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의 의의에 대해, 진행 방식에 대해, 그리고 성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수업시간에 몇번씩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책이 나왔다는 말씀에 꾹꾹 참았었습니다^^

여러 교수님들의 논문이 묶인 책이고, 미처 한미 FTA가 급물살을 타고 타결되기 전인 작년 11월에 탈고한

책이지만, 윤영관교수님이 어떠한 대답을 하셨을지는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미 FTA는 한국이 '개방형 통상국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과정이란 사실은 아마 대부분 합의를

할 것 같은데요. 다만 책에서 지적되듯 로드맵도 무시하고 국내정치적인 협상도 건너뛰고 조급하고 임의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측면이 낳는 부작용이 너무 크다고 생각합니다. 애초 동시다발적 FTA전략이란 과감한 전략

자체도 우선순위를 정해서 영향이 적은 소규모경제권부터 시작하기로 했던 것이니까요.


더구나 일단 FTA가 타결되고 나니까,마치 루비콘강을 건넌양 "돌이킬 수 없으니 계속 가자, 국제신용도도 그렇고

외국인투자도 그렇고 지금와서 반대해봐야 죽음뿐이다"라는 식으로 몰고 가는 여론이 우려스럽습니다.

한칠레 FTA도 국내 비준까지는 1년반이나 걸렸는데, 그보다 더욱 파장이 큰 한미 FTA는 한국측, 미국측 모두

비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장애물과 난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실제로 재협상의 가능성도 조금씩

높아지는 것 같구요. 만약 최종적인 비준에 실패했을 때 한국에 미칠 역풍을 한국정부, 언론 등이 스스로 키우는

건 아닐까요. 초점을 맞춰야 할 건 장기적으로 개방형 통상국가가 되기 위한 비전이지, 졸속처리된 한미 FTA

자체의 가부결이 아닌 것 같은데요.

협상이 좌초한다고 해서 한국 경제가 당장 나락으로 구를 것처럼, 혹은 타결된다고 해서 당장 (깃발들고 말달리며
 
태평양을 건너) 미국시장을 호령할 것처럼 겁주고 어르는 것은, 전혀 한국 내부의 이익조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한미 FTA에 목매달고 있다고 광고해서 스스로의 협상역량을 부식시키는 일 같습니다. 저는 차라리 지금의

한미 FTA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우리의 로드맵에 따라 '개방형 통상국가'를 추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때엔 다른 한미 FTA를 협상할 수 있겠지요, 한국 내 여론을 수렴하고

피해상황도 좀더 분석된 후에요.


또하나, 흔히 자유무역의 장애물을 말할 때 반대 이익집단이 보다 집중화, 조직화되기 쉬워서 자유무역이

좌초되기 쉽다고 말하는데, 과연 한국에서도 그러한 일반적인 설명이 그대로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정당이나

합법적 채널이 모두 막힌 상황에서, 그야말로 집회, 시위, 폭력행위같은 강압적 채널만이 허용된 한국의 자유무역

피해집단(농민, 중소기업, 노동자 등)은 이미 그 자체로 여론과 정책집단에 대한 영향력을 일정정도 상실하고

시작하는 것 아닐지요. 찬성집단이 정당과 합법적 채널을 장악하고 유려하게 여론몰이를 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반대집단이 찬성집단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판단은 다소 피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책에서

지적된 대로 한칠레FTA 비준을 세차례나 연기시킨 역량이 있긴 했지만, 이미 판세나 여론은 찬성을 대세로 한

상황이었다고 보는데요. 한미 FTA 역시, 일부 반대 이익집단이 강력했다기보다는 교수들이나 사회단체들이

나서는 등 총론 차원에서 우려가 컸기 때문에 사회적 반발이 컸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이 '21세기 한국의 정치경제모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사회의 권력 분산이 시급하다는

진단에 비추었을 때 협상과정에서 끊임없이 노출되는 파열음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앞선 채널의 편재에

대한 얘기는, 여전히 권력이 대기업과 자본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세계화와 개방을

이야기하면서 외려 대기업들은 반독점이나 공정 거래에 대한 국내적 규율을 약화시키기를 요구하고 있구요.

세계화의 진척이 도리어 한국의 권력 분포를 집중시킨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의 세계화 자체가 그러한 권력의

집중과 비민주화를 유인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나아간 질문으로는, 한국이 IMF라는 위기를 기회삼아 구조 조정과 권력 분산에 성공했다고 보시는지요??



아..전 왜 요새 언론 모냥새 보면서 계속 OECD가입했을 때의 장밋빛 일색이던 그 모냥새가 생각나죠?-.ㅡ^



from '국제정치경제' 수업 커뮤니티게시판.


세계정치 6 - 6점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엮음/인간사랑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니들끼리 잘해봐라"였던가? 06년 한국을 강타한 괴물의 오프닝에서 나오는 대사다.

아마도 한강에서 투신 자살을 꾀할 정도로 삶의 극한에 몰렸던 그는, 칙칙한 강물 바닥 아래서 그 무언가를

감지한다.



#1st '둔함'-괴물이 존재하던 말던..

강두(송강호)의 가족은,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세상을 마주한다.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마스크를

공구해서 일괄착용하고, 상상된 '바이러스'를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의사는 강두 머리에 구멍을 내고,

경찰은 그들을 잡기 위해 애쓰며, 국과수직원은 연무소독에 여념이 없다.(이로써 그들의 임무는 완수된다)

어쩌면 어이없다 싶을 정도로 강두 딸의 생존 가능성이나 괴물의 존재에 무관심한 사람들.

괴물을 잡으려는 노력은 전적으로 송강호들의 몫이다. 괴물에 대한 사람들의 둔감함이 일부 깨어나는 것은,

자신이 그로 인해 피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때다. 환경'운동권'으로 표현된 사람들이랄까..



#2nd '둔함'-영화 '괴물'의 괴물은 누구?

바이러스의 숙주는, 옐로우 뭐라는 그 축늘어진 돌고래같은 '괴물'이었다. 날것으로 인간을 잡아먹고 뼈를

토해내는 다른 괴물은, 변태적인 기형일지언정 생태피라미드의 한 부분에 살짝 걸쳐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그 돌고래시체같은 노란 '괴물'이 요동하는 순간 사람들은 귀에서 피를 뿜으며 한강변에 쓰러진다. 물론

강두의 가족은 그 '바이러스 vs 사회'라는 틀을 벗어나 있었고, 개인사적인 원한 관계로 '올챙이 괴물 vs 가족'의

구도를 갖고 있었다. 해서 화염병 석유+불화살+쇠파이프 라는 사상 초유의 무기로 괴물을 해치우는 것이

가능했고 의미도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정말 두려워하던 바이러스는, 혹은 바이러스와 같이 생체를

갉아먹는 것은 그 노란 '괴물'이 작동하도록 만드는 시스템이었지만 이는 순수한 형태의 폭력을 행사하는

올챙이 괴물에 가리워져버렸다.

괴물과 송강호들이 조우하기 위해 넘어야 했던 온갖 괴물스러운 작태들, 시스템들. 그 극단의 형태가 바로

노란돌고래였을 수도.



#3rd '둔함'-재생시킨 행복조차 둔해빠진.

엔딩 어디메쯤에서 송강호는 매점 창밖의 기척에도 총을 움켜쥐며 괴물을 경계하지만, 정작 바이러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그럴듯한 발표를 낭독하던 티비는 무심하고 둔한 발가락으로 꺼버린다. 언제고 한강에 사람을 잡아먹는

올챙이같은 것이 나타나는 순간 작동하기 시작하는 '괴물'. 그 아가리는 눈에 보이지 않고 훨씬 세련되어서

'빠이'프를 쑤셔넣기도 불가능할 텐데도, 송강호는 현상수배됐던 자신의 얼굴이 담긴 '삐라'를 액자에 꼽아넣고

이제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끝까지 둔해빠진 색퀴".

따스한 불빛은 그의 조그마한 매점 주위만을 밝힐 뿐, 푸지게 쏟아지는 하얀 눈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온통 어둠에

먹혀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최초의 발견자가 한강에서 보았던 건, 과연 뭐였을까. 그 검은 그림자는 올챙이 괴물의

그것이었을까.



더하기. 반미영화?

정말, 이제 '반미'는 문화적 상품이자 시대의 트렌드가 되어버렸다. 처음부터 '포름알데히드'라는 단어를

반복학습시키는 영화인지라, 강력한 반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선전됐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송강호와 함께 괴물에 맞섰던 그 미군은? 바베큐 파티를 함께 하던 미군과 한국군은? 구도는 좀더 명료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미국(과 미국에 복종하는 한국 기득권층) vs 미국에 반대하는 한국(혹은 민중)은 아닌 것 같다.

마치 '살인의 추억'에서 미국의 회신이 결정적으로 한국의 수사 향방을 좌우했듯 미국은 하나의 '상수'같은

건지도 모른다. 그냥 우리가 놓인 환경..이란 정도. 송강호에게 재갈을 물린 건 미국, 미군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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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애초 기획단계에서부터 이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기대를 꽤나 했었고, 꽤나 오랜 시간 공을 들이는 것을

보면서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흥미진진했었다. 그렇지만 칸영화제에서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는 수다스런

언론의 설레발이 확대재생산되고, 마치 한국영화의 새로운 부흥을 알리는 전기가 될지 계속 침체일로를 걸을지

막중한 역사적 의미까지 띈 영화처럼 부각되면서 차츰 우려스럽기 시작했다.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단

사실만으로 이미 맘속으로 몇 수 접어주고 관대한 갈채를 보냈던 분위기 속에서, 생각보다 별로였다..란 조심스런

얘기조차 돌팔매질당하는 분위기가 또다시 재연될까봐 불편했다.(이미 '디-워'를 둘러싼 이해할 수 없는 논란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던 데다가, '밀양'같은 '어려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 역시 외국영화제로부터 빌려온

아우라에 힘입은 바 크다고 생각한다.)


이미 스스로도 너무 영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것은 아닐까, 이러다간 왠만한 영화를 봐도 좀처럼 만족스럽지

않겠다..란 생각도 하고 있던 터였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치솟기만 한 기대치를 어떻게든 낮추고 봐야겠다는

경계심이 들었달까. 개봉 나흘만에 100만에 육박한다는 실로 과열된 신드롬 현상-한국에서 흥행했던 많은

영화들의 첫 궤적-을 따르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약간의 우려와 스스로에 대한 경계, 그 두가지가
 
아마도 이 '놈,놈,놈'을 보는 나의 준비자세였지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생각없이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라고 생각하며, 두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이 그다지

길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볼거리와 긴장감도 팽팽한 영화인 것 같다. 이런 영화를 볼 때 탄탄한 스토리를

기대하거나 배우들의 연기에 주목하는 편이라면 다소 실망했을 수도 있겠지만, 여름방학을 맞이한 본격적인

오락영화 그자체의 본분에는 매우 충실하다. 그렇게 진지하게 뭔가 잡아내서 이야기하기에도 석연치 않은,

그리고 이 영화가 몇백만이 들만한 영화일지에 대해서도 그다지 평가하기도 그런-재밌으면 보는 거지 뭐..

다만 남들이 보니까 따라보는 게 아니기만을 바랄뿐..아니 실은 그랬대도 별말 하고 싶지는 않다-영화.



최근에 씨네21이었던가, 어느 영화잡지에서 본 거 같은데 김지운 감독이 분명 '마카로니 웨스턴'의 광팬이었을

거라고 평했던 적이 있었다. 착한 놈과 나쁜 놈의 대결이 아니라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의 대결.


* 마카로니웨스턴 [macaroni western],

미국 서부극과 같은 개척정신의 요소는 없고, 주로 멕시코를 무대로 총잡이를 등장시켜 잔혹한 장면을 강렬하게 묘사한 것이 특색이다. 1964년 세르지오 레오네가 《황야의 무법자》를 제작한 이래 미국 서부극을 압도할 기세로 선풍을 일으켰다. 한국에도 1966년 《황야의 무법자》(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가 상영된 이래 여러 편이 수입되어 마카로니 웨스턴 붐을 일으켰다. (네이버 백과사전 中)


그에 더해, CGV 골드클래스 경험담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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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연인에서 나온 CGV골드클래스 장면)

영화 시작 한시간전부터 골드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데, 골드클래스 상영관에 붙어서 바로 라운지가 있다.

주류를 포함해 약간의 음료와 간식류를 팔고 있으며 조그마한 카페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영화 시작전

아늑하게 미리 입장해서 편히 앉아 놀거나 쉴 수 있는 장소.

입장을 하게 되면 좌석은 총 30개, 130도까지 꺽이는 편안하고 커다란 가죽의자가 두개씩 붙어서 있고 커플석당

테이블이 하나씩 놓여있다. 한껏 젖혀서 영화를 보다보면 정말 영화관을 전세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조조를 봐서 그런지 대략 10명도 안되는-그니까 네 커플도 안되는-사람들이 엉성히 앉아있어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사실 영화시작전 한시간동안 라운지에서 무료음료와 보드게임 어쩌구..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건

CGV입장에서도 일종의 수익사업이지 관람객의 편의를 기한다는 느낌이 크지 않고, 영화관의 좌석 배치와

안락한 좌석...그게 골드클래스의 가장 큰 메리트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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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놈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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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놈 이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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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마도 한국영화에서 최초로 시도되었을 열차탈취씬. '서부영화' 혹은 '마카로니 웨스턴'이라는 장르
역시 한국에서 최초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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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상한놈 송강호. 자칫 '가오'만 잔뜩 잡고 엉성해지기 쉬웠을 영화를 끝까지 붙잡고 갈 줄 아는 배우.
그는 정말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생생한 캐릭터를 연기해냈다고 생각한다.

'정신'이라는 부분에까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을 시도할 수 있게 만든 게 전적으로 프로이트의 몫이라고

말하는 건 과할지 몰라도, 그로부터 정신분석이라는 '과학'이 출발한 건 사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을 고찰하고 분석해내는 인간의 능력이 정신 자체에까지 뻗어가 체계를 갖추고, 인과(내지
 
상관)관계를 발굴하고..세계를 해석하는 인간의 이성과 정신세계 자체를 분석 대상에 올렸다는 점에서, 자칫

외부 세계의 존재 그자체를 허물어뜨릴 수 있는 극한의 지적 탐험이랄 수 있겠다.


흔히 정신이라고 뭉뚱그려지고 있는 것이 실은 의식의 얇은 표피 이면에 광대한 무의식의 세계(그의 후기엔 이드,

에고,슈퍼에고로 나누기도 하지만..)로 존재한다는 것 하나, 꿈이나 히스테리, 혹은 예술가의 승화된

작품세계에서 순치되거나 굴절된 형태로 그 무의식이 나타난다는 것 둘, 그리고 의식의 세계, 혹은 문명의 세계가

압박하고 있는 그 무의식 혹은 원시적 세계의 본령인 원초적 성적 본능(리비도)의 충족을 위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다는 것 셋.(물론 융 같은 경우는 무의식의 본령이 성적 본능에 있다는 전제에 문제제기를 했다지만)


모든 문학작품에서 '발견'해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보이듯 모든 것을 성욕의 충족 내지 표현으로

환원하는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없지 않다. 그리고 유아기의 성욕과 그로 인한 아버지, 어머니와의 관계를 이후

삶의 방식들에서 확장된 은유로써 유추해 내는 건, 어쩌면 일상의 권력관계의 양태를 뭐랄까, motherous and

fatherous(이런 단어가 있다면)의 두 대표적 형식으로 대별하는데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담
 
그의 정신분석학은 일종의 정치학으로 평가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잡생각.


우야튼 이런 점에서, 무의식이 단지 유아기의 성적 욕망으로 결정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융의 비판에 귀를

기울일 만하다. "만인은 무의식 앞에서 평등하다." 만약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란 당위적이기만 한 속빈 선언의

내실을 채우고 싶다면, 아마도 "무의식 앞에서'라는 한정적 수식어가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모나리자를 그려낸 다빈치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쓴 도스토예프스키도, 그리고 히스테리를 앓거나 개꿈을

꾼 갑남을녀도, 무저갱의 무의식으로부터 끌어올려진 욕망의 발생/저항/충족(혹은 왜곡된 충족)이라는 점에서

동일성을 획득한다. 어미의 젖을 탐욕스럽게 빠는 어린애의 욕정, 한용운도 어디선가 애타게 불렀던 '우리

누이'에 대한 은밀한 애정, 다빈치가 그려낸 불쾌한 '어머니의 유혹하는 미소'(@ 모나리자).


도발적이고 흥미로운 관점인데다가, 세상을 보다 재미있게 볼 수 있게 해주는 풍요로운 만화경이다.

원하면 사서 끼고, 싫음 말고.

예술, 문학, 정신분석 - 8점
프로이트 지음, 정장진 옮김/열린책들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에 이어 정권마다 반복되던 독도 문제가 곧바로 불거져 나왔다. "2MB 대통령이 독도를 일본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독도 괴담'을 방불케 하는 <요미우리>의 자극적인 보도 내용과 사안 자체의 심각성은 독도 문제를 금세 여론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또, 대북문제에서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정부는 이번만큼은 '건수'를 잡은 듯 마음껏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독도 괴담'의 주인공인 만큼 그 혐의를 벗기 위해 열심인 모습이 꽤나 가상하다. 하지만 역시 '2MB'는 역시 '2MB'다.
 
  청와대는 <요미우리>와 일본 정부에 한국의 내분을 획책한다며 비난했다. 동시에 독도 문제로 맹공을 퍼붓는 야당에 대해서도 '자국 정부보다 일본의 우파 신문을 믿고 대통령을 공격한다'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자국민보다 극우 언론을 믿는 정부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2MB를 제외하곤 누구도 완벽하지는 않으니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같은 날 나온 다른 보도를 보자. 2MB 대통령은 지난 15일 부산시 업무보고 및 부산 발전전략 토론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환은 어쩔 수 없지만 내우(內憂)는 하나가 돼 극복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제시된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고 초점을 잠시 '공화국 북반부'로 돌려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미국 정부와 언론의 북한 인권문제 제기에 대해 "지도부와 인민을 분열시키려는 음해공작이다"라고 일축했다. 그는 "북한의 식량위기는 미제의 고립 압살 책동 때문이니 이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전 인민의 단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북한에 핵 문제를 제기하는 남한의 '동족'에 대해서는 모두 '미제의 앞잡이'로 매도하고 있다.
 
  극적인 비교를 위해 다소 과장을 하기는 했지만, 기본 구도가 상당히 유사하다. 외부의 적과 어려운 환경을 설정하고 그것을 빌미로 내부의 총화단결을 호소(라고 쓰고 협박이라고 읽는다)하는 수법은 나치 이래로 전체주의 세력들의 고전적 수법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아군'의 악덕을 비판하는 내부 구성원들은 '적군'을 이롭게 하는 반역자로 간주되어 숙청 대상이 된다. 일본 재단의 자금을 지원받는 낙성대 연구소-노파심에서 말하자면 필자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친일적'이기 때문에 매도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보다 일본 언론을 인용해 대통령을 공격하는 민주당이 '국가의 반역자'에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사실 이 수법을 가장 성공적으로 구사한 인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취임 초기부터 반대세력에게 '반미 민족주의 진보'로 낙인찍힌 노무현 대통령은 강경한 대일발언과 자주국방이라는 명분을 통해 대중의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했다. 그는 반대세력이 자신에게 붙인 딱지를 오히려 정치적 자산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그는 참여정부 때 신자유주의적 사회질서를 전면적으로 도입해 사회 각 계급을 재편했고, 이에 따른 불만은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억압되었다. '국익'이라는 단어가 대부분의 정치적 논란을 종결짓고, 잘못을 전가하는 보도가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반대자들은 '친일세력'으로 규정되어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평소 민족의 해체를 주장해 대표적 '친일세력'으로 인식되는 '뉴라이트' 세력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2MB 정권의 총화단결 호소는 참여정부가 자극한 민족주의 정서와 맥락도 다르고, 효과도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극한 민족주의 역시 '선진 국가'를 위한 국가주의적 프로그램의 외피에 불과하다는 면에서 2MB의 노골적 국가주의와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정치에서 포장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다. 2MB의 딜레마는 자신은 끝없이 국가주의를 강조하지만, 이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종족담론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민족주의와 불협화음을 일으킨다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MB 정권은 국가주의를 향한 질주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기세다. 정부는 독도 문제에 대해 신중한 대응을 주문-금강산 문제에 대한 쌍팔년도 식 발언을 보자면 특별히 성숙한 정세판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념적 편견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일본의 언론을 보라", "여야도 없고, 진보-보수도 없고 모두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우리는 본질적이지도 않은 것으로 안에다 총질을 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와 같이 노골적으로 총화단결을 호소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신중한 대응을 외치면서도 마치 외부의 적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일 것인 양 대내적 단결을 호소하는 것은 다소 형용 모순 같다. 과연 무엇을 위한 총화단결일까?
 
  이러한 모순된 국가주의 드라이브가 계속된다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두 얼굴이 서로 대립하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MB 정권은 '우리 민족끼리'에 대한 반명제로서의 친일, 친미적 보수 세력을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종족담론을 끌어들일 수 없다. 또 2MB 정권은 참여정부의 '황우석 현상' 같은 국가지도자와 민족의 구세주가 일치하는 통일된 내셔널리즘도 확보할 수 없다. 그렇지만 2MB의 대외정책 실패와 일본의 우경화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국내의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고 그 세력을 결집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 세력들은 2MB의 우군보다는 대항세력이 될 공산이 크다.
 
  촛불이 시작된 이래 '민주-반민주'의 구도로 나타났던 대립구도가 10년을 더 후퇴해 '매국노-민족'의 구도로 전환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런 구도는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주도했던 2MB 자신이 더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상당부분 위험한 조짐이 보인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독도 관광 붐이 일어나고, 독도 관련 영화가 개봉되고, 독도 관련 법안들이 무더기로 발의되는 '독도 마케팅'은 매우 우려스럽다. 이런 경향이 지속된다면 촛불시위에서 다양한 형태로 막연하게 표출된 내셔널리즘은 독도라는 구체적 대상을 만나 본격적으로 발현될 것이다.
 
  문제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 구도는 양자가 서로를 '반국가 세력', '매국노'로 규정하는 극한의 대립 속에서 양자를 포괄하는 내셔널리즘 자체의 상승작용을 유도하며, 이렇게 강화된 내셔널리즘으로는 어느 쪽이 승리하든 대립의 발단이 된 내우외환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결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아니,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데에 일조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이데올로기에 갇힌 대외정책의 막장은 부시 행정부의 지지율이, 국가 혹은 민족의 이름으로 호소된 총화단결의 끝은 계급지배의 강화로 귀결된, 레이거노믹스의 파탄이 이미 증명해주고 있다.
 
  아마 앞으로 2MB 정부가 무엇을 하든 그 태생적 한계와 특유의 촌스러움으로 인해 단결된 국민의 동원에는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는 전체주의 사회의 도래가 아닌, 앞에서 말했다시피 국가주의를 내세우며 억압하는 지배블록에 대한 도전연합의 저항이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전선이 내셔널리즘 내에서 형성되는 경우이다. 이 상황이야말로 정부가 주권의 두 요소인 대외적 자율성-사실 2MB 정권 하에서는 이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과 대내적 수행력 모두를 상실하는 순간이며 대항세력마저 내용물이 다를 뿐 형태는 같기에 그 미래마저 기약할 수 없는 캄캄한 상황일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요구되는 자세는 각자가 각자의 영역에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정부는 외교문제를 빌미로 주제넘게 시민사회에 대해 윽박지르는 것을 중단하고 본연의 임무인 외교에 충실하게 임하고, 시민들 역시 독도관광 따위의 쇼에 열광하기보다는 정부의 외교정책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한 의견을 표출해야 한다. 2MB 외교정책의 문제점은 예전부터 수없이 지적되어 왔지만 그것을 방치한 건 우리들 자신이다. 사실 우리가 일장기를 태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본 정부의 행동을 바꿀 수는 없는 자위에 불과하다는 것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독도 관광 한번으로 숭고를 체험하기에는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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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매국노 대 민족'의 구도로 후퇴할 수 있다는 우려는 진즉부터 하고 있었지만-촛불시위에 태극기가 나오고 미국에 대한 불명확한 입장 속에 민족주의적 색채가 덧대어지면서-독도 문제 이후 더욱 심각해져버린 것 같다.
그런 구도로 빠져버려 민족주의 담론내로 포섭되는 순간, 한국이나 동아시아 전체에 상당한 부담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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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 홈페이지 팝업 퍼왔는데, 이런 내용엔 Copy-left가 적용되야 하는 거 맞겠지? 라고 혼자 납득했다.

정세가 얽히고 섥혀있긴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다. 국민은 이미 이명박을 심판했다.

아무리 PD수첩을 걸고 넘어지고, 진보연대나 대책회의를 걸고 넘어져도, 그리고 진보신당에 대한 백색테러까지

자행하며 구도를 흐리려 해도, 당장 갈비탕을 못 먹게 된 내 짜증과 분노를 씻을 수는 없다.

(이데올로기전이다. 이데올로기전에서도, 근래의 과학전에서처럼 정밀한 외과수술과 같은 surgical strike,

국부공격이 필요하다.)


다물으다. (잃은 것을) 되찾는다는 뜻을 지녔다는 우리의 고어로 알려진 이 단어는, 80년대 초 민족주의와

민족사관의 열풍을 선도한 베스트셀러 '다물'로 처음 소개된 바 있다. 식민시기 일제의 잔인한 악행과 천여번의

침탈만 당했던 애끓는 약자의 비애를 미래 언젠가 통일한국의 기개와 대비시키며 식민사관의 사슬을 끊어내자는

줄거리의 소설이다. 언젠가 '그 때'가 되면, 남북한의 통일은 물론 토문강 이남의 연해주, 만주를 되찾고 (여전히

일각에서 주장되듯) 산둥반도 부근의 동중국까지 '다물'하여, 토끼같은 형상의 한반도에 짓눌려있던 한민족의

기개가 되살아나 평균신장까지 서구인보다 더 크게 된다는 거다. 그게, 우리가 다물해야 할 세계최강 최고민족

최종 버전의 역사이자, 원래의 우리모습이라는 주장. 흔히 민족사관이 빠져버리고 마는, 결과적인 자기 부정 내지

자기 혐오의 모순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소설이다. 형이상학적인 또다른 목적론과 병든 인간.



아직 주몽이 이끄는 일단의 무리들이 내건 '다물多勿'의 의미는, 수세적인 상황인지라 그 외연이 적절히 통제된

상황에서 그나마 다소간의 설득력과 적실성을 확보하고 있다. 지역-내지 당시의 전세계-패자인 한나라와 이에

기댄 부여에 대항해서, 상실한 삶의 기반(다소 서정적), 혹은 고토(다소 국가주의적), 혹은 민족의 터전

(다소 선동적)..이랄까, 뭐가 되었던 간에 그 땅뙈기를 되찾겠다는 데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뭐..물론 그 땅에

'백성이 주인되는 땅'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지, 왜 하필 주몽이 왕이 되어야 하는지, '이 땅 위에서 가장

강대하고 융성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고토만 회복하면 되는지 아님 어디까지 쳐부셔야 가능해지는지, 왜

전쟁에서 잔인하게 죽어나가는 건 '주몽의 착한 백성'과 '적들의 무장한 병사'들 뿐인지 등등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것들투성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고대 왕국의 성립을 위해 제창된 '되찾음'의 이데올로기는 적어도 상실한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제시되고 있을 때, 그리고 상대편이 그에 대항하여 무언가 더욱 설득력있고 피끓는

명분을 제시하지 못할 때 강력한 호소력을 갖게 된다. 아무래도 목표로 삼아야 할 대상의 외연을 좁히고 명확히

할수록 유리해지는 거다. 지금의 미국이 제시한 '테러와의 전쟁'이란 이데올로기가 그 외연을 이슬람 문화

일반으로 넓혀버리고 말아 더욱 곤란해지고 만 것은 반대의 사례일까.



고구려의 역사는 태왕사신기로 이어지면서, 아니 거기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당장 어느정도 고구려의 기틀이 잡힌

후에는, '다물'이란 단어가 폭주하기 시작한다. 외부의 제약으로 눌려있던 그 폭력성과 저속성이 드러나는 것

뿐이지만. 물론, 당시 고구려가 실제로 '다물'을 의식적인 이데올로기로 차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고구려

초기에 건원칭제하며 '다물'을 연호로 썼다는 설도 있다만-모든 국가, 조금 줄이면 고대국가는 동일한 행태를

보인다. '다물' 등 나름의 관제 이데올로기를 동원한 정복 전쟁. 더이상 우아한 '역사강역'의 문제나 합리적

(국제법적?)인 영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전쟁을 위한, 그리고 전쟁을 수행할 백성을 동원하기 위한, 혹은

(아직 이데올로기가 백성에게까지 유효하지 못하다면) 자신의 정복욕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납득하기 위한

핑계거리일 뿐이다.



독도의 영유권이 한일 중 어디에 있던 큰 상관이 없는 것보다 더, 주몽이 옛 조선의 영토를 다물하던, 대조영이

발해를 꿈꾸던, 그건 사실 사는데 별 상관 없는 일이다. 하잘것 없는 민족적 일체감을 5분정도나마 느껴보거나,

우리민족도 이만큼 해낼 수 있다는 이중으로 왜곡된 자기 비하에 빠지고 싶다거나..이런 건 비추. 그저 하나의

퓨전사극으로만 볼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암만해도 붉은악마가 재등장시킨 '치우천황기'나 민족주의를 빙자한

온갖 극우주의적인 주장들과 종교들이 낭자한게..일본이 뭐만 하면 헤드라인으로 '극우주의 부활' 이러는데

사실 한국이 더 문제다. 멀쩡하게 잘 사는 인간들을 갑자기 한이 가득한 못난이로 비하한 채, 과거 '깃발을

꼬나들고 대륙을 호령하던 영웅'을 처방하는 민족주의(내지 민족사관)는 이미 정부의 FTA 옹호 광고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미국하고 경제 자유화하자는 거지, 누가 깃발쥐고 말달리며 쳐들어가자했냐 말이다. 그런

메타포가 정부에서조차 흘러나오는 상황이라니..볼 때마다 참..가슴이 덜컥덜컥한다. 조금만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하면, 이 병든 인간들은 영웅을 부를 게다. 전쟁을 부를 거 같다. 아니, 이미 전쟁과도 같은 사고방식은

시작된지 오래다. 우리는 이미 전쟁에 동원된지도 모른 채로, 나와는 상관없는 전쟁중인지도 모르겠다. 대개

은폐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자기가 순순히 죽으러 나가는 게 아니라, 상대를 죽이러 나가는 게 전쟁이다.



(민족주의는 식민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도된 이미지 그 자체일 뿐이다.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은 단지

'일본인이 없는 일본의 지배'를 고도화했을 뿐인지도. sub-altern학파의 이야기.)

"사람들이 계속해서 아이들을 낳으려면, 덜 방황하려면, 거대한 고독 속에서 사회적 위험물로 변하지 않으려면

모두 사랑의 열병을 앓게 해야 한다는 것이 통치자들의 판단이었다...진정한 사랑이라는 신화를 장려해야 했다.

개인들의 실패한 사랑은 어디까지나 실수로 여겨져야 한다. 물론 한두 번 실패했다고 믿음을 잃어선 안 된다.

제 몫으로 만들어진 반쪽이 존재한다는 플라톤적 신화를 믿는 한 사람들은 맞는 짝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그 광적인 요구는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몇몇 운 좋은 사람들이나 사랑을 누렸지만 이제 좋은 것은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민주주의 이상에

따라 우리 사회는 사랑을 모든 이와 그네들 일생의 중심이자 기본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 구도가 완성되려면

어느 정도 성적 충동을 해방시켜야 했지만 대신 성행위는 어디까지나 사랑의 수단이란 걸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사랑 없는 섹스는 모욕이고 착취이며 상대를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란 생각은 금세 만인의 지지를

얻었다...


공권력은 일체의 감상적 사랑을 배제한 섹스만으로는 대단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없음을 간파했다. 그러므로

대중을 시장 원리에 복종시키려면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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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를 보다 보면, 모든 것이 사랑을 위해, 혹은 사랑을 기다리기 위해 준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미녀와 데이트를 하고 싶으면 자동차부터 장만하고, 멋진 남자를 잡으려면 마스카라부터 사라고, 남편에게

사랑받으려면 밥솥을 바꾸고, 아이들의 사랑을 얻으려면 보험에 들어라는 식이다. '죽어도 좋아'란 영화는,

이제 어르신네들까지 쑤석거리면서 그 사랑찾기 대열에 합류시키려는 '놈들'의 프로파간다일지 모른다.

OST는 끝까지 반짝반짝했지만, 스토리는 갈수록 값싼 광택을 내는 플라스틱보석처럼 후져버린 '소울메이트'..

뒤늦게서야 우르르 봐버리고 나서의 씁쓸한 뒷맛을 말끔히 씻어낸 소독용의 매콤한 공업용 메탄올같은 책.

단 메탄올은 에탄올이 없을 때 고작해야 입에 머금을 정도의 대용품일 뿐, 삼키면 죽는다.

사랑하면 죽는다 - 6점
마르셀라 이아쿱 지음, 홍은주 옮김/세계사


그럴 줄 알았다.

검찰에서 관련 죄목 최저형에 가까운 7년을 구형할 때부터,

김용철변호사의 양심선언에 대해 뭐 하나 제대로 밝혀지기는 커녕, 오히려 내부고발자인 그에 대한

딴지걸기만 계속되던 때부터,

삼성을 싸안고 도는 언론/검찰/정권/정당들의 속내는 그러했을 거다.

이참에 깔끔하게 후계문제며 상속문제까지 정리해버리자고.


사실상 무죄방면에 면죄부용 구형에 판결이다. 삼성이라는 기업을 이건희의 사유물이자 승계재산이라고

법적 인증까지 해준 셈이니, 이건희는 속으로 웃고 있을 게다.(이후 기사를 보니 겉으로도 웃고 있었다.)

화낼 거리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월욜부터 일욜까지 죽어라죽어라 하면서 쌓이고 있다.

김용철 변호사가 나섰을 때 그를 보면서 참..가슴이 먹먹했었는데.

정의구현사제단 분들이 말했듯 巨惡이란 단어 앞에서 그 분은 얼마나 좌절스러웠을까.

하물며 지금은, 어떤 심경이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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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엊그제는 성대에서 진중권의 르네마그리트 강연을 들었다. 진중권이 애초 미학자였단 사실은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가 '왕의남자'나 '타짜'에 나왔던 유해진과 똑같단 생각은 들을 때마다 하게 된다.

개인적으론, 내가 많이 겹친다고 생각하는 인물. 정치적인 입장이나 그걸 표현하는 방식, 그리고 말투도 조금.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체험'이라는 단어로, 일상성에 함몰된 사물을 복권시키는 마그리트의 예술을 해명하려

했다. 일상적으로 친숙한 이미지를 고립시키거나, 중첩시키는 잡종화의 기법은 우리가 사물에 부여한 도구적,

실용적 의미를 벗겨내고자 하는 시도라는 해석.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메타적 해석과 비판적 재구성, 그건

내가 마그리트를 예술적 의미의 좌파라 부르고 싶은 이유다.



#2. 그의 그림인 줄 모르고 좋아했던 몇개의 작품들이 있었다. 진중권의 강연회 다음날에는 세시간동안 그의

전시회에서 놀았다. 일단 한번 쭉 돌고, 빽빽한 인파를 피해 다시 한번 거닐면서 맘에 들었던 그림들만 다시 보기.
 
이런저런 작품들이 내 걸음을 잡고서 놔주지 않았지만 그다지 리뷰는 내키지 않으므로 생략. 그저..단지 나뭇잎과

비둘기를 합쳐놓은 그림들보다..'눈물의 맛'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훨씬 맘에 들었다. 이런 그림에다가, 송충이

하나가 커다란 나뭇잎-새(?)를 갉아먹고 있는 장면이었는데, 요새 주위에 하도 사랑 문제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는지..와닿았다. 눈물의 맛은 누가 보고 있는 걸까. 새의 가슴을 갉아먹는 송충이? 가슴이 휑하니

갈아먹힌 새? 둘다? 누가 누구를 울게 했고, 누가 누구의 눈물을 맛보고 있는 걸까..라는. the flavour of tears.

오케이, 그림 찾았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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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레네, 혹은 아이린(Irene)이라는 인물의 발굴.
 
첫째, '이레네 혹은 금지된 책'이란 작품. irene의 철자와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계단이 그려져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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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대화의 기술'이란 작품. 다소 해석하기 쉬운 듯한 이 그림에는, 그려진 글자가 숨어있다. 내가 보기엔

IRENE정도로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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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마그리트가 찍은 무성영화를 보면 Irene이란 인물이 종종 등장한다. 뭉실대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도슨트에게 질문했더니, 그녀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의 와이프였다나. 음..그래서 저 그림의 밑에는 남자 둘이

서 있는 건가. Irene이 저만큼 커보였을 수도, 그녀를 저 불분명한 글씨만큼밖에 이해하지 못한 걸 수도, 혹은,

위태롭지만 아름답게 쌓아올려진 저 돌들처럼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걸 수도. 어쨌거나, 어쩐지 공식적인

사생활이 깔끔하다했다. 머..말년까지도 마그리트 부부는 무지 행복해 보이긴 했지만. 아, IRENE을 마그리트와

묶어보는 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



#4. 부모되긴 무지 힘들 거 같다. 평일이었고, 오전이었음에도, 인간들이-특히 학부형과 아이들이-파도처럼

철썩댔다. 애들한테 쉼없이 질문하거나 설명하거나..이건 뭘까, 저건 어떻게 생각하니, 이런 열린 질문은 그래도

무언가 귀를 기울일 만한 아이의 대답을 유도하지만, 표현기법이 어떠니 저 사물은 무엇을 의미한다느니 등의

진부하고 꽉 막힌 설명은 참..힘들어 보였다. 열을 올리며 설명하는 어머니나, 지루하고 다리아파하는 아이나

서로 못할 짓 같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이번 전시회 관련해 뭔가 찾아봐도 마찬가지다. '검증받은' 작품들만

그림파일로 쉼없이 전파되고, 그에 대한 '검증받은' 감상 역시..들불처럼 번져나간다. 작년 피카소전때도, "난

뭔지 잘 모르겠고 뭐라 의견을 낼 만한 자신도 없지만, 내가 긁어온 글에 의하면 대단하다더라, 이그림이

대단하다더라"..거개가 이런 '안전한' 태도다. 흠...싫어.

묘한 이질감을 주는 제목처럼, 한풀이식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돋우는 영화는 아니었다.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누가 정말 적인지 구분하기도 힘들어진 상황에서..오지에서 독특한 가면 문화와 삶을 꾸려나가던 사람들은

럭비도 배우고, 창가도 즐기고, 인종과 이념 같은 것이 부질없어지는 '환상적인' 상황에 처한다. 뙤놈이나 왜놈

운운하는 대사가 있지만, 그다지 현실적이라거나 실제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동막골은, 그런 곳이다.


아프지만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이 연출되는데, 그중에서도 맘에 툭 꽂혔던 장면이 있다. 무엇이 불안한지, 아니면

두려운지, 무릎을 바싹 땡긴채 웅크리고 자는 앳된 군인의 옆머리에 강혜정이 꽃을 꽂아주는 장면. 그리고는,

아주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꽃잎을 두어번 쓸어내리는. 촉촉한, 보들보들하면서도 생생한 그 감촉..은, 그네들이

'작대기'라 부르던 우왁스럽고 둔탁한, 그리고 선뜻한 총의 감촉과 정확히 대척하고 있다. 풍선처럼 유유히

낙하하는 폭탄의 질감 역시. 꽃잎을 쓰다듬으며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미친X, 아님 광년이라 불릴 수 있는

세상이다. 다행히도, 동막골은 그런 미친X를 포용, 아니 이해하고 있었고..그녀의 죽음은 그래서 마을 전체의

슬픔이 된다.


언젠가부터 나비의 이미지가 굳어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혹여 흰나비를 백의민족 어쩌구의 상징으로

생각하지 않는한. 다만 호접지몽, 장자지몽 이전에..나비효과 같은 걸 연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딘가의 나비

날갯짓으로부터 불러들여지는 폭풍. 대체 어디서 잘못된 건지, 무엇이 어긋나 이렇게 누군가에게 분노를

투사하고 총을 겨누며, 맨몸으로 폭격기에 맞서야 하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대답은, 도식적인 구도로 나타나지도

않으며 쉽게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그런 간단한 관계가 아니라는.


예측할 수 없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인간들은 서로가 원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서로 부지불식간에 쌓아올린 업?

구조? 관계? 아님...간주관성?--; 그런 것들로 보이지 않게 서로 구속되어, 싸우고 웃고 울고 죽어버리는 건지도

모른다.



며칠전에 본 박수칠 때 떠나라의 신하균은 두가지 작품을 동시에 했음에도 캐릭터가 하나도 안 섞였다. 멋진
 
배우에 멋진 영화들. 올여름 대박 세영화다 가족들이랑 심야로 봤다. 이사가기전에 가까운 센트럴시티 무지

이용한다.ㅋ


난 항상 사랑니가 났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문득 이가 아파 병원에 가면 사랑니가 이미 다 난 상태라 하고,

그것때문에 아프단다. 너무 쉽게 생겨나고, 너무 금방 아파지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님 살짝 둔해서 무지하고,

다 자라고 나서야 뽑아버리는..참 멍청한..어쨌거나 어제는 입안으로 망치와 메스(조각칼같은), 뽁뽁이가

들어갔고..염증을 제거한다고 엄지손톱만큼 살을 잘라냈다. 치료받고 담주에나 뽑아낼거 같은데..항상

뽑혀나가기만 한다. 달이 삼분지이가 지났다. 근데, 전화요금이 기본료 더하기 2614원.


이번달, 군대 녀석들이랑 논다고 전화 은근 많이 썼지 싶었는데, 아마 저번달 기록 경신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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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게 아니라, 유난히도 뚜렷하게 새겨지는 스와치 시계의 초침소리를 들으며, 일초일초 늙어가고 있다고

실감할 때가 있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댁에서 있던 구식 괘종시계의 똑, 딱, 하는 초침소리도 그렇게 명징했지만,

어느새 다가오는 '늙음'의 표징들-그러니까 '졸업', '취업', 쉽게 가시지 않는 '숙취'..같은 것들-을 무시하지

못하게 된 지금에야 초침소리 속의 재우침을 느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이렇게 계절은 돌고 돌 뿐이지만, 인간은 한 철 살고 지는 메뚜기처럼 그렇게 뛰다가

만다. (비록 47층에서 바라보는 하늘이야 늘상 흐린 황토빛이지만..) 어쨌든 봄빛이 일렁이는 와중에 나는, 살찐

돼지가 되어가는 게 아닐까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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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 - 8점
정지아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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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7월30일에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있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요?
그리고 그 교육감 선거가 서울시민 모두의 직선으로 선출되는 사실도 알고 계시는지요?
그리고 이 선거에 현재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후보가 나와 2강 구도로 세력대결을 하고 있는 것도 알고 계시는지요?  

현재 약8~9명의 후보가 등록되어 있는데, 대체적으로 진보와 보수의 양대후보로 2강구도로 갈 것으로 보입니다.

보수진영은 한나라당 중심으로 공정택 현 교육감을 지지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시민사회단체와 전교조, 진보단체들은 주경복 후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언론에서조차 두 후보를 유력한 후보로 거론하고 있어 투표율과 각 진영의 조직화 정도에 따라 양쪽 모두 당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는 현 정부의 광우병 쇠고기 정국과, 영어몰입교육 일제고시 부활, 0교시 실시, 우열반 편성등 교육정책에 관해 심판하는 선거입니다. 서울시교육감 후보가 관장할 수 있는 한해의 예산이 무려 6조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또한 5만5천여명의 교직원 인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 정부의 교육양극화 정책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가 됩니다. 교육 공공성을 영원히 포기하느냐 아니면 다시 돌려놓느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있습니다.

이번 교육감 선거는 정당이 개입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의 가치에 맞는 후보를 선택하시어, 7월30일 반드시, 꼭, 투표를 하고, 주변에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하도록 홍보해주십시오.

교육감 선거는 정당선거와 달리 많은 분들의 공감을 이끌어낼만큼 밀착된 주제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숨막히는 교육시장에 쏟아버리는 이 미친 교육이 진정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녀를 가진 분들에겐 더욱 절실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번 투표에 꼭 참여해주세요.

현재 교육감선거가 직선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 많기에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정부는 거소투표제(주소지가 아닌 실제거주(직장 등)하는 곳에서 투표하는)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부재자 투표인데, 이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셔서 투표를 미리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특히 투표 당일날 휴가인 분들은 미리 신고하셔서 꼭 투표에 참여하세요..

그림파일을 참고하시고, 첨부한 파일을 다운받아 거소란에 체크하여 주민등록상 주소지 동장에게 우편으로 발송하면 투표용지가 우편으로 옵니다. 그러면 기표하셔서(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우편으로 보내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거소투표 신청서를 7월15일까지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청서는 간단하며, 첨부파일 다운 받아 체크해서 보내시면 됩니다.

여러분의 한표한표가 이명박 정부의 미친교육을 막아낼 것입니다.

교육감 선거에 당선되면 아이들 급식에 미국산 쇠고기가 오르는 것을 실질적으로 막아낼 수 있습니다!

이번 선거로 이명박 정부를 반드시 심판합시다! 7월30일 투표 꼭 참가하십시오!

시간이 없어서 대강 얼개만 써두었던 리뷰..다시 풀어서 쓰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를 쏟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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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후퇴

2007년에 87년 6월 항쟁 20주년 기념으로 프레시안이 주최했던

좌담회를 모은 책. 당시 대선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서

나온 이야기들은 불과 1년도 안 되어 너무 멀어진 '얘기'거나 혹은

너무 섬뜩해진 '예기'가 되어 버렸다.

이제 한국은 어느정도 민주주의가 고착되었노라고 생각했던,

그래서 농담삼아 MB가 되면 이민간다했었는데..이렇게 쉽사리

국내외 정치/경제/사회의 전분야에서 망가져버릴 줄은 몰랐다.

지난 20년을 조망하는 책을 보면서, 고작 지난 몇달간..그리고 향후

5년간 얼마나 '희망'과 '성숙'이라는 단어와 멀어져야 할지

답답한 마음에 몇번이나 책을 처박아두곤 했다.


#1.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역량 간의 갭

불꽃놀이 같은 열망의 폭발은 소진의 징후일지도. 예컨대 87년 5월항쟁의 폭발은

6,7,8월의 노동자대투쟁을 외면했다. 딱 그만큼의 각성에 알맞는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그 소란스러움과 야단스러움을 감당할

준비가 된 '시민'을 키우지 않는 교육/매체. 오히려 시민 의식과

역량을 소진시키기만 하는 교육/매체. 타협과 협상, 소통을 모르는

이뭐병..MB는 어쩜 이 시대의 상징이다.

(그렇다고 그를 뽑은 '우리'라는 양비론으로 가고 싶지도 않고,

뽑았으니 닥치라는 놈은 너나 닥치시고, 정치적 상품으로서의 MB리콜운동을

말하며 정치를 경제적 메타포로 헷갈리게 하고 싶지도 않다.)


#2. 열망이 있기는 할까?

독재/군사정권/억압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민주주의' 말고.

절차적 민주주의 말고, 인간답게 살기 위한 선결조건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먹고 사는 데 도움 안되는 것들로 싸잡아 평가절하되는 것들.

'실용'이라는 단어에 매료당한(당했던) 사람들.


#3. 몇가지 내 생각

한국에서 민주적 문화의 성숙을 막는 몇가지 질곡. 군대/군대식

학교/군대식 기업/유교적 가부장제/되먹지 않은 어른들.

촛불든 아이들을 보면서, 이제 난 아무리 싫어도 책임을 져야 하는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이 사회에 이러저러한 빚을 지고 있으며

이러저러하게 사회를 변화시켜왔던 어른. 평생 아이인 척 살 수

없을 바에야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보겠다고 비로소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장하준식의 사회적 대타협이란...현상에 대한

문제의식과 우려, 그리고 지향까지 동의하지만 경로면에서

매우매우 불만스러운 이야기.

또하나, 비판만이 아닌 삶의 긍정을 말해야 하는-자본주의의

공포 문화/선망 문화를 넘어서기 위해-시민운동 혹은 문화운동이

사회나 삶의 모순, 질곡의 근본원인들을 지적해내는 까칠하고도

불만섞인 시각과 어떻게 엮일 수 있을까. 항상 궁금했던 문제..


지금 내 삶이, 사회가 이러이러하게 문제가 있다, 불만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지금 당신 삶이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있으니 괜히

경쟁의 논리와 박탈의 틀 내에서 시기하거나 좌절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한입으로 두말하기..의 위험을 벗어나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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