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여 묵었던 친구녀석의 아파트 건물에 있던 빈티스 느낌 가득한 엘레베이터. 이중문으로 되어 있어

바깥문을 먼저 열고 안의 문을 열어야 엘레베이터에 탈 수 있고, 두개 문을 모두 닫아야 작동되는 형태.

마지막으로 돌아본 녀석의 집. 아침에 나와선 뒤도 안 돌아보고 멀어졌다가, 밤이 깊어 어둑해져서야 더듬대며

돌아왔으니, 이렇게 밝은 시간에 제대로 마주보는 것도 처음이다. 그치?

튈를리 정원 근처의 풍물시장이 있단 이야기를 들었는지라, 살짝 돌아보고 구경이나 할 셈으로.

터헛. 장화신은 고양이 3종세트가 저런 슈렉고양이스런 눈빛을 하고 내게 걸어오는 듯한 환상은 뭐지. 아..

저 애절하면서도 도도하고,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지한 눈빛. 냐옹.

마침 고양이 인형 샵도 옆에 있어주시고, 냉큼 들어가서 할딱할딱대며 온갖 고양이들을 원없이 구경하다가

눈에 딱 들어온 저 녀석. 저 아이, 딱 보면 갖고 싶어지지 않나효.

고양이 말고도 이런 아리따운 자태의 소녀들과 요정들도 잔뜩 귀엽긴 했지만, 고냥이보단 못해, 라고 멋대로

생각하고는 더이상 눈길도 주지 않았다. 고양이에 대한 절개..랄까.

암튼, 내가 샀던 건 요녀석들, 발을 늘어뜨리고 새근대며 잠들어 있는 모습이라니. 꺄아.

공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점심, 샹젤리제를 걷다가 역시나 발이 땡겼던 곳은 뽕드뺑. 뽈을 가줄까 하다가

그럴듯한 야외 테이블에 빈 자리가 없어서 여기로 와서 간단히 빵과 에스프레소로 요기.

왠지 파리지앵들은 휴가 마지막날 공항으로 가기 직전의 여행자보다도 여유로워 보였다. 휴가를 위해 일한다는

그들, 나도 그렇긴 하지만 그들은 조건부터가 다르다. 일년에 4주 휴가는 보통, 6주에서 8주 휴가도 전혀 드물지

않다는 삶의 질을 누리는 그들.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안다, 그건 축복이 아니라 싸워서 쟁취한 '상식'이다.)

거리 공연이 늘 벌어지던 지하철 역사 내 그 장소, 어김없이 어느 아티스트의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고 행인들은

적잖이 발걸음 멈추고 구경중이었다. 파리의 마지막 이미지.




어둠에 짙게 깔린 주펀의 길거리, 이번엔 내리막을 따라 내려오던 그 길에서 문득 고양이 한마리를 만났다.

길에 면한 풀숲 사이에서 시원해 보이는 돌판을 돌침대 삼아, 역시나 쿨쿨 자고 있던 녀석.

고지대에서 내려다본 타이완의 동북부 지역의 해안선. 타이완은 커다랗고 토실해서 먹음직스런 고구마처럼

생긴 섬인데, 이렇게 한쪽 끝 바다를 보았다.

낮에 햇살이 지글거리던 때 들렀던 사당에도 다시 들러보고. 뭔가 창백한 형광등 불빛이 중앙에서부터 강렬하게

쏟아져내려 주변의 불그죽죽한 빛깔을 전부 탈색시키는 느낌에 되려 섬뜩하기도 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들, 방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들이 정겹다. 아마 이곳이 금광촌으로 이름을 날리던 때에도

일확천금의 꿈을 바라던 사람들이 저런 곳에서 하루를 마감하며 내일을 기대했겠지.

슬슬 인적이 끊겨가는 산비탈의 작은 마을, 관광객이나 여행자들이 떠난 자리에 가로등 불빛만 남았다.

더이상의 촬영은 무리, 완전 깜깜해져 버려서 불빛들이 너울대다 픽, 하고 꺼져버릴 듯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황금산성 주펀의 메인스트리트는 지산제(基山街), 수치루(竪崎路) 정도의 굵은 골목을 따라 달린다.

실핏줄처럼 그곳에서부터 사방으로 뻗어달리는 자잘한 골목들이 주펀의 볼거리, 먹거리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지만 여하간, 메인스트리트를 따라 우선 돌아보게 되는 게 인지상정.

붉은 홍등이 골목 양쪽으로 끊이지 않고 가지런히 늘어선 모습이 인상적이라는 이곳은, 원래는 산비탈을 따라

올라가는 금광촌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금이 고갈되고 쇠락해 가다가, '비정성시' 같은 영화로 재발견되면서

관광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붓이니 먹이니, '문방사우'를 팔던 가게.

이 문어같이 생긴 건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하다가 이내 알아챘다. 흐뭇하게 웃고 있는 대가리를 잡고서는

대여섯개 꽂혀있는 다리로 폭폭폭 안마를 해주는 안마기. 들고서 몇번 토닥거려보니 제법 시원했다.

고양이를 팔던 기념품점. 고양이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또 정신못차리고 한참을 넋빼고 구경했다.

특히 저 낚시질하는 고양이, 흐뭇한 미소하며 가지런히 모은 두 손과 두 발(네 발이라 해야 하나..)이라니.

주펀에서 자주 만났던 간식거리 중 하나, 저렇게 두꺼운 깨엿같은 걸 정말 대패로 밀어서 가루를 내서는,

밀가루를 얇게 펴 만든 전병 같은 것 위에 소복히 올리고는 그 위에 아이스크림을 두덩이, 그리고 이국적 향내

가득한 고수를 적당히 썰어 올려서는 말아서 주는 거다.

왠지 '방망이깍는 노인'의 한대목이 떠오르는 할아버지의 대패질, 아 다 깍아졌고만 뭘 계속 대패질하고 있어요.

안 팔아, 이런 참을성없는 것 같으니라고. 아니 어디서 이런 간식을 사온 거에요, 꺠엿 대패질하기가 생각보다

쉽지가 않아서 조금 성글게 갈아도 잇새에 끼고 너무 곱게 갈아도 입술에서 녹아버리거든요. 터헛. 멋진 할아방.

아직 대낮이건만 구간구간 이렇게 터널처럼 위천장이 막힌 골목에서는 이미 홍등이 불이 들어왔다. 온갖

음식점과 찻집, 기념품점, 간식 파는 곳으로 가득한 골목,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문득 마주친 반가운 간식, 뽑기. 박카스병같은 투명한 갈색빛이 은은히 감도는 울트라맨이니 팬더니 따위의

설탕뽑기가 20NTS. 1NTS에 대략 35원이니까 35를 곱하면 700원쯤 하는 셈이다.

죄다 혀빼물고 있는 인형들이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기념품점도 있었다. 혓바닥에 뭐라 써져 있던데, 뭐

자세히 안 봤지만 그런 거겠지 싶다. 복을 빌고 장수를 빌고 행운을 비는 그런 거.

다닥다닥 붙어있던 간판들, 홍등들, 그리고 어깨를 맞부딪히며 걷는 수많은 사람들. 그나마 가게 안에서 솔솔

흘려지는 에어컨 냉기 덕에 숨통이 트였고, 문득 잊었다는 듯 불어오는 바람이 골목통을 한번씩 훑어주는 덕에

그다지 답답하진 않았다.
또다른 간식, 커다란 버섯-아마도 새송이인 듯..-을 통째로 양념장을 발라 석쇠 위에서 구워서는 먹기 좋은

사이즈로 잘라 종이컵에 담아주었다. 버섯도 꼬들꼬들 맛있었고 양념장도 짭조름하니 쳐묵쳐묵 했다는.

이렇게 중간중간 주펀 거리의 풍경을 넣어주면 왠지 함께 골목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효과가 나지 않을까

싶어 부러 사진을 배치해 놓았는데.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럴 땐 차라리 동영상이 나을 수도 있겠단

생각, 내게 체류비와 적당한 월급과 캠코더를 쥐어준다면 평생 여행만 다니며 '걸어서 세계일주' 요런 거

내 나름의 버전으로 꾸며볼 텐데.ㅋ

작고 귀여운 사이즈의 나무신발이 쪼로록 진열되어 있던 기념품점, 열쇠고리처럼 쓰라는 거 같은데, 그보다는

그냥 요렇게 진열하듯 전시해두는 게 훨씬 이쁘겠다.

이건 거의 떡이랑 흡사했다. 안에 소로 들어간 게 콩가루나 견과류, 요런 거라는 점도 그닥 색다를 건 없었고

다만 따끈따끈한 상태에서 들고 다니며 먹기에 딱 좋은 사이즈라서, 정말 주펀에서 돌아다닐 때는 쉼없이

입을 놀리며 걸었던 거 같다.

잘 보이진 않지만, 수치루(竪崎路)라는 이름 아래 '수기로'라고 한글로도 적혀 있다. 아마 드라마 '온에어'에서

이곳의 저녁무렵 홍등 풍경을 워낙 이쁘게 담아놓고 나서 늘어난 한국여행자들을 배려한 게 아닐까 싶다.

산등성을 따라 걷기도 하고, 비탈을 오르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주펀의 오르막을 따라 골목길을 쫓아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렇게 '깜찍한' 사진을 내걸고 장사하는 가게도 만나고.

새끼 고양이들을 풀어두고 간식을 팔고 있는 집도 있었고,

또다시 고양이 인형과 장식품과 그림들이 가득한 샵도 만나고.

아직 해가 지려면 몇 시간 기다려야 했다. 주펀 만큼이나 오래된 듯 낡고 헤진 꼬질꼬질한 홍등과 방금 갓 달아둔

신품의 홍등이 얼기설기 매달려 있었지만, 그 홍등들의 행렬이 만들어내는 묘한 흥취와 분위기가 색다른 곳.





연일 폭염으로 혀빼물고 헥헥대게 만드는 요즘, 주펀의 사당에서 만났던 혀빼문 저승사자 이야기.

주펀, 2차 세계대전 후 한동안 금광도시로 '골드러쉬'를 맛보며 불야성을 이뤘던 계단식 마을이다. 타이페이의

북동쪽에 위치해서 버스로 한 두시간 정도 달려야 도착하게 되는 마을.

점점 고지가 높아지는 느낌이 강하다가 어느 순간 확 트인 풍경, 한쪽으로는 산등성을 따라 계단형으로 차곡차곡

채워진 네모난 건물들, 그리고 반대편으로는 타이완 앞 바다와 굴곡진 해안선. 구름들은 저멀리로 밀려난 채

꼬물거리며 쭈삣거리고 있었다. 역시나, 작렬하는 태양.

주펀의 메인스트리트로 가기 위해서는 좀더 경사로를 올라야 했다. 무슨 등산로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각도를

보여주던 그 곳의 길들. 오랜 연륜이 묻어보이는 벽돌건물들과 삐뚤빼뚤한 시멘트 계단이 왠지 살갑다.

짙푸른 하늘, 눈부시도록 하얀 구름, 그리고 동굴속에라도 들어선 듯 온통 깜깜하게 만드는 먹장 그늘.

어느결에 아스팔트 차도 위로 합류해선 차들을 옆에 끼고 걸었다. 사방을 이리저리 찔러대는 화살표들은, 왠지

보는 사람을 더욱 혼란에 빠뜨릴 거 같다는 생각을 잠시.

주펀에 본격 진입했음을 알리는 듯 한 누렁색 기와지붕.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등이 축축해지는 날씨였다.

2층짜리 집의 1층과 2층 사이에 커다란 부채를 꼽아넣으면 이런 모양이 되려나, 얇고 넓은 차양을 올려친 채

햇볕을 가리고 느긋이 퍼진 채 쉬고 있는 주펀의 주민분들. 나름 신경써서 배열한 타일 무늬도, 꽤나 산뜻하게

빛났을 파란색 페인트도 과거의 흥청댔을 분위기를 소근대는 듯 싶다.

사실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가 '관광용' 주펀인 걸까, (난 보지도 않았지만) 드라마 '온에어'에

나온다는 주펀, 여행자들이 찾는 주펀은 어디서부터일까. 원래 그런 거 신경쓰지 않고 외려 일상적인 공간에

더 재미를 느끼긴 하지만, 어쨌든 주펀에 왔으니. 조금 당황하던 즈음에 내가 가진 '주펀 지도'에 내 좌표가

찍혔다. 소영묘昭靈廟.

별 생각없이 들어선 내부에서 딱 마주친 기괴한 인형 두 개. 딱 보고 살짝 허걱, 했다. 이 섬뜩한 얼굴표정하며

두툼한 눈썹털, 그리고 귀신나올 것 같이 정신머리없는 복장까지. 첨엔 그 압도적인 표정과 복장에만 온통

시선이 쏠려 몰랐는데, 사람만한 사이즈의 유리장에 사람만한 사이즈의 인형이 들어가 있었다.

가만히 보니 정신사나운 모양의 꽃관도 쓰고, 왼쪽 분께서는 혀도 길다랗게 빼물고 계시고. 오른쪽 분께서는

금세라도 턱뼈를 덜컥, 떨어뜨릴 것처럼 덜그럭덜그럭. 얼핏 들으니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영혼을 끌어가는

역할을 하는 귀신탈이라 하니, 우리 식으로 따지면 저승사자겠다.


뭔가 주펀에서 행사나 제례가 있을 때 장식장 속에서 뛰쳐나와 행렬의 앞에 서서 융숭한 대접을 받는 분들이

아닐까, 절로 나오는 이 존대말은 뭘까.

햇살이 드문드문 침투한 사당 내부, 한줌의 햇살이라도 사방에서 번쩍이는 금박과 장신구들에 기대어

사방으로 튀기고 있던 그 공간에서 개의치 않고 고요히 앉아 뭔가를 기원하고 있던 할아버지.

대만의 대부분 사당의 기둥은 전부 이렇게 용이 칭칭 감겨 있었다. 이곳 역시 격하게 올록볼록한 용들이

기둥마다 하나씩 붙잡고는 또아리를 튼 채 대가리를 정면 쪽에 대고 사람들을 위협하려 했다.

사당 옆에 있는 특이한 모양새의 탑. 아마도 도교식 탑이 이렇게 생긴 걸까, 싶도록 낯선 모양이었다.

탑 위에 올라선 사람의 형체하며, 탑의 기단마다 새겨진 사람들의 모습과 기왓장이 올려진 처마에서 꿈틀대는

구름같기도 하고 용비늘같기도 한 무늬.

왠지 사당에 들어설 때보다 더욱 뜨거워져버린 듯한 땡볕. 그나마 선선했던 사당 밖으로 나설 엄두가 나지 않던

발길이 문득 주춤했다. 사당 안의 반들반들한 대리석 바닥에 최대한 몸을 밀착시킨 채 완전 뻗어버린 검정개

한 마리를 밟을 뻔 했다.

아마도 그 검정개한테 밀려난 걸까. 땡볕이 지배하는 주펀, 용틀임한 기둥 뒤로 만들어진 가뭇한 그림자 속에

꼭 맞게 들어간 고양이 녀석도 정신을 놓고 늘어져 버렸다. 조금씩 움직이는 그림자, 슬쩍 삐져나온 꼬리와

뒷발이 맘에 걸려 조금 밀어넣어주고 싶었지만 잠이 깰까봐 참고 말았다.






고양이를 찾아낸 한 해외누리꾼은 '일단 한번 찾아내니 잘 보인다'고 귀띔했다. ('고양이를 찾아라!' 이색 사진 화제, 노컷뉴스)

고양이를 찾기가 쉽지 않은 건 사실이다. 우선 눈코입이나 제대로 보여야 얼굴이 어딘지 알 텐데.

이렇게 눈만 말똥말똥뜨고 있어도 마찬가지, 몸뚱이가 어디로 뻗어나가는지 보이길 해야 말이지.

사실 보려고 눈만 크게 뜨면 이렇게 잘 보이는데, 한번 보고 나면 의외로 쉽게 보인다는 말은 정말이다.

심지어는 이런 테이블 넘버를 알려주는 표찰에도 고양이는 숨어있었다.

타이페이, 홍등으로 유명한 주펀의 한 찻집에서 만난 고양이들이다.

이렇게 길게 널부러진 채 발을 모으고 있는 녀석도 있었고,

초록잎을 품은 채 몸을 외로 꼰 모양새의 고양이도 있었다.

메뉴판에도 고양이들은 떼거지로 등장했는가 하면,

금세라도 쥐를 잡을 듯 잔뜩 옹송그린 채 튀어나갈 준비 태세중인 고양이도 있었다.

풀밭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펑퍼짐하게 퍼진 녀석들이 다섯 마리, 고양이 오형제다.

그러고 보니 왠지 올빼미를 닮은 고양이 두 마리.

그리고 각기 특징있는 색깔과 사이즈를 보여주는 세 마리.

찻집 어느 한 켠에는 몸을 동그랗게 만 채 새근거리며 잠들어버린 고양이도 한 마리 숨어있었다.

그리고 약간 무서운 표정을 지은 채 기둥 위에 올라가 손님들을 맞이하는 마중냥이도 한 마리.

뭐, 사실 약간 '고양이를 찾아라'라는 핫 검색어에 편승해 낚아 보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만간 포스팅하려던 타이완 주펀의 고양이 찻집 풍경.

이 녀석은 이 포스팅의 알파요 오메가.



선물로 받은 프라하산 고양이 한 마리. 자그마한 비닐백 속에 담긴 채, 빨간 끈뭉치랑 놀고 있었다.

비닐백에서 풀어놓으니 앞다리도 움직이고, 뒷다리도 움직이고. 세모꼴 귀만큼이나 쫑긋 선 꼬리가 귀엽다.

가만히 보면 표정이 익살스럽다. 코를 벌름벌름대면서 금방이라도 냐아~ 할 거 같다.

빨간 끈을 완전히 감아 버렸더니 살짝 실눈을 뜨고 나를 흘기는 듯한 저 고냥이스런 표정.

요새 보고 있는 책에 갈피해 넣었다. 하나의 땅에 사는 두 개의 민족 이야기다. 쉽진 않지만 꽤나 재미있다는.

실 끝을 부여잡고 있는 고양이의 자세가 왠지 굉장히 절실하다. 실을 놓느니 죽어버리련다, 정도의 결기랄까.

다른 쪽 끝, 고양이에겐 마치 세계의 반대편 끝이라고나 느껴지려나. 단정히 주저앉은 실타래.

내 선물 말고도, 집에 하나 새로 생긴 꼭두각시 인형. 손발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데 심지어는 걷는

모습까지 '레알' 재현이 가능하다.


 
1월, 내 생일날. 옛 서울역사에서 했던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을 보러 갔었다. 휑하니 낡은 역사에 수도조차

얼어붙은 그곳의 화장실은, 뿌옇게 먼지낀 창밖 풍경처럼 남루하고 싸늘했다.

3월 어느날, 홍대 근처의 어느 와플집. 적나라하지만 이쁘다고 생각했다.

HOMME과 FEMME가 적힌 알제리의 쉐라톤 호텔 화장실. 5월이었다.

7월, 휴가를 내고 고양이까페에 가서 고양이들이랑 네시간도 넘게 놀았던 날. 폭발적인 고양이들의 환대와

더불어 폭발하고 만 알러지 증세. 다음날까지 눈이 시뻘갰었지만, 여전히 고양이를 좋아한다.

고양이 까페에서 놀다가 찾았던 용산 남일당건물, 그 뒤의 공중화장실. 견(경)찰사용금지.

8월 여름휴가로 떠났던 캄보디아, 씨엠립 국제공항의 화장실에서부터 영역표시에 들어가다.


앙코르왓 어디메쯤에서의 화장실 표시. 생각보다 많지 않게 띄엄거리던 화장실이었던지라 표시가 무척이나

반가웠더랬다.

앙코르왓이 있던 씨엠립에서 프놈펜으로 달리던 버스 안에 있던 화장실. 한번 써보려다 말았다.

프놈펜의 왕궁. 왕궁 안에 있던 화장실, 맨다리와 맨팔을 드러냈다고 입장을 제지당한 사람들이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탈의실로서의 소임도 다하고 있었다.

앙코르왓 어딘가의 화장실에 붙어있던 표지판. 변기 위에서 똥싸지 마시오, 가 좀 충격적이었던.

9월, 예상치 않게 가게 되었던 제주도에서 들른 아프리카박물관의 화장실. 유쾌하고 귀여운 그림이다.

11월, 또다시 예기치 못한 제주도. 모 박물관에서 숱하게 마주친 화장실 그림.

예컨대 이런 식, '팬티 내리는 곳'이랜다.

공원식으로 꾸며진 뮤지엄 내부,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도처에 설치된 화장실 표시등.

입구 옆에 떡하니 화룡점정을 찍어주시는. 이제부터 나오는 두 장의 사진은 '19금'이다.

엄훠.

항가항가.

역시 11월의 제주도, 산굼부리. 레고블럭의 인형들처럼 생긴 남자와 여자가 몹시 마려운 듯한 표정과 포즈를.

화장실로 본 2009년. 끗.
#0. '장 그르니에'라는 섬에 대한 조각지도.

그의 글들은 쉽지 않다. '글'이라는 것이 뭔가를 묘사하고 구체화하는 거라면, 그의 글은 그의 내면 세계와

사고 과정을 묘사하고 스케치하는데 치중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자칫 난해하다거나 사변적이라는, 어렵게

쓰려고 참 애썼다, 라는 비아냥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의 짧은 단편들은 그의 내면, 그 구석구석에 대한 부분 지도와도 같다.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누구라 생각하는지, 여행이란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행을 왜 떠난다고 생각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런 굵직굵직하고도 근본적이랄 문제들에 대해 '장 그르니에'라는 이름의 섬을 조금씩 드러내는

지도인 것이다.



#1. 묘하게 빨려드는 헛된 유희의 중독성, 삶.

'이것'과 '저것'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게 삶이다. 두 가지 다 영판 아니다 싶고,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런 게 삶"이고, 일정 시간 후에는 죽음으로 흘러가도록 정해져 있다는 건 억지로라도

잊으려 애쓴다. 생일이 다가오면 한 살 더 먹었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뒤집어 살 날이 한 해 줄었구나,

라고 생각해도 안 되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터무니없는 공포심과 터부, 그 이외엔 없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은

'비인간적'이라 거부당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욱, 유희에 말려들어 덧없는 것 속에서 있지도 않은 것을 찾아 헤매게 되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 항상

좋고 완전한 것이란 없음을 알면서도, 일단 이 세상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악마'의 유혹이 귓전에 맴돌게

되는 거다. "목숨이 붙어 있는데 왜 안 살아? 왜 제일 좋은 걸 안 골라? 왜 좀더 낫게 살지 않아?" 라는. 그말에

따라 달리기를 시작하고 여행을 떠나고. 집 한 채 마련하려고 수십년을 바치고.


니체가 '동일자의 무한반복'이라는 세계의 이미지를 견디어내는 자를 일러 칭했던 '위버멘쉬', '초인'이란

단어는 유사한 현실인식을 궁구하면서도 끝내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장 그르니에에 붙음직한 칭호인지 모른다.

그는, 그렇게 무한한 밀물썰물의 진퇴를 반복하는 세상 가운데에서도 어느 순간 충만함을 맛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무 의미도 없는 파도의 움직임에 문득 의미가 깃드는 순간. 그 한 순간이면 된다. '행복하다'는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는 자는, 어쩌면 그 '한순간'이란 게 생각보다 인생 곳곳에 숨어있음을 알기 때문일지도.



#2. 여행의 대용품, 섬 찾아나서기.

어딘가로 떠난다는 건, 일상의 더께 속에 깊이 파묻혀 있던 감정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툭툭 먼지를 털고

다시금 탱탱하게 충전시키고자 함이다. 그렇지만 장 그르니에의 말을 빌건대, "여행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것이고.."

그는 여행이 꼭 필요함을 말하는 동시에, 또 부질없음을 말한다.


더구나 영상 매체와 온갖 미디어를 통해 세상의 낯선 풍경들, 내 멱살을 잡고 흔들어 정신을 번쩍 들게 해줄

그런 풍경들의 파괴력은 반의 반의 반쯤으로 줄어버린 게다. 이미 어디선가 한번쯤 본 풍경, 어디선가

보았던 구도를 답습하고, 꼬리를 문 관광객들의 뒤를 이어 화살표를 따르는 여행이란, (여행을 테마로 했다

주장하는 블로그를 채우려는 사람 입장에선 많이 아이러니하지만) 자칫 티비 다큐멘터리 하나 보는 것만

못한 지루하고 진부한 경험일 수 있다.


다행인 건, 우리 사이엔 아직 신대륙이 남아있다는 것. 남아있는 정도가 아니라 실은 매우매우매우 무궁무진

하다는 것. 장 그르니에의 단편들이 모인 이 단편선의 제목이 '섬'인 이유는, 그가 허무하고 부질없다 느끼는

삶에 애정과 온기, 열정을 불어넣게 되는 이유가 바로 '섬'에 대한 이해, 유대의 욕망이기 때문일 거다. 그는

본질적으로 삶이 무의미하고 공(空)한 것이라는 인식을 양보하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작은 고양이 한 마리,

두 그루의 나무, 한 번의 악수, 어떤 눈길, 그런 것들로 충분히 삶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섬. 점에서 조심스런 말줄임표로, 기어이는 선으로.

김기덕 감독의 '섬',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사람들이 제각기의 해안선으로 외곽을 단단히 둘러친 '섬'같다는

이미지가 단단히 굳어져 버렸다. 망망대해에 혼자만 존재하는 듯 덩그마니 놓여 있는 자그마한 땅덩어리.

사실 그런 이미지는 많은 선인들이 차용했던 것이었고, 그르니에 역시 그 궤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제각기 떠들고는 있지만, 사실 어느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이해받지 못한다는, 게다가 결국은 그 섬에서

굶어 죽던 나이들어 죽던 제각기의 삶을 소진하고 제각기 죽어갈 뿐이라는 식의 이미지.


다만 그는 '섬'이 갖는 폐쇄성, 소통불가능성, 본원적인 고독, 외로움 따위의 이미지에 더해, 그 복수의 '섬들'에

대한 여행의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저기 저 섬, 한번 여행하듯 떠나보지 않을래? 조금씩 지도를 읽어나가듯

이해하고, 소통해보지 않을래? 육체를 먼 곳에 내동댕이치는 여행이 아니라, 지독히도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다른 육체와 정신들에 대해 여행을 떠나보지 않으련, 하고 그는 권하는 것이다.


장 그르니에의 '섬'이란 그래서 동떨어진 하나의 점 같은 것이 아니다. 그 점들이 하나하나 이어져 조심스런

말줄임표로 서로를 탐색하고, 결국은 갸냘픈 '선'에까지 이르러 탄탄하고 의지함직한 '관계'를 만들어가려는

움직임의 시초, 일종의 씨앗. 그에겐 '보로메의 섬'이었던 그것은 아직 서로에 뿌리를 뻗지 못한 우리들이다.



#4. 글쓰기. '섬'으로의 친절한 초대장.

글쓰기란 그래서 내겐, 일종의 '작도(作圖)'다. 2009년 10월 20여일 어디메쯤의 나라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품고 있고, 이런 내면을 갖고 있음을 전하려는 지도 그리기나 다름없다. '블로그'라는 도구가 새로운 양 하여

뭔가 그에 걸맞는 뾰족한 수가 있지 않겠나 했지만, 그건 전혀 핵심을 놓치고 있었다. 블로그가 문제가 아니라,

글쓰기가 문제다. 그러고 나면 온갖 광고성 리뷰와 내키지 않는-고역스럽고 '일'이 되어버리는-포스팅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장 그르니에의 '사변적이고 난해한' 글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거다. 그의 글을 읽는다는 건, 전혀 경험치 못한

하나의 세계, 섬 안으로 걸어들어간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비록 그가 니힐리즘과 실존주의 철학의 역사적

궤적 하의 인물이고, 까뮈를 예비한 인물이란 정도의 배경지식이 있다 해도, 그래서 일정 지역에 몰려 있는

'군도'에 속해 있다 해도 그는 여전히 '섬'인 채로다. 그런 글조차 없었다면 대체 어디에서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또 대체 어디에서부터 그에게 '들어갈' 수 있을까 싶다.



- 10점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민음사


회사에 봉사 동호회 하나쯤 있어야 되지 않을까 하던 차에, 동기들과 의기투합해 뚝딱 만들고는 오늘 첫 봉사활동을 갔다.

서울 어디메쯤에 있는 한 아동 보육시설, 3세미만 영유아부터 초등학생들까지 한 60여명이 머물고 있는 자그마한 2층

건물이었다. 앞뒷 마당을 깔끔하게 쓸고, 마침 고장나 버린 세탁기를 대신해 세탁물을 헹구고 널고, 아가들 밥먹이고

대여섯살짜리 꼬맹이들이랑 놀아주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가버렸다.


그냥 아이들하고 잘 놀아주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끊임없이 안아줘, 업어줘, 한번만,을

외치는 극성스러운 아이들 틈에서 동기 하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말로 변신한 채 천지사방을 기어다니고 있었고, 나 역시

어느 순간 앞에 두 녀석을 안고 뒤에 한 녀석을 업고 말았다. 자기들 맘대로 해주지 않으면 미워! 하면서 연속 로우킥도

서슴치 않는 무서운 대여섯살 짜리 아이들, 서로 안기고 업히겠다고 아우성치다간 서로의 머리통을 그야말로 퍽, 소리

나도록 내려치는 서슬에 살짝 움찔해 버렸다.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3살미만 어린애들의 점심을 챙기면서 시설 근무자는 제대로 본을 보이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밥 다먹어가는데 넌 왜 이리 늦어, 봉사하는 사람들 왔다고 더 칭얼거리는 거야? 얼른 안 씹을래? 갓 24개월 지났다는

애가 미처 밥을 다 씹어 삼키기도 전에 우악스럽게 숟가락으로 입술을 눌러대고, 책으로 머리를 탁탁 쳐가며 재우쳤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는 과장님 말로는 자기 애는 밥먹는데 한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했는데, 그 아이들은 이십분만에

뚝딱 해치워버렸다. 봉사자들 앞에서도 전혀 거리낌없는 그 말투와 태도와 손속이라니. 한쪽에선 갓난애가 죽어라

울어대고 있었는데, 자꾸 어르고 달래주면 버릇만 나빠진다고 그냥 냅두라고 했다. 그런 분위기.


2층의 대여섯살 아이들은 1층으로 내려오는 게 금지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안고 업고 마당에 나가려고 계단을 한걸음
 
내딛다가 방안 가득 아이들의 새된 비명소리가, 게다가 내 가슴팍과 등언저리에서도, 뽑아져 나왔다. 안 되요, 혼나요.
 
그런가 하면, 애들 손이 안닿는 한구석 높은 곳에 쌓여있는 블럭이니 장난감들은 먼지가 묵은 때로 변해 두껍게 쌓여
 
있었다. 누가 봐도 이건 장식용이구나, 싶을 정도의 먼지 두께하며, 건네준 블럭을 주저주저하며 받아드는 아이의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태도하며.


그 시설 근무자들을 도덕적으로 탓하려는 생각은 별로 없다.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하고

여건의 문제로 봐야 하는 게 맞을 거다.
애들은 많고, 근무자 수는 적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감싸야 한다는 이야기는

사실 친부모에게조차도 쉽지 않은 이야기인 것을. 더구나 '봉사'를 한다는 마음에 고양되어 있는 '뜨내기' 봉사자와는
 
달리 근무자들은 그것이 비일상적인 봉사가 아니라 일종의 업무, 주어진 작업일 테다.

오히려 내가 착잡해졌던 건 다른 문제였다.


뾰족한 기술이나 실질적인 도움될 만한 게 없어 사실상 '몸빵'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닌 봉사였다. 그저 애들하고 잘

놀아주고, 조금이라도 웃게 해주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어쩌면 시설 근무자들이나 아이들에게나 역효과를
 
일으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아이는 마냥 이쁘지만, 막상 같이 사는 '가족'(시설 근무자)의 입장에선
 
그게 또 아닐 거다. 아이들이랑 놀아주고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그렇게 아이들의 요구사항에 싫은 내색 한번 없이

예스로 일관하러 온 봉사자들이란, 어쩌면 애들을 망치고 애들과 시설근무자들의 관계마저 악화시키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잠깐씩 손님처럼(손님으로) 왔다 가는 봉사자들의 선심쓴 관대함을 최대한 이용하려 들고, 근무자들은 관심의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성격만 극성스러워지고 (사회적인 어법으로 말하건대) '버릇만 나빠지는' 아이들을 다루느라

진이 빠질 거다. 아이들과의 마주침은 흡사 전쟁과도 같아지고, 늘어나는 건 제재요 후퇴하는 건 '당위적인 도덕률'들일
 
거다. 아마도 그렇게 진행되어 오는 상황일 텐데 거기에다가 '애들은 사랑으로'라느니, '절대 때리면 안 된다'느니

배부른 이야기는 차마 못 하겠다.


그 와중에 회사에 제출하기 위해 사진찍고 찍힌다는 행위가, 뜬금없게도 얼마전 고양이까페에 갔을 때의 그것과 중첩되어

보였다. 다소의 어이없음과 불쾌감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아동 보육시설에서의 (일회성) 몸빵

봉사활동과 고양이 까페에서의 고양이 사파리-고양이들과 놀아주는 것-의 차이점보다 유사점이 두드러졌다. 몇가지만
 
떠오르는 대로 적어봐도 꽤나 많다.


아이들이 드글드글대는 공간, 고양이가 드글드글대는 공간.
 
적절하고 꾸준한 관심을 줄 수 있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 주인이 없는 고양이들. 

로우킥을 날리고 머리채를 잡아도 귀엽다고 마냥 관대해지는 자세, 고양이가 바지에 오줌을 싸도 마냥 귀엽다는 자세.

아이들(의 버릇, 생활)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 홀가분한 입장, 고양이에 대한 책임은 질 필요없는 홀가분한 입장.

아마도 노인이나 장애인보다 아이들을 좋아할 취향, 아마도 개나 예컨대 쥐보다 고양이를 좋아할 취향의 문제.


뭐..시니컬하게 나가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비교적 온건한 것들도 벌써 이만큼이다. 어린 왕자의 여우가 갈파한 바

서로를 책임지지 않는, 길들여지지 않은 관계란 것은 온실 속 백만송이 장미꽃과 나의 관계다. 일회적인, 혹은 비일상적인

'봉사'가 갖는 치명적인 허점이 아닐까 싶다. 책임질 필요없는 대상에 대한, 취향이 반영된 선심. 더구나 그

누군가의 새삼스런 선심으로 인해서 더욱 사태가 악화될 가능성마저 생겨버린다면.


봉사란 뭘까.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하는 걸까. 한번 다녀오고 고민만 늘었다.

어쩌면, 비일상적인 봉사는, 그야말로 비일상적인 부분에 그쳐야 할지도 모른다. 쓸고 닦고 빨고, 그런 부분. 부족한

사랑을 채워준다는 미명으로 아이들과 놀아주고 마냥 귀엽다며 다 받아주는 '봉사'란 건 길게 봐선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키우는 맘으로, 책임지겠다는 마음이 아니라면.







고양이에 열광한다. 알레르기가 있다. 고양이까페에 갔다. 오줌을 쌌다.(1/6)

[사진] 고양이 클로즈업..@ 고양이까페.(2/6)

[사진] 스스럼없이 테이블을 차지한 고양이녀석들..@ 고양이까페.(3/6)

[사진] 대자로 널부러진 고양이들..@ 고양이까페.(4/6)

[사진] 가지런히 네발모은 고양이녀석들..@ 고양이까페.(5/6)


에 이어 여섯 번째로 이어지는 고양이 사진選입니다.ㅎㅎ

고양이의 몸에는 늘씬한 팔다리가 차곡차곡 접혀서 숨겨져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가제트 만능팔~이 덜컥

튀어나오듯, 고양이의 재빠르고 군더더기없는 움직임은 항상 우월한 기럭지로 뒷받침된다.

어렸을 적 몇십번씩 보았던 디즈니 만화의 고양이캐릭터들, 그리고 그 오리지널버전의 애기고양이까지.

까페 안엔 고양이들이 들어가 쉴 수 있는 공간이 많이 마련되어 있었다. 털이 복슬복슬한 이런 '고양이수납공간'.

아마 기어코 만지고 비비고 안아주겠다는 손님들이 있으면 쪼르르 이런 곳으로 도망치지 않을까. 저렇게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공간 밖을 내다보며 말이다.

1층위에 2층, 2층위에 3층, 3층위에..각 층마다 거주하고 있는 고양이들은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2층집 고양이가

애써 1층집 고양이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고개를 뺴꼼히 내세웠지만, 들은 척도 않는 나쁜 1층집 고양이.

그와중에 입맛다시는 3층집 고양이는 뭐고.

큰 대자로 뻗어 두발을 널부러뜨린 욘석은 여전히 잠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아늑한 바구니 안에서, 그것도 제몸과 색깔이 똑같은 보호색을 띈 바구니 안에서 옹송그린 고양이 한마리.

뭔가 놀란 표정의, 눈을 똥그랗게 뜨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고양이.

그리곤 다시 고개를 돌려, 고양이들 밥먹는 방으로 들어가려다 시작되어버린 눈싸움.

의자에 사람처럼 기대 앉아선 주변을 호기심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하양고양이.

그리고, 유독 내 가방에 관심을 보이던 몇몇 고양이들. 가죽냄새가 너희들을 흥분시켰던 거니.

짱구의 울라울라춤은 아마 고양이를 보고 영감을 받은 게 아닐까.

뭔가를 붙잡고 자야 안심이 된다는 듯 밧줄에 팔 하나를 걸쳐놓고 뒹굴거리는 대자 널부러진 꼬마 고양이.

까페 한구석에는 상처입은 유기고양이가 철망 안에서 적응 중이다. 뭔가 부럽기도 하고 착잡해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눈빛이라고 느꼈다.

이제 슬 갈 준비를 하려는데, 눈치를 챘는지 좀체 내 가방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급기야 앙탈을 부리는 녀석.
시간이 지나면서 늘어난 손님들, 여기저기서 본격적으로 놀기 시작하는 고양이들.

막판에 워낙 귀엽게 구는 통에 정신이 쏙 빠졌다. 아주 그냥 내 가방을 제 둥지삼아 끌어안고 살 기세다. 좋은 기세다.

형님 저는 이만.

왠지 이 녀석이 내 가방위에서 취하는 포즈들이, 요새 연예인들 섹시화보니 하며 찍어대는 그 사진들과 비슷한 포즈에

분위기에 눈빛이다. 요염한 녀석 같으니라고.

기어코 떨쳐내고 일어섰더니, 마침 옆 테이블에 와서 앉는 사람 가방으로 쪼르르 옮겨가 버린다. 순간판단력이나,

대응속도나...나무랄데 없이 쾌속하다. 아마 이녀석은...가방에 대한 페티쉬를 가진 듯.

집에 가는 길, 횡단보도에 빨간 불이 길어서 살짝 넘어섰다가 경찰아저씨가 쫓아왔다.

딱지를 떼고 말았다.ㅜ

그리고, 의사선생님은 '마치 짚을 이고 불섶에 들어간 것'과 같다며 알러지 반응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것이라 했다.

삼일동안 눈이 뻘겋게 충혈되어 지냈다.






꺄아~~ 완전 귀여워~!!

얼굴을 살짝 돌리면...꺄아~~ 너무 귀여워~!!

반대편 얼굴도 보여주셔요 고양이님~~! 꺄아~~~

고양이님과 눈높이를 맞춰 카메라를 들이대는 즐거운 한때.

꺄아~

응? 

꺄아~ 마치..해변가를 걷던 잘빠진 구릿빛 피부의 젊은 남자가 뒤에서 부르는 나긋한 여성의 목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살짝 돌아보는 듯한 분위기랄까. 방심한듯, 무심한듯, 하면서도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라는.ㅋ

이 몰입한 눈빛연기. 앞에 각잡고 앉아있는 고양이들을 눈빛만으로 제압할 기세다. 근데, 실은 아무것도 앞에 없었다.

왠지 심통스런 표정의 고양이. 나 지금 진짜 삐졌거든. 말걸지 마 흥. 정도랄까.

짝눈뜨니까 완전 불량해 보여. 왕년에 껌 쫌 씹었던 고양이. 그치만 별로 무게감은 없다.

완전 귀여운 새끼고양이. 눈을 몇번 꿈뻑거리다간 정신못차리고 잠들어버렸다.

흔히 여성의 눈을 두고 '고양이눈'이네 뭐네 하지만, 똑같은 고양이눈도 눈가 주름이 약간씩 씰룩거리면서 영

다른 분위기를 풍긴단 말이다.

왠지 고양이가 아니라 부엉이나 올빼미를 떠올리게 만들던 녀석.

이 아이들은 말을 할 줄 아는데 안 하고 있거나, 말을 이해할 수 있거나. 둘 중 하나..라고 믿게 만드는 눈빛을 가졌다.

이렇게 우아하고 의젓한, 그야말로 왕족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고양이는 처음 봤다. 다만 저 갈기갈기 갈기수염이

밥먹을 때 많이 불편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뿐.



금요일은 휴가였다. 비가 오는 꾸물꾸물한 날씨인지라 차를 끌고 그동안 별렀던 고양이까페에 가기로 맘먹었다.

유리창에 볼록볼록, 빗방울이 도톰하게 올라붙었다.

왠지 가는 길에 경찰차가 계속 눈에 밟혔다. 마침 빨간불에 걸린 김에 사거리 반대편에 보이는 경찰차가 뭐하나

궁금해하다가. 자꾸 경찰차가 유난히 눈에 띈다 싶을 때 조심했어야 했다. 결국 나오는 길에 딱지를 떼고 말았으니.

서울대입구역 4번출구로 나와 신한은행을 끼고 좌회전하면 나오는 지오캣, 알고 보니 6, 7년째 고양이까페를

운영해 오신 베테랑 사장님이 버티고 계신 고양이까페계의 좌장이랄까.

이곳을 가르쳐주신 윤뽀님의 포스팅에서도 봤었던, 이미 한번 눈에 익었지만 여전히 섬뜩한 경고문구.

고양이의 생명을 위한 길이 뭔지를 잘 생각하고, 양육자로서의 책임이 뭔지도 잘 생각하고.

(궁디)팡팡 금지!!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이 찌찌와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지를 기억한다면 조심.

고양이나 개의 '성격' 운운하는 말은 항상 뭔가 낯설면서도 신기하다. 당연히 갸들도 나름의 성격이나 스타일이 있겠지만,

대개 한 번에 한마리씩 조우하게 되는 터라 비교하기란 쉽지 않았던 터. 한꺼번에 수십마리의 고양이를 만나면 '성격'을

구분해 낼 수 있겠지..라는 기대로 드디어 입장~*

가장 먼저 눈에 띈 새하얀 고양이. 도도하게 몸을 누인 채 방심한 듯한 눈매를 흘리고 있다.

고양이들이 세걸음마다 한마리씩 놓여있었다. 말하자면 단위면적당 고양이밀집도에 있어서는 거의 세계최고수준 아닐까.

의자위에 올라가 있던 조그마한 새끼고양이. 하얀 털실뭉치같으면서도 올망졸망 달릴 건 다 달려있어 더욱 귀여운.

아무도 없던 금요일 오후 1시의 고양이 까페에 밀고 들어선 방문객에 조금은 동요하는 녀석들.

이녀석은 사자처럼 늘어뜨린 갈기를 우아하게 펼치고는 뭔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봐주었다. 고양이 왕인가.

주둥이와 귀, 발끄트머리가 온통 까매서 무지 세련된 느낌의 요 고양이는 슬슬 카메라를 의식하고 있었다.

고양이의 이 풍부한 표정이란..! 입매와 눈빛, 살짝 이지러진 얼굴의 각도만으로 표정과 분위기가 확 바뀐다.

못생겼단 표현은 고양이님께 죄송하지만...얜 참 독특하게 못 생겼다. 얼굴이 평면이다. 뭔가 스타워즈의 캐릭터스럽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길고양이나 친구집에 놀러가 마주한 고양이와는 다른 듯 비슷한 느낌이다. 다들 머릿속엔

나나나나나, 자신만 들어있는지 주변에 별로 괘념치 않고 있었다. 내가 카페 안을 헤집고 다니며 카메라를 들이대도

피하거나 겁먹지도 않고, 그렇다고 둔한 것도 아닌 것이 참 묘하다. 묘妙한 고양이猫들.

나와 동생은 고양이든 개든 키우고 싶어하는데, 어머니가 원체 반대하신다. 당신이 동물털들이 날리는 걸

못 보아넘기는 때문이기도 하고, 사실 아버지나 내가 살짝 알레르기 기운이 있어서 안된다는 거다. 난,

이렇게 고양이가 떼지어 모여있는 걸 보고 마냥 좋을 뿐이고.

이제 조금 차분하게 앉아서 고양이들이 노닥거리는 걸 구경할 생각이었다. 여태 까페 안을 헤집고 다녔으니 한마리한마리

눈여겨 보며 사랑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테이블에 앉자마자 내 무릎에 앉아 귀염을 떨던 고양이 녀석 하나, 갑자기

휴대폰 진동처럼 부들부들 떠는 거다. 급격히 따뜻해지는 내 아랫도리.

떨리는 목소리로 주인 아저씨를 불렀더니, 화장실 가서 깨끗이 씻고 드라이기로 말리면 된댄다. 자주 일어나는 일인갑다.

씻고 나와 그 녀석을 찾았다. 구석에 이렇게 숨어들어서는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그런 것처럼 보였다. 에구 귀여워라.




우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우리의 '생각'은 통제할 수 있으나, 모든 것을 말하는 '감정'은 통제할 수 없다. J.L.Godard

오랫동안 내 방에서 나와 함께 기거했던 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다.

그 중 한마리, 기분좋게 늘어져있던 책장에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펄쩍 뛰어내리더니 파삭, 하고 다리가 부러졌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당연한 결과일 텐데.
 

제깐에는 다리가 튼튼하다 생각했을까, 차갑고 단단한 유리가 깔린 바닥이 만만해보였을까.

얼룩무늬 고양이, 양쪽 눈색깔이 다른 오드아이는 고사하고 작은 눈을 쳐감고 있어서 눈색깔이 뭔지도 보이지 않지만,

게다가 터키쉬고양이같이 매력적인 눈매도, 앙고라같은 길고 탐스런 털도 갖고 있지 못한 녀석이었지만, 나름
 
귀여웠는데. 게게다가 두 녀석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더할나위없이 딱, '한 쌍'이었단 말이다.

그녀석이 원래 있었던, 있어야 할 자리에 다시 조심스레 놓아보았지만 뚝 끊어져 버린 다리가 험상궂다.

예전의 미묘하면서도 뭔가 귀엽던 표정도 살짝 경직되어 보이는 건...인간의 감정이입일 뿐인가.

반창고를 발랐다. "어차피 살아간다는 건 상처를 입는다는 말과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내가, 니 애비다.

어렸을 때는 어서 어른이 되어 상처를 덜 입기를, 금방 치유되기를 바랐고, 어른이라고 통하는 나이가 되어선 이순신의

마음을 깨우쳤다. 내가 상처입은 걸 남에게 알리지 말라.

괜찮다고. 넌 아직 어리니까 이게 '첫 상처'겠지만, 의식을 차리고 고작 스무해 정도 살아낸 나는 이미 넝마같은 마음과

잔뜩 헤집어진 상처들을 무수히 품고 있다고. 너도 이제 '괜찮다'라는 PAINKILLER을 식후의 누룽지맛사탕처럼 다소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그렇지만 어김없이-한두번쯤 입에서 굴려주곤 뱉는 규칙적인 의례에 익숙해질 거야.


그렇게 반창고를 둘둘 감아주었다.

넌 괜찮을 거야. 순결하고 완전하고 오점없는 인생을 바라던 사람들은 이미 다들 삶을 등졌으니.

차라리 일찍부터 큰 상처 하나를 안고 가는 게, 앞으로 있을 자잘한 상처들 따위에 코웃음쳐줄 힘을 주겠지.


고양이가 웃었다. 앨리스의 원더랜드에 나오던 체셔고양이처럼 웃음소리만 남기고 머리부터 사라지는 일은

생겨나지 않았지만, 반창고 발린 고양이, 깨졌던 다리를 다시 용케도 붙들고 있는 고양이를 보니 내게 믿음이 생겼다.

상처입었어도 다시 살아가. 책장에서 뛰어내려 다리가 부러져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고양이 두 마리가 다시 어울렸다.


 열반에 든 부처를 상징하는 와불상이 샛노랑 개나리색 옷을 입고 있다. 무슨 돌로 만들어진 건지 모르겠지만, 조금

녹아내린 건지 얼굴이 얼룩덜룩하다. 왠지 어렸을 적 했던 스트리트 파이터의 한 배경화면같은 느낌?

사이즈로 승부한 느낌이다. 더구나 뒤로 돌아서 본 헐벗은 등짝의 남루함, 그리고 발바닥의 꼬질꼬질함이라니.

발가락이 네갠지 여섯갠지.

무슨 탑이었는데...뭐더라...제법 높은 탑에 중턱까지 오를 수 있는 계단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온통 평지만 펼쳐진

태국에서 여기보다 높은 곳이 없다는 설명을 얼핏 어디선가 봤던 거 같기도 하고. 올라가봤는데 주변의 풍광이

온통 발아래로 말갛게 펼쳐졌었다. 탑이라기보다는 무슨 얄쌍한 피라밋같은 느낌?

위에서 내려다본 탑 아래의 풍경. 깔끔하고 실감나게 꾸며진 디오라마 마을같기도 하고, 입체감이 잘 느껴지는

가옥과 대문들이 손에 잡힐 듯 했다. 저 건물은 기억컨대 부처님을 모신 불당이었을 게다.

 여행지마다, 고양이가 참 많이 따른다. 뉴욕서도, 이집트의 다합에서도, 그리고 태국의 아유타야에서도.

굳이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면, 나름 말이 되는 것 중 하나가 고양이랑 개로 나누는 거다. 고양이과의 사람,

개과의 사람. 고양이가 가진 도도함과 자존심, 손길에 연연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표정이 흔들리는 듯한

모습. 다합의 모래사장에서 내 그림자를 청해왔던 그 자그마하고 귀엽던 새끼고양이처럼, 아유타야의 한 사원에서

중천에 뜬 태양을 피해 고양이가 내게 왔다. 고양이를 품었다. 그새 '품는 법'을 조금은 더 배웠구나.

적어도, 고양이 한마리 품을 만큼 여유가 생겼으니.


글로벌 고양강아지

 저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동물을 찾으라면, 아마 고양이와 강아지의 성격을 모두 가진 가상의고양강아지를 빗대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고양이와 강아지가 서로 매우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고양이가 가진 야무지고 조심스러운 성정과 고유영역에 대한 소신 있는 몰입과 같은 것들은, 강아지가 갖고 있는 원만하고 적극적인 친화력과 충성심 등과 뚜렷이 구분되는 특성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러한 두 특성을 모두 갖춘 채 적재적소에 필요한 성향을 드러내어, 최적의 맞춤형 인재로 부족함이 없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고양강아지의 유연한 태도와 타고난 친화력을 바탕으로, 제가 귀 기업에 대해 품고 있는 깊은 애정과 소속감을 펼쳐 보이고 싶습니다. 부드럽고 원만한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조직 및 개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

 - 산문시집 '구직험난(求職險難)' 제 1장 '글로벌 고양강아지' 일부 발췌, 이채(생몰년도 미상) 作






일본에 왜 이렇게 고양이들이 많은지, 그리고 고양이를 소재로 한 만화, 액세서리, 소품들이 다양한지 모르겠다.

이유는 몰라도 고양이가 눈에 띌 때마다 꺄아~ 하며 쫓아가선 사진을 찍기 수차례, 제풀에 지쳐서 나중에는 옆에

고양이가 멀뚱히 날 좀 찍어줘, 라 해도 애써 외면하고 지나기도 했다.
하카다역 근처 캐널시티 쇼핑몰에서 만난 고양이 인형. 이 므훗한 표정하며, 두손곱게 모아쥐고 투명한 유리공을

받쳐든 폼하며, 번들거리는 T존까지. 입꼬리, 혹은 눈꼬리가 어떻게 살짝이라도 비틀리느냐에 따라 표정과

느낌이 그야말로 천양지차로 바뀌고 만다. 당장 요 두마리도, 조금 덜 과감하게 웃은 왼쪽 녀석이 상대적으로

다소곳하고 순한 느낌이라면, 오른쪽 녀석은 왠지 잔뜩 장난꾸러기 같다.

후쿠오카 대로변의 한 주차장에서 등을 웅숭그린 채 사주경계 중인 호랑무늬 고양이. 복슬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앞발이 귀엽다.

구시다신사였던가, 신사에 있는 소원적는 나무판에 그려진 고양이. 축 늘어진 볼살을 그려내고 싶었던 듯 한데,

왠지 어색한 주름살로만 보인다. 그래도 천금과 만복을 가져다주는 고양이라니 번쩍 쳐든 앞발과 살짝 초점잃은

시선이 귀엽다고 치자.

큐슈지방에서 최대 규모의 잡화 전문점이라는 텐진 니시테츠 야쿠인역 인근 INCUBE 매장을 둘러보다가 한켠을

가득 메운 고양이에 혹했다. 섬세하고도 자부심강한 야옹이들의 러시.

하카타역 옆의 쇼핑몰 커낼시티를 걷다가 마주친 또다른 고양이들. 자세히 보면 사슴, 돼지, 토끼 등속도 보이지만

내겐 전부 고양이로 보인다. 특히 저 까만 고양이가 자꾸 눈을 당긴다.

텐진, 나카쓰 거리를 걷다가 문득 뒷통수가 근질거려 돌아본 곳에 버티고 앉았던 두 마리 얼룩 고양이. 깜장이랑

하양이 굵게 얼룩져 있는데, 두마리 다 콧등성이에만 조그맣게 검은 얼룩이 두드러진다. 도망가지도, 겁내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 당당한 녀석들.

다시, 인큐브(INCUBE) 매장에서 만난 깜장 고양이. 저 몽환적인 눈빛과 축 늘어진 사지하며, 따스하고

살짝 거친듯 부드러운 느낌의 재질하며. 은빛 단추로 표현된 코와 은은히 웃고 있는 입 모양까지.

그러고 보니 내가 고양이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던 체셔 고양이 때문이었던 듯.

몸뚱이만 서서히 지워져 나가고 난 후에도 그의 웃음소리는 남아서 사방을 울렸다는 그 입째진 고양이의

독특한 캐릭터와 카리스마가 좋았다. 

초점이 뒤에 있는 황금거북이한테 맞아 버렸는데, 요 두마리 고양이 장식품도 참 이뻤다. 심플하게 표현된 바디와

머리 위 장착된 두 개의 똥글똥글한 안구까지. 유려하게 슬쩍 웨이브를 탄 꼬리의 곡선도 미끈하다.

온갖 동물들이 인형으로 만들어지지만, 얼마전 아랍에미레이트에서 산 이뿐 낙타인형과 더불어 이렇게 귀여운
 
고슴도치 인형은 본 기억이 없다. 보드랍고 포근한 느낌의 고슴도치.

실사 고양이인형..이랄까. 땡그란 눈을 두리번대는 것 같은 왼쪽 녀석도 귀엽고, 살짝 자긍심에 차 업되어 있는

느낌으로 코를 들어올린 오른쪽 녀석도 귀엽다. 어리버리하지만 순해보이는 왼쪽 녀석과 야무지고 똘똘해보이지만

살짝 건방져보이는 오른쪽 녀석, 멋진 짝이다.

닥스훈트 밑에 깔린 새끼 강아지.

그리고 토토로~* 역시 인큐브의 잡화매장에서 찍은 건데, 한 코너가 온통 만화 캐릭터 상품들로 가득했다. 그 중

가장 눈여겨보았던 건 역시 토토로. 말도 몇마디 없고 단순히 행동과 표정만으로 존재감을 전달하는 이 캐릭터에

왜 그렇게 꽂혀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요녀석의 캐릭터상품을 내 사무실 책상에 꼭 올려놓을 생각.

당장 2009년 달력도 팔고 있었지만, 글쎄..1년만 놓고 버려야 한다는 건 좀 아쉽길래. 토토로 분수대를 사실 가장

갖고 싶다는.

만화의 나라 일본에서, 이런 식의 상품 설명 만화가 그려진다는 건 좀 굴욕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저

어색한 표정, 어색한 동작, 어색한 얼굴의 여자아이가 그려진 그림이라니. 멍하니 그냥 가만히 보다보면은 이거는

뭔가 아니다 싶어 밑의 아가씨는 저게 혀라고 빼물고 있는 건지 저건 뭔가 적잖이 속이 쓰려오는 그림.

일본의 음식점이나 가게에 들어설 때마다 보이는 본던져주는 고양이가 살짝 변형된 오른쪽 고양이. 이 아이는 다소

과하다 싶게 속눈썹을 그려놓아서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나름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참해 보인다. 그래도 역시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저 왼쪽 므흣고양이.

이런 식의 아이디어 상품. 비록 메이드 인 이태리..라는 글자가 선명하지만, 여튼 일본에서 봤으니깐. 저런 깜찍한

시계는 하나만 덜렁 있음 왠지 별로일 듯 하고, 다른 고양이 컨셉 소품들과 함께 있으면 정말 괜찮을 거 같다.

저런 독특한 소품들에 따르는 일종의 '규모의 경제'효과랄까, 한두개로는 별로 괜찮단 느낌이 없지만 여러개가

뭉쳐 있어야 비로소 그 진가가 살아나는 듯한.

전혀 고양이나 동물과 상관없지만, 저런 관람차 모양의 액자, 혹은 회전목마 모양으로 실제 돌아가는

액자도 꽤나 참신한 아이템이지 싶다. 애기들 사진 꽂아서 곁에 놔두면 혼자서도 재미있어하며 잘

갖고 놀지 않을까.

텐진의 어느 펫샵에서 만난 고양이. 엄청 나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길래 장난삼아 살짝 톡톡 건드렸더니 귀찮다는

듯 몸을 딩굴거린다. 왠지 한손으로 다른 한 팔뚝을 잡고는 뻐큐를 날리는 것 같은 포즈, 그리고 시크한 저 표정.

얘들도 동물이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커낼시티와 붙어있는 구시다신사에서 만난 상상속의

동물 녀석. 붉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건 잘 못 봤던 거 같다.

보통은 이렇게 회색빛 돌을 깍아서 만들지 않나. 얘는 근데 왜케 복슬복슬해 보이는지, 푸들의 몸을 빌린 거 같다.

얘는 표정이 맘에 좀 안든다. 사람을 내리깔아 보는 느낌의 눈빛. 게다가 살짝 입꼬리를 말고 웃고 있다.

신성한 소라며 대접받는 소 동상도 신사에서는 흔히 보이는 것 같다. 딱히 귀여운 느낌은 없고, 걍 동물이니까

끼워 준 셈.

부록삼아. 이 아이는 동물인지 식물인지..명확치 않으나 유산균 캔디를 샀더니 그 사은품으로 딸려있던 걸로 보아

유산균이라고 봐야 할 거 같다. 유산균은...식물은 아니니 포함시키기로 하고, 사실 유산균 캔디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저 휴대폰 고리를 갖고 싶어서 산 거였다. 꽤 귀여운 데다가 일본 여행의 기념품도 될 수 있을 듯하여.

일본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휴대폰에 달고 좋아라, 하면서 찍은 사진. 저 입모양은 딱 빙긋 웃는 모양이다.



중요한 사원, 신전들을 보호하는 수호상들. 비슷한 모티프로 제작된 상상속의 동물들이나 인물들이지만, 곳곳에서

색다른 표정과 뉘앙스를 만나게 된다. 약간은 찡그린, 멍청해보이기도 하고, 뭔가 불만에 가득하거나 화장실이

급해보이기도 하는 다양한 표정들. 

이거 왠지, 서울시청 으슥한 곳으로부터 아무런 조율도 의견수렴도 없이 서울의 상징으로 불도적식 밀어붙여지고

있다는 '해태'와 느낌이 닮았다. 사실 내가 알기로는 해태란 상상속의 동물은, 불교적인 색채를 많이 띄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불교의 나라 태국에 비스꾸레한 형상들이 넘쳐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겠다.


찍다 보니까, 얼레, 의식하기 시작하니까 사원 내 온갖 곳에 그런 수호상이 세워져있다. 문 양쪽으로 당당히 시립해

있는 건 물론이고, 이 아이들은 왠지 저 쓰레기통을 지키고 있다. 주위에 흘리거나 제대로 버리지 않음 우씨,

제스처를 취한 저 아저씨의 돌주먹에 호되게 맞는다는 뜻이렸다.

계단 모서리에도 생명체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스물스물 계단턱을 타고 내려와 쫑긋, 대가리를 세웠다. 머리

다섯개 달린 용가리라고 해야 하나, 발가락 하나하나 날카롭고 까칠할 듯한 이빨을 품고 있는 발바닥이라 해야하나.

난 왠지 황금발바닥에 한 표. 발바닥이라기에는 넘 심한 평발이긴 하다는 반론은 기꺼이 인정.

뭔가 불꽃같은 이미지의...개? 늑대? 여우? 어찌 보면 또 닭같기도 하다.

이 녀석은 왠지...뭔가 닮았다 닮았다 싶더니, 퍼뜩 떠올랐다. 요놈.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왠지 살짝 슬퍼보이면서 순종적인 눈매와 처연한 입꼬리, 그리고 몽땅한 두 앞다리를

치켜든 제스처와 분위기가 딱인 거 같은데.

이런 서양적인 마스크를 가진 녀석은 언제부터 이 태국 땅에 서있었을까. 어쩌면 이미 '색목인'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다른 이러저러한 경로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고대, 중세에는 훨씬 활발한 교류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녀석, 얼굴을 조금만 추상화시켜서 볼라치면 딱 시골동네 어귀에 섰는 장승닮았다.

입꼬리를 자세히 보면, 이녀석 비웃고 있는 거다. 푸훗..이런 식으로.


그리고 현대적 의미의 수호상들은, 영국의 왕궁 앞이라거나, 미국 워싱턴 국립묘지의 교대식장이라거나, 아직

잔존하는 몇몇 왕궁과 같은 시설을 경호하고 있는 살아있는 경비병들일 게다.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체, 공간의

일부가 되어 관광객들의 배경이 되어 주기도 하고 여전히 날선 권위의 생생한 증인이 되어 주기도 한다.

태국 왕궁의 경비병들은, 하얀 제복이 새하얗다 못해 형광등처럼 푸르스름한 기운마저 머금었다.

종종 수호상들은 문짝을 고정시켜놓기 위한 유용한 받침돌로도 사용되고, 만들어진지 얼마 안된 수호상들은

차가운 금속성의 철파이프를 잡고 있기도 했다. 예전같으면 생각도 못했을 용도를 발굴해낸 근대의 도구적 인간들.


이를 드러내고 제법 용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의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돌을 간지럽히며 표정 흉내내보기.

저 달그락거리는 자그마한 돌맹이를 만지작대다 보니 왠지 유쾌해졌다. 그나저나, 어떻게 집어넣었을까?

저 녀석이 찌익~ 입을 벌리고 돌을 앙 물고선 다시 빳빳하게 돌로 돌아갔을 리도 없는 거고, 돌을 덧붙여서 구멍을

막는다거나 할 리도 없는 거고, 신기한 일이다.

태국적인 느낌의 수호상..이라고 하면, 이제 이미지가 좀 머릿속에 구체화되면서 그게 무얼 말하는지 알 거 같다.

마치 A형의 혈액형을 가진 여자라거나 O형의 남자..라는 묘사가 대화하는 사람 간의 머릿속에 무언가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해서 나름의 유용성을 확보하듯이 말이다. 태국적 느낌의 수호상이라는 걸 머릿속에 그려보자면

아마도 뭔가 도톨도톨한 느낌의 혹이 잔뜩 붙어있고, 입꼬리를 쫘악 올려붙이고 있으며, 굵은 주름이 사정없이

흘러내리는 얼굴에 표정이 생생하게 묘사된 다소 위압적이면서도 살짝 우스꽝스러운..동물상이랄까. 그것도 닭의
 
벼슬, 사자의 갈기, 개의 꼬리 등속을 마구 짬뽕시켜 놓은..상상력에 적지 않은 재량권을 허용하는 윤곽.

나중에, 여행을 많이 다녀서 이런 수호상들 사진을 잔뜩 모으게 되면, 나름의 컬렉션으로도 괜찮겠다 싶다. 종교를

막론하고 지키고 싶은 권위와 힘이 있던 곳에는 모종의 경비병, 신적인 권능을 상징하는 수호자를 세워놓기 마련.


일종의 power-base가 소재하는, 소재했던, 혹은 새롭게 부각되는 곳의 상징, 슈렉 고양이를 닮은 수호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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