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디 가? - 8점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강미란 옮김/열림원

희생-선택을 해야 한다면 작은 희생보다는 큰 희생이 선호된다 : 왜냐하면 큰 희생에 대해서는 작은 희생에서는 불가능한 자기찬미를 통해서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아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 그리고 이년 후 한 웅큼의 불안과 함께 태어난 두번째 아이도 장애아였다.

저자는 "두번째 세상의 종말을 맞았다"고 이야기한다. 이른바 막장드라마가 아무리 창궐했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현실감이 떨어지는 데다가 오버스러워서 드라마로 치자면 되려 실격이다. 같은 부모의 두 아이 모두가, 그것도

같은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니, 이렇게 억지스럽고 말도 안되는 설정은 '감정이입'도 '개연성'도 너무나 떨어진다.


감정이입도 쉽지 않고 개연성도 떨어지지만, 현실이다.

저자는 "세상으로부터 감동적이고 훌륭한 아버지라는 역할을 배정받았음"을 깨닫는다. 그는 이제 마치 로또에 두번

연이어 1등 당첨된 만큼이나 희소한 경험을 하고 있는 애비로서 세상의 주목을 끌 수 있으며, 그의 두 아이들을

내세워 스스로를 치장할 수도 있다는 걸 안다. 장애아는 하늘의 선물이야, 라며 초췌한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거나, 혹은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불행함의 기운을 풀풀 뿜어내는 식이다.


불행-누가 어떤 사람에게 "그러나 당신은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보통 항의할 정도로, 불행에 들어 있는 특별한 명예(마치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천박함, 겸허함, 평범함의 표시인 것처럼)는 대단히 크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애써 음울한 표정만을 고수하지도, 고상하고 이타적인-모범적인-마음가짐만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그는 수많은 군중 속에서 '기적처럼' 자신의 아이들을 잃어버리고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거라

가쁜 호흡의 문장으로 기대해 보기도 하고, 아이들의 장애인 증명서 덕분에 불법주차를 버젓이 할 수 있다며

자랑삼기도 하고, 또 자신 아이들 "똥강아지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지푸라기만 잔뜩 들었단 말을 몇번이나 되풀이하며

얼핏 무지하게 씨니컬하고 까칠한 말들만 내뱉는다.


그러면서도 또 아이들이 남들과 '다를' 뿐이라며, 아인슈타인이니 모짜르트가 모두 남들과 심각하게 달랐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스스로에게 주입한다. 밤중에는 누구보다 현명하고 똑똑해서 아주아주 어려운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라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끝내 "내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못생기고, 제일 멍청하다. 이게 다 내 잘못이다. 제대로

실패한 것이다"라며 펑..."도대체 뭐가 뭔지, 어느 상황에 있는지...알 수가 없다...내 길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내 삶은 막다른 길에서 끝이 난다."라며 폭발하기도 한다.


수정된 누가복음 18장 14절-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아마 하루에도 수백번, 이런 감정의 기복, 인내심의 기복을 경험하지 싶다. 그게 솔직하게 와닿았다.

사실 아무리 불행해보이는 사람도 하루에 몇번쯤은 삐쭉삐쭉 웃게 되고, 또 아무리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듯 보이는 사람들-대표적으로는 부모님들-도 가끔은 심술을 부리거나 지쳐서 시니컬해지기도 하는 거다.


감정선이 그렇게 들쭉날쭉 널뛰기를 하는 것이, 심장의 쿵쾅대는 맥박뜀과 겹쳐 보이며 '인간적'이라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그렇지만 장애아를 둔 아버지의 적나라한 감정선의 맥놀이를 드러낸다는 건 쉽지 않았을 거다.

사람들은, 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의 삶을 온통 불행일색으로 칠해놓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자신들이 쉽게

동정할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춰주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정상아'들이 입주위에 온통 케잌을 묻히며 먹는 모습에는 웃는 사람들이, '장애아'의 같은 모습에는 절대

웃지 않는 게 사람들인 거다. 장애아라 해서 우리를 웃음짓게 하는 특혜에서 제외시켜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이야기는 끝내 방송전파를 타지 못했다고 했다.









엄마의 은행 통장 - 8점
캐스린 포브즈 지음, 이혜영 옮김/반디출판사

# 공감하는 입장.

다섯 아이를 키우면서 늘 쪼들렸을 게 틀림없는 살림에도, 아이들을 불안하고 겁먹게 하고 싶지 않은 엄마 마음.

작가가 되고 싶다는 아이의 마음을 섬세하고도 다정하게 헤아려 손잡아주려는 엄마 마음.

차갑고 쌀쌀맞은 주변 사람들조차 감화시켜 '엄마'를 축으로 한 따뜻하고 행복한 세상에 포함시키고야 마는 엄마 마음.

가족들을 늘 먼저 생각하느라 당신을 위한 선물은 커녕 당신의 소중한 것조차 선뜻 포기하는 엄마 마음.


그런 엄마다.

이 소설의 화자는 카트린, 그녀의 엄마 이외에 시그리드 이모니 트리나 이모니, 제니 이모니 많은 등장인물에

둘러 쌓여 있지만. 그녀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한번씩 시큰하게 뒤돌아 보며 되새기게 되는

자신의 엄마에 대한 기억 귀퉁이를 건드린다. 문득 그녀의 엄마에게서 우리, 나의 엄마가 겹쳐보일 때가 있다.


어떤 면에서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보다 더한 리얼리티를 느끼게 하는 구석이 있다. 신경숙의 작품에서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한 특정 '엄마'를 살리는데 좀더 신경을 썼다면, 이 책에선 다소 동화적이고 치밀하지 않은 행간과

여백을 남겨 두어 모두의 '엄마'를 투영시킬 만큼의 여유로움이 보이기 때문일까.



# 시니컬하자면.

근데, '엄마'의 이름은 뭘까. 넬스, 카트린, 크리스틴, 다그마르, 카렌의 엄마이자 무슨무슨 이모들의 막내여동생인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날 때부터 엄마는 아니었을 텐데, 그런 이야기는 아마 화자인 카트린이 좀더 컸어야 가능했을까.


결국 끝이 좋았으니 모든 게 좋았단 식의 이야기. 온갖 풍랑이 밀어붙였지만 끝내 살아남았으니, 제 발로 섰으니

용케 망가지지 않고 쓰여질 수 있었던 이야기는 아닐까. 다행히도 엄마의 은행통장을 실제 꺼내야 할 일은 없었고,

다행히도 아빠는 회복했으며, 다행히도 크리스틴은 엄마의 뜻을 좇아 고등학교로 돌아가고, 다행히도 카트린의

학교생활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안착했으며, 다행히도 크리스틴은 순산했다.


세상은 아름답다, 모정은 위대하다, 라는 식의 이야기에서 내가 느끼는 시니컬함은 이 정도로만.

그렇게 억지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그리지도 않았고 눈물을 짜내겠다는 '불순한 의도'도 크지 않아 보이는 책이다.

잔잔하지만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소품 같은 에피소드들.



작가들이 모여 말한다.
우리의 이념은 사람이고 우리의 배후는 문학이며 우리의 무기는 문장이다.
우리는 다만 견딜 수 없어서 모였다.

모든 눈물은 똑같이 진하고 모든 피는 똑같이 붉고 모든 목숨은 똑같이 존엄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은 극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절대 다수 국민의 눈물과 피와 목숨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한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고통스럽다. 본래 문학은 한계를 알지 못한다. 상대적 자유가 아니라 절대적 자유를 꿈꾼다. 어떤 사회 체제 안에서도 그 가두리를 답답해하면서 탈주와 월경을 꿈꾸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 본연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이 차라리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다급한 마음으로 1987년 6월을 떠올린다. 박종철의 죽음이 앞에 있었고 이한열의 죽음이 뒤에 있었다. 그 죽음들의 대가로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힘겹게 그것을 가꿔왔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망각할 권리가 없다. 이명박 정권 1년 만에 대한민국은 1987년 이전으로 후퇴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가 하나의 정부인 작가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조직도, 집행부도, 정강도 없다.

우리는 특정한 이념에 기대어 발언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아무런 이념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중도실용주의'라는 가짜 이념은 집권 1년도 못 돼 폐기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도처에서 헌법 위에 군림하는 독재의 얼굴을 본다. 용산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짓밟는 와중에 여섯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고도 이명박 정부는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여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지만 저들이 행한 일은 위선적인 사과와 광범위한 탄압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론 장악을 기도했고 도심 광장사이버 광장에 차벽을 치고 철조망을 세웠다. 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는 이 정부가 시대착오적인 색깔론과 천박한 관료주의로 문화예술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전직 대통령을 겨냥한 사상 최악의 표적수사와 비열한 여론몰이는 그를 벼랑에서 투신하게 하였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매장되었다.

이 모든 일에 적극 가담한 정치검찰과 수구언론을 우리는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을 울린 종지기들로 고발한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굴종하고 죽은 권력에는 군림하면서 영혼을 팔고 정의를 내던진 정치검찰들, 증오와 저주의 저널리즘으로 민주화의 역사를 모독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조롱하는 수구언론에 우리는 분노한다. 우리가 저들과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혹해진다. 저들을 여전히 검찰과 언론이라고 불러야 하나. 곰팡이가 온 집을 뒤덮었다면 그것은 곰팡이가 슨 집이 아니라 집처럼 보이는 곰팡이일 뿐이다. 저 권력의 몸종들과 함께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와 보편 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달려온 이명박 정권 1년은 이토록 참담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서 우리는 깊은 절망을 느낀다. 저들은 수치를 모르고 슬픔을 모른다. 수치와 슬픔을 아는 것이 사람이고, 사람됨이라는 가치에 헌신하는 것이 문학이다. 우리는 문학의 이름으로 이명박 정부를 규탄한다.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 이것은 과장인가?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문학의 과장은 불길한 예언이자 다급한 신호일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종이와 펜이 있다. 그러니 동의하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끝내 저항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원을 갈아엎고 있는 눈먼 불도저를 향해, 머리도 영혼도 심장도 없는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 저항할 것이다. 가장 뜨거운 한 줄의 문장으로, 가장 힘센 한 문장의 모국어로 말할 것이다. 사람의 말을,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람이니까 해야 하며 사람인 한 멈출 수 없는 그 말을. 아름답고 정의로운 모든 문학의 마지막 말, 그 말을.

우리는 작가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글을 씁니다.
우리는 각자의 나라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글의 바탕에 언제나 인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념이 아니라 사람의 편에 섭니다.

우리는 모였습니다.
참혹한 오늘을 불러온 것도 우리이지만
참다운 내일을 만드는 이도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권의 야만에 분노합니다,
사람의 설 자리가 사라진 현실에 분노합니다.

우리는 보고 싶습니다.
이견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정치가의 얼굴을.
우리는 듣고 싶습니다.
아첨과 왜곡의 목소리가 아니라, 공정하고 진실된 언론의 발언을.
우리는 느끼고 싶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확신과 자부를.
우리는 되찾고 싶습니다.
본래 우리 것인 광장과 집과 대지, 스스로 흘러 생명일 수 있는 강물을.
우리는 꿈꾸고 싶습니다.
그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는 사회, 양심과 이성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 자유와 평등은 원래 사람의 것이라 믿고 자라날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를.

우리는 입을 엽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입니다.

2009년 6월 9일
작가선언 6.9



* 피리부는 사나이여, 이 쥐떼를 다 데려가라 - 188명의 작가들 '한줄 선언' 발표 (프레시안)

"밥상도, 민주주의의 원탁도, 다 엎은 자여 이제는 당신이 고꾸라질 때"(문동만) "푸르게 날이 선 6월의 잎사귀로 썩어버린 심장을 찌릅니다. 굿바이 MB"(유형진) "이명박 정권은 문화와 민주를 파괴하는 광기의 야만을 국민 앞에 사죄하고 물러가라"(박민규) "하느님, 우리가 이 정권을 무너뜨리지 못하여, 총명하고 선량한 제 딸아이가 커서 감옥 갈 확률만 높아지고 있습니다"(이만교) "누가 내 사랑을 파괴하면 나는 그가 신이어도 나는 그를 파괴할 것이다. 나는 민주주의의 애인이다"(신형철) "우리의 영혼이 고통스러운 건 민주주의가 우리의 본성인 까닭입니다"(손홍규) "너를 지울 수 없다. 민주주의여!"(박형숙) "불법 폭력이 문제라고? 맞다. 늘 그게 문제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그렇게 두들겨 맞아 시퍼렇게 멍들고 피 흘리며 죽어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김명기) "시인이 깨어 있으면 독재자는 잠들지 못한다"(전성태)"내 이웃이 헌법적 자유와 권리를 빼앗기고 모멸을 삼키며 죽어갈 때, 나는 어디에 있었나?"(이안) "무능한 정권, 썩은 검찰, 역겨운 언론-적출 대상 3종세트. 아차, 나도 문제야"(명지현) "나는 부끄러운 손으로, 내 삶의 길들여진 부위만을 잘라, 쥐불 놓는다"(김요일) "잘못 뽑아 개고생, 평생 두고 후회한다! 잠깐 실수 후회 말고, 미리 살펴 재난 막자!"(김정남) "한 손엔 곤봉 한 손엔 삽, 머리엔 떡찰 가슴엔 악법, 썩은 입술로 산자를 물어뜯는 괴물, 누가 광장에 MonsterB를 풀어놨는가!"(윤예영)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고 패배는 당신들의 것입니다"(김경인) "나는 분노한다. 국가가 없을 때 당할 고통을 국가 때문에 당한다는 것에. 나는 비참하다. 그 국가를 내가 만들었다는 것에"(박상수) "더이상 갉아먹지 마라. 쥐는 벽을 잊어도 갉아먹힌 벽은 쥐를 잊지 못하는 법이다"(박성원) "피리 부는 사나이여 이 쥐떼를 다 데려가, 우리에게 노래를 허락하길"(박연준) "들쥐들의 교묘한 협잡 더는 못참겠어 울화의 향불이 지글지글 타올라 가만 못 있겠어"(성기완) "세스코에 전화하기 전에, 냉큼 물러가라!"(정여울) "정책이 비문(非文)이다. 언론의 맞춤법은 작위적이고, 미친개들은 국민에게 오타를 남발한다. 당신들의 언어번역이 안된다. 암울한 시국의 문장을 견딜 수 없다. 오래된 생각이다"(박상)....


* 작가들이 아닌 범인들이 이런 식으로 한줄 선언을 모아 '시국선언'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작가들의 그것은 다르다. 작가들이 뱉는 촌철살인의 아포리즘 한줄은 감성을 건드리고 이성을 흔든다. 작가답다. 그들이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권과 구악, 구체제에 저항하는 거다.

* 바야흐로 6월. 오늘은 6월 10일이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서울광장이라도 갈까.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는 국민적 화합을 위해 민주주의의 큰 틀을 지켜나가야 한다

우리 국민은 누구나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 앞에서 큰 아픔을 겪고 있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 길게 늘어선 조문 행렬은 단지 애도와 추모의 물결만은 아니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착잡하기 이를 길 없는 심경으로 나라의 앞날을 가슴속 깊이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넘어서서 각계각층의 온 국민이 하나 되어 전직 대통령의 국민장을 치러낸 것을 계기로 우리 모두는 새로운 길을 열고 있으며 또 열어야만 한다.

지난 수십 년간 온갖 희생을 치러가며 이루어낸 민주주의가 어려움에 빠진 현 시국에 대해 우리들은 깊이 염려하고 있다. 작년 '촛불집회'에 참여한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소환장이 남발되었고 온라인상의 활발한 의견교환과 여론수렴이 가로막혔으며, 이미 개정이 예고된 집회 관련 법안들의 독소조항도 시민사회의 강한 비판에 부딪히고 있다.

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 또한 훼손되었다. 주요 방송사가 바람직하지 못한 갈등을 겪는가 하면, 국회에서 폭력사태까지 초래한 미디어 관련 법안들은 원만한 민주적 논의절차를 거쳤다고 말하기 어렵다. 여야의 동의로 지난 3월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가 국민적 합의 도출을 위해 출범했지만, 여당 측 위원들이 회의 공개나 국민여론 수렴을 반대함으로써 위원회는 표류하고 있다. 국민 다수가 언론법 처리 강행 방침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를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런 흐름은 민주주의의 기반인 언론의 자유를 허물어뜨리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뿐 아니다. 현직 대법관의 '촛불집회' 재판 개입 사건에서 보듯이, 현 정권은 사법부의 권위와 독립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에 상처를 입혔으며, 그에 따라 재판의 독립을 수호하려는 전국 법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국민여론에 따라 일단 포기했던 '한반도 대운하'는 '4대강 살리기'로 탈바꿈하여 되살아나고 있으며, 지난 십여 년 동안 대북정책이 거둔 성과도 큰 위험에 처했다. 특수고용직 노동자가 목숨을 끊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기본권 보장을 요구할 때 집회의 강제 해산과 노동자 대량연행과 구속으로 맞서는 일 또한 구시대적 대처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정치노선의 차이나 이념의 대립이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 존중과 민주적 원칙의 실천이다. 모든 국민의 삶을 넉넉히 포용하는 열린 정치를 구현하는 정부의 노력이 참으로 절실한 시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직 대통령 관련 검찰 수사 과정 또한 이전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검찰은 국가원수를 지낸 이를 소환조사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3주가 지나도록 사건 처리 방침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추가 비리 의혹을 언론에 흘림으로써 전직 대통령과 가족에게 견디기 힘든 인격적 모독을 집요하게 가했다. 이는 엄정한 공직자 비리 수사라고 하기 곤란하며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되돌아보면 지난 1월 용산 철거민 농성에 대한 무모한 진압으로 빚어진 참사는 올해 벌어질 갖가지 퇴행적 사건을 예고했다.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은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으며, 검찰이 수사기록 중 핵심적인 대목의 공개를 거부함으로써 재판도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5월 22일 서울 서부지법 민사12부가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이 "세입자의 재산권, 주거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침해한다"며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사실에 주목하면서 현 정부의 근본적인 자기 성찰을 기대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가 전직 대통령에 대한 범국민적 애도 속에 주어진 국민적 화해의 소중한 기회를 잘 살리고 국민의 뜻에 부응하기를 우리는 간절히 희망하며, 다음의 구체적 요구사항을 제시한다.

1. 이명박 대통령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다. 이 대통령이 스스로 나서서 국민 각계각층과 소통하고 연대하는 정치를 선언해야 한다. 더불어 현 정부와 집권 여당은 다른 정당과 시민사회단체를 진심으로 국정의 동반자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1. 현 정부는 민주사회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1. 현 정부는 전직 대통령 관련 검찰 수사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하며, 정적이나 사회적 약자에게만 엄격한 검찰 수사에 대한 근본적 반성과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1. 현 정부는 용산 참사의 피해자에 대해 국민적 화합에 걸맞은 해결책을 제시하고, 경제 위기 하에서 더 큰 어려움에 처한 비정규직 노동자 등 소외계층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현 집권층이 우리 국민 모두의 가슴에서 타오르고 있는 민주적 요구에 대해 진지하고 성의있게 대응함으로써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국민적 화합과 연대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의 큰 길로 나아가는 전환점으로 삼을 것을 간곡히 바란다.

2009. 6. 3.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하는 서울대학교 교수 일동

서명자 명단 (2009년 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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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한 청와대 관계자의 반응.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서울대 교수가 전부 몇 분인 줄 아느냐"고 반문하면서 "1700명 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부' 교수들의 '소수의견'일 뿐이라는 '무시'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090603161708&section=01)

#. 맞는 말이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태 때 이후 근 5년만에 있는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이며, 그 때보다도 더 많은 인원이 모였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될 텐데.



이준구 교수의 말에 따르자면 시장근본주의자들이 날뛰는 세상이다.

그들은 정부의 규제를 죄악시하고 시장을 만병통치약이라 여기지만, 사실 이미 경제 활동의 발목을 모질게 잡는 것은

규제가 아니라 그들이 방기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시장 실패, 혹은 시장 왜곡이다. 경제활동 현장에서 예컨대 무역

애로를 발굴하라거나 불편한 규제를 적시해서 해소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해도, 그건 전봇대 몇 개 뽑는 식의 간단한

제거, 지움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정비하고 시장 자체가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려는 노력을 요구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게 문제인 세상.


이준구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 것에 대해, 정부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는 다들 그랬었다. 시장주의자도, 시장근본주의자도. 하물며 노무현보다 왼쪽에 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한미FTA를 반대하고 이라크파병을 반대했던 사람들 역시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실정에 대해서 대개 한 목소리의

비판을 낼 수 있었다.


물론 약간씩 다른 목소리가 간간히 섞여 나왔다. 이준구 교수는 새만금 사업을 강하게 비판했었다. 그건 환경지상주의도,

온정주의도 아니었다. 철저히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대규모 '토목 공사'가 효용이 없음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종합부동산세에 대해 좀더 정밀하고, 좀더 보완되면서도 강력한 효과를 갖도록 주문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목소리를

두고 딱히 좌/우의 색깔론이 불러내질 상황은 아니었다. 이미 노무현에 대한, 노무현의 정책에 대한 비판 일색의

지형에서 그 비판이 좌로부터 오던 우로부터 오던 따지는 건 부차적인 일이었다.


이명박이 당선되고, 종부세에 한을 품은 사람이 장관이 되고 종부세는 거덜이 났다. 새만금 따위는 기억 저편에 묻힐

만큼의 대규모 토목공사를 4대강 유역, 전국토에서 벌이겠다고 움직거리기 시작했고, 교육은 오로지 경쟁의 논리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 그리고 이준구 교수는 '좌빨'이 되었다.


그는 경제학자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원칙적으로 믿는 시장주의자다. 그런 사람을 일러 좌빨이라 칭하는

사회에서는 두가지 문제가 생긴다. 미쳐 돌아가는 시장탈레반주의자, 혹은 뭐라 이름붙일 '주의-이즘'도 없는

깡패 권력자 집단에 쉽사리 농단되고 희롱당하는 희생자가 수도 없이 나온다. 도심 테러분자라 희롱당한 용산,

논두렁에 1억시계를 버렸다는 식으로 하지도 않은 말들이 첨가되어 희롱당한 노무현, 고공농성 중인, 파업중인,

혹은 스스로 산화한 노동자들까지.


두번째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이런 공간에선 '시장주의자' 이준구를 비판할 여지조차 협소하다. 왜 그는 한미FTA를

한번 걸어볼만한 도박이라 생각하는가. 왜 그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규제 자체를 모두 피해야 할 것으로 매도하는가.

공익을 위한 규제라면, 좀더 정밀하게 가다듬어진 규제라면 오히려 좋은 결과를 이끌 수도 있지 않을까. 단적으로,

유럽의 자동차 시장에 대한 품질 규제는 지금 그들의 경쟁력을 높이고 환경까지 보호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한 셈이다.


어쨌거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의 정국에 대해 특히 이준구 교수의 혜안이 발휘되는 대목.


"주택가격 폭등을 위시한 주택정책 전반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것은 물론 (당시 노무현) 정부다.

정부는 일관된 방향으로 정책을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오히려 주택시장을

더 큰 혼란에 빠뜨리기까지 했다."


"백약이 무효'인 상태를 가져온 결정적인 원인은 정부, 그리고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대한 신뢰의 결여에 있었다.

...그렇지만 정부에 대한 불신이 현 정부(노무현 정부)가 들어오면서 새로이 나타난 현상은 결코 아니다...정부와

정책에 대한 불신과 관련해 현 정부(노무현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크지만, 모든 책임을 현 정부에 뒤집어씌우는

것은 공평한 일이 아니다."


"정책에 대한 신뢰의 상실을 가져온 데는 현 정부의 무능을 가장 소리 높여 비판해온 집단에도 일단의 책임이 있다.

...정부가 잘못하는 점이 많더라도, 추진하고 있는 모든 정책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정부가 하는 일

모두를 도매금으로 싸잡아 매도한 나머지 거의 '식물정부' 수준으로 몰아간 것도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얼마전 주택가격이 미친 듯한 폭등세를 보였을 때 이에 기름을 부은 것은 다름 아닌 야당과 보수 언론이었다.

자신들이 집권하면 종부세를 크게 완화해줄 듯한 제스처를 쓴 야당,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종부세의 흠을 잡아

정부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 보수 언론 역시 사태가 악화일로로 치닫게 만든 데 책임의

일단을 갖고 있다."


노무현에 대한 균형잡힌 평가는 최소한 이 정도의 상식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쿠오바디스 한국경제 - 10점
이준구 지음/푸른숲




저번달 초에 있었던 시사인 2차 독자위원회 리뷰가 최근 시사인 홈페이지(http://www.sisain.co.kr/)에 올랐다.

마침 노무현 특집이 있었고, 촛불집회 1년 특집도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노무현을 겨눈 검찰의 칼날이 사정없이 

조여 들어오던 시점이었고, 꽤나 먼 일처럼 여겨지는 그 때에도 뭔가 위태함을 감지했던 듯 하다. 그래도 몇 마디
 
노무현, 혹은 '노무현의 가치'를 변호했었다.





그리고 촛불 1주년 특집 기획..에 대해서도. 무슨 타임캡슐 묻어놓듯이 사람들의 짧막한 단상들을 그러모아놓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보다 심도있는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마냥 상찬하고 떠받들 것이 아니라, 한계와

부족한 점들을 냉정하게 짚어내고 그에 따른 정확한 기대와 전망이 가능할 거라 믿었다.


(끝장을 내달라 @ Sisain)

그 외에도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많이 하긴 했는데, 조금씩 잡지에 반영되어 변화를 이끌고 있다는 게 실감난다.

어제는 1기 독자위원 마지막, 세번째 리뷰를 진행하고 술을 마셨다.



출장 가기 전날 밤, 허위허위 썼던 글이 프레시안에 올랐었다. 몰랐다.


"당신의 눈물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뭐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기고를 보내주면 다 받아주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던데, 모르겠다.

지금은 생각이 다소 바뀌었달까. 사람들은 '노무현'을 '민주주의'와 등치시키고 있다.

믿기지 않는다고? 그를 향해 써내려진 만장들, 온갖 편지와 메모와 메시지들, 그리고 슬픔에 잠긴 조사들..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부분을 '민주주의'라고 바꾸어 읽어도 어느 한대목 문맥상 거슬림이 없다.

민주주의의 화신 노무현이 되었다.


인간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을 구분해서 보면 더욱 보이는 게 많았을 텐데, 그건 놓쳤다.

대통령 노무현이 실제로 이룬 업적과는 달리, 인간 노무현이 표상할 수 있는, 그래서 대통령에까지 오르게 했던
 
'시대정신'이란 부분이 분명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생각은 여전히 똑같다. 사람들이 추모하는 건 민주주의의 죽음이다. 되돌아가지 않으리라 여겼던

역사의 수레바퀴, 절차적, 실질적 민주주의의 발전상이 문득 숨을 몰아쉬며 핀치에 몰린 상황임을 깨달은 거다.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이 도저한 애도의 물결은은 눈물을 위한 핑계거나, 혹은 집단적인 신드롬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노무현은 민주주의에 가장 '프렌들리'했던 대통령은 맞지만, 이명박을 넘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곳은 아니다.



 * 입사 직후 독후감 숙제를 받았던 책 중의 한 권, 그 때 냈던 '숙제'를 일부 수정하여 올립니다.   

배려 - 6점
한상복 지음/위즈덤하우스

 


어느 사이엔가 수많은 자기계발서, 혹은 인생지침서들이 범람하고 있는 세상이다. “몇 억 만들기”같은 재테크를 위한 실용서들보다는 무언가 나름의 깨달음에 기반한 책들이겠지만, 대부분 무게감 느껴지는 근본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얄팍한 스킬이나 임기응변적 처방에 치우쳐 있거나 다소 독단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강변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외국에서는 크게 반향이 없었던 『머시멜로우 이야기』같은 류의 책이 유독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도 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번에 인사팀에서 선물받은 도서 『배려』를 처음 받았을 때에도 역시, 그런 류의 책이겠거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책을 보기 시작했다.


책을 읽어내리면서 약간 놀라기 시작했다. 보통 잠언이나 짧은 이야기를 빙자해서 얄팍하고 설득력 떨어지는 상황을 제시하는 책들과는 달리, 가족의 문제, 팀에서의 문제, 회사에서의 문제 나아가 인생에서의 문제를 골고루 짚어줄 만큼 탄탄한 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위는 정말 주위에 있을 법한 그런 사람으로 현실감있게 다가왔고, 무언가 그럴듯한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꾸며진 앙상한 스토리가 아니라 차근차근 잘 다져진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에 몰입한 채 마지막 장까지 달려가다 보니, 중간에 몇 번이고 잠시 멈칫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순간을 만날 수 있었다.


스스로를 배려하기 위해서는 솔직해야 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에 더해서, 지금의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처해 있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대담함을 가지고 있다면 언제고 새롭게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초심을 이야기하며 새로운 공간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말하지만, 사실 12월 31일과 1월 1일의 차이처럼 문제는 자신의 마음인 거다. 하루하루 새롭고 청신한 눈으로 스스로를 확인하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이미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저러한 삶의 목표가 있고 비전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역시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닐까. 비록 다소 유치해 보이기도 하고 막막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행복은 삶의 과정에서 언제든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인도자의 말은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나와 더불어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 그것은 사람에게 다가서는 첫번째 예의이기도 하고, 함께 즐겁게 살기 위한 필요 조건이기도 하다. 상대의 마음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눈높이를 유지한 채 상대를 대하는 것은,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독선자의 태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밥퍼운동본부의 최일도 목사님은 그러한 식의 독선적인 태도나 말만 앞선 소란스러움 때문에 전체 종교인들이 비판받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하나님을 앞세우지 않은 실제적인 활동으로 지금은 전세계에 걸친 구빈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직접, 솔직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타인에게 말을 거는 최일도 목사님의 배려하는 태도는 그의 공동체가 타인의 관점과 입장을 배격하지 않는 낮은 자세로 섬기기 위한 기초가 되었고, 모두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하루하루의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끊임없이 이루고 있는 것이다. 비단 봉사의 문제만이 아니다. 가정에서, 회사에서,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고 있는 숱한 대화와 행동들이 모두 상대방의 관점을 배려하는 것이라면 삶이 훨씬 즐거워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배려심이 모두에게 더욱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배려」라는 책이 묘사하는 시각적인 이미지 중에서 가장 강렬했던 것은 11층에서 바라본 차도 위의 차량 행렬이 구급차의 신호에 따라 정연하게 길을 내어주는 모습이었다. 꽉 막힌 도로에서 운전할 때 구급차에게 차선을 양보해 주는 개개인의 작은 행동들이 저러한 장관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었다. 트레이드센타 51층의 창밖으로 내다보는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귀엽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그러한 방향으로 생각해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잡아낼 수 있는 통찰력. 그게 어디든 통찰력을 키울 수 있는 곳이 바로 나 자신의 학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내 마음을 전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소통의 기반에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것이 성공이라면, 보다 풍요로운 내용을 갖기 위한 지혜가 바로 통찰력일 것이다.


굳이 어떻게 성공할지, 당신의 비전은 무엇인지 캐어묻는 책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삶의 기본기를 조곤조곤 이야기해주는 이 책의 말대로, 받기 전에 먼저 주는 배려는 나와 상대방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공존의 원칙이며 사회의 기반이 된다. 지금까지 스스로에 대한 배려에 예민한 채,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배려를 해야 할 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지냈던 게 사실이다. 밥퍼운동본부에서 몇시간에 불과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천명에 가까운 어르신들의 점심을 전쟁치르듯 준비하면서 오랜만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걸 뿌듯하게 느꼈다.




눈물을 흘리는 행위는 감정을 정화하고 정돈시켜, 새로운 상황에 적응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헤어진 연인이 실제로 헤어지는 순간은, 그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순간이라던가.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작년 촛불시위 때의 방향성없는 폭발력과 지금의 전염성강한 눈물바다가 갖는 동일한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비루하고 피곤한 삶. 대통령 노무현조차 감당치 못한 강고한 시스템과 주류 세력에 대한 패배감. 울고 싶은 삶.

그 모든 것들을 공유하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부글대던 울화, 불만, 그런 것들이 해소되는 거 아닐까.


노무현의 급서 후 눈물을 글썽이고,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고, 불쌍하고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들도

이성적인 판단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차원의 '자기 위로용'이라는 심증이 갈수록 짙어진다. 노무현에게 미안하단다.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한단다. 존경했고, 훌륭한 정치인이었으며, 서민의 편이었고, '바보'같이 우직한 우리들의

대통령이었단다. 심지어는 그가 그립댄다. 


이런 묻지마식 감정의 물결이 사회를 온통 휩쓸고 사고를 마비시키는 건 경계할 일이다.


언제, 누구에게 그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았던가. 아마 그가 검찰, 그리고 그 뒤에 선 권력자의 '피살자'로써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 시작된 일이다. 그렇기에 노사모에선 '국민이 죽여놓은' 노무현이 국민장이라니, 당치않다고 펄쩍

뛰었던 거 아닌가.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를 비난하고, 모든 게 노무현 때문이야, 라는 말을 초딩들까지 입에 물고
 
있던 게 불과 이삼년 전이다.


막말로, 이명박은 왜 당선되었는가. 우리가 노무현을 싫어해서였다.


처음에 방송이 났을 때,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에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지만,

울 일은 아니었다. 노무현은 아무것도 대표하지 못했고, 그는 더이상 현실세계에 작용하지 않았으며, 그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유일한 가치 도덕성마저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느순간 티비 속 사람들의 눈가가 빨갛게

축축해지더니, 울고 쓰러지고 그러다가 세네시간씩 줄을 서서 헌화하기 시작했다. 꼬맹이들을 안고 업고, 그렇게.

그러고 보면 그새 티비들은 감동적인 음향이 깔린 다큐멘터리와 코멘트들을 쉼없이 돌렸다.


물론 그를 향한 눈물바다가 죽은 자에 대한 어느 정도의 너그러움이 가미된 애도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가졌던

대통령 중에 가장 '진보'적이었고, 가장 호감이 갔고, 또 가장 청렴했고 도덕적으로도 우월했던 대통령인 사실도 맞다. 

그렇지만, 노무현의 정체가 없다. 5공 청문회 스타였다고? 입지전적인 궤적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고? 대통령된 후에
 
검사들과 한판 뜨려 했다고? 대통령 된 후의 업적에 대한 다큐는 과문한 탓인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노무현을 바라보고 울지만, 그 눈물은 살아남은 자들, 살고 있는 자신들을 위해 바치는 눈물이다.

죽은 노무현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표시와 열렬한 지지는, 살아있는 이명박에 대한 극렬한 반대와 증오와

한 짝을 이룬다. 그리고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조차 이명박 정권에게 당하고 말았다는 묘한 '동류의식'도 한몫 한다.

그들은 자신이 불쌍한 거고, 자신의 처지가 애틋한 거고, 답답한 현실에 또다시 꽉 막혀 버린 가슴에 목메어버린 거다.


울고 싶던 차에 뺨 제대로 맞았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개별적 차원의 스트레스 해소와 감정 배출이 문제 해결의 의지를 오히려 꺽어버리거나 역량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거다. 이미 촛불시위에 대한 상찬 후 조심스레 등장하기 시작한 비판들이 보여주듯, 한판 난장으로

-축제였고 혹은 '새로운 시위문화의 전형'이었다고 평해지는-들썩들썩했던 그 거대한 에너지는 문제 자체에 대한

해결 의지보다는 스스로의 스트레스 해소에 몰입했던 면도 없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정제된 감정과 쿨해진 머리를 갖춘
 
'순치되고 이빨빠진' 양민들이 남을까봐 두렵다.


촛불시위가 정돈되는데 한몫했던 건, 종교계 인사들이 개입하면서 이성적인 문제를 감성적인 문제로 바꿔 버렸던 탓도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스템은 바뀌지 않고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감정은 분출했고 어느 정도 치밀었던 울화통도
 
해소하고 잔뜩 축적됐던 스트레스도 날려버렸다. (물론 이 정부 하에서는 더욱 빠른 속도로 스트레스가 누적되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심리적인 위로와 종교적인(혹은 도덕적인) 우월감도 만끽했다. 그리고 다시 예전과 같이 전혀 변함없이

굴러가는 시스템 내부로 걸어들어간다. 추모 신드롬, 울음바다도 한순간의 반짝, 으로 끝나지 않을까 두렵다.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순치'에 다름아니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한가.


노무현에 대한 이 중독성강한 추모 물결은, 온국민에 전염되어 버린 듯한 (혼란스러운) 분노와 비통함은, 아직은

우리를 아무데로도 인도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신기루처럼 사그러들었던 노무현에 대한 열광이 순식간에 되살아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은 그저 "지금보다 나았던 것 같은 과거에 대한 향수", 그것 밖에 안 보인다. 노무현에 대해

사람들이 부여하는 가치나 이미지라는 게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추모 열기가 일종의

신드롬화되어 버린 것은, 그가 오로지 '이명박의 반대이미지'로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초점이 흐려진다. 한미FTA, 이라크파병, 비정규직법, 사학법, 부동산세제, 스크린쿼터제, 양심적

병역거부, 국가보안법, 투자은행, 금산분리, 언론법...이런 문제들에 대한 입장은 "노무현이냐 이명박이냐"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명박의 반대이미지는 노무현인지 몰라도, 이명박의 반대정책, 반대세력은 노무현이 아니다.


노무현에 대해 너무 박한 평가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왜 울고 있는지 그 진정한 이유를 스스로에게 재우쳐 물어보아야 하는 거 아닐까.


지금 왜 그를 보며 울고 있는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애도가 줄을 잇고 있다.

그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대통령이었으며 한국 사회 비주류와 소외된 자들의 대변인이었던 것처럼

기억되고 있으며, 마치 민주주의를 위해 한평생을 헌신했던 인물인 양 급격하게 단순화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가 미군기지를 위한 부지를 조성한다며 평택에서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강제 진압을 벌였던 것도,

동시다발적 FTA추진전략이랍시고 한미FTA를 졸속으로 추진하며 이른바 4대 선결조건 문제를 예비했던 것도,

사실상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며 한국의 교조적인 시장주의 세력-신자유주의 세력-을 용인하고 부추겼던 것도,

부동산 문제나 금산분리 문제, 언론법, 사학법에 있어 지금과 같은 퇴행적 상황을 야기한 것도,

말로는 서민들을 위한다면서 비정규직을 폭증시키고 재벌들과 가진 자들의 배만 불렸던 것도,

심지어 그가 선정적으로 이야기했던 '과거의 유물' 국보법 폐지 문제에 있어서 결국 아무 성과도 없었던 것도,

그리고 이미 그의 치하에서 이명박 정권 때와 별반 다름없는 국가 권력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시위진압작전이 있었던
 
것도,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지금의 정부에 대한 불만들, 지금의 정책에 대한 불만들을 표출하기 위한 땔감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초혼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정책이 근본적으로 이명박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그림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가
 
실제로 '비주류'와 '소외된 자들'을 위한 대통령이었는지는 차치하고, 그의 몇몇 언행들이 편집되어 반복 재생되고 있는

거다.


그가 정면으로 반박했던 대운하 사업,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던 대북한 포용 정책, (발언의 실리적 공과를 떠나)

미국과의 관계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발언, 검찰의 독립권을 보장하고 언론권력을 비판하려 했던 그의 문제의식.

그리고 무엇보다 역대 그 어느 대통령보다도 '일반인'에 가장 가까웠던 그의 화법과 '출신성분'.


그런 것들이 작금 이명박 정부의 대척점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위치지어주는 키워드들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손쉽게 기억하며, 그 기억들은 대개 현재의 필요로 인해 불러내어진 것들이다.


노무현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추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떠올리는 그의 모습이 온통 긍정적이고

바람직했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할 듯 하다. 그렇다고 노무현 정권 시대에 우리가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으니.


다만 그러한 '기억의 재구성'과 새로운 '인간 노무현의 탄생'이 모쪼록 지금의 답답하고 부조리한 정국을

타개하는 에너지로 化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혹자는 지금의 정국이 80년대로 돌아가는데 필요한 건

단지 성고문, 물고문뿐이라고 이야기했다. 노무현은, 왜 죽었는가. 거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노무현은,

우리에게 정말 희망이었는지로 답을 마감해야 할 것 같다.


티비에서 쌍둥이빌딩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어리벙벙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실감이 안나던 기억.

2001년, 3개월 동안 뉴욕에 머물다 돌아온지 채 며칠이 안 되었을 때였다.


비몽사몽 늦잠에 취해있는데 잠을 덜컥 깨운 엄마의 한마디. "노무현 죽었다".

뭐라고? 이건 흡사 9.11때 기억의 반복 아닌가. 난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여전히 티비 속보들은 잠에 취했는지,

자살이네 실족이네 서거네 운명이네, 온갖 단어들을 동원하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투신자살'이라니. 노무현의 허약하고 위세없는 지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단어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글쎄, 개인적으로 노무현을 좋아하지 않았고, '진보'를 표상-혹은 위장-했던 그가 끝내 이렇게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보며 더더욱 실망했지만. 아니, '진보'라는 단어에 똥물을 뿌리고 '도덕성'이란 기준 자체를 회의에

빠뜨리고 말았던 그가 끝내 자신의 언행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죽음을 선택하다니. 또다시 '경망스럽다'는

표현을 듣지 않을까 저어스럽다.


주위 사람들의 몇 가지 반응.

"광주학살을 부르고 몇백억씩 해처먹은 인간도 잘만 살고 있는데 왜 죽고 그러냐.."라는 안타까움.

"이건 결국 이명박이 초래한 거 아니냐.."라는 분노.

"남겼다는 유서에 대체 무슨 내용이 담겼을지 모르지만, 혹시 다 까고 간 거 아니냐.."라는 기대(?).


모르겠다. 장자연리스트때도 그랬지만 죽은 사람은 더이상 말이 없고, 죽은 사람은 더이상 (쥐뿔 남은) 권력도

행사하지 못하며, 그는 이제 주위 사람들을 남기고 온갖 문제들을 남기고 홀로 떠나버렸다.


혹시 故 노무현 전대통령 만큼이나 말실수 잦고 오해를 자주 부르는 그 사람이, '국가 이미지에 큰 타격'이라느니,
 
'국민의 성금을 모아 장례를 치르자'라느니...제발 그런 속내가 있어도 말않고 조용히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론들, 노무현 전대통령 때 중소기업 사장이 목매달아 자살했던 것을 두고 사실상 노 전대통령이 죽였느니

어쨌느니 말많았던 언론들, 이번엔 과연 누구더러 책임지라 하는지 두고 보자.




전반적으로 그의 소설에는 스윙 리듬같은 늘어짐이랄까, 천연덕스러우면서도 요즘 세상에선 다소 밋밋한 정도의

재기발랄함과 도발적인 호흡이 느껴진다. 뭔가 당시에는 관습이나 장르 따위 모종의 경계를 희롱하였을 게 틀림없는

그의 참신한 시도나 발상으로 말미암아 그의 글들은 재즈 시대라 불리던 당시엔 매우 흥미롭고 자극적인

소설이었을지 모르지만, 이미 상상력과 표현력이 극한까지 치닫는 요즘에는 다소 퀘퀘한 맛이 외려 매력적이지 않나

싶다. 살짝 고리타분한 묘사라거나 글투는 요즈음의 소설과는 전혀 달라서 신선한 느낌이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매력적인 오프닝. 주치의는 두 손을 비비다가 버럭 짜증을 내고, 간호사는 복도에서 달아나려던 거센 욕구를 가까스로

억누르지만 새된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며, 쨍그랑 덩! 쨍그랑! 대야는 요란스럽게도 일층 바닥까지 굴러떨어진다.

"댁이 내 아버진가?" 경어법이 존재하는 한국어의 맛을 절묘하게 살려낸 한마디 아닐까. 칠십세 노인에서부터 시작한

삶이 거꾸로 흘러 갓난애기로 죽음을 맞게 된다는 상상력이 반짝거린다.


"그녀는 자기 틀 안에 지나치게 안착해 버렸다. 너무 평온하고 너무 만족하고 너무 흥분을 모르고 취향도 너무

점잖았다." 어린이가 되어가는 어른이 보기엔,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가며 파란 물감같던 눈빛을 잃고 싸구려 도자기

같은 색을 띄게 되기 마련이란다. 다들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그 도저한 흐름을 거스르는 자가 보고 느끼는 걸 통해

나이 먹음-인생-삶을 낯설게 보게 된다.


'젤리빈'

밤새도록 생각하여 마음속에 세워졌을 거대한 결심, 수치심과 패배감의 은사를 입은 그 단단한 결심이었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내뱉기 전에는 황금과도 같았을 다짐이, 입밖에 뱉어지고 조건과 마주하는 순간 똥으로 변한다. 그건

피츠제럴드의 말마따나 일종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거의 화학적인 변화'. 갈지자로 분탕질치는 누군가의 행위 저간에는

그토록 심오한 심적 갈등과 고뇌, 영겁과도 같은 고민의 시간이 있었던 게다.


'낙타 엉덩이'

그토록 매력적이고 앙칼지지만 맘여린 아가씨라면, 낙타 앞몸뚱이가 아닌 엉덩이 부위를 담당해서라도 들이대 보겠다.

특히 와닿았던 표현. "코르크가 (아마도 : 그보다 더 딱딱하게 메말라버린) 내 심장을 본다면 치욕에 못 이겨 저절로

떨어져 나갈 테니." 아..이런 표현을 자연스레 구사하던 사람들이 살던 시대란. 무도회와 고풍스런 자동차. 실크햇과

평등하지 않은 인간. 살아보지도 못한 시대에 대한 향수.


'도자기와 분홍'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일종의 꽁트랄까.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며 무대 위 연극을 설명해주는 연사가 있고, 무대 위엔

복숭아빛 처자들이 있다. 정확히는 '연분홍색을 띤 흰색'의 오랜 옷을 입고 있는 도자기 욕조 속 줄리. 왠지 방정환선생이

쓴 '만년샤쓰'던가, 그런 소설의 김창남이 떠올랐지만, 김창남은 여유로움보다는 오기와 자존감이 강조된 캐릭터.

그에 비해 줄리의 재치있는 입담과 센스넘치는 받아침을 보건대, 그녀는 호기롭고 당찬 신여성.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그저 안타까울 뿐. 왜 그녀는 멍청하게도 가난을 예견하며 설레하는 건지. 가난을 모르던 그녀들의 낭만이란, 이제야

비로소 밤하늘 별들을 보곤 다이아몬드와 직통으로 연결짓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키스미키스민, '키스민'이라는

센스넘치는 이름이라니 조금은 봐줄 수도 있지만,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를 두고 '다이아몬드엔 좀 질렸어'

따위로 말하다니.


작가가 의도한 게 이토록 가당치도 않은 거대한 부를 실감나도록 상상케 만들어 허기를 느끼고 가상이나마 채우도록 한

거였다면, 그리고 그게 성공했다면, 왜 마지막엔 모든 걸 한낱 꿈으로 만들어 버린 거냐. 되려 허기만 심해지고 말아서,

스스로의 낭만과 여유로움의 바닥을 들여다봤다. 


'메이데이'

누군가는 삶과 사랑에 지쳐 권총을 물고, 누군가는 건물에서 자유낙하해 머리가 깨져 죽고, 또 누군가는 무도회의

여왕처럼 대접받다간 사건에 휘말려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오고, 술에 취한 미스터 인앤아웃은 천국행 엘레베이터를

잡아 탄다. 그런 식의 스케치..좀 지루했다. 차라리 고든과 이디스의 어긋난 감정과 타이밍에 집중한 이야기를 했다면.

"'사랑은 덧없는 거죠.'...새로운 사랑의 말들, 새로 배운 부드러움은 다음번 연인을 위해 소중히 간직되었다." 이런 식의

마무리도 깔끔하지 않았을까.


'치프사이드의 타르퀴니우스'

한국 환타지문학의 거두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를 비롯한 작품들엔 꼭 이런 인물들이 나온다. 수다스럽고도 고풍스런

말투를 구사하며 다소간의 현학과 숨겨진 위트를 즐기는. 드래곤 라자의 후치같은 캐릭터. 이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제목의 소설은 그러한 캐릭터의 원형이 혹시 이로부터 비롯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기시감을 선사한다.


'오, 적갈색 머리카락 마녀!'

난 이 소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한 게 맞다면 너무 밍숭맹숭한 스토리, 그리고 내가 놓친 게

있다면 넘 어려운 스토리..라고 치부하고 넘어간다.


'행복의 잔해'

작가가 좀 나이를 먹고 쓴 게 아닐까. 그 이전의 발랄한 분위기와 특이한 사건 위주로 흘러가며 만담하듯 읽히던

단편들과는 달리, 차분한 호흡에 담백한 스토리. 가당치도 않게 행복의 잔해 위에 선 두 남녀의 새로운 러브 스토리,

혹은 정사신의 여운이라도 남길 바랬던 스스로에게, 자극들로부터의 디톡스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Mr. 이키'

유머러스하게 닫히는 1막짜리 연극 대본같은 소설. 근데..방충제가 등장한다는 거 말고는 포인트를 못 잡겠다. 뭐지.


'산골 소녀, 제미나'

짤막한 사랑이야기. 유일한 선생을 알콜중독으로 사망시킨 양조장 소녀가 국자로 위스키를 퍼먹다가 만난 외지인,

그리고 '인간 알코올램프' 그녀와 외지인은 전투중에 발가락 숫자를 세다가 함께 죽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인데,

웃기고 만 이야기.


'작가의 말'

"변화하는 유행의 권태로움이 나와 내 책들과 이 단편소설을 모두 한꺼번에 짓누를 때"...를 그는 기다렸던 거다.

그는 불후의 거장이 되겠다거나 인간의 변함없는 뭔가를 글 속에 간직하고 싶다는 욕심보다는, 당대의 욕구와 취향을

가장 잘 반영하고 선도하고 또 따르려는 욕심을 가졌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의 글들을 읽다 보면 당시 유행을 선도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떤 식의 농담을 했는지, 어떤 유희를 즐겼는지 살아있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당대를 넘어 불변하는 뭔가를 끝내 쥐어내고 시대를 버티어내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시대에 오체투지하듯

몸을 던져 흐름에 완전 영합함으로써 시대를 넘어서는 작품도 있기 마련인가 보다. 살짝 풍기는 노인네의 구렁내같은

골동품의 냄새도 이정도면 오묘한 향수 축에 끼워줄 수 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6점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선형 옮김/문학동네




먹히면 죽는다. 내 군생활을 시작하면서의 다짐이었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학부에 남아있기 쪽팔리다 싶어 사회에 쭈뼛대며 나섰을 때도, 그런 마음이었다.

먹히면 죽는다. 이전에 비해 업그레이드된 점은, 이제는 그 다소 부담스런 비장감을 덜어낼만큼의

여유로움도 챙기고 싶었다는 정도.


그도 그랬나 보다. 허지웅.

허지웅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가 프리미어 기자라는 것도, 종종 시사지에서 마주쳤던 좋은 글들에 달린

바이라인에 그의 이름 석자가 들어가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리고 나와 거의 비슷한 동년배라는 것은

더더욱.


그는 여전히 자신이 어리다며, 생리적 나이와 관계없이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그는 자신이 '울었다'는 고백을 겁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먹히면 죽는다'는 결기에 더해 가오를

좇는 센스까지 갖추어 삶을 살아내고 있다. 꼰대와 야메 마초가 되길 거부하며, 한걸음한걸음 자신의

힘으로 살고 있다. 분노하고, 사랑하고, 의욕하며, 울기도 잘 울고, 난잡하다는 평에 안도한다.

'대한민국표류기'에 활자화된 그는 아직, 여전히 말랑말랑한 사람인 것 같다.


사람들은 조금씩 딱딱해진다. 대학에 들어와 기고만장해지면서, 이삼년 대학다니고는 '캠퍼스의 낭만'을

실컷 즐겼다며 취직 준비를 하면서, 군대를 다녀와선 세상의 부조리함에 만성화되면서, 대학을 졸업할

때쯤엔-특히 요새 이른바 88만원 세대들은 더더욱 어쩔 수 없이-옹이구멍만한 눈으로 밥벌이구하기에

매달리면서, 사회에 나와선 나름의 방식으로 익힌 처세술과 가면 뒤에 숨어서. 언제 딱딱해지기로

결정했느냐, 시간의 문제일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앞서거니 뒷서거니 어른을 자처하며

에스컬레이터 위의 삶을 취한다.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게 참 쉽지 않아졌다고 생각했다.

회사원을 만나 연애하는 것이 학교 때와는 또 다르다는 이야기야 익히 들었지만 비단 연애 이야기만은

아니다. 나 역시도 그런 면이 없잖겠지만,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딱딱해진다. 이미 타인에 대한 신뢰나

기대감에 적잖이 상처입어서일 수도 있고,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생각해서일 수도 있겠다. 얄포름해지고, 둔감해지고, 물기가

말라버린 느낌.


그런데 그런 생각은 기실, 대학 들어왔을 때도 생각했던 거다. 대학 들어왔을 때는 대학 친구들과

고등학교 친구들을 비교하며, 그 이전에는 고딩/중딩 친구들과 불알 친구들을 비교하며. 사회

친구들과 대학 친구들을 비교한 후에는 또 누구와 누구를 비교하게 될까. 그러고 보면, 딱딱해졌다고

생각했던 그들 중에도 술 한잔 하며, 커피 한잔 하며 수다를 떨다보면 의외로 여전히 말랑말랑한 구석이

온존함에 놀랍고도 반가웠던 적이 있다. 말랑말랑한 사람들과, 딱딱해져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속은

여전히 말랑대는 사람들과, 정말로 딱딱해져 버린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 와중이다.

아직 말랑말랑하다고, 적어도 말캉말캉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의 (영화평론을 포함한)

에세이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왠지 내 속의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듯 했다. 그런 말랑말랑함이

필연적으로 동반할 (꼰대 세계의 눈으로 본, 가치평가가 담긴) '불완전함'과 '불안정함', 그런

'질풍노도'의 표류기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계속 말랑대며 살고 싶은

내가 그랬듯.


ps. 개인적으로 정말 한번 만나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첨엔 비슷한 나이의 그가 이런 책을 냈다는

사실에 살짝 질투도 느끼고 괜히 치기어린 구석은 없나, 꼬투리 잡을 거 눈에 불을 켜고 찾았지만,

조금씩 그의 글들을 읽으며 99% 싱크로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만난다면 특히나, 흡사 하나의

세계였던 그녀가 허물어지면서 그가 느꼈던 결락감을 지금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도 묻고 싶고.


대한민국 표류기 - 10점
허지웅 지음/수다




"제가 아는 '황석영'이라는 분은, 지난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의 집권을 막기 위해 시민단체들 그러 모아 비장하게 비상시국선언까지 했던 분입니다. 그때는 이명박씨를 '부패연대세력'이라 부르며, 이명박의 집권을 막기 위해 반MB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지요. 제 기억에 그 움직임은 결국 문국현 후보에게 가하는 사퇴의 압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자 뉴스를 보니, 자신을 황석영이라 부르는 또 한 분이 나서서 이명박 정권이 실용적인 중도정권이라며, 그 정권을 적극 돕겠다고 하는군요. 부패한 세력이 집권 1년 만에 자연치유되어 싱싱해졌다는 얘긴가요? 아니면 이명박이 '부패'한 세력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치즈나 요구르트처럼 '발효'한 세력이었다는 얘긴가요?

더 황당한 것은 아직도 진보세력이 '독재 타도'나 외치고 있다는 그의 비판입니다. 2007년 대선 때 철지난 독재타도 외치던 사람은 바로 황석영씨였습니다. 그때 '비상시국회의'라는 단체의 결성식에서 황석영씨는 "척박한 독재의 동토에서 민주화를 위해 분투한 초심의 열정으로 다시 돌아가"겠노라고 했었지요. 그런데 이제 와서 사돈 남 말 하고 계시니.... 

사진에 나타난 생물학적 특성은  이 개체가 영장류에 속한다고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기억력이 2초라는 금붕어도 아니고, 세상에 명색이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바로 얼마 전에  자신이 했던 언행을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요? 욕도 웬만해야 하는 거지, 이 정도의 극적인 변신이라면 욕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웃고 넘어가지요. 

정작 코미디는 따로 있습니다. 황석영의 문학적 영감이란 게 '몽골 + 2 korea'라는 발상이라네요. 이 대목에서 완전히 뿜어버렸습니다. 요즘 그러잖아도 크로스 오버가 유행하던데, 아예 개그계로 진출하시려나 봅니다. 민족문학 한다고 북조선 넘나들더니, 이젠 민족의 단결을 넘어 몽골 인종주의, 알타이 종족주의 문학 하시려나 봅니다. 이 분, 생기신 것보다 많이 웃기세요. 풋~ ^^ "

@ 진보신당 당원게시판.


"5월18일부터 20일까지 국립극장 문화광장등 국립극장 곳곳에서 전시될 예정이며,
전시외에도 공연,체험등의 아랍관련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으니,
남산이 푸르른 요즘, 
시간이 가능하시다면, 발걸음 하셔서,
아랍문화의 향기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전시는 4시부터 8시까지 오픈예정입니다.)"

라고, 아랍문화축전 담당자분이 이메일을 주셨다. 정작 내가 갈 수 있을까..싶은 타이밍의 날짜들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내 사진과 글이 전시된 곳을 다녀오지 않을까.ㅎㅎ

혹시 아랍문화에 관심있고 다른 여행사진들이나 캘리그래피, 헤나, 아랍음식 등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며칠전 올렸던

아랍문화축전 행사 관련 포스팅을 참조하시길.
([아랍문화축전]꾸스꾸스를 먹고 이라크영화를 본 후에 수단전통혼례에서 결혼하기.)




아..노래를 끄고 이제 잠들어볼까나 하는 심정이었는데, 문득 눈에 들어온 이 기사의 제목. 덕분에 잠이 확 깼다.

'李대통령, 국민보고 뚜벅뚜벅 갈 길 간다'.


그렇지만 사진을 보고, 연합뉴스가 고도의 안티는 아닐까 싶기도 하고 살짝 유쾌했달까. 사진 속의 인물이

뉘신지는 모르겠으나, 국민을 보고 뚜벅뚜벅 잘도 걷겠다는 타이틀과는 너무 상반되는 이미지 아닌가.


어깨는 금방이라도 뒷산에 올라 반성해야 할 듯 축 처져 있고,

국민을 향해야 할 고개는 꾸부정히 숙여진 채 시야는 발밑 쥐구멍에 걸쳐 있고.


뭔가 고독한 '새마을' 영웅의 이미지를 심고 싶었던 등짝인지도 모르지만 내 보기엔 그저 편집증과 강박관념,

그리고 날림형 언행들로 빚어진 '괴물'의 등짝처럼 보인다.


연합뉴스에도 조만간 막말이 날아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사진찍지마~ (이딴 식으로 찍어서 비꼴거면) XX 찍지마~ 성질이 뻗쳐서 정말 XX 찍지마!"



평소 경영학 지식서나 자기계발서에 대해 전혀 '식욕'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우연찮게도 이 책은 최근 며칠에 걸쳐서

내게 몇 번씩이나 노출되어 있던 상태였다. 회사에서 주관했던 CEO조찬회에서 선물로 나눠줬다는 이야기나, 누구였더라

높은 분이 일장 연설을 하실 때도 이 책의 내용을 일부 인용키도 했었고, 주변에 책을 사서 들고 다니는 친구도 있었고.


그렇게 읽게 된 메이저리그 경영학. 야구를 경영에 빗대어 보겠다는 아이디어가 참신했다.

야구에서 진루 순서를 바꿀 수 없듯, 경영에 있어서도 운영관리, 인력관리, 자기관리, 그리고 변화관리라는 네 개의

베이스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메타포는 정말 반짝거렸다. 


그걸 조금 정식화시킨 게 바로 이 책의 목차이기도 하며, 목차보다 명료하게 제시된 건 책의 양날개에 있는 요약.

65% 앞서 가는 경영의 기본 운영 관리, 1루 진출.

35%만이 진루에 성공한다는 인력 관리, 2루 진출.

자신을 분석해야 15% 안에 든다는 자기 관리, 3루 진출.

변화를 주도하는 최후의 5%를 위한 변화 관리, 홈 밟기.


이제 남은 문제는, 야구의 통계에서 빌려온 이러한 65%니, 35%니 하는 (있어보이는) '믿음직한 수치'를

경영기법의 문제에서 어떻게 설득력있게 제시하는가, 그리고 얼마나 뻔하지 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아니면 최소한 뻔한 이야기라도 조금은 더 새롭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가.


야구의 온갖 일화들, 비화들은 재미있었다. 야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크지 않은 나같은 사람도

흥미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인 일화들도 있었고, 풍부한 사례들로 지루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야구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도 작지 않은 소득이라고 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야구에 빗대 경영을 이야기하려는 애초의 반짝이던 아이디어가 광택을 확 잃었달까.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어느 순간 너무 도식화된 틀에 얽매여서는 야구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경영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예의 '자기계발서/경영서 혐오증'이 울컥 일었는지, 대체 왜

이런 뻔한 이야기를 뱅뱅 돌리고 돌려서 있어보이게 포장하려고 급급한 건지 짜증이 나기에 이르렀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디테일로 들어가선 온통 구멍숭숭 뚫린 치즈같은 느낌이었다.

조금 더 씨니컬하게 말하자면, 애초 이 책이 삼백여 페이지나 할애해 가며 쓸만한 아이디어를 품고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아, 야구 경기의 운영을 경영에 비유해 볼 수 있겠구나, 라는 짧막한 깨우침이랄까, 그걸 말하고

싶었다면 열페이지로도 충분했을 게다. 야구에서의 사례를 풍부하게 인용하고 싶었다곤 해도, 인용의 과잉이다.

그게 아마 이 책이 경영서인지, 야구 상식대백과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이유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쐐기를 박아주는 멘트. "만약 당신이 위의 네가지 경영 전략을 마스터한 5%에 들 수 있다면

이제 티켓을 맘대로 끊을 수 있다. 그것도 VIP귀빈석으로." 이런 유치찬란하고 싸보이는 멘트...이건 전적으로 내

취향에 달린 문제겠지만, 사람들을 경마경기의 말들처럼 앞만 보고 내달리라고 꼬드기는 이런 말...

아무리 자기계발서라고 해도 요샌 이렇게 대놓고 천박하게 굴지는 않으며, 믿는대로 이뤄진다는 식으로 사이비

약장사처럼 굴지도 않는 것 같던데.




영화를 보기 전 가급적이면 그 영화에 대한 정보를 피하려는 성향이 언젠가부터 생겨버렸다.

위드블로그에서 있었던 이 영화에 대한 시사회 신청을 하면서도, 여주인공 이름이 (아기공룡 둘리의 그)

'둘리'라니 왠지 더 보고 싶다느니, 희미한 기억 속 친구의 멘트를 팔아가며 신청은 했지만, 사실 시놉시스나

평가같은 것들에 대해선 일부러 눈을 감고 신청했던 거다.


광화문 인근에 이런 영화관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음식물 반입이 일체 금지된 데다가 전후좌우로 넓찍한

좌석공간, 그리고 세련된 마감재로 신경쓴 듯한 영화관 내부의 은근히 호기로운 분위기. 시네큐브에 도착해서야

내가 보게 될 영화의 제목을 확실히 각인했다. 그전까지는 블랙 스노우였는지 블랙 아이스였는지 계속 헷갈렸다.




알고 보니 여주인공은 둘리가 아니라 툴리였고, 영화는 그리스 비극과 같은 느낌을 풍겼다.

이렇게 발랄하게(!) 시작했던 영화, 시사회가 끝나고 심영섭 평론가님과 함께 했던 '씨네토크' 자리에서 누군가

지적했던 것처럼 '놀랍게도' 이 둘은 부부다. 주름살이 패이기 시작하는 마흔살 나이의 아내지만, 그 둘은

뜨겁고도 농염한 사랑을 나눈다. 나도 저랬으면 좋겠다, 고 잠시 생각할 만큼 행복해 보인다.


심영섭님은 일종의 나비효과라고 했지만, 이걸 나비효과라고 부를 수 있을지까지는 모르겠다. 다만 행복하던

어느 한순간 기타케이스에서 갑작스레 떨어진 다섯개 들이 콘돔 한 통, 그 안에 내용물이 세개밖에 없었다는

데서 최초의 충격이 가해진다. 신뢰를 잃은 남편, 그렇게 살얼음판 위에 콱 내리찍힌 후에는 남편의 자잘한

거짓말을 타고 균열이 사방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녀, 사라가 의도치않게 '남편의 애인', 툴리를 만나면서 찌지지직, 손쓸 수 없는 속도로 번지기

시작한다. '남이 하면 불륜, 자신이 하면 멜로'라는 손쉬운 한마디는 모종의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 남이 하는 

'불륜'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것도 역시 사랑이구나..라고 인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 모든 사람이 자신의

내부에서 들끓었던 감정의 흐름들, 그 복잡하고 미묘한 것들을 알아주길 바라는 건 무리라 해도 때로는

그런 것들을 설명하지 않고서도 이해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나 보다. 사라가 툴리에게 그랬다.

그게 심지어는 자신의 남편에 대한 사랑이라 할 지라도. 남편을 빼앗긴 상처받은 사라는 남자를 빼앗고

불안해하는 툴리를 어떻게 죽이면 좋을지 수백번씩이나 생각하는 동시에, 가면 쓴 사라, 크리스타는 툴리와

은밀한 이야기를 공유하며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관계이기도 하다. 이제 사라는 신뢰를 저버린 남편을

미워하고, 툴리에게도 불성실한 남편을 미워하며, 그럼에도 사랑하고, 깨어진 자신의 사랑을 슬퍼하고,

툴리를 정말 좋아하며, 남편을 뺏은 툴리를 증오하고, 툴리의 젊음을 시기하며, 스스로의 위선과 가식을

혐오하고, 툴리의 행운을 빈다. 이 모든 혼란스런 감정은 그대로 '진심'이다.


그런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사라와 툴리의 내면에서 들끓으며 더더욱 복잡하고 모순적인 그림을 보이면서도,

'남편의 외도를 알아챈 아내 vs 아내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통속적인 구도에서 비롯한 갈등은 또 자체의

동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속내야 어떻든 그녀들 둘은 서로 맞부딪혀야 하는 사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결론으로 치닫게 되는 인간의 운명을 그린 그리스 비극들처럼, 그 둘은 예정된 파국으로 치닫는다.

균열이 극대화되는 순간, 핀란드의 백야는 끝나고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를 벗어난 자동차는 나무둥치에

들이박는다.


미워하는 사람을, 신뢰를 잃은 사람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결국 이 영화는 신뢰와 사랑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남편과 아내 간의 문제기도 하지만,

그보다 초점을 맞추는 건 오히려 사라와 툴리의 문제다. 어느 순간 (조금 많이 꼬아진) '델마와 루이스'가

왠지 연상되기도 하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비극을 떠올리게 했지만, 그래도 그 둘은 비극적 결말로 끝나지 않을

진부하지 않은 희망의 메시지를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었다.


스토리를 요약하려 해도 참 쉽지 않다. 영화가 인물들의 행동이 아닌 감정과 심리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덕분에 딱 떨어지는 느낌은 전혀 없이 혼란스럽고 지저분한 느낌마저 들기도 하고, 구불구불한 스토리 전개도

뭔가 폭발적인 한방을 바랬던 관객에게라면 어지러울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원래 사람 맘이란 게 그런 거

아닐까. 말로 하나하나 설명해내기엔 참 구구하고 재미없고 설득력도 없기 십상일 텐데, 이렇게 흡인력있고

짜임새있게 풀어낸 감독이 대단하다 싶다.


영화를 다보고 생각한다.

블랙아이스란, 당신과 나의 둘도 없이 친밀한 관계에마저 끼어있는 자그마한 살얼음판. 잠시 방심한 한순간이면

관계의 통제력을 잃게 만들어 한껏 감정을 휘젓다가 어디론가 꼬라박히게 만드는. 안전운전..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기엔, 저 멀리서 비웃고 있는 '운명'이란 녀석의 썩소가 맘에 걸린다.



 
 

ⓒ 시사인 홈페이지(www.sisain.co.kr)

지난달부터 시사IN 제1기 독자위원회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4월 6일에 있었던 첫 시사IN 독자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려고, 회사에는 집안일을 빙자해 30분 일찍 퇴근하고

독립문역 옆에 있는 시사IN 편집국으로 고고싱. 대구에서 섭도 째고 올라온 열혈독자분도 있었고, 기자분들

수고하신다고 음료수를 양손가득 들고 온 분도 계셨다. 나는? 넥타이만 덜렁대며 갔다가, 나 빼고는 전부

대학생 혹은 졸업생이라 얼른 넥타이만 풀어버리고 말았다.


관련기사들 :

“시사IN 너마저 제목 장사를…”

끈질긴 <시사IN> 저력 보여주길

그래도 하고 싶은 말 말 말

독자위원 눈길 사로잡은 기사

“배달 그것이 알고 싶다.”



애초 한시간 반 정도를 예상했던 독자위원들의 리뷰는 두시간을 꽉 채우고서야 끝났다.

내가 말을 좀 많이 했다 싶긴 했는데, 실제로도 좀 많이 하긴 한 듯..정리해준 변진경 기자님이 워낙 깔끔하게

정리해 주어서 다들 그럴듯하게 이야기한 것처럼 나오는데, 감사할 따름.ㅋ


아래 사진들은 여섯 명의 독자위원 중 한명이었던 도윤씨가 찍은 시사인 편집국의 풍경들.

우리가 모였던 편집국 회의실은 도서관도 겸하고 있었다. 무질서한 모습이지만, 오히려 그만큼 자주 저 책들을

들춰보고 있다는 반증 아닐까 싶다. (단순히 정리할 시간이 없는 거였는지도 모르지만..당장 누가 꺼내 들춰봐도

전혀 부담스럽거나 어색하지 않을 저 분방한 분위기라니.)

작년이었던가, 시사IN 표지를 장식했던 MB님.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미지지만, 지금은 다소 MB의 명징함이

떨어지고 있다. 'MBC 내부의 적들'도 그렇고 反MB 진영내의 불분명하고 '정치공학'적인 문제들도 그렇고.

역시 작년 언젠가, MB와 부시의 회동을 시사하는 표지 모델로 나섰던 인형. 그때 이 표지를 보면서, MB가

앞에서 말고삐를 잡고 있고 측면에서 화면을 잡았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했었다.

고이즈미, 정동영, 박근혜에서 박제동에 이르기까지 삼등신으로 재구성된 그들의 인형이 내려다보는 편집국 내부.

시사IN, 난도질에 가까운, 선혈이 낭자한 '하드코어 리뷰'를 바란다면 기꺼이. 그렇지만 애정을 가지고.


"국방부 장관(사진)은 20일 “북한은 서울이 군사분계선으로부터 50km밖에 안 떨어졌다고 위협하지만 우리가 보면 평양도 군사분계선에서 150km밖에 안 떨어져 있다”며 “현대전에서 이런 거리의 차이는 수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이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북한군 총참모부 대변인이 18일 ‘서울이 군사분계선에서 불과 50km 안팎에 있다’고 협박한 데 대해 “우리 군은 국지도발이든, 전면도발이든 즉각 응징할 대비가 돼 있다. 북한은 도발을 엄두도 내지 말고 하지도 말아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동아일보, 09. 4. 21)


북측의 엄포에 대해 우리도 이런 식의 엄포라니...북한이 아무리 '서울 불바다' 운운했어도 이런 식으로까지

까칠하게 대응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니들이 까면, 우리도 깐다라는 식이잖아.


그렇지만 이전에도 이들처럼 할말이 없어서 안 한 건 아닐 게다. 양측 모두의 전쟁의지를 억제시킬 수 있는

MAD(mutual assured destruction)식의 미친 협박을 서로 겨누어봤자, 우리 측이 잃을 것이 워낙 많은 탓에

애초 상호 협박이 불가능한 탓이다. 게다가 북한은 이미 수십년째-혹은 일제시대 때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부터-

온통 지하요새화, 벙커화되어 있는 지역이니 한국, 그리고 서울의 하늘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마천루에

비할 게 아니다.


정말 싸우자는 건지, 괜히 한번 폼 재볼라고 으르렁대보는 건지, 아님 MAD인 건지 모르겠지만,

이건 상대도 뻔히 공갈인 걸 아는 실속없는 엄포이니 가오도 안 잡힐 뿐더러, 실속도 없고, 분위기만

더 악화시킬 뿐인 최하수 아닌가 싶다. 멍충이들.



참 요란스런 껍데기다. 중국에서 판매속도가 가장 빠르다느니, 수백만 매체가 어떻고 몇십주동안 1위가 어떻고.

빌게이츠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는 규모의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로스차일드가문이 세계 금융을 쥐고 흔든지

어언 이백여년이 되었다거나, 링컨과 케네디의 암살, 미국의 남북전쟁, 심지어는 유럽의 전쟁들과 1, 2차

세계대전까지도 그들 일부 '배후세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했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런 식의

허무맹랑한 음모론은 이런 식의 의문을 낳는다.




그런 음모론에 경도된 책의 앞머리 절반쯤을 읽으며 한 댓번은 "그래서 어쩌라규~"를 외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불태환화폐가 고작 몇십년의 역사밖에 지니지 못한, 아주 특이한 경우임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듯 하다. 태초부터 그랬던 듯 단단하고 완전무결해 보이던 지금의

시스템이 실은 역사적인 구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 그리고 변경가능하다는 상상력의 자극. 그게 지금 시스템의

문제점을 바꾸는 단초일 테니까.


지은이가 말하는 대로, 금본위제가 폐지되고 은행들의 지급준비금제도에 기댄 불태환화폐제도가 그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돈'을 출현시켰다. 금이나 은과 같은 진정한 부(wealth)를 증거하는 화폐가 아니라, 은행으로부터

액면가만큼을 빌렸음을 의미하는 차용증서로서의 화폐. 그리고 그러한 화폐의 발행이 점차 팽창하면서 이른바

'인플레이션 택스(Inflation Tax)' [각주:1]효과로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며, 그에 더해 전지전능한 '그들'의 입맛에

맞는 타이밍과 성과를 기한 세계적 차원의 경기변동이 유도되어 특정국의 자산과 부를 고스란히 가로챈다고 한다.

그게 지은이가 말하는 '양털깍기'의 의미이다. 경제가 호황을 이루고 급속한 성장을 이루다가, 어느 순간 거품이

잔뜩 끼었다 싶을 때 훌떡 경제를 말아버리고는 싼값에 주요 기간산업과 기업들을 차지하는 것.


결국 이 책의 요지는, 제9장 달러의 급소와 금의 일양지 무공, 그리고 제10장 긴 안목을 가진 자, 요 두 챕터에 전부
 
담겨 있는 듯하다.(제목도 참...중국스럽다.) 중국이 금융시장을 개방하기 전에, 황금에 기반한 화폐제도로 조금씩

위안화를 바꾸어나가며 미국의 국채나 달러 대신 금을 중국내에 쌓아두라고. 그렇게 서서히 세계의 기축통화로

등극해서 중국이 다시금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워낸 패권국으로 등장하라는 민족주의적 메시지다.


근데, 한국의 경제위기 당시에도 나왔던 이야기지만 국내자본과 해외자본이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지은이는

'중국'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중국 내의 금융자본도 역시 자기증식을 통한 이윤 추구라는 논리에 충실할 뿐 아닐까.

지금이야 세계 금융시장에서 수세를 점하고 있기에 방어에 급급할 뿐이지만 그들 역시 언제든 '로스차일드가문'이

그랬듯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바꾸고 국가를 변형시킬 집단인 거다. 그러니까 거기에서는 '국내자본' 대

'해외자본'의 구도 혹은 '중국' 대 '외부의 적'의 구도라기보다는, '공공영역의 수호자인(여야 하는) 정부' 대

'자본'의 구도가 더 설득력있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금태환화폐 시스템으로 변환시키기 위해서라도, 중국 내

자본과 협력하는 것보다는 타국 정부들과의 협조가 더욱 중요하고 효과적일 것 같다.


하나 더, 중국은 패권국을 추구한다고 치고, 한국에는 어떠한 함의가 있는 걸까. 이책. 중국 정도 되는 나라니까

외부 금융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던, 로스차일드가문이 전세계를 집어삼키겠다고 음모를 꾸미던 말던 그에 대항해서

뭔가 해보려고 하는 거지, 우리 나라는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중국에서야 이 책이 뭔가 대국인으로서의 역사적

책무라거나 괜히 어깨 으쓱하는 사명감을 느끼게 했을지 몰라도, 그래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해도, 한국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태환화폐 시스템의 역사적 형성과정이나 그 문제점들이란 건, 사실

이 책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많이 접할 수 있을 텐데...? 한국의 CEO들이 추천하는 책이라는데 왜 그럴까.

왠지 Snob effect란 단어가 오랜만에 떠오르는 듯.ㅋ


화폐전쟁 - 6점
쑹훙빙 지음, 차혜정 옮김, 박한진 감수/랜덤하우스코리아







  1. 인플레이션 택스(Inflation Tax)란 내가 기억하는 한도내에서 설명해 보자면 이런 거다. 화폐공급량이 늘어나 물가가 상승하게 되면 보유하고 있던 자산의 가치가 하락하게 되는데, 그 자산의 하락한 가치분만큼을 화폐발행의 책임이 있는 정부에 세금으로 낸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정부가 초래한 인플레이션에 따라 사람들의 부가 스물스물 정부로 이전되는 효과랄까. [본문으로]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대포도 안 만들 테고
탱크도 안 만들 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 애국자가 없는 세상(권정생, 2000)


*                *               *

李대통령 "공무원이 야구 대표팀보다 애국심 부족" 하다는 기사를 보고 그가 진화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드디어 그가 '애국심 이데올로기'를 영리하게 써먹겠다는 '개념을 탑재'했구나 싶기도 하고, 이래서야 그의 정책과

마인드에 반대하기가 더욱 쉽지 않겠다는 위기감도 들고. 


그가 자신의 무대뽀식의 추진력을 정당화하는데 필요한 개념들을 챙기기 시작하고, 그러한 개념들 중 하나가

특히나 취약한 안보라는 핑계로 이 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민감한 '애국심'을 동원한 효과적인 국가주의라면...

에효.


위드블로그에서 이런저런 리뷰 신청을 하다가, '화이트 벤토나이트'라는 것을 주성분으로 했다는 '케어닉

스킨닥터'의 리뷰 신청을 보고 냉큼 신청했었다. 비록 벤토나이트니 신비의 광물질이니 이런 단어들은 뜬금없게도

내게 슈퍼맨의 힘의 원천 클립토나이트를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그리고 제조사도 '(주)발렌티노 씨엔씨'라나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곳이었지만(그렇다고 다른 뭔가 귀에 익은 제조사가 있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지만), 일단 그런건

되고 나서 생각하자고 다짜고짜 신청부터 했었다.


그리고 집에 배달된 케어닉 스킨닥터 제품들을 꼼꼼히 살펴보며 이걸 과연 써도 될지, 부터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이 사실이다. '먹지 마세요, 피부에 양보하세요'라는 세상 아닌가. 책이나 음반류와는 달리 심각한 부작용이나

적어도 피부트러블의 위험을 자초한 게 아닌가 잠시 두근두근.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각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마뜨하게 스며드는 느낌도 그렇고,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다고

해서 그런지 피부톤도 좀 밝아지고 건강해진 듯한 느낌이다. 찡그린 표정에 칙칙한 톤의 사진을 비퍼(Before)라

칭하고, 활짝 웃는 낯에 뽀샤시한 톤의 사진을 애프터(After)라 하며 자사의 제품 효과를 광고하는 온갖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가운데, 벤토나이트 케어닉 스킨닥터를 체험해 본 근 3주간의 내 생활을 하나하나 적시하며 효능이

있음을 증명키로 한다.


< 내부 요소 >

1. 수면 부족 : 주말에도 거의 매일 밤 2-3시에야 잠들어, 이른바 피부재생의 시간이라는 밤 10-12시 타임을 전부

수면이 아닌 다른 것에 할애했다. 기상시간 역시, 10시쯤 일어났던 주말을 제하고는 매일 7시이전..

2. 음주 : 한 주에 3일 정도는 술을 마셨던 듯 하다. 맥주, 소주, 소맥, 양주, 와인, 빼갈...

3. 흡연 : 마침 직간접 흡연이 절정에 달했던 기간. 담배를 몇년간 안 피다가 다시 피게 되었고, 하루에 많을 때는

한 갑씩도 태웠다.(최근 다시 끊었다.)

4. 스트레스 : 별다섯개, 그것도 왕별 다섯개짜리 스트레스가 쭉. ★★★★★


< 외부 요소 >

1. 황사 : 올해는 그나마 황사가 덜한 편이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황사는 '피부의 적'이다.

2. 건조함 : 비무장지대에서 잘도 번지고 있다는 대형 산불 탓도 있을 테고, 버석버석한 느낌의 계절..봄.

3. 컴퓨터 : 근자에 동영상 강의를 듣는 것도 있고 블로그에 좀 시간을 더 할애하는 듯 하니, 아무래도 컴퓨터의

전자파나 열기가 피부에 도움이 될리는 없고, 인체에 유해할 거다.



< 기타 요소 >

1. 닭튀김 : 후라이드 치킨을 몇 차례 맥주안주로 먹은 바, 특히 날개와 껍데기에 탐닉하여 콜라겐을 섭취하려

애썼으나 그 양이 소량인 고로 피부에는 미미한 효과를 미치는 데 지나지 않았으리라 사료됨.

2. 흑초 : 상무님이 드셔야 할 흑초를 1:3의 비율로 냉수와 희석하여 아침마다 장복한지 몇주 되어가는 듯 하며

배변생활에서의 명랑함을 기하고 있기는 하나, 아직 피부에까지 효험이 이르지는 못한 듯 하여 기각함.



..이런 와중에도 피부가 뒤집어지지 않고 최소한 Before와 After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은 반대로 당시

체험중이던 '벤토나이트 케어닉 스킨닥터'의 탁월한 효과를 반증하는 건 아닐까. (이건 왠지 서프라이즈의

믿거나, 말거나 하는 나레이터 톤을 연상시키는 듯..)


종로3가의 허름한 낙원상가 4층에는 '서울아트시네마'가 있다는데, 아직 실제로 가본 적은 없었다.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나면 늘 그렇듯, 잔뜩 피곤하고 뭔가에 절어버린 듯한 느낌으로..한동안 고심했다.

시사회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피곤하기도 하고, 혼자 영화를 보고 전시회를 보는 게 요샌 별로 땡기지도 않고,

금요일 저녁에 사람 복작대는 종로통에서 헤매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시사회 티켓교부처에서 이름을 말하고 티켓 두 장을 받았다. 한 장은 됐다고 돌려줄까 하다가, 그냥 받았다.

담배를 피는 커플들 틈에 끼어 낙원상가 옥상에서 종로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약간 헤매며 찾은 이곳은, 말하자면

낙원상가 건물 옥상에 위치한 모양새의 영화관인 거다. 카메라를 들고 왔어도 뭔가 신기한 것들이 잡혔겠다고

살짝 아쉬워했지만, 어차피 영화시간에 딱 맞춰 근근히 도착했으니 할애할 시간도 얼마 없었다. 입장 전에 티켓

한 장은 아예 가방에 밀어넣고, 나머지 한 장만 손에 쥔 채 조용히 통과했다.


처음 이 영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바다, 갯벌 어쩌구 하길래 난 왠지 당연히 '태안 앞바다'겠거니 했었다.

그렇지만 아니었다. 영화는 근 15년간 끌어왔던 '새만금 간척사업' 에 대한 이야기였다. 망가지는 갯벌을 보여주며

자연 다큐처럼 시작해서는, 간척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농성이나 천막투쟁을 보여주고, 그간 간척 사업을 둘러싼

간략한 역사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간척 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분열'되고 '패배'했는지,

또한 그러면서도 바다를 터전삼아 살아가는 여성어민들이 얼마나 강인하면서 인간적인지를 보여준다.


대책위의 지지부진한 행동, 불분명한 입장표명, 그리고 간척사업으로 인한 피해가 고르지 않게 돌아가는

선주들과 非선주들 간의 미묘한 입장차. 최종적으로 33킬로에 달하는 물막이 공사가 완료되기 전까지 몇번이나

예고되었던 대규모 선상시위의 뉴스는 나도 들은 기억이 있지만, 그렇게 허탈하고 무기력하게 대응했던 건지는

몰랐다. 엉엉 울면서 하소연을 하는 젊은 아저씨의 붉은 눈시울이 가슴에 와 닿았고 물막이 공사현장을 점거하곤

밤늦도록 핏대높여 자신들끼리 방향을 두고 싸우던 그들의 절실하고 필사적인 모습이 먹먹했다. 단순한 그림이

아닌 복잡하고 미묘한 그림을 보여주는 다큐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뭐니뭐니해도 어머니들이 앞장섰다. 어느 분은 감성적인 소녀처럼 바닷가 생명들이 죽어나간다며 한숨지었고,

또 어느 분은 자식넘이 들고 온 돈내라는 가정통신문이 겁난다며 분노했고, 그렇게 제각기의 포인트는 달랐지만

결론은 같았다. 해수유통. 물막이댐을 터서 바다를 되살려내라. 그렇게 청와대 앞에서 일인시위도 하고, 농림부로

찾아가 책임자와의 면담도 요구하고, 해상 시위에도 앞장서고. 그리고 결국 한 분은 갯벌을 베고 돌아가셨다.


개인적으로는 농림부에 찾아갔던 그분들이 대체 누구를 보고 소리치고 호통을 쳐야 할지 모른 채, 사방에 대고

소리지르는 장면이 너무 와닿았다.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누가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가. 그(들)은

모두 어디에 숨었길래 화면 귀퉁이에도 나오지 않는가. 그분들의 흥분한 눈초리와 새된, 그러다가 쉬어버린

목소리는 농림부나 청와대, 혹은 국가기관 그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한 채 허탈하게도 증발해버린다.


대법원에서도 그들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기각된 어느 날, 어민 한분이 초딩 4년짜리 딸내미에게 술김

훅훅 뻗치며 허탈하게 말한다. "넌 나중에 공부 잘해도 판사 하지 말어, 그럼 아빤 너 안 봐." "차라리 시인되라.

시인이나 철학자. 그래서 이 사회 썩어빠진 거 전부 비판해 버려." ..그렇게 갯벌은 하얗게 소금기가 낀 벌판이

되어간다. "물막이한 게 뭐라고 태극기를 흔들어,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도 아녀." 그러게요, 그러게 말입니다.


터전을 상실한 그분들이 다른 지역의 바다로 옮기면 되지 않나..하고 살짝 생각했지만, 내 생각에 답이라도 하듯

한 분이 말씀하신다. 마치 농부가 대지에 민감하듯, 어부는 바다에 민감한가 보다. 다른 지역은 영 다른 환경에

다른 기술과 도구가 필요한, 말하자면 다른 기술을 요하는 다른 '직종'인 셈이랄까. 당신들의 직장을 한순간

상실해버린 채 제대로 된 보상조차 못 받고 등떠밀리는 상황..안다고 생각했지만 몰랐었다


하긴, 나는 바다, 갯벌, 생태라고 하면 기껏 '태안' 밖에 생각해 내지 못하는 시크한 도시 남성인데다가, 물막이

공사가 끝났을 뿐 여전히 그곳에는 거대한 바다(랄까 호수랄까)가 버티고 있음을 상상도 못했던 상상력 빈곤한

녀석인 거다. 그 곳을 매립하기 위해서는 인근 반경 60킬로 내의 야산을 모두 깨야 한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어느

주민 한 분이 말했던 것처럼 (미국 뉴올리언주를 덮쳤던 카트리나 같은) 재해가 닥쳐서 차라리 저 물막이댐을

쓸어가 버리면 어떨까..


* 2009 희망다큐프로젝트는 1월 '워낭소리'를 시작으로, 2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3월 '할매꽃',

4월 '살기 위하여', 그리고 5월 '길', 6월 '3xFTM'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휴대폰도 되고 카메라도 된다는 '컨버전스', 혹은 엠피쓰리도 되고 USB도 된다는 '양수겸장'의 아이디어 상품은

종종 성공적이지 못하다. 어느 한 쪽의 기능이나마 제대로 살아있다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 다른 한 쪽의 기능이

물귀신처럼 우월한 쪽의 기능을 물고 늘어져 두 가지 기능 모두 어정쩡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읽기에 따라 연애소설이 될 수도, 미스터리소설이 될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강조하는 건, 일본이 아닌 외국에서는

쉽게 와닿기는 힘들 듯 하다. 우선 미스터리를 구성하기 위해 치밀히 고안된 복선들과 상징들이 일본 '내수용'의

것들이어서 내 눈에는 별로 걸리지 않았다. 다만 A면, B면이라 이름붙은 두 챕터가 알고 보면 동시간에 일어나는

사건들의 기록이라는 흐릿한 의심은 뒤로 가면서 더욱 짙어졌었고, 마지막 장면에서 폭발하는 과거의 기억들은

나름 성공적으로 그간의 긴장을 날려버렸다. 그것만으로도 꽤나 참신하고 재치있는 구성의 묘미가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연애소설의 측면에서는. 글쎄. 얼핏 생각하면 그 소설에서 제일 눈에 띄는 아포리즘은 이건가 싶다.

인간에겐, 이 세상에는 절대란 건 없다고. 그걸 알게 되면 비로소 어른이라고 해도 좋다고.

이 사람이라면 평생 사랑할 수 있겠다는 느낌, 헤어진 뒤에도 그 이상으로 좋아하게 될 상대는 앞으로 평생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 그런 건 모두 어린 시절의 무지한 신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절대'란 게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연애가 바로 일종의 통과의례, 이니시에이션(Initiation) 러브라고.


그런 거구나, 하면서 제길, 하면서 끄덕끄덕 하려다가 왠지 반감이 인다. 내가 품은, 그녀가 품은 애정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당사자들도 알지 못하고 확신도 없는 게 '어른들의 사랑'이라고? 사람을 사랑하면서 믿을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지금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는 얄팍하고 찰나같은 진실이란 걸 부정하는 건 아니다. 고작 그정도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절대'라느니, '(성숙한) 어른의 사랑'이라느니 상대적으로 (미성숙한) '아이의 사랑'이라느니.

자존심을 다칠까 마음을 다 못주는 연약함, 상대로부터 거부당한다는 걸 견딜 수 없는 두려움, 그런 걸 왠지 다

컸다는 느낌을 강변하는 '어른의 사랑'이란 단어로 뭉개버리려는 건 아니고?


섹스 파트너를 감수하면서까지 그의 마음을 얻으려 했던 그녀, '역시 그렇게 되는구나..'라는 그녀의 한 마디.

그녀는 마치 열혈 기독교도처럼, 자신이 이미 알아버렸다고 생각한 그 황량하고 불가역한 '진실'이 남자에게도

유효할 것이라 이야기했지만..막상 그녀로 인해 황량해져버린 그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상처나 공허함을 타인에게도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그들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때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얼마나 기다려야 다시 예전처럼 신선하고

건강한 핑크빛 하트로 회복되냐고 묻는다면, 그건 모르겠다. 어차피 살아간다는 게 계속해서 상처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면...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상처투성이 마음으로 사랑을 다시 해야 한다면, 그게 '어른의 사랑'이란
 
단어의 진정한 의미인지도 모른다.



이니시에이션 러브 - 6점
이누이 구루미 지음, 서수지 옮김/북스피어

김수행 교수님의 아카데미시즘

김수행 교수님은 아직 상대평가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부터 수강생들에게 엄격한 학사관리를 한다는

평판이 높았다. 수업에서 듣는 내용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다고 생각했던 일부 사회대 학생들은 이른바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님께서 그런 것도 몰라주고 엄격한 출결관리와 냉정하고 야박한 학점을

고수하는 데에 섭섭함을 느끼기도 했었지만, 사실 '상대평가'와 '사회주의적 가치'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할 이유 따위는 찾지 못했었다. 교수님은 특히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고자 수업을 듣는 학생이라면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씀했었다.


이 책에서 교수님은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명확히 고백한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자면 자신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탐색을 하는 데서 그칠 뿐, 예컨대 '김수행노믹스' 식의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현실

정책이나 개별 사안에 대한 디테일한 평가가 가능할 만큼 공부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는 것. 지승호와

인터뷰할 때의 교수님은 때로는 시사 이슈에 대한 대중적 이해 수준에 머물거나, 혹은 솔직히 '그 부분은

공부를 안 해서 모르겠다'고 한 발 물러선다. 농업 경제학의 문제, 영국 복지정책 후퇴에 대한 해석의 문제..


그렇지만 한국 사회와 같은 황량한 지형에서 '자본론'에 기대어 한국경제를 읽어낼 만큼의 공력이 있는

경제학자가 있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김수행 교수님에게 구체적인 경제정책을 내놓으라거나,

혹은 개별 사안에 대한 입장과 논평을 요청하는 건, 일개인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선,

서울대학교에서조차, 그분의 퇴임과 함께 마르크스 경제학은 주류 계량경제학의 틈바구니에서 또다시

밀려나 버리는 상황인 거다.


자본론의 부활을 말할 때

누군가 진보 세력의 특징은 개인이나 요소가 아닌 구조와 동학을 주목하고, 반대로 보수 세력의 특징은

개인과 요소에 우선적인 책임과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동의하는 말이다. 맑스도 그랬지만

김수행 교수도 개별 사안이 아닌 구조 자체를 천착하고 있다. 케인즈도 '구성의 모순'이라며 개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전체로서의 합리적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을 했으니, 꼭 빨갱이만 구조적

모순과 시스템의 불합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아닐 거다.


실제로 주류 경제학이 'Ceteris Paribus'(다른 모든 조건이 일정하다면)이라는 비현실적 전제 하에서 완전

경쟁을 상정하는 것과 달리 정부가 시장판 자체를 유지, 존속시키는 역사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가능성을 최소한 이전에 그랬듯 지금 굴러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반성적

역할에 한정하더라도, 시장의 역사성이나 생산의 원천 및 분배에 대해 풍요로운 시사점을 충분히 던질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마르크스와 그의 경제학을 아예 도외시하고 있는게 문제다.


90년대 'IT 경제' 혹은 '지식경제'가 유행하면서 실물경제의 중요성이 약화되었다느니, 노동-자본의 구도

자체가 무화되었다느니, 혹은 비정규직 문제가 주목받으면서 '노동'을 덩어리로 보는 기존 시각과

맑시즘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느니 많은 지적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금융경제의 거품이

급속히 꺼져들어가는 세상에서 맑스와 김수행 교수가 주목하는 날것의 구조와 시스템, 실물 경제 그리고

강고한 노동-자본의 구도는 요요히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미상 열려있고 내용이 굳어지지 않은 '새로운 사회'

김수행 교수님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일으키는 종말론적인, 목적론적인 '닫힌 미래'를 항상

경계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에 '조응'한다고 했던, 그 '조응'이라는 애매한 단어에

기대어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 그러니까 경제가 발전하면 자연히 사회가 발전한다는 식의

'경제주의'도 경계하고자 했던 교수님은, 그래서 '새로운 사회'를 말한다.


그건 어떻게 올 지, 어떠한 형태가 될 지, 언제 올 지 아무도 모른다. 마르크스도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그의 단편적인 아이디어들을 여기저기 흘리고 있을 뿐, 기계적인 도식 따위 그린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는 건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교수님도 이야기하듯)

새로운 사회를 그릴 수 있는 상상력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런 면에서 책 마지막 장의 우석훈교수가

말했던 좌파 경제학의 정의가 와닿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지키는 것은 (주류)개발경제학이고, 말 못하는

사람-소외 받은 쪽이나 소수자나 약자들-을 지키는 것이 좌파경제학이라는 이야기.


얼마 전 만났던 기자 선배가 했던 이야기가 오버랩되었다. 자신이 되고 싶은 기자란 건, 항상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는 기자라고. 그렇게 지금 사회의 약자들을 지키고 그들과 함께 보고 이야기하면서

문제를 가다듬어 나가고, 또 그에 대한 반응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첩경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이미 그 의미와 내용이 가득 차 굳어버렸거나, 심지어

오염되어 버린 면이 없지 않다.


남북 경협에 대한 새로운 시각, 그러나.

개성에 출장을 다녀오면서 느꼈던 것이지만, 남북 경협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개성공단에 진출한 기업들은 남북관계가 너무 호전되면 임금이 인상되고 노동자 관리하기도 힘들거라

염려하고 있었다. (물론 이는 지금처럼 최악으로 경색되기 이전의 '배부른 고민'이었다.) 김수행 교수도
 
지금과 같은 식으로 투자해서 바로 자본주의적 이윤만을 좇는, 값싼 노동력만을 착취하는 경협은

별 의미도 없고 남북통일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물론 경협 자체만으로도 남북간 합작의 훈련이 될 수 있고, 자본주의의 이식을 위한 훌륭한 시험대가

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 반대편 시각과 그 근거에 대해서도 충분히 논의해 볼 만한 내용 아닌가.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데 필요한 훌륭한 자극이 될 수 있는 꼬투리가 될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그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여전히 웃기지도 않는 '불온도서' 운운하는 세력이 굳건하다.


덧붙임. 인터뷰의 미학.

마구잡이로 치고 빠지는 '합이 짜이지 않은' 날것의 싸움이 막장으로 가는 개싸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그럴 듯해 보이거나 심지어 아름다워 보이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액션 영화나, 토론회, 혹은

'리얼'을 표방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조차 기본적인 '합'을 짜두기 마련이다. 내가 이렇게 치면

넌 이렇게 막고, 니가 이렇게 반격하면 난 저렇게 피한다는 식의 '합' 말이다.


지승호와 김수행의 질문과 답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김빠진 문답도 아니었지만, 어느 한쪽의 기세가

등등한 위압적인 문답도 아니었다. 둘다 최선을 다해 질문하고, 최선을 다해 답하고 있다는 느낌, 

그들은 질문과 답을 함께 만들고 있었다. '합'을 미리 짜두어서라기보다는, 서로가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충실히 알고, 또 아는 것을 최대한 노이즈없게 전달할 만큼 충실히 숙성시킨 사람들이어서 그런 게다.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 - 10점
김수행 지음, 지승호 인터뷰/시대의창


'환상의 커플'에서 '서프라이즈', 그리고 '출발 비디오여행'으로 이어지는 일요일 오전의 프로그램 라인업은 내겐

늦잠에 대한 욕망을 식히는 강력한 유인이 되고는 한다.

방금도 여느 때처럼 서프라이즈를 보며 늦은 밥을 먹고 있는데, 북한에서 로켓을 발사했다는 일본 보도가 인용되며

속보가 뜨더니 여지껏 특보를 계속하고 있다. 서프라이즈 세번째 이야기가 남았는데.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인지도 모르는데.(아직까지 난 첫번째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중이다. 로봇 애인 이야기)


서프라이즈 세번째 이야기가 북한의 로켓 발사보다 중요하다는 식으로야 농담삼아 말한 거지만, 이렇게 호들갑을

떨 일인가 싶다. 그것도 대부분의 소스는 일본 측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그들이야 아소 다로 총리의 국내정치적

국면 전환을 위해 대대적인 호들갑을 떨고 있는 거고, 북-미간 관계가 일본의 입장과는 달리 급격히 호전되는

상황 자체를 못마땅해 하는 차에 요격이니 뭐니, 소란의 판을 키우고 싶었을 거다.

미국은 24시간 뉴스 채널 CNN에서 속보로 떴지만 관련된 정부의 입장은 나오지 않고 있고, 러시아나 중국은

예견된 상황이었으니만치 유별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차분한 반응을 보이고 있댄다.


북한의 말대로 로켓이 통신위성이 맞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듯 하고, 그렇다면 국제사회의 반응은

더욱 온건해질 수 밖에 없지 싶다.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했니 어쩌니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교적수사일 뿐

가장 중요한 키는 미국과 북한과의 입장 조율에 있을 거고. 북한의 로켓 발사가 거의 성공적인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렇다면 이제 뭐, 상황은 끝인 거 아닌가.

일본의 요격이나 발사 실패로 인한 일본 본토의 피해라거나 그런 것 없이, 발사 지연에 대한 온갖 억측들을

불식시키고 깔끔하게 날라갔고, 그렇다면 남은 건 북한의 무력(과학력?) 과시에 대한 주변국의 인식 변경,

그리고 이로 인해 압박을 받게 될 미국의 적극적 대응이다. 그게 전향적 접근이 될 지, 혹은 더욱 강경한 접근이

될 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당장이야 원칙적이고 강경한 이야기를 해도 결국 유화적인 태도로 나설 거 같다.


근데 이렇게까지 공중파를 낭비해야 하나? 그것도 심층적인 분석은 거의 없이 외신은 어쩌니, 외국 정부 반응은

어떠니...기실 시끄럽게 떠드는 건 일본밖에 없는데. 이번 이슈에 대해 좀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하는 보도를

하던가, 아니면 그냥 속보로 화면 밑에 둥둥둥 떠다니는 자막으로 만족하던가. 대체 왜 이렇게 호들갑스럽게

난리를 치는 건지 모르겠다. 보도를 위한 보도? 어쩜 이런 식의 감정적인 반응이 북한의 의도에 말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에 반해 '벚꽃놀이 나선 상춘객'들의 반응은 쿨하다. 왜 이렇게 야단스러운지 모르겠다는.

대부분 국민들이 체감하는 것도 그렇지 않나. 쟤네 또 뭐 쐈나..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근데 한국은, 대체 북한에 대한 종합적인 전략과 일관된 자세는 있기나 한가. 아무런 비전도, 전략도, 혹은

최소한 북한에 대한 입장조차 불분명해 보인다. 깝깝시리.


아...서프라이즈 세번째 이야기는 대체 언제 하려나.



Mad bullying disease

Apr 2nd 2009 | SEOUL
From The Economist print edition

Press freedom under attack

NORTH KOREA this week detained a South Korean man for criticising Kim Jong Il’s regime and “trying to lure a female North Korean” south. No surprise there. More strikingly, across the border, South Korean prosecutors last week arrested a producer at the country’s second-biggest television station, Munhwa Broadcasting Corporation (MBC), and four union members at a 24-hour TV news channel, YTN.

북한에서 김정일 체제를 비판하고 북측 여성을 꼬시려 했다는 이유로 남한 사람을 붙잡아놓고 있다고는

하지만, 남한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비하면 놀랄 일도 아니라는 식입니다. MBC의 PD를 체포했던 일이나

YTN의 노조원 네 명에 대한 영장을 신청한 건을 비웃고 있네요.


Lee Choon-keun, a producer at South Korea’s best known investigative television programme, PD Notebook, spent 48 hours in jail after a former agriculture minister and his deputy accused the programme of slandering them in April 2008. The programme had asked whether American beef was free from mad-cow disease. The prime minister, Han Seung-soo, says the information was misleading and “led Korea into chaos” by sparking vast street demonstrations against the government’s decision to resume imports of American beef. Arrest warrants are out for five other PD Notebook journalists. Some MBC employees are sleeping in the station’s lobby to prevent police from seizing their videotapes and notes.
 
PD수첩이 광우병(MAD COW DISEASE)에 대한 정보를 오도했고 한국을 대혼란에 빠뜨렸다는 한승수

총리의 말을 인용했는데, 이 기사의 제목은 MAD BULLYING DISEASE입니다. 그리고 이코노미스트는

PD수첩의 보도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하네요. 미국산 소가 광우병에서 안전한지에 대한 물음이라구요.

의도적인/악의적인 오역이니 선전선동이니 거짓이니 말이 많지만, 약간 한국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떨어져있는 영국잡지인지라 오히려 핵심이 명료해 보입니다.


At YTN, the leader of its union, Roh Jong-myun, and three others were arrested for obstructing the president, Gu Bon-hong, from entering his office. YTN’s union feared that Mr Gu, who was appointed to his post by the government last year, would undermine the station’s editorial independence. Nearly half the channel’s employees went on strike because of Mr Roh’s detention, though the dispute was settled this week. Amnesty International claims his arrest was part of “an increasingly concerted effort by the government to control South Korea’s media”. It says that last year the heads of four other media groups—the state-owned Korea Broadcasting System (the country’s largest television station), Korean Broadcasting Advertising Corporation, Arirang TV and Sky Life—were replaced by government supporters.

국제사면기구(암네스티)는 한국 정부의 언론통제노력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 합니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입맛대로 휘두르려는 정부의 집중된 노력이 점차 강화되고 있다고 하는 표현을 썼네요.

KBS, 한국방송광고공사, 아리랑TV, 스카이라이프까지. 네 개의 언론그룹 수장이 정부인사로

교체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The ruling Grand National Party is now debating whether to make it a crime to post inaccurate or misleading information on the internet. A blogger, Park Dae-sung, was arrested in December after being rude about the government’s economic management. He is still in jail. “Every journalist in South Korea is fearful right now,” says PD Notebook’s Mr Lee.

기자가 이 글을 쓰면서 분명 피식피식 실소를 터뜨렸을 것 같습니다. 혹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꽃피길

기다리느니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어나는 게 빠르겠다'란 옛말을 기억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미네르바는 여전히 감옥에 있다, 라고 썼습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과 브랜드밸류를 떨어뜨리는 놈들은 대체 누구인가요.

부끄럽고, 또 화가 나는 기사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두 건 다 78호 기사에 대한 글이라는. 요새 좀 열심히 읽는 중이긴 하다.


아무리 기술 발달로 페이퍼리스 작업이 가능해졌다고 해도, 뭔가 인쇄물에 대한 로망은 여전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쇄된 매체에 대해 자의반 타의반 부여하는 공신력과 권위..랄까.




며칠전 다녀온 '용산GAJA전'에 대한 포스팅이 "네이버 오픈캐스트"라는 곳에 실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게 뭘까 했었다. 오픈캐스트?


그냥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글을 쓸 뿐, 별로 IT제품에 대한 얼리어답터도 아니고, 블로그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고민도 없는..그야말로 날라리 블로거인 터라 이런 식으로 무식을 탄로내고 싶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랬다.

내 글("용산참사 후 2개월, '용산GAJA전'에 다녀왔습니다.")이 오른 곳은 네이버 오픈캐스터 구피라는 분의

<정론직필, 휴머노미스트의 시선>이라는 공간이었다. 


보니까 네다섯시간 단위로 계속해서 리스트업되고 있었고, 구피 님뿐 아니라 다른 많은 분들도 제각기의 주제로

기사나 포스팅들을 '취합'하고 있었는데, 예컨대 '네이버에서 볼수없는 뉴스'라거나 '오늘의 만평 모아보기',
 
'오늘의 사설 모아보기'같은 식으로 묶여 있었다. 아직은 베타 버전으로 운영된다지만 앞으로도 크게 방향이

바뀌진 않을 듯 하다. 소수의 '캐스터' 혹은 '데스크'에서 온라인을 부유하는 온갖 정보들을 선별해서 원하는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형태.


네이버 대문에 노출되는 기사에 대한 '편집권'을 둘러싸고 말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일단 일간지별로

노출되도록 변경하고 알아서 보고 싶은 일간지를 선택해서 보라고는 했지만, 역시 누군가 입맛에 맞는

기사들을 한번 걸러주기를 바라는 수요는 여전하니 그걸 노린 게 아닐까.


음...잘 될지는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좀 걸러낸 정보들이란 건, 이를테면 일간지와 주간지 정도의 차이는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양으로 승부할 게 아니라 질적으로 좀 검증된 내용들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초반이라 그런지 대부분의 캐스터들이 양으로 승부하려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좀 높은 퀄리티의 수준높은 기사, 혹은 컨텐츠를 가려보고 싶은 게

'데스크권'을 이양하는 독자들의 수요일 텐데..또다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양적 팽창으로 이어져선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기우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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