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뭘까. 직경이 지름 1미터쯤 되는 거대한 기둥 6개가 뻗어나가고 삼사층짜리의 자그마한 건물같은.
이런 비슷한 용도모를 건물이 원시인들이 살던 약 오천년 전에 세워졌었다면 거의 중세시대 성이라거나
요새의 초고층건물에 비견될 만한 거 아닐까. 에도시대부터 유명했다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기다리는
일본 아오모리현에 있는 산나이마루야마(三內 丸山) 유적군에 있는 대표적 유적이다.
그러니까 이곳은 이런 가죽옷을 입고 원목 몽둥이를 휘두르는 원시인 500여명이 일본 본섬의 북동쪽끝에서
대략 오천년 전부터 천삼백년쯤 살았다는 대규모의 집터 유적이 보존되어 있는 곳인 거다. 약 2천여 점의
유적이 대량 출토되었다는 이곳은 사실 야구장을 건설하기로 되었던 부지였는데, 1994년 아오모리현 지사가
유적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보전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일본의 국가사적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등재를 기다리는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남은 셈이다.
우선 마을 유적부터 둘러보기로 하고 박물관 건물 밖으로 나와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지나니 왠 샛노란
민들레 꽃밭이 먼저 나타난다. 그럴 리 없겠지만 오천년 전에도 여기 살던 사람들이 같은 꽃밭을
보고, 밟았던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일었다.
그렇지만 오천년 전의 기후나 지형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거다. 당장 그때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2-3센티 높았는지라 바로 이 마을 코앞까지 바다가 들이찼을 거라고, 퇴직하기 전까지 학교에서
근무하는 선생님이셨다는 '산나이마루야마 응원대'라는 자원봉사자 할아버지가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음식으로 삼았던 생선이나 해산물등의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고도 한다.
사실 이 나무 구조물이 무슨 용도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이런 형체가 확실한지에 대해서도 뚜렷이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한다. 자원봉사자 할아버지가 여기가 '번지점프대'였는지도 모른다고 농하셨듯이.
그래도 여러 정황상 여섯 개의 대형 기둥이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그 위에 저런 형태의 구조물이
설치된 채 아마도 망루의 기능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모든 유적 복원물에는 합당한 추정과 근거가 있는 법. 이 '망루' 추정 유적에는 뚜렷한 근거가 있었다.
토목, 건축, 고고학자들이 망라된 발굴조사 중에 무려 2미터 깊이, 2미터 직경의 구멍이 이렇게 뽕뽕
규칙적으로 박혀있는 걸 발견했다는데 그 중 일부 구멍에 지하수에 잠긴 밤나무 기둥조각이 온전히
남아있었다는 거다.
이곳이 그 복원된 '망루' 옆에 있던 실제 건물터. 이렇게 깊고 큰 구멍에 걸맞는 두껍고 튼튼한 기둥이
여섯개나 박힌 건물이라면, 글쎄 아무리 원시시대였다고 해도 꽤나 그럴듯한 건물이 지어지지 않았을까.
지금 복원해 놓은 건 가장 보수적이고 냉정한 상상력을 동원해 지어놓은 건지도 모르겠다.
우람한 덩치라거나 뒤로 이어지는 많은 주거지들의 흔적들을 보자니 여긴 정말 꽤나 커다란 마을을
이루고 있었겠구나, 그만큼 일손(노동력)도 많고 집짓고 망루짓는데 동원할 나무니 끈이니 자원도
많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무려 500여명이 살았다고 추정되는 마을이니만큼.
가장 큰 건물에 먼저 들어갔다. 길이가 32미터, 폭이 10미터에 이르는 이 커다란 건물은 무려 19개나
되는 밤나무기둥으로 지탱되고 있었다는데, 용도에 대해서는 공동작업소라거나 마을 집회소, 혹은
겨울철을 나는 공동가옥이었을 거란 여러 설들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런 설명들을 듣는 사이에
계속 코를 찌르던 연기 냄새가 거슬려 뭔가 물었더니, 건물을 구성하는 나무들을 튼튼하게 오래
보전하기 위해 원시인들이 처리했던 훈증 작업을 재연한 결과라고. 아닌게 아니라 나무들이 다 탔더라.
버려지고 버려져서는 약 천년동안 언덕처럼 불룩 솟아올랐다고 한다. 말하자면 '난지도' 같은 곳이었을라나.
깨진 장신구, 못쓰게 된 토기 등을 생활쓰레기랑 함께 모아서 버리던 곳이랄까. 그런 곳이 수천년이 지나니
유물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유적의 보고가 되어버렸다.
이 곳에 당장 복원되어 있는 집터들도 꽤나 많다고 느꼈는데 이게 전부가 아니란다. 바닥에 땅을 파서
만든 집터도 있고 기둥을 세워 땅 위에 세운 집터도 있다는데 도합 600기 가까운 주거터가 발견되었지만
복원한 건 그 중에서 불과 20여기 남짓이라고. 땅에 대한 소유권이 없던 시절이었을 테니, 그들은 그저
원하는 장소에 스스로의 힘으로 나무 뼈대를 세우고 움막같은 집을 지었으면 땡이었을 거다. 그럼 굳이
여러 채 갖겠다고 과잉하게 노력해서 집을 지어놓지도 않았을 거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화려한 집을
짓겠다고 난리치지도 않았겠지. 뭐 단순비교하긴 그렇지만, 오천년 후 지금은 그때보다 행복할까.
이게 땅바닥을 파서 만든 주거터. 슬쩍 들어갔더니 암사동 선사유적지에 복원되어 있는 움집처럼 별 거 없다.
뭐 원시인들이 '일본땅' '한국땅' 출신이란 자각을 갖고 있지도 않았을 거고, 뭔가 고유하거나 특징적인
문화적 차이점을 주거 형태에 구현하기에는 아직 집 한채 짓기도 급급한 수준이었을 테니깐. 중앙에는
화로가 하나, 이때는 아직 쌀을 재배하기도 전이라 주식으로 도토리, 그리고 연어니 오징어니 생선과
해산물을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땅에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운 주거터. 하나 재미있는 건, 이곳에 살던 원시인들이 먹었을 음식의
흔적 중에서 생선 머리뼈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러가지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는데
토막내서 머리는 바다에 버리고 몸통만 먹었을 거다, 혹은 머리에 붙은 아가미가 공기에 닿아 쉽게
부패하면서 머리뼈까지 삭혔을 거다, 혹은 머리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썼을 거다, 라는 정도가 있다고
할아버지가 설명을 해주었다. 글쎄, 어차피 씌어지기 전의 역사, '선사(先史)'시대니까 상상하기 나름,
머리뼈는 몸에 좋다며, 아님 머리가 똑똑해진다며 다 먹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있었는데, 오천년 전의 마을이라기엔 정말 생생하게 한 마을 풍경을 망라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대규모 마을 유적에서 발굴된 다량의 토기, 석기, 목제품이나 골각제품들은 2002년에 개관된 박물관에
전시해두고 있다고 하니 이젠 뙤약볕을 피해 박물관 내부를 관람할 차례. 그 전에 화장실을 가려고
표지를 찾았더니, 저렇게 귀여운 남/녀 화장실 사인이라니.
일본에서 까마귀가 길조로 여겨져서 많은 걸까, 아니면 워낙 많아서 길조로 여겨지게 된 걸까. 마치
닭과 달걀의 선후를 따지듯 골치아프고 애매모호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생각도 없지만, 이곳
산나이마루야마 마을 유적에도 까마귀가 참 많았다. 그러고 보면 일본 소설에서 까마귀는 길조이면서
동시에 죽은 자와 산 자를 잇는 메신저 역할도 하고, 아니면 죽은 사람의 영혼 그 자체라고 표현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왠지 오천년 된 유적지에서 만난 까마귀라 더욱 상서롭달까.
박물관, 정확히는 조몬지유칸(時遊館) 내부에 미니어쳐로 전시되어 있는 산나이마루야마 마을의 유적.
실제 마을에 선사시대 원시인들이 꼬물거리는 모습이 모형으로나마 시각화되니까 훨씬 그럴 듯 하다.
마을을 둘러싼 숲, 그리고 그 너머의 바다는 이 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을까. 외적이 쳐들어올 수도, 예기치 못한 짐승들의 습격이 있을 수도, 혹은 대규모의
자연재해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니만치 저렇게 불쑥 튀어나온 '망루'의 쓰임이 더욱 실감나기도 하고.
'망루' 유적의 커다란 구덩이 밑에서 보존되어 있던 1미터짜리 두꺼운 밤나무 기둥의 잔해 진품.
무려 오천년쯤이나 땅 속에서 썩지도 않고 이렇게 버텨왔다는 게 대단하다. 역시 진짜를 보니까
모조품을 보는 것과는 또 느낌이 다른 듯.
마을 유적에서 발굴되었다는 수많은 토기 조각들을 일일이 짜맞춰서 복원한 토기들. 토기를 어떻게
제작하는지를 마네킹이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저 푸른 초원 위에 복원된 십여기의 움막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지를 보여주는 모형.
무엇보다 흥미롭던 건 십자가 형태로 정형화되다시피 빚어지는 사람 모양의 토기, 토우였다.
아무래도 다산을 상징하고 싶었는지 불룩 튀어나온 두 가슴과 둔덕이 세 뿔을 이루고 있는
십자가 형태의 사람 흙인형은 얼핏 보면 노릇노릇 잘 구워진 쿠키같기도 하고, 초기 기독교시대의
십자가 원형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오천년 전 선사시대를 살던 사람들에 대한 편견 아닌 편견을 좀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각 토우들에
그려진 문양들은 이렇게 숫자를 나타내는 표식이기도 했다는 것. 그냥 거의 동물에 가깝거나 두뇌 활동은
미미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고쳐 생각하면 지금의 인류보다 훨씬 생존력도 강하고 적응력도 강하고,
심지어 저런 것을 보면 두뇌 수준도 훨씬 우수했던 건 아닐까. 막말로 요새 사람을 그들이 맞닥뜨렸을
환경에 떨궈놓는다고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은 거다.
그리고 토기에서도 이런 인물 문양이 발견되기도 했단다. 사람의 형체가 뚜렷하게 나타나서 얼굴과 손,
그리고 발의 모양이 쉽게 구별되긴 하는데, 손에 든 건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태 토기에 그려진
문양들은 대개 빗살무늬니 아라베스크 무늬니 하는 간단하고 기하학적인 것들 아니었던가. 아님 아예
아무것도 그려넣지 않은 민무늬거나. 꽤나 이례적인 토기 문양 같아서, 일본어는 모르지만 제법 중요하게
생각하고 비중있게 전시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토우에 호피가죽옷을 입히고 똥글똥글한 눈을 가진 귀여운 캐릭터로 마스코트를 삼다니. 게다가
박물관 입구에 도토리로 만들어둔 저 귀여운 녀석들은 어떻고.
* 교통편.
* 이번 여행은 하나투어 '겟어바웃' 필진의 일원으로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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