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신인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모신 곳. 901년 '우다이진(右大臣)'이라는 장관직에서 돌연 다자이후로 좌천된

미치자네는 2년 후, 이곳에서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무덤 위에 세워진 것이 이 '텐만구(天滿宮)', 그니까

신사로서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학문의 뜻을 이루고 부와 행운이 따른다나. 시골마을로 밀려난 이사람이 왜 무려

'학문의 신'으로까지 추앙받고 있는지는...글쎄, 관직운과는 별도로 학문적 성취가 대단했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다만 '학문적 성취'를 빌도록 특화되어 개창했을 이 신사가 언제부터 부와 행운까지 얹어주는 종합선물세트로

탈바꿈했을지 생각하다 보니, 결국 사람들은 언제 어느시대고 그런 것들을 바라는 법인가 부다 싶다.

다자이후텐만구에 가는 길에는, 엔 기호처럼 생긴 저런 문을 몇개씩 지나야 했다. 어렸을 적 민족사관이니 뭐니에

빠졌을 때에는 우리나라의 솟대, 천군의 상징이 저 문의 원형이라더라, 라고 외치는 비분강개조의 목소리에 동해

합세했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가까운 지역이 영향을 주고 받는 건 당연한 거고. 과거를 금칠하는 건 곧잘

현재를 비하하고 부정하는, 과거로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초래하는 것 같다. 자랑스러운 한민족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면서 외려 '지금 여기'의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그리고 과도하게 부끄러워하는 함정. 그러다가 덜컥

부국강병, 군사강국을 이야기하고 '다물'을 이야기하며 북벌이니 남벌이니. 심지어는 핵무장을 통해 무궁화꽃이

피었다고 비분강개조로, 혹은 격정적인 연설조로 눈물이 그렁그렁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유아적 발상.

그런 시끄러운 감정과잉의 것들보다는 차라리 요런 게 훨씬 좋다. 저 꼬맹이의 할머니뻘 되어 보이는 분이 아기를

들쳐앉고는 봉헌된 '신성한 소'의 옆에 바싹 붙어 사진을 찍고는, 잠시 눈을 감고 뭔가를 빌었다. 조용히.

또다시 지나는 문, 조금씩 본전에 다가설수록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교육 문제가 심각한

곳이니만큼, 학업성취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이 다자이후텐만구는 아마도 영원토록 무궁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은 얼핏 듣기로 대학교만이 아니라 중고등학교도 어딜 가는지가 중요하다고 하던데, 어쩜 여태껏 한국보다

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미, 조만간 한국 청소년들의 스트레스가 급격하게 상승해서

금방 따라잡고 또 추월할 거 같단 생각이 강하긴 하지만.

마침 이곳을 방문했던 날이 11월 15일, 일본 명절인 시치고산(753)이라고 했다. 여행을 다녀온 후 일본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마치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을 위한 백일잔치나 돌잔치를 하듯 일본에서 아이들의 건강과 행운을 빌어

주는 행사라고. 아이들이 무사히 크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기 위해 전통의상을 곱게 차려입고 신사에 가서는
 
조상신에게 인사도 하고, 사진도 찍고 하는 날이란다. 말그대로, 7, 5, 3살짜리 아이들을 위한 날.


정작 이렇게 이뿌게 차려입고 온 아이들이 꾸역꾸역 정말 쉼없이 신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무슨

중학교 입학시험이나 초등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 있거나, 막 치르고 왔나 했다.

저렇게 귀엽게 차려입은 아이들을 양손에 잡은 어른 한 명, 그리고 카메라를 쥐고선 버둥대는 아이들을 열심히

지휘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 어른 또 한 명. 그렇게 구성된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이들이나 아이들이 입은

옷이나 어찌나 귀엽고 앙증맞던지, 도촬 아닌 도촬이 계속되고 말았다는.

우리나라 산사에 오르면 입구에 시원한 샘물이 있듯, 후쿠오카에서 들어가본 모든 신사에도 그런 샘물이 있었다.

물맛이 좀 이상하다 싶어 그냥 손만 씻고 말았는데, 일본 사람들도 나이가 좀 든 사람들 아니면 딱히 마시는 것

같진 않다. 하기야 이런 신사가 한국의 절들처럼 산등성이에 버티고 서서 사람을 목마르게 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보고 귀여워 죽겠다고 생각하면 결혼할 나이라고 하던데, 한 세네살쯤 되어보이는 이 꼬맹이 아가씨의 눈이

어찌나 말똥말똥하던지. 그치만 결혼은 아직.

커다란 붉은 등을 지나면 인제 다자이후텐만구의 본전이다. 흐릿하게 디테일을 죽여놓고 보면 색감이나 목조건물

양식이나 얼핏 한국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요모조모 따지다보면 딱히 닮았다기도 민망하지 않을까

싶도록 달라 보인다. 부산에서 배타고 고작 3시간여 달리면 도착할만큼 가까운 곳인데, 사실 아는 게 없다.

본전 앞마당 좌측에는 점쟁이같은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아이들과 부모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꼬맹이가 점을 본 건지, 부적을 산 건지, 흐뭇한 아버지는 한 손에 잡은 뭔가를 늘어뜨리고 있는데, 애기는 바싹

얼어있는 표정이다. 여린 눈, 여린 피부가 감당하기엔 가을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그랬던 건가.

본전에 올라가 절을 하고 나오는 아이들에게 신녀, 라고 하나...그 누님들이 풍선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다홍빛

치마에 팔소매가 너풀대는 하얀 저고리, 그리고 반들거리는 긴 생머리를 정갈하게 동여맨 흰 머릿수건..(?)까지.

뭔가 단순히 전통을 지킨다는 느낌의 '민속촌 도우미'가 아니라 성당의 수녀님들에서 느껴지는 단정하고 깔끔한,

그리고 뭔가 비세속적인 '종교인'의 느낌이 들었다.

꼬맹이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주고 있는 부모들. 그리고 언니가 빠알간 원색의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게 여전히

낯선지 빤히 바라보는 여동생. 무엇보다 저 꼬맹이가 들고 있는 쪼꼬만 빽. 꺄아.

얜 뭘까. 한국이나 태국의 절에서 많이 봤던 것들과 비슷하긴 한데, 그렇다고 해태나 머 그런 불교설화상의 동물은

아닐 테고-여긴 신사 안이니까-, 그렇다고 한국설화에 있는 철을 먹는 불가사리, 이런 것도 아닐 테고-여긴 일본

이니까-, 정체가 싱숭생숭한 만큼이나 싱숭생숭한 저 눈빛. 녀석의 기분을 모르겠다.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본전에 들어가려는지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유유히 지나는 신사 관계자분. 감청빛

바지와 살짝 비취빛을 띈 저고리의 색감이 청신하다. 그리고 왠지 약간의 대머리 느낌이 더할나위없이 잘 어울리는

거 같다고 느꼈다. 저 의상을 걸치고 시커멓게 숱이 많은 머리였다거나, 곱슬머리였다면 전혀 안 어울렸을 듯.

본전에 들어앉아 뭔가 빌고 있는 학부모들, 그리고 아이들. 사람들이 꽉 차들어왔다가는 쑥 빠지고, 또 다음 팀이

꽉 차들어왔다가는 파도처럼 쑥 빠진다.

그리고 한 가운데 당당히 버티고 앉아 뭔가를 읊고 있는 아저씨. 일본 제품들에서 종종 느껴지는 세련된 색감은

어쩜 저런 전통의상으로 전승되는 과거의 빛깔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뿐인지도 모르겠다. 한국도 요새

세련되고 고급스런 색감의 한복이 많이 나오던데, 아직 그런 빛깔을 갖고 제품에 잘 적용하지는 못하고 있는 듯.

점보는 듯한 곳에 갔더니 무려 일인당 오천엔. 당시 1000엔에 15000원하던 환율이었으니..무지하게 비싸다. 그치만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역시, 불황 속에서도 아이들만 잘 타겟으로 하면 지갑은 쉽게 열린다. 특히

최근 '소황제' 외동아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중국이나, 더 말할 것도 없는 한국이나, 그리고 일본은 그렇지 싶다.

뭔가 빨갛고 노란 종이들이 가득히 묶여있다. 내가 어렴풋이 아는 바로는, 신사에서 점괘를 보고 운이 좋으면 그냥

가져가고, 좋지 않으면 신사 안에 묶어두는 곳이라고 하던데, 그럼 저 이뿌게 묶인 종이들이 온통 악운을 예언한

것들인 건가. 일본어로 뭐라고 쓰여 있긴 한데 영 까막눈이다. 그래도 한자는 잘 읽는 편이지만, 일본어에 쓰이는

식으로 한단어씩 뚝뚝 끊겨 쓰여서야, 좀처럼 이해불능인 게다.

그 아마도 악운을 예견해서 이곳에 동여매진 종이들 사이로 바라본 텐만구 건물.

사진을 찍다보면서 느낀 거기도 하고, 지금 또다시 느끼는 거기도 하지만, 어쩌면 난 아이들이 이뻐서라기보다는

저 쬐끄만 사이즈의 일본 전통의상..아마도 기모노?..의 색깔과 라인, 그리고 문양들에 꽂혔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저렇게 등 뒤에서 커다란 꽃모양으로 묶인 허리띠의 깜찍함이라니.

말하자면 다자이후텐만구의 기념품점인 듯 한데, 파는 게 대부분 부적이다. 이미 수험생활과는 상당히 멀어져버린

몸인지라, 학업관련 말고 다른 종목에 괜찮은 물건이 있음 기념품으로 사갈까 했으나 그다지 땡기는 게 없었다.

뭐...솔직히 녹록치 않은 가격도 한 몫했달까.

100엔짜리 제비라고 한국어로 적혀있다. 한국사람들이 꽤 많이 오나본데, 그치만 내가 다닐 때에는 다른 한국인들

거의 못 만났다. 아사히 맥주공장 견학갔을 때 만났던 게 사실상 유일무이한 한국인과의 접촉이었던가. 급격히

올라버린 환율 탓에 적지않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거나 다른 곳으로 돌렸다고 했고, 게다가 인근 국가에는

주로 패키지 여행이 많은 탓인지도 모른다. 내 일정 자체는 그다지 한국인을 피하려는 속셈이 없었으니.

다소...기분이 언짢았던 표지판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열매처럼 주렁주렁 달린 소원 적는 나무판들. 저렇게

조그마한 꼬맹이들이 뭔가를 간절히 두눈 꼭 감고, 혹은 머리를 푹 떨구고 빌고 있다. 합격을 바란다.

저만한 아이때부터 세상에 거부당한 느낌에 직면해야 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비극이지 싶다. 경쟁을 통한

선별작업도 좋고, 무한경쟁을 통한 체질개선도 좋은데...아직 가을햇살도 뜨겁고 눈부신 아이들이란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학업 성취라는 달콤한 과실을 설득력있는 스토리에 꿰어맞춘 이 다자이후텐만구는 살짝 애교스런

사기에 가까울지 모른다. 적극적으로 아이들의 '학업 성취'를 팔면서 그렇게 크지 않은 돈을 박리다매식으로

그러모으고 있는 게다. 머, 사실 어떤 종교던 뭔가를 팔고 있는 거지만, 다소 노골적이고 상대적으로 다소 단순한

것을 팔고 있다는 점에서는 무지 심플하고 담백한 공간이기도 하다. 여기선 부활이니 천국이니, 그런 세련된 걸

팔지는 않으니.

이 호리병들은 뭘까. 뭔가 안에 손오공이라도 가둬뒀을 법한 호리병들이 담고 있는 건, 사람들의 밝은 소원일까

아님 뭔가 이곳에 버리고 가고픈 악운이나 나쁜 감정일까.

그런 식의 소원적어 걸어두는 나무판은 다자이후텐만구 본전을 둘러싸고 쭉 계속 이어졌다. 어떤 한국사람은

독도는 한국땅, 이렇게 격정적인 궁서체로 적어놓기도 했고-미리 여기와서 그런 글을 쓰려고 붓을 챙겨올 만큼

용의주도했던 걸까, 아님 펜으로 붓의 궤적을 그릴만큼 집요했던 걸까-우리 사랑 영원하게 해주세요, 혹은 대학

가게 해주세요 운운운. 일본어는 하나도 모르지만, 일본어로 적힌 것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다.

바글바글한 꼬맹이들과 부모들을 품고 있는 본전 건물 뒷켠을 돌았더니 인적이 툭, 끊겨 있었다. 더러는 나무에

걸리고, 남은 햇볕들이 땅바닥에 누웠다.

신녀..라고 해야 할까, 라고 두번째 갈등. 여기서 있는 사람들은 계속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인 걸까, 아니면 뭔가

일로 하는 걸까, 아님 알바? 아까는 '종교인'의 포스가 느껴졌던 뒷태였지만, 이렇게 인적없는 곳을 종종걸음치는

모습에서는 왠지 몇세기 전 일본에 불시착한 느낌, 민속촌의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시치고산(753)을 맞아 가족사진을 찍으려는 듯 흥정하는 가족, 그리고 요 쪼꼬맣고 귀여운 아가씨의 뒷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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