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실.

@ 제주도.
주상절리 가는 길, 잘 생긴 야자수들이 늘어서 있고, 오른쪽엔 현무암으로 쌓은 돌무덤들이 드문드문.

주상절리, 주상절리, 소리내어 발음을 해보면 왠지 '주상절리'라는 쫀득한 젤리가 입안에서 착착 감기는 느낌이다.

막상 녀석의 생김이란 울툭불툭, 육각형의 까칠하기 그지없는 기둥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니, 이름하곤 별로

매칭률이 높진 않다.

주상절리가 어떻게 생겨난다더라, 뭐 세세한 건 다 까먹었지만 요는 그렇다. 바다 밑 땅속에서 부글부글 끓어 넘쳐나온

용암이 파앗, 하고 분출하는 순간 바닷물에 급속 냉각되면서 빳빳하니 굳어가며 육각형의 결정형태를 이룬다던가.

갠적인 생각으로는, 그런 거 모르고 보는 게 더 신기할 때가 있다.



작년 10월에 제주도 출장을 가서 머물렀던 펜션. 제주 컨벤션센터와 가까워서 좋기도 했지만, 일단 통나무로 이쁘게

지어진 2층짜리 펜션이 넘 이뻐서 좋았다. 더구나 2층은 뾰족한 세모꼴 천장이 그대로 살아있었다는.

펜션 자체도 이뻤지만, 앞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귤밭이 정말. 2008년 10월 말께의 노란 제주도 귤밭.

워낙 귤나무가 무성한 잎사귀들을 달고 있어서 무슨 정글 속에 노란 귤 한 박스쯤 쏟아 부어놓은 듯한 느낌.

신라호텔이었던가, 여기 전복죽이 아주 맛있다는 이야기에 죽 한사발씩 먹고 산책삼아 걸었던 호텔 정원.

수영장 바닥을 파란색으로 칠하는 건 참 멋진 아이디어였던 거다. 시원해 보이고, 맑아 보이고, 그래서

뛰어들고 싶게 만드는 파랑물이 일렁일렁. 옆에 있는 파라솔들 역시 매력도 아닌 '마력' 아이템.

신라호텔 뒷길 산책로가 그렇게 유명하다고 하길래, 그래? 이랬더니 여기에 바로 그 쉬리 마지막 장면을 찍은

벤치와 언덕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휘적휘적 걷던 중에 마주친 (징그러운) 잉어떼들.

옛날 이야기 중에 물에 빠진 사람을 물고기들이 수면으로 떠밀어올려 살았다거나, 적들에게 쫓기던 와중에

물고기들이 물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어 큰 강을 건널 수 있다거나. 이걸 보면 왠지 있음직한 일이다.

어디 한번 먹다 죽어봐라, 하는 심정으로 먹이를 뿌려댔을 거다 분명히.

그러고 보니 이 날도 꽤나 흐렸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니 한걸음 한걸음 가까워지는 해안가. 깜장이 현무암

울타리를 넘어서는 초록빛 싱싱한 풀밭에 들꽃이 지천이었다.

이게 바로 '쉬리 벤치'. 한석규와 김윤진이 나란히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When I dream..

그러고 보면 '쉬리'란 언젯적 작품이냐..1999년이었을 거다. 근데 쉬리의 영문명이 Swiri라는 건 방금 알았다.


일망무제의 바다, 터무니없이 큰 물웅덩이를 눈앞에 두고 있으면 왠지 막막해지기도 하고, 멍해지기도 하고, 그렇다.

해변을 따라 제주도에서 흔치 않을 모래사장이 곱게 이어져 있었다.

돌아오는 길엔 억새가 깃발처럼 나부꼈다. 호텔 시설을 굳이 사용하지 않고도, 단지 산책로를 걷고 쉬리 벤치에

한번 앉아 보는 것도 괜찮다 한다. 지나는 길에 잠깐 차 세우고 걸어봄직한, 짧막하지만 꽤나 이뿐 산책로.




짧은 제주 일정의 마지막 경유지는 바로, 성산 일출봉. 대학교 일학년 때 친구들과 자전거로 제주도를 일주할 때

멀리서부터 그 봉우리를 보고는 다들 미친듯이 페달을 밟았던 기억이 생생한 곳이다. 이번에는 일출봉 바라보고

가던 길에 배가 고파 살짝 무슨무슨 맛집, 어디 프로그램 소개 맛집, 요런 데 들러서 가볍게 식사를 했다.

그 식당 앞에 무질서하게 쌓아올려진 듯 보이는 돌담, 바람이 숭숭 잘도 통하게 쌓아놨다.

매표소 옆의 계랸색 매점 건물을 지나 눈을 높이면, 웅장한 맛을 풍기는 일출봉이 우뚝하다.

제주 지역방송들이 방송 중간중간에 간지 끼워넣듯 껴넣는 이미지, 성산 일출봉에 해뜨는 모습이라지만 사실 여기서

해뜨는 건 번번이 못 보고 지나갔었다. 가족들과 어렸을 적 왔을 때는 아예 요앞에서 묵으며 해를 기다렸는데 날이

흐려서 못 봤었고, 다른 날은 여기에서 일출이나 일몰을 기다릴 타이밍이 되지 못했더랬다.

성산봉 오르는 길목, 초록빛 싱그러운 초원 위에는 잘 생긴 갈색 말 몇 마리가 묶인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뿐 아니라 제주도를 돌다 보면 드문드문 승마 초보자 환영, 말타볼 수 있는 곳, 이런 간판을 많이 볼 수 있다.

초원 같은 평지, 살풋 각도가 느껴지는 평지를 지나 본격적으로 등산 시작. 일출봉 어귀에 있던 매점에는 중국어가

떡하니 적혀있었다. 샨샹메이요우슈웨이~. 일출봉 오른 후엔 물 파는 데가 없으니 여기서 사란 얘기. 그러고 보면

제주도에서 중국인 단체관광객은 눈에 참 많이 띈다.

일출봉 가는 길이 그때도 이렇게 잘 닦여 있었던가, 처음부터 끝까지 차곡차곡 계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다지 길지

않고 힘들지도 않은 코스, 지레 겁먹었던 동생님도 어느새 생기발랄해졌다. 왕복 50분이면 넉넉히 보고 돌아올 듯.

일출봉에 올라서서 바람으로 땀을 식히는데, 좀 곤란하다. 커다란 분화구 모양의 일출봉. 사진을 찍을 만큼의 적당한
 
거리를 허용치 않은 채 나와 방문자들을 덥썩 안아 버렸다. 제법 까끌하면서도 부드러운 질감이 느껴지는 초록빛

커버가 분화구를 매끈하게 메우고 있었다. 현무암에 잔뜩 슬어있던 이끼같기도 하고, 스프 위에 좀 과하게 뿌려놓은

아스파라거스 가루 같기도 하다.
 
안개 자욱한 분화구 너머 마을이 희끄무레하게 보이고, 분화구의 오톨도톨한 가장자리가 험준한 산의 능선이나

백두대간처럼 쭉 이어진 산맥처럼 보인다. 파도치듯 쉼없이 달려나가는 백두대간의 미니어쳐랄까. 아님 우유 광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우윳방울이 낙하한 직후의 왕관같은 흔적과도 흡사하다. 천분의 일초 쯤으로 찍어올린 장면,

튀어오른 물방울들은 전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정상에서 굽어본 중간 쉼터. 사람들이 조그만 게 개미같고, 나무들은 딴딴하고 속이 찰진 파슬리나 브로콜리 같다.

멀리 보이는 마을과..저건 호수인 척 하는 바다일까. 그러고 보니 이날 날씨가 하루종일 흐린 편이었기에

더위도 덜했고, 땀도 그다지 많이 나지는 않았던 거 같다. 바람이 찍혀 나온 사진.

성산 일출봉에 올라 사람들이 밟을 수 있는 영역이란 딱 여기까지다. 울타리가 설치된 구간은, 커다란 분화구의

오분지일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의 공간만 확보해 주었을 따름이다. 사람들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나름

최선의 뷰를 잡아보려 애쓰지만, 어쩌면 이 곳의 풍광을 오롯이 감상하려면 열기구나 헬리콥터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게다가 맨눈보다도 못한 카메라로는 눈으로 감상하는 풍경의 절반도 담지 못하겠더라. 적어도 나는.

내려가는 길, 그러고 보니 내게 남아있던 일출봉의 이미지란 단지 그 뾰족한 화구만의 것은 아니었다. 거기까지

이르는 길에 푹신해보이도록 깔려있는 녹색의 잔디밭, 언덕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곡선, 그리고 그 너머에서

산산이 부서져 있는 햇살, 그 햇살이 둥둥 표류하는 바다.

어라, 한쪽에는 모터보트 선착장도 생겼나보다. 이런 거 못 봤던 거 같은데. 계속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 내어 굳이

대조해보게 되는 건 왤까.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느끼려고 애쓰면서도, 막상 쉽지 않다. 어쨌거나, 혹시

모터보트 추격신이 필요하거나 해안 총격장면을 찍어야 하는 감독이라면 한번 추천해주고 싶긴 하다.

내려오는 길 어딘가에서부터 사람들이 다듬어진 돌계단길을 버리고 잔디밭으로 걷기 시작했다. 사실 보폭이 그다지

고려되지 않은 채 만들어진 계단인지라 계속 왼쪽 다리로 계단을 내려서게 되거나, 혹은 반발짝을 마저 걸어야 하는

등 좀 불편하고 힘들었다. 푹신푹신, 경사가 제법 되는 길인데도 사방을 둘러보며 걸을 여유가 생겼다. 덩달아

여유로와보이는 저너머 '노인과 말'.

늘 생각하지만 제주도에 가서 성산 일출봉은 왠만함 꼭 들러야 하는 곳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봉우리 하나

등산하듯 오르내리는 게 아니라, 그 봉우리 앞에 쫙 펼쳐져 있는 이런 풍경들, 이렇게 이쁜 길들, 그것들은

'성산 일출봉'이란 이름과 떼어놓을 수 없는 매력적인 공간들이지 싶다. 일출봉이 덮고 있는 무릎깔개처럼

안온하고 포근한 느낌을 전해주는 그 보들보들하고 싱싱한 녹색. 그러고 보니 언젠가 한번 구경갔던 골프장의

인공조경과 비견할 만한 굴곡에 녹색이다.


일단 올해 다녀온 제주도 여행기는 여기서 끝~*


제주#1. 제주올레 7코스, 외돌개를 끼고 걷기 시작하다.
제주#2. 꽃길, 찻길, 논두렁길, 바닷가길을 넘어 건너.
제주#3. 철조망에서 자유로운 제주도의 해안..?
제주#4. 남/녀 노천탕에 사람은 없고 조개껍데기만.
제주#5. 올레길 7코스의 바닷가 우체국.
제주#6. 강정포구 가는 길(올레길 7코스)
제주#7. 올레길 7코스 vs 해군기지.
제주#8. 월평포구에서 끝난 올레길 7코스.
제주#9. '업'에서 나왔던 커다란 새를 찾아내다.(아프리카 박물관)
제주#10. 오설록녹차박물관에서 '현미녹차'를 생각하다.
제주#11. '식상한' 천지연보다 '제주감귤와인'이 궁금했다.
제주#12. 이름이 왜 5.16도로일까.
제주#13. 숲다운 숲, 비자림 거닐며 산림욕 한번 어떨지.



비자림, 어렸을 적 바둑을 잠깐 배웠을 때 적당한 두께의 비자나무 바둑판이 최고급이라는 풍월을 들었던 거 빼곤,

비자나무라는 이름 자체가 낯설기만 했다. 제주도의 서북쪽께, 제주시와 성산일출봉 중간쯤에 있는 비자림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대단히 희귀한 비자나무 숲이라고 한다.

티켓을 받아들고 이거 뭐야, 했다. 왠지 글씨체가 북한에서 많이 쓸 법한 격정적인 궁서체여서, 전반적인 티켓의

색감도 왠지 남한보다는 북한에서 많이 쓸 법한 느낌? 개성공단에 갔을 때 보았던 한글 간판들의 궁서체와 꽨

흡사하다 싶다. (이런 글 쓰면 조만간 티켓 디자인 바뀌는 거 아닐까 몰라. 근데 특징적이란 얘기지 절대 싫다거나

혹은 '표 디자이너'가 빨갱이 아냐, 란 식의 이야길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아 이 기나긴 자기검열과 지레 핑계대기)

매표소에서부터 4-50분 걸으면 비자림을 한바퀴 여유있게 걷고 나올 시간이 된다고 한다.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하트 모양 뚫려 있는 바위와 잘 조성된 정원. 연인끼리 간다면 하트를 마주한 채 양쪽에 설 법한,

전형적인 포토존이다.

비자나무의 이름은, 잎의 뻗어나간 생김생김이 한자 아닐 비(非)자(字) 닮았다고 해서 비자(非字)나무라고 한다.

은행열매랑 비슷하게 생긴 누런 빛의 열매가 투둑투둑 떨어져 있었는데, 은행열매의 고약한 똥내와도 다르고

살짝 시큼한 느낌, 혹은 비린내가 풍겼다. 왜 오존발생기에 코를 박으면 맡을 수 있는 그런 비릿한 냄새같기도 하고.

돌에 잔뜩 끼어있는 이끼는 볼 때마다 신기하다. 대체 저 돌멩이에 빨아먹을 양분이 뭐가 있다고.

'숲'이란 건 왠지 생소하다. 무럭무럭 자라난 나무들이 이렇게 하늘을 가리울 만큼 커진 채 무리를 이루고 있는 걸

보기가 쉽지 않은 탓이기도 할 거고, 숲이라고 불릴 만큼 너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나무들을 보기도 쉽지 않아서다.

그런 점에서 비자림은 꽤나 숲다운 숲이었다. 울창하고, 푸르고, 아늑한 느낌에다 살짝 비릿하지만 상쾌한 내음까지.

연리지. 아마 이 단어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건 최지우가 주연을 맡았던 동명의 영화보다도, 각종 퀴즈프로에서

심심치 않게 나왔던 덕분이 아닐까 싶다. "이 비자나무에 영원한 사랑을 빌어보세요."

사진이 좀 흔들렸지만, 한때 나의 드림카였던 푸조 시리즈. 무려 '푸조나무'라는 나무가 있어서 신기해서 한방.

이름이 무려 "새천년 비자나무". 2001년인가, 당시 수령이 830여세의 이 나무를 두고, 비자림에서 니가 짱먹으라며

붙여준 이름이란다. 당시 '새천년'이란 단어가 유행하긴 했지만 나무에도 이런 악취미한 작명이라니. 뭔가

비자림을 관장하는 숲의 신이 깃들어있는 듯한 포스를 쫌 말아먹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내려오는 길, 비자림을 걷는 사람들이 발을 씻거나 신발을 씻고 갈 수 있도록 마련해둔 수도꼭지도 범상찮다.

종종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걷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는데, 따라하고 싶은 맘이 쿡쿡 솟아났지만 참았다.

'새천년 비자나무'를 기점으로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다른데, 그곳까지 걸어들어가는 길이 나무가 잔뜩

우거진 숲길이었다면, 그곳에서 걸어나오는 길은 잘 정돈된 산책로 같았다.

그림같은 길. 걷기도 편하고. 현무암 돌담길을 옆에 끼고, 황토빛 흙길에 떨궈진 비자열매들을 즈려밟으며,

내딛는 걸음걸음 뚝뚝 끊어져 내린 햇볕들과 희롱하다. 약간의 저항감이 느껴지던 열매가 터질 때 퍼지는

비자열매의 향기란.

이상하다 싶도록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 사람. 누구냐 넌. 안 올리려다 배경이 워낙 이뻐서.

걷는 속도로 사진찍기. 멈춰선 사진엔 왠지 직접 걸으며 느끼는 실감이 덜하겠다 싶어서.

거의 입구까지 돌아나온 길, 한 쪽에는 벼락맞은 비자나무가 있다.

하트무늬로 구멍뚫린 돌 옆도 다시 지나고, 저거 자연적으로 생긴 걸까, 그렇담 정말 멋진데.

이제 제주도에서 꼭 빼놓을 수 없는 마지막 장소만 남겨두고, 비자림을 떠났다. 아무래도 밤비행기를 타기까지

하루코스는 정말 잘 짠 거 같다. 아침부터 오설록녹차박물관-아프리카박물관-서귀포시 점심-천지연폭포-

-비자림-그리고 바로 그곳-제주시 저녁까지.




제주도에 갈 때마다 드라이브 코스로 잊지 않는 5.16도로. 길 양쪽으로 길고 잘생긴 나무들이 쭉쭉 뻗어있다.

이야~ 여기 진짜 좋다, 란 탄성이 한 세네번 터지고 난 즈음이면 어김없이 길 한켠에 차를 대놓고 나와서

주위를 거니는 사람들을 마주치게 된다.

길도 적당히 꼬불꼬불거려서 운전하는 재미도 있고, 온통 양치식물이나 덩굴이 휘감긴 반듯한 줄기들을 보자면

어딘가 원시림의 냄새도 풍기고.

근데 왜, 이 멋진 도로의 이름이 5.16인 걸까. 이름의 유래도 모르겠고, 그런 무성의한 숫자이름 따위보다 좀더

이뿌게 이름을 짓는 게 어떨까 싶은데. 예전에 '블랙홀'이란 헤비메탈그룹이 이런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

"815, 419, 516, 1212, 518, 629, 그리고 성수대교~" 운운하며 나가는 노래였는데, 5.16이란 숫자 혹은 날짜가

갖는 애초 의미가 무엇이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516도로에서 박정희의 5.16 쿠데타(누군가에겐 혁명)를 생각하지

않을까. 이 도로를 박정희 쿠데타 기념으로 착공한 건 아닐 텐데. 설마 그런건가..ㅡㅡ


차제에 이름 공모라도 해보는 게 어떨지. 이 아름다운 길에 걸맞는 좀더 이쁜 이름이 있을 거 같은데.

주차장 한 켠에서 뒤뚱맞게 어기적대던 오리. 어디선가는 개 대신 오리더러 집을 지키라 시킨다던데, 이 녀석도

목청은 타고 났다. 꽥꽥 꾸엑 그엑 구웩~ 좀만 있음 피토하며 득음하시겠다.

실컷들 사랑하라 가슴이 있을 때, 죽은 뒤에도 네 사랑 간직할 가슴 있겠니.

두 가지다. 가슴이 무슨 밥사발도 아니고 거기에 사랑을 무덤밥모냥 퍼담는 것도 아닐진대, 그리고 '사랑하라'는
 
여리고 고운 메시지를 이렇게 반말투로 해서야 되겠니.

그 옆에 천지호. 윙버스였던가, 에서 보았던 천지연의 대표 이미지였던 거 같은데 이 돛의 그림은.

천지연 폭포를 보러 가는 길은 두 갈래, 보통 오른쪽으로 걸어들어가 폭포를 보고는 왼쪽길로 돌아나온다. 몇 번쯤

제주도 올 때마다 들렀던 거 같은데, 좀체 기억이 안나신다는 동생님의 기억상실증 치유를 위해 다시 간 길이었다.

구멍 송송난 현무암 재질의 돌하르방, 최근 모아이석상의 모자를 어떻게 씌웠는지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던가,

서태지의 공연이 보고 싶어, 왠지 방구석에 기대어 앉아 두 무릎을 잔뜩 끌어당긴 채 움츠러든 모습 같지 않나..

라는 식으로 마구 자유연상을 뻗게 해준 돌하르방들.

드디어 천지연 폭포, 온통 대기를 젖게 만드는 폭포의 포스도, 엠씨스퀘어나 아이도저처럼 규칙적인 음향을 내며

떨어지는 폭포수의 호쾌한 소리도, 동생님의 기억상실증을 치유하진 못했다. 다만 이제 다시 기억을 꾹꾹 눌러

담았을 테니 됐다.

여름에 수량이 좀더 많았었을 때 왔던가, 내 기억에 비해보면 조금 수량이 줄은 거 같기도 하다.

천지연 폭포 앞에서 이리저리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 길, 다른 때에도 그랬듯 폭포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해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무리무리 자리잡고 있었고, 친구끼리 여행온 듯한 유쾌한 녀석들 몇몇은 폭포수로 가글하는

사진 연출에 여념이 없다. 왜 그런 거, 피라밋을 손끝으로 잡아올리고 에펠탑을 두손으로 미는 사진처럼.

삼복이 온다고 했다. 거북이와 원앙과 또 하나가...뭐였더라. 장수, 금슬, 또 하나는 백방 출세의 아이콘이었을 텐데,

여튼 다리 아래 저들이 붙잡고 있는 바구니 속에 동전을 넣는데 성공하면 출세도 하고 사랑도 지키며 오래 살 수

있다는 이야기. 원래 안 그런데 단번에 성공했다. 이 날을 기점으로 인생이 바뀌었어, 라고 훗날 말하게 될까.ㅋ

천지연 폭포에서 돌아나오는 길에 저 절벽 어딘가를 잘 보면 사람 얼굴이 나타난다던가. 기본적으로 너무 어둡게

찍은 탓도 있지만, 맨눈으로 봐도 난 잘 모르겠더라. 차라리 그 커다란 바위 병풍 위에 우거진 나무들의 짙푸른

녹음이 와닿았다.

천지연 물줄기가 돌틈을 타고 내려와 바다로 흐르는 길.

천지연 물줄기가 돌틈을 타고 내려와 바다로 흐르는 길을 찍는 사람이 찍힌 사진.

감귤초콜렛은 이미 익숙해졌을 만큼 성공한, 안정된 상품인 거고, 새롭게 등장한 응용상품들이 눈에 띄었다.

제주감귤주, 감귤와인, 백년초초콜렛, 감귤크런치초콜렛...감귤와인이 정말 궁금했다. 복분자와인이니 뭐니

많지만 늘 궁금했던 건, '와인'이란 단어가 애초에 '포도로 만들어진 것'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건 아닌가?

감귤와인이 아니라 감귤(과실)주 정도가 맞을 거 같은데. 그런 건 차치하고 일단 맛이 너무너무 궁금했지만

운전을 해야 했어서 안타깝게도 패스.

딱 이거다. 돌하루방 중에 가끔 찐따같은 포즈와 표정을 가진 것들이 있다고 느꼈었는데, 딱 이거다.

이녀석의 속마음. "흥, 아무리 옆에서 아줌마들이 날 떼어놓고 자기들끼리 좋다고 웃으며 떠들고 있어도 괜찮아.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보이는 건 한라산의 용암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기억하기

때문일 뿐이고, 두무릎을 바싹 땡겨 안은 채 안쓰러워 보이는 포즈를 굳이 잡고 있는 건 그저 무릎이 시려웠을

뿐이야. 기억할지 모르지만 난 제주 할방/하루방이라구. 건방지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 것들이 말야."


미안해 할방...풋.

* 천지연 티켓. 티켓에 나온 사진이나 지금이나 별반 유량의 차이는 눈에 안 띈다. 원래 이런 거였나.








오설록 녹차박물관, 아침부터 대형관광버스로 꾸역꾸역 관광객들을 토해내는 걸 보니 확실히 여긴 뜬 곳이다.

그럴 만도 한 게 녹차를 사업적으로 재배해 보겠다고 나선 한 기업 오너의 열정과 의지로 나름의 성공을 구가하고

있는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이다. 녹차라는 아이템을 세련되게 다듬고 새로운 상품을 고안해 내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녹차 문화도 좀더 본격화되었지 않나 싶다. 사실상 곡물차로 분류되어야 할 '현미녹차'가

고소해서 좋다던 입맛을 나름 다양하게 변화시켜 주었으니 말이다.

이 분이 바로 녹차 쪽으로 사업을 추진하라 명령을 내리신 분, 넓은 잔디밭에 서서 흡족하게 바라보는 쪽에는

꾸불꾸불 녹차밭이 웅숭그리고 있었다. 녹차밭 사진 한장 찍어줬어야 하는데, 아침부터 운전하느라 정신없어서 패스.

참...녹차박물관이라고 가서, 녹차밭도 아니고 풀떼기 잔디밭에 누군가 벗어놓고 간 꼬맹이 신발을 좋다고

찍고 있다. 개나리 노란 꽃그늘 아래 가지런히 놓여있는 꼬까신 하나~ 아기는 살짝 신벗어놓고 맨발로 살금살금

나들이갔나, 가지런히 놓여있는 꼬까신 하나, 꼬까신 하~ 나아아~ 고무줄 하던 기억을 뻐끔 퍼올려준 신발.

고무줄 놀이 나름 적잖이 했었던가, 나..?

아침에 비가 살짝 와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비는 그쳤고, 운좋게도 공기 중의 O2가 물방울에 실컷 두들겨맞고선

훨씬 청량해졌다. 현미녹차 티백을 어느순간부터 안 먹게 된 입맛으로, 박물관 내에서 무료로 시음시켜주는

초록빛 일렁이는 세작 녹차 한잔 마시고 나왔다.




업, 근래 봤던 영화 중에 꽤나 인상 깊이 남았던 영화다. ([업] Adventure is ubiquitous.)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고집스런 사각턱 할아버지나 통통한 동양계 꼬맹이 말고, 저 커다랗고 길다란 새를 기억하는지?

아마도 영화 속에서 할아버지가 집을 날렸던 곳은 남미 어디메쯤이었던 듯 하지만, 사실 이 새는 아프리카에

살고 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짠~* (왠지 익숙한 이 단어, 짠~*) 똑같지 않은가, 강인하게 쭉 뻗은 긴 다리, 두껍고 강력해 보이는 부리, 전체적으로

타조와 비슷할 만큼 대형 몸집을 갖고 있으면서도 슬림하게 뻗어있는 허리와 둔부까지. 깃털까지 꼽아놓았다면 아마

더더욱 흡사하지 않았을까 싶다. 알록달록 빛깔이 선명한 깃털들로. 아프리카박물관엔 이런 조각상이 아주 많다.

제주도 컨벤션 센터와 마주보고 있는 아프리카 박물관, '서아프리카 말리공화국에 소재한 젠네 대사원'을 토대로

설계하였다는 박물관의 외관이 실물을 보고 싶다는 욕구를 마구 자극한다. 무려 세계 최대의 진흙건축물이랜다.

마당 한 켠에 분방하게 전시되어 있는 전통 가면들. 왠지 하늘로 손을 쭉쭉 뻗은 나무들조차 아프리카스럽다.

정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새의 조각상. 딱 보자마자, '업'에서 벌어지는 탐험의 중심에 있던

그 새가 너로구나, 반가웠다. "코뿔새 상"이랜다. 업에 나왔던 그 새의 이름을 이제야 알겠다. "코뿔새"다.

"코뿔새는 아프리카의 신화적 동물로 반투어로는 코몬도(Komondo)라고 불린다. 코몬도는 양성의 동물이며, 크기가 30m가 넘는다고 전해진다. 가뭄에 시달릴 때, 하늘에 비를 내려 주기도 하고 죽은자의 영혼을 사후세계로 인도하는 죽음의 사신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또한 나쁜 기운과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 (아프리카 박물관 홈페이지 참조)

아프리카박물관은 기대 이상으로 볼 거리도 많았다. 애초에는 하루 세차례, 11:30. 14:30, 17:30에 열린다는 아프리카

전통 공연을 위주로 보고 나머지 소장품들은 설렁설렁 보면 보고 말면 말자는 식이었는데, 소장품들도 풍부하고

재미난 것들도 꽤나 많았다. 아, 이런 아프리카 전통의 S라인 조각상을 봤다고 그러는 건 아니다.

S라인이 제대로 안 살아나 각도를 바꿔 다시 한번(이라고 쓰고 실은 여러번, 이라 속으로 생각한다) 찍는 열의를

보이기는 했지만, 정말 이 조각상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던 건 아니다. 단지 아프리카에도 이렇게 수준높은 몸매...

아니, 이렇게 수준높은 조각예술이 발달했었나, 이렇게 육감적인 표현이 가능했었나 신기했을 따름.


어쩌면 마치 우리가 고대의 유물을 두고 다산/순산을 기원했다느니 하는 설명을 아프리카 예술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도 무리가 있을지 모른다. 그들 나름의 미감과 미적 쾌감이 발전해 왔을 텐데, 그들은 고대인이 아니고 아프리카

역시 21세기의 아프리카 땅이란 측면을 넘 무시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싶다.

유리창 너머 보존되는 조각상이라 사진이 안 나왔다. 눈으로 보면 무척이나 섬뜩하고 강렬한 조각상인데.

해서 아프리카박물관 홈피에서 업어온 그림 첨부.
콩고의 주술사가, 부족의 룰을 어긴 사람을 선별해서 벌을 줄 때 사용한 조각상이라 한다. 온통 쇠못이 고슴도치처럼

박혀서는, 냉막한 표정으로 날카로운 송곳을 집어들고 있는 게 처키보다 섬뜩하다. 어찌 보면 단순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었던 상처, 아픔을 눈에 보이게 하는 게, 치유를 위한 첫걸음인지도 모른다. 저 살벌한 못들처럼.

주술사가 해결할 사건 수가 늘어갈수록 쇠못도 하나씩 늘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면서 타인에게 박아넣는 못들보단

훨씬 적은 수일 거다. 만약 그게 저 못들처럼 대가리를 삐죽대며 몸에 박힌 게 보인다면. 으..

신기하게도, '용'이란 존재를 불러내는 상상력은 만국 공통인 듯 싶다. 서양의 용, 동양의 용, 그리고 아프리카의 용.

아프리카의 용은 왠지 짧막하고 가분수인 게, 귀엽다. 이 녀석 어쩜 거대용의 아바타일지도.

시간 맞춰 들어선 지하의 공연장. 자그마한 공연장이지만 사람이 꽉 찬 게 더 놀랍다. 아프리카박물관을 강추하는

온갖 블로그나 까페, 구전의 효과란 말인가. 나 역시 그 구전에 기꺼이 합류하기로 맘먹고 블로그 중이지만.

세네갈에서 왔다는 공연팀이 등장했다. 그 중에서도 열정적인 댄스와 노래-랄까 격한 허밍이랄까-를 선보였던

아리따운 검은 아가씨. 반질하고 매끈한 피부가 꼭 새까맣고 단단한 흑단목을 연상케 했다.

북을 치는 아저씨 둘은, 박자를 마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깨고 잇고, 굉장히 멋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친 수준높고 열정적인 공연이라니. 물론 그 와중에도 뽁뽁이 신발신고 뒤에서 뛰어다니는 아가의 부모는

어디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조금 더 큰 아이들은 아무런 제재나 부모의 관리없이 통로를 방황하고 있었지만.

꼭 '국립문화원'이니 '예술의 전당'이니, 돈쳐바른 곳에서만 조용히 예의를 지켜야 하는 건 아니란 말이다.

이제 둘러보고 나가는 길, 코뿔소 새의 휘영청 만곡한 부리가 너무 멋지다. 죽음의 사신이지 수호신이라는 신화적

존재, 코뿔소 새. 근데, 머리 위의 갈기털은..누가 파마를 시켜놓은 건가.

아프리카 박물관의 센스는, 화장실 표지에서도 빛을 발했다. 이런 자그마한 것 하나에서도 그 공간의 이미지와

특성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의 섬세함이 난 좋다.

기념품점에서 맞닥뜨린 No.5 던가.(일본만화 '원피스'를 보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알 듯.ㅋㅋ) 기린기린열매를 먹은

그가 열심히 단련하여 네모반듯한 기린 전사가 되는 눈물없인 볼 수 없는 감동의 대 서사시. 딱 그녀석이 생각났다.

왠지 우울한 표정의 원숭이, 조삼모사에 낚인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호랑이는 왠지 입에다가 타이거마스크를

하고 있는 느낌이고, 또다시 등장한 기린은 아직 완성체가 되기 이전의 모습.

티켓 값이 그다지 싼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주도의  지원으로 10% 할인이 적용된다고 한다. 참고로 아침일찍

갔다가 허탕쳤음을 호소해도 추가 할인은 없다.









7코스는 외돌개에서 시작해 월평포구에서 끝난다. 그리고 8코스는 월평포구에서 다시 시작하며, 그런 식으로 총13개

올레길이 제주도 남해안을 쭉 잇고 있다. 15.1킬로의 7코스 구간, 놀멍 쉬멍 걸으멍 했더니 반나절이 훌쩍 넘는다.

7코스의 마지막, 월평포구. 천천히 걸었던 어쨌던 코스를 마쳐서 시원하다는 느낌보다는 아쉬움이 강했다.

월평에서부터 거꾸로 7코스를 걸어가는 사람들, 어쩜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초반에 강정마을의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참기만 한다면 이후로는 쭉 즐거울 테니. 뭐, 고기구울 때 제일 노릇노릇 맛난 한 점을 먼저 먹을 건지

아껴뒀다 마지막에 먹을 건지의 차이.

바다 한가운데 부표처럼 떠있는 게 뭔가 했더니, 사람이다. 카메라로 잔뜩 땡겨서 봤더니 낚시 중이신 듯. 근데

뭐에 의탁한 건지 모르겠지만 위험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다시, 7코스 시작점쯤에 있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 차로 달리니 금방인 것을. 어떻게 보면 멍청한 짓이라겠지만,

슝- 달리다 놓치기 쉬운 풍경들 하나하나에 이야기와 추억들을 촘촘이 링크걸어 놨으니 됐다.

펜션에 도착해서 쉬엄쉬엄 이쁜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잘 꾸며져 있던 정원의 꽃도 보고, 개랑도 놀고.

지금 제주도의 모습이 이런 거 아닐까. 오랜 이미지, 현무암 돌하루방, 전통문의 상징 위에다 뭔가 새롭고 깔끔한

이미지를 덧대고 변형시키는 중. 올레길 개척과 커다란 반향이 그 단적인 사례일 듯 하다.

펜션 뒤쪽으로 놓인 그네의자.

털썩 주저앉았다가 주르르 미끄러져 누워버리고는, 흔들흔들 뒤척이며 셔터를 눌렀다.

이번엔 벌레먹은 능소화. 그러고 보니 "벌레먹은"이란 표현은 중의적일 수 있겠다. 벌레가 먹은, 혹은 벌레를 먹은.

여튼 이건 여리디여린 얄포름한 꽃잎을 갉아먹는 갈빛 벌레.

짠~*

제주 올레길 7코스의 강정포구 인근. 여태 해안가와 논두렁길, 꽃길을 걸으며 한껏 들떠있었던 기분이 싸해졌던 구간.

올레길 표시를 지나 문득 꺽여들어간 해안길.

오묘한 형태의 조형물이 바닷가에 서 있었다. 왠지 살풍경하고 휑뎅그레한 분위기, 왤까 싶다.

조금 둘러보니 노란색 깃발이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꽂혀있고, 삼엄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한켠에는 천막이랄지 텐트랄지 간이시설물이 있다. 방금까지도 누가 머물러있었던 듯 하다.

올레길을 걸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을 맞닥뜨리니 정신이 없다. 우선 사주경계부터. 캄보디아어 같은 꼬부랑

글씨들까지 곳곳에 적혀있는 이 게시판을 보니 조금 정신이 든다. 아. 해군기지 부지가 여기였구나. 강정포구.

MB와 같이 주민의 동의나 의견을 묻지 않고 대규모 국책사업을-더구나 군사시설 유치를-추진하는 제주도지사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최근에 제주도지사에 대한 전례없는 주민소환 시도가 투표율 저조로 부결되었지만 그 와중에

투표를 방해하려는 여러 조직적 움직임이 있었다고 또다른 논란이 되었으며, 게다가 '주민소환'같은 직접민주주의적

제도가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MB의 언질 하에 제도 자체를 축소하려는 움직임마저 있는 상황.

바다 위에 군함이 정박해 있는 그림. 그다지 이뿌진 않다. 주민 공청회나 의견수렴을 위한 최소한의 절차나 노력도

없이 덜컥 위에서 결정된 일이라니까 더 거부감이 든다.

그래서 해군기지가 여기 들어오는 건 시간문제인 상황인 거 같다. 또다시 가시돋힌 철조망이 둘리고, 살인무기들이

집결한 채 살기등등한 이빨을 드러내겠지. 올레길의 여유로움이나 (잠시나마) 품게 되는 관대한 마음 같은 게 그때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아니, 해군기지가 생기고 나면 올레길 7코스가 지금과 같이 유지될지도 모르겠다.

여기도 무료 엽서와 우체통이 있었다. '바닷가 우체국'에서 보았던 잘 꾸며진 모양새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절실함,

그리고 진실함이 있다 느껴진다. 이곳에까지 발톱 세운 철조망을 칭칭 옭죄어야 하는지, 자연 그대로 냅둘 수는 없는지

누군가에게든 다그쳐 묻고 싶었다.

나중에 만난 택시기사 한분에 슬쩍 물었더니, 이쪽 해안에 중국 어선들이 불법조업을 많이 하니 그걸 단속하려면

해군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발전하려면 뭐라도 들어와야 안되겠느냐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해양경찰력을 강화하면

될 일을 해군기지까지 섭외할 일인지, 해군기지가 지역발전에 도움이 될지, '세계평화의 섬'으로 비전을 정립하고

올레길 같은 자연자원, 관광자원으로 발전해야 할 제주도의 이미지만 해치지는 않을지 묻고 싶었지만...

아마 해군기지 부지로 선정되고 나서 인근 토지에 대한 보상절차가 진행중인가보다. 이미 황량해져 버린채 버려진

비닐하우스들. 이런 장소에 해양박물관이니 크루즈항 같은 걸 짓고 해군기지를 이용한 지역축제를 개발하여 경제를

부양하겠다는 아이디어, 아...겁없이 용감하고 답답한 사람들. 그래놓고 해군기지서 기름이라도 대규모 유출되면

국민들 동원해 기름닦으라 시킬 거고, 해군기지 갔으니 공군기지도 짓자고 나설 테고, 지역축제에 혈세 낭비하며

위엣것들 사진 몇 장 남기고 선거운동 팜플렛에 한 줄 넣었으니 되었다 할 거고. 너무 시니컬한 건가.

사실 이전까지 걷던 길과 비슷한 풍경인데, 마음상태가 투영되어 버렸다. 왠지 써늘한 불안감과 싱숭생숭함이

둥둥 떠다니는 듯한 대기. 노란 깃발을 희롱하는 거침없고 둔탁한 바닷바람.

파도에 떠밀린 방파제들이 뭍까지 올라와 하얗게 말라죽어있다. 불가사리들 같기도 하다.

벌써부터 황량하고 살벌한 느낌의 바닷가를 벗어났을 때 살짝 안도감마저 들었다. 이제 다시 밝고 따뜻한 느낌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싶어서. 걷는 여행의 장점이자 단점은, 마치 보글보글 끓여대는 냄비 속에 들어가있는

개구리처럼 조금조금씩, 점진적으로 주변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는 거다. 드라마틱한 단절이나 충격 같은 거 없이,

사실 강정포구의 살풍경함이란 그렇게 야금야금 예견되어 있었던 거였다. 빠져나가는 길 역시 그렇게 야금야금.

그렇지만 빠져나가는 길은 더욱 독했다. 이미 강정포구까지 잇는 모종의 도로 확장사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머

명목상으로는 이쪽의 도로 사정을 원활케 하고 관광자원 접근성을 높이니 어쩌니 등등의 건설현장 안내문을 보긴
 
했지만, 아까 이야기를 잠시 나눴다던 그 택시기사 아저씨 역시 이게 해군기지 건설 정지작업이라 보고 있었다.


여론 수렴을 날림으로 하는 이유는, 어쩌면 니들끼리 내부적으로 싸워서 힘빼 버려라, 하는 고도의 수작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내용에 대한 공지와 협의가 제대로 이루어진 후에야 공통 지반 위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텐데

공통 지반 없이 각자의 지반 위에서 떠드는 꼴이다.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올레길 7코스엔 이런 공사길도 포함되어 있다. 조만간 아스팔트가 부어지고 판판하게 다져질테지만, 당장은

벌건 흙먼지가 자욱하고 포클레인의 격한 호흡소리와 진동음이 땅을 울리며, 걷는 사람 따위 배려되지 않는.

뭐, 어차피 올레길도 여름 한철 장사라 이건가. 안전띠나 보행자 안전통로 같은 건 전혀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게 공사판 가운데를 뚫으며 걷고 나니, 시멘트를 대충 발라놓은 제방길을 걸어야 한다. 하아...

이 녀석. 파워가 나가버린 트랜스포머가 칙- 소리를 내며 축 늘어져버리듯 생명이 나가버렸다. 얜 어떤 소리를

내며 죽어버렸을까. 깨져버린 등딱지와, 서로 딴 곳을 향해 고정되어 버린 툭눈. 그렇지만 여전히 생기어린 채

빳빳한 다리털이 안타깝다. 대충 발린 시멘트길 위로 올라와 죽어버려 더욱 비극적인 녀석의 최후.


아, 방금 알아낸 사실 하나, 강정마을 해역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권보전지역이라고 한다.




강정천을 뒤로 하고 얼마 남지 않은 7코스를 계속 걷기 시작했다. 올레길 공식홈페이지(www.jejuolle.org)에서

뽑은 지도에 따르자면 남은 포스트는, 강정포구, 알강정을 지나 월평포구까지 총 세개밖에 안 남았다.

8코스를 전날 걸었던 엄마와 여동생이 흥분하며 했던 말들에 따르자면, 8코스에는 이런 쉼터나 매점이 거의 없다한다.

코스도 7코스보다 길고 더 힘들었다고는 하는데, 7코스만큼이나 8코스도 좋았다고.

바다가 보이지 않는 길로 들어섰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랜만이다. 그리고 나서 바로 나타나는 소철 '농장'.

비닐하우스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어린 종묘들. 뭔지 궁금해서 한참 봤지만, 짧막한 내 식물학적 지식으론

도무지 모르겠다. 넓적한 건 잎이요, 쭉 뻗은 건 줄기랄까.

비닐하우스 단지 내에서 길을 잃을세라, 바닥에 큼지막하게 그려놓은 올레길 화살표. 자세히 보면 페인트칠 직후에

차바퀴가 밟고 지나간 듯 뽈, 뽈, 뽈 페인트 자국이 남아 있다.

온통 시뻘겋게 녹슬어버린 물탱크, 도로까지 무성하게 뻗어나온 하룻강아지녀석 풀떼기들. 왠지 방금까지 걷던

인적없어도 넉넉하고 여유롭던 바닷길과는 영 딴판으로 황량하고, 뭔가 괴괴한 느낌이다.

그런 길인데, 비닐하우스 안은 또 딴판이다. 온통 꽃밭 가득.

이것은 꽃. 아까 미처 영글기 전의 종묘가 "넓적한 건 잎이요, 쭉 뻗은 건 줄기"랬다면, 꽃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벌어진 건 꽃잎이요 뭉쳐있는 건 암수술이랄까. 아...너무 무식하다.

그렇게, 황량하고 살짝 불안하기까지한 느낌이 감도는 길 옆에 무덕무덕 무더기로 피어난 꽃들을 위로삼아

강정포구로 가는 길이다.




서건도를 지나 다음 기점, 풍림리조트로 가는 길이다. 어제 신문이었던가, "올레길 싸우멍 다투멍(서울신문, 9/16)에

나왔듯 올레길을 둘러싼 이야기가 온통 찬사 일색인 건 아니다. 걷기 좋게 흙길로 포장하려 하는 측과 먼지나고

지저분하다고 싫다는 땅주인 측, 그리고 사유지 통행을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올레길 폐쇄까지 이르기도 한다.

"올레길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제7코스 돔베낭골과 야자수나무숲 길 등 일부 코스는 최근 땅 주인과 마찰을 빚은 끝에 조만간 폐쇄될 전망이다. 올레꾼들은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이런...사유지에 대한 적정 수준의 보상과 합리적인 타협점을 찾았으면 좋겠다. 다녀온지 며칠 되었다고 폐쇄 이야기가.

제주도에서 흘러내리는 민물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 제주도민들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는 곳이라 한다.

정오가 가까워져서인지, 파도가 조금씩 거칠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어디선가 해가 높을수록 파도가 거칠단 '속설'을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아서, 아마 그래서 거칠어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옛날 세탁기가 한참 윙윙 돌 때 슬쩍 열어보면, 안전장치가 작동해서 내부에서 정신없이 돌던 빨래통이 금세

멈추곤 했다. 무슨 먹음직스러운 크림을 떠내듯 손가락 끝으로 풍성하게 떠올리던 비누거품. 딱 저렇게 생겼었다.

앞에서 걷던 엄마가 문득 저 돌을 가리켰다. 저거 무슨 환상속의 동물 같지 않냐고. 황소가 콧김 내뿜는 거 같기도,

혹은 용이 입을 히죽 벌리고 지긋이 응시하는 것 같기도 하지 않냐는. 난 두꺼비가 떠올랐을 뿐이고.

바로 옆에도 뭔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바위가 놓여 있었다. 엄마는 사자 같은 동물 두마리 같지 않냐고, 한마리는 밑에

늘어지게 눕고 또 한마리는 그 허리춤 위로 턱을 괴고 기댄 거 같지 않냐는 말씀. 나는, 왠 건방진 배불뚝이 자식이

옆으로 누워 한 팔로 턱을 괸 거 같다.

조그마한 내를 가로지르는 하이얀 나무뼈다귀. 생각보다 많이 흔들려서 여성들에겐 조금 쉽지 않았던 듯.

다리 삼아 누워있던 나무뼈다귀를 밟고 지나고 나니 잔잔하게 흐르는 내 한가운데 가지런히 올려진 돌무더기가
 
그제서야 보인다.

바닷가 우체국이랜다. 뭔가 했더니, 인근 리조트에서 직접 짓고 운영하고 있다는 자그마한 정자, 그리고 무료 엽서와

배송 서비스. 나쁘진 않은데, 엽서 전면에 광고처럼 붙어있는 리조트 시설물의 그림이 좀 아쉬웠다. 좀더 은근하게,

거부감도 덜하면서 더욱 기억에도 남을 방법으로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한쪽엔 이미 온통 낙서로 자욱해진 '소원기원벽'. 색연필도 넉넉히 비치되어 있었고, 차근차근 읽으면 재미도 있었다.

우체통이 있고 엽서가 있고 펜이 있으며 마침 아픈 다리 쉬어갈 바람솔솔 정자도 있으니, 마음만 있다면 누구라도

엽서 한 통 적고 싶어지는 건 인지상정 아닐까.

그리고 얼마전 누군가 지적하던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치 일본 신사에 주렁주렁 매달린 소원기원 푯말들을 벤치마킹한

소원기원 패..라고 해야 하나. 뭐, 좋으면 벤치마킹할 수도 있는 거지. 이게 무슨 사당도 아니고, 소원을 적어 걸어둔단

정도의 아이디어 갖고 베꼈다고 말하는 건 좀 과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정자를 둘러싼 울타리엔 통나무를 걸어놨다. 거기 역시 소원을 적을 수 있도록 충분히 비치된 펜들.

오호......누군가 빨간 펜으로 "MB OUT"을 적어놓았다. 누굴까, 이거 누가 그랬을까.ㅋㅋㅋ

올레길이라고 전부 올레길 손수건 같은 기념품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랜다. 코스 중에서도 7코스를 비롯한 몇몇 코스,

그리고 7코스중에서도 몇몇 포스트에서만 구매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찾아간 풍림리조트. 그 앞에 그럴듯한 이끼벽.

토토로가 뛰어놀듯한 분위기다.

아마도 여기가 강정천? 리조트 옆을 끼고 흐르는, 아니 정확한 선후사실대로 따지자면 강정천을 끼고 리조트를

지었겠지만, 사계절 내내 맑은 물이 흐르는 은어 서식지랜다. 물이 엄청 맑지 않고서야 코빼기도 안 비친다는

우윳빛깔 은어씨, 수박냄새 은어씨.

그러고 보면 과거 제주도, 하면 떠오르던 돌하르방과 전통 형태의 대문 같은 이미지의 농도가 많이 옅어졌다.

그만큼 제주도에 다른 볼거리와 먹을거리, 이야기거리가 많아졌다는 의미인 거 같아 다행스럽다.






법환포구에 들어섰구나,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한 징표는 역시 바다 위에 둥둥 뜬 채 매어있는 배들.

남/녀 노천탕이 있어서 깜짝 놀랬다. 알고 보니 제주도에서 흔치 않은 담수가 용출한다는 곳, 역시 그러니 근처에

법성포구 마을이 자리잡은 거겠지만. 여자 노천탕을 얼쩡거려봤는데 아쉽게도(?!) 양말만 벗은 아주머니들만 계셨다.

길바닥에 널어놓은 게, 돌담에 기대어 놓은 게  뭔가 했더니 깨란다. 도로가에 널어놓으면 먼지가 풀풀 쌓일 거 같은데

여긴 별로 오가는 사람도 없고 차도 없으니 괜찮지 싶다.

울룩불룩한 해안선. 울퉁불퉁한 돌멩이.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조각배.

법환 잠녀 마을. 해녀가 일제 시대의 잔재라는 걸 알았던 건 대학교 일학년 때, 제주도를 자전거로 일주할 때였다.

굳이 일제 시대 만들어진 단어를 싸그리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순전히 어감상 해녀보다 잠녀가 로맨틱한 게 좋다.

이런 식의 공공미술 기획이 늘어나면 좋겠다. 뭔가 늙어가는 사람처럼 퇴락하고 벗겨지고 날로 촌스러워져가는 풍경에

새롭게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작업. 요새 오히려 이런 수혜는 지방이나 상대적으로 소외된 곳이 받는 듯 한데, 삭막하고

위압적인 도심에도 마찬가지 생기가 필요하지 싶다.

해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을 달리는 배, 보아하니 막 출항해서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잠녀 체험이 가능하다는 간판을 보고 들어가 본 건물에서 만난 잠녀복장. 알고 보니 식당이어서 성게국수를 맛보았고,

다시 알고 보니 식당을 빙자한 마을 아주머니들의 모임장소여서 갖고 있던 간식거리도 나눠먹고, 재밌었다.

해안가에 연한 어느 집 야트막한 담장 위에 얹혀 있는 조개껍질들.

유모차를 끌고 저기까지 왜 나가셨나 했더니, 빨랫감을 싣고 나르는 역할을 하나 보다. 동그마니 서서는 빨래가

끝나길 기다리는 얌전한 유모차.

이 나무기둥위에 얹힌 돌들이란. 허참, 이란 감탄사 이외엔 별로 할 말이 없어진다. 아니 요새는 '올레~'라던가.

바닷바람에 장렬하게 펄럭이며 꿋꿋이 길을 알려주는 저 기개는, 왠지 이순신장군의 최후같이 비장감이 감돈다.

법환마을을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친 매점. 뭔가 분위기가 꽤나 이국적이었다. 100% 망고주스를 팔길래

한번 맛보고 싶었는데, 생망고가 아니라 엑기스나 그런 거 아닐까 싶어서 그냥 포기.

이제 바닷가에 보다 바싹 붙어서 걷기 시작했다. 검은 빛의 현무암 덩어리들이, 살짝 침침한 날씨 아래 빛을 머금었다.

이건 일종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인 거다. 돌이 두 개 이상만 다소곳이 쌓여 있으면, 삼층이 되고 사층이 되는 건

순간이다.

눈앞에 보이는 건 서건도, "썩은 섬"이란 우리말 지명을 굳이 한자로 옮기다 보니 서건도가 되었다 한다. 섬의 토질이

부식되어 있어서 썩은 섬이라 했다던가. 만조 때는 섬이 되고, 간조 때는 짧으나마 '모세의 기적'이 벌어지는 곳.

서건도로 향하는 구간은 일명 '일강정바당올레'라고도 한다. 일일이 손으로 돌을 골라낸 끝에 새로운 바닷길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한번 그어진 얇은 선 위에 숱한 덧칠을 통해 굵게 만들어내듯, 올레길은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며 더욱 뚜렷이 패일 거 같다.

서건도. 썩은 섬. 맘먹으면 섬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제주도와 연결되어 있었지만, 물이 차들어오는 건 또 금방인지라

조금 가보다가 말았다. 가봐야 뭐 별거 있겠어, '저건 신포도야' 이런 마음으로.

바닷가에 떠밀려 온 거겠지. 하얗게 표백되어 버린 나무가 해안가에 길게 누워있었다. 넌, 어디까지 가봤니.(이러고)

바닷가에 바로 붙어있으니 토질이 좋을리가 없다. 소금기 짭짤한 바람이 사시사철 24시간 불어올 텐데, 그 바로

옆에서도 이렇게 흙을 일구고 작물을 돌보시는 분. 대체 저 고랑 사이로 무엇이 튀어올라올지 모르겠지만, 그게

뭐든 튼튼하게 잘 여물었으면 좋겠다.

물질 나가시나보다. 잠녀 아주머니 두 분이 바삐 걸음을 옮기셨고, 나는 그 빨갛고 노란 장갑의 색감이 너무 좋아

카메라를 바삐 들이대고 말았다.




찻길 옆으로 걷다가 마주친 '건설자재 야적장'. 무슨 "때묻지 않은" 천혜의 비경이나 자연만을 보는 길이라면 자칫

일상을 도외시한 잠시지간의 탈출로 끝나기 쉬울지 모른다. 제주도를 삶터로 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있고,
 
학생들은 통학하며, 먹고사니즘의 굴레를 놓지않고 사는 현장이 생생히 있어서 걸음걸음 더 재미지다.

윗둥치를 뚝뚝 끊어놓은 나무들에서 몽실몽실 이파리가 돋아놓으니, 왠지 잘 자라고 있는 나무를 거꾸로 꽂아놓은

느낌이다. 이파리들이 좀더 길게 자라나면 위아래를 분간하기도 좀더 쉬워질 듯.

어디로 가야 할 지, 갈림길이 나타나면 두리번두리번 숨어있는 화살표부터 찾는다. 사실은 갈래길에선 딱 화살표

두 개면 해결될 텐데. 갈림길 나타났을 때 당황하지 말라고, 진즉에 길 안내표시 해놨다고 하나, 그리고 갈림길에

서서 멀찍이 양쪽 길을 바라봤을 때 어느 한 쪽을 가리키는 화살표 하나.

아마도 여름엔 사람들이 바글바글댔을 길가 행상의 흔적. 인걸은 간데 없고 천막만 남았다.

문득 즈려밟고 가야 할 징검다리. 보폭에 맞게 잘 배치된 징검다리는 그 위를 밟고 걸으면 도, 레, 미 소리가

경쾌하게 날 듯 하지만, 다리를 억지로 잡아찢게 만드는 징검다리나 계단은 짜증만 난다.

역시 남도라 식생이 다르긴 다르다. 선인장이 꽃을 틔우고, 뾰족뾰족 가시를 드러냈다.

걸으며 지나친 어느 공원. 엉성하게 세워진 탑과 야자수길이 인상적이었다. 이 곳의 야자수는 아랍국가나 동남아의

야자수와는 또 느낌이 다르다. 좀더 조그맣고 부드러운 인상을 남긴다.

거대 알로에..처럼 생긴 선인장..일 게다 아마 저건. 알로에는 토실토실 배가 부른 잎사귀를 갖고 있을 텐데 이건

얄포름한 잎사귀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추측. 잎사귀 하나 잘라내서 칼처럼 휘두르면 재밌겠다 싶었다는.

왜 언젠가 홍길동이던가, 티비 속 퓨전사극에서 휘두르던 연검이랑 닮았다.

화살표를 그려넣기가 애매한 곳에는 등산로를 표시하듯 이렇게 노란끈 파란끈이 묶여 있다. 올레길의 대표색상인지도.

문득 눈에 띈 돌하루방, 돌하르방인가? 어쨌거나 올레길을 걸으면서나 제주도 와서 생각보다 눈에 잘 안 띈다.

올레길을 걸으러 왔던 가족인 듯 한데, 어느 틈에 이런 코팅된 표식까지 준비한 걸까. 그 세심한 마음씀씀이에 놀랬고,

또 저런 멘트는 언제 준비해서 적어넣은 걸까 궁금증이 끝이 없다. 집에서부터 "엄마아빠 힘내세요"라 적어왔을려나.

코팅을 제주도에서 올레길 걷는 와중에 하지는 않았을 텐데. 학교 앞 문방구에서 했을 수도 있겠구나..등등.

아마도 여기가 수봉로. 염소만 다니던 길을 삽과 곡괭이로 올레지기 한분이 직접 개척해서 만든 길이 수봉로라던데,

딱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올레지기님의 이름을 딴 '수봉로'인지는 걷고 나서도 모르겠다. 그냥, 제주도의 어느 길.

이렇게 돌들이 몽글몽글한 해안가를 바로 곁에 두고, 조금씩 뜨거워지는 태양을 느끼며 걷는 건 여전히 유쾌했다.

등엔 어느 틈엔가 솔찮이 땀이 배어나고 다리도 조금은 묵직해지는 느낌이었지만, 흔히 원형으로 돌게 되는 산책과
 
달리 그저 가고 또 가는 걸음이란 사실 자체가 유쾌했던 것 같다. 去去去中知, 行行行裏覺이라던가.

해삼과 오분작이를 체포한다고? 채취는 알겠습니다만 체포는 무엇인지. 한자를 알면 뜻은 헤아릴 수 있다지만,

이왕이면 조금 더 대중적인 단어를 써도 될 거 같은데 말이다.(잘 안 쓰이는 단어라면 한자를 병기해주던가 차라리.)

이것..난꽃 맞지 싶은데, 꽃들 너머로 열기구가 떠오르고 있었다. 한눈에 섬의 사면, 그러니까 바다로 둘러싸인

땅덩이를 실감할 수 있다는 건 꽤나 매력적이긴 한데...일단 제주도는 섬이라기엔 너무 크다. 실감이 안 날 정도로.

그러고 보면 제주도의 해안이 걸음직한 이유는, 김기덕의 영화 '해안선' 마지막에 나왔던 것처럼 반도 삼면의 해안은

모두 군대에 점령되어 있기 때문이다. 밤에 마음대로 내려가 밟아보지도 못하는 가시돋힌 철조망의 땅. 여기도

그다지 자유롭진 못해서, 파란색으로 색칠된 초소가 드문드문 현무암 사이에 박혀 있다.

소철..이던가. 어렸을 적 집에서 키웠던 뾰족뾰족하고 딱딱한 잎사귀의 식물을 재배중인 듯한 비닐하우스다. 근데

이렇게 관리 안되는 비닐하우스는, 일부러 천장을 뜯어내고 벽면의 비닐도 헐어버린 걸까. 열맞춘 소철 병정들에
 
점령당해버린 듯한 비닐하우스.



여기가 돔베낭길 쯤일까, 옆으로 담장돌들이 가지런히 이빨맞춰 늘어서 있고, 머리위엔 꽃을 잔뜩 얹었다.

색소폰을 형상화한 거 같기도 하고, 다른 악기 같기도 하고. 알고 보니 여긴 무슨무슨 펜션의 정원이랄까,

사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올레길 코스도 그런 사적 영역에 기댄 바가 없지 않다.

호텔에 부속된 산책길이라거나, 호텔 홍보를 위해 기증된 정자라거나.

그래도 그런 공간들이 올레길 순례자들에게 (물건을 사라거나 자신의 호텔을 이용해달라는 등의) 강한 압박, 그래서

불쾌할 수 있는 부담감을 주지 않아 다행이다. 그냥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느낌이다. 그 펜션 정원에 들어가 잠시

앉아 쉬며 바라본 꽃과 나비.

거푸 크게 심호흡하는 리듬으로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는 나비. 후읍, 하아, 후읍, 하아.

약간 흑백 사진처럼 나와버렸는데, 왠지 분위기가 살아있는 사진같다. 걷기 시작한지 30분도 안 됐으니, 아침 7시반도

안 된 살짝 이른 아침의 제주 앞바다.

그리고 제주의 하늘. 구름이 몽실몽실 한켠으로 우르르.

계속 이렇게 잘 관리되고 '공원'같이 다소 인위적인 느낌의 길만 걷나 했더니, 아니다. 어느 지점에서 잘 닦이고 주변

경관도 잘 조성된 길은 끝나고 '날 것'의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껏 낮은 자세로 웅크린 저 차양들처럼 서서히. 저건 뭘 길러내기 위한 보호막인 걸까.

올레길이라고 샛길이나 곁길이 없을리 없다. 잠깐 샛길로 빠졌더니 바닷가에 내려섰다.

시커먼 돌과 푸르딩딩한 바다, 그리고 그야말로 하늘색 하늘.

다시 올레길 코스로 복귀, 이번엔 문득 호박길이다. 호박이 넝쿨째 이리 뒹굴 저리 뒹굴거리는 길가.

이런 찻길이나 대로변 인도를 걷기도 한다. 온통 '허'로 시작하는 렌트카들이 씽씽 달리는 찻길이라 조금 주춤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찻길 근처에 기댄 구간이 길지 않아 다행이다.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아버지를 빼고 엄마랑 여동생이 함께 갔다. 앞에서 부지런히 걷는 두 모녀.

그렇게 대로변을 지나다 마주친 어느 집의 '팥색' 지붕. 퇴색한 느낌이 너무 좋은 거다. 군데군데 잘 벗겨진

페인트칠도 무지하게 매력적이고. 이게 바로 엣지있는 빈티지스러움..?

공항버스 600번. 제주국제공항에서 15분마다 출발하는 이 버스는 제주시에서 서귀포시까지 제주도를 종단한다.

서귀포시 옆 제주월드컵경기장 근처 펜션에 머무느라, 목요일 퇴근후 비행기 잡아타고 이 버스를 잡아탔댔다.

올레~! 갈래갈래 갈린 길 앞에 서면 이런 식으로 된 스티커던, 파랑색 페인트로 찍찍 그려진 화살표던, 뭔가

표식을 찾게 된다. 스티커가 이뻐서 하나 떼어올까 하는 마음이 0.1초간 들었으나 후인들을 위해 참기로 했다.

서귀포여고를 지나가는 길에 문득 마주한 어느 집 대문. 제주도의 대문이라 하면 나무기둥 세 개를 가로누인 전통적인

그게 생각나는데, 이 녹슨 철문도 못잖은 포스를 뿜고 있다.

아직은 싱싱하니 파랗기만 한 귤. 희끗희끗한 액체가 말라붙어 있길래 혹시 농약인가 해서 물었더니, 영양제란다.

지금 나오는 귤들은 하우스 재배라는 것 같던데, 그래도 인심좋은 가게 주인아저씨에게 받은 귤은 크고 달았다.

어느 집 지붕 위에 불쑥 피어난 꽃무더기. 여린 꽃잎 여기저기 벌레먹은 양 너덜너덜한 게 살짝 민망하지만서도,

외려 '보여주기'용이 아니라 그냥 제 멋에 싹트고 자라고 꽃피웠겠거니 생각하니 또 그럴 듯 하다.





10월에 찍은 사진이 11월에도 가고 9월에도 맞겠지 싶는 것들이 있다. 매 달에 딱 떨어지는 정합성을 띄고 있거나

대표성을 띈 사진을 찾기도 쉽지 않아 그렇기도 하고, 사실 10월과 11월, 혹은 9월이란 덩어리가 가진 특징이

뚜렷치 않은 탓이기도 할 거 같다. 굳이 어린왕자처럼 10월 31일과 11월 1일의 차이가 뭐죠, 라고 묻고 싶진 않고.


티스토리측에서 꼭 매달에 맞는 사진을 골라달라고 할 게 아니라 차라리 봄여름가을겨울, 이렇게 사계에 맞는

사진만 분류해서 응모해달라고 하는 게 좀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사실 그 많은 사진들을 골라내는 작업에도

한계가 있을 테니 어쩔 수 없을 거다. 응모하는 측에서 그 부담을 조금만 더 덜어주십사 하는 걸텐데, 글쎄..정말

달별로 쪼개는 작업은 쉽지도 않고, 하다보면 스스로 세웠던 기준 자체가 흔들흔들하고 있어서 어렵다.

#1. 10월 - 후쿠오카 유센테이 코헨의 가을 풍경.

#2. 10월 - 후쿠오카 고묘젠지에서 떠낸 붉은 단풍.

#3. 10월 - 후쿠오카 고묘젠지의 가을 정취 물씬한 정원.

#4. 10월 - 후쿠오카 고묘젠지의 단풍.

#5. 10월 - 남이섬 인근의 북한강 풍경.

#6. 10월 - 남이섬 인근 북한강에 불난 듯, 자욱한 새벽 물안개.

#7. 10월 - 북한강변의 가을 단풍.

#8. 10월 - 제주도의 가을 바람.

#9. 10월 - 후쿠오카 유센테이 코헨에서 찍은 달력포즈 사진.

#10. 10월 - 욱씬욱씬 커가는 노란 제주귤.

#11. 10월 - 후쿠오카 다자이후의 가을.


#1. 11월 - 스산하게 얼어붙은 임진강변. 개성가는 길.

#2. 11월 - 후쿠오카의 아크로스 후쿠오카 건물 위에서 바라본 가을.

#3. 11월 - 후쿠오카 고묘젠지의 붉은 단풍.

#4. 11월 - 후쿠오카 유센테이 코헨의 금빛 잉어.

#5. 11월 - 후쿠오카 다자이후 골목을 지나는 여고생들.


8월, 9월...전략적으로 생각했을 때, 8월은 뭔가 여름휴가하면 생각나는 작렬하는 태양, 눈부신 육체, 그리고 축제

같은 분위기가 질펀해야 할 텐데 별로 그런 사진을 찾기 쉽지 않았다. 9월 역시 추석이라는 거대한 이벤트가 

있으니만치 그런 사진들을 올려야 할 거 같은데, 별로 해당될 만한 사진이 안 보인다. 객관적으로 내 사진들을

따졌을 때에도 그닥 뛰어난 사진은 없으므로 틈새를 노려야 한다는 고려도 한 몫해서 사진들의 해당 월수를 찾아

주었던 것.


애초 사진공모를 '빙자'했다고 했으나...어느새 몰입하고 있다는.

#1. 8월 - 제주도의 어느 노천 수영장.

#2. 8월 -  샹젤리제 거리에서의 일광욕.

#3. 8월 - 축제의 도시, 파리의 휴일날 거리공연.

#4. 8월 - 아침고요수목원의 오래묵은 소나무.


#1. 9월 - 후쿠오카 유센테이 코헨의 가을 정취.

#2. 9월 - 김태희 허수아비가 지키는 남녘의 들판.

#3. 9월 -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웨이크보드가 응시하는 새벽안개 자욱한 남이섬.

#4. 9월 - 후쿠오카 유센테이 코헨의 이끼슨 석등.

#5. 9월 - 세느강변의 조금 이른 낙엽, 그리고 푸른 잔디밭.

#6. 9월 - 제주도 주상절리대의 검푸른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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