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 2개월이 지났음에도 도무지 지지부진한 채 '망각'되기만을 기다릴 뿐인 듯한 상황을 보다 못한 만평

그리시는 분들이 나섰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보았었다. 그래서 내 다이어리에 남았던 짧막한 메모 한 줄.

"3.27-4.9. 용산gaja전. 이대 1번출구방향 공정무역카페 '티모르'".

메모를 따라 찾아간 '티모르'는 자칫 놓치기 쉬울만큼 조그마한 입구를 따라 오르면 2층에 있는 조그마한

공간이었다. 전시회를 까페에서 어떻게 한다는 걸까 궁금했었는데, 아주 단순했다. 벽면을 따라 빼곡히 만평들을

걸어놓았고, 까페에 오르는 계단 양옆에도 크게 프린트된 만평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자리를 잡기 전 그림들을

따라 한바퀴 까페를 돌았다.

이번 만평전은 용산, 그리고 가자지구의 참사를 주제로 하고 있었다. 용산 문제는 아무래도 이명박 대통령에게

화살이 귀결되기 마련인지라, 이명박을 직접 때리는 만평이 대다수였다. 입구에서 마주쳤던 이 사진작품은,

뚜비,나나, 뽀 버전 보라돌이 이명박..정도 되려나.

올해 2월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며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비판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가자지구를 맹렬히 공격했을 때의 이야기를 담은 만평이다. 당시 이스라엘 집권당에서 코앞에 닥친 총선을 위해,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총풍'을 불어오기 위해 가자지구의 피바람을 일으켰다는 날카로운 지적. 역시..절묘하게

핵심을 짚은 그림은 살짝살짝 빗겨나가며 주절대는 몇백마디 말보다 강력하다.

사진 한 컷, 그림 한 장, 그리고 짧막한 촌철살인의 대사 몇 마디. 까페 안에 전시된 만평들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용산참사, 그리고 가자지구의 그칠날 없는 피바람의 이야기는 그렇게 정제되고 압축된 프레임 속에서

거의 유사한 지위의 집단으로 나타난다. 사회에서 배제된, 존재를 부정당하는, 약자. 

그 반대편에 선 것은, 탱크와 총칼과 콘테이너박스로 무장한..스스로 합법화한 폭력 집단.

단지 한 컷짜리 만평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이미 한번쯤 본 기억이 있는 프레시안의, 경향의, 그리고

죄송스럽게도 이름조차 생경한 각종 지역신문의 네컷짜리, 혹은 그보다 긴 컷을 가진 만화들도 있었다.

마침 내가 갔을 때엔 까페 안에 사람들이 없어서 맘편히 돌아다니며 전부 구경할 수 있었다. 아마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차를 마시거나 공부를 하고 있었다면, 그 자리 윗켠에 붙은 만평들을 보는 건

아쉽지만 포기해야 했을 거다.

까페 '티모르'는 동티모르에서 공정무역 원칙에 입각해 재배한 커피를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이대 근처에 이런 까페가 있다니, 주말에 혼자 커피 한잔 시키고 앉아서 책 한권 늘어지게 보기 좋은

곳인 듯 하다. 만평들을 보는 것 외에 예기치 못하게 얻은 또 하나의 소득.

원래 만평가분들이 구경온 사람들의 캐리커쳐도 무료로(!) 그려준다고 읽었어서, 카운터에 물어봤더니

그 분들은 어제그제 계시다가 오늘은 안 나오셨다고 한다. 자못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으니 일단 한구석의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자그마한 수첩이 낙서장, 혹은 메모장의 소임을 띄고 동그마니 놓여 있었다.

요런 게 바로 만평 아닌가. 조금만 더 시의성 있는 이슈를 공간 내에 넣었다면 완벽했을 텐데,

저 근육과 주름살이 꿈틀대는 이명박의 얼굴을 보라. 둘러멘 삽자루 하며. 어느 센스높으신 분의

작품인지 모르겠지만, 혼자 메모장을 첨부터 끝까지 구경하는 내내 킬킬거렸다.

테이블 위에 낙서장과 함께 놓여있던 필통..이랄까. 엉성하게 깍인 몽당연필 세자루가

차곡차곡 메모장에 더해지고 있겠지.

내가 자리잡은 테이블 위에 내려뜨려졌던 귀여운 새모양 장식.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빨강새가

둔탁하니 길지도 않은 날개를 활짝 핀 채 테이블 위를 날고 있었다. 이슈가 이슈이니만치 때론 살벌하고

독하다 싶은 만평들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띌 수 밖에 없던 귀엽고 앙증맞은, 속 편한 빨강새.

이런 식인 게다. 용산을 밟아버린 용역, 견찰, 검찰, 그리고 그 위의 돈다발로 사자머리인양 치장/위장한

개발사업자(x데) 개 네마리가 서로 학학대며 붙어먹고 있는 그림. 더욱 가관인 건 그 개 네마리뒤에 붙은

검은 쥐 한마리가 '사랑했읍니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 그들의 단백질 팽팽하게 곤두선 넓적다리 아래에는

꼬물대다가 이리저리 밟히는 '벌레'들의 꽥꽥대는 소리. 빨강새의 핀트가 나가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정말 잔혹하달까, 그림이..그리고 세상이.

만평들로부터 눈을 돌려 창밖을 내려보니 꽉찬 3월의 햇살이 유유하다. 내 맞은편으로 아까운 줄도 모르고

떨어져내리는 햇볕이 빛과 어둠의 영역을 가르지만, 까페 안에는 온통 용산과 가자지구를 '망각'으로부터

구출해야 한다는 외침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햇살이 좋은, 여느 때와 별다를 바 없는 날에도 사람이 죽고,

기억에서 밀려 또다시 죽곤 하는 거다.

그냥, 가슴이 답답해져서 나왔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이슈들, 이제는 왠만한 건으로는 놀라거나 분노하지도 않을 만큼 굵어져버린 신경줄,

너무나도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세상이라 사람 몇 명 죽어나간 건 고작 한 달짜리 단기기억으로 족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어쩜 계속 이 문제를 잡고 시비거는 사람이 '쪼잔하고 순진해 빠진,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라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미안한 척이라도, 립서비스라도 해줄 생각않는 그 오만함과 막장스러움은

역시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 3. 27 ~ 4. 9 "용산 GAJA 전", @ 까페 '티모르'.



#1. 시크릿은 실컷 웃을 수 있는 연극이다.

공연 소개를 아무리 보아도 이게 대체 어떤 류의 이야기를 할 지는 감이 잘 안 왔다. 대충 사랑이야기이겠거니,

게다가 정신병원이 배경이고 니가 미쳤니 내가 미치고 있느니 사실은 미치지 않았느니 운운 이야기하는 걸로 보아

뭔가 '미쳤다'는 것이 갖는 의미를 보여주려는 연극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한시간 반 정도의 공연 시간, 한시간 십분 정도는 계속 웃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삼십분 정도는 빵 터졌으며, 또

그 중 이십분 정도는 박장대소를 했던 듯 하다. 정신병원이란 배경에서 능히 상상할 수 있을 또라이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해내는 배우들도 훌륭했고, 이러니저러니 덧붙은 살들이 있긴 했지만 역시나 재미를 극대화하는데

주력한 티가 역력한 에피소드와 개별 씬들도 딴 생각없이 실컷 웃을 수 있을만큼 재미있었다.


#2. 시크릿은 관객과의 소통을 특히 유의한 연극이다.

어느 연극이 안 그렇냐만은 초반부터 무대와 관객석 간의 유리장벽이 통쾌하게 부숴진다. 쉼없이 관객을 호명하는

배우와 그에 응하며 맘껏 즐기는 관객들의 호흡이 역시 연극에 대한 만족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지 싶다.

내가 보았을 때는 특히 반응이 좋았던 관객 한 분이 계셨어서 더욱 큰 웃음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던 것 같지만,

시크릿이란 연극 자체가 관객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다만 다소 '상식적인 수준'에서 쉼없이 이야기되는 정치나 시사에 대한 이야기들은, 에잇, 까놓고 말해 이명박에

대해 빈정대며 이리저리 비난/비판하는 대사들은, 오히려 너무 '대통령 까댐'이라는 시류에 편승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진부하고 내용이 없어서 아쉬웠다. 차라리 좀더 생생하고 와닿는 이슈를 가지고 그런 이야기를 끄집어 내고

희롱했다면 좀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3. 바이올린 현이 파들파들 떨며 우는 소리는, 자칫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첩경이기 쉽다.

메시지나 교훈 따위 끄집어내지 않고 그냥 실컷 웃고 즐기면 되는 연극이라고 생각했는데, 불쑥 바이올린 현이

길게 울다간 파들파들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극의 분위기를 급냉각시키며 분위기를 잡으면 좀 당황스럽다. 이러한

경우 그런 감정의 오르내림을 함께 하며 몰입할 수 있다면 멋지겠지만 대부분 관객들이 그간의 몰입 상태에서

튕겨나오는 당혹감을 느끼기 때문에 다소 아쉽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곤 하듯이, 웃겼다 울렸다 관객을

주무르려는 제작자의 의도에 대한 반감은 이러한 튕겨나옴에서 비롯하는 걸 거다.


설득력이 약하거나 다소 급작스럽다 싶은 감정의 과잉 분출, 변환이 역시 시크릿에서도 나타난다. 뭔가 인생에

대해, 사람에 대해, 사랑에 대해 한 마디 해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는지 정신병원의 노인은 광소를 터뜨리며

뭔가 아포리즘이 담긴 문단을 읊고는, 기적처럼 스르르 제혼자 열린 문으로 퇴장하는 거다. 좀더 작은 목소리로,

좀더 담백하게, 그리고 좀더 간접적으로 담을 수도 있는 이야기였을 텐데 너무 전면에 불쑥 내세워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굳이 그전까지의 유쾌한 분위기를 확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는지 싶기도 하고.


#4. 비록 손발은 잠시 오그라들었지만.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재미있었던 연극이었다. 그리고 연극계 최초로 관객들을 대상으로 '다단계식' 홍보를 한다는

당찬 선언에 맞게 대박났으면 좋겠다. 갠적으론 홀로 감정몰입해 흐느끼는 바이올린 선율은 왠만하면 쓰지 않았음

좋겠다. 이미 배우의 연기만으로도 충분한데, 거기에 바이올린 소리까지 더하는 건 오바 아닐까 싶다. 그리고도 넘

진부한 연출 아닐까.


애초 위드블로그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리뷰어를 신청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차례로

그의 미술작품들, 그의 수기노트들, 그리고 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이 그의 삶 어느 순간순간에 포진해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꼬리를 물고 일어난 이미지들이 바로 내가 지금껏 다 빈치 그에 대해

그나마 갖고 있던 조각조각 분절된 정보들이었던 게다.


사람들은 자신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 혹은 이해하기 꺼려지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앞에 두고 쉽게

멈추어 버리곤 한다. 그렇게 자신의 동서남북 사방으로 멈추어선 경계 그 내부를 세계의 전부인양 살아가지만,

때론 그 경계를 거침없이 넘어서는 사람들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오늘날 현대과학이

검증해낸 과학적 사실들을 일찍이 깨우쳐버린 다 빈치나 갈릴레이 같은 사람들. 이해하기 꺼려지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종교적, 문화적 배경과 당대의 상식에 반함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고 실험을

극한까지 밀고 나갔던 프로이드나 니체 같은 사람들.


그 중 운 좋은 사람은 후대인들을 자신의 어깨 위에 태워 좀더 넓은 세계를 보여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나중에야 재평가되고, 아 이러저러한 것들은 이미 그가 얘기했던 것들을 '재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구나, 하는 식으로 그치곤 한다. 다 빈치가 그렇다. 그의 아이디어와 과학적 시도, 방법론들은 너무

일렀다. 그야말로 그는 '너무 일찍 깨어난 사람'이었다.

                                                                                      ⓒ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 책에서는 특히 그가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할 만큼 엄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현상과

그 이면에 감추어진 작동 원리를 탐구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난잡한 수기 노트에 적힌 글과 그림을 봐도

그가 얼마나 자연 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어 했는지 열의가 느껴진다.

물론 이 책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생을 재구성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책이다.

그가 자신의 사고를 기록해둔 수기노트들조차 제대로 재구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니 그의 삶을 좀더

명료하게 알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사실 욕심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다 빈치 앞에 붙는 온갖 수사들, 천재니 편집증

환자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사생아였다느니 등등 손쉽게 레테르를 붙이고 멈추는 게 아니라 조금은

더 그의 삶이 어떤 궤적을 그렸는지 따라가며 인간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풍성하고 탐스러워 보이는 하얀 수염이 뒤덮인 늙은 현자로서 멈춰있는 다 빈치가 아니라, 그의 어릴 적 모습과

커나가는 모습, 그리고 인간적인 여러 고민과 어려움들 앞에서는 지금의 나와 별다를 바 없는 그의 반응을 보면서

왠지 친밀한 느낌이 한층 커져 버렸다.

이 책은, 정확히 말하자면 청소년용 인문/사회 도서다. 몰랐다. 처음에는 책을 받고 나서 이런 책을 보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나 다소 망연했었지만 생각보다 재미있게 볼 수 있었고, 또 무엇보다 책 마지막 쯤에 있는 다 빈치의

수기노트를 웹상에서 일부 열람 가능토록 한 웹사이트 주소를 여기저기 쑤시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


현재 그의 수기 중 유일하게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빌 게이츠가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레스터 사본은 물이 가진

모든 성질과 움직임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한다. http://www.amnh.org/exhibitions/codex/index.html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으니 한번 죽 읽어보며 수기노트에 담긴 그림 일부를 감상하는 것도 좋을 듯.


또 영국국립도서관의 사이트에서는 마치 책장을 넘기듯 그의 수기노트를 열람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데,

왜 그런지 난 계속 못 보고 있다. http://www.bl.uk/collections/treasures/digitisation.html#leo 


레오나르도 다 빈치 - 10점
캐슬린 크럴 지음, 장석봉 옮김, 보리스 쿨리코프 그림/오유아이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노종면 위원장(언론노조 YTN지부장)의 체포 소식을 듣고 이명박 정부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옛말에 '미인 박명'이라고 했는데 '명박 박명'이라고 바꿔야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지금 증거 인멸, 도주의 우려가 있는 것은 누구냐"라고 물었다.

"이명박 정권은 지난 1년간 증거를 인멸하고 도주해야할 일만 했다. 부자 세금 깎아줘서 올해 12조, 내년 25조씩 세금이 줄어들게 됐다. 그리고서 장애인을 비롯한 복지 예산을 줄였다. 양도 소득세 깎아주면서 철거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사교육비를 줄인다며 사교육을 경기부양 산업으로 만들고 있다. 세금깎아 자동차 팔리게 한다며 에쿠스는 깎아주고 경차는 안깎아준다. 지금 도주,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 것은 이명박이다"

그는 "노종면 위원장의 구속을 보며 '아 이제 나도 감옥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론사 노조위원장이 감옥갈 정도면 나머지는 온전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느냐"며 "그러나 감옥이 가득차면 청와대 무너진다. 우리는 역사가 가르쳐준대로 싸울 것이다. 임기를 마친 독재정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09.03.27. 프레시안 "감옥이 가득 차면 청와대가 무너진다"


노종면 YTN 노조위원장의 구속에 이어 이춘근 MBC "피디수첩" PD가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YTN 노조에서 낙하산 사장에 반대하며 출근저지투쟁을 했다는 '업무방해' 혐의로, 피디수첩에서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보도를 내보내 국가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정말.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세상이다.
                                                                                         ⓒ CBS 노컷뉴스(www.nocutnews.co.kr)


그리고 포털 대문은 온통 '김연아', '임창용', '북한 로켓' 이야기다.

포털을 쥐고 있는 조중동, 주요 언론이 의식적으로 YTN와 MBC에 대한 이러한 언론 탄압(의 소지가 있는) 사건을

보도하지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사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대체. 아니 선명한 건지도 모른다.

(참고 : 09.03.28. 미디어오늘 "한겨레, 'YTN·MBC 사태 보도' 조선일보 16배")
                                                                                                                 ⓒ 09.03.28. 경향


감옥이 가득차면 청와대가 무너진다.

                                                                                             ⓒ 손문상 화백 ( onscar@pressian.com )

안데르센의 대표적인 동화들인 '인어공주', '백조왕자', '장난감 병정', '성냥팔이 소녀'와 '눈의 여왕' 등 총 6편의

작품들이 '어른들을 위한' 새로운 버전으로 출간되었단다. 어른들을 위한 버전이라니, 인어공주와 왕자와의 종을

넘어선 정사 장면이라도 묘사되었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장난감 병정이 실은 메조키스트였다는 충격 고백이 독점

게재되어 있을지 궁금했지만, 글쎄, 그림체가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보다 조금 더 섬세하고 정묘해진 덕분에

어른들이 들고 다니며 읽어도 '모냥새 빠지는 일'은 없겠다 싶은 정도 외에는 뭘 바꿨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자체로 사실 큰 공헌일지 모른다. 어렸을 적의 '내'가 이해했던 그 내용과 교훈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그 동화를 공식적으로 어른이 된 '내'가 다시 한번 집어들어 펼쳐볼 만한 유인을 제공한다는 것 자체로

말이다. 동화를 읽으면서 계속해서 마주쳤던 건, 언젠가 기억도 나지 않는 까마득한 옛날, 마치 화석처럼 조용히

내 어딘가에 새겨졌던 느낌들과 나름의 해석이었고, 또 그것과 부딪히고 반발하는 지금의 '나'였다.
어렸을 적에는 진짜 감정과 가짜 감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우습게도 나는 인어공주가 되어 나의 감정만을 유일시했으며, 나를 넘어 옆나라 공주를 바라보는 왕자의 감정은,

그리고 그에 호응하는 옆나라 공주의 눈빛은 가짜라고 여겼다. 굳이 악의가 철철 흐르는 '바다마녀'라거나 장난감

병정에게 시련을 안기는 '괴물 인형', 혹은 '눈의 여왕'이 아니라 해도 주인공의 감정을 가로막고 좌절시키는 것은

모두 가짜, 혹은 나쁜 놈이었다. 어쩌면 동화 속 주인공 자리는 항상 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옹이구멍만한

시야와 턱없는 자존감이 바로 내 모든 감정이야말로 진정한 것, 순수한 것이라고 믿게 하는 원동력이었을 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지 받아들여지는 감정과 받아들여지지 않는 감정이 있을 뿐인 것 같다.

모두 진짜라면 진짜고, 또 가짜라면 모두 가짜일 그 감정들의 흐름 속에서 때로 막히고 때로 뚫리면서 슬펐다가

기뻤다가, 그렇게 아프고 행복한 것 뿐인 건 아닐까.


기억도 나지 않는 어렸을 적부터 주입되었던 '선은 반드시 악에 승리한다'는 기묘한 믿음이 조금씩 사각대며

부식되고 있으면서도, 아직 공룡뼈처럼 완고히 남아있는 최후의 보루랄까, '진심은 반드시 통한다'(그리고 나만이

진심이다)라는 식의 잔재가 남아 자신의 감정이 거부됨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 뿐인지도 모른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내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들도 얼마나 혼탁하고, 변덕스러우며, 진실하지

못한가. 마음이 진실하다는 건 또 뭐냐, 흘러가는 감정을 '단어'와 말의 힘을 빌어 오롯이 퍼올릴 수 있을까

따위 근본주의적인 질문엔 잠시 등을 돌린 채 나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보면, 차이는 어쩜 아주 작은 것

하나 뿐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마치 망망대해에 점점이 솟아오른 섬과 같다면, 좀처럼 이어지기 힘든 

인근 섬 그 어딘가에게 연결되고 회신을 받을 수 있는 감정, 그리고 누군가에게도 걸쳐지지 못한 채 힘없이

자유낙하하다 바다 저 아래로 가라앉을 뿐인 감정. 그렇게 이어지고 이해받는지, 아닌지의 차이.


인어공주의 마음은 왕자에게 전해지지 못했으며,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며, 되돌려받지 못했을 뿐이다.

옆나라 공주의 마음은, 왕자의 마음은, 서로에게 전해졌으며, 받아들여졌고, 그리고 어렸을 적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걸 믿는 건 잠시 유예할지라도 당분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감정을 되먹여줄 게다. 그리고

인어공주의 아픈 감정만큼 그들의 달콤한 사랑 역시 진실하다.


동화 속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주인공일 수 있고, 저마다 감정을 쌓아온 역사와 이야기를 자신의 입으로 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진심은 반드시 통하는 것은 아니며 자신의 감정이 진짜일까 가짜일까 답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소모하느니 감정이 받아들여지도록 최선을 다해 움직여라, 정도가 어른들을 위한 동화의 훌륭한 교훈이 아닐지. 


그렇게 자신의 진심이 언제고 거부당할 수 있다는 걸 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잔인하지 않은가. 어른들에게조차.




눈의 여왕 - 6점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김양미 옮김, 규하 그림/인디고
한국독립영화협회와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 개최하는 “아시아 독립영화의 오늘” 기획전 티켓을 받게 되었다.

3월 13일부터 18일까지 열리는 이번 기획전에 나온 14편의 작품 중에는 '똥파리', '농민가', '개종자', '유토피아' 등

투박하고 날것의 느낌이 풀풀 풍기는 제목도 있었고, '리버 피플'이니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나 조금은 더 제목에

신경을 쓴 듯한 영화도 있었다.


그 중 시놉시스로나 제목으로나 가장 흥미를 끌었던 것은 양익준감독의 '똥파리'란 작품이었다. 오늘 아침 신문에

이 작품이 프랑스 도빌 영화제에서 대상과 국제평론가 협회상을 받았다는 기사가 났던데..아쉬운 일이다. 

내가 보았던 "멘탈"이란 영화는 너무 길었고, 너무 난해했달까. 무려 두시간 십오분동안 영화를 보고 나니 완전히

지쳐버렸댔다.


멘탈. MENTAL. 精神. 정신질환자들이 겪고 있는 두 가지 질병에 대해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들이 '정상인'과 달리 앓고 있는 특정한 질환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들이나 다른 '정상인'를 막론하고

잠복해있는 '정신질환자' 혹은 정신병자 혹은 (막나가자면) 미친사람, 또라이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 당장 내가

모종의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고 하면 영화 속 그들이 보여줬듯 사회로부터 완전히 밀려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주변인의 시각에서 굳이 냉랭함과 두려움을 읽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영화는 2시간 내내 그들이 사실 그렇게 두렵지 않으며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음을 보여주는데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신병원에서나, 가정 도우미가 드나드는 집에서나,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는 카메라를 따르다 보면

그들의 앙상하고 낯선 이미지에 살이 붙고 피가 돌면서, 그들도 별반 유별난 구석 없는 사람이라는..그런 식의

진부한 결론을 향해 치닫는 듯 하다.


그렇지만, 마지막 15분쯤 카메라는 한 정신질환 노인이 복지시설 내로 들어와 자신의 일을 보는 것을 실시간에

가까울 정도로, 집요하게 따라간다. 그 15분간 솔직히 그 노인이 어떻게 그렇게 막 나갈 수 있는지, 주위 신경

안 쓰고 하고 싶은대로 하는 태도를 보며 복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그런 거였을까? 쉽사리 '그들과 우리는

다르지 않은 같은 사람'이라며 눈으로 보고 이해하는 것과, 직접 그들의 복지와 생활을 챙겨야 하는 입장에서

맞닥뜨리는 건 역시 다르다고? 고작 15분여 그 노인의 언행과 태도를 마주했을 뿐인데도 참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의 의도인 걸까, 아님 나만 그렇게 느낀 걸까는 모르겠지만.



블로그를 운영하는 건 몇 년전부터 해보고 싶던 일 중 하나였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디지털 공간 속에는 모두의 마음 속에, 입가에 물려있는 말풍선이 오밀조밀

자유롭고 분방하게 퍼져있을 거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돈과 힘, 목소리 크기로 터무니없이 적은 한줌의 사람들의

말풍선이 다른 사람들의 말풍선이 들어갈 공간 따위 모두 짓눌러버린 현실세계보단 조금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일,

그리고 조금 더 작은 것들에 귀기울일 수 있는 공간일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보다 넓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내게 낯설거나 새로운 것들을 얻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그런데 실은, 이 공간도 그런 소박한 소망이 실현되기는 쉽지 않은 공간이었다. 인력과 예산을 얼마나 동원할 수

있는지가 곧 목소리의 크기, 그리고 그에 대한 반향(조회수, 댓글, 추천...)이 얼마나 되는지를 거친 수준에서나마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이 블로그에 투입할 수 있는 '시간'과, 블로그에 기록할 만한 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한

'예산'이 보다 노출되기 쉽고 인기있는 블로그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 중 빠질 수 없는 두 가지 요소라는 건 대부분

동의하지 않을까. (물론 그 두가지 요소를 투입하도록 이끄는 정신적 요소는 '열정'이나 '흥미'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대량 양산되는 포스팅들 사이에서 좋은 글을 찾는 건, 조회 수나 댓글 수, 추천 수 등으로 서열화되어

노출되는 시스템 하에서 종종 더욱 어렵다는 느낌에 빠지곤 했다.


그런데 이 두 요소, '인력'과 '예산'이라는 측면에서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괴물, 그 결과 자연스레 조회수와

댓글 수, 추천 수 등 노출의 수준이 거의 19금을 넘나드는 괴물이 결정적으로 이 공간을 교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복지부와 국방부가 파워 블로거라고?"라는 이번주 시사인의 기사를 보면, 외부 필자의 기고를

받거나 기자단을 따로 두고서 쉼없이 '생활 컨텐츠'를 양산하고 있는 복지부의 '따스아리'와 국방부의 '동고동락'

두 블로그가 올해 최고의 블로그로 손꼽히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괜찮을까? 힘센 정부가 쥐고 있는 언로가 이미

충분할 텐데, 그런 언로를 통해 제대로 발표하고 그것으로 평가받는 이미지를 쌓아올릴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생활밀착형'의 말랑말랑한 이슈들로 포장하려 하는 건 아닌지 싶어진다. 


정부가 할 일은 블로그 공간을 활용해 연성 이슈나 전파하고 '착한 정부'의 이미지 홍보에 열올릴 게 아니라,

기업들 같은 다른 사적 공간의 힘있는 액터들이 그런 식으로 블로그 공간을 오염시키고 교묘하게 조정하는 걸 막는

거 아닐까 싶다. 이미 인터넷 클럽, 카페에서 위력을 발휘했듯, 기업들의 홍보나 상대기업 이미지 깍아내리기 등을

위한 리뷰 포스팅이나 각종 신제품, 신기술에 대한 포스팅이 개인 명의의 블로그인양 위장된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포털 사이트 첫 화면에 뜨려면 수천만원이 필요하다는 식의 공공연한 이야기와 이런 기업들의

숨겨진 블로그가 결합되는 순간 나타날 폐해란 불을 보듯 뻔하다.


'소통'이라는 건, 그리고 그 소통을 위해 개개인이 적절한 발언대와 '마이크'를 확보한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어렸을 적 소년동아던가, 뭐 그런 신문사 기자가 따갔던 내 멘트가 어이없이 왜곡되는 일을 겪었다거나,

제대직후 떠난 배낭여행길 비행기 안에서 한비야씨와 나눴던 이야기가 그녀의 입장에서 재구성되어-난 나조차

낯선 타자가 되어-칼럼화되는 일을 겪었다거나, 뭐 그런 개인적인 경험도 이유겠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고 싶어한다고 믿는다. 최대한 왜곡되지 않을 수 있고, 최대한

억압받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을 지키기 위해 정부가 해야 할 몫이 있다고 생각한다. 앞장서서 그 '블로그 생태계'를

교란하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다.

이번주 시사인 78호에 실린 "사교육 공포에 맞서기"란 특집기사를 읽으면서, 최근 신해철의 학원 광고 출연을

두고 다소 혼란스럽던 머리가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신해철이 평소 보였던 전향적이고 진보적인 성향들에

익숙해졌던 사람들은 그가 갑자기 대형 입시학원의 광고판이 되어 노홍철스러운 표정을 짓는 걸 이해하지 못했고,

신해철은 다시 이러저러한 소음과 함께 장문의 '소명서'를 제출했지만 이는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신해철이 과연 평소 말과 어긋난 행동을 한 것인지 아닌지 그 사안 자체에 대해서는 진중권이 말했던 것처럼

"임금님 머리꼭대기에서 희롱하며 노는 광대"가 갖춰야 하는 선명하고 자극적인 언사에 대한 너그러움으로

넘어가면 될 일이 아닐까 싶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남았다.


입시학원을 광고하는 게 나쁜 건가. 도덕적인 견지에서라도,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껴야 하는 게 맞는 걸까. 

사교육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냥 교육제도에 신물이 난 한국사람들이니만치,

'공교육의 썩은 등걸 위로 마구 돋아난 독버섯'같이 사교육 자체를 덮어놓고 부정하는 거 아닐까. 혹은 부정하는 척

실제로는 대책없이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사교육이 싫어요"라고 옹알이하듯.


어쩌면 우리는, 공교육이 교육 문제의 알파이자 오메가며 공교육을 살려야 한다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대원칙과

당위적인 선언 앞에서 이것저것 하는 시늉만 깔짝대면서 사교육에 대해서는 손놓고 머리도 놓고 멍하니 있었는지

모른다. 공교육만 살아나면, 공교육만 제대로 되면, 최소한 이번 정책만 제대로 펼쳐지면, 자연스레 모든 게 술술

풀려나갈 것처럼.


사교육은 신해철이 말한 대로 자동차나 핸드폰처럼 필요하면 쓰고 아니면 마는 개인의 중립적인 '선택사양'인 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교육 천국 불신 지옥'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정신없이 앞만 보며 아이를 내몰고 스스로

숨통을 조여가는 학부모들이 바로 우리의 부모,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모습 아닌가. 누구 하나 강요한 적은 없지만,

또 누구 하나 자유로울 수도 없는 게 사교육을 향한 '다단계 돈지르기' 도박인 게다. 결국 밑천이 많은 사람만이

이기게 되는 비정한 도박.


이미 대부분의 자녀들은 첫번째 싸움에서부터 지고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구조라지만, 어쨌든 모든 부모는 그의

자녀들이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하길 바라고 기대하면서 가용한 모든 자산을 판돈으로 걸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이 신해철을 비판했던 건, 그의 이미지를 과대평가했던 것도 있지만 사교육 자체를

자신들의 삶을 질곡하는 어떤 것, 그러므로 없어져야 할 것, 최소한 불건전한 것으로 암묵적이나마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교육은 가능한 최소한으로 줄어드는 게

자연스럽고 또 바람직한 귀결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여전히 답은 오리무중이다. 사교육이 나쁘다, 라고 말해봐야 당장 아이가 부쩍 자라고 옆집 아줌마가

옆구리를 찌르며 믿지못할 교육정책의 널뛰기가 눈앞을 어지럽히는 당사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자신들이 이 땅의 교육시스템과 전혀 무관하게 한평생 살아갈 자신이 있거나 자신과 자신의 아이, 혹은 연관된

사람들이 그로 인해 적잖은 피해를 입는다 해도 초연할 자신이 있는 것처럼 구름 위에서 노니는 '메타적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대부분 질척하고 더러운 매트릭스 위의 말들처럼 꼬질해지고 천박해진 채 아이를

들춰업고 땅을 밟으며 걸어야 하는 범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사 중에서도 특히 '상처투성이 우리가 희망입니다'라는 꼭지는 여러모로 인상깊었다.

사교세, '사교육 없는 세상'이 아니라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라는 명칭의 시민 단체의 이야기다. 그 기사는

참 드물게도 직접 사교육을 시켜야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입장에 서서 사교육을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가 조금 모자라는 부분만 채워주면 될 것 같은 욕심이 시시때때로 발동하는 부모로서, 그렇지만 이렇게

자신의 어린시절과 똑같이 아이를 옥죄는 게 답답한 부모로서, 선험적이거나 구조적인 이야기에서부터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당장 자신의 아이와 자신의 삶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에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있다니 다행이다. 거대담론과 이념적 정향, 당위적 지향에 따른 것이 아니라 생활의

불편함을 못 견디고 거리로 나섰던 촛불들처럼 그렇게 사교육의 목에 방울을 달아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니, 널리 알려져서 우선은 '사교육 걱정'이라도 없어졌으면 좋겠다.



THE WHITE HOUSE

Office of the Press Secretary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For Immediate Release                                                March 10, 2009

 

Remarks of President Barack Obama
A Complete and Competitive American Education
US Hispanic Chamber of Commerce

March 10, 2009
Washington, DC

 

Every so often, throughout our history, a generation of Americans bears the responsibility of seeing this country through difficult times and protecting the dream of its founding for posterity. This is a responsibility that has fallen to our generation. Meeting it will require steering our nation’s economy through a crisis unlike any we have seen in our time. In the short-term, that means jumpstarting job creation, re-starting lending, and restoring confidence in our markets and our financial system. But it also means taking steps that not only advance our recovery, but lay the foundation for lasting, shared prosperity.

 

I know there are some who believe we can only handle one challenge at a time. They forget that Lincoln helped lay down the transcontinental railroad, passed the Homestead Act, and created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in the midst of Civil War. Likewise, President Roosevelt didn’t have the luxury of choosing between ending a depression and fighting a war. President Kennedy didn’t have the luxury of choosing between civil rights and sending us to the moon. And we don’t have the luxury of choosing between getting our economy moving now and rebuilding it over the long term.

 

America will not remain true to its highest ideals -and America’s place as a global economic leader will be put at risk- unless we not only bring down the crushing cost of health care and transform the way we use energy, but also do a far better job than we have been doing of educating our sons and daughters; unless we give them the knowledge and skills they need in this new and changing world.

 

For we know that economic progress and educational achievement have always gone hand in hand in America. Land-grant colleges and public high schools transformed the economy of an industrializing nation. The GI Bill generated a middle class that made America’s economy unrivaled in the 20th century. And investments in math and science under President Eisenhower made it possible for Sergei Brin to attend graduate school and found an upstart company called Google that would forever change our world.

 

The source of America’s prosperity, then, has never been merely how ably we accumulate wealth, but how well we educate our people. This has never been more true than it is today. In a 21st century world where jobs can be shipped wherever there’s an internet connection; where a child born in Dallas is competing with children in Delhi; where your best job qualification is not what you do, but what you know - education is no longer just a pathway to opportunity and success, it is a prerequisite.

 

That is why workers without a four-year degree have borne the brunt of recent layoffs, Latinos most of all. And that is why, of the thirty fastest growing occupations in America, half require a Bachelor’s degree or more. By 2016, four out of every ten new jobs will require at least some advanced education or training.

 

So let there be no doubt: the future belongs to the nation that best educates its citizens - and my fellow Americans, we have everything we need to be that nation. We have the best universities and the most renowned scholars. We have innovative principals, passionate teachers, gifted students, and parents whose only priority is their child’s education. We have a legacy of excellence, and an unwavering belief that our children should climb higher than we did.

 

And yet, despite resources that are unmatched anywhere in the world, we have let our grades slip, our schools crumble, our teacher quality fall short, and other nations outpace us. In 8th grade math, we’ve fallen to 9th place. Singapore’s middle-schoolers outperform ours three to one. Just a third of our thirteen and fourteen-year olds can read as well as they should. And year after year, a stubborn gap persists between how well white students are doing compared to their African American and Latino classmates. The relative decline of American education is untenable for our economy, unsustainable for our democracy, and unacceptable for our children - and we cannot afford to let it continue.

 

What is at stake is nothing less than the American dream. It is what drew my father and so many of your fathers and mothers to our shores in pursuit of an education. It’s what led Linda Brown and Gonzalo and Felicitas Mendez to bear the standard of all who were attending separate and unequal schools. It is what has led generations of Americans to take on that extra job, to sacrifice the small pleasures, to scrimp and save wherever they can, in the hopes of putting away enough, just enough, to give their child the education that they never had. It’s that most American of ideas, that with the right education, a child of any race, faith, or station, can overcome whatever barriers stand in their way and fulfill their God-given potential.

 

Of course, we have heard all this year after year after year - and far too little has changed. Not because we are lacking sound ideas or sensible plans - in pockets of excellence across this country, we are seeing what children from all walks of life can and will achieve when we do a good job of preparing them. Rather, it is because politics and ideology have too often trumped our progress.

 

For decades, Washington has been trapped in the same stale debates that have paralyzed progress and perpetuated our educational decline. Too many supporters of my party have resisted the idea of rewarding excellence in teaching with extra pay, even though we know it can make a difference in the classroom. Too many in the Republican Party have opposed new investments in early education, despite compelling evidence of its importance. It’s more money versus more reform, vouchers versus the status quo. There has been partisanship and petty bickering, but little recognition that we need to move beyond the worn fights of the 20th century if we are going to succeed in the 21st Century.

 

Well, the time for finger-pointing is over. The time for holding ourselves accountable is here. What’s required is not simply new investments, but new reforms. It is time to expect more from our students. It is time to start rewarding good teachers and stop making excuses for bad ones. It is time to demand results from government at every level. It is time to prepare every child, everywhere in America, to out-compete any worker, anywhere in the world. It is time to give all Americans a complete and competitive education from the cradle up through a career. We have accepted failure for too long. Enough. America’s entire education system must once more be the envy of the world.

 

And that is exactly what the budget I am submitting to Congress has begun to achieve. At a time when we’ve inherited a trillion-dollar deficit, we will start by doing a little housekeeping, going through our books, and cutting wasteful education programs. My outstanding Secretary of Education Arne Duncan will use only one test when deciding what ideas to support with your precious tax dollars. It’s not whether an idea is liberal or conservative, but whether it works. This will help free up resources for the first pillar in reforming our schools - investing in early childhood initiatives. This isn’t just about keeping an eye on our children, it’s about educating them. Studies show that children in these programs are more likely to score higher in reading and math, more likely to graduate from high school and attend college, more likely to hold a job, and more likely to earn more in that job. For every dollar we invest in these programs, we get nearly ten dollars back in reduced welfare rolls, fewer health costs, and less crime. That is why the American Recovery and Reinvestment Act I signed into law invests $5 billion in growing Early Head Start and Head Start, expanding access to quality child care for 150,000 more children from working families, and doing more for children with special needs. And it is why we are going to offer 55,000 first-time parents regular visits from trained nurses to help make sure their children are healthy and prepare them for school and life.

 

Even as we invest in early childhood education, let’s raise the bar for early learning programs that are falling short. Today, some children are enrolled in excellent programs. Some are enrolled in mediocre ones. And some are wasting away their most formative years. That includes the one fourth of all kindergartners who are Hispanic, and who will drive America’s workforce of tomorrow, but who are less likely to have been enrolled in early education programs than anyone else.

 

That is why I am issuing a challenge to our states. Develop a cutting-edge plan to raise the quality of your early learning programs. Show us how you’ll work to ensure that children are better prepared for success by the time they enter kindergarten. If you do, we will support you with an Early Learning Challenge Grant that I call on Congress to enact. That is how we will reward quality, incentivize excellence, and make a down payment on the success of the next generation.

 

Second, we will end what has become a race to the bottom in our schools and instead, spur a race to the top by encouraging better standards and assessments. This is an area where we are being outpaced by other nations. It’s not that their kids are any smarter than ours - it’s that they are being smarter about how to educate their kids. They are spending less time teaching things that don’t matter, and more time teaching things that do. They are preparing their students not only for high school or college, but for a career. We are not. Our curriculum for eighth graders is two full years behind top performing countries. That is a prescription for economic decline. I refuse to accept that America’s children cannot rise to this challenge. They can, they must, and they will meet higher standards in our time.

 

Let’s challenge our states to adopt world-class standards that will bring our curriculums into the 21st century. Today’s system of fifty different sets of benchmarks for academic success means 4th grade readers in Mississippi are scoring nearly 70 points lower than students in Wyoming - and getting the same grade. Eight of our states are setting their standards so low that their students may end up on par with roughly the bottom 40% of the world.

 

That is inexcusable, and that is why I am calling on states that are setting their standards far below where they ought to be to stop low-balling expectations for our kids. The solution to low test scores is not lower standards - it’s tougher, clearer standards. Standards like those in Massachusetts, where 8th graders are now tying for first - first - in the world in science. Other forward-thinking states are moving in the same direction by coming together as part of a consortium. More states need to do the same. And I am calling on our nation’s Governors and state education chiefs to develop standards and assessments that don’t simply measure whether students can fill in a bubble on a test, but whether they possess 21st century skills like problem-solving and critical thinking, entrepreneurship and creativity. That is what we will help them do later this year when we finally make No Child Left Behind live up to its name by ensuring not only that teachers and principals get the funding they need, but that the money is tied to results. And Secretary Duncan will also back up this commitment to higher standards with a fund to invest in innovation in our school districts.

 

Of course, raising standards alone will not make much of a difference unless we provide teachers and principals with the information they need to make sure students are prepared to meet those standards. Far too few states have data systems like the one in Florida that keep track of a student’s education from childhood through college. And far too few districts are emulating the example of Houston and Long Beach, and using data to track how much progress a student is making and where that student is struggling - a resource that can help us improve student achievement, and tell us which students had which teachers so we can assess what’s working and what’s not. That is why we are making a major investment in this area that we will cultivate a new culture of accountability in America’s schools.

 

To complete our race to the top requires the third pillar of reform -- recruiting, preparing, and rewarding outstanding teachers. From the moment students enter a school, the most important factor in their success is not the color of their skin or the income of their parents, it’s the person standing at the front of the classroom. That is why our Recovery Act will ensure that hundreds of thousands of teachers and school personnel are not laid off - because those Americans are not only doing jobs they cannot afford to lose they are rendering a service our nation cannot be denied.

 

America’s future depends on its teachers. And so today, I am calling on a new generation of Americans to step forward and serve our country in our classrooms. If you want to make a difference in the life of our nation; if you want to make the most of your talents and dedication; if you want to make your mark with a legacy that will endure - join the teaching profession. America needs you. We need you in our suburbs. We need you in our small towns. We need you in our inner cities. We need you in classrooms all across our country.

 

And if you do your part, we’ll do ours. That is why we are taking steps to prepare teachers for their difficult responsibilities and encourage them to stay in the profession. That is why we are creating new pathways to teaching and new incentives to bring teachers to schools where they are needed most. It is why we support offering extra pay to Americans who teach math and science to end a teacher shortage in those subjects. And it is why we are building on the promising work being done in South Carolina’s Teacher Advancement Program, and making an unprecedented commitment to ensure that anyone entrusted with educating our children is doing the job as well as it can be done.

 

Here is what that commitment means: It means treating teachers like the professionals they are while also holding them more accountable - in up to 150 more school districts. New teachers will be mentored by experienced ones. Good teachers will be rewarded with more money for improved student achievement, and asked to accept more responsibilities for lifting up their schools. Teachers throughout a school will benefit from guidance and support to help them improve.

 

And just as we have to give our teachers all the support they need to be successful, we need to make sure our students have the teacher they need to be successful. That means states and school districts taking steps to move bad teachers out of the classroom. Let me be clear: if a teacher is given a chance but still does not improve, there is no excuse for that person to continue teaching. I reject a system that rewards failure and protects a person from its consequences. The stakes are too high. We can afford nothing but the best when it comes to our children’s teachers and to the schools where they teach.

 

That leads me to the fourth part of America’s education strategy - promoting innovation and excellence in America’s schools. One of the places where much of that innovation occurs is in our most effective charter schools. These are public schools founded by parents, teachers, and civic or community organizations with broad leeway to innovate - schools I supported as a state legislator and United States Senator.

 

Right now, there are caps on how many charter schools are allowed in some states, no matter how well they are preparing our students. That isn’t good for our children, our economy, or our country. Of course, any expansion of charter schools must not result in the spread of mediocrity, but in the advancement of excellence. That will require states adopting both a rigorous selection and review process to ensure that a charter school’s autonomy is coupled with greater accountability - as well as a strategy, like the one in Chicago, to close charter schools that are not working. Provided this greater accountability, I call on states to reform their charter rules, and lift caps on the number of allowable charter schools, wherever such caps are in place.

 

Even as we foster innovation in where our children are learning, let’s also foster innovation in when our children are learning. We can no longer afford an academic calendar designed when America was a nation of farmers who needed their children at home plowing the land at the end of each day. That calendar may have once made sense, but today, it puts us at a competitive disadvantage. Our children spend over a month less in school than children in South Korea. That is no way to prepare them for a 21st century economy. That is why I’m calling for us not only to expand effective after-school programs, but to rethink the school day to incorporate more time - whether during the summer or through expanded-day programs for children who need it. I know longer school days and school years are not wildly popular ideas. Not in my family, and probably not in yours. But the challenges of a new century demand more time in the classroom. If they can do that in South Korea, we can do it right here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Of course, no matter how innovative our schools or how effective our teachers, America cannot succeed unless our students take responsibility for their own education. That means showing up for school on time, paying attention in class, seeking out extra tutoring if it’s needed, and staying out of trouble. And to any student who’s watching, I say this: don’t even think about dropping out of school. As I said a couple of weeks ago, dropping out is quitting on yourself, it’s quitting on your country, and it is not an option - not anymore. Not when our high school dropout rate has tripled in the past thirty years. Not when high school dropouts earn about half as much as college graduates. And not when Latino students are dropping out faster than just about anyone else. It is time for all of us, no matter what our backgrounds, to come together and solve this epidemic.

 

Stemming the tide of dropouts will require turning around our low-performing schools. Just 2,000 high schools in cities like Detroit, Los Angeles, and Philadelphia produce over 50% of America’s dropouts. And yet, there are too few proven strategies to transform these schools. And there are too few partners to get the job done. So today, I am issuing a challenge to educators and lawmakers, parents and teachers alike - let us all make turning around our schools our collective responsibility as Americans. That will require new investments in innovative ideas. That is why my budget invests in developing new strategies to make sure at-risk students don’t give up on their education; new efforts to give dropouts who want to return to school the help they need to graduate; and new ways to put those young men and women who have left school back on a pathway to graduation.

 

The fifth part of America’s education strategy is providing every American with a quality higher education - whether it’s college or technical training. Never has a college degree been more important. And never has it been more expensive. At a time when so many of our families are bearing enormous economic burdens, the rising cost of tuition threatens to shatter dreams. That is why will simplify federal college assistance forms so it doesn’t take a PhD to apply for financial aid. And that is why we are already taking steps to make college or technical training affordable.

 

For the first time ever, Pell Grants will not be subject to the politics of the moment or the whims of the market - they will be a commitment that Congress is required to uphold each and every year. Further, because rising costs mean Pell Grants cover less than half as much tuition as they did thirty years ago, we are raising the maximum Pell Grant to $5,550 a year and indexing it above inflation. We are also providing a $2,500 a year tuition tax credit for students from working families. And we are modernizing and expanding the Perkins Loan Program to make sure schools like UNLV don’t get a tenth as many Perkins Loans as schools like Harvard. To help pay for all of this, we are putting students ahead of lenders by eliminating wasteful student loan subsidies that cost taxpayers billions each year. All in all, we are making college affordable for seven million more students with a sweeping investment in our children’s futures and America’s success. And I call on Congress to join me - and the American people - by helping make these investments possible.

 

This is how we will help meet our responsibility as a nation to open the doors of college to every American. But it will also be the responsibility of colleges and universities to control spiraling costs. And it is the responsibility of our students to walk through those doors of opportunity. In just a single generation, America has fallen from second place to eleventh place in the portion of students completing college. That is unfortunate but it is by no means irreversible. With resolve and the right investments, we can retake the lead once more. That is why, in my address to the nation the other week, I called on Americans to commit to at least one year or more of higher education or career training, with the goal of having the highest proportion of college graduates in the world by the year 2020. To meet that goal, we are investing $2.5 billion to identify and support innovative initiatives across the country that achieve results in helping students persist and graduate.

 

And let’s not stop our education with college. Let’s recognize a 21st century reality: learning does not end in our early 20s. Adults of all ages need opportunities to earn new degrees and skills. That means working with all our universities and schools, including community colleges, a great and undervalued asset, to prepare workers for good jobs in high-growth industries; and to improve access to job training not only for young people who are just starting their careers, but for older workers who need new skills to change careers.

 

It is through initiatives like these that we will see more Americans earn a college degree, or receive advanced training, and pursue a successful career. That is why I am calling on Congress to work with me to enact these essential reforms, and to reauthorize the Workforce Investment Act. That is how we will round out a complete and competitive education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So, yes, we need more money. Yes, we need more reform. Yes, we need to hold ourselves more accountable for every dollar we spend. But there is one more ingredient I want to talk about. The bottom line is that no government policies will make any difference unless we also hold ourselves more accountable as parents. Because government, no matter how wise or efficient, cannot turn off the TV or put away the video games. Teachers, no matter how dedicated or effective, cannot make sure your children leave for school on time and do their homework when they get back at night. These are things only a parent can do. These are things that our parents must do.

 

I say this not only as a father, but as a son. When I was a child, living in Indonesia with my mother, she didn’t have the money to send me where all the American kids went to school so she supplemented my schooling with lessons from a correspondence course. I can still picture her, waking me up at 4:30 in the morning five days a week to go over some lessons before I left for school. And whenever I’d complain or find some excuse for getting more sleep, she’d patiently repeat her most powerful defense - "This is no picnic for me either, buster." And it is because she did this day after day, week after week, and because of all the other opportunities and breaks I had along the way, that I can stand here today as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And I want every child in this country to have the same chance that my mother gave me, that my teachers gave me, that my college professors gave me, that America gave me.

 

I want children like Yvonne Bojorquez to have that chance. Yvonne is a student at Village Academy High School in California. Village Academy is a 21st century school, where cutting edge technologies are used in the classroom, where college prep and career training are offered to all who seek it, and where the motto is - "respect, responsibility, and results." A couple of months ago, Yvonne and her class made a video talking about the impact that our struggling economy was having on their lives. Some of them spoke about their parents being laid off, or their homes facing foreclosure, or their inability to focus on school with everything that was happening at home. When it was her turn to speak, Yvonne said:

 

"We’ve all been affected by this economic crisis. [We] are all college bound students…We’re all businessmen, and doctors and lawyers and all this great stuff. And we have all this potential," she said, "but the way things are going, we’re not going to be able to [fulfill it]."

 

It was heartbreaking that a girl so full of promise was so full of worry that she and her class titled their video, "Is anybody listening?" And so, today, there’s something I want to say to Yvonne and her class at Village Academy. I am listening. We are listening. America is listening. And we are not going to rest until your parents can keep their jobs, your families can keep their homes, and you can focus on what you should be focusing on - your own education. Until you can become the businessmen, doctors, and lawyers of tomorrow, until you can reach out and grasp your dreams for the future.

 

For in the end, your dream is a dream shared by all Americans. It is the founding promise of our nation. That we can make of our lives what we will; that all things are possible for all people; and that here in America, our best days lie ahead. And I truly believe that if I do my part and you, the American people, do yours - then we will emerge from this crisis a stronger nation and pass the dream of our founding on to posterity, ever safer than before. Thank you. God bless you. And may God bles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                                                *                                                *

 "Our children spend over a month less in school than children in South Korea. That is no way to prepare them for a 21st century economy. That is why I’m calling for us not only to expand effective after-school programs, but to rethink the school day to incorporate more time - whether during the summer or through expanded-day programs for children who need it. I know longer school days and school years are not wildly popular ideas. Not in my family, and probably not in yours. But the challenges of a new century demand more time in the classroom. If they can do that in South Korea, we can do it right here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의 아이들이 21세기를 맞이할 준비를 아주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가 보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어떤 그림일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는 경제위기를 핑계로 교육 투자를 게을리 하거나

각자도생의 길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교육격차 해소를 위해 대규모의 공교육 부문 투자를 강조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오바마가 말하고 경계하는 '한국'이란 나라는 그의 머릿 속에만 있는 나라인 듯 싶다.


아...이런 게 아니다.

이런 싸구려 색감이 아니었는데. 그리고 그림의 그 크기 자체에서 풍겨나오는 느낌도 전혀 다르다.

아무리 인터넷을 디비고 구글신님께 빌어보아도..애초 내가 보았던 그 '무지개'가 안 떠오른다.


Larc'n CIel. 라크엔시엘이 불어로 무지개란 뜻이었구나..

샤갈이 죽을 때까지 지니고 있었다는 작품. 시립미술관의 퐁피두 전에서 보았던 작품 중 가장 눈에 들어왔던

작품이었다. 에펠탑과 노틀담사원, 달빛 아래 거리, (아마도 그녀의) 여인...그가 평생 품고 있었던 기억의

편린들을 펼쳐놓은 것만 같다. 그리고 특별히 하얗고 빨갛게 만곡한 곡선들은 모자 쓴 한 남성으로부터 그

모든 것들로 너울너울 펼쳐지고 있다. 그 남성은 왠지 마그리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그' 같기도 하고.


한마리 거대한 새가 몸을 유연히 비트는 그 각도 그대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굴절되는 기억들,

그 풍요로운 기억들 자체가 바로 샤갈의 무지개였나보다.


근데 아무리 찾아도 애초 원화가 가졌던 그 마력적인 다홍빛 배경과 주제의 색감을 그나마 전해주는 파일이 없다. 

아......복제화라도 사야겠다.





각하께서 드디어 현실감각을 완전히 상실하신 듯합니다. 그럼 국민들은 어이를 상실하게 되지요. 외국 다녀오더니 위대한 성과(?)를 거두었다며 자화자찬 하시는군요. 이제까지  외교는 말만 하고 돌아왔는데, 자기는 실질적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다고 말만 하고 있네요. 평가는 언론에 맡겨둘 일. 피겨 선수들이 언제 자기 연기에 자기가 점수 먹이던가요? 우리 각하, 자기가 자기를 알아주기로 했나 봅니다. 그 동안 남들이 자기를 안 알아줘서 스트레스를 받으셨나 보죠? 

첫 증상은 기자들을 향해 "잘 한다, 잘 한다 해야, 잘 한다."라고 말할 때 이미 나타났지요. 일반적으로 언론의 사명은 권력에 대한 감시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각하의 생각은 다릅니다. 각하께서 생각하시는 이상적 언론은 권력의 옆에서 '잘 한다, 잘 한다' 추임새 넣는 언론이지요. 그래서 각 방송사에 낙하산 부대 내려보내, 공중파로 '각하, 잘한다, 잘 한다' 명비어천가 방송을 내보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겠지요. 

권력자가 뭘 하든 옆에서 '잘 한다, 잘 한다' 추임새 넣는 것은 북조선 같은 전체주의 국가의 언론이지요. 전체주의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언론을 정권 프로파갠더의 수단으로 간주하지요. 지금 그 선봉에 선 사람이 문화부의 신재민 차관이지요. 제가 보기에 그가 이 정권에서 맡은 임무는  나치 정권에서 괴벨스가 맡았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정권 홍보,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언론 공격. 지금 문화부의 기능은 3공때 문화공보부와 똑같습니다.

민주국가에서는 언론이 권력을 감시하는 반면, 독재국가에서는 권력이 언론을 감시합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애먼 기자들이 해직 당하고, 앵커가 중징계를 당하고, 방송 프로그램이 검찰 수사의 대상이 됩니다. 정권이 뿌리는 떡고물을 받아먹으며 해괴한 우익 관변단체들이 극성스럽게 설치고, 이들이 MB 완장 차고 비판언론에 생트집을 잡으며 극성스럽게 앞잡이질을 하면, 방통심의위라는 검열기관에서 그걸 냉큼 받아 마구 징계를 때려대는 식이지요. 

각하께서 국민의 "극히 일부분"이 정부에서 하는 일에 반대한다고 하셨는데, 지금 국민의 3분의 2가 이 정권의 주요한 정책에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3분의 2가 이 정권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길거리 돌아다니면서 대통령 잘 하고 있다고 얘기하는 사람, 거의 못 봅니다. 그런 얘기 했다가는 돌 맞는 분위기입니다. 각하 주위에 몰려 있는 "극히 일부분"의 사업형 아부꾼들만이 위대하시며 영명하신 그 분의 탁월한 영도력을 찬양하고 계실 뿐이지요. 

이 정권이 완전히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그래놓고서 하는 얘기가 외국 야당이 부럽다고 하네요. 언젠가 TV에 나와서, 위기의 시대니 미국과 같은 나라의  통합적 지도력을 본받으라는 취지의 얘기를 하니까, 거기에 각하께서는 대뜸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우리가 미국 같은 선진국입니까?"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통합적 지도력, 민주적 리더쉽은 아직 한국이 후진국이라 본받을 때가 못 되고, 다만 야당질만큼은 선진국스럽게 해라, 뭐 이런 얘기죠. 

각하는 외국 야당이 부러우시답니다. 그런데 국민은 외국 여당이 부럽답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선거 때 손가락 하나 잘못 눌린 죄가 이다지도 크단 말입니까? 지금 국민이 당하는 고난은 지난 대선 때 저지른 실수에 비해 너무나도 가혹한 형벌입니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747 공약, 믿어서 찍은 것도 아니고, 그냥 믿고 싶어서 찍은 것 뿐인데, 그게 그렇게도 큰 죄라서 그 죄값을 이런 가공할 규모로 받아야 합니까? 이제 겨우 1년 지났는데, 한 10년 산 것 같습니다. 

반대만 해야 하는 국민도 정말 괴롭습니다. 도대체 국민이 찬성할 만한  정책들을 내면 어디가 덧납니까? 어떻게 내놓는 정책마다 모두 국민이 나서서 뜯어말려야 합니까. 공약 지킬까봐 겁나는 대통령은 그가 아마 처음일 겁니다. 내놓는 정책들이 양계장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니, 영장류의 본능상 국민들이 생물학적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거죠. 국민들이 정권에 반대하는 이유는 철저히 진화론적인 것입니다. 과거로 퇴행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진화하고픈 본능이라고 할까요?

- 09.03.09. 진보신당 당원게시판.

* 가장 멋졌던 댓글은, "어머, 제목만 봐선 여태까진 현실감각 있었는 줄 알겠어요."ㅋ


조커는 번번이 화가 났다.

갱단이라는 것들은 '가오'도 잡을 줄 모르고 돈만 밝히며, 경찰은 화끈하게 자신과 놀아주기는 커녕 빌빌거리다가

뒤로 돈이나 찔러주면 좋다고 실실거린다. 범죄자라고 감옥에 처박힌 것들도 조금만 겁주면 오줌이나 질질 싸거나

눈물부터 흘리는 심약한 것들이고, 그런 범죄자와 자신은 다르다며 고고한 척 하는 '시민'들 역시 애써 자신들

마음 속에 있는 악마적 요소들을 외면하고 있을 뿐 다를 게 없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선하고 나무랄데

없는 '문명화된' 사람이라고 강변하는 모습이 조커 그에겐 역겹기까지 하다. 착한 척, 질서잡힌 척, 교화된 척이나

하지 말던가.


그는 생각한다. 나는 억울하다.

인간은 누구나 악한 거다. 네놈들은 분칠한 내모습이 무섭다고 손가락질하지만, 네놈들이 위선과 허영으로

자신의 악한 모습에 덕지덕지 분칠해 놓은 것은 더더욱 그로테스크할 뿐이다. 선한 척, 고상한 척, 고결한 척

하며 애써 겁먹지 않은 척 자신에게 대적하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니들 마음속의 악마를 보란 말이다. 우린

다르지 않아. 왜 나를 별종(Freak)이라고 몰아가지? 왜 나만 나쁜 놈이라 비난하지? 니들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세상은 원래 혼돈 그 자체이고, 악과 선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하는데, 왜 날 거세하려 들지?


그렇다면 좋다.

니들이 스스로의 가면을 벗도록 해주지. 난 돈 따위 관심없어. 다만 당신들이 스스로 각성하길 바랄 뿐이야.

조커는 사람들에게 나름의 심판을 내린다. 기독교적인 의미의 '심판의 날'에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계량하고

본모습을 대면해야 하는 것처럼,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구린 속내와 직면하고, 그걸 따르도록 강제, 혹은

유인코자 한다. 덴트 검사야말로 배트맨이 '백기사'이자 영웅으로 세워내려할 만큼 강하고 훌륭한 '가면'을

갖고 있었지만, 이런 그 역시 조커에 의해 '투페이스'로서의 광기에 먹히고 만다.


여기서 꼭 항변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건, 그 광기 자체를 내가 불러낸 건 아니란 사실이야. 검사 양반 그가 그토록 크고 강한 가면을 쓰고 있던

것은 반대로 그가 그만큼 크고 강한 악의를 감추고 있었단 이야기도 되지. 그는 자신의 속에 애초부터 존재하던

'광기'를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뿐야, 약간 내가 돕기는 했지만 말이지. 그가 왜 받아들였냐고? 그 이름모를 여자의

죽음이 마치 방아쇠처럼 그의 가면을 깨뜨리는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난 알 바 아냐. 어쨌든 난 또다시 내

주장을 강화하는 커다란 샘플을 얻었지. 세상의 것들은 온통 타락했고, 악하며, 세상의 본질은 카오스 그 자체라는.

그런데 영 맘에 안드는 자식이 있다. 배트맨.

내가 세상의 균형을 이루는 추의 한쪽 끝, 극단이라면 또다른 한쪽 끝에 서서 균형을 잡고 있는 녀석. 그런데 그는

나를 없애려고만 드니 골치가 아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나를 죽일 용기도 없는 '찌질이'다. 그러니 더

배알이 꼴리는지도 모르지. 내가 그를 희롱하고 놀리듯이 그도 나와 놀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기본적으로

유머감각도 없고 '균형'이란 걸 생각지도 못하는 꽉 막힌 놈이다. 몇번이고 말하지만, Why, so, serious?

난 몇번이고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시험해 보았는데 이젠 인정하기로 했다.


그는, 나처럼 별종(Freak)이다.

그의 것은 '가면'이 아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박쥐가면을 쓴 찌질이와 허연 분칠을 한 입째진 조커만이

실은 '가면'을 뒤집어쓰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그가 적당히 섞인 채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조심스런 미소와 겸손한 태도를 가장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거다. 사람들이 모두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결국 배트맨 너와 조커 나는 사이좋게 정신병원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거다. 너처럼 백번을 던지면

백번 다 '불에 그슬리지 않은 동전 앞면'이 나오는 녀석과, 나처럼 백번을 던지면 백번 다 '불에 그슬린 앞면'이

나오는 존재는 '사람처럼' 살 수 없다. '사람'이란 존재가 무엇인지를 다수결원칙으로 정의한다면, 세상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하듯이, 배트맨 너와 나는 이미 '사람'이란 종에 속하지 않는지도 모르니까.


아마도 그래서 우린 살아남았다.

서로 몇번씩이나 죽일 수도 있었지만, 지겹고 이가 갈리고 혐오스러워 닭살이 일 지경이겠지만, 니가 없이는 내가

무너지고, 내가 없이는 니가 무너지겠지. You, complete, me. 다음엔 좀더 멋지게 해보자구. 넌 여전히 사람들이

본래 선하고 질서를 선호한다고 믿고 있겠지만, 내가 그 믿음을 산산이 깨뜨려 보여주지. 아직까지 우리의 싸움은

오십 대 오십. 잠깐 어느쪽으로 추가 기운 듯 보일 수야 있겠지만, 아마 앞으로의 싸움도 오십 대 오십.



P.S. 그렇지만 말야 친구, 결과를 안다고 재미없어지는 건 아냐. 난 당신과 춤추듯 스텝을 밟을 뿐야.

누가 리드하던, 한발 앞으로 딛었다가 한발 뒤로 뺐다가, 날렵하게 턴을 하기도 하고 말이지. 멋지지 않아?

끝도 결말도 없는 선과 악의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말이지. 우리는 그 속에서 살고 그 속에서 가는 거라구.





한국 힙합 뮤지션은, 글쎄..그다지 장르를 가려듣는 편은 아니지만 힙합은 딱히 땡기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아마도 '거리의 시인들' 정도가 내가 최근까지 굳이 앨범을 사가면서 들었던 한국 힙합 뮤지션이던가 싶을 정도.

그만큼 힙합이란 장르는 내겐 꽤나 낯선 것이다. 


견문이 천박해서겠지만, 왠지 힙합은 다소 겉멋에 치우쳐 수입되고 소비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있었다.

특히 팝송도 제대로 이해 못하는 판에 알아듣지 못할 영어 라임으로 꽉찬 힙합 음악을 듣는다는 건 뭐랄까, 정작

중요한 부분을 놓친 채 나머지만을, 심하게 말하자면 겉멋만을 취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더군다나 그들의

노래는 대부분 분노한, 상처받은 목소리로 뱉듯이 읊어지고 있었기에 더욱 그 가사가 중요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런 데다가, 락을 좋아하던 시절에 락 스피리츠 어쩌구 했던 것처럼, 힙합의 소울이란 게 있다고는 하지만, 과연

한국의 힙합이라는 게 '비주류와 저항의 음악'이라고 자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회에 대한 살벌하고 나름

거침없는 비판을 던지던 '거리의 시인들', 그 중 한 멤버인 노현태가 이명박의 대선 캠프에서 홍보송을 부른 것도

모자라 대운하 찬양송까지 불렀다는, 최근에야 뒤늦게 알게 된 뉴스는 한국에서 소비되는 힙합이란 건, (본토에선

어떤지 잘 모르겠으되) 이미지가 중요한 일개 상품일 수 밖에 없다는 확신을 더욱 굳혀 놓았었다.


그런데 화나, 그의 첫 정규앨범이라는 이 앨범은 그 두가지 면에서 모두 살짝 내 흥미를 간지럽힌다.

그는 '라임폭격기'라거나 '라임몬스터'라는 별칭으로 불리나 보다. 그의 라임은 어쨌든 몇번을 들으면 귀에 익어

뜻이 전달될 수 있는 한국어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어쨌든 난 네이티브 한국인이니까-, 중간중간 폭발하는 듯

내달리는 라임들이 여전히 의미불명이긴 하지만 대개 메세지를 이해하며 듣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음색. 불만에

차서 분노를 터뜨리는 듯, 때론 냉소하듯, 또 때로는 잔뜩 칼날이 쑤셔박혀 상처입은 듯 아파하는 목소리까지

왠지 뭔가 중독성있게 귓가를 맴돈다. 그의 이름이 왜 화나, 일까..화난 목소리가 매력적이어서? 따위 말도 안되는

상상까지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예전에는 곡 하나하나를 뜯어서 듣는 스타일이었는데, 요샌 갈수록 노래를

BGM으로 쓰고 있어서 딱히 몇 번 트랙 무슨 노래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더라, 라고 기억해내지는 못하겠지만..


이번주 시사인 잡지에 실린 조국 교수의 에세이에 보면 최인훈의 '서유기' 중 한 대목을 인용하고 있다.

"당대가 이른 가장 높은 문명 감각의 정상에 서서 당대가 이른 가장 높은 현실 정치에 대해서조차 비판하는 것,

이것이 진보가 살 길이다."

약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거창한 역사의 진보라느니, 의식적인 지향이 아니더라도, 어떤 음악은

"현재 이곳에서 이뤄진 가장 현대적인 감각의 정상에 서서 현재 이곳에서 이뤄진 가장 당연해 보이는 기득권에

대해서조차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힙합 자체를 순치되고 상업화된 형태로 소비하는 것 자체도 부정하거나 비판할 생각은 없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래도 '비주류와 저항의 음악'으로서 힙합을 자처하고자 하는 뮤지션들은 계속해서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또 개인적으로는 나왔으면 한다. 누군가는 문화와 음악이 태생에서부터 비주류와

저항의 몸짓을 담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화나도 그런 묵직한 힙합을 계속 할 수 있지 않을까.




#1. '남편'이 아니라 '아내'가 결혼한 이유.

'남편이 결혼했다'란 제목은 '아내가 결혼했다'는 지금의 제목보다 더욱 비현실적일 뿐더러 그닥 신선하지도 않다.

왜 그럴까. 한국에서 남자로, 혹은 남편으로 산다는 건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굳이 따로 결혼을 생각할 만큼 머리가

복잡한 일이거나 채워지기 힘든 불만족을 떠안고 지내는 걸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보다 단순하기

때문일지는 모르지만, 한국 남자에게 결혼은 아직 '남는 장사'고, 하고 나면 장땡인 '쑈부'인 게 사실이다. 


그리고 굳이 '결혼'이란 형식으로 새로운 관계를 틔워놓아야 할 만큼 절박하지도 않으며, 언제든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즐기고..그게 또 '남자답다'는 식으로 용인받기도 하는 게 아직은 사실인 듯 하다. 여전히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고, 영화 중의 대사말마따나 '바람핀 뇬 용서못하고 차버리고 떠난

놈 용서못한다'는 게 일종의 관습법인 게다.

결국 남편이라면, 굳이 또다시 결혼을 할 생각을 할 유인이 적다. 그래서, 아내가 결혼했다.


#2. 목마른 그/녀가 우물을 팔 뿐.

그렇지만 이 영화를 꼭 페미니즘적인 시각, 그러니까 가부장제적인 가족제도 하에서 구속받고 억압받고 있는 

여성의 해방이란 측면에서 보아야 할 지는 모르겠다. 더구나 남자 둘, 여자 하나 간의 섹스에 대한 문제는 살짝

건드리기만 할 뿐, 어정쩡한 선에서 봉합하고 있다고 보이니 그다지 적극적으로 '성 해방'을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요사이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코드로 읽어내려가려는 내 편향성이 걸리긴 하지만, 이 영화 역시도

어쩔 수 없이 사랑을 끝까지 추구하고 지켜나가려는 이야기..란 느낌이다.


그녀는 사랑이 하나가 아닐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게 반으로 쪼개지냐는 그의 항변에,

뻔뻔하지만 또 사랑스럽게도 그녀는 이렇게 응수한다. 사랑이 절반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두 배가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마음이 상대의 장점, 단점, 그리고 온갖 고유한 특성들을 다 껴안아 주는

거라면, 그는 그녀가 믿고 있는 이러한 애정관을 미리 알았어야 했고, 껴안거나 내치거나 해야 했을 거다.


그는 그렇지만 '그녀가 원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녀의 연애 생활을 무덤 속으로 끌고

가려고' 결혼을 이미 해버렸다. 결혼은 그런 게 아닐 텐데, 아니어야 할 텐데, 뒤늦게 수업료가 어마어마하다.


사랑은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애초 서로에게 마법같이 끌려들었던 그 감정을 그대로

지켜 나가는 두 사람에게 이해되고 용인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문제될 것은

없을 거 같다. 그리고 남1과 여, 남2와 여는 그렇게 우여곡절과 자기부정과 관계부정을 거쳐, 자신들의 '사랑'을

새롭게 정의하고 단단히 다져나간다. 그들은 아마, '축구공'을 차고 노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어릴 적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걸 게다. 그들 인생의 축구공을 단단히 쥐고 함께 살아가기를.


#3. 사랑을 유지시키는 신기술, 두 번의 결혼?

그런데 꼭 또 한번의 결혼이어야 했을까. 그보다, 그녀가 남2에게 느꼈던 것은 사랑이었을까. 그녀는 말한다.

상대의 도드라진 점만 보는 연애와는 달리, 결혼은 삶 자체가 포개지는 느낌이라고, 새로운 행복을 느끼게 되었고

그러한 행복을 남2와도 나누고 싶다고.


어쩌면 그녀는 흔히들 결혼을 핑계로, 변화를 핑계로, 혹은 다른 무엇인가 적당한 핑계로 사랑이 식고 '情'으로

굳히기에 들어가는 관계를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한번에 두사람을 사랑할 자신이 있다, 혹은 사랑할 수도

있는 거라고 말하는 거고, 평생에 걸친 '영원한 사랑'의 판타지는 여전히 흔들림없는 게다. (상대가 하나던 둘이던

간에 말이다.) 그런 점에서, "평생 한사람만 사랑할 자신이 있냐"고 묻는 도발적인 카피는 사실 좀 초점이 엇나가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어쩜 덧없고 허무한 '사랑'의 불꽃을 계속 신선하고 뜨겁게 지켜내기 위해 다소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꼼수를 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마음이 사랑이었다고, 혹은 자기합리화라고 재단할 생각은 없다. 그건, 그녀와 사랑하는 자의 몫이다.


#4. 내게 묻는다면.

다만, 내가 그라면, 그녀를 이해하려고 애써보긴 하겠지만..끝내 못하지 않을까 싶다.

사랑이 하나가 아닐 수 있을까. 게맛살 쪼개지듯이 사람 맘이 두 곳으로 쫙 쪼개져서 둘다 진짜임을 주장한다고

해도, 그건 잠정적인 과도기일 뿐 결국은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지게 되지 않을까. 도덕적으로 누구에게 미안하고

못할 짓이고 라는 식의 비난이 아니라, 결국 그 두 사람 모두에게서 외로움만 더 커지고 마음의 상처만 깊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한 명씩이었다면 그 순간 상대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으며, 또 자신의 것-"내꺼"-이라고 믿으며

한때나마 충일감을 느끼고 외로움을 떨쳤겠지만, 그런 기적과도 같은 마법을 온통 망쳐버리는 짓 아닐까.


그래서 나라면, '영원한 사랑'의 판타지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영원한 기간동안 그녀가 나와 또다른

남자를 사랑할 거라는 선언을 받아들여 그녀를 사랑할 자신은 없다. 물론 모, 닥쳐봐야 아는 일이지만.



덧댐. 아마도 '채털리부인의 사랑'에서 나왔던 대목을 차용한 거 같은데, 맨살-혹은 우비만 입고-로 소낙비

빗방울을 후두둑후두둑 맞으며 사랑하는 이와 야외 섹스를 하고 싶다는 그녀의 환타지, 그걸 실제로 남2와

했었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내가 이 영화를 그다지 강하거나 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 이유다.


덧댐2. 손예진의 매력이란...그리고 뮤직비디오로 '요조'의 모닝스타가 쓰였는 줄은 몰랐다.

전국언론노동조합 MBC 본부에서 만든 UCC([Korean MBC] Message to the world, "fight against Control of Speech")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공정하지 않고 비난과 편견으로 가득차 있다는 비판도 있고,

해외에 이런 식으로 광고를 해대다니 부끄럽다는 이야기도 있고,

결국 자신들 밥그릇 싸움인데 지들만 잘난 척 한다는 빈정거림도 있고,

이넘이나 저넘이나 똑같은데 나는 알 바 아니라는 '쿨한' 냉소도 있고,

(진부하게도) 김대중/노무현 때는 가만있다가 왜 지금은 이러냐는, 뭘 알고나 떠드냐는 고상한 뇌까림도 있다.


#1. 이 UCC는 trigger로서 제 역할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

싸움에 신물나서 관심을 끊거나, 양비론을 취하며 고상한 척 하거나, 정말 사건의 진행을 못 따라와서 논점을

모르거나, 그런 사람들이 내국인이던 외국인이던 이번 동영상을 보고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된 거라고 생각한다.

이왕이면 이로써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하며 언론노조 편이 되어주면(동시에 이번 사태에 한정해서라도

한나라당과 MB의 반대편에 서주면) 좋겠지만 말이다. 이미 한국의 여론은 그쪽으로 기울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되고 있으니 악법이니, 날치기니, 민주주의의 후퇴니, 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설혹

이런 동영상을 보고 반대 입장에 서도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한번쯤 생각해보고 찬/반의 입장을 정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한 훈련이 될 테니.

이미 이렇게 여기저기서 논쟁이 벌어지는 것만 봐도 대단한 성공을 거둔 거 아닌가.


#2. 이 UCC는 당연히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담고 있다.

동영상 하나로 이번 사태의 전말, 배경과 대치한 양 진영의 논리를 모두 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너무 욕심이 많다.

이 동영상은 아나운서가 멘트를 한다는 형식을 띄고는 있지만 객관적 보도를 하는 '뉴스'가 아니라 말그대로

'선전전', 혹은 '홍보'를 위한 것이다. '균형'이나 '공정성'이란 개념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할지에 대한 고담준론은

차치하고라도, 이 동영상은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열려 있는, 몇 안 되는 이야기할 공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미 거대 언론의 지원사격을 등에 업고 있는 한나라당은 그에 더해 지하철공간 등에서 자신들의 입장(만)을

선전하고 있기도 하다. 한나라당이나 주류 입장에 선 사람들에게는 반대 입장도 소개하고 사건의 배경을 모두

설명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지 않나? 그들을 탓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여론을 형성하고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두

진영이 각자의 목소리를 키우고 공감을 얻기 위해 싸우는 건 너무도 당연한 거 아닌가.


균형잡힌 자세를 유지하는 것, 물론 중요하다. 그렇지만 가독성과 간결성을 생명으로 하는 이런 UCC에 대고

균형잡힌 시각을 요구하는 건 너무 가혹하지 싶다. 그런 가혹한 기준을 조금 큰 차원에서 구현하려면, 언론에서

각 진영의 입장을 보도하는 칸과 글자수도 균형을 잡아야 할 테고, 언론 매체가 지향하는 논조와 입장도 잘

균형잡아 동수에 가깝게 배치되어야 할 테고, 여야 정치인 수도 동수에 가깝게 되어야 할 테고..전혀 우습지 않다.

이 UCC는 '균형'과 '조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당 정치인들의 폭거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다.


#3. 이 UCC의 내용은 부끄럽지도, 천박하지도 않다.

국내용인지 해외용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국내용이라고 생각한다. 6개국어를 사용해 한나라당과 MB에

대해 직접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좀 들어라 하는 식으로. 실제로 외국에 대해 어떻게 구체적인 조치를 해달라,

도와달라고 이야기하는 건 없다. 어떤 분은 중국어 파트에서 항의전화를 하라는 것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UCC 제작자들은 항의전화를 위한 전화번호 공개도 없고 아무런 '행동 지시'를 내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 그리고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허튼 짓 하지 마라."란 말이 중국어 파트의

핵심이 아닐까.


해외용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날치기를 시도한다', '악법', '대형극우신문 조중동', '독재정권의 부활', '언론법

개정으로 경제를 살린다는 말이 거짓말이다', 이런 표현들이 눈먼 비난인가? 물론 제각기의 가치관과 시각에 따라

판단할 부분이겠지만, 아무래도 이건 비난으로 점철되었다고 읽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오히려 언론악법 저지,

민주주의수호라는 이번 파업의 명분과 기치를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끄럽다고 해서 다 덮을 건가. 미국의 민주주의가 부러운 것은, 설사 잠시 부끄럽고 치욕적일지라도

자신들의 환부에 대해 공개적인 논의와 유연한 방향수정이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논의 자체를 거부하지

말라고도 이야기하지만, 논의에 끌려들어가는 순간 그대로 졸속입법되고 졸속시행될 것이 뻔한 상황이다.

형식적인 의견 수렴 절차는 갖춰지지도 않았다. 형식상으로나마 보장된 통로도 모두 막힌 상황이다. 별다른

방법이 있다면 총파업을 두 차례나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을 거다.


#4. 이 UCC를 만든 사람은 노빠도, 명빠도 아니다.

밥그릇 싸움 맞다. MBC에, CBS에, YTN과 기타 언론 매체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에 피해가 올 거고, 그 피해를

막기 위해 나선 것 맞다. 그리고 그 이상이기도 하다. 편향된 언론, 언론이 정부에 먹히든 정부가 언론에 먹히든,

그 피해는 상식을 믿고 상식에 따라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돌아온다. 그건 우리의 밥그릇이다.



첫째, 이 UCC는 세계인에게 전하는 제3자적 입장의 객관적 보도를 하는 게 아니라 말그대로 '선전전', '홍보'를 하는 UCC라는 점입니다. 당장 당사자들의 이해가 걸려있고, 게다가 한국 내에서는 대체로 이게 언론자유, 표현자유의 침해라는 공감대가 서 있는 상황인데 한나라당의 주장까지 챙겨줄 필요가 있나요? 이미 그들은 지하철 공간, 방송광고 등에서 자신들의 입장(만)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여론을 두고 두 진영이 각자의 설득력을 높이고 공감을 얻기 위해 싸우는 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둘째, 사실 저는 이 UCC는 국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6개국어를 사용해 한나라당과 MB에 대해 직접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듣도록 하는 것이죠. 실제로 외국에 대해 어떻게 구체적인 조치를 해달라, 도와달라고 이야기하는 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전 아주 유쾌하고 참신한 전략이라고 생각하구요. 설혹 님 말씀대로 '미국에 도와달라'는 의미로 읽혔다 해도 그게 뭐가 문제죠? 미국 언론의 문제점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미국 시민도 적지 않고, 이 UCC 자체가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란 식으로 이야기한다고 느낄 미국 시민도 없을 거 같은데요.
여러 모로 좀 반박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 긴 댓글 남깁니다.

The National Union of Media Workers began a second strike Thursday(Feb. 25) to protest a plan to pass controversial media bills at the National Assembly.

The union of MBC, the nation's second largest broadcaster that led a first strike through Dec. 26, called on its members to boycott their workplaces. About 1,000 members, including anchorwomen, were absent from TV, and program directors of popular shows took to the streets, disrupting MBC broadcasting.

The strike came about two months after the government and governing Grand National Party (GNP) tried to railroad seven media-related bills allowing newspapers and business conglomerates to buy major stakes in terrestrial broadcasting stations...

"A majority of people oppose the bills. The GNP's move is a threat to the people and the media," the union said. "We are going to fight until they scrap their scheme to control the media."

(http://www.koreatimes.co.kr/www/news/nation/2009/02/117_40366.html)


This UCC is made by MBC Union, one of the National Union of Mediaworkers, to let the people in the world

know the worsened situation of FREEDOM OF SPEECH and infringed DEMOCRACY in Korea. We Koreans

have strongly opposed to the the bills and will fight against any attempt to restrict the Freedom of Speech

and Democracy given by the MB government. We need your help. Please listen our voice and please

remember that.


This is to encounter the media control bills. This is also to keep our Democracy.




* 김정근 아나운서 (오프닝, opening)
안녕하십니까, 전국언론노동조합 문화방송 본부에서 전해드리는 뉴스 속보입니다.
한나라당이 언론 악법을 통과시켜 방송을 장악하려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도 위태롭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전세계에 알리고자합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문화방송 본부에서는 전 세계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준비했습니다.

* 최현정 아나운서 (영어, english)

긴급 속보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지 이제 겨우 1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이 합의 없이 언론의 자유를 규제하는 법안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날치기라 부릅니다.
이 악법은 온 국민의 분노를 부르고 있고, 대한민국은 언론 자유를 잃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This is an urgent message.
It's been only a year since President Lee MB took office,
however, our nation's foundation of liberal democracy is on the verge of collapsing.
The ruling Great National Party is twice pushing the registration
to restrict the freedom of speech without the agreement from the opposition.
In Korea, this is called "Nal-chi-ki(날치기)", which means rushing the bill through.
This is raging a lot of the public anger
and our nation is on the brink of losing our freedom of speech.

* 최현정 아나운서의 스크립트를 뜨려고 계속 들어보다가, 그녀의 눈빛이 너무 처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힘내시고 또다시 이겨내길 바랍니다!

영어 스크립트를 뜨면서도, 사실 이건 한국어 포함 6개국어로 말하되 모조리 MB와 한나라당을 향해
 들으라는 말들이잖아요. 참신하고, 멋진 전략입니다.ㅎㅎ


* 방현주 아나운서 (중국어, chinese)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13억 중국인들이여!!
한나라당 ‘고흥길’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해주십시오.
“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
또 한 통의 항의전화를 해주십시오.
이번에 전화 걸 사람은 김형오 국회의장입니다.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허튼 짓 하지 마라.”

* 권희진 조합원 (프랑스어, french)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사르코지와 브뤼니의 만남보다 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커플이 탄생하려고 합니다.
바로 3대 대형극우신문 조중동과 방송의 결합입니다.
이들의 만남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대재앙이 될 것입니다.
대다수의 국민은 반대하고 있지만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은 국민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없습니다.

* 이동희 조합원 (스페인어, spanish) 

지금 대한민국에서 많은 단어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상식 소통 언론자유....
세상에 이런 일이!!!
대한민국에서는 시계도 거꾸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역사가 후퇴하고 다시 독재정권이 부활했습니다.

* 하지은 조합원 (일본어, japanese) 

언론법 개정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한나라당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정말로 거짓말입니다.
한편, 국회 문방위에서는 난데없이 일본어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겐세이 놓고 끼어들이시면 계속 늦어지니까...”
우리가 한나라당에게 듣고 싶은 말은 ‘겐세이’가 아니라 ‘쓰미마센’입니다.

* 김정근 아나운서 (클로징, closing)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저희는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여러분도 동참해 주십시오.



전국언론노동조합(http://media.nodong.org/home_b/main.htm/)


#1. 지워진 테입에 덧씌워진 '새롭고 오랜 기억'.
 
제리(잭 블랙)이 사고로 자석인간이 되고 나서 친구 마이크(모스 데프)가 일하는 비디오 가게의 비디오 테입이

전부 지워진다. 그렇게 아무 내용이나 기억도 없는 상태로 돌아간 채 허망한 타이틀과 앙상한 시놉시스만 걸치고

남아있는 테입들이지만, 그들의 필사적이고도 기발한 재창조 과정을 거쳐 다시 새롭지만 익숙한 무엇들을

품게 된다.


옛 영화들과 닮아 있으면서도 묘하게 코믹하고, 또 묘하게 감탄하게 만드는 그들의 새 영화들은, 마치 자신의

실수로던 어떤 이유로던 서둘러-예기치 않게-지워버린 과거의 사랑을 다시금 기를 쓰고 기억하고 각인해낸..

그런 결과물과 유사한 것 같기도 하다. 큰 얼개와 스토리 전개는 비슷하다 해도, 자신의 입맛과 현재 상황에 맞춰

이리저리 각색되고 힘을 덜 빼고 더 넣은 장면들.


그들의 '새롭고도 낡은' 영화는 대박이 났다. 사랑이 지난 후의 '새롭고도 낡은' 기억 역시 대개 대박이 되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쩜 평생 품을 가슴시린 추억이 될 수도 있겠지만.



#2. 지워지는 '파사익의 팻츠'에 덧씌워지는 '새롭고 오랜 기억'

비디오 가게 주인 플레처(대니 글로버)는 이 마을, 파사익(Passaic)과 자신의 가게가 있는 건물에 얽힌 '팻츠'란

재즈 뮤지션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하곤 했다. 사람들이 그 뮤지션을 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비감한 마음을 갖고

있던 그였지만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라곤 마이크와 제리 뿐이었던 듯 하다. 건물을 철거하려는 당국의 시도에

끈질기게 저항해 보았지만 끝내 일주일 후 건물이 해체되기로 통보를 받은 날, 그는 사실 '팻츠'와 그 건물, 그리고

그 마을을 묶어주던 자신의 이야기가 거짓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시작되는 이야기의 재구성. 신부님, 독실한 교인,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마을 사람들이 풀어내는 '구라'들이

희미해지다가 급기야 펑, 소리내어 부정당할 뻔 했던 '팻츠'와의 이야기끈을 더욱 딴딴하고 풍요롭게 비끄러

매어주는 동앗줄이 되어 주기 시작했다. 그리곤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을 불러낼 만큼 힘있는 '사실'이 된다.


그렇게 가게 주인 플레처가 지워 버리려던 이야기,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이야기는 다시금 생명력을

얻고 또다시 '새롭고도 낡은' 기억으로 화한다. 그건 더이상 플레처가 말했던 그 내용과도 다르지만, 또 예전과

같이 얄팍하고 의미박약한 이야기도 아니다.



#3. 시간에 씻겨나가는 기억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사실 'Be Kind, Rewind' 이 영화 코미디라고 분류되어 있다. 그냥 배우들의 재기발랄한 표정과 연기를 즐겨주고,

또 노골적으로 조악한 특수효과, 그렇지만 그 통통 튀는 상상력과 표현력에 탄복하며 살짝 마지막에서 감동해

주면 그만일 영화인데, 괜히 심각한 척 다른 데를 보며 되도 않는 의미를 부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비카인드 리와인드', 되감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도로 의역될 수 있을까. 비디오 가게에 크게 적혀

있기도 한 이 제목은 그렇지만 괜히 이런저런 다른 생각으로 나를 계속 몰고 간다.

"종종 짜증나고 싫던 기억들, 다시 되감아 조금 더 여유롭고 아름답게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만의 기억이라 여겨지던 것, 다시 되감아 우리의 기억으로 만들어 더욱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완전히 잊혀지기 전에 말입니다...


나만 가슴이 살짝 아프게 본 걸까. 모르겠다.



덧댐. 참, 영화를 다 보고 이 영화 출연진들을 일별하는데 깜짝 놀랬다. 시고니 위버가 나왔었다고..??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 [oscar@momo: 아카데미의 보석들]에서 상영된 작품들은 대부분 내가 보고 싶어하다

놓쳤거나, 기대하고 있는 작품들이었지만 그래도 몇 개 딱히 끌리지 않는 작품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더 레슬러". 제목만 봐도 뭔가 센스없어 보이고 무성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시놉시스를 약간 보니

대충 '은퇴한 레슬링 영웅의 눈물겨운 부활..' 그런 식의 뻔한 레퍼토리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 레슬러> 2008/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105분/청소년관람불가

은퇴한 노년의 레슬러의 눈물겨운 재기를 그려낸 작품으로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수작이다. 주연을 맡은 배우 미키 루크의 화려한 재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으며, 이미 올해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미키 루크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까지 거머쥘 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1998년 장편 데뷔작 <파이>와 2000년 <레퀴엠>으로 영화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연출작이며, 1992년 <내 사촌 비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탄 후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마리사 토메이가 제 2의 전성기를 맞은 듯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면서, 두번째 여우조연상에 도전한다.(씨네아트 상영작 정보 中)


그렇지만 시간상의 제약으로 다소 체념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었던 이 영화는, 의외였다.

노쇠한 영웅의 재기..라는 뻔한 주제에 따라붙기 쉬운 뻔한 묘사들, 뻔한 동기 부여들에 더해 그냥 괜찮은 영화로

남는 게 아니라, 그나마 남아있는 삶의 안온한 부분들을 전부-자의던 타의던-던져 버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에센스로 바로 돌진하고 마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어느순간 자신의 지난 삶이 실은 자신의 황금기였음을 깨닫는 것 같다. 자신에게 현재 남아있는 건

소원해진 가족, 얼굴도 까먹은 친구들, 그리고 밥벌어먹고 사느라 망가져가는 몸뚱이, 그렇게 누추해진 삶일 뿐.

그러면 보통 며칠 싱숭생숭하다가 술 한잔 하고 풀기도 하고-더러는 눈물을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혹은

돌아올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있는 여행을 다녀온다거나..그렇게 어떻게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고 현재의

자리로 고분고분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건 뭐랄까, 추운 겨울날 아침 눈을 딱 떴을 때, 그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을 벗어나기 싫어 더욱 안으로 

파고 들듯..그렇게 '남아있는 행복'들에 집착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레슬러는 달랐다. 그나마 그에게 안온함을 주고 남아있는 삶의 행복쪼가리들이라도 꼭꼭 지키며 남은 삶을

방어하려는 자세를 굳힌 것이 아니라, 다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바쳐진 링으로 돌아가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는 살이 깨끗하게 발라진 뼈다귀만 애꿎게 핥으며 여생을 보내고 싶진 않았던 게다.


그는 착하지도 않고, '사회성'도 떨어지며, 사람에 대한 속깊은 사랑이나 배려가 있는 것도 아닌, 그냥 보통

사람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를 알았고, 다른 대체물들로 대리만족을

구하려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이어나가기 위해 죽음도 불사했다.


아마도 그 점이, 가게에서 쌍욕을 하고 자해를 하며, 스테플러 철심을 몸에 박아넣고 피칠갑을 하는 그를 끝내

연민하고 응원하게 되는 이유지 싶다. 가족을 제대로 건사하지도 못하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마음 하나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막말을 하는 외톨이 레슬러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다.





운좋게도 위드블로그에 베타테스터로 선정되어 활동을 시작한 지 한달도 채 안된 기간에 적벽대전2, 레저베이션

로드, 더 레슬러 같은 영화도 볼 수 있었고, 고병권의 추방과 탈주 같은 책도 읽을 기회도 잡는 등 솔찮이 재미났던

게 사실이다.


물론 그때마다 리뷰를 남겨야 하는 건 다소 부담이 없잖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런 엄연한 외력을 빌어

자발성을 빙자한 리뷰를 써제끼면서 혼자 즐거웠으니 됐지 싶다. 내가 무슨 IT 첨단제품에 대해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얼리어답터도 아니어서 별로 신제품에 관심도 없고. 걍 클래식하게 영화나 책 같은 거나 보고

끼적대는 게 딱이다 싶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문득 오즈에서 체조위젯을 리뷰해달라면서 신청자를 받고 있다는 걸 보고 냉큼 신청해

버렸으니. 나도 몰랐지만 아마 사무실에서 온종일 엉덩이만 키우며 앉아있는 게 꽤나 무료했나 보다.


이제 보니 저런 식으로 신청을 해놨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름 사무실에서도 찌뿌드드한 몸을 펼 수 있는 몇 가지

쓸만한 동작들이 있어서 몇개씩 따라해 보다가 내게 가장 잘 맞는 운동을 찾아냈다.

바로 이민기의 졸음예방체조.


점심먹고 돌아와 앉으면 쏟아지는 졸음과 무기력증, 뻣뻣해지는 근육들의 아우성을 입막음하기 위한 나름의 비책.

구분동작으로 알아보고 실생활에 응용키로 한다.

이민기가 활짝 웃고 있는 첫 화면.
에헤이~ 남은 바빠죽겠는데 또 조신다~ (니가 뭘 안다고 에헤이~냐?ㅡㅡ+)
자, 따라해 보세요~ (너 이자식 계속 짝눈 뜨고 이러고 있다)
하나~
둘~
하나~ (반대편으로)
둘~
에헤이~ 왼쪽 어깨 따라가면 안돼요~ (나랑 대화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려는 꼼수 따위..통할지도.)
그렇지, 그렇게요! (친한 척 하는 건 맘에 안 들지만, 칭찬받으니 왠지 기쁘다는..)
상체는 세우시고요, (두 팔을 깍지껴 뒤로 젖히고는 아래로~)
(또 위로~)
어때요? 잠이 확 깨시죠? (이러면서 얼굴이 커졌다 작아졌다, 열심히 들이대는 민기)




남자들은 보통 군대를 다녀오면서 '엄마'라는 호칭을 떼어버리곤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갈아탄다고 한다.

그렇지만 첫휴가 때부터 제대할 때까지 부모님께 제대로 '필승!'하고 경례 한번 한 적 없는 내 유별난 군대

혐오증 탓인지, 턱도 없이 군대를 빌어 뭔가 더 철든 척 하고 어른스러운 척 하기는 싫었던 터라

내게 엄마는 여전히 엄마다.


그런 엄마가 어느날 날 쿡쿡 찌르며 한번 읽어보라 했던 책.

누가 바라보는 건지, '엄마'도 아니고 '신'도 아닌 거 같은데, 뜬금없지만 집요하게 쓰이는 '너'라는 지칭에 다소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또 '엄마'란 존재가 또다시 자식들에게 헌신하고 남편에게 평생 봉사하고 모든 것을

다 챙기고 끊임없이 사랑을 퍼올리는 근원으로 이상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다소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눈물을 찔끔이게 되는 건, 그 '엄마'에게서 스스로의 엄마 모습을 찾아내기 때문일 거다.


일찍 퇴근하는 날에도 늘 뭔가 약속이 있다며 주중엔 맨날 놀다가 늦게서야 집에 들어와서 피곤타고 짜증내고,

들어가 잔다고 뻥치고는 시덥잖은 컴터나 하고 앉아선 밤늦게 자기 일쑤고, 아침엔 혼자 못 일어나서 맨날

'오분만오분만~' 웅얼대는 게 일이고, '애미애비도 몰라볼 만큼' 술퍼마시곤 동네 놀이터에서 뻗어자기도 하고,

뭐 그런 것들. 그때마다 엄마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했다는 새삼스런 반성.


조금은 더 엄마한테 덜 틱틱거리고 덜 투덜거릴 수 있게 날 잡아 주겠지만, 또 다시 당신이 예전에 불리던 이름과

예전에 가졌던 꿈들에 대해 살짝 무뎌져 버리면 금세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책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는 동안이라도.

'엄마를 부탁해'라는 건,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향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게 그 피에타.

엄마를 부탁해 - 6점
신경숙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1. 데자뷰로 위장된 변함없는 일상

가끔씩은 어제 신문이 오늘 신문같고, 또 오늘 신문이 내일 신문같을 때가 있다. 기자들은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진

듯이 떠들고 이런저런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하려 애쓰지만, 그건 어쩌면 매일매일 새로운 NEWS를 찾아내야 하는

그네들의 직업적 특성이거나 생계유지를 위한 언론인들의 암묵적 공모인지도 모른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난쏘공이 씌여진 그 때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나보다. 난장이를 알아보고

이해하고, 나아가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임을 말하는 신애도 그렇게 말한다.


"사회 부조리 시정 촉구한 고위층, 당직 개편 않겠다고 밝힌 야당 당수, 사회 안전법 해설, 남북한 대화 촉구한

UN사무총장...10년 동안에 여덟배로 늘어난 강력범죄, 학교 돈 1억원을 횡령한 재단 이사장...경기 회복되어도

계속 흐릴 고용전망...한 개에 1천만원이 넘는 기둥 스물 네개로 떠받들여진 여의도 새 의사당, 30만 원이 없어

아파트 입주 포기하고 새 터전 찾아 떠나는 재개발 지구의 철거민들...톱밥으로 만든 고춧가루...어제의 신문과

다를 것이 없다. 이상할 것도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날마다 같은 신문을 찾아 읽는다."



그렇지만 일종의 데자뷰, 기시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난쏘공의 나오는 사람들이 내뱉는 탄식, 절망, 분노는

낯설지 않다. 사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침없이 터져나왔던 것들이지만, 근래 다시 그들에게 마이크가 향했다는

점이 새삼스런 오버랩을 가능케 했을 거다.



#2. 난장이와 난장이 가족들, 난장이와 한편인 사람들의 이야기

난장이에게 다른 세계를 상상하도록 자극했던 지섭, "일만년 후의 세계"라는 책만 읽는다는 지섭에게 과외를

받았던 윤호 역시 탄식한다. "여기서는 무엇 하나 이룰 수가 없어. 시간을 터무니없이 낭비하고, 약속과 맹세는

깨어지고,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난장이가 '난장이의 가족'들과 함께 살던 서울시 행복동 집에 철거계고장이 날아온 날, 아파트 입주할 돈이 없어

입주권을 팔고 원치 않게 추방당한 그들의 가족들은 분개하지만 난장이는 말한다. "그들 옆엔 법이 있다."


난장이의 큰 아들, 그의 속깊음과 따스함으로 결국 사형대에까지 떠밀린 그는 이미 어려서부터 깨닫고 있었다.

무허가건물이 난립한 그의 동네에 찾아와 철마다 표를 구걸하던 거짓말쟁이들은 계획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필요한 것은 계획이 아니었다는 사실. "이미 많은 계획들이 나왔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고, 설혹 무엇이

달라진다 하더라도 그건 실제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 되리라"
는 깨달음.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으로 나가고 나니 마음이 차라리 편해졌다던 그들. 난장이의 아들딸들. 보이지 않는 보호를

받고 있다나. 그 보호란 건 그 구역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는 보호였고, '공부를 한 자'와 '못한 자'로

엄격히 나누어진 세계에서 이질집단으로 평생 낙인찍힌 채라야 받을 수 있는 보호였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마음이 편하댔다. 그러면서도 바다에 떠있는 늙은 수부가 목말라 괴로워하듯, 회색에 감싸인 축소된 집과 축소된

가족들을 들여다 보며 "물, 물, 어디를 보나 물 뿐, 그러나 한 방울도 마실 수 없다"
고 또한 괴로워했다.


공장의 사장은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은 이야기로 그들을 위협했다. 회사가 당면한 위기를 말하고, 경쟁사와의

경쟁에서 지면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음을 말하고. 혹은 힘껏 일한 후 함께 누리게 될 부와 희망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이른바 '파이 논쟁', 키워서 나눌지 나누면서 키울지가 2009년까지도 여러 사람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들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변화는 없었다. 나빠질 뿐이었다."


#3. 새삼스레 촌스러운 이야기, "촌스러운" 용산참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랑이 없는 세계라고 했다. 배운 사람들은 책상 앞에 앉아 싼 임금으로 기계를 돌릴 생각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필요하다면 밥 대신 모래라도 먹일 사람들이란 게 난장이 아들딸의 생각이었다. 폐수 집수장

바닥에 구멍을 뚫어 폐수를 직접 바다로 흘려넣는 사람들이란 게 난장이 아들딸의 생각이었다. 촌스럽다.


지섭도 말했다. 달나라의 이름으로 펼쳐보였던 그 사랑이 가득한 세상은 이제 지상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그는

목사, 과학자와는 달리 스스로가 많은 희생자 중 하나로서 노동자였다. 작품을 통틀어 계속해서 끈질기게

자칭 타칭 '근로자'라 불려왔으나, 손가락 두개를 잃은 지섭의 재등장과 함께 '노동자'라는 단어가 비로소

등장한다. 근로자와 노동자의 어감 차이, 그건 단순히 근면성을 강제하는 뉘앙스의 차이만이 아닌 거다. 못 배운

사람, 약자에게 경제적 고문을 퍼붓는 시대에 A대학 법학부에서 쫓겨난 그는 노동자,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역시 촌스럽다. 현장에 뛰어드는 학출 노동운동가라니, 촌스럽다.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기업들의 구태는 말하자면 '우리의 대표브랜드'라는 세련된 분장 뒤에 숨었다.

"협조적인 사람이 이끄는 노조라고 해도 그것이 기업에 이익을 줄 리는 없으며, 기업에 해롭고 우리 모두에게

해로운 노조는 우리 전체의 구조를 약화시키는 악마의 도구"
라는 마인드는 더더욱 촌스럽지만, 천박하게 번쩍이는
 
도금 광택으로 세련됨을 강변한다. 용산 참사 뒤에 숨은 대자본 건설사의 야만성과 촌스러움, 경찰과 검찰의

비열함과 촌스러움, 사과조차 없이 뭉개고 앉았는 위정자들의 더러움과 촌스러움, 그리고 여론을 스스로

자처하는 보수 언론들의 저열함과 촌스러움 역시 무엇인가로 위장되거나 혹은 스스로 세련됨을 강변하고 있다.


난장이의 아들딸이 보기에 그들이 살았던 사회와 같다던 먹이 피라밋은 여전히 유효할까. 아님 더욱 강해진 것은

아닐까. 대학교 신입생의 구성이라거나, 소위 좋은 직장의 신입 직원 구성이라거나, 무엇보다 세습을 포함한 부의

불균등한 분배에 이르면 더욱 공고하고 가팔라졌다는 느낌이다. 대학교 때 토지경제학을 가르치셨던 이정전교수는

우리 나라에선 절대 부의 불균형에 대한 통계를 낼 수 없다고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봉과 같은 소득 불균형

자체도 이미 이렇게 심각하지만 부동산이나 물려받은 재산등이 포함된 '부'의 불균형이 공표되는 순간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다고 하셨던가. 분명치는 않지만. 


이미 난장이의 아들은 자신의 최후를 예견하고 있었던 게다. 부모는 그의 자식들이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길

바라지만, 이미 자식들은 첫번째 싸움에서 져버렸다. 노비 매매문서에 적힌 그들의 조상에서 넘겨진 삶의 무게와

질곡에 눌린 아버지는 난장이가 되었고 난장이의 아들은 그보다도 작은 어릿광대로 눈을 감을 것이라는 예감.


#4. 悲

언론의 또다른 특징은, 새롭지도 않은 NEWS의 행진이 계속되도록 하기 위해 무언가를 계속해서 놓아버린다는

점이다. 혹자는 한국인의 냄비 근성을 탓하기도 하지만, 이미 한달여가 지나 OLDS가 되어버린 용산 참사,

그리고 사실 조세희가 이 소설을 쓴 때부터 OLDS였던 철거민 문제, 그런 것들이 대장 속에서 쉼없이 연동하는

그런 것들처럼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고 잊혀진다. 의도적이던 아니던.


용산 참사 후 한 달, 참사 이후 달라진 것은 없다. 한 철거민은 "박정희도 이러진 않았다"고 말한다.

"내가 테러리스트란다. 진짜 도둑은 따로 두고…"(프레시안, 09.02.20)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뫼비우스의 띠 장마 외 - 10점
조세희.윤흥길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www.idoser07.blogspot.com


"19일 이 인터넷 사이트는 항불안성, 항우울성, 마약성, 진정제, 성적흥분 등 모두 10개 부문으로 나눠 73개의 아이도저 MP3 파일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마약성 부문에서는 코카인, 헤로인, 마리화나 등 모두 28가지의 마약을 느낄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이 파일을 들으면 해당 마약을 흡입한 것과 같은 환각 증상을 준다는 것."(09.02.19. 헤럴드경제)


사이버 마약이라고 해서 궁금했다. 대체 뭘까 싶어서, 우연찮게 알게 된 싸이트에 접속해 들어갔더니 수십개의

트랙이 무료로 다운로드가 가능하단다. 다소 시간을 잡아먹는 광고를 기다려 다운을 몇 개 받아서 들어보았더니

이게 뭔가 싶다. 중학교 다닐 때던가, 옆친구가 쓰던 엠씨제곱을 잠깐 빌려 들어본 느낌이랄까.


"사이버 마약은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알파 파장(7~13Hz)과 지각과 꿈의 경계상태로 불리는 세타파(4~8Hz), 긴장, 흥분 등의 효과를 내는 베타파(14~30Hz) 등 각 주파수의 특성을 이용해 사실상 환각 상태에 빠져들게 하는 것으로 일명 ‘아 이도저(I-Doser)’로 불린다." (09.02.19, 헤럴드경제)


계속해서 삐이이이이~ 하는 소리가 약간의 파동을 치며,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쉼없이 들려온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살짝 꾸룩꾸룩거리면서 전혀 다른 파동과 빠르기로 옮겨가기도 하고.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어찌 마약을

느낄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미 우리는 뇌파에 자극을 주어 집중력을 강화하거나 긴장을 풀어주거나

할 수 있다고 공인된 기계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지 않나. 뭔가 효과가 있겠거니, 참고 계속 들어봤다.

10분짜리 음악..이랄까 소리..랄까 다 끝나갈 때쯤 소리가 귓전을 쨍-하고 울리며 점점 고조되어 갈 때엔 뭔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들긴 했는데, 만약 이게 맞다면 정말 약한 것 같다.

기껏해야 빈 속에 말보로 레드를 두 대쯤 연달아 피웠던 느낌 정도? 아님 PVC파이프를 갈아 만든 듯한 중국산

담배를 소주와 함께 피우는 정도? 스트롱버전도 있다니 나중에 한번 해볼까 싶기도 하고.


뭐랄까, 어렸을 적 '전생여행'이라는 책을 사며 부록으로 전생으로의 퇴행이 가능하다는 정신과의사의 최면테입을

열심히 들어 보던 때가 자꾸 기억이 났다. 누워서 릴랙스하며 발끝부터, 손끝부터 긴장을 빼고 심연으로 가라앉는

느낌을 가지려 애쓰다 보면, 어느 순간 숙면을 취하고 말았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도 나름 부작용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신문에선가, 신문에서 봤다는 친구의 입을 통해선가,

혹은 그 친구에게 들었다는 친구의 입을 통해선가, 어느 학교 학생들은 그걸 시도하다가 최면이 깨질 않아 병원에

실려 갔다느니, 심각한 정신적 충격이 있었다느니..모든 것들은 부작용을 수반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제쳐

놓더라도, 이렇게 뇌파를 직접 자극해서 감각을 상상시키는 시대가 오다니. 여기에 약간의 3D 입체영상만

구비된다면 마치 공각기동대에서 나올 법한 한 장면 아닌가 싶다. 가상이 실제를 조금씩 잠식해 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우려거니와, 살짝 머리가 아픈 거 같다. 하갸 실제 마약류도 두통이 수반된다고

들었지만.



뭐, 어쨌든 한번은 되었다 싶을 때까지 들어볼 생각이다.

생각있는 분들은 한번 시도해 보시길. 누굴 해하는 것도 아니고, 방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요 머.


요런 것도 있는데, 글쎄..궁금하신 분은 시도해 보시길. 정말 그 표정부터 공각기동대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관련기사 : '사이버 마약' 아이도저 급속 확산중 (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9/02/19/200902190199.asp)






#2. 탈주를 잠재운 약빨.


촛불집회가 들불처럼 번지고 뭔가 '주권'이라는 게 한줌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강부자 정부가 아니라 시민들에게

있다고 살풋 실감날라던 때가 있었다. 6월 10일. 백만 가까이의 인파가 어게인, 87년 6월을 외치며 모였었고 이후

6월말까지, 아무 대책도 수습책도 없이 손놓고 있는 정부를 거침없이 압박해 가는 모양새라고 생각했다. (그치만

이런 끈덕진 무대책과 무반응이란 건 이 정부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인 것 같다. 요새 강호순 사건으로 용산

참사를 덮으려는 심각한 여론조작을 시도했다는 온갖 심증과 물증에도 일절 언급을 피하는 청와대'꼬라지하고는.')


어느순간 기류가 바뀌었다. 고병권은 그게 6월말 7월초, "80년대식 강경진압을 한번 해봐야겠다"는 경찰 고위직의

말대로 거침없는 폭력이 행사되고 난 후, 각계 종교계인사들이 대거 나서서 '비폭력' 행진을 하면서부터라고 본다.

압도적이고 적나라한 국가 폭력 앞에서 잠시 멈칫했던 시민들의 분노가 채 어떤 모양새를 갖추고 어떻게 분출될지

결정될 그 중요한 시점에 종교인들이 촛불시위대의 지도부 역할을 자임하면서 급속도로 그 분노와 '폭력성'이

사그라들어 버렸다는 거다.


물론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폭력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역사를 움직이는(진전이건 후퇴건)

중요한 동력인 건 틀림없는 데다가, 민주화의 대표적 상징이 되어버린 87년 6월 항쟁이나 80년 광주항쟁 등을 봐도

스스로를 합법화하는 폭력인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폭력은 이번 촛불집회 때의 양상 따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극렬'했던 것이 사실이다.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곳곳에서 무력충돌이 빚어졌고, 그때도 언론들은 법질서

확립 운운하며 떠들었던 터다. 형식적인 민주화가 쟁취되었고 어쨌든 '우리가 뽑아놓은 대통령'이니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글쎄.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종교인'들이란 사람들은, 그 습성상 사람들을 자신들이 구제하고 계도하고 이끌어야 할 '어린양'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마치 그들이 사람들의 아픔을 직접 어루만지고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 짊어질 몫이라며

앞장서서 떠맡고자 한다. 아름다운 마음이고, 감동적인 자세라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지상의 법'이다. 그들이

가진 숭고한 인류애, 희생정신,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의 허물을 보려는 자세,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구도자의

자세..그런 것들은 말이 통하고 눈높이가 맞는 사람에게나 통하는 내용이다. 누가 잘못했고 어떤 현실적 해법을

구해야 할지,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서 조금이나마 그 왜곡을 풀어내야 하는데, 종교인들은 (거칠게 말하건대)

'모두가 죄인'이고 '폭력=죄'란 구도를 순식간에 형성해 버렸다. 노신이 얘기했던 것처럼 물에 빠진 개는 건져

올려봐야 다시 버릇 못버리고 물겠다고 컹컹댈 게 뻔하니, 우선 죽기 전까지 때렷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말도

일리가 있을 텐데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촛불정국이 (단기적으로는) 아무런 성과도 못 남기고 만 상황을 보며 마치 1919년 삼일절 독립만세

운동의 귀추가 오버랩되는 감이 있었다. 훌륭하고 고매한 정신세계를 가진 33인의 '민족대표'란 사람들은 휘황한

문구와 이상적이고 또 그만큼 종교적인 의미와 맞닿는 독립선언서를 쓰고는 채 제대로 낭독조차 안하고서 감옥에

걸어들어간다. 그들의 독립선언서에서 보이는 건 국외의 무장독립운동단체가 써내린 또다른 독립선언서에서

풍기는 피 냄새와 일전불사의 자세가 아니라, 어쩌면 조선인민 내부 회람용이 아닌가 싶을 만큼 자족적이고, 또

타협적인 자세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 '비폭력'을 내세우며 상처입고 버려진 국민들을 종교인들이 끌어안는

순간, 정부를 향했던 촛불들은 어느새 둥그렇게 안을 보고 모여선 캠프파이어가 되어 버렸다.


잘은 모르겠다. 고병권은 간디와 루터킹목사의 '비폭력'투쟁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최초 촛불들이 공권력과 '빠이와 꽃병'으로 맞대응하기보다 공권력의 구획과 질서를 희롱하면서 겁먹지

않던 그 때의 분위기가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어쩌면 한층 적나라하고 짐승스러웠던 7월초의 분위기를

넘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쿨하게 그렇게 갈 수 있었다면..비록 자연스레 격한 감정과 액션들이 간헐적으로 분출될

지라도..지레 겁먹고 수위를 통제하려던 것 같았던 데다가 전혀 지엽적이라 느껴지던 폭력/비폭력 논쟁으로

힘을 소진하진 않았을 거 같다.


종교가 현실 세계에 미치는 힘은 여전히 꽤나 크다.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던 맑스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 양면적인 면을 가리키는 표현 아닌가. 잘만 쓰면

효능 좋은 약이지만 잘못 쓰면 사람 병신만드는 게 아편인 게다. 신, 그리고 종교는 어디까지나 지상의 인간들이

보다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만들어진 창조물이라 생각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지 않더라도, 종교적인

위로와 정신적인 고양감만으로는 당장 내 살과 뼈를 발라내겠다고 덤벼드는 아귀들을 막아낼 수 없다는 건

불문가지다.


선종하신 김수환추기경님의 덕성과 고매한 인격을 의심할 바야 없지만, 그 분이 때로 보였던 보수적이거나

양비론적이고 애매한 입장들이 갖는 효과들은 따로 떼어 생각해 보아야 할 거라 생각한다. 그게 어쩌면 종교인에

짐지워진 하나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지 모른다. 하기야, 신의 말씀이라는 성경, 성서, 코란 등등 조차도

정치적으로 읽힐 수 밖에 없고, 또 그렇게 읽혀왔다는 걸 상기한다면, 그 분 역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지도.


앞선 글 : [추방과 탈주(고병권, 그린비)] (이명박) 정부로부터의 '탈주' 선언(1/2)


추방과 탈주 - 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카센터 김씨와 처음 만났을 때, 밀양의 한자 의미를 아냐는 생뚱한 질문을 던져 대화의 허리를 댕겅 잘라버렸던

그녀. 그 질문은, 어지럽게 자란 둑방 풀섶에 앉아 뜬금없이 '좋다~'라는 말을 내뱉었던 만큼이나 맥락이 없었다.

그래도 횡뎅그레하게 던져진 이 말에는 되바라진 아들녀석이 "뭐가 좋아?"라고 받아치기라도 했었다. 도시인인

자신이 촌에 '내려왔다'는 현실에 더해 그럴듯한 비장미와 낭만이 서려있음을 만끽하는 그녀.


그녀는 허영쟁이다. 그녀는, 밀양에 내려온 자신이 무언가 특별해 보이기를 원했고, "죽은 남편을 못잊어 남편의

고향에 내려와 살기까지 하는 여자", "서울에서 내려온 돈많은 여자", 혹은 (김씨의 장단에 맞추어) "국제 콩쿨서
 
우승도 한 피아니스트"같은 아우라를 덮어쓰고 싶어했다.


이런 자잘한 허영심은 그녀의 아이를 데려간다. 이제 "남편에 이어 자식까지 잡아먹고 만" 신애에겐 남은 게 없다.

신을 믿노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감염되어, 그녀는 신의 허울을 빌린 거대한 허영심으로 살아남고자 한다.

신, 신을 아는 자, 신을 모르는 가엾고 불쌍한 자의 위계 속에서 그녀는 다시금 굽어볼 발판을 마련했다. 급기야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빗발치는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러 나선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자에 대해 갈갈이 찢어죽이겠다는 증오 대신 주님의 사랑을 전파하러. 메조키스트나 할 법한 묘한 방식의 승리

선언을 위해.


그녀가 '사랑과 용서'로 굽어보려 했던 그는 이미 같은 무기, '신의 사랑과 용서'를 장착하고 있었다. 좌절한

그녀의 허영심. 십자가 아래 그를 무릎꿇리고 가련한 존재로 격하하려던 사디스트적 욕망이 픽 소리를 내며 꺼져

버렸다.


그렇다, 신애는 깨닫는다. 처음 교회에 나가 온몸으로 울던 것은 신의 가피 따위에 위로받은 것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위태로운 그녀는 예기치 못한 지렁이 한마리에도 와락 허물어지지 않았던가.

신 = 지렁이. BGM은 김추자의 '거짓말이야'.(전두환이 이노래듣고 불같이 화내며 방송금지시킬만 하다고

처음으로 공감했다.ㅋ)


그녀는 경건한(?) 야외 집회를 망치고, 집사의 성욕을 불지르고, 끝내는 한결같은 김씨의 감정마저 농락하면서,

신에게 복수하려 한다. 그녀의 복수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결정적으로 상처받고 만 그녀의 허영심? 끊임없이

주기만 하는 연애같은 종교에 대한 실망? 허영심에 젖어있던 그녀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 스스로의 의지로

2등칸에서 '불쌍하고 가련한' 3등칸으로 물러난 그녀는, 신에 대한 복수의 계속되는 실패 속에서 손목을 긋고서야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처음이었다. 살려주세요. 나 지금 아파요. 사람 살려요..


왜 하필 그시간에 그곳에 있었냐던 미용실을 뛰쳐나온 그녀는, 장독 위에 거울을 걸쳐놓고 혼자 힘으로 머리를

깎으려 한다. 목을 이리저리 빼고, 팔은 불편하게 굽힌 채다. 김씨의 등장, 그리고 적당한 높이에 든든히 세워진

거울. 햇빛 한 조각에 신이 숨어있던 말던, 그녀는 인간스러운 그로부터 베풀어진 그 정도의 도움을 받아들인다.

위계에 기댄 자기파괴적인 허영심이 무독하고 고상한 자존심으로 순화되는 순간. 그것은 또한, 살려달라던

그녀의 호소가 답을 얻은 순간.


김씨는, 여러모로 놀라운 인물이다. 교도소에 굳이 찾아가겠다는 신애에게 사람들이 '화이팅' 어쩌구 외칠 때

코웃음을 던지고, 계속 교회에 다니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안나가면 섭섭하고 나가면 맘편해서, 습관이

되어서 계속 다닌다고. 아편의 사용법에 대한 그 나름의 갈파가 아니었을까.


어쩌다 보니 코엑스 인터콘티넨탈 호텔 VIP시사회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VIP로 대접받고

싶어하고, 행사가 있으면 헤드테이블에 앉겠다고 난리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마치 그런 거다. 내가 뜬금없는

호텔 VIP로 대접받아 영화시사회에 초대받는 상황.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만.

(그러고 보면 요새 영화는 전부 시사회에 초대받아 보고 있다. 요새 좀 그렇다.)


영화는, 사람 얼굴을 쉽게 외우지 못하는 나로서는 다소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인물을 깔아두면서 시작했다.

그들의 사랑이 때론 막 깨어져 나갔고, 진행중이기도 하고, 혹은 피어나는가 싶더니 피시식 꺼져버리는 이야기들.

그런 짧막한 에피소드들이 서로 하나씩 단서들을 물면서 연결되고, 누군가의 불꽃같은 사랑은 또다른 누군가에겐

결혼생활을 송두리째 회의케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랑이란 감정에 빠진다는 것은,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이 취사선택을 요구받았던 두 개의 알약 중 하나를 삼켜야

하는 바로 그 타이밍에 빠져드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생활, 지금까지의 사람들과의 관계에 뭔가 낯설고 거슬리는

균열을 발견하고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 다만 매트릭스의 알약과 사랑의 차이라면, 이번

'핑크 알약'은 한번 먹어서 될 일은 아니라는 거 아닐까.


소설 하나를 쓰는 기분으로 연애나 사랑을 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저러한 감정의 변곡선의 위태위태한

궤적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어디서 언제쯤, 어떤 대사를 동원해 결말까지 써내리겠다는 다짐을 나 자신도 모르게

어느 시점에 했을 거라 자각했던 건, 늘 그 사랑이 지나고 난 바로 다음이었다. 그대로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해도,

사랑에 빠진 스스로의 감정을 즐기며, 그렇게 암묵적인 개요와 아웃라인에 맞춰 결말까지 숨가쁘게 한판 달리고

나선 문득 이건 자기애가 아닐까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런 이기적인 '사랑'놀음을 깨고, 마치 영화에 나오는 알렉스가 지지에게 빠져버리듯 그렇게

최초의 '핑크 알약'을 맛봤던 그런 순간도 있었다. 그런 순간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퇴락하거나, 무의미해지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상투적인 사랑이야기라기엔, 그리고 상투적인 변곡선들이 넘나들며 결국은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는 식의 뻔한

스토리라고 치부하기엔,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머금는 커플(혹은 홀로 선 깨진 커플조차)의 모습이 이쁘다.

타인의 시각으로 보기엔 참 뻔하고 식상하고 닳고 낡은 이야기일지 몰라도, 지금 사랑에 빠져 있고, 그 사랑이

자신을 사랑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의 유치하고 이기적인 수준이 아니라면, 그 둘만의 이야기는 참 충만하고

내밀한 달콤한 소근거림으로 가득할 거다.


마침 발렌타인 데이란 게 다가왔고 또다시 솔로들의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겠지만, 지금 사랑하고 있는

이들은 부디 자신들의 지극히 사적이고 비밀스런 이야기를 소근대기를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록 어딘가엔

"He's just not that into you"라는 살벌한 가능성이 으르렁대며 웅크리고 있을지라도, 그저 매순간 진심을 따라

행동한다면, 그리고 그 진심에 감응한 또다른 진심이 용기를 낸다면,


He can be absofuckinglutely that into you. 비록 언젠가 마침표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찍게 될지라도.


#0. 들어가기 전.

이 책은 형식상 두 파트로 나뉜다. '대중의 흐름', 그리고 '지식의 운명'. '운동의 선언'이란 파트가 덧붙어 있기는
 
하고,
특히 마지막의 '코뮨주의 선언'은 앞선 '대중의 흐름' 파트의 행간을 더욱 풍요롭게 읽을 수 있는 힌트들이

가득
담겨 있지만, 일단은 선언들을 제하고 앞의 두 커다란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에 담긴 것들이 너무 많다. 1부에서는 아감벤이 말했던 '배제함으로써 포섭하는 생명정치'에 대한 이야기

(이미 나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 대해 포스팅한 바 있다.[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부터

시작해서,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가속화된 국민의 추방, 촛불시위의 전말에 대해 내가 본 중 가장 깊이있고

냉정하게 내려진 해석, 폭력의 문제와 혁명의 문제 등이 줄줄이 다루어진다. 물론 그것들은 연속해 있지만, 동시에

하나하나 녹록치 않은 어려운 문제들이기도 하다. 그만큼 생각이 가지를 뻗어나갈 여지도 풍부한 소재들이란

뜻이다. 거기에 더해 2부에서는 지식인의 현재적 의미, 대중지성과 그에 대척하는 테크노크라트의 문제, 그리고

현장인문학이란 문제의식의 제기, 앎과 삶의 관계가 말해진다. 고병권 그가 생각하는 선언이란 "말한대로 살아야

하고, 살아온 대로 말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충실한 살아있는 무엇인가이며, 그의 이 책 역시 그 자체로 "이명박

정부, 정부로부터의 탈주"를 선언하는 선언문 같아 문득 이 책을 읽는 자세를 가다듬기도 했다.


어떻게 리뷰(혹은 이 책의 얼개를 뜯어 내 사고와 뭉쳐내어선 다시 풀어낸 글)를 쓸까 고심하다가, 나름 중요하다

생각하는 세 가지 지점을 잡기로 했다. 우선 국민들을 추방시키고 있는 정부(특히 벌써 망각되고 있는 용산참사와

관련해서), 두번째로는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사제들의 개입과 승리선언의 평가, 마지막으로는 '선언'이라는 단어로

고병권 그가 담고자 하는 실천적 의미가 무엇일지. 한없이 길어지겠다 싶어서 두번으로 나누어 올릴까 생각중이다.



#1. 국민을 추방하는 (이명박) 정부.


정확히 말하자면 노무현과 이명박 정부, 그리고 그 앞선 시대의 정부들에 대한 환상을 던져버리라 한다.

사실 이미 사람들은 모두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환상이 부질없음을 알고 있으며, 질릴 대로 질려서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누가 되건 똑같은데 왜 괜히 핏대 세우나." "지들끼리 해먹지."

              ▲ ⓒ연합뉴스

이명박이 지금 벌어지는 만악의 근원일까. 이명박 등장 이후 부쩍 늘어난 노무현에 대한 향수, 그리고

상대적으로 더욱 부각되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 무엇보다 마치 이명박 정부 혹은 이명박 개인이 이 모든

사회문제의 근원인 양 치부되는 경향이 없지 않은 사회 분위기를 본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급기야 경찰국가,

민주주의독재국가로 치닫고 있는 이명박 자신이 자초한 면이 매우 크지만, 또한 노무현의 말만 앞섰던 번지르르한

립서비스가 남긴 잔상들 탓도 있을 게다.


그렇지만 이명박 정부의 재개발 정책, FTA 추진을 비롯한 시장개방 정책, 감세 정책, 무한경쟁식 교육 정책,

부동산 정책, 비정규직 처우와 관련한 노동 정책 등등. 하나하나 논의의 여지가 큰 이슈들이지만,그런 것들은 사실

노무현 정부의 연장선 상에 있다는 것이 중론이고, 말마따나 '설거지만 하는 수준'으로 이어받았다 자인하기조차

하는 게다.  그렇다면 최소한 지난 십여 년간의 한국 사회를 꿰뚫는 연속적인 흐름은 잡아내는데 무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실은 고병권 그가 말했던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의 연속성을 실증적으로 책 안에서 보여주지는

않고 있지만, 중요한 건 정권 교체 따위로 역전되지 않는 하나의 도도한 흐름이 있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라 한다. IMF가 잠시 거세게 몰아치는 삭풍이라 여기며 잠시 후면 다시 잔잔한 일상이 도래할 것이라

여겼던 사람들이 직면했던 것은, 그칠 줄 모르고 불어제끼는 삭풍이 곧 일상으로 화해 버린 현실이었다. 구조조정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구조가 되어 위기를 일년 365일 안고 살아야 하게 되었다는 인식. 그런 상시적 위기는 마치 

녹아내리는 빙하 위에 빼곡히 올라앉은 사람들을 가장자리에서부터 조금씩 바닷속으로 밀어내듯, '국민'이란

이름으로 지켜지는 사람들을 조금씩 줄이고 있다. 이주 노동자, 여성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철거민, 농민, 빈민,
 
노점상인, 장애인, 공고 졸업생, '지잡대' 졸업생, 4년제 대학 졸업생, 20대 청년...계속해서 밀려나고 있는 거다.

취업시장은 얼어붙었고, 채 세워지지도 않은 사회적 안전망은 허물어졌고, '금모으기운동'은 씁쓸하고 부끄러운

기억이 되었다. 

         [손문상의 그림세상]<172>"세입자도 국민이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130165117&section=03)

그들은 이제 '국민'이 아닌 국가 내부의 난민이 된다. 더이상 이들은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국민','시민'이란

단어로 불리워지지 않으며, 다만 점점 줄어가는 그 정체모를 '국민'의 이해를 위해 계속해서 양보를 강요당하게

된다. 용산참사에 대한 반응도 그렇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그들은 대한민국 내부의

테러리스트"라는 등, 철거민(세입자)는 더이상 우리와 같은 국민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리고 고병권의 지적처럼,

이러한 경계로 몰린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날것의 국가권력을 두고 합법과 불법을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통제받지 않는 합법적 폭력을 휘두르며 게다가 일부 언론과 검찰의 사후 추인을 동원하는 

국가권력에 비해, 존재 자체가 불법이 되고 말아 법의 보호를 받을 수도 없는 "추방된 국민"들이란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그렇지만 얼마나 빠른 속도로 그들이 불어나고 있는 것인지.

               ▲ ⓒ프레시안

경찰국가, 혹은 민주주의 독재국가가 도래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추방당한 사람들에 대해 더이상 세련되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데서 기인한다는 게 고병권의 지적이다. 국민된 권리로부터

추방당한 채 방치된 '2등 국민, 3등 국민'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정부의 위협 요인이며 불안 요소일 수 밖에 없다.

연인원 수백만명이 거리로 나섰던 지난 촛불정국에서, 명박산성으로 상징되는 이명박정부의 앙상한 대응태세는

권위와 시스템의 외피가 지워진 국가권력의 추하고 무능력한 쌩얼을 드러낸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때 잠시나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노래부르던 사람들에게 힘이 돌아왔다고 느낄 정도로, 정부의

절대적이고 늘 신성해야 할 외관은 심히 손상되고 헐벗어 있었다.


용산참사를 두고 찧고 까부는 사람들 역시 분칠된 국가권력의 추악성, 비인간성을 노출시키고 있다.

인간으로 살아갈 기본적인 권리, 생존권을 절박하게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사회의 법질서를 우선하라고 윽박지르는

것만큼이나 추악하고 본말이 전도된 장면이 또 있을까. 민주주의의 허울을 쓴 채 덕지덕지 존엄함과 지고함을

두르고 있는 정부 시스템이 요란스레 작동해서 '국민 모두가 살 길', '재발 방지와 선진화의 길'의 찌라시를 뱉는

동안, 그 '국민이 주인된다는' 권력의 원천인 여섯 생명이 한줌 재로 화했던 충격적인 사건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는 장면. 비극적인 것은, 국민들이 계속해서 추방당해 '한발 재겨딛을 곳조차 없는' 백척간두의 위기속으로

몰리게 될수록, 이러한 추악한 권력의 맨얼굴을 대면할 일이 점점 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추방과 탈주 - 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강준만 교수의 글은 대학 다닐 때에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읽었던 그의 말마따나 그의 글은

시간의 힘을 오랫동안 이겨낼만큼 깊이있고 섬세하게 다듬어졌다기보다는, 시사적인 이슈에 맞춰져 다작으로

승부하겠다는 느낌이 짙었던 탓이다. 아마도 그런 탓인지 다소 까칠하면서도 정제되지 않은 말글같은 그의

줄글에 담긴 내용이란 현상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제기, 혹은 약간 더 치고 나간 정도의 이야기정도라고

생각했었다. 조선일보에 대해서나 학벌문제에 대해서나 지역갈등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이 책은 제목을 어디선가 들었을 때부터 꼭 한번 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과 지방 사이의

간극이란 문제에 대해서 좀 관심이 뻗어있을 때기도 했고, 외교학과(라고 쓰고 국제정치학과 혹은 국제관계학과라

읽어야 할 거다)를 나온 탓에 어디서 줏어듣기는 한 '종속이론'이나 '세계체제론'의 개념을 빌어 한 나라의 중앙과

지방 사이의 문제를 논하려 하는 듯한 아이디어 자체가 참신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필명을 얻었을

때 쓰던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풍모가 그대로 묻어나는 제목, "지방은 식민지다." 그 제목 그대로의 이야기다.


'내부식민지론'은 한 국가 내부에서 발생한 중앙과 지방 간의 극심한 총체적 격차가 구조화되어 급기야 지방이

중앙의 발전 및 유지를 위한 착취의 대상, 즉 식민지로 기능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최장집교수 등이 이러한

내부식민지론을 한국에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경우 환원론에 빠질 수 있다는 비판하는 데 대해, 강준만교수는

풍부한 사례를 들어 강력히 반박하고자 한다. 교육, 경제, 사회, 문화, 정치..그 어느 면에 있어서나 한국 사회의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주요한 사회 모순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 책의 자잘한 칼럼들이 한목소리로 말하고자

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그에 더해 지방의 신문방송학과 교수라는 점에서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지방 언론이

가져야 할 마땅한 책무와 역할에 대해 유독 강조하고 있다. 물론 지방언론이 실제로 지방 자치제도와 경제성장의

도모, 기타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마침 이 책을 다 읽어갈 즈음, 설날을 맞이해 '지방'이 모처럼 방송 앞머리를 장식했다. 휴식과 여가의 공간이자

도시인들(서울사람들)의 향수와 감정적 치유의 원천으로 남겨진 공간,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의 원형적 전통과

문화, 그리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환경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고 믿어지는 그곳. 그곳으로 도시인들은 꾸역꾸역

밀려내려갔고, 또 다시 '출세를 위한 공간', '한국의 중심' 서울로 되밀려 꾸역꾸역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잠복했던 한국의 지방은, 강호순이 지방의 야산과 한적한 국도를 휘저으며 연쇄살인을 저지를 때에야 또 방송에

출현하고 있는 거다.


그의 짧은 칼럼들을 교육, 정치, 언론 등 큰 주제에 따라 모아놓은 이 책에는 반짝거리는 아이디어와 당장 실천

가능할 법한 방책들이 많이 제시되고 있다. 서울 소재대학들이 경쟁우위를 갖는 것은 바로 서울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고 일갈하면서 그것들을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쓰자는 이야기나, 지방에 난립해 있는

토호친화형 언론들을 솎아내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소수의 언론을 밀어주자는 이야기, 그리고  연고주의를

강고하게 재생산하는 비공식적 집단들인 동창회, 향우회 등이 차라리 공익적인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조금은 쇄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 등등.


그 모든 이야기들은 언제나 원칙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의 회의적이고 시니컬한 반응을 유발할지 모른다.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거나 임기응변에 불과하다는 식의 참 쉽고도 힘빠지는 비판말이다. 그걸 의식하고 있는
 
강준만 교수는 매 칼럼마다 꼭 지레 항변하곤 한다. 이것 말고 실제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더 좋은 대안이

있다면 말해달라. 무릎꿇고 경청하겠다, 하고.


안타까운 건, 그렇게 현실적인 제약을 십분 고려하고 원칙을 어느 정도 양보하며 제시하고 있는 그의 대안들조차

'이빨이 들어가지 않는' 지금의 상황이다. 그는 지방자치를 보완하기 위한 제도적 기제를 이야기했지만 외려

지방자치제도 자체를 폐기하거나 유명무실화하려는 움직임이 더욱 설득력을 얻으며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는 지방문화와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매끈한 '서울공화국'에 약간의 균열을 희망하며 그 모루와

망치로써 지방 언론을 주목했으나, 오히려 지방 언론들은 전부 말라죽어버리거나 더욱 지방 토호와 협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마 그가 말한 내부식민지로서의 지방이 중앙에 상납해야 할 몫은 점점 커지기만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강준만 교수는 이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원칙을 좀더 양보하고 보다 유연하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다시

궁리해 낼 것인가, 혹은 다시 원칙을 내세우고 다소 선동적이고 비타협적인 이야기-그리고 어쩔 수 없이

다소간 선정적일 이야기-를 할 것인가. (어떤 경우든 그는 그가 제시한 '내부식민지론'이 강고해진다는 점에선

기뻐할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그의 목소리가 등장 초기에 비해 조금씩 힘이 빠지고 퇴락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식의 진동을 그가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건 대안을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부딪히게 될 한국의 완고하고도 답답한 현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방은 식민지다! - 8점
강준만 지음/개마고원


* 스포일러가 약간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스포일러는 뭐니뭐니해도 "손수건을 준비하라"는 팁..이 아닐지.


사랑하는 열 살짜리 아들이 한순간 눈앞에서 스러져 버렸다. 그것은, 처음에는 사고였다.


나름의 방식으로 슬픔을 가누어가는 남은 세 가족, 에단, 그레이스, 그리고 딸-여동생이 있다.

에단은 아들의 죽음에 대해 비난할 사람을 찾고 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아들의 부재, 그런 당혹스럽고

비극적인 상황을 초래한 원인이 누구인지, 누가 그의 아들을 치고 도망갔는지 밝히고야 말겠다며 광기에 가까운

집념과 증오심을 불태운다. 어쩌면 그건 그의 아내 그레이스가 자칫 자책감을 갖지 않을까 염려해서, 혹은

자신조차 아내에게 원망을 갖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억지로 몰고 나간 감정인지도 모른다. 


한편 그레이스는 이미 떠난 그녀의 아들을 정리하고 남은 가족들을 잘 추스르려고 안간힘을 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며, 핸드헬드로 촬영되어 연신 경련하듯 흔들리는 화면은 그녀의 바스라질 듯한 내면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하지만 더이상 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 소재니 법적 절차니 운운하며 떠난 아이의

아픈 기억을 들추는 건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녀가 아픔을 참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맛살을 한껏 찌푸리고 입술에 힘을 주며,

그 슬프고 힘겨운 바람이 멎기만을 조용히 기다리는 느낌. 보고 있는 것조차 너무 아팠다.


사이좋던 오빠를 잃은 여동생은, 영문모르고 분위기에 휩쓸려 비명을 지르고 펑펑 눈물을 흘리는 꼬맹이지만

또 하늘에 있을 오빠를 위해 피아노 연주를 바칠 줄도 아는 녀석이다. 어쩌면 죽음 앞에서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라는 식의 당위 없이 있는 그대로 슬픔을 받아들이고 또 보낼 줄 아는 게 아이들 아닐까.



그 사고로 인한 슬픔을 가누어가는 또다른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사고를 살인으로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고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싶었던 그였는지라, 실수로 쏟아버린 물처럼

의도치 않게 벌이고 만 사고는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책감과 후회, 괴로움을 안기고 만다. 그렇게 그가

괴로워하면서 시간을 끌고, 거의 반사적으로 증거를 은폐하고, 또 겨우 짜낸 용기도 무성의한 경찰들 앞에서

사그라들어 버리면서 타이밍을 놓치는 사이, 그 사고는 살인으로 바뀌어 간다.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 그의 압박감과 죄책감, 그리고 어느새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모든 걸 둔감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끼도록 바꿔버리는 시간의 강력한

산화력에 대항해서, 그와 에단은 계속해서 마주치게 된다. 마주치면서 조금씩 높아지는 가슴의 떨림, 그리고

그 진동을 상대가 눈치채면서 이야기는 폭발하듯 터져오르는 순간으로 급속히 달려나간다.


비극이란 건, 단순히 이야기가 슬퍼서 비극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그 인간의 숙명같은 것..뭐랄까, 어찌어찌

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뒤얽히고 결국은 옴쭉달싹 못하게 되는 그런 '통발'같은 스토리를 이른다고 했다.

어느 한편을 들어서 쉽게 다른 한 편을 손가락질하고 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더욱 가슴이 답답하고 꽉 메이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게 만드는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의 비극.



모두가 아픔을 나누어 갖는 것이 사고라면, 누군가에게 아픔을 적극적으로 떠넘기는 게 살인 아닐까.


결국 한 아이의 사고는 남은 가족들이나, 그 죽음을 직접 초래하고 만 당사자, 그리고 그의 남은 가족들에게 모두

견디기 어려운 아픔과 고통을 남긴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그 사고, ACCIDENT의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걸 다른 단어가 아닌 '사고'라는 단어로 지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고와 살인을 구분짓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남은 자들의 아픔을 누군가에게 모두 전가해버리려는 의지를 갖고 행하는 건 범죄, 살인.

그리고 남은 자들의 아픔을 타인에게 떠넘기고 모르쇠하려는 게 아니라 기꺼이 내 몫을 나누어 받겠다는 자세라면

실수, 사고.


사고를 낸 드와이트, 죽은 아들의 부모인 에단과 그레이스가 모두 '인간'이어서 다행이다. 그들은 삶을 살아나가다

예기치 않은 사고를 맞닥뜨렸으며, 그들 모두 그 사고의 피해자였던 것 아닐까..



* 삼국지 내용이야 다들 알 텐데 굳이 스포일러를 경계할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다만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듯 오우삼이란 이야기꾼은 무엇을 어떻게 강조하고 드러내고 싶었는지를 느낀대로 말하는 정도랄까요.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 주말의 명화 시간에 몇 번이고 봤던 영화가 몇 편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벤허'도

질릴 줄 모르고 봤던 작품들이었지만 무엇보다 The Towering Inferno, 한국어 제목으로는 심플하게 '타워링'을

빼놓을 수 없다.


재난이라고 하면 으레 폭풍, 해수면 상승, 우주인, 화산폭발..같은 어느정도 인력을 벗어난 것들을 다루고 있는

영화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가히 고전의 반열에 올라섰다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영화는 독특하게도 대화재에 휩싸인
 
초고층건물에서 쥐잡듯 몰리는 인간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주 조그마한 스파크에서 시작해 급기야 초고층빌딩

전체를 거대한 횃불처럼 살라먹으며 세 시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 내내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영화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불(火). 위협적으로 시뻘겋게 낼름이는 화염의 이미지가 어찌나 강렬하게 남았던지, 초등학교

혹은 이후의 유년시절에서도 화재방지 포스터 같은 걸 그릴라치면 가장 먼저 '타워링'의 장면들이 오버랩됐더랬다.

"적벽대전 2 : 최후의 결전". 흔히 나관중 삼국지의 스토리에 익숙한 사람들이건 아니건 큰 상관없도록 한

배려인 건지, 영화는 삼국지의 전체적인 맥락과 큰 그림을 모르는 사람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이야기를

살짝 단순하게 변주한다는 느낌이다. 한국에서야 삼국지를 열여덟번 읽어야 서울대를 간다느니 하며 위풍당당한

동양의 고전임에는 틀림없지만, 역시 삼국지가 익숙치 않을 넓은 세계시장을 겨냥하고 있는 오우삼감독이라

그런지 이야기하는 데에는 큰 욕심을 부리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적벽대전 1'을 보지 않은 사람조차 그다지

영화를 따라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니까. 2편 스토리도 사실 크게 복잡하지 않은 게, 화계를 사용한 이후의

전쟁씬을 묘사하는 데 더 열중하는 듯.


물론 등장해야 할 사람들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천하삼분지세를 유지할 조조, 공명, 주유의 세 축을 비롯해

유비 삼형제, 손권, 조자룡, 감녕, 채모, 장윤, 화타..등등에 더해, 주유의 아내인 소교, 그리고 손권의 여동생인

'돼지' 상향과 숙재던가, 바보스럽고 우직하지만 축구를 잘해 천부장이 된 조조의 병사가 새롭게 비중을 얻었다.

그렇지만 이 영화 역시 두시간 반에 육박하는 긴 시간동안 영화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는 주인공은 불(火)이다.

바람의 힘을 빌어 화계를 쓰겠다고 양 진영에서 모두 마음을 굳히고 있을 때부터, '적벽대전'이라 후세에 알려진

그 처참한 싸움이 있었던 전장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건대, 통제불가능한 수준의 대화재를 조장하고 방기한

거대재난지역으로 예정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애초 불화살과 화염탄의 성능을 키우지 못해 안달내던 감녕이 전장에서 마주치게 되는 건, 이제 더이상 사람이

손쓸 도리도 없을 만큼 자체의 생명과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화마(火魔) 그 자체다. 조조군이나 손권군, 소속을

불문하고 화염이 무차별하게 너울지며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광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새삼 망연하고 경악스럽다.

그런 질린 듯한 표정의 끄트머리를 타고 얼굴에 선연해지는 결기, 혹은 광기의 힘을 빌어 그들은 앞의 상대를 베고

찌르고 자르고 부수고 으깬다.

의외로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은, 이미 주인공 노릇에 진부할 대로 진부해진 거물 정치인들이 아니라 손권의

여동생 상향과 그 '착한 멍청이' 숙재인지도 모르겠다. 조조의 노련한 선전선동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환자들이

'승! 리!'를 거푸 외치며 전의를 불사르는 모습은 그 정도의 정치적 깜냥도 안 되어서 '오해다'란 말을 유행어로

미는데 정신없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할 뿐, 왠지 기괴하고 불편해 보였다. 그에 반해 이름조차 몇번 나오지 않는

숙재는 단지 세금을 삼년간 면하고 먹고 싶은 걸 맘껏 먹고 싶은 단순한 마음으로 참전했고,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줏대있는' 젊은이다. 그와 상향은 마치 에반겔리온이 AT-필드를 무력화시키듯이

소속과 명분의 이데올로기 싸움을 뻘쭘하게 만드는 소소한 연애담과 이벤트들로 사람냄새를 폴폴 피운다.

우연찮게도 그들은 모든 걸 덮치고 불살라 버리는 탐욕스런 불길이 빚어낸 재난에서는 한발 빗겨서 있는 데에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그들이 비극적 결말을 피하는 데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비록 영화 자체는 조조가 무도한 역적으로, 주유와 공명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는 식으로, 게다가 주유는

천하삼분지계를 위해 조조를 살려두고 말았다는 식으로 다소 가치판단을 유도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그들은 정치인. 혹은 지배계층. 혹은 권력자.

조조에게, 주유에게, 그리고 공명에게 불을 이용한 화계라는 건, 각자의 명분을 실현하고 이익을 취하기 위해

기꺼이 마수(魔獸)를 풀어버릴 수 있다는 판단을 전제한다. 그 마수에게 어느순간 통제권을 빼앗기고 적과 내가

동시에 쫓기는 상황이 될지라도, 내가 상대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면 기꺼이 화마(火魔)를 불러내겠다는 그런

권력욕과 광기어린 정복욕은 불길이 과시하는 끝없는 탐욕과 순수한 비인간성과 통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는 해도 주유는 마지막에 신음을 토해내듯 말한다. 이 싸움에서 승자는 없다고. 애초 유황을 실은 배

몇 척으로 시작했던 화계가 어느 순간 온 바다와 산야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번져오른 데에 대한 자각이나

반성이었을까. 복잡한 눈빛에서 공포와 두려움이 읽혔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소개 사이트에 보이는

이 영화에 대한 시놉시스(http://cinema.ticketlink.co.kr/detail/place_end01.jsp?pro_cd=A0009565)는 삼국지의

'적벽대전'이란 사건에 대한 요약일 뿐 이 영화 자체에 충실한 시놉시스라고 하긴 어렵지 않을까. 불타오른다, 는

그야말로 딱 떨어지는 표현 하나를 제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하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인간이 불러내고 만들어낸 재난에 대한 영화이자, 그 권력자입네 하는 인간들
 
자체가 다른 이들의 삶을 재앙에 빠뜨리는 재난임을 말하려고 한 영화는 아닐까. 조조군에 혈혈단신 찾아갔던

소교가 무지막지한 칼날 앞에서 하릴없이 횃불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장면이 자꾸 눈에 밟혔다. 주유의 아내가

아니라 백성을 대표해 조조 앞에 나섰다고 했던 그녀가 들고 있던 불은 고삐가 매인, 잘 통제되어 무섭지도 않은

그런 잔불이었다.




빈 마음 속의 동요(Riot in empty heart), 고상우라는 작가의 작품이다. 구불구불 잘 말린 머리칼과 비대칭의

앞머리. 그리고 새침하게 내려뜨린 기인 속눈썹 밑에는 어떤 눈빛을 숨기고 있을까. 뺨에 선명한 손바닥

자국은, 그녀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었음을 은유하는 걸까. 한참동안 바라보았지만 좀체 그녀의 속내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2층에는 좀더 그럴 듯한 공간이 있었다. 아마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쓰이던 공간이었는지 중간중간 흔적이 남아

있기도 했다. 그 너른 공간을 채운 커다란 사진작품들은 그 몽환적이고 묘한 느낌의 색감으로 뭐랄까, 공간 자체를

익숙한 것으로부터 스멀스멀 밀어내는 느낌이 들었다. 색이 뒤집어진 사진들과 죽어버린 듯한 색감의 역사만으론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서, 일부러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와타나베 曰) 사람 두 명을 집어넣다.

몇 개씩 천장에 달려있는 샹젤리제들하며 높은 천장, 아마 1, 2층 통틀어서 이공간이 가장 야심차게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곳이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전시된 작품들도 대형작품이나 연작이 많았다. 이 전시회 관련 기사에 함께

뜨는 사진들이 모두 이 곳에서 찍힌 것들임을 와보니 알겠다.

이 곳이 한때 "한국철도공사"가 운영하는 서울역사의 일부였음을, 그리고 또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쓰였던 곳임을

증거하는 흔적들. 그니까 여긴 '교양실'이자 '제1전시실'이었던 건가. 아님 '교양실'이었는데 '제1전시실'로 바뀐

걸까. 어느 쪽이던 이상하다. 저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만큼 소심하게 문짝 위에 올라붙은 명패는 대체.

사진들이 보통 잔뜩 헐벗고 남루해진 벽들을 가리듯이 걸려있던 다른 방들과는 달리, 이방은 그래도 멀끔한

나무장식들도 살아있다.

정확한 이름은 여전히 모르겠지만, 라디에이터라 그러나. 흔히 보는 것과는 다른, 조금은 고색창연해보이는 모습의

라디에이터가 수줍게 벽면 안쪽으로 숨어있었다. 저건 혹시 일제시대때 설치된 건..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생김새나 때깔이 그때까지 거슬러가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한 켠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런 벽난로도 있고, 여기 그러고 보니까 댄스홀 정도로 써도 별 손색이 없겠는걸

하고 생각했다. 터키의 톱카프 궁전이나 파리근교의 베르사유 궁전, 머 이러저러한 궁전들에서 보았던 천장높고

화려하게 치장된 방들에야 못 미친다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준수하지 싶다. 다소 키치스럽긴 하지만 유럽의

고풍스런 건물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왼갖 장식들. 아님 이 방에 들어서기 전 내가 지나온 곳들이 워낙 눈높이나

기대치를 낮췄던 탓일까.

그 방을 빠져나오니 다시 시작된 버려진 건물 순례. 깻잎처럼 붙어있는 낡고 닳은 벽지조각과, 온통 터져버린

페인트칠, 그리고 배관설비와 전깃줄이 몽창 드러난 헐벗은 곳에 드문드문 이빨빠진 샹젤리제의 불빛이

붕붕 떠있다.

이게 그 깻잎사이즈로 벽에 남은 벽지의 추억..이랄까.

고색창연한 문짝에 달린 놋쇠장식들. 둘러보다 문득 들었던 생각은, 조선시대의 기와집이나 궁궐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어정쩡한 근대 따라잡기 시대에 지어졌던 이런 건축물들도 우리가 지켜야 할 (전통)문화가 아닐까

싶었다. 그게 비록 서구 문화의 껍질만을 흉내낸 거라거나 어색하고 어설픈 미성숙의 것이라 할지라도.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비로소 지금까지 흘러온 걸 테니까 말이다.

창문에 저렇게 흰색 천을 늘어뜨리고 빛을 가려놓았다. 영화 '디 아더스'같은 데 나왔을 법한 주인없는 집에서

가구들이 모두 흰색천을 뒤집어쓰고 창문에도 흰색천을 가려놓는 장면이 떠올랐다.

2층 어디메쯤에서 내다 본 옛 서울역사의 머리꼭대기. 분명 새파랗게 맑을 하늘이 지저분한 유리창에 겹쳐서는

누덕누덕해졌다. 어디쯤에선가 방에 들어서면 새로 지어진 서울역사에서 KTX가 출발함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고스란히 들리기도 하고, 또 기차가 덜컹거리는 소음과 진동이 몸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같은 장소를 찍는데 카메라 렌즈가 빛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머금느냐에 따라서 사진의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사진전을 보면서 카메라를 찰칵대려다 보니 왠지 주눅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좀더 잘 찍어야 되지 않겠냐는

안타까움이 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저런 각도, 저런 느낌의 사진은 따라 찍어봐야겠다 싶어 눈여겨보게 된다.

예컨대 요런 사진도, I'm lost without you. 작가가 적당한 느낌의 벽에 저렇게 낙서를 해놓고 사진을 찍은 건지

아니면 우연찮게 저런 낙서를 발견하고 찍은 건지야 알 도리가 없지만, 중구난방 쓰레기통같이 감정들이 소용돌이

치는 맘속에서도 뚜렷이 형체를 갖추고 한가운데서 소곤거리고 있는 저 문장. 저 마음.

세상에 막 출현한 아이. 아직은 삶이란 더러운 것임을 기억하고 있는 지라 인상이 바가지다. 금세 잊고 찡얼대며

젖을 찾고선 배시시 웃겠지만.

나도 파리를 갔었고, 그 중 며칠은 비가 내렸으며, 에펠탑은 지나는 길에 몇번이나 발에 채였음에도, 더구나 노란

색이 아닌 파란 색 에펠탑이었거늘. 사랑은 ㅁ다. 사진도 ㅁ다. ㅁ은 타이밍. 그치만 사진은 ㅁ+ㅁ'랄까.

ㅁ'는 역시나, 영감 혹은 스킬. 꽤 다른 것들인데 하나로 묶고 만다.

내가 에펠탑이 보이는 저 샤요궁전 발코니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게 바로 저런 포즈..

Reflection. 올해 계획 중 하나는 데세랄을 기어코 사는 거다.

뉴욕에 있을 때 그래피티들에 열광했었다. 그렇게 화려하고 멋지진 않지만, 자연스레 박살난 합판 벽재와 뻘건

글씨의 낙서들은 이미 뭔가 자체의 생명력을 얻은 듯 했다.

고대의 벽화를 보는 것도 아닌데, 고작 백년은 커녕 수십년밖에 안 되었을 사람의 더께가 조각조각 부서져내리는

광경이라니. 저런 식으로 계속 벗겨지고 벗겨지면 차라리 엄청나게 깔끔하고 깨끗한 뭔가가 드러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마치 여름철 뙤약볕에 잔뜩 탄 살결에서 보풀이 벗겨지는 것 같다.

걱정스럽던 건 여기 정말 불이라도 나면 비상구 표시등은 제대로 켜지기나 할까, 스프링쿨러 따윈 언감생심일테고.

그래서였을지는 모르지만, 문들을 활짝 열고서 고정시키는 데에는 어김없이 통통하고 짜리몽땅한 빨간 소화기가.

소화기들을 엊그제쯤 일제점검하며 한번 걸레질이라도 했는지 다들 유난히도 반짝거려서 조그만 위화감도 일었다.

무슨 영화 세트장같은 느낌이었다. 침침한 조명 아래 한켠엔 사진액자가 열맞춰 늘어서 있고, 다른 쪽엔 오래전에

쓰였을 뿐 더이상 쓰이지 않는 물건들이 늘어서있고. 창틀에 걸려 부서진 햇살은 복도끝에 정좌한 액자에 무심히

내려앉는 중이다. 차분히 아래를 굽어보는 있으나마나한 샹젤리제까지.

깨진 유리창 이론이 어쩌면 이 곳의 전시 스타일을 설명할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잔뜩 낡고 부서져내리는 공간에

사진을 전시하려다 보니 빨간 테이프로 대충 창문틈도 바르고, 화살표도 바닥에 대충 찍찍 만들어 붙이고, 조명

틀 역시 각목으로 대충 뚝딱해서 훤히 드러나게 세팅하고. 또 그래야 공간과 전시가 어우러질 테고. 실제로 깨져

있던 창문이 하나 눈에 띄었지만, 그렇다고 저걸 보고 사람들이 나머지 유리창도 발로 차거나 돌을 던져 깨뜨릴 것

같지는 않다.

그 허술하고 긴장감없는 전시 기획을 한 눈에 보여주는 간이 의자..랄까, 이거 제대로 버틸까 겁나서 앉을 엄두도

못 냈다. 널빤지 몇개로 뚝딱거리고는 자주빛 벨벳같은 걸 살짝 얹어선 스테이플러로 고정시킨 거 같은데 전시장

전체에 적지않게 살포해 놓았더랬다. 하기야 이곳에서 가죽이 매끈한 푹신 의자를 바라지도 않는다.

날 상당히 감동시켰던 문구들. 촬영자(작가..라는 거창한 말 말고라도)의 인문학적 배경과 감성적 섬세함, 결국엔

촬영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한장의 사진. 애매모호하고 사적으로 보일지라도, 작가 그자체를 바로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다는 얘기. 언어나 문자에 비해 직관적으로 성큼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이 크긴 한 것 같다.

물론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룬 사람들에 한한 이야기일 테지만, 사진을 좀 본격적으로 다뤄보고 싶은 욕망이 불끈.

드디어 세시간여 관람을 끝내고는 출구를 찾아 다시 입구로. 사진전에 왔으니 사진들을 보는 거야 당연하다지만,

옛 서울역사를 이렇게 구석구석 구경하고 다닐 수 있던 것도 무지 기억에 오래 남을만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그게

고작 세시간 돌아보고는 관련 포스팅을 세개나 하며 사진을 덕지덕지 올리면서 주절주절대는 이유기도 하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