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좀 하자. 한 번만 더 보고.



난 김혜자가 싫었다. 그녀의 가늘고 여리여리한 목소리, 때로는 신경질적일 만큼 하이톤의 그 목소리도 싫었고,

그 목소리가 이와 혀를 걸러 발출될 때의 발음과 말투도, 그녀의 얇은 입술도 싫었다. 쉽게 근심그늘이 고이는

웅덩이같은 그녀의 양미간, 짙은 주름도 보기 싫었고 무언가 늘 고민과 걱정을 안고 있는 듯한 눈매와 그

축축한 눈동자도 모두, 맘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연기는 언제나 '엄마'였다. '국민 엄마'라는 칭호로 소개되곤 하던 그녀에게선, 정말이지

여자가 아닌 엄마의 표시만이 가득했다. 잔소리와 더러는 짜증을 예비하기 위한 목소리, 그러면서도 숨길

수 없는 자식 걱정에 굵게 패인 주름, 자식놈이 커나갈수록 쉬이 축축해지는 눈동자까지. 그런 '엄마'만

있는 게 아니라지만, 그녀는 그런 특징들을 꽉 쥐고 '엄마' 역할의 전형을 보여줬다.


그런 엄마, 전원일기 속 엄마, 드라마 속 엄마에 더해 봉준호의 '마더'는 그녀에게서 살짝 불온하고 불안한

엄마 모습을 캐내고자 한다. 섹스가 없는 상태에서의 엄마, 섹스를 원하지만 충족할 수 없는 엄마의 모습들.

간이 옷장 안에 숨어 젊은 남녀의 육덕진 섹스를 훔쳐보는 엄마, 고등학생의 부탁으로 생리대를 고르고

계산하며 눈치보는 엄마, 휴대폰 속 벌거벗은 남자-섹스 구매자로서-들 사진을 한장씩 넘겨보는 엄마,

심지어 자신을 막 대하는 아들 친구에 묘한 긴장감을 느끼는 엄마. (어쩌면 이미 그녀와 아들 친구놈은

한번쯤 잤던 사이라고 힌트를 주는 것 같기도 하다.)


더구나 그녀, 엄마는 조금은 지쳐 있을지도 모른다. 남자라곤 아들 밖에 없는 집에서 둘이 산 지 오래다.

다 큰 아들은 정신이 온전치 못해 팬티만 입은 채 한 이불을 덮고 엄마 가슴을 조물딱대며 잠들곤 하니,

'엄마와 잔다'는 표현이 계속해서 중의적으로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닌 거다. 아직은, 아마 앞으로도,

상상할 법한 '패륜'의 힌트가 예기되지는 않았으니 엄마는 만족되지 못한 채 지치거나 욕구불만이거나.

그렇지 않을까. 아마도 그래서 노상에 방뇨하는 아들의 그곳에 유심스레 눈길이 간 거다.


남자의 욕구야 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 그녀의 다 큰 아들도 마찬가지다. 정신은 빠졌어도 육체는 건전하니,
 
쌓이기만 하는 욕구는 그를 '발정난 개'로 만들어 버린다. 굳이 '오이디푸스 신드롬'이니 따위 엄마에

대한 근원적 욕구를 운운할 생각은 없지만, 그를 사랑해주고 보듬어주는 여자는 그녀 뿐이다. 비록

그녀가 다섯살즈음 농약을 먹였을지언정, 그녀는 마르지 않고 넘칠듯한 사랑으로 그를 무조건 믿고

보호하며 지지한다는 걸 안다. 그에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대안은, 엄마다.


아들에게 '바보'라는 표현이 그 누적된 욕구불만을 파열시키는 방아쇠 역할을 한다면, 엄마에겐 그

아들의 존재-하나뿐인 피붙이이자 '남자'로서-가 위기에 처할 때 방아쇠가 작동한다. 천지사방을

뛰어다니며 아들의 구명을 위해 애쓴다. 그치만 누구를 위한 구명일까. 바보천치 아들은, 콩밥도

맛있다며 교도소 안이 편하다는 아들은 사실 창살 안과 밖의 구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혹, 엄마 자신을 위한 구명 활동 아닐까. 그녀가 살기 위한, 그녀의 욕구불만을 해소키 위한. 
 
그러고 보면 엄마에게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남자는, 아들이었다.


그렇게 엄마와 아들은 더욱 서로에 의지하고, 지쳐가며, 또 헌신한다. 다른 방법이나 대안이 없기도 하다.

특히 엄마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에 대한 보호 본능이라 이름붙이던 모성애라 이름붙이던, 그녀는 아들로

인해 욕구불만이 강화되고 아들로 인해 욕구불만을 해소한다. 달리 기댈 곳이 없었던 그들의 애정이 쏟아져

나갈 유일한 통로, 서로를 향한 무조건적 애정이 콸콸 쏟아지는 순간, 그녀는 말랐던 댐이 터지듯 온통

뿜어나오는 피분수 속에 두 손을 담궜다. 어느 순간 구르기 시작한 파국적인 결말을 향해 치달으면서도

그 둘의 징글징글하고도 섬뜩하기까지 한 애정, 특히 엄마 혜자의 아들 도준에 대한 사랑은 더욱 뚜렷이

선연해지기만 한다.


"엄마는 원래 그런 존재야, 모성애란 그런 거지" 등등의 따뜻하지만 통속적인 이야기로 끝낼 영화는 아닌 거

같다. 그녀의 사랑은 알게모르게 현실적인 이해타산이 맞물려 있고, 다른 통로의 유무에 따라 그 강렬함이

결정되며, 그 기저엔 엄마이기 이전 사그라드는 여성으로서의 욕구불만이 마그마처럼 꿈틀대고 있다는. 

무조건 신성하고 순결한, 지고한 데다가 여성이 가진 본성과도 같은 덕목으로 찬양받는 '모성애'가 실은

그런 육체적인 욕망과 얼기설기 엮여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던 건 아닐까. 천상의 모성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삼성을 생각한다 - 10점
김용철 지음/사회평론
이 책은, 이건희와 (아마도) 이재용을 위해 온갖 범법행위를 함께 했던 한 '범죄자'의 최후고백이다. 자신이

이건희를 위해 검찰에, 그리고 삼성 계열사에 범죄를 저질렀다며 벌을 달게 받겠다, 고 양심선언을 했던

한 사람을 그저 미친 사람, 성격 더러운 사람, 심지어는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세상에 크게 외치려는 책이다.

"결국 '정사'에는 나에 대한 비난만 남게 됐다. '삼성 비리는 이제 '야사'에만 기록되겠구나' 싶었다."라는

자괴감, 혹은 (중립적인 단어로는) 위기감이랄까. 책을 읽어내리다 보면 정말 본인이 하고 싶던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활자화하려는 듯한 기분이 느껴진다. 범죄와 관련된 무수한 실명이 등장하고, 자신의 의도와

입장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추가되며, 뭐랄까, 김용철의 삶 중 삼성과 관련된 부분은 남김없이 들어간 것 같다.


그의 양심선언은 잠깐이나마, 통제되지 않은 힘을 휘두르던 우리나라 일등 '경제권력'이 제 입맛에 맞게 요리한

시장경제 판을 정돈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불렀었다. 상식적으로, 지시를 받고 범죄를 직접 저지른

사람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내용과 대상에 대해 구체적인 자백을 한 거였으니까. 굳이 "뇌물 수수 범죄에서

'뇌물을 준 사람의 자백'은 직접 증거"라는 변호사의 권위를 빌은 말이 아니어도 말이다. 그런데 그는, 김용철

전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은 재판에서 졌다.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 조성과 국가 권력 매수를 위한 조직적인

불법 로비'가 죄가 안 되서가 아니다. 법이 불비해서도, 법이 집행된 전례가 없어서도 아니다.

(*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에 따르면 연간 세금 포탈 규모가 10억 원이 넘으면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게 된다. 검찰과 법원의 거듭된 봐주기 편법에도 불구하고 이건희는 무려 465억원의 세금 포탈 혐의가
인정되었고, 특검은 삼성 비자금 중 약 4조 5000억을 발견해서 이건희에 돌려줬다.)


상대가 삼성이어서 그랬다, 라고 이야기해도 괜찮지 않을까. 여러 재벌기업 중 하나였다가 김대중과 노무현을

지나며 압도적인 대표기업으로 변신한 채 국가 아젠다를 결정하고, '참여정부'라는 이름도 지어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기업이니 말이다. 삼성을 위한 정책을 펴던 공직자가 삼성 사장으로, 삼성을 위한 판결을

내리던 법관이 삼성 변호사로 가는 그런 세상이란 건, 사실 김용철 변호사가 책에서 이야기하기 전부터 익히
 
들어서 살짝 진부하기까지 한 거다. 사람들도 그럴 거다. 그래서, 금세 포인트는 옮겨간다. "왜 삼성만 갖고

야단인데? 언제 우리사회가 법대로 갔어? 일등에 대한 못난 질투가 넘 심하잖아? 삼성이 망하길 바래?"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도, 나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포인트는 이거다. 삼성이 싫은 게 아니다.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계속 성장하며,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다만 잊지 말기를 바라건대, 한국의 이익과

삼성의 이익, 그리고 이건희의 이익은 대개 일치하지 않으며, 지금은 이건희의 이익을 앞세워 삼성 계열사

임직원과 주주, 국가 경제까지 좀먹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이건희 개인과 일족의 이익을 '보위하기 위해'

국가 조직과 법질서를 농단하고 있으니, 앞엣말은 이렇게 수정되어야 맞겠다. 재판에 진 이유, 상대가 합당한

죄과를 받지 않은 이유는, 상대가 다름아닌 삼성을 조작하며 제뱃속을 채우는 '이건희 일족'이어서 그랬다고.


이건희가 삼성 주식의 몇 프로를 갖고 전체를 휘두르고 있는지, 이재용으로의 승계를 위해 주주 이익을 얼마나

훼손하고 배임행위를 저질렀는지, 금산분리법 폐지나 복수노조 설립금지를 위한 로비 자금을 위해 어떤 불법을

저질렀는지, 검찰과 법원, 국세청과 언론 따위 사회곳곳에 검은 돈을 얼마나 뿌려댔는지 등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고 쉽게 알아 볼 수 있음에도, 아무도 책임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게 현실이다. 그런 '괴물'이 탄생하게 된

데에는 노무현과 김대중의 역할이 컸다. 그들을 두고 좌빨이니 좌익이니 말이 많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지극히

친기업적인(혹은 친삼성적인) 정책으로 일관했던 거다. 삼성과 국가 사이에 놓인 부등호의 입은 그들의 십년새

확연히 삼성 쪽으로 벌어져 버린 것 같다.


사실 삼성 이야기를 하다보면 굉장한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뻔한 이야기를 대체 얼마동안 해야 제대로 '법과

원칙'이 설 지, 법은 정말 만명에게만 평등한 건지 따위 염세적인 생각이 드는 것이 하나의 이유지만, 반대로

어디까지를 '상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또 어디서부터 '원칙'을 들이대야 세상 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

라느니 따위의 비아냥을 피할 수 있을지 말이다. 이 책 역시, 어쩌면 "범죄자를 옹호해야 한다는 게 맘에 들지

않아 변호사가 싫다"고 할 만큼 까칠하고 원칙적인 한 성마르고 결벽증 초기단계쯤의 조직부적응자가 자기

성미대로 써갈긴 그런 책이란 비난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내가 몇몇 구절, 그의 진심에 가닿았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어서 소개해본다.


"다른 재벌이 삼성보다 더 깨끗한지 아닌지에 대해 나는 잘 모른다. 나는 단지 삼성 비리를 목격했으므로 이를 고발했을 뿐이다."

"한국 사회의 부패는 뿌리가 깊고 넓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이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사법기관이 다른 영역보다 유난히 더 썩은 게 아님에도, 내가 사법기관의 부패를 유독 강하게 비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수사와 사법 처리를 담당하는 곳이 썩어버리면, 다른 영역에서 일어난 자정 노력이 허사가 될 수 있다."

"권력층이 부패한 사회는 힘센 자가 아무런 견제없이 횡포를 부리는 무법천지일 뿐, 우파의 이상도 좌파의 이상도 될 수 없다...그래서 나는 모든 시민이 부패에 맞서는 장면을 꿈꾼다."








<경향신문>에 기명 칼럼을 연재 중인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과)가 <프레시안>에 기고를 보냈다. 김 교수는 17일 <경향신문>에 실릴 예정이던 자신의 칼럼이 게재를 거부당한 일을 소개하면서, 이 일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모순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그의 글을 전문 게재한다. <편집자>


안녕하세요? 저는 전남대 철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김상봉입니다. 저는 지난해 말부터 <경향신문>에 3주에 한 번씩 수요일마다 기명 칼럼을 써왔습니다. 오늘 제 글이 실릴 차례인데 불행하게도 글이 실리지 않았습니다.

<경향신문>에서는 제가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를 소개하면서 삼성 및 이건희 전 회장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신문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 된다면서 양해를 구했습니다. 저는 물론 거절했으나, 신문사는 끝내 저의 칼럼 지면을 다른 분의 글로 채웠습니다.

저는 이 일에 대해 <경향신문>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문을 닫을 때 닫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언론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재 이 땅의 진보 언론들이 처해 있는 어려움의 원인이 신문사 내부의 잘못이 아니라 언론 소비자들의 무지와 무관심에 기인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일을 두고 <경향신문>을 비난하기보다는 도리어 진정한 독립 언론의 길을 걷도록 더 열심히 돕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 <경향신문>이 삼성 관련 기고를 게재 거부한 것은 지금 한국 사회의 모순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프레시안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번 사건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순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서 결코 묵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 수립 이후 우리는 독재 정부에 맞서 지속적으로 투쟁해왔습니다. 수십 년 동안 시민을 폭력적으로 억압한 주체는 국가 권력이었습니다. 하지만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결실로 국가 권력에 대한 시민적 권리는 큰 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재 권력이 물러간 자리를 지금은 자본 권력이 대신하여 또 다른 방식으로 시민적 자유와 주체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최근 김용철 변호사의 책이 일간지에 광고할 수 있는 지면을 얻지 못하고, 외부 칼럼으로 기고한 저의 원고가 신문사 자체 검열에서 끝내 게재를 거부당한 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삼성이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권력이 되었다는 것을 웅변해줍니다.

1970년대 유신헌법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개정이나 폐지를 청원하는 것도, 더 나아가 그런 움직임을 보도하는 것조차 금지했던 긴급조치 9호 시절처럼, 이제 우리 사회에서 삼성과 이건희를 비판하는 것은 이른바 진보 언론이라 불리는 신문에서조차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본이라는 새로운 독재자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회의 정의로운 기초를 뒤흔드는 시대에 누구든 어떤 식으로든 애써 역사의 종을 울려야 할 것입니다. 종이 신문에서 실리지 못한 저의 글을 혹시 실어주실 수 있는지 정중히 여쭈면서 이번 일이 이 땅에서 삼성의 독재를 끝내는 대장정의 첫걸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경향신문> 2월 17일 '김상봉 칼럼'에 실리지 못한 원고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변호사의 새 책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 나면 우리는 삼성이란 재벌이 어느덧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사회 암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책에는 삼성에 대한 심각한 이야기들뿐만 아니라 코미디의 소재가 될 만한 이야기들도 꽤 많다. 삼성의 이건희 전 회장은 일단 회의가 시작되면 아무리 길어져도 화장실을 가는 법이 없다 한다. 놀랍다면 놀라운 일인데 끔찍한 일은 따로 있다. 주인이 화장실을 가지 않으니 회의에 참석한 머슴들도 화장실을 못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녁에 회의가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물 비슷하게 생긴 것은 아예 입에 대지 않는다 한다.

이 책에 엽기적인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감동을 주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건희는 유명 예술인들을 집에 불러 연주를 청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그가 부르면 대중가수든 고전음악을 하는 사람이든 달려오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한다. 그런데 유독 나훈아 씨만은 그렇게 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는 대중가수이니 오직 대중들 앞에서만 노래한다는 것이 이 존경스런 가수의 신념이라 한다.

이 재미있는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에 비하면 대다수 언론의 침묵은 기이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하다. 출판사에서는 몇몇 신문에 광고를 내려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돈 주고 광고 내겠다는데도 선뜻 받아주는 신문사가 없어 지금까지 이 책은 입소문으로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일종의 금지도서 아닌 금지도서가 된 셈이다.

7~80년대에는 금지도서가 많았다. 체제에 비판적인 책들은 어지간하면 금서로 분류되어 책방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그렇게 밟고 눌러도 땅거죽을 뚫고 솟아오르는 겨울 보리싹처럼 많은 금서들이 수십만 권씩 팔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와 지금의 차이 또한 분명하다. 그 시절에는 국가가 비판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금서 같은 것을 지정하는 억압의 주체였다면, 지금은 삼성이 우리의 입과 귀를 막는 그런 권력이 된 것이다.

그렇게 말과 생각을 억압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의 말기적 징후이다. 삼성이 한국 최고의 경제 권력으로 군림하면서 뇌물로 국가기구를 매수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광고로 언론을 길들이고 나면, 이제 그 절대 권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내부로는 노동조합이 생기는 것을 막고 외부로는 삼성을 비판하는 개인의 입과 귀를 틀어막는 일만 남는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이 증언하듯이 삼성은 이미 노무현 정부 시절에 국가 기구와 주요 언론을 장악하는 과제를 완료했다. 삼성의 남은 과제는 김용철 씨처럼 어디서 출현할지 알 수 없는 비판자들이 나타나지 않게 막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누구도 삼성을 비판하지 못하도록 유신 독재 시절처럼 모든 개개인의 말과 생각을 전면적으로 검열하고 통제해야 한다.

마치 미국에서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공공연히 비판하는 것이 금기시되듯, 한국에서 삼성과 이건희를 비판하는 것이 대중들 사이에서 금기시되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삼성이 이건희의 왕국에서 그 아들 이재용의 왕국으로 순조롭게 이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포석인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이 금서 아닌 금서가 된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알고 보면 삼성그룹 전체에서 이건희가 소유한 지분은 0.57퍼센트에 불과하다는데, 그는 자기 머슴들의 배설을 억압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우리 모두의 입과 귀를 가리려 한다. 그러면서 이 짝퉁 루이16세 폐하께서는 황송하옵게도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한다'는 교시까지 내리셨다 한다.

선거날이 가까워올수록 사람들은 이명박 심판에 열을 올리겠지만, 그 일은 박근혜 전 대표가 누구보다 차분히 잘 해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눈앞의 허상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자본에 매수되지 않는 진보정당을 키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삼성을 해체하고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한국식 자본주의를 타파할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삼성제품 불매는 당연한 일이지만,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생각하기를 권한다.
 

/김상봉 전남대학교 교수



*                                       *                                       *

'삼성을 생각하다'를 읽고 있다. 광고도 안 되고, 대형서점에서 구석진 자리로 쫓겨나고 있단 얘기에 회사

근처 대형서점에서도 과연 그런가 싶어 점심시간을 쪼개 가본 참에, 생각보다 전면에 노출되어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두툼하지만 술술 넘어가는 페이지를 몇장 읽다가 바로 사서 나와버렸다. 조만간 리뷰~*



몰랐는데 '카모메 식당'과 감독이 같다. 모타이 마사코라는 주연 배우도 세번째 여자로 등장했었다. 알아채기

전에도 왠지 두 영화가 느낌이 같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조용한 이야기일 거라고.

사실은 그런 첫인상과 감독과 배우 한 명 빼고는 많이 달랐다. 가끔 어색하다 싶을 정도로 담백하거나 심지어

능청스럽다 싶도록 느그지게 빼무는 카메라의 시선은 닮았지만, 느낌은 영 달랐다.


전통과 인습, 혹은 전통과 전설. 그 애매모호하고 불분명한 '가치'를 두고 벌이는 싸움을 이렇게 유쾌하게,

또 깊이있게 표현한 영화는 잘 못 봤던 거 같다. 금테둘린 채 무겁게 먼지 속에 가라앉은 '전통'의 이미지가

보기만 해도 앙증맞은 '바가지머리'로 치환되어 버린 순간, 파리의 최신유행 빠숑(fashion)과 촌티 사이를

위태하게 넘나드는 그 스타일을 경계로 꽤나 근본적인 이야기가 작은 마을 속에 꼭 맞게 들어앉았다.


저 아이들은 나중에 사회의 동냥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바가지 머리' 마을로 들어온 '찰랑찰랑 갈색머리'

외부인을 배척하거나 질시하는 일변도가 아니라, 내면에 숨어있던 질투와 부러움을 성찰하고 솔직히

소리내어 고백할 줄 안다. 외부인을 맞아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기적인' 성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친구가 되고 덩어리로 뭉쳐든다. 그렇게 열린 채로, 나이많은 사람부터 무서운 엄마까지 모든 사람들이

'전통'이라며 예스라고 할 때 쉼없이 물음표를 매달고는 급기야 전통에 반대하며 가출도 감행하고 시위도

하는 거다. 커서 멋진 노를 외치는 멋진 데모꾼이 될 거다.


비록 살색그림 가득한 빨간 책에 열광하고, 슬슬 철봉에 거기도 문대는 맛도 알아버린 장난꾸러기 녀석들이긴

하지만, 만약 '어른이란 타인을 배려해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꼬맹이 아버지의 기를 쓰고 멋져보이려는 말이

맞다면 녀석들은 이미 어른인지도 모른다. 마을의 룰, 규칙, 전통보다 먼저 새로 들어온 사람을 생각하고,

그런 '전통'이 깨져나갈 때 어쩔 수 없이 아프게 될 사람을 또다시 먼저 생각하는 녀석들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바가지머리를 유지하는 건 누군가에게 싫은 일이 되니까 반대지만 그렇다고 바가지머리를 없애는

건 또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니까...어째야 할지 모르겠다며 우는 거다.


그 아이들과 미용실 아주머니의 화기애애하고 다정한 분위기는 수미상관, 그렇지만 아이들의 머리모양은

바뀌었다. 바리깡으로 밀리고 나서는 아직 형태를 잡지 못했다. 다시 바가지 머리로 길들여지지는 않을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착하게도, 강한 척 하지 않고 괜찮은 척 하지 않고 울어버렸댔다. 무언가를

바꾸고 변화시킨다는 건 그런 아픔을 모두에게 남긴다는 걸 고백함에 다름아니었다. 아주머니 역시 어른이니까

그 어른스러운 아이들에게 우악스럽고 일방적인 아픔을 전가하진 않을 거다. 어른이니까 조금은 더 양보하고

참아주면 좋겠다.


바가지 머리, 그런 거 하나를 바꾸는데도 이렇게 다치고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다. 깔끔하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갈리지도 않는다. 어쩌면 모든 건 변하며 사람은 늙으니까, 실은 모두가 피해자인지도 모르겠다. 어른인 척은

아니어도 최소한 나잇값은 해가면서, 상대가 짊어지고 있는 아픔, 짊어지게 될 아픔은 헤아려 볼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생떼 피워가며 빨갱이니 뭐니 난동피우는 늙은이들, '反기성세대'라며 갈아엎자느니

죽이자느니 증오의 언어를 뱉는 젊은이들, 둘다 촌티 풀풀 나는 바가지 머리다.



어디나 사람사는 곳은 똑같다지만, 핀란드는 다르다. 열심히 바닥을 훑으며 줏었던 버섯들을 어느새 흘리고

올 만큼 사람을 홀리는 숲이 있어서라고는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소박한 식당에 모여앉아 밥을 챙겨먹고

커피를 마시는 그네들의 손놀림, 몸가짐, 온몸에서 풍기는 분위기,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여유로움'과

'아늑함'이라는 단어를 깊이깊이 각인시킨다. 낯선 타지로 여행을 나선 사람의 눈으로 보아서 그런 걸까.


'성공'이란 자기 억압의 결과물이라 했던가. 그냥 여기서라면 살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 눌러 앉을 수도,

지도를 펼치고 눈감고는 아무데라도 찍어서 떠날 수도, 여행가방의 분실을 핑계삼아 아무 기약도 계획도 없이

머무를 수도 있는 건데. 그 곳에는 '하기 싫은 건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는 세 여자가 있었고, 그녀들은

가게 분위기를 만들고 또 그대로 젖어든다. 정정해야겠다. 핀란드라 다른 게 아니라 그녀들이 다른 거다.


핀란드가 아니어도, 그녀들이라면 어디서든 숲을 살갑게 헝클어뜨리는 바람을 불러일으킬 거 같다. 어디서든

빵을 굽고 주먹밥을 쥐며 손님들을 다정하게 불러모을 거 같다. 그런 가게가 근처에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마실 커피에 마법의 주문을 속삭여주는 주인이 있고, 소박한 가게의 인테리어에 맞는 앞치마를

깔끔하고 단정하게 걸치고 있는 점원이 있고. 그런 가게가 있다면 잠시 핀란드로, 어디로던 여행을 떠난

기분으로 앉아있을 수 있을 거 같다.


물론 그녀들도 언제나 그렇게 머물러 있지는 않을 터다. 완벽하다 싶은 조합은 하염없이 멈춰있을 수는 없고,

누군가가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아쉬워 하며 빈자리를 쓸쓸해 할 거다. 몸이 떠나지 않더라도 마음이 떠나

더이상 이 잔잔하고 고요한 '여행'의 동반자이기를 부정하거나, 시덥잖은 농담에 푸짐하게 웃어줄 수도

없을지도 모른다. 데모, 그렇지만, 세상의 끝날에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 모아놓고 좋은 재료를 아낌없이

써서 만든 맛난 것들로 파티할 때 다시 모이리라는 기대만 있다면야. 결국은 다시 모으고 모일 수 있으리란

기대만 있다면야 그야말로 다.이.조.브.

참 니가 고생이 많다. 입으로만 친구찾는 녀석들에 낚여서 정선에 훅 떨궈져서는, 잘못 찾아간 펜션에서

박대당하고 신종 꽃뱀에 물려 바지까지 털리고, 과잉친절을 베풀고는 바지를 벗겨내려는 아저씨를 만나는가

하면 기껏 만난 친구 녀석은 전 여친과 잤다는 고백이라니. (비록 오해가 풀려 전 여친이 아니라 여동생이라는

'충격적 반전'이 있지만, 그닥 고백의 강도가 떨어지지는 않는 거다.)


실은 이 녀석, 그 모든 '비극적인' 상황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정선에 놀러가자는 친구들 꼬드김에도,

경포대에 가서 바다라도 보라는 친구 권유에도 항상 반문하는 거다. 거기에 뭐가 있는데? 거기 가면 뭐하지?

내가 바뀌지 않았는데 내가 놓인 곳이 변한다 해서 현실이 변할리 없다는 냉철한 판단이요 괜한 돈 낭비하며

멀리까지 나가봐야 돌아오면 똑같다는 실리적인-냉소적인-계산이 이미 끝난 건지도 모를 일이다.


짧막하게 줄여 말하자면 거기엔 술이 있었고, 거기 가서는 술을 마실 일만 있었다. 그 고생들, 무려 오박 육일에

이르는 대장정에는 늘 술이 있었다. 정선에 도착해 처음 들어선 해장국집에도, 티비와 함께 하던 허름한 펜션

방에도, 경포대의 횟집과 어딘가의 여관방에서도. 술은 사람들과 처음 얽히는 단초가 되기도 했고, 혹은 이미

설켜있는 관계를 해소하는 매개가 되기도 했다.


사실 까칠하게 보자면 꼭 술이 있어야 사람들과 말을 트고 관계를 쌓아나가느냐, 형님아우하며 부어라 마셔라

해야만 그렇게 친밀감이 쌓이고 신뢰가 쌓이냐, 등등 눈살을 찌푸리며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녀석이

근 일주일 동안 주종 가리지 않고 마셔댄 결과 몸도 축나고 나중엔 술잔도 기피하는 '교육적'인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제대로 된 음주문화를 선도하려는 의도 따위도 없을 거고 말이다.


다만 그냥 오감에 기대어 말하자면, 영화를 보면서 여행이 땡기고 술이 땡기고 또 새로운 인연이 땡겼다.

주인공 혁진이 드디어 서울로 돌아가려는 찰나, 벤치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걸어오는 설레는 가능성의 그녀.

그녀와 그의 얼굴이 오버랩되는 순간 그들이 강릉으로 함께 떠나 술을 마시는 그림이 떠올라 버렸다. 다소

들뜨고 경계심이 풀린 그들, 여행 중인 그들, 음주 중인 그들, 그리고 새로운 인연 앞에 설레어하는 그들이다.


왠지 여행과 술과 인연을 굉장히 설득력있고 강력한 끈으로 칭칭 동여매어두는 삼위일체의 신비. 꼭 술이

아니어도 된다지만 역시나 술이란 '황홀한 마취와 각성의 액체', 상대와 자신의 마음/몸을 무장해제시키고

피가 들끓게 만드는 그건..곧 여행, 그리고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감과 통하는 거다. 혹 그가 지금 눈앞의

그녀와 함께 떠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 어디메쯤, 서울로 돌아와 다시 어디론가 흐르는

그 골목길 어귀 어디메쯤에서라도 인연은, 그리고 술집은 항상 기다리고 있으니까.



* 다만 '숙취'는 조심할 것. 혼자 떠난 여행에서 김빠진 기대감만 발로 툭툭 차며 돌아오는 일이란 건

부지기수인 데다가, 더러는 '변태'도 만나 단돈 육천원에 몸값을 흥정해야 하는 굉장히 유니크하지만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은 경험도 쌓이기 마련이니.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마음자리 곁에서 멀리 떠나있는 가족, 밥벌이용 밥통 이외엔 공유하지 않는 직장 동료들만 있다면 더더욱.


한규(송강호)가 그렇다.

그에게는 '빨갱이 사냥'하는 국정원 대공부서 일이나 '동남아 신부 사냥'하는 흥신소 일이나 별반 '밥통' 이외의

의미는 담기지 않았다. '국민들을 발뻗고 자게 한다느니' 따위의 말이야, '가정의 행복을 되찾아준다'는 명분과

똑같이 속편한 자기암시거나 위무일 뿐 그저 그는 딸내미 집 한 채 사줄 돈만 모을 수 있으면 족하다.


그런 한규라지만, 울리지도 않은 전화에 대고 살갑게 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다. 그는 결국, 외롭다.


지원(강동원) 역시 마찬가지다.

국정원에서 정리해고당한 한규처럼, 지원 역시 작전 실패로 배신의 낙인을 찍힌 채 '조국'으로부터 내쳐진다.

사실 '장군님'에 대한 그의 사상과 정조가 얼마나 투철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를 움직이던 힘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국에 돌아가겠다는 일념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내와 딸이 있는 곳, 조국.


멀리 떨어진 가족,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6년여 시간을 기다렸지만 참 쉽지 않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란 때론, 의심스럽고 위험해보이기만 하는 낯선 남자보다 못해 보일 때도 있는 거다.


그래서 그들은 기대어 선다. 사람 둘이 서로 기대어 선 사람人의 형상에 걸맞도록, 그렇게 외로움을 삭인다.

가족으로부터, 조직으로부터, 남과 북 두 강력한 국가로부터 내쳐졌거나 강제적으로 떨어져나간 채

외롭던 그들이다. (국가 자체가 거대한 병영인 북한에서 떨어져 나간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국정원이라는

국가 핵심조직에서 튕겨나간 한규가 서울이 아닌 지방을 전전하며 '외국인'신부들을 잡는다는 건 의미심장한

대목이 아닐까.)


쉽지 않았다. 한 명은 명색이 전직 국정원 직원-게다가 '간첩신고'의 의무와 상금 수령의 권리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인 데다가, 다른 한 명은 최고도의 살상기술을 익혔을 남파 간첩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내면화되어 있을

반공회로와 반자본주의 적개심과 공포심은 어찌 다독거린다 하더라도, 상황과 조직이 내버려두지 않는다.

남한은 북한의 핵을 부르고, 북한은 핵으로 으름장을 놓고, 폐쇄 회로 속에서 꼬리를 무는 남북, 북남 두 국가의

대치 상황과 함께 '맥'장군님과 '김'장군님을 추앙하는 사람들의 득달같은 기세는 언제든 파국을 부를 수 있다.

그들의 '의리'는 통일보다 어렵다.


그렇지만 외로움이 해냈다. 인간이 외롭단 건, 때로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나보다. 빨갱이를 잡고

외국인신부에 수갑채우던 그가 '인간적으로' 바뀌었고, 웃음조차 사치인 양 냉막하고 까칠하던 그가 어느새

뜨거워졌다. 그런 그들의 관계가 굉장히 멋진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마침 두 사람 다 외롭지 않았다면 시작조차

되지 못했을 그런 드라마, 영화가 마치고 나니 가슴이 따뜻해졌다. 



p.s. 굉장한 스포일러 하나, 이 영화는 해피 엔딩이다. 이 척박한 세상에 그들 둘만이라도 해피해질 수 있다니,

가슴이 더 훈훈해졌던 이유 중 하나. 둘 중 하나라도 죽었으면 시니컬함이 더욱 심해졌을지도.


p.s.2. 그런 의미의 애국심이면 그래도 참아주고 인정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지원이 그의 나라,

북한에 쏟는 헌신과 애정이 그렇듯,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게 각별한 사람들이 있는 땅이어서 사랑하고 아끼는

거라면 좋겠다는 생각. 그건 다른 곳과의 경쟁심이나 우월감을 수반하지 않는 '나라 사랑'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까페에서든 어디서든, 종종 멍하니 상념에 젖을 때 어느 틈엔가 손끝에서 종이나 휴지가 만지작만지작, 뭔가를

알아서 만들고 있을 때가 있다. 대개 그건 유치한 종이비행기의 형태를 띄기 일쑤인데 그건 가장 간단한 수준의

손장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딱히 다른 것을 만들 줄 아는 게 없어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종이배조차

어느순간 만드는 법을 잊어버려서, 몇 번 만들려다가 끝내 종이배 대신 종이모자만 만들어지고 말았던 아픈

경험이 있다는.


그래서, 얼마전 타임지를 보다가 "올해 최고의 발명품 50선"이라는 섹션에서 재미있는 걸 보고 당장 따라해

보았댔다. 무려 45위에 랭크된 "Sky King"이라는 종이비행기 만드는 법이다. 고작 종이비행기 만드는 법이

인공눈알이니 팬없는 선풍기니 종이박스처럼 접히는 스피커니 따위의 그럴듯한 발명품들과 함께 50선에

들었냐 하면 이게 세계에서 가장 오래 날 수 있는 종이비행기를 만드는 법이기 때문이란다. 일본항공협회의

사장이 이 비행기로 세운 세계 기록은 무려 27.6초, 종전 기록을 0.3초 앞당겼다고 한다.

타임지를 보다가 바로 혹해 버려서 한장을 찍 뜯어내서 따라하기 시작했다. 물론 '종이비행기'니만치 따로

칼이나 가위, 풀 따위는 필요치 않다. 그냥 종이 한장이면 끝.

흔하게 만드는 종이비행기 만드는 법과 어느 정도까지는 똑같다.

여기까지 똑같다.

그담부터 살짝 변형되는 "Sky King" 제작법.

말로는 설명이 힘드니 그림으로 보시길.

여기가 살짝 힘들지만, 그래도 나도 그림 보면서 금방 따라할 수 있었으니 별로 어렵진 않은 거다.

이륙 직전, 날개까지 꽉 접어 세운 상태의 Sky King.

짠~* 완성이다. 이 종이비행기의 이름이 무려 "Sky King", 하늘의 왕이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은 게, 직접

만들어서 날려보았더니 확실히 잘 난다. 모양도 꽤나 쌔끈하지만 무게 중심이 확실히 앞쪽에 쏠려서 공기를

가르며 나가는 느낌이다.

사진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굳이 첨부해넣는 오리지널 설명서. 이제 굳이 아래와 같은 기본적인 형태의

비행기만 줄창 접어놓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로맨틱한 내음이 물씬한 면에선 저 비행기가 한 수 위이긴 하지만.






러닝타임이 무려 162분이던가, 두시간 사십여분짜리 영화란 걸 알고 대번에 툴툴거리고 말았다.

대체 요즘 영화들은 왜 이렇게 길게만 만드는 거야, 좀처럼 덜어낼 줄도 모르는 욕심쟁이들 같으니라구.

아무리 제임스 카메론이 감독의 전작들, 에이리언이니 타이타닉(195분)이니 전작들이 모두 러닝타임이 대체로 

길었다고는 해도, 또 그의 검증된 '능력'을 신뢰한다 해도 부담스러운 길이의 영화임에는 틀림없었다.


엊그제 영화를 보고 나서 뭔가 바로 리뷰를 쓰고 싶었다. 워낙 요새 개봉한 영화 가운데서 압도적이고 독보적인

위상을 점하고 있는데다가, 대체로 영화에 대한 상찬 일색이었던 판이어서 나도 뭔가 말을 보태 그 '아바타

신드롬(?)'이라 할 만한 것에 묻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달까. 그런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무엇을 딱히 짚어서 이야기할 만한 건더기를 결국 못 찾고 말았다. (사실은 이 영화에 대해

새로운 영화적 가능성을 발견하니 어쩌니 말은 많지만, 결국은 '현질'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잘 만들어진 영화다. 카메론 감독이 공들여 묘사해낸 외계 행성의 비쥬얼은 디테일한 부분까지 황홀할

정도로 환상적이었고 전투신 등은 박진감 넘쳤으며, 스토리 역시 길고 긴 러닝타임이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세련되고 탄탄했지만, 무엇보다 무척이나 재미있는 영화였다는 점은 틀림이 없다. 비쥬얼과 스토리 모두

빠짐없이 구비한 데다가 명감독의 능력까지 더해 아주 재미있는 영화가 된 셈이다.


그런데 사실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 비쥬얼이나 이야기 모두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비쥬얼만 따져보자면 공중에 떠있는 '할렐루야 산'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천공의 성 라퓨타'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몇 점을 그대로 영화화해 놓은 듯한 느낌이었고, 공중 전투신은 스타워즈에서 보았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자아냈다. 외계 행성에 있던 '생명수'의 이미지라거나 그들의 '자연친화'적인 삶의 이미지 역시

어디에선가 여러번 반복되어 나타났던 그런 전형적인 '헐리우드식 친생태 유토피아'의 모습인 거다. 딱 잘라

말하자면 적잖이 진부한 비쥬얼이란 거다. 딱히 새롭게 상상력을 자극한다거나 전혀 참신하고 새로운 모습을

창조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스토리 역시 마찬가지다. '아바타'라는 존재를 통해 지구인과 외계인의 존재를 매개한다는, 그리고 결국 어떤

육체에 실려있을 때가 자신인지에 대한 혼란스러움은 일견 참신해 보인다. 그렇지만 매트릭스 이후, (사실은

'13층'이란 영화 이후) 모든 SF가 다루고 있는 건 일종의 탈근대적인 자아 정체성 찾기의 문제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나로서 규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마주한 시공간이 현실/진실일까" 따위의 철학적

문제, 동양적으로는 일종의 '호접몽'을 제기하는 건 이미 답도 없고 진부하기만 한 관념적 유희가 되어버렸을

정도다. 거기서 더 나아가려는 영화적 시도들이 있고, 실제 그런 영화들이 개봉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제와

또다시 '이 몸이 정말 나인가 저 몸이 정말 나인가' 같은 류의 화두를 꺼내다니 조금 아쉽다. 물론, 영리하게도

감독은 이런 난해하고 오래묵은 문제를 파고들지도, 치열하게 대면하지도 않는다. 단지 영화를 맛깔나게 하는

하나의 씨즈닝처럼 살짝 얹어놓을 뿐.


결국 영화는 종을 넘어선 사랑이야기다. 생태에 대한 이야기, 인류의 탐욕에 대한 이야기, 인간적 신뢰와

휴머니즘의 이야기, 혹은 지구적 차원에 빗대어 선진국 대 제3세계 간의 갈등이야기 등은 하나의 양념이나

데코레이션처럼 영화를 풍성하게 하는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카메론

감독이 정말 '나비'족의 생태철학과 생명존중문화를 중요한 주제로 여겼다고 생각한다면 몇 가지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적장의 가슴에 화살을 두 발씩이나 박아넣던 여자가, 처음 등장할 때엔 어쩔 수 없이 생명을 해치는 것에 대한

괴로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간직했던 그 여자라는 걸 기억하는지. 생명을 최대한 불필요한 괴로움없이

사그라뜨리려던 건 '나비'족의 어른이 되기 위한 요건이기도 했다. 이제 그녀는 '증오'와 '분노'를 배운 셈이다.

또, 마지막 장면에 '나비'족이 포로들을 지구로 돌려보내던 장면에서 지구인들의 무기로 무장한 장면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제 그들은 지구인의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한 채, 지구인들의 또다른 침공을 대비하거나 혹은

자신들끼리 전쟁을 벌이게 될 거다. 그들이 지구인들에 비해 '야만'이었던 혹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인류'였던,

이제 그들도 오염되기 시작하는 건 아닐까.


뭐, 심각하게 따지고 보자면 그런 거고, 역시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오락영화로 보아야 할 거 같다. 그다지

새롭거나 실험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지만, 이미 오락성이 검증된 몇 가지 이야기와 소재들을 잘 버무려서

만들어낸 전형적인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랄까. 어쨌건 그 스펙터클함은 영화관에서 봐야 제 맛인.



시립미술관 가는 길은 늘 설렌다. 덕수궁 돌담길의 운치도 그렇지만 도심에서 한발 벗어난 곳의 고즈넉하고

적적한 분위기가 맘에 든다. 게다가 몇 시간꺼리 재미나게 놀 수 있는 소재들을 만나러 가는 거니까, 아마도

어렸을 때 큰 길건너 아파트촌에 있었던 '기린놀이터'로 달음질치던 기분이 이랬을 거다.

앤디 워홀. 대량 생산, 무한 복제의 시대에 걸맞는 '팝아트'를 창시한 예술가이면서 헐리웃과 세계의 '유명인사'

그 자체를 이미지로 소비해낸 자칭 '기술자'이기도 하다. 정치적 영향력, 역사적 중요성 따위와 관계없이 그저

사람들이 잘 알고 제혼자 친숙한, 그야말로 '쎌레브리티(Celebrity)'로서, 그는 마를린 먼로와 레닌, 마오쩌둥을

같은 반열 위에 놓고 작업을 하는 거다.

그의 숱한 '선정적'인 말들 중 이런 것도 있다. "미래에는 모두가 15분씩은 유명인이 되는 기회를 얻을 것"이라

했던가. 그의 작품들은 마치 익명의 일반인이 유명인이 되듯 하찮고 사소한 상품과 물건들에 초점을 맞춘 것이

꽤 많이 보인다. 너무도 흔한 세제 상자, 통조림스프 따위가 열맞춰 세워진 모습을 재구성한 작품들이 그렇다.


그가 창조해내는 세상은 모든 것이 이미지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제통도, 재클린 케네디의 죽음도,

레닌과 마오의 이데올로기도, 교통사고와 심지어는 죽음조차 변주되는 해골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는 왜

자신이 기계처럼 예술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을까. 뭔가 그림 뒤에서 심오한 의미를 찾고 온갖 기호를 암호처럼

배열하던 기왕의 미술과는 다르다는 뚜렷한 선긋기였는지도 모르겠다.

더이상 스스로를 근대적, 혹은 그 이전 시기 '예술가'라는 단어가 갖는 아우라로 포장하지 않고, 단순한 하나의

직업으로서의 예술가를 자처하고 자본주의 상업미술과 근대 미술과의 접점을 찾는 여정을 걸었달까. 그런

점에서 그의 세계는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탈근대의 미학과 미감들에 대한 하나의 클래식인지도 모른다.


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탈근대, 포스트모더니즘의 '클래식'은 이제 조금은 유치하고 촌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아무리 앤디 워홀이 전례없는 예술 양식과 미감을 개척했다고는 해도 사실 워홀식의 작품들은 이미 무수한

발전 혹은 변화를 거쳐 사방에서 볼 수 있는 거다. 자본주의적 광고와 예술의 벽은 허물어진지 오래, 일상의

것들을 주목하고 새로운 문맥에 배치하는 시도 역시 그 자체만으로는 너무도 진부해진지 오래. 


게다가 재키-재클린 케네디-의 죽음이나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참사가 이미지로 어떻게 소비되고 소진되는

지에 대해서는 워홀보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훨씬 익숙할 수 있는 거다. 물론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여전히

워홀의 참신하고 날카로운 시각이 필요하달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익숙해진 만큼 다른 예술가들은 다시

꾸준히 낯설게 하기를 시도하고 있는 거다. 굳이 앤디 워홀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앤디 워홀의 바나나 그림이 프린팅된 벽면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찍고 있는 사진 한장한장,

그게 바로 앤디 워홀이 다양한 색감으로 표현한 마릴린 먼로라는 작품이고 네가지 색깔의 레닌 작품인 거다.

이미 이미지는 넘치는 데다가 심지어 유사한 곳에서 유사한 피사체-음식, 건물, 풍경 따위-가 쉼없이 복제되고

변주되고 있는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가 워홀을 관람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시대를 관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의 작품 뒤를 보려 하지 말라고 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과연 그런지는 별개 문제지만

그는 자신과 자신의 작품이 '충분한 만큼 오랫동안 바라보아'지는 걸 두려워했나 보다. 충분한 만큼 오랫동안

바라보기. 이미지의 매트릭스를 깰 수 있는 건 역시 성찰의 힘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건가, 모르겠다.

그의 작품 뒤로 걸어나오면서, 몇가지 그의 말들을 되씹어 봤다. 말장난같기도 하면서, 묘하게 여운이 있다.

* 사람들은 시간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그들 자신에 의해 변화한다.

* 인생은 그들 자신의 변화하는 모습을 되풀이하여 보여주는 시리즈의 연속물이다.

* 사람들은 점점 더 오래 살고 늘어가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아이로 살아갈 것인지 배워야 한다.

* 사람을 가장 흥분시키는 매력들은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

* 예술은 당신이 벗어날 수 있는 다른 세상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마지막 것, 미술관이나 전시관을 굳이 꾸역꾸역 찾아 돌아보는 이유기도 하다.

시립미술관 1층에서는 "조각적인 것에 대한 저항"전이 열리고 있었다. 다들 앤디 워홀전만 보고 여기를 지나쳐

가버리는 듯, 들어가니 관람객은 나 혼자 뿐이었다. 작품들을 보다 보면 불현듯 스스로 되묻게 된다. 근데 이거

조각전이었지? 조각은 뭐지? 하고.


커다란 덩어리 하나 혹은 여러개가 단단하고도 조용하게 지표 위에 버티고 있는 게 전통적 의미의 조각이라면

그 모든 것들 하나하나를 의문에 빠뜨린다. 덩어리가 아니거나, 단단하지 않은 액체/기체거나, 조용하지 않고

회전하거나 불규칙하게 움직이거나, 지표 위가 아니라 벽면이나 천장에 있거나. 형체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은 도발적이고 불안정해 보이는 것들, 그것들을 '조각'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각이 아니라 청각과

촉각까지 끄집어내는 작품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앤디 워홀전만큼 재미나게 관람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반짝거리는 아이디어들이 가득했던

전시 공간이었다. 앤디 워홀의 그것들이 조금은 더 '클래식'하고 '올드'해 보인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시립미술관에서 돌아나오는 길, 아까는 참 앙상하고 못나보였던, 무슨 파리채마냥 똥그란 철사에 전선 그물망

얼기설기 엮인 듯 보였던 그곳에 불이 들어왔다.



지난 2005년 '안기부 X파일'을 인용해 '삼성 떡값 검사'의 실명을 공개한 혐의(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등)로 기소된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8부(재판장 이민영)는 4일 오전 열린 선고공판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1심을 깨고 이같이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가 인터넷을 통해 떡값 검사 명단을 공개한 것은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정당성이 인정된다"며 통신비밀보호법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또한 노 대표가 국회에서 기자들에게 떡값검사 명단을 공개해 명예를 훼손한 혐의에 대해서도 "국회 안에서 행한 정당한 국회의원의 활동으로 면책특권이 인정된다"며 공소 기각했다.

노 대표는 지난 2005년 8월 국회 법사위원회 회의에 앞서 '안기부 X파일' 보도자료를 통해 옛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에서 삼성그룹의 떡값을 받은 것으로 언급된 전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이날 선고에 대해 노 대표는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난 느낌이다. 사필귀정이라고 생각한다"며 "재판부가 제 주장을 완벽하게 받아들인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삼성 X파일은 국회에서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인데 법원에서 해결해 준 역사적 판결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표는 "오늘 판결은 제 문제를 넘어 삼성 X파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며 "이 문제와 관련이 있는 삼성 관계자, 중앙일보 관계자, 전현직 검찰 등 모든 주체들이 삼성 X파일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것은 명명백백하다"고 했다.

노 대표는 이어 "나머지 300여개 녹취 테입이 아직 서울중앙지검에 남아있다"며 "이 문제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 경우 유사한 사건이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18대 국회가 새로 밝혀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내년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한 그에게 법적 걸림돌이 제거됨에 따라 향후 정치행보에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이에 대해 노 대표는 "내년 1월 중 후보 선출이 있을 예정"이라며 "아직 대법원의 판결이 남아있지만 거대권력과 불의에 맞서 싸운 제 진심에 대해 국민적 평가를 받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임경구 기자 (www.pressian.com)

오늘자 프레시안의 손문상 화백 만평. 제목이 무려...."천한 것들"이다. 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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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손가락을 세워 가리켰던 달은 아직까지 아무도 거들떠보거나 주의를 기울이지도 못했지만,

어쨌던 그가 세운 손가락에 시비를 걸던 이들이 조금은 잠잠해질 것 같다. 이제 다시 손가락을 따라

삼성과 국정원(구 안기부), 일부 검찰의 비리를 파고들 수 있을까.


이제 걸리적대던 족쇄가 사라졌으니 노회찬 대표, 내년 지방선거를 맞아 서울에서 부활해야 할 텐데.

힘내시길 바랍니다~*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선혈이 낭자했다. 실감나게 토막나버린 팔다리는 말할 것도 없이, 동강난 머리통과

허리째 베여나가 무슨 햄덩어리같은 인체의 신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중에는 그냥, 영화배우 '레인'이

칼을 휘두를 때마다 썰려나가는 적들의 몸뚱이를 보면서 정육점의 전동회전칼이 생각났다. 윙~ 소리나는

그것에 큼직한 고기를 갖다대면 살이고 뼈고 거침없이 썰려나가는. 아, 물론 약간의 김칫국물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효과와 외마디 비명소리 정도는 추가되어야겠지만.


액션 영화의 스토리란 거야 뭐, 뻔하니까 딱히 기대하는 것도 없었지만 영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건

딴 생각이었다. 이 영화에 비, 혹은 레인이 나오지 않았다면 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나 욕구가 생겼을까.

그러니까 이 영화가 관객들, 최소한 국내 관객들에게 '소구'하는 요소는 레인이 주연으로 나온다는 점

이외에 뭐가 있었을까 싶었다. 적어도 난 그랬다. 딱히 액션을 다른 장르에 비해 즐기지도 않고, 새빨갛고

끈적한 느낌의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기는 비쥬얼이기만 하면 족한 것도 아니었으니. 무슨 흡혈귀도 아니고.
 

영화만 놓고 보자면 그냥 그랬다. 그다지 여운이 크지 않았던 그야말로 살짝 얹힌 드라마, 뻔하고 간결한

스토리, 만화같은 액션, 과도하다 싶을만큼 잔인하게 선정적으로 묘사된 죽고 죽이는 장면들. 결국 그 비쥬얼에

집중해서 그걸로 승부를 보려한 영화였던 것 같지만, 킬빌에서 보였던 핏빛잔혹한, 그렇지만 우아하고 세련된

느낌마저 들었던 영상미보다는 많이 모자라 보였다. 훨씬 잔인하고 리얼하게 많이 죽어나갔지만 뭐랄까,

아무리 대량의 피가 사방에 흩뿌려져도 부담감과 속의 메슥거림 이상의 감정을 느끼기 힘들었다.


아름답지 않았다. 불편하기만 했다. 그래서일 거다. 숱한 고비를 넘기고 그야말로 혈겁의 전투를 계속해온

레인의 몸에 남은 상흔들이 처절해보이고 그래서 아름답고, 그런 종류의 미감을 끄집어내기보다는 그저

너덜너덜해진 '걸레'처럼 보였던 건. '핏빛 아름다움', 뭐 그런 류의 미감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가 적들과 주고

받는 합들 사이로 번져나가는 붉은 피에서는 그다지 그런 미감이 건드려지지 않았다. 영화가 끝날 즈음 성한곳

하나없이 신체의 전면과 후면 모두 커다란 칼에 뜯긴 자국이 몇개씩 생겨난 레인이 우뚝 선 모습은 징그럽기만

했다.


레인의 연기가 문제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액션 영화에 액션 이외 연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애초 영화가 추구했던 '미감'의 문제 아닐까 싶다. 어쩌면 영화 자체가 그런 '핏빛 미학'을 추구한 게

아니었던 거다. 그저 난도질하고 죽이고 피가 사방에 적나라하게 튀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지도. 뭐,

그렇다면 기존 헐리우드 영화가 '동양적 소재'에 기대어 그려내려 했던 '핏빛 아름다움'의 정형과는 상당히

다른, 새로운 시도가 되는 셈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냥 좀 생각없이 만든 삐급영화였던 게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저번에 전지현이 일본식 교복입고 칼휘두르던 '블러드'를 보면서도 느꼈던 거지만, 배우 한 두명이 헐리우드

작품에 나간다고 해서 그들이 '한국' 배우로서의 대표성을 갖는 건지, 헐리우드에서 그들이 '한국' 배우로서

인정받는 건지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그들은 이를테면 '배우 올림픽'에 한국이라는 나라 국가대표로 나간 게

아니라, 그냥 헐리우드에서 필요한 동양적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한 일개 배우인 거다. 괜히 한국 배우의

헐리우드 진출, 이렇게 대서특필하고 주목하고 자랑스러워할 게 아닌 거 같은데. 오히려 헐리우드에서 계속

이런 식으로 소비하고 왜곡해 나가는 '동양', 혹은 '한국'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만 쓰이는 소모품이 되는 건

아닐까. (배우 본인들은 헐리우드 진출의 후광을 업고 돈도 벌고 명예도 얻겠지만.)


이 영화만 해도 오리엔탈리즘에 경도된 동양의 이미지들이 덕지덕지 포장된 거다. 그건 영화가 어색한 이유 중

다른 하나일 수도 있겠다. 한국인 관객들에 익숙한 '동양'의 이미지와 컨텐츠가 왠지 익숙한 듯 낯선 모습으로

헐리우드에서 재구성되고 있으니, 도무지 몰입이 안 되는 거다. ('동양'에 대한 백지 이미지를 가진 미국이나

서구에서야 그냥 그런가부다 하고 흡수되는 이미지겠지만 말이다.) 주로 일본에서 연원하는 국적 불명의

동양적 이미지들, 상당히 강조되어 노출되는 레인의 '동양적 생김새', 가족을 중시한다 여겨지는 '동양적

가치관', 게다가 영화를 보면서 이건 일본관객들이 불쾌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동양적 복수'의

방식, 묶어놓은 사람에 복수를 한다고 칼질을 하는 것까지. 이제는 클리셰가 되어버린 세탁소의 한국인 주인은

차치하고라도, 마이크를 쥔 힘센 '서양' 헐리우드가 동네방네 '동양'은 이런 곳이야 떠벌리는 꼴이다.


물론 한 술밥에 배부르랴, 는 지적이 나오리란 거야 빤히 예상되는 바이지만, 요는 그거다. 한국배우 한두명의

진출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말 한국의 국격이니 위상이 중요하다 생각한다면) 헐리우드에서 한국을, 동양을

다루고 소비하는 방식의 단무지스러움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한국배우들의 헐리우드 진출이

늘어난다고 해서, 그리고 그게 이슈가 되어 해당 영화가 쉽게 홍보된다고 해서 이득보는 사람이 누굴까.

결국 레인이 나온다는 사실만 빼고나면 전혀 잘 만들었단 생각이 안 들었던, 딱히 인상적인 것도 없고 울림이

남는 장면도 없던 별볼일 없는 영화였다고 고백하는 셈이다.




그래도 일요일 오후, 육천원짜리 전시를 보았으면 사진찍는 솜씨가 조금이라도 나아져야 하지 않겠나 싶은데.

확실히 겨울이었다. 들어갈 땐 흐릴 지언정 사방이 환했는데, 몇시간 지나지 않아 금세 어둠이 짙게 나렸다.
 
어둠 속, 문득문득 도심의 야만스런 불빛과 소음이 정적을 깨뜨리는 가운데 둥실둥실 떠오른 덕수궁 내 중화전.

배병우 작가는 어부였던 아버지를 닮아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하루의 농사를 준비했다고 했다. 그가 찍은 사진

중 태반은 해뜨기 직전, 실내는 묘한 공기에 감싸이고 바깥은 몽환적인 보랏빛이나 초콜렛빛 어둠이 출렁이는

그런 시간에 얻어졌다고 했다. 뭐, 사진이 쉽게 찍히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쩌면 상당부분 '우연'이란

요소가 짙게 작용하는지도. 일단 빛이라는 것부터가 그러니까 말이다.

뭐 그런 노력에 비견되랴만은, 쉼없이 눌렀던 셔터, 그렇게 남았던 몇개의 흔적 중 그래도 조금은 봐줄만

하다 싶은 사진들. 진눈깨비처럼 펄럭이며 내리는 빗물 탓이기도 했지만, 한동안 덕수궁미술관 입구 처마 안에

우두커니 선 채 셔터만 눌렀다.

미술관에서 몇 걸음 내딛다가 뒤로 돌아 한 방, 날려줬다. 이녀석 깜짝을 놀랬을 거다. 아닌게 아니라, 하얗게
 
질려버렸다. 스크림의 그 유령 마스크가 떠오를만큼.

확실히, 몸이 움직이니 구도가 바뀐다. 부지런해야 하는구나. 그러고 보면 그동안 내가 찍었던 사진은, 무쟈게

실용적이었던 것 같다. 내가 보는 것, 내가 눈여겨본 것, 그런 것들을 기억에 남기기 위한, 일종의 USB였다.

기억의 외장하드. 딱히 미감이나 예술적인 측면을 고려했던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솔직한 고백. 아..사진 좀

잘 찍고 싶다. 카메라도 질렀는데 제길.

조금 걷는데 하얗게 질린 덕수궁미술관 벽면에 얼룩이 졌다. 무슨 백한마리 달마시안도 아니고, 괴기스럽게

부풀고 꺽여든 나뭇잎들의 그림자가 벽면에 대고 간질간질, 간지르듯 간만 보고 있었다.

아까 밝을 때만 해도 카메라 수십대가 쏠렸던 광명문, 지금은 나와 일대일, 독대하는 중이다. 역시 빛이 부족한

건가. 커다란 구리 종색깔같은 처마 위 하늘 색깔이 제일 맘에 드는 구석이다.

돌아나가는 길, 느지막히 아침 겸 점심만 먹고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참이었다. 배가 고파서 몸은

뭔가 먹을 것이 있으리라 여겨지는 앞으로만 계속 내달리고 싶어하는데, 손이랑 눈이 브레이크를 잡는다.

참..별 것도 아닌 사진 찍겠답시고 계속 멈춰서서 이리저리 배회하는 모습이라니.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다.

그리고 사실 그렇다. 낮에 이미 사람들이 우르르 훑고 다닌 길에 닳을 대로 닳아버렸을 구도일 게다. 꼭 내

카메라로 내가 다시 찍어서 내가 다시 간직하고 다시 이렇게 블로그에 올려야 할 이유는 뭘까. 뭐, 모르겠지만

일단은 재미있으니까, 정도의 답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데세랄 지른지 아직 한 달도 안 된 터에 이런 회의와

시니컬한 구렁텅이 따위 빠져들 시간이나 여유는 없는 게다.)

알고 보면 꽤나 넓은 덕수궁과 외부를 연결하는 대한문, 혹은 입장료 내/받는 곳. 특정 포인트를 향해 정연하게

벌어진 등불들과 달리 외부 세상의 불빛은 사방을 향한 사방으로부터의 불빛이다. 잊을만하면 툭툭 떨어지는

산만한 물방울들만큼이나 무질서하고 정신없는 세상이다.

안녕 대한문. 그러고 보면 덕수궁은 꽤나 자주 들르는 곳이다. 일년에 두세번은 가는 듯. 창덕궁 후원-흔히

비원이라 불리는 곳이 여기라던가-을 한번 가봐야겠다고 맘은 먹는데, 아직 한번도 못 가봤다. 배병우 작가가

'생산'해낸 작품 중 소나무를 소재로 한 것은 SNM, 비원을 소재로 한 것은 BWN이란 약자로 시작하는 작품

번호를 가졌다던가.



* 이제부터는 오로지 카메라 자랑을 위한 사진들.

사진으로 일단 찍은 후에 한번 하얗게 불살라 버린듯한 느낌.

사진이 뻘겋게 타버렸다. 그러면서도 묘한 깊이가 느껴지는.

제대로 오래된 사진 느낌..혹은 일반적으로 느끼는 오래된 사진의 분위기란 게 이런 거 아닐까. 누렇게 변색된.

찍고 나서는 아궁이불이 들어오는 구들장 같은 데 기름먹은 장판 속에 한 이십년쯤 묵혀둔 듯한 사진. 

비슷하게 구들장에서 타버린 느낌이긴 한데, 조금 다르다. 타고 나서는, 차가운 가을바람에 한 삼년쯤 식혀진.

뭐, 이문세의 '조조영화'던가, 그런 노래가 떠오른 이유는, 아마 저 오른쪽 창구가 영화티켓 예매소, 그리고

입구는 극장 입구스러워서일 게다. (대체 어디가? 라고 물어도 별로 대답할 말은 없다는...)





배병우라는 사진 작가, 얼핏 귀동냥한 수준이라곤 일본에서 미스터 소나무 라 불릴 정도로 소나무 사진이

유명하다는 정도? 그의 작품을 보기 전 내 감각이란 게, 보고 난 후의 감각과 어떻게 달라질지, 달라지긴 할지

괜시리 궁금해져서 시험삼아 눈앞의 소나무를 찍어보았다.

어라, 들어가려고 봤더니 도슨트의 설명이 오후 네시, 다섯시, 여섯시, 그렇게 있다. 한 삼사십분 밖에서 돌다가

들어가면 도슨트 누나야들과 함께 자상한 설명을 들으며 감상할 수 있겠다 싶어 우선 발길닿는대로 덕수궁을

둘러보았다.

미술전이었다면 뭐 딱히 도슨트의 설명 없이 알아서 이해하면 되겠지, 싶었지만 왠지 사진전은 여러차례 접해

보아도 뭔가 내가 이해하는 게 너무 동떨어져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이 없다. 미술전이라 해도 으레 먼저 한바퀴

돌아보고 도슨트와 함께 한번 다시 돌아보며 내가 받았던 이미지나 느낌들과 비교해 보는 게 또 쏠쏠한 재미,

어떻게든 도슨트와 함께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 건 더욱 재미있게 전시를 즐기는 첩경이지 싶다. 

전시를 둘러보는 나만의 방식이랄까, 우선 한 바퀴 전체적으로 둘러본다. 몇몇 눈에 밟혔던 작품들은 잘 기억해

두었다가 다시 한번 돌며 그것들만 찾아서 좀더 시간을 할애해 감상한다. 이제 어느정도 정형화되어 버린 

미술전 감상에 비해 아무래도 아직 사진전은 이렇다 할 정도의 전형이 잡힐 만큼 많이 돌아본 건 아니라,

게다가 사진이 뭔지 아직 잘 모르겠어서 조금은 조심스럽다.

뜬금없지만 새로 산 카메라 자랑. 펜탁스가 10월 초 회심에 찬 일격으로 내놓았다는 K-x. 이런 기능이 있다.

설정만 해놓으면 지 마음대로의 색감을 끄집어내어 랜덤으로 찍어버리는. 완전 낡고 퇴락한 느낌이다.

덕수궁을 종횡하며 가로지르는 돌담들, 그 담장을 중간중간 끊어놓고 있는 문들은 자연스럽게 담장과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저런 담장에 저런 대문, 아니면 뭘 갖다 붙일 수 있을까.


빗발이 조금씩 흩뿌리기 시작했다. 단체로 출사를 나온 듯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위계를 나타낸

비석들이 쪼르르 서있는 마당이 스산해졌다. 사람들은 대부분 덕수궁 입구와 덕수궁 미술관을 이어주는

최단거리 상에 몰려 있었다.

다시 한번 카메라 자랑질. 오오...신기하다 신기해. 같은 공간인데 이토록 다른 느낌이라니.

물, 빛, 바람(공기)를 늘 사진 속에 포착해냈다는 배병우란 사람, 그의 사진을 보면서 몇 가지 느낀 점들이

있었다. 같은 사진이라 해도 '크기'라는 요소에 따라 느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겠구나. 같은 공간이라 해도

시간에 따라, 빛에 따라 이렇게 다른 느낌을 줄 수 있겠구나. 구도를 창조해낼 수 있는 그림과는 달리 사진이란

건, 구도를 발견하고 끌어내기 위해 정말 부지런히 발로 뛰어야겠구나. 뭐 그런 것들.

그는 소나무 사진으로 이름을 얻었지만, 일부 비평가들은 그렇게도 말한다고 했다. 그가 한국 해안가에 자라는

옹골지고 고단한 해송이 아닌 다른 지역의 소나무를 테마로 잡았다면 이토록 성공하진 못했을 거라고. 한국의

소나무, 그중에서도 거센 바닷바람을 버티고 열악한 토양조건을 극복해야 하는 주름지고 굴곡진 해송들의

강한 기운을 존중하는 그는, 경주의 왕릉 주변 소나무를 찍은 사진 반대편 전시공간을 온통 까만 천으로 덮어

버렸다. 얘기인즉 왕릉 주변의 소나무들은 지상의 영혼을 하늘로 이어주는 강한 영적 매개체라 맞은 편에

작품이 놓이면 그 기운을 배겨내지 못했을 거라 여겼다는 것인데, 1:1 사이즈로 '생산'된 그의 사진들을 보면

정말 뭔가 기운이 발산되는 듯 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런 요청까지 굳이 했다는 작가를 소나무에 미친

'또라이'라고 이야기할 수야 없는 거인데다가, 엽서나 카드 사이즈의 사진과는 다른 모종의 '포스'를 그 1:1

사이즈의 사진들은 분명하게 내뿜고 있었던 거다.)

그는 스스로를 '사진가'가 아니라 부정했다. '예술가'라고 했다.

일반적인 화가들이 붓으로 스스로의 세계를 펼쳐내듯, 그는 카메라로 스스로의 세계를 끌어냈다. 그가 '생산'한

사진들은 단순히 현실의 재생이 아니라 배병우 자신의 의도와 관념이 짙게 투영된 그림과도 같다는 거다. 하여

그의 사진들은 일반적으로 사진의 특성이라 얘기되는 뛰어난 모사성, 구체성, 디테일함이나 세밀함 따위를

대체로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냥 소나무 한 그루에 더해 흐릿한 실루엣 쪼금, 그걸로 족한 사진들이다.



날것의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굉장히 세련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쉼없이 쏟아져나오는 육두문자와 걸레 물고

내뱉는 온갖 말들조차 세련되었다거나 세련되어서 어색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김기덕의 영화들에서 나왔던

막말들보다도 더욱 강하고, 진짜같았다. 리얼했다. 여기서 '리얼했다'는 말은 흔히 조폭 코미디나 깡패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관용어구'같은 욕들과 억양이 아니라, 정말 진짜로 '마음을 담아' 욕을 하고 있어 보였단 의미다.


세상 무서운 것 없이 경찰을 폭행하고, 거침없이 욕을 달고 살며, 아버지를 밟아 짓이기고, 길가는 여자에 침을

뱉으며, 여자에 주먹질도 서슴치 않는 사채 해결사. 그런 사람이 주인공이다. 대화와 소재와 주제, 스토리까지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막장인데 대체 '세련되다'는 느낌은 어디서 왔을까. 세련된 거라 함은 보통 디테일까지

은근하지만 꼼꼼하게 안배되어 있으며, 어거지스럽거나 촌스러운 부분을 최대한 배격한 것을 이르는 것 같다.


아마 그런 부분 아니었을까. 남대문시장에 여자와 아이와 함께 놀러나갔던 남자, 그전까지 항상 쉼없이 담배를

뻐끔대던 남자의 입에 물린 담배가 불이 붙지 않은 채 빙빙 돌고 있던 어느 스쳐간 장면. 또, 아이와 여자가

금세 친해지고 살짝 겉도는 느낌을 받은 남자가 어색하게 주머니에 쑤셔넣은 손을 아이가 슬그머니 끌어당겨

잡아주는 장면. 여자가 남자의 이복 누이의 집에서 서둘러 일어나려는 남자에게 "갈테면 혼자 가"라는 식으로

당돌하게 말하면서도 문 앞을 가로막은 채 주저앉아 양파니 파를 다듬는 장면. 그리고..남자가 손목을 그은

아버지를 들쳐업고 뛰면서 내뱉는 헉헉 끊어지는 단어들, 중간중간 미처 뱉어지지 못한 채 삼켜진 단어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장면. 남자가 입안가득 피를 머금고 꾸륵꾸륵대며 던지는 몇마디 짐승소리 같은 그것들.

너무나 함축적인데, 그러면서도 또 너무나 생생하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 역시 굉장히 좋았다. 양익준의 눈빛은
 
특히나.


세련되다는 느낌은 무엇보다 선정적이고 표피적으로 동원해낸 막장스러움이 아니라 그냥 진정한 막장을

보여준 데서 나온 것 같다. 왜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듯이, 극단으로 밀고 간 막장은 오히려 극단의 세련됨과

통하는지도 모른다. 어정쩡한 선에서 타협하거나 우물쭈물하는 게 아니라, 거침없이, 끝까지 보여주면서

꾸미지 않는다. 어쩌면 그랬기에 더욱 이야기에 흡인력이 생기고 '진심'이 담겨 버린 게다. 이 영화, 어정쩡한
 
자세로 보면 왠지 한 대 호되게 두들겨 맞을 만큼의 서늘함과 기백을 품고 있다. 실제로 양익준은 이 영화를

자신의 지난 시절을 해소해내기 위해, 오로지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어쨌거나 굉장히 날것이면서도 굉장히 세련된 이 영화는, 결국은 사람을 굉장히 우울하게 만들어버렸다. 아니,

그보다는 '굉장히 우울함'이라는 연못에 빠졌다가 흠뻑 젖어서 기어나온 느낌이랄까. 써늘하고, 소름이 돋고,

너무 먹먹해서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가 끝났다는 것만으로 왠지 따뜻하고 안전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심마저

들게 만드는 영화다. 이 영화의 단점이랄까, 나무랄데없이 행복해보이는 풍경과 최악의 상황을 맞바로 붙여

놓는 거침없는 모양새와 비쥬얼과 사운드를 필요에 따라 드문드문 생략한 채 어느 하나에 집중시켜 버리는

영리한 머리씀씀이. 그런 것들이 일종의 뒤집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든다. 이렇게 망가지고, 이렇게

형편없어져도 괜찮구나. 그래도 어엿하게 살아갈 수 있구나, 하고. 그건 분명 단점이라면 단점이고, 또 분명

장점이라면 장점인 게다.


내가 너무 쉽게 예상해 버렸지만, 예상치 못하게 이뻤던 장면 하나.

(한참 골몰하던 남자,) "야 한연희, 두년희, 세년희, 네년희 이 썅년아, 이 미친년아." "아씨 이 미친놈 진짜."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골목에서 남자가 여자에 침을 뱉고 주먹을 날렸을 때만 해도, 남자가

그녀 앞에서 이렇게 나름의 농담을 던지려고 애쓸 줄은, 그래서 귀여운 모습을 보이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문장을 보는 것으론 느낄 수 없는 맛, 그리고 둘 사이의 내밀한 교류를 모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맛. 저런

대사들이 난무하는 사이에서도 그들의 눈빛만 좇을 수 있다면, 비위가 약해도 한번쯤 꼭 시도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영화다. 개인적으로 기대가 꽤나 컸던 영화, 기대 이상이었다. 김기덕의 은퇴 후, 이런 감독이 나타난 건

축복이다.






애초 국가간의 조약을 체결함에 있어, '재협상'의 엄밀한 정의라거나 원래적 의미 따위는 있지도 않다. 조문을

미세하게 바꾸던, 조문의 해석을 바꾸던, 아니면 아예 원점으로 돌려 모든 것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리던 간에

어떤 식으로던 기존에 합의되었던 내용에 대해 다시 문제가 제기되고 논의가 시작되는 것이 그나마 추론해

봄직한 '재협상'이란 단어의 의미에 가장 가깝다고 할 거다.


통큰 대인배 MB가 덥썩, 오바마에게 선물을 쥐어줬다. 군대가면 다 따는 태권도 1단증 나부랭이 말고,

한미FTA 재협상을 할 수 있다는 전향적이고 적극적인 입장 표명이었다. 그가 한 마디 하면 밑엣 사람들은

새롭게 해석하기 바쁘다. '그것은 오해', '~는 하지만 ~는 아니다.'라는 그간의 숱한 설화(舌禍)들을 무색케할

대형 사고가 났지 싶다. 혹은, 이런 파장까지 고려한 고도의 정치적 술수일지 모른다. 교착 상태의 한미FTA를

밀어붙이기는 사실 쉽다. '경제 살리기'라는 마법의 키워드다. 일단 미국이 움직여서 돌파해낼 수 있다면,

여태까지 그랬듯 반대는 모두 물리친 채 꿋꿋이 돌격할 거다.


그는 과연, 미치도록 멍청한 걸까 아니면 토할 듯이 영악한 걸까.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고 평가할 준거를

마련해주는 신문들은, 신문들의 만평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흥미롭게도 신문에 따라, 논조와

입장에 따라 'FTA재협상'의 수혜자는 달라진다.

한겨레의 20일자 만평. 아프간 파병과 FTA 재협상의 선물을 받아들고 가는 오바마의 므흣한 미소. 그 뒤에서

'그랜드바겐'에 대한 립서비스로 만족해하는 멍충이 혹은 명바키아벨리. FTA 재협상이 과연 미국에 대한

선물이기만 할지는 모르겠다. MB 자신의 이미지와 '실적/업적'으로 충분히 치환할 수 있을 게다.

노컷뉴스. 오바마의 '립'서비스를 대가로 전장에 나선 MB다.

위의 두 만평은 나름 진보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어서 그렇다 말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마찬가지다.

한국일보의 20일자 만평. 광대뼈가 유난히 튀어나온 그분이 하신 말씀을 국민에게 통역하고 있다.

다시 얘기할 수는 있지만 재협상은 아니다, 계획대로 추진한다는 게 원안대로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말이 와닿는 순간. "뽑혔지만 대통령은 아니다."

국민일보도 합류한다. 국민인심에는 관심없는 대통령, 파병 재확인과 FTA자동차 재논의(?)를 후하게

선물로 줘서 보냈다. 눈동자가 찍히지 않은 그의 눈, 아마 화백은 '화룡점정'의 고사를 생각했을지 모른다.

무서웠겠지, 눈동자를 찍는 순간 MB가 눈앞에 나타난다고 생각해보라. 아님 폭행사고낼까봐 두려웠거나. 

역시 조선일보다. 보즈워스대표가 방북하겠다는 오바마의 공식발언을 그냥 두고 넘기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건

다른 만평들이 주목하는 '그랜드바겐 공감' 발언 따위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조선일보

만평은 북한의 입장이 우세해진 상황으로 그려준다.) 앞에서 짚었듯 '립서비스'에 불과한 공감 표현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더더욱 MB는 받은 거 없이 줘버린 셈이겠지만, FTA재협상의 국내 수혜자가

누굴지 생각하고 또 MB가 믿을 구석이 어딘지를 생각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딴청부리는 중앙일보, 4대강 반대움직임을 여/야의 정쟁 프레임 안에 가둬버리려는 수작이다. 이런 식의

물타기라니 유치하단 생각을 지울 길 없다.

19일자 중앙 만평을 찾아보니 이미 한미정상회담을 소재로 그림이 나왔었다. 미국은 아프간 파병, 한국은 G20,

북핵, FTA 등에 이해관계가 걸렸다는 걸 보여주는, 만평이라기엔 별로 임팩트도 없고 의미도 없는 담백한

설명그림이다.

매일경제, 경제지에선 역시 선명한 입장이 나타난다. FTA 장애물을 걷어내기를 바란다는 MB와 매경의 입장.

아무리 자동차 분야에서의 재협상이 있더라도 FTA 타결 자체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그들의 시각과 주장을 잘

대변하고 있는 듯 하다. 작년 쇠고기 졸속협상의 기억 따위 남아있지 않은 거다.


어쨌거나 대통령의 돌발발언으로 급속히 FTA재협상 이슈가 수면 위로 부상해버렸다.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문이 만평 주제로 이 발언의 효과와 전망을 다룬 만큼, 미국에서 호응만 있다면 MB 스타일대로 훅 해치워

버리기는 쉬워진 상황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만평들만 보아도 이 이슈에 대해 상당한 입장차, 그리고 또

온도차가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FTA 협상을 단순히 국가 대 국가의 문제로 봐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거 아닐까. 국가간의 협상은 동시에 국가 내부의 협상을 수반해야 한다.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권리위)가 11일(현지시간) 용산참사와 노동권 침해, 4대강 사업 등 한국 사회의 주요 현안에 대해 깊은 인권침해 우려를 나타냈다. 한국이 1990년 비준한 ‘유엔사회권 규약’을 스스로 광범위하게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권리위는 이날 스위스 제네바 ‘팔레 윌슨관’에서 현 정부의 유엔 사회권 규약 이행 여부에 대해 이틀째 심의를 열었다. 권리위는 “사회권 규약이 (한국의) 재판규범으로 적용되고 있는가”라며 이 문제에 대해 전반적으로 회의적 시각을 보였다.

◇용산참사 처리 잘못=용산참사의 책임과 원인을 모두 철거민에게 돌린 현 정권에 대해 권리위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필레이 위원은 “시위자들은 약 40명이었음에도 1200명의 전경이 동원되고, 개인경비업체 사람들도 동원돼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죽었다”며 “그럼에도 철거민들은 아직 장례도 못치르고 정부의 공식 사과도 없으며, 시위를 지원한 인권활동가들은 은신상태에 있다”고 말했다. 피해를 본 쪽은 철거민들이지만 보상은커녕 탄압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참사의 근본원인인 주거권 보장 문제도 제기됐다. 필레이 위원은 “개발을 해도 재정착률이 20%밖에 되지 않는 한국 상황에선 강제퇴거가 발생할 가능성이 많다”며 “강제퇴거를 막을 수 있는 지침을 입법화하거나 입법화 때까지 강제퇴거를 연기할 용의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법무부는 “용산사건은 상가세입자들이 보상금에 대한 요구를 한 것이라 주거권과 관계가 없다”며 “경찰의 진압작전도 일반 공중의 안전을 위협하는 불법 점거농성을 진압한 것이지, 강제 철거와는 관계가 없다”고 답변했다.
제이미 로메로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 위원장(왼쪽에서 두번째)과 이성주 주 제네바 대표부 대사(왼쪽에서 세번째)가 11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 유엔본부 ‘팔레 윌슨관’에서 한국 정부의 유엔 사회권 규약 이행 여부에 대한 시민단체의 발표를 듣고 있다. 한국 사회권 NGO보고서를 제출한 56개 인권시민사회단체 제공

◇노동권 부정당해=정부의 강경대응으로 인한 노동권 침해 문제도 제기됐다. 단단 위원은 “2008년 총파업 과정에서 경찰력이 동원됐고, 활동에 비해 처벌이 지나쳤다고 본다”면서 “지난해 서울 프레지던트호텔에서 본 추도집회는 평화집회였는데, 거기에 동원된 경찰 수를 보고 놀랐다”는 목격담을 전했다.

캐지아 위원은 쌍용차 사태를 예로 들며 “공장에서 농성하는 노동자들의 노조 권리와 자유에 있어서 한국 정부가 강경대응을 보이고 있다”며 “특히 최근(쌍용차 사태)에 벌어진 매우 매우 강압적이고 지나친 공권력의 사용원인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노조 지도자들에게 업무 방해를 적용한 근거도 요구했다. 고메즈 위원은 파업의 합법과 불법을 판단하는 주체가 누구며 그 비율을 알려달라고 질의했다.

김홍섭 노동부 담당자는 “업무 방해 적용 여부는 대법원 판례에 따른 불법파업 기준에 따른다”면서 “불법인지 합법인지 판단하는 주체는 1차적으로 경찰, 검찰이며, 나중에 대법원에서 판단한다”고 대답했다.

◇4대강 협의부족, 예산낭비=본공사에 착수한 4대강 사업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단단 위원은 “4대강 사업에 대해 한국 내 많은 비판이 있었다는 점을 알고 있다”며 “막대한 예산이 드는 사업임에도 영향을 받는 주체들과 협의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4대강 사업비를 복지부문으로 돌리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고 물었다.

국토해양부 담당자는 “4대강과 관련해 각 정부조직, 지역 주민들, 지차체들의 의견을 청취했고 공청회도 여러차례 했다”면서 “복지사업도 중요하지만 자연재해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사업도 중요하다”고 답변했다.

이밖에 한국의 최저임금수준 문제, 비정규직 근로자의 열악한 인권상황, 이주노동자의 임금 차별 문제 등 굵직한 국내 인권 현안에 대해 질의가 이어졌다.

<송진식·김지환기자 truejs@kyunghyang.com>


*                                                                 *                                                                 *

1990년 비준한 'UN사회권 규약'은 구속력이 없는 선언적 차원의 규약인 건 맞지만, 동시에 앞으로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명시했다는 의미도 크다. 사회권 규약 내에 담긴 '주거권', '노동권', '인권' 등에 대한

정언적 지침 하나하나를 하나의 기준점으로 삼는다면,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때 역시 이에 한참

못 미쳤을 거다. 그런 면에서 지금이나 그때나 오십보 백보, 다만 방향성과 추세라는 측면에서 지금의

역주행을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틀거리가 될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오십보 백보'라는 말로

은근슬쩍 묻어가기엔 전분야의 퇴행이 너무나 전면적이다.


조직의 수장이 전형적인 '관리자형/관료형'의 인물이라 해서 국제 사회의 굵직한 현안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던 UN이지만, 내부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구나, 라는 감흥.


묻힐 기사는 아닌 거 같아서 스크랩~*




* 스포일링의 가능성은 최대한 비켜내고자 하는, 영화를 보고 삐쭉삐쭉 뻗어나간 사변입니다.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은 비켜내기로 하자. 개인적으로는 사형제도에 반대하지만 자칫-아니 백방-구구절절히

사형을 반대한다고 처벌에 반대한다거나 정당한 죗값을 주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라느니, 하는 이야기까지

주렁주렁 엮여야 할 것은 뻔하니, 그냥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고 싶다.


사람을 죽인다. 냉정하게 말하건대 별 거 아니다. 실수로, 사고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심지어 스스로

목숨줄을 놔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 생명이란 게 얼마나 취약하고 깨지기 쉬운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물론

여느 영화에서처럼 목 한번 돌려주거나 숨통에 바늘 하나 꼽는다고 켁, 나자빠져 버리지야 않겠지만 그냥 목에

밧줄 한번 감아서 땡겨주거나 전기로 지지거나, 여차하면 독액이 든 주사액을 주입해버리면 그뿐이다. 실제로

사형은 그런 식으로 집행된다. 어쩌면 흔히 벌어지는 일들과 같이 차에 치이거나 높은 곳에서 밀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번거롭고 수고로울지 모른다.


죽이는 건 별 거 아니다. 사람의 육신을, 생명줄을 끊어버리는 건 쉽다. 문제는 그 임팩트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 밖에서 보기엔 법원의 판결이, 공문 한 장이, 국가의 이름 하에 국가가 사람을 죽이는 거였지만,

누군가는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 아무리 국가의 공무(公務)라는 휘광 뒤에 숨으려 해도, 사회의 법과 정의를

위해서라는 대의를 내세우려 해도, 혹은 피해자의 아픔과 가해자의 비인간성에 대한 인간적인 공명이라 해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는 건 사람이다. 비록 그게 국가의 명령에 따르는 거라 해도,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신성하고 지고한 '초인간적인' 국가 따위 실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합법적 폭력'을 휘두르는 부르조아

소위원회..한줌의 사람-그들 역시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과격한 거일라나.)


갈림길이 나온다. 이사람은 죄를 뉘우치(는 것처럼 보이)고, 죄값도 치렀(다고 생각하)으며, 결과적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저사람은 죄를 뉘우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고, 사회에 돌아가면 계속 죄를 저지를

(처럼 보)이고, 갱생의 여지가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사람을 살릴지 저사람을 살릴지,

누굴 죽여도 되고 누굴 안 죽여야 할지의 갈림길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인간과 '신'의 갈림길이다. 앞선 문장

중간중간을 얼기설기 묶어둔 괄호들, 그게 인간이 신이 아니라는 징표들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오바하는

걸까. 다른 생명을 판단하고 소멸시키는 건 신, 혹은 만물을 주재하는 운명 따위가 존재한다면 그가 맡을

역할이지, 동일한 생명, 인간의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과 저사람을 죽일 때의 죄책감이 다를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아무리 강호순 사건 때나

조두순 사건 때 골프장 갤러리들처럼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쳐죽일 놈, 광화문 네거리에 육시를 할 놈, 어쩌구

막말을 내뱉던 사람들도 밝고 맑은 정의로움과 숭고함을 유지하며 사람을 죽일 수는 없을 거다. 자기 손에

피를 안 묻히니까 막말을 하고 저주를 내뱉고 '죽여라'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거다. 설혹 '내가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하듯 말한다 해도, 또 설마 실제로 직접 손을 써 죽여버린다 해도, 영화 속 집행자들처럼 뭔가가 하나둘씩

무너져버리고 말 거다.


처음에 말을 잘못한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사형제도를 건드리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사람을 사람을

죽이게 만드는 것이 그간 주목받지 못해온 사형제도의 비인간적인 한 측면인 거다. 사회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안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집행'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이상한 게 있다. 왜,

집행의 선고자들, 이 사회와 제도의 정점에 있는 자들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가. 저승에 있다는 

길고 긴 젓가락을 휘두르듯, 그렇게 누군가 다른 사람을 들어 '집행'시키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격무에

시달리거나 피곤해서는 아닐 텐데. 


"우리는 망나니였어" 어쩌구 하는 대사가 있었다. 사회를 위해 법을 집행하는, 좀더 적나라하게는 살인을

떠맡는 존재들. 사회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 그들 안의 무엇인가는 어쩌면 사회로부터 죽임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걸 또 다른 '살인'이라 부르기는 무리일지 모르지만 최소한, 사람으로서의 무엇인가가 무너져

버리는 건 틀림없는 거다.



* 고백 하나, 사실 '사람으로서의 무엇인가'가 무너지는 순간은 꼭 정말로 사람을 죽일 때만은 아닌 거 같다.

거리에서 전경들과 마주 선 채 투석이 난무하거나 파이프를 맞대고 있을 때, 전쟁터와 같은 그런 상황에서 역시

분노와 공포, 혹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뭔가가 툭 끊어지는 느낌, 뭔가

눈먼 야수같은 광기가 뿜어지는 듯한 감각은 두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무엇이었다. 단지 문제가 사형이

살인인지 아닌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성을 조장하는 시스템, 문화, 분위기, 그리고 감수성의 차원까지

확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하는 이야기다. 꼭 생명을 말그대로 끊어버려야 살인이 아닐 거다.

(물론 당연히도 이른바 '폭력집회'가 잘못되었다거나 비인간적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스템과 정책의

문제를 틀 내에서 해결치 못하고 거리에서 파열음을 내게 만드는 기제 자체가 비인간적인 상황을 이끈다는

말이다. 2미터 앞에서 돌을 던지는 보호장구 완비한 전경들이나, 자위적 차원에서 무장을 한 시위대, 문제의

본질은 그 너머에 있다.)




故장자연이 카섹스신과 자살신에 등장한다며 마케팅을 펼쳐 다소 물의를 빚는 영화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 영화가 이 영화였는 줄은 모르고 봤다. 꽤 긴 러닝타임, 그녀의 카섹스와 그녀의 자살은 흐름을 받치는 꽤나

중요한 포인트였다고 생각했고, 아마 그녀의 분량을 덜어냈다면 영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겠다 싶었다. 비록

가고 없는 고인이 영화속에서 싱싱한 육체를 흔들며 신음소리를 내뱉고, 욕조 속에서 손목을 그은 채 죽어있다

해도, 그녀는 연기자로서 마지막 필모그래피를 해낸 거 아닐까. 마케팅에 의도적으로 동원한 측면이 있다면

그건 분명히 그녀의 죽음을 팔아 선전하는 거겠지만, 그녀의 자연스럽고 그럴 듯한 연기는 나무랄 데 없었다.


영화는 다소 가지가 많달까, 좀 많이 쳐냈어야 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러닝타임도 길고, 너무 잡다한 상념과

너무 힘이 들어간 상징들이 즐비하다 싶어, 좀더 밀도있게 응집시켰어야 했다 싶은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꽤나 상류의 삶을 영위하는 30대 초반 세친구들이 보이는 현실적인 삶과 더불어, 장혁의 환상과 상상을

이미지화하여 스크린에 쏘아내면서 영화는 좀 종잡을 수 없이 흐르거나, 때로 관객의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던
 
거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 견디다 못해 나가버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던 걸 테고.


'펜트하우스 코끼리'. 아마도 '펜트하우스'가 세 친구 그들의 부족할 것 없는 삶, 허영에 찬 삶을 상징한다면,

때로 구름 위에서 네다리를 휘젓고 혹은 벽면에서 3D 영상으로 나타나는 '코끼리'란 녀석은 그들의 환상이자
 
막연한 지향점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묘한 제목은 그렇게 현실과 환상을 병치시키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내용은 크게 두 개의 흐름이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채 조울증에 시달리는 장혁의 뇌까림,

코끼리만 찾으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탄식. 그리고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상황에서, 다시

장님 코끼리 만지듯 무언가 막연한 걸 잡고 일어서는 모습. 농도짙은 섹스신과 야하고 야비한 농담들,

그로테스크하고 시니컬한 장면들은 덤이다.


장혁이 어렸을 적 사람이 붐비는 동물원에서 엄마와 했던 약속, 혹시 손을 놓치면 코끼리 우리 앞으로 오라던.

코끼리만 찾으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코끼리 우리도 너무 크고, 주위엔 사람들도 많고, 코끼리란

자식 역시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다며, 인생을 통틀어 가장 두려웠던 기억이라 장혁은

고백하는 장면, 난 여기서 영화가 끝나는 걸까 생각했다. "코끼리만 찾음 되는 건줄 알았는데." 그 말의 울림이

가히 엔딩 수준이었단 말이다. 대학만 가면 되는 건줄 알았는데. 직장만 잡으면 되는 건줄 알았는데. 결혼만

잘하면 되는 건줄 알았는데. 돈만 많이 벌면 되는 건줄 알았는데. 사랑만 하면 되는 건줄 알았는데.


개인적으로는, "내가 나이 삼십 넘어서 이렇게 후지게 살 줄은 몰랐어."라는 대사가 꽤나 와닿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전부 후지게 살고 있었다. 코끼리 따위는 대마 연기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세상, 펜트하우스의

재력으로도 별 수 없는 거다. '가을을 탄다'라는 표현이 내면의 파르르 떨리는 마음을 가을 한철로 몰아넣고

말아버리듯, '사춘기'라는 표현 역시 심약하고 가파르며 위태로운 내면의 풍경을 특정 나이대의 특징인 양

구별짓고 떠밀어버린다. 사실은 '나이 삼십넘어서'도, 혹은 '평생'(이라 해도 좋을만큼의 시간동안) 한결같이

쭈욱 가을을 타고 사춘기/오춘기에 시달리는 건지도 모른다.


제길, 코끼리만 찾으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코끼리만 찾으면 되는 게임이면 참 쉬울 텐데. 어쨌거나 문득

동물원에 가보고 싶어지게 만든 영화였다.





* 스포일러 없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만..


어느 예술작품이나 그렇지만 특히 SF나 환타지류의 작품들은 특히나, 현실에 대한 은유와 시사점이 더욱

눈에 밟히게 마련이다. 맨 땅에 헤딩하듯 백지에서 뻗어나온 상상력이 아니라 감독,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소구할 수 있는 특정한 현실을 울룩불룩 비틀고 치환했기 때문에 그럴 거다. 이미 이 외계인'떼'가 등장하고

거대한 우주선이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떠있는 굉장한 스케일의 SF영화 역시, 빈부격차, 철거민, 성적 소수자에

이주노동자, 심지어 '호모 사케르'(이미 서평을 올린 적 있다. [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라는
 
개념까지 동원해서 해석되고 있다.



워낙 다 맞는 지적들이다. 영화 중 드러나는 외계인과 인간의 대치 상황, 역관계를 고려하면 외계인은 구조적

빈민, 철거민, (지탄받는) 동성애자라거나 이주노동자, 그렇게 이 사회에서 밀려나고 배제당한 사회적 약자의

뚜렷한 상징이 분명하고,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받고 도외시되는 2등 국민인 거다. 피가 튀고

살점이 씹히고 하는 화면도 걸쭉하니 살벌하지만, 그보다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용병에게 사냥당하는 그들의 처지가 더욱 살벌하게 와닿는 이유다.
 

새삼 말을 보탤 필요도 없이 다양한 해석들이 설득력있게 나왔지 싶다. 하나만 딴죽을 걸자면, 외계인의 처지는

현실세계의 '2등 국민', '호모 사케르'들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비록 지도층이 지구 착륙시 대부분 사망해버려

무질서한 군집을 형성한 채 지구인으로부터 천대받고 살지만, 그들이 가진 과학기술은 인류보다 월등한 것이
 
분명하고 정신문명 역시 최소한 낮지는 않아 보인다. 한마디로, 그들은 원래 (지구인에 비해)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었다. 20년동안 멈춰있던 우주선 덕분에 사람들의 두려움과 일종의 경외감 역시 화석처럼 딱딱해져 버린

건지, 다행히도(?) 지구인들은 그들의 약자에 대한 잔혹함을 외계인들에게 여지없이 발휘한다. 덕분에 영화는

3년 후를 기약하는 장면으로 거침없이 내닫을 수 있었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외계인들을 돕는 주인공 남자, 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키를 쥔 쪽은 외계인임을

깨닫게 된다. 남자는 끊임없이 비열하고 자기중심적이며 계산적으로 행동해 왔지만, 그 계산과 복잡한 속셈은

모두 '인간>외계인'이라는 부등호 위에 버티고 서있었던 건 아닐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외계인이

수송선을 숨겨두었다는 걸 알게 된 즈음일 게다. 과거의 힘을 회복할 수 있는 '엑스칼리버'같은 그것.) 그는

이제 외계인이 자신의 명운을 쥐고 있음을, 또 자신과 다른 외계인들의 복수를 해줄 것임을, 그럴 수 있는

힘과 의지와 '선의'를 갖고 있음을 믿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을 향해 입을 벌렸던 부등호가 등을 돌려버렸다.


그래서 궁금해지는 건 그거다. 3년 후, 외계인들이 돌아왔을 때 남자는 인간으로 남기를 고집할까. 선택권이

그에게 남아있기는 할까. 우연찮게도 3년 후, 영화가 개봉한 해를 기준으로 하면 2012년인데, 또다시 2012년의

대재앙을 예고하는 영화인건 아닐까 싶다. 그가 되찾고 싶었던 과거는 사실 그의 아내, 그녀의 사랑 그자체다.

어쩌면, 변신이 완료된 그의 절절한 소원을 뿌리치지 않을 만큼 '인류애, 휴머니즘'을 가진 듯한 외계인들의

배려 덕분에 인류 마지막 아담과 이브가 되어 새로운 별로 이주하게 되는 건 아닐까. 이제 인류, 라기보다는

'인류였던' 남녀 한쌍이 되어.


사실 어느 순간 '외계인'이라는 단어가 혼란스러워진지 오래다. 그들은 외계에서 왔지만 지구에 거주 중이다.

그들과 우리, 가 칼로 자르듯 더이상 산뜻하게 갈라지지도 않게 되어버렸다. '외계인'이란 존재를 철통처럼

포박한 채 물 위의 기름처럼 분리시키고 있던 그 온갖 제재와 표식들은, 그 부적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무작정 밀쳐버리고 떠밀기만 했던 사람들은 아무런 대책없이 소멸될 예정이다. 단, 외계인이 힘을 회복했을 때.



죽음을 앞두고 발휘되는 통찰력.

'인생수업'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통찰력을 빌어 하는 이야기는 그런 거 같다. "지금의 삶으로 충분해,

더이상 바라는 것은 없어"라고 생각할 만큼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라, 지금 여기 내앞에 놓인 순간에 만족하라,

그리고 (매끄럽게 배려된) 감정표현을 두려워하지 마라. 죽음을 앞두고야 깨닫지 말고, 평소부터 정말 중요한

것들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라는 조심스럽지만 강력한 제안이다.



다르지만 같아 보이는 것들.

순응과 포기는 다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고정된, 주어진 부분이 뭔지를 판단하고 그에 대해서는 더이상

떼쓰거나 욕심부리지 않는 것이 순응이다. 반면 어떻게 잘 해보면 자신이 움직여볼 수 있는 것들임에도 지레

힘들다거나 두려워서 손을 놓는 것은 포기하는 거다. 그렇지만 생활로 들어가 구체적으로 보자면 어려워진다.

어디까지가 내가 손대면 바꿀 수 있을 부분일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해도 마냥 손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무엇을 해야 할지, 순응하는 마음자세와 포기하는 마음자세는 대체 어떻게 다른 건지.


현실만족과 현실안주는 다르다. 이른바 Carpe Diem, 지금 이순간에 대해 충만함을 느끼며 매 순간 살라는

이야기는 그럴듯하다. 인생수업의 이 부분은 이미 동양철학, 특히 불교철학에서 직접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보디사트바, 보살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매순간, 매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온통 주의를 집중해서 살게 된다,는

이야기나 '애인을 만날 때 온 정신을 기울여 이야기를 나누고 예컨대 담날 회의, 일거리 생각은 하지 말라'는

현대적 이야기나 핵심은 같다. 그렇지만 역시, 추상에서 구체로 들어가면 어려워진다.

HERE & NOW, '지금 여기'라는 지점이 대체 무엇일까. 온몸으로 살아내야 할 지금의 현실이라 느끼는 건

아주 피상적인 껍데기 현상에 불과할 수 있다. 자신이 연기해야 할 역할도 수십가지인 판에, 자신이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현실'이란 것 역시 잘 생각하면 깔끔하게 정답이 나오는 단순한 문제가 아닌 거다. 쉽게

던지는 '순간에 충실해'란 말이 '점심시간이지만 배가 고프진 않아'란 말과 비슷해지는 건 그래서다. 뭔가

의미는 알겠는데 어쩌란 건지 모르겠는.


감정표현과 감정전가도 다르다. 적절한 때 적절한 수준으로 감정을 표출, 화를 내는 것이던 화를 내겠다는

예고이던 해주는 게 본인에게나 서로의 관계에 좋다는 말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특히 나처럼 딱히

화내지 않고 시니컬하게 반응하며 해소해 버리는 스타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반면 무턱대고 화만 내는

사람이나 화낼 꼬투리만 잡으려는 듯 보이는 사람, 그런 건 감정표현이 아니라 감정전가에 불과하다. 자신이

화났으니 너도 이만큼 화나게 만들어주마, 작정한 듯 계속 갈구고 찌르고 건드리는 사람들. 역시 개념적으로야

딱 떨어지는 정의와 설명이 주어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혼동스럽다.

그러한 감정표현이 자신이 감내해야 할 상황, 받아들여야 할 불만족이나 분노를 다른 이에게 배구공 토스하듯

전가시키는 일인지 아니면 정말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의 어필이 가능하도록 안배된 일인지. 또 내가 생각컨대

적절한 감정표현의 범주에 들어가는 행위가 상대의 입장에선 전혀 불합리하고 치졸한 행위로 보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똑같아 보인다는 문제.(당장 죽지 않는다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저자들의 탓은 아니다. 그렇게 구분하기 쉽고 해내기 쉬운 일이라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가 되서야

겨우 깨닫고 인생을 새롭게 반추하게 되겠는가. 심지어 평생 그런 '정말 중요한 가치'들을 깨닫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많은 판에 말이다. 게다가 머리로 알았다, 라고 아무리 외친들 게으른 몸이

그에 따르는 건 별개 문제다. 죽음이 턱밑까지 쫓아왔음을 느끼고 나서야 슬그머니 마음을 돌려먹는 거다. 


주관적인 입장에서, 나는 이런 교훈들을 체화시켜 살라고 할 때 몇가지 문제점을 의식하게 된다. 우선 타인의

시선에 대해 신경이 쓰인다는, 지극히도 유치하고 허세스런 문제다. 마치 식물이 빛을 따라 움직이듯 사람도

타인을 따라 움직이는 '굴타인성'이 있는 거니까 그렇다고 치기로 하고, 순응과 포기, 현실만족과 현실안주,

그리고 감정표현과 감정전가는 대개 거의 비슷한 외형으로 나타난다. 지금의 인생에 만족해, 라는 말을 뱉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당당한 주체성과 현실만족감이 자리해 있을지 몰라도, 겉으로 보기엔 현실에 안주하거나

심지어 거짓부렁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거다. 심지어 스스로도 불안해진다.


이건 사람들이 대개 타인의 이야기를 너무나 쉽게 하고-그만큼이나 쉽게 잊어버리기도 하지만-무책임하게

한다는 경험칙 때문에 더욱 신경쓰이는 상황이 된다. 다른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다단하고 얼기설기

꼬여있는 줄도 모르면서 잘도 훑어내려 몇몇 문장으로 정리해버리는 우악스런 사람들. 게다가 스스로 그러한

무책임한 '평론가'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더욱 스스로를 검열하고 재우치게 되는 바보스런 처지에 빠지기도

하는 거다.


물론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회광반조'와 당장에도 삶의 현장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이며 온갖 더러운 꼴을

보아야 하는 쌩쌩한 생활인의 마인드는 다를 수 밖에 없다고도 생각한다. 생일을 맞을 때마다 살 날이 한 해

더 줄었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도 더 나아가 오분후에 내가 죽을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당장 초상집에 가서도 처음의 어색함과 침중함도 잠시, 금세 배고프고 졸립고 우습고 욕망하는 게

사람인데 말이다. 배울 게 많으니 수업을 듣는 거니깐, 굳이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 반잔이나, 라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가 있다면.

헬렌 켈러가 이야기했다는 말, "삶은 하나의 모험이거나 아무것도 아니다." 그곳에 쓰인 '삶'이라는 단어는,

혼자만의 삶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 게다. '우리'의 삶은 하나의 모험이거나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고쳐

읽어야 할 거라 생각한다. 결국은 '길동무'의 문제. 아무리 혼자서 인생을 두고 '물 반잔이나'라는 식으로

고쳐 생각하려 애쓰고 그에 맞춰 살아보려 해도, 주위 사람들이 전부 '물 반잔밖에'라는 마인드로 평가하고

충고하고 개입한다면 금세 꺽일 수 밖에 없을 거다. 생각보다 인생은 길지 않던가.


이런 류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인생수업'은 타인을 변화시킨다거나 타인과 함께 행복해진다는 식의

이야기에는 굉장히 조심스럽다고 느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평화, 자신의 행복을 찾는 법에 집중하고

있어 보인다. 어쩔 수 없다. 자기 하나 바로세우기도 힘든데 다른 사람까지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 지나친

과욕이거나 자만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고 모든 사람의 예스를 얻을 수도 없는 거다.

다만 인생에 대한 비슷한 자세를 가진 자기 편 한 명 정도만 든든하게 버텨주면 된다. 그저 꽃밭에서 꽃들이

제각기 자신의 무거운 꽃대궁을 쳐들고 꽃잎을 틔워내어 함께 아름답듯, 그렇게 누군가-그게 정말 단 한명이라

할지라도-와 함께 햇볕을 쪼이고 바람을 맞으며 '반잔 씩이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게 겸손해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일지 모르겠다.


덧댐. 제목이 인생수업, 수업의 시작과 끝이 인생의 시작-탄생과 끝-죽음과 맞닿아 있다면, 아직 이렇게도

사는 게 뭔지, 무엇을 좇아 살아야 할지 모르는 건 어쩜 당연할지도 모른다. 왜 등산나오신 아줌마 아저씨들이

흔히 5학년이네 6학년이네 하는 말이 유난히도 와닿게 만드는 책이다.


인생 수업 - 8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외 지음, 류시화 옮김/이레

이순재 대통령이 펼쳤던 '동아일보', 놓칠래야 놓칠 수 없는 제호 아래 떡하니 버틴 오자, '당청금'. 특정 신문사

혹은 하향평준화되어가는 언론계 맞춤법 실력을 풍자한 게 아닐까 싶었다. 장동건이 참모와 나눈 대화 중

'시장나가고 떡볶이 먹으면 서민정책이야?' '보여주는대로 믿습니다'란 대사야 너무하다 싶게 노골적이었지만,

보통 가정을 꾸리고 사는 최초의 여성대통령 고두심의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모습은 왠지 조금많이 에둘러서

'같기도 안같기도 한' 누군가의 처지를 떠올리게 했던 것 같다.


웃자고 만든 영화에 죽자고 달려들고 싶지는 않고 그냥, 어렸을 적 잠깐 품었던 '대통령'의 꿈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야 워낙 어렸으니 별 생각없이 과학자 되겠다는 짝궁 이겨먹겠다고 난 대통령이나 될까, 서울대 가겠다는

짝궁 이겨먹겠다고 서울대는 시시하고 하바드나 갈까, 이런 식이었던 것 같지만. 조금 머리가 굵어지면서

대통령이란 자리는 뭔가 내가 손을 뻗을까, 생각해 볼 만한 '직업'의 범주에서 벗어나 한줌 정치인들만의

정략적인 계산 결과 얻어지는 자리라 여기게 됐었다. 어쩔 수 없이 뒤가 구리고, 거짓말을 직업적으로 하고,

조선시대 왕과 같은 그런 존재라고.


근데, 이런 대통령도 꿈꿔볼 수 있었던 거다. 이순재 같은 대통령, 장동건 같은 대통령, 고두심 같은 대통령,

그들 역시 별 수 없이 노회하고 얄미운 정치인이고, 각자의 정견에 따른 요상한 정책들을 펼치겠지만, 그래도

꽤나 인간적이지 않은가. 사실은 꽤나 '훌륭'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면, '꽤나 훌륭한' 대통령을 여태

현실세계에서 만나보지 못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뭐, '적당히 훌륭한' 대통령은 한두명 만난 거 같긴 하지만.

웃으라고 만든 영화인 거 같은데, 별 수 없이 자꾸 현실과 비겨보게 된다. 젠장.


한가지, 장진 감독의 작품이란 걸 몰랐다면, 제목만 보고서는 그다지 보고 싶은 맘이 무럭무럭 동하는 영화는
 
아니었다. 왜 이렇게 얌전하고 무색무취한 제목을 달았던 걸까. 좀더 매력적인 문구 없었을까. 이를테면, 음..

음..쉽지 않구나. 그냥 뭐, '이쯤되면 막가자는 대통령질'이라거나, '당선은 됐지만 대통령은 아니더라'. 뭐 요런

제목? 아님 '개나 소, 그리고 대통령' 이런 제목은 어땠을지. 개나소나 다해먹는 대통령질이라는 의미로다가.

이 영화를 보고는 나조차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하고 대통령의 꿈을 한번 꿔볼 수 있는 영화였으니 말이다.









‘100분 토론’을 사랑해주시는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손석희입니다.

제가 ‘100분 토론’을 두 번 진행한 후인 지난 2002년 1월 26일에 이 게시판에 처음으로 인사차 글을 올린 후 7년 10개월 만에 두 번째 글을 올립니다.

제 거취문제가 언론에 보도된 이후 열흘 가까이 많은 분들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걱정도 해주셨고 격려도 많이 받았습니다. 또한 진심으로 저를 아껴주시는 차원에서 조언도 많이 주셨습니다. 물론 저의 퇴진 문제와 관련해서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없습니다. 제가 상황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만, 회사측도 어느 쪽으로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쉽지는 않다고 들었습니다. 보도된 것처럼 제 문제는 노사관계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제가 입장을 좀 정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물론 회사측의 결정에 따른다고 말한 적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퇴진이 결정된다는 전제하에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결국 이 글은 마지막 인사차 올리는 글입니다. 이미 저의 퇴진 문제가 공론화된 마당에 모두에게 부담만 드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혹 제가 ‘100분 토론’에 남게 되더라도 이 상황에서는 프로그램에 도움이 되질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그대로만 받아들여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정치적 배경도 없으며, 행간의 의미를 찾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7년 10개월 전에 제가 이 게시판에 올린 첫 글에 “저는 어떠한 정치적 당파성으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라고 썼습니다. 저는 지난 8년 가까운 시간 동안 ‘100분 토론’을 진행하면서 이 약속을 크게 어긴 적은 없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부에선 저의 퇴진 문제를 논하면서, 편향된 면은 있었지만 퇴진시키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걸 봤습니다. 물론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만, 자칫 이것은 인상비평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실제로 그랬다면 ‘100분 토론’이 오늘날 대표적 토론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토론진행자로서 허물이 없을 순 없겠지만 8년을 진행하고 물러나면서 가질 수 있는 이 정도의 자부심은 허락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저의 퇴진문제가 프로그램의 새로운 출발과 연관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저의 퇴진문제로 더 이상의 논란은 없었으면 합니다.

사실 지난 8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일주일에 하루씩은 거의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이제는 밤샘에서 해방됩니다. 일주일에 세 번씩 했던 회의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남는 시간은 학업과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좀 더 매진하는 데에 쓰겠습니다. 그 동안 새벽 두시가 돼서야 끝나는 프로그램을 시청해주시느라 함께 고생하신 시청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과분한 관심과 사랑을 잊지 않겠습니다. 동시에 저나 ‘100분 토론’을 아프게 비판해주신 분들께도 특별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한 비판 덕분에 또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개편 때까지 이제 저의 진행은 네 번 정도 남았습니다. 11월 26일부터는 새로운 진행자와 함께 한 단계 더 도약하는 ‘100분 토론’을 저도 시청자가 되어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겠습니다.
용산 참사 해결을 촉구하며 단식을 하던 문규현 신부가 쓰러졌다. 문 신부는 단식 10일째 22일 새벽 5시 신월동 성당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문 신부는 숨을 쉬지 못했고 맥박도 뛰지 않았다. 함께 있던 나승구 신부(역시 단식 중)가 심장 마사지를 했고, 119를 불러 이대목동병원으로 옮겼다. 응급조치를 마친 뒤 문 신부는 오전 8시 55분 여의도성모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현재 의식이 없는 상태로 중환자실로 옮겨진 상태다.

   
ⓒ시사IN 장일호
병실을 지키는 문정현 신부와 용산참사 유족 전재숙씨.
나승구 신부는 “오전에 쓰러지실 때 심장마비가 왔다. 병원 쪽에서 그 때 뇌로 산소공급이 안 돼 뇌손상으로 의식이 없다고 한다. 하루 정도 있으면 의식을 회복할 것이라고 한다”라고 말했다.

여의도 성모병원 최승필 응급실장은 “심폐소생술 등 응급 처지를 했다. 현재 의식은 없지만 혈압은 안정된 상태이다”라고 말했다. 최 실장은 “큰 위기를 넘겼지만 의식이 돌아오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의식은 하루정도 지나면 돌아올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전문수
지난 5월18일 저녁 용산 참사현장인 남일당 건물 앞에서 열린 광주항쟁을 기념 및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에 참석한 오체투지로 순례중인 문규현 신부가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

현재 병원에는 전종훈 신부와 문규현 신부의 여동생 두명이 병실을 지키고 있다. 문 신부의 형인 문정현 신부는 문 신부가 중환자실로 옮겨지자 용산 참사현장으로 돌아갔다.
용산 참사현장에서는 문 신부를 비롯해 전종훈 신부, 나승구 신부 등이 단식을 계속 하고 있었다. 전재숙 씨 등 병원을 찾은 용산 참사 유족들은 “(단식)중단하셔야 한다. 안 그러면 저희도 모두 단식에 들어가겠다”라고 말했다.


2009년 10월 22일 (목) 13:38:38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                                                               *                                                               *

네이버 포털 중 '프레시안'과 '오마이뉴스'를 제하고는 기사창에 뜨지도 않았다. 온통 '서울대생이

술통에 쩔어간다'라느니, '김태희가 생각보다 글래머'라느니, '강남 5대미녀, 난 양치질해도 화보'

라느니, 포르노가 어쩌구, 콘돔이 어쩌구저쩌구.


어제는 생각없이 웹툰을 뒤지며 뭔가 찾다가 꽤나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무슨 광고/홍보용

웹툰이 그렇게 많아. 심지어는 삼성 MP3플레이어 아이콘을 소재로 한 웹툰도 있었다. '도전만화'에서

'요일 웹툰'으로 정식 등극하기 위해서, 혹은 보다 많은 노출이 되어 '베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추천을

해주고 높은 평점을 매겨줘야 하는데, 이런 시스템으론 상업자본의 분탕질에 너무 취약하지 않을까.


인터넷이 처음 도입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새로운 문명의 이기에 열광했었다. 정보격차를 줄이고

그야말로 '1인 미디어' 시대의 도래로 양질의 정보가 선순환할 거라 생각했었던 게다. 그런 식의 환상은

이미 사그라든지 오래, 오히려 '빅브라더'라거나 하루키의 1Q84식으로 말하자면 '리틀피플'이 날뛸

가능성만 높이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이전보다 나아지진 않은 것 같다.


문 신부님,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얼른 일어나셔요..ㅜ





#0. '장 그르니에'라는 섬에 대한 조각지도.

그의 글들은 쉽지 않다. '글'이라는 것이 뭔가를 묘사하고 구체화하는 거라면, 그의 글은 그의 내면 세계와

사고 과정을 묘사하고 스케치하는데 치중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자칫 난해하다거나 사변적이라는, 어렵게

쓰려고 참 애썼다, 라는 비아냥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의 짧은 단편들은 그의 내면, 그 구석구석에 대한 부분 지도와도 같다.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누구라 생각하는지, 여행이란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행을 왜 떠난다고 생각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런 굵직굵직하고도 근본적이랄 문제들에 대해 '장 그르니에'라는 이름의 섬을 조금씩 드러내는

지도인 것이다.



#1. 묘하게 빨려드는 헛된 유희의 중독성, 삶.

'이것'과 '저것'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게 삶이다. 두 가지 다 영판 아니다 싶고,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런 게 삶"이고, 일정 시간 후에는 죽음으로 흘러가도록 정해져 있다는 건 억지로라도

잊으려 애쓴다. 생일이 다가오면 한 살 더 먹었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뒤집어 살 날이 한 해 줄었구나,

라고 생각해도 안 되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터무니없는 공포심과 터부, 그 이외엔 없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은

'비인간적'이라 거부당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욱, 유희에 말려들어 덧없는 것 속에서 있지도 않은 것을 찾아 헤매게 되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 항상

좋고 완전한 것이란 없음을 알면서도, 일단 이 세상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악마'의 유혹이 귓전에 맴돌게

되는 거다. "목숨이 붙어 있는데 왜 안 살아? 왜 제일 좋은 걸 안 골라? 왜 좀더 낫게 살지 않아?" 라는. 그말에

따라 달리기를 시작하고 여행을 떠나고. 집 한 채 마련하려고 수십년을 바치고.


니체가 '동일자의 무한반복'이라는 세계의 이미지를 견디어내는 자를 일러 칭했던 '위버멘쉬', '초인'이란

단어는 유사한 현실인식을 궁구하면서도 끝내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장 그르니에에 붙음직한 칭호인지 모른다.

그는, 그렇게 무한한 밀물썰물의 진퇴를 반복하는 세상 가운데에서도 어느 순간 충만함을 맛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무 의미도 없는 파도의 움직임에 문득 의미가 깃드는 순간. 그 한 순간이면 된다. '행복하다'는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는 자는, 어쩌면 그 '한순간'이란 게 생각보다 인생 곳곳에 숨어있음을 알기 때문일지도.



#2. 여행의 대용품, 섬 찾아나서기.

어딘가로 떠난다는 건, 일상의 더께 속에 깊이 파묻혀 있던 감정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툭툭 먼지를 털고

다시금 탱탱하게 충전시키고자 함이다. 그렇지만 장 그르니에의 말을 빌건대, "여행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것이고.."

그는 여행이 꼭 필요함을 말하는 동시에, 또 부질없음을 말한다.


더구나 영상 매체와 온갖 미디어를 통해 세상의 낯선 풍경들, 내 멱살을 잡고 흔들어 정신을 번쩍 들게 해줄

그런 풍경들의 파괴력은 반의 반의 반쯤으로 줄어버린 게다. 이미 어디선가 한번쯤 본 풍경, 어디선가

보았던 구도를 답습하고, 꼬리를 문 관광객들의 뒤를 이어 화살표를 따르는 여행이란, (여행을 테마로 했다

주장하는 블로그를 채우려는 사람 입장에선 많이 아이러니하지만) 자칫 티비 다큐멘터리 하나 보는 것만

못한 지루하고 진부한 경험일 수 있다.


다행인 건, 우리 사이엔 아직 신대륙이 남아있다는 것. 남아있는 정도가 아니라 실은 매우매우매우 무궁무진

하다는 것. 장 그르니에의 단편들이 모인 이 단편선의 제목이 '섬'인 이유는, 그가 허무하고 부질없다 느끼는

삶에 애정과 온기, 열정을 불어넣게 되는 이유가 바로 '섬'에 대한 이해, 유대의 욕망이기 때문일 거다. 그는

본질적으로 삶이 무의미하고 공(空)한 것이라는 인식을 양보하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작은 고양이 한 마리,

두 그루의 나무, 한 번의 악수, 어떤 눈길, 그런 것들로 충분히 삶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섬. 점에서 조심스런 말줄임표로, 기어이는 선으로.

김기덕 감독의 '섬',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사람들이 제각기의 해안선으로 외곽을 단단히 둘러친 '섬'같다는

이미지가 단단히 굳어져 버렸다. 망망대해에 혼자만 존재하는 듯 덩그마니 놓여 있는 자그마한 땅덩어리.

사실 그런 이미지는 많은 선인들이 차용했던 것이었고, 그르니에 역시 그 궤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제각기 떠들고는 있지만, 사실 어느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이해받지 못한다는, 게다가 결국은 그 섬에서

굶어 죽던 나이들어 죽던 제각기의 삶을 소진하고 제각기 죽어갈 뿐이라는 식의 이미지.


다만 그는 '섬'이 갖는 폐쇄성, 소통불가능성, 본원적인 고독, 외로움 따위의 이미지에 더해, 그 복수의 '섬들'에

대한 여행의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저기 저 섬, 한번 여행하듯 떠나보지 않을래? 조금씩 지도를 읽어나가듯

이해하고, 소통해보지 않을래? 육체를 먼 곳에 내동댕이치는 여행이 아니라, 지독히도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다른 육체와 정신들에 대해 여행을 떠나보지 않으련, 하고 그는 권하는 것이다.


장 그르니에의 '섬'이란 그래서 동떨어진 하나의 점 같은 것이 아니다. 그 점들이 하나하나 이어져 조심스런

말줄임표로 서로를 탐색하고, 결국은 갸냘픈 '선'에까지 이르러 탄탄하고 의지함직한 '관계'를 만들어가려는

움직임의 시초, 일종의 씨앗. 그에겐 '보로메의 섬'이었던 그것은 아직 서로에 뿌리를 뻗지 못한 우리들이다.



#4. 글쓰기. '섬'으로의 친절한 초대장.

글쓰기란 그래서 내겐, 일종의 '작도(作圖)'다. 2009년 10월 20여일 어디메쯤의 나라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품고 있고, 이런 내면을 갖고 있음을 전하려는 지도 그리기나 다름없다. '블로그'라는 도구가 새로운 양 하여

뭔가 그에 걸맞는 뾰족한 수가 있지 않겠나 했지만, 그건 전혀 핵심을 놓치고 있었다. 블로그가 문제가 아니라,

글쓰기가 문제다. 그러고 나면 온갖 광고성 리뷰와 내키지 않는-고역스럽고 '일'이 되어버리는-포스팅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장 그르니에의 '사변적이고 난해한' 글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거다. 그의 글을 읽는다는 건, 전혀 경험치 못한

하나의 세계, 섬 안으로 걸어들어간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비록 그가 니힐리즘과 실존주의 철학의 역사적

궤적 하의 인물이고, 까뮈를 예비한 인물이란 정도의 배경지식이 있다 해도, 그래서 일정 지역에 몰려 있는

'군도'에 속해 있다 해도 그는 여전히 '섬'인 채로다. 그런 글조차 없었다면 대체 어디에서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또 대체 어디에서부터 그에게 '들어갈' 수 있을까 싶다.



- 10점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민음사


 #1. 시사IN이 어떤 생각으로 특별판을 내는데 합의했을까.

시사IN이 단순히 자신의 명의로 '추석 특별판'을 무려 15만부나 찍는다는 사실에 들떠서, 인지도가 올라가서 앞으로 많이 팔아먹을 수 있겠다고 덥썩 합의하진 않았을 거라 믿는다. 그렇다고, 시사IN이 집회나 거리선전전에서 뿌려짐직한 '(피/아의 식별이) 뚜렷하고 (문제의 해법이) 단도직입적으로 선명한' 그런 본래적 의미에서의 '찌라시'용 글투나 주장에 강하다고 자신했으리라 생각지도 않는다. 설마.

시사IN이 시사저널 때부터 이어온 고유한 특징으로, 또 척박한 한국 언론계에서의 나름 존재의 의미로 자각하고 있었던 것은 건조하고 객관적인 글투, 좌/우 진영논리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차분함과 냉정함 아니었나. 그것이 시사 주간지로서의 본령이자 언론의 기본이라고 믿는 언론사, 언론'기업'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한 속사정은 모르겠으되 일단은 어느 모로 보나 추석맞이 특별판, 더구나 선명한 정견을 가진 시민단체의 의뢰를 받아 특별판을 제작하고 배포한다는 아이디어가 너무...뭐랄까, 허를 찌른 나름의 '역발상'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편집권의 소재 문제라느니, 용산참사/4대강 사업 등에 대한 논조 조율의 문제라느니,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대강 그렇다. 애초 왜 시사IN이 그런 특별판을 자신의 제호로 내는데 합의했을까. 특별판의 내용으로만 추측컨대 마치 어정쩡한 상업성 추구와 '먹물'의 '곤조'가 죽도밥도 아닌 것을 만들어내 버린 꼴이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순진하게 '광고입네~', '광고 끌어온 기사네~'하고 드러내는 최근의-그리고 그 수는 점점 늘어나는 느낌의-몇몇 기사들과 비슷한 느낌이다. 15만부의 매력, 추석의 대목시장을 놓칠 수 없다는 마음 vs 그래도 나름의 건조하고 분석적인 기사체를 고수하겠다는 마음. 그리고 그 결과는 어정쩡한 '추석 특별판'과 모두의 불만으로 돌아온 듯 하다. 


#2. 시사IN의 정체성은 무엇이라고 내/외적으로 규정짓고 있을까.

그렇다고 시사IN 추석 특별판이 이명박의 거짓 친서민행보를 까고, 4대강과 용산참사에 대한 핏대세운 기사를 담았다면 해결이 되는 그런 간단한 문제도 아니다. 최근 시사IN 기사를 보면 나름 감정이 생생한 '대담'의 방식도 활용하고 조금씩 기사의 열기를 더해가려는 시도가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시사IN은 언론 시장에서 상당히 딱딱하고 건조한, 심심하고 지루한 매체로 인식되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작년 촛불사태 때 시사IN이 거리편집국을 꾸리고 나오면서 시작된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점차 모두에게 유치하도록 선명한 '피/아'의 식별을 강요하는 시대의 문제라는 게 더 맞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시사IN은 뜨거워질 텐가, 아니면 여태껏 견지해왔던 차갑고 냉정한 표정을 고수할 텐가. 이미 시사IN을 아낀다 자처하는 '열혈'독자가 생겨났고, '촛불'들은 시사IN에 대한 이성 이전의 호감을 굳힌 상태다. 그런 단어들, 사실 시사IN의 딱딱하고 무미한 글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시사IN의 롤모델은, 사견이지만 손석희 정도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손석희 정도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추석 특별판 15만부'로 희석되고 휘발되는 무딘 정체성과 감성, 고민에서 나오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3. 시사IN은 인터넷 소통을 포기할 참일까.

이곳에 종종 글올리는 걸 즐기는 1人으로, 이번 '추석 특별판' 문제가 불거지고 벌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조마조마했는데 역시나다. 느리다. 느리고, 무뚝뚝하다. 느리고, 무뚝뚝하고, 고압적이다.

문제가 제기되고 많이 지나서 '시사IN 기자' 한분이 댓글을 달았다. 더 궁금하면 편집국에 전화하란다. 이건 아니다. 시사IN 홈페이지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가. 시사IN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고 관심도 없는 사람이 여기까지 와서 글쓰고 댓글달고, 그러지 않는다. 최소한 부정기적인 가판대 독자거나 정기 구독자, 못해도 (광범한 의미에서의) 심정적 지지자다.

편집국장의 편지에서 자랑스럽게 '온라인팀'의 신설을 알렸다. 온라인의 특장은 신속성과 양방향성이다. 아직 가동되지 못했으니 조금만 더 참아달라고 말하기는 민망할 거다. 댓글 단 기자님께는 그나마 '전화하라'는 댓글이라도 달아주어서 감사할 지경이다. 인터넷 공간, 인터넷 공간에서의 소통에 대해 이 정도로 무심하고 시크해서야. 그래도 내 페이퍼 독자에겐 따뜻하겠지, 라고 위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기사를 차갑고 무겁게 쓰는 건 (개인적으로) 환영이지만, 소통에 있어서까지 그래서야 곤란하다. 지겨운 단어, '소통'이다.

아직까지 시사IN이 왜 '추석 특별판'을 내게 된 건지, 사실 확인 자체도 할 방법이 없다. 인터넷을 활용해 '소통'해라, 정도의 팁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이런 정도로 일이 퍼지고 커지기 전에 무언가 공식적인 입장 표명과 사실 확인이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닐까. 문제가 처음 제기된 이곳은 '시사IN 놀이터'지 '버려진 놀이터'는 아니지 않은가.


*                                                           *                                                           *

원래는 블로그에 쓴 글을 시사인 홈페이지(http://www.sisain.co.kr/)의 '자유게시판'에 옮겨 올리는데,

이번엔 순서가 바뀌었다. 검색엔진에서 '시사인', '추석', '특별판' 따위 검색어로 찾아보면 대체 무슨

사건인지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시사인이란 주간지가 추석 때 특별판을 언소주 등 시민단체의 의뢰로

15만부 찍어냈는데, 애초 의뢰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매우 불분명한 논조의, 주제도 합의된 대로 나오지 않았다

한다. 사실 관계는 아직 모르겠지만, 가장 압도적인 상념은 그거다.


시대가 하 유치하여 그야말로 선명한 '피아 식별'을 요청하고 있다. 빨간 색과 파란 색 가득한 촌스러운

태극무늬 단면 위에서 뛰노는 게 아니라, 한뼘쯤 떨어져서 주변의 사괘도 구경하고 하얀 바탕도 감상할 만한

여유, 그런 메타적인 시각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단순히 시민단체의 요구가 그랬다는 거 때문이

아니라, 시사인이 그런 '찌라시'로서의 역할을 자처한 것 때문이다. 그게 시대적 위기의식의 발로였던,

아니면 상업적 위기의식의 발로였던간에.)




수십명 남녀의 난교, 여성의 자위, 남성의 아크로바틱한-스스로의 입을 사용한-자위, 남자들/여자들의 동성애, 남자들의

쓰리썸, 관음증에 S/M까지. 왠만한 성인영화나 포르노물에서도 한꺼번에 다루기 힘든 소재들이다.

그런 이슈들을 한꺼번에 다룬 '발칙한' 영화, 그래서 한국에 수입될 때 이런저런 말들도 많고 제약도 적잖았던 영화,

숏버스. Short Bus. 숏버스란 '능력있고 결함있는' 자들을 위한 뉴욕의 어느 모임 공간의 이름.


제이미와 제임스를 넘나드는 주인공 남남 커플의 이야기가 중심축이랄 수도 있겠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겨졌던

장면은 스무살 어간의 뽀송뽀송하고 아름다운 청년-그것도 모델출신-이 숏버스에서 어디선가 많이 본, 낯익은 할배와

조우하는 장면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요?" "그럴 수밖에, 내가 뉴욕시장이었으니까."


희끗희끗 헐벗은 머리에 쭈글쭈글한 얼굴을 가진 그 뉴욕 전 시장 할아버지는, 알콜 기운도 없이, 맨 정신으로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물론 한쪽 방에선 벌거벗은 젊은 남녀의 난교가 질펀하고, 대마 연기 자욱하게 피어올려지는

공간에선 여지없이 남녀/남남/여여/혹은 '창의적인 방식'의 교합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와중이긴 하다.) 자네는 무슨

잘못을 하고 여기에 왔는가. 별거 아닌 거였겠지. 고향이란, 자신의 정서적 보금자리라 여겨지는 고향이란, 때론 무지하게

가혹하고 냉엄해질 수 있다네. 그게 뉴욕처럼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오랜 것을 존중할 줄 아는, 세상에

몇 남지않은 해방공간이라 해도 말일세.



잘못이란 건, 자신이 저지른 것일 수도, 혹은 누군가 무엇인가 자신에게 각인시켜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뇌와

클리토리스를 연결해 오르가즘을 만들어낸다는 일종의 마법회로처럼, '나'와 '내가 느끼고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알기
 
힘든 블랙박스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제임스(혹은 제이미)는 어렸을 적 아버지의 성적

가혹행위나 매춘의 트라우마 때문에 사랑을 돌려주지 못한다. 외견상 문제될 게 크게 없는 커플 상담가/섹스 카운셀러

유부녀는 엄격한 동양적 가정교육과 아버지의 도착적이다시피한 감시로 인해 정작 오르가즘을 못느끼는 석녀란다.

새디즘을 만끽하며 가죽옷과 채찍에 탐닉하는 '제니퍼 애니스톤'은 정작 자신의 이름조차 철저히 숨겨온 여리고

상처투성이인 영혼일 뿐이고, 주인공이랄 남남 커플의 일상을 쉼없이 따라가는 스토킹행위로 관음증적 욕망을 해소하는

맞은 편 집의 남자는 사실 사랑하는 남자의 손을 잡는 것조차 숨막혀 하는 순둥이다. 그런 식이다. 뭐 때문에 뭐, 이렇게

단선적으로 말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백퍼센트 자신의 모자름이나 부족함 때문이라 말하기도 힘든 상황,

그래서 블랙박스, 마법의 회로일 게다.


섹스야 제각기 침대 속의 내밀한 이야기이듯, 사실 이 영화에서 각자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블랙박스'의 해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은 자살시도라는 격하고 돌출적인 행위를 통해,

혹은 반편향의 과도하고 도발적인 성적 탐닉을 통해, 혹은 스스로 흘러내리는 껍질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등의 방식이 있겠지만, 해결책이야 각자가 꼬여있는 방식이 다른 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고, 심리적인 문제가 으레 그렇듯

겉으로 드러나는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거다. 제각기의 방식으로 제각기 맞닥뜨려야 할 문제.


정작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건 그들이 문제에 직면하는 방식이었다. 뉴욕의 시장이었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중후한 연세의 '아저씨', '아줌마'이든, 남녀노소 미추를 불문하고 각자의 '계급장'과 '사회적 자본'들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막혀버리고 뒤틀려버린 감정선을 되찾겠다 나서는 것, 그리고 전 뉴욕시장 할배가 그랬듯 얼마나

나이가 들었고 외부의 평판을 쌓아놨던 간에 스스로의 결핍과 부족함을 자인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 그건 '여태 경험치

못한 오르가즘을 되찾는 모험'일 수도,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는 무작정한 몸부림(자살까지 감수하는)'일 수도,

'한평생 쌓아올린 경력과 평판보다 스스로의 가치와 취향을 지켜내려는 자존감의 싸움'일 수도 있는 거다.


그럴 수 있을까. 성적 쾌락에 대한 탐닉과 '비정상'적인 성적 취향, 성적 흥분의 인과를 차갑게 이야기하기 이전에, 그렇게

벌거벗은 상태로 스스로를 응시하고 자신의 감각에 충실한, 결국은 스스로의 자존을 지켜낼 수 있는 용기를 지켜내고
 
있을까. 그 시험대가 대마초 연기 자욱하고 아마도 땀내와 정액냄새 질펀할 그런 공간이란 건 딱히 중요치 않다. 오히려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억눌리고 비틀린 욕망을 마주할 수 있는 근본적인 곳이란 '그럴듯한 포장'도

가능할 거고, 간단하게는 그저 '어디라도 상관없었다'라는 식의 빗겨나감도 가능할 거다. 어디서든, 그게 성당의 고해소가
 
되었건 사랑하는 이의 품속이 되었건 온갖 욕망과 희열이 둥둥 떠다니는 성적 해방구가 되었건, 스스로를 외면하거나
 
치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면 되는 거다.


아마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을 의식한 듯한 그 할아버지 캐릭터는, 그런 혼몽하고 '난잡한' 분위기에 자신을 맡겨버리고

멍하니 휩쓸리지 않고 되려 중심을 잡은 채 스스로를 건져내고 지켜내러 그곳에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에서 그 궤적을

좇는 다른 몇몇 젊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단순히 살색 그림-검은색이던 분홍빛이던 노란색이던-만

노출되었던 다른 수많은 영혼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중심을 잡으러 왔는지 휩쓸리러 왔는지. 그것 역시 실은 지극히도

개인적인 영역,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왈가왈부할 수 없는 영역인 게다.


다만, 나이가 몇이 되었건 사회적 지위와 성취가 어찌 되었건, 그들은 뭔가를 찾으러 왔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찾으러

움직일 만큼의, 그리고 필요하다면 이것저것 다 벗어제낄 만큼의 용기와 결단력이 있다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게 꼭 섹스여야 하는지, 동성애나 SM이나 관음증이나 쓰리섬이나 난교여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스스로의

결핍과 결락감을 인정하고 새롭게 (되)찾으려 드는 그들의 움직임은 단순한 육체의 리드미컬함은 아니었다.


사실 또 개인적으로는 그렇게도 생각한다. 꽤나 멀리, 그리고 이상적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인간의 이른바

'시초축적'이 시작되고 역사가 시작된 건, 자유로운 성욕을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이데올로기로 비끄러매면서부터

비롯한 건 아닐까 하고. 사랑할 만큼만 먹고 살면 되었을 세상이, 누군가를 먹여 살리고 안정적이고 반영구적인 잉여를

남기기 위해 사랑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어 버린 건 일종의 비극일지 모른다고.


총구에 장미꽃을 일일이 꽂아주었던 68혁명의 정신, 히피의 정신이란 게 그런 건 아니었을까. 생명살상을 위한 총알이
 
발사되는 총구가 상징하는 차갑고 흉폭한 남성성에 여리고 섬세한 장미꽃,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 그걸 가능케 하는

세상의 몇 남지않은 해방공간, 개인적으로도 직면하기 쉽지 않은 자각의 순간, 다 벗어던지고 알몸의 스스로를

새삼스럽게 쳐다볼 수 있게 해주는 '숏버스'.
 

거긴 머물러 살 곳은 아니지만, 최소한 잊지 않고 가끔씩 들러줘야 하는 공간임에는 틀림없다.





김현중이 신종 플루 확진을 받았다고 하는데, 오늘 '코코 샤넬'을 보려고 영화관에 갔다가 내가 앉았던 자리가 바로 F4.

김현중이 완쾌할 때까지라도, F4의 멤버로 활동을...? (퍽퍽;;; )


코코 샤넬은 어느 자의식 강하고 자존심센, 그리고 패션 감각이 탁월했던 여성의 일생을 그린 영화였다. '샤넬'브랜드와는

별로 관계치 않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질투로 말미암아 사랑하게 된' 남자와 '이해하지만 현실적으로 제약당한 채

사랑하는' 남자 둘과 벌이는 사랑이 주된 뼈대가 되는 이야기랄까. 프랑스 영화스럽게 잔잔하고 차분하면서도 곧잘

배우들의 연기로 화면이 꽉 들어차는 장면들이 와닿았다. 근데 그 여주인공, 오드리 투투 인가, 강혜정하고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나 혼자일까.


강혜정한테 예전에 싸인 받았던 게 어딘가 있을 텐데, 못 찾겠다. 그거 찾으면 포스팅해서 저도 결혼식 가고 싶어요~라고

징징댈라 했는데.ㅜ 타블로와의 결혼, 축하합니다~^^



* 저는 진심으로 김현중씨의 빠른 쾌유를 바랍니다. 오해 없으시길~^^;


[일문일답] 정운찬 총리 내정 소감 기자회견

정운찬 총리 내정 소감 기자회견 일문일답

 

  
신임 국무총리에 내정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3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교수연구실에서 지인들로부터 축하전화를 받고 있다.
ⓒ 유성호
정운찬

- 정 내정자가 총리직 수락 전제조건으로 '실세총리', 권한 확보가 가능하면 수락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명박 대통령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비서실장과 2번 만났고 대통령과 1번 만났다. 나에게 많은 도움 주겠다고 했지만 나와 대통령 간에 실세다 아니다 말할 겨를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대통령을 잘 보필해서 우리나라를 좀 더 강한 경제의 나라, 통합된 사회 만드는 것이 목표지 대통령과 총리가 얼마의 권한을 갖는다 따지는 것은 의미 없다."

 

- 경제학자로서 언론기고를 통해 (현 정부의 경제정책을)토목경제다 하면서 비판해왔다. 현 정부 경제정책이 총리 지명자 신념과 다르다는 지적이 있다.

"경제학자로 이런 저런 비판한 것 사실이지만, 과거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지금도 만나 생각해보니 그분(이명박 대통령)과 나의 생각 다르지 않다.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해야한다는 점에서 같다."

 

- 시기적으로 언제 제의가 와 수락했나.

"매우 최근이다. 신문지상에 내이름 오르 내린 건 오래 전이나 대통령 비서실장 만나고 한 건 아주 최근이다."

 

- 4대강 사업의 경우 계속 비판적 의견 말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나.

"대운하에 대해선 반대입장 분명히 했다. 환경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대운하가 우선순위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나 4대강은 수질개선과 관련 있기 때문에 쉽게 반대하기 어렵다. 청계천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친환경적으로 만들고 4대강 주변에 중소도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반대할 의사 없다."

 

- 장관 6명 됐는데 대통령과 협의를 했나.

"누가 됐는지는 알지만 그 인사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나에게 이런 이런 사람이 어떻냐고 해서 내가 '좋다'고 했다."

 

- 윤증현에 대한 생각.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관료로서도 훌륭하고 경제를 보는 관점을 존경해 왔다."

 

- 행정복합도시가 최근 논란이 돼 왔는데 행복도시 원안 추진할 건가?

"경제학자인 나의 눈에는 아주 효율적인 플랜은 아니다.그러나 이미 그 계획 발표했고 사업을 많이 시행해서 원점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동시에 원안대로 다 하는 것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행복도시는 부분적으로는 하되 대신 충청도 분들 섭섭치 않을 정도로 여러가지 계획을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수정은 이뤄지겠네.

"내 생각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수정은 아마..."

 

- 이명박 정부와 정치적 컬러 맞다고 생각하나.

"나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된 적이 없다. 1년전 대통령 선거 때 출마를 전혀 고려 안한것은 아니지만 당시 어떤 당과 연결된 적은 없다."

 

- 총리직 후 대권도전 계획 가지고 있나.

"그런 생각은 전혀 없다. 대통령 보필해서 경제 살리고 사회통합하는 것이 급선무다."

 

- 대선 도전 가능성은?

"생각 안해봤다."

 

- 본인은 충청권 총리라 생각하나?

"나는 충청도 출신인 것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나는 충청도 총리가 아니라 대한민국 총리이다."


원칙도 없고 신념도 없는
당신에 대한 호감을 철회하고, 당신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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