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의 산막이옛길, 예전에는 산골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옆 마을로 넘나들거나 장터갈때

이용하던 길이라던데 점차 마을이 조그매지면서 잊혀져가던 길이라고 한다. 최근에야 휘적휘적

구비진 강을 따라 오르내리며 내달리는 산길을 정비해서 근 삼 킬로미터에 이르는 '옛길'을

되살려냈다던가. 제주 올레길의 예기치 못한 성공담이 지자체에 던진 울림은 이다지도 컸지싶다.

세 그루의 연리지, 아니 여섯 그루의 연리지라고 해야 하나. 서로 사이좋게 몸을 섞은 채

고개를 살풋 외로 꼬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한 세 커플나무들. 연리지 하나가 생겨나기만 해도

울타리도 치고 포토존도 만들고 수액도 맞아가며 특별대접을 받는 판인데 무려 세 쌍이라니.

옛길 초입부터 계속 유유한 호흡으로 따라오는 건 괴강. 그러고 보니 이곳의 지명은 괴산,

강이름은 괴강. 57년에 이승만대통령이 괴산수력발전소를 만들고선 호수가 되어버려 괴산호라

불리게 되었다곤 하지만, 조금씩 방류되고 있는 건지 바람이 미는 건지 아니면 드문드문 다니는

조그만 철선과 목선이 만드는 건지 수면에 잔물결이 꼼꼼히 새겨져 있었다.

나무에 묶인 그네에선 아이들이 꺅꺅 소리를 질러대며 산아래쪽을 향해 발을 구르고 있었다.

저러다 휘잉~ 하고 날면 그대로 괴강, 괴산호까지 날아가겠고만 겁나지도 않는지 마냥 즐거운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 살벌한 그네 대신 조용조용 잔물결처럼 일렁이는 흔들의자에서 잠시

앉아 쉬었다. 전날 내렸던 비가 어느결에 말랐는지 보송보송한 의자에서 슬몃 나무냄새가 났다.

출렁다리, 어렸을 적 고성 잼버리장에서도 뛰놀아보고 했지만 이렇게 길고 출렁대는 다리는

처음 본 거 같다. 이거 재미있겠다 싶어서 우다다 걷다가 일부러 흔들기도 하고, 그러다가

뒤의 꼬맹이가 완전 겁먹은 거 보고 미안해져버려서 사뿐사뿐 흔들림없이 걸어보려 했지만

몇걸음 가지 못해 다시 출렁출렁. 처음 느낌 그대로, 어른들한테도 꽤나 길고 재미있던 코스. 

출렁다리에서 내려와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이는 단단한 흙길을 밟으니 기분이 상쾌하다.

흔들리던 발아래 나무판자 대신 땅을 딛으니 시선이 자연스레 주변을 스캔하게 되는 거다.

약간 뜨겁긴 하지만 아직 설익어 부드러운 느낌의 오전 봄햇살도 그렇고, 본격적으로

짙어지기 전의 싱그러운 녹색 풀떼기 같은 것들.

산막이옛길은 그냥 하이킹 삼아 가볍게 걷는 길도 좋지만 저 위로 본격 등산로를 따라 걷는 것도

꽤나 좋을 거 같다. 대충 코스를 짜보자면 등산로로 크게 돌아서 산막이마을까지 가서는 옛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 정도가 좋지 않으려나. 여기가 바로 등산로와 옛길이 갈라지는 지점인데

등산로라기엔 넘 푸릇푸릇하고 완만한 길이 시작되는게 꽤나 유혹적이었다.


괴산수력발전소가 물을 가두고 나서 몇개 마을이 잠기고 구불구불하던 강의 생김생김도 많이

변했다지만 여전히 옛길 옆을 따라 출렁이는 강물은 구불한 실루엣을 간직하고 있었다. 제법

폭이 넓은 강, 호수를 끼고 있어서 그런지 바람이 굉장히 시원하다. 미처 땀이 솟을 겨를도

없이 에어콘바람처럼 시원한 산바람 강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연화담. 지금은 연꽃이 피워올려지는 저 연못이라지만 이전에는 천수답, 논이었다고 한다.

충북 괴산, 여기 옛길까지 차로 달리며 놀랐던 건 마치 강원도의 느낌처럼 쉼없이 울룩불룩

높진 않아도 야무진 삼각산들이 늘어서있던 풍경. 논농사를 짓기엔 땅이 부족했던 걸까,

저 손바닥만한 세모땅에까지 벼를 심었다니. 직각이등변삼각형 모양, 올만에 떠올린 단어.

산막이옛길을 따라 걷다가 발견한 큼지막한 동굴이 있었고 왠 뜬금없는 호랑이 상과 인형이

놓여있었다. 앞에 세워진 표지판을 보기도 전에 뭐야 이거, 호랑이굴이야 했더니 역시나.

믿거나 말거나 1960년대까지 호랑이나 다른 산짐승이 자리잡고 살던 굴이라고 하는데

그것보다 더 놀라웠던 건 대체 왼쪽의 호랑이 인형은-ZOO COFFEE에서 들고 온 듯한-

어제의 장대비를 견디고 저리도 뽀송거리는 걸까.


적당한 강약으로 오르내리는 계단도 있고, 그리 좁지 않은 너비로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나무

데크 길이 쭉 이어지고 있어서 아이들도 신나라 걷고 뛰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 지칠 만하면

나타나는 전망대니 약수터니. 앉은뱅이가 물을 마시고 벌떡 일어났다나, 그런 약수터의 전설이

무색하게 물이 아낌없이 펑펑 흘러나오던 물맛은 나쁘지 않았다.

비가 그친 연후라 그런지 완전완전 산뜻한 초록색을 뽐내며 옛길을 터널처럼 감싸고 있던

나무들, 그리고 제법 울창해진 그 틈새를 비집고 기어이 불어오는 산바람과 이따금씩 뚝뚝

떨어지는 봄볕 쪼가리들. 어디선가 풍기는 나무냄새, 꽃냄새까지 더해지니 정말, 한없이

걸어도 좋겠다 싶었다. 그야말로 풀향기 가득한 이런 길만 쭉 이어진다면.

괴강에서는 선착장과 선착장, 산막이옛길의 처음과 끝을 잇는 목선과 철선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옛길 위의 사람들을 앞서 달리고 있었다. 배를 몇번을 보내고 맞이하며 급할 것 없이

걷다가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선 반짝, 초록빛 나뭇잎새를 뚫고 햇살이 눈부셨다.


중간중간 지게에 얹혀있던 것들은 이곳, 산막이옛길을 노래하는 시들이 적혀있었다. 제법 많은

시들이 이곳의 경치와 분위기와 역사에 감동하고 감탄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렇다. 풍경이 이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의 말을 건네 들을 필요가 있나. 그래서 내용은 늘 스킵,

차라리 지게 위에 늘어뜨려진 성긴 나뭇잎을 보며 안구를 정화. 피톤치드를 달라며.

어디였더라, 그랜드캐년이었던가, 바닥이 유리로 된 이 전망대는 분명 그걸 염두에 두고 만든 게다.

뭔가 바닥을 보고 겁먹기에는 온통 초록빛의 여리여리한 이파리들, 그리고 보기만 해도 보들거리는

괴강의 잔물결들이었는지라 저런 꼬맹이도 펄쩍펄쩍 겁먹지도 않고 뛰놀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만큼

밖으로 불룩 나가서 바라본 풍경은, 강 한복판은 아니어도 대충 깊숙히 들어와 강의 좌우를 바라보는

느낌을 줬다. 잔뜩 굽어진 강물, 강물 따라 잔뜩 굽어진 산등성들, 또 산등성들 따라 굽어진 초록빛들.

총 길이가 채 삼 킬로미터가 안 된다는 거 같던데, 조금씩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제

슬슬 길이 끝날 때가 되어가려나. 좀더 길면 좋겠는데. 좀더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마음이

가득한 채 아껴 핥듯이 한걸음 한걸음 길을 뒤로 밀어보내고 있었다. 갈수록 멈춰서서 사진을

찍어 남기고 싶은 마음만 강해지다 보니 사진은 어느새 기백장을 헤아릴만큼 찍어대고 있었고.

산딸기길. 6월이 되어야 산딸기가 길 좌우로 잔뜩 피어나 붉고 푸른 색감이 강렬할 텐데

지금은 그저 푸른 색 일색이었다. 날이 좋은 주말에는 이 길 가득 사람들이 걷는다는데

이때는 그래도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던 거 같다. 그래도 주차장은 이미 만차가 되어

주변 골목까지 차들로 빼곡하게 넘쳐나는 상황이었지만.

뭘 파종한 걸까, 갈빛 땅위에 초록색으로 가지런히 빗질을 한 듯한 평행선들 너머로 잔뜩 여윈

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선착장 도착. 여기가 산막이옛길의 끝 '산막이마을' 선착장이고, 애초 출발했던 지점은

'차돌바위' 선착장이라던가. 십오분만에 바로 가는 소형배는 오천원, 그리고 멀리 한바퀴

돌아서 한시간여 유람까지 하는 유람선은 만원.

11인승인 소형배는 두 종류가 있었다. 목선이랑 철선이라고 부르던데, 이게 그 목선.

뭔가 정신사나운 만국기가 무당집처럼 내걸려 있는 거 빼고는 그래도 좀 운치가 있달까.

배 뒤로 남겨두는 궤적도 뭔가 뽈뽈뽈뽈, 통통거리는 엔진소리에 맞춰 리드미컬하다.


아쉽게도 내가 탔던 건 목선이 아닌 철선. 11명 이상이 타면 뽀글대며 가라앉지 않을까 싶은

간단하기 짝이 없는 모터배였다. 그래도 뭐, 괴강 한복판에서 올려다보는 양쪽 강가의

풍경이란 건 다른 맛이 있었으니 배가 어쨌거나.

산막이옛길 반대편 강가에도 습지가 제법 발달해 있었고, 나무가 뭉텅이뭉텅이 소보록하니

자라나 있었는데 아직 그쪽에는 이런 길이 나있지는 않다고 한다. 거참..딜레마다. 좋은

길을 보면 걷고 싶은데, 또 사람들이 한둘 모여 걷다 보면 길이 황폐해지고 자연도 조금씩

상해버릴 텐데. 산막이옛길도 잘 관리되고 보전되었으면 좋겠는데..그런 점에서 나무데크로

단단하게 만들어놓은 길이 조금 아쉽긴 했다.

설렁설렁 걷긴 했지만 한시간반 정도 걸려 꼼꼼이 걸었던 길을 이십분도 안 되어서 훌쩍

되돌아오다니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 눈으로 옛길을 되짚다가 불쑥 뜨인 난파선에 시선이

가기도 하고,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으로 칠해둔 남한 최초의 수력발전소라는

괴산수력발전소의 유머러스함에 웃어주기도 하고.

그렇게 한 세네시간동안 잘 돌아본 산막이옛길, 다시 돌아나오는데 아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사인이 샛노랗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목,

큼지막하고 선명하게 새겨진 산막이옛길. 그리고 빨간 화살표가 선연한데 아까는 왜

저걸 못 봤나 했더니 주차장이 만차라 반대쪽으로 돌았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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