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길 옆으로 걷다가 마주친 '건설자재 야적장'. 무슨 "때묻지 않은" 천혜의 비경이나 자연만을 보는 길이라면 자칫

일상을 도외시한 잠시지간의 탈출로 끝나기 쉬울지 모른다. 제주도를 삶터로 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있고,
 
학생들은 통학하며, 먹고사니즘의 굴레를 놓지않고 사는 현장이 생생히 있어서 걸음걸음 더 재미지다.

윗둥치를 뚝뚝 끊어놓은 나무들에서 몽실몽실 이파리가 돋아놓으니, 왠지 잘 자라고 있는 나무를 거꾸로 꽂아놓은

느낌이다. 이파리들이 좀더 길게 자라나면 위아래를 분간하기도 좀더 쉬워질 듯.

어디로 가야 할 지, 갈림길이 나타나면 두리번두리번 숨어있는 화살표부터 찾는다. 사실은 갈래길에선 딱 화살표

두 개면 해결될 텐데. 갈림길 나타났을 때 당황하지 말라고, 진즉에 길 안내표시 해놨다고 하나, 그리고 갈림길에

서서 멀찍이 양쪽 길을 바라봤을 때 어느 한 쪽을 가리키는 화살표 하나.

아마도 여름엔 사람들이 바글바글댔을 길가 행상의 흔적. 인걸은 간데 없고 천막만 남았다.

문득 즈려밟고 가야 할 징검다리. 보폭에 맞게 잘 배치된 징검다리는 그 위를 밟고 걸으면 도, 레, 미 소리가

경쾌하게 날 듯 하지만, 다리를 억지로 잡아찢게 만드는 징검다리나 계단은 짜증만 난다.

역시 남도라 식생이 다르긴 다르다. 선인장이 꽃을 틔우고, 뾰족뾰족 가시를 드러냈다.

걸으며 지나친 어느 공원. 엉성하게 세워진 탑과 야자수길이 인상적이었다. 이 곳의 야자수는 아랍국가나 동남아의

야자수와는 또 느낌이 다르다. 좀더 조그맣고 부드러운 인상을 남긴다.

거대 알로에..처럼 생긴 선인장..일 게다 아마 저건. 알로에는 토실토실 배가 부른 잎사귀를 갖고 있을 텐데 이건

얄포름한 잎사귀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추측. 잎사귀 하나 잘라내서 칼처럼 휘두르면 재밌겠다 싶었다는.

왜 언젠가 홍길동이던가, 티비 속 퓨전사극에서 휘두르던 연검이랑 닮았다.

화살표를 그려넣기가 애매한 곳에는 등산로를 표시하듯 이렇게 노란끈 파란끈이 묶여 있다. 올레길의 대표색상인지도.

문득 눈에 띈 돌하루방, 돌하르방인가? 어쨌거나 올레길을 걸으면서나 제주도 와서 생각보다 눈에 잘 안 띈다.

올레길을 걸으러 왔던 가족인 듯 한데, 어느 틈에 이런 코팅된 표식까지 준비한 걸까. 그 세심한 마음씀씀이에 놀랬고,

또 저런 멘트는 언제 준비해서 적어넣은 걸까 궁금증이 끝이 없다. 집에서부터 "엄마아빠 힘내세요"라 적어왔을려나.

코팅을 제주도에서 올레길 걷는 와중에 하지는 않았을 텐데. 학교 앞 문방구에서 했을 수도 있겠구나..등등.

아마도 여기가 수봉로. 염소만 다니던 길을 삽과 곡괭이로 올레지기 한분이 직접 개척해서 만든 길이 수봉로라던데,

딱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올레지기님의 이름을 딴 '수봉로'인지는 걷고 나서도 모르겠다. 그냥, 제주도의 어느 길.

이렇게 돌들이 몽글몽글한 해안가를 바로 곁에 두고, 조금씩 뜨거워지는 태양을 느끼며 걷는 건 여전히 유쾌했다.

등엔 어느 틈엔가 솔찮이 땀이 배어나고 다리도 조금은 묵직해지는 느낌이었지만, 흔히 원형으로 돌게 되는 산책과
 
달리 그저 가고 또 가는 걸음이란 사실 자체가 유쾌했던 것 같다. 去去去中知, 行行行裏覺이라던가.

해삼과 오분작이를 체포한다고? 채취는 알겠습니다만 체포는 무엇인지. 한자를 알면 뜻은 헤아릴 수 있다지만,

이왕이면 조금 더 대중적인 단어를 써도 될 거 같은데 말이다.(잘 안 쓰이는 단어라면 한자를 병기해주던가 차라리.)

이것..난꽃 맞지 싶은데, 꽃들 너머로 열기구가 떠오르고 있었다. 한눈에 섬의 사면, 그러니까 바다로 둘러싸인

땅덩이를 실감할 수 있다는 건 꽤나 매력적이긴 한데...일단 제주도는 섬이라기엔 너무 크다. 실감이 안 날 정도로.

그러고 보면 제주도의 해안이 걸음직한 이유는, 김기덕의 영화 '해안선' 마지막에 나왔던 것처럼 반도 삼면의 해안은

모두 군대에 점령되어 있기 때문이다. 밤에 마음대로 내려가 밟아보지도 못하는 가시돋힌 철조망의 땅. 여기도

그다지 자유롭진 못해서, 파란색으로 색칠된 초소가 드문드문 현무암 사이에 박혀 있다.

소철..이던가. 어렸을 적 집에서 키웠던 뾰족뾰족하고 딱딱한 잎사귀의 식물을 재배중인 듯한 비닐하우스다. 근데

이렇게 관리 안되는 비닐하우스는, 일부러 천장을 뜯어내고 벽면의 비닐도 헐어버린 걸까. 열맞춘 소철 병정들에
 
점령당해버린 듯한 비닐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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