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10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곳, 연미정은 아래로 굽어보이는 물길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고 하여 연(제비燕), 미(꼬리眉)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 풍경이나

정자가 품고 있는 시원한 바람이 예사롭지 않아 강화나들길 1코스 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곳이다.
 

그러고 보니 여긴 정묘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고.

그렇게 표지판에 적혀있긴 했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정묘호란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끝난 거

아니었던가.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나 싶어 '정묘호란'을 키워드로 찾아봤는데 이곳 연미정의

이름은 나오지도 않고 '삼전도'만 줄줄이 나온다. 그리고 '정묘호란, 연미정'을 키워드로 찾아보니

또 이 곳의 표지판 내용을 그대로 딴 글들이 줄줄이 나오고. 뭐지 이게..? ctrl+c, ctrl+v 신공인가.


광해군을 쫓아낸 서인세력들은 ‘도덕적 가치’를 내세운 정권답게 광해군의 중립외교 대신에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도덕외교를 구사했고, 이는 결국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으로 일어났다. 정묘호란으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정묘화약을 맺은 이후 후금군은 철군했다. 그후 1636년(인조 14년)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는, 종전의 입장을 바꿔 이제는 조선에 ‘군신관계’를 강요했다. 청조의 요구에 불쾌한 인조는 청과 일전을 불사르겠다는 일념으로 척화파를 지지하였지만, 채 전의를 갖추기도 전에 청군은 압록강을 넘고 있었다.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넘은 청군은 6일만에 서울 근교까지 진출하였고,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게 서울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길을 차단했다. 강화도행을 포기한 인조는 우왕좌왕하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이로써 12월 15일부터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까지 45일간의 남한산성의 항전이 시작되었다.


남한산성의 항전은 청군의 위협 외에도 거센 눈보라와 맹추위와도 싸워야 하는 악조건 속에 진행되었다. 1637년 1월 23일 밤, 청군은 남한산성의 공격과 함께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가 점령되고 위기감이 고조되자 성내는 척화에서 강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결국 1월 30일 인조는 항복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산성을 나서 삼전도로 향했다. 말에서 내린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500여 명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삼배구고두는 여진족이 천자를 뵈올 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 예식이 끝난 후 인조는 소파진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당시 사공은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서로 건너려는 신하들이 몸싸움을 일으켜 왕의 옷소매까지 붙잡기도 했다. 청의 장수 용골대가 인조를 호위하며 강을 건너자 1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강 옆 길가에서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하며 울부짖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아..좀 복잡하긴 하지만, 정리하자면 그런 거다. 정묘호란, 연미정, 삼전도, 인조의 삼배구고두

따위 키워드에 대해 제대로 정리하고 있는 기사나 포스팅들이 없는 거 같아 굳이 이런 정보성

글을 쓰게 되는데, 우선 기억해야 할 건 1627년(인조 5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인조 14년)의

남한산성 항전의 차이다.


ㅇ 1627년(인조 5년) 일명 '정묘호란' :

당시 '후금'과의 형제관계를 인정하는 강화조약을 강화도 연미정에서 체결

(인조의 첫번째 굴욕)


ㅇ 1636년(인조 14년) :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고치고 재침략하여 군신관계를 인정하는 예식을 삼전도에서 행함.

(인조의 두번째 굴욕)


요렇게 정리되시겠다. 삼전도와 연미정의 차이. '청'과 그 전신 '후금'의 차이.

명에서 청으로 슈퍼파워가 바뀌던 국제질서의 혼란기였으니 당시 국제관계를 규율하던

의례적인 '군신관계'를 확인하려 머리를 조아렸다고 해서 딱히 비분강개할 것은 없지 싶다.

보다 현명하게 굴어서 부드럽게 당대의 세계최강국과의 관계를 구축했다면 저렇게 적나라한

장면은 나타나지 않았을 테지만, 그거야 위정자와 기득권 집단의 수치일 뿐 백성들이야 뭐.

정말 경관이 굉장히 이쁜 곳이었는데, 500년된 느티나무도 두그루나 떡하니 버티고 있어

시원한 바람과 그늘을 품고 있었고, 그런 거에 비하면 참 안 알려진 곳이지 싶다. 어쩌면

그건 인조가 후금과의 기싸움에서 밀리고 억지로 맺었던 강화조약을 여전히 굴욕이라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치욕의 징소, 굴욕의 장소는 얼른얼른 덮고 지우려거나

최소한 소극적으로 방치해두기라도 하는 사례야 워낙 많았으니까.


아니면 여전히 저 성곽에 딱 붙어서 북쪽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는 군인들이 상주하는

군사제한구역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고. 북쪽을 향해서는 사진도 찍지 말라는 표지판이

붙어있는 걸 보면 두번째 이유가 더 그럴듯해 보이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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