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집까지 걸어서 퇴근했다.

찬 바람이 떠밀어 더욱 재게 놀리던 발걸음이었지만 좀 지나니 몸이 훈훈해져 똑딱똑딱 걸었다. 똑,딱,똑,딱.

문득 내 안의 '불안과 불만'이 되살아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술에 잔뜩 쩔었던 내장이 다시 작동할 때처럼

기이하지만 왠지 안심이 되는 느낌이랄까.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그런 건 모르는 듯 마냥 든든하고 안정적이며 긍정적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때가 있었지만, 이미 그것도 옛날 얘기. 사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있지만 없는 척, 그렇게 애써 눈돌리는데

능숙해지는 것 뿐이었다. 지금의 나, 내 주위의 것들, 나로부터 뻗어나가거나 나를 얽어두고 있는 관계들에

대한 불안과 불만을 문득문득 잊어가곤 하지만, '잊은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


차라리 눈 앞에 딱, 불만의 대상, 불안의 대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것 때문에. 라고 말할 수

있는 타겟이 있다면 좋겠다고. 이미 지난 것들은 간편하게 추려져서 명료한 이유를 붙일 수 있지만, 지금

지나는 것들, 앞으로 지날 것들에 대해서는 마냥 막막하고 혼란스러운 이미지 뿐, 뭔가 딱 떨어지는 '답'이

없어 보인다.


몇 개의 통발을 지났다. 한번 지나고 나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적인 순간들, 취직, 진학, 입학, 그리고

탄생까지 거스를 수 있을 그것들. 어쩌면 그것들은 간편한 핑계가 되어 주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핑계거리,

혹은 시험관문이 사라지고 나면, 뭔가 그 과정을 거쳐 성숙하기는 커녕 마냥 나태하고 진부해져버려 '불안과

불만' 자체를 그냥 없는 문제인 양 하면서 외면하고, 그렇게 지친 어른이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수학을 왜 공부하냐고. 수학에서 배운 것들을 바로 써먹을 리야 없겠지만, 그걸 통해 사고의 논리력과 응용력을

배울 수 있으리라 믿는 거라고, 와타나베보다 먼저 생각했었다. 어쩌면 '불안과 불만'은 항상 그 시점까지

살아오며 배운 것들을 총동원해 해결하고 해소해야 하는 커다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응용력을 키우기 위한

연습문제들이 동나버린지도 오래, 응용력 따위 키우기도 전인데 하루하루 문제의 압박은 커져간다.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불만과 불안의 골이 깊으면 만족과 안온함의 산도 깊을 거라고. 정면으로 이 녀석들과

마주하지 않으면 하루하루 마비된 채 살아가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좀처럼 

듬직하고 안정감 있는 어른 따위 못해먹겠다. 혹여 그런 모습이 보일 때라 해도 그것은 연기, 내면에선 여전히

질풍노도가 치고 있는 데다가 나 역시 집중해서 그걸 바라보는 중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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