수백년 묵은 나무들이 뿜어내는 정기와 신비롭기까지한 분위기란 건 직접 맞닥뜨려야 실감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나무들이 한두 그루도 아니고 즐비하게 늘어서 아름답고 작은 성당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곳, 아산 공세리 성당이다.








1코스와 22코스가 만나면서 지리산 둘레길을 한바퀴 완성시켜주는 접점인 주천면에 닿기 전, 제법 지대가 높은


구룡치 어간에서 자욱한 운무를 만났다. 이슬비가 쉼없이 내리던 와중에 안개가 조금 짙어지나 싶더니, 이렇게


배배 꼬인 연리지 나무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삽시간에 시야가 가려져 버렸다.



이렇게. 온통 희끄무레하고 먹먹한 커튼이 내려뜨려진 느낌인데다가 빛은 사방에서 번져버리니 분위기가 묘하다.


들이마시는 호흡조차 축축하고 새하얀 빛깔인 것만 같은 느낌. 



마법의 시간이 끝나고 숲을 빠져나왔더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멀찍이 내닫는 시계. 속이 후련하다.






그리고 1구간과 22구간이 양쪽으로 내달리는 시작점이자 종착점. 주천읍이다.


아직 본격적으로 녹색이 침공해 들어오는 계절도 아니건만 벌써부터 이 곳은 초록초록에 절반쯤 잡아먹힌 상태.





의식적으로 둘레길 코스에서 벗어나볼까 하면서 가닿은 곳에는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의 저수지가 있었다. 비가 계속


내리다 보니 수위가 더 올라간 거 같기도 하고.







어느 곳에선가 마주친 사당이랄지, 아니면 사람이 살지 않게 된 흉가랄지. 집앞의 배롱나무가 활처럼 허리를 휘어서는


본채를 향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현관의 기와지붕에 온통 퍼렇게 돋아난 이끼들도.



비가 그쳤으면 좋겠는데, 도무지 빗발이 그칠 기미가 없어 카메라를 잘 꺼내들 수가 없었다. 



다소 지루하게 이어지던 숲길, 설마 저 나무도 오늘 하루종일 비를 맞아 저렇게 이끼가 잔뜩 생긴 건 아니겠지. 



지리산유스호스텔 부근, 좀더 걸어가다가 아무래도 산속 깊숙히 들어가는 길인 거 같아서 중도에 돌아나왔다. 


계속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 깊은 숲에선 금방 해가 떨어져버릴 것 같다는 점들을 고려했는데, 현명한 판단이었던 듯.



콜택시를 기다리던 중에 귀여운 표지판 발견. 나무를 베지 말고,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메시지도 굉장히


명료했지만, 특히나 맨 마지막 그림의 토끼가 짓고 있는 호소력짙은 표정이 맘에 들었다. 자살토끼같은 표정.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울릉도 성인봉에서 내려가는 길, 다시금 발아래 짙은 구름을 헤치는 나가는 길이다.

 

 

 

제법 가파른 하산길엔 나무도 눕고 바람보다 먼저 고사리(같은 것)들도 누웠다.

 

 

대체로 보자면 성인봉 끄트머리를 잡고 바싹 땡겨올린 원뿔 모양을 하고 있는 울릉도, 그 북쪽 사면에 움푹 패인

 

너른 분지가 바로 나리분지. 옛날부터 사람이 자리를 잡고 살았던 곳이 나리분지 쪽이라고 한다.

 

 

 

 

 

 

나리분지 중간쯤에서 만난 투막집. 울릉도 전통 가옥인 투막집은 저멀리 구름을 두른 채 뾰족한 봉우리들과 대치 중.

 

 

 

 

 

 

사실 그렇다. 어디서부터가 성인봉 등산로의 시작이고 끝인지, 어디서부터 성인봉이고 옆 봉우리인지 알기란 어렵다.

 

그저 길이 이어질 뿐.

 

 

제법 늦은 시간에 성인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했는데, 나리분지가 끝나도록 여전히 해가 중천이다.

 

어디에 묵겠단 계획은 없었지만 이렇게 된 거, 바다를 보기로 했다. 울릉도 남쪽 바다에서 시작했으니 이제 북쪽 바다로.

 

 

 

 

파꽃이 온통 피어있는 밭을 지나고 캠프장을 지나, 길을 조금 더듬으며 가다 문득 고개를 돌려 발견한 풍경.

 

이곳저것 집들에서 밥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연기가 뭉게뭉게 모여서는 산 중턱에 구름으로 걸렸다.

 

 

그러고 나니 다시 오르막길. 생각해보니 여긴 나리'분지'. 분지를 빠져나가려면 다시 야트막하나마

 

고개를 하나 다시 넘어야 하는 거다. 그냥 여기에서 멈출까 3초쯤 생각하다가 그냥 계속 걸었다.

 

고개를 얼추 올라 돌아본 나리분지의 전경. 마을이랄 것도 없는 집 몇 채가 듬성하니 꽂혀 있는 초록빛 풀밭같은 곳.

 

그리고 내리막. 닳고 나면 재생되지 않는다는 도가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파르고 꼬불거리던 길.

 

그냥 한바퀴 빙글 돌아 전방낙법을 치고 나면 아랫목에 도달했음 좋겠다 싶도록 지치고 질리고 힘들던 걸음.

 

홍살문이 하나 갈림길에 서서 삿된 것들을 걸러내고.

 

산을 둥글둥글 타고 내려가는 길은 대체 어디에서 어디로 이어지는 건지, 이쪽으로 가면 되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멀찍이 보이는 바다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만 믿고 계속 걷기.

 

해가 조금씩 가라앉는가 싶더니 가속이 붙었다. 어느새 어둠이 살라먹은 짙은 숲, 나무그늘, 그리고 비탈의 사면들.

 

 

조금 마음이 바빠지던 찰나, 길을 헤매거나 맴돌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지던 차에 문득 나타난 천부 마을.

 

 

이제야 안심하고 널 보낼 수 있을 듯 하여. 저물어가는 해를 잠시 구경해주며 아스팔트 바닥에 철푸덕 앉았다가.

 

 

반나절만에 다시 만난 건물들이 반갑기도 하고, 그래봐야 울릉도의 조그마한 마을이라 아기자기하기도 하고.

 

 

'독도수호 중점학교'란 게 뭔지 모르겠지만, 독도의용대라도 양성하는 곳인지 뭔지. 여하간 자그마한 학교.

 

이 조그마한 마을에 내려서는 와중에 놀란 건, 헤아릴 수 있을 만큼의 건물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에 십자가가

 

네다섯 개나 꼽혀 있었던 모습. 그것도 하나같이 크고 높고 뾰족한. 음...

 

드디어 천부 도착. 다행히 여전히 밝은 중에 도착했다. 해가 가장 길다는 하지 다음날이라 재수가 좋았던 걸지도.

 

 

잠시 바닷가를 거닐다가 바다를 코앞에 낀 전망 좋고 파도소리 좋은 펜션에 절룩거리며 들어갔더니 맘좋은

 

주인아주머니가 우뭇가사리로 만든 냉콩국을 한 사발 내어주셨다. 어찌나 감사하고 맛있게 먹었던지.

 

금세 어둠이 나리고, 밥먹을 곳을 찾아 조금 마을을 헤집고는 부둣가 제방에 앉아 바람 쐬며 파도소리 듣다가 한장.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KBS중계소부터 울릉도 성인봉 오르는 길, 계획없이 일행없이, 또 정해진 숙소없이 가는 길이었는지라 그냥

 

내키는 대로 걷고 쉬고 걸었다. 초반에 가팔랐던 비탈길은 정말 쉬엄쉬엄 올랐고.

 

 

 

나무데크로 잘 꾸며진 길을 지나 구름다리를 출렁출렁, 그냥 얌전히 지나려다가 괜히 우다다 뛰어서 건너보기도 하고

 

다시 돌아와 잠시 앉았다가 누웠다가 온몸으로 그 출렁이는 진동을 맛보기도 하고.

 

 

고사리같은 양치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에선 바람이 일일이 그 조그마한 이파리들을 손잡아주는 걸 보았고.

 

 

안개가 슬슬 서리기 시작하는 울릉도 깊은 산속의 흐릿한 풍경.

 

 

 

 

어디선가 숲의 정령이 톡 튀어나올 것만 같은 그런 풍경이 이어졌다.

 

 

그냥 아무 말없이, 가슴속 깊이 숲의 초록향을 들이마시며,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며 걷는 길.

 

 

나무들이 드릴처럼 윙윙 뿌리를 맹렬히 땅에다 대고 회전시켜 박아버린 느낌이다. 덕분에 좁다란 숲길마저 같이 휘감긴.

 

 

 

인적조차 없는 등산로. 쓰레기 하나 찾아볼 수 없이 깨끗하게 관리되는 숲길이어서 문득 현실감이 희박해지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퍼뜩 현실에 발딛게 해줬던 건 저런 산악회들의 끄나풀, 그리고 살짝 거슬리던 쥐새끼들.

 

 * 울릉도 때아닌 ‘들쥐와의 전쟁’ (2012. 6. 21, 문화일보)

 

 

기사에 여러 차례 다뤄질 만큼 들쥐들이 창궐한 것도 사실인 거 같고, 고양이가 있는 민가나 마을이 아닌 천적이 없는

 

산으로 전부 올라와 사는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뭐..피리부는 사나이가 필요할 정도는 아니다. (하여간 쥐가 문제...)

 

 

그래도, 들쥐 한마리가 길 앞섶에서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울릉도에서 사는 검은비둘기가 푸드덕거리며 머리 위 나뭇가지를 박차고 도망가는 게 더 사람을 놀래킨다.

 

 

 

 

이런 정경에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까. 그저 아슴프레하고 꿈결같던 풍경.

 

촉촉하게 젖은 공기에 오래 묵은 나무 향기와 흙내음이 가득 담겨있던.

 

 

 

 

그리고 성인봉을 900미터 남겨둔 지점. 도동에서 출발하면 성인봉까지 대충 4~5km정도 소요된다고 생각함 될 듯.

 

KBS중계소를 기점으로 해서도 거리가 별반 차이는 없을 듯.

 

 

 

그리고 초록빛 운무를 꿰뚫고 나려든 빛무리.

 

 

오히려 정상에 오르니 구름인지 안개인지 뿌옇던 시야가 말끔해졌다. 성인봉 중턱에 짙게 드리웠던 커튼을 뚫고 올랐다.

 

 

성인봉 정상의 표석.

 

 

울릉도를 에워싼 푸른 바다와 하얀 구름바다. 그리고 희뿌연 하늘.

 

울릉도의 듬성듬성한 봉우리들이 구름바다 위로 섬처럼 솟았다.

 

 

검은 비둘기가 날고, 온갖 산새들이 지저귀고, 그리고 구름은 잠시동안 지켜보는 와중에도 시시각각 물결친다.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KBS중계소를 지나 울릉도 성인봉으로 오르는 길, 갈수록 가팔라지는 계단이나 비탈길에 지치다가도

 

잠시 옆 나무에 털썩 몸을 부려놓고 있으면 평생 처음 맡아보는 짙고 진한,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숲향이 그득.

 

 

위로 올라가며 어느순간 희뿌연 안개 같은 구름이 사방을 가리웠다. 일년 중 대부분의 날들을 이렇게

 

구름으로 휘감고 있는 봉우리인지라 성스럽다 하여 성인봉이라 이름지었다던가.

 

뭔가 네이쳐 리퍼블릭 광고 같이 초록빛이 농염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광고를 찍기에 딱 맞춤한,

 

그런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 이런 게 어쩌면 깊은 숲이나 원시림에 대한 뿌리깊은 경외심을 자아내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숲향에 흠뻑 취해서 나무 사이를 뒤채며 내달리는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숲바람을 쐬노라면

 

금세 기운이 다시 회복되는 거다. 정말 취한 듯한 기분으로, 모세혈관 하나하나 깨어나는 기분으로.

 

 

그렇다고는 해도 몇 걸음 걷다가 이내 에라 모르겠다, 굳이 서둘러야 할 이유 따위 없으니 털썩.

 

오후 세네시쯤이어선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등산객들. 세상에 혼자 존재하는 느낌이다. 온갖 새소리들 빼고.

 

 

그렇게 쉬엄쉬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농밀하고 강렬한 숲향에 취하고 산바람에 희롱당하며 오르다가 문득.

 

어느 나무 등걸에 몸을 거의 뉘이고 있는데 불쑥 초록빛 운무를 뚫고 빛이 내렸다.

 

 

온통 희뿌옇고 어른어른한 풍경들 속에서 불쑥 땅바닥에까지 늘어뜨려진 햇살 몇 가닥.

 

 

 

 

 

아마도,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풍경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느닷없는 빛살이 내려 초록빛 운무와 짙은 숲향을

 

일렁이고는 마음까지 흔들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말았다.

 

 

 

경기도 이천에 소재한 '동원리더스 아카데미', 최근 회사 내의 연수를 위해 다녀온 곳이다. 날이 좀 흐리긴 했지만

 

펜탁스의 15mm 리밋렌즈를 들고 어슬렁거리며 아카데미 건물을 휘감고 있는 '명상의 숲'을 거닐기엔 그럭저럭 괜찮았다.

 

비가 오지만 않았으면 저기에 앉아 바람을 쐬며 밥먹는 게 참 좋았는데.

 

 

인공잔디이긴 하지만 잔디구장도 있어서 틈만 나면 공을 차러 나가곤 했던 운동장, 그 둘레에 새빨간 장미가 함박 피었다.

 

다른 쪽에는 흔히 족구장으로 활용되는 배구장, 그 옆엔 농구장도 있는데 아무래도 족구가 덜 힘들다.

 

 

건물 뒷켠으로는 철도길처럼 침목 받침이 규칙적으로 놓여 발걸음을 인도하는, 그런 숲길로 새는 길이 있다.

 

 

 

아직 뻣뻣해지지 않은 가지를 기울여 오솔길 쪽으로 귀를 기울인 나무 한 그루.

 

 

이렇게 트인 잔디밭 길을 따라 걷는 것만 해도 제법 거리가 짧지 않다. 이제 숲으로 진입하는 길목.

 

 

 

 

중간중간 벤치도 있고, 제법 울창한 숲이 시야를 감싸고 하늘을 걸러서 아늑한 기분이 든다. 당장 코앞에 있을

 

교육동의 여러 소음들도 여기까지는 차마 침범하지 못하는 그런 고요하고 차분한 공간.

 

 

 

6월이 넘어간 초록색은 벌써 삶의 고단함과 녹록치 않음을 깨달았는지 뭔가 심지가 들어간 질기고 그악스런

 

분위기가 없지 않지만, 5월까지만 해도 대개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햇살 쬐고 물빨아올리는 게 좋은 착한 연둣빛이다.

 

 

 

with smc PENTAX DA 15mm F4 ED AL Limited.

 

 

 

일본 아오모리현 도와다 호수의 오리배는 이렇게 생겼다. 지금 다시 보니 네스호의 괴물이라거나 공룡이 떠오르는

 

외모이기도 하지만, 그때는 딱 보자마자 원피스의 고잉메리호가 떠오르더라는.

 

나름 원피스의 명장면 중 하나로 기억하고 있는, 고잉 메리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장면.

 

 

호숫가 나룻터에 묶인 채 둥싯거리는 오리배들. 최근에 다시 색칠을 한 건지 부리나 리본이 화사하다.

 

둥싯거리다간 서로의 부리를 입맞춤하며 느그적 휘어진 모가지로 하트를 그리기도 하고.


나룻터 끝에서 바라본 도와다 호수는 어찌나 넓던지, 오리배 페달을 밟는 발놀림이 비장해 보였다.


오리배들을 어루만져주는 두 할아버지, 한가로이 파라솔 아래 앉아 담소를 나누시던 모습.

 

호수를 따라 죽 이어지는 산책로, 울창한 숲과 산을 옆에 끼고 있는 데다가 시선을 어지럽히는 가게나 매점도 없다.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망원경의 푸르스름한 렌즈가 똘망똘망하다.

 


도와다 신사로 가는 길, 다른 관광대국들도 그렇지만 일본도 맨홀뚜껑을 소홀히 넘기지 않았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나무 전봇대가 아직도 서 있는 도와다 신사 경내의 산책로.

나무뿌리가 잔뜩 헤집어진 건지, 아니면 벼락을 맞은 건지 위풍당당한 모습에 이끼가 잔뜩 슬었다.

 

곰이 출몰하는 지역이니 주의하라는. 굉장히 무시무시한 표정과 포즈의 곰 앞에서 손도 떨었나보다.



도와다 신사 도착.

 



나무의 잔뿌리가 지면 위에까지 핏줄처럼 툭툭 튀어나온 모습이 땅 속을 궁금하게 만든다.

나무 계단은 하얗게 바랬을지언정 말끔한데 정작 아래 돌받침은 둘로 쪼개진 채 이끼가 잔뜩이다.


 


석등을 둘둘 휘감고 기어오르는 덩굴도, 석등 위에 꽂힌 깃털처럼 나부끼는 풀떼기도 고작 한계절이면 저리도

 

그악스럽게 자라날 텐데, 왠지 바라보는 사람은 거기서 이 신사의 고색창연함을 느끼는 거다.



일본 신사의 '약수터'는 물을 마시는 곳이 아니라 손을 씻어 몸을 정갈히 하는 곳.

 

 

도와다 호수의 명물이라는 소녀상. 소녀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를 만든 작가와 평생 해로했던

 

아내의 모습을 본따서 만들었다고 했던가. 호수의 물안개를 잘도 버티고 서 있다.

 

 



도와다 호수 주변을 좀 거닐면서 담은 풍경들.



차를 타고 좀더 올라가 도와다 호수 전망대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희뿌연 간유리 너머

 

풍경처럼 어슴푸레한 호수 너머 풍경과 온통 짙푸른 녹색이 가득한 풍경. 아오모리, 푸른숲靑森이구나.

 


전망대 위로 올라가는 샛길이 하나, 무성한 수풀 뒤로 숨어있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인지

 

낙엽이니 풀들이 온통 점령해버린 땅바닥엔 발딛은 맨땅 한뼘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자연에 정복당해버린 숲길을 혼자 걷고 있자니 왠지 무섬증도 살짝.

 

어디선가 곰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할지 살짝 머릿속으로 이미지트레이닝도 해보고.

 


계속 신경을 긁던 까마귀 한마리가 숨어서 울어제끼던 곳을 결국 찾아냈다. 사진 속의 그곳.


슬쩍 제2 전망대까지만 찍고 내려오는 길. 인적끊긴지 오래인 듯한 괴괴한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 하나하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며 불안하게 만들었는지라 내려오는 길은 카메라를 꼭 쥐고 거의 날 듯이 뛰었지만,

 

그래도 푸른 숲과 퍼런 호수의 풍경은 놓칠 수 없어 시선은 계속 도와다 호수에 붙박혀 있었다.

 

 

 

 

 

 

 

 


 

아오모리현이 품고 있는 세계 최대의 너도밤나무 원생림, 시라카미 산지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을

정도로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라고 한다. 일반에 개방되어 있지 않은 곳에는 추정수령이
 
400년에 이른다는 아름드리 너도밤나무 'Mother Tree'의 압도적인 커다란 줄기가 사방으로 뻗친 모습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그 방대한 면적과 귀중한 자연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일본에서도 가장 처음으로

세계유산 등록이 되었다고.

 

시라카미 산지에서 일반에 개방된 부분은 정말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어마어마한 숲이 뿜어내는

좋은 공기와 피톤치드 덕분일까, 근처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기분도 좋아지고 공기맛도 다른

거 같다. 우선 비지터 센터에 들어가서 시라카미 산지의 식생에 대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 다른 것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3살짜리 너도밤나무의 키가 고작 저만큼이란 사실. 3년이나 묵었는데 수첩만도 못하다니.

20살쯤 되어야 이제 사람이랑 눈높이를 맞출만한 크기로 자라난다고 한다. 다른 동물들은 어렸을 때 쑤욱

자라나서는 그대로 쭉 멈춰있기 마련인데, 너도밤나무같은 저런 나무들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그렇지만

꾸준히 자라나서 수첩만한 높이에서 어른 사람만한 높이로, 그리고 몇층짜리 건물만한 높이로 자라난다는 게

실감이 나는 전시였다. 그리고 대형 스크린으로 이 곳에 사는 식물과 동물들을 만나볼 수 있기도 했고.

그리고 드디어 시라카미 산지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월령공주'를 만들 때 자주 찾아와 장면을 참고하는 등

일본의 여러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배경이자 영감을 준 장소로 유명하다고 한다. 벌써 들어가는 길에 보이는

산세라거나 숲의 울창한 정도가 차원이 다르다는 느낌이다.

비지터 센터에서 받아온 한글 버전 지도 겸 안내팜플렛. 좀 어색한 번역투가 거슬리긴 했는데, 특히나

4번, '화장실은 적절히!'라는 항목이 특히 웃겼다. 트레킹 코스 중에 화장실이 별도로 없으니 미리 해결하고

입산하라는 이야기일 텐데, '할수 없을 경우에는 구멍을 파서 묻어 달라'는 아주 세심한 지침까지.

정말, 하야오의 월령공주에서 나왓던 커다란 늑대들이 사방에서 불쑥 튀어나올 거 같은 울창한 숲길이었다.

초록색 식물들이 지천으로 온통 삼엄하게 점령한 가운데 잔뜩 쪼그라들어버린 흙길을 한 줄로 서서 조심조심

걸어가는 트레킹 코스. 길은 꼭 필요한 최소한의 손길만으로 정비되어 있다는 게 느껴질 만큼, 이 곳은

사람보다 자연을 우선하여 관리되고 있었다.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한 공간.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숲들이 조금 몸을 웅크려 내어준 길을 따라 걸었다.

자극적인 볼거리나 흥밋거리는 없지만 수천년이나 묵었다는 원시림의 생명력이랄까 신비스러운 아우라를

체감하는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거대한 산이나 바다 앞에서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느낀 적은 있었지만

숲을 걸으며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들 줄이야.

숲길을 따라 걸으면서 눈길 닿는 대로, 그리고 숲의 생명력이 느껴진다 싶은 장면들을 찾아 사진을 찍었다.

숲의 생태계에 대해서 중간에 드문드문 설명이 적혀 있기도 했다. 아이들과 함께 온다면 나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이 곳에서 제대로 생태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아쉽게도 일본은 대개

외국인에 대한 설명에 인색하더라는. 저런 거 최소한 영어로라도 병기해주면 좋을 텐데 말이다.

울룩불룩 실핏줄처럼 툭툭 튀어나온 나무의 잔뿌리들이 대지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다 마르고 시들어 쓰러진 나무는 또다시 다른 나무들이나 식물을 위한 양분이 되고.

그리고 우뚝 우뚝 솟아있는 싱싱한 나무들은 또다른 식물들이 의지하고 살아갈 기둥이 되어 주고.


더러는 비비 틀어진 채 사방으로 꼬이는 사랑의 작대기마냥 나무들 사이를 종횡하는 덩굴식물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기도 한 거다.

그리고 시냇물. 보기만 해도 굉장히 맑고 투명해보이는 물은, 손으로 살짝 움켜보니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잠시 손을 담궈 몇 번 비비기만 했는데도 온몸에 땀이 쏙 들어가버리는 느낌.

그렇게 온통 초록빛 일색이었지만 전혀 지루하지도, 심심하지도 않더라는. 그렇게 가파르거나 힘든 길이

아니어서 그랬기도 하겠지만, 그냥 이 길이 한없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너무도 좋았던 길.

그리고 너무도 좋았던 시라카미 원시림.


그렇지만 일반에 개방된 코스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한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는 구간이었다. 어느새 길은

살짝 내리막으로 바뀌어 되돌아나오는 중이었다.

이런 곳에 나무에 저렇게 칼로 낙서를 남기다니, 그나마 한글이 안 보이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려나.

일본인들은 예의를 중시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게 국민성이라고들 하지만, 그것도 요즘 젊은 세대들이나

그 아랫세대에는 별로 해당되지는 않는 이야기인 듯 하다. 한국에서도, 젊거나 어린 일본인 관광객들은

버스 안이던 전철 안에서도 주위를 개의치 않고 큰소리로 떠드는 경우를 종종 봤었다.

한바퀴 돌아서 나온 길, 들어갈 때는 딱히 시선을 두지 않았던 약수터가 엄청 반가웠다. 다른 사람들도

한모금씩 물을 들이키고는 그 차가움에 놀라고, 그리 힘들지 않았던 한시간여의 트레킹이 가져다 준

기분좋은 피로감마저 싹 지워버리는 듯 하다고 한마디씩.

다리를 건너 차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가는 길. 워낙 깊은 산중, 깊은 숲속인지라 딱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트레킹 코스고 일반 차도인지 구분하기도 애매할 정도다. 이렇게 울창한 숲이 풍겨내는 독특하고도

생생한 그 분위기에 매료되어서 일본의 애니메이터나 영화 감독들이 이곳을 즐겨 배경으로 활용하는 게 아닐까.


주차장 옆에는 왠 뜬금없는 놀이터가, 그렇지만 제법 그럴 듯한 스케일로 미끄럼틀도 몇 개씩 갖추고 있었다.

이정도면 거의 놀이터계의 '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럴 듯 해서, 그대로 지나치긴 아쉬워

굳이 위로 꾸역꾸역 올라가선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줬다. 밑에서 보기보단 중간중간 속도를 줄여주는

구간들이 작용해서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내려오진 않았지만 엉덩이는 후끈해졌더랬다.





 


 

네모난 창을 통해 바닥, 그리고 벽면까지 기울어진 햇살 자국이 낙인처럼 선명하다. 아오모리현 카즈노의

호텔에 체크인하고 짐을 풀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 동네를 살펴보려는 차에 햇살부터 설레였다.

호텔 입구에 있던 뭔가 '안테나'를 광고하던 티켓.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저 사슴뿔이 안테나처럼

쫑긋쫑긋 서 있는 게 귀엽다. 아무래도 아오모리가 워낙 깊은 숲동네인지라 저런 동물들을 활용해서

캐릭터로 만들고 활용하는 게 좀더 잘 어울리는 거 같다.


아오모리로 오는 길에도 내내 도로변에서 온갖 야생동물이 그려진 표지판들을 보며 왔더랬다.

아, 중간에 한장은 담배꽁초 버리지 말라는 사인이지만 여하간, 그만큼 숲이 울창하고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이야기일 거다.

사람이 드문드문 지날 뿐인 골목을 걷다가 발견한 빈티지스러운 표지판. 뭔가 사방팔방으로 손가락을

해대는 게 살짝 수다스러워보이기도 하지만, 적당히 빛바래고 톤다운된 모습 덕에 과하진 않아 보인다.

호텔 앞으로 지나던 기찻길. 두 갈랫길이 합쳐지는 합류지점에 서서 짙은 초록색이 한가득한 산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동네를 바라보았다.


마을을 어슬렁거리다가 간판 하나를 발견했다. 개울을 따라 쭉 이어지는 산책로가 십여킬로미터에

이르도록 정비되어 있다는 이야기인 거 같다. 일본어를 모르지만 대충 이런저런 풍경도 마주칠 수 있고

그렇다는 거 같아서, 설렁설렁 걸어보기로 했다.


슬쩍 산책로로 접어드니 방금 지나친 기찻길이 저 쪽의 다리 위로 지나는 게 보였다. 몇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마을 풍경이 저만큼이나 가려져 버렸고, 이내 빼곡하게 자라난 늘씬한 나무들 사이에 파묻혀 버렸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마을 뒷산같은 느낌이다 싶었는데, 산책로 바닥에 툭툭 돋아난 저 나무뿌리들을 보니

뒷산보다는 좀더 원시의, 야생의 느낌이 짙다.

출발하자마자 맞부딪힌 건 '곰 출몰주의'라는 커다란 경고문. 워낙 산이 깊고 숲도 울창해서 야생곰이

여전히 살고 있는 지역이란 얘긴데, 느리게만 보이는 곰의 최고 속도가 시속 40킬로미터에 육박한다니

맞부딪히면 큰일이다. 어느새 허리까지 올만큼 주변 풀숲도 무성해져서 딴 길로 새면 안되겠다 싶다.

이 길을 걷는 사람도 거의 없는 듯 길바닥에까지도 온통 초록색이다. 사람들이 많이 다녀야 조금이라도

사람 다니는 길과 옆엣 풀숲이 구분이 될 텐데, 정말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아도, 땅을 보아도 온통 초록색이다.

흔들다리. 다리 위를 걸으며 일부러 쿵쿵 소리 내어 발을 굴러보기도 하고 펄쩍펄쩍 뛰어보기도 했지만

그리 많이 출렁거리진 않았다. 다리를 건너다 말고 양쪽 끄트머리를 바라보니 무성하고 울창한 숲에 덥썩

먹힌 느낌이다. 뭐랄까, 커플이 빼빼로 하나 입에 물고 먹기게임을 하듯이, 숲과 숲 사이의 다리 하나.

숲과 숲 사이로 내어진 개울. 다리 위에서 바라보니 개울을 경계로 양쪽 숲이 삼엄하게 대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온통 녹색으로 뭉개진 듯 삼엄한 숲이지만 엄연히 디테일은 살아있었다. 초록 일색으로 보이던

풍경 속에 숨어있는 샛노랑 꽃밭이라거나, 사람 발길이 이어져 만들어진 길가에 용케 뿌리를 박고

꼬깃꼬깃 잎새를 편 산죽나무 새싹들.

개울을 끼고 계속 이어지는 산책길. 사람 하나 만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꽤나 잘 정비되어 있는 길이었다.

옆에 쉬어갈 만한 정자도 있구, 개울 옆으로 따라달리는 가지런한 나무데크와 적당한 높이의 나무난간도 그렇고.

중간에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곳에 있던 나무등걸 하나가 눈길을 땡겼다. 누군가 나무를 일부러 저런

모양으로 자른 걸까 싶을 정도로 의자랑 비슷한 모양으로 남아있는 나무등걸. 엉덩이가 놓일 자리에는

보기만 해도 폭신폭신한 이끼가 소담하게 앉아있었다.

가다 보니 '폭포'라고 말하기도 민망할만큼 낮고 작은 낙수물도 떨어지고 있었다. 그 가느다란 물줄기가

굉장히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여 느낌을 좀 담아보려 노력했으나.

배배 꼬인 나무들이 불쑥 산책로를 틈입해서는 나봐란 듯이 팔다리를 내뻗고 있기도 했고, 맑고 투명하던

물은 어디쯤에선가 저런 쑥빛으로 바뀌어 있기도 했다. 햇살에 정통으로 맞아 하얗게 바래보이는 잎새들.


인근에 수력발전소가 있나보다. 물을 방류하면 수위가 높아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듯한 경고 표지판,

그런데 만화 그림체가 귀여워서 뭔가 메시지가 담고 있는 정색한 표정을 살짝 풀어주는 거 같다.

어느 순간 산책로 양쪽으로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던 산이 슬쩍 숨을 죽였다. 내려진 차창처럼 그 사이로

햇살이 잔뜩 들어왔고, 어슴푸레하지만 몇 그루 소나무가 비탈에서 꼿꼿이 자라고 있는게 보였다.

그리고 개울가의 돌밭에서 나뒹구는 새까매진 나뭇가지 하나.

너무 멀리 나왔다 싶어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사람도 하나 없어 문득 겁이 나기도 했고, 언제 곰이 나올지

모른다는 반투명하던 불안감이 점점 형체와 색깔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문득 잊었다는 듯 울어제끼는

새소리와 배경음처럼 깔린 물소리가 전부이던 산책로. 너무 좋았는데, 대충 한시간 가까이 걸어왔으니

그만큼 시간을 들여 돌아갈 생각하면 이쯤에서 유턴할 타이밍.

돌아나와 마을을 둘러보는데, 아무래도 사람 얼굴을 계속 연상시키는 이 노랑색 건물이 나름의 기준점

역할을 단단히 해주었다. 유독 높은 건물이기도 했고, 색깔이나 모양새가 워낙 튀기도 하고.

눈이 많은 아오모리 지방인지라 건물들은 대개 단층, 높아봐야 이층짜리, 그리고 지붕은 이렇게 비스듬히

얹힌다고 한다. 차가 워낙 조그마하니 차고도 미니어처처럼 조그맣다.

새 두마리가 노닐고 있는 모양이 새겨진 맨홀뚜껑. 외국에 나가서 눈여겨보는 것 중 하나가 맨홀뚜껑이다.

나름의 고유한 특징과 문화적인 미감이 담겨 있는 섬세한 것도 있고, 그저 기능에 치중한 심플하고 멋없는

것들도 있지만 그런 모양 자체로 그 지역의 분위기나 특색을 말해주는 게 있는 것 같다.


조그맣지만 정갈해 보이는 게 일본 가옥의 대체적인 이미지 아닌가 싶다. 특히나 여기는 집집마다 정원을

잘 꾸며놓아서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조용하지만 깔끔하고 화사한 분위기, 이런거 좋다.


호텔 내부를 찍은 몇 안 되는 사진 중 하나. 히메노유 호텔이란 호텔 이름을 군데군데 알아볼 수 있었던

등불이 지키고 선 뒤쪽으로는 노천온천이 있었다.

아무도 없을 법한 시간대에 카메라를 들고 들어간 노천온탕의 전경. 그렇게 크지 않은 온천탕이지만

소슬한 밤공기 속으로 펄펄 뜨거운 김을 흘려보내는 그 온천의 마력이란. '카즈노의 대표 미인 온천'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온천을 하고 나서 피부가 보들보들, 매끈매끈. 게다가 하루의 피로가 싹

풀리는 그 개운함은 잊을 수 없다.




@ 히메노유 온천호텔, 아오모리 카즈노.

강원도 정선, 그 근방에 있는 가리왕산 자연휴양림. 조그마한 동네인 정선에 슬쩍 그 산자락 하나를

얹어놓은 것만 같은데, 실은 강원도란 데가 온통 산자락이 구불렁구불렁한 곳인지라 어디서부터 어디가

무슨 산인지 딱 끊어 이야기하기도 어려운 거다. 여하간 그 이름모를 산자락 앞에 바싹 머리를 디민

커다란 해바라기 하나. 파란 하늘도 좋고 샛노란 해바라기 꽃잎도 좋고.

정선의 메인로드라고 해봐야 이삼층을 못 넘는 야트막한 건물들이 채 백여미터나 될까 싶은 왕복 4차선

찻길을 호위하고 있던 그 호젓하던 길, 길가에 무성하게 자라난 야생국화꽃이 지나는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춰보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정선역까지 기차를 타고 왔던 게..아마도 2001년쯤, 군대 가기 전이었던가. 그때 역사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주변 풍경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라면 아무 기억도 없다. 그저 그 때 강원 카지노랜드와 민둥산을 들러서

눈밭에서 잔뜩 뒹굴고는 정상에 올라 꽁꽁 언 캔맥주를 마셨었던 기억 뿐.

가리왕산 자연휴양림, 하늘. 새파랗고 새하얗고. 정말 너무나 좋은 9월의 하늘.

땅.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지도 않는 하늘과는 달리, 땅에는 약한 것들 투성이다. 뽑고, 꺽고, 밟고,

심지어 만지는 손길에도 치명적일 수 있는 여린 생명들.

이렇게 여린 빛깔을 여지껏 품고 있는 거다. 빛을 받아 문득 투명해진 연두빛의 잎사귀들, 저런 여리고

약한 생명 앞에선 손끝에서 가위라도 절그럭대는 것처럼 조심조심 몸가짐을 여미는 게 인지상정.

휴양림 내에서 크고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는 산책로 옆에 뒤집어져 있는 쓰레기통, 그 첫 글자인

'쓰'의 쌍시옷이 왠지 방긋 웃고 있는 이모티콘을 연상시킨다.

본격, 9월의 가리왕산 자연휴양림 위에 펼쳐진 하늘. 그냥 아무 말없이 흘러가는 구름만 바라보고 있어도

하나도 지루하거나 심심하지 않은 날이 있는데, 딱 그런 날의 하늘이었다.

그래서 정말, 휴양림 어디쯤엔가 철푸덕 자리 깔고 앉아서는 하늘만 보다가 돌아나왔다. 숲속을 떠나도

하늘은 따라와서, 정선의 고즈넉한 길가 위에나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 위에도 파랗고 하얗고. 문득

스머프가 생각나기도 하지만 우야튼,


저렇게 동글동글 수제비처럼 떼어내진 구름떼가 바람에 밀려가고, 그 훨씬 위에 칠해진 투명한 파랑색 하늘이

어느순간 일렁인다 싶은 환상에 빠질 즈음이면, 누군가 기분좋게 머릿카락을 쓸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정선 시내를 산책하다가 만난 풍경들 몇 개. 바리케이드로 쓰이는 노랗고 까만 철제구조물에 비닐을

씌워서는 고추를 말리는, 아아 나른하다 나른해, 라고 고추들이 비틀리며 중얼거리는 거 같다.

쌍꺼풀이 엄청나게 짙던 강아지 한마리. 쌍꺼풀도 길고 속눈썹도 길어서 왠지 눈매가 낙타를 연상시킨다. 


'자전거포'라고 어렸을 때 불렀던 거 같은데 요새야 엔간하면 전부 무슨무슨 샵, 으로 바뀌었다지만. 아마

그 나이를 따지자면, 바이크샵<자전거포<자전차 정도 되지 않을까.

벌써 어디인가는 연탄불을 지피고 있는 건가, 근처에 연탄불 고기집 같은 곳이 안 보이는 주택가였으니

아무래도 난방용으로 쓴 건가 싶다. 아니면 무슨 온실같은 곳에서 공기를 덥혀주느라 태웠다거나.

어느 골목길, 아이들이 길가에서 공을 차며 자기들 눈에만 보이는 골대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색색의 플라스틱 우유상자를 화분삼아. 구멍이 숭숭 난게 공기 통하기도 좋겠고, 사방으로 나 있는

손잡이 덕에 옮기기도 편하겠고, 여러 개 저렇게 배열해놔도 깔끔하게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고.

전깃줄 위에 앉아서 쫑긋쫑긋 머리를 사방으로 돌려대는 새 한마리. 저렇게 새들이 머리를 마구 돌려대며

사방을 경계하는 걸 보면, 꼬깃꼬깃 돌려대다가 뚝 하고 끊어져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슬몃 들기도 한다.

여하간, 또다시 가슴을 둥둥둥 울려대는 9월의 하늘. 여행가고 싶다..





오이라세계류, 아오모리현의 특별명승지이자 천연기념물이라는 계곡을 따라 하늘을 가릴만큼 빼곡한

원시림 숲길을 걸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전체 거리 약 17킬로미터에 이른다는 오이라세계류

산책구간은 어쩌면 이제 한국에도 익숙해진 올레길, 둘레길 같은 트레킹 코스의 경쟁상대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제 점수는요. 바로 옆으로 2차선 도로가 구불구불 함께 달리고 있음에도 마치 사람 하나 찾기 힘든

깊은 산속의 좁은 숲길을 혼자 걷는 듯한 호젓함과 한가로운 느낌이 너무너무 좋았다.

오이라세계류를 따라 걷는 길은 계속 이런 식이었다. 다리를 건너 개울 건너편으로 간다거나 잠시 구불댄다는

등의 변칙은 있었어도, 대개 한켠에는 개울을, 신록이 그득한 원시림 한꺼풀 너머에는 이차선 도로를

끼고서 걷는 길. 다니는 차가 많지도 않았지만 두껍게 드리워진 초록빛 커튼이 소음과 부산함을 전부

막아내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치 다른 세상을 걷고 있는 듯한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까.

길 중간중간 오이라세계류 트래킹코스로 합류할 수 있는 샛길 길머리에는 어김없이 이런 안내판이

서있었다. 일본어로밖에 안 나와있는 건 아쉬웠지만 그림과 간략한 영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알 수 있는 내용들. 시끄럽게 하지 말고, 식물을 채취하지 말고, 동물을 함부로 풀어놓지 말고,

불을 붙이지 말라는 주의사항들은 어찌보면 굉장히 당연한 이야기들이지만, 저런 기본이 제대로

지켜진 덕분에 이곳의 짙푸른 원시림과 그 특유의 분위기가 지켜지는 거 같다.

핫코다 하치만타이국립공원 내에 있으며 일본에서 세번째로 깊다는 도와다호수는 강물이 전혀 흘러들지

않고, 땅에서 솟는 물과 비, 눈으로만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호수에서 유일하게 흘러나가는 물줄기가

바로 오이라세계류, 계류가 이끼낀 바위 사이를 힘차게 흐르면서 일으키는 하얀 물거품이 선명하다.

게다가 무성한 이파리에 가려 드문드문 찢겨진 채 떨궈지는 햇살 한 조각이 묘하게도 이끼낀 바위위에

떨어지는 것도 굉장히 묘한 감정을 일으킨다. 마치 하늘에서 의도한 적정량의 조명이 적절한 바로 그곳에

딱 맞춰서 예정대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숲이면 다 같은 숲이지 '원시림'은 또 뭐냐, 하는 맘이 없지는 않았다. 한국에도 여기저기 조성된 트레킹

코스들은 대개 나무가 무성한 숲길 한가운데를 걷거나 숲과 바다와 산을 끼고 걷는 길인데 새삼스러운 게

있으려나 생각했었던 거다. 그런데 '원시림'의 포스는 뭔가 분명히 다른 게 있다. 저 수령을 알 수 없는

두껍고 단단해 보이는 나무 주변에서 아우라처럼 뻗어오른 잔가지들, 그리고 그 잔가지를 다시 감싸는

초록색 이파리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다른 거다.

저 너머 도로에 꽂혀있는 급코스를 경고하는 노랑색 교통표지판이 보이는 즈음에, 나무 역시 급코스를

온몸으로 예고하듯 격하게 뒤틀어져 있기도 했다.


길 중간에 개울 너머로 다리를 놓아주고 있는 통나무 다리도 만나고. 나무로 만든 다리가 아니라

말그대로 통나무 하나를 베어내선 개울 이쪽과 저쪽으로 걸쳐놓은 통나무 다리였다. 흔들리지 않게

제법 단단히 양쪽 땅에 고정된 거 같긴 했는데, 뭐하나 의지할 것 없이 이 나무다리를 건너 저쪽으로

건너갔던 사람이 있기는 할까. 의구심과 동시에 저 건너편에 대한 맹렬한 호기심이 일어난 것도 사실.

나무 옆구리에서 톡톡톡, 연지곤지 찍듯이 여리고 둥근 연두빛의 잎사귀가 부드럽게 돋아났다.

계단 옆으로 하얗고 두꺼운 나무 뿌리 두개가 툭, 툭, 상아처럼 튀어나온 것도 꽤나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부러지고 넘어지고 휩쓸리고 뒹굴던 나무들. 이미 당당히 하늘을 향해 온몸을 펼쳤던 모습은

오래전 과거의 것인 듯 부러지면 부러진 대로, 넘어지고 휩쓸리면 휩쓸린 대로 각자의 모습 그대로

연두색 융단이나 액세서리들을 도톰하게 휘감고 있었다. 반지의 제왕에서 나왔던 숲의 정령들이

어디에선가 끼이- 끼이- 거리면서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벌인대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풍경.


전체 17킬로미터 구간을 다 걷지는 못했고 일부만 걸었는데, 그 중에서 이렇게 넓은 길은 정말 극히

일부였던 거 같다. 대개가 한사람이 딱 걸을만한 좁은 폭, 반대편에서 사람이 올라치면 어깨를 칼처럼

세워서 서로 지나쳐야 할 정도로 좁았으니까. 아무래도 숲을 보호하는 게 우선이니까 길을 최소한으로

내려고 했던 거 같다. 한국의 지자체들도 걷기 열풍을 타고 트레킹코스를 만든답시고 나무데크로

길을 완전 포장해버리는 짓을 하고 있는데, 자연이 우선이라는 마인드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이렇게 고사리가 무섭도록 무성하게 자라난 곳도 무딘 발에 밟히거나 쓸려나가지 않을 테고,

이렇게 좁은 숲길 양쪽에 펼쳐진 이끼 융단이라거나 여리디 여린 덩굴들이 그물처럼 서로를 엮어넣은

모습을 지켜낼 수가 있을 거다. 오이라세계류의 원시림을 이렇게 훌륭하게 지켜낸 건 그런 마인드 아닐까.

좋은 계절에 온 것 같았다. 온통 나무들이 꽃보다도 이쁜 초록빛 잎을 크고 두껍게 피워내는 신록의 계절,

계류를 따라 맑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새소리마저 신비한 숲속을 산책하면, 시끄러운 물소리에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이 온통 차분하고 경쾌하게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분명 몇걸음 앞에 다른 일행이나

사람들이 앞서고 뒷서며 함께 걷고 있음에도 웬지 이곳에 홀로 쉬고 있다는 느낌.

실타래처럼 떨어지는 폭포인 '시로노이토'. 삼각대를 갖고 왔어야 저 가늘고 부드러워보이는 폭포수가


더욱 그럴듯하게 표현되었을 텐데 아쉽기 짝이 없었다는. 이곳은 아무래도 호수에서 뻗어나온 개울이다

보니까 낙차가 그렇게 크지도 않고 유량이 많은 편도 아니라고 한다. 폭포라길래 뭔가 콰콰쾅하는 소리가

사방에 진동하고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그런 걸 기대하는 건 무리라는 사실.


그건 '조시오타키'라는 이름의 폭포도 마찬가지였다. 제법 낙차가 있고 유량도 많은 편이긴 했지만,

앞선 폭포의 섬세하고도 미묘한 물줄기를 보고 기대치를 어느정도 조정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조금 실망할 뻔 했다. 그렇지만 도쿠리병의 주둥이처럼 생겨서 저런 이름이 붙었다는 이 폭포는

이 오이라세계류에 산다는 무지개송어의 장벽이기도 하단다. 자세히 보면 중간중간 시퍼런 색깔이

섞인 게 신비한 분위기를 살풋 풍기며 부지런히 쏟아져내리는 폭포수가 굉장히 시원헀다. 


아마도 상수원이니 물을 깨끗이 보전하자는 건가, 아님 나무와 풀을 보호하라는 건가, 여하간 꽤나

오랫동안 저 자리를 지켰을 강철표지판의 가장자리가 온통 낡고 닳았다.

커다란 구렁이가 나무를 칭칭 휘감고 올라가는 건가 해서 깜짝 놀랐는데, 눈비비고 다시

보니깐 두툼한 가지 하나가 나무둥치를 휘감고 뻗어있었던 거였다. 깜짝이야.

원시림을 벗어나 다시 세속으로 돌아나오는 길, 불과 몇걸음 안 떼었는데도 방금까지 바로 옆에서

지줄거리며 흐르던 개울과 단단하게 공기를 쥐고 있던 푸른 잎사귀들로 이루어진 공간이 꿈인양 하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은 이런 곳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걷고 둘러보고 느끼는

와중에 딱 어울릴 것 같다. 다시 딱딱하고 살짝 끈적해진 느낌의 아스팔트를 밟으니 정신이 번쩍 난다.

도와다 호수로부터 뻗어나온 유일한 개울이라는 오이라세계류가 그럭저럭 직선을 그으며 흘러나가는

길을 따라 이어지는 황토색 길, 17킬로미터에 이르는 전 구간을 걸었으면 딱 하루 코스였을 텐데 시간만

허용되었다면 정말 꼭 걷고 싶었다. 아쉽게도 이렇게 살짝 맛만 보고 돌아서야 하다니. 주위에 보니

차를 타고 오기도 하고,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들도 적잖이 보였는데 무지무지 부러웠다.

우리나라의 숲길들도 잘 보존해서 이런 상서로운 분위기를 풍길 수 있는 때가 오길.


* 오이라세계류의 위치.







* 이번 여행은 하나투어 '겟어바웃' 필진의 일원으로 다녀왔습니다.
Get About - 당신의 여행이야기

절 옆에서 물이 솟아난다 하여 절물이라던가, 제주도의 절물자연휴양림 들어서는 입구다.

역시 탐라국답게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입구에서부터 우리를 반겼다.

"오십디강 잘 쉬었당 갑써양", 제주 말이 잉잉거린다 싶은 건 바닷바람에 날린 탓이라고.

현충일을 앞둔 황금연휴의 시작, 토요일 오전이었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다. 일기가 궂어서

사람들이 제주도로 많이 못 내려왔나 싶기도 했지만 속속 도착하는 대형버스들이 사람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조금 일찍 출발한 덕분에 새소리 가득한 호젓한 숲길을 고즈넉히

걸어볼 수 있었다.

쭉쭉 곧게 뻗은 나무들이 빼곡하게 버티컬 커튼처럼 내리쳐져서는, 땅바닥의 갈빛과 천장의

녹색빛깔 사이에서 조금씩 그라데이션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앞서 걷는 사람 하나 찾아보기

쉽지 않은 그런 숲길, 어디선가 은은한 꽃향기와 나무향이 흘러넘쳤고 나무 사이를 휘감는

바람은 정말 머릿속 두통까지 털어내는 듯 했다.

나뭇가지를 지팡이처럼 꺽어쥐고 걷던 꼬맹이가 뭐에 심통이 났는지 빽 소리지르며

울기 시작했나보다. 당황한 부모가 일단 나뭇가지부터 던져버리고 아이를 달래기 시작,

나무 등걸을 타고 덩굴이 올라가듯 아이의 울음소리가 하늘로 번져 오르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사람많고 아스팔트로 꽉 찬 도시의 울음과는 그 괴로움의 정도가 훨씬 덜했다.

그나저나 나무 참 미끈하게 쭉쭉 잘도 뻗었다. 지면이 평평하던 기울었던 상관없이 나무는

하늘을 향해 알아서 방향을 잡아가다니, 무던하게 1미리씩 오차를 수정해가며 하루하루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꺾어나갔을 거다. 지구 중심부로부터 바로 뻗어나온 그런 각도아닐까,

왜 둥근 태양에서 햇살처럼 번져나는 느낌으로 지구에서 뻗어나간 나무들.

중간중간 놓여있던 너른 평상, 잘 관리되는 푸른 잔디밭 위에 잘 생긴 나무들이 우쭉우쭉

자라나 초록 그늘을 드리워 바람이 머문다 싶은 곳엔 여지없이 평상이 놓여있었다. 시간만

많다면 그냥 저기 벌러덩 누워서 바람쐬고 먹고 자고 하면 딱 좋겠다 싶었는데, 부러운

맘에 선택받은 사람들의 그 평온하고 편안한 분위기만 슬쩍 취했다.

덩굴식물을 보고 있으면, 특히나 녀석들의 조그맣고 반질거리며 단단한 이파리를 보고 있으면

이 아이들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건 아닐까 싶어질

때가 있다. 위에서부터 크리스마스 트리에 전구나 리본을 둘둘 감듯이 나무둥치에 휘휘

감아놓은 듯한 분위기여서 그런 걸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하다.


얼핏 초록빛 일색으로 보이던 숲이 알고 보면 무수하게 다양한 빛깔을 품고 있었다. 뭐랄까,

상이색이나 에메랄드색 크레파스같은 빛깔이 풍기는 숲그늘이 너무 신기해서 한참 둘러보다가,

나무를 눈여겨보고야 그 이유를 알았다. 나무껍질에 온통 옅은 녹색의 이끼가 잔뜩 끼어있어서,

전체적인 색감이 그렇게 오묘하게 나왔던 거다.

드디어 '절물'이란 이름의 연원에 도착, 절은 없어졌고 조그마한 암자가 남아있다지만

절 옆에서 흘러나온다던 물은 그대로였던 거다. 층층이 이끼가 시루떡처럼 얹혀있는 샘물,

나무대롱을 타고 흘러내리는 수량이 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급살맞게 콸콸 흘러내리는

지경은 아닌데다가 주변이 온통 파릇파릇하고 폭신한 분위기인 게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어느 한 장면 같다. 토토로라도 뛰어나올 분위기.


코스가 여러곳으로 뻗어나가 있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산책했던 코스도 있고 하여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는 맛이 있을 거 같다. 절물오름까지도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도

있다고 하니 할애할 시간도 짧게는 한시간 내외에서부터 길게는 몇시간까지 즐길 수

있을 거 같고. 제주시에서 멀지도 않으니 꼭 한번 들러볼 만한 곳인 듯.

"왕방강 잘고라줍서", 와서 보고 가서 잘 이야기해달라는 그 당부 아니어도 이야기를 신나서

잘 할 수 밖에 없던 곳. 절물자연휴양림이었다.





가끔 현수막이나 광고, 안내문에 오탈자나 비문이 보이면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해질 때가 있다.

친애하는 독재자 나으리의 '읍니다' 따위 말고도, 경주 남산에서 마주한 이 현수막을 보면서

이건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걸까 싶은 맘이 부글부글 일고 말았다.


"샛길 훼손지 복원을 위하여 훼손된 샛길을 복원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밥을 먹기 위하여 밥을 먹고 있습니다."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적절한 예문을

만들기도 어려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말인 거다. 어쩌자고 이런 말도 안되는 현수막을

내걸었는지 원. 제발 좀 실제로 만들어 내걸기 전에 한번이라도 생각이란 걸 해보고 걸기를.



@ 경주 남산.



아셈타워와 코엑스 인터콘 호텔 사이의 조그마한 오솔길, 앉고 싶어지는 맘이 동할 때쯤 벤치가 하나씩 꽂혀

있어서 영화 보기 전이나 잠시 짬이 날 때 앉아서 바람 쐬며 초록빛 가득 눈에 담기에 딱 좋은 곳.

아무래도 높다란 건물 사이에 끼인 듯 마련된 오솔길이어서 건물 사이로 쓍쓍 부는 바람이 맹렬하긴 하지만,

나름 조그마한 물길도 있어서 물흐르는 소리도 졸졸 들리고. (비록 수돗물일지언정)


도시락도 까먹고 벤치에 앉아 망중한도 즐기고 참 그새 많은 추억이 구비구비 서린 곳.




앙코르 톰을 벗어나 소위 '그랜드 투어 코스'를 자전거로 돌아 보기로 했다. 네모반듯한 앙코르 톰의 동쪽에는

'승리의 문'과 '동문'이 있는데 그쪽으로 나가면 '스몰 투어 코스'로 작은 원을 그리며 앙코르왓으로 돌아오게

되고, 북쪽의 '북문'으로 나가면 '그랜드 투어 코스'로 좀더 많이 큰 원을 그리며 한나절 코스가 되는 거다.

사실 한나절 코스니, 반나절 코스니 미리 재단하는 건 좀 웃기는 일이다. 가서 맘에 드는 곳이 있으면 몇시간이

지나가던 앉아서 쉬고, 책도 보고 낮잠도 자고 그럴 수 있는 건데 말이다. 여행을 떠나서 아침에 대략적인

스케줄만 스케치하듯 잡고서는 나머지 디테일은 그때그때 내키는대로 채우는 게 그래서 좋은 거 같다.

북문에도 여지없이 눈똑바로 뜨고 앙코르 톰을, 씨엠립을, 캄보디아를 지키는 '크메르의 미소'. 네모나게 각진

얼굴에 저런 은근한 미소를 물려주지 않았다면 꽤나 무섭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곳에도 역시 깊고 넓게 파인 해자를 건너기 위한 다리가 있고, 다리 위에는 거대한 뱀의 몸뚱아리를 줄 삼아

잡아당기고 있는 신들이 있다. 감사해요, 덕분에 다리 밑으로 떨어지지도 않겠군요.

쁘레아칸(Preah Khan)으로 가는 길 중간, 느닷없이 마주친 한무리의 아이들. 축축 늘어져있는 가지에 매달려

그네처럼 좌우로 거침없이 흔들기도 하고, 해먹인 양 편히 기대어 쉬기도 하고, 쪼꼬마한 아이들도 나무를 꼭

쥐고서 놀고 있는 게 꼭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요즘에도 가끔 나타나 화제가 되고 하는 '정글 인간', 십수년씩 혼자 정글에서 동물들과 생활했다는 그들이나

정글북에 나오는 모글리같은 아이들이 저렇게 지내던 게 아닐까. 정글 깊숙이 우거진 나무들에 기대어 쉬고,

놀고, 잠들고. 저렇게 많은 아이들을 품어 주고 버텨주는 나무가 듬직하다.

앙코르 왓 내부에는 화장실이 드물다. 몇 킬로미터씩 가야 띄엄띄엄 있는 수준인데, 가끔은 입장객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받는 유료 화장실도 있다. 자전거를 격하게 달린지라 장 활동이 활발해졌는지, 화장실의

위치 추적에 예민해졌던 그 때, 문득 눈앞에 나타났던 '한국-캄보디아 우호의 숲'이라고 읽히는 낯익은 글자.


의전 원칙에 따라 자국 국기를 왼쪽으로, 외국 국기-여기선 태극기-를 오른쪽으로. 자국어인 캄보디아어로

먼저 소개를 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보질 못하겠고, 한글로는 한국이 먼저 나와 '한국-캄보디아', 그다음

병기된 영어로는 'Cambodia-Korea'로 자국이 먼저 나오고. 나무랄 데 없는 배치다.

우호의 숲 속에 자리잡고 있는 화장실. 타고 다니던 자전거를 세워두고 급한 불부터 끈 후에, 건물을 따라 숲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뭐, 딱히 다를 건 없었고 그냥 여느 앙코르 왓 내부의 정글과 같이 치렁치렁하고 빽빽한

정글, 숲이었다.

화장실 안에서 재미있는 그림이 있어서 한 장. 왼쪽부터 보자면, 흡연 금지다. 아무래도 정글에 목재 건물이니

화재 예방이 중요한 거다. 그담 변기뚜껑에 올라앉아 일보지 말라는 표시, 워낙 많은 불특정다수가 쓰는 공용

변기이다 보니 더러워지기 쉬울 테고 그럼 또 저런 자세를 부득불 취해 더욱 더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겠지.

그렇지만 저 자세로는 물이 사방으로 튈 텐데.ㅡㅡ;; 세번째는, 옆에 있는 수도꼭지로 발 닦지 말라는 건지

신발을 닦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날이 워낙 더운데다 여기 오면 아무래도 많이 걷게 되니 발 한번 씻고

나면 피로도 좀 풀리고 좋지 않나? 좀 이해가 안 되는 표지다. 마지막 그림처럼 샤워하지 말라는 거야, 다른

사람에 민폐도 될 수 있고 '선녀'처럼 옷을 분실할 수 있는 위험도 있으니 그렇다지만. 


이 중 하나를 어기고 말았다. 너무 더운데다 이미 옷에 하얗게 소금꽃이 피어나 어쩔 수 없었다는.


비자림, 어렸을 적 바둑을 잠깐 배웠을 때 적당한 두께의 비자나무 바둑판이 최고급이라는 풍월을 들었던 거 빼곤,

비자나무라는 이름 자체가 낯설기만 했다. 제주도의 서북쪽께, 제주시와 성산일출봉 중간쯤에 있는 비자림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대단히 희귀한 비자나무 숲이라고 한다.

티켓을 받아들고 이거 뭐야, 했다. 왠지 글씨체가 북한에서 많이 쓸 법한 격정적인 궁서체여서, 전반적인 티켓의

색감도 왠지 남한보다는 북한에서 많이 쓸 법한 느낌? 개성공단에 갔을 때 보았던 한글 간판들의 궁서체와 꽨

흡사하다 싶다. (이런 글 쓰면 조만간 티켓 디자인 바뀌는 거 아닐까 몰라. 근데 특징적이란 얘기지 절대 싫다거나

혹은 '표 디자이너'가 빨갱이 아냐, 란 식의 이야길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아 이 기나긴 자기검열과 지레 핑계대기)

매표소에서부터 4-50분 걸으면 비자림을 한바퀴 여유있게 걷고 나올 시간이 된다고 한다.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하트 모양 뚫려 있는 바위와 잘 조성된 정원. 연인끼리 간다면 하트를 마주한 채 양쪽에 설 법한,

전형적인 포토존이다.

비자나무의 이름은, 잎의 뻗어나간 생김생김이 한자 아닐 비(非)자(字) 닮았다고 해서 비자(非字)나무라고 한다.

은행열매랑 비슷하게 생긴 누런 빛의 열매가 투둑투둑 떨어져 있었는데, 은행열매의 고약한 똥내와도 다르고

살짝 시큼한 느낌, 혹은 비린내가 풍겼다. 왜 오존발생기에 코를 박으면 맡을 수 있는 그런 비릿한 냄새같기도 하고.

돌에 잔뜩 끼어있는 이끼는 볼 때마다 신기하다. 대체 저 돌멩이에 빨아먹을 양분이 뭐가 있다고.

'숲'이란 건 왠지 생소하다. 무럭무럭 자라난 나무들이 이렇게 하늘을 가리울 만큼 커진 채 무리를 이루고 있는 걸

보기가 쉽지 않은 탓이기도 할 거고, 숲이라고 불릴 만큼 너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나무들을 보기도 쉽지 않아서다.

그런 점에서 비자림은 꽤나 숲다운 숲이었다. 울창하고, 푸르고, 아늑한 느낌에다 살짝 비릿하지만 상쾌한 내음까지.

연리지. 아마 이 단어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건 최지우가 주연을 맡았던 동명의 영화보다도, 각종 퀴즈프로에서

심심치 않게 나왔던 덕분이 아닐까 싶다. "이 비자나무에 영원한 사랑을 빌어보세요."

사진이 좀 흔들렸지만, 한때 나의 드림카였던 푸조 시리즈. 무려 '푸조나무'라는 나무가 있어서 신기해서 한방.

이름이 무려 "새천년 비자나무". 2001년인가, 당시 수령이 830여세의 이 나무를 두고, 비자림에서 니가 짱먹으라며

붙여준 이름이란다. 당시 '새천년'이란 단어가 유행하긴 했지만 나무에도 이런 악취미한 작명이라니. 뭔가

비자림을 관장하는 숲의 신이 깃들어있는 듯한 포스를 쫌 말아먹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내려오는 길, 비자림을 걷는 사람들이 발을 씻거나 신발을 씻고 갈 수 있도록 마련해둔 수도꼭지도 범상찮다.

종종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걷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는데, 따라하고 싶은 맘이 쿡쿡 솟아났지만 참았다.

'새천년 비자나무'를 기점으로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다른데, 그곳까지 걸어들어가는 길이 나무가 잔뜩

우거진 숲길이었다면, 그곳에서 걸어나오는 길은 잘 정돈된 산책로 같았다.

그림같은 길. 걷기도 편하고. 현무암 돌담길을 옆에 끼고, 황토빛 흙길에 떨궈진 비자열매들을 즈려밟으며,

내딛는 걸음걸음 뚝뚝 끊어져 내린 햇볕들과 희롱하다. 약간의 저항감이 느껴지던 열매가 터질 때 퍼지는

비자열매의 향기란.

이상하다 싶도록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 사람. 누구냐 넌. 안 올리려다 배경이 워낙 이뻐서.

걷는 속도로 사진찍기. 멈춰선 사진엔 왠지 직접 걸으며 느끼는 실감이 덜하겠다 싶어서.

거의 입구까지 돌아나온 길, 한 쪽에는 벼락맞은 비자나무가 있다.

하트무늬로 구멍뚫린 돌 옆도 다시 지나고, 저거 자연적으로 생긴 걸까, 그렇담 정말 멋진데.

이제 제주도에서 꼭 빼놓을 수 없는 마지막 장소만 남겨두고, 비자림을 떠났다. 아무래도 밤비행기를 타기까지

하루코스는 정말 잘 짠 거 같다. 아침부터 오설록녹차박물관-아프리카박물관-서귀포시 점심-천지연폭포-

-비자림-그리고 바로 그곳-제주시 저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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