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안 리얼리즘' 전은 추석 연휴 기간에 무료로 개방하고 있었다. 김혜자를

닮은 이 인도네시아 여자는, 그녀의 인상적인 얼굴, 혹은 두 눈을 제한 나머지는 온통 흐릿하게 처리되어 더욱

강렬한 인상을 주는 듯. "병아리와 함께 있는 여자"라는 무미건조한 제목이 레알 리얼리즘의 향취 가득.

이 작품은 이번 전시의 대표 이미지로 광고나 티켓에 온통 쓰이고 있었는데 역시, 작품의 일부만 자른 채 활용된

그림들과 전체가 다 살아있는 실제 사이즈의 그림은 그 느낌이 꽤나 다르다. 가장 맘에 들던 작품 중 하나.

또 하나는 문화혁명기의 중국 화풍을 여실히 보여주는 몇 가지 작품들, 리얼리즘이 결국 대면하게 되는 사회

갈등과 모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영웅화된 노동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예컨대 이런, "구리광산의

첨병" 같은 작품.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마치 기념동상이라도 된 듯 단단하고 당당하게 버티고 선 저 굳건하고

의지적인 자세, 게다가 광산 내부를 흐르는 물방울의 정밀한 묘사까지.


이외에도, 비바람을 맞으며 한밤중에 전봇대에 올라 전선을 복구하는 용감하고 굳은 눈매를 가진 아가씨의

그림이라거나, 밤중에 애기를 이쁜 포대에 업은 채 쇠스랑을 꼬나쥐고 사람죽일 눈매로 뛰쳐나오는 애아주머니의

그림 같은 것들. 보고 있으면 나 역시 절로 기운이 솟아 죽창이라도 뽑아들거나 열심히 노동해야 할 듯.

사실 한국의 20세기 리얼리즘을 보여준다는 작품들은 대개 실망이었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20세기는 어느 정도의 공통 분모를 공유하고 있었고 피식민 경험, 일본의 수탈, 태평양 전쟁,

식민지 근대화와 독재, 자본주의화 따위의 역사적 경험에 대해 치열히 대면한 작품들이 보였지만, 한국은

그다지 선명하지도 뚜렷하지도 않은 느낌. 일제 강점과 극렬한 사상대립, 한국전쟁과 반공이데올로기,

재벌과 압축 근대화 등등 리얼리즘의 냉막하지만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주제는 무궁무진했을

텐데, 다른 나라의 작품들에 비해 인상적이지도 않았고 의미심장해 보이지도 않았다.


모르겠다. 아마도 한국의 리얼리즘을 좀더 잘 드러내는 작품들의 섭외가 안 된건지도. 그치만 그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작품, '속 농자천하지대본'. 쌀포대에 직접 그려진 이 작품은 표창장과 태극기와 캠페인 포스터의

활짝 웃고 있는 농부의 모습들이 온통 쭈글쭈글한 저 노인의 얼굴 속으로 우겨들어간 채, 그가 품은 한장의

편짓말로 주제를 드러낸다. 노인들만 남아 일손은 없고, 몸은 아프지만 난 괜찮응게. 부디 너그들은 대처에서

잘 살아라잉.



추석날 서울에 남아서 노는 건 처음이었다. 뭔가 공기가 달라진 채 휑한 느낌의 서울, 덕수궁 미술관에 갔다.

중화전 앞마당에 놓인 품계석들은 원래 왕이 조회를 볼 때 문무백관이 시립할 위치를 표시한 것, 그렇지만

추석을 맞아 품계석 주변에는 온통 '일반 백성'을 위한 플라스틱 의자가 깔린 채 우리 소리 한마당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과거의 한 때나마 '똥돼지들'이 대대손손 해먹던 자리에 '딴따라'와 '무지렁이 백성'들이

편안히 앉아 연휴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다니. 유쾌한 추석.





뭐라도 해야겠다. 광장부터 열어야겠다. (2009. 7.)

[광장을 열자 조례를 바꾸자] 본격적인 서명운동을 위한 도우미자격을 얻었습니다. (2009. 8.) 


작년에 생긴 서울광장을 두고 오세훈의 서울시 측이 신고제 대신 허가제로 운영하면서 생겼던 일이다.

촛불집회를 막고, 문화제를 막고, 노무현 추모행사를 막았다. 잔디 보호를 위해, 광장 목적에 부합하지 않아,

그리고 폭력 시위가 우려된다는 다양한 이유를 '하사'해주었다. 그렇지만 서울시나 관에서 주최하는 온갖

어용 행사들은 별다른 제재없이 쉼없이 벌어졌다. 서울시는 집회 및 시위의 자유가 인간의 기본권이 아니라

그들이 허가해주는 시혜나 재량에 속한다고 믿는 듯 했다.


대학 때 조금이나마 '사람 많은 곳'을 찾아다니다가 돌도 맞고 그랬지만, 언젠가 부모님이 그랬었다. 이제 와

돌아보니 바뀌는 것 하나도 없는데 괜히 나섰지? 니가 나섰다고 뭐하나 바뀐 거라도 있냐.


뭐, 길게 이야기할 건 아니다 싶어서 알게 모르게 바뀐 것도 많다고 하고 말았지만, 사실 딱히 이런 승리를

거뒀고 이런 걸 바꿔냈다, 라는 '승리의 경험'이란 게 없는 건 사실일 수도 있겠다. 물론 상식을 둘러싸고

벌이는 밀고당기기인지라 정말로 바꿔낸 부분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딱 눈에 드러나는 것만 따지면 그렇단 얘기.


광장은, 서울 광장은 좀 다를 거 같다. 그래도 조례 개정안을 요구하기 위한 십만명이던가, 서울시 거주인구의

몇 %에 달하는 그 인구가 이름과 연락처와 주소와 주민번호를 기꺼이 제공하며 서명을 했었고, 당시 한나라당

일색이던 서울시의회가 무시하고 사장되는가 싶더니 이제 일년이 지나 잊혀질 즈음 구성원이 바뀐 서울시의회가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강남시장 오세훈이 뻗대고 있어서 그렇지만.



정 그가 헌법적 가치와 원칙을 무시하고 뻗댈 거라면, 이런 건 어떨까. 총 25개의 구가 있는 서울시에서 그가

대표하는 곳은 강남, 서초, 송파의 3개구. 서울광장을 25개로 구획해서 3개 구역범위만큼만 오세훈 맘대로

허가제로 쓰던 예비군기지로 쓰던 지지고 볶으라 그러고, 나머지 22개 구역범위는 신고제로. 서울시민과

서울시의회가 바라는 것처럼.



승리의 경험이 머지 않았다. 서울광장을 시민의 품으로.


 

[참고] 오세훈, 서울광장 조례안 공포 거부

서울광장을 놓고 서울시와 서울시의회가 다시 맞붙었다. 서울시의회가 최근 재의결한 '서울광장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 개정안'을 서울시가 공포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서울시는 19일 서울광장 조례가 집시법 등 상위법과 충돌한다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지난 17일 열린 조례·규칙심의회에서도 서울시는 서울광장 조례안에 포함된 '집회 및 시위의 진행'은 시의 소관업무가 아니라며 상정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서울시청 앞 광장을 놓고 벌어지는 이 같은 충돌은 처음이 아니다. 서울시의회는 지난달 13일 시의원 79명이 발의한 이 조례안을 통과시켰지만,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6일 시의회에 재의를 요구했다.

오 시장의 재의 요구에 서울시의회는 재의결로 맞섰다. 시의회는 지난 10일 열린 본회의에서 "오 시장의 주장은 시민과 시의회를 기만하는 반민주적, 반시민적, 반의회적 오기행정"이라며 다시 조례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서울시는 소송까지 검토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서울광장 조례안에 포함된 내용은 경찰청 소관업무로 심의회 상정 대상이 아니"라며 대법원에 '조례안 재의결 무효확인 및 집행정지 소송'을 낼지를 이달 안으로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오세훈 시장도 서울시의회가 조례안을 재의결할 경우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서울광장 조례안의 공포 기일은 19일까지로, 서울시가 이를 공포하지 않을 경우 지방자치법에 따라 시의회 의장이 직권으로 공포할 수 있다. 서울시의 소송 검토는 시의회 차원의 공포에 대한 또 하나의 맞불 작전인 셈이다.  (프레시안, 2010. 9. 19)

 오세훈 시장 서울광장 개방 끝내 거부… 은근히 편드는 언론 (미디어오늘, 2010. 9. 19)


전달하려고 하는 명료한 메시지를 향해 차츰 전진해 나가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그냥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지극히 농밀한 환상과 이미지로 가득차 있는 영화가 있는 것 같다. 영화를 빌어 말하고자 하는 바가

하나로 응축된 '결정타'와 같은 장면이나 대사, 이미지가 얼마나 효과적이고 설득력있게 안배되는지가 전자와

같은 종류의 내러티브 위주의 구조라면, 후자와 같은 종류의 영화에서는 딱히 그런 결정타랄 부분 대신에

전체적으로 관객을 얼마나 깊게 그 세계로 빠져들게 해서 실감케 하느냐, 가 관건이지 않을까.


'엉클 분미'는 그런 후자 스타일의 영화다. 잘 벼려지고 설득력있게 가다듬어져 누구라도 명료하게 읽어낼 수

있는 주제를 전달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냥 스물스물 일어나는 분위기,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장면들에

관객이 충분히 몰입할 수 있을 만큼 자욱한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스토리가 논리정연하지 않아도,

장면의 전환이나 전개에 개연성이 부족해 보여도, 뜬금없이 등장한 인물이 거침없이 기괴한 장면을 선보여도

관객에게 '저건 말도 안돼'라는 식의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으면 되는 거다.


엉클 분미, 분미 아저씨는 신장 질환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 시골의 여동생 집으로 돌아오고 나니, 갑자기

죽은 아내의 혼령이 나타나고 오래전 실종된 아들이 원숭이 괴물이 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분미 아저씨는 전생의

기억들을 단락적으로 기억해내고, 죽은 아내의 혼령이 이끄는 대로 온 가족은 정글을 지나 어느 괴괴하고 신비로운

동굴로 길을 떠나게 된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지만, 이야기한대로 스토리는 크게 중요치 않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건조하지만 환상적으로 툭툭 던져지는 장면과 삽화같은 이미지들, 그것들이 쌓여서 만들어내는

효과를 느긋하게 감지하고 영화에 올라탄 채 즐기는 거다.


고백하자면, 즐기기가 쉽지는 않은 영화다. 태국의 정치상황과 현실 문제를 은유적으로 다룬 장면들이 크레딧

올라가면서까지 심술궂게 등장해선 가뜩이나 혼란해진 머리를 더욱 정신없게 만드는가 하면, 분미 아저씨가

자신이 태어난 '자궁'으로 인식하는 그 시꺼먼 동굴 뱃속에서는 희미한 손전등 불빛 하나를 조명삼아 카메라를

핸드헬드로 들고 지리하게 찍는다. 속이 다 울렁거리더라는. 뿐인가, 여태 내가 봤던 모든 종류의 섹스신 중에서

이렇게 파격적이고 예기치 못한 이종(異種)간의 섹스신은 없었다. 사람과 메기라니. 인어가 태어날 듯. 민물인어.


그래도, 영화가 끝나고 세상 밖으로 다시 풀려나오니 문득 낯설다. 이런 느낌, 좋다.








그냥 한번 웃고 말 동영상이라기엔, 스토리의 쫄깃함이라거나 대사와 배우들의 싱크로율, 그리고도 날카로운

풍자까지도 놓치지 않은 작품이랄까. 게다가 패러디한 작품도 '대부'란 말이다.


그렇지만 사실 요새 '똥돼지'들을 향한 격렬한 반응과 집요한 추궁들, 그리고 그 추궁의 화살을 어찌됐건 MB를

희롱하는 데로 돌리려는 움직임은 걱정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다. 노골적 인사청탁이나 부정한 배임행위 없이도

왠지 끼리끼리 모여들게 되는 상황은 이미 오래전부터 강화되어 왔기 때문에,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도 알고보니

친구의 자제가 외교부에 들어와있더라, (본인은 결백하다) 따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잘난 집안, 돈과 빽으로 받쳐주는 부모 밑에서 부족함없이 지원받아가며 자라난 그 아이들이라면, 사실 굳이

그런 노골적 인사청탁과 무리수 없이도 한 자리 알아서 챙기는 게 딱히 어렵진 않을 거다. '똥돼지'들은 그런

풍요로운 환경과 아낌없는 지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제 부모 손에 똥을 묻히고 있으니 부모에도 못 할 노릇,

지켜보는 사람들의 복장에도 못 할 노릇. 


사실은 민주주의사회랍시고 갈수록 '계급사회'처럼 피라미드화되어 가는 그 구조 자체를 문제삼고 의제화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싶다. 비단 외교부만의 문제도, 정부기관만의 문제가 아니라 더욱 극성스레 사기업을 비롯한

사회 전반에 창궐해 있는 이야기니까. 몇몇 그 피라미드에 주어진 자리도 제힘으로 못 꿰어차고 부모의 힘을

빌리는 '똥돼지'는 차라리 예외적인 케이스, 쯔쯔 혀를 차며 불쌍하게 봐줘야 할 케이스라고 봐야 할 거 같다.



마루 밑 아리에티. 저번주 도쿄 여행에서 지브리 스튜디오를 들렀을 때, 아리에티 캐릭터 상품을 샀어야 했다고

땅을 치며 후회하고 말았다. 이 단호하고 살짝 딱딱해보이는 토끼머리(?!) 소녀에게, 그리고 그녀가 사는 마루

밑장에 이런 이야기와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10센티미터 '소인'의 오감으로 감지하는 인간의 세계를 그토록 치밀하게 묘사해내고 활용할 수 있다니,

토끼머리라고 생각했던 그게 야무지게 머리를 묶은 빨래집게라는 상상력에선 정말 영화관 안의 모두가 빵 터지고

말았다. 한층 세련된 OST들과 잔뜩 신경쓴 게 분명한 사운드의 힘을 빌어 그려내는 하야오의 또다른 세계.




이런 거 눈여겨 보면 영화가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몇가지 영화의 단서들을 주워섬겨본다. 당연히 이는

전적으로 내 기준..;;


# 인형의 집.

일반적으로 '인형의 집'이라 하면 인간이 인형을 위해, 그렇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제공하는 편의

시설인 셈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인형의 집'이라 불리지만 실은 소인들을 위해 수십년전부터 준비되었던

정교하고 아름다운 집이 있다. 생존조차 쉽지 않은 소인들, 아리에티와 그녀의 가족에게 '인형의 집'은

하나의 이상향과도 같은 공간. 그들이 그 집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는지 그 미묘한 변화를 읽어내는 건

꽤나 즐거웠다.


# 각설탕.

인간으로부터 '몰래 빌리려던' 각설탕이 노골적으로 주어지는 순간, 그리고 다시금 일련의 모험을 거쳐

인간에게서 아리에티에게 건네지는 순간의 어마어마한 차이.


# 할머니.

일반인. 보통 사람. 방학 때마다 곤충 채집을 하고, 딱딱한 껍데기를 뚫고 알코올을 주사해두곤 했던 어린 나.

그녀의 흐물흐물한 잇몸이 느껴지는 웃음이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일종의 공범자 의식, 아니

차라리 나라면 방송국부터 불렀을 텐데. 아무래도 할머니가 대책없긴 하지만 순박한 것도 어쩔 수 없구나.

하야오가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늙은이라고 늘 현명하거나 진실을 알고 있다는 따위 안전한 '상식'에 기대지

않는다는 점.



# 배경지식 (지브리 스튜디오 보러가기 전 어디선가 주워들은..)

하야오가 지브리 스튜디오를 만든 후 '월령공주'를 만들지 송충이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만들지 두 개의

작품을 두고 고심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가는 과정만으로 재미있는 영화 하나가

되리라던 하야오의 믿음은 확고했지만, 우선 액션이 좀더 들어간 '월령공주'부터 만들자는 주위의 권유에

월령공주가 만들어졌단다. 아마 그 때의 그 송충이 주인공의 영화를 좀더 의인화하여 다듬은 게 이 영화

아닐까.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가는, 그 조그만 발들을 살살살 움직여 시속 10센티쯤으로.


# '매트릭스', 혹은 '인셉션'식의 질문 하나.

마루 밑의 아리에타가 살던 일상은 그녀의 집천장처럼 흔들림없이 단단했다. 단단했던 때가 있었다. 어느

한 시점에서 그녀의 일상은 잔뜩 헝클어지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가야 하는 타이밍이 온다. 알고보니

그녀의 집천장은 얄포름한 널빤지 한장, 몰랐던 건 아니겠지만 어느새 잊고 있었거나 애써 지우고 있었거나.

그렇다고 마루 위의 인간 쇼우가 사는 일상이라고 단단치도 않다. 심장수술을 모레로 남겨둔, 남은 수명을

손가락으로 헤아리는 인간의 세계는 일찍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던 것.


마루 위냐 아래냐, 그게 문제가 아니다. 하야오, 지브리 스튜디오가 일관되게 말하는 건 하나다.

살아라. 살아라.









진중권(@unheim)은 "허영만 화백의 선견지명? 이 만화가 2003년 거라니... 이 분, 돗자리 까셔도 되겠네요."

지인(@tradepoli**)은 "저 강을 아끼는 사람들의 심정으로.."라며 답답함을 호소하며 리트윗을 했고,

나(@ytzsche)는 "이미 2003년에 상식이 되어가던 이야기, 그치만 2010년엔 낯설어지고 만 이야기."라며

프레시안에 오른 기사를 재트윗. ( 허영만 화백의 예언? <식객> 한 장면, 4대강 논란과 흡사 )



어제 4대강에 대한 피디수첩을 보면서도 계속 분통이 터졌댔다.

"아니 정말, PD수첩에서 하는 얘기 누가 몰랐나. 별거 없잖아. 상식적인 차원의 비판과 온건한 수준의 문제제기일

뿐이다. 그 정도의 제도권내 비판조차 이런 우여곡절을 거친다는 사실이 더 비극이다. 우리 가족 모두 총평은

싱겁다, 라는 것."

"솔직히 정권과 언론상층부에서 그토록 무리하게 방송을 금지시켰길래 대체 뭐가 있나 했었다. 근데 이건

너무나 상식적이자나. 그들은 '상식'의 기준을 어디까지 끌어내리고 싶은 걸까."


그 답을 보여주듯, 2003년 허영만 화백이 기록한 '상식화되어가던' 당대의 (준)상식. 2010년 지금은 오히려

그 방향이 뒤집어진 채 상식이 비상식의 낯선 영역으로 내몰아지고 있다.



그 와중에 다른 트윗 친구분(@vleee**)은 "오늘로 이명박대통령의 임기가 절반을 채웠답니다!! 이제????"

라며 경악하고 말았다는 전설같은 이야기. 아, 슬프다.



맨프로토 190CXPro3, 옷장 안에 봉인된 삼각대를 대신하다.
맨프로토 324RC2 Joystick Head, 정말 좋은 '손잡이'다..!


비가 슬금슬금 내리던 날씨, 맨프로토Manfrotto의 190CXPRO3 삼각대에 324RC2 Joystick Head를 옆좌석에

태우고 고수부지로 향했다. 카본화이버 튜브에 마그네슘 재질, 중학교 때던가 K-Ba-Ca-Na-Mg..로 나가는

반응속도를 죽어라 외우며 물에 던져진 마그네슘 조각이 폭발하는 실험을 했던 기억이 뜬금없이 떠올랐지만,

다행히도 강변 둔덕위에 다리를 펴고 삼각대를 올릴 즈음 비가 멎었다. (물론 삼각대의 마그네슘 성분이

비 좀 맞는다고 폭발할 리는 없고, 오히려 녹슬지 않으니 악천후와 무관하게 쓸 수 있을 듯.)

삼각대를 써본 게 처음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고급형은 다르다. 수평계가 달린 볼 헤드와 유려하게 미끄러져

나오는 삼각대의 다리들 덕에 위치를 잡고 세팅하기가 쉽고 빨랐다. 우선은 살살, 셔터속도를 1/2 sec 정도로

잡고 강 넘어 북쪽의 도시를 찍어보았다. 이런, 망원렌즈를 안 가져왔더니 저 너머 S타워의 모습이 너무 작다.

게다가 한강은 왜 이리도 넓고도 도도하게 흐르는지.

불빛이 반짝반짝할 만한 장소로 바꿨다. 동작대교 위의 구름까페 전망대. 강넘어 아파트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들이 차분하게 반짝반짝, 게다가 육각별 모양의 가로등 불빛이 정말 반짝반짝거리는 동작대교를 지나는

차들의 불빛이 길게 미끄러지기까지. 때마침 지나가는 전철을 잡겠다고 삼각대를 대충 펼치고는 볼 헤드로

순식간에 각을 잡았다. 삼각대도 삼각대지만, 볼헤드 조이스틱 참 편하다는 감탄을 다시금.

조금씩 셔터 속도를 과감하게 늦춰보았다. 왜 그, 자동차 불빛이 길게 이어지면 빨갛고 노란 띠처럼 차도 위를

두르는 사진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평소엔 망할 손떨림 때문에 고작 1초도 흔들림없이 버티지 못하는 데다가,

비그친 후 강바람이 세차게 부는 다리 위에서 미미하게나마 흔들리던 싸구려 삼각대의 경험이 있어서 불빛이

마치 너울성 파도처럼 울렁울렁 했던 거다. 셔터속도 6 sec, 빨갛고 노란 불빛띠가 선명하게 감겼다.

셔터속도를 한 15초쯤으로 놓으면 어떨까. 불빛들이 어른어른해지고 아파트니 동작대교의 실루엣이 뭉개지진

않을지 염려스러웠지만 일단 시도. 15초 동안 꼼짝않고 미동조차 없이 카메라를 잡고 있어줘야 할 텐데.

결과는 나름 만족스러운 정도였다. 한강의 수면이 간유리 표면처럼 보들보들하게 불투명해졌고 차도 위 불빛은

엷게 번져나갔다. (15 sec, F/40.0, ISO-800) 착한 녀석, 토닥토닥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

ISO를 좀더 높여서 다시 시도, 차도 위에 감겼던 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은은한 황금색 불빛으로 하늘까지

물들어버린 느낌, 이 시간을, 이 공간을 뭐라면 좋을까. (15 sec, F/40.0, ISO-3200)

아담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의 위력에 대해 일찍이 이야기한 바 있지만, 이런 불빛 띠가 반듯이 감기는

사진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다리'의 위력이 꼭 필요하다. 사진 안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눈치챌만한 여지도

남기지 않는 시크한 녀석이지만, 이리저리 휘두르며 들고 다녀도 힘들지 않을 만큼 가벼우면서도 흔들림없이,

단단하게 카메라를 잡아줄 수 있는 녀석이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우선 시장이

몇 가지 전제조건을 충족해야 하듯, 보이지 않는 '다리'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역시 그런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는 거다. (3 sec, F/29.0, ISO-3200)



P.S.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진들이 나오고 마는 거다. 모처럼 짬내서 카메라 둘러메고 밖으로 나섰더니 고작

요런 사진들만 우르르 나와서야 대략 난감. 삼각대, 제대로 된 삼각대 없이 찍힌 난감한 사진의 몇 가지 대표적인

예시들을 골라 봤다.

1) 손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수준에서 최대치는 이정도. 젊은 시절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굶주린 상태는 아닌지

등등 여러 조건에 따라 손떨림의 정도는 개인 편차가 있을 수 있겠다. 그치만 사진은 공통적으로 어둑어둑하단 사실.

2) 무리해서 찍는다 해도 손톱만한 사이즈로 볼 거 아니라면 시신경에 매우 유해하다. 멍하니 어느 한점을 응시해서

한 삼십초쯤 바라보면 3D로 뭔가가 튀어나올 기세.

3) 도깨비불이 휘날리듯 사방으로 비틀거리는 불빛들의 대향연. 호흡조차 멈춘 채 얼음처럼 굳어 있는다고 애썼지만

불빛은 심장 맥놀이하듯 벌렁벌렁 나뒹굴고 있다.

물론, 아예 노골적으로 이렇게 흔들어대면 또 나름 멋진(멋지다고 생각되는) 사진이 나오기도 하는 거 같다.

사진으로 생생한 구체를 잡아내는 게 아니라 사방으로 번져나가고 흐느적대며 '미친X 널뛰듯' 일렁이는 추상화를
 
그려낼 거라면, 삼각대의 도움은 필요없이 은지원 만보기 흔들어대듯 카메라 잡고 흔들어대면 되겠다.




퇴근길에 선릉역 앞, 어느 아저씨가 가로수처럼 위장하고 얼음, 한 채 서 있었다. 아무래도 시선이 쏠리는

옷차림에 어색스런 쭈뼛거림인지라 가만히 주위 지형지물을 살피니 옆에 나즈막한 잡지 매대를 세워두고

같이 얼음, 하고 있었던 거다. 지하철 바닥에 닭둘기 털날리듯 쏟아져내리는 무가지 중 하나겠거니, 하고

심상히 지나가려다가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저게 혹시 그건가.

비닐에 한부씩 곱게 싸인 채 주인을 기다리던 몇 권의 잡지들 앞에는 골판지에 유성매직으로 '빅이슈3,000원'이라

적혀 있었다. 냉큼 삼천원을 꺼내들고는 아저씨에게 '땡-!'을 외치며 잡지를 건네받고는 예상보다 얄포름한

그 두께에 놀랬고, 또 한부씩 비닐포장되어 있음에 놀랬다.

빅이슈코리아, 뭐라더라...홈리스들, 그러니까 한국에서 흔히 '노숙자'라 불리는 사람들의 재활과 자립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잡지라고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다. 외국에서 이미 존재하는 잡지가 한국에도 이제 창간되었다는

소식에 살짝 궁금증이 일었었고, 보통 사람들로부터 '재능'을 기부받아 컨텐츠를 채운다는 이야기에 조금 더

살짝 궁금증이 동했었다. 표지에 No.002라고 적힌 걸 보니 이번달로 두번째 발간했나보다.


그나저나, 표지모델은 정말 노숙자를 모델로 삼아서 사진을 찍은 걸까 아님 누군가가 분장을 한 걸까. 시선을

확 잡아끄는 데는 확실히 성공한 듯 하다. 취직했단 건, 빅이슈코리아에 취직했단 걸까. 여러 궁금증이 몽실몽실.

표지 아래쪽에는 잡지값 3,000원 가운데 1,600원이 홈리스에게 간다는 안내문구가 씌여 있었다. 그래, 표지포함

고작 36페이지 짜리 잡지가 삼천원이나 할 리는 없을 줄 알았지만, 뭔가 절반 이상 이렇게 의미있게 쓰이는 건

내 기꺼이 뿌듯하게 인정할 수 있다.

이번 달 빅이슈의 '스타 스토리'는 안젤리나 졸리. 빅이슈 영국 북부판, 그리고 빅이슈 일본판에서 제공한 컨텐츠를

한국에서 번역하고 살짝 글을 얹은 기사였다. 자신의 영화를 홍보하러 한국에 왔던 졸리는 기자회견석상에서

"수차례 '빅이슈'의 무료 표지모델을 했다"고 밝혔다던데, 이왕임 컨텐츠 자체가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면 더욱

의미심장했을 듯. 이런 재능을 기부하는 기자는 없는 걸까. (졸리도 만나고 사진도 찍고 겸사겸사, 나라도 좋다면.ㅋ)

세계의 빅이슈 중 하나, 영국의 '빅이슈'에서는 빅이슈코리아가 한국에서 드디어 창간되었음을 알리며 무려

네 페이지나 할애하는 관심을 보였다고. 오...영국에서도 이 잡지는 서른여섯 페이지일까. 글탐 정말 굉장한 비중.

잡지를 슬슬 보다가 눈에 띈 건 빅이슈코리아 자립지원 프로그램, 그 중에서도 돈 드는 거 말고, 자원봉사 교육

지원이라거나 전문 재능기부 봉사단 모집이라거나..그런 것들에 눈이 휙휙 꽂혔다. 오...재미있겠다...!!!

나도 뭔가 할 수 있는 거 없을까, 싶은 생각이 마구마구.

몇 가지 재미있던 꼭지들, 이라기보다는 사고(社告)가 맞겠다. 빅판 도우미를 모집한댄다. 자원봉사인증서도

발급해 준다는데, 아직 방학 중인 학생들 괜찮지 않을까 싶다. 한 달도 안 되어 사천부 가까이 팔려나간 잡지면

꽤나 준수한 성적이지 않나. 앞으로 더욱 많이 팔려나가면 좋을 거 같다.


'빅이슈 판매사원'이라는 게 아까 선릉역 앞에서 만났던 '얼음땡' 놀이 중이시던 아저씨같은 분들일 텐데,

아무래도 조금씩 익숙해지다 보면 조금은 더 신나게 판매하실 수 있을 거라 기대도 된다.

그런 분들의 행동수칙도 잡지에 떡하니 적혀있다. 음주나 흡연 중 빅이슈를 팔지 않는다, 미소를 지으며 당당히

고개를 들겠다, 하루 수익의 50%는 저축한다...사소해 보이지만 정말 그분들을 위한 세심한 조항들인 거 같다.

아무래도 궁금해져서 홈페이지를 검색했다. http://www.bigissue.kr/

'빅이슈'로 찾았더니 더불어 뜨는 연관검색어는 '노숙자 잡지', '빅판(빅이슈 판매사원)' 등이다.

그저 어렴풋이 노숙자를 돕는 잡지겠거니, 혹은 노숙자가 만드는 잡지겠거니 더듬어 생각했을 뿐이었다. 근데

사실은 이런 메커니즘으로 노숙자들의 자립을 돕고 있었던 것. 우선 10권을 무료제공하면서 시작되는 수레바퀴는

그분들의 주거와 주소를 확보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찾는데까지 나아가는 거다.


빅이슈코리아는 이런 잡지라는 내용, "재능 있는 청년이 만들고 홈리스가 판매하는 소셜 엔터테인먼트 매거진'을

추구한다는 내용이다. 지속적으로 노숙자들의 목소리를 담는데 노력하며, 동시에 일반 독자들의 관심분야까지

아우르겠다는 그들의 비전은 사실 조금 이상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일반 독자들의 컨텐츠 참여나

봉사활동이 필요한 거겠지만.

8월호를 훑어본 느낌은, 날것의 느낌이 있긴 하지만 굉장히 신선하고 발랄하다는 것. 아직 2호밖에 안 되었는데도

나름의 체계가 잡혀가는 것 같고, 독자들의 피드백도 꽤나 열렬한 듯 하다. 기분 좋은 일이다.

Working! Not Begging! 한때 홈리스였던 사람들이 '커밍아웃'을 해서 '빅이슈 판매사원'으로 얼음땡 놀이부터

시작한다는 건 정말이지 꽤나 의미심장한 출발선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 잡지로 수많은

노숙자들이 전부 자립할 수 있게 된다거나 그들의 삶의 질이 비약적으로 도약하리라 믿지는 않지만, 그건

정말 굉장히 과도하고 불공평한 기대지만, 그래도 노숙자들의 목소리와 움직임이 하루하루 스러져 버리는 게

아니라 이렇게 활자화되고 남아서 사람들 사이에 유통된다는 게 대단하다.

이번 호 기사 중에 제일 재미있었던 것, 꼭 그렇다고 내가 '이래도 안 볼테냐'하고 들이대는 건 아니다. 그치만

뭐, 다이어트나 교육 관련 이슈에 대한 조금 '섹시한' 컨텐츠가 뜨면 단숨에 각종 포털 사이트 대문에 큼지막히

걸리는 상황이니, 이정도 매력적인 제목의 다이어트 기사라면 어디 한번 사보고 싶은 맘이 솔솔 들지 않으려나.


무려 '누드 셀카놀이 다이어트' 비법이란 말이다. 당장 선릉역 8번 출구 앞으로 뛰어가시길. 혹은

홈페이지 (http://www.bigissue.kr/)로 고고씽~*








세상에 손잡이는 많고, 용도도 다양하다. 아예 본체와 딱 붙어서 고정된 것이 있는가 하면 본체와는 별도로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있다. 단순히 물체의 연장으로 뻗어나온 것도 있지만 또 나름의 독자적인 의미와

유용성을 가진 것도 있는 거다.


카메라용 삼각대에 조이스틱이 옵션으로 붙을 수 있단 이야기를 얼마전에 처음 들었다는 친구의 첫 반응은

'그거 무슨 수도꼭지 같은 거야?'라는 거였다니 나름 촌철살인의 통찰이었던 셈이다. 맨프로토Manfrotto의 

 324RC2 Joystick Head는 그 하고많은 손잡이 중에서 수도꼭지와 가장 비슷한 형태의 손잡이다.

수도꼭지가 전후좌우상하로 자유로이 회전하며 원하는 온도의 물을 원하는 만큼의 세기로 끌어낼 수 있다면,

맨프로토의 조이스틱 볼헤드 역시 전후좌우상하막측 신묘하게 움직이며 원하는 사진을 쉽게 끌어낼 수 있다.

삼각대 자체를 쓰다 보면 부딪히는 난점은 사실 명백하다. 삼각대를 위치시킬 바닥이 판판한 수평을 유지한

맨질맨질 수평바닥이란 법은 없다는 거다. 아무리 다리 세 개를 이리저리 비틀어대도 평형을 맞추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삼각대 다리를 미세하게 조정해 보아도 울퉁불퉁한 바닥 위에서는 삼각대의 수평을 잡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 되고 만다. 삼각대 자체의 수평계가 제 역할을 해서 조금은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부들부들

끓는 라면에 빠뜨린 달걀 노른자처럼 출렁이는 수평계의 수평을 잡기란 역시 적잖은 시간과 집중을 요하는

일이다.

바로 그런 문제의식에서 생긴 게 아닐까, 살짝 추측해 본다. 삼각대에 덧붙이는 조이스틱, 카메라를 손쉽고도

미세하게 조정할 수 있고 삼각대와는 별개로 수평을 다시 잡아낼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하는 거다. 게다가

삼각대에 더해져 함께 휴대되어야 하니 무게가 최대한 가벼우면서도 튼튼해야 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말하자면, 좋은 손잡이로서 '조이스틱 헤드'가 가져야 할 장점은

1) 손쉽고 간편한 미세조정

2) 수월한 수평측정

3) 가볍고 견고한 내구성



이렇게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삼각대 위에 장착한 조이스틱 헤드, 조금은 부담스럽게 큰 거 같기도 하지만, 손에 꽉 감기는 조이스틱의 그립감이

너무 좋다. 쥐고 조종하기에 적당한 굵기와 길이, 그리고 손으로 쥐기에 딱 알맞는 인체공학적 형상과 고무로

마감된 오톨도톨한 외장재까지 깔끔하다. 왼손잡이용으로도 쉽게 변형이 가능하다지만 난 오른손잡이, 딱히

왼손을 지금부터 써서 오른뇌를 더 계발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패스.

손에 감기는 그립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이 아이를 얼마나 부드럽고 섬세하게 조종할 수 있는지.

삼각대와 조이스틱 사이를 단단히 잇고 있는 스테인레스 스틸볼은 거의 저항감없이 유려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아예 카메라를 수평으로, 수직으로 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아주아주 미세하게 조율하는 것도 스르륵.

조이스틱 뒤를 보면 이렇게 조그마한 다이얼이 숨어 있었다. 뭔가 해서 이리저리 돌려보니 그 스테인레스 볼의

뻑뻑함을 조정할 수 있는 장치, 최대한 풀었을 때는 아무런 저항감조차 없이 미끈하던 움직임이, 최대한 조이고 나니

많이 뻑뻑해졌다. 뻑뻑하다기보다는 조이스틱을 움직일 때 좀더 힘을 가해야 하는 정도..? 최대한 푼 상태와

최대한 조인 상태의 어느 중간쯤에서 쓰는 사람의 취향을 따라 조정하면 될 것 같다. 나야 최대한 풀어서

미끌미끌하다 싶도록 부드러운 상태가 좋고.

삼각대가 어느 지형에 얼마나 삐뚤게 놓였던, 조이스틱으로 조정하면 그만이다. 카메라를 장착할 때 바로 옆에

붙어있는 수평계로 손쉽게 수평이 맞았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실제 출사를 나가서도 삼각대의 수평에

연연하지 않고 조이스틱으로 쉽게 조정하고 고정시키면 되었으니, 순간을 포착해야 하는 바쁜 타이밍에도

번거롭지 않고 정말 편했다.

2010년 올해 5월에 나온 신상품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기존 조이스틱 헤드들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했을 거라

기대하는 게 당연하지만, 정말 맨프로토 홈페이지에서 찾아본 구형의 조이스틱들에 비해 디자인부터 다르다.

무게는 고작 430그램. 삼각대에 항시 부착시켜 두고 들고 다녀도 딱히 무리가 없을 무게고, 실제로 늘 그런 식으로

휴대하고 다녔지만 딱히 조이스틱 때문에 더 무겁다거나 휴대하기 불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해서, 내 맘대로 생각하는 조이스틱 헤드의 세가지 덕목을 여유있게 충족시킨다 싶어 대만족.

1) 손쉽고 간편한 미세조정

2) 수월한 수평측정

3) 가볍고 견고한 내구성
8시에 시작한다던 Stevie Wonder의 슈퍼콘서트, 제4호 태풍 뎬무가 기세등등하게 북상하던 타이밍, 슬슬 발동이

걸린 듯 쏟아붓기 시작하는 폭우와 교통체증 때문인지 8시 반이 되도록 사람들이 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강렬하게 조명이 내려꽂히는 무대, 그리고 시야를 하얗게 휘발시켜 버리는 조명이 빙빙 도는 천장 아래

잔뜩 설레고 흥분된 사람들의 웅성거림. 원더의 공연이 시작되기 전, 폭풍전야의 흥분.

2시간 20분여..쉼없이 달리던 그의 공연. 노래 하나가 끝나는가 싶으면, 그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또다른 멜로디가

마법처럼 너울대며 퍼져나왔다. 시작부터 목에 건 키보드를 격하게 치다가는 옆구리에 끼고 치고, 뒤로 돌려

치고 급기야 자리에 벌렁 누워서 치는 황홀한 퍼포먼스를 보였던 원더. 그의 꿈틀대는 동작 하나하나, 마치

음악에 흠뻑 취해서 경련하는 듯한 극도의 쾌감이 느껴졌다.

1950년생, 올해 육십이지만 좀처럼 나이를 모르겠는 그 열정. 아마 대머리여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그는 머리를

민 걸까 아님 앞에서부터 까진 걸까. 문득 궁금했지만 이내 그의 압도적인 음악 앞에 지워져 버렸다.


Isn't she lovely의 한 대목. 아이폰으로 동영상을 찍으려면 가로로 눕혀 찍어야 한단 걸 몰랐다. 아놔..;

그의 공연을 보러 간다고 자랑했더니 누군가 곧 애아버지될 분이 하던 말, 뱃속에 있는 딸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는. 정말 이 노래는 남녀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딸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다는 걸 알고 들으면

더욱 아름다운 거 같다, 더구나 평생 얼굴 한번 못 보는 딸이 태어나자마자 처음 그가 했던 말이라니.

그만큼의 어둠을 품고서 노래하는 아름다운 빛, 스티비 원더. 가난과 피부색과 장애를 승화시킨, 아님 오롯이

'사리'처럼 품고있는 그의 노래나 퍼포먼스는 정말 감동이었다. 마치 트럼펫같던 그의 음색은 오히려 앨범으로

녹음된 것들보다 실제로 듣는 게 더욱 압도적이고 파워풀하면서도 감미로웠다는 느낌.


또다른 공연 실황. 어줍잖은 아이폰의 동영상이라 화질도 별로고, 내 위치도 다소 코너에 몰렸는지라 볼 것도

없지만, 그의 목소리와 노래, 그리고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아우성같은 환호소리가 레알.

워낙 쉼없이 달린 공연이라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 하나하나 손꼽기도 쉽지 않다. 대충 알 만한 노래는 전부

섭렵한 거 같고, 몇몇 그의 최근 노래들도 불렀던 거 같고. Overjoyed. you are the sunshine of my heart,

isn't she lovely,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for once in my life, for your love, free, happy birthday,

lately, if you really love me, part time lover, superstition, uptight, yester me yester you yesterday...

대체 그의 명곡들은 왜 이리도 많은 건지.

11시가 거의 다 되어 밖으로 나왔다. 멀고 낯설지만 따뜻한 곳에 잠시 다녀온 느낌..여기가 어딘지, 지금이 몇시인지

그런 것들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꿈처럼 스티비 원더와 한 공간에서 미친듯이 소리지르고 노래를

따라불렀다는 기억만 남아 버렸었다.

그래서 두 글자로 그의 공연 소감을 정리하자면, '엉엉'. 날 가져요 스티비 원더. (그날 이래 변치않는 내 네톤

대화명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나의 최대한의 경의를 담아.)


그리고, 담번에는 그의 노래들 가사를 전부 외워야겠다는. 15년 후쯤 다시 돌아올 그를 기다리며.













삼각대 : 삼각형 형태로 버티고 선 세다리 위에 카메라를 단단히 얹어놓고 사진 찍는 도구.
(출처 : 내 머릿속 단어사전)


내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삼각대란 그런 거였다. DSLR을 지르곤 사방으로 카메라를 둘러메고 돌아다니다 보니

어둑어둑한 풍경을 찍어야 할 일도 생기고, 저주받은 손모가지의 부들거림을 의식하게 되고, 무거운 카메라를

거꾸로 쥐고 주야장창 셀카만 찍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 삼각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카메라를 전문적으로 쓰는 언론사 사진기자 같은 지인들에게 추천을 받았다. 

Q. 카메라 삼각대 뭐가 싸고 좋은가요.
A. 얼마 정도 예산을 잡고 있니.
Q. 5만원이요.
A. 헉... 
Q. (눈치를 보며) 그럼 한 10만원 이내...?
A. 됐고, 맨프로토를 사. 싸구려 사놓고 카메라 버리지 말고.
Q, 얼만데요?
A. 대충 삼십 정도면 좋은 거 산다.

이해할 수 없었다. 까짓것 급하면 돌멩이도 괴어놓고 사진찍는 판에, 삼각대가 뭐라고 몇십만원이나 줘야 하나.

그렇게 한 번 싸구려 삼각대를 샀고, 무겁고 뻑뻑한 그 녀석은 컴컴한 옷장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그리고, 맨프로토 삼각대를 다시 샀다. 나는 소장용이 아닌, 전천후로 어디던 들고 다닐 삼각대가 필요했다.

맨프로토, 이탈리아의 'Manfrotto'가문의 장인 정신으로 만들어진 전문가용 삼각대 브랜드였고, 카메라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겐 (알고 보니) 거의 삼각대의 대명사와 같은 존재였던 거다.

맨프로토 홈페이지에서 들고 온 나의 삼각대, 190CXPRO3의 이미지다. 옷장 안의 삼각대에 비기자면, 뭔가

최소한의 뼈와 가죽만 남긴 채 앙상하다는 느낌, 그러면서도 왠지 강인해보여서 별로 가벼울 거 같진 않다는

첫인상이었다.

집에 도착한 녀석을 뜯자마자 해본 건, 아령처럼 두 손에 쥐고 올렸다 내렸다, 가볍다 싶어서 다시 한손으로

쥐고 올렸다 내렸다 해보았다. 꽤나 가볍다. 사람이 올라서는 저울 위에 올렸더니 1kg에서 2kg 사이에 걸쳤고,

다시 주방용 저울에 올렸더니 한바퀴 돌아 1kg를 넘어 150g 정도에서 멈춘다.


가볍다. 이정도 무게면 계속 손에 들고 다녀도 돌아다니기에 전혀 무리가 없겠고, 가방에 넣어 어깨에 매고

다니면 거의 티도 안 날 수준이지 싶다.

삼각대를 본격적으로 훑어보기로 했다. 원래 다리 달린 동물들을 고를 때는 발굽의 상태부터, 밑에서부터 홅어

올라오며 보는 법이라 했던가. 야무지게 끼워진 고무재질의 발굽이다. 너무 말랑해서 금방 닳아버릴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또 너무 단단하고 딱딱해서 쉽게 미끄러질 것 같지도 않은 딱 알맞은 감촉.

무려 4단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미끈한 다리다. 플라스틱으로 성형된 조임새나 손잡이 등 부속들의 매무새가

말끔하다. 마무리가 거칠거나 어설퍼보이는 것들은 조금만 험하게 쓰면 금가거나 떨어져나갈 듯 불안한데,

반질거리는 부품들이 믿음직하다.

손가락이 딱 밀착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만들어진 레버는, 부드러우면서도 확실하게 조정이 쉬웠다.

그리고 레버를 올려 다리를 늘이거나 줄일 때 전혀 저항감이 없이 스르륵 뻗어나오는 느낌.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몇 번이나 올렸다가 내렸다가 반복했지만, 한결같이 미끈하고 부드럽게 움직인다. 캬아..

밭끝에서 한참을 머물며 만져보고 늘여보고 줄여보고, 한껏 애정해주다가 못내 아쉬워하며 조금 시선을

위로 옮겼다. 두 개의 마크가 붙어 있었다.


마그네슘이 사용되었음을 알리는 표지 하나. 강하고, 견고하며 가볍기까지 해서 무게를 줄이는데 맞춤인

마그네슘으로 삼각대의 중앙부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100퍼센트 카본화이버 튜브가 쓰였음을

나타내는 빨간 색 표지도 있다. 카본 화이버, 탄소 섬유가 질기고 견고하며 가볍다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

발끝에서부터 샅샅이 시선을 훑고 손으로 쓰다듬으며 감탄하다보니 왠지 스스로 조금 묘하다는 기분이 들 무렵,

마치 아리땁고 정숙한 아가씨의 종아리에서 예기치 못한 뜨거운 타투를 발견한 것 같은 순간이다. 

메이드 인 이태리의 자부심이 묻어나는 맨프로토의 로고.

그녀의-어느 순간 나의 맨프로토 삼각대는 '그녀'가 되어 버렸다-미끈한 각선미, 그리고 아마도 카본 튜브의

텍스춰가 그대로 드러나 보여지는 저 배열은 있는 그대로 이뻐 보인다.

팔씨름을 할 때, 사실 승부는 서로 손을 잡으면서 결정된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저 손만 잡았을 뿐인데 상대의

완력과 단단함이 느껴지는 거다. 맨프로토 삼각대의 다리를 만져봤을 때의 느낌도 마찬가지.

다소 선뜻하면서도 단단하고 강인한 체력과 내구력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

다리를 쭉 거슬러 올라와, 어느덧 가슴께까지 올라왔다. 세워놓고 한 방, 눕혀놓고 한 방.

은색의 레버는 삼각대의 각도를 조절하는 데 쓰인다. 25도, 46도, 66도, 89도 총 네 가지의 각도로 조절이 가능.

각도를 조절할 때도 뭔가 걸리는 느낌없이 부드럽고 무리없이 잘 펴지고 접히고, 조작하기가 참 수월하다.

드디어 상단부, 고지에 올라섰다. 마그네슘으로 만들어진 마그네슘 상단부의 매무새가 깔끔하다. 모양새를

보니 단단하게 카메라를 지지하기 위한 최소 부위만 남기려 애쓴 흔적이 보인달까.

그리고 말로만 듣던 수평계가 장착된 삼각대, 이전 삼각대는 수평계도 없고 뻑뻑한 움직임 탓에 수평을 잡고

사진을 찍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는데, 수평계가 있으면 카메라의 수평을 잡는데 편리할 듯 싶다. 얼른 들고

나가서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불끈불끈.

수직으로 위치를 전환했을 때의 모습이다. 버튼만 누른 채 센터컬럼을 움직이면 쉽게 수평과 수직의 위치를

전환할 수 있다. 간편한 조작이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일체형으로 만들어두면 자칫 조임이 헐겁거나

덜렁거리진 않을까, 묵직한 카메라까지 얹어놓으면 흔들리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워서 일부러 다소 난폭하게

움직여보기도 하고 잡아당겨보기도 했다.


아무리 거칠게 다뤄보아도 수평이던 수직이던 위치가 잡히고 나면 미동도 않고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삼각 다리와 센터컬럼이 마치 한몸인 양, 그렇게 믿음직하게 버티고 서 있는 모습에 끝내 감탄하고 말았다.
 

아, 삼각대 무게는 1.29kg이랜다. 왜 우리집 저울로는 1.15가 나왔을까 싶어 다시 살펴보니, 주방용 저울의

측정가능한 맥시멈 무게가 1.15였다는, 다소 멋쩍은 후문.


 



스티비 원더, Wonder의 공연을 보러 가기로 한 날, 어젯밤 거의 로또에 맞는 수준으로 티켓을 구해서

그때부터 줄창 그의 노래만 듣고 있다. 그리고 방금 본 건 지식채널E에서 그를 다뤘던 꼭지 두 개.


그 중에서도 가장 맘에 와닿던 문구, "우리 인생에는 얼마나 많은 노래들이 숨어 있을까."

스티비 원더와 함께 했던 장면들..까페 앞, 도서관 벤치, 남산, 술집, 바..

아, 중학교 2학년때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란 노래로 학교 합창대회를 연습하고 상을 탔던 기억도
 
있구나. 그의 노래만 해도 내 인생에도 이미 엄청시리 많은 노래들이 숨어 있었다, BGM처럼 은근히 깔리기도 했고,

숨소리조차 조심스런 압도감으로 다가서기도 했고.


그의 노래는 밝다. 워낙 밝고 명랑한 그의 노래들이라 종종 노래하는 그에게 까닭없이 화풀이를 하고 싶던 적도

있었지만, 그의 '밝음'은 어둠을 아는 밝음이다. 가난하고, 흑인에, 눈이 먼 '리틀 원더'는 더이상 그런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리얼 원더, 스티비 원더로 성숙한지 오래. 그의 노래들을 사랑한다. 내가 저 나이쯤 되면

저렇게 되고 싶다, 아직은 아니지만.


망원경도 챙겼고, 장미꽃을 던져야 하나 펜레터를 던져야 하나. 두근두근대며 퇴근시간만 기다리는 중.






생각보다 사람의 상상력이란 빈곤하다.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를,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를 전부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른 철학 위에서 세워진 시스템을 상상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더구나

주류 언론, 거물급 정치인들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되풀이하며 선전선동을 일삼는 상황에선.


'This is not America!'라는 외침에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시니컬한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 예측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인종차별, 보이지 않는 계급 WASP(white-anglosaxon-protestantist), 총기, 마약, 시장주의,

패권주의, 제국주의적 속성까지. 미국에 대한 빈정거림과 비난은 하늘을 찌르지만, 그만큼 스스로를 노출하고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솔직히 까놓고, 미국의 인종차별이 심하다곤 하지만 한국은 어떤가. 미국의

정치판과 대통령이 대놓고 전세계의 놀림감이 되지만 한국의 그것들은 어떤가. 그게 미국의 저력이다.


마이클 무어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하다. 아무런 배경지식도 관심도 없던 사람들에게 딱딱한 사회 시스템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현학적이거나, 반대로 감정적이지도 않다. 눈높이를 바닥에서부터 서서히 올려가는,

능란한 요리사가 부식재료를 다루듯, 그는 냉소적이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멘트들로 포커스를 한 점에 모은다.

미국 의료보험업계 로비스트와 결탁한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시스템.


시스템이 포인트다. 그는 응급실에서 돈 얘기부터 하는 의사의 야박함을 탓하지도, 티비에 나와 캐나다의

의료보장제도를 욕하는 정치인들의 뻔뻔함을 비난하지도, '의료 손실'이라는 손익의 개념으로 접근해 최소한의

보험을 제공하려는 보험업계의 비인간성을 타박하지도 않는다. 물론 야유와 조소는 아낌없이 던져지지만,

문제는 사람들을 그렇게 상상하고 움직이도록 틀지워주는 시스템이란 걸 그가 결코 잊지 않고 있다는 거다.


시스템이 사람들을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지, 그는 캐나다, 영국, 프랑스, 그리고 심지어 쿠바의 사례까지

풍부하게 제시한다. 그 모든 장면에서, 의사와 마주해선 'How much..?'부터 조바심치며 묻는 미국인들은

그들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시선 앞에서 완전히 당황하고 만다. 미국에서 120불짜리 약이 그들의 적국

쿠바에서는 겨우 5센트라니, 미국의 시스템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다른 것'이 아니라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 앞에서는 완전한 배신감에 망연해지고 말았던 그들.


나라마다 시스템의 각론은 약간씩 다르지만, 'This is not America. System pays it'. 대답은 한결같고

그 대답이 깔고 있는 마인드도 한결같다. 돈이 아니라 환자가 우선이라는 거다. 누군가 자신의 지갑이 아닌

건강에 신경을 써주고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봐준다는 것. 적절한 치유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은 국가의

기본이며, 더욱 부강해지자는 주문을 쉼없이 외우는 정치인들의 목적은 더욱 국민들을 잘 돌보기 위함이어야

한다. 그게 상식이다.


상식과 의지가 모여 시스템을 만든다. 상식의 힘은 시스템을 만들어낸다는 데에 있다.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부는, 상식을 조작하고 의지를 분쇄한다. 미국은 최소한 의료보장제도에 있어서는 그렇게 되어버렸다. 최근

오바마가 다시 전국민을 수혜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 개혁안을 통과시켰지만 두고 볼 일이고..


미국의 그들이 '시스템'과 '상식'의 가면을 빌어 하는 이야기는 뻔하다. 사회화의 비효율성, 비용 문제,

세금폭탄..사회화(socialization)와 몰락한 현실 사회주의/전체주의 국가 사이에 은근슬쩍 이퀄(=) 표시를

꼽아두고는 사회화나 국가적 차원의 복지 시스템을 절대악으로 몰아간다. 한국과 같다.


한국의 그들은 미국의 의료제도를 따라 영리 의료법인 설립을 독려하고, 의료서비스를 팔아 돈을 벌겠다는 거다.

그들이 우러러보는 '선진시스템', 미국의 시스템을 따라 국가가 운영하던 인천공항도, 한전이니 철도니 도로니

따위의 것들처럼 민영화한다는 이야기가 스물스물 나오는 판이지만, 한박자씩 뒤늦게 따르는 그들의 지독한

박자감각은 어쩔꺼나. 이미 시행됐고 문제가 잔뜩 불거져서 고칠려는 판에, 우리는 그 '정통 오리지널' 버전을

수입하겠다니.


아무리 그래도, '상식과 시스템'을 둘러싼 전투에서 한국의 그들은 줄곧 승리해 왔다.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부는, 상식을 조작하고 의지를 분쇄한다. IMF 이후 급격히 무너진 공공 영역, 공공 부문에 들이대진 효율과

수익성의 잣대로 민영화는 곧 지고선이 되었고. 하나하나 무너져내려 이젠 정말 돈 있는 자들의 생명과 재산을

유료로 지키는 경찰과 소방관들이 나온대도 딱히 이상해지진 않을 만큼 '상식'과 '시스템'이란 게 후퇴하고

있는 거 같다.


식코에 등장한 9/11 자원봉사자들, 한때 미국의 영웅으로 떠받들리다가 건축 폐자재 따위로 인한 신체적

손상이나 심리적 스트레스로 정신적 손상을 입은 채 내버려진 그들을 보고 중첩되는 이미지가 하나 있었다.

가해 선박의 이름으로 보통 기억되곤 하는 해상 기름유출 사고지만, 마치 누군가 본능 깊숙이 인셉션한 것처럼

'서해기름유출사태'로만 기억날 뿐인, 2007년의 "삼성 허베이스피리트호 기름유출사건".


아이들의 고사리손까지 끌고 가서 국민들은 돌덩이의 기름띠를 닦아냈지만, 사실 그 원유는 치명적인 독성을

갖고 있던 데다가 변변한 안전장비조차 갖추지 않은 채였던 거다. 거기서 국가나 언론이 해야 할 일은

그 '자원봉사'를 영웅화하고 애국마케팅으로 소모해버릴 게 아니라, 무엇보다 국민의 건강과 안위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상식'을 지켜야 했던 건 아닐까. 이놈의 나라 국민들은 너무 순해빠진 건 아닐까.






# 부국강병의 기치 아래 백성들에게 목숨을 내맡기고 충성을 다하라고 외치는 그들,

그렇지만 정작 사태가 엄혹해지면 그렇게 말한다. 너희같은 장똘뱅이가 어찌 그 뜻을 알겠느냐.

아 예, 어차피 아랫것들은 윗대가리에 누가 밟고 올라서나 그놈이 그놈인 것을.


영화에서 묘사된 대로라면 현상타파를 추구하는 전쟁광 세종의 치하나, 명이니 여진이니 왜니

그런 외국의 치하나 사실 '장똘뱅이' 백성들에겐 다를 바 하나 없는 것 아닌가.



# 현대식의 어정쩡한 말투라거나 마지막 장면의 '사물놀이'패 등장이라거나, 한은정의 복장이라거나,

어차피 엄정한 고증을 통한 정극을 추구하는 영화는 아니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제발 장르가 뭔지를 알려다오. 액션인가 드라마인가 멜로인가 역사물인가.


아무리 그래도 세종의 호위무사와 항아리를 집어던지며 개싸움을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300을 패러디하듯 대책없이 대군과 붙여놓는 건 아니지 않나.

전혀 설득력도 없고 떼잡이식으로 '애국심을 팔았으니 감동먹지 않을 테냐'라는 건가.
 
아니면 한은정의 (연기말고) 외모나 즐감하라는 건가. 좀처럼 납득되지 않는 허접 스토리.



# 버섯구름까지 등장시키는 그 적나라하고 호전적인 마인드.

뭐 다른 거 다 넘어가고 그저 '킬링타임용' 쓰레기영화라고 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버섯구름.

근대국가끼리의 관계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주권'의 개념을 울부짖는 세종,

그야말로 벌레처럼 죽어나간 적군의 시체 틈바구니에서 당당히 버티고 선 전쟁영웅들,

노골적으로 피어오른 버섯구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를 노래하고 싶었던 거구나.


그놈의 무궁화꽃, 핵주권 따위 이야기는 정말 질리지도 않나. 전쟁동원을 위한 그들만의 노래.

조선시대 버전으로 피어난 무궁화, 이건 쓰레기 중에서도 아주 악질적인 상쓰레기.



# 민족주의에 대한 일그램의 성찰 따위도 없는 영화.

민족주의를 들먹이는 윗대가리들이 의식하던 못하던, 그 사고회로는 대략 이런 거다.

'우리 민족은 잘났다', '과거에는 남들보다 잘나갔다',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현재를 보라',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 '그걸 위해 너의 피와 철을 바쳐라'.


우습게도 '우리 민족 잘났다'는 민족주의가 그 민족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현재를 수탈한다.

우습게도 그 잘났다는 민족의 과거를 강조하다 보니, 멀쩡히 나름의 역사적 맥락과 문맥 속에 존재하는

나름의 역사를 마냥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묘사하고 만다. 과거의 특정부분을 억지로 부각하고 높이려니

다른 부분은 깍여나가고 폄훼되는 거다.

 

# 사대교린의 옛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주권평등의 근대국가 질서를 섞어놓고,

'신기전'이라는 대량살상무기를 만들기 위해 뻔히 보이는 위험도 감내하도록 만들며,

조국과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 국민된 도리라고 강변하는 스토리는 혐오스럽다.


그런 스토리와 속내가 품고 있는 함의는 너무나도 정치적이라서. 그리고 현실에서는

그나마 안성기가 연기한 세종처럼 '백성은 황제'라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조차 없어놔서.

그러고 보면 정말 최악의 영화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노골적으로 최악의 인간들이 존재하는 현실세계에

비기면 나름의 영화적 상상력과 매만짐으로 조금은 이쁘게 만들어 놓은 셈이랄까.



아...시간 아까워. 아 진짜 쓰레기쓰레기 이런 상쓰레기 영화가 당시에 그렇게 화제였다니. 

의미도 없고 최소한의 재미도 없고. 정말이지 최악.



배우들에 우선 놀랬다. 메릴 스트립,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심지어 때로는 섹시한 중장년의 여성을 연기해 낼
 
수도 있다니 정말 대단한 배우. 그리고 에이미 아담스, 어쩌다 두 번이나 보게 되었던 '마법에 걸린 사랑(Enchanted
 
love)'의 지젤이었단 걸 끝까지 몰랐다. 사랑스런 공주님이셨다.


두 명의 캐릭터, '줄리'와 '줄리아'가 모두 그런 사람들이다. 뭐랄까 약간의 '공주' 캐릭터. 현실 감각이라 할 만한

건 평균에 많이 못 미치면서도 불쑥 열정에 휩싸여서는 두손 그러쥐고 눈 반짝거리며 꿈을 이야기하는.

나이가 들어서도 꿈많고 순수하지만, 그만큼 여리고 철없거나 순진해보인다는 이야기를 듣기 딱 좋은. 줄리아의
 
다소 과장스럽고 생각없게 들릴 수 있는 말투라거나 줄리의 블로그에 대한 순진한 몰입과 기대라거나.


그렇지만 그녀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요리 앞에서, 정말 하고 싶은 것 앞에서 그녀들은 불쑥 자라난

모습을 보인다. 8년에 걸쳐 요리책을 가다듬는 모습, 1년에 걸쳐 수백개의 레시피를 전부 시도하는 모습,

그 와중에 생겨난 문제들을 직면하고 돌파하는 모습..까지. 자신이 벌여놓은 일의 애초 부여한 의미를

잊지 않고, 그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지겠다는 모습은 그들에게 혀를 차던 주변 사람들을 머쓱하게 만들고,

심지어 그들의 열정에 감화되어 박수를 보내게 할 정도다.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 고 말하지만 어쩌면 그 스위치를 못 찾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유치하고

무책임한 아이에서 (꼰대가 아닌) 어른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시간이 흐르길 바라거나 무턱대고

철 좀 들자며 스스로를 타박할 일이 아니라 그 스위치부터 찾아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요리를 통해

성장하는 두 여자의 이야기가 서로 대비되면서 내게 묻는 것 같다. 당신의 스위치는 무엇인가.


그저 '요리를 통한 성장드라마'라고 하기에는 감출 수 없는 미덕이 참 많은 영화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줄리와 줄리아가 현실 세계에서 끝내 만나거나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거, 중요한 포인트라

생각한다. 줄리가 요리의 '스위치'를 켜서 어른스러워지기 위해 필요했던 건, 전설의 쉐프 따위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본인을 계속 지켜봐주고 격려해줄 수 있는 '동수'. 그런 점에서 영화에선 두 명의 줄리아가

나온 셈이다. 그밖에 무책임한 해피 엔딩을 지양했다거나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두 여인의 스토리가

인상적이었다거나, 무엇보다 둘의 연기가 좋았다는 정도. 2시간의 러닝 타임이 군더더기없이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느낌.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마침 밤기차로 서울역에 도착하고 나니 3시반. 전철다니길 기다리기로 하고 여관과
아가씨를 권하는 여성분들께 죄송해하며 비됴방으로.


모든 곳에서 의미를 찾으며 모든 곳에서 이러저러한 지침을 받으려는 건 물론 아니지. 때론 시간 때우기 용으로
보기도 하고 그저 일종의 재미만 요구하는 경우가 태반이기도 하고. 그치만 하다못해 무협지나 만화에도

무언가-말투던 단어건간에-得이 될만한 게 있다는 게 내 경험이라서. 이 영화보고 나서 잠시 어리둥절했다.

멋진 영화인데..무언가 완벽하게 속아넘어간 느낌. 마술을 볼때처럼, 박수를 치고 감탄을 하면서도 왠지 한구석이

미진한 느낌이랄까. 스토리 끝의 갑작스런 반전에 원인이 있었나..


그 생경함의 출처는, 숙고 끝에 다다른 답안인데 아마도 이질감인 거 같다. 전혀 말이 안 되는 환타지틱한

이야기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풀어 나가며 '빙의(라 부를만한 것)'의 허무맹랑함을 거의 완벽히 지워버렸으니

말이지. 하긴 동감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거보다 정도가 훨씬 세지 싶네. "우리는 우주에서 왔어!" 정도로.


마지막의 히로시에 료코가 '까슬까슬' 아빠-남편의 턱을 만지는 장면에서야 군더더기같던 결혼식 장면이 이해가
 
되었다. 결국 남편이 그녀를 딸로 호명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녀는 멋지게 그 변화-아내에서 딸로의-를 이루기
 
위한 연극을 했던 거..남편-아빠는 잠시 발끈해서 그녀의 새 신랑에게 제의를 하고..두대 갈기겠다는, 한대는

딸내미를 위해. 한대는 그녀를 위해. 한대를 있는 힘껏-머리도 희끗해졌으면서-갈기고서 잠시 pause..

그리고 그녀에게 말한다. 새인생이 시작된 걸 축하해.


그저 맹목적인 애정 내지 의욕만으로는 무언가를 이루기에 턱없이 부족하거나 제대로 이뿌게 만들어내기가

곤란하다. 그저 무작정한 친밀하고도 따스한 분위기만이 맥없이 흐르는 경우가 어찌나 많은지. 담을 그릇을

잃어버린 정신이 역할갈등을 겪으면서..어찌할 수 없는 그 변화를 수긍하기 위한 서로의 노력. 그 노력을 눈멀지
 
않게 하기 위한 이벤트가 결국 영화의 중종반간의 스토리지 싶다. 거의 성공해가는 단계에서 굳이 그걸 폭로하는

그녀의 의도가 남편에게 전해지는 순간, 주먹은 멈추고 그는 웃어 줄 수 있게 되어 결국 사랑이 성공하는 셈이랄까.


성공...이란 말보다는 매듭..이란 말이 더 나을라나. 사랑의 매듭.


어쨌거나 지금은 비됴보고 집에 와서...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다.ㅋㅋㅋ



(2003.12.24)
오대수(최민식)에게 이우진(유지태)이 말한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니들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오대수가 찾아간 최면술사는 그의 자아를 양분하여 그사실을 아는 자아(악한 자신)를 제거해 버리는 시술을

해 놓지만, 성공과 실패를 장담할 수 없다는 여운을 남긴 것. 문득 정신을 차린 대수 위로 눈이 한없이 쏟아지고..

미도(강혜정)가 대수에게 와서 대사. "아저씨..사랑해요.."


대수의 손이 움찔 떨고는 미도의 등저리를 감싸안으며..그 우는듯 웃는듯한, 처연하면서도 결연한 표정이 클로접.

최면이 성공한 걸까. 그래서 그저 그 인상적인 표정은 '복수심밖에 남지 않았다던' 황량한 과거를 매듭짓고

새로운 사람, 사랑을 얻은 감개무량함인 걸까. 혹 최면이 실패로 돌아간 게 아닌지. 이미 누차 대수가 인위적인

조작을 깨부수고 온전히 자각해나갔듯이 말이지.


우진이 누이와의 일을 겪으며 그 현실을 자신이 소화해낼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강렬한 증오를 대수에게

투사하며 사건을 왜곡했던 것처럼..'문명화된' 인류의 성금기를 깬다는 일은 아마도 쉽게 묻어버리거나 긍정해

버릴만한 소사는 아닌 거다. 그걸 단지 시술자의 실력, 컨디션. 구상력이랄까, 그런 것에 우연처럼 맡긴 채

지워버릴 수 있단 건 너무 무책임하지 않나..세탁소에 빨래 맡기는 게 아니란 말이다.


해서..결국 최면에의 기댐은 현실을 좀 쉽게 돌파하려는 대수의 꼼수였던 게 아닐까..혹은 조금이라도 꿈인 양

위로받고 싶었던 대수의 painkiller같은 건 아니었을까. 현실이란 건, 그게 설사 사촌과 관계를 맺던 딸자식과

관계를 맺건 결국은 자신이 어떻게든 질겅이며 소화를 시켜나가야 하는 걸 테니까. 다만, 그 와중에 제멋대로

현실을 꾸깃꾸깃 소화하기 편하게 해석하다가 우진처럼 편법을 쓰지도 말 일. 무조건 타인에게 내처 전가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니.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은 걸까. 미도라는 여자를 껴안음으로서 자신이 아프게 깨닫고 있는 그 '현실'을 인정하면서..

대수는 그렇게, 우는듯 웃는듯..처연하지만 결연한 표정을 지은게 아닐지.


사운드트랙이 참 맛깔스럽게 배치가 되었지 싶다. 효과적인 음향과 변주를 통한 분위기 일신. 2시간의 러닝타임을
 
팽팽히 유지하는 극적인 탄탄함과 설득력있는 반전들도 그렇거니와, 하드코어틱한 장면들이 극에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고 외려 받침이 되는 적절한 연기와 안배를 통해 잘 '버무려진 듯'. 멋진 영화였어.



(2003.12.24)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 10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청미래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보면..사랑이 싹트고 자라고 피어나고 시드는..그 과정들에 대한

단락구분이 절묘하다. 예컨대 이상화..진정성..정신과 육체..사랑이냐 자유주의냐..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행복에 대한 두려움..이런 식이다. 이를테면 관계의 절정에 달했달 부분인, '행복에 대한 두려움' 챕터 이후에

오는 것들은, 수축..낭만적 테러리즘..선악을 넘어서..예수 콤플렉스..사랑의 교훈..운운 이런 이별을 예감하고

준비하고 맞이하고 되새기는 과정들에 대한 압축적인 소제목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이 스물다섯 쯤에 쓴 처녀작이다. 처음 이 책을 봤을 때 그의 감성과 능력에 질투를 느꼈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그는 '이별하는 법'을 말하지 않았다. 이별을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하는게 좋은 이별이고

어떤 게 나쁜 이별인지 말하지 않았다. 애초 그가 배우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좋은 이별 따위 없는 거고, 이뿌게

돌아서는 것 따위 없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별은 언제나 당하는 것일 뿐..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별은 상대로부터 오는 건지도, 혹은 자신이 만들어낸 마음속의 환영으로부터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와, 누구에게 어떻게 이별을 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배우지 않은 것들, 배울 수 없는 것들은 도무지

막막할 뿐이다. 다만...그에게 힌트를 얻는다. 그는 그 기승전결의 루트를 돌이키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부주의와
 
나약함을 가감없이 대면하고, 묻는다. 묻어버리고, 또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저 매순간..진심을 담아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나마 내가 더할 수 있는 팁일까.



(2008. 12. 28)


생각보다 그녀의 사랑은 많은 것들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극적인 반전에 공을 들이기보다는, 둘의 마음이 얼마나 깊고 단단한지,

둘의 사랑이 얼마나 애절하고 가슴시린 것인지를 느끼도록 하려 애쓰는 것 같다.



그래서, 대만에 간다.

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왠지 멋져 보이지 않나. 지난 번 영화 '청연(Hear you)'에 이어

'말할 수 없는 비밀' 이 두 편의 영화를 보고 대만이 가고 싶어져서 오늘 훌쩍 떠난다라면.


7/15-19, 대만 다녀오겠습니다~* 놀러가는 거여요.ㅎㅎㅎㅎ






우리들은 경학생 장면먹고 전거타고

남가동 북가석버스 타고 가

길을 갈 땐 측으로 화실은 변기로

힘내 나가 이겨야 하

빛내 빛을 내 경학생 만만세~*
 

우리들은 경학생 동먹고 마차타고

이동에 면동에 등고속 타고 가

길을 갈 땐 측으로 당구칠 땐 라마시로

힘내 나가 이겨야 하

빛내 빛을 내 경학생 만만세~*


*                                              *                                              *

왠지 오늘 아침부터 머릿속에서 잔뜩 맴도는 노래.

대학 들어가서 술자리나 집회판에서 듣고 정말 절묘하게 재미있는 노래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명박이 어느 순간 불쑥, 사회적 합의 따위 없이 '측통행'을 밀어붙이는 때 쯤엔 더이상 마냥 웃어 넘길

가사만은 아니구나 했다.


이 노래 아는 사람이 블로거 중에도 있으려나, 아는 사람 손~*ㅋㅋㅋㅋ






가면의 고백 - 10점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잔뜩 힘이 들어가기 쉽다.

자신의 지난 사랑, 심지어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다. 그토록 진실되고 아름답고 뜨거웠던 사랑은

두 번 다시 못 올 거라는 듯이, 상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또 자신에 대한 상대의 마음이 단색으로 칠해진다.


사실은 아니다. 금송아지라도 껴안고 있었던 듯한 지난 삶은 사실 적지않이 누덕누덕한 채 남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가 모인 것에 불과했으며, 지난 사랑 역시 어거지로 강변했던 단심(丹心)의 모노톤이 아닌

선명하고 흐릿한 스펙트럼 내에서 빨주노초파남보 쉼없이 급변하며-그렇지만 역시 남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냉온탕을 거쳤던 거다.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그렇게 어렵다. 나의 삶, 나의 사랑 이야기란.


미시마 유키오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가면의 고백'이란 아이러니한 제목으로, 자신의 삶과 첫사랑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는 자신의 탄생부터 유년시절, 청년시절에 이르는 성장기를 자세히 묘사하며 동시에 자신의

성 관념이 어떻게 변전해 나가는지, 동성애적 성향이 어떻게 발현되고 자신을 괴롭혀 왔는지 고백한다.


그의 첫사랑은 아마도 동성과 이성, 양자를 나누어 따져야 할 듯 하다. 동성애적 성향을 발견시켜주고 이후

하나의 전범이 되었던 동성의 첫사랑, 그리고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과 싸우며 키워나가다 무참히 깨뜨리고 말았던

이성의 첫사랑. 그러니 어쩌면 '첫사랑'이라는 무디고 닳아빠진 단어에는 잡히지 않는 게 그의 복잡다단하고

종잡기도 어려운 첫사랑 이야기, 혹은 첫사랑을 경과하는 그의 심리관찰 이야기다.


아니, 비단 '첫사랑'이란 단어의 문제가 아니다. 이야기라는 게 그렇다. 불연속적이고 중첩적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총보를 악장별로, 파트별로 구별해 채보하는 작업과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덩어리진 채 자신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어렴풋이 느끼기만 할 뿐인 그런 불안감, 초조감, 만족감, 기대감...그런 것들의 카오스적인

혼합물에 제각기 이름을 붙여내고 인과관계의 레시피를 구성해 내는 것. 비록 어느순간 자신이 실제와는 한참

동떨어진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지라도.
 

실제 삶이란 건 정신병자의 읊조림같은 분절적인 자동기술법에 지나지 않거나, 자신조차 납득할 수 없는

미친년 널뛰듯 하는 조증과 울증의 연속과 오히려 같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너무 위태롭고 위험하다. 사건과

감정의 선후, 인과관계에 대한 명료하고 선명한 정리가 필요한 거다. 자신의 불안정하고 규정불가능한 감정선에
 
규칙적이고 모범적인 법칙을 부여하고 특정한 이름을 붙여내어 가닥가닥 구분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불안스럽도록

구체적인 카오스 덩어리는 그저 하나의 식별가능하고 이해가능한, 그리고 무독무해한 추상으로 변해버린다.



그의 고백은 그런 '가면'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 너무도 잘 의식하고 있어서, 차라리 그 '가면'과의 대결이라

하는 게 낫겠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가능한 가감없이 철저하게 되새기고 손실없이 전달하고자 한문장 한문장

심혈을 기울여 뽑아낸다. 너무도 무디고 둔탁한 언어와 어휘를 가지고 종횡무진 사방으로 뛰노는 감정선들을

추스려 표현하기란, 거의 잠자리채로 바람을 잡아보겠다고 나대는 꼴과 같을지 모른다. 비록 어떠한 경우에도

그러한 '가면'을 벗을 수야 없겠지만, 잠자리채로 바람을 낚을 수야 없겠지만, 그는 정말 낚아챌 기세다.


그의 삶의 행적과 사고과정을 오늘의 시각에서 아귀가 딱딱 맞도록 시간과 인과에 맞추어 재구성하고 몇가지
 
대표적 감정으로 칠하여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하려는 의도 따위는 전혀 없다. 행동하는 그 순간, 심지어

그 이후의 순간까지도 서로 충돌하고 모순되고 중첩되는 수만가지 온갖 단상들이 머릿속에 가득차 윙윙대고

있었음을 힘들여 기억해내고 있다. 거기에는 삶과 사랑을 미화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없다. 단지 자신의 내면에

철저하게 솔직하고자 한다. 그게 그의 '고백'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삶이 마치 모네의 '수련' 작품과 같음을 보이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멀리서 볼 때는 아름다운

연꽃으로 피어나는 그 형체란 게 사실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물감 범벅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굳이 그가 왜 단순하여 아름다울 '사랑'과 '삶'의 궤적을 그토록 세밀하고 적나라하게

들여다 보아 온갖 진창과 같은 감정과 진실들을 떠올리고 말았냐고 묻는다면,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의 삶과

지난 사랑을 스스로 납득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한 몸부림일 거라고 대답하고 싶다.



연극의 오프닝은 늘 그렇듯 상콤한 분위기 띄우기 용의 멘트와 선물공세.

느닷없이 이 연극의 장르를 묻는 진행자의 공세적 삿대질 앞에 쫄아버린 사람들은 주섬주섬, 멜로니

블랙코미디니 주워섬겼지만 정답은 그리 쉽지 않았다. "본격휴머니즘느와르액션블랙코미디".


연극에 대해서는 왠지, 시덥잖은 킬링타임용 영화를 볼 때보다 더욱 엄격하게 보게 된다. 아무래도 눈앞에서

직접 배우들의 연극을 보고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또 아무래도 영화보다 연극이 대개 비싸고 접근하기

쉽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맘에 딱 드는 연극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킬러가 왔다는 연극은 킬러 대신 사기꾼과 취업준비생과 캥거루처럼 아이를 안고 키우는 부모와

느닷없이 진지한 체대생들만 나왔다. 몇몇 반짝이는 대사와 은유들, 그리고 꽤나 빵터지게 재미있는 순간들도

있었는데, 역시나 뒤로 갈수록 모종의 교훈으로 치닫겠다는 의도가 적나라해지면서 겸연쩍어지고 말았다.


그쯤에서부터 관객들의 반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뭔가 그 전에는 포인트를 짚어가며 웃음을 준비하고

터뜨리던 관객들이, 어느 순간 혼란에 빠져버린 거다. 배우가 진지한 대사를 칠 때 관객1은 빵터지게 웃어버리고

관객2는 옆사람에게 상황을 물어보며 관객3은 몰입해보려 애쓰고 있다. 아마도 대본의 문제, 배우들은 충분히

연기도 잘하고 임기응변도 능란했다.


연극들이 '기승전결'이란 프레임에 넘 얽매여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냥 깨알같은 웃음을 점점이 박아놓고

첨부터 끝까지 유쾌하고 가볍게 갈 수는 없는지. 굳이 블랙코미디라고 비장해지거나 무리하게 메시지를 심거나

혹은 관객들을 울리고 웃기겠다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태우려다가 삑사리 내기보다, 조금은 힘빼고 끝까지

가볍게 가는 연극, 굳이 클라이막스 억지로 안 만들고 가는 건 어떨지 모르겠다.


물론, 진지하다고 재미가 없어지는 건 아니고 반대로 재미있기 위해 진지하면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연극이 되었던 영화가 되었던, 잘 나가던 극의 흐름을 요리조리 잘 꺽어가며 폭소와 반전과 감동을 만드는 건

굉장히 잘 짜인 대본이 필요할 거란 사실. 그저 답습하듯, 관성처럼 적당히 웃기게 시작해서 점증하는 갈등속에

문득 정신차려보면 배우가 울부짖거나 포효하는 클라이막스란 건 좀 그렇다.







벤야멘타 하인학교 - 10점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문학동네

하인, 누군가를 위해 순종하고 헌신하는 사람. 보다 정확한 사전적 의미로는 "남의 집에 매여 일을 하는 사람".

한자로는 더욱 웃긴다. 그야말로 하인이라도 알 수 있을 법한 쉬운 한자들, 下人. 아랫사람.


학교가 있다. 그런 하인이 되라며, 누구보다 하인다운 하인을 키워낸다는 하인양성학교가 있다.

의외로 그런 학교에도 학생들이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또 한명이 입학하겠다고 학교 문안에 들어선다.


시대는 19세기 후반. 앙시앙레짐의 귀족들이 무너지고 신흥 부르주아들이 기계 문명과 함께 떠오르는 시기,

예술과 소비의 주체가 특정의 '고귀한 핏줄'만이 아닌 '대중'으로 확장되었다 믿어지기 시작한 시기.


아마도 그는 몰락귀족의 핏줄로부터 도망치고자 했다. 동시에 오만해진 대중과 배나온 부르주아들 틈바구니에서

부대끼고 발버둥치기를 거부하고자 했다. 귀족의 오랜 피는 이미 잔뜩 안정되고 녹슬었음을 알아챘고, 또한

부르주아와 대중의 치기어린 범속함을 알아채버렸다. 그리고 그는 그 '고귀해지기 위한 경쟁'의 링 위에

올라서기를 거부해 버렸다.


쳇바퀴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남들이 모두 올라서길 열망하며 위를 바라볼 때, 그는 차라리

충직한 하인이 되어 주인님의 반짝이는 구두와 지팡이를 맡아 놓기 위한 예의바르고 순종적인 태도와 더불어,

의심하지 않는 마음, 한결같은 복종과 주인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한 마음을 갈고 닦으려 한다. 시니컬하고

독립적이며 재기발랄한 그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하강'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모르겠다. 혼란스러운 그의 사유가 자동기술식으로 기록된 궤적을 가만

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Vertigo에 빠지고 만다. 어디가 위인지 어디가 아래인지, (당위적으로) 뭐가

옳고 발전적인 방향인지 무엇을 피해야 하는 건지. 그렇게 스스로를 혼란 속에 던져놓고 스물스물 삐져나오려

버둥대어 보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다.


그리고 실은, 그들의 하인학교는 지금의 세상과 뭐가 크게 다른지 곰곰 따져보는 것도 의미심장해 보인다.

단순하게만 뒤집어보아도 하인이 되기를 자처한 그가 빠져드는 모순과 욕망의 좌절들은 외려 세상에

적응해가며 겪는 그것들과 과히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다.





*  vertigo (영어).  물리적 감각이 두뇌에 상충하는 신호를 보내 발생하는 공간 방향 감각 상실.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수분간, 온갖 세상의 소음들이 삐집고 나오는 그 틈바구니에서 꽃처럼 만발하던 수화들,

처음엔 아무 대사 없이도 이렇게 흡인력있게 당겨낼 수 있다는 데에 마냥 놀랬고, 다음엔 말로 뱉는 대사들 대신

수화만으로도 참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사실 수화, '손으로 하는 말'이라 이해하는 건 조금 어폐가 있는지도 모른다. 수화를 할 때 둘은 서로의 손모양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표정, 입모양에 몸짓까지 모두 섬세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다. 그들의 눈빛,

입모양, 살짝 스쳐가는 빛과 그늘, 그런 뉘앙스들을 모두 잡아낼 기세로, 수화는 단지 손짓을 이용한 대화가

아니라 거의 완전소통을 지향하는 무엇과도 같다. 더듬이 두개를 완전히 포갠 채 서로의 의식 전체를 온전히

공유하는 개미의 그것과 같은 무엇 말이다.


쉽게쉽게 뱉어지고 그 누구의 귀에도 가닿지 못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눈을 마주치지 않고도, 상대를

등진 채로도 던질 수 있는 말이란 건 얼마나 허랑한지. "그럼 여태 너희는 만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그의 아버지가 어이없어 하며 물었고, 그래서 그녀와 그는 말한다. "그동안 우리는 말이 아니라 손으로 했어요."

손으로, 온몸으로,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한다.


그러고 보면 영화 내내 한 번도 서로에게 전하지 못했던 말, '사랑해'. 자그맣고 귀여운 반전이 지나고 난 후에도

그들은 말할 뿐이다. "워 시환 니". 난 니가 좋아. 그 말로도 충분한 거다. 굳이 뭉게구름같은 수사와 여름철

소낙비같은 고백 말고, 이미 그들은 손으로, 눈으로, 입모양으로, 온몸으로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p.s1. 이런 달콤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만나면, 잠시나마 심술궂은 시니컬함이 잠잠해지고 만다.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씩은 갱장갱장히 이런 영화가 땡기는 이유.


p.s2. 영화에 대해 아쉬운 점은 딱 하나, '聽說'이란 (아마도) 대만 타이틀을 그대로 써버린 무성의한 제목, '청설'.

차라리 영어제목을 쓰는 게 어땠을까. hear me. 내 목소리를 들으라는 것도, 내 말만 들으라는 것도 아니에요.

내 모든 것을, 내 모든 뉘앙스를 가능한 남김없이 들어주길. 그런 느낌의 영어 타이틀이다.






#1. 어어, 평소와 다르다는 건 뭔가가 위험하다는 거다. 어어, 한달이나 전에 봤던 연극을 이제야 포스팅하는 건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거다. 어어, 여긴 내가 평소 지내던 방이 아니다. 침대가 아니다. 어어, 위험하다위험하다.

그의 어정쩡하고 위태로운 말투를 그저 보아 넘길 수 있던 건, 일종의 계단 효과. 그대는 나보다 한계단 밑에,

나는 그대보다 한계단 위에 서있다는 충만한 자의식.


#2. 아무런 기대없이 느꼈던 변곡선, 급 행복에서 급 슬픔으로 치닫는 배우들의 변곡선은 그래도 봐줄만 했다.

꼼꼼하게 따지고 개연성이 있네 없네, 따위 공자연한 말씀이야 멀리 떨어진 관객의 입장에선 맘껏 씨부릴 수

있다지만, 정작 자신이 무대 위에 올라 표출하게 되면 도무지 뭐하나 '인과관계', '설득력' 따위 찾아볼래야

찾을 수가 없는 거다. 더구나 무대 위에서 자신은 자기 자신에 벌거벗겨진 셈인 거다.


#3. 교훈...이라고 하자면, 연극 보러 가서 무대 사진 찍으면 어디선가 누군가 나타나 정중하고도 단호한

제재를 가할 거라는 사실, 그리고 '레이먼'과 '레인맨'의 미묘한 차이와 유사성 만큼이나 애매모호한 것들로

우리는 더러 환상적인 공감대를 느끼고 혹은 죽일 듯한 악의를 느끼게 된다는 것.

#1. 둘 다 모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는 게 굉장히 맘에 들었다. 용맹무비한 바이킹이 등장하니까 그런

정도 상처쯤이야 별일 아니라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애니에서 이 정도 결말이면 꽤나 인상적이다.


#2. '투슬리스'는 왠지 토토로와 슈렉고양이가 퓨전한 녀석 같다. 슈렉고양이 하니까 생각나는데, 요새 광고중인

'슈렉 포에버'에 나오는 녀석은 완전 투실투실해져 있었다. 수컷이었을 텐데, 상상임신중?


#3. 아바타 이후 3D가 대세가 될 것처럼 난리법석을 떨었었지만 몇 개의 영화들이 나가떨어졌다. 덕분에 좀더

세련되고 편한 3D 안경의 보급을 기대했던 난 실망하고 말았지만, 이 영화는 다시금 그 기대에 불을 지폈다.



#0. 사실, 영화의 스토리나 메시지는 분명치 않고 의식적이지도 않다. 아바타처럼 적당한 기존의 이야기를

뒤섞고 약간의 변형된 영웅을 등장시킨 정도랄까. 또 아바타처럼 성공적이기도 하다. 3D의 기술을 만화적인

차원에서 백퍼센트 활용한 작품인 듯. 기대 이상이었다.



영화는 극중 영화감독지망생 영재, 그의 말대로 다소 "산만하고 수다스럽고 정신없이" 진행되는지도 모른다.

영화 제작을 위한 자금 걱정을 하다가 뜬금없이 '아~ 스크린쿼터', '아~ FTA' 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이나,

네그리의 '제국'을 읽으며 사회의식을 가진 문화활동을 하라던 고참이 눈앞의 부조리에 침묵하는 모습,

노동해방 조끼를 입은 노조원을 개잡듯 두드려잡는 꼰대의 광적인 소란까지. 아, 정신병력이 있는 친척이

있냐는 의사 질문에 대한 대답에 빵 터졌다. "사촌 형 중에 조선일보 기자가 있어요." 정신없이 사방팔방을

손가락질하고 시니컬하게 뒤틀어놓는다. 온갖 사회문제에, 꼰대들의 고루함과, 기존 영화판에까지.


그런 감성과 지적질들이 맞고 틀렸는지는 나중에 따지기로 한다. 워낙 정신없이 사방으로 벌려진 이야기에다가

그의 이야기는 대개 맥락도 없고 지긋한 깊이도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 수다스런 이야기는 외마디다.

외마디의 집합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가 문득 실어증에 걸리면서 비로소 핵심으로 가닿는다. 입닥치는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여태 제대로 '말을 들었던 적이 없음'을 깨닫는다. 영화를 만들려면 우선 그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떻게 살아왔고 남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를 되짚을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는 그와

함께 했던 그녀와의 관계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그는 결국 은하, 그녀를 해방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은하 3호, 4호로 바뀌어 나가고 동시에 자신도 영재 4호,

5호로 바뀌어 나가며 함께 해나가기에는 이미 그녀는 지쳐있었다. 이젠 자신이 없어, 이젠 마음이 없어.

그렇게 그는 홀로 영재 5호, 6호로 변전해 나간다. 그건 그가 여태 남의 말을 듣거나 감정을 헤아리기보다는

혼자 쉼없이 떠들어댄 대가이자, 그 '양질전환'의 임계점에 이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했을지 모른다.


이제 그는 잘 할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을 거야, 잘 하니까." 해방된 은하, 그리고 새로 함께 하는 은성 역시

똑같이 말해준다. 그가 애초 번다하고 수다스럽게, 마치 정리되지 않은 채 머릿속을 부유하는 온갖 말풍선들을

잘라붙인 듯한 화면과 메시지를 모자이크하듯 던져준 건 일종의 힌트 아닐까. 이제 그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줄곧 머릿속에 쌓이기만 한 채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외마디 수다'로 소모되었던 그런 에너지를 조금 더 잘

가다듬어서, 그런 산만하고 정신없는 실타래로부터 하나하나 잘 정련된 '이야기', '대화'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그마하고 조심스런 희망.


새로 함께 하는 은성이 듣지 못한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채플린의 영화처럼, 혹은 '톰과 제리'같은 만화처럼,

말이 없어도 그 의미와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영화를 감독은 만들고 싶은 게 아닐까. 그러고 나면 그의 정치적

지향과 감수성, 비판의식같은 것들도 좀더 효과적이고 설득력있게 다가올 수 있을 거 같다. 이 영화에서

다뤄진 것만큼 유쾌하고 발랄한 방식은 고스란히 살리면 좋겠고. 그게 영화속 감독지망생에게 바라는 바이자,

(아마도) 윤성호 감독 본인이 바라는 바인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덕수궁미술관, 생각해보면 여긴 뭔가 내가 머릿속이 복잡할 때마다 덜렁 카메라 둘러메고 떠나는 곳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뭘 하는지도 모르고 갔는데,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다"라는, 덕수궁미술관으로서는

처음으로 현대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를 열고 있었다.

미술관 앞, 몇 개의 부처상들이 놓여있었다. 심상히 여기고 지나쳤는데 알고 보니 미술관 내부에 전시된

작품들의 연장선상에서 배치된 것들이었다. 작품의 컨셉, 이번 전시의 컨셉은 말하자면,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눈에 보이도록 가시화하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들지. 그리고 그 아연한 시간의 흐름속에서 우리는

어떤 공력을 기울이고 어떤 관계를 맺어나가는지. 그걸 보여주려는 전시였달까.


그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게 이 조각상들..이었지 싶다.

덕수궁 미술관을 가는 길엔 산책삼아 한바퀴 돌아보는 덕수궁, 늘 그렇듯 낯익은 듯 하면서도 새로운 구도와

모습들이 드러난다. 내가 방문하는 시간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피사체는 사라지고 배경만 남아버린 이런 풍경.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다"라는 전시 제목은, 실은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라는 백남준의 작품 제목을

따서 지은 거라 한다. 전시회를 한바퀴 둘러보다가 운좋게 만난 도슨트의 설명이 그랬다. 굉장히 로맨틱하고

그럴듯한 제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백남준의 원제가 더욱 그럴듯하지 않은가 싶었다. 우리가 둥그렇게 생긴

아날로그, 디지털 시계를 내려다보기 전에는 달을 바라보며 시간을 어림잡았을 테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밤하늘에 뜬 달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상념을 잠겼을 거다. 그야말로 태곳적의 텔레비전.

내가 전시를 돌아보는 방식은, 언젠가 말한 적이 있지만, 그런 식이다. 우선 한바퀴 훌쩍 돌아보고 나선 맘에

폭폭 꽂혔던 것들 위주로 다시 한번 돌아보기. 요새는 워낙 도슨트 서비스가 잘 되어 있어서 처음 한 바퀴는

으레 도슨트를 따라 돌며 기본적인 배경지식과 관점을 참고하게 된다.

그냥, 전시를 죽 돌아보고 나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새삼스럽게도. 역시 시간은 흐르는구나. 시간은 흐르고,

어찌 되돌이키거나 붙잡거나 고여있을 수 없는 순간들이 지나고, '강이 흐르듯' '시간이 차고 기울고 다시 차듯'

어쩔 수 없는 상처들은 덮거나 지우고  다시 흐르는구나. 나도 흘러야겠구나. 그런.

이 작품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비누로 만들어진 이 조각상은, 삽시간에 '나이'를 먹는다. 야외에 설치되어

빗물에 씻기고 바람에 씻기고 아이들의 손이 타 금세 지저분하게 녹아내리고 심지어는 갈라지는 조각상.

건물마다, 예술작품마다 제각기의 '수명'이랄까 '나이'가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게 아마 도심속의 덕수궁

미술관에 들어설 때 느끼는 이질감의 정체겠지만, 씬삥의 콘크리트 건물이 뿜어내는 느낌과는 전혀 다른,

훨씬 긴 호흡의 뭔가를 이전 시대의 건축물이나 예술품에서 느끼는 거다. 그 차이. 그걸 응축해서 보여주는

게 이 비누로 만들어진 조각상이 아닐지.

다른 작품들은 모두 이미 제작된 작품들을 섭외한 거지만 이 아이들은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다시 제작된

것들이라 했다. 이전 전시에서는 이런 아이들이 화장실 세면대 옆에 설치되었다던가. 손을 씻고 이 아이들을

문대면서 자연스레 씻겨나가고 지워지는 효과를 의도한 거라 했었다. 멋지다.

덕수궁 내에는 시간의 흐름을 잡아내는 또다른 도구가 있으니, 바로 자격루다. 덩어리 덩어리 분절된 게

아니라 그야말로 '흘러가는' 시간을 표현하는 적절한 수단은 액체, 물이었을 거다. 그러고 보면 전시된

작품 중 하나의 제목이 가슴을 울렸었다. liquified agony. 에라 모르겠다. 씻겨나가겠지, 라는 식의 제목.



* 도슨트 말로는, 5월 초부터 시작된 이번 전시를 위해 덕수궁 미술관 앞에 설치된 저 비누 조각상들이

불과 한달만에 저렇게 쩍쩍 갈라지고 허옇게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아마 전시가 끝나기 전에

녹아내려버릴지도 모르겠다 했다. 장마철이 다가오고, 유난히 비가 많을 거라는 이번 여름을 생각하면

정말 그럴 거 같다. 전시는 7월 4일까지, 관람료는 덕수궁 입장료 포함 5,000원. 성인 기준이다.





국립극장, 어제부터 제3회 아랍문화축전이 시작했다. 개막식 행사 때 참석해야 '밥은 먹고 다닐' 수 있어서,

개막공연을 보러 갔다. 총 나흘동안 열리는 문화축전에, 이라크, 레바논, 쿠웨이트, 리비아 이렇게 네 개

국가의 전통 공연이 펼쳐진다. 낯선 나라들의 문화공연이지만 나름 그들의 나라 국가대표로 오는 사람들,

최상의 퀄리티를 보여주는 공연단이 내방한 거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앞에 세워진 천막-의도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아랍에서

귀한 손님들을 맞을 때 쓰는 그 천막과 생김새가 닮았다-에서 각종 전통음식도 팔고, 전통의상이나 공예품도

전시해두고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켠에선 헤나 체험도 벌이고 있었는데, 어깨에서 다섯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구불구불 이어지는 헤나를 하고 싶었지만 줄이 너무 길어 포기했다.

리비아의 전통 가무. 끊임없이 높고 흥청대는 콧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강렬한 추임새가 중간중간 박자를

끊고 들어왔다. 그리고 마치 칼춤을 추듯, 기묘한 스텝을 밟으며 사방을 자유로이 종횡하는 아저씨와 아줌마들.




공연 실황, 아이폰으로 찍은 거라 그다지 화질이 좋진 않지만 그래도 뭐...쓸 만하지 않나 싶다.

수피 댄스랑 비슷하게 계속 빙글빙글 도는 거 같으면서 또 많이 다르다. 결혼식 때 축하 댄스,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는 댄스, 소녀들이 즐긴다는 댄스, 등등 여러가지 컨셉의 댄스를 보여줬지만 글쎄..스텝이 미묘하게

다르고 음악의 흐름이나 분위기가 살짝 다르긴 한데, 까막눈이라 민감하게 짚어내진 못했다.

빙글빙글 도는 그들의 댄스와 휘영청 꺽이고 뒤집어지는 피리 소리를 한 시간 들었더니 몽롱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은근 단순한 거 같으면서도 몸을 까딱까딱 박자맞추게 만드는 마력도 있는 거 같고, 괜춘하다.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조금씩 그들이 관객석에 들이대기 시작했다. 관객 코 앞에서 펄쩍펄쩍 뛰기도 하더니

이내 손목을 잡고 한명씩 무대로 올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VIP로 초청받은 외교부 차관이니 G20준비위원장도

손에 태극기와 리비아 국기를 들고 무대에 나와 같이 들썩거렸다.

기대 이상으로 꽤나 재미있고 흥미롭던 공연이었다. 내일모레까지 계속 이런 낯선 아랍 국가들의 전통 공연과

음식, 문화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으니 한번 가 볼만 할 거 같다. 더구나 남산에 인접한 국립극장,

그렇게 공기가 좋고 다른 분위기의 서울을 만나리란 것도 미처 몰랐다.



덧댐. 그러고 보니 거기에서 삼천원에 팔던 꾸스꾸스도, 한국에서 맛봤던 것 치고는 꽤나 괜찮았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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