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제주 일정의 마지막 경유지는 바로, 성산 일출봉. 대학교 일학년 때 친구들과 자전거로 제주도를 일주할 때

멀리서부터 그 봉우리를 보고는 다들 미친듯이 페달을 밟았던 기억이 생생한 곳이다. 이번에는 일출봉 바라보고

가던 길에 배가 고파 살짝 무슨무슨 맛집, 어디 프로그램 소개 맛집, 요런 데 들러서 가볍게 식사를 했다.

그 식당 앞에 무질서하게 쌓아올려진 듯 보이는 돌담, 바람이 숭숭 잘도 통하게 쌓아놨다.

매표소 옆의 계랸색 매점 건물을 지나 눈을 높이면, 웅장한 맛을 풍기는 일출봉이 우뚝하다.

제주 지역방송들이 방송 중간중간에 간지 끼워넣듯 껴넣는 이미지, 성산 일출봉에 해뜨는 모습이라지만 사실 여기서

해뜨는 건 번번이 못 보고 지나갔었다. 가족들과 어렸을 적 왔을 때는 아예 요앞에서 묵으며 해를 기다렸는데 날이

흐려서 못 봤었고, 다른 날은 여기에서 일출이나 일몰을 기다릴 타이밍이 되지 못했더랬다.

성산봉 오르는 길목, 초록빛 싱그러운 초원 위에는 잘 생긴 갈색 말 몇 마리가 묶인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뿐 아니라 제주도를 돌다 보면 드문드문 승마 초보자 환영, 말타볼 수 있는 곳, 이런 간판을 많이 볼 수 있다.

초원 같은 평지, 살풋 각도가 느껴지는 평지를 지나 본격적으로 등산 시작. 일출봉 어귀에 있던 매점에는 중국어가

떡하니 적혀있었다. 샨샹메이요우슈웨이~. 일출봉 오른 후엔 물 파는 데가 없으니 여기서 사란 얘기. 그러고 보면

제주도에서 중국인 단체관광객은 눈에 참 많이 띈다.

일출봉 가는 길이 그때도 이렇게 잘 닦여 있었던가, 처음부터 끝까지 차곡차곡 계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다지 길지

않고 힘들지도 않은 코스, 지레 겁먹었던 동생님도 어느새 생기발랄해졌다. 왕복 50분이면 넉넉히 보고 돌아올 듯.

일출봉에 올라서서 바람으로 땀을 식히는데, 좀 곤란하다. 커다란 분화구 모양의 일출봉. 사진을 찍을 만큼의 적당한
 
거리를 허용치 않은 채 나와 방문자들을 덥썩 안아 버렸다. 제법 까끌하면서도 부드러운 질감이 느껴지는 초록빛

커버가 분화구를 매끈하게 메우고 있었다. 현무암에 잔뜩 슬어있던 이끼같기도 하고, 스프 위에 좀 과하게 뿌려놓은

아스파라거스 가루 같기도 하다.
 
안개 자욱한 분화구 너머 마을이 희끄무레하게 보이고, 분화구의 오톨도톨한 가장자리가 험준한 산의 능선이나

백두대간처럼 쭉 이어진 산맥처럼 보인다. 파도치듯 쉼없이 달려나가는 백두대간의 미니어쳐랄까. 아님 우유 광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우윳방울이 낙하한 직후의 왕관같은 흔적과도 흡사하다. 천분의 일초 쯤으로 찍어올린 장면,

튀어오른 물방울들은 전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정상에서 굽어본 중간 쉼터. 사람들이 조그만 게 개미같고, 나무들은 딴딴하고 속이 찰진 파슬리나 브로콜리 같다.

멀리 보이는 마을과..저건 호수인 척 하는 바다일까. 그러고 보니 이날 날씨가 하루종일 흐린 편이었기에

더위도 덜했고, 땀도 그다지 많이 나지는 않았던 거 같다. 바람이 찍혀 나온 사진.

성산 일출봉에 올라 사람들이 밟을 수 있는 영역이란 딱 여기까지다. 울타리가 설치된 구간은, 커다란 분화구의

오분지일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의 공간만 확보해 주었을 따름이다. 사람들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나름

최선의 뷰를 잡아보려 애쓰지만, 어쩌면 이 곳의 풍광을 오롯이 감상하려면 열기구나 헬리콥터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게다가 맨눈보다도 못한 카메라로는 눈으로 감상하는 풍경의 절반도 담지 못하겠더라. 적어도 나는.

내려가는 길, 그러고 보니 내게 남아있던 일출봉의 이미지란 단지 그 뾰족한 화구만의 것은 아니었다. 거기까지

이르는 길에 푹신해보이도록 깔려있는 녹색의 잔디밭, 언덕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곡선, 그리고 그 너머에서

산산이 부서져 있는 햇살, 그 햇살이 둥둥 표류하는 바다.

어라, 한쪽에는 모터보트 선착장도 생겼나보다. 이런 거 못 봤던 거 같은데. 계속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 내어 굳이

대조해보게 되는 건 왤까.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느끼려고 애쓰면서도, 막상 쉽지 않다. 어쨌거나, 혹시

모터보트 추격신이 필요하거나 해안 총격장면을 찍어야 하는 감독이라면 한번 추천해주고 싶긴 하다.

내려오는 길 어딘가에서부터 사람들이 다듬어진 돌계단길을 버리고 잔디밭으로 걷기 시작했다. 사실 보폭이 그다지

고려되지 않은 채 만들어진 계단인지라 계속 왼쪽 다리로 계단을 내려서게 되거나, 혹은 반발짝을 마저 걸어야 하는

등 좀 불편하고 힘들었다. 푹신푹신, 경사가 제법 되는 길인데도 사방을 둘러보며 걸을 여유가 생겼다. 덩달아

여유로와보이는 저너머 '노인과 말'.

늘 생각하지만 제주도에 가서 성산 일출봉은 왠만함 꼭 들러야 하는 곳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봉우리 하나

등산하듯 오르내리는 게 아니라, 그 봉우리 앞에 쫙 펼쳐져 있는 이런 풍경들, 이렇게 이쁜 길들, 그것들은

'성산 일출봉'이란 이름과 떼어놓을 수 없는 매력적인 공간들이지 싶다. 일출봉이 덮고 있는 무릎깔개처럼

안온하고 포근한 느낌을 전해주는 그 보들보들하고 싱싱한 녹색. 그러고 보니 언젠가 한번 구경갔던 골프장의

인공조경과 비견할 만한 굴곡에 녹색이다.


일단 올해 다녀온 제주도 여행기는 여기서 끝~*


제주#1. 제주올레 7코스, 외돌개를 끼고 걷기 시작하다.
제주#2. 꽃길, 찻길, 논두렁길, 바닷가길을 넘어 건너.
제주#3. 철조망에서 자유로운 제주도의 해안..?
제주#4. 남/녀 노천탕에 사람은 없고 조개껍데기만.
제주#5. 올레길 7코스의 바닷가 우체국.
제주#6. 강정포구 가는 길(올레길 7코스)
제주#7. 올레길 7코스 vs 해군기지.
제주#8. 월평포구에서 끝난 올레길 7코스.
제주#9. '업'에서 나왔던 커다란 새를 찾아내다.(아프리카 박물관)
제주#10. 오설록녹차박물관에서 '현미녹차'를 생각하다.
제주#11. '식상한' 천지연보다 '제주감귤와인'이 궁금했다.
제주#12. 이름이 왜 5.16도로일까.
제주#13. 숲다운 숲, 비자림 거닐며 산림욕 한번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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