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막이옛길, 풀향기 가득한 그 길에 처음 섰던 건 사실 하늘이 종일 칭얼거리던 날.

날씨도 우중충하고 빗물도 그치지 않아 어쩔까 하다가 잠시만 둘러보기로 하고 우산을

들고 카메라를 쥐었다. (맑은날의 기록 : 구불구불한 산막이옛길에 풀향기가 가득.)

흙바닥이었지만 나무쪼가리들이 폭신하게 깔려있어서 물웅덩이가 생겨있거나 질척해져있지는

않아 걷기 수월한 덕분에 물기가 총총히 맺혀있는 나무들도 보고, 흰 김같은 구름을 칭칭

감고 있는 산들도 보고, 물안개가 잔뜩 피어오른 강도 보고. 삐죽거리는 솔잎 끄트머리마다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물방울들이 점점 긴장감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러다간, 주륵.

그네도, 흔들의자도, 나무와 나무사이에서 슬쩍 휘어있는 벤치도, 그리고 자연목으로

얼기설기 엮어만든 울타리도 모두 흠씬 젖어 있었다. 그 와중에 울타리 위에서 뱀인지

용인지 혀를 날름거리며 꿈틀거리고 있는 녀석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옆에는

나무를 깎아만든 오리도 있고 새도 있고, 이 길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소품들이다.

그렇지만 이 옛길을 걸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소품이랄까, 포스트는 단연코 이곳이었다.

정사목. 한글로 된 음만 읽으면 감이 확 오지는 않지만 한자로 써놓으면 그 의미는 분명해지는 거다.

情事木. 아니, 뻣뻣하게 굳어있는 나무가 정사라니, 기껏해야 서로 수십년에 걸쳐서 손이나 잡는

느낌의 연리지가 고작일 텐데, 나무가 정사라니.(feat. '내가 고자라니')

정사목. 나무에 뭔가 남자표시 여자표시 이름표가 붙어있는 걸 보니 뭔가 기대가 되긴 하는데,

딱히 모르겠다. 설명에 따르면 천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포즈의 나무들이라는데, 대체 뭐가

어떻다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원. 근데 왜 가지가 세개지, 여자 표시가 두개 붙어있는건...?

아하, 슬쩍 각도를 틀어서 가까이 가서 보니 바로 알겠다. 무슨 숨은그림찾기처럼 한번 그림이

보이고 나니까 이제 아주아주 잘 보이는 그림, 이 나무 진짜 그럴 듯하다. 그러니까 설명하자면...

음...남자나무가...여자나무를...음...[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렇게 한참을 즐감해주시다가, 왠지 나무들이 삐걱삐걱거리며 서로의 몸을 더듬고 비트는

듯한 환상과 함께 어디선가 밤꽃냄새가 마구 풍기는 듯한 환상이 떠오를 무렵, 정신건강에

안 좋겠다 싶어 일단은 철수하기로 했다. 마침 빗발도 좀더 굵어지고 있었고, 잔뜩 찌푸린

하늘 덕에 금세 어두워지겠다 싶기도 해서.

솔잎마다 방울져있는 빗방울들, 사선으로 내리꽂히는 빗물을 닮았다는 느낌. 빗물에 씻기고

나니 산막이옛길도 그렇고 온통 푸르른 풍경이 더욱 싱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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