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걷고 싶은 아름다운 산책길 1, 강화도 나들길(윤성의)-

 

* 2016. 7. 11(월) KBS제1라디오 '라디오 전국일주' 방송분입니다.

* 아래글은 제 블로그의 글 (걷는 이의 눈높이에서 재발견한 강화, 강화나들길 제1코스.)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원고입니다.



안녕하세요. 라디오 전국일주 청취자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산책 좋아하시나요? 저는 이번 한주동안 청취자 여러분께 전국의 아름다운 산책로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이번 저와 함께 걸어보시면, 시속 3km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꼭꼭 밟으며 음미하는 풍경은, 단지 눈에만 담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까지 차분하게 스며든다는 것을 느낄 있을 겁니다.

오늘 함께 걷고 싶은 길은 강화도 나들길입니다. 강화도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마니산 참성단, 진달래 밭으로 유명한 고려산, 갈매기와 새우과자가 떠오르는 석모도, 그리고 곳곳에 산재해 있는 선사시대 고인돌까지 하나씩 차근차근 이어나가 있는 곳입니다.

강화 나들길은 산책로와 옛길을 포함하는 20 코스로 이루어져 이런 지점들을 빠짐없이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중에서 1코스, 심도역사문화길이란 이름이 붙은, 강화도의 가장 번화한 시내에서부터 동쪽 해안가의 갑곶돈대까지 18킬로미터의 길을 걸어볼까요?

강화버스터미널에서 차를 내려 소박한 슬레이트 지붕이 이어진 골목길을 지나면 동문을 만날 있습니다. 동문은 몽고가 침입했을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옮겨와서 항전하며 쌓은 성문입니다. 야트막한 가옥들과 눈높이를 맞춘 소박한 성문을 골목 끝에 갖고 있는 동네에서 살면 꽤나 운치 있을 같아 이곳 주민들이 살짝 부럽기도 했습니다.

동문을 지나고 만나게 되는 600 묵었다는 회나무, 그늘 아래서 자동차들도 쉬어가는 그런 거대한 나무를 보면 왠지 옷깃을 여미게 된달까요. 생명력과 연륜 앞에서, 그리고 단단히 수백 동안 뿌리박은 위엄과 경이로움에 조금 압도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걷다보니 어느새 고려궁지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한창 뜨거운 오후 2시쯤. 이곳 그늘에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 먹으며 땀도 식히고 바람도 쐬어 봅니다. 이곳은 고려 시대 몽골군의 침입으로 왕조가 강화로 옮겨 왔을 , 고려 왕조의 왕궁이 있던 곳입니다.

1코스의 끄트머리쯤에서 만날 있는 연미정은 강화 10경의 하나로, 아래로 굽어보이는 물길 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는 데서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풍경이나 정자가 품고 있는 시원한 바람이 예사롭지 않아 강화나들길 1코스 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곳입니다. 정말 경관이 굉장히 아름답고 500 느티나무도 그루나 있어 시원한 바람과 그늘을 품고 있는 곳이었지만, 이런 아름다움에 비하면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안타까웠습니다.

꽤나 한적한 나들길을 따라 걷는 정말 기분 좋은 일입니다. 나고 드는 자유롭다는 뜻의 '나들길'. 강화도에 왔다면 어디서부터든, '강화나들길' 표지를 따라 강화의 풍경을 즐겨보시는 어떨까요. 모범답안처럼 코스를 따르지 않더라도 내키는 대로 형편 닿는 대로 걸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지금까지 낯설게만 볼 수 있다면 어디서든 여행이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 윤성의였습니다.






싱가폴의 차이나타운 초입, 싱가폴의 상징인 멀라이온상이 원색으로 치장된 채 우뚝 서 있다. 


어느 나라나 차이나타운은 비슷한 풍경에 상품들이면서도 꼭 한번은 찾아보게 되는 매력이 있는 듯. 안 가면 아쉬운.


특히나 싱가폴의 차이나타운에는 무려 4-5층 건물 높이에 육박하는 대형 사찰이 있다. 부처의 치아 일부를 


4층에 모시고 있어 용아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절 앞으로 싸구려 잡화들이 늘어섰다.


네발달린 의자들 발치에서 네발달린 고양이 한마리가 털을 고르는 중.


차이나타운의 먹잣골이랄까, 과거 중국인 노동자의 모습이 굽어보는 그곳에는 온통 양쪽으로 식당들이 즐비하다.


어느 한 골목을 꺽으니 머리를 이쁘게 염색하신 분이 열심히 전각작업중.


그리고 용아사 입장~


향연기를 흠뻑 맡은 용의 눈빛이 개개 풀려버렸다. 


생각보다 신식의 새것같은 느낌인 사찰, 중국이 으레 그렇듯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실내. 




그렇지만 정작 제대로 금칠이 된 건 부처님의 치아 일부를 모시고 있는 4층. 엘레베이터를 타고 자유롭게 올라가면


사진촬영이 금지된 곳이 나타난다. 금을 사오백 킬로그램이나 아낌없이 써서 만들었다는 좌대가 멀찍이 있고


유리로 칸막이가 쳐져있어 그 한가운데 모셔져 있다는 치아는 보이지도 않는다.


소원을 빌면서 불을 밝혀둔 유리잔 속 초들. 


4층에서 혹시 더 올라가면 뭐가 나올까 해서 올라가니 옥상 정원이 나타난다. 강화도 전등사에 가면 볼 수 있는,


경전이 새겨진 동그란 통 같은 거. 손잡이를 잡고 이걸 한바퀴 돌리면 경전을 일독하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는다나.



절 바깥으로 풍경이 이쁘게 보이는 옥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잘 꾸며둔 정원이어서 한번 올라갈 만도.


 

강화도 외포선착장에서 카페리를 타고, 게으른 갈매기들이 부리에 물리는 새우깡만 씹는 모습을 보며 들어선 석모도.

 

눈썹바위 아래 부처조각과 소위 '기돗발'이 잘 받는 3대 관음도량으로 유명한 보문사를 오랜만에 찾았다.

 

보문사로 올라서는 제법 가파른 산길에서도 꿋꿋이 하늘과 땅 사이에 수직으로 버티고 선 나무에 하트 무늬가 새겨져있다.

 

한여름내 햇볕을 그득 받고 시퍼렇게 멍들어버린 덩굴손들이 커다란 바위를 꽁꽁 움켜쥐고 있는 듯.

 

수능이 머지 않았다. 3대 관음도량인데다 영험하다는 소문이 퍼진 절이다보니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탑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선 부처들, 혹은 부처의 뒤를 이어 깨달음을 얻은 보살(보디사트바)들의 색색깔 뒤통수.

 

 

눈썹바위로 가는 길에 수백개 돌계단을 오르고, 역시 수백개의 연등 옆을 지났던 거 같다.

 

그리고 눈썹바위 전망대에서의 석모도 그리고 그 너머의 전경. 바다 위로 불쑥불쑥 솟은 송전탑들.

 

 

보문사를 등지고 내려와 허기를 달래려 복분자 막걸리 한 동이와 함께 감자전을 주문했다.

 

 

 

 

강화도 외포리 외포여객터미널, 이곳에서 30분마다 출발하는 카페리호를 타고 석모도를 들어가려는 차와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화도 외포리에서 석모도 석포리로 불과 십분 남짓 배를 타고 이동하는데 드는 비용은

승선비용 대인 2,000원, 소인 1,000원, 승용차 14,000원. 편도비용이 아니라 오가는 왕복비용을 미리 지불하는 식이다.

선착장 끝이 바다에 슬몃 잠겨있고, 그 앞에서부터 일렬로 늘어서서는 배가 오기를 기다리는 차들. 저만치 앞에서

갈매기떼를 무슨 날파리들처럼 몰고서 오는 유람선이 보인다. 

이제 배 앞의 입을 활짝 벌리고는 항구와 단단히 연결짓도록 인도하는 아저씨, 배 한대에 승용차로 한 삼십여대이상

들어가는 거 같았는데 이날따라 관광버스로 석모도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아무래도 수능시험을 치고나서

보문사의 부처님께 부탁할 일이 많아서라거나, 석모도에 있는 조그마한 산들을 오르내리려는 거 아닐까 싶다.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린, 석모도 가는 길 배 위에서 갈매기에 새우깡 던져주기 놀이. 이제 갈매기

녀석들도 어찌나 닳고 닳았는지 엔간한 새우깡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게으르게 배를 따를 뿐이다. 던져졌던 새우깡이

바다에 힘없이 떨어지고 나면 그제야 바다에 살짝 내려앉아 먹기도 하고, 요행히 자기 비행 경로에 맞춤하게 던져진

새우깡만 잡아챌 뿐, 던져진 새우깡을 먹겠다고 서로 다툼하거나 사람 손가락까지 잘라먹을 듯 덤벼드는 '기백'은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고 새우깡 안 사고 남들이 던져주는 것만 구경하길 잘했다 싶을 정도로 배부른 갈매기들.

▲ 네이버에서 찾아본 석모도 지도. 왼쪽 아래 '장곶선박출입항대행신고소'와 '민머루해수욕장'이 보인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장구너머포구. 네이버 지도상에는 '장곶선박출입항대행신고소'라는 긴 명칭으로 나와있지만

장곶포구 혹은 장구너머포구라고 흔히들 부른다고 한다. 포구로 향하는 길은 그다지 정비되어 있진 않아서

차 두대가 아슬아슬하게 지날만큼의 아스팔트포장이 되어 있고, 따로 간판이나 표지판이 서 있는 게 아니라

길 바닥에 저렇게 노랑 화살표가 그려져 있는 정도. 포구에 도착하니 낙조를 보며 식사를 할 수 있다는 횟집들이

각자의 배 이름을 걸고서 성업중이었다.

그리고 흐릿한 날씨에 벌써부터 시뻘겋게 변해버린 해가 걸쳐 있는 하늘 아래로, 마치 태양으로부터 뻗어나와

바닷물에 일렁이는 햇살인 것처럼 출렁이는 배들이 저 멀리부터 점점 커지며 눈앞으로 육박하고 있었다.

포구에 배들이 전부 들어와있나 싶을 정도로, 조그마한 포구가 꽉 차 있었다. 그리고 한 켠엔 잔뜩 녹이 슬어 있는 채

시멘트 바닥 위로 끌어올려져 있던 커다란 닻이 하나.

바닷바람이 꽤나 쌀쌀했지만 바다에 낚시줄을 드리우고 있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보였다. 그네들도 추운지 제각기

방해받지 않고 띄엄띄엄 자리를 잡은 게 아니라 다닥다닥 붙어선 낚시대를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었는데, 그와중에

혼자 살짝 떨어져 있는 저 분이 눈에 띄었다. 어쩌다 보니 저 분이 낚시대를 드리워서는 저 어선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재미있어서 사진으로 담아봤다.

포구나 그런 곳은 보통 갈매기떼들이 하릴없이 노니며 주인없는 생선이 있지는 않나 호시탐탐 노리는 게 상례인데,

아무래도 석모도의 갈매기들은 전부 외포리와 석포리를 잇는 카페리호를 따라다니는 거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구너머포구로 들어오는 배, 포구에서 나가는 배들이 그 사이에도 쉼없이 뱃고동을 울리고 있었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이 곳에서 아예 바다로 삼켜지는 태양을 구경하는 것도 꽤나 괜찮겠다 싶어서 기억해두었다.

강화도에서 먹었던 것 중 맘에 들던 조합 하나는 강화도인삼막걸리랑 순무김치, 석모도에서도 순무가 나는지

장구너머포구를 뜨기 전 한 옆에 소담하게 무더기짓고 있던 자줏빛 순무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민머루해수욕장'.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민머루, 미음발음이 연이어 나는 이름이

기억하기도 쉽고 이쁜 거 같다. 석모도에 있는 유일무이한 해수욕장이라는데 이미 바지런한 이들은 텐트를 펼치고

바다를 바라보며 캔맥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요새 날씨에 바다에 들어가긴 좀 무리겠고, 바다를 바라보며 캠핑을

하기엔 맞춤한 장소일 거 같다.

바다만 바라봐도 추워 보이는 11월인데다가 바닷바람도 제법 세차다. 아무래도 여름철 바다와는 달리 다른

봄가을겨울의 바다란 건 다분히 관상용이라는 혐의가 짙다.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듣고 바다 냄새를 맡으며,

지치지도 않고 쉼없이 달려들다간 허물어지는 파도에 질릴 줄도 모르고 시선을 빼앗기는 것.


아니면 이렇게 바닷가 모래사장에 주차되어 있는 자전거를 타고 바퀴가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 위를 잠시 주행해

본다거나, 낚시대를 바닷가에 드리워보는 것도 괜찮겠다.


모터보트는 뭍에 잔뜩 끌어올려진 채 엔진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내년 여름까지 움직이지 않으려나. 여름이면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이 바글바글 줄서서 샤워장을 이용하고, 모터보트의 엔진도 쉴 줄 모르고 뜨겁게 달아오를

텐데, 민머루해수욕장의 여름철 풍경이 문득 환상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계절에 딱히 구애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산악오토바이, 네 바퀴의 ATV를 타고 해수욕장 근처를 돌아보거나

가볍게 드라이브를 즐기는 건 비만 오지 않으면 언제든 환영이다. 사진에 찍힌 건 그렇게 당장 드라이브를 나갈

상태는 아니고, 다만 카울 옆에 붙은 '페라리' 마크가 너무 선명해서.

천막이 걷힌 채 뼈대만 차갑게 남아있는 가을 혹은 겨울바다 위로 조금씩 해가 기울고 있었다. 가뜩이나 춥고 센치한

풍경에 저런 앙상하고 차가운 알루미늄 뼈대가 시꺼멓게 타버린 듯한 모습을 보니 이정도면 이맘때 바다를 찾아

즐길 수 있는 센치함은 만땅 충전되었지 싶어, 이제 슬슬 떠나도 되겠다 싶었다.

민머루해수욕장을 떠나려는데, 아까 장구너머포구에서부터 잘 보이지 않던 새떼가 보였다. 갈매기는 아니고,

쐐기 모양의 대형을 이루어 어딘가로 떠나는 철새들인 거 같았는데, 덕분에 이맘때 바다를 찾아 느끼고 싶은

스산함이라거나 센치함이라거나 그런 감정이 충만해진 채로 떠날 수 있엇다.





* 인천관광공사에서 컨텐츠 제작에 필요한 지원을 받습니다.

보문사에서 굳이 마애관음좌상 이야기를 따로 빼서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보문사라는 절 하나를 돌아보는 것만큼

마애관음좌상을 보러가는 길과 마애관음좌상 자체의 무게가 묵직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이렇게 보문사 극락보전을 돌아 마애관음좌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채 밟기도 전부터 부처님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다.

(이전 포스팅 :  석실 안에 모셔진 천오백년 전 부처님의 모습, 석모도 보문사에서.)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꽤 많이 남았다 싶은데 벌써부터 계단 양쪽에 버티고 선 석등에는 불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쌍쌍이 손을 잡고, 혹은 아이의 손까지 잡고 사이좋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지만 글쎄, 내가 본 바로는

계단 중간쯤부터는 가쁜 숨을 헉헉 내쉬며 대개 손을 놓고 제한몸 건사하기에도 힘겨워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약 10분 소요'된다는 이 계단은 경사가 꽤나 가파르기도 하고, 애초 절에서부터 마애관음좌상까지의 거리도

10분이 걸린다기에는 조금 무리다 싶은 1킬로미터 가량이라고 하니.

계단을 오르는데 눈에 띈 현수막 하나. 소원을 담는 곳이라나. 소원을 적어서는 유리병 속에 담아 100일을 채우고 나면

스님께서 축원을 올려주시고 태워서 날려보낸다는 건데, 딱히 불자는 아니지만 이런 걸 보면 왠지 한번 해보고 싶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소원이라고 하면, 음..아무래도 로또나 연금복권 당첨 같은 것 밖에 떠오르질 않는 걸 보면 딱히

부처님에게까지 들고 가서 부탁할 일은 아직 없는 거 같다.

계단을 오르면서 계속 보문사 쪽을 돌아보았다. 아직 기운이 팔팔하던 계단 초입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단풍진 숲속에

포옥 감싸여 있는 절의 전체적인 모습이 계단을 좀 오르면서 점점 각도를 달리해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거다.

이런 식으로 보는 각도와 방향을 달리 해서 보문사를 굽어 볼 수 있다는 건 마애관음좌상을 친견하러 가는 계단 위에서

얻는 예기치 않은 또다른 즐거움.


오르는 길이 어찌나 가파른지, 계단을 지그재그 모양으로 만들어 두었어도 어느 순간 아래를 내려보면 살짝 아찔하다

싶을 정도의 각도로 꺽어지고 있었다. 지그재그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길이 저 아래 어디쯤에선가 앙상한 나무사이로

삼켜져 버려서 이젠 더이상 보문사의 기와지붕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노랗고 따뜻해 뵈는 등불을 품고 있던 석등이 중간중간 있어서, 저기까지만 가서 쉬면 되겠다, 라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석등에서 석등을 마음으로 짚고 넘어가는데 점점 하늘이 어두워진다. 해가 워낙 짧고

금방 사그라져버리는 계절, 겨울이 오고 있는 거다. 마음이 급해지는데 앞에 왠 반짝거리는 유리병들이 보였다.


아까 계단 입구에서 봤던 그 소원을 들어준다는 유리병들이 여기다 모여있었다. 색색의 종이에 꾹꾹 눌러 씌인 사람들의

소원이 반짝거리는 말간 유리병 안에 담겨있었다.

그리고 용 대여섯마리가 서로의 몸을 비비 꼬며 또아리를 틀고 있는 그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 사이에도, 용의 사슴뿔 위에도

사람들은 겁도 없이 유리병을 걸어두었다. 저렇게 하면 용을 타고서 조금이라도 빨리 부처님께 가닿을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마애관음좌상 도착. 툭 튀어나온 눈썹바위 아래로 돌을 돋을새김한 부처님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알겠다. 여기 예전에 왔을 때는 문득 비가 나려서, 저 눈썹바위 아래에 바싹 붙어서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내려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때 고마웠어요 부처님, 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보문사는 600년경에 창건된 천년사찰이라 하지만 이 마애석불좌상은 아직 백년도 채 되지 않은 비교적 최근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높이가 9미터가 넘고 너비가 3미터가 넘는 이 커다란 부처상도 그러고 보면 내가 그날 그랬듯

이 눈썹바위 덕분에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거다.

툭 튀어나온 바위가 지붕처럼 부처님을 가호해주고 있는 셈, 그리고 그 부처님은 이곳에서 저 아래 보문사, 그 아래 석모도,

그리고 강화도 너머 멀리까지 굽어살피며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가호해 주고 있는 거랄까. 여기서

다시 내려다본 지그재그 계단은 생각보다 별로 안 길어 보이는 게 아쉽다. 실제로는 숨이 턱까지 차서야 올라왔는데.

신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은 언제나 참 연약해 보인다지만, 특히나 저렇게 단단한 바위에 모셔진 부처님 앞에 선

사람들의 모습은 더욱 조그마해 보인다. 그저 눈에 보이는 부분만이 아니라 마치 빙하처럼 저아래로 보이지 않는

커다란 낙가산 전체의 기운과 무게감이 부처님 조각에 실려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새 점점 날이 어두워지고

부처님 앞에 모셔진 촛불들이 더욱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 보문사 마애석불좌상(안내판 참조) :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 주지 이화응과 보문사 주지 배선주가 낙가산 중턱의 일명 눈썹바위에 조각한 것이다. 불상 뒤의 둥근

빛을 배경으로 네모진 얼굴에 보석으로 장식된 커다란 보관을 쓰고, 손에는 세속의 모든 번뇌와 마귀를 씻어주는 깨끗한 물을

담은 정병을 든 관음보살이 연꽃받침 위에 앉아있다. 얼굴에 비해 넓고 각이 진 양 어깨에는 승려들이 입는법의를 걸치고

있으며 가슴에는 커다란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보문사는 관음보살의 성지로서 중요시하던 곳이었다.


 


날씨가 꾸물꾸물하더니 딱히 기별도 없이 해가 넘어가버릴 생각인가 보았다. 해질 무렵 이곳에서 바라보면 서해바다로

곤두박질치는 붉은 해의 모습과 노을로 타오르는 하늘과 바다의 모습이 정말 장관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나는 올 때마다

날씨가 이렇게 흐린지 모르겠다. 이런 것도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이라면 인연이려나, 시시각각 어둠이 내려앉고 계단을

지키던 석등의 노랑 불빛이 둥실둥실 떠오르더니 보문사를 넘어 석모도의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향불이 쉼없이 살라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제각기의 소원을 빌고 부처에 의탁하며, 빨강노랑초록색 향에 불을 쟁여

부처님께 바치고 있었다. 거칠 것없이 바람이 휘몰아치는 곳이라, 바람이 한번 불어닥칠 때마다 바싹 빨아당기는

담배 끝처럼 향 끝에서 붉은 불꽃이 일렁이며 거침없이 타들어갔다. 향로에 무질서하게 꽂혀있는 색색의 향들이

만들어낸 모양이 삐죽삐죽 제멋대로의 고슴도치 같기도 하고.

이곳 보문사 마애관음좌상은 현재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세속의 차원에서 보자면

보문사와 더불어 인천이 품고 있는 관광 명소 중의 하나일 것이고, 부처님을 모시는 차원에서 보자면 이렇게 석등의

갓 위에까지 도톨도톨하게 돌멩이를 올려둘 만큼 절절하고 영험한 관음보살의 도량인 게다. 그리고 내게는, 아직

연이 닿지 않아 보지 못한 낙조 풍경이 숙제처럼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숙제긴 숙제지만 유쾌하게 받아들고

기꺼이 하고 싶은 그런 류의 숙제 말이다.




* 인천관광공사에서 컨텐츠 제작에 필요한 지원을 받습니다.

강화도 외포리 외포선착장에서 카페리를 타고 십분. 그렇게 도착하는 석모도는 생각보다 꽤나 큰 섬인데다가 나름

'산'이라 이름붙은 야트막한 야산들도 불쑥불쑥 솟아 있는 거다. 그 중 하나, 200여미터의 높이로 솟아 있는 봉긋한

낙가산에 기댄 보문사란 절을 찾았다.

석모도는 서울이랑 가까우면서도 배를 타고 나간다는 느낌 덕인지 예전부터 몇 차례 놀러왔던 곳이다. 대학생 때는

훌쩍 섭을 째고는 혼자 놀러 와보기도 했었고, 언젠가의 연말 굉장히 춥던 날에 오기도 했었고. 보문사는 그렇게

벌써 두번째, 그때나 지금이나 하늘로 곧추솟은 이 소나무들이 보문사의 첫인상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간당간당 넘어갈라는 시기, 축축해진 낙엽이 길을 온통 덮었고, 그 사이로 탑처럼 솟아있는 건

사람들이 보문사에 내려놓고 가는 소원 한토막들. 비가 올 거라던 일기예보는 틀렸지만 공기는 꽤나 촉촉했다.

보문사는 양양의 낙산사와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해상 관음 기도도량이라고 한다. 무려 신라시대로

거슬러올라가는 천오백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매번 올 때마다

무언가를 간절히 간구하는 불자들의 행렬이 결코 적지 않았었던 거 같다. 당장 이번에 찾았을 때만 해도 수능시험이

끝나고 좋은 대학에 가게 해달라는 어머니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보문사를 특히 유명하게 만든 건 저 위로 보이는 마애관음좌상과 앞쪽의 석실 덕분이다. 마애관음좌상을 보려면

근 500여개의 계단을 올라 저 위로 올라야 하니 일단은 차치하고, 석실부터 꼼꼼히 살펴보기로 했다.

보문사 석실,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석굴사원의 하나라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정말 석굴암 말고 또 석굴을 파고 조성된

사원을 본 적이 없는 거 같다. 이 안에는 전부 스물두분의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는데 제법 넓찍한 석실 내부에서 스님이

두드리는 목탁소리가 둥그렇고 무지근한 파장을 그리며 울려퍼졌다. 천장에는 온통 연등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는데

왠지 생일파티때 헬륨가스를 잔뜩 불어넣은 풍선들을 천장에 빼곡하도록 불어올린 그런 분위기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 보문사 석실(안내판 참조) :

신라 선덕여왕 4년(635)에 회정대사가 처음 건립하고 조선 순조 12년(1812)에 다시 고쳐지은 석굴사원이다.

천연동굴을 이용하여 입구에 3개의 무지개 모양을 한 홍예문을 만들고, 동굴 안에 불상들을 모셔 놓은 감실을

설치하여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미륵보살과 나한상을 모셨다. 이들 석불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어떤 어부가

고기잡이 그물에 걸린 돌덩이를 꿈에서 본대로 모셨더니 부처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보문사 석실 앞에 세워져있던 잘 생긴 향나무. 나무둥치가 바로 선 게 아니라 뭔가 구불텅하게 두어번 휜 것이

마치 용틀임하는 모양을 닮은 거 같기도 하다. 향나무의 생김이 범상치 않아 그런지 향나무를 둘러안고 있는

대리석들 위에도 꼬마스님들이나 부처님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으셨다.


보문사의 본당인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해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삼성각이,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마애관음좌상으로 가는

길이 있다. 몰랐는데 한국에 관음성지로 지정되었다는 서른세곳의 성지 중에서 첫번째로 손꼽힌 곳이 바로 이곳,

보문사라는 표지가 붙어있었다. 그냥 서울에서 가까운 바람쐬기 좋은 곳,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석실도 살펴보고

보문사 구석구석 살펴보다보니 생각이 바뀐다. 등잔밑이 어둡다, 는 속담이 자꾸 생각나고 있었다.

그렇게 이전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보문사의 성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던 중 쐐기를 박은 건 바로 이 와불상.

커다란 와불이 법당 하나의 끝에서 끝까지 머리에서 발까지 쭉 몸을 뉘이시곤 누워 계셨다. 조성된지 얼마 되지 않은건지

또렷한 단청무늬와 사려깊은 조명들이 부처님의 얼굴에 떨어졌고, 앞에는 공양된 쌀과 향과 초들이 놓여있었다.

해가 스멀스멀 기우는가 싶더니, 어느순간 확 어두워져 버렸다. 마애관음좌상을 보러 올라갔다가 황급히 내려와보니

그새 보문사의 풍경이 확 바뀌어 있었다. 기와들을 가지런히 쌓아올려 만들어둔 야트막한 담장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와

생선비늘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퍼런 물이 짙어져가다가 까무룩 시커멓게 변해버리는 하늘 아래 기와지붕은 나름의

음영을 드러내며 운치를 더했다.

저녁 예불 시간이 되었는지 스님 두분이 큰북을 두들기러 나오셨다. 삽시간에 어두워져버린 풍경들을 뒤로 한채

촛농처럼 아래로만 흘러내리는 불빛 몇 개가 스님의 민머리 위에서 잠시 반짝거리다가 흘러내렸다.

이제 슬슬 가볼 참이었다. 석모도를 뜨는 배는 매시 정시와 30분, 그렇게 30분 간격으로 있다 했으니 지금 움직이면

딱 맞춰서 돌아갈 수 있을 듯 했다. 보문사에 오를 때는 경사가 워낙 급한 오르막이라 힘들었는데, 내려오면서는

차라리 오르막길이 낫다 싶었다. 자꾸 발걸음에 가속이 붙는 게 누가 뒤에서 밀치는 거 같기도 하고, 하여 그저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데에만 집중했다. 한걸음한걸음, 보문사의 관음보살을 뵙고 돌아오는 길은 그렇게 한걸음씩

새기면서 돌아올 길이었다.

석모도 들어올 때도 엄청나게 차들이 많아서 자못 당황했었는데, 사방이 이렇게 꺼뭇꺼뭇해진 시간이 되니 그렇게

들어온 차들이 전부 나가겠다고 꼬리에 꼬리를 문 게 그 붉고 노란 불빛들도 볼 만하다. 평일엔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배라고 했지만, 승객들이 늘어나는 공휴일이나 무슨 날에는 그냥 몇 대의 배가 쉼없이 움직이는 거 같다. 들어올 때도

생각보다 금방 차들의 행렬이 줄어들더니 나갈 때도 생각보다 금방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참 가까운 곳,

가까운 곳에 이렇게 영험하고 오랜 사찰이 있는 줄도 모르고 먼 곳만 보았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 인천관광공사에서 컨텐츠 제작에 필요한 지원을 받습니다.



고인돌의 나라, 강화도(고인돌의 나라, 강화를 재발견하다.)에서 올해로 벌써 14회째를 맞이한

축제가 있다. 다른 지자체들의 축제가 부침을 거듭할 때에도 흔들림없이 계속되어온 이 축제의

이름은 "강화고인돌문화축제", 아무래도 강화도를 대표할 뿐 아니라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에 이른 고인돌을 앞장세운 게 톡톡히 제 역할을 했지 싶다.


이틀동안 축제가 벌어지는 곳은 생각보다 너른 섬 강화도의 중앙쯤 위치한 고인돌광장,

강화도 지석묘를 둘러싸고 있는 초록잔디밭 광장 위로 특이한 형태의 연들이 줄지어

꼬리를 퍼덕이고 있었다. 올해의 경우 6월 11일(토)부터 12일(일)까지 이틀 열렸는데

광장을 꽉 채워 고인돌 행사장, 체험장, 사진전시장, 전통체험관, 먹거리장터들이 늘어섰다.



ㅇ 고인돌 축조 재현하기

무엇보다 눈을 사로잡았던 건 역시 고인돌을 쌓아올리는 모습을 직접 재현하는 모습이었다.

부족을 통솔하던 부족장이 죽자 하늘이 내려앉은 듯 탄식하며 비통해하는 원시인들의 모습,

그리고 커다란 덮개돌을 덩굴같은 줄로 단단히 묶어서는 흙으로 비탈을 만든 바닥돌 위로

힘을 합쳐 끌어올리는 모습, 재현 중에서는 열명 남짓한 원시인들이 힘을 합쳤지만 실제론

수백명에 달하는 인력이 동원되었을 거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건 실제보다는 상당히 축약된 무게와 규모로 재현된 미니어처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재현행사를 준비하는 스탭들이 저 커다란 덮개돌을 가뿐하게 들어올리는

모습을 얼핏 보았던 거 같기도 하다. 스티로폼으로 만들었으려나, 그렇지만 그걸 저렇게

리얼한 표정과 액션으로 소화해내며 재현 행사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원시인 여러분들의 연기력에 박수를 보낼만 했다. 

 

구경하던 사람들까지 모두 불러내어 으쌰으쌰, 덮개돌을 바닥돌 위에 확실히 얹어놓고나서는

두 손을 번쩍 치켜올리며 고인돌이 완성된 것을 축하하는 원시인들. 바퀴 역할을 하며 바닥에서

뒹굴었던 나무통과 비탈을 만들어 주었던 흙만 치워내면 이곳 강화도에 이미 존재하는 140여기의

고인돌에 하나가 더해지는 셈이다.

고인돌축제의 개막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인돌 축조과정을 재현하는 원시인들의 기합소리와

함께, 칠선녀들의 공연과 함께. 고인돌광장과 바로 붙어있는 강화역사박물관에 마네킹으로 전시된

선녀들의 복장이나 장신구는 완전히 똑같았던 그녀들은, 그렇지만 훨씬 뛰어난 미모와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칠선녀는 과거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단군이 하늘에 제를 지낼때 일곱선녀가 옆에서 제를

도왔다던 고사로부터 등장하는데, 전국체전의 성화를 매년 새롭게 뽑히는 칠선녀들이 참성단에서

채화하고 있기도 하다고. 그리고 그녀들은 1956년 이래 강화여고에서 뽑혀왔다고 하니, '그녀들'이라

칭하기보다는 그 아이들, 이라는 표현이 낫겠다.


ㅇ 원시인의 일상 체험하기

이리저리 고인돌광장을 떠돌며 행사도 구경하고 체험관들도 구경하던 와중에 만난 꼬맹이들.

고인돌을 둘러싼 울타리에 기대앉아선 조금 쉬어가려는 듯 옥수수로 하모니카를 불고 있더니

카메라를 보자 불쑥 장난끼가 발동한 듯 옥수수랑 돌도끼를 양손에 쥐고는 흔들어준다.

원시인들이 다들 저런 레오파드 무늬가 뚜렷한 가죽옷을 입고 다녔을지는 상당히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벌거벗고 다니거나 잎사귀 한두장으로 코스프레를 하기엔

너무 전위적인 느낌이니까 원시인들은 모두들 표범 한두마리쯤 쉽사리 때려잡았을 거라

호의적으로 생각하기로 하자. 호피무늬 원시인 복장을 머릿수건까지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돌도끼나 단검을 꼬나쥐고 나니까 다들 신났다. 거울 앞에서 요리보고 조리보고.

그렇다고 다들 폭력적으로 변한 건 아니었다. 돌판과 돌확을 이용해서 낟알의 껍질을 까고 있는

진지한 표정의 아이의 손끝이 신중했다. 돌확은 원시인들이 곡식을 떨어내고 껍질을 제거하던

작업을 돕기 위한 도구인데, 저 정도로 원시적이어서야 손으로 하나씩 까는 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에 불과하지 않으려나 싶다. 하긴 워낙 발전속도가 빨랐으니, 수천년 전의 인류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터에 직접 '인간 탈곡기'가 되어 체험하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몇몇 시대를 구분짓고 공간을 구분지을 지표가 되어주는 토기들을 갖고 아이들에게

열심히 그 특징과 정보를 알려주고 계신 아저씨. 이 토기에 그려진 무늬는 빗살무늬라고 하는데

주로 곡식의 낟알등을 담아두었고 바닥이 뾰족한 건 땅에 묻어두었으리라 추측하는 근거가

된다 운운, 이야기를 듣는 아이의 자세가 제법 의젓해서 보기만해도 흐뭇했다.

사냥감을 사냥해보는 체험, 이랄까. 새총들이 줄줄이 늘어선 가운데 꼬맹이들이 있는 힘껏

노랑 고무줄을 당겨서는 표적을 노리고 있었다. 공룡이 그려진 표적지를 보며 다시금 궁금해진 건,

인류의 조상인 원시인들이 공룡과 겹쳤던 적이 정말 없었을까. 일반적으로는 인류와 공룡은

서로 시기가 겹치지 않는다고 하지만, '고인돌 빠삐코'니 뭐니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 원시인들은

늘 공룡들과 함께 노닌다.


ㅇ 강화도 문화 체험하기

강화도의 특산품, 하면 화문석. 어쩔 수 없는 암기식 교육의 부산물이다. 이름만 익히 듣고 외웠지

그게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여태껏 블랙박스 안에 숨겨져 있었던 게 사실.

옆에서 하나씩 가르쳐주는 선생님 옆에서 입을 꼭 다문 채 화문석 만들기에 몰입해 있는 아이도

아이지만, 그 손놀림을 유심히 바라보며 대체 어떻게 저렇게 이어지고 묶이는 걸까 호기심에

가득찬 구경꾼들의 표정도 못지 않았다. 시간만 있다면 털썩 천막에 앉아서는 선생님한테

배워가며 직접 한땀한땀 정성으로 매만진 화문석 한장을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강화도에 많이 나는 약쑥으로 비누도 만들어보고, 상큼한 형광색 꼬리를 달고 있는 화살을

던져넣는 투호도 하고, 그렇게 몇걸음 채 걷지 못하고 무언가 직접 손목 걷어부치고 만들거나

경험해보거나 그렇게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함께 즐길 거리들이 제법 솔찮았다. 아이가 탄

유모차를 끌고, 혹은 걷는 아이 손을 꼭 붙들고 온 부모들에겐 꽤나 수월한 나들이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천연염색을 체험할 수 있는 부스를 포함해서, 고인돌마을 족장 체험, 도자기 만들기 체험,

연날리기 체험, 무형문화재 제14호 단청그리기 체험, 다도체험 등등 고인돌을 만들던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살던 인류가 축적해온 유무형의 독특한 문화유산들을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 넓게 열려있었다. 이정도면 굳이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라는 단어를 동원해

교육과 놀이가 혼합되어있음을 강조한 주최 측에 수고했노라, 박수를 쳐줄 만 하다.


ㅇ다양하게 즐기기

강화고인돌문화축제를 즐기러 와서 찍은 사진 중에서 맘에 드는 사진은 즉석에서 인화해서

콘테스트에 응모할 수 있다나, 이미 응모된 사진들을 하나씩 살펴보니 다들 욕심이 그득하다.

일등해서 상품가져갈려는 의욕이 넘치는지 사진들이 다들 범상치 않았달까.

원시인 복장을 챙기고 돌도끼를 들지는 않더라도, 뺨이든 손등이든 뭔가 고인돌축제에 어울릴

페인팅을 하나 하고 나면 뭔가 축제를 즐길 준비가 된 느낌인 거다. 특히나 아이들이 엄마손

잡고서 길게 늘어선 그 줄을 슬쩍 지나치고 나니 또 다른 긴 줄이 나타난다. 삐에로 아저씨가

풍선으로 강아지를 만들어주는 건, 정말 어디서나 아이들을 모으는 최고의 방법인 듯.

그 와중에 바쁘게 돌아가는 먹거리장터와 행사장 주변 스탭들의 발놀림. 축제의 분위기를

돋우는 건 심장 박동을 따라 노니는 풍물의 흥겨운 장단과 함께, 빤짝거리는 새틴 재질의

'가죽옷'을 입은 '원시인'이 어색한 옷차림에 불편해하면서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행사가

잘 되도록 움직이고 있는 모습인 거다.
 

공연도 이틀동안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짜여있었다. CBS에서 녹음방송을 하는가 하면, 마야가

초청가수로 와서 노래를 부르고, 평양예술단이니 인천시무형문화재협회 공연이니, 심지어는

웃찾사 공연팀이 와서 개그공연까지 하도록 스케줄이 짜여있었다. 나름 강화군 차원에서 심혈을

쏟아붓는 행사라는 게 빈말은 아닌 거 같다.


굉장히 흥미로웠지만 조금 아쉬웠던 건 '에어바운스' 축하비행이었다. 등뒤에 커다란 프로펠러를

메고서는 그 힘으로 날아올라 낙하산에 의지하여 두둥실 떠다니는 것, 처음에 굉장히 커다란

선풍기 소리가 날 때만 해도 설마 저게 날겠어 싶었는데 정말 훌쩍 떠오르더라는. 아쉬웠던 건

바람이 너무 쎄서 비행에 성공하기까지 어려움이 좀 많았고, 그나마 떠올랐던 것도 생각보다

일찍 내려온 거 같았다. 그치만 정말, 저렇게도 날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줬달까.

그 옆의 역사박물관에서는 축제 기간에 맞추어 인천무형문화재 기능장들의 특별전을 열고

있었다. 대금, 단소 같은 전통악기나 화문석, 도자기나 전통의상 등이 강화역사박물관 1층의

로비에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었으니, 잠깐 더위도 식힐 겸 에어콘 바람도 쐴 겸 들어가서

휘 둘러보기에 딱 좋았던 거 같다.  

 

2011년 강화 고인돌문화축제는 여러모로 좋은 계기가 되었던 거 같다. 강화도에 있다고만 들었던,

실물을 제대로 보거나 체험해본 적은 없는 고인돌이니 화문석이니 그런 것들에 대해서 작정하고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고, 축제 자체도 '고인돌'이라는 뚜렷한 아이템을 가지고 특색있게 잘

꾸며놓아 중구난방식의 여느 지방 축제와는 격을 달리 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강화 고인돌광장 인근으로 산재해 있는 고인돌군을 돌아보기에도 좋은 위치라는 점,

그리고 강화도도 제주도나 다른 곳들처럼 트레킹 코스를 사방으로 개발하고 있으니만치 더욱

즐길 것이 많아졌다는 점도 축제에 맞추어 강화도를 향해 발걸음을 쉽게 떼도록 이끈다.








ㅇ 고인돌, 교과서 밖에서 만나다.(Intro.)

강화도, 대학에 들어올 때까지 교과서에서 배웠던 강화도와 실제로 이래저래 놀러다녔던 강화도의

이미지 사이에는 꽤나 큰 갭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국사교과서 상권이었던가, 표지모델로 봤었던

이런 지석묘, 고인돌의 이미지가 강화도에 대한 대표적 이미지 중 하나였다면, 막상 강화도를

걷고 달리고 드라이브하면서 마주쳤던 풍경 중에 고인돌은 딱히 맞닥뜨렸던 적이 없는 거 같다.


의외로 이렇게 눈에 탁 뜨이는 공간에 그림처럼 놓여있는 것들이 많지 않은데다가 평소에

별반 관심이 없으면 그만큼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아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저 나만의

특수한 사례에 속할지도 모르지만. 여하간 고인돌을 실제로 본 적도 굉장히 까마득한 거 같고,

한두기 띄엄띄엄 보는 게 아니라 좀 제대로 작정하고 본적도 없는 거 같고.

그러고 보면 고인돌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탁자모양 북방식, 바둑판모양 남방식, 그리고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매장양식이란 거 정도다. 이래서야 원, 저렇게 얼추 탁자모양 닮은

벤치가 덩그마니 놓여있는 것만 보고도 '탁자모양 북방식 고인돌'이라고 생각할 지경이다.


이미 14회를 맞이했다는 강화도고인돌문화축제, 이번 기회에 단단히 작정하고 고인돌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강화도 여기저기에 산재해있다는 고인돌, 알아보고 찾아보고, 그러면

더 강화도를, 고인돌의 이미지들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알고 보면 고인돌은 영어로 Dolmen,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는 거석문화의

한 형태라고 한다. 큰 바위로 석상이나 무덤 등을 만들어 부족의 권위나 영광을 드러내는

문화, 어쩌면 그런 문화는 인류가 지배-피지배의 권력관계로 정립되고 나서 지배계층이

품게 되는 필연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욕망을 그대로 반영하는 건 아닐까. 이집트의 피라밋,

요르단의 페트라, 모아이의 석상들, 그 커다랗고 무쓸모하지만 위풍당당한 석조물들. 

그렇지만 한국의 고인돌이 2000년 UNESCO의 세계문화유산 인증을 받은 건 나름의 고유함과 특성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의 강화, 고창이나 화순처럼 고인돌이 밀집된 곳이

흔치 않다고 한다. 전세계에 퍼진 약 6만여기의 고인돌 중 약 2/3(4만여기)가 우리나라에 있는데,

강화도의 경우는 북한과 남한 고인돌의 맥을 모두 반영하고 있어 그 형태가 다채롭고, 고창,화순은

보존상태가 좋고 한곳에 밀집된 특징이 있어 선정되었다.


특히 강화도의 경우, 북방의 탁자식과 남방의 바둑판식이 섞여 있고, 고려산을 중심으로

고지대에 분포하고 있어 연구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강화도 고인돌에 대한 연구는 이미

1916년 조선총독부가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 학술적 가치를 짐작할 만 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표적인 고인돌이 바로 첫사진, 그리고 강화고인돌문화축제가 벌어지는

곳인 부근리 고인돌이고, 그 외에 강화도에 산재한 150여기 중 70여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니 저렇게 다양한 고인돌 탐방로를 짜서 둘러볼 수 있는 거다.


ㅇ 고인돌 만드는 법

무릇 유행이란 돌고 도는 것. 선사시대 부족장 Style의 무덤이 언젠가 2000년대 이후 부활해서

새롭게 트렌드가 될지 모르는 거다. 당장 던져진 돌무더기가 산을 이루도록 맞아야 할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여하간 어떤 경로로던 고인돌(Dolmen) 스타일의 매장 풍습이 다시 유행할

떄를 대비하여 간단히 고인돌 만드는 과정을 보아두는 것도 좋겠다.

1. 채석하기 : 고인돌을 만들기에 좋은 편마암을 큰 바위조각으로 떼어낸다. 특히 강화도는

편마암이 풍부한 덕에 고인돌이 이렇게 많이 축조되었다고 이야기된다고 한다.

2. 바닥돌 세우기 : 땅을 파서 통나무를 지렛대처럼 이용해서 돌을 세운다. 꽤나 많은 인력과

당시로선 적잖은 물자가 동원되었을 테니, 아무래도 고인돌은 지배집단이 강력해진 징표.

3. 덮개돌 운반하기 : 흙으로 바닥돌 주위를 덮어 완만한 경사면을 만든 후, 통나무를 바퀴처럼

활용해서 덮개돌을 바닥돌 위로 끌어올린다. 커다란 고인돌의 경우 덮개돌을 옮기기 위해

천명에 가까운 인력이 소요되었을 거라는 분석도 있다고 하니, 보통일은 아니었던 거다.


4. 고인돌 축조완료 : 완만한 경사면으로 쓰기 위해 덮었던 흙을 전부 파내고, 바닥돌 사이의

양쪽 열린 공간을 막음돌로 막는다. 그러고 나면 이제 '선사시대 부족장 Style' 고인돌 완성.

그 앞에서 제사를 지내던 차례를 지내던, 아니면 굿판을 벌이던 남는 건 선사시대 매장양식을

21세기에 되살린 본인의 취향 문제랄까.


ㅇ 고인돌의 나라, 강화도를 돌아보다.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라고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수많은 고인돌을 갖고 있단다.

특히나 강화도, 고인돌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버린 이 '강화도 지석묘'의 존재만으로도

강화도는 '고인돌의 나라' 수도 서울깜이다. 이 고인돌은 얼마나 공들여 축조되었는지 바닥이

무려 수십층이나 다져진 자취가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저토록 당당한 듯.

그렇지만 사실 대부분의 고인돌들은 저렇게 반듯하고 딱 떨어지는 깔끔한 이미지로 유지되는

건 아니다. 근처에 있는 '신삼리고인돌', 논밭 한가운데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채 잔뜩 녹슨

철울타리로 둘러쳐진 커다란 너럭바위가 하나 있다 싶었더니 고인돌이랜다. 아놔. 잡초라도

좀 거둬내주고 울타리라도 좀 페인트칠이라도 다시 하던가, 나무울타리로 바꿈 좋겠고만.

그렇지만 요모조모 둘러보며 이 수천년 묵은 커다란 바위의 신비함을 느끼기에는 더없는

효과가 있는 거 같기도 하다. 좀처럼 연대를 식별할 수 없는 바위지만, 저렇게 판판하게

다듬어진 게 수천년 전의 인류 솜씨라는 걸 헤아리려면, 저렇게 잡초라도 무성하고

녹이라도 슬어야 좀 실감이 나는 거다. 바닥돌이 좀만 더 잘 보이면 좋겠지만.


지나던 주민분들, 폭삭 늙으신 할머니 농민분들이 사진찍는 걸 보더니 슬쩍 알려주시던

이야기 한 토막. 논을 넓히겠다며 주인이 저 바위를 움직이겠다고 으쌰으쌰한 적이 있댄다.

그게 언젠지, 삽으로 퍼내려 한건지 굴삭기를 동원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날밤

그의 꿈에 머리가 새하얀 노인이 나타나서 크게 꾸짖었다나. 우가우가, 이러셨을려나.

 

그리고 좀더 차로 달리다가 문득 발견한 강화 부근리의 '점골 지석묘'. 제법 잔디도 깔리고

말끔하게 정돈된 상태로 서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70여기의 강화도

고인돌 중 하나라고 한다. 앞선 '신삼리 고인돌'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은 곳이었어서

그렇게 방치되다시피 했던 걸까.


고려산 북쪽 능선을 따르다 끝자락에 축조된 점골 지셕묘는 상석과 4개의 바닥돌이 있는

전형적인 탁자형 고인돌로, 원래 상석과 바닥돌이 기울어져 있던 것을 2009년께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준비하며 발굴조사하고 나선 해체하고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문화재를

수선하거나 관리할 때 자주 쓰이는 '해체', '복원'이란 단어가 웬지 고인돌 앞에선 웃기다.

그냥 돌들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제대로 올려놓는, 굉장히 심플한 작업이지 않을까 싶은 거다.

물론 실제론, 제대로 이가 맞았는지라거나 어디를 괴어야 할지 따위 의외로 복잡할 듯.

'강화 삼거리 고인돌군'
엔 그래도 제법 고인돌들이 우르르 몰려있다길래 놓칠 수 없다 싶어

조금 길을 헤매고 뱅뱅 돌면서도 굳이 찾아갔다. 표지판들이 꽤나 오래전 구비된 듯 많이들

헐고 낡은데다가, 그렇게 많지 않아 가는 길 내내 이 길이 맞는지 조바심을 내야했다. 게다가

저렇게 철컥 자물쇠가 걸린 채 수십년은 녹슬고 있는 듯한 장애물까지.

옆으로 돌아 계속 앞으로 걸으니 점점 산길이 깊어지고 경사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산 꼭대기를 오르는 길인가 싶어, 어느 순간부터 끊긴 인적을 찾아 되돌아가야 하나 걱정이

스물스물 일기 시작할 무렵. 문득 저런 조그마한 표지판이 땅에 박힌 걸 발견했다.

그 표지판 옆에는 저런 제법 커다랗고 판판한 바위가 땅에 박혀있었다. 저게 설마, 고인돌인가.

그저 바위라고 생각하기에는 은근히 인공의 손길이 가해진 느낌으로 판판한데다가,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표지판이 앞에 이름표처럼 붙어있을 리가 없으니깐.

역시 그런 거였다. 계속 오르는 길 양편으로 제법 크거나 많이 크거나 조금 큰 바위들이 누워

있었고, 그게 좀 눈에 띄게 편편하다 싶은 것들엔 저런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이곳 강화도

삼거리 고인돌군에 크고 작은 고인돌들이 십여기나 모여 있다더니, 이런 것들이 이제 그

예고편이나 전조처럼 가는 길에 늘어서 있는 건가보다.

오르막길이 끝나고, 제법 평평해진 중턱에 올랐더니 표지판이 나타났다. 수천년 전에도 여긴

지금처럼 평평한 지형으로 양지바르게도 햇빛을 담뿍 받는 그런 곳이었을까, 수기의 고인돌이

주르르 늘어서 있다니 뭐랄까, 그때의 선사시대인들과 약간의 동질감이 느껴진다. 저들도, 지금

내가 쬐는 이런 햇살을 쬐었겠구나, 오르막길 걷다가 이 평지에 탁 올라서니 기분좋았겠구나.

'강화지역에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고인돌이 산재해 있으며, 특히 이들 중에

10-20여기에 달하는 군집을 이루는 고인돌군이 5개가 있다. 이 중 하나인 삼거리고인돌군은

고려산 북쪽 능선에 위치하며, 모두 10여기의 북방식 고인돌이 3개의 소군집을 이루고 있다.

삼거리 고인돌 중에는 덮개돌에 '성혈'이라고 하는 작은 구멍이 패여있기도 하는데 이를

별자리와 연관짓기도 한다. 2000년 12월 2일 고창, 화순의 고인돌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덮개돌이 미끄러져 내려간 걸 제외하면 형태가 제법 온전히 남은데다가

덮개돌이나 바닥돌이 고른 두께로 납작하게 다듬어진 게 꽤나 공력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가히 삼거리고인돌군의 대표선수라고 해도 될 거 같은데, 무너져 내리지 않았으면 최근에

만들어진 석조 탁자라고 해도 믿었을 거 같다. 차라리 무너지며 뒤틀려서 아마도 부족장의

유해가 뉘여졌을 그 내부 공간이 드러나고 나니까 고인돌스러운 거 같다.
 


누군가가 옆에 굴러다니는 납작한 조그만 돌들로 고인돌을 만들어놓고 떠났다. 뒤로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수천년 전의 커다란 진품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자잘한 고인돌 모형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대부분 덮개돌이 미끄러져 내린 채 낙엽이 두껍게 덮이고, 잡초가

자라고 자잘한 돌들이 틈새를 메우고 있었다.


십여년 전에 조성된 무덤은 무섭지만, 수천년 전에 조성된 이곳 고인돌 무덤은 전혀 무섭지 않다.

그들의 팔다리가 놓였을 공간은 이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머리가 놓였을 곳에는 특히나

불쑥 뾰족뾰족한 잡초가 자라났다. 그네들의 양분을 빨아먹고 자랐을 거다, 라고 간단하게

치부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차이가 그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흙으로 돌아갔다가

지렁이에 먹혔다가, 물에 섞여 하늘에 올랐다가 다시 땅위로 흘러내리고 바다로 번져서,

온세상에 흩어져 있을 거다. 
 

그래서 이렇게 싱싱하고 원기왕성한 덩쿨이 되어 나무를 기어 오르기도 하고, 이미 죽어버린

나무등걸들이 때마침 바닥돌처럼 11자로 늘어선 가운데에서 부울쑥, 새싹을 틔우기도 하는건

아닐까. 수천년 전의 인류가 지금의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대체 얼마나 길고 오랜 시간이

그 사이에 놓여있는지 가늠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네들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공간인 고인돌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그 망연한 수천년의 시간이 바싹 땡겨지고 조여지는 느낌이다.
 

비록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는 수천년동안 깨지지도 녹슬지도 변색되지도 않는 돌처럼

단단하고 완고한 그들의 거석문화가 아니라, 이렇듯 금세 녹슬고 낡아지는 슬레이트 같은 세상은

아닌가 더러 걱정스러워지긴 하지만 그래도. 수천년 전 고인돌을 만들어 지금까지 이렇게 전하는

그들의 본능적인 지혜랄까 원초적인 에너지를 우리도 갖고 있으려니 믿고 싶어지는 거다.


아까 신삼리 고인돌이 덩그마니 놓여있던 논밭을 지나 강화도를 빠져나오는 길.

수천년전 그때처럼 태양이 새빨갛게 떨어져내리고 있었고, '고인돌의 나라' 강화도를

빠져나오면서 내 안 어디에선가 틀림없이 각인되어있을 수천년전 인류의 흔적이 새삼

도드라져 보였다.







강화도에도 그럴듯한 걷기 좋은 길이 있다길래 정보를 검색하다가, 그런 길이 무려 8개 코스나

생겼다는 사실에 깜짝 놀랬다. 이름하야 강화나들길. 그 중에서 제1코스, 심도역사문화길이란

이름이 붙은 길을 걸었다. 정비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나들길의 경로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갓 내걸린 신품의 느낌이 가득하다. 여기서부터, 총거리 18킬로미터, 약 6시간이 소요되는 코스.

<강화나들길 제1코스>

강화버스터미널 - 동문 - 성공회강화성당 - 용흥궁 - 고려궁지 - 북관제묘 - 강화향교 - 은수물

- 북물 - 북장대 - 오읍약수 - 연미정 - 옥개방죽 - 갑곶성지 - 갑곶돈대



 

 

코스야 그렇게 짜였다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모범답안'일 뿐 내키는 대로 형편닿는 대로

돌아보기로 했다. 버스터미널에서부터 조금 뻗어있는 나름의 도회지를 지나고 나니 이내

시간감각이 혼란스러워지는 풍경이 나타났다. 슬레이트지붕의 단층건물들이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는 골목길, 적당히 허름하면서도 정겨운, 그런 편안한 분위기다.

그런 골목을 지나다가 문득 발견한 동문, 몽고가 침입했을 때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옮겨와서

항전하며 쌓은 성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문이 있다는 건 양쪽으로 길고 높은 성벽이 이어졌을

거란 이야긴데, 아쉽게도 그 자취는 거의 사그라져 버린 듯 하다. 그나저나 저렇게 야트막한

가옥들과 눈높이를 맞춘 성문을 골목 끝에 갖고 있는 동네에서 살면 꽤나 운치있을 거 같다.

 

안내표지는 꽤나 친절하게 사방에서 찾을 수 있었다. 가장 많이 띄었던 표지는 저렇게

파랑색 바탕의 분홍색 화살표를 페인트로 그려놓은 거였는데, 뭔가 갈랫길에 당도하거나

길이 헷갈릴 즈음 길바닥이나 벽면에서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저런 좁은 골목 뒷길도

지나고 논두렁길도 지나고. 바람에 나풀거리는 앉은뱅이 허수아비도 만났다.

동문을 지나고 만나게 되는 600년 묵었다는 회나무, 그늘 아래서 자동차들도 쉬어가는

그런 거대한 나무를 보면 왠지 옷깃을 여미게 된달까. 그 생명력과 연륜 앞에서, 그리고

단단히 수백년동안 뿌리박은 그 위엄과 경이로움에 조금 압도되는 거 같다.

꽤나 한적한 나들길을 따라 걷는 건 정말 기분좋은 일이었다. 아직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

길이 채 제대로 나지 않은 곳들을 따라 걷는 즐거움도 있었고, 아직 상업화되지 않고 정비되지

않아 그냥 날것의 일상이 바로 옆에서 그대로 느껴지는 풍경도 생생했다.


그런 길을 좀 걷다가 마주친 건물, 110년이 넘었다는 한옥 양식의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햇볕이

슬슬 따갑게 내려쬐이기 시작한지라 땀 좀 식힐 겸, 한옥식 성당이라는 이곳을 좀 구석구석

돌아보기로 했다. '대영국 알마 수녀 기념비'가 서 있는 것부터 시선을 바싹 잡아당겼다.

'천주성전'이라는 편액을 걸어둔 건물이 바로 성당 본당이다. 처마의 생김이나 색감은

여느 한옥이랑 비슷하지만 기둥 사이사이로 활짝 열릴 유리문이 있다거나, 내부에 저리

길게 늘어뜨린 전등이라거나 성당의 기능에 맞게 개조된 내부 구조가 신기하다. 그리고

신부님이 머무시는 듯한 별당 건물 역시 지붕에 십자가 표지라거나 문짝에 그려진 태극

십자가 문양이 인상적이었다.


어느새 고려궁지, 오후 2시쯤 한참 뜨거운 때여서 다 허물어진 잔해 속을 거닐며 비감에 젖는

것보다는 그늘에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를 빨며 땀도 식히고 바람쐬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몽고 침입 때 고려 왕조의 왕궁으로 쓰였던 고려궁지는 이후 버려졌다가 조선 인조 때 다시

쓰였다가 이내 다시 잊혀졌던 곳이란다.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흔적이 더 큰 그런 곳이다.


코스에 따르자면 고려궁지에서 북관제묘, 강화향교, 은수물을 거쳐 북문으로 가게 되어 있지만

그냥 바로 북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기로 했다. 사실 스스로의 의지였다기보다는 그냥 내키는 대로

앞서나가는 발걸음이 이끌었다는 게 맞겠지만. 다행이었다. 나무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나무터널길이

북문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미처 가려지지 않은 햇살이 아스팔트 길위에서 반짝거렸다.

그리고 진송루, 북문. 북문은 동문과 딱히 별다르지 않게 생겼지만 좀더 지대가 높고 양쪽에

성벽을 위풍당당하게 조금 끼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다소 녹슬고 칙칙한 그림자에 가려진

성문을 지나면 저런 짙은 녹색의 숲이 바로 나타났다.

한번 코스에서 벗어나 일탈을 해보면, 그담엔 쉬워진다. 이제 뭐 정말 발걸음 닿는대로 걷기

시작했다. 어찌됐건 기분좋게 걸을 수 있고 재미있으면 되지, 꼭 어디어디를 지나쳐 어디로

가야 한다는 법 따위는 없는 거니깐. 숲으로 덥썩 뛰어들어서는 사람들이 많이 밟고 지나가

풀이 돋지 않았거나 상대적으로 흙바닥이 많이 보이는, 길처럼 보이는 걸 따랐다.


그렇지만 정말 작심하지 않으면 딴길로 접어들기도 어려울 만큼, 인적 하나 없는 숲길 중간에도

이렇게 나무로 잘 만들어진 안내판이 어김없이 길을 일러줬고, 그보다 더 자주 '강화나들길'의

끄나풀이 길을 인도했다. 어디선가 꽃향기가 걸쭉하게 번져나온다 싶으면 꽃이 나왔고,

어디선가 나뭇잎을 사각대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금세 바람이 따라왔다.


산길을 한참 걸어올라가다가 걸어올라온 만큼 내려간다 싶던 때 오읍약수터가 나왔다. 약수터는

그냥 조그만 동네 약수터랑 비슷했고, 그 아래쪽에 졸졸 물이 흘러내리는 풍경을 따라 걷다보니

산길이 끝나고 도로 갓길로 접어들었다.

한참 뜨거운 시간, 그림자는 한뼘도 생겨나지 않는 때에 하필 이렇게 벌거벗은 아스팔트 길

위에 서게 되다니 타이밍이 좀 안 좋았던 게다. 너무 뜨겁기도 하고 아무래도 도로 갓길은

쉽게 지치고 볼거리도 없고 하여 색색으로 이쁘게 칠해진 초등학교 정자나무 아래를 찾아

잠시 쉬었더니 금세 땀도 식고 기력도 회복하고. 근데 학교 진짜 이쁘게 칠했다.

사실 다른 건 몰라도 1코스에 '대산리 고인돌군'이 끼어있다길래 걷다가 고인돌들이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겠구나 했었다. 근데 아무리 가도 고인돌은커녕 바위쪼가리도 안 보이고

그저 숲길이 계속 이어졌고, 또 이어졌고, 주위에 보이는 건 온통 초록색 풀떼기 뿐. 길은

그대로인데 고인돌을 바라던 내 맘이 변덕인지라 '풀떼기'가 되고 말았다.


결국 다시 큰길가로 나오고 나니 맞이하는 건 사방으로 뻗은 화살표. 현재 위치는 이미

대산리고인돌군을 훌쩍 지나친 어디메쯤. 뭐 깔끔히 포기하고 고인돌은 다음 기회에 다시

보러오기로 했다. 그렇게 월곶마을의 띄엄띄엄한 건물들 사이로 느슨하게 놓인 길을

걷다가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를 원망할 무렵이었다. 저 파랑색 차양이 눈에 띈 건.

논쪽을 향해 불뚝 튀어나온 평상 위에 아저씨인지 할아버지인지 중늙은이 두 분이

앉아계셨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파랑색 차양을 높직이 드리우고는 한가로이 논쪽을

내려보며 쉬고 계신 듯 했는데, 가능하다면 옆에 한자리 끼어서 같이 쉬고 싶던 마음뿐.

결국 마을회관을 지나고 좀더 걷고서 도착한 '연미정'. 코스 중간에 식사할 수 있는 포인트로

연미정을 소개했던 안내지도와는 달리 근처엔 구멍가게 하나가 숨어있던 게 고작이어서,

위에 올라 바람맞고 쉬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 길 걷는데 중간중간 가게나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건 이 코스의 장점이자 단점인 거 같다. 분위기가 흐트러지지는 않되

미리 챙겨두지 않으면 목이 말라 쓰러지거나 배가 고파 쓰러질지도.

강화 10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곳, 연미정은 아래로 굽어보이는 물길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고 하여 연(제비燕), 미(꼬리眉)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 풍경이나

정자가 품고 있는 시원한 바람이 예사롭지 않아 강화나들길 1코스 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곳이다. (이전 포스팅 : 인조의 첫번째 굴욕이 있던 곳, 강화도 연미정.)

정말 경관이 굉장히 이쁜 곳이었는데, 500년된 느티나무도 두그루나 떡하니 버티고 있어

시원한 바람과 그늘을 품고 있었고, 그런 거에 비하면 참 안 알려진 곳이지 싶다. 어쩌면

그건 인조가 후금과의 기싸움에서 밀리고 억지로 맺었던 강화조약을 여전히 굴욕이라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치욕의 징소, 굴욕의 장소는 얼른얼른 덮고 지우려거나

최소한 소극적으로 방치해두기라도 하는 사례야 워낙 많았으니까.


나고 드는 게 자유로워서 '나들길', 강화나들길 제1코스는 이제 연미정에서 옥개방죽길을 거쳐

갑곶으로 마무리되도록 짜여있긴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기로 했다. 굳이 첨부터 끝까지 밟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형편따라 나고 드는 게 정말 나들길을 즐기며 걷는 방식이지

싶어서, 배도 고픈데다가 서울로 돌아갈 시간도 애매해서 나머지길은 다음을 기약했다.


강화도에 왔다면 어디서부터든, 저 '강화나들길' 표지를 발견하는 순간 이 나들길에 들어서서

조금이라도 걸으면서 발견하게 되는 강화의 풍경을 즐기다가 다시 나리는 건 어떨지.


* 강화나들길 사이트 : http://www.trekking.go.kr/




강화 10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곳, 연미정은 아래로 굽어보이는 물길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고 하여 연(제비燕), 미(꼬리眉)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 풍경이나

정자가 품고 있는 시원한 바람이 예사롭지 않아 강화나들길 1코스 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곳이다.
 

그러고 보니 여긴 정묘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고.

그렇게 표지판에 적혀있긴 했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정묘호란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끝난 거

아니었던가.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나 싶어 '정묘호란'을 키워드로 찾아봤는데 이곳 연미정의

이름은 나오지도 않고 '삼전도'만 줄줄이 나온다. 그리고 '정묘호란, 연미정'을 키워드로 찾아보니

또 이 곳의 표지판 내용을 그대로 딴 글들이 줄줄이 나오고. 뭐지 이게..? ctrl+c, ctrl+v 신공인가.


광해군을 쫓아낸 서인세력들은 ‘도덕적 가치’를 내세운 정권답게 광해군의 중립외교 대신에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도덕외교를 구사했고, 이는 결국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으로 일어났다. 정묘호란으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정묘화약을 맺은 이후 후금군은 철군했다. 그후 1636년(인조 14년)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는, 종전의 입장을 바꿔 이제는 조선에 ‘군신관계’를 강요했다. 청조의 요구에 불쾌한 인조는 청과 일전을 불사르겠다는 일념으로 척화파를 지지하였지만, 채 전의를 갖추기도 전에 청군은 압록강을 넘고 있었다.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넘은 청군은 6일만에 서울 근교까지 진출하였고,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게 서울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길을 차단했다. 강화도행을 포기한 인조는 우왕좌왕하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이로써 12월 15일부터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까지 45일간의 남한산성의 항전이 시작되었다.


남한산성의 항전은 청군의 위협 외에도 거센 눈보라와 맹추위와도 싸워야 하는 악조건 속에 진행되었다. 1637년 1월 23일 밤, 청군은 남한산성의 공격과 함께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가 점령되고 위기감이 고조되자 성내는 척화에서 강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결국 1월 30일 인조는 항복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산성을 나서 삼전도로 향했다. 말에서 내린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500여 명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삼배구고두는 여진족이 천자를 뵈올 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 예식이 끝난 후 인조는 소파진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당시 사공은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서로 건너려는 신하들이 몸싸움을 일으켜 왕의 옷소매까지 붙잡기도 했다. 청의 장수 용골대가 인조를 호위하며 강을 건너자 1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강 옆 길가에서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하며 울부짖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아..좀 복잡하긴 하지만, 정리하자면 그런 거다. 정묘호란, 연미정, 삼전도, 인조의 삼배구고두

따위 키워드에 대해 제대로 정리하고 있는 기사나 포스팅들이 없는 거 같아 굳이 이런 정보성

글을 쓰게 되는데, 우선 기억해야 할 건 1627년(인조 5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인조 14년)의

남한산성 항전의 차이다.


ㅇ 1627년(인조 5년) 일명 '정묘호란' :

당시 '후금'과의 형제관계를 인정하는 강화조약을 강화도 연미정에서 체결

(인조의 첫번째 굴욕)


ㅇ 1636년(인조 14년) :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고치고 재침략하여 군신관계를 인정하는 예식을 삼전도에서 행함.

(인조의 두번째 굴욕)


요렇게 정리되시겠다. 삼전도와 연미정의 차이. '청'과 그 전신 '후금'의 차이.

명에서 청으로 슈퍼파워가 바뀌던 국제질서의 혼란기였으니 당시 국제관계를 규율하던

의례적인 '군신관계'를 확인하려 머리를 조아렸다고 해서 딱히 비분강개할 것은 없지 싶다.

보다 현명하게 굴어서 부드럽게 당대의 세계최강국과의 관계를 구축했다면 저렇게 적나라한

장면은 나타나지 않았을 테지만, 그거야 위정자와 기득권 집단의 수치일 뿐 백성들이야 뭐.

정말 경관이 굉장히 이쁜 곳이었는데, 500년된 느티나무도 두그루나 떡하니 버티고 있어

시원한 바람과 그늘을 품고 있었고, 그런 거에 비하면 참 안 알려진 곳이지 싶다. 어쩌면

그건 인조가 후금과의 기싸움에서 밀리고 억지로 맺었던 강화조약을 여전히 굴욕이라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치욕의 징소, 굴욕의 장소는 얼른얼른 덮고 지우려거나

최소한 소극적으로 방치해두기라도 하는 사례야 워낙 많았으니까.


아니면 여전히 저 성곽에 딱 붙어서 북쪽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는 군인들이 상주하는

군사제한구역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고. 북쪽을 향해서는 사진도 찍지 말라는 표지판이

붙어있는 걸 보면 두번째 이유가 더 그럴듯해 보이긴 한다.





강화도에서 만난 배달오토바이 한대에 깜장테잎으로 돋을새김된 글자들이 눈에 띄었다.

비켜!는 그렇다 치더라도 -_-ㅗ라거나 ㅈㅅ이라거나, 그러고 보니 한글도 꽤나 변해버려서

일종의 상형문자나 기호처럼 알아보는 사람만 알아보게 되어버린 거 같다.


뭐 딱히 나쁘다고만 할 수도 없다 싶은 게, 예컨대 '엿먹어라'라거나 '죄송'이란 식으로

제대로 된 한글 단어를 저기에 채웠다면 저런 장난스러움이 느껴졌을까. 저렇게 간단명료한

몇개의 선으로 정리해서 보이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을테니 눈에 잘 띄지도 않았을 거다.


고려말 十八子得國의 파자(破字)가 이李씨 조선의 건국을 예언했다던가. 뭐 그렇게 거창하진

않더라도, 초중종성으로 얼기설기 엮인 한글도 저렇게 풀어쓰거나 적당히 변칙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재미있다. 이미 뭐, 저런 식의 어휘들이 대세가 되어버렸으니.






벌써부터 부처님 오신 날을 준비중이었다. 파스텔톤의 등불을 빼곡하게 달아두고 있던 경내 마당에

얼룩덜룩 팔각 그림자가 융단처럼 깔렸다. 올록볼록 엠보싱 같기도 하고. 전등사 이름부터 범상치

않더니 땅바닥에 연등 그림자를 내걸었다.

보통 알록달록한 원색으로 만들어진 연등에는 익숙했는데, 이런 식으로 파스텔톤의 다정다감한

연등들이 바람불때마다 쏴아, 가만히 앉아 그 빛깔들이 섞여들어가는 걸 보고 있어도 좋았다.

아무리 날씨가 구질구질하고 여전히 바람이 쌀쌀해도, 5월이 오긴 하겠구나. 이런 식으로

4월이 슬그머니 닥친 걸 보면.

색색의 꽃들, 전등사는 그러고 보면 한해에 한번씩은 꼭 가는 거 같은데. 그때마다 차를 갖고 가서

순무김치를 안주삼아 인삼동동주를 마실 수 없음에 아쉬워하면서 번번이 그런다. 술기운 대신

꽃향기를 맡고서 힘을 내는 패턴이랄까.

그리고 풍경의 두가지 버전. 요새 토이카메라 모드가 꽤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자꾸 찍어보게

되는 첫번째 풍경 사진, 그리고 그냥 여느 때처럼 찍은 두번째 풍경 사진. 물고기가 하늘에 둥둥

떠서는 바람결에 퍼덕거리다가 산호초 사이에 낑겨 버렸다.




 @ 남산골 한옥마을

@ 충남 공주

@ 한강 고수부지

@ 충남 공주 무령왕릉

@ 경기도 의왕호

@ 강화도




강화도 대명항, 수많은 갈매기들이 무어에라도 쫓기는 듯 온통 날아올랐다. 여기저기 물찌똥을 찍찍 갈기는

건방진 녀석들이지만, 닭둘기와는 다르게 날아다니는 폼이 여유가 있다.

그렇지만 여기 역시, 마치 석모도 들어가는 페리에 파리떼처럼 달라붙는 그 손탄 갈매기의 기풍이 없을 수는

없는 거다. 사람들은 풍족하게 먹고 소비하고 남기고 버리고, 약간의 휴머니즘이나 센티멘탈리즘을 더해

동물들에 먹을 걸 던져준다. 시혜 욕구와 식욕 모두를 충족시키는 윈-윈이랄 수도 있겠지만, 저들이 부디

나는 법을 잃어버린 채 사람들의 손끝만 바라보는 닭둘기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랄 뿐.

먹이를 두고 첨예한 날개죽지 싸움이 벌어지는 뻘밭. 그들의 매끈하고 반들거리는 몸통과 날개는 웬만한

더러움쯤은 쉽게 튕겨낼 듯 한 포스가 배어있다.

과자를 던지는 아이의 손에 꽂힌 녀석의 눈빛. 인형에 붙어있는 유리눈깔같이 조금은 괴기스럽기도 하고,

생기를 잃은 듯 하면서도 묘하게 살아있음이 느껴지는 눈빛이다.

과자 먹느라 신나셨다. 홰를 친다고 표현하던가, 날개를 푸드덕대며 태양을 피하고, 한 입에 과자를 꿀꺽.

이 녀석은 왠지 털도 부시시해 보이고, 뻘밭 웅덩이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자학에 빠진 것만 같다. 이리 살아

뭐할끼고. 과자 한 입 못 얻어 먹는 시러배새새끼.

시간만 있으면 갈매기들의 비상을 제대로 한 컷 잡아 보고 싶었는데 어느순간부터 이녀석들 전부 저공비행이다.

어렸을 때던가,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는 식의 속담에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했던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나면서, 지금은 공기도 무거워지고 벌레들도 지표면 가까이로 내려와 있어 새들이 낮게 저공비행하는 걸 테고

내일쯤 비가 오려나 생각했는데, 비는 결국 안 왔던 듯 하다.

대명항에서 기우뚱거리는 어선들. 잘 손질된 어구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항구 바로 앞에 세워진 어물전에서는 시뻘건 소고기같이 생긴 고래고기도 팔고, 지느러미가 리얼한 상어고기도
팔고, 저마다 아주머니들의 남편이, 아들이 잡아왔다는 국내산 생선들을 파느라 분주했다. 그 와중에 빛나는

아이디어, '껍질홀라당벗겨진, 금방 돌아가신 간제미'.


수백마리의 생선이, 수만마리의 새우 사체가 산처럼 쌓인 채 소금에 절여진 냄새를 뿜어내는, 조금은 잔인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어시장이었지만 저런 덕분에 재미있었다.

아무래도 바다를 제대로 보려면 서해보단 동해다. 뭔가 바다를 바라보아도 질척하고 끈적한 뻘밭이 시야의

한웅큼을 뺏어가는데다가, 거의 틀림없이 바다 너머엔 또다른 육지가 보인다. 이래서야 원, 강인지 바다인지

알 방법이라곤 짠내밖에 없는데 그조차도 왠지 서해 쪽은 많이 희석되는 느낌이다.

어느 횟집의 빈티지스러운 테이블 세팅. 색이 바랠대로 바랜 의자 여섯개가 노골적으로 부조화스런 색감을

뽐내며 척하니 자리를 잡았고, 고등학교 때까지 익숙했던 파랑색 쓰레기통이 상석을 차지했다. 한눈에 보아도

잔뜩 녹슬어 보이는 테이블 위 석쇠를 넘보는 건 보랏빛 바디가 딱정벌레처럼 반들거리는 오토바이.



@ 강화도


#1. 국립의료원에서 황열병 주사를 어제 맞았다. 치사율이 무려 오백만분의 일이라던가. 의사가 말하길 그렇게

낮은 수치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기로 한 거 안 갈거 아니니까 맞으셔야죠, 그랬다. 실은 이달 말께 가기로 했던
 
아프리카 출장이 무기 연기되는 바람에 딱히 오백만분의 일이라는 운세를 시험해볼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십년이나 효과가 지속된다니, 이김에 (꽁짜로) 맞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


삼일정도 금주를 하라 했고, 며칠 몸살기운이 있거나 컨디션이 안 좋을 수 있다 했는데 딱히 모르겠다. 아직

살아있는 거 보면, 오백만분의 일의 확률은 날 비켜간 듯. 그 정도면 높지도 낮지도 않은 확률이었는데.



#2. 그러고 보니 막걸리를 마시면서 포스팅중. 객관적으로야 삼일이 채 안 지났지만, 이미 내 맘속으로는

한 삼백일쯤 지난 듯 하니 패스.



#3. 5월말부터 월, 수, 금, 퇴근 후 일곱시부터 열시까지 교육을 받고 있다. 이제 다음주말에 시험만 보면

끝나는데 이걸 내가 왜 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또 어쨌든 꾸역꾸역 출석하고 중간셤도 나름 잘 보고 하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는 '성실함'이 빛을 발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냥, 회사를 다니면서 목표를 상실한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려면 조금씩 단기 목표를 세워가며 사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어영부영한 맘으로 시작했던 코스인데 끝이 보여서 다행이다. 내일 열두시부터 여섯시까지

여섯시간동안이나 수업 겸 평가를 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깝깝하긴 하지만서도.


#4. 종일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아침부터 심각하게 찌푸렸던 하늘에서 물방울이 톡톡 돋아나는 것부터 보았던

터라, 내내 기분이 좀 처져 있었다. 게다가 다음주엔 무슨 행사가 그리도 많은지, 손가락은 열 개인데 키보드

자판은 무려 백네개나 되어서 힘겨웠던 하루였던 거다.


주말에 일박이일로 여행이나 갈까 했는데. 아쉽게 되고 말았다.



#5. 아...막걸리 한잔에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온다. 오백만분지일의 가능성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건가.

국립의료원에서 황열병 예방주사를 신청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는데, 이미 내 앞으로 사백구십구만

구천구백구십구명의 사람이 무사히 주사를 맞고 돌아갔던 건지도 모르겠다.






@ 강화도 대명항.


새하얗고 커다란 구름 갈매기가 어느결엔가 내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구름 갈매기의 위용에 조무래기 갈매기들이 모두 날아올랐다.


카메라 초점이 애초 맞을 수가 없는 저 너머의 갈매기였지만, 덕분에

물기를 머금은 듯 번져보이는 대명항이 조금은 순진해 보였다.







@ 강화도 전등사.

진흙속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단전에 기를 모으듯 영양분을 끌어모았을 거다.

물방개니 게아재비니 어깨로 툭툭 시비걸 때마다 꽃대궁은 파르르 떨었을 거고.


강한 듯 애절하게 탄주되는 기타 루프소리가 뭔가 못견디겠는 쾌감을 선사하듯,

그렇듯 발가락과 똥꼬가 움찔대는 쾌감 속에 뿅. 꽃봉오리가 터져나온 건 아닐까 싶다.


뿅.



전등사 들어서는 길,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떠올리게 만드는 자그마한 돌문을 사이에 두고 풍경이

바뀐다. 양켠에 즐비한 음식점의 번다하고 소란맞은 풍경에서 싱싱한 초록빛 물감냄새 물씬한 그것으로.

대학다닐 때 수업은 듣기 싫고 어디던 떠나고 싶은 마음에 다 째버리고 혼자 여까지 꾸역꾸역 기어왔던 적이

있었다. 이번 주말처럼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잔뜩 가물어 쩍쩍 갈라진 논바닥같은 소나무 둥치 고랑에

초록빛 이끼가 촘촘하게 올라붙었다.

이걸 한 바퀴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은 효과가 있다지만, 문맹자를 위한다는 명목이 사라진 지금은 아무리 봐도
그건 야매에 가까운 무엇이다. 종교가 현세와 내세의 안녕과 축복을 지켜내는 세련된 기복 시스템으로

타협하면서 일그러진 부처의 메시지는 심지어 그걸 '야매/short-cut' 공덕쌓기용 시주함으로 전락시킨

사람들에 의해 조금 더 상처받은 거 같다.

전등사에 도착. 빤딱빤딱하는 것들보다는 불투명하고 담백한, 그런 이미지의 것들이 왠지 절이라는 공간에

맞춤한 거 같아서, 저런 식으로 반짝거리는 유리창 대신 한지라거나 간유리 느낌의 창이 아쉽다.

시원하게 활짝 제껴진 창문들 사이로 공을 몰고 질풍처럼 드리블하는 바람을 그려보는 걸 보면, 월드컵 시즌.

적당히 보기좋게 퇴락한 단청을 얹은 처마 끄트머리에서 풍경이 짤강거린다. 비온 후 갠 참이다.

목도리처럼 염주를 감고 있는 부처, 학업성취를 다짐하는 동자승, 소림사에서 수행중인 동자승들 틈에서

은근슬쩍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저 洋夷의 아이는 누군고.

전등사 경내의 찻집,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혹해 뒤로 돌아갔더니 장독들이 팀파니처럼 앉아있다.

갈 길을 잃어버린 개미 한 마리. 두 개도 아니고 여섯 개나 되는 더러운 발로 꽃잎을 희롱해대더니 갈 길을 잃고

그대로 멈췄다. 얼음.

너른 꽃잎 벌판을 지나 탱글하게 감긴 채인 꽃송이들 사이를 덜컥거리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개미 녀석의

몸크기에 비기자면, 지금 녀석은 비포장의 시골길을 달려가는 마을버스같은 율동감을 느끼고 있을 듯.

문득 도예 수업 시간에 내가 만들었던 도자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졌다. 굉장히 이쁜 것들 많았는데.

두툼하고 튼튼해 보이는 부리, 다소 우글쭈글하지만 쭉 뻗은 각선미. 휘영청 감아올라간 허리까지.

그냥 초록빛이 넘 좋아서.

빛 조절에 실패한 사진이지만, 왠지 살짝 환타지스런 느낌이 있다. 낡고 오랜 성벽을 꾸역꾸역 말아올리는

악령의 손아귀처럼 덩굴식물이 시커멓게 잠식해 들어가는.

원래 요렇게 밝은 색감이어야 하는데.

이 사진만 보면, 그냥 돌바닥에서 잎사귀들이 하늘을 향해 나무처럼 자라오른 느낌이다.

무더기무더기, 소원을 빌며 사뿐하지만 조심스레 올린 돌멩이탑이라기보다는 그냥 돌무더기.

이건 더 심하다. 쪼개지고 토막난 나무 위로 빼곡하게 돌멩이들이 들어차 있는데, 그냥 누가 포대 가득 차있는

돌멩이를 탈탈 거꾸로 털어서 쏟아부은 듯. 올라앉을 놈 올라앉고 굴러떨어질 놈은 굴러떨어지고. 지 팔자지.

토요일 쏟아붓던 비는 적어도 일요일까지는 문제없다는 기세더니 웬걸.

돌아나서는 길. 누군가는 새롭게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의 '행방불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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