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와 시민사회에서 그간 '범야권 정치예비세력'으로 숱하게 하마평에 올랐던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이

이명박 정부의 국무총리로 내정되었단다. 서울시장 후보니 국회의원이니 말이 많았지만 본인이 한결같이

고사해왔다고 알고 있는데 참 의외다. (국무총리 후보에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 내정)


정권 차원에서 보자면, 이명박 정부가 충청권을 감싸앉고 나아가 박근혜에 대항할 수 있는 대선후보를

키우기 위한 포석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명색뿐인 '친서민행보'를 외치는 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중도실용노선'을 끌고 나가기 위한 신선한 얼굴마담으로서도 충분한 값어치를 한다. 더구나 그간 '범야권'

진영의 후보라 여겨졌던 만큼 정권의 포용성이랄까, 강부자/고소영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을 불식시키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고 말이다.


아마 정운찬은 기왕 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다면 이명박 정부가 레임덕에 빠지기 이전에 총리직을 맡는 것이

유리하면서도, 적당히 힘이 빠져 개인의 운신이 폭이 조금은 넓고 자신의 목소리를 투영하기 좋은 타이밍이라

판단했는지도 모르겠다. 내년 G-20도 있으니 국제 무대에서 나름의 비중있는 역할을 기대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본인이 충청권과 여차하면 호남, 수도권까지 어필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걸까.


참 실망이다. 아무리 정권에 대한 분칠용으로, 본인의 정치욕구에 대한 해소용으로 잇속이 서로 맞았다고 해도,

정운찬이 그러는 건 실망이다. 나름 지난 대선에 범여권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었고, 박원순 변호사니 누구니

재야 세력과 함께 묶여서 고려되던 사람 아닌가. 서울대 법인화에도 반대 목소리를 명확히 냈던 걸로 기억하고
 
있고, 교육 정책 등에도 상당히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던 사람인데, 결과가 어떻게 되던 일단 실망이다. 게다가
 
똥물만 잔뜩 묻히고 쫓겨나오기 십상이지 싶다.


무서운 건 청와대다. 정운찬을 총리로 발탁하는데 성공하다니, 이런 깜짝 카드를 구사할 만큼의 능력치로

레벨업했다. 집권 초나 얼마전까지의 어리버리함, 막무가내식의 땡깡이 아니라, 나름 머리를 쓰며 수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노무현과 김대중의 연이은 비극에도 불구하고 세력화는 커녕 정체성조차 뚜렷치 않은

야권 세력, 그 비극 중에 묻혀 버린 진보 세력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올 뿐이다.


물론 청와대는 그들과 이해를 함께 하는 언론과 권력기관의 비호를 받고 있다. 당장 최장집 교수가 진보개혁세력에
 
대한 강연 중에서 했던 몇몇 대목을 끌어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난이 곧 진보는 아니다"라는 식으로 메치기되어

되려 진보개혁세력에 대한 칼로 돌아오게 만든 조중동의 활약이 있지 않은가. 그분의 근본적인 문제의식 따위는

모조리 거세된 채 그저 선정적인 문구 하나만 발췌해서 써먹는 수법이라니.(중앙일보·동아일보, 최장집 띄우기 왜?)


그들의 지원사격을 등에 업고, 이명박의 통치술이 점점 진보하고 있는 것 같다. 정치력 따위 제로에 가깝고

그저 선불맞은 멧돼지모냥 앞으로만 직진하는 미친 불도저인 줄 알았더니, 네비게이션을 장착하고 나름

영악스럽게 정국을 장악해 나가는 건 아닌가 염려스럽다.




요새는 위드블로그에 종종 앨범이 리뷰대상으로 오르고 있지만, 위블에서 올린 음반 리뷰의 첫대상이었던 '화나'

힙합앨범이 운좋게 당첨된 이후([FANATIC] 생기다만 귀로 듣는 화나의 힙합.)로는, 전혀 당첨의 기회가 없었던지라
 
아쉬워 하던 참이었다. 아마 그때의 리뷰가 맘에 안 들었나보다, 역시 내 귀는 생기다 말아서 누군가의 음악을

평한다는 게 가당치도 않은 소리로 들렸나보다..여러 가지 자책감과 자괴감이 물밀듯 몰려오던 중.


"클래식/크로스오버 뮤직의 센세이션! 본드와 바네사 메이보다 업그레이드된 21세기형 클래식 밴드"라고?

본드는 제임스 본드를 말함인가 했지만, 여튼 바네사 메이는 안다. 그녀의 바이올린 연주를 나름 좋아라 하며

찾아들었던 이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니, '21세기형 클래식 밴드'란 단어가 와닿는다. 오호...냉큼 신청.

"레드 제플린의 'Kashmir',엔니오 모리꼬네의 'Chi Mai'라니요..이 두곡을 어떤 식으로 재해석해서 연주했는지 꼭 듣고 싶습니다. 비록 제가 바네사 메이밖에 모르고 본드가 누군지, 에스칼라가 누군지 듣도 보도 못했지만 바네사 메이보다 업그레이드되었단 게 대체 어떤 느낌일지 맛보고 싶네요."

라고 알랑방귀 아닌 알랑방귀를 뀌었더니, 뿡, 소식이 왔다. 역시 방구가 잦으면 또...흠, 여튼.

앨범 포장지에도 붙어있다.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최종전까지 진출했던 그녀들인 게다. 하긴 데뷔 앨범에서

'Palladio', 'Kashmir' 두 곡이 동시에 싱글 차트에서 대박을 냈다니 실력은 인정받고도 남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들어보니 2번 트랙 Palladio와 3번 Kashmir, 그리고 7번 Chi Mai와 9번 Serabande가 가장 귀에

꽂힌다. 주로 가사없는 클래식 음악이나 뉴에이지 음악류는 틀어놓고 쭉 BGM으로 쓰는 터라 따로 트랙번호나

곡 이름을 확인하는 일이라곤 좀처럼 없는데, 이렇게 네 곡은 앨범을 들춰 제목을 다시 확인하고 말았다.

특히 Palladio는 그녀들이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들고 나간 곡이라던데, 아마 그 쇼에 나가서 처음 이 곡을

선보이던 순간, 심사위원들은 이런 느낌을 받았지 않을까. 포장지를 쭉 잡아찢어 그녀들의 음악을 좀더

맛보고 싶다, 대체 이 세련되면서도 파워풀한 곡 흐름은 뭐지, 두 대의 바이올린, 한 대의 비올라, 한 대의

첼로로 이렇듯 풍부한 감정을 탄주할 수 있다니. 아마 그랬기에 최종전까지 올라갔었으리라. 다른 재해석된

곡들도 물론 멋졌지만, 이 앨범 전체에서 가장 빛나는 곡이 바로 Palladio인 것 같다.


나름 클래식한 우아함, 장중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스피디함과 보다 드라마틱한 궤적을 화려하게 그려내는데

성공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 잘 모르겠지만, 이 씨디를 아예 차에다 갖다놓고 시간날 때마다 듣게 되는 걸

보면 뭔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품고 있는 거다. 아마도 다음 앨범이 나온다면, 한번쯤 살지 말지를 고민하게 될

법하다. (물론 그 전에 리뷰대상으로 나온다면 꼭 뽑아주세요~하고 저요저요 하겠지만.)


아, 그러고 보니 기억 속의 흐릿한 바네사 메이보단 파워가 약하면서도 좀더 풍부한 화음이 장점이지 싶다.

아무래도 솔로와 밴드의 차이겠지만. 점수를 주라면 솔직히 바네사 메이에 쏠리겠지만, 데뷔 초의 그녀와 비기는게

공정한 거고, 그렇다면 글쎄. 오십보 백보의 점수를 받지 않을까.

멋진 앨범이었지만, 다만 한 가지. 배송 상태가 왜이렇게 엉망인지 씨디 케이스를 열자마자 나뒹구는 씨디와

옥수수 강냉이 이빨빠지듯 사방으로 튀겨나가는 씨디 케이스 쪼가리들. 에어캡을 좀더 감던가 택배직원에게

좀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청하던가, 씨디를 열 때마다 조심스레 수평맞춰 여는 일이 없도록 다음번에는 신경을

좀 더 써주었으면 한다.








내가 정말 오랫동안 좋아라 하는 가수 중의 한 명, 이상은이다. 그녀하면 '담다디'나 '언젠가는'만을 떠올리는

사람이 여전히 많겠지만, 내게 그녀는 6집 '공무도하가' 앨범부터 각인되어 있다. '새', '어기여디여라', '성녀',
 
'비밀의 화원', '공무도하가'..온갖 명곡들을 만들어낸 대단한 싱어송라이터이자, 마력적인 보이스를 가진 

가수기도 하다. 내 십년 전부터의 필명, ytzsche에도 한 부분 기여한 그녀다.

수요일에는 매봉역 옆에 있는 EBS 공감 스튜디오에서 이상은과 '공무도하가' 앨범 이래 그녀와 함께 하는

다케다 하지무의 공연을 보러 갔었다. 얼마전 장기하의 공연을 보려고 응모했을 때는 보기좋게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용케 당첨된 친구와 함께 그녀를 보러 가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실제 그녀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사실 초등학교 때 친구가 그녀의 조카여서, 친구집에 놀러갔을 때 한번 얼핏 본 기억은 있지만, 그때는

담다디로 막 나섰던 때였던가...별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다. 사인이라도 받아둘걸...ㅜ)

퇴근 후 부랴부랴 도착하느라 저녁도 간단히 샌드위치로 때우고 들어간 공연장 내에서는 카메라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공연 마치고 슬쩍 한 장. 후다닥 찍느라 엉망이다.

두번째 사진, EBS 공감 스페이스라는 로고가 공연 내내 맞은편 벽에서 둥실둥실 떠있는 게 눈에 자꾸 걸렸어서

찍고 나니까 누군가 와서 그런다. 공연장 내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앗 죄송...이러고 더이상 사진찍기는

포기. 해서 공연장 내 사진은 달랑 이렇게 두 장이다.

공연은 총 열 곡. "너무 오래", "Soul Hospital" 같은 곡들은 첨에 대체 뭐지, 내가 모르는 노래도 있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미발표곡이었다는. 이번 공연은 그녀와 함께 십여년간 음악활동을 해온 다케다 하지무가 그녀의 노래들을

피아노로만 재해석한 앨범 'MONO'를 낸 것에 대한 홍보를 겸한 듯 했다. 덕분에 기대했던 앞머리 '어기여디여라'는

그의 피아노 곡으로만 들을 수 있었다.


총 공연시간은 한..80분? 열 곡 부르면서 곡 하나 마칠 때마다 이야기하고, 마지막에 앵콜 곡하나, '음악성은 좀

떨어지지만 누구나 쉽게 따라부를 수 있고 하나된 걸 느낄 수 있는' "언젠가는"을 부르고는 퇴장..박수를 열심히

치면 다시 나와 앵콜곡 하나를 더하지 않을까 했는데, EBS 측에서 야박하게도 조명을 탁, 켜버렸다.


너무나도 아쉬웠던 80분. 조그마한 소극장 사이즈 공연장을 꽉 채웠던 그녀의 야트막한 허밍소리, 그리고 허스키한

까끌까끌한 그녀의 목소리가 고저를 넘나들며 자유로이 꺽이던 그 마력적인 순간들. 사실 그녀가 얼마전 상당한

연하남과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이후 나온 앨범들에 많이 실망한 채였다. 이승환처럼, 그녀 역시

사랑을 하니까 '예술혼'이 망가져버리는구나 싶었달까. 그녀는 '이상은이 이상해'라는 수군거림을 들었다던

'공무도하가' 앨범 시절의 그녀가 자신 생각에도 많이 이상하고, 또 '새'란 노래도 정말 이상하다고 이야기했지만,

난 그 앨범, 그중에서도 '새'가 너무너무 좋단 말이다.

공연이 끝나고 들어왔던 통로로 다시 나왔다. 벽을 따라 온통 붙어있는 이전 공연자들, 이전 공연 스케줄, 포스터들.

이상은의 마법같은 목소리, 그 떨림에 흠뻑 젖었던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다시 현실이랄까, 그 통로 마지막 모서리켠에

붙었던 '언론악법 저지'의 포스터들. 문득 떠올라 버린, 그래서 이상은의 환타지스럽고 몽환적인 가사와 운율을

유감스럽게도 망쳐버린 민중가요 한 대목.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설 수는 없다, 무엇을 뺏길 건가, 단지 되찾을 뿐."

민중가요를 좋아하지만, (물론 민중가요를 감상의 대상처럼 표현하는 '좋아한다'란 단어에 어폐가 있을 수 있지만)

이상은의 여운을 좀더 오래 간직하고 싶었단 말이다.

EBS 건물 1층 한켠에 설치된 교육방송 부스. 공감스페이스가 정말 괜찮은 프로그램이고 다른 다큐멘터리도 꽤나

호평받고는 있지만, 역시 EBS는 교육방송의 이미지가 강하다. 나도 고등학교 때 EBS 문제집은 거의 다 풀었던 듯.

밤이 깊어 나서는 길, 요새 계속 PENTAX 데세랄을 쓰다가 다시 이전의 하이엔드급 카메라를 쓰려니 뭔가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다. 음..뭐랄까, 중후하게 스윽 미끄러지며 코너링에도 흔들림없는 중형차를 타다가 갑자기

티코같이 뒤뚱거리며 장난감스러운 소형차를 탄 느낌? 이를 어쩌나, 간사한 사람마음.

그래서, 혹시나 DSLR을 사는데 돈을 보탤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공연장서 들고온 물병. 이게 뭐냐면,

바로바로 이상은이 공연 중간중간에 들고 마셨던 물병이다. 믿지 못하겠다고? 공연 직후 자리를 채 뜨지

않았던 관객들이 전부 보았다. 왠 까만옷의 직장인이 무대위로 펄쩍펄쩍 손을 뻗어 그녀가 마시던 물병을

잡아채는 민망한 모습을.

잘 보면 물병에 동글동글 그려진 그녀의 지문도 보이지 않나. 아..나 무슨 변태같아..ㅡㅡ;;;

중요한 건 사실, 방송에 노출되는 물병인지라 저렇게 라벨을 칼로 깔끔히 제거했다는 것. 난 사실 그게

신기해서 들고 왔을 뿐, 오타쿠스럽지는 않다구요...믿거나 말거나. 원하는 분 제게 비밀댓글로 적당한

가격을 불러주셈.ㅋㅋㅋㅋ

공연 80분, 게다가 다케다 하지무가 초반 네곡을 혼자 했으니..너무나도 아쉬웠던 건 당연한 터. 집에 와서

그녀의 씨디를 다시 찾아보았다. 국내에서 조금 판매되다가 이내 절판되고 더이상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고있는

6집 공무도하가 앨범(95년)가 왼쪽 상단, 나는 옥션이었던가, 경매 사이트에서 구매했었다. 나머지는 시계방향으로

8집 LEE-TZSCHE(97년), 9집 Asian Prescription(99년), 10집 Endless Lay(01년)...이상하네, 7집과 11집이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현재 13집 발매중이라는데..너무 밝고 건전한 그녀는 그닥.

 
'어기여디여라'는 일본 무슨 영화의 OST로 쓰였다고 한다. 국내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팬이 많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었는데, 국내에서 좀 더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날 공연은 아마..담주? 다담주쯤 EBS 공감

스페이스에서 방영되지 않을까. 워낙 쪼끄만한 공연장이었으니 내 얼굴도 몇 번 비치지 않을까 싶다.



* 이상은의 "새" 가사.

네가 바라보는 세상이란 성냥갑처럼 조그맣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허전함 맘으로 돈을 세도
네겐 아무 의미 없겠지 날아오를 하늘이 있으니
너는 알고 있지 구름의 숲 우린 보지 않는 노을의 냄새
바다 건너 피는 꽃의 이름 옛 방랑자의 노래까지
네겐 모두 의미 있겠지 날아오를 하늘이 있으니
내려오지마
이 좁고 우스운 땅 위에 내려오지마
네 작은 날개를 쉬게 할 곳은 없어
어느 날 네가 날개를 다쳐 거리 가운데 동그랗게 서서
사람들이라도 믿고 싶어 조용한 눈으로 바라보며
내겐 아무 힘이 없어요 날아오를 하늘이 멀어요
내려오지마
이 좁고 우스운 땅위에 내려오지마
네 작은 날개를 쉬게 할 곳은 없어
가장 아름다운 하늘 속 멋진 바람을 타는
너는 눈부시게 높았고 그것만이 너다워
가야한다면 어딘가 묻히고 싶다면
우리가 없는 평화로운 섬으로 가지
마음을 놓고 나무 아래서 쉬는 거야
우리가 없는 평화로운 곳으로 가서
가야한다면



故김대중대통령 추모 공식홈페이지(http://211.233.13.92/?brch=1)에 고인의 마지막 일기 중 일부가 PDF형태로

공개되었다. 생각보다 현 정권에 대해 '세게' 발언한 부분도 공개되어서 왠지 안심했다. 고인이 생전에

침묵하지 않으셨다는 게 안심이 되었고, 서거 후에도 타의에 의해 침묵당하지 않으셨다는 것 역시 안심이

되었달까.



■ 건강에 대한 언급

"살아있다는 것이 행복이고..건강도 괜찮은 편인 것이 행복이다. 불행을 세자면 한이 없고 행복을 세어도 한이 없다."(2009. 5. 2)

이렇게 건강도 괜찮으셨다는 분이 갑작스레...역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충격이 크셨던 게다.


■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언급

"노 대통령도 사법처리 될 모양. 큰 불행이다. 노 대통령 개인을 위해서도, 야당을 위해서도, 같은 진보진영 대통령이었던 나를 위해서도, 불행이다. 노 대통령이 잘 대응하기를 바란다."(2009.4.18)

고인은 스스로를 노 전대통령과 함께 "진보진영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진보'라는
것에 주어지는 운신의 폭이란 그 두 분의 서거를 돌이켜도 빤히 보이는 것 같아 답답하다.


"자고 나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보도. 슬프고 충격적이다. 그간 검찰이 너무도 가혹하게 수사를 했다. 노 대통령, 부인, 아들, 딸, 형, 조카사위 등 마치 소탕작전을 하듯 공격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수사기밀 발표가 금지된 법을 어기며 언론플레이를 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신병을 구속하느니 마느니 등 심리적 압박을 계속했다. 결국 노대통령의 자살은 강요된 거나 마찬가지다."(2009.5.23)

결국 노대통령의 자살은 강요된 거나 마찬가지다....마치 소탕작전을 하듯 공격했던 사람들,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그들.

"고 노 대통령 영결식에 아내와 같이 참석했다. 이번처럼 거국적인 애도는 일찍이 그 예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현실에 대한 실망, 분노, 슬픔이 노 대통령의 그것과 겹친 것 같다. 앞으로도 정부가 강압일변도로 나갔다가는 큰 변을 면치 못할 것이다."(2009.5.29)


전례는 없었겠지만, 생각보다 금방 또다른 사례가 생겨나고 있습니다...그런데 전현직 대통령 중 당신의 추도사는
누가 해줄지, 누가 이렇게 진심을 담아 울어줄지...먹먹해지네요.


■ 정치적 시사점을 던지는 언급

"끝까지 건강 유지하여 지금의 3대 위기-민주주의 위기, 중소서민 경제위기, 남북문제 위기-해결을 위해 필요한 조언과 노력을 하겠다. '찬미예수 백세건강'"

야당 정치인들이 뭐라뭐라 떠들기는 하지만, 김대중 전대통령만큼 명징하게 현재의 위기상황을 정리한 사람은 없었다.
대정부 비판을 위해서 제대로 된 프레임을 마련해 주었고, 실제로 이후 야당은 이 세가지를 잘 활용하고 있다.


"용산구의 건물 철거 과정에서 단속경찰의 난폭진압으로 5인이 죽고 10여 인이 부상 입원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2009.1.20)

동계 철거는 실시하지 않는 게 상례였다는 점에서, 용산 참사는 사정을 아는 모두에게 매우 예기치 않았던 비극이었다.
빈민들의 처지가 눈물겹다고 일기에 적는 당신의 모습에서, 20대 체게바라의 감수성을 본다면 과장일까.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은 자기만은 잘 대비해서 전철을 밟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전철을 밟거나 역사의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2009.1.16)

지금이 독재인지 아닌지, 그걸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적인 구속감, 자유의 박탈감'이
더욱 중요한 거 아닐까. 마치 빈부차에 있어 '상대적인 박탈감'이 '절대적인 박탈감'보다 중요한 요소듯이.


"여러 네티즌들의 '다시 한 번 대통령 해달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다시 보고 싶다, 답답하다, 슬프다'는 댓글을 볼 때 국민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힘닿는 데까지 헌신, 노력하겠다."

국민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는 노 정객의 다짐. '삼김'이라 도매금으로 묶였지만 줄곧 피해자의 위치에 서있었고,
YS 대 DJ의 라이벌구도라 하지만 사실 YS만큼의 막말을 던진 적이 없는 고인. YS와 JP의 일기장엔 뭐가 적혀있을까.
그리고 우리의 MB 일기장엔 대체 뭐가 들어있을까.


■ 촛불집회 관련 언급

"(인류의 역사는 지식인이 헤게모니를 쥔 역사 같다며...)21세기 들어 전 국민이 지식을 갖게 되자 직접적으로 국정에 참가하기 시작하고 있다. 2008년의 촛불시위가 그 조짐을 말해주고 있다."

촛불시위에 대한 이런 심정적 지지, 온건한 입장을 갖기란 '노땅'의 마음가짐으론 쉽지가 않을 터다. 평생의 살아온 길이
고인의 열린 마음, 합리적인 판단을 가능케 한 것일까. 정말 대단한 정치인이었다.



■ 아내와의 사랑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하루 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

이희호 여사와의 관계가 참 돈독하셨나 보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 라는 표현에 담긴 애정이 잔잔하게 와닿는다.


■ 기타

"꽃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마당의 진달래와 연대 뒷동산의 진달래가 이미 졌다.지금 우리 마당에는 영산홍과 철쭉꽃이 보기 좋게 피어 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나에 대해서 허위사실을 공표한 한나라당 의원에 대해서(100억 CD) 대검에서 조사한 결과 나는 아무런 관계 없다고 발표. 너무도 긴 세월동안 '용공'이니 '비자금 은닉'이니 한 것, 이번은 법적 심판 받을 것."

"가난한 사람들, 임금을 못 받은 사람들, 주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는 설날이 큰 고통이다."



p.s. 김대중 전 대통령님, 허락을 안 받고 감히 '마지막일기' 파일을 제가 첨부하려 합니다. 널리 읽혔으면

하는 마음으로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올리오니 부디 넓은 마음으로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곳은, 평안하신지요.








위드 블로그가 조금씩 품목들이 다양해진다 싶더니, 선크림도 리뷰 품목에 올랐길래 이렇게 적었댔다.

"남성들도 피부를 가꿔야 한다느니, 꽃남이 대세라느니 말은 많지만 일단 선크림부터 찍어바르는 게 시작이란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하얗게 들뜨거나 끈적거리는 느낌이 싫어 안바르고 있었는데, 액티브 썬크림은 어떨지 기대도 되고요, 마침 여름휴가철이니 본격적으로 사용할 기회도 많을 거 같아 신청합니다~!"

용케 당첨이 되었는데, 생각보다 여름 휴가가 많이 미뤄졌다. 해서 우선 집 밖에 나다닐 때 바르기로 하고 택배상자 개봉!
 
생각보다 커다란 상자에 에어쿠션이 잔뜩 들어있었고, 그 밑에서 사뿐히 자리잡고 있던 선크림과 보디워시, 로션까지.

이런 걸 그리고 임기응변에 강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좀 성의없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박스 한쪽 뚜껑에 적힌

메시지와 하트 마침표. 조금만 더 신경썼으면 메시지의 진심이 훨씬 잘 와닿지 않았을까 아쉬웠던 대목.

본격적인 사용후기 #1. '프레쉬 바디워시 & 바디로션'

선크림보다 먼저 써본 건 받고 나서 바로 써본 바디워시와 바디로션이었는데, 좀 실망이었다. 향이 너무 달기만

하고 산뜻한 느낌이 없어서, 화장실 내의 공기가 온통 무겁게 축축 처지고 가라앉는 듯 했달까. 게다가 로션은

뭔가 처덕처덕 바른다는 식으로 점도가 높아서 피부에 마뜨하게 스민다기보다 발라놓고 말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뭐...사실 이 품목들은 보너스로 온 셈이니까 딱히 리뷰를 할 필요는 없을지 몰라도, 그래도 의견을 표해주면 좀더

좋은 제품이 나오리라는 기대를 하며 몇마디 꿍시렁꿍시렁.

본격적인 사용후기 #2. 'CS3 for Men'

사실 선크림을 잘 바르지 않아 대조군이 딱히 없다. 그나마 내가 선크림을 발랐던 기억이라면 이집트와

태국의 작열하는 태양아래 뿌옇고 텁텁한 선크림을 쓴 약삼키듯 억지로 발랐던 것, 그리고 어쩌다 한 번

바르곤 씻어낼 때 물 위에 기름이 동동 뜨며 잘 씻겨지지도 않던 그런 불쾌한 느낌? 그런데 좀 나은

느낌이 들었다. 그새 기술이 진보한 건지, 아님 내가 예전에 썼던 게 구렸던 건지 모르겠지만, 뭔가

피부에 스며들어 텁텁한 느낌이 훨씬 덜하고, 바르면서도 뭔가 군인들 위장크림 바른다는 그런

처덕처덕한 느낌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뭐랄까, 양말 신고 그 위에 두텁고 둔한 등산양말 신는 느낌?

그런 느낌에서 조금은 많이 멀어져 있었다.


이제 다음주에 태양이 가득한 나라로 뒤늦은 여름휴가를 떠나는데, 꼭 가져가야 할 아이템으로 메모해 두었다.

가서 씻고 나서 스킨/로션 다 바르고, 그 위에 썬 크림 바를 때 조금은 덜 찝찝한 기분으로 바를 수 있을 것 같다.



8월 19일자 동아일보 '스포트라이트' 면입니다. 어제는 양용은 골퍼, 오늘은 나로호 발사...러시아를 위한 사전테스트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로호 기술진 내부로부터 나오고 있긴 하지만, 나로호 중요하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라고는

하지만 사실 어차피 나이 든 분들은 가시기 마련 아닙니까. 어차피 기력 쇠한 좌파정부 수장 노인네, 만평거리조차

못된다는 걸까요.

오늘(8/19)자 조선일보. 음...잉크값 좀 들었겠군요. 어떻게 보면 참 단정하다 싶고, 또 어떻게 보면 고인에 대한

아무런 평가도, 기억도 되살리지 못하는 '쉬어가기용' 만평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고인을 '인동초'라

칭하는 건 (갠적으로는) 80년대까지의 민주화 투쟁에 한해 고인을 평하는 것 같아 좀 입맛이 좋지 않습니다.

그 이후의 '대통령 김대중'의 치적에 대한 언급과 평가를 피하려는 것 같아서요. 


그나저나, 좀 낯익습니다. 아마 5월에도 비슷한 만평을 봤던 기억이 있다는 거죠.
지난 5월 어느날 조선일보의 만평입니다. 좀더 선명해지죠. 자신들이 불과 하루 전에도 줄기차게 비난하고

여론몰이를 하던 당사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접하고..."쩝..." 이정도 느낌이었을까요. 할 말은 한다는 신문,

전직 대통령 두 분이 서거 앞에 할 말이 이리도 없었나 봅니다.
 
오늘(8/19)자 중앙일보. 신기한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느낌은...저만의 편견일지요. 뭐랄까, 좌파정권의 수장, 잃어버린

10년의 주동자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를 '북괴의 수장' 김정일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만평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조차 북한 비아냥거리기의 소재로 소비해 버리는 중앙일보의 '통큰 만평', 감탄할 수 밖에요.

어쩌면 북한 지도자가 방한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미리 '물타기' 좀 하려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한겨레 만평입니다. 고 김대중 전대통령의 최근 어록을 저 구름 위 하늘세상에 말풍선삼아 띄워놓았네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그분의 가톨릭적 감수성에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왠지

만평 속 그분의 표정, 그걸 멀찍이서 바라보는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표정이 처연하네요. 눈밑에 온통

근심걱정이 가득해 보이십니다.

경향신문입니다. 고인을 기리는 만평의 정석 아닐까 싶네요. 성함과 이미지를 넣고, 생몰연대를 적고,

고인의 행적과 생각, 평생의 삶을 떠올릴 만한 한마디를 퍼올리는 거죠.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이

되어야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다." '인동초'라는 잔뜩 바랜 이미지, 독재정권과 투쟁하던 민주화투사로서의

이미지보다 더욱 중요한 고인의 업적이 그의 대통령 재임 중에 이뤄졌던 걸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프레시안 어제(8/18) 만평입니다. 왠지 보고 있으면 울컥한 만평이었는데, 하루가 지났지만 아직 이만한 만평을

보지 못했습니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죽음은 어쩔 수 없이 불과 몇개월 전에 돌아간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을 오버랩시키고, 그 두분의 죽음을 재촉한 공통의 무언가가 있었음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아마도 그게

상식적인 반응일 겁니다.


굳이 '인동초'라는 이미지로 '대통령 김대중'의 치적을 가리거나 지워버리려 하고, 남북화해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고인의 죽음 앞에서 북한 지도자 비아냥거리기에 골몰하고 있고, 아니면 아예 대담한 '생략'기법을

구사하는 언론이라면...'우리'가 아닌 '그들'이란 단어로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p.s. 혹시나 하고 8월 20일자 동아일보 '스포트라이트'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23일날 천만관객을 맞게 된다는

영화 '해운대' 이야기를 20일날 굳이 하는 이유는 뭘까요. 정말......참...그러네요.





* 이 연설문은 김 전 대통령이 7월 14일 주한 유럽연합(EU) 상공회의소 초청연설을 위해 준비했다가 연설을 하루 앞두고 폐렴 증세로 입원하면서 발표되지 못한 것이다.

* 김대중평화센터(http://www.kdjpeace.com/)에서 생전의 연설문과 사진 자료 등을 구할 수 있다.


9.19로 돌아가자

 

존경하는 장 마리 위르띠제 주한유럽연합상공회의소 회장, 장 자끄 그로하 소장, 유럽연합의 각국대사, 그리고 이 자리에 오신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몇 말씀드리게 된 것을 매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21세기는 세계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세기입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시대가 출현한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 동안 세계는 미국의 일방주의 시대였습니다. 세계는 미국과의 친소관계, 이해관계, 종교적 차이 등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후 세계는 달라졌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과거의 친소와 원근에 상관없이 대화를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세계는 그동안 미국의 이분주의에 고통을 겪다가 이제 정치, 경제, 종교,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대화와 협력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에 대한 희망이 부풀어 오른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그 동안 소원하고 적대관계에 있던 이란, 시리아, 러시아, 쿠바 등과 대화를 시작하고 있으며 이슬람 세계와의 접근이라는 획기적인 자세도 보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반도 문제만은 예외가 되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시절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이란, 북한의 지도자들과 직접 만나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당선 이후에는 클린턴 대통령이 취했던 정책처럼 유연한 태도로 북한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은 우리를 크게 고무시켰습니다. 아마 북한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태는 우리의 기대처럼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오바마 정권은 유독 북한에 대해서만 언급하지 않고 차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바마 정부의 태도에 실망하고 위협을 느낀 북한은 극단적인 반발자세로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문제를 둘러싼 북한 내부의 상황이 사태를 더욱 촉진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만, 여하튼 북한으로서는 지금 절박한 입장에 처한 것은 사실입니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해서 안심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든지, 그것이 불가능하면 사생결단의 자세로 생존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북한이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증거가 있습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를 통해 북한은 핵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클린턴 정부를 이은 부시 정부는 당시 합의된 경수로 건설, 국교정상화, 경제협력 등의 약속을 파기했습니다. 그리고 북미간 실질적인 합의에 접근한 장거리 미사일 문제 협상도 부시 정권에 의해서 파기되었습니다.

이에 반발하여 북한은 NPT(핵확산금지조약)를 탈퇴하고, IAEA(국제원자력기구) 감시요원을 추방시켰으며, 핵실험까지 강행했습니다. 북핵 문제는 다시 꽁꽁 얼어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부시 정부는 6년 동안 북한에 온갖 압박을 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은 굴복하지 않았고 북한정권이 무너지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미국은 태도를 바꾸어 2005년 9월 19일 6자회담의 합의를 통해 핵문제 해결의 길을 열었습니다.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한다. 미국은 북한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경제지원을 한다. 미국과 북한은 협력해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실현한다’ 등이 합의되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북한 핵문제 해결에 다시 희망의 무지개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다시 핵 사찰 문제, 에너지 지원 부진 등으로 혼미한 사태가 거듭되다가 부시 정권은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지도자와 직접 대화를 통해서 핵문제를 풀겠다는 오바마 정권이 등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바마 정권 하에서는 세계적인 문제들이 대화를 통해 유연하게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북한과의 관계도 상당한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한반도 비핵화에 협조하는 동시에 2005년 9.19 합의에서 이루어진 북미 국교 정상화를 위한 관계개선 등의 약속이 지켜질 것으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태는 우울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북한 핵문제는 전쟁으로 해결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북한에 대한 경제봉쇄도 중국이 협력하지 않는 한 성공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저는 지난 5월 중국을 방문해서 시진핑 국가부주석 등 여러 정치지도자들과 대화했습니다. 중국의 태도는 분명했습니다. ‘우리는 북한 핵을 절대 반대한다. 그러나 이웃국가인 북한에 대한 경제적 원조는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은 역사적, 지리적 관계로 봐서 이웃국가인 북한이 파멸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을 것입니다.

전쟁이 있을 수 없고, 경제제재가 큰 효과를 얻지 못한다면 방법은 무엇입니까? 대화와 협상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북한에 대한 국제적 제재는 어느 정도 고통을 주겠지만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협상은 우방국가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이해를 주고받고 윈윈(win-win)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면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와도 얼마든지 협상을 해야 합니다. 북한의 근본적 목표는 국가안보와 체제보장, 북미 국교 정상화와 경제협력을 통한 국제사회의 진출입니다. 또한 한국과 미국의 궁극적인 목표 역시 북한으로 하여금 핵과 장거리 미사일을 포기하게 해서 태평양 국가들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안전보장, 핵과 미사일 문제의 해결, 이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조건입니다. 이 조건에 대한 합의는 이미 2005년 9.19 선언으로 합의되었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저는 이 자리에서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북한은 완전무결하게 핵을 포기해서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시켜야 합니다. 미국은 북한과 국교 정상화하고 북한을 국제사회에 편입시켜서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평화롭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원만한 해결의 길입니다.

변화를 내건 오바마 대통령은 오래된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종식시키는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비핵화를 통한 점진적 관계개선'이라는, 장기간이 소요되는 단계별 접근방식을 지속하기에는 상황이 달라졌고, 사태가 급박합니다. 북한의 핵무장을 조속히 막아야 합니다.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통한 비핵화'라는 근본적이고도 포괄적인 접근방법으로 전환할 때가 되었습니다. 평화협정, 외교관계 수립, 경제협력 등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 함께 핵 폐기를 실현하는 일괄타결방식으로 한반도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다시 압축해서 말씀드리면 오늘의 북핵문제 해결방안은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통해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길뿐입니다. 이 외에 대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원칙에 합의한 바 있습니다. 2005년 9월 19일 6자회담의 공동성명, 그것을 준수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도 좋고, 일본도 좋고, 중국도 좋고, 러시아도 좋고, 한국도 좋고, 북한도 좋은 것입니다. 다시 9.19 선언으로 돌아갑시다. 그리하여 동북아시아에 평화와 안전, 협력의 시대를 열어갑시다.

감사합니다. (끝)


*                                                                  *                                                                  *

참...절박한 심경이 구절마다 녹아 있는 연설문이다. 당신의 죽음을 예감해서일 수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체가 핀치에 몰렸다는 상황 인식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북핵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함께

가장 현실적이고 모범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가 싶다. 아마 당신이 수십년 동안 대결했던 사람들의

인식이 얼마나 강고하게 편협한지, 얼마나 대결적이고 소모적인지를 알기에 그랬겠지만,

"전쟁이 있을 수 없고, 경제제재가 큰 효과를 얻지 못한다면 방법은 무엇입니까? 대화와 협상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북한에 대한 국제적 제재는 어느 정도 고통을 주겠지만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원칙에 대한 강조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이 정도 인식에도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한국의, 미국의 대북 정책을 지휘하고 있으니 말이다. 부디 고 김대중 전대통령의 확고한 대북관이

사후에라도 남녘땅 곳곳에서 만개하기를 바란다.


사실 놓치기 아까운 기회가 온 셈이지 않나 싶다. 북한 측에서 현정은 회장을 통해 남북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전했고, '포용정책'으로 남북관계의 혁신적인 전기를 열었던 고인에 대한 조문단을 보내온다지 않나.

아무리 이명박 정부가 계속 헛발질만 해대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다지만, 그래도 이 나라가 결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좀 잘 해냈으면 좋겠다. 북한과의 관계를 조속히 복구하고 지난 10년의 성과 위에서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리길 바란다.





이웃 띠보님께서 [이벤트] 14회 한겨레문학상 <열외인종 잔혹사> 리뷰어 모집이란 포스팅에 "예쁘게 귀엽게 섹시하게
 
당황스럽게 유머러스한 댓글"
을 달면 '열외인종 잔혹사'라는 책을 배려해 주시겠다 하였다. 전혀 예쁘지도 귀엽지도

섹시하지도 당황스럽지도-아마 1그램쯤 당황스러우셨을까-유머러스하지도 않은 댓글을 달았지만, 경쟁률이 1:1이 되지
 
않았던 예기치 못한(나로서는 기적적인!) 사정이 도래하여 책을 받아 보았다. 봉투에 찍힌 도깨비 그림 도장이 귀엽다.


이야기는 단숨에 읽혔다. 책을 받아보고 잠시 몇장 펼쳐볼까 했던 게, 세네 시간만에 다 읽어버렸다. 그런데 읽고 나니

뭐랄까..너무 허했다. 이야기의 구조나 전개가 무슨 골다공증 마냥 구멍 숭숭 뚫린 엉성한 모양새여서가 아니라, 아주

매력적이고 스피디하며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은 지독하고 잔혹한 현실에 대한 지독한 은유였기 때문이다.


뫼비우스 띠의 앞면.

주위에서 너무 쉽고 익숙하게 접하던 캐릭터와 공간들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천만명이 사는 서울에선 딱히 희소할 것도 없는 10대 불량청소년 하나, 눈에 밟히고 발에 채이는 30대 남성노숙자 하나,

고만고만한 대학을 나와 인턴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며 수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정규직이 되려는 20대 여성 하나와

매일 군복을 갖춰입고 탑골공원에서 온갖 빨갱이들이 등장하는 시국연설에 열을 올리는 60대 할아버지 하나라는 등장

인물들 말이다. 그리고 마치 길안내하듯 자세하게 그려지는 압구정역 3번 출구 옆 맥도널드와 코엑스 배스킨라빈스와

푸드코트, 혹은 홍제동과 독립문역의 풍경까지.


어쩌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들이다. 노숙자에, 구직자에, 완고한-시니컬하게 표현하자면 '시대의 부산물'이랄-

친미보수우익 노인네, 그리고 번쩍거리며 재탄생한 용산역과 한국 자본주의경제의 상징, 코엑스몰과 압구정까지.

코엑스몰은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잊지 않고 순례하는 명소 중 하나로 자리잡은 지 오래기도 하다.


그런 공간이 어느 순간 전쟁터로 변한다. 방화용셔터가 전부 내려가 외부로부터 격리되며, 대량의 인질극이 발생하고,

여차하면 당겨진 방아쇠로 많은 사람들이 총살당하는 공간이 되는 순간, 내가 아는 구체적인 지역에서 벌어진다는

생생한 현실감에 되려 서늘한 날이 서면서 그 공간이 낯설어진다. 어라. 마찬가지다. 지하철 안에서, 혹은 버스 안에서

한번쯤 마주쳤을 동시대인들이 문득 괴물같은 상황에 떠밀려 '모처럼 심장터져라 뛰는' 지경에 이른다. 낯설다.

그러고 보니 저렇게 아드레날린이 폭주하는 상황이란 건 얼마나 드문 상황인가. 머리끝까지 열이 뻗치거나 강렬한
 
열망에 의해 쉼없이 뛰어다니는 상황이라는 건. 혹은 스스로의 괴물같은 내면을 마주하게 되는 건.

"뭐 이런 카니발도 나쁘진 않네요. 사람 죽어나가는 게 좀 끔찍하긴 해도, 서울에서 하루에도 수백명씩 교통사고와 암으로 송장이 되어 죽어나가는데 이깟게 뭐 대수겠어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뭐랄까? 이번 정규직 사원 인사 발탁 건 말이에요. 음..."


뫼비우스 띠의 뒷면.

연미복에 양머리를 뒤집어쓴 '최악'의 멤버들. 양털이 복슬복슬한 그 양머리는 단정하지만 과장스런 연미복 차림과

기괴한 매치를 이루며 왠지 이 땅위에 있어서는 안 될, 혹은 있으리라 상상할 수 없는 기괴한 생명체로 나타난다.

그들의 '양머리 카니발'이란 게 시작되는 순간 더더욱 비현실적으로 변해가는 공간. 노숙자들의 서툰 쿠데타가

가십처럼 벌어졌던 용산역에서처럼, 그치만 그보다 훨씬 강력하고 전면적으로 세상이 낯설어진다.


그런 낯선 것들은 어느 순간 온전한 지금 이대로의 모습과 겹쳐져 보이니 또 이상한 노릇이다. 양머리를 뒤집어

쓰고 사방에 총을 난사하는 그들, 그리고 그들의 잔혹한 살인행위와 웅얼대는 혁명선언도 묘한 기시감을 수반한다.

그러다 보면 번쩍이는 은빛 총을 움켜쥐고 양머리들을 하나씩 쓰러뜨리는 게임중독 10대 청소년이 양머리들보다

괴물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에 봉착하기도 하고, 양머리들의 난동이 되려 인간적이랄까, 안쓰럽달까, 그런

동정 혹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게다.

"그런데 우리들은 모두 양머리들뿐이야. 목자가 없어. 그래서 불안해지기 시작한 거지. 모든 게 혼란스러웠어. 그래서 우리는 목자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지. 그런데 왠걸. 우리가 목자라고 믿고 싶던 대상들이 하나같이 우리의 기대를 배반했어. 또 어떤 얼어 죽을 사이비 목자들은 우리를 썩은 오물통 속으로 밀어넣기도 하고 말이야."


띠의 앞면에도, 뒷면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 "열외인종"

그렇게 띠의 앞면과 뒷면, 각기의 흐름을 타고 일상에서 비일상을, 비일상에서 일상을 퍼올리던 흐름은 어느순간

하나로 합쳐진다. 그야말로 뫼비우스 띠처럼. 양머리를 쓴 노숙자는 더이상 띠의 앞면에도, 뒷면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가 낑낑대며 끌어올렸을 거대한 돌덩이가 거친 소리와 함께 산비탈을 달려내려가듯

차라리 호쾌하게 내려닫는 이야기의 결말이라니. 그전까지 가벼운 조증에 걸린 듯 시니컬하면서도 신나게

이야기하던 화자는 갑작스레 브레이크를 밟고는 완전히 시니컬해진다. 혹은 어리둥절해하는 독자를 보며

가학적인 쾌감이라도 느끼듯, 돌연 잔혹하고도 엄연한 현실을 불러낸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제의 일을 다 알고 있다!"라는 외침. 그 외침이 누구의 관심도, 누군가로부터의 반향도 얻지 못하고

헛헛하게 공중을 맴돌다 사라져버리는 기분은 어떨까. 아니 사실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10대, 20대, 30대,

아니 세대를 막론하고 뭔가 스스로의 의지나 행위와는 달리 제알아서 돌아가고 있는 거대한 세상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당장 치솟는 어리둥절함과 분연한 의기, 그 뒤를 바싹 좇는 무기력감과 소외감, 억울함과

열패감까지. 이런 결말이라니 잔혹하다. 이런 세상이란 걸 깨닫게 해주는 이런 결말이라서 잔혹하다.

"어떻게 천만 인구가 아웅다웅 모여사는 서울특별시에서 적어도 오십 명 이상 죽어나간 이 대대적인 인질극에 대해 한마디도 없냔 말이다. 별 볼일 없는 연예인 부부의 이혼 소식조차 탑 이슈로 보도하는 이 판국에."


열외인종 잔혹사 - 10점
주원규 지음/한겨레출판




플로베르는 말했다. "나는 귀두에 뻣뻣한 털을 세우고 그것으로 암놈을 찢어버리는 호랑이와 같다."


이런 식의 '당당한' 마초적 발언들이 누대에 걸쳐 이어져서일까, 남성은 먼 옛날 사냥꾼의 본능을 이어받아

끊임없이 이 여자 저 여자를 찝적거리며 육체적 쾌락에만 몰입한다는 식의 신화가 알게 모르게 전승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미 진부해진 나쁜 남자 신드롬이니, 마초니 하는 것도 그렇고, 최근에 돌연 부상한 초식남이니

건어물녀니 하는 신조어들의 본질이 그 '섹스에 무관심한, 무성적인' 부분에 있다는 점도 되려 이전의 남성상이

성적 욕망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에게 육체적 사랑이 중요하다는 신화, 혹은 사랑보다 섹스를 탐하는 남자들..이라는 유서깊고도 심증 짙은
 
의구심을 주목한 출판사는 책이름을 선정적으로 비틀어버렸다. 원제는 "Man, Love and Sex". "남자, 사랑과

섹스" 정도로 번역될 만한 원제의 세 단어에 조사를 조금씩 바꾸니 이런 도발적인 제목이 나타난다.

"남자의 사랑은 섹스다." 저번주 내내 왠지 이 블로그 유입 키워드 2, 3위를 놓치지 않았던 문장이었다.
 
처음엔 사실 책 제목인지도 몰랐다. 단지 책이나 영화 제목이겠거니, 했을 뿐.


하도 궁금해져서 점심 시간에 밥안먹고 서점가서 책을 찾아 읽었다. 그림을 좀 첨부해볼까 하다가, 그닥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라 말기로 한다. 2009년 8월 10일에 초판발행된 따끈한 책이었다. 미국의 'Mens' Health'라나

남성잡지 편집자이자 남자행동분석전문가라는 저자가 말하는 방식은, 뭐랄까, 왜 남자 맘을 몰라주냐고 여성들에
 
투덜대고 떼쓰는 느낌이었다. 단적으로 책 중간에 'Q&A 코너'를 빌어 여성의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 있었다.

Q: 왜 남자들은 화장실 변기를 더럽히며 소변을 보나요?
A: 남성의 방광이 어쩌구...거기에 마이크로칩이 달린 것도 아니고...시작과 끝에 흔들림이 있을 수 밖에 없으니 이해해주시고...(결론) 남성용 소변기를 화장실에 설치하세요.

내 기억과 짧은 메모에 의지해 복구한 내용이지만 거의 비슷할 거다. 하다못해 '남성다운 남성'의 상징 최민수조차

티비 토크프로그램에 나와 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본다고 떳떳이 말하고 있는데, 남성용 소변기를 설치하라는 건

뭥미. 말그대로 '뭥미'다. 남자들을 좀 이해해 달라, 남자들을 배려해 달라면서 실은 계속된 기득권을 견지하겠다는

욕심꾸러기 떼쟁이 악동같은 태도.


책의 주제인 남자의 사랑과 섹스를 말하는데 줄곧 같은 자세를 견지한다는 게 문제다. 남성이 섹스 후 당신의 아파트에서
 
자지 않고 간다면? 다음날 칫솔과 면도기가 있는 자신의 집에서 눈뜨고 싶은 남성의 현실적인 태도니 이해해라. 남성이
 
섹스 후 당신의 아파트에서 자고 간다면? 다음날 회사에 안 나가니 편하게 쉬고 싶은 남성의 현실적인 태도니 이해해라,

라는 식이다. 당신을 사랑해, 라고 말하면 그저 사랑하는구나 믿고, 일하면서 별일 없었어, 라고 말하면 아 별일 없었구나

라고 믿으면 된단다. 단 이전에 다른 여자와의 경험이 다섯번이라 하면 열두번이겠거니 하면 된단다. 또 처음 데이트할

때에 비해 많이 활동성이 줄었는데 왜 그럴까. 십오만 킬로를 달린 차는 이제 차고에 들어가 편히 쉬고 싶지 않겠나, 이런
 
식이다. 이런 게 잔뜩 있지만 굳이 더 인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미 충분하다 싶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같은 '가이드북'은 성별에 따라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가진 두 인류가

서로를 이해하고 조금더 잘 소통하기 위한 (그야말로) 일반화된 수준의 길잡이를 제공하는데 작으나마 그 미덕이 있지
 
않았나 싶다. 이미 그러한 류의 책은 다양한 변주를 거쳐 포화상태에 이르렀으니 '섹스'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끄집어

내고 싶었을까. 혹은 사회적으로 다소 터부시되는 그 소재에 대해 용감하게 발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결과는

신통찮다는 게 내 개인적인 결론. (사실 이 책은 미국 남성을 기준으로, 미국 남성을 위해 쓰인 거라서, 사실 미국에선

그다지 선정적이지도 않았을 것 같다. 더구나 저런 '온건한' 영어 원제목으로는 더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내용이 거의 없는 책인데 그 선정성에 기대고 있을 뿐인 그런 책이라 불만인 거다. 그리고 그게

애초 목적이라 표방된 "남자를 이해해줘"라는 의도조차 무색할 정도로, 오히려 남여간의 사이만 멀게 만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배려심없고 이기적으로 보여서 불만인 거다. 


책의 마지막 메시지는 나름 의미심장하다. 의미심장한데, 책의 전개가 전혀 그런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질 못했다.

사실 그 메시지는 한국에서 번역된 책 제목과는 영 딴판이기도 하다. 메시지는, 불만족스러운 관계에 만족스러운

섹스라봐야 기껏해야 관계를 조금더 지속시키는 매개에 불과하다는 것. 뒤집어 말하자면 남녀간의 관계가 탄탄하고
 
만족스럽게 맺어져 있는데 섹스까지 훌륭하다면 더할나위없다는 거다. 그래서 남자들이 바라는 건 단순히 섹스가

아니라 사랑과 친밀한 의사소통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다, 저자는. 뭐,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인데 그걸로는

책 한권을 만들어내기가 어려웠나부지, 라는 지독히도 시니컬한 반응을 부르는 책. 제목에 낚이지 말길.



덧댐. Q. 뭔가 남자에게 선물을 해주고 싶은데 무엇을 해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A. 섹스를 선물하라. 그것도 이왕이면 근사한 포장(?)이 된 거면 더욱 좋겠다.(ⓒ 남자의 사랑은 섹스다)

남자의 사랑은 섹스다 - 2점
데이비드 징크젠코 지음, 김경숙 옮김/더난출판사








식후30분 혹은 출근직후 꼬박꼬박 복용중인 카라의 미스터.

저 엉덩이의 움직임을 뭐라면 좋을까. 아...잠깐 침좀 닦고.


저번주 금요일부터 문득 걸 그룹에 꽂혀버려서, 넋놓고 뮤비에 몰입중이다.

2NE1, 소녀시대, 브아걸에 티아라까지.


뮤비를 보면 다른 걸 할 수가 없어서 그다지 뮤직비디오를 즐기는 편은 아닌데,

그냥 멍하니 뮤비에 몰입하게 만드는 그녀들♡ (사실 노래만 들음 별루..)


맨날 유튜브 들르기도 귀찮고, 찾아서 보기도 귀찮아서 아예 업어와버렸다.

식후30분, 출근직후 매일복용 중. 어 그래그래 미스터 여기쩌용~~*

- MBC
 
 
- KBS
 

- SBS


- Mnet 


* 보다보니 느끼는 점 하나.

코디를 좀더 신경써서 해주지, 춤의 매력을 죽이는 코디라거나, 모양이 같고 색깔만 다른 옷이라거나

심지어 입힌 옷 또 입히는 건 뭐냐..




하루키처럼 [2009.08.07 제772호]
[레드 기획] 누구나 한 번씩은 거쳐가는 소설 <상실의 시대> 한국 출간 20년,
일상의 곳곳에 스며든 ‘하루키와 나’

(중략)

 
» 다음 카페 ‘무라카미 하루키 되기’의 회원들이 저마다 좋아하는 하루키의 책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박주희, 김도윤, 윤성의, 유승진, 윤종석씨.

“얼마만큼 좋아?” “봄날의 곰만큼.”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날의 곰만큼.” … “그게 무슨 말이야. 봄날의 곰이라니?”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 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상실의 시대>,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제목이 된 문장)

2003년 개설된 다음의 ‘무라카미 하루키 되기’ 카페 회원 수는 4천 명이 넘는다. 대부분이 20대다. 20년이 지난 뒤 17살에게도 하루키는 단숨에 읽힌다.

카페지기 김도윤(27)씨는 언어영역 이외의 책은 읽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를 피해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어야 했는데, 책방의 친한 누나가 “야 이거 읽어봐”라고 건네주는 것을 들고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에 앉아서 그냥 끝내버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것도 처음이었지만 그렇게 긴 소설을 독파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 뒤로도 질릴 때마다 꺼내본다. <상실의 시대>다.

같은 카페의 박주희(28)씨는 하루키의 수필을 좋아했다. 너무 좋아 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나 읽은 소설인 <상실의 시대>는 ‘와타나베 바람 피우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대학교 4학년 무척 괴롭던 시절에 간 일본에서, 중고서점에 들렀다.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세 줄이 인생에 해답을 던져준 듯했다. “그러나 당시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되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간이라는 것은 때로 그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는 <상실의 시대>를 와타나베의 시각으로 다시 읽고는 모든 하루키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감각적인 문장도 좋지만 그것만이 하루키의 매력은 아니다. 윤종석(34)씨는 하루키 때문에 바람의 노래를 들으려고 한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작품이 있음). “책을 읽으면서 내 일기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루키에게 정말 감사한다. 살다가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때 다시 들춰본다.” 윤성의(28)씨도 “나뿐만이 아니구나. 애써 감추고 있던 생각을 얘기해줘서 위로를 받는다. 니체의 초인이나 오쇼 라즈니시처럼 극한을 긍정하는 사람이다.”

 

하루키는 PPL, 원 소스 멀티 유스

하루키는 맥주 TV광고보다 자극적이다. 하루키는 PPL이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맥주가 마시고 싶어지고 재즈가 듣고 싶어진다. 하루키는 원 소스 멀티 유스다. 책에서 책과 음악과 스타일이 가지를 뻗어나온다. 윤종석씨는 하루키의 소개로 레이먼드 챈들러를 읽고 헤어날 수 없이 빠졌고, 박주희씨는 글렘 굴드를 듣고, 먼 북소리를 좇아 그리스를 간다. 김도윤씨는 1년간 여행 가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했다가 맞아죽을 뻔했다.

‘하루키처럼’은 이어진다. 그들이 진짜로 하루키에게 배우는 것은 ‘마이너리티’다. 유승진(27)씨는 “하루키에게는 거대담론과 거대권력에 대항하는 마이너리티의 정치학이 있다”고 말한다. 그가 오해되듯 탈정치화한 게 아니란 말이다. “80년대의 거대담론에서 인간 실존은 죽어 있었다. 김승옥 같은 예외가 있었지만 희귀했다. 그 단절 기간 동안 목말라 있었는데 하루키가 채워준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윤성의(28)씨도 비슷하다. “한국 문학이 극복하지 못한 지점에 하루키가 있다.”

무엇보다 그의 작가적인 태도야말로 ‘스타일’이다. 정은숙 마음산책 사장은 “소설에서 주는 아름다움과 자기 관리가 동시에 다가왔다. 하루키가 20대가 보는 패션지에 쓴 칼럼을 묶어낸 게 있다(<무라카미 라디오>). 그걸 읽고 하루키는 그런 데 써도 하루키의 몸을 버리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을 쓰기 위해 마라톤을 하고 담배를 끊었다. 소설가의 자세가 느껴진다.”

칼럼니스트 임경선씨는 2005년 “그저 그래야 될 것 같았고 또 너무나 그러고 싶었기 때문에” <하루키와 노르웨이 숲을 걷다>를 펴냈다. 그에게 하루키는 불가사의한 존재다. 변덕이 심한데 하루키에 대해서만은, 일본에서 빨간 책·초록색 책을 읽은 1987년 이후로 여전히 깊이 매료돼 있다. 그의 책상 앞에는 하루키의 사진이 붙어 있다. 하루키는 데레크 하트필드에게 문장에 대해서 배웠지만, 임경선씨는 하루키에게서 글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 임경선씨가 글을 고칠 때 언제나 옆에 하루키가 나타난다. “아이씨, 대충 보고 말지, 하는 생각이 들 때 하루키를 생각한다. 문장에 대한 집착, 잘 쓴 문장에 대한 집착을 유지하려고 한다. 얼음을 깎듯이 단어를 많이 없애려고 하루키처럼 노력한다.”

진실한 작가적 태도야말로 그의 ‘스타일’

하루키는 임경선씨에게 작가로서도 롤모델이지만 인간적으로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보는 유명인 중에서 성실함을 미덕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없어져간다. 진정성이 있으면서 성실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 임씨는 하루키가 ‘가치 전파자’라고 말한다. “건강하고 합리적인 개인주의, 다원주의, 민주주의를 몸소 실천하고 또 은연중에 글이나 사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파하는 것 같다. 강요가 아니라. 또한 그는 집단주의의 광기나 부조리함, 권위주의을 맹렬히 거부한다. 그만큼 ‘편견’이 없고 ‘상대성’을 인정하는 개인주의자다.”


*                                                                 *                                                                 *

#1. "하루키는 뭐랄까, 말하자면..왜 그거 뭐죠? 드라마 속에 광고가 숨겨진 거?" 그렇게 내가 물었고, 기자님이 PPL

이란 답을 알려줬다. 그렇게 하루키는 PPL(제품 간접 광고(Product Placement))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멋지고 단순한
 
표현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사실 PPL이란 비유는 어폐가 있다. 다만 그의 작품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음악, 음료, 음식,
 
작가의 이미지들이 워낙 강렬하다는 거다.


#2.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저 사진을 올리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찍으면서도 우리들끼리 아 이렇게 촌스러울 수가,

라고 탄식했던 포즈였었는데. 맘에 아주아주 들지 않는 사진이다.


#3. 뭐랄까, 그날 이야기했던 부분들이 기사 전체에 녹아있는 느낌이다. 누군가의 말로 인용되거나 적절히 쪼개지긴

했지만, 예컨대 임경선의 이야기도 그날의 인터뷰에서 몇차례 반복되어 강조되었던 부분이었다. 생각보다 하루키에

대한 평가는 정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여전히 인터뷰비는 없었다. 원래 없는 건가.




시사IN 제1기 독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할 때, 시사IN에서 처음으로 단행본을 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회의였던가, 회의실 밖에 붙어있는 '거꾸로, 희망이다'라는 책 표지 가안들을 구경했고, 우리들도 각자

원하는 책 표지 도안에 스티커를 하나씩 붙였었다. 그리고 며칠 후 시사IN에서 책을 배려해주었다.

내가 스티커를 붙였던 바로 그 시안대로 표지가 나왔다. 사실은 '거꾸로, 희망이다'라는 제목이 좀 맘에 안 들었지만,

어쨌든 그 책제목을 시각적으로 살려주며 흥미를 돋구는 디자인인 거 같아 만족.


제목이 불만이라 했지만, 사실 요새같은 때 거꾸로 희망을 보자는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이빨이나 들어갈까 싶어서다.

흔히 골이 깊으면 산이 높다고 하고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 하며 위기가 곧 기회라 하지만, 그건 꽤나 장기적인
 
안목을 유지하는 사람이거나 희망섞인 기대와 당위로 '오염'된 예측일 뿐이다. 물론 장기적으로야 박정희도 무너졌고

전두환, 노태우의 시대도 무너졌지만...케인즈가 시장의 자연회복을 기대하는 시장주의 경제학자들과 싸우면서 했던

말이 딱 어울린다. "장기적으로 (경제야 물론 살아나겠지만) 그때는 이미 우린 모두 죽어 있을 거다."


게다가 아침이슬의 첫대목에서 보이는 "긴밤지새우고.." 류의 인고의 정신, 지금의 고난을 기꺼이 맞닥뜨려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란 건 꼭 사회적 약자, 구조적 약자의 전유물은 아닌 거다. 뒷산에 올라 요새도 즐겨부르고 있을지

모르는 거다. 사실 그와 그의 따까리들 역시 나름 곤란한 상황을 맞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심지어 어제 동아일보는

사실을 통해 그들을 보수주의자가 아닌 '보신주의자'라 일갈했던 바 있다. 하여, 결국 '살 맛이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바쳐야 할 건, '거꾸로 희망을 보라'라는 무슨 자기계발서나 경영기법에 나올 법한 아포리즘이라기보다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컨텐츠다. (자칫 그들이 이런 제목만 보고, 그래 위기가 기회다~하며 더 치고 나올까 무섭다.)


역시 시사IN, 책의 내용은 훌륭하다. 나름의 '특수관계'를 의식한 말이 아니라, 정말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사실 이 책은 올초, '혼돈의 시대, 위기 속에서 길을 묻다'라는 제목으로 벌어진 여섯 차례의 강연회를 엮은 강연록이다.

시사IN 독자위원회 때 늘 나오던 이야기 중 하나는, 좌담회 형태의 기사란 게 영양가 있고 재미있게 쓰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현란하게 짜인 액션영화처럼 잘 짜여진 '합'에 따라 정말 예술적인 수준의 문답이 오고 가야 하는데

그건 어느 정도의 사전 지식과 적잖은 준비를 통해 질문자와 응답자 간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이야기의 강약에 대한

감이 서있어야 가능할 거다. 그에 더해 서로의 말하기 스타일에 대한 감까지 있다면 더욱 유려한 대담이 될 테고.


쟁쟁한 강사들에, 쟁쟁한 질문자들이었다. 하나하나 강연 내용 자체가 완결적이었던 건 강사의 온전한 이야기에 더해,

강사가 품고 있는 겉내와 속내의 이야기, 맥락을 이해하고 있는 질문자가 틈새를 잘 보완하고 완급을 추스렸기 때문일

거다. 어렵거나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소재들에 대한 내용을 말글로 풀어내어 훨씬 쉽고도 깊은 내용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 여섯 건의 강연 내용과 문제의식을 얼추 소개하자면 이렇다.


* '생태적 상상력'을 묻는 이문재 시인, 말하는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 

경제불황 속에서 일본의 샐러리맨들이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풍요로운 인생을 살았다는 관찰이 있었다고 한다. 해고나 근무시간 단축을 통해 남아돌게 된 시간에 꽃과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되려 가지게 되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녹색'의 삶이란 뭘까.

*'위기의 심리'를 묻는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말하는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

심리적 견지에서 대통령의 자격요건을 묻는 김어준다운 질문에 대통령에게 필요한 건 자기성찰능력이라는 명쾌한 대답. 불안한 사람들은 각자의 섬으로 스스로를 유폐하지만, 불안을 터놓고 공유할 때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

* '자본의 미래'를 묻는 정태인 경제평론가, 말하는 김수행 교수 ;

정통 맑스주의자인 김수행교수는 역시 경제공황의 필연성을 이야기한다. 특히 개인이 부자가 되는 것과 모든 국민이 잘 살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임을 강조하며, 모두가 잘 살기 위한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자고 한다.

* '문화적 상상력'을 묻는 우석훈 경제학박사, 말하는 조한혜정 교수 ;

문화적 자유주의와 소비자본주의의 틈새에서 '소모성 건전지'를 자처하며 말라죽어간다 느끼고 있지는 않은지 묻는다. '소수를 살게 하고 다수를 죽게 내버려두는 체제' 말고 다른 체제를 꿈꾸자고 말한다.

* '대안경제'를 묻는 하승창 시민운동가, 말하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

참여연대와 아름다운 재단, 희망제작소까지 끊임없이 시민들을 자극하려는 박원순. 경제는 경제자체로만 수직상승할 수 없으며 사회적 복지라거나 사회적 평등, 생태의식과 같은 국민들의 의식수준에 비례한다는 지적은 날카롭다.

* '역사의 위기'를 묻는 정해구 교수, 말하는 서중석 교수 ;

현대사를 전공한 서중석 교수는 한국 뉴라이트와 일본 극우세력의 유사성을 지적하고, 최근의 '건국절' 논란이 그들의 태생적인 한계랄까 아킬레스건를 반증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다만 오바마의 당선과 촛불시위를 한국 민주주의의 역진에 대한 전환 모멘텀으로 삼고 있는 점은...두고 봐야 할 듯.


각기 상당히 다른 부분들을 건드는 주제이면서도, 결국은 '거꾸로, 희망을 찾아보지 않으련' 정도의 메시지로 수렴된다.

골이 깊고 어둠도 짙고, 누구랄 것 없이 위기라며 한숨을 물고 사는 시대라서 그렇다. 어쨌든 살아가야 하니까, 조금은 더

낫게, 사람사는 것처럼 살고 싶으니까 고개 끄덕일 수 밖에 없다. 희망을 찾아보자고.


거꾸로, 희망이다 - 10점
김수행 외 지음/시사IN북




무라카미하루키되기(http://cafe.daum.net/harukimake)란 까페에서 최근 공지가 올랐었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출간 20주년을 맞아 한겨레21에서 기획기사를 쓰는데,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몇 명 모아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딱히 누군가에 대한 '팬질'은 해 본 적이 없는데다가 작가가 좋아

글을 읽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하루키의 소설들은, 적어도 고베 지진의 영향이 드러나기 이전의 작품들은 모두

워낙 마력적이었고 하루키 역시 딱 그만큼 특별한 작가였다.


저번주 수요일, 퇴근을 서둘러 홍대의 '한잔의 룰루랄라'라는 만화책방으로 향했다. 내가 5명의 인터뷰이 중 하나로

낄 수 있었던 건 아마도 하루키를 20년동안 알아왔다는 것, 그래서 초딩 때와 고딩 때와 대딩 때와 군인 때, 그리고

지금 어떤 느낌으로 읽고 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어서였던 것 같다. 초딩 때 영문모르고 펼쳤던 '노르웨이의 숲',

레종 데트르(raison detre)라던가, 주인공 와타나베가 하루동안 걸었던 발걸음을 세고, 오르내린 계단수를 세지만

아무도 그런 것엔 관심을 갖지 않는단 걸 알아차리는 부분이 깊이 인상에 남았었다. 그에 더해 나오코의 희뽀얀

육체가 달빛아래 노출되는 초딩에겐 다소 자극적인 장면도 틈날 때마다 발췌독하는 부분이었고.

(나중엔 책만 펼치면 자동으로 책장이 갈라져 그 페이지가 딱 열리곤 했었다는...ㅡㅡ;)

그런 얘기를 했다. 2006년쯤 싸이 미니홈피에 올렸던 감상을 인쇄해서 가져갔었다. 그때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루키의 소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미묘한 상실감과 허무함에 특정 '주의'의 틀을 씌워내며 그의 작품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제멋대로 유추해 내는 과정에, 과하리만큼 90년대 초중반을 경과하는 시대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있다는 거다. 누구나 그의 작품에서 느낄 흡입력과 강한 공감, 그런 것들에 이름을 부여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적극적인 독해의 작업이 그 하루키 작품 전부에 붙어있는 '친절한' 해설, 서평 등속의 것들, 그리고 그의 작품의 표지디자인, 카피..그런 것들로 제한되고 굴절되어 거개가 비슷한 시야로 보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작품들이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서(실제로는 한국에 한정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인기를 끄는 이유를 일반화하여 ready-made해낸다.

뻔하게 나오는 큰틀은 그렇다. 60년대말70년대초 전공투라는 이상주의적이고 환상적인(미망과도 같은) 경험을 하고 이에 대한 환멸을 겪은 하루키는 9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이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하겠지? 그 평론가입네 하는 작자들은?-시대적 경험의 동질감을 던져주며 인간 내부로 침잠하여 삶의 상실감과 허무함을 염세적 현실주의라는 스타일을 빌어 아주아주 매력적인 기교로 풀어낸다는 식이다. 글쎄......뭐랄까. 90년대 초에 지성계를 휩쓸었다는 유행..청산주의의 냄새가 너무나 짙다.

거대이념과 근대적 사고-합리와 인과가 보장되는-가 더이상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고, 사회주의의 실험은 거대한 사기극이었으며 68년으로부터 한국의 80년대에 이르기까지 혁명적인 열기의 분출은 치기어린 '젊음'탓이었다는. 그리고 그러한 과거를 가진 인간은 현실로부터 아무런 위로도 못받고 "아무곳으로도 갈 곳이 없다"는 허무함만을 채워가며 이것이 하루키의 작속 인물들의 전형, 내지는 기본적인 형상이라는 게 그들의 분석이다.

과연?

하루키의 작품에 드러나는 '상실'을 그런 식으로밖에 이야기할 수 없을까? 그러한 역사적인 실패, 그리고 후쿠야마식의 '역사의 종언' 이후 등장한 인간군상이 아니라, 하루키 자신이 끊임없이 환기하고 있듯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본질적인 상실감이라는 부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의 작중 인물들은 애초부터 갖고 있던 상실의 요소들이 외화되어 드러나면서 현실을 일그러뜨리기 혹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자본주의적 형태로 맞추어진 가족이 해체되고, 직업(직장)으로부터 탈출하며 등등, 그러한 조건들이 충족되고 난 후 쯔음 인물들이 맞닥뜨리는 현실은 조금씩 일그러져 리얼리티를 잃어가며 주인공-아니, 이말은 그의 소설에 적절치 않다..그냥 일인칭 "나"가 온당할 듯-여튼 그가 무엇인가를 확실히 놓쳤다, 잃어버렸다, 잊었다 라는 인식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가 대응하는 방식은 상당히 영웅적이다.
 
새로운 방식의 영웅성, 마치 바싹 마른 녀석이 다리를 부들부들떨며 돌띵이를 들어올리는 듯한, 자칫하면 깔릴 듯 위태로우면서도 한편으로 우스운. 적극적으로 현실을 일그러뜨리고 자신의 상실된 부분을 찾고자 나서는데, 그 여로는 사실상 사회로부터의 절연, 자신 내부로의 침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끊임없이 돌덩이를 밀어올리는 프로메테우스의 그림자가 언뜻 겹치기도 한다. 그 사회로부터의 절연은 약간 모호한 방식이긴 하고, 그래서 보르헤스같은 환상 문학의 냄새가 짙어지는 거겠지만 그걸 현실 도피라고 일률적으로 재단하는 건 온당치 않다.

중요한 건 애초에 상실이 있었고, 그 상실의 원천이 된 온갖 사회적 관계들, '일상'이라 불리거나 상식이라 불릴만큼 당연한 흐름으로부터 유리되어, 상실감을 느끼게 된 시점부터 일그러지고 얼개가 맞지 않는 현실을 더욱더 뒤틀고 단속적으로 토막냄으로써, 적극적으로 자신의 결락감(!)을 메워내고자 하는 하루키의 시도들. 그게 그의 작품 세계 아닐까..

태엽 감는 새, 이 작품에 슬쩍 드러나는 태엽감는 새 연대기 어쩌구의 맥락도 그렇다. 사실 세상은 인과가 뚜렷하고 합리적인 사고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대기처럼 하나하나 자체로 완결되어 닫혀 있는 사건이라는 게 하루키의 인식 아닐까. 거기에는 물론 이성에 대한 불신, 과학적 인과법칙에 대한 회의 등 포스트모더니티의 요소들이 담겨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세계관에 있어 근본적인 모순이라 할 만한 그 '상실감'은 현 세상의 '관계'들로부터 비롯되는 거라는 얘기다.

그의 글빨은 정말...멋지다. 정점에 다다른 기교와 깊은 통찰력, 그리고 장면별로 완전한 함축과 은유들. 더구나 태엽감는 새에서처럼 그러한 장면들이 결국엔 합류되어 하나의 직조된 의미를 그려내는 데에 이르면. 마치 짜라투스투라..처럼, 여러 잠언들과 금언들을 화려하게 짜깁기한 듯한 느낌이 없지 않을 정도다. 운명에 관한 대목..에서 내가 받은 느낌은 그런거다. 마치 재봉틀로 재봉질하듯, 이미 박힌 부분은 운명, 아직 박히지 않은 부분은 일반론이 지배하는 공백. 어차피 박히고 나면 운명이 되고 말. 여튼, 그람시와 연관지으면, 하루키는 그람시가 말한 '효소'의 개념을 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거 같다. 그리고 그보다 더, 하루키에 대한 판에 박힌 평들을 서로서로 베껴가며 재생산해내는 평론가들은 '효소'가 뭐에 써먹는건지부터 좀 생각해야 될 거 같다."



대체 어쩌자고 하루키의 소설에 그람시를 연결지으며 글을 마쳤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효소'란 개념이 뭐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니 대체 어떤 맥락인지도 잘 모르겠다는. 어쨌든, 하루키의 세계를 단지 자기 내면으로의 퇴행이라거나

도피로만 해석하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하루키가 내세우는 인물은, 주의주장, 이른바 '이즘'을 넘어선 인물이다. 어떤 사회 시스템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인간 내면의 문제에 집중하는 인물이다. 어떨 때 자신의 감정이 파르르 떨리는지, 어떤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자신과

타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죽기 전까지 함께 할 그 '결락감', 공허함 혹은 외로움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늘 유지하는 인물이다. 피곤한 인물이다. 하루키를 읽으면 내면 깊숙이 숨겨졌을 뿐이던 대답하기 어렵고 곤란한

문제들이 모처럼 밖으로 끄집어져 바람을 쐬었다는 후련함과 함께 망연스러움이 느껴진다.


요새는 또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리 해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 아무리 고민해도 답없는 문제, 가끔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의아해질 때 하루키를 펼쳐보며 그런 문제를 맞닥뜨리는 것도 좋겠지만, 어쩌면 대개의 시간엔

그걸 덮어두고 지내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여유가 없어진 건지도, 그저 피곤해진 건지도, 삶에 대한 눈먼 열정과

두려움없는 궁금증이 부담스러워진 건지도 모르겠다.



밤에 잠이 안 오고 마냥 종잡을 수 없는 얄따꾸레한 생각들만 치밀어오르기로 걍 이부자리를 걷고

모처럼 책장을 디볐다. 손창섭..내가 그간 즐겨 읽던 작가이면서도 여태 이름에 주의하지 않았더랬다.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약간씩은 일그러지고, 그로테스크한 배경과 그와 비슷한 분위기의 이질적인-

그야말로 어불성설격인-인물이 등장하곤 한다. '인간동물원'이라거나 '잉여인간', 아님 '비오는날'..


무엇보다 그의 자전적인 소설인 '신의 희작'에서 드러나는 냉소와 비정상성은 해방 전후를 기해 한국

문학계가 잡아낸 온갖 이물감과 혼란, 방황의 극치랄까, 이보다 더 극적으로, 혹은 '선정적으로' 드러낸

작가는 없는 거 같다. 그의 묘한 문체와 행간에서 배어나오는 짙은 냉소, 자포자기식의 쾌감. 그러한 말투로

읊어내는 비현실적 사건과 배경은 그 자체로 음울함을 잔뜩 독가스처럼 품고 있다.


푸닥거리하듯 그의 자멸적이고 자학적이랄만한 작품들을 쏟아내고 마지막으로는 '신의희작'에서 그 작품들에

대한 열쇠로 보여질만한 자기고백을 하면서 그는 대략 진정된 거 같다. 소위 문학을 통한 승화, 구원이랄 만한.

그담엔 더이상 쓸 게 없었을까..더이상 별다른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68년인가 일본으로 아예

귀화해버렸다고 하더군. 하긴, 그가 '신의희작'에서 연기한 인물은 갈데까지 간셈, 막장중의 막장이었다.


그 탓일까, 내 생각엔 손창섭이 그다지 평가받지 못한 게 아닐까 싶은데 말이지. 이른바 한국인의 특성이라는
 
애이불비, 혹은 아무리 힘든 고난과 역경에도 한줄기 빛무리를 (무책임하게) 던져놓고 마는 식의 통속적이고
 
도식적인 구도가 아닌거다. 왠지 그래야할 듯한 도덕적인 압박감이나 (계몽이건 격려건) 무책임한 낙관으로

회귀하고 마는 잘 짜여진, 닫힌, 완결된, 기승전결의 작품이 아닌 거다. 이게 내 생각엔 손창섭과 김기덕, 그런 류의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의 공통점인거 같다는 생각이 불끈 드는데, 그저 현실의 어느 한 부분을 '따왔을 뿐'인거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걍 하나의 주제의식이나 의식적인 부르짖음을 위해 현실을 보기좋게 매무새지어 마지막에

마침표로 마치는 것이 아닌...뭐랄까, 그저 작품 앞뒤에 말줄임표로 그 연속성과 함축성을 열어놓는달까.

"..." 이런 식으로나 표현할 수 있을까.


해서, 그는 어설픈 냉소나 겉멋든 자포자기가 아니라, 갈데까지간 냉소와 그로테스크함을 보여준다. 이쯤이면 되겠지,
 
이쯤에서 반등해서 밝은곳으로 상승해야지, 하는 게 아니라 도무지 그 음울함과 비정상성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그저 맷돌에 갈리듯, 한없이 침잠할 뿐.



그러고 보니 하루끼 역시.




유달리 강하지는 않아도 제 식솔에 대한 책임은 아는 사람, 아버지..라는 게 소설의 메시지인 듯 하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지나치게 호들갑스런 묘사도 아니었고, 어떻게든 눈물을 뽑아내겠다는 의욕이 과해보이는

스토리도 아니었다. 소설은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특정 상황을 묘사하는 몇몇 표현이 생생하고 신선한 게 눈에 띄긴 하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말투는

담백하고 건조하기까지 하다. 그건 아버지에 대한 이 소설을 '아버지'의 이미지와 비슷하게 가져가고 싶어서였을까.

대개 아버지의 이미지란 건 과묵하고, '소처럼 묵묵히' 일만 하며,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그런 거니까.


그래서일 거다. 난 이 소설이 그다지 와닿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새삼 깨닫게 되지도 않았으며, 뭔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 라는 커다란 심적 동요가 오지도 않았다. 그저 조그마한 소득이라면, '아버지'들은

이렇게 생각하나 보군, 정도 감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랄까. 감정의 기복을 격하게 탄주하지 않고 덤덤하게 가는 건

좋은데, 그러다 보니까 감정이입도 별로 안 되고 밋밋하고 지루하다. 재미가 없다.


어허, 엄숙하고도 거룩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밋밋하고 지루하다고 해서야 되겠는고, 하고 누군가

꾸지람할지 몰라도, 솔직히 이 소설에서 화자 엄세웅의 병든 형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그나마 남아있던 한 줌의

설득력조차 사라질 뻔 했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을 하던 가족들 먹여살려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불도저처럼

살아가는 아버지, 주변의 평판은 내팽개친 채 편집적으로 소지품정리에 매달린다는 아버지, 죽고 난 후의 일을

추스리려 발신번호만 몇차례씩 남기면서도 살아있을 때의 일은 돌보지 않는 아버지.


굳이 난 그런 아버지에 반댈세, 라고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그런 아버지도 있을 수 있을 테고, 당신의 삶이니까.

또 그게 아버지의 '사랑방식'이라면야 더 할 말 없다. 그치만 난 그들의 '책임'이란 게 단순히 식구들 밥 안 굶기는 걸로

끝난다고 생각지도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것, '지금 여기'서 함께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통 '아버지'들의 사랑 표현방식이나, 이 책이나, 똑같은 어려움에 봉착하는 것 같다. 표현을 안 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려니 '밥먹여 살리는 것'으로 책임을 다한다는 착각에 빠지고 만다. 게다가 함께 한 스토리가 없으니 서로에 대한

 감정이입이나 공감도 어렵다. 차라리 IMF 직후엔가 나왔던, 주절주절대는 신파조의 '아버지'가 나았다고 생각한다.




이건, 요새 봤던 왠만한 영화 중에 최고다.

Wall-E에 이어 픽사가 또다시 잊지 못할 영화를 만든 것 같다. 업(UP) 말이다.

메가박스 영화관 한가운데에 전시된 풍선이 주렁주렁 매달린 집을 보았을 때도, 다른 영화를 보기 전 예고편으로

할아버지와 뚱뚱한 꼬맹이가 나왔을 때도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감동적이고 흡인력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애니메이션이 더이상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은 이미 상식이 되어버렸지만, 이제 굳이 애니메이션이라는 표현

방식을 지적하며 다른 실사 영화와는 다른 기준으로 그 예술성이나 완성도를 평가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건, 요새 봤던 왠만한 영화 중에 최고다. 이야기를 이끄는 호흡의 완급에 있어서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에

있어서나, 어느 모로 보나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인 것 같다. 감동을 마구 먹어버렸다.

스포일러의 요소를 최대한 피하겠지만, 사실 이건 영화를 직접 봐야 느낄 수 있으니 별로 스포일링되지 않을 듯.


영화는 이제 시작인데 벌써 눈물이 한번 고여버렸다.

할아버지가 거대한 풍선다발에 집을 매달고 하늘로 날아오르기까지의 삶, 그러니까 그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초반의 장면들이란 건 뭐랄까, 누군가의 인생에 순식간에 감정이입하면서 문득 일흔세살의 노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해준다. 어느순간, 내가 그 '칼' 할아버지가 되어 있다. 그의 백발이

이전엔 검은 머리였음을 알고, 그의 완고한 표정과 눈매가 이전에는 훨씬 부드러웠고 누군가에겐 애정이 가득했음을

알고 있다. 비행선을 동경하며 늘 모험을 꿈꾸던 아이가 어른이 되고 홀로 남게 된 그런 상황, 영화는 그제서야

시작이다. 영화는 이제 시작인데 벌써 눈물이 한번 고여버렸다. 이런 영화는 본 적이 없다.

"Adventure is up there"?

스토리를 구구절절 이야기할 생각은 없으니 급마무리랄까. 할아버지가 집을 위로 띄울 생각을 하게 만드는 상황,

주위가 온통 재개발에 들어가 고층빌딩이 조그마한 집을 포위한 터였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집을 띄우고 남아메리카까지

날아가기로 한다. 비행선을 동경했던 할아버지 내외의 가슴에 새겨져있던 탐험가의 말, "Adventure is up there"는

늘 '칼' 할아버지에게 하늘을 쳐다보게 만들었댔다. 이야기가 끝낼 때쯤에야 바닥에 안착하는 집의 이미지가 보여주듯

모험이란 건 다소 들뜨고 불안정한 상태, 어딘가에 정착하지 않고 부유하는 상태에서 이뤄지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건,

모험을 하려면 약간은 바닥에서 거리를 두고, 원경에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Adventure is ubiquitous!

'유비쿼터스'란 단어가 한때의 트렌드였던 적이 있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편재하는' 정도의 뜻을 가진 이 단어가

아마도 이 이야기와, '칼' 할아버지를 이끄는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위(up)' 어딘가 기다릴 모험을 찾아 떠난

길이지만 실은 그의 삶 전부가 모험에 다름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어느 특정 장소에 도착해야 비로소 모험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그냥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 하며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던 거다. 흔히 여행이란 방식으로
 
낯선 곳에 떨어지고 나서야 하루하루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곤 하듯이 말이다.


'칼' 할아버지는 과거의 일상이 모두 소중한 모험이었음을 깨닫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지금의 순간을 적극적으로

'탐험'하기 시작한다. 그의 집이 비록 과거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해, 과거에 약속한 모험을 이루기 위해 위로 떠오르긴

했지만, 수천개의 풍선은 이제 지금의 순간을 위해, 지금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으레 삶의 전성기를 지났다 여겨지는 노인들이 그러듯 어떤 삶의 순간에 멈춰버리지 않고, 다시금 계속해서 살아간다.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며.



p.s. 다시 생각해보면 애니메이션이어서 유리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애니메이션이라서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장면 하나하나에 스토리의 흐름에 필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움직임
 
하나, 소품 하나까지 의도에 맞게 정밀하게 세공해낼 수 있는 게 애니메이션이니까. 중간중간 화면 전체에 의미가 꽉 차

있다고 느껴지는 장면들이 더러 있었다. 게다가 어떤 건물의 창문밖을 슥 지날때 풍선을 투과해서 집안 내부에 비쳤던 

알록달록한 조명도 그렇고, 집에 묶여 바람에 나부끼는 색색의 풍선들이 보여주는 음악같은 율동감과 반짝거리는

아름다움이라니. 물론 이야기 초반에 나오는 압축적이고도 압도적인 삶의 묘사는 말할 것도 없고.


또 하나 만화라서 되려 유리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한 부분이 있다면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 육체적으로

쭈글쭈글하여 '아름답지' 않으며 뭔가 모험이나 역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져 극을 이끄는 주인공으로는 잘

캐스팅되지 않는 그런 캐릭터를 무리없이, 감정이입이 쉽게 구현할 수 있었던 건 역시 애니메이션이 갖는 '미화'의 힘

때문은 아닐까. '칼' 할아버지는 사람이 살면서 자연스레 외면에 쌓게 되는 온갖 흔적들로부터 자유로운 건 사실이니까.

어떤 배우가, 어떤 사람이 '칼' 할아버지를 이만큼 연기해낼 수 있을지 잘 상상이 안 간다. 만화라서 유리한 건 역시

역사성 없는 할아버지 캐릭터랄까. 삶의 구린내가 전혀 풍기지 않는 동화(만화) 속의 할아버지여서, 그의 삶에 더욱

쉽게 감정이입하고 그와 함께 울고 웃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살풋 들었다.







김승환 회장이 보낸 공개질의서 전문

존경하는 김형오 국회의장님! 지난 7월 22일 국회에서는 방송법안 처리를 둘러싸고 여야 사이에 극한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었습니다. 헌법은 권력분립의 원칙에 따라 국회에 입법권을 부여하였고, 국회의 입법권을 통하여 만들어진 법률은 국민의 모든 생활영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방송법은 헌법이 보장하고 확보하는 민주주의와 국민의 알 권리를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방송의 자유, 방송의 독립성, 방송의 공적 책임을 구체화하는 법률입니다. 이 때문에 방송법의 올바른 형성은 국가공동체의 미래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국회는 이번에 방송법안을 처리하면서 매우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습니다. 그것도 정족수와 국회의원의 투표행위라는 매우 기초적인 것에 관한 것이라서, 국회의 모습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매우 착잡하기만 합니다. 정족수와 투표는 공·사영역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회의체에서 적용되고 행해집니다. 그래서 국회가 정족수를 계산하고 국회의원들이 투표를 하는 행위는 국회 외의 다른 모든 회의체에 전범으로 작용하여야 합니다.

제가 아래의 질의를 공개적으로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방송법안 처리를 둘러싸고 제기된 문제는 국회의원, 대통령, 언론인, 대자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국민이 알아야 할 문제입니다. 이 때문에 의장님과 저 사이에 교환되는 질의와 답변은 저희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의장께서 제 질의에 대한 답변을 하셔야 할 법적 의무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정치인으로서 오랜 경륜을 갖고 계시는 의장께서 제 질의에 대한 답변을 해 주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몇 가지 질의를 드립니다.

하나. 7월 22일 이윤성 국회부의장이 방송법안에 대한 투표개시를 선언한 데 이어 투표가 진행되었고, 투표종료선언 즉시 전광판에는 재석의원이 145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의결정족수를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49조와 국회법 제109조에 따르면 재적의원 과반수가 재석해야 하고, 투표에 참여한 의원 과반수가 찬성을 해야 방송법안이 가결됩니다. 현재 국회재적의원이 294명이니까 재석해야 하는 의원은 148명입니다. 재석의원 145명은 의결정족수의 첫 번째 요건인 재적의원 과반수에 3명이 모자랍니다. 따라서 그 결과는 부결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윤성 부의장이 "재석의원이 부족해 표결 불성립되었으므로 다시 투표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재투표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 가결되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한 질의는 이것입니다. 법률안에 대한 의원들의 투표는 투표개시선언, 투표, 투표종료선언이 있으면 유효하게 성립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투표결과 재석의원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면 불성립하는 것입니까?

둘. 이윤성 부의장은 표결 불성립을 선언한 후 재투표를 선언하고 진행했습니다. 국회에서의 의사절차는 헌법과 법률에 근거해야 합니다. 이번 재투표의 근거조항은 무엇입니까? 참고로 재투표에 관한 근거조항은 딱 하나 국회법 제114조 제3항입니다. 그것은 "투표의 수가 명패의 수보다 많을 때에는 재투표를 한다. 다만 투표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조항은 이번에 실시한 전자투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이 명백합니다. 국회사무처가 방송법안 재투표를 정당화할 수 있는 선례라고 내놓은 자료는, 역으로 그러한 선례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의장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항이 이번 방송법안 투표에 적용될 수 있는지,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셋. 국회의 회의와 의사진행 및 의안의 의결에 필요한 정족수로는 의사정족수와 의결정족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전자는 국회가 회의를 열고 의원들이 발언을 하기 위한 정족수이고, 후자는 법률안 기타 의안을 가결시키는 정족수입니다. 이윤성 부의장의 말대로 방송법안 1차 표결이 불성립되었다면, 어떤 정족수가 문제가 되어 불성립된 것입니까? 혹시 헌법학자인 제가 모르는 또 다른 정족수, 예를 들어 표결개시정족수라는 것도 있는 것입니까?

넷. 헌법 제130조 제2항은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헌법개정안은 국회가 의결한 후 3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 붙여 국회의원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가결·확정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헌법개정안에 투표한 유권자의 수가 유권자 총수의 과반수에 미달하는 경우가 발생했다고 가정합시다. 이 경우 헌법개정안은 부결된 것입니까, 아니면 재투표에 회부해야 하는 것입니까?

다섯. 주민소환에 관한 법률 제22조 제1항에 따르면 단체장이나 지방의원에 대한 주민소환은 주민소환투표권자 총수의 3분의 1 이상의 투표와 유효투표 총수 과반수의 찬성으로 확정됩니다. 이 법률 제23조에 따르면 주민소환이 확정된 때에는 주민소환투표대상자는 그 결과가 공표된 시점부터 그 직을 상실합니다. 여기에서 주민소환이 확정되었다는 것은 주민소환이 가결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법률이 시행된 후 최초로 2008년 12월 12일에 하남시장 주민소환투표가 있었습니다. 당시 하남시선관위가 발표한 집계결과에 따르면 전체 투표인수 10만6435명중 31.1%인 3만3057명만이 투표에 참여해, 소환요건 충족인원 3분의 1인 3만5479명에 미달하여 주민소환이 무산되었습니다. 이 경우 주민소환투표는 부결된 것입니까, 아니면 투표권자 총수의 3분의 1 이상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으니까 재투표해야 하는 것입니까?

여섯. 헌법은 입법권, 집행권, 사법권 3권을 분리하고 있습니다. 권력상호간에는 헌법과 법률의 규정에 따라 일정한 견제와 균형 그리고 협력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 있습니다. 어떠한 권력도 다른 권력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물론 우리나라에서는 권력분립에 관하여 헌법규범과 헌법현실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권력은 또한 상호 통제를 받습니다. 국회가 압도적 다수로 가결시켜서 효력을 발생하고 있는 법률조항이라 하더라도 헌법재판소가 위헌결정을 내리면, 결정이 선고되는 순간 그 법률조항은 효력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국회 내에서 발생하는 다툼은 국회의 권위와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국회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더구나 이번 방송법 표결 불성립과 재투표에 관한 다툼은 헌법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결론이 너무나 단순명료합니다. 이런 사안 정도는 결자해지 차원에서 국회가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곱. 7월 26일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8월 중 종합편성채널과 보도전문채널 사업자 승인 신청 접수 및 심사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밝혔고, 세제혜택 등 신규사업자 지원 검토까지도 약속했습니다. 국회에서 어떻게 싸우든, 헌법재판소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상관하거나 기다릴 것 없이 자신은 방송법이 통과된 것으로 간주하고 일을 추진하겠다는 생각인 듯합니다. 아마도 그는 헌법재판소의 심리적·정치적 부담을 재빨리 읽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결론을 내려도 후폭풍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헌법재판소의 부담 말입니다. 이럴 때 재판기관은 대개 시간을 끌게 됩니다. 헌법재판소는 무엇이 헌법인가, 그리고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국회법의 관련조항들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만을 선언하면 될 텐데, 우리나라에서 대통령권력이라는 것이 어디 그리 만만한 것입니까? 주변에 막강한 다른 권력들이 호위하고 있기도 하고요. 이런 상황에서는 입법부의 수장인 의장께서 정부에 방송법안 시행을 위한 작업을 중단할 것을 요청해야 한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덟 이번 방송법안 투표에서는 국회의원들의 대리투표, 절도투표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는 것이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계속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형법상 공무집행방해죄에 해당합니다. 수능시험에서 대리시험행위 또는 공직선거에서 대리투표행위가 적벌되었을 때, 형법과 공직선거법 등에 의해 학생이나 유권자가 받는 엄정한 형사처벌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의장으로서 국회의원들의 이러한 행위는 어떠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그러한 불법투표로 얼룩진 방송법안 투표의 효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프레시안 기사.
헌법학회장, 김형오 국회의장에게 공개질의 "결론은 단순명료…국회가 결자해지하라"

경찰, 용산 철거현장 강제 진압... 5명 사망 참사
"특히 특공대들은 수십미터 높이의 대형 기중기에 매달린 컨테이너 박스를 타고 참극이 벌어진 농성 현장에 접근했다. 철거민들을 상대로 사실상 대테러 작전을 펼친 것."(데일리중앙, 2009. 1. 20)

 
 

점유 형태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강제 퇴거, 괴롭힘 또는 기타 위협에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점유에 대한 법적 안정성을 보장받아야 한다.  (유엔 사회권위원회 사회권규약 일반논평4)


책을 보았다. '여기 사람이 있다'. 몇장 힘겹게 넘기다가 울컥, 눈물이 쏟아져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던 책이었다.

그러다 문득 기사를 보았다. 쌍용차 공장에서도 용역과 경찰의 합동작전이 버젓이 이뤄지고 있다는 기사였다.
 
"법을 얘기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쌍용차 공장에서는 용역들이 새총을 쏘고 불을 지르고, 용산참사에서처럼 똑같이 합니다. 경찰이 엄호하고 합동작전도 하고 경찰 장구도 빌려줍니다. 경찰력 제대로 된 나라에서는 자존심이 있지, 일반 용역깡패에게 지위 안 넘깁니다. 경찰은 경비업법 위반과 중상해죄, 공무원 사칭의 공범입니다. (권영국 변호사)"("테이저탄 맞아 뺨 썩는데 항생제 없이 수술..." - 오마이뉴스)


어제그제, 울음을 삼키며 책을 읽어내렸다. 그게 그러니까 올 초였다. 사람이 여섯 명이나 '학살'당했다. 경찰특공대는
 
용역과 손발을 맞춰 '도심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엄혹한 군사작전을 성공리에 펼쳤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반년이 지났다.
그분들은 장례조차 못 치르고 있다. 만평 그대로, "뒤는 걱정않고 뭉개버렸던"
 
그들은 여전히 건재한 채 또다른 살인, 또다른 학살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재개발문제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고, 2000년의 봉천3동 철거촌에서 며칠 깔짝대며 나름대로 남들보다 보고 들은 게

있다고 생각했었다. 착각이었다.

오늘은 봉천 3동에서 이루어진 동계 노동자 빈민 학생연대투쟁(줄여서 빈활)의 첫날이었다.

이미 포클레인에 무참히 무너져내린 빈 집들이 쭉 좌우에 도열한 가운데 성했을 무렵에도 꽤나 볼품없었을 그런 집의 길쪽 창가에나마 여전히 갸날프게 매달려 있던 방범철창들...그건 공권력에 대한 순진한 기대를 비웃는 듯 했다.

겨울철에는 재개발을 위한 철거가 불법임에도, 이주 비용조차 없는 빈민들을 위한 가수용단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철거깡패들을 동원한 폭력과 방화 등의 살인적인 강제 철거가 지금에도 계속 사실상 경찰의 비호 아래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지역의 빈민들-대부분이 세입자인데-에게는 약간의 이주비 외에는 아무런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재개발 사업 지역에서 충돌이 그치지 않는 주된 이유의 하나가 되는 거 같다.
가옥이 재산으로만 파악이 될뿐, 실지로의 삶의 터전, 즉 주거의 공간으로는 인정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들을 '빈민'으로 칭하던 그때의 대학생이 사회인이 되고 나니 알겠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가진 꿈은 '내집 마련'.

한국의 주택보급률은 이미 100%를 넘은지 오래건만, 전체 가구의 40%가 전월세로 살고 있다. 10명이 5,508채를

소유하고 있다는 현실이라거나, 전체 인구의 1%가 전체 사유지의 60%를 소유하고 있는 현실은...그냥 넘기기로 한다.

소득불균형이 아니라 부의 불균형을 따진다면 나라가 벌써 엎어졌을 거라던 이준구 교수님의 이야기도 그러려니 한다. 


정말 복장터지도록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는 건 그거다.

왜. 미분양 아파트는 쌓여만 가는데, 계속해서 더욱 비싸고 넓고 고급스런 아파트만 지어지고 있는 걸까.


좀더 적은 세대수를 가진, 좀더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유효한 아파트를 위한 현재 방식의 재개발이 지속되는 한,

철거민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집이거나, 혹은 (자영업자로서) 자신의 '밥그릇' 그 자체를 일부 땅주인들과

건설업자, 공무원들의 이익을 위해 통째로 넘겨야 하는 상황이라면. 세입자 보상은 재개발 사업의 너무 늦은 단계에서,

거의 모든 것이 정해진 상황에서 그저 강요된 독배처럼 이뤄진다면.
가게에 대한 투자금과 전세금
등을 100% 보상받지

못할 뿐 아니라, 기존의 영업지역, 생활권 이외의 지역에서 다시 장사를 일으키라며 막무가내로 내쫓는 거다. 게다가 이미

인접지역은 재개발 열풍에 휘말려 잔뜩 전세금이 올라버린 상황, 사람들은 체념을 강요당한다.


그나마 아직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움직인다.

가능한 재원을 박박 긁어모아 가능한 인근한 주거지로 옮겨간다. 물론 순식간에 두배 이상 뛰어버린 전세금을 감당하기

쉽지 않고 사고처럼 닥친 '재개발사업'에 재산도 반토막났지만, 그래서 이전보다 좁고 열악한 환경으로 가기 일쑤지만,

어쨌든 '입에 풀칠하란 법은 없다'는 속담이 아직 힘이 된다. 이전에 비해 더욱 힘겨워진 삶이고, 심지어 집주인들조차

잔뜩 올라버린 집값을 감당치 못하고 튕겨나가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주변에 그나마 연착륙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철거되는 지역에서 곧 철거될 지역으로 이동한다. 계속

낙후한 곳으로 밀려나고 밀려나 어느순간 '소시민'에서 '거지'로 전락해버린 걸 깨닫는 사람들. 그렇게 밀려날 수 없어서

항의를 시작한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히고 만다.


어쩌면 그들의 잘못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애초 도심에 비비고 살고 있었던 게 잘못이다.

원하던 원치않던 자녀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거나 학원을 옮기는 등 아이들 교육 환경이 바뀌는 게 뭐가 대수라고.

원하던 원치않던 다니던 직장이 조금 멀어지고, 출퇴근이 조금 어려워지는 게 뭐가 대수라고.

원하던 원치않던 조그마한 가게 없어지면, 어디서든 새로 열어 손님 새로 만들고 단골 만들면 되지 그게 뭐가 대수라고.

이웃간의 정이니 마을의 화목함 따위야 돈없고 촌스런 자들의 자기위안일 뿐이지 그게 뭐가 대수라고.

보다 쾌적하고 안락하며 고급스러워서 돈되는 건물을 올리겠다는데. '보이지 않는 손'이 이끄는 대로 국가발전을 위한

최적의, 최고효율의 자원 배분을 하겠다는데. 그게 비록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착각.


사과라도 해야 할 판이다. 가난한 사람이면 가난한 사람답게 교육에도 욕심 안 부렸어야 했고, 직장이니 가게니 어차피

당신들 눈에 보이기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텐데 그런 걸로 쪼잔하고 구차하게 굴지 말아야 했으며, 삶의

터전이니 뭐니 촌스러운 단어로 '떼잡이질'했던 것들 너무너무 반성하고 죄송한 마음 뿐이라고. 그런 건가.


용산은,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회는 두 가지를 요구했었다. 지금까지 장사해왔던 이곳에 주상복합 상가를 지은 후
 
다시 이 곳에서 영업할 수 있도록 상가를 임대조건으로 제공하라는 것이었고, 두번째로는 공사기간 중 영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가수용상가를 개발지역 내에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밥그릇 싸움이다. 다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밥그릇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다. 개발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살던 곳에서 살 수 있을
 
만큼의 생존권만을 확보해 준 상태에서 개발을 하라는 거다. 세입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집주인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대안도 내놓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손해를 강요하는 것에 대해 항의했던 거다.


그리고 그건 모두를 대신한, 생업에 바쁘고 어쨌던 삶을 이어가기에 바쁜 사람들을 대신한 항의였다. 서울에만 50개가

넘게
짓겠다는 뉴타운 공약을 비롯 전국각지에서 벌어지는 재개발 사업, 그에 필연적으로 뒤따를 재개발 지역의 혼란상.
 
잔뜩 올라버린 집값과 앉은 자리에서 슬금슬금 빼앗기고 있는 우리네 재산. 없는 이들의 재산이 있는 자들, 세입자 한번도
 
안 해봐서 세입자 심정 모르겠다며 똥배짱 튕기는 용산구청장, 건설자본들의 배만 불리고 있다는 고발이기도 했다.

그리고는, 용역과 경찰과 법과 언론에 위협받았으며...끝끝내 살해당했다.


"지금, 오늘날 한국에서 행복해하는 자는 다음 두 부류 중 하나다. 하나는 도둑이고, 하나는 바보다." 난쏘공의 저자

조세희 작가님은 말한다. 불행한 사람들, 불행한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연대의 깃발 하나로 목숨을 건 전철연 사람들이

있다. 그분들이 돈을 받았다느니 어쨌다느니 언론이 떠들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사계절 넘게 망루 투쟁을

벌였던 용인 어정상가/공장 철대위분들은 자신들 대신 돌아가신 거라며 눈물흘렸고, 용산4구역 철대위분들은 자신들

도와주러 왔다가 돌아가신 분들때문에 고개를 못든다며 눈물을 흘린다.


아무래도 조세희 작가가 놓친 한 부류가 더 있다. 행복해하는 자, 혹은 최소한 눈물흘리지 않는 자의 한 부류가 더 있으니,
 
그들은 살인자다.


아무리 그들이 돈없으면 죄인이요, 망루가 너희를 반기리니 회개할지어다..라고 떠들지라도, 세상이 온통 가진자

위주로 돌아간다는 섬뜩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진실이 정말 끝끝내 진실이라 할지라도, 모처럼 하루 휴가를 낸 내일,
 
내일은 박카스라도 한 박스 사들고 용산에 가야겠다. 돌아가신 분들, 그리고 사는 것 같지않게 살아가시는 분들..

여기도 사람이 있다고, 죄송하다고 찾아뵈야겠다.



용산참사 반년, 사회 원로 대표 시국선언(7.23)


- 이전 포스팅들

▶◀ 불도저식 진압, 이건 살인이고 학살의 시작이다.

용산참사 후 2개월, "용산GAJA展"에 다녀왔습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촌스러운' 용산참사와의 부끄러운 데자뷰







여기 사람이 있다 - 10점
강곤 외 지음/삶이보이는창




<브리핑>

노회찬 “오늘 날치기된 언론악법이 이명박 대통령보다 더 위험하다”

언론악법 날치기 규탄 및 MB정권 반대 진보신당 시국대회 발언   


- 7.22(수)19:30 명동 우리은행 앞


요즘 내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대통령 잘못 만나 길거리 연설을 하다보니 이렇게 됐다. 내일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두 달인데 아직도 대통령은 사과 한 마디 없다. 이런 대통령을 보고 많은 국민들이 대통령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여론이 80%나 됐다.  


그러자 이명박 대통령은 통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문동 시장에 방문해 떡볶이와 오뎅을 먹었다. 누가 먹는 것을 바꾸라고 했나. 통치를 바꾸라고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낮은 30% 지지율에서 헤매고 있다.


경제위기가 닥쳐 모든 나라들이 가난한 사람들 복지 늘리고 부자증세를 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 서민감세는커녕 부자들 세금 깎아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종부세만 13조, 올해는 25조, 2012년까지 무려 90조의 부자감세를 해준다. 그러면서 담배, 소주세는 인상한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빼앗아 부자들에게 나눠준다. 대운하 안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4대강 사업이라고 해서 30조씩이나 쓴다고 한다. 사교육비 반값은커녕 학원비 등록금이 기하급수적으로 오른다. 그래서 우리 국민이 이명박 대통령을 못 믿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국정기조를 바꾸기는커녕 오늘에는 언론악법을 날치기 직권상정으로 통과시켰다. 오늘 텔레비전을 보면 국회 육박전을 볼 수 있다. 여러분은 그 속에서 본질을 봐야 한다. 이 언론악법은 국민 모두의 생활과 연결돼 있는 문제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토록 이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 이유는 지지율은 계속 떨어지는데 정권재창출을 해야 하니 여론장악, 언론장악을 하겠다고 나선 것 아니겠는가.

  

저 노회찬이 국회의원 한 석밖에 없는 당의 대표인데, 100분토론과 심야토론에 가장 많이 출연했던 사람이다. 왜 그랬겠는가. KBS도 MBC도 공영방송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소수의 목소리도 방송해줬기 때문이다.


만약 조중동방송이고, 삼성방송이었다면 이것이 가능하기나 했겠는가. 내 신발도 안나왔을 것이다. 재벌과 족벌신문이 자기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여론을 장악하는 법이 바로 오늘 통과된 언론악법이다. 이명박 대통령보다 더 위험한 법이 이 법이다. 이제 대통령과 국회를 바꾸는 일만 남았다. 썩어빠지고 무능한 대통령과 국회를 바꾸는 데 여러분이 함께 해주신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2009년 7월 22일

진보신당 대변인실

 

시국연설회 일정
* 23일(목) 오전12시 여의도역 사거리
* 23일(목) 오후6시  종로 젊음의 거리
* 24일(금)  오전12시 구로디지털단지(구로 이마트)


 






언론악법 날치기 통과는 국회법을 위반한 원천무효입니다

언론악법 날치기 통과에 대한 진보신당 입장... 국민과 함께 싸워나갈 것


- 2009년 7월 22일(수) 국회 정론관 브리핑

- 진보신당 원내대표 조 승 수


오늘 신문법 방송법, IPTV법 등 언론악법과 금융지주회사법 등 네 개 악법이 모두 날치기 통과됐습니다. 정권재창출을 위해 재벌방송, 조중동 방송을 밀어붙여준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희대의 날치기 작태에 온 국민과 함께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언론악법 날치기는 국회법을 위반한 원천무효입니다. 신문법 투표과정도 대리투표 의혹이 제기됐고, 방송법 투표과정에서는 의결정족수가 안 된 상태에서 부의장이 투표종료를 선언했음에도 이후 재투표를 지시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런 천인공노할 말도 안 되는 절차를 통해 진행된 미디어법은 원천무효입니다. 우리 진보신당은 오늘 언론악법 날치기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특히 재벌과 조중동의 방송진출 허용법안인 방송법은 국민과 함께 원천무효투쟁을 벌여나가겠습니다.


이제 국회는 더 이상 민의의 전당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저녁 6시 명동에서 국민과 함께 언론악법 날치기 규탄 시국대회를 열 것입니다. 진보신당은 민의가 존재하는 국민 곁으로 다가가서 국민과 함께 싸워나가겠습니다.


2009년 7월 22일

진보신당


<브리핑>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날치기 관련 진보신당의 법적 대응

23일 즉각 헌법재판소에 방송법 날치기 통과 관련 권한쟁의심판청구와 효력정치가처분 신청 제출할 것


진보신당은 오늘 있었던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와 관련하여 국회 원내외에서의 강력한 투쟁과 더불어, 법적으로 무효인 이 법안의 무효화를 위해 다음과 같이 법적 대응을 하기로 하였다.


첫째, 오늘 처리된 모든 법안에서 대리투표가 발견될 경우에는 오늘 투표는 원천무효이므로 왈가왈부할 것이 없다. 국회는 오늘 표결을 원천무효화해야 하며, 진보신당은 이 경우 법적 대응은 물론 모든 수단을 동원해 투쟁할 것이다.


둘째, 국회 부의장이 투표종료를 선언한 후 재투표를 지시한 방송법의 경우, 투표종료 당시 국회법 109조 의결정족수 조항에 따라 재적 과반수에 미달한 것이므로 이 안건은 부결된 것이다. 이 경우, 국회법 92조에 따라 일사부재의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국회 부의장이 그 자리에서 재투표를 지시한 것은 국회법에서 정한 자신의 권한을 초과하여 위반한 것이므로, 이에 대해 진보신당은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할 것이다.


셋째, 더불어 이 권한쟁의심판청구 소송이 종결될 때까지 방송법의 효력은 사라지는 것이므로, 헌재에 방송법의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같이 청구할 것이다.


오늘 국회에서의 날치기 통과는 위와 같은 이유로 원천무효이다. 진보신당은 바로 내일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청구와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할 것이며, 더불어 원내외의 모든 투쟁을 병행할 것이다.


2009년 7월 22일

진보신당 대변인 김 종 철

신문법, 방송법, IPTV법 등 미디어법 3개법안, 게다가 금융지주회사법까지 4개법안이 날치기 통과되었다.

이건 아니다. 진보신당의 조승수 원내대표와 노회찬 당대표의 입장이다.




대한민국은 독재국가로 가고 있습니다

김형오의장은 히틀러의 괴링을 자임하는가?


- 2009년 7월 22일 (수) 13:10 국회정론관

- 진보신당 원내대표 조 승 수


오늘은 대한민국의 의회 민주주의와 언론 민주주의가 사망한 날입니다. 언론관계법을 놓고 국회가 파행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끝내 김형오 국회의장이 직권상정 의사를 밝혔습니다. 국민여론을 부정하고 국회를 청와대의 거수기로 만드는 폭거가 자행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의 방송법은 민주주의 국가의 핵심가치인 여론다양성을 부정하는 MB언론장악법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김형오 국회의장도 언론관계법은 민생법안이 아니라 조중동에 방송진출을 허용하느냐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정부여당은 재벌과 특정 언론에 방송을 내주기 위해 통계수치까지 왜곡 조작한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연구결과를 이용하고 일자리창출 효과가 있다며 대국민사기극까지 펼치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이 합의처리를 원하고 있는 언론법을 일방처리 하는 것은 한국 언론 민주주의의 근간을 파괴하는 심각한 행위이자 한나라당이 재벌과 조중동의 시녀임을 자처하는 꼴입니다. 자본독재국가의 마지막을 완성하려는 정부의 음모에 국회가 놀아나는 꼴입니다.


지금 많은 국민들은 언론법이 민주주의 기반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피와 눈물로 이룬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독재국가로 나아가려는 것이라 우려하고 있습니다.


김형오 국회의장께 요청합니다. 의장은 오늘 미디어법을 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직권상정 뜻을 분명히 한 말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론악법 직권상정은 더 큰 파국을 초래할 뿐입니다. 지금 당장 직권상정을 철회하십시오. 정권이 저지른 참혹한 살인인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문제도 내팽개친 채 여론수렴 절차도 없이 대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부 지시대로만 언론악법을 밀어붙이려는 한나라당과, 이에 부화뇌동하는 국회의장의 태도는 돌이킬 수 없는 국민적 저항을 부를 것입니다.


역사적 비극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미디어법이 직권상정 된다면 김형오의장은 히틀러와 나찌에게 일당 독재의 길을 열어 주었던 1933년 당시의 독일국회의장이었던 괴링의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진보신당은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이 법을 막아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투쟁할 것입니다. 국민의 여론을 무시하고 찍어누르려는 대통령과 여당의 권위는 그 순간부터 부정됐습니다.


용산 참사를 외면하고 살인과 다름없는 정리해고를 단행하면서 급기야 언론과 방송마저 자본과 정권의 시녀로 만들려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맞서 모든 것을 걸고 국민과 함께 싸우겠습니다.


2009년 7월 22일

진보신당 원내대표 조 승 수


<브리핑>

노회찬 대표 “정권재창출 위한 언론악법 강행처리 국민과 함께 막겠다”


- 2009년 7월 22일 (수) 13:05 국회 정론관

- 진보신당 대표 노 회 찬


바로 엊그제 김형오 의장 더 이상 협상에 관여치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몇시간 후 의장은 한나라당 수정안 검토에 참여했습니다. 지금 의장은김형오 국회의장으로서의 권위와 위신과 체면을 스스로 내팽개치고 한나라당 구직대열에 들어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한나라당 언론악법 강행처리는 무엇보다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 재창출이 힘들다는 결론 때문입니다. 더 이상 민심을 얻을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조중동 방송진출에 따른 여론장악을 통해 정권재창출 길밖에 없다는 판단인 것입니다. 강부자 정권에 이어 강부자 방송이 출연하는 암울한 상황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에 개기일식이 진행됐습니다.. 달이 해를 가리기 시작하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를 기습점거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지역에 달이 해를 78.5% 가렸지만 국회를 가리지는 못합니다. 하늘에 떠있는 태양처럼 민심은 정부여당의 직권상정을 용납치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진보신당은 언론악법이 직권상정되면 국회는 더 이상 민의의 전당이 아님을 선언할 것이며, 민의가 존재하는 국민들 곁으로 다가가서 국민과 함께 싸워나가겠습니다.


2009년 7월 22일

진보신당 대표 노 회 찬

그녀의 '숟가락 정치'가 또다시 한나라당뿐 아니라 보수 세력을 술렁이게 하고 있다. 이번엔 친박세력 내부에서도

미디어법안 처리를 두고 입장이 갈리는 만큼 "현 시점에서의 직권상정 반대"라는 그녀의 말 한마디는 추종세력에조차

적잖은 혼란을 일으켰다고 보인다. 중요한 타이밍마다 예기치 못한 말한마디로 판을 흔들고, 그녀의 무게감을

시위하는 그녀 나름의 '정치' 방식이 그 어느 때보다 큰 폭발력을 갖고 정국을 주도하는 모양새다. 반작용도 만만치

않아서 보수의 대표주자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지 오래인 그녀를 이제는 우파 내부에서 내치자고 한다.


그래서다. 대체 박근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박근혜는 어떤 사람인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그녀가

바로 박정희의 딸이라는 점이다. 육영수 여사 사후 청와대 안주인 노릇을 하며 정치감각을 익혔다거나, 박정희의

지도력을 이어받았다는 식의 높은 평가가 따라붙는다. 철의 여인 대처 수상의 이미지를 덧씌우는가 하면 여성 특유의

정치적 리더십도 겸비했다고 '알려진다.' 그리고 북한의 정권 세습을 비난해 마지 않는 일부 보수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의 재림을 갈망하며 박근혜를 무조건 지지하는 친위대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좌파를 포함한 그녀의 반대세력이 그녀를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입장은 다르지만, 그건 '박정희의 딸'로서의

박근혜를 물고 늘어진다는 점에서 뿌리가 같다. 독재자의 딸이라거나, 박정희의 정치적 과오에 대한 사과가 없다거나,

순전히 박정희를 등에 업고 분에 넘치는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식의 평가가 그것이다. 그녀의 정견이나 정치적

색깔에 대해서도 별로 깊은 분석은 안 보인다. 다만 박정희를 지지하고 심지어 찬미하는 일부 보수세력과 그녀를

동류로 배치하고, 신자유주의라느니 국가주의라느니 헐겁고 피상적인 분석만 이어질 뿐이다.


물론 이해할 수 있다. 박근혜의 캐릭터 자체가 불분명한 탓이다. 박근혜가 스스로의 정치적 이상이나 지향을 적극적으로
 
개진한 적은 과문한 탓인지 듣도보도 못했다. 그녀의 정치 스타일 역시 이번과 같은 이슈에 대해 '숟가락만 걸치는'

대중추수적인, 인기에 영합하거나 정치적 지분과 명분을 쌓기위한 정략적 행보가 두드러질 뿐, '큰 그림'은 안보인다. 

게다가 그녀의 정치적 행보나 입장을 보아도, 선정적인 몇마디를 제외하면 이른바 '보수꼴통'세력과 별반 차별성이

드러나지 않으며 다만 그녀의 친위세력이랄 친박연대에 대한 밥그릇 챙겨주기에만 골몰한 듯 보인다.


그렇지만 박근혜는 엄연히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몇년째 선두를 지켜오고 있다. 뭔가 있다는

얘기다. 단순히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무지한 대중' 때문이라고 말하는 건 사람들의 지적능력에 대한 건방진 폄하이며,

특히 차기 집권을 노리는 세력이라면 그렇게 둔탁한 분석으로는 절대 그녀를 이기고 민심을 잡을 수 없다는 게 중요하다.

그녀가 조금씩 MB와 각을 세우는 모양새를 취하고, '친서민행보'를 취한다는 MB보다 더욱 친서민적인 발언을 토하며

소위 '여성적인 리더십'을 내세워 현명하게 어필한다면 승산이 있는지 묻고 싶다.


정치인 박근혜의 정체를 명료히 분석해야 한다. 그녀의 말 하나하나, 행보 하나하나에 녹아있는 그녀의 정치적 본색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정책적 선명성 대결과 합리적 판단을 요청해야지, '박정희의 딸'이니 안된다는 식이어서는 더이상

곤란하다. 그건 국민들이 왜 박근혜를 선호하는지, 왜 박근혜가 설문조사에서 매번 1위를 차지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겠다는 얘기와도 같다. 박근혜가 누구인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어떤 정치색을 갖고 있는지 근본부터

다시 검토하고 진지하게 맞대응해야 할 때다.


덧댐. 그녀의 '숟가락 정치'가 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이미지와 정견은 숨겨진 채

그녀가 필요할 때마다 애매모호한 한마디가 툭툭 던져진다. 그녀의 가면을 벗기고 구체적인 논리를 가진 이야기를

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녀가 과연 정치인으로서의 자격은 있는지, 이상은 있는지, 그리고 로드맵은 있는지 말이다.

* 관련기사들. 

돌풍주역 박근혜… 사생결단 정세균(서울신문)

조갑제, 박근혜 탈당하라(오마이뉴스)

‘여론’에 몸 실은 박근혜… MB정책과 ‘선긋기’(중앙일보)

‘박근혜 정치’… 실체는?(문화일보)




유전무죄, 무전유죄. 나도 당신들처럼 살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을 뿐이라고. 돈이 있고 없음에, 나와 당신들은 창살과

인질을 격하고 마주하고 있다고. 실화를 주물러서 영화를 만든다는 건 얼마간 위험을 안고서 시작하는 일이기도 하다.

스토리가 뻔한 결말로 치닫는 걸 지루해할 관객들을 잡아놓아야 하고, 이미 많은 방식으로 해석된 실화에 대해 얼마나

그럴듯한 살점을 붙여넣을 수 있을지. 홀리데이도 그런 '뻔한' 스토리라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은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외침을 얼마나 와닿게 던져줄 수 있는가의 문제니까.

감독은, 얼마간 난관에 부딪힌 듯 하다. 처음의 철거촌 장면에서 드러나는 적나라한 공권력의 '합법적 폭력성'은 차츰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어디론가 스며들어가고 도망가버린다. 핏빛 낭자하던 콘크리트 바닥의 민들레꽃과 죽일듯

바라보는 그런 전장의 눈빛. 그런 건, '외국놈'들을 반기기 위해 정화된 서울거리에 어울리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소소하지만 따스한 일상의 공간들에 '침입'해들어간 '탈옥수'들은, 그래서 한낱 바이러스처럼, 아님

살인강간강도전과에 총칼로 무장한 괴한이란 말이 차라리 자연스럽다.


차츰 흐릿해지는 그들의 현실인식, 그리고 감독의 대략 낭패스러움, 큰일났다, 자꾸만 지강혁 '일당'과 대치하는 공권력,

내지 국가란 녀석이 어디론가 내빼고는, 지강혁은 단지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는 또라이 정도..로나 보이게 된다는 거다.

어쩔 수 없어진다, 감독은, 지강혁이 수북이 피워올린 담배가 올림픽종합경기장 모양의 재떨이에 꾸욱 비벼꺼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이 가진 따스한 인간성과 최민수의 야비한 목소리와 말투, 표정을 대치시키려 하지만, 자꾸 전선은

허물어진다.

 
야비함과 비인간의 화신이 된 최민수를 죽이지 않고 극의 끝까지 그들과 대척시키려 하지만, 그정도론 어림없다. '우리의

대한민국'과 '대머리아저씨'는 피한방울 안묻어있을 뿐더러, 초코파이에 열광하지도 않고, 걸핏하면 욕지거리나 해대고

싸워대는 '시정잡배'가 아니란 말이다.
 
결국, 최민수가 마지막 쏘아올린 세 발의 총성, 실제와 다르게 감독이 영화적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마무리한 그것은,

최대한 '공권력'을 감각시켜내려는 상징 그 자체다. 그런 식으로밖에는, 그 실체를 잡아낼 수도, 보여줄 수도, 느끼게

할 수도 없다는 거다. 슬프게도, 지강혁이 무엇과 멱살을 잡고, 무엇에 대고 욕지거릴 내뱉었는지 볼 수가 없는 거다.

고작해야, 말갛게 닦인 시꺼먼 각그랜저 보디쯤에서, 그리고 최민수의 예기치못한 깍듯한 모습이 거기에 비쳐지는
 
것으로, 그렇게 보여질 뿐이다. 그렇다면, 그 총성 역시도 공권력, 국가 그 자체로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반향 정도? 차체에 비친 최민수의 모습처럼, 국가의 압력이 최민수의 둘째손가락쯤에 가해져 작렬한 총탄. 

갈수록 투명해지는 국가권력의 압박, 그리고 아직 cloaking되지 않은 그 끄트머리쯤은 계속해서 감각적인 차원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안타까움. 난곡, 봉천3동...용산. 그리고 가슴저릿저릿한 비지스의 음색. 
 

Ooh you're a holiday , such a holiday
Ooh you're a holiday , such a holiday

It's something I thinks worthwhile
If the puppet makes you smile
If not then you're throwing stones
Throwing stones, throwing stones

Ooh it's a funny game
Don't believe that it's all the same
Can't think what I've just said
Put the soft pillow on my head

Millions of eys can see
Yet why am I so blind
When the someone else is me
It's unkind, it's unkind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Yet millions of eyes can see
Yet why am I so blind
When the someone else is me
It's unkind, it's unkind

Ooh you're a holiday , ev'ry day, such a holiday
Now it's my turn to say , and I say you're a holiday
It's something I thinks worthwhile
If the puppet makes you smile
If now then you're throwing stones
Throwing stones , throwing stones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프랑스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 - 가랑비.

프랑스 영화는 굴곡이 없고 밋밋한 거 같아.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것 같다가 어느순간 크레딧이 올라간다구.

'비퍼 선셋'이 '비퍼 선라이즈' 이래 9년만에 만난 두 남녀의 자잘한 수다로 일관하다 어느순간 끝났을 때의

그 황당함이란. 물론 그 영화가 싫었단 건 아니지만, 그 영화는 그야말로 "프랑스영화"였다는 얘기지.

그런데 사실 기승전결이 뚜렷치 않고 감정선이 뭔가 펑하고 터져나가는 순간이 없다는 거 자체는 나쁘다고도

좋다고도 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 하나의 스타일인 거지 뭐. 천둥이 내려꽂히듯 번쩍 하는 깨달음이나

카타르시스의 순간도 있을 수야 있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조근조근 젖어들 수도 있는 거니까.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광화문

그녀와 나는 월요병에 걸린 상태였어. 주말 내내 자알 놀았던 나는 사무실 책상 앞이 어설프고 어색해서 종일

엄지손가락 열개로 타자를 쳤고, 토요일밤부터 월요일을 의식하던 그녀는 결국 매우매우 녹초가 된 데다가 둘다

저녁을 먹지 않아 굶주린 상태였거든. 잔뜩 꾸물꾸물한 날씨, 왠지 전철이 광화문에 가까워질수록 몸도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어서, 몇마디 말도 나누다 끊겼던 듯 해. 게다가 광화문에 내려 시네큐브로 몇발짝 걷기도

전에 후두둑 후두둑 내깔겨지는 빗방울이라니. 좀, 좋지 않은 날에 좋지 않은 날씨, 영화도 그닥 기대만발이거나

막 보고 싶었던 영화가 아닌, 뭔지도 모르고 '프랑스영화' 보러 가는 길이었으니. 괜한 스케줄이었나 싶었지.


자그마한 우산들, 그리고 다시 비.

따뜻한 커피부터 한잔. 우중충하고 눅눅한 날이어선지 뜨거운 김이 폴폴 오르는 커피가 땡기는 거야. 한모금

마시고 나니 후끈한 커피기운이 마치 뜨거운 다리미처럼 몸을 뽀송뽀송하게, 게다가 날선 와이셔츠처럼 빳빳히
 
다시 풀먹여주는 느낌이랄까. 그러고 나니 둘다 기분이 매우 좋아졌었지. 다소 흐릿했던 눈매도 어느새 초롱초롱

총기가 반짝거렸고 심지어는 장난끼까지 어른거릴 정도로.
 

다리를 쭉 펼 수 있던 넓은 영화관, 절반도 채 차지 않았던 듬성대는 인구밀도, 게다가 어디선가 아스라히 들리는

빗방울 소리. 그건 마치, 여름날 매미가 벗어둔 허물같은 소리였어. 아니면 엄청시리 크게 틀어둔 엠피쓰리의

주인없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얇고도 빈약한 소리랄까. 적당히 포근하고 또 적당히 감정을 흔드는 그런.


한숨 죽인 빗소리가 쏴아.....


그리고 영화가 시작됐지. 레인. 

언제나 화창하길 바라지 않아. 이 영화 원제가 뭔지 알아? 렛 잇 레인. 비는 내리거나 말거나. 날씨 핑계를 대며
 
우울해할 수야 있지만, 사실 성철스님 말마따나 비는 비요, 사람은 사람이라구. 그보다 덜 가다듬어진 대사도 하나 

있었지 아마. "자기만 있으면 난 언제나 해가 쨍인걸!" 이렇게 오바스런 대사는 상자에 넣고 청테이프로 둘둘

감아 뻥하니 발로 차버리더라도, 영화를 보고 나니 밖에서 그악스레 내려대는 빗방울 따위 심장까지 스며들어오지

않겠다는 자신감 혹은 여유가 생겼달까. 그런 영화였어.




* 영화 '레인'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 그치만 영화의 흐름과 느낌에 매우매우 충실하려 애썼던,

비에 대한 이야기..


* 오늘도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 이런 식이다.

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



오감도 홈페이지(http://www.eros2009.co.kr/)엔 자유게시판이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랑을 원하시나요?"라는 제목아래

간단한 메시지를 포스트잍틱한 비주얼로 남길 수 있게 되어있는데, 온통 욕이다. 트랜스포머2 개봉에 맞춰, 그리고 실은

'대한늬우스' 강제상영에 맞춰 9,000원으로 오른 영화값에 대한 분노, 노출신에 맞춰진 홍보만 믿고 살색그림 펑펑

터져나오는 걸 보고 싶었는데 낚였다는 분노, 혹은 (애국시민의) '한국영화'를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분노까지.

그렇게 욕먹을 영화인지는 모르겠다. 실은, 꽤 괜찮은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다섯 가지 사랑이야기가 뚝뚝 끊어져 나온다. 김수로의 캐릭터가 겹치긴 하지만, 스토리는 각각 전혀 다른 측면의

사랑을 포착해낸다.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단물빠진 소재들, 다소간의 동성애 코드나 의외의 반전조차 어디선가

한번쯤 본 듯하여 그다지 강력하진 않았지만, 그건 어쩌면 주재료인 '사랑'의 맛과 향을 고스란히 살려내기 위해

일부러 한번쯤 위력을 줄여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클린턴 식으로라면, "Stupid, it's love."


즉석복권과도 같은 기차 티켓을 매개로 벼락처럼 마주친 두 남녀의 감정이 각자의 경험치와 스킬에 따라 어떻게

번져나가고 기어코 그 목적한 바를 이루게 되는지, 그렇지만 그 과정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쉽지 않은 내적인

꼼수와 갈등들을 지나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His Concern)는 첫 섹스를 하고 난 후 느닷없이 고개를 드는 낯섦과

막막함, 외로움을 보여준다. 또 그 다음 에피소드 '나 여기있어요'는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다"고 한줄 정리할 법한

이야기를 그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했으며 어떤 때 가장 행복했는지, 그리고 남은 자의 눈물이 언제 흘려지고 언제

닦이는지..그렇게 잔뜩 응축된 화면과 스토리로 속삭인다. 알몸으로 있을 때 가장 섹시하지만, 또 알몸으로 안아줄

때 가장 행복하지만, 굳이 섹스는 없어도 된다. 섹스가 없어도 사랑이다.


이런 때라면, 확실히 육체적 '사랑'은 그다지 의미가 없거나 무언가 품격이 떨어지는 뭔가로 보인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 한대목을 빌자면, "이 어이없는 엉덩이의 율동, 초라하기 짝이 없는 축축하게 젖은 조그마한 페니스가 시들어

가는 바로 이것...결국 여기에 경멸감을 느낀 현대인은 옳은 것이다."
라고 볼 법하단 이야기다.


그렇지만 사랑은 역시 자극적이고 치명적인 무엇이기도 하다. 상대의 정체가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페로몬 향내따라 내달리는 남자들이, 혹은 여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33번째 남자'에서 나오듯 자극만을

좇다보면 어느새 피향기 가득한 식탁 위에 사지가 올라있을지도 모르지만..그럼에도 서른세번째, 서른네번째, 사냥감은

쉼없이 덤벼든다. 상대가 이성이던 동성이던 그것은 별반 다를 바 없다. '끝과 시작'에서 나온 엄정화와 김효진은

이룰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 때로 사랑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스스로의 정상적인 생활

자체를 파멸로 몰고 가더라도,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생활을 온통 갈아엎어버릴지라도, 그런 사랑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섹스는 격렬하다. 끈이 동원될 수도 있고, 피를 볼지도 모른다. 좀더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무언가가 된다.


어쩌면, 섹스는 그 자체로 사랑인가. 다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빌자면, "이 세상에 남은 가장 좋은 것"인지도 모르고,

"당신 속에 들어갈 수 있으니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그 번다하고 다소 용두사미로

보일지 모르는 행위로부터 "우아하고 힘찬 육체의 고요함"을 찾아낼 수 있어야 가능하겠지만. 당신을 사랑하니 당신 안에

들어가고, 또한 당신을 사랑하니 당신에게 열어준다는 메타포의 현현.


그리고 '순간을 믿어요'. 사실 이 다섯번째 에피소드는 좀 패착이 아닐까 싶은데, 10대 또래로 구성된 세 커플이 서로의

상대를 시험에 들게 한다는 다소 도발적인 스토리다. 아마 십대의 발랄함과 미성숙함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그보다

나이많은 이들의 '시험'이었다면, 그래서 일종의 스와핑으로 나타났다면 좀더 위태롭고 좀더 위험했을 게다. 감독은

거기까지는 (아마도) 차마 나가지 못하고 만다. 에피소드 다섯개의 배열이 결국 섹스와 사랑의 관계를 좀더 진지하게

묻고자 했던 의도를 품고 있었다면, 마지막 에피소드는 치열함이 조금 부족했고 도발성은 매우 부족했던 거 아닐까.


마지막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며 나오는 내레이션이 보다 분명히 이 영화의 의도를 전달한다.

아마도 그건 섹스와 사랑, 좀더 눈에 익은 편한 단어로는 육체와 정신, 그 중간의 황금비율에 대한 이야기.

내레이션으로 의도는 알겠는데, 답을 주지는 않았다. 나 역시 답은 모르겠다. 다만 영화제목의 권위를 빌자면, 역시

사랑은 오감을 모두 동원해야 하는 것...일까, 라는 정도?



* 사실 영화는 그렇게 야하지 않다. 그 흔한 가슴 한번 나오지도 않고, 부모님과 함께 봐도 별로 안 민망할 듯..

살색그림의 향연을 기대하고 보러 간다면 그닥 비추.



장면#1.

오랜만에 친구들과 놀러가기로 한 수영장, 이게 얼마만인가.

옛 기억을 더듬어 촌스런 무늬의 수영복과 수영모를 꺼내다 보니 옆에서 뒹굴대며 함께 나오는 수경과 튜브.

일단 수영장에 들고 가기는 했는데..막상 바람을 불어넣고 나니 그 앙증맞은 사이즈란.

예전 기억에는 마냥 거대하기만 했던 초등학교 교정이 어느새 손바닥만한 사이즈로 변했듯,

허리에서 훌라후프처럼 돌아가던 튜브가 허벅지에서 멈춰버렸다.


장면#2.

수영장에서 수영만 하고 노는 사람이 어디있나. 쌩돈내고 바가지쓰는 기분으로 사든 튜브.

근데 모양이..아까 그 '어린이용' 튜브와 다를 게 없다. 나는 어린 아이들보다 최소한 일만이천육백구십삼개의

(튜브와 함께 하는) 영법을 더 상상할 수 있는 어른이란 말이다.


장면#3.

여자친구와 함께 간 수영장.
 
가뜩이나 수영장이니만치(!) 한뼘의 빈틈도 허용치 않고 바싹 붙어있고 싶은 마음일 뿐이건만,

맘과는 달리 자꾸 멀어지는 둘의 거리. 도넛같이 두터운 튜브가 자꾸 쿵쿵 부딪혀서 서로를 밀어낸다는.

에라, 차라리 튜브 두개를 끈으로 묶어버릴까.



그에 대한 해답?!

아직 시험은 못 해봤지만...능히 이런 세가지 상황을 손쉽게 해소할 수 있는 그야말로 '정답'이 아닐까.


 

 
 
 
 
 
어줍잖은 소설론 - 소설은 분재같은 거 아닐까.

소설을 보면 애초 영감처럼 떠올랐을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아무리 참신하고 흡인력 강하다고 해도, 그 줄기에서부터

뻗어나가는 가지들이 영 실하지 못하거나 볼품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늘 아쉬웠다. 마치 하나의 잘 다듬어진

분재처럼-그 어거지로 비틀고 구속하는 작업에 대한 반발감은 논외로 하고-개성있지만 기품있게 자리한 줄기와

그와 적절히 균형을 이루며 고른 각도로 뻗어나간 가지들의 비례와 배치에서 기인하는 미감이랄까.  그런 소설이

정말 만나기 힘든 잘 쓴 소설이 아닐까, 뭐 내가 요즘 소설을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말이다.


최대한 자연을 흉내낸 '자연스런' 분재처럼, 최대한 사회를 흉내낸 '사회스러운' 소설. 사회스럽단 말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쉽게 말하기 힘들지만 그건 확실하다. 자연을 인간의 손으로 빚는다는 거 자체가 다소 어불성설에

가까운 최고난이도의 작업이듯, 사회를 고작 몇 페이지의 글로 구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거란 사실. 아,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회'란 신문 사회면에 실릴만하다는, 그 좁은 의미로서의 '사회'가 아니라 인간 세상을 말한다.


세상을 타워 속에 집어넣다.

674층 높이에 인구 50만이 살고 있는 빈스토크(beanstalk), 그 유례없는 초고층 건물 자체가 대외적으로 주권을 승인받은

하나의 국가라는 설정에서 이야기들은 뻗어나간다. 이야..이런 참신한 발상은 대체 어떻게 잡아낸 걸까. 건물이 나라의

영토가 되고, 그 건물의 입주자가 국민, 방문객에 대한 절차가 출입국 통관절차로 바뀌게 된단 얘기다. 건물 경비원들은

이제 외적에 대해 '영토' 빈스토크를 방어하는 '합법적 국가폭력' 군대가 되는 거고, 아마 건물주는 빈스토크의 국왕이

되는 셈인가, 음..일종의 도시국가라고 볼 수도 있겠으니 시장이란 게 맞겠군.


아마 이런 식으로 배명훈의 머릿속에서 '국가'를 '타워'로 대치하는 작업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작가의 상상력이

어떻게 발현되었을지, 어떻게 가지를 뻗고 세세한 디테일을 장악하기 시작했을지 상상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게다가, 초고층 빌딩을 그 영토로 가진 국가라는 건 무척이나 특이하다. 어느 나라 영토가 시루떡처럼 층층이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던가 말이다. 그건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엄청나게 취약하기도 할 거다. 이미 우리가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리고 먼 옛날 바벨탑이 신의 불같은 분노로 무너져내렸던 것처럼. 


'빈스토크' 절개면의 에피소드들

이 소설 타워의 미덕이랄까, 구성상의 장점은 '연작'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리하게도 배명훈 그가 창조해낸

'빈스토크'의 요모조모를 뜯어보며 재기발랄하고도 함축력짙은 사건들을 묘사하기엔, 긴 호흡의 소설이 아니라 단편

에피소드들이 연이어지는 연작소설의 형태가 맞춤하다는 것을 알았던 게다. 그렇게 나열된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빈스토크라는 고층빌딩 내 구현된 사회의 면면을 날카롭고 재치있게 버혀내어 준다. 어쩔 수 없이 작금의 시대와

견줘보게 되는 건 작가가 작정하고 블랙유머를 날린 걸까, 아니면 내 편향 때문일까.


좀더 자세한 스토리..라기 보다는 스토리 각기에 대한 이미지 스케치가 궁금하다면 열어 보기~*




바벨탑은 이미 지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한국 사회를 되짚어 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의 말을 빌자면 생식능력 없는 남자가 되었다가
 
심지어 여자가 되고 말 욕을 부르는 자, "곧 성행위를 할 사람"들이나 "생식기같은 자"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굳이 빈스토크를 지어내어 그 안의 인간군상을 보여준 작가의 의도는, 어쩌면 그 안에서 평행우주처럼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낯설게 하고,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바벨탑'을 어쩔 건지

묻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나라 전부는 나도 잘 모르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 내가 사는 동네만큼은 바벨탑이 아니"라고.



타워 - 10점
배명훈 지음/오멜라스(웅진)




노무현 전대통령의 영결식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장면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아이처럼
 
울던 모습이었다. 그가 영결식 때 추도사를 하려다가 현 정부가 제지하여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최근 그가

'독재'라는 단어를 동원하며 현 정부와 각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개인적으로는 노무현보다 김대중을 더 좋아한다. 그의 노회한 정치력, 그리고 어쨌든 그는 한국 정치판에서
말그대로
 
죽지 않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 나름의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에 대한 신념을 견지하면서 말이다.

'김대중'이라는 정치인, 사람을 구성하는 코어, 핵심가치를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견의 차이를 떠나.


아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홈페이지인 "사람사는 세상"(http://www.knowhow.or.kr/)에 오늘 오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뒤늦은 추도사.


"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억울한 일을 당해 몸부림치다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나도 억울합니다. 목숨 바쳐온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억울하고 분한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꿈같습니다, 정말 꿈같습니다."


 이토록 담백하고 꾸밈없는 표현이라니. 영결식 때
보였던 그의 울음이 자꾸 오버랩된다.


"우리가 아무리 500만이 나와서 조문했다고 하더라도 노무현 대통령의 그 한과 억울함을 푸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분의 죽음은 허망한 것으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                       *                       *

하지 못한 추도사를 대신하여


“김대중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 당일 끝내 못한 추도사. 김 대통령님께서 그 추도사를 대신한 추모의 말씀을 3일 보내오셨습니다. 동교동에서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의 신간 추천사 형식을 통해 보내주신 추모의 메시지를 공개합니다.” <관리자 주>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동교동에서 독일 〈슈피겔〉 지와 인터뷰를 하다가 비서관으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왜 그때 내가 그런 표현을 했는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온 과거를 돌아볼 때 그렇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노 전 대통령 생전에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에 처해지는 상황을 보고 아무래도 우리 둘이 나서야 할 때가 머지않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돌아가셨으니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상주 측으로부터 영결식 추도사 부탁을 받고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지 못했습니다. 정부 측에서 반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어이없기도 하고 그런 일을 하는 정부에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한 추도사는 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영결식장에서 하지 못한 마음속의 그 추도사를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의 추천사로 대신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노무현 당신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서 민주주의 위기, 경제 위기, 남북관계 위기, 이 3대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힘이 되어주십시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을 살았던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같이 유쾌하고 용감하고, 그리고 탁월한 식견을 가진 그런 지도자와 한 시대를 같이했던 것을 나는 아주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저승이 있는지 모르지만 저승이 있다면 거기서도 기어이 만나서 지금까지 하려다 못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동안 부디 저승에서라도 끝까지 국민을 지켜주십시오. 위기에 처해 있는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주십시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우리 국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조문객이 500만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그것이 한과 한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노무현의 한과 국민의 한이 결합한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억울한 일을 당해 몸부림치다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나도 억울합니다. 목숨 바쳐온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억울하고 분한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만든 민주주의입니까. 1980년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1987년 6월항쟁을 전후해서 박종철 학생, 이한열 학생을 포함해 민주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그런데 독재정권, 보수정권 50여 년 끝에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10년 동안 이제 좀 민주주의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경제가 양극화로 되돌아가고, 남북관계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꿈같습니다, 정말 꿈같습니다.

이 책에서 노 전 대통령은 “각성하는 시민이어야 산다.”, “시민이 각성해서 시민이 지도자가 될 정도로 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말해온 ‘행동하는 양심’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이 됩시다. 그래야 이깁니다. 그래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그 길은 꼭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행동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바르게 투표하면 됩니다. 인터넷 같은데 글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여론조사에서 민주주의 안 하는 정부는 지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위기일 때, 그것조차 못한다면 좋은 나라와 민주국가 이런 말을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노무현 대통령은 타고난, 탁월한 정치적 식견과 감각을 가진 우리 헌정사에 보기 드문 지도자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을 사랑했고, 가까이했고, 벗이 되고자 했던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항상 서민 대중의 삶을 걱정하고 그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유일하게 자신의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당한 조사 과정에서 갖은 치욕과 억울함과 거짓과 명예훼손을 당해 결국 국민 앞에 목숨을 던지는 것 외에는 자기의 결백을 밝힐 길이 없다고 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고 500만이 통곡했습니다.

그분은 보기 드문 쾌남아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가졌던 것을 영원히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라던 사람답게 사는 세상, 남북이 화해하고 평화적으로 사는 세상, 이런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뜻을 계속 이어가서 끝내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서거했다고 해도 서거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500만이 나와서 조문했다고 하더라도 노무현 대통령의 그 한과 억울함을 푸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분의 죽음은 허망한 것으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노무현 대통령을 역사에 영원히 살리도록 노력합시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비록 몸은 건강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허무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연부역강(年富力强)하니 하루도 쉬지 말고 뒷일을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나와 노무현 대통령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평화를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후배 여러분들이 이어서 잘해주길 부탁합니다.

나는 이 책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가 그런 후배 여러분의 정진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무현 전 대통령이 인터뷰하고 오연호 대표 기자가 쓴 이 책을 보니 정치인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전후에 국민의 정부와 김대중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책으로 참여정부와 노무현을 공부하십시오.

그래서 민주정부 10년의 가치를 재발견해 계승하고, 극복할 것이 있다면 그 대안을 만들어내서, 결국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고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가길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3개월, 3회에 걸친 독자위원회 활동을 마쳤다. 시사인의 독자층을 반영하는 듯 6명의 독자위원이 모두 20대였고 그 중

직장인은 내가 유일했다. 빠른 생일 덕에 20대에 꼈으니, 그냥 세대 다양화를 위해 30대로 치고 좀더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겠노라 다짐했는데 막상 돌이켜 보니 '직장인으로서', '30대로서', 꺼냈던 지적이나 요청은 딱히 없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직장인' 혹은 '30대(준)'라는 자각이 없는 탓이다. 게다가 직장인의 정체성, 30대의 정체성을 내걸고 짚을 수
 
있는 부분이란 건...뭘까. 재테크 관련 정보를 달라고? 결혼준비를 위한 정보? 직장상사와의 관계 노하우? 진지하게라면

직장에서 제공하는 삶의 질 문제라거나 안정성, 그와 이어지는 비정규직 법안이나 노조탄압 문제..파업이나 투쟁에 대한

적대적인 언론 프레임에 대한 문제제기..근데 이미 그런 것들은 시사인이 민감하게 다루고 있는 편이니, 딱히 더

할말이 없었던 거 같기도 하다.


Dynamic Korea. 워낙 껀수가 많은 나라인 탓에, 게다가 위정자가 귀머거리인 탓에, 해결은 커녕 최소한의 봉합조차

이뤄지지 않고 시간에 쓸려가는 사건들이 부지기수다. 용산에서 피어오른 화마가 잡아먹은 사람이 6명. 언론들이

만들어놓은 '냄비근성'의 사람들은 새로운 자극과 더 강한 충격을 좇아 달리는 중이고, 이제 전대통령의 죽음조차

겪은 사람들이 대체 무엇에 충격받고 분노할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 


사실 끊임없이 New를 찾아 달려야 하는 언론에게 새로 밝혀야 될 것이 아니라 이제 그걸 토대로 추궁하고 책임을
 
물어야 하는 책임까지 지우는 건 과하다. 이른바 '기자정신'이 얼마나 비장하고 끈덕진지는 몰라도, 그건 'New'를

찾아내기 위한 거지, 그 뉴스로 촉발될 수 있는 후폭풍까지 끌어내기 위함은 아닐 거다. 그래서 더 답답한지도.

용산참사의 경우 합법/비법/불법을 동원해 면죄부를 쥐어주긴 했지만 '죄'가 어느 쪽에 있는지는 더이상 New가

아닐만큼 판단이 섰다고 보는데. 노 전대통령의 경우도 누가 사과를 해야하는진 더이상 New가 아니며, 사람들이

그걸 받아내지 못하는데 언론에서 계속 '사과해라사과해라'할 수도 없는 거고. 계속 뉴스를 발굴하는 건 별개지만.


* 용산참사 직후에 썼던 난쏘공 리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촌스러운' 용산참사와의 부끄러운 데자뷰

진보신당이 왜 민노당 뒤에 타고 있는지에 대한 농섞인 질문을 하게 만들었던 표지. 사실 원내 의석수나 지지율 등으로

따지면 당연한 걸 텐데..뭐 그랬다. 그리고 '초식남'에 대한 여성 패널들의 빈정거림만 가득했던 기사에 대한 불만을 잔뜩

털어놨던 자리. 초식남에 대한 빈정거림은 마초와 남성 일반으로 번져갔고, '자아'가 최대 수출품목이라는 네팔에 다녀온

남자는 우스워지고 까페에 앉아 책을 본다거나 와인을 즐기는 남자는 자뻑 나르시즘에 쩔어버린 속물로 취급당했다.

여러번 뜨끔뜨끔, 했던 탓도 있지만 그건 아니다. 더구나 '된장녀'니 '신상녀'니 여성들에 대한 그런 식의 딱지붙임이

불쾌해서 네넘들도 한번 당해봐라, 이런 맘으로 기획된 거라면 더욱 아니다.

그 이전까지는 개성공단을 살리자는 측과 죽이자는 측으로 단순했던 것 같다. 북한에서 개성공단 내 임금과 임대비용등을
 
몇 배로 올려달라, 중국을 다소 상회하는 수준으로 달라고 했더니 바로 살리자는 측이 쪼개졌다. 한국경제를 살리려고

개성공단을 이용하자는 건데 이럴거면 죽이자, 라는 것과 임금을 올려주는 것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라며 살리자는

입장으로 대별되지 않을까 싶다.


개성공단의 가격경쟁력이 천년만년 갈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저임금만을 경쟁력으로 삼아 버틸 생각이었나. 통일되고

나서도 북한의 저임금을 발려먹을 생각이었을 거다. 기업들이 앞장선 남북간 민간교류란 게 그렇게 흘러간다.


*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의 속내.  '개성공단 춤사건'을 기억하시는지. - 봉동관, 그리고 입경.(4/4)

* 혹시 이 글이 시사IN 제2기 독자위원회 위원분들의 눈에 띈다면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ㅎㅎ

으레 시사인 독자위원회가 있던 날은 집안에 일이 있거나, 몸이 안 좋았다. 한 시간정도 일찍 조퇴해서 독립문역까지

오면서 한달 네차례 나온 주간지들을 하나씩 되짚어보며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을 챙겼다.

독립문. 구한말의 근대화 노력을 상징하는 건물이라지만, 파리의 개선문을 따라 지었던 만큼의 한계도 보인다.

당시의 '독립'이란 의미는 꼭 중국에 대해 굴욕적인 종속적 지위를 벗어나겠다는 비분강개의 의미만 담겨있던 건

아니었다. 서구적/근대적 독립국가간의 평등한 네트워크라는 패러다임이 사대교린, 단일중심의 위계를 상정했던

아시아의 기존 국제질서 패러다임과 부딪히는 상황에서 '독립'은 이른바 중화질서를 벗어나 서구제국들의 근대질서로
 
편입되겠다는 의지였을 거다. 바뀐 패러다임을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새로운 질서에 대한 설렘 혹은 희망..?


그전까지는 중화 질서 내에서 중국 다음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부심의 원천이 되기도 했겠지만, 이젠

중국의 허약함이 간파당하면서 그런 위계 자체가 비정상적이고 수치스럽게 느껴지게 된 시점이었을 거다.

평등하고 독립적인 국가들 사이의 당당한 액터가 되겠다는 순진한 믿음. 그렇지만 실제로는 '근대화'의 미명 아래

'파리', '워싱턴', '뉴욕'의 그것들을 최정점으로 하는 층층시하 위계지어진 공간에서 '성장 이데올로기' 한길로

천박하게 달려오고 있다. 결국 파리 개선문의 짝퉁이래도 별반 할 말은 없는 독립문, 그리고 그 이래의 역사.

그나마 조금은 한국적이고 독자적인 뭔가가 나타난다면, 온통 서울로만 밀집해 버린 국가기능, 그리고 비정상적으로

확대되고만 있는 비대한 아파트촌. 뒤에 곧추선 고층 아파트들이 차라리 지금 한국의 '독립'을 더 효과적으로 상징하는

건 아닐까. 삶의 질이고, 평등이고 도외시한 채 정말 '독립적'인 궤적을 밟으며 지금의 부를 일궈왔다는 점에서 말이다.

시사인 편집국이 소재한 건물로 가는 길, 맞닥뜨리는 풍경들이 왠지 때이른 향수에 젖게 만든다. 아니, 아직 내가 뭔가를

보며 향수에 젖을 나이는 아닌데, 희한하게도 어릴 적 동네에 있던 슈퍼나 문방구의 그 느낌이 그대로다.

서울이란 도시, 너무 쉽게 화장이 지워지는 거 아닌가 싶다. 조금만 도심에서 멀어져도 한적하고 '촌스러운'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했다 싶은데, 심지어는 도심 한복판에도 곳곳에 이런 남루한 가게들을 품고 있으니 말이다.

맞은 편에 있던 칠전문 페인트점. 간판이 좀 신기하다. 칠 대신 페인트. 페인트칠을 다시 해주겠다는 건가 아니면

칠하지 말고 가만있으면 페인트를 해주겠다는 건가. 갸웃갸웃대다가 가게로 들여놓으려는 수작인가.ㅋ

위풍당당한(...!) 시사인 편집국 건물. 독자위원 중 한 명은 저 커다란 '임대' 현수막이 맘에 걸린다고 했다.

경향이나 한겨레나 '88만원 세대'보다 못한 월급을 받고 있다는 흉흉한 시절인지라, 맘에 걸릴 만 하다.

그리고 아담한 건물 6층에 자리한 시사IN. 두번째 모임서부터는 경비아저씨가 알아봐주시곤 어디가냐고 묻지도

않으셨는데, 좀 익숙해지니 다시 올일이 없다는 게 아쉽다. 그치만 주간지를 꼼꼼히 읽어가며 뭘 지적해야 할까

눈빨갛게 정독하는 건 생각보다 많이 피로한 일이어서, 은근히 홀가분하기도 한 느낌.

독자위원회가 열리는 곳은 회의실이자 도서자료실같은 곳. 우리가 리뷰를 진행하던 사이에 어떤 기자분이 오셔서는

지난 시사인 표지를 유리에 이어붙이고 가셨다. A4 한장만한 사이즈를 매주 한장씩, 어느덧 넓은 유리벽 한면이 반쯤

차가고 있다.

잡지 표지를 장식했던 인형들, '끊고 살아보기'라는 기획 기사가 있는데 그간 휴대폰끊기, 밀가루끊기, 엘레베이터끊기,

담배끊기 등 많은 소재들이 있었다. 예컨대 "계단에 주저앉아 담배와 이별하다" 같은 기사들.


내가 줄기차게 요청했던 것 중 하나가 'MB사진끊기'였는데...안 된단다. 난 정말 소화불량에 홧병에 치질까지

생겨버릴 태세인데..야박한 사람들.

쪽방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가 올랐을 때 쓰였던 작품. (관련기사 : 21세기형 쪽방에 저당잡힌 청춘)

이건 뭐더라..뭐 강만수가 보이고 돈을 돛대삼아 수수깡 뗏목을 띄운 걸로 보아 아슬아슬한 느낌 만땅이다.

편집국 한쪽 벽면을 채운 셀레브리티들의 인형들. 눈에 확 띄었던 건, 왜 하필 이명박과 이건희의 머리에 빨간 띠를

둘렀을까. 단결투쟁, 이라 적힌 새빨간 머리띠를 두른 이명박과 이건희라니. 자신들에 반대해 연대하라는 의미인가.ㅋ

표지에 이렇게 이뿌게 들어가고 난 인형은 편집국을 장식하는 장식품으로 남는 것 같다. 그대로 잘 보관해서 아크릴 상자

속에 넣는다던가 해서-작가의 사인과 '품질보증서'를 첨부하여-나중에 바자회같은 데 내놓아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 시사IN 제1기 독자위원회 활동기.

* 시사IN 2차 독자위원회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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