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과 신해철이 댄스가 없는 댄스음악을 만들어보겠다, 고 의기투합하여 만든 앨범이었던가. 나중에 SES가

리메이크했던 '달리기'란 노래가 있었고, '질주'와 '기도'란 노래도 꽤나 인상적인 앨범이었지만 무엇보다

강렬했던 노래는 역시 이 노래였다.


윤상과 김광민, 이병우가 함께 했던 'Play with us' 콘서트의 잔향이 여전히 짙게 남아있는 무더운 여름날

생각난 김에, '사랑은 천개의 날을 가진 날카로운 단검이 되어 너의 마음을 베고 찌르고 또 찌르고, 자 이제

날 저주하겠니'란 가사가 완벽하게 아름다웠던. 96년 노댄스의 그 노래. Moon Madness.




너의 눈빛 너의 몸짓
너는 내게 항상 친절해
너를 만지고 너를 느끼고
너를 구겨버리고 싶어

걷잡을 수 없는 소유욕
채워지지 않는 지배욕
암세포처럼 지긋 지긋하게
내 몸을 좀 먹어드는 외로움

나의 인격의 뒷면을
이해할 수 없는 어둠을
거길 봐줘 만져줘
치료할 수 없는 상처를

내 결점을 추악함을
나를 제발 혼자 두지마
아주 깊은 나락 속으로
떨어져가고 있는 것 같아

나의 마음은 구르는 공 위에 있는 거 같아
때론 살아있는 것 자체가 괴롭지
날 봐, 이렇게 천천히 부서지고 있는데
아주 천천히

끝없이 쉴곳을 찾아
헤매도는 내 영혼
난 그저 마음의 평화를
원했을 뿐인데

사랑은 천개의 날을 가진
날카로운 단검이 되어
너의 마음을 베고
찌르고 또 찌르고

자 이제 날 저주 하겠니
술기운에 뱉은 단어들
장난처럼 스치는 약속들

나이가 들수록
예전 같지 않은 행동들
돌고 도는 기억속에
선명히 낙인 찍힌
윤리 도덕 규범 교육

그것들이 날 오려내고
색칠해서 맘대로
이상한걸 만들어 냈어

내 가죽을 벗겨줘
내 뱃살을 갈라줘
내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나도 궁금해

나의 마음은 구르는 공 위에 있는 거 같아
때론 살아있는 것 자체가 괴롭지
날 봐, 이렇게 천천히 부서지고 있는데
아주 천천히

끝없이 쉴곳을 찾아
헤매도는 내 영혼
난 그저 마음의 평화를
원했을 뿐인데

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칠 때
기억나지 않는 지난밤
내 마음을 언제나
감싸고 있는 이 어둠은
아직 날 놔주지 않고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김광민, 이병우, 그리고 윤상의 "PLAY WITH US', 6시부터 시작한 공연이니

한 두어시간 하고서 저녁먹음 되겠다 생각했으면 배고파 죽을 뻔 했을 거다. 누군가 콘서트가 마치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이제 배고픔도 못 느끼고 배가 마비된 거 같아'라던 대사를 나 역시도 읊었을 테니.

인터미션 포함, 앵콜곡 포함해서 장장 세시간 반동안 쉼없었던 그들의 연주곡, 윤상의 목소리,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초대가수 아이유의 노래까지.


윤상이란 가수는, 그러고 보면 90년대 중학교를 다니며 꽤나 좋아라했던 가수. 신해철과 결성했던

노댄스라는 '댄스음악'도 참 좋았었는데, 그 이후로 한동안 안 보인다 싶더니 7년동안이나 유학을

다녀왔다가 작년부터 이 콘서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 '학교가는 길'을 작곡했고 일찌기

해외에서부터 인정받은 국내 최고의 피아니스트 김광민, 국내 유일의 멀티 기타 플레이어이자

영화음악의 거장 이병우와 함께 한 무대는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하나 보태자면, 초대가수 아이유. 윤상의 '재회'와 '나만 몰랐던 이야기'를 만만치 않은 실력으로

노래한 그녀는 마지막으로 '좋은날'을 불렀다. '아이쿠'니 '하나둘'이니 '삼단고음'이니 따위의

아이돌스러운 악세사리를 제거한 '좋은날'을 부르는 그녀가 굉장히 낯설고 조금은 어색해 보였던 건

아이유 그녀가 반짝하는 아이돌 스타로 소모되기보다 이제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의지랄까,

십년후 이십년후에도 무대를 지키겠다는 열정이 느껴졌기 때문일 거다. 이제 그녀는 자신을 아이돌의

대세로 굳혀버린 그 노래 '좋은날'로부터 슬슬 떠날 준비를 하는 거 같다. 기대기대~♡

 


그리고, 기억을 되살려 콘서트에서 연주되고 불렸던 노래들을 유투브에서 이것저것 긁어왔다.

아직 발표하지 않은 신곡도 꽤나 많이 연주해주었지만 그런 건 어쩔 수 없으니 제외하고, 기억에 남는

노래들을 대략적인 공연 순서에 따라 스크랩.
























 

한국전쟁, 혹은 분단 상황을 다룬 한국영화들을 보면서 어느순간 굉장히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나왔을 때, 실미도가 나왔을 때, 그리고 그 전의 쉬리가 나왔을 때의 참신함이나

과감함의 동력은 떨어지고, 그냥 스펙터클한 볼거리로서 전쟁을 소비하거나 휴머니즘이 부각된 드라마의

배경으로 소비되는 게 관습화되어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어쩌면 '퇴보'라고 불러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불을 뿜던 뜨거운 총구는 차갑게 식었지만 여전히

차가운 전쟁이 지속중인 한반도에서, 반세기가 넘는 분단상황에 의지한 양측의 지배권력이 적대적인

공생관계를 이어가며 사회와 경제와 문화를 일그러뜨리고 있는 한반도에서, 그 단초였던 '한국전쟁'이

고작 블록버스터용의 스펙터클이라거나 신파를 북돋우는 비극적 배경으로만 내리 읽히는 게 정상인가.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전쟁 이전의 남과 북의 정치적 상황은 어땠는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좀더

깊고 끈질긴 시각을 보여주는 영화가 나올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거다. 어린애들이 뉴스에서 나온

정치인들에게 "아저씨들은 왜 맨날 싸워요? 싸우지 말아요" 하는 수준으로 한국전쟁을 다루고

남과 북을 다루는 영화도 필요하지만, 이미 그런 '안전하고 손쉬운' 영화는 넘 많이 나왔다.


사실은, 내가 바라는 한국전쟁에 대한 영화는 그런 수준이다. 좀더 논쟁적이고 좀더 위험할 수 있는

영화. 여기서 위험하다는 건, 애초 '쉬리'가 나왔을 때 남북한 관계의 변화를 반영했거나 이끌었다고

평가되었듯 그렇게 영화의 현실 인식과 판단이 한국의 기존 시각을 뒤흔들 수 있는 그런 걸 말한다.

막말로, 한국전쟁이 남측의 도발로 일어났고 미국의 전쟁범죄가 빨갱이의 그것보다 심했다, 는 식의

수정주의적 시각에 기댄 영화도 한번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옳던 그르던, 지평의 문제 아닐까.


그렇지만 요새 같은 세상에 그런 건 너무 과도한 희망인 거다. 긴장완화의 10년 세월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언제라도 국지적 도발이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위태한 상황에 남북 모두 처해 있다.

마치 '고지전'에서 휴전 협정 조인 후 발효되기까지의 12시간 같은 상황 아닌가. 사실은 휴전으로

끝나는 것도 아닌데 12시간동안 어떻게든 상대를 밟고 올라서려 지옥도를 연출한 거나, 사실은 북의

숨통이 그리 쉽게 끊길 것도 아닌데 어떻게든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치킨게임중인 지금이나.


다시금 영화는, 한국전쟁을 해석했던 여태까지의 스펙트럼, 상식과 싸우고 변화된 현실을 치열하게

반영해냈던 그 '고지'를 지키고자 결사적이다. 붉은 깃발 휘두르며 빨갱이들 모두 쓸어내자, 라는 식의

반공 일색의 영화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우리가 이만큼 당했으니 어디 한번 본때를 보여주자, 라는

식의 호전적인 전쟁 독려 영화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어쩌면 장훈 감독은 여태 한국영화가 한국전쟁을

다뤄왔던 그 현실인식의 지평, 허용된 한계치에서 더이상 후퇴할 수 없다며 고지에 깃발을 꼽은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얘기는 딱히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남북의 접경에서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양측

사람들이 겪는 거대한 분단체제와 가냘픈 휴머니즘 간의 갈등을 그렸던 '공동경비구역 JSA', 그리고

서로 다른 진영에 선 형제를 발견한 순간 기필코 죽여야할 불구대천의 적으로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무언가로 바뀌는 상황을 그렸던 '태극기 휘날리며'가 확보했던 나름의 성취를 잘 버무린 수준이지

싶어서다. 비인간적인 전쟁에 대한 혐오, 국가권력에 대한 무기력함 등, 이미 여러번 밟았던 고지다.


언제쯤, 그들은 야전지휘관에 겨눴던 총부리를 남한의, 북한의 정치권력 심장부에 겨눌 수 있을까.

그래서 언제쯤, 우리나라에서 한국전쟁을 다루는 영화와 예술의 시각과 스펙트럼이 우측 끝에서부터

좌측 끝으로까지 다양해질 수 있을까. 그런 게 경제만 비대해진 '국격'에 맞는 수준으로 고양되는

문화의 힘 그자체일테고, 반공이데올로기를 넘어 자유로이 성찰하기 시작했다는 표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때쯤이면 전쟁을 다룬 영화 앞에 '휴먼'이니 '대작'이니 따위 상투어가 떨어지지 않을까.


언제쯤, 이 고지를 넘어설 수 있을까.



KBS를 두고 김비서니, 정권의 나팔수니 말이 많지만 결국 최근 도청의혹 사건과 관련해 2000년 이후

입사자들이 실명으로 연서를 작성하며 해명을 촉구하고 나섰단다. 아무리 그래도 젊은 직원들은

여전히 강건하구나, 싶기도 하고 나라면 어땠을까 찔끔하기도 한다.


입사한지 10년이 채 안 된, 적게는 입사 1,2년차일 그들이 나서서 회사의 최고경영층에 집단으로

반발하며 할 말을 하는 상황이란 건, 굉장히 큰 용기가 필요했을 거다. 인사상 불이익은 물론이고

집단해고사태가 또 오지 말란 법도 없는 너절한 상황이고 보면 그들이 더욱 돋보이는 거다.



문제는, 이런 이들의 행동이 제대로 보도도 되지 않고 묻혀버린다고 할 때. 그렇게 각개격파되고


숨통이 조여져 KBS가 정권의 나팔수로 고착되는 게 최악의 상황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응원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게 그 젊고 싱싱한 분노와 의지를 꽃피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                                                   *


박대기 기자등 "영혼없는…굴욕 못참겠다" 폭발(미디어오늘)


2000년~입사 KBS 기자 166명 "사장·본부장 모든걸 걸고 도청의혹 답하라"

[0호] 2011년 07월 21일 (목) 조현호 기자 chh@mediatoday.co.kr


 

민주당 당대표실 도청 의혹 사건에 자사 기자가 당사자로 지목되고 있는 KBS의 젊은 기자들이 집단 연서명으로 작금의 굴욕적인 현실에 개탄하며 김인규 사장과 고대영 보도본부장 등 KBS 수뇌부를 상대로 명쾌한 해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강규엽, 고진현, 김경진, 김명주, 류석민, 박대기, 박효인, 범기영, 유동엽, 이하늬, 조정인, 허솔지 등 2000년 이후 KBS에 입사한 기자 256명 가운데 166명은 21일 오후 각각의 실명을 밝힌 성명을 내어 민주당 대표실 도청 의심을 받고 있는 현실에 참담함을 쏟아냈다. 이들은 “도청 의혹 사건이 터져나온 지 벌써 한 달이 돼 가는 동안 KBS에는 긴 침묵만이 흘렀다”며 “부끄럽고 참담하기 짝이 없다”고 탄식했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방식의 도청은 없었다’, ‘제3자의 도움이 있었지만 취재원 보호를 위해 밝히지 않겠다’는 KBS의 해명에 대해 이들은 “참으로 옹색함을 넘어 어처구니 없을 정도”라며 “취재원의 말 한마디, 한마디의 의미를 읽어내는 훈련을 받은 우리가 봤을 때 이건 정말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이런 해명이 되레 불신만 키운다는 것.

이들은 그간 취재현장에서 조롱과 비아냥을 받아야 했던 경험을 털어놨다. 이들은 “KBS에 대한 여론은 그야말로 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다”며 “공영방송 KBS는 처절하게 무너졌고, 피해는 고스란히 일선 취재 기자들의 몫”이라고 지적했다.

당장 취재현장에서는 “KBS 너희들이 그렇지 뭐, 영혼 없는 기자들아 딴 데 가서 취재하라”는 조롱 뿐 아니라, 심지어 취재현장에서 쫓겨나는 경우도 있다고 이들은 전했다.


지난 2008년 9월3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 2층 민주광장에서 KBS 입사 1~9년차 기자들이 방송장악 규탄과
이병순 사장 반대 투쟁 결의대회를 개최했던 모습. ⓒ프레시안 자료사진


사정이 이런데도 ‘경찰 수사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는 KBS에 대해 이들은 “첨예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팩트 확인 없이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 결과를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는 후배가 있을때, 제대로 된 선배라면 ‘네가 기자냐? 팩트 확인해!’라며 일갈을 했을 것이며, 그게 정도(正道)”라고 비판했다.

또한 이들은 “사회의 부조리와 비리를 파헤쳐 고발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인 언론사가 정작 자신의 문제는 수사기관의 입에만 의존하겠다는 굴욕적인 작태를 지금 KBS 수뇌부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다”며 “소인배들이나 할 짓”이라고 성토했다.

이들은 “더 이상 이런 불편한 침묵과 굴욕을 참지 못하겠다”며 김인규 사장과 기자 조직을 책임지는 고대영 보도본부장에게 다음의 질문에 떳떳하게 답하라고 촉구했다.

“KBS 구성원 중 민주당 대표실을 도청한 사람이 있는가?”
“KBS 구성원 중 민주당 대표실 회의녹취 내용을 한나라당에 건네준 사람이 있는가?”
“민주당 대표실 회의 녹취록 작성에 결정적 도움을 준 제3자가 있다면 누구인지 명백하게 밝혀라”

이들은 이 질문에 대해 없으면 ‘없다’, 있으면 ‘조직의 수장으로서 즉시 책임지겠다’는 분명한 답변을 원한다며 이 답변에 김인규 사장과 고대영 보도본부장은 직을 포함한 모든 것을 걸라, 그래야만 KBS가 살 수 있다고 촉구했다.

다음은 2000년 이후 입사한 기자 166명이 발표한 성명 전문이다.


<김인규 사장-고대영 보도본부장, 모든 것을 걸어라!>


민주당 대표실 도청 의혹 사건이 터져나온 지 벌써 한 달이 돼 간다. 그동안 KBS에는 긴 침묵만이 흘렀다. 부끄럽고 참담하기 짝이 없다. 김인규 사장을 비롯한 KBS 수뇌부 어느 누구도 명쾌한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도청 의혹 사건에 대해 지금까지 KBS가 내 놓은 해명은 참으로 옹색함을 넘어 어처구니 없을 정도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방식의 도청은 없었다” “제3자의 도움이 있었음을 부득 불 확인하지만 취재원 보호를 위해 밝히지는 않겠다” 또한 애매모호한 해명의 주체 역시 경영진은 보도본부로, 보도본부는 정치외교부로 떠넘기고 있다. 취재원의 말 한마디, 한마디의 의미를 읽어내는 훈련을 받은 우리가 봤을 때 이건 정말 말장난에 불과하다. 정녕 KBS 수뇌부는 세상 속 여론을 모른단 말인가? 이런 해명으론 의혹 해소는커녕 불신만 키울 뿐이다. 언제까지 ‘언론자유나 취재원 보호’ 운운하며 사무실 뒤에 숨어 있을 셈인가?

지금 KBS에 대한 여론은 그야말로 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다. 한달 가까운 침묵과 애매모호한 해명으로 일관하는 사이, 공영방송 KBS는 처절하게 무너졌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선 취재 기자들의 몫이다. 당장 취재현장에서 “KBS 너희들이 그렇지 뭐, 영혼 없는 기자들아 딴 데 가서 취재하라” 이런 식의 조롱과 비아냥이 들려오고 있다. 심지어 취재현장에서 쫓겨나는 경우도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회사는 경찰 수사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입장만을 되풀이 하고 있다. 만약 첨예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팩트 확인 없이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 결과를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는 후배가 있다면, 제대로 된 선배라면 “네가 기자냐? 팩트 확인해!”라며 일갈을 했을 것이다. 그게 정도(正道)다.

더구나 사회의 부조리와 비리를 파헤쳐 고발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인 언론사가 정작 자신의 문제는 수사기관의 입에만 의존하겠다는 굴욕적인 작태를 지금 KBS 수뇌부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다. 소인배들이나 할 짓이다.

우리 기자들은 더 이상 이런 불편한 침묵과 굴욕을 참지 못하겠다. 김인규 사장, 그리고 KBS 기자 조직을 책임지는 고대영 보도본부장은 자신들의 직책을 걸고 다음 물음에 떳떳이 답하기를 요구한다.

1. KBS 구성원 중 민주당 대표실을 도청한 사람이 있는가?
2. KBS 구성원 중 민주당 대표실 회의녹취 내용을 한나라당에 건네준 사람이 있는가?
3. 또 민주당 대표실 회의 녹취록 작성에 결정적 도움을 준 제3자가 있다면 누구인지 명백하게 밝혀라.

우리 기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없으면 “없다”, 있으면 “조직의 수장으로서 즉시 책임지겠다”라는 분명한 답변을 원한다. 다시 한번 요구한다. 이 3가지 답변에 김인규 사장과 고대영 보도본부장은 직을 포함한 모든 것을 걸어라! 그래야만 KBS가 살 수 있다.

2011년 7월 21일 2000년 이후 KBS 입사 기자들 (가나다순)

강규엽, 강수헌, 강재훈, 강정훈, 고순정, 고은희, 고진현, 공웅조, 곽선정, 구경하, 국현호, 권태일, 기현정, 김가림, 김경래, 김경진, 김기중, 김기현, 김나나, 김대원, 김도영, 김동욱, 김명주, 김문영, 김민경, 김민아, 김민철, 김상민, 김석, 김선영, 김성주, 김성현, 김승조, 김시원, 김연주, 김영은, 김영인, 김용덕, 김웅, 김재노, 김정은, 김종수, 김준범, 김지선, 김진화, 김진희, 김태석, 김태현, 김해정, 김현태, 노윤정, 류란, 류석민, 류성호, 박경호, 박대기, 박미영, 박상현, 박상훈, 박선우, 박수현, 박예원, 박장훈, 박중석, 박현, 박효인, 박희봉, 백미선, 범기영, 변성준, 변진석, 서재희, 손은혜, 송명훈, 송명희, 송민석, 송수진, 송현준, 송형국, 신봉승, 신지원, 심각현, 심인보, 안다영, 양민효, 양성모, 엄기숙, 연봉석, 오광택, 오수호, 우동윤, 유동엽, 유승용, 유용두, 유지향, 윤나경, 윤영란, 윤지연, 윤진, 은준수, 이경진, 이광열, 이만영, 이소정, 이수정, 이수진, 이승준, 이승준, 이이슬, 이재교, 이재석, 이재섭, 이정민, 이정은, 이정화, 이종영, 이종완, 이중근, 이진석, 이진성, 이진연, 이철호, 이하늬, 이호을, 이효연, 임명규, 임재성, 임종빈, 임주영, 임태호, 임현식, 장성길, 정성호, 정수영, 정아연, 정연욱, 정영훈, 정윤섭, 정창화, 정현숙, 정홍규, 조경모, 조승연, 조정인, 조지현, 조태흠, 지형철, 진정은, 차정인, 천춘환, 최경원, 최광호, 최대수, 최만용, 최세진, 최지영, 최형원, 최혜진, 한규석, 한승연, 한주연, 허솔지, 홍석우, 황재락, 황현규, 황현택


 

이 평소같지 않은 포스팅은 일본에서, 더 정확히는 티비에서 소녀시대, 카라, 동방신기와 2PM을 봤다고

자랑같지 않은 자랑질을 하는 포스팅.


사실 한국의 아이돌 그룹들에 딱히 관심은 없었다. 소녀시대니 카라니, 아 그리고 아이유니 티비에서

나오면 잠깐 그녀들의 다리나 몸매를 응시하긴 하지만, 딱히 가요 프로그램을 찾아본다거나 그녀들의

이름을 번거롭게 외우려드는 따위 추가적인 노력을 들일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랬는데, 일본 여행중에 문득 티비를 켜니까 아침저녁으로 한국의 아이돌들, 연예인들이 나타나는

거다. 아침에 눈떠서 티비를 켜니깐 장근석이 나오고 저녁에 온천 마치고 티비를 켜니까 소녀시대니

카라니, 그리고 2PM이니 동방신기가 연이어 노래도 부르고 농담따먹기도 하는 식이다.

역시 '소녀시대는 다리'랄까나. 근데 이 아이들이 언제 이렇게 섹시해졌다지 싶도록 까맣고 반질거리는

의상도 멋졌거니와 무대위를 자유로이 종횡하며 그녀들 혹은 그녀들의 다리를 담아내는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도 멋졌다. 태연은 좀 사진이 안 나오긴 했지만..저 머리스타일 맘에 든다.

한국 사람들이 일본어를 쓸 때면 평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뭔가 말투도 바뀌고, 콧소리도 앵앵

들어가는 느낌이고, 게다가 약간 하이톤으로 올라간 목소리가 더욱 색감적이랄까. 그녀들, 참 열심히

일본어 공부했구나. 하긴 '외화벌이'라는 동기부여가 뚜렷하니.

동방신기가 나왔는데, 왜 두명이지 싶었다. 원래 다섯명인데 세명이 JYJ로 나갔더랬지. 뭐 그러거나

말거나 이 아이들도 참 일본어 잘 하더라는. 이번 3박4일동안 꾸역꾸역 히라가나 외우면서 심각한

두통을 겪었던 나로서는 그들의 유창한 일본어가 새삼 놀라웠다.


일본 현지 가이드분이 JYJ를 좀 비난하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나. 그랬더니 바로 한국에 있는 딸에게

누군가 그 사실을 알렸고, 따님께서는 팬까페와 기타 등등을 동원, 가이드 소속 여행사를 순식간에

초토화시켰다는 '미담'을 전해들었다. 굉장한 IT강국이고, 굉장한 '대중문화강국'이다.


그래도 정말, 다른 일본 가수들에 비해 춤도 파워풀하고 박력있었다. EXILE이니 뭐니 일본의 남성

그룹들보다 노래나 춤 면에서 좀더 멋졌지 싶다. 그러니 이번에 프랑스에서 있었던 콘서트가 그리도

대성황을 이루었달 정도로 세계적인 한국 대중문화, 혹은 아이돌계가 발전했다고들 하는 거겠지만.

그리고 2PM. 이 아이들은 또 언제 일본어를 이렇게 공부했는지. 서로 뒷통수를 퍽퍽 쳐대며 완전히

프리스타일의 진행을 하던 두 명의 진행자가 농담을 걸어도 잘 받아치고, 다른 일본인 가수의 빈약한(!)

근육에 대한 품평을 해달래도 팔근육을 꿈틀거리며 위트있게 넘어가고. 이제 니들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다른 한류 열풍에 감긴 나라에서 떼돈을 벌겠구나.

그리고 카라! 그녀들은 직접 티비 프로그램에 출연한 건 아니었고, '명곡 특집'이라는 꼭지에서 마이클

잭슨이니 하는 다른 유명한 가수들과 나란히 소개되었더랬다. 좀처럼 대중 문화나 아이돌가수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나로서도 그녀들의 미스터, 뮤직비디오만 보고 이아이들이 생계형의 딱지를 드디어

떼겠구나 싶어서 뮤비까지 포스팅했었는데, 왠지 모르게 정감가는 그녀들. 하라짜응~♡


여하간, 한국에서는 본체만체 소 닭보듯 하던 그녀들, 특히 그들. 남자놈들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없고

오히려 약간의 적대감마저 품고 있었다지만 일본에서 티비를 틀자마자 나타난 그녀들과 그들 앞에서

왠지 모를 반가움이 불끈 하더라는. 근데 왜 아이유짜응~♡은 안 나올까나.







* 19세 이하에게 유해한 정보(사진 등)가 포함되어 있다 하여 강제 비공개처리된 후, 약간의 수정과

사진 자체 검열을 통해 재발행하는 '유르겐 텔러' 사진전. 그의 전시는 19금이 아니었다.



대림미술관의 전시를 언젠가부터 빠짐없이 보고 있다. 최근만 해도 폴스미스, 디터람스, 이번에

유르겐텔러의 전시까지. 그는 무려 10년동안 마크 제이콥스의 광고사진을 찍기도 하고 각종

다큐멘터리 작업도 하는 등, 딱히 상업사진가라거나 예술사진가라는 식의 단순한 도식에

포섭되는 인물은 아닌 거다. 원래 전시를 보러가서 작품을 찍어오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그의 사진들을 보며 내가 다시 재촬영하고 싶다는 욕구가 무럭무럭 생겨버렸다. 

유르겐텔러의 이번 전시회, 'Touch Me'를 소개하는 브로슈어의 소개된 두장의 그림은

위의 마크제이콥스 광고사진과 이 문어 사진. 아마도 마크제이콥스의 상품들을 탐닉하다못해

쇼핑백 안에까지 박박 긁어들어간 빅토리아 베컴을 보여주고 싶었던 듯한 첫째 사진과

침대 위에서 여덟개의 다리를 흐느적대며 쉼없이 꼬아대는 문어를 보여주는 두번째 사진은

묘하게 겹치는 구석이 있는 거 같다. 침대 위 문어는 굉장히 섹슈얼하면서도 강렬한 느낌. 



(사진)


그의 사진들은 거침이 없다. 주저없이 드러내고 거침없이 희롱하는 느낌이다. 심지어 그는

임신한 부인의 만삭의 배 위로 자신의 성기를 드리운 채 사진을 찍는다. 그의 몸을 사진으로

담아내며 그는 스스로 포토그래퍼의 '권력'을 내려놓고 피사체로 평등해지는 건 아닐까.

 

(사진)

여성 모델이 그럴듯한 그랜드 피아노에서 연주를 하는 사이, 그는 또다시 옷을 벗고 피아노

위에 올라가 넓은 등판을 통해 피아노 소리를, 울림을 듣고 있다. 자신의 적나라한 신체를

아낌없이 보여주면서, 귀로 듣는 게 아니라 온 몸으로 듣는다는 게 어떤 건지를 보여주려는 듯.



(사진)


도슨트의 설명에 따르자면, 이 사진은 어린아이의 돌사진 같은 포즈를 요청하여 찍은 것이란다.

비슷한 포즈, 비슷한 표정이라지만 너무도 이질적이고 위화감마저 조성되는 풍경, 아마도 그는

이런 식의 불편함을 불러일으키고 좋아하는 건 아니려나. 뭔가 쿨하게 드러내고 표현에 거침없다

싶으면서도, 그의 사진은 은유와 유머가 가득하단 느낌이다.

아무래도 사진을 찍으면서 모두가 바라는 건 그런 거 아닐까. 이미 잔뜩 소모되고 익숙해져버린

풍경에서 뭔가 새로운 느낌, 낯선 시선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이런 사진인 거다.

지상에 존재할까 싶은 생명체의 모습같기도 하고, 영화 '괴물'에 나왔던 녀석의 모형같기도 하고,

그런데 알고 보면 바나나를 긴 혀로 휘감아 삼키려드는 순간의 코끼리였다는 반전.

이번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touch me', 그 제목은 사실 이 사진 어디엔가 숨어있는 그 문구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터치 미. 옷을 전부 챙겨입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팬티만 입은 한 남자가 다소

멍하고 방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다. 그리고 그의 팬티에 그려진 손모양과 간단한 문구.

묘한 광기가 떠도는 듯한 눈빛 위로 거꾸로 쓴 왕관, 길가의 가로수 나무라도 꺽은 듯 엉성하고

약해보이지만 구부정한 자세를 용케도 버텨주는 나무지팡이, 옆에 변기와 맞물려 왠지 냄새나고

더러운 오물일 거라 짐작-기대되는 거뭇거뭇한 흔적들이 묻는 그의 몸. 


(사진)


그녀의 강렬한 눈빛에 이끌렸던 시선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차츰 내려가는 순간, 또다른 눈이 하나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외설적인 느낌보다는, 활짝 열린 그곳으로부터 도리어 관찰당하는 느낌.

엄마아, 엄마아, 엉덩이가 뜨거워. 정도? 다큰 성인의 몸뚱이라지만 다 벗은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한없이 유약하고 부드럽고, 또 추워 보이는 거다. 난로를 들이대니 오히려 더

추워보이는 느낌이 더해진 걸까.

저런 생생한 표정, 맥주가 터져서 거품이 질질 흐르는 순간이다. 할아버지는 당황한 듯 입을

벌린 채 병을 쥐곤 (공교롭게도) 그의 노쇠한 성기가 있을 위치에서 두 손이 굳었고, 할머니는

그야말로 경악하며 한 손으로 그 광경을 가리려 애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림미술관 2층, 3층을 한 바퀴 돌고, 몇몇 맘에 들던 작품들 다시 한번 보고 나서 도착한 곳은

유르겐 텔러와 함께 작업했던 모델, 유명인들이 그에게 던진 질문들이 벽면 가득 적혀있던

미디어룸. 원래는 하나하나 답하려 했다고 하나, 무려 102개의 질문이라 그러지 못해 미안하단

유르겐의 쪽지가 가운데에 적혀있었지만 질문들이 전부 유르겐을 비춰주는 거울 같아서

찬찬히 읽어보는 재미가 있었다.

1층에 전시되어 있던 유르겐 텔러의 그 거대한 쇼핑백. 사람들에게 일종의 포토존 역할을 하는

저 쇼핑백 뒤에서 해보고 싶던 건 사실 물구나무를 서던가 해서 다리 두개만 번쩍 노출시키는

거였는데. 보는 눈이 많아서 참았다..랄까. 여하간, 사진을 나도 저렇게 멋지게 찍고 싶다고

잔뜩 파이팅을 충전해서 돌아왔던 전시였다. (2011. 4. 15 - 7. 31, 대림미술관)





이걸 '코미디'라 할 수 있을까. 개그가 버무려져 있긴 하지만,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코믹한 상황 전개에 맘껏 웃긴 했지만, 과연 그것 뿐일까. 이 영화가 이주노동자, 흔히들

외국인노동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캐릭터나 상황을 단순히 코미디의 소재로 소진해버리고

만 건 아니라고 볼 포인트들은 적잖이 깔려 있었다.


첫번째 포인트.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반복되는 메시지. "동냥은 못 줄지언정 쪽박은 깨지 말랬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을 위해 법의 사각지대를 감내하며 추방의 위협을 무릅쓰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신고하고 사기치지 말자는 맥락에서 나왔던 대사다.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온 그들이 왜 굳이 탈주해서 불법체류하게 되는지에 대한 내용이 좀더 담겼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이주노동자를 보는 기본 시각으로 부족함이 없달까. 같은 한국인끼리도 시각장애인

안내견에 '더럽다'며 고함치는 판이니 저 메시지는 모두가 모두에 대해 명심해야 할 거다.


두번째 포인트, 그들이 '낭만에 대하여' 대신 작업반장 알리의 고향노래를 함께 불렀던 것.

가사를 일일이 설명하고 재연해가며 배웠던 '낭만에 대하여'는 한국사회가 그들을 받아들이고

바라보는 전형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이주노동자노래자랑에서 상받는 노래는, 뽕삘의 성인가요,

명랑하고 신나는. 열심히 일하며 밝고 희망차게 한국에서 사는 이주노동자의 이미지 그대로다.

그들이 정작 무대 위에서 부른 건, 알리가 매일같이 흥얼대던 아주아주 슬프고 절절한, 그의

모국어로 된 노래. 이주노동자들의 정서와 고유한 문화를 드러내며 함께 살아가자는 의미 아닐까.


세번째 포인트, 한국인이 부탄인이라 위장해서 취업했다가, 국적이 드러나며 쫓겨난 것.

일각에서 이주노동자를 불편해하고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일자리를 빼앗기 때문이란

거다. 저임금을 감수하고 고된 노동을 감내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악화시킨단

이야기다. 과연 그런가. 그러한 판단은 선후를 잘못 생각하는 거 아닐까. 언제나 좀더 값싸고

편하게 쓸 수 있는 인력을 찾고 있는 사장들이 먼저 있었고, 엉성하고 뒤처진 법망 틈으로

그들이 고용된 거 아닌가.


요새 문제인 비정규직/정규직에 비겨 보아도 마찬가지다. 비정규직이 정규직 일자리를 빼앗고 임금과

노동조건을 낮춘다고 손가락질할 건가.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이윤을 극대화하려

노동을 짜내는 사장들이 손가락질 받아야 하는 거 아닐까. 비정규직법안을 만들어내고 제도적으로 

악용할 여지를 계속 잔존시키는 사람들이 손가락질 받아야 하지 않을까. 이주노동자도 마찬가지,

탓하더라도 유명무실하고 비현실적인 '산업연수생'제도와 법망을 피해 그들을 착취하는 고용인을

탓해야 하는 거 아닐까.


영화가 조금 아쉬웠던 건, 아무래도 코미디의 가벼움과 상큼한 뒷맛을 유지하려던 때문이겠지만,

뒤로 가면서 너무 편하게 해피엔딩으로 빠져버리더라는 점이었다. 착한 사장이 나와서 그간 지급하지

않았던 체불임금을 한번에 주는가 하면, 출입국사무소 직원은 노래에 울먹이고, 강제추방을 앞둔

그들이 경연장에 나설 수 있다는 등. 그렇지만 분명 이 영화는, '사장님 나파효'를 연발하는 개그

소재로나 단발적으로 소모되던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살아갈 때 지녀야 할 마음가짐과 현재의

상황에 대한 억측을 막기 위한 안간힘을 보여준다.



p.s.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 무식한 방법은 따로 있긴 하다. 문제를 없애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다. 그들 중 불법체류자를 모두 본국으로 추방하고, 법적 시스템과

고용 시스템을 정비한 후에 합법적인 이주노동자만 제한적으로 받는 거다. 그렇지만 그건

결국 불가능한 이야기. 법의 보호를 받는 이주노동자는 더이상 지금처럼 싸게 막 부릴 수

있는 저임금 노동자는 아닐 테고, 공장과 자본은 역시 해외로 튀어버린다며 협박할 거다.

무엇보다, 문제를 없애는 게 칠판에서 백묵을 지워내듯 간단한 게 아니다. 사람들이니까.

초현실 환타지 '풍산개'의 처음이자 끝은 바로 그 전율돋는 메타포 아니었을까. 오랜 세월 남북의 무력대치가

부추겨지고 점증하는 상황에 대한 그 잔인하도록 적확한 묘파라니. 자그마한 방에 갇힌 사람들의 손에

권총 한 자루가 쥐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소총, 수류탄에 이르는. 누군가 계속해서 살상무기를 공급하고

남과 북은 각자의 위계에 따라 '대가리'에 충성을 바치며 이빨을 드러내고, 그 와중에 전부 공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그런 미친 상황에 끼어있음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여태 한반도의 분단상황이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화되어 왔다지만, 대부분 남측의 입장 혹은 휴머니즘 혹은 스펙타클에 치중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아니다. 이미 여러번 지적된 것처럼 남자 주인공(윤계상)이 아무런 말도 내뱉지않고

소속이 모호한 정체성을 견지하는 건, 전혀 남이나 북 어느 한편에 기울지 않은 채 그 분단상황을 그대로

보여줄 시각이 필요했기 때문인 거 같다. 영화는, 분단의 제약을 넘어 분단상황을 그려낸다.


그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여느 영화들처럼 인물이 중심이 되고 이야기가 흘러가는 그런 드라마가

아니라, '풍산개' 이 영화는 하나의 상황에 대한 스틸컷을 보는 것만 같다. 초현실 환타지라고 굳이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장르를 앞세운 이유도, 그 상황을 최대한 설득력있게 공감가도록 제시하기

위한 장치로 다른 모든 것들이 쓰여졌다는 생각 때문이다. 김규리나 다른 등장인물들의 어색하고 비현실적인

연기와 좀체 감정이입되지 않는 상황, 게다가 장대높이로 휴전선을 넘는다는 설정까지.


그래서, 한국 사람들, 그리고 북한 사람들이 처한 분단상황이란 거대한 질곡을 시각화해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압축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평소에 워낙 무뎌져서 좀체 의식하지 못했던 그

불편하고 불안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실감나도록 환기하는 것. 그게 이 영화의 최대 미덕이 아닐까 싶다.

어느 한편에 쏠리지도 이념적으로 치우치지도 않은 채, 신적인 관점에서 가감없이 그 광기의 표출을

바라보도록 해주는 참 드문 영화인 거 같다. (역시 김기덕 그리고 그의 후예들이랄까.)





2차 희망버스를 다녀와서 느꼈던 것 중 하나. 자칫, 과거의 촛불집회가 그랬듯 '광장에서의 카타르시스'로

끝나는 자족적이고 자위적인 이벤트로 끝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모인 사람들은 희망버스를

타며 '봉사활동', 혹은 벼랑 끝의 목숨인 김진숙을 구하러 가는 '구조활동'으로 생각한 걸까, 아니면 정말

자기 스스로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가는 건지. 그 '희망버스'가 그런 생각들을 표출, 발전시킬 수 있을지도.


촛불집회를 꺾었던 건, 막아선 경찰 앞에서 '폭력/비폭력'을 운위하며 스스로 동력과 가능성을 소모해버린

대중의 두려움, 그리고 어느 정도 기존 편견에 기댄 '시위꾼'들에 대한 염증에 따른 정당/시민단체 등 운동

지도세력에 대한 불인정. 그 두가지 아니었을까. 희망버스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그런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났던 것 같다. 185대에 자발적으로 타고온 사람들이니만치 나름의 의견, 입장은 있을 테고 존중하지만 .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이야기가, 그저 듣기 쉽고 편한 이야기만 하다 끝내자는 이야기와 같지는 않다.

지금껏 진보진영의 세력들이 대중과 유리되어왔다는 비판이, 그들이 갖고 있는 견해와 입장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과 같지는 않다. '시민'의 자발성을 존중한다는 것이 '지도부'의 존재와 모순되는 것은 분명

아닌데, 누구 하나 그런 불편한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는다.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을지 모른다.


지도부가 없고 모두가 주체라는 말은, 뒤집으면 정제된 정체성이 없다는 말과 같다. 백인백색의 주장만이

난무할 뿐 요구사항과 승리조건을 정돈해서 내밀지도 못하는 모래알같은 군중이란 말과도 같다는 말이다.

차벽이 막았을 때 돌파할지 말지의 문제는, 스스로의 법을 무시하며 초법적으로 군림하려 드는 국가권력에

저항할지 말지의 문제였다. 폭력/비폭력의 문제가 아니라 저항의 문제라고 이야기해야 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 하지 않는다, 라는 속담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불편하고, 어렵고,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말문은 터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여기 왜 모였습니까. 어떤 점이 당신을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앞으로 이끌었습니까. 무엇이 달성되면 돌아가겠습니까. 장애인과 동성애자와 두리반,

유성기업, 콜트 노동자들이 함께 하는 의미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당신의 '저항'이, '분노'가 향한 끝은 어디입니까.

그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마침 비슷한 생각을 써낸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



*                                                               *                                                            *

연대의 희망버스, '촛불판 명박산성' 넘을까(미디어오늘)


희망버스와 '광우병 촛불집회', 불평등·불공정의 '차벽' 넘어 희망 홀씨 주목

[0호] 2011년 07월 12일 (화) 허완 기자 nina@mediatoday.co.kr

전국 각지에서 194대의 버스에 나눠 탄 7천여 명의 사람들이 부산에 모여 ‘정리해고 분쇄’와 ‘구조조정 중단’을 함께 외쳤다. 9일 부산에 집결한 ‘2차 희망의 버스’는 700여 명이 동참했던 ‘1차 희망의 버스’를 넘어 그렇게 뜨거운 연대의 불길을 지피며 하나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187일째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끝내 만나지 못했다. 이들은 ‘3차 희망의 버스’를 다시 출발시키자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3차 희망의 버스’가 출발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만만치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는 “기성 노동운동과 정당, 시민운동이 하지 못하는 역할을 새로운 방식의 운동이 보완하고 대체해 주고 있다”고 말했고,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조직된 노동자들이 함께 정리해고를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풀어나간다는 의미가 희망버스에 있다”고 밝혔다. 박유기 금속노조 위원장도 “이제 노동운동도 과거 수동적이거나 선전선동, 상투적인 조직으로는 안 된다”며 자발적인 시민들의 참여가 주축이 됐던 이번 행사의 의미를 높게 평가했다.

▲ '2차 희망의 버스' 서울지역 출발 지점이었던 시청 앞 재능교육 농성장에서 한 참가자가 '슈퍼크레인' 티셔츠를 팔고 있다. ⓒ허완 기자

한겨레는 11일자 사설 <고통받는 이들과의 연대와 나눔, 희망버스>에서 “이들의 마음은 이제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해고자를 넘어,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불평등과 불공정을 함께 해결해가는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평했다. 경향신문도 같은 날 사설 <촘스키, 강경진압, 그리고 ‘희망의 연대’>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이들이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를 ‘불쌍하다고 동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문제’로 여기고 해고노동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2차 희망의 버스’가 주목할 만한 ‘새로운 현상’이자 ‘대안 운동’의 하나로 떠올랐지만, 현장에 있던 참가자들 사이의 ‘온도차’는 곳곳에서 감지됐다. 9일 저녁 거센 빗줄기를 뚫고 부산역에서 출발해 약 4㎞를 걸어 영도조선소를 향해 가던 시위대의 눈앞에 육중한 경찰 ‘차벽’이 나타나자, 참가자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 부산역에서 시작된 행진을 마치고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와 불과 700여 미터 떨어진 봉래 로터리에 도착한 '2차 희망의 버스' 참가자들이 마주한 것은 거대한 '공권력의 성채'였다. ⓒ허완 기자

차벽 맨 앞에 자리를 잡은 몇몇 단체와 시민들은 거친 ‘분노’를 쏟아냈다. “평화행진 하겠다는 데 이게 뭐하는 거냐”, “카메라 끄라고(채증을 중단하라는 뜻) 이XX들아!”, “폭력 경찰 물러가라” 등의 구호와 욕설이 난무했다. 참가자들은 차벽에 ‘정리해고 박살내자’, ‘강제진압 중단하라’ 등의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붙였다. 깃대로 차벽 위에 있던 전경들을 공격하거나, 주먹으로 차벽을 거칠게 두드리며 거세게 항의하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일부 참가자는 물병을 던지거나 거리에서 통째로 뜯어온 안전펜스를 타고 올라가 차벽 위에 설치된 채증용 카메라의 선을 뽑기도 했다. 이들은 양 옆 인도를 막고 있던 경찰들과 쉬지 않고 몸싸움을 벌이며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차벽에서 멀리 떨어져 행렬 뒤 편에 자리 잡고 있던 참가자들에게서는 한결 여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예 일찌감치 자리를 펴고 앉아 맥주와 준비해온 음식 등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참가자들도 많았다.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원생 이 모(26)씨는 “왜 저렇게까지 해서 (저지선을) 뚫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가볍게 몸을 흔드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그 사이 방송차에서는 “방송차가 뒤로 이동하니 앞자리로 이동해서 빈자리를 채워달라”거나 “젊은 남성분들은 앞쪽으로 나와 저지선을 함께 뚫자”는 방송이 이따금씩 흘러 나왔다.

▲ 일부 참가자들이 인도를 가로막고 있던 경찰을 뚫고 진입을 시도하면서 거친 몸싸움이 이어졌다. ⓒ허완 기자

경찰이 경고방송 끝에 물대포와 최루액, 색소포 등을 쏘아대자, 차벽 앞에서는 점점 더 거센 ‘분노의 몸짓’이 이어졌다. 한 쪽에서는 ‘폭력은 안 된다’며 이를 저지하는 참가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팽팽한 긴장 속에 긴박하게 대치 상황이 이어지던 새벽 두 시경, 일부 참가자들이 ‘희망의 계단’을 쌓기 시작했다.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의 손길이 뒤에서 앞으로 벽돌과 소금포대 등을 연신 날라댔다. 경찰의 차벽을 넘어 85호 크레인으로 가자는 이들의 열망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계단이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강경 진압’으로 반응했다. 경찰의 진압 작전은 순식간에 시위대를 50여 미터 뒤로 멀찌감치 밀어냈다. 결국 차벽에서 50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 형성된 ‘전선’은 다음날 정리 집회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 채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새벽에 발생한 경찰과의 충돌 과정에서 연행된 50명의 석방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혼선도 빚어졌다. 주최측은 10일 아침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연행자가 석방되기 전에는 희망 버스 단 한 대도 서울로 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일부 참가자들은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참석자는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대안은 있는 거냐”고 되물었다. 일부에서는 짐을 챙겨 농성장을 이탈하는 장면도 적지 않게 목격됐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자체 행사’를 갖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주최측과 참가단체 대표단이 회의를 거듭하면서 오전 한 때 프로그램 진행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도 두세 번 연출됐다. 무엇보다 한 번 ‘밀려난’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갈 힘은 나오기 힘들어 보였다. 맨 앞줄에 서있던 한 참가자는 “이럴 거면 뭐 하러 여기까지 왔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답답해하기도 했다.

▲ 시민들은 행진을 가로막은 차벽에 다양한 구호를 담은 손팻말을 붙이며 항의 의사를 표시했다. ⓒ허완 기자
▲ 대치가 이어지면서 일부 참가자들이 물병을 던지는 등 강하게 저항하자 경찰은 물대포와 최루액, 최루액을 섞은 색소포 등을 뿌리기 시작했다. 차벽 위로 모습을 드러낸 물대포가 참가자들을 조준하고 있다. ⓒ허완 기자

“판을 크게 키워놓기는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판을 이끌고 갈 것인지 고민하고 책임 있게 판단할 수 있는 주체가 없다.”

소리 공연과 랩, 마임 등 흥겨운 ‘연대 공연’이 이어지던 10일 오전, 현장에서 만난 한 노동운동단체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관심으로 한진중공업 사태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라면서도, “지금처럼 느슨한 연대로는 경찰의 저지선도 뚫을 수 없고, ‘판’을 앞으로 이끌어 나갈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같은 상위 단체가 대규모 투쟁을 조직할 여력이 안 되는 상황에서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만 기대기에는 (투쟁의) 한계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송경동 시인은 11일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밥을 먹으러 가는 데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기 마련”이라면서 “그럼에도 ‘밥을 먹으러 가자’는 데에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송 시인은 “기존의 운동들이 많이 관성화되어 있고 진정성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면서 “흔히 이야기하는 ‘운동 중심’을 넘어서 보편적인 ‘사람의 문제’에 기반을 두어 공개적으로 (희망의 버스를) 제안하고 연대해나가는 운동이 힘을 갖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이어 송 시인은 다양한 목소리가 한 데 어울리면서 발생할 수 있는 전술적 의견 차이에 대해서는 “각자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투쟁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라며 “그 과정에서 큰 결정들은 현장에서 의견을 종합해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두고) ‘희망의 버스’ 내부에 이견이나 분란이 있다고 보는 것이나 운동조직과 일반시민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관점도 잘못된 것”이라는 게 송 시인의 생각이다.

▲ 경찰의 진압은 신속하게, '효과적으로' 시위대를 저지선에서 멀찌감치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시민은 부상을 당했고, 50여 명이 연행됐다. ⓒ허완 기자

한편, ‘희망의 버스’에서 2008년 여름의 거리를 장식한 ‘광우병 촛불집회’를 연상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반 시민들의 자율적인 참여가 집회를 주도했다는 점과 ‘느슨한 연대’가 지속됐다는 점 등 당시의 촛불집회와 ‘희망의 버스’가 여러모로 닮았다는 지적이다. 2008년 촛불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는 송선주(22) 씨는 물대포와 최루액 등이 등장한 경찰의 강제 진압, 결국 ‘차벽’을 넘어서지 못한 ‘2차 희망의 버스’의 고민 등 “현재 상황이 2008년에 ‘명박산성’을 앞에 두고 시위대 사이에서 벌어졌던 논쟁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개방 협상에 반대해 들불처럼 번져나갔던 촛불집회는 당시에도 ‘새로운 운동’, ‘대안적 운동’ 등으로 불리며 뜨거운 여론의 관심과 호응 속에 거리를 물들였다. 시민들은 자유롭게 광장에 나왔고, 자유롭게 떠들었다.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했고, 즉석에서 토론이 오고가기도 했다. “웹 2.0 세대가 시위를 ‘놀이’로 만들어 즐기기 시작했다”, “대중지성, 집단지성이 세상을 바꾼다”는 등의 찬사도 이어졌다. 시민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가사를 따라 부르면서 동시에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권력을 향해 냉소와 조롱을 퍼부었다. 그러나 촛불집회는 그 뜨겁고 맹렬했던 기세만큼이나 급작스럽게 사그라들었다.

▲ 경찰의 차벽 앞에서 피켓을 들어보이는 '2차 희망의 버스' 참가자들의 모습. ⓒ허완 기자

2008년 촛불집회 직후 출간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에 공동 저자로 참여했던 백승욱 중앙대학교(사회학) 교수는 당시에 썼던 <경계를 넘어선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다>라는 글에서 “(집회가) 축제로 끝난다는 것은 이 집회에 참여하는 대중들이 이미 머물러 있던 경계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지키면서 불만만 표출하는 차원에 머문다는 의미”라면서 “촛불집회에서 가장 경계할 것은 이 집회가 ‘축제’가 되어 ‘카타르시스로’ 끝나는 일”이라고 썼다. 백 교수는 이어진 글에서 “2008년 촛불집회가 부딪힌 가장 큰 한계점은 광장의 저항이 자신의 생산·재생산 공간(일상적 삶의 공간)으로 확산되고 이전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고 평가하면서 촛불집회가 “참가자들 사이에 놓인 경계들(비정규직과 정규직, 이주노동자와 현지인, 남성과 여성, 고학력 노동자와 저학력 노동자 등)을 넘어 구체적인 연대로 나가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희망의 버스’의 미래를 좌우할 고민이자 과제로 남아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희망의 버스’를 제안한 송 시인도 “(한진중공업 사태가) 이 곳 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과 이 일이 당사자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인식이 보다 긴밀하고 보편적으로 퍼져야 한다”며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확산 등 그간 진행되어 왔던 신자유주의 기조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의식”을 언급했다. 이는 ‘한 번 왔다가 가는’ 투쟁의 현장에서의 삶과 일상 생활에서의 삶이 서로 변화를 주고받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엇갈려서는 안 된다는 지적인 셈이다.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참가자들이 단순한 ‘동정’이나 ‘안타까운 마음’, ‘막연한 분노’를 넘어서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희망 버스'가 당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장의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도 숙제다. 한진중공업노조가 사실상 떨어져나간 상태에서 '희망버스'는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큰 힘이 되고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 어떤 결말로 나아갈지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3차 희망의 버스'가 안고 갈 희망만큼이나 그 등불이 되고 있는 김진숙지도위원에 대한 부채감도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차 희망의 버스’가 출발한 곳은 시청 앞 재능교육 농성장이었다. 이곳에서는 부당한 임금체계를 개선하고, 특수고용직으로 규정된 학습지 교사를 정규직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투쟁이 무려 1200일 넘게 이어지고 있다. 작년 겨울 파업을 벌였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30여 명은 ‘희망 자전거’를 타고, 2년 전 직장을 잃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지난 1일 평택을 출발해 도보로 ‘희망의 버스’ 대열에 합류했다. 사측의 직장폐쇄에 맞서 일괄복귀를 요구하며 두 달 넘게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유성기업 노동자 100여 명도 달려왔다.

‘희망의 버스’가 활짝 열어젖힌 ‘연대의 장’은 분명 다양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렇지만 “광장에 모인 개인들은 과연 ‘연대’하고 있었던 것 것일까? 아니면 함께 모인 사람들과 그저 함께 있기만 했던 것일까?”(백승욱 교수)라는 질문은 이번에도 필요해 보인다. 과연 ‘희망의 버스’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얼마나 더 많은 곳으로 실어 나를 수 있을까?

▲ 참가자들은 대오를 해산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꼬박 밤을 지샜다. 그 사이 새벽이 밝아왔다. 농성 대오와 멀리 떨어져 있는 차벽도 밤새 자리를 지켰다. ⓒ허완 기자


공지영 작가의 트윗. "대체 일만명이 한국 제2도시 도심서 밤새 시위를 하는데 한줄도 한장면도

보도되지 않는다. 이건 전두화시대 수준의 후퇴다. 기자들의 순종이 지속된다면 이는 80년 이전

혹은 역사에서 없던 암흑으로의 전무후무한 후퇴로 보인다."


정말이다. 딱히 조직되지 않은 사람들이, 제돈을 주어가며, 소중한 휴일을 포기하며, 이백여대

가까운 버스를 타고, 봉고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모인 일이다. 그렇게 모인 만여명의

사람들이 한진중 85호 크레인 위에서 185일째 고공농성중인 김진숙 그녀를 응원하러, 죽지 말라고,

모인 참이다.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 라거나 비정규직 철폐! 같은 가다듬어진 주장도

넘실거렸지만, 무엇보다도 이 나라의 정권과 자본과 언론이 말라죽이는 사람 하나 살리러 간 길이었다.


그게 기사꺼리가 안 된다고? 좀처럼 본 적 없는 그런 높은 수준의 연대라거나, 조직되지 않은

시민들이 만 명이 자발적으로 모인 거라거나, 심지어 노암 촘스키가 지지발언을 보낸 그 '사건'이?

180여일째 35미터 크레인 위에서 계절 세개를 보내며 한진중공업의 불법적이고 악의적인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고 있는 그녀, 김진숙과 한진중 노동자들이 보이지도 않았으니 새삼

놀라울 것도 없지만, 언론이 잘했다면 MB가 대통령되는 따위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놀랍다.


평창이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다고 눈물짓고 빵빠레 울리던 언론, G20개최로

수십조의 경제효과가 기대된다며 앵무새처럼 읊어대던 언론, MB의 말 하나 토씨 하나까지 금칠해서

홍보하느라 지면과 이미지가 넘쳐나는 언론, 4대강이니 민간인사찰이니 정권에 골치아픈 이슈가

있으면 알아서 축소보도하는 언론, 삼성과 한진 따위 대기업들의 횡포와 불법행태에 대해서는 눈감고

입다물면서, 틈만 나면 국민들을 훈계하고 교육해서 '공정사회'에 걸맞는 '국격'돋는 언론.




정말이지 "You are not 언론"이다. 방송은 전멸하다시피했고, 그나마 지면으로는 몇개 살펴볼만한

기사가 남은 게 다행일까. 얼마전 올렸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김진숙, 그들은 살아내려와야 한다. 에

이어, 7월 9일에서 10일까지 무박 2일에 걸친 2차 희망의버스 사진들과 참가기. 언론이 제대로 한다면

굳이 왜 카메라를 들고 가서 400mm 폭우 속에서 비맞으며 고생했겠나. 언론 따위, MB보다 더럽다.
 


9일 오후 1시, 시청 앞과 서울 시내 곳곳에서 2차 희망의 버스가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탄 차가

출발하며 시청을 지나는데 시청앞 광장에 모여있는 수많은 사람들, 주말에 놀러나온 길에 그들을 구경하는

사람들, 그리고 경찰차들이 보였다. 희망버스는 1차 때와 마찬가지로 뜻이 통한 사람들끼리 돈을 모아

버스를 대절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는지라 버스회사나 색깔 따위는 제각각이었는지라 앞에 '희망버스'

몇 호차, 이렇게 싸인지를 붙이는 걸로. 이제 전국에서 모인 185대의 버스가 김진숙님에게 간다니 두근두근.


4시, 휴게소에서 쉬는 중, 저마다 계란과 떡볶이와 과자들같은 간식거리를 나누느라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지경이다. 걱정스러운 건 부산에 내리붓는다는 장대비. 엠비의 인공강우는 아닌지 의심이..어제도

비가 엄청시리 내리고도 계속 쏟아붓는다. 부산은 어떤지, 김진숙지도님은 괜찮은지, 마음이 더 부산해진다.


그와중에 부산역에서 크레인으로 가는 길목인 영도다리를 막았다느니, 한진중공업 앞에 물대포부대가

깔리고 새까맣게 닭장차와 전경들이 깔렸다느니. 나는 김진숙의 '소금꽃나무'를 읽고 있었다. 저자 사인을

받고 싶었는데. 그의 책 중 한대목. "평생을 일해도 집한칸 지닐 수 없는 세상에 널 살게 할순 없지

않겠느냐..비정규직은 울고 정규직은 잔업과 성과금에 영혼을 파는, 오로지 이 두가지의 선택이 네 미래가

되게 할 순 없지 않겠느냐.(김진숙, 김주익열사 추모시)"

7시, 부산역 광장에 모이고 나니 이미 사람이 가득하다. 걱정했던 것처럼 400mm 폭우가 내리고 있는

부산이었지만 역앞 광장에서 울려퍼지는 문화제의 익숙한 마이크소리와 후끈한 분위기. 전국에서 195대,

서울에서 66대가 출발했다는 소식에 버스안에 환호성과 박수가 터졌었는데 정말 많이도 모였다.

'WELCOME TO BUSAN웰컴 투 부산'이라 적힌 촌스러운 구조물을 넘어, 역앞 광장을 그득하게

메우고도 역사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까지 꽉꽉 들이찬 사람들. 이들을 움직인 건 '김진숙', 그리고

그녀와 크레인을 함께 지키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들.

그녀는 국방부가 선정한 불온서적 23선 중의 한권이기도 한 '소금꽃나무'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싸워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노동자들의 투쟁은 위험해 보인다...그들은 아직도 거북선은 이순신장군이

만들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북선은 우리가 만들었다.(김진숙,소금꽃나무)"


그녀와 한진중공업의 투쟁은, 위험천만한 고공농성은 단순히 감성으로, 휴머니즘과 드라마로 소모할

꺼리가 아니다. '노동'의 제몫찾기, 한줌 제한 나머지는 모두 노동자라는 자각이 중요한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희망의 버스'는 그들에 대한 구조활동이나 봉사활동이 아니라,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거다. 일상화된 정리해고와 자본과 공권력의 야합 앞에 위협받는 유리병같은 일상을.


비는 참 오지게도 왔다. 폭우 속에서도 노래를 찾는 사람들, 3호선 버터플라이 등의 공연에 이어

1차 희망의 버스를 만들어냈던 시인 송경동을 비롯한 시인들의 시낭송이 있었다. '크레인 위에서

태어난 최초의 인간'이었던가, 제목부터 의미심장했던 결코 짧지 않던 시는 순간순간 울컥하게

만드는 진정성과 '불순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행진 시작. 촛불집회 때 보였던 우비가 다시 보인다. '촛불아 모여라, 될 때까지 모여라'던 촛불소녀.

정말 올해 맞을 비는 전부 맞은 거 같다. 촛불소녀의 촛불이 우의 속에서 흔들림없듯, 사람들은

장마철 폭우가 우박처럼 아프게 내리붓는 와중에도 흔들림없이, 가벼운 걸음으로 김진숙 그녀를

만나러 간다. 어쩌면 그녀의 일과 한진중공업의 일이 전해지고 난 후 가장 가벼운 마음이었는지도.

행진은 부산역 광장에서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까지의 코스가 예정되어 있지만,

경찰들이 조선소 앞에 까맣게 진을 치고 있다느니, 영도다리를 봉쇄했다느니 불길한 소문들이

흘러들고 있었다. 그래도 교통 안내판에는 '부산역->영동한진'까지 행진이 예정되어 있다고

나와있어서, 어쩜 김진숙지도님을 볼 수 있겠구나, 조금은 안심되던 때.

내가 겪은 부산 시민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노동자들 편에 서서 공권력과

용역깡패들, 보도하지 않는 언론에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병원 1층 로비를 개방해서 화장실도

쓰고 전화기 충전도 하도록 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면, 차 창문을 열고 왜 괜히 길막히게

부산까지 와서 난리냐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는 사람도 있었다. 뭐, 다 그런 거 아닌가. 다양한 목소리.

그런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 '국회'라는 그릇에 넣고, 그 안에서 전체 국민의 삶을 위한 정책을 편다는

게 초등학교 수준의 '정치'에 대한 설명이랄까. 그래서 이렇게 이름 중의 '정의'를 갖고 말장난하며

'justice21'이라느니 홈페이지 주소를 광고하기도 하겠지만, 문제는 왜 대부분의 국회의원은 노동일

한번 해본 적 없는 화이트칼라, 그 중에서도 잘 나가고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만 있는지.

그래서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는 저 플래카드가 마냥 곱게만 보이지는 않는 거다. 일단은 선거가

굉장히 중요하고, 의정활동에 대한 감시도 중요하다지만, 그거로는 뭔가 2% 이상 부족하다.

계속해서 행진 중. 몇 년만에 거리행진인지. 미처 꺼두지 않은 빨간 신호등이 반짝거리고, 차들이

씽씽 달려야 할 차선 위를 걷는 느낌은 꽤나 매혹적이다. 비가 미친 듯이 내리붓고 있지만, 평소

생각지도 못하던 공간에서 기존의 규칙과 상식을 깨뜨린다는 건 여전히 즐거운 일이다.

아, 거리 행진은, 부산역 광장에서부터 한진 영도조선소까지의 행진은 신고를 마친 합법 집회.

사실 한진중공업, 김진숙이나 다른 해고노동자들의 문제는 비단 여기뿐만이 아니다. 콜트 노동자들,

유성기업 노조, 발레오공조 노조, 그리고 노조조차 갖지 못한 삼성 같은 곳에서도 무한반복되듯

이어지고 있는 이야기들. 구조조정과 등치되는 정리해고, 허울만 좋은 법 뒤로 벼랑끝으로 밀려나는

노동자들. 그 와중에 일종의 '대표성'을 띄고 그나마의 '대중성'을 획득한 것이 한진중공업. 이번

싸움을 꼭 승리로 만들어 김진숙과 한진중공업이 웃을 수 있도록 해야 할 이유기도 할 거다.

한진중공업 노조가 사측과 독단적으로, 법적 효력도 없는 타협에 합의하고 나서는 여기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실제로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 거리 곳곳에는

그들의 반칙과 기만을 숨기려는 플래카드들이 넘실거리고 있었고, 전국에서 모인 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니 손팻말이니, 그런 것들은 그것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85호 크레인 사수! 노동자민중 생존권 쟁취! 정리해고 철회! (크레인) 강제진압 반대!"

한시간쯤 걸었을까. 걱정하던 영도다리는 허무할 정도로 금방 넘어버렸다. YS를 당선시키지 못하면

모두들 영도다리에서 빠져죽자느니 어쨌다느니, 그런 어줍잖은 이야기 속에서 등장해 유명했던

영도다리가 여기였구나, 느끼기도 전에. 아마도 모두들 여기쯤 경찰이 봉쇄하지나 않았으려나,

김진숙지도님을 보지 못하고 막히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운 맘이었을 거다.

앞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걸음이 점차 느려지더니, 멈췄다. 명절날 고속도로에서

그렇듯, 꽉 막힌 도로사정은 사람을 답답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카메라는 이제 조금씩 장대비

앞에 무릎을 꿇어가고 있었다. 잔뜩 물기를 머금은 렌즈로 앞으로 바라보니. 차벽이다.

언제부터 여기서 버티고 섰을까. 물대포차가 가운데 버티고, 양쪽으로는 차벽이, 그리고 채증용 카메라와

조명이 설치된 닭장차가 그 옆으로, 남은 부분은 완전 무장한 전의경들이 메웠다. 아니 근데, 이들이

왜 정당하고 적법한 행진을 막고 섰을까?? 불법으로 노상을 점거하고 합법 행진을 막고 있는 경찰들이다.

차벽 앞에서 당황해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그럴 수 밖에 없다. 조직된 대오도 아니고, 몇몇 학교와

조직을 포함한 개인들이 제각기의 판단으로 참여한, 지도부 없는 무리인 거다. 부산역에서부터 물처럼

흘러흘러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까지 흐르려던 물줄기가 까만색의 살벌한 경찰들에 가로막혔다.

그 앞에서 '같이 살자',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85호 크레인에 희망을', '다시 소금꽃을 피우고 싶다'

따위 손팻말을 든 건 해고노동자들의 가족들. 나중에 경찰들이 폭력진압하며 연행해 간 가족들도

저기에 있었다. 해고되어 크레인에 오른 노동자분의 아내와 17살짜리 딸이었다던가.


'소금꽃'이란 김진숙 그녀의 '소금꽃나무'란 책 이름에서 비롯했을 거다. 배 안에서 용접하고 페인트칠

하며 온통 땀에 절어버린 조선 노동자들의 옷위에는 늘 하얗게 소금이 맺혀있었다는 거다. 그렇게

'소금꽃'을 매달고도 든든한 노동자들이 바로 '소금꽃나무'라는 그녀의 표현.


건물 위는, 사진기자들이 저렇게 진을 쳤다. 이미 그들은 전선이 여기에 생기리란 것을, 경찰이 여기서

무슨 짓을 하리란 것을 알고 사진 찍기 좋은 자리를 찾아 아우성쳤던 걸 거다. 뭐, 곤봉과 방패가

번쩍거리고 물대포가 최루액을 뿜는 그런 풍경을 노리는 까마귀떼나 하이에나 같단 생각도 들었지만,

여하간 저만치 진을 쳤으니 보도는 잘 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지금.

폴리스라인, 되먹지 않은 글자 위에 '정리해고 박살내자', '강제진압 중단하라'는 스티커가 빨갛고

파랗게 나붙었다. 법도 무시한 네놈들의 폴리스라인 따위. 페인트로 단정하고 세련되게 칠해진

글자들 따위, 우리들의 촌스럽고 싸구려(지만 접착력은 끝내주는) 스티커로 덮어버리겠달까. 

차들 틈새로 어렴풋이 보이는 너머 풍경. 여기서 700미터쯤만 가면 바로 김진숙과 한진중 해고자들이

농성 중인 85호 크레인이 나타난다고 했었는데. 경찰들은 아무 법적 근거없이 여길 막아서고 심지어

폭력적으로 진압하려 들면서 스스로의 정체를 노출하고 말았다. 한진중공업의 사설 경비업체 나부랭.

그런 경찰 따위. 어디에서 났는지 '폴리스 라인', '이선을 넘지마시오' 따위가 적힌 형광색의 반짝반짝

빛이 나는 차단대가 차도 한켠에 우르르 쌓여있었다. 그리고 차벽 앞에서 그걸 한두개씩 빼어서는

깔개로도 쓰고, 저렇게 무더기 위에 철퍽 앉아서 지친 다리를 쉬는 사람들. 스스로 공정하고 본연의

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경찰의 권위 따위 궁둥이 밑에 깔려도 싸다.

차벽 앞에서부터 버글버글하게 모인 사람들. 끝이 보이지 않는 인파였고, 비바람에 쉼없이 나부끼는

깃발이었다. 그리고 이유없이 진로가 막힌 것에 대한 분노 한덩어리였다.

비상출동했다는 닭장차, 예외없이 골고루 '강제진압 중단하라'는 스티커가 붙었다. 사실 크레인에 대한

강제진압이 시시때때로 시도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중단 요구였는데, 2차 희망의 버스를 타고 부산에

내려와 행진중인 사람들에 대한 강제진압 역시 중단하라는 요구로 커져버렸다. 경찰이, 한진중공업이,

무엇보다 이 정권이 일을 그렇게 키우고 있었다.

차벽과 차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우선 막아놓고는, 틈새는 몸빵. 죄없는 전의경을 앞세워 길목을

틀어막은 그들이다. 그리고 길을 트라며 달려드는 시민들과 방패로 받아치는 전경들의 몸싸움이

벌어진 뒤쪽에서 잠자리떼처럼 흉물스럽게 공중으로 부양하는 것들, 뒷날의 사진채증을 위한

캠코더나 카메라 장비들인 거다. 그리고 선무방송. '지금 일부 집회참가자들이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있으니, 해산하지 않을 경우 강제 진압하고 전부 연행하겠다'던가. 누가 불법인가.

완강한 차벽 앞에서, 사람들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왜 여기에 왔으며, 누가 우리를 막고 있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노랗고 하얗고 파란 우의를 입고서 머리카락을 타고 얼굴로 흐르는 빗물에도

개의치 않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체를 아우르는 지도부가 있었다면, 좀더 많은 사람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지 않을까 아쉽긴 하지만, 각자의 단위별로, 참여한 버스별로 진행된 이야기.

성소수자들도, 장애인들도, 두리반으로 모인 인디 음악인들도, 모인 자리였다. 이왕이면 좀더 멋지게

전체의 목소리와 요구를 담아낼 수 있는 판을 만들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아쉬웠다. 전통적인 노동문제뿐

아니라, 성소수자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 장애인 문제 같은 다른 문제들도 산재해 있음을, 상식이라 믿는

수많은 것들이 사실 하나하나 누군가의 밥그릇과 생존을 위협하는 질곡이자 장애물일 수 있음을 나누는

자리였다면 더욱 멋졌을 거다.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가 철회되고, 비정규직이 없어지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멋진 세상이 되겠지만,

좀더 당당하고 신나려면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할 수 있어야 할 거 같다.

김진숙지도님에게 전달하려던 희망의 배가, 빗물이 강이 되어 흐르는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진수식을

가졌다. 한진과 경찰, 자본과 국가가 이런 식이라면, 다음번 3차, 4차가 계속 노도처럼 밀려올 테고,

그렇게 길바닥에서 진수식을 가진 종이배가 85호 크레인 앞으로까지 항해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참여연대에서 걸어올린 현수막,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응원합니다 힘내세요', 김진숙님 그리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분들. 함께 2차 희망의 버스를 타고 오진 못했지만 그 마음은 서울과 지방 곳곳,

오프라인과 온라인 곳곳에서 넘실거린다.

밤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색소물대포를 쏴대고, 사람 얼굴을 겨냥한 최루액 물총이 난사되었으며,

방패와 곤봉 앞에 몇사람이 두드려맞고 실려가고 연행되었는가 하면, 급기야 최루액 물대포를 쏘아서

대오 전체를 고르게 적셔주는 만행까지. 장애인과 노약자들이 있던 말던, 순식간에 사방은 무슨

가스체험실처럼 되어 눈물콧물이 낭자하고 기침소리가 가득해졌었다.

그렇게 심상정 전 진보신당의원이 연행되는 등 50명이 연행되고, 수많은 사람이 최루액과 경찰의

폭력으로 병원에 실려가거나 후송되는 밤을 버텨내고 날이 밝았다. 방송차까지 빼앗기고 나서

좀처럼 낙관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끝내 자리를 지켰다. 이 외로운 남도의 끝, 홀로

고립된 채 186일째를 버티고 있는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최루액 대량방사의 따꼼함을 담배연기와

물로 헹궈내며. 폭력경찰 물러가라! 정리해고 철회 투쟁! 의 구호가 밤새 이어졌다.

7월 10일 6시경. 경찰들은 어느새 차벽 뒤로 견찰들 전부 숨어들어간 상태. 사람들은 제각기의 자리에서

독려발언을 이어가고, 인디밴드나 음악인들은 자유발언이나 공연을 통해 사람들을 북돋고 있었다.

이 차벽 너머에는 김진숙지도님과 다른 노동자분들이 고공농성 186일째의 아침을 맞고 있었을 거다.

밤을 꼴딱 새고는 난민처럼 널부러진 이들, 머리 위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무엇이 이들을 이런 고단함으로 이끌었을까.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고생을 자발적으로 사서 하는 사람들.

폭우가 쏟아진다는 걸 알면서, 경찰과 한진이 곱게 보내줄리 없다는 것도 어렴풋이나마 알았으면서,

그리고 당장의 밥벌이와 생활에 지쳐 일주일 중의 주말만을 기다렸을 거면서.

7시쯤. 기자회견. 유시민과 정동영이 함께 했다고 했지만, 아침 7시가 넘어 시작된 기자회견에 모습을

보인 건 진보신당의 노회찬 전대표, 조승수 대표와 민노당의 권영길 의원을 필두로 한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들의 참담한 얼굴표정, 그러고 보니 거리의 신부 문정현 신부님이나 백기완 선생님,

가장 앞에 서서 길을 뚫겠다 하셨던 두분은 괜찮으신 걸까. 말보다 행동으로 보이는 분들이야말로

희망이다.

그렇게 기자회견이 끝나고, 밤새 있었던 우리의 몸짓과 목소리가 공중파나 다른 언론에서 거의

묻혀버리다시피 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리면서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일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자비를 내어가며 자발적으로 이 먼 곳에까지 와서 한목소리로 한진중공업 사태의 해결을

촉구한다는 것. 그 평화롭고 합법적인 행진을 불법적으로 막고 폭력을 행사하며 진압하려든 것은

언론이 다룰 내용이 아니라는 건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3차 희망의 버스를. 이라고 할 수 밖에.





분노하라 - 10점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돌베개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는 책읽기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무언가 자신의 사고 궤적을 이어나가는 행위랑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소설이나 문학류 이외의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 서적을 본다는 건 당시 자신이 갖고 있는 의문점,

고민이라거나 관심분야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 독서 리스트를 쭉 이어나가보면

그자체로 나름의 스토리랄까 문제의식이 뻗어나가는 그림이 잡히는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분노하라'라는 책이 내 손에 쥐어진 건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이 다들 쥐고

있는 이른바 '핫한' 책들은 일단 피하려고 하는 묘한 청개구리 심리에다가-아직 '정의란 무엇인가'는

좀체 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지구 반대편 레지스탕스의 목소리를 빌려 굳이 '분노하라'는 말을

전해듣지 않아도 될만큼 무시로 분노하고 있지 않은가. 그냥, 워낙 감각적인 표지가 맘에 들었다.


삶으로 말한다, '앵디녜부(Indignezvous)!'

저자는 이제 무관심과 냉소를 넘어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행동을

위한 에너지로서 분노를 말하고, 분노의 결과로 행복을 말한다. 삶의 안전망으로 기능해야할 사회보장

제도의 축소, '일반의 이익보다 특정인의 이익을 앞세우'게 된 경제 시스템, 정부와 대기업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고 있는 찌라시 언론들,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대물림하는 교육. 분노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이런 식의 현실분석은 이미 차고 넘친다. 집회나 시위현장에서 배포되는 얇은 전단에

더욱 정밀하고 응축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에 기반한 결론, 혹은 주장도 같다. 이제 그만 속고,

그만 참고, 그만 당하자고. 분노하고 저항하자는 거다. 다만 이 책은, 그 뻔하고 당위적이며 선동적인

이야기에 담긴 무게가 다르다. 메시지의 진정성, 신뢰성이 다른 거다. 그러니 울림이 다를 수 밖에.
 

1917년에 태어난 저자는, 나치와 싸우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가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갇힌 채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 탈출하고 다시 투쟁, '유엔 세계인권선언문' 작성에 참여했으며, 여전히

인권과 환경 등 사회문제 전반에 발언하며 활동하고 있다. 올해 아흔네살이다. 그런 '늙은이'가,

그런 '꼰대'가 좋은 게 좋다느니, 철 좀 들으라느니 따위 이야기가 아니라 '분노하라'는 거다.


90대 노인의 '격렬한 희망'에 위로받다

결국 이 책을 읽고 발견한 건, 육체적인 쇠락에 지지 않고 탄탄하며 쌩쌩한 열정과 젊음을 가진

어느 존경할 만한 투사의 삶이다. 그리고 그의 삶 자체로 느껴지는 위로다. 나보다 앞선 그의 삶과

신념과 가치를 발견하고는, 왠지 그의 여전히 탄탄할 것 같은 등을 바라보는 안온함과 믿음직함을

느끼게 되는 거다. 근 한세기동안 명멸해온 거대한 폭력과 광기를 지켜봐온 그가 희망을 말하니까.

그의 견지로 봤을 때 MB치하 3년간의 고난, 괴로움은 그야말로 '이 또한 지나갈 것'이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좌절과 절망을 느꼈을까.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제 한세기를 살아온 노인의 혜안으로 젊은이들에게 고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총대를 넘겨 받으라, 분노하라는 거다.


수많은 한국의 레지스탕스에게. 특히 김진숙에게.

이 책의 소감은 사실 책에 씌여질 종류의 것은 아닌지 모른다. 분노하고, 행동하라는 그의 분명한

메시지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한국에 태어난 건 다행인지 모른다. 갈수록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어렵고 분노의 대상이나 책임의 소재를 밝히기 어려워지도록 복잡해지고 은폐되어지는

사회시스템의 진화 속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날것의 국가폭력, 비인간적인 자본의 모습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용역깡패의 모습으로, 어용 언론의 모습으로, 유치한 고소고발로,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의 밥줄을 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분노하기 유리할지도.


역시, 내게 책읽기는 사유의 연장이다. 요새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 한진중공업의 그녀, 김진숙.

사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할아버지까지 찾아갈 것도 없었다. 젊어서부터 안 해본 것 없이 노동해온

오십대의 그녀가 도무지 한눈에 보기에도 어처구니없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대항해서 크레인에

올라간지 180여일이 가까워진 참이다. 한국의 자본권력, 그리고 그를 비호하는 국가권력은 최소한의

설탕코팅조차 없이 쓰디쓴 현실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참이다.


스테판 할아버지(저자)는, 그녀의 이런 투쟁을 안다면 노구를 이끌고 크레인 위에라도 오를 사람이다.

그리고 김진숙 그녀는, 레지스탕스 할아버지처럼, 그리고 거리의 신부 문정현신부님이나 다른 한국의

이름없는 레지스탕스들처럼, 아무리 나이를 먹고 육체가 노쇠해져도, 지금과 같이 그런 열정과 분노를

가지고 우리에게 든든한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러려면 이 팬시하고 '깔쌈한' 표지의 책은 서가에

꽂아놓을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슴에 꽂아두어야 할 일이다.


그러면 혹시 또 아나, 우리는 백발 성성해진 김진숙이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를 이야기하며 분노하라,

그리고 저항하라며 쓴 또다른 뜨거운 책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하루끼가 한 남자에게, 한 남자와 여자에게 빨간 점을 찍는다. 그 전까지는 그야말로 '갑남을녀',

익명의 바다를 떠다니던 남자와 여자에게 이름이 붙었다. '덴고'와 '아오마메'.


그의 소설은, 그의 소설 중 내가 좋아하는 류의 소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나, 주인공은 특정 분야에서 나름대로 특출하달 정도의 재능을 갖고 있지만 의지와 욕구가

부재하다. 맘만 먹으면 그래도 꽤나 해낼 수 있는데, 그 마음 먹기가 힘들다. 딱히 무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사실 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는 상태. 둘, 주인공은 다른 등장인물과의 관계나

세계 그 자체에 대한 회의나 비현실감을 끈질기게 품고 있다.

"여기는 여기가 아닌 세계구나"류의 대화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 내내 반복되는

질문, 우리가 지금 같은 시공간에 있는 걸까. 셋. 도무지 주인공의 문제가 해결되는 법이란 없다.

기껏해야 원점, 이거나 여기가 내가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할 수 있는 딱딱한 바닥면이구나, 정도의

확인에서 그친다.


그건 왠지 내 이야기다. 얼마전 하루끼와 관련한 잡지 인터뷰에서도 말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어필하는 부분은 바로 그런 부분이다. 적나라하게 지금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 맨날 보여주면

짜증나서 죽어 버릴지도 모를 볼품없고 엉성한 상태지만 그래도 가끔은 거울을 들여다보듯 날

비추어 볼 수 있는. 그의 이야기에서 공통된 부분들, 딱히 신나게 달리지도 않고 드라마틱하고

거창한 결말도 없으며 주인공은 늘 사변적이고 주춤거리는-때로 아주 답답하고 짜증나는-캐릭터에

딱히 꿈이나 야망이랄 것도 없고 사실 뭘 하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누추하고 김빠지며

'참 사느라 애쓴다' 싶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의 소설을 보는 이유는, 그게 지금 내 삶과 많은 부분

맞닿아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가 바닥이구나, 싶어서다. 그건 내가 살아감에 대한 일종의

데카르트식 '방법적 회의'를 가능케 하는 최후의 지반일 수도 있겠다.


항상 그렇듯 건조한 인생을 쌓아나가다 어느 순간 문제가 불거진다. 두 개의 달이 떠있음을 퍼뜩

깨닫게 되듯 일상에 그어진 작은 균열을 발견하고 나면 쭉쭉 균열이 사방으로 번지는 건 금방이다.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밋밋하고 조용했던 인생을 복기하다 보면, 정작 본인의 문제랄까,

본인의 결락이 심각함을 발견하고 그것에 매달리게 된다. 외부의 문제는 최초의 자극, 계기일 뿐

이내 시선은 내부로 향하게 되는 거다. 그 내부엔 자신의 가치, 자신의 사랑, 자신의 치부가 오롯이

숨겨져 있다. 모든 문제를 자기화하고,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내밀한 것으로 되돌이하고

마는 강력한 산화력이 발휘되지만, 그건 이기적이라거나 탈정치라거나 혹은 관념적, 사변적이라는

표현과 맞춤하지는 않다. 자신을 먼저 찾아내고 알아내려는 노력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A에서 A'로 바뀐 자신은 드디어 뭔가를 의욕하기 시작한다. 범속한 일상에서

무기력하고 무의지한 모습으로 일관하던 주인공이지만, 조금은 '의지'라는 것을 품게 된다. 그건

아마도 수많은 상실을 거친 후, 내적으로는 거의 세계대전에 가까울 만큼 혁명적이고 치열했을

전투를 거친 결과이겠지만, 정작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별반 다를 바 없다. 하루끼가 찍어 놓은

빨간점을 지우고 일상에 풀어주면 다시 이전처럼 이름없고 얼굴없는 대중 속으로 빨려들어갈 거다.
 

그의 이야기가 하나의 커다란 원을 돌아서 원점으로 돌아온다 싶은 게 그래서다. 결말이 이상하다

싶다는 소감들도 그래서 아닐까 싶다. 1984나, 1Q84나 다르지 않다. 내면에선 폭풍우가 일고 숱한

상실과 모험을 겪었지만, 외부로 드러나는 건 거의 없다. 여전히 세계는 해가 뜨고 달이 뜨고, 신은,

'리틀 피플'은 기분이 좋지 않으면 천둥치며 으르렁대는가 하면 사람들의 일상 역시 똑같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도 바뀌는 건 없는 거다. 건방지지만, 그게 세상이다, 라는 정도의 말을

해야 할 타이밍이다.


어쩌면 고마쓰니, 교쿄니, 아유미니, 교쿄의 남편이니 하는 등장인물들, 소설속 그리고 현실속 모든

동시대인들 역시 제각기의 모험 중이었을 거다. 상실감을 품고 뭔가를 계속해서 흘리듯 잃어버리면서,

허랑하게 뱉어지는 메마른 말들을 주고 받는 그들이었다. '리틀 피플'의 위협은, 주변의 소중하고

취약한 것들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은 꼭 덴고나 아오마메에게만 전달된 것은 아니었을

거다. '리플 피플'이란 일종의 비료랄까, 원래 내면에 있던 씨앗을 이상성장시킬 뿐이다. 상실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을 조금 일찍 상실시킬 뿐이다. 그렇게 제각기의 전투와 모험을 마치고, 두권짜리

장편소설 분량의 이야기를 마치고 일상으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복귀했겠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루끼가 빨간 점을 찍고 들어올리기 전까지는.


그들은,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덴고'와 '아오메마'가 1984년에서 어느 순간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없는 1Q84년으로 흘러들었듯, 일상의 어느 순간 어디서 그런 갈림길, 혹은

스위치를 건드릴지 모른다. 기지개를 연달아 네번 켜본다거나, 왼쪽신발과 오른쪽신발을 바꿔

신어본다거나. 굳이 그런 거 아니어도 호, 흡, 호, 흡 대신 호, 호, 흡, 흡 하는 정도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런 사소한 스위치 하나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불가역한, 돌이킬 수 없는 세상으로

옮겨지는지 모른다.


그건 사실상 매순간 돌이킬 수 없는 시공간에 떨어지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지만 좀처럼

그 무게감때문에 직시하고 싶지 않은 깨달음과도 같다. 매순간 돌이킬 수 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많은 소중한 것들을 함께 쓸어내버린다는 것.

시간이 흐른다는 것 자체가 내 현재, 내 소중한 살점들이 흘러가 버린다는 거니까 사실은 같은

말이다. (불가역한) 시간, 과 상실, 이란 단어. 그리고 '리틀 피플'의 협박이란, 사실 언제가

'상실'에 있어 맞춤한 때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갈협박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작용한 게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상실할 때였는지도 모른다.


1984년과 1Q84년이 결국 다르면서도 같을 수 밖에 없는 이유, 소설의 시작점과 마침점이

다르면서도 같을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깨달은 후에도 별다를 바 없이 계속 똑같이 살아가게

되는 이유, 그 모든 이유는 아마도 시간 = 상실, 삶 = 상실, 실용적이지는 않은 깨달음 때문

아닐까 싶다. 딱히 그걸 알았다고 해서 어째야 할지 대책이 안 서는, 그저 거기서부터 다시

뭐든간에 쌓아올려볼 수 밖에 없는 '방법적 회의'의 밑장.



* 리뷰랄까, 내가 쓴 건 지독히도 재미없는데 소설은 사실 꽤나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하루끼가

이리저리 뒤척여가며 보여주는 그의 '밑장'은 여기서 보던 저기서 보던 똑같다. 그의 문제의식이나

글쓰기의 주제가 더이상 커지거나 발전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이미 그가 다루는 주제는 인간이

나고 자라면서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외로움, 상실감이라는 거대한 것, 그걸 이야기하는 그의

내공은 절정을 친 지 오래고 지금은 이리저리 변주만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물론 이야기는

세련되고 풍성해졌으며 더욱 '열렸지만', 핵심은 '상실의 시대'에서 이미 다 쓰여져 버렸다고 생각한다.



1Q84 1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1Q84 2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1Q84 3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누군가의 트윗을 보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오랜동안 눈으로만 좇던 그녀, 김진숙의 트윗을 퍼나르고 여기도 당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이 있으니 울지 말라며, 죽지 말라며 하루종일 몸만 회사에 두고 있던 어제였다.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중인 김진숙과 한진중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과 용역깡패들의 침탈이 시작되던 순간, 이 사람은 '그런' 강의를 듣고 있어 마음 둘 곳을

모르겠다지만, 난 '그런'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지원하는데 일조하는 곳에 몸담고 있다니.


그녀가 내 타임라인에서 언제부터 날짜를 하루하루 세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한진중공업, 유성기업 같은 파업현장이나 명동성당 앞, 포이동 판자촌같은 재개발(예정)

지역들의 이야기들로 온통 무거워지기만 하던 공간, 그녀에게 조금더 일찍 내 목소리를

전하지 못한 게 안타깝다. 그녀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나의 침묵이 행여나

부정적이거나 힘빠지는, 그렇게 전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불어 '노조'의 이름으로 평노조원들의 인생과 신조를 둘둘 말아서 투항해버린 노조

집행부..비겁하단 말로 부족하다. 비열한 배신행위, 그야말로 등에 칼 꼽는 이적행위를

한 거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핏대세워 분노하기엔 스스로 떳떳치 못하단 생각이

들어서..지금이라도 한진중공업 파업사태의 배경을 알만한 글 하나 펌..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진숙 그녀는 살아 내려와야 한다.


*                                                              *                                                     *

"작가가 울고 카메라도 울고 나도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정희준의 '어퍼컷'] 조남호 회장님, 이건 살인입니다!


지난 1월부터 한국방송(KBS) 부산방송총국의 탐사 보도 프로그램 '시사인 부산'의 진행을 하고 있다.

지난 수요일도 여느 때처럼 '시사인 부산' 진행을 위해 남천동 KBS로 갔다. 그날 방송의 주제가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의 농성장과 이곳을 방문한 희망 버스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탐사 보도 프로그램의 특성상 열 받는 이야기, 억울한 이야기, 기가 찬 이야기, 귀신 곡할 이야기를 많이 다뤄봤기에 솔직히 그날도 분장실에 들른 후 무덤덤하게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이 프로그램은 피디와 작가들이 사전에 7~12분짜리 비디오 세 개를 준비하면 내가 그 사이사이를 연결하며 진행하는 30분짜리 프로그램이다. 최근엔 진행이 꽤 익숙해졌다. 미리 집에서 대본을 보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판단하고 오기 때문에 내가 맡은 부분이 끝나면 스튜디오 안의 모니터를 통해 이어지는 비디오를 보곤 했다. 그런데 이날은 조금 달랐다.

내리는 비 때문인지, 피디와 카메라맨이 오늘은 더 잘하려 해서인지 어딘가 어수선했다. 나도 몇 번을 버벅거렸다. 왠지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그날 유난히 실수를 많이 했다. 끝나고 나서 담당 피디가 "교수님이 자꾸 틀리니까 나도 틀리잖아요!" 하며 투정이다. 왜 그랬을까.

자꾸 눈물이 나올라 그러잖아 XX…

첫 비디오는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들은 농성을 시작한 2010년 12월부터 집에 들어가지 못한 관계로 식구들과의 유일한 통로는 휴대 전화다. 가족에 대한 간절함 때문에 이곳 농성자들은 영상 통화를 많이 한다. 한 농성 노동자가 아내와 통화를 하다가 아들을 바꿔보라 한다. 큰아들이다.

"오늘따라 니 와이리 잘 생겼노."

참으로 싱겁고도 썰렁한 그 말에 작은 화면 속 아들은 덤덤해 보인다. 이어 아버지는 동생 잘 챙겨주라는 말도 한다. 그런데 아들은 대답이 없다. 나 혼자 속으로 '요즘 애들 참 버릇없어, 대답을 안 해' 하며 내 아들을 떠올리는 순간 내 귓전을 때리는 아버지의 한 마디.

"또 운다 이놈 자슥."

이어서 집에 있는 둘째 아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아버지의 분신과도 같다는 둘째는 최근 가족의 그림을 그리는데 아버지를 그리지 않았단다. 아이 엄마는 둘째가 요즘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도 울까봐 아버지의 전화를 안 받는다고 자기도 울먹이며 말한다. 엄마가 인터뷰를 하는 사이 결국 둘째는 머리를 양 무릎에 파묻고 울기 시작한다. 양팔로 마구 눈물을 훔치면서.

또 다른 농성자는 딸 이야기를 한다. 배가 아픈데도 말을 않고 있다가 결국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큰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면서도 아빠 걱정을 했다고 한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면 될 것이지, 이 곰 같은 노무 새끼가 계속 참았던 모양이에요. 병원 가면서도 하는 말이…. 지가 뭐할라꼬 병원비 걱정을 하냔 말이야."

비디오를 보고 있는데 문제를 직감했다. 내 마음 속에 이미 눈물이 한바가지 고여 버린 것이다. 눈 크게 뜨고 껌벅이며 참는데, 이걸 계속 보다간 다음 순서 진행을 못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안 보기로 했다. 그래서 대본을 보려는데 소리는 계속 들리는 게다. 눈이 다시 모니터로 간다. 결국 스튜디오 구석으로 가서 대본을 들고 소리 내서 읽기 시작했다.

어수선하게 두 번째 진행을 마치고 다음 비디오가 나올 때 나는 마침 작가와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는 이 비디오를 만드느라 아마도 수십 번은 봤을 것이다. 그런 그가 모니터를 보며 한 마디 한다.

"아~ 눈물 난다."

"한 사람이 울기 시작하면 다 울어요!"

그가 방송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를 해준다.

해고된 남편들이 해고와 함께 농성에 들어가면서 월급이 끊기자 아내들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다. 우선 애들 학원을 그만 두게 해야 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은 사원 임대 아파트 단지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논다.) 그리고 뭐라도 해야 할 처지가 됐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 어린 아이들이 있는 여성들이라 흔한 식당일도 할 수 없는 처지라는 점이다. 그래도 아이들 먹여 살리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처음엔 스티로폼 만드는 새벽 공장에 나갔단다. 아이들을 재우고 한밤중 11시에 나가서 새벽까지 일하는 일당 5만 원짜리였단다. 그래서 손에 쥐는 게 한 달 70여만 원. 그런데 이게 곧 일이 끊겨 다른 일을 알아보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집에서 냉장고 냉각기 부품 조립하는 것. 이건 얼마? 개당 15원. 새벽까지 하루 1000개 정도 만들어봐야 일당 1만5000원이다. 한 달이면 30~40만 원.

그렇게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 회사는 사원 아파트에서 나가라고 통보했단다. 그래서 34가구가 쫓겨날 판이다. 이들은 냉장고 부품 조립을 모여서 한다. 그러나 사실은 무서워서 모이는 것이다. 퇴거나 가압류 통보하러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게 무서워 이들은 모여서 작업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쫓겨나면 이들에겐 다른 방법이 없다. 갑자기 부모에게 쫓아가 손을 벌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한다. 최근 부산의 전셋값이 오르는 바람에 내쫓기면 길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과의 인터뷰가 이제까지의 어떤 인터뷰보다 힘들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울기 시작하면 다 운다는 것이다. 사실 이번 방송은 눈물 없이 보기 힘들다. 아버지를 보고 아들이 울고, 전화 끊고 아버지가 울고, 아들 이야기 하며 엄마가 울고, 그 엄마를 보며 아들이 또 울고, 엄마들이 부품 조립하다 인터뷰 하며 울고, 한 엄마가 우니까 옆의 엄마들이 다 울고, 그들과 인터뷰한 작가는 집에 가서 울고, 진행자는 다음날 다시보기 보며 울고.

사실 그날 스튜디오 풍경도 평소와는 달랐다. 비디오가 나가는 동안 카메라맨들을 포함한 7~8명의 스태프가 모두 모니터 앞에 모였다. 이제까지 이들 스태프는 비디오가 나가는 10여 분 동안 이를 보는 이도 있었지만 전화나 잡담을 하며 각자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은 모두들 골똘히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 한진중공업의 정리 해고에 맞서 6개월 넘게 총파업을 벌이던 노동조합은 6월 27일 결국 파업을 철회하고 업무에 복귀했다. 업무 복귀를 거부한 약 30여 명의 조합원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있는 타워 크레인 중간에서 장기 농성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법원이 퇴거 명령 강제 집행을 실시하면서 약 300여 명의 용역 직원이 업무 복귀를 거부하는 노동자를 강제 퇴거했다. ⓒ노동과세계

한마디로 '악덕 기업주'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들의 가정은 붕괴하고 있다. 이게 바로 가족의 생이별이고 가족의 해체다. 다른 말로는 날벼락이다.

정리 해고된 170명 노동자들의 가족은 남편 없는 생활, 아버지 없는 생활을 반년 가까이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울증에 걸린 아내들이 늘기 시작했고 이미 이혼을 한 부부들이 있는데 점점 늘어갈 조짐이란다. 지금 이들은 벼랑 끝에 내몰린 정도가 아니다. 추락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들은 졸지에 이런 막다른 처지에 내몰리게 됐는가.

요즘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한진중공업이 자리한 영도구를 지역구로 가진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국회의장을 지낸 그 지역 정치인인 내가 면담이나 통화 요청을 해도 거부하기를 벌써 십수 번인데 노동자들에게는 오죽 했겠는가"라며 그의 국회 청문회 출석 거부는 "국회를 무시하고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라며 조 회장을 비판했다.

주변의 말을 종합해 보면 조남호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주 독한 기업인인 듯하다. "사람 몇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 않을 사람이에요"라는 말도 들었다. 지난 몇 년간 회사가 보인 회사의 행적도 양식을 가진 회사라 보기 힘들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영도 조선소 죽이기'에 나선 것이 아닌가 싶다. 이쯤 되면 '악덕 기업주' 아닐까.

회사는 정리 해고의 이유로 '긴박한 경영난'을 핑계 대지만 한진중공업은 지난 10년간 4277억 원의 흑자를 본 회사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수익성도 좋았다. 2010년 조선 부문 영업 이익률은 13.7%였다. 이번 정리 해고 직후 한진중공업은 174억 원의 주식 배당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긴박한 경영난이라니. 노동자들 정리 해고 시키면서 돈 잔치 하는 걸 보면 이들은 참으로 앞뒤도 없고 낯짝도 없는 인간들이다.

한진중공업은 수주 물량이 없어서 노동자들을 해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4월 한 해운 조선 전문 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조선 산업은 조선 수주량에서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고 한다. 특히 한진중공업 연결재무제표를 보면, 2010년 말 기준으로 수주 잔액이 5조500억 원. 2010년 중에도 1조7000억 원 수주 계약을 달성했다. 그런데 수주 물량이 없다니.

문제는 이 물량이 모두 한진중공업의 자회사인 필리핀 수빅 조선소에 배치됐다는 것이다. 2006년 이후 수빅 조선소는 67척을 수주했는데 영도 조선소엔 2008년 이후 한 척의 수주도 없는 것이다. 회사 측이 한마디로 필리핀의 조선소로 '몰빵'한 거다. 회사가 영도 조선소를 죽이기 위해, 결국 노동자들 해고의 근거를 마련키 위해 영도에 수주 물량을 배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도 조선소의 문제는 수주 물량이 없는 것 아니라 수주 물량 배분의 문제이다.

노동자 해고는 '가족 살인'

사실 이 수빅 조선소 때문에 2007년 노사는 '해외 공장 관련 특별 단체 교섭'에 합의했다. 당시 사측은 해외 공장을 운영해도 노동자들의 정년을 보장하고 "특히 해외 공장 운영으로 인해 국내 공장 조합원의 고용 불안이 발생치 않도록 한다"는 조항까지 넣어 노조와 합의했다.

그럼에도 한진중공업은 2009년 12월 조선업 불황을 이유로 400여 명(희망 퇴직 349명 포함)을 감원했다. 2010년 2월 정리 해고 중단을 노동조합과 합의했지만 그해 연말 이를 또 깨고 노동자들을 내쫓은 것이다.

1931년 설립된 한진중공업은 74년 역사의 향토기업이다. 그 재벌은 영도 조선소에서 돈을 벌어 부자가 됐고 그 재벌 일가를 부자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영도 조선소의 노동자들이다. 그럼에도 그 재벌은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준 수많은 노동자를 무더기로 해고해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또 그 가정을 파괴하는 만행을 부끄러움도 없이 저지르고 있다. 그 뻔뻔스러움과 파렴치함 때문에 나는 그런 이들을 재벌이라기보다는 악덕 기업주라 부른다.

노동자들은 재벌만큼 부자가 될 생각도 없고 재벌의 재산을 뺏을 생각도 없다. 그냥 열심히 일하고 퇴근 후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꿈이고 행복이다.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했고, 방송에 나왔듯 아이들도 아빠의 회사 한진중공업을 (지금도) 자랑스러워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돈독 오른 악덕 기업인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이들 노동자와 그 가족의 행복을, 아이들의 미래를 빼앗아 무참히 짓밟는 짓을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해고 노동자 가족을 취재한 작가는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은 그 가족에겐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렇다. 채 2년도 되지 않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가족 15명이 생을 달리했다. 한진중공업은 이미 6개월이 지났다.

증오하라!

요즘 <분노하라>(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돌베개 펴냄)는 책이 유행이라는 이야길 들었다. 백번 동감하면서도 지금 우리 한국사회의 현실에는 뭔가 2퍼센트 부족하다. '분노하라'에는 그 방향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대상이 누락된 듯하다. 정확히, 다시 조준하자.

"증오하라!"

우리 사회는 그들을 증오할 권리가 있다. 상생과 공존을 거부하고 수많은 노동자의 고통을 딛고 자신의 배만 불리려는 그들을 증오할 권리가 있단 말이다. 그리고 이는 일방적 권리가 아니다. 그들에겐 자격이 있다. 그들이 우리의 증오를 받을 자격은 차고도 넘친다.

/정희준 동아대학교 교수

한국전쟁은, 어쩌면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개의 국가가 세워지는 국가 형성(Nation-building)의

급격하고도 폭력적인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전근대적인 사고방식과 사회시스템을

깨고 영토와 국민, 그리고 그것들을 규율할 대내적 주권을 장악한 근대국가가 만들어지는 거다.

물론 식민지 조선시대부터 이미 '근대'는 수혈되기 시작했지만, 전쟁은 그야말로 시골무지랭이

촌동네까지도 비켜가지 않고 적나라한 근대국가의 위력과 속성을 뼛속까지 새겨준 셈이다.


밤낮으로 국군과 산사람(인민군)들이 마을을 자신들의 영토라며 선혈이 낭자한 땅따먹기를 하고,

마을사람들이 상대 군인을 돕는 건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라며 을러대고 핍박하는 모습은

남한과 북한, 두 개의 근대국가가 어떻게 서로에 기대어 세워졌는지 그 적대적 공존의 기원을 보여준다.

게다가 당신들은 우리를 위해 가진 것을 탈탈 털어 바치고 필요하면 목숨도 내놓아야 한다는 건,

지금은 이미 너무도 공고해지고 세련되어져버려 잘 보이지도 않는 국가의 폭력성, 비인간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같은 대극장에서 연극이 올랐다는 점으로 꽤나 이슈가 되었던 연극 '산불'은

이런 지점에서 이야기를 출발시킨다. '한국인이라면 꼭 봐야 할 연극'이라느니, '리얼리즘 희곡'의

대명사라느니, 그런 홍보 문구들은 자연스레 그런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이데올로기 전쟁을 통해

드러나는 부조리나 비인간성, 혹은 근대국가의 위선이나 폭력성을 천착하며 쉽지 않은, 가슴

답답해지는 느낌을 가득 안고 나오겠구나 했던 거다. 답없는 질문, 그렇지만 질문 자체로 새로운

프레임이 잡히고 당연했던 상식들을 낯설게 보게 만들 수 있는 그런 멋진 경험이랄까.


그런 기대가 좀 컸던 탓일까. 리얼리즘은 커다란 무대 위에 구현된 산골마을의 초가집이나 언덕길,

봄에 지천으로 피어난 꽃들과 막판의 산불 이미지가 리얼했다고 붙여질 만한 이름은 아닐 텐데.

단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전쟁기를 배경으로 한 어정쩡한 치정극을 본 느낌이었다. 여리고 나약한

인텔리 '선생님'을 두고 이년간 수절했던 두 과부가 욕정과 애정이 뒤범벅되어 만들어낸 삼각관계,

한국전쟁은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조건이었을 뿐 꼭 그때가 배경일 필요는 없었을 거 같고,

그나마 사랑 이야기조차 제대로 설득력있게 풀리지는 않은 것 같다.


1부에서는 나름 충실하게 한국전쟁의 비극성과 작위적이지만 흉포한 근대국가의 폭력성을

묘사하려 애쓴 거 같은데, 20분의 쉬는 시간동안 겨울이 지나고 순식간에 봄이 오며 시작하는

2부에서는 다른 것들은 다 뒤로 물러나고 급작스레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의 갈등과 절망에

초점이 맞춰지는 거다. 남자의 분노도 여자들의 절망도 공감하기에는 너무 급작스러워서, 이후

온통 무대를 벌겋게 피어오른 산불은 극의 절정이라거나 극적인 결말이라기보다는 그냥 모든 문제를

무화시키고 덮어버리는 느낌이었다. 20분의 쉬는 시간동안 나도 모르게 극이 계속 진행되었던 걸까.


물론 공정하게 말하자면 꽤나 재미있었다. 연기도 좋았고, 넓은 무대를 십분 활용한 동선이라거나

그럴듯한 배경과 효과들, 그리고 무대인사 때 특히 인상적이었던 강부자의 무게감이나 관록까지.

다만 막이 내리고 돌아나오면서 뭔가 당황스럽고, 딱히 이야기의 포커스를 잡아서 이해하기엔

모호하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는 거다. 희곡의 원저자가 누구던, 어떤 금테가 둘려 있던 간에, 글쎄,

'한국전쟁기'라는 특수하고도 깊숙한 상흔을 갖고 이정도 문제의식 밖에 못 꺼내고 이정도 이야기

풀어낸다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 특히나 '한국인이 꼭 봐야 할 연극'이라고 팔고 싶다면.







경쟁에 반대한다 - 10점
알피 콘 지음, 이영노 옮김/산눈

제목부터 도발적인 책이다. "경쟁에 반대한다"

경쟁에 반대한다고? 시장 논리와 무한경쟁을 통한 효율성 제고의 신화가 경제 영역을 벗어나 교육, 정치,

문화 전 분야로 뻗어나가는 이런 시기에, 예컨대 '불공정한 경쟁'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경쟁' 그 자체에

반대한단 제목이다. 이런 책은 둘 중 하나 아닐까,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제목으로 '낚아보려는' 책이거나

혹은 작심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려보겠다는 결기 어린 책이거나. 둘 중 어떤 걸까, 이왕이면 후자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처음 집어들었다.


부제는 더욱 웃긴다. "왜 우리는 이기기 위한 경주에 삶을 낭비하는가?"

누구는 낭비하고 싶어서 하나? 그리고 나라고 지기만 한 경주는 아니었단 말이다, 라고 저쪽에서 루저 1이

울컥 핏대세워 이야기한다. 이번엔 졌지만 다음에 이기면 된다고, 더 큰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거라고

저쪽에서 또다른 루저 2가 자신없이 중얼거린다. 이건 낭비가 아니라 '두걸음 전진을 위한 한걸음 후퇴'라고

해병대 팔각모자쓴 저쪽 루저 3은 강단진 표정으로 이를 악문다. 1%의 인재가 나머지 사람들을 먹여살려

준다는 이야기는 이런 식의 경쟁, 줄세우고 비교하고 99%를 '비인재', 루저로 모는 무한경쟁 무한찬양의

극단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당장 이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싫어도 경쟁 속으로 뛰어들고,

혹은 더 큰 과실을 위해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경쟁에 참여하고 있다. 치열한 몸값경쟁을 통해 낙찰,

낙찰가 88만원인 거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배웠네 하는 사람들도 이야기한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여태 인류의 발전 과정을

보면 끊임없는 약육강식의 갈등, 적자생존의 경쟁 상황 속에서 이런 '빛나는 문명'을 꽃피운 거랜다. 한국

사회로 스코프를 좁혀보아도 국내 기업간의 이기기 위한 경주, 뼈를 깍는 경쟁을 통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난 거 아니냐는 이야기다. 초등학교 때부터 진단평가니 뭐니 시험을 보고 경쟁을 붙여야 아이들의

학업성취도도 올라가고, 그래야 우리 지자체의 경쟁력-이라고 쓰고 명문대 합격률이라 읽는다-도 올라가고

국가 경쟁력도 올라가고 나아가 인류 전체의 복지에도 공헌할 거라는 투다.


인류의 놀이문화를 봐도, 어쩌면 경쟁은 인간의 본성일 거라는 지레짐작이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이미

우리는 고대 그리스 이래 스포츠와 놀이 문화조차 '인격 형성과 성숙에 도움이 된다며 경쟁 일편향으로

기울어져 왔으니, 지금의 축구나 야구 같은 현대 스포츠가 전쟁과 같은 양상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욱 폭력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어쨌든 경쟁적 스포츠로 인간 본성에 내재한

전투적 본능을 달랜다는 해석도 있는 거다. 스포츠맨십 따위 치장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건 굳이 승자와

패자를 가려내고 승리를 통해 쾌감을 만끽하려는 욕구다. 승패 따위 가리지 않는 게임은 솔직히 지루하지

않은가, 라고 물어보기도 우스울 만큼 재미있으려면 당연히 경쟁적이어야 한다고 모두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티비에 만연한 온갖 버라이어티에서 보이는 경쟁 구도들, 갈수록 선연해지고 말초적으로 변해가는

경쟁들이 그 단적인 사례들 아닐까.)


그렇지 않다는 거다. 경쟁을 통해 더욱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라는 믿음, 경쟁을 통해 삶이 윤택해지고

의미가 생긴다는 믿음, 심지어는 경쟁이 '인간 본성' 그자체에서 비롯한다는 믿음, 이 모든 것들이 잘못된

오해거나 혹은 악의적인 이데올로기라는 게 이 책의 골자다. 스스로에 대해 확신이 없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는, 자존감 부족이 바로 경쟁사회의 원인이자 결과, 그래서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는 진단. 실은 협력을 통해 더욱 재미있을 수 있고 생산적일 수 있으며, 개인의 자존감 역시 더욱 고양될

수 있는데, 충분히 그런 사실을 증명하는 연구 결과들도 이미 나와 있음에도 워낙 근본적인 문제라 꼼짝도

안 한다는 거다.


생각보다 학술적으로 깊이 들어간 책이고 책 자체가 하나의 주장을 위한 탄탄한 논문이라 해도 좋을 만큼

논리 정연하고 논거가 풍부하다. 교육 심리학자인 저자는 기존의 학문적 필드에서 '정설'이라 일반화되어

버린 설들에 대한 강력한 반박을 하고 있어서 상당 부분 '팩트' 싸움, 유의미한 해석을 도출하는 실험의 인용

여부 및 신뢰도 싸움일 수 있는 건 사실이다. 다만 총 10장으로 구성된 챕터 중 무려 아홉 챕터나 할애해서

집요하게 보여주려는 것, "승리와 성공은 다르다"라는 명제 아래 지금의 "경쟁"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키워드, "협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하게 하려는 저자의 의도와 문제제기는 정말 너무나도 무겁다.


사실 이미 경쟁을 조장하는 구조가 문제냐, 경쟁적인 마인드에 절어버린 사람이 문제냐, 하는 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은 무의미하고 무익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예컨대 '키작은 사람은 루저'라는

말에 분개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경쟁시스템에서 '키'라는 요소로 패배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한편 '키'라는 요소조차 타인과의 경쟁구도 속에서 생각하는 멘탈리티를 이미 장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키'라는 신체적/천부적 조건조차

이 도박장이나 주식시장같은-대부분의 사람이 돈을 잃는다는 점에서-경쟁시장의 칩으로 훌륭히 쓰이고

있는 거고, 또 칩으로 이미 유통되고 있으니 사람들은 '키'를 둘러싼 경쟁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뫼비우스의 띠.


그렇게 보면 참 공고하다. 아무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경쟁하는 동물이 아니며, 경쟁 말고 협력을 통해

보다 나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떠들어봐야, 마치 맑스주의를 오늘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그래, 니말은 다 알겠는데, 참 논리정연하고 그럴 듯하고 멋져보이는데, 그래서 어쩌라구. 그런 차갑고

단단한 벽에 부딪히는 느낌 때문에 책을 읽어내리다가 덮어버리기를 몇 번. 단순히 경쟁 말고 협력에 의한

문화, 경제, 사회가 가능하겠구나 정도 고개 몇 번 주억거리고 말 일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뭔가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 지, 기업 구조, 경제 시스템, 학업 시스템 따위 거대한 것들 말고 당장

경쟁에 길들어버린 '내 입맛'은 어떻게 바꿔야 할지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저자는 치사하게 자기

전문분야인 '교육'에 대해서만 몇 마디 아이디어를 던져주고 말았다.


그냥, 계속 생각해 볼 만한 책이고 어쩌면 좀 확장해서 읽어보아야 할 책일지도 몰라서, 정리가 채 되지

않은 상태로 글을 쓰고 있다. 아니, 정리해 버릴 책이 아닌 거다. 계속 책상 위, 머릿속에서 ing로 남아있어야

할 책, 남아있어야 할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외부의 자-타인이 되었건

그들이 정해둔 기준이 되었건-를 빌어 스스로를 재어 보며 위축되거나 과시하지 않고, 스스로 혼자 설 수

있도록 좀더 애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취직 시즌이라 알게 모르게 또 마음속의 자를 가동해보는 자그마한

모터 소리가 윙윙 들리는 거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어디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어디쯤, 이런 식의 등수

놀이를 피하려면 다소간 '도 닦는 마음'이 필요한 거다. 스포츠에 비기자면,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려는

축구를 하기보다는 자신의 신기록을 갱신하려는 역도나 높이뛰기쯤에 임하는 마음이랄까.
 

책을 보면서 문득 떠올랐던 대학교 2학년 때의 기억 하나. 학과 신입생들을 맞이하는 새내기준비위원회

회장을 맡아서는 오리엔테이션에 뭐하고 놀지, 뒷풀이에선 뭐하고 놀지, 새터가서는 또 뭐하고 놀지

나름 열심히 고민고민했었다. 뭐 결과물이야 통속적이고 보잘것 없었지만, 만약 내가 '경쟁'과 '협력'을

감별해낼 만큼의 미각을 갖고 있었다면 좀더 신선하고 즐거운 놀이들을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함께 즐겁고, 서로의 얼굴을 기억해내고 이름과 쉽게 매칭시킬 수 있게 만드는 게임들.

누구보다 앞서고, 누굴 제치고 이기려고 바둥바둥대느라 잔뜩 지치고 상처받았을 녀석들하고 굳이

또 그런 게임을 할 필요는 없었던 건데.


어떤 책들은 읽고 나면 숙성시킬 시간이 필요하다. 사방팔방으로 울림이 번져나가는 책,

그게 소설이던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되었던, 들불처럼 사방으로 번질 수 있는 의미의 갈래들을

하나씩 새겨보고, 그게 어떤 의미와 연결될 수 있는지를 되짚어보는 과정은 읽는 것 자체와는

또다른 큰 쾌감을 준다. 그리고 그런 책들에서 자신이 애써 고삐를 추스려 잡아 자신의 말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 중의 아주 조금에 불과하다. 뭐, 고작해야 학사 나부랭이인 내 수준에서

그렇단 얘기다.


민중에서 시민으로 - 10점
최장집 지음/돌베개

최장집 교수의 이 책, 그의 다른 책들처럼 굉장한 책이다. 나는 그저, 내 나름의 맥락에서 그 중

일부를 떼어서 조금이나마 사고를 자극하고 정렬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은

'리뷰'라기보다는 일종의 발제문.


'갈등'과 '분열'을 조장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전제로 한다. 특정 주제에 대해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는 두 개의 집단이 맞서고, 두 집단은

모종의 타협이나 정치적 과정을 거쳐 적절한 균형을 만들어낸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지만

정치의 영역에서는 그런 무조건적인 통합의 메시지는 국가주의나 집단주의를 초혼할 뿐이다. 시끄러울 수 밖에

없다. 국회는 안건을 갖고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게 당연하고, 시민들 역시 떠들어댈 광장이 필요하며,

시스템이 안배한 통로 속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괴로운 사람은 초법적 수단조차 동원해야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갈등선'이 비로소 그어지는 거다.


갈등을 부정하고 묵살하는 사회

문제는 우리 사회가 그런 '갈등'에 대해 그 존재부터 부정하고, 묵살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시스템 내의 '갈등

발견&해소 프로그램'은 협소하고 취약하기 짝이 없어서, 모든 갈등은 사회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치환된다. 결국 사교육비 많이 부담하라는 교육문제, 애기 외롭지 않게 키우라는 출산율문제, 손 많이 씻고

쇠고기는 알아서 골라 먹으라는 보건문제, 우유 많이 먹고 성형외과 찾아가라는 젠더문제, 눈높이를 낮추고

기술을 배우라는 취업문제. 사실은 사회 문제, 즉 사회적인 갈등선을 빚어내는 문제들이 대부분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소하도록 종용되고 있다.


복불복 마인드로 순치되어 버린 파편화된 개인

그리고 조용한 사회. 누군가 '노'라고 이야기하면-갈등을 말하려 하면-사회 불만세력, 반정부세력, 심지어는

국론 분열과 국력 낭비를 조장하는 매국노로까지 매도당한다. 지금의 비정규직 정책에 반대한다, 한미FTA에

반대한다, 재개발 정책에 반대한다, 등등 이어지는 '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답은 언제나 그렇듯 무조건적인

사회 통합의 강요, 국가발전 한길로 매진해야 할 시기에 힘 빼지 말자는 국가주의적 교시였다. '노'라고 말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스템적 안배나 기제가 없는 상황에서 번번이 '불법'으로 밀려나는 최악의 상황에선, 1박2일식

'복불복 마인드', '나만 아니면 돼'라는 파편화된 개인들은 그러한 무서운 국가 앞에 무력할 뿐이다.


똘레랑스는 갈등 인정 이후의 문제다

그게 민주주의일까. 황장엽이 말하고 보수세력들이 떠드는 '한국식 민주주의'가 그런 거라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국가주의, 혹은 다른 무엇이다. 민주주의는 최장집의 표현을 고대로 빌건대 "폭력을 배제한 갈등과

타협에 기초한 정치체제"에 가까운 무엇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한 똘레랑스는 고사하고 갈등 자체를 터부시

하고 있는 거다. 시끄러운 국회가 싫다, 시끄러운 광장이 싫다, 결국 '시끄러운 게 싫다'란 정도로 요약될

갈등 상황 자체에 대한 혐오나 염증이 문제다. "정치인 아저씨들은 왜 맨날 싸워요?"라고 묻는 어린애의 똘망한

눈망울 앞에 무조건 부끄러워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실제적인 갈등을 대체하는 추상적 전선(戰線)

혹은 갈등을 묵살하고 없는 것 취급하는 것과 동시에, 추상적인 양극 구도로 몰아간다. '민주 대 반민주', '진보

대 보수', '평화개혁세력 대 냉전수구세력' 따위의 갈등선은 뭔가 선명하고 뚜렷해 보이지만, 사실은 더이상

내용도 없고 실천적 의미 또한 던져주지 못하는 죽어버린 그림이 아닐까. 87년을 기점으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고 나서, '민주', '진보', '개혁' 따위의 단어로 지시되는 내용은 그때그때 바뀌어 버렸다. 이미 갈등선이

그 고도로 추상화된, 그렇지만 그래서 오히려 쉬운 단어의 세계를 넘어서 복잡다단한 현실세계로 넘어온 거다. 


'부러지지 않는 쌍쌍바', 자잘한 균열선들의 긍정적 역할

두 개의 그림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쌍쌍바 여러개를 고르게 포개어 쪼개는 그림, 그리고 쌍쌍바 여러개를

무질서하게 포개어 부러뜨리는 그림. 첫번째 그림에서 쉽게 부러질 쌍쌍바가 '민주 대 반민주'니 '진보 대

보수'니 따위의 극단적이고 추상적인 갈등선으로 일관하는 사회의 파국 혹은 불건전성을 의미한다면, 둘째

그림에서 좀처럼 부러지지 않을 쌍쌍바들은 예컨대 '동성애 찬성 대 반대', '증세 찬성 대 반대', '등록금 무료

찬성 대 반대', '모병제 찬성 대 반대' 따위 수많은 이슈에 대한 자잘한 갈등선을 품어내는 사회의 건전성을

의미한다. 최장집은 정당정치가 그러한 자잘한 갈등선을 반영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의 부재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떠할까. 정당 정치는 마비되었고, 광장 정치(광장 민주주의라 높이 평가되기도 한)는

고양되지 못한 채 배설되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근대 정치에 걸맞는 '자유주의적 인간형'조차 제대로 세워지지

못한 채 지지부진하다. 거대한 국가와 동등한 계약관계로 묶인(혹은 묶였다고 상정되는)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인간, '시민' 대신에 NL(민족민주)이니 PD(민중민주)니 통일조국, 민주국가건설을 위한 '민중'만이 화석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광기에 가까운 월드컵 응원 열기, 골프와 피겨, 축구 선수에 대한 과도한 국가적 상징화,

새롭게는 '국격'이니 '국위 선양'이니 따위의 국가주의적 수사에 푹 절어 있는 것이 하나고,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면 '네티즌 수사대'가 몰려들어와 융단폭격을 하는 원시적/집단주의적 작태가 다른 하나다.


'민중'에서 '시민'으로 바꿔내지 못한 한국 민주주의

최장집이 이른바 386세대, 운동권에 대해 비판하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기득권 세력,

구조에 대한 거울 이미지로서 스스로를 형상화하고 안티화해내면 되었을 뿐인, 역사적인 한계기도 하지만 능력

부족이기도 했던 부분이다. '민중'이란 불분명한 역사적 집단에 기대어 '역사의 정방향으로의 발전'을 믿었던,

지금과는 정반대의 뒤집어진 세상만 꿈꾸면 된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불철저했던 문제의식은 곧 김대중/노무현

두 자칭 '진보성향' 정권의 실패 원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결국 김대중과 노무현, 이명박은

동일한 문제를 내재하고 있다, 혹은 이명박은 10년 '좌파 정부'의 예정된 귀결이었다고 판단한다.


김대중과 노무현, 그들을 박제화한 '민중'의 배신은 당연하다

과연 그런 걸까. 판단은 유보하되 의견을 말해 보자면, 김대중과 노무현, 두 대통령의 죽음에 비통해 하던 이들은

'민중'이었지 '시민'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세속된' 이해관계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갈등을 시스템 내에서

해소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시민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태에서, 또 이명박이 퇴행시켰거나 노출시킨

허술한 민주주의에 놀란 상태에서 '민주 대 반민주'라는 손쉬운 갈등선에서 어느 한 쪽을 택한 '민중'이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이명박 덕분에 갑자기 '민주'의 화신, 실패한 영웅으로 부활했지만, 사실 그들은 재임 중

수많은 이슈에 대해 사람들을 실망시켰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도 시스템 내로 그런 이슈, 갈등을 들고 들어와

해결하는 기제를 마련치 않았다. 그 결과다. '민중'은 속되고 삿되다 하여 정치권에서 다루지 않는 온갖 생활

밀착형 이슈들, 부동산과 주식과 교육과 취업과 세금의 문제에서 또다시 '김대중과 노무현'의 가치를 배신하고

있다. 이명박의 지지율을 보면 알 일이다.


운동권 세력이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

그건 한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을 10년을 날려버린 정치권의 실패다. 그들은

"샐러리맨 세금낮추기 정당", "공휴일에 지하철 막차시간 연장하기 정당", "대학생 일자리 보장 정당" 따위, 좀더

세분화되고 생활에 발딛고 있는 이슈로 자잘한 찬/반 균열을 그어줄 수 있어야 했다. 그런 이슈들의 묶음으로

커다란 '진보'를 형상화할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이 곧 '구체에서 추상으로' 나아가라는 구호의 함의였을 거다.

사실 국가 발전을 위해 다른 갈등들을 묵살하는 기득권 세력의 몸짓은 지금의 '운동권' 세력에게도 여기저기

발견된다. 조직 내 성추행 사건을 덮는다거나, 전경과 대치하기 위해 필요악으로 동원되는 '사수대'의 군대식
 
규율, '민주주의'의 대의를 위해 개인의 도덕률과 사명감의 차원으로 모든 것을 치환해 버리는 방만함까지.


자잘한 이슈들을 그어내고 반영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좀더 갈갈이, 중층적으로 찢겨야 한다. 무슨 모세의 기적도 아니고 반공이니, 신자유주의니, 혹은 친미/반미니,
 
심지어는 희화화된 형태의 '보수꼴통'과 '친북좌파'의 굵고도 무식하며 무시무시한 일도양단식 균열말고. 그런

세속화되고 일상적인 형태의 자잘한 균열들이 좀더 촘촘하게 그어지고 나서야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고착되고

성숙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서구처럼 국가 이전에 '시민'이 먼저 형성되는 것이 실패하였다 치더라도,

이제라도 강력한 국가 앞에서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시민'을 불러내는 정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분열을 말할 때다. 지금처럼 인터넷 상에서 서로 ^^해가며 좌빨이니 우빨이니 맞지 않는 화살만

잔뜩 주고 받는 소모적인 이야기로 분열하는 게 아니라, 정말 서로의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입장이 다름을

확인하기 위한 분열 말이다.



덧댐.

어쩌면, 이명박을 뽑은 국민들이 '돈을 많이 벌게 해줄 것'으로 기대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으로는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뿐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경제발전'에 대한 감수성과 비판의식을 키워내야겠지만

'돈을 많이 벌게 해줄 것'에 대한 디테일과 방법론이 경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는 '진보'를 자처한 진영이

그 이슈를 송두리째 방기했음을 반증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형태의 삶의 부유함을, 어떻게 창출할 건지에

대한 미시적 수준의 갈등선을 역시 그었어야 한다는 거다. 이 역시 이명박의 집권이 김대중/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운동권 세력이 정치적 발전에 소홀했던 덕택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한다. 최진실, 노무현, 정몽헌, 최진영..활자화된 이름들의 죽음 이외에도 도처에서 학생이,

회사원이, 주부가, 아이가 죽음을 선택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지만 사람들은 대개 그들의 선택에 대해

원망하고 훈계한다. 더러는 비웃음이 섞인 훈계일지도 모른다. 니가 힘들다는 그 삶, 난 잘 살고 있는데..하며.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한 사람에 한번쯤 생각해본 사람까지 합한다 해도, 어쨌던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그들은

소수자일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의 이름으로 자살의 경박함과 무책임함을 비난하고, 사회는

종교와 철학과 과학의 이름으로 자살을 단죄하는 판이라 그렇다. 이미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살려두기 위한 '반면교사'나 '예외'가 된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같다.)

(참고 : [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


"자살이라는 문제는 심리학적 접근으로 풀 수 없다. 생명 법칙이 깨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이루어진다."



자살을 적대시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또 일견 그럴 듯 하다. 기본적으로 생명은 소중하고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채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역할과 기대가 그(녀)에게 감겨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주변인과 공동체에

커다란 아픔/손실을 주는 이기적인 행동이란다. 잠시의 우울함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어른스럽지 못한'

나약함의 소산이라고도 하고, 몸이 건강하지 못한 것과 같이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증좌라며 심리적/생리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까지 곁들여진다. 게다가 여전히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등의 종교적인 믿음이 단단한

실체로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자살학의 진단이 틀리지 않다고 해도, 자살을 이미 감행했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공허할
뿐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인생상황'이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절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다. 외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마디로 아무것도 없다. 당사자만이 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렇다.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힘들다는 사람들을 끌어와 앉혀서는, 니가 죽으면 남은 사람들이

뭐가 되겠니, 하며 니가 맡아야 할 역할을 끝까지 수행하라는 압박이다. 단적으로 최진영의 죽음이 그랬다.

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조카는 어떡할 거냐, 엄마는 어떡할 거냐, 누나 볼 낯이 있겠냐, 따위 오지랖 넓은

한가한 이야기만 잔뜩 해댔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는, 본인이 어떤 고민에 빠져 있었는지, 어떤 과정 끝에

죽음을 선택한 건지 등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의 노력은 없었다. '우울증'이란 단어 하나로 끝이었다.


"그(자살을 거부하는 자)는 자신의 고독조차 온전히 체험하지 못한다...그저 주어진 삶을 긍정했으며, 터져
 나오는 구토를 애써 부정했다. '긍정과 부정의 균형'은 사실 평형을 이룬 게 아니다. 생물로서의 본능과 사회의
 요구에 따르며 자신에게 지워진 무게를 별거 아니라고 한사코 우기는 셈이다."



자살은 말처럼 쉽지 않다.  아메리가 굳이 '자유죽음'이란 단어를 쓸 만큼, 자살은 '자유를 집중적으로 체험하는

순간', 그래서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상황으로 스러지고 만다는 깨달음을 거쳐야 가능한 거다.

자살하고 나면 모든 게 무의미해질 거고,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사회성/기능성'에 기반한 사회의 협박 이외에도 스스로 죽기를 거부하는 강렬한 생물학적 본능이란 것도

넘어야 할 거대한 벽이다.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는 생명의 논리를 온몸으로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인생은 최고로 가치있는 자산이 아니다."


그럼에도 죽고자 한다면 그런 상황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자연본능과 사회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다.

나는 자연적인 죽음을 거부한다, 사회적인 동물로서 사회가 요청하는 온갖 생산활동-애낳고 밥벌이하는-을

계속 수행할 것을 거부한다. 일체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생명체로서 가장 근본이 되는 생명보전의 대원칙까지

벗어던지겠다는 선언이다. 그것은 자신이 판단하건대 더이상의 삶은 부질없는 생명의 연장일 뿐 죽음보다

못하다는 결론이 지어진 후에야 가능하다. 그것은, 아메리가 말하듯, 삶을 던져 '자유'와 '삶'의 의미를

지키겠다는 모순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런 극단적인 판단에까지 이르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개개인마다 다를 거다. 다르지만

또 같을지도 모른다. 아메리는 하나의 단어를 제시한다. 에셰크(Lechec), 치욕적인 꼴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것. 죽음이 그를 세상으로부터 몰아내기 전에 이미 세상이 그를 버렸다. 더이상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느끼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미래가 더이상 없는 중증 환자, 삶의 전부라

여겼던 사랑의 실패자, 심지어는 대입시험에 실패한 사람, 남들 눈에 어이없고 하찮아 보일 문제라 해도 판단은

본인이 하는 거다. 삶의 결정적 순간은 본인만이 안다.


"자유죽음은 순전하고 지극한 부정이다. 여기에 어떤 긍정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자유죽음은 실제로
 '무의미'하다...(그러나) 지성의 논리로 볼 때 자유죽음이 무의미하다고 할지라도, 자유죽음을 택한 결단마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자살은 오히려 '인간성'과 '존엄성'에 기댄 최후의 선택일 수 있다.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거다. 죽음을 향해 마지못해 꾸역꾸역 나아가는 인생과 '에셰크'에 맞서 스스로의

자유죽음으로 직접 끝낸 인생 중 어떤 것이 정답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겠지만 최소한, '자살할 권리'는

복권되어야 한다. 인간이기에 스스로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하나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자살을 결심하고 수행하기까지, 그 어느때보다도 강력하게 스스로의 자유를 체감하고 밀도높은

삶을 살았다고 본인이 느낀다면 본인 이외 다른 누가 그 삶에 대해 주제넘은 훈계와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찾아온 죽음, 이는 겁쟁이의 죽음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택한 죽음은
 다르다. 깨어있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택한 죽음, 이것은 자유죽음이다."



아메리는 자살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삶의 욕구'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주목하려고 한다. 꾸역꾸역 생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살아내겠다는 다짐에 충실하고자,

삶의 가치와 인간적 존엄을 지켜낼 자유를 극한으로 수행하고자, 맹목적으로 살아남는 대신 차라리 인간으로

죽음을 택하겠다는 결단이다.


"삶의 이야기는, 그 삶이 어떤 것이든 간에 실패의 이야기이다." 사르트르.
"잠이 좋다. 더 나은 것은 죽음이다. 절대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가장 좋았으리라." 하이네.
"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 퀸, 보헤미안 랩소디.



그렇게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융통성없고 고집스러운, 순진하다 못해 꽉 막힌 쑥맥들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에 대한 존중과 포용이 필요하다. 그들이 가진 '에셰크'에 공감하고 포용하려는 자세가 없는

사회야말로 자살의 온상이다. 실패와 좌절의 두려움을 참을 수가 없어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계와

비웃음, 그리고 권해지는 자연적인 죽음은 최악의 '에셰크'인 거다. 우리 사회의 드높은 자살율엔 이유가 있다.







#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나 생각이 삐져나오면 '요새 삶이 힘드냐', '우울하냐'고 물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그럴 때만 입에 올려야 하는 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죽을지 살지의 문제가 김밥을 먹을지 햄버거를

먹을지의 문제만큼 유쾌하거나 사소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꼭 우울하거나 피폐해졌을 때만 떠올려야

하는 건 아닌 거다. (그렇다고 요새 내가 삶이 힘들지 않다거나 우울하지 않다는 건 아니..ㄹ 거다.)


진지한 것과 우울한 건 다르다. 그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자살'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죽음과 관련된 것들에 병들고 패배한 듯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봄이라고, 볕이 따시다고, 만물이

생동한다는 따위, 죽음을 터부시할 이유가 하필이면 손꼽을 수 없을만큼 쌓여있는 이 때라도, 살아갈 자유가

있다면 동시에 죽을 자유도 있는 거다. 동전의 양면이다.



자유죽음 - 10점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김남시 해제/산책자


* 알라딘 4월 마지막주 이주의 TTB에 선정되었습니다.



1984 (반양장) - 10점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문학동네


솔직히 그런 책들이 있다. 제목을 워낙 많이 들었거나 그 핵심 아이디어라며 쉽사리 인용되는 한두가지 개념에

워낙 익숙해진 탓에 미처 읽기도 전에 이미 읽었다고 착각하고 마는 책. 예컨대 '빅브라더'같은 단어가 그런

착각을 일으킨다. 하루키의 1Q84를 두고 '아이큐84(IQ84)'라며 이상하게 읽어대는 어떤 문학평론가를 조소하다가,

그러고 보니 나 역시도 하루키가 1Q84라며 비튼 제목의 원전 격이랄 조지 오웰의 '1984'를 여태 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정말정말 굉장히 멋진 책이다. 하루키를 무지 좋아라 하지만, 그의 1Q84는 조지 오웰의 1984과 매우 '다르다.'

그리고 아마 2984년쯤에도 살아남아 찬사를 받을 작품은 조지 오웰의 1984일 거라는 데 걸겠다. 물론 두 작품은

제목 빼고는 별로 주제도, 내용도 겹치지 않으니 굳이 두 작품을 비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굳이 1Q84를

제목으로 내건 하루키가 1984의 문학적 성취를 의식하고 호승심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뭐랄까, 두 번째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불현듯 마오쩌둥의 '영구혁명론'이 떠올랐다. 사회주의가 성취되기

위해서는 한번의 혁명, 한번의 전복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애써 이뤄낸 성취가 무위로 돌아가거나 후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모든 분야에 걸쳐 근본적인 변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그 '영구혁명론'의 대강인데,

이 책에서 그려지는 1984년의 세상은 그런 영구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세상인 거다. 다만 그 혁명은 위로부터의

혁명, 그러니까 기득권층, 더 적나라하게는 지배계급의 '영구혁명'이라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겠다.


1984년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권력, '빅브라더'는 역사의 흐름을 이해했다, 혹은 이해했다고 믿는다. 권력을 쥔

상층계급에 대항해서 자유와 평등, 정의 따위의 수식을 내건 중간계급이 하층계급을 끌어들여 그들을 전복시킨다.

그리고 중간계급은 상층계급으로 자리이동하고 다시 새로운 중간계급이 생성되어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한다는

식의, 커다란 순환을 무한반복한다는 것이다. 이제 권력은 그 역사의 흐름을 이해했으니 그 지식을 활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영구히 보유하려 한다. 중간계급이 성장하기 위해서 집적되어야 하는 부를 족족 소진시키고,

중간계급을 각성시키기 위한 지식을 황폐화시키겠다는 황당하지만 살벌한 전략. 그게 지배계급의, 지배계급을

위한, 지배계급에 의한 '영구혁명'의 목표다.


듣기엔 우습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다. 온 인류를 먹여살리고 노동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만큼 경이로운 수준에

오른 생산력은 주변국과의 쉼없는 전쟁을 위한 총과 대포를 위해 소모된다. 현재의 세상을 비교하고 평가하기

위한 나침반이자 전거로서 기능해야 할 과거의 역사, 과거의 지식은 매시간 새롭게 씌여진다. 늘 전시체제 하에서

동원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제 전쟁이 없던 시기를 기억하지 못하며, 배급되는 신발과 면도날의 질과 양이

불과 일년 전에 비해서도 양호해졌는지를 따지지 못한다. 그들은 전쟁의 광기에 불현듯 휩싸이면 빅브라더를

위해 만세를 부르며, 집안 화장실마저 감시하는 사상경찰 하에서 억지웃음을 지을 뿐이다.


권력이 자원을 무익하고 비생산적인 쪽으로 소모해버리고 적극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건 2010년 지구에서는 이미 익숙해져 버린 풍경이다. 한국만 해도, 온 국민을 먹여살리고 북녁의 주민들까지

먹여살릴 수 있을만큼의 풍요한 자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굳이 희소하게 만들어 버린다. 전쟁무기를

구매하고 국외와의 불공정한 경쟁에 노출시키며 4대강 같은 무익한 사업에 쏟아부으며 '소모'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와 이데올로기를 만들기에도 게으르지 않다. 권력과 언론간 '반복과 차용'의

근친교배를 통해 사실로 굳어져버리고 마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들. 천안함 사태가 그렇고, G20가 그렇고,

사대강 사업이 그렇고, FTA옹호론이 그렇다. 그 와중에 국내이슈를 덮어버리는 애국 마케팅도 절묘하다.


조지 오웰의 상상력은, 그렇지만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괜히 그를 '디스토피아'의 무시무시한 재현자로

이야기하는 게 아닌 거다. 이들, '빅브라더'를 전면에 내세운 채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춰버리려는 이들은 사회를

통제하고 구조를 고착화시키려 안간힘을 쓸 뿐만 아니라 아예 인간의 사고 자체를 개조하려 든다. 기계에서

자동으로 배열된 몇가지 단어로 짜맞춰진 시와 노래만을 유포하고, '섹스를 더럽게 변질시켜' 억압된 성욕을

전투적인 증오심과 지도자 숭배로 전환시키는 거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사고능력을 둔화시키고 제거하기

위해서 언어 그 자체를 새롭게 정리한다. 어휘를 계속 줄이고 줄여서 생각의 폭을 좁히고, 결국에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기계인간을 만드는 것이 빅브라더가 생각하는 혁명의 완수.


빅브라더의 생각대로 될까.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다양한 동사와 형용사들, 깊은 사고와 반성을 가능케 하는

관념어들이 없어지면, 정말 인간이 변화할까. 그리고 신발깔창처럼 제작되는 노래와 시들이 재래의 예술을

대체하면 인간의 문화는 황폐해지고 말까. 성욕을 억압하면 인간들이 까칠해져버려서 전투적으로 변하고

전시상태의 비인간성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는 걸까. 전통적 가정을 하나의 상호 감시단위로 변화시킬 정도의

강력한 감시와 통제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수락할 수 밖에 없게 될까.


모르겠지만, 조지 오웰은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고 말한다. 이미 그의 주인공 윈스턴조차 찢겨진 시체의 팔목을

무심히 발로 차내어 버릴만큼 황폐해졌고,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을 곡괭이로 살해하고 말겠다 다짐할 만큼 살벌하다.

결국 지독한 고문과 자기 부정을 거쳐 윈스턴이 빅브라더를 사랑한다 고백하는 최후의 순간에 이르면, 오웰의

예측은 옳은 것이었다고 동의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고 마는 거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런 상황에까지 몰리면

인간은 멸종하고 말겠구나, 역사는 멈추고 말겠구나, 기껍지는 않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게 단순히 조지 오웰의 '사고 실험'이었으면 좋겠다. 아직 어떤 권력도 빅브라더만큼 철저하게 국민들을

통제한 바 없으며, 언어를 조직적으로 퇴화시키는 건 고사하고 문화와 사생활과 사고방식을 규율하고 억압한

적은 없다고 믿고 싶다. 그렇지만 불길하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간 신체에 대한 구속력-생체권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해졌고, 국가와 자본주의의 동학 내에서 대중문화는 스스로 천박해진지 오래다. 전신을

스캐닝하고 개인정보와 생체정보를 집적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란 너무 쉬워졌다. 민주주의의 이름을

팔아 하향평준화를 강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자기 성찰과 반성적 사고를 단련하기 위한 시간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슈들에 선점당한다고 느낀다면, 너무 시니컬한 건가.


다행히 아직은 그렇게까지 위태롭지 않다고 해도, 조지 오웰의 이 암울하고 염세적인 이야기는 여전히 값지다.

자연스런 흥망성쇠의 역사 흐름을 멈춘 채 현재의 지위와 특권을 영원히 장악하겠다는 그들 권력자들의 욕심은,

조지 오웰이 그 결과로 그려낸 세상은 낯설지언정, 그 욕심 자체는 지독히도 진부하고 익숙한 거다. 그들은

언제고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며, 그들을 위해 유리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를 강권한다.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 아닌가. 4대강은 운하가 아니고, FTA는 모두에게 유리하며, 아랍인은 테러리스트이고, 미국은 영원한

우방이자 세계경찰이고, 그리고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란 이야기.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다. 2+2=5, 라디오헤드의 이노래가 1984의 이 대목에서 비롯한 건 아닐까.

이제 끔찍해질 거야, 도망칠 곳은 없어.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쳐도 이제 너무 늦었어.


Are you such a dreamer
To put the world to rights?
I stay home forever
Where two and two always makes up five

I lay down the tracks
Sandbag and hide
January has april′s showers
And two and two always makes up five

Its the devil′s way now
There is no way out

You can SCREAM IT, you can shout
It is too late now

Because...
You′re not there!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You have not been paying attention

paying attention
paying attention
WHEN I SAY SOON oohh

I try to sing along
But I get it all wrong
′Cause I’m not
′Cause I’m not

I swat ′em like flies but like flies the buggers keep coming back NOT
But I’m not

All hail to the thief
All hail to the thief

But I′m not
But I′m not
But I′m not
But I′m not

Don′t question my authority or put me in the box
′Cause I′m not
′Cause I′m not

Oh go and tell the king that the sky is falling in

When it′s not
But it′s not
But it′s not
Maybe not
Maybe not



걸작은 이유가 있다.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생명력이 넘치는 연기, 군더더기를 더하거나 덜함이 없는

깔끔한 화면,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의 잔혹한 시험대를 극복한 너른 공감대를 확보해 내는 이야기까지.

그런 세 가지만 확보가 된다면 그 작품은 한 시대를 풍미하고 다시 다음 시대의 전범 혹은 클래식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허공에의 질주, Running on empty. 영화는 어쩌면 굉장히 특수한 시대의 특수한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1968년 신좌파의 혁명이 있었고, 베트남전에서 쓰인 네이팜탄을 개발했던

연구소에 테러를 가했던 젊은 남녀가 도망자 신세로 살아가는 시대, 더이상 히피들의 노래소리는

들리지 않고 68혁명의 잔당들은 젊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반동의 시대인 거다. 게다가, 쉼없이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며 도망다녀야 하는 그 젊었던 두 남녀는 이제 대학을 가야 하는 나이대에 이른

두 아이의 부모. 이런 가족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88년은 그런 부모와 가족이 정말 있을 법한,

68혁명의 아이들이 다시 그들의 아이들을 키워냈을 맞춤한 시간대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니다. 영화는 68혁명의 잔향에 기대지 않는다. 어쩌면 88년쯤에는 그 향기가 너무도

강하게 남아있어서 다른 것들이 미처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또다시 20년쯤 흐르고 나니

조금은 숨겨져 있고 조심스럽던 다른 것들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띄는 것 같다. 영화가 가리키던 현실을

조금은 은유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가족들과 주변 인물들의 말과

행동에서 계속 환기되는 것은 겉으로는 '68혁명의 정신'이지만, 지금에 와서 읽히는 것은 차라리

'가족'이란 이름의 굴레에 대한 은유거나 '때가 되어 헤어지는 것의 슬픔과 아름다움'에 대한 지극히

섬세한 묘사인 것 같다. (간편하게 '성장영화'란 네글자로 뭉뚱그리기엔 뭔가 너무너무 억울하다.)


세상에 믿을 것은 우리 가족밖에 없다는 단호하고도 절박한 믿음, 그걸 단순히 꽉 막히고 세상에 겁먹은

부모의 못난 소리라고 치부하기에는 '눈감으면 코베어간다'는 세상의 잔인함과 무자비함이 선연하다.

이병철이 이건희에게, 이건희가 이재용에게 금권력을 넘기는 거나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권력을 넘기는 것 모두 그런 단호한 믿음의 소산인 거다. 세상에 믿을 건 우리 가족, 내 피가

섞인 우리 핏줄이야말로 세상이 무너져도 믿을 수 있는 내 편이라는 오래고 오랜 믿음. 당대의 독재자들이

그런 식인데 하물며 힘없고 빽없는 일반인들이야 어떠랴 싶어서 부모의 못난 소리는 가슴이 아프다.


사실이기도 하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는 게 사실이고, 부모자식간의 인연이란

수십년 세월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건 '핏줄이 당긴다'며 수십년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르지않는

눈물로 증명되는 거다. 자식 역시, 특히나 한국처럼 자신에게 무조건적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는 부모를

둔 자식들에게는, 자신의 부모를 '그(He)'라거나 '그녀(She)'로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단순히 멘탈리티의 문제가 아니라, 온갖 연고로 묶인 패거리문화와 시스템이 최후의 보루로

'가족'을 더더욱 부각시키고 신성화해 버린 점도 있을 테고,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안정적인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가족' 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한 점도 잊지 말아야 할 점일 테고.


그렇지만 가족은 또다른 가족을 낳으며 분열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필연이다. 플라나리아의 몸통을

반으로 쪼개면 각기 두 개의 새로운 플라나리아로 분열해 생존하듯, '가족'을 찢어내어 다시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내는 거니까 아플 수 밖에 없다. 자식들은 크고 부모는 늙는다. 자식들은 부모가 되고

부모는 죽는다. 단순한 과정 속에 숨어있는 엄청난 저항과 혼란, 싸움의 징후들이 보이지 않는가.

'허공에의 질주'에서 나온 리버 피닉스처럼 피아노와 대학이 탐탁치 않은 아버지와 맞서기도 하고,

마샤 플림튼처럼 중산층 부모의 삶이 허위에 가득찬 채 인간적이지 않다며 부정하기도 하고, 반대로

그들의 부모는 그들의 자식이 철이 없다거나 아직 부모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하며 갈등한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헤어짐은 이르건 늦건 약간의 시차가 있을 뿐 예비되어 있는 거다. 언제까지

품안의 자식이고, 언제까지 하늘같은 부모여야 할 건가 말이다. '토이스토리3'에 나왔듯, 살아있는

것은 모두 나이를 먹고 헤어지기 마련이다. 서로에게 칼을 꼽고 손톱을 박으며 헤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식의 잘못된 헤어짐은 결국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고 짐이 된 채

불구를 만들고 만다는 게 수많은 문학과 예술작품들의 오프닝이었으니 적지는 않을 거 같다. 아무리

성숙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좋게 헤어진다고 해도, 그 헤어짐은 마치 자궁을 빠져나오는 순간과

같아서 배꼽이란 상흔을 남긴 채 더이상 이전의 세계를 허용하지 않을 거고.


굳이 부모자식간의 관계로 한정할 것도 없다. 남자와 여자, 친구와 친구, 선생과 제자, 결국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라고 할 만한 그런 관계에는 어느 순간 헤어짐과 분열의 순간이 닥쳐오게 된다.

그게 우발적이던 필연적이던, 그런 식의 평가는 한참이 지난 후에나 내릴 수 있을 뿐이지만 만약

언제고 벌어질 일이 벌어졌다는, 피할 수 없는 때라는 느낌이 왔다면 그런 헤어짐에는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 걸까. 쥬드 허쉬와 크리스틴 라티처럼, 리버 피닉스처럼 나 역시도 처음에는

혼란스러워 하다가 때론 반발하다가, 결국은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슬프고 아름다운 분열의 과정을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까. 슬프고, 서럽고,

미안하고, 안타깝지만, 또 한켠, 뿌듯하고, 기쁘고, 대견하고, 설레는 느낌들이 마구 뒤섞이지 않을까.

이 영화를 보는 느낌이 바로 그랬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아름답지만 슬픈 헤어짐의 이야기.

이토록 아름답고 멋진 헤어짐을 경험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기에 나 역시도 이 영화를

평생 기억할 만한 영화로 손꼽기에 주저하지 않겠다.



@ 서울가족영상축제, CGV송파.




like 1984

언제나 의심해야 할 것은 '충성'과 '민족', '국가' 따위 단어를 내세워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막고

무조건 믿고 따르며 똘똘 뭉치라는 말이다. 'Strength through Unity, Unity through Faith'라는 그들의

구호, 그리고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 거대한 텔레스크린으로 화상지시를 하거나 언제라도 도감청을

내키는대로 할 수 있는 능력, 정부가 날조하고 의도한 이야기만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언론들,

음악과 예술이 사라지고 10시면 사람들을 집안에서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 통제력, 전쟁/테러/질병/

자연재해 등 '외부의 적'을 계속 만들어내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연장하는 그들의 패턴은 똑같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인류가 위계화된 이래 '권력'은 그런 식으로 대중을 동원하고 통제하고 조종해

왔으니까. 어느 정도의 사실을 가지고 언론과 학계의 권위를 빌려 '위기'를 만들어내고 '상식'을

만들어내는 거다. 영화에서 나왔던 소재는 악의적으로 뿌려진 '신종 바이러스'였지만, 1984에서는

'전쟁'과 '재구성되는 역사'였다. ([1984] 지배계급의 '영구혁명'이 진행되는 세상, 1984 혹은 현재.)


각시탈 혹은 바더 마인호프

권력에 대항한 '폭력'을 정면으로 제기하고 맥락을 수긍케하는 영화는 아무래도 '사회통념상' 쉽지

않은 거 같다. 떠올려보면 70년대 독일 적군파들의 무장봉기 및 테러를 앞세운 극좌노선 이야기를

그렸던 '바더 마인호프', 혹은 (한국에서 프로파간다 차원으로 만든 선전물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김일성 치하 북한에서 각시탈을 쓰고 무력투쟁의 선봉에 서는 '각시탈' 정도일까. '칠레전투3부작'은

조금 그림이 다르니까 논외로 치고, 당장 떠오르는 대부분의 영화는 '폭력은 나쁜 것'이란 선험적인

판단에서 그치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는 어떨까. 국회의사당을 폭파하고 정부요인을 암살하며 테러를 선동하는 그 행동들의 기저에는

단순히 폭력에 대항하는 또다른 폭력, 반폭력으로 맞서는 건 어리석다는 판단이 깔린 채다. 총 앞에

총으로 맞서봐야 상대는 대포와 미사일을 갖춘 거대한 폭력집단. 중요한 건 잔뜩 움츠러 들어있고

마비되어있는 사람들의 이성과 감성을 일깨우는 자극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세뇌된 부자유에 대한 불만,

자유와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결핍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대가리가 바뀌어봐야 그대로일테니.

폭력에 대한 판단은 그래서 차라리 부차적이다. 굳이 정당화할 생각도 없지만, 그렇게 역사가

바뀌어 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현실적인 '매트릭스'

물론 이 영화에서 '폭력'이 수반하는 모두의 피와 고통을 진지하게 마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화려한 수식과 세련된 연출력으로 잘 만들어진 오락 영화, 'Phantom of Opera'의 사회적

버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주인공 V가 부패하고 부정의한 정치권력을 살육하고 스스로도 목숨을

바쳐 이전 시대를 끝내고자 했다지만, 그가 권력자 한 두명을 바꾼 건지 '앙시앙레짐' 체제 자체를

바꿔낸 건지에 대해서는 답도 없다. 폭파해나가는 국회의사당 안에서 팔다리가 찢겨나가 죽었을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적당한 가벼움과 오락성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끝내 현실성과 감동을 획득한다.

매트릭스에서 나왔던 빨간 알약, 이번에도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빨간 알약을 나도 함께 먹은

느낌이 드는 거지만, 그때만큼 막막하거나 멍한 느낌은 없는 거다. 이 세상이 통째로 거짓이란

이야기, 차라리 세상을 떠나 어디 가서 도나 닦는게 낫겠다 싶게 만드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이 세상이 거짓이긴 하지만 그건 그들이 각본하고 짜맞춘 이야기와 시스템이 그렇다는 거지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부정하진 않으니까. 뭘 해야 하고 뭘 피해야 할지 알려주니까.


감동의 3단부스터 (아이유 좋아요)

그렇게, 옆에 있는 사람들과 만들어내는 장면들은 정말 너무너무 좋았다. V의 가면을 쓰고

국회의사당 앞 광장으로 물밀듯 몰려오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느리지만 단호한 발걸음이

탱크와 중무장한 군부대 턱앞까지 두려움없이 다가오던 그 때. 수뇌부가 무너진 군병력이

망연자실 손을 놓은 가운데 바리케이트와 방패와 탱크를 넘어 계속 나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1단 감동. 그리고 이윽고 시간이 되자 거대한 국회의사당이 사방으로 불을 뿜으며

폭발해 나가는 그 모습에서 2단 감동. 거대하게 화석화된 권위, 사람들로부터 나왔지만 어느새

사람들 위에 군림하던 국회의사당이 터져나가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정말 국회의사당이 무너져내리자 비로소 가면을 벗고 맨얼굴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손놀림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던 장면. 감동의 화룡점정, 그야말로 3단부스터였던 거다.

가면 뒤에 숨어서, 가면의 통일성을 빌어 자신들의 목소리와 의지를 전달하던 그들은 이제 가면이

필요없게 되었음을 웅변하던 장면이었다. 제각기의 얼굴로 제각기의 목소리로, 새로운 권위를

세우고 자신들의, 자신들을 위한 새로운 국회의사당을 만들어낼 거다.


어쩌면, 워쇼스키 형제는 이런 식의 낭만적인 혁명이 진짜로 가능하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아름답고 깔끔한 혁명이란 영화속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그렇게

나도 따라 믿고 싶어지는 어느 혁명의 이야기, 브이 포 벤데타.




B.C와 A.D., 그리고 9.11.

9.11이 터지기 며칠 전, 뉴욕에서의 3개월 체류를 접으며 마지막 여행지로 쌍둥이 빌딩을 올랐었다.

아직 한국에서의 일상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어느 가전제품 대리점의 티비들로 접했던 그 충격적인

모습이란, 뭉클 솟아난 두려움과 함께 상당한 비현실감을 안겼었다. 이후 수많은 이미지와

스토리들로 계속해서 재연되고 재구성되었지만 그 충격이란 여전해서, 이후 국제정치의 룰도

바뀌고 세계사의 흐름도 꺽인 듯하다. 영화 속 대사가 딱 맞는 거 같다. 서양인들은 역사를 B.C와

A.D를 기점으로 나누었지만 그에 더해 제3의 기점, 9.11이 생겨났다고.


미국 내 무슬림들의 Ground Zero.

그렇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미국이 아니라 인도에서 시작한다. 인도에서 건너간

이민자들의 이야기, 더구나 이슬람을 종교로 가졌거나 가졌다고 오인받는 이민자들의 이야기.

그렇기에 그들에게 9.11의 타격은 쌍둥이 빌딩의 충격적인 붕괴가 아니라 이후의 '여진'에서

더욱 강렬하다. 히잡을 두르지 못하게 되고, 이슬람의 분위기가 풍기는 가게는 문을 닫게 되고,

급기야 무슬림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은 그들의 아이마저 앗아가고 말았다. '미국인'들이 말하는

그라운드 제로가 쌍둥이 빌딩이 위치했던 곳이라면, 그들의 그라운드 제로는 아이의 타살장소.


'충격과 공포'에 대응하는 한가지 방법.

인도인이지만 힌두교인 여자는 소리친다. 무슬림인 당신과 결혼해서 내 아이를 잃었다고.

당신 때문에 아이가 죽었다고. 가버리라고. 온 미국인에게, 미국의 대통령에게 "내 이름은

칸이고, 난 테러리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모를까, 돌아오지 말라고. 그렇게 분노에 휩싸인

그녀는 아이의 살해범을 찾아내 응징하기에 발벗고 나선다. 그녀의 분노는 자연스럽다. 실제로

9.11이 터진 후 미국과 세계가 움직였던 방식이기도 하다. 분노, 응징, 그리고 공포에 질린 '고백'의

형태로 나타나는 그것은,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충성서약'과 유사해진다.


'충격과 공포'에 대응하는 또다른 방법.

자폐와 유사한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는다는 남자는 농담을 모른다. 늘 진심을 말하고, 순진함이

극에 달해 마치 이전의 '포레스트 검프'나 '레인맨'이 돌아온 느낌이다. 그는 여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대통령을 찾아 나섰다. "My name is Khan. I'm not a terrorist."의 멘트를 주문처럼 외우며.

몇개월에 걸쳐 대통령을 만나려다가 오히려 테러리스트로 오인받아 수모를 받기도 하고, 전투적

무슬림들의 테러 대상이 되기도 한 그에게 결국 그녀가 다시 돌아오고 난 후에도, 그는 그 말을

대통령에게 전한다는 '약속'은 꼭 지키겠다며 다시 나선다.


겁먹은 '충성서약'을 넘어 당당한 '선언'으로.

그렇지만 그의 멘트는 다르다. 난 당신과 같은 편이에요, 라는 겁먹은 고백이 아니다. 내가 가진

종교를 타협하지도, 내가 사는 방식을 타협하지도, 편가르기식 프레임에 포섭되지도 않는다.

처음엔 그저 그녀에게 돌아갈 생각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슬림으로 겪게 된 미국사회의

편견과 격한 공포심에 맞닥뜨리면서 바뀐 건지 모르겠다. 아니면 애초부터 현명한 어머니에게

받은 교육의 효과일지도 모른다. 이슬람식 이름을 대며 자신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밝히는

그의 말은, 차라리 이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편견과 무지를 깨뜨리자는 선언처럼 들린다.

종교가 문제가 아니라,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세상에 좋은 사람을 늘리자는 그런.


인도의 카메라가 미국을 훑다.

이 결코 가볍지 않은 영화를 두시간여 흠뻑 몰입하며 내달릴 수 있게 하는 게 진짜 능력이다.

인도에서의 성장기를 경쾌하게 내달렸던 카메라가, 본격적으로 미국의 곳곳을 핥아내면서

전혀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인도인 이민자에게 미국이란 이런 느낌이구나, 라는 식으로.

게다가 자폐증을 연기한 '샤룩칸'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라거나, 이국적이면서도 마력적인

인도의 음악, 미국 곳곳의 풍광이 담긴 영상까지 잘 만들어져, 몇몇 센스넘치고 사랑스러운

장면들이 가슴에 남고 말았다.


"My name is Khan. I'm not a terrorist."





'공기인형' 리뷰는 기네스 병맥주를 사서 마시고는 그 딸랑이는 것의 정체를 찍은 사진을

포스팅할 때까지 미뤄둬야겠다, 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런 영화를 보고 나서 바로 잠드는 건

역시 못할 짓이다.


노조미가 처음으로 밟은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발견한 달그락대는 병, 아마도 기네스 병맥주일

그 이미지만으로 이 영화는 응축될 수 있다. 별 다를 거 없는 그 유리병은 조그마한 구슬 하나를

안에 꼭 품고 있다. 고작 조그만 구슬 하나가 더 들어있을 뿐인데, 그 존재로 인해 오히려 유리병

속이 텅 비어있음이 더욱 부각되는 거다.


유리병을 꽉 채우지도 못하고 절겅절겅 소리만 내는 구슬, 사람의 마음이 딱 그렇다. 존재를 꽉

채워주지도 못하면서 그 '결락감'만 더욱 부각시키는, 도무지 쓸모를 모르겠는 '맹장'같은 녀석.


마음이 생긴 공기인형이 바라보는 세상은 누군가가 누군가의 대용품이 되는 세상이다. 그것은

그녀가 늘 스스로 '나는 공기인형,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용품'이라고 아프게 되뇌여왔다는

점에서, 스스로의 처지로부터 비롯한 날카로운 시선이다. 그녀가 그렇게 보이는 세상에 마음

아파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옛 여자친구를 잊지 못하고 섹스돌에 그녀 이름을 붙인 채 인형놀이에 열중인 아저씨,

자동응답기에 녹음해둔 자신의 목소리와 대화하며 스스로를 위안 중인 아가씨, 젊은 시절

학교에서 대리교사로 일했던 할아버지,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는 여직원을 세탁기 위에서

겁탈하는 사장님..심지어는 공기인형 그녀가 마음을 주려는 남자조차 그녀를 옛 여자친구의

대용품으로 여기고 있다.


어쩌면 그녀의, 또 나의 과잉한 반응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집에 여전히 간직된

옛 여친의 사진들, 옛 여친이 썼던 헬멧의 긁힌 자국, 자신도 공기인형과 비슷하다는 그의 고백,

그녀의 바람을 뺐다가 넣었다가 하고 싶다며 그가 아무 설명없이 요청해왔던 것들 모두

'공기인형 그녀는 그의 옛 여친 대용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공기인형 그녀의 바람을 뺐다가 넣다가 하는 건, 그야말로 옛 여친에 대한 그의 욕구를

극적으로, 그리고 지독히도 이기적으로 해소하는 방식 아닐까. 떠난 옛 여친에 대한 복수심

-죽어라죽어라 하는-인지, 반대로 아마도 죽어버린 옛 여친을 살려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야말로 공기인형을 통해서만이 해소할 수 있는 그의 욕구. 적어도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배려하는 행위는 아니었다. 그걸 왜 하고 싶은데, 라는 그녀의

질문에 우물쭈물 답하지 못했던 그의 흐트러진 눈빛만 봐도 뻔하다.


그녀가, 인간의 마음이란 게 꼭 '대용품 or not'으로 칼처럼 갈리는 게 아니란 걸 깨달은 후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쉽게 분별증류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게 마음이란 걸 깨달아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이미 훌쩍 자라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를 품어줄 만큼, 비록 그녀의 숨으로 그를 살릴

수는 없을지언정, 그녀가 어쩌면 그보다 성숙한 마음을 갖게 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는 아직

미처 인정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공기인형 그녀에 대한 '사랑'을 그녀는 그의 마음 속에서 발견해냈다.


한때 그녀의 주인이었던 남자는 말한다. 마음이 없던 때가 좋았어, 그때로 돌아와주지 않을래.

글쎄. 그저 자신의 욕망을 쏟아붓고 돌아서 화장실에서 씻어내면 그만이었던 그때를 말하는 거라면,

당신이 쭈그려앉은 모습은, 섹스돌을 껴안고 말을 거는 모습은, 왜 그리도 불행해 보였던 걸까.


'마음이 생겨난다'는 표현, 그야말로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는 거다. 어느날 문득 공기인형이 눈을

깜빡이며 몸을 움직이듯, 누군가를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이란 건 한순간에 번쩍

생겨난다. 비록 그 마음이 꼭 충만하고 행복한 순간을 약속하는 건 아니라지만,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괴롭고 쓰디쓴 경험만을 불러 오겠지만, 그건 텅빈 유리병들 틈에서 스스로를 구분짓는

'가능성'이자 '축복'에 가까운 무언가다.


영화를 보는 시각에 따라서, 영화는 밝을 수도, 혹은 지독히도 어두울 수도 있을 거 같다.

아마도 그게 '마음'이란 녀석이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할 거고. 그 녀석은 그저 그림자도 투명한

'공기인형'들 틈에서 잘그랑잘그랑, 나 여기 있다고 소리내고 있을 뿐이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 10점
박노자 지음/한겨레출판
 
"현재 북한을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 군사적 압박을 가하자는 전쟁 불사론은 바로 이런 네오콘식 선제 정밀 타격과 전쟁 수행을 통해 무력으로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키자는 주장의 판박이다.
일부 국내 호전론자들은 만일 미군이 결심만 하면 북한 수복은 물론이고 만주까지 치고 올라가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할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펼친다."
- 시사인 11.29일자, 한반도 전쟁 시뮬레이션 해봤더니…하루만에 240만명 사상 중.


정말 황당한 주장이다. 당장 황당한 건 '잃어버린 고토'라는 단어에서 배어나오는 재미없고

칙칙한 열혈 우국지사틱한 마인드고, 또 그들이 잃어버린 고토라는 '우리땅' 만주에서

비롯하는 낯설고 생경한 어감이다. 수백만명이 죽고 다치는 전쟁을 무슨 땅따먹기놀이처럼

생각하는 무식한 야만성이나 미군이 미국 국익의 고려없이 무조건 우리편이라는 유아적

사고에 멈춰있다는 따위, 지엽적인 문제는 넘어가기로 하자.


대체 어떤 또라이들이 저런 주장을 하나 싶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발딛고 선 논리랄까,

마인드의 문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단 게 문제다. 사실 이미 드라마니

영화니 잡서들을 통해 가공의 역사와 특정한 시각이 알게 모르게 친숙해져 버린 건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다. 주몽이니 근초고왕이니, 고대사를 다룬 드라마들이나 조선의 세종을

다룬 영화('신기전'이었던가), 심지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따위 쓰레기까지, 조금만

더 진지해지면 저런 황당한 주장을 펼치는 또라이와 같아질 정도로 접근해왔다.


그들은 단순하게도 오늘날 나라와 나라 사이를 구획하는 경계선이 단단하듯 수천년전에도

똑같이 명확한 국경선이 그어졌을 거라고 상상한다. 아니, 그렇지 않다는 거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정립했다는 시기에조차 각 고대국가는 도읍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정 권역의 개념이었지 국가간 경계선을 그을 정도로 안정적이고 확정된

근대적 '영토'를 갖지는 않았다. 예컨대 고조선이 만주 일정지역에 영향을 행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신채호가 말한 것처럼 '정복 왕조'로서 파악되거나 단군을 '정복자'로

묘사할 만한 정도의 것이 아니라 일정 지역에서 공물을 거두는 정도였다는 거다.


게다가 어느 한때, 잠시동안 '만주'를 영향력 하에 두었다고 해서 '원래 우리민족,

우리나라 땅'이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 그 이전이후의 다른 점유자들은 강탈자인 건가.

팔레스타인 땅을 두고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벌이는 강탈과 똑같은 논리인 셈이다.

물론 '만주'에 대한 고토회복의 열망은 좀더 근대의 기록에 근거한다고 반박할 거다.

백두산 정계비에 쓰인 조선-청 간의 영토획정 결과 간도지역이 조선에 속한다는 건데,

글쎄, 청과 조선이 모두 망했고 백년이 넘은 지금 상황에서 그걸 주장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한국이 독도를 실효적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중국이 지배하고 있는 땅이다.


두번째로, 오늘날 그어진 국경선 내에 꾸깃꾸깃 살고 있는 사람들이 수천년 전부터 동일한

민족을 이룬 채 살아왔다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주민들은 서로를

한민족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거라는 착각인데, 덕분에 당나라를 끌어들여 '통일'을 이룬

신라의 김유신과 김춘추는 거의 '민족반역자' 수준의 비난을 받아온 거다. '조선일천년래

제일사건'이라며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애통해 했던 신채호의 입장은 이후 남북한을

막론하고 이 사건을 보는 기본적인 시각이나 멘탈리티로 굳어진 셈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랬을까. 그때의 '우리'라는 관념이 지금처럼 국가나 민족단위로 단단하게

있었을지도 의문이고, 동일 언어를 쓰는 한민족, 혹은 단군의 자손이라는 '삼한일통'의

정신이 뚜렷이 드러나는지는 더욱 회의적이다. 국가가 구성원을 통제하는 수단이나

정도가 근대국가에 비해 훨씬 미미했던 그때, 사람들은 씨족이나 가문 정도에서 가장 크고

확실한 정체성을 얻지 않았을까. 설혹 신라인, 백제인으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해도 그들이

'뙤놈'과 '왜놈' 사이에서 '우리민족'을 의식했다는 건 소설에 가깝다. 동일 언어를 썼으니

말도 잘 통했을 거라는 막연한 상상도 서로 국서가 불통하더라는 사실 앞에 무너진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일본 혹은 다른 타국을 의식하는 방식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근대의

아픔만큼 과거에는 우리가 우월했음을 강변하는 식으로 대처하고, 중국에 대해서는 과거의

조공으로 맺어진 사대관계를 얼버무리는 대신 '만주'를 회복해 우리가 중심이 되겠다는

식으로 대응한다.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고대 한국으로부터의 일방적인 문화전파만이

있었는데 배은망덕하게도 한반도를 호시탐탐 노려왔다는 아주 간편하고 단순한 전제가

늘 깔려 있다.


일부 민족사학자들은 일본을 아예 백제 유민이 건설하고 이후 쭉 천황계보를 이어오고 있는

형제의 나라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백제의 일본'이라 해도 그런 전제가 달라지진 않는다.

아무런 문화도 없던 섬나라의 원숭이들에게 문화를 전파하는 선진국의 이미지, 그리고

그런 은인의 나라를 욕보이고 덥썩 집어삼킬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는 양아치 원숭이의 이미지.

역사를 조금만 보면, 오히려 한반도와 왜국 간의 긴밀한 문화 교류-일방적 전파가 아니라-의

사례들이 수천년동안 발견될 뿐 아니라 왜국은 중요한 외교적 파트너로 존중되었단 거다.


사대교린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중국의 문화적 역량과 군사적 역량을 앞세워 구축한

천하질서는 당대 외교질서의 문법이었을 뿐이다. 오늘날 미국이 구축한 세계질서 하에서

다른 국가들이 자리매김하고 각개약진하며 미국의 문화적 군사적 역량을 제공받듯, 당대

중국의 문화를 교류하고 천하질서 하에서 상석을 차지하는 경쟁이 벌어진 셈이다. 그건

국가의 실리를 위한 외교정책이었을 뿐, 그 어디에도 근대적 의미로의 '예속'이나 '식민'의

굴욕을 떠올려야 할 구석은 찾을 수 없는 거다.


결국 '거꾸로 읽는 고대사'를 읽으면서 계속 부딪히는 건 '민족사관'의 문제 그 자체다.

'우리 대한민국', 혹은 '우리 한민족'이 먼옛날 언젠가 만주벌판을 호령하며 '뙤놈'과

'왜놈' 따위는 가뿐히 무찌르고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최고였다는 유치찬란한

환상, 그리고 그 '우리'는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변함없어서 가히 개인의

목숨 따위보다 훨씬 지고하고 신성한 집단, 민족공동체라는 구라. 박노자가 줄기차게

하는 이야기는 굉장히 심플하고 기본적이다. 민족사관의 거품을 빼자. 민족사관이

편의적으로 취사선택해 부풀린 몇 개의 사실들만 말고, 균형을 잡고 보자는 거다.


신채호가 고대사를 읽어내던 시대는 지금의 시대와 다르다. 달라야 한다. 근대국가로의

경쟁적인 변신이 이루어지던 와중,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탈하는 등 야만적이고

가차없는 힘의 논리가 극강하던 시절에야, 뒤늦게라도 '한민족'을 만들어내고 하나로

규합해서 근대민족국가를 만들 필요가 '민족사관'을 만들어냈던 거다. 언제고 국제사회는

냉엄한 현실 논리, 힘의 논리로 움직인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존재했던 평화와 공존의

시기에서 눈돌려서는 안 될 일이다.


일본을 늘 한결같이 악하고 못 믿을 존재로 규정짓는 역사를 공부한 사람과, 때로는 굉장히

갈등하기도 했지만 또 때로는 생각 이상으로 긴밀하고 절실하게 상호 교류해온 나라로

공부한 사람, 그 인식의 차이는 어쩌면 이후 한국 사회가 얼마나 다채롭고 성숙할 수 있을지

열쇠가 될지 모른다. '한민족'이라는 집단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생성되고 변화되어 왔는지

그 임의성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비로소 근대인으로, 주체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P.S. 박노자는 이 책에서 한사군이 존재했다 말한다. 한사군이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감정적인 불쾌감과 민족적 '책무감'이 더해 가타부타 말이 많지만, 박노자는 정작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탄탄히 대는 데에는 힘을 쏟지 않는다. 그는 한사군의 존재 여부보다

그 존재에 대해 일단 거부하고 보는 한국 사학계의 멘탈리티 혹은 태도를 한번 따져보길

바라는 거다. 한사군이 있었다고 해도 일제 시대처럼 총독부를 설치하고 식민화한 게

아니라, 그저 중국계 유민들의 부락 정도였을 거라는 게 그의 추측이다. 우리 시대에

우리가 현재 아는 것에 빗대어 상상하는 게 위험하다는 걸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





순교자 (양장) - 10점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문학동네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순교, 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굉장히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누군가의 죽음이

여하간에 대의를 위한 죽음으로 포장되는 순간, '순교'로 불리우는 순간 더이상 그 죽음의

전후 맥락을 따지거나 정확한 팩트를 판별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만다. 심지어는,

그렇게 죽어간 사람이 어떠한 고민과 생각을 거쳤고 어떤 죽음을 맞았는지조차도.


고은 시인 이전에 한국계 작가가 이미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김은국이란 작가, 함경도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전쟁때 해병대 근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그의 프로필이나 이 책의 심상찮은 제목 '순교자'를 보고 처음에는 꽤나 거부감이

생겼더랬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도의 시각으로 본 미국, 남한 만세 이야기인가 했다.


'그래, 언제 이 병신같은 전쟁놀이를 그만둔다지?'
'전쟁은 천지창조 이후 계속되어온 거 아닙니까?'

아니었다. 그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이 전쟁 역시 짐승같은 국가들과 썩은 정치인들 사이의

눈먼 권력 투쟁이 빚어낸 구역질나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미 죽었고 앞으로

죽어갈 수많은 사람들은 정말이지 개죽음이며, 무고한 제물로 희생된 것이며 냉혹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국제 정치 무대에 꼼짝없이 붙들린 죄없는 볼모들이다'라는 거다.


한국전쟁에 대해 이토록 냉정한 평가, 그리고 뜨거운 평가는 꽤나 인상적이다. 그렇지만

더욱 강렬한 건 정작 이 다음이다. 그러한 배경 하에서, 주인공 이 대위는 갈등하고 있다.

빨갱이들에게 죽은 열두명의 목사와 살아남은 두명의 목사, 그 생사의 스토리에 얽힌 진실이

무엇이던간에 '순교'의 금칠을 하려는 군대와 기독교인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다.


'목사들의 신성한 복장 밑에 더러운 속옷이 숨겨져 있었다고 폭로하기보다는 열두 명 순교자들의 영광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자네들 기독교에 더 큰 봉사가 되지 않는가?'

그런 금칠을 단순히 사기극이라고 치부할 건 아니다. 군인은 지켜야할 국가와 그 명분이 있는

거고 목사도 또한 지켜야할 교회와 교회의 명예가 있는 거니까, 전면전의 상황에서 그런 둘의

이해 관계나 목적은 굉장히 단단하고 뚜렷하며 현실적이다. 거기에 대고 진실은 모두가 알아야

한다느니, 순교자는 하나님의 뜻에 봉사하는 거지 인간의 일시적 필요로 만들어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물론 옳지만 다소 한가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열두명의 목사가 끝까지 종교적 신념과 신앙을 지키며 죽었건 아니면 서로 헐뜯으며 살려달라고

애걸하다 죽었건, '목사들의 신성한 복장 밑에 더러운 속옷이 숨겨져 있었다고 폭로하기보다는

열두 명 순교자들의 영광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자네들 기독교에 더 큰 봉사가 되지 않는가?'하는

대령의 말에 군종목사가 입을 닫고 마는 게 딱 그런 논박의 한계다. 탈영병 백명을 백명의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것과 신앙의 영웅을 만드는 게 다를 바 없다는 것. 조직 보위와 프로파간다의 논리다.

 
 '신성하게 미친 가련한 젊은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조롱과 미움의 대상이 되고 로마 병정의 창끝에 온 몸을 찔리고, 적들의 시선 앞에서 그를 구해줄 기적 하나 없이 무력하게 헐떡이고 땀을 흘리고 피를 쏟고 있는 젊은이, 신의 아들이라는 사람의 그 가련한 육신의 절규'를 구원의 동화로 만드는 것. 그런 동화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을 경멸할 텐가, 사랑할 텐가. '

그런데 이렇게 치열한 세속의 고민에서 작가는 한발 더 내딛는다.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종교와 신앙의 역할에 대한 질문, 특히 전쟁과 인생에 지쳐있는 그야말로 절망적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러한 '동화'를 주어 위로하는 종교에 대한 폭넓고 깊은, 극한까지 밀고 들어가는

고민인 거다. 고난에 시달리고 고문당하는 불쌍한 사람들, 그들의 비참한 생에 달콤한 환상을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줘야 하는가.


이 대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들을 잘 보살펴주시고 국가는 그들의 운명을 진지하게

걱정해주고 있으니 만사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는 모든 고상한 거짓말,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위한다며 저질러지는 이 모든 것들이 역겹게만 느껴진다. 그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동정하면서도 종교나 신이 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거다.

하여 계속 묻는다.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그와 다른 축으로 모여선 사람들, 신목사와 박 대위는 그저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진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삶을 의미있게 하고 고난을 값진 것으로

해줄 그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련하고 유약한 사람들이라는 거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자신의 신과 신앙을 모두 의심하고 무너졌던 열두명의 목사가 '순교자'로 불리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라는 거다. 정의에 대한 약속, 신에 대한 약속 없이는 모두 무너질 테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당하는 고통은 고통일 뿐, 거기에는 우리가 이승 너머에서 찾아낼 어떤 정의로움도 없습니다.'

작가는 두 가지 입장을 첨예하게 밀고 나간다. 수백만명이 죽어가는 한국전쟁의 와중이라는

혼란하고 부조리한 상황 한복판에서, 아무런 희망과 약속을 얻을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근대의 낙관주의처럼 모두가 차갑고 냉엄한 현실 앞에서 당당하진

못하더라도 괴로운 진실을 떠안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입장과 불의하고 무의미한

삶을 견디지 못해 무너져버리고 말거라며 '환상'을 쥐어준다면 그것자체가 희망 아니겠냐는

입장, 그 두 입장은 끝까지 머리맞대어 고뇌하며 이리저리 약점을 찾아 타격하며 투쟁한다.


사실 한국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아니어도, 사람들은 종종 자문하곤 한다. 이걸 지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 삶은 어딜 향하고 있을까, 죽고 나면 다 끝나는 건가. '죽음'이나 '사후'에
 
대한 그런 숱한 질문은 더러는 사회적인 터부가 되어 자물쇠가 채워져 관리되고, 개인적으로도

애써 힘내보자는 자기계발류의 이야기나 생에 대한 이야기로 집요하게 돌려버리곤 하는 거다.

그런 걸 보면 인간은, 끝내 스스로 삶과 죽음, 영원한 소멸과 사라짐을 긍정할 수 없는 걸까.


'교인들은 이 무의미한 세계에서 그들의 생을 지속시키는 그 무언가를 갖고 있어. 한데 우리에겐 그게 없지. 그들이 가진 그것을 우리가 꼭 동화라고 불러야 할까.'

소설에선 신 목사가 그런 '경지'에 이른 거 같다. '스스로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스스로 그 십자가를 짊어질 수

없는 사람들을 삶에서 보호하는 거다. 그들을 위해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지켜주는 목자.

소설 제목인 '순교자'는 이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신을 위해 봉사하고 목숨까지 바친

사람이 아니라, 신을 믿는 사람과 삶에 의미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사람인 거다.


그건 어쩌면 매트릭스 식으로 말하자면, 빨간 알약을 먹어버리고도 이 세계에 남아있는 존재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깨닫고도 아직 피안으로 넘어가지 않은 채 중생을 계도하는 존재,

보디사트바(보살)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난 궁금하다. 이 대위도 궁금했던 거다.

'국외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애초에 신을 믿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에 기댈 수 있을까.

신으로 엮인 목자와 양떼의 관계가 아니라, 신의 개입없는 개인과 개인이라면.


분명 그건 더욱더 힘든 싸움일 거다. 십자가뿐 아니라 온갖 기도와 염불과 예배 소리로

가득한 땅에 살면서 그런 '종교'라는 마약에 취하지 않고 눈 똑바로 뜨고 아연하게

짖쳐들어오는 온갖 희로애락과 불행들을 맞닥뜨리고 온전히 감내하려면. '순교자'에

기대어 삶의 의미를 보증받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회의와 두려움 속에서 한치 앞도

알 수 없고 의미조차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니까. 신 없이 살아간단 건 그런 거다.


* 굉장히 인상깊었던 대목 하나. 이 작품과 이 작가가 한국 사회에서 잊혀진 이유 아닐까.

기독교에 대한 굉장히 전향적이랄까 혁신적인 해석, 그리고 기독교 교리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랄까 새로운 시각이란 것들을 품기에는 한국사회가 너무. 여전히.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그러나 내가 찾아낸 건 고통받는 인간...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그리고 죽음의 다음은?"
"아무것도 없소! 아무것도!"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어야 해요. 영광과 환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희망이라는 환상을 준단 말입니까? 무덤 이후의, 죽음 이후에 대한 환상을 주란 말입니까?"
"그렇소!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이오. 절망은 이 피곤한 생의 질병이오. 무의미한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삶의 질병입니다."

..."목사님은요? 당신의 절망은 어떡하고 말입니까?"
"그건 나 자신의 십자가요. 그 십자가는 나 혼자서 짊어져야 하오"
"다른 사람들은?"
"많은 이들이 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건 아니잖소? 그들은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이오. 우린 그들에게 그들의 그리스도와 그들의 유다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부활도?"
"그렇소, 육체의 부활도!"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도?"
"그렇소, 그 천국도!"
"정의는?"
"물론이오. 정의, 얼마나 그리운 이름이오? 그렇소. 정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궁극적인 정의를 주어야 하오."
"목사님은?"
"계속 괴로워해야겠지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얼마 동안이나? 얼마 동안이나 괴로워해야 하는 겁니까?"
"죽을 때까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없을 때까지!"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떻게 내려져야 하는 걸까.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기로 한

목사가 여전히 말로 답하기를 거부하는 그 질문.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반값등록금, 촛불이 또다시 번져나가고 있지만 입장을 명쾌하게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등록금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건 분명히 문제가 있고 사립대나 국공립대를 막론하고 대체

그 막대한 자금이 어디에 쓰이는지도 명료치 않다는, 그에 더해 이명박의 대선공약이었고

그의 당선에 여하간 도움이 되었단 사실 만으로도 '반값등록금'은 이슈가 되기 충분하다.

취직에 쪼이는 대학생들이 거리에 나선 것만으로도 굉장히 고무적인 일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등록금이 반값으로 줄면 되는 문제일까. 등록금만 오른 게 아니라 물가전반이

모두 올라 있는 총체적 경제파탄의 문제 아닌가. 또 그걸 위한 재정이 국가에서 나오던 기존

대학 재정을 헐어서던 상관없이, 반으로 뚝 잘라 50%만 내면 '교육 소비자'로서 대학생들은

만족이란 건가. 예컨대 국고로 지원된다면 대학 교육의 공공성은 어떻게 확보할 건지, 대학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균형을 맞출 건지 따위 근본적인 이야기는 전혀 없다. 


이래서야 무슨, 소셜커머스에서 50% 할인혜택 받으려고 줄선 구매자들과 다를 바가 뭔가

싶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반값 등록금'이란 요구와 그 저변에 깔린 어려움을 모른다는 게

아니라, 좀더 정밀하게 주장을 가다듬고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출 수 있도록 논리와

근거를 되새겨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다. 우리끼리 한풀이하듯 촛불들고 나가서 울고, 

그렇게 에너지를 소모해버리는 건 지난 촛불시위 때로 충분하지 않은가.


'반값'이란 이미지가 굉장히 선명하고 매력적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아무 전략이나 로드플랜없이

'반값등록금'이란 구호에 매몰되어 있어선 좀 곤란하다. 마침 서울대 경제학과 이준구 교수가

비슷한 문제의식으로 글을 올렸다.(http://www.jkl123.com/) 그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대학 본연의 의의를 확보한 대학교육은 공공성을 가지며 또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서울대와 달리 사립대학의 경우 (좀더 면밀하 살펴야겠지만) 대학재정 운영의 문제가 크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현재 십수일째 진행되고 있는 '반값 등록금' 촛불집회를 좀더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끌고, 결과적으로 무언가 성과가 남는 승리의 기억으로 만들기 위한 합리적인

발문으로 쓰임직한 거 같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반값등록금'에 준하는 성과를 낸다거나,

그런 문제의식의 결을 이어받은 '대학 교육, 대학의 공공성'에 대한 근본적인 큰그림의 해법과

로드맵이 나올 수 있음 좋겠다.



*                                                             *                                                     *


반값 등록금을 요구하는 외침이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다. 등록금 마련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거리로 뛰쳐나와 ‘반값 등록금’을 외치게 되었을까? 등록금 낼 돈이 없어 아르바이트로 밤을

지새우는 젊은이들의 얘기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고된 아르바이트로 몸과 마음이 모두 녹초가

되어 버렸을 텐데 공부를 제대로 할 힘이나 남아 있을지 걱정이 된다.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 말이 이들에게는 별 위로가 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은 대학 등록금이 최근 들어 크게 뛰어오른 것도 아닌데 왜 반값 등록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갑자기 커지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예전에도 등록금이 너무 비싸다는 불평은

끊이지 않고 나왔지만, 반값으로 내려야 한다는 요구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서민들의 어려운

살림을 생각해 조금 내려줬으면 하고 바랐을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당당하게

‘반값 등록금’을 외치는 것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비싼 등록금에 대한 불만이 폭발적으로 커지게 된 배경에는 최근 들어 서민들의 살림이 크게

빡빡해졌다는 사실이 있다. 성장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는데 서민들의 살림에는 도대체

나아진 점이 전혀 없다. 게다가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뛰어올라 서민들의 살림을 압박하고 있다.

정부는 입만 열면 ‘친서민’을 부르짖지만 피부에 와 닿는 개선은 하나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

그러니 근근이 감당할 만하던 등록금의 부담이 갑자기 허리가 휠 정도로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일부 사립대학이 학생들로부터 거둔 등록금을 부적절하게 사용했다는 사례가 알려지면서

타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사실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사립대학이 학생들이 낸 등록금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영세한 재정구조를 갖고 있다. 외국의 유명 대학들처럼 충분한 기본자산

(endowment)을 마련하지도 못한 채 간신히 건물만 지어놓은 상황에서 대학이랍시고 간판을

내건 탓이 크다. 그러면서도 일부 교주는 마치 대학이 자신의 사유재산인 양 전횡을 일삼기 때문에

등록금이 부적절하게 사용되는 사례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 사례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이제 등록금을 낮추라는 요구는 도덕적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

과거에는 대학에게 등록금을 낮춰 달라고 부탁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당당하게 낮추라고

요구하는 분위기로 바뀐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최근의 사태는 대학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값 등록금으로는 대학을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다고 호소해 보았자 아무도 귀 담아

듣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물론 일부 사립대학 때문에 건전하게 운영되어 오던 다른

사립대학도 한 묶음으로 매도되는 것에 문제가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객관적으로 보아 등록금을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낮추라고 하는 것은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다.

욕먹을 각오를 하고 말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학의 살림을 아무리

쥐어짠다 해도 교육의 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지출을 지금의 절반 수준으로 줄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알뜰한 살림으로 어느 정도의 절감은 가능하다 해도, 그것이 절반 수준에까지

이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나도 한때 서울대학교의 재정에 간여한 바 있기 때문에

대학재정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로 등록금을 절반 수준으로 낮춘다면 이로 인해 발생하는 재정상의 애로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에 의해 해결될 수밖에 없다. 하나는 정부의 지원을 통해 부족분을 메우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교육에 투입되는 비용 그 자체를 대폭 줄이는 것이다. 교육에 투입되는 비용을 대폭 줄이면

교육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이 방법을 선호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반값 등록금에 대한 요구는 결국 정부의 대폭적 지원에 대한 요구를 뜻하는데, 이를 무조건 지지하기는

어려운 사정이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사업이 바람직하다고 해서 정부가 무조건 돈을 쏟아 부을 수는 없다.

예산제약이 있기 때문에 엄격한 우선순위하에서 가장 바람직한 사업부터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로 대학교육에 대한 지원은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 받기 힘들다. 공공재(public goods)나 가치재

(merit goods)의 성격을 갖는 것과 관련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쉽게 정당화될 수 있다. 또한 외부성

(externalities)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정부의 지원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찾기가 쉽다. 그러나 대학교육은

공공재도 아니고 가치재도 아닐뿐더러, 강한 외부성이 존재하는 경우도 아니다.


때로는 어떤 지출프로그램이 갖는 정당성의 근거를 소득재분배에서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교육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소득재분배의 차원에서 정당화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정부 지원을 통해 등록금을

낮추면 가난한 가정뿐 아니라 부유한 가정의 자제까지 이득을 보게 된다. 대학을 아예 가지 않는

사람들이 빈곤층에 더 많이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생각하면 정부 지원에 의한 반값 등록금은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반대방향으로의 재분배를 가져올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반값 등록금이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정답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반값 등록금은 부유한 가정의 자제들에 의한 무임승차(free riding)로 인해 효율성과 공평성의 측면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따라서 정답은 일단 등록금을 합리적인 수준으로 낮추고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에게

집중적 지원을 해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요즈음 보편적 복지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지만, 이것과 반값

등록금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초중학생의 전면 무상급식은 한사코 반대하던 정부, 여당이 반값 등록금 문제와

관련해서는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상급식을 반대하며 망국적 포퓰리즘이니

뭐니 신나게 떠들던 때와 비교하면 온순한 양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더군다나 재정부담의 측면에서 보면

반값 등록금이 무상급식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될 텐데 말이다. 평소의 지론대로라면,

반값 등록금을 실시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강경한 입장을 취해야 마땅한 일이다.


내가 보기에 정부, 여당이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결정적 이유는 자신이 반값 등록금

얘기를 꺼낸 장본인이었다는 데 있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선거캠프에 ‘등록금 절반인하

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당선 후 반값 등록금

공약을 한 적이 없다고 부정했고, 교과부 장관은 (등록금의) 심리적 부담을 반으로 줄여주겠다는

약속이었다는 궤변으로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그러나 무슨 말로 변명을 하던 반값 등록금이라는

말을 처음 꺼낸 원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지금 반값 등록금을 요구하며 거리로 뛰쳐나간 학생들 자신도 반값 등록금의 실현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반값 등록금을 약속하고도 입을 씻고

있는 정부, 여당이 얄미워서 약속을 지키라고 강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 말을 먼저 낸 쪽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표를 얻기에 급급해 실현되지도 못할 반값 등록금을

약속함으로써 국민에게 부질없는 희망을 안겨준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현 정부가 대선 때 내건 공약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일으킨 사례가 이 반값

등록금의 경우에 국한되지 않는다 . 세종시, 동남권 신공항, 과학벨트 등 그 예가 숱하게 많다.

그러면서도 국민 앞에 엎드려 사과를 하던 무엇을 하던 어느 것 하나 깨끗하게 처리한 것이 없다.

반값 등록금 문제도 마찬가지로 현실성 없는 공약을 내걸어 엄청난 혼란만 일으켜 놓고 얼렁뚱땅

마무리해 버릴 가능성이 크다.


많은 사람들이 현 정부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으로 ‘원칙 없는 국정운영’을 들고 있다. 지금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파문이 확산되어 가고 있는 등록금 문제에서도 이렇다 할 원칙을 찾아보기

힘들다. 정부, 여당의 이 사람은 이 말 하고 저 사람은 저 말하는 난맥상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문제의 해결방안을 찾아 일사불란하게 그 방향으로 추진해 가도 해결이 어려운 터에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모습만 보이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지금 상황이 더욱 걱정스러운 점은 야당까지 중심을 못 잡고 오락가락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야당이 지금 내걸고 있는 그 많은 복지프로그램에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은 터에

반값 등록금까지 약속한다면 그 엄청난 재정부담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세금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거둬들일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야당이라 편하게 아무 약속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태도로 일관하면 만년야당

신세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격앙된 분위기를 수습하려면 하루 빨리 합리적인 해결방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질질

끌수록 감정은 더욱 격앙되기 마련이기 때문에 시간을 끌면 끌수록 문제해결은 점차 더

어려워지게 된다. 반값 등록금은 실현가능성이 없는 대안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가난한 가정의

자제가 겪는 어려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줄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정치적 기류에 따라 반값

등록금을 실시할 듯 말듯 하는 기회주의적 태도는 문제를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게 만들

것이다. 욕먹는 것이 두려워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알면서도 뒤로 감춘다면 그것은 책임 있는

정치가의 자세가 아니다.



후기 1 : Need Blind Policy

등록금 문제를 해결하는 데 미국 아이비리그의 일부 대학이 실시하고 있는 Need Blind Policy가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얼마 전 Yale대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의

입학관련 담당자가 그 대학에서는 바로 이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정책은

지원자들의 입학허가 여부를 결정할 때 재정상태는 고려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부유하든 가난하든 그 점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고 오직 학문적 자질만을 고려해 입학허가

여부를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다음 재정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학생에 대해서는

필요한 만큼의 장학금 지원을 해준다고 합니다. 따라서 입학허가를 받은 모든 학생이 재정적

문제 없이 학업에 열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제도를 도입해

어려운 학생을 지원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후기 2 : 무상급식과 반값 등록금

전면 무상급식을 지지했던 내가 대학 등록금과 관련해서는 선별적 지원을 지지하는 것이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두 가지 이슈가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고 보기 때문에 일관성이 문제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초중학생의 급식은 가치재의 성격을 갖는 데 비해, 대학교육은 가치재의 성격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무상급식은 고려대상이 될 수 있는데 비해, 무상대학교육은 고려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정부가 왜 등록금의 절반을 부담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의 근거도 찾기 어렵습니다.






모방범 1 - 10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문학동네
모방범 2 - 10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문학동네
모방범 3 - 10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문학동네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엔 너무 커져버린 세계.


"너희들은 인간의 생명이 뭐라고 생각하나?"
"남의 생명이니까, 남의 생명이라고 생각할 뿐이지요." 피스는 상냥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지인이나 친구는 죽이지 않아요. 죽으면 슬프니까요. 그렇지만 남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 남들도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어! 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그야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우리와는 관계없어요."
"이런 짓을 해서 뭐가 좋단 거야!"
"즐겁지요. 당신도 해보면 알걸요. 재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요."


단순히 미친 또라이의 생각일까. 남의 생명은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생명일 뿐이라는 저런

식의 사고라는 건.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지만, 그 너머 어딘가서부터 나와 상관있는 사람과

상관없는 사람을 가르는 경계선이 있다는 거다. 서로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 나의 사람들과 타인을 가를 경계, 그런 경계선 자체를 부정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지구 반대편에서 굶어죽어가는 아이들, 지구 곳곳에서 쉼없이 벌어지는 전쟁에서 죽고 죽이는

사람들, 일본에서, 휴전선 너머에서, 심지어 이 나라에서도 부당하게 고통받고 괴롭힘당하며

죽거나 상처받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거다. 나와 남을 가르는 경계가 있지 않고서야 우리가 단

일초라도 웃을 수나 있을까. 우리가 주위 사람, 가까운 사람만 보듬고 사는 건 어쩔 수 없는지도.


평생 직간접적으로 접하게 될 사람들의 대다수가 경계선 밖에 '남'으로 존재하고 있단 얘기다.

급작스레 커져버린 세계와 헤아릴수 없이 많아진 인간들을 대하고선, 인간 능력에 한계가 온 건

아닐까. 정말이지, 세계가 이토록 커져 버린 건 인류 역사에 유례없는 일이니까.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인류가 갑자기 흉포해진 것도 아니고, 그저 너무 커지고 많아진 건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인간 본연의 욕구.


"피해자를 죽이기 전에 범인은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야. 너는 죽고 싶지 않다고 애걸하지만, 지금처럼 보잘것없이 살아봤자 뭘 하겠어? 그렇지만 내가 기획한 이 연속살인극에 참가하면 네 이름은 전국으로 알려지게 돼. 모든 사람이 네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줄 거야. 모든 사람이 너의 죽음을 애도해줄 테고. 이거 너무 멋지다는 생각 안 들어?"

"가장 두려운 것은 인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아무런 자극도 없는 인생을 보낼 바에야 죽는 편이 낫다는 그런 지향성."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단 욕구는 '모방범'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에너지와 같은 무엇이다. 범인들이

뚜렷하게 보여주는 그런 인정에의 욕구처럼 삐뚤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주목을 끌고 알려지고 싶다는 욕망을 내밀한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거다. 범죄사건의 목격자이던

논평자이던, 소설 속의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하고 방송에 나오려고 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점점 그런 인정욕구에 목말라가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점점 광활해지기만 하고

사람수는 헤아릴수 없이 늘어나기만 하는 와중에, 거대한 도시, 수많은 사람 속에서 살아남고

두드러지기에 실패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모두가 인정받고 싶지만, 또 모두로부터

버림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거다. 너무 커져버린 사회 속에서 각자도생, 팽개쳐진 영혼들.


범죄의 피해자였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버려졌다고, 있으나 없으나 세상에 별 상관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범죄의 가해자였던 사람들 역시 어려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잊혀진 채였다.

굳이 시니컬하게 '자존심 비대증의 실패자'라며 비하하지 않더라도, 가해자들의 삶은 공히

가족으로부터, 친구로부터, 너무 커진 세계로부터 결정적인 상처를 받고 있었던 거다.



도시 반대편에 사는 사람에게 신, 혹은 스타가 되다.


"나는 안 잡혀. 계획은 완벽해. 황홀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스토리야. 가즈아키, 잘 들어. 이 사회는 내가 만들어내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어. 그 다음 이야기와, 최고의 클라이맥스와, 길게 여운이 남는 라스트신. 그러니까 네가 협력해줘야지. 공연자로서 말이야."

피해를 입은 여성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딸이나 손녀를 두고 있는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의 예외없이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었다...그것은 아마도 정말 안됐다는 생각과, 우리집 딸이나 손녀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같은 농도, 같은 온도로 섞인 결과일 것이다...자신이 피해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고 또는 앞으로 될지도 모를, 피해자들과 동년배의 여자들은 심한 불안과 슬픔과 분노를 드러냈지만,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밝은 표정으로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겁도 없이 낯선 남자를 따라가니까 저렇게 되는 거야, 하고 희생자들을 매도함으로써 안도하는 경향이 있다.


범죄자들은 생각한다. 도시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은 어쩌면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세상의 모든 타인을 발아래 둔 채 생사여탈권을 쥐고 모두를 위한 스토리를 통제하는 존재.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흥분에 들떠 추측만 해댈뿐인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보며 오락거리를

제공해주는 신.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봉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경이다.


사실은 수많은 익명의 군중 속에서 사람의 마음은 정작 어디론가 묻혀버렸다. 연쇄살인 역시

도시 반대편의 사람에겐 하나의 가십에 지나지 않은 채 소비되고 만다. 마치 해외토픽처럼.

이미 그런 선정적이고 비극적인 스토리들은 계속 수위를 높여가며 제공되고 있었고, 연속선

상에서 연쇄살인사건 역시 최초의 충격을 지나서는 그저 엔터테인먼트, 남일이었을 뿐이다.


그건 합리적인 반응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들이 사람을 죽여봐야, 자신의 일이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 친구의 일이 될 가능성이란 건. 대개의 경우 그런

사건은 내가 아닌 절대다수의 '타인'에게 벌어지는 거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공감하고

감정이입하기를 바라는 건 어쩌면 무리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너무 크고, 사람은 너무 많다.



언제고 또 나타날 '모방범'.


'모방범' 속의 사건들은 1990년대 후반의 일들이다. 휴대폰과 인터넷이 막 보급되기 시작하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중전화기나 집전화를 이용해서 서로 연락하는 그런 시대이다.

지금은 그나마 거대한 세계에 모래알처럼 흩어진 인류가 조금은 서로를 끌어당기려 애쓰는

도구들이 많아진 시대다. 휴대폰도, 트위터니 페이스북이니 따위의 소셜 네트워킹도.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다. 그런 도구가 아무리 발달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와

타인 사이에 세워두는 경계선이 좀더 확장되거나, 결국엔 사라질 거라고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거다. 휴대폰이 생겼어도, 가상 사회가 건설되었어도, 가장 중요한 인간의

깜냥 자체는 조금도 커지지 않았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이해를 위한 능력, 의지.


결국, 사람은 어디까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혹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지점에서 서로를 괴롭히고 못견뎌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도시 반대쪽의 살인마를

키워내는 건 이쪽에서 티비를 보며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한편 연극의 등장인물처럼

소모하는 우리들 아닐까 하는 거다. 이 소설이 아무래도 우울한 비극으로 읽히는 이유다.


이 거대해진 세계, 인간의 수용치를 넘어버린 세계에서 '모방범'의 도래를 피할 수 있을까.






기대를 많이 했었다. 그리고 기대 이상이었다.


전주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순식간에 매진되었다는 것 같은 단편적인 '카더라' 기사들도

계속 꾹꾹 자극을 해댔지만 무엇보다 스스로 가게를 차리고 맛집방송에 출연해서 그 거짓을

벗겨내겠다는 기획의도가 대단해보였던 거다. 통틀어 한주에 177개나 소개된다는 '왼갖 짭새가

날아들듯' 하는 맛집들이 진짜일 리는 없다는 생각은 이전부터 모두가 해왔을 터, 이걸 어떻게

요리해서 보기 좋게, 먹기 좋게, 그리고 재미있게, 결국은 맛있게 보여줄까. 그런 기대였다.


그 천편일률적인 손님들, 단골을 자처하는 손님들의 리액션이나 광고문구같은 몇마디 대사는

대본에 가까운 뭔가가 있을 줄 알았다. 이미 모든 프로그램이 시청률 경쟁에 매몰된 지금

맛집프로그램 역시 시청률이 높도록 더욱 충격적이고 신선하고 흥미로운 것들을 찾아서 눈이

빠지도록 돌아다니고 있을 줄도 알았다. 그러다보니 홍보를 원하는 음식점과 방송국(혹은

외주제작사)과의 금전 거래가 없진 않으리라, 그것도 짐작했었다. 짐작대로였고, 기대대로였다.


그런데 그 이상이다. 사실은 브로커를 통해 돈이 오가며 '방송'시간을 광고시간으로 팔고 사는

자체로도 이미 충격적인 범죄인데, 이미 자극적인 것들에 잔뜩 둔해져버린 미각으로는 '고작'

그 정도의 폭로로는 성에 안 찰 우리임을 알았던 걸까. 브로커는 친절하게도 가게의 방송용

컨셉을 정해주고, 전지전능한 상상력을 동원해 음식들을 마구 퓨전해주기에 이른다. 캐비어

삼겹살, 특제 대판요리, 청양고추범벅의 돈까스, 해물과 호박찜..방송을 위한 일회용 메뉴들.



실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절망하기에 이르렀다.


몰랐던 것들도 아니고, 그렇게 '보기좋은 떡'을 만들어 방송국에, 실은 시청자에 팔기에 열중인

브로커의 넉살좋은 얼굴과 느끼한 목소리에 문득문득 실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장난같았다.

그렇게 '매워서 죽던지말던지 돈까스'가 그들의 세트장이자 음식점인 곳에서 뚝딱 만들어져

촬영이 되는 장면이 그야말로 블랙코미디의 정점이었다면, 그렇게 장난처럼 만들어진 것이

수분동안 공중파를 타는 장면에선 울컥, 분노랄까 절망이 치솟았다.


방송이 장난인가. 맛집이라 주장하는 가게 주인들은, 환호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미는 알바들은,

온갖 말장난으로 코너 하나를 해치우는 연예인과 방송인들은, 그리고 뚝딱 컨셉을 만들어내고

그 모든 컨텐츠를 조율하는 제작진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이건 단순히 '먹기 좋도록' 떡을

포장하는 수준이 아니라 떡인 양 비닐봉지를 씹어먹는 CG를 촬영하는 수준 아닌가 말이다.

오대수, '오늘만 대충 수습해서 살자'라는 마음가짐으로 방송 한번하고 모르쇠하는 마음가짐,

그 어디에도 시청자는 없었다. 시청자는 그저 시청률의 숫자, 혹은 우스운 호구였을 뿐.


그렇지만 사실 더하고픈 질문은, 사람들이 맛집프로를 보며 얻으려는 게 맛집 정보가 아니라

가학적이고 선정적인 비쥬얼쇼와 박스로 돈을 쓸어담는 대박의 판타지는 아닐까 하는 거다.

만약 그렇다면 맛집 프로를 공장처럼 찍어내는 그들은 사실은 사람들의 욕망과 니즈를 아주

적확하게 꿰뚫고 그에 부응하는 것 뿐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굉장히 날카롭고 위험한 영화의

칼끝은 사실 방송국 혹은 외주제작사가 아니라 천박한 입맛과 취향을 가진 우리들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문제는, 놀림감으로 전락 중인 우리 자신이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그들'의 거짓과 사기행각에 분노하는 건, 직면하기 낯뜨겁고 수치스러운

질문 앞에서 굉장히 단순무식하고 손쉽게 문제를 푼 척 하거나 아예 부숴버리려는 시도인지 모른다.

영화는 분명 그 부분을 불편하게도, 굳이 까칠하게 짚고 있다. 시청자들의 취향과 입맛이 고작

그정도라 이런 프로와 이런 되먹잖은 맛집들이 횡행하는 건 아닌가, 어느 맛집 컬럼니스트가

영화에서 분명히 지적했듯이. '그들'을 욕하는 건 쉽지만 결국 그들을 키워낸 건 '우리'다.


꼭 맛집프로그램에 관련된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자존심강하고 자기잘난 줄 아는 대중이 사실은

이리저리 휘둘리고 희롱당하는 모험담은 주위에서 넘쳐난다. 조선일보가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열독률 1위의 신문', 자신들을 무시하면 자신들을 그토록 열독하는 대중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논리라거나, 한나라당과 박정희에 대해 다수결이나 지지율을 근거로 정당화하고

복권시키는 논리라거나, 언론이 던져주는 떡밥을 덥썩덥썩 물며 남의 사생활이나 캐대고

연예인이나 마녀사냥해대는 웃지 못할 이야기들이라거나. 잘난 척하지만 놀림감으로 전락중인.



내가 원하는 건 뭔가.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영화 마지막의 장면은 자못 심각하게 방송이 맛갔음을 선포하지만, 사실 감독은 지금

우리 모두가 맛이 갔음을 먼저 인정하라고 솔직히 말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채널선택을

하기에 앞서 우리가 맛집프로그램에서 무엇을 보고 싶었는지, 저널리즘에 대한 기대치가

얼마나 있었는지, 있기는 했는지부터 따져보았어야 한다는 거다. 단순히 일부 방송의

문제, 시청률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방송을 굳이 챙겨보는 우리의 문제란 거다.


결국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해서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욕망과

결핍을 알아내야 하는 거다. 내가 원하는 건 뭔가.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만약 당신이

맛집프로그램에서 맛집 정보를 찾고자 한다면, 그 사람의 삶 자체이자 즐거움인 음식을

조롱하고 더럽힌 제작진에게 불의 철퇴를. 만약 당신이 맛집프로그램에서 대박의 판타지와

시트콤을 보고 싶다면, 지금까지처럼 하면 된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무의미해질 때까지.


낯뜨거움과 수치스러움을 무릅쓰고 던진 질문의 최종적인 답은 이런 식으로 나오지 않을까

두렵다. 지금 우리의 입맛, 취향과 사고수준은 너무나도 저렴하고 천박해서, 이런 맛집프로는

바로 지금의 우리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고. 거울처럼. 나는 맛집 정보를

손쉽게 뽑아보고 싶었고, 나는 뜨겁고 맵고 신기한 음식 앞에서 연예인들의 리액션이 즐거웠고,

나는 맛집들의 성공담에서 자영업 성공신화를 보았고, 따위들.


트루맛쇼.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MBC, KBS, SBS의 맛집프로그램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포고 따위를 넘어서고 말았다. 가처분신청을 내고 어쩌고, 약간의 소란이 있긴

했지만 이미 맛집프로그램들은 택시기사의 추천을 받는다거나, '티비 안나와도 손님이 너무

많아 걱정'이라는 따위 변형을 거쳐 또다시 우리들의 욕망에 발빠르게 응답하고 있는 거다.

결국, 우리가 바뀌지 않는 한 맛집프로그램 따위 지엽말단의 이슈는 바뀌지 않는다.


거악(巨惡)은 우리다. 현재로선 그렇다.


일본에 유학가 있는 친구녀석(http://yakisobapang.tistory.com/)이 비싸기만한 외지생활과

예기치 못한 후쿠시마 사태로 멀어져버린 현지 취업의 꿈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뚝딱뚝딱

만들어낸 가죽지갑. 불우이웃돕는 셈 치고 주문하고 봤더니 색깔이 너무 이쁜 거다. 말하자면,


"홍대출신 디자이너가 일본 가서 직접 색깔을 믹싱했다는 바로 그 청순네이비블루 가죽지갑".

파란색감도 굉장히 맘에 들고, 굵고 촘촘한 스티치도 분위기 있고, 두껍고 탄탄한 가죽도

앞으로 어떻게 길이 들고 때가 껴서 말랑해질지 기대가 커지는 거다. 가뜩이나 날도 하루가

다르게 더워지는데, 두꺼운 반지갑 대신 얄포름한 요고 하나 들고 가면 괜찮겠다. 뭐 땀도

흡수하고 물도 먹고 해서 더욱 빨리 빈티지스러워지겠지만.ㅎ

배송되고 포장을 뜯기가 넘 아까웠던 것도 빼먹을 수 없는 포인트였다. 두꺼운 갈색종이가

굵은 스티치의 하얀 실로 박혀서는 가죽지갑을 감싸고 있던 거다. 그리고 뒷면에는 제품명과

색깔, 제품번호가 진한 갈색으로 박혀있었고.

눈에 잘 안 띄게 둘러져 있던 띠를 벗기고 나니 숨겨져 있던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Constant Leather Goods, 그리고 뒷면에는 무려 QR코드가 숨어있어서 스마트폰으로

긁어보면 바로 홈페이지로 연동이 되는 거다. 전체적으로 갈색 종이에 검정 글씨가

깔끔하면서도 단정하다 했더니 QR코드의 불규칙한 문양이 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

안에는 제법 많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그저 지갑 하나 들어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뭔가 워런티

비슷한 분위기의 일련번호가 새겨진 카드 하나. 그리고 제품에 대한 컨셉이나 디자인을

설명한 카드가 몇장. 다른 것보다 가장 눈에 띄었던 건 언제 제작되었는지 그 날짜가 적혀

있더란 점이었다. 내 지갑은 2011년 5월 5일, 어린이날 빨간날이라고 전부 나가 놀고 있을 때

누군가는 열심히 수작업으로 이렇게 두꺼운 가죽을 바느질하고 있었겠구나.


조명에 따라 색깔이 휙휙 바뀌며 검정색처럼 보이기도 하고, 살짝 남색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다소 경쾌한 느낌의 청색이랄까. 엷은 베이지색의 실이랑 가죽 안쪽의 살색이

대충 깔맞춤은 되고 있지만 앞으로 손때도 묻을 테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먼지도 낄 테고

그렇게 더욱 빈티지스러운 느낌으로 운치가 살지 않으려나 싶다. 두꺼운 반지갑을 들고 다니기

부담스럽거나 귀찮다 싶을 때, 슬쩍 카드 두어장이랑 현금 조금 넣어서 갖고 다니기 좋을 듯.

* 지갑이나 다른 가죽제품에 관심있는 사람은 QR코드로 이 그림을 찍어보거나, 아니면

그냥 귀찮더라도 www.constant.co.kr을 찍어보거나.





 
그들의 노래는 '진정성'이 담뿍 담겨있었다.

'나는 가수다'에 대한, 김건모의 재승부에 대한, 심지어는 '아이유와 나가수가 싸우는 만화'에

대한 이야기가 인터넷 공간의 천지사방으로 마른 불 번지듯 퍼져나갔지만 여태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노래만 어찌저찌 듣게 되거나, 대충 그래서 김건모는 어찌되었고, 어느 가수는 '나가수'를

반대했다는 따위의 이야기들로 접하던 이 프로그램을 직접 보겠다는 맘을 먹게 된 건 순전히

노래 두 곡 때문이었다. 김범수의 '제발'이 불을 댕기고, 이소라의 '넘버원'이 결정타를 먹였달까.


그래서 첫회부터 졸졸 따라가서 이제 다 따라잡았다. 워낙 전회 복습의 분량도 많고 중간평가니

뭐니 곁다리 내용도 많아서 중간중간 빨리감기를 하며 노래 위주로 보긴 했지만, 주위에서 임재범

노래를 들으며 울었다느니, 이건 꼭 챙겨보라느니 따위 유난스럽다 싶은 반응들이 이젠 그럴 만도

하네, 정도의 평가를 얻게 되었다.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소라, 박정현에서 김건모, 임재범에

이르는 출연 가수 하나하나 노래를 할 때마다 소름이 번쩍번쩍 돋고 눈물이 치솟으려 하더라는.


그들의 노래는 '진정성'이 담뿍 담겨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진심을 다해 부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눈물을 훔치며 생각한다. 꼭 이런 방법으로 가수들의 진정성을 짜내야 하는 걸까.

이 질문은 두가지를 의미한다. 경쟁 이외의 다른 방식은 없었을지, 그리고 가수들이 진정성을

담아 혼신의 힘으로 노래하도록 우리들이 채근하고 강제할 수 있는지.


1_ 경쟁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 '진정성' 짜내기.

경쟁이 있었기에 이렇게 멋진 가수들이 더 멋진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이미 가수로서 어느정도 입지를 다지고 있는 그들은 자신의 스타일, 평판에 안주하며

설렁설렁 매너리즘에 빠진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매너리즘을 깨는 게

꼭 이렇게 살벌한 경쟁, 꼴찌는 떨어져나가는 콜로세움의 살육전을 빌어야 하는 걸까. 누군가

이미 말했듯 1등이 명예롭게 빠지는 방식이라거나, 두번 이상의 기회를 주어 평가한다거나,

팀전을 벌인다거나 하여 원샷원킬의 경쟁구도와 긴장을 완화할 수는 없었을까.


그리고 경쟁 이외에 다른 방식은 정녕 없었을까. 가수들이 '진정성'을 담뿍 담아 노래를 부르게

하려는 건, 무언가를 잃지 않기 위해서나 타인을 앞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혹은 함께 만들기 위해서 같은 동기로는 안 되었을까. '나가수' 식의 감동있는 무대를 만드는 게

흔치 않은 것 만큼이나 그런 '씨스터액트'류의 감동있는 무대 역시 흔치는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은 거다. 정말 궁금한 건, 나가수의 경쟁이 계속해서 '진정성'과 감동을 이끌어내는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하는 거다, 가수들에게서나 관중들에게서나. (경쟁은 이미 진정성 이외의 부분,

감동적인 스토리빨, 빛나는 편곡, 여러 스페셜한 요소들에서 이뤄지지 않는가.)


2_ 근본적으로, 노래에 진심을 담는 건 가수의 의지.

콘서트 내내 쏟아부을 열정과 에너지를 노래 하나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거꾸로 말하면 평소엔

노래부를 때는 체력안배를 하거나 컨디션을 고려한다는 이야기다. 당연하다. 노래 한곡으로

뭔가 결정되는 경연대회를 늘 여는 게 아니니까, 늘 일백 퍼센트의 진심이 가득 담긴 그런 노래가

나올 수는 없는 거다. 그런데 이 '나가수'라는 프로그램은 그런 걸 요구한다. 노래 한 곡을 위해

이주동안 그야말로 피말리는 연습을 반복하게 하고, 이십년차의 국민가수도 손을 덜덜 떨며

노래를 부르도록 한다. 프로그램에 들어온 이상 규칙이 그렇다. 가수는 쥐어짜내진다.


뭐, 원치 않았음 출연하지 않았으면 된다고, 알아서 몸관리는 하는 게 프로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가수는 매번 노래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라고 교과서적으로 이야기할지도.

나도 처음엔 그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노래하기 시작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과의 싸움,

화려한 컴백의 야심, 부와 명예, 호승심 등등 여러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계상황으로 내모는 건, 그리고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좀 잔인하지 않나. 임재범이 건강상의 문제를 무릅쓰고 녹화를 강행한 게 미담이

되고, 평생 노래해야 할 가수들이 강행군으로 목을 상하거나 건강을 상하는 게 무용담은 아니다.


약간 확대하자면, 검투사들의 멋진 육체, 약동하는 근육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보기 위해

로마인들은 그들을 죽음과 대면시켜 죽을 때까지 싸우도록 하며 환호했었다. 검투사들 역시

자발적으로 그 콜로세움에 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원래 세상이 그런 거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혹은 돈과 명예를 위한 사다리를 잡기 위해 선 사람도 있을 거다. 어느

경우이던 간에, 그들의 진정성, 진심은 이미 프로그램화된 외부로부터 쥐어짜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불러올려져야 하는 것 아닐까. '나가수'에 나가지 않고도 진정성 가득한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실제로 부르고 있는 가수들을 귀찮음과 무지를 무릅쓰고 찾아나서는 건 어떨까.



나가수, 결국 가수들의 진정성을 값싸게 만드는 건 아닐까.

나는 가수다, 그 프로그램에 출연한 가수들도 모두 내로라 하는 가수들이다. 그들의 노래는

아름답다. 그들이 자처한(혹은 자처했다고 생각하는) 콜로세움, 무대 위에서 그들이 노래를 할 때

그들은 그대로 혀가 되고 목청이 된다. 그래서 더 걱정스럽다. 언제까지 그들의 '진정성'을

쥐어짜내어 대중에게 값싸게 단타로 팔아치울건가. 대체 이 프로그램이 가수들의 진정성을

어필하고 극대화하는 방식이란 건, 지속가능하기나 한 걸까. 단지 체력적이고 육체적인 부분의

문제만이 아니라, 경쟁으로 누군가는 계속 밀려나고 누군가가 계속 수혈되는 구조란 게.


어린애가 새장 속의 새들을 끄집어서는 꾹꾹 누르며 노래를 뱉으라 하는 거, 그런 그림 같다.

지금과 같은 식으로라면 그들의 진정성이, 그들의 노래가 값싸져버리는 부작용이 생기지는

않을지 걱정스럽다. 이미 나온다. 가창력이 전부가 아니다, 라는 이야기. 이미 변덕스런 대중은

아무 노력없이 잘 포장된 채 손에 쥐어진 그들의 진정성에, 그들의 음악에 둔감해지고 따분해

하는 건 아닐까. 좀더 강렬하고 '감동'있는, 그리고 피비린내나는 이야기를 원한다며 소란을

떨지는 않을까. 생사여탈권을 쥔 다수의 무리가 덜덜 떨고 있는 한줌을 향해 이런저런 변덕을

부리고, 힘을 전횡하는 그림, 딱 떨어지는 근거는 없다지만 괜히 두려워진다. 


+ 사족.

사실, 근거가 없진 않다. 김건모가 재도전에 나섰을 때 온통 공정성, 공정성을 외쳐댔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정성? 말이야 좋은 말이고, 그가 재도전을 요청한 것도 딱히 좋은 그림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건 예능이다. 수능시험도, 입사시험도 아니고 대선이나 총선도 아닌

일개 예능 프로그램. 그 소란은 정말 '공정성'에 대한 목마름이었을까. 아니면 하나 거창한

꼬투리 잡아챈 아이가 새장 속 새를 온통 들쑤시며 광기 어린 욕망을 채우려는 거였을까.


이 프로그램에서 '공정성'을 논하기엔 룰도 엉성하지만 룰이 놓인 시스템 자체가 엉성하다.

1등과 꼴찌를 뽑는 기준이란 게 사람들의 평가만으로 되려면, 나머지 변수들이 통제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편곡의 아웃소싱 여부, 동원자원(브라스, 댄서, 스페셜 게스트, 밴드 등)의

한계설정, 거칠게 운빨이라고만 정리하자면 컨디션, 공연 순서, 곡 선정 따위의 것들까지.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노래 잘하는 가수를 뽑는 게 아니라 그냥 좋은 가수들의 공연을 즐기는

셈치고, 핏대세우지 말고 봅시다~' 하고 쿨하게 말하기엔, 프로그램부터 살기를 띄고 가수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결국 '나는가수다' 이 프로그램이 지탱하고 있는 '경쟁으로 가수들로부터

더 좋은 음악, 진정성 담긴 음악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안이하고 근시안적인 마인드 그 자체부터

문제삼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거다.



이런 스토리로 빠질 줄은 몰랐다. 청소년보호법의 존재로 인해 유명무실한 처벌을 받을 뿐인 아이들의

범죄에 대해서 피해자의 어머니이자 가해자의 선생님인 그녀가 나름의 방식으로 응징을 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예고편 따위를 통해 접했던 이야기의 얼개였다. 그 응징이 왠지 풋풋하고 발랄한 식으로

내려지리라는 건, 어른이자 선생님이 어린이이자 학생에게 내리는 벌이리라는 안이한 기대에 더해

주연배우 마츠 다카코의 여성스럽고 선한 이목구비 때문이었던 거 같다.


영화는 계속해서 내달렸다, 이런 내 안이한 예상치를 훌쩍훌쩍 여유롭게 뛰어넘으며. 학생들이 점령한

무질서하고 소란스런 교실을 거닐며 종업식을 진행하는 시종 무기력한 그녀의 이미지도, 그녀의

아이를 죽인 살인자  A와 B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순간도, 그 살인자들에 AIDS환자의 혈액을 섞은

우유를 먹였다고 그녀가 폭로하는 순간도, 끝내 막장까지 내몰리는 살인자 두 명의 지옥과도 같은

일상의 묘사도, 그리고 등장인물들 제각기의 고백에서 수시로 번뜩거리는 가학과 살인의 충동까지.


그런 충격은, 물론 조밀하고 탄탄한 스토리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어린이', 혹은 '청소년'에 대해

한수 접어두던 사회적인 태도 탓이 큰 거 같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비슷하게,

그들을 아직 스스로의 의지와 사고를 통제하지 못하는 판단력 부족한 미완성의 인간으로 보거나,

아직 인간의 덕목이나 인간성을 다 갖추지 못한 한정치산의 존재로 보는 시각이랄까. 덕분에 그들은

'계도'나 '훈육'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동시에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도 제한된 책임만 지는 거다.


근데 영화에서 그려진 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아이들 중 일부는

작고 어리지만 이미 활짝 피어난 어른, 악인일 뿐이지 꽃봉오리나 씨앗의 무궁한 잠재력을 품은

'청소년'의 이미지와는 전혀 동떨어진 거다. 글쎄, 그런 아이도 있을 수 있겠다 싶다. 아이라고 해서

모두 선하고 순진무구하기를 바라는 건 어른들의 퇴행적인 로망, 자신들 멋대로 꾸며내고 믿고

싶어하는 신화니까. 아이들도 결국 백인백색이라는 사람과 같은 종(種)인 바에야 당연할지도.


영화가 딱히 '어린이는 조그만 어른이나 마찬가지'라고 강변하려는 건 아닌 거 같다. 다만 그런

악마적인 아이의 범죄와 맞닥뜨렸을 때 어디까지 잔혹하고 또 잔인한 복수가 이뤄질 수 있을지

극한까지 내달리고 싶었던 거 같다. 거의 면책에 가까운 특권을 가진 아이들의 악의적이고

의식적인 범죄로 삶이 망가져버린 사람이, 그 아이들의 흉포하고 잔인한 인간적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 반들거리는 눈빛을 마주하고 난다면 어떻게 변할까. 어떻게 복수할까.


두 살인마에게 복수를 마치고, 그녀의 마지막 대사가 굉장히 섬뜩했다. 이제 아무 희망도

남지 않은 절망의 구렁텅이를 느껴봐, 거기서부터 갱생이 시작되는 거야. 아니, 장난이야.

대충 이런 식의 이야기. 절망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삶이 온통 부서지고 난 이후에는, 갱생이고

뭐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폐허만 계속되었다는 그녀의 고백. 그리고 또 너 역시 그런 폐허를

거닐게 될 거라는 처절한 저주. '파리대왕'과 '올드보이'의 교집합, 그 어딘가쯤 이 영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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