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어쩌면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개의 국가가 세워지는 국가 형성(Nation-building)의

급격하고도 폭력적인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전근대적인 사고방식과 사회시스템을

깨고 영토와 국민, 그리고 그것들을 규율할 대내적 주권을 장악한 근대국가가 만들어지는 거다.

물론 식민지 조선시대부터 이미 '근대'는 수혈되기 시작했지만, 전쟁은 그야말로 시골무지랭이

촌동네까지도 비켜가지 않고 적나라한 근대국가의 위력과 속성을 뼛속까지 새겨준 셈이다.


밤낮으로 국군과 산사람(인민군)들이 마을을 자신들의 영토라며 선혈이 낭자한 땅따먹기를 하고,

마을사람들이 상대 군인을 돕는 건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라며 을러대고 핍박하는 모습은

남한과 북한, 두 개의 근대국가가 어떻게 서로에 기대어 세워졌는지 그 적대적 공존의 기원을 보여준다.

게다가 당신들은 우리를 위해 가진 것을 탈탈 털어 바치고 필요하면 목숨도 내놓아야 한다는 건,

지금은 이미 너무도 공고해지고 세련되어져버려 잘 보이지도 않는 국가의 폭력성, 비인간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같은 대극장에서 연극이 올랐다는 점으로 꽤나 이슈가 되었던 연극 '산불'은

이런 지점에서 이야기를 출발시킨다. '한국인이라면 꼭 봐야 할 연극'이라느니, '리얼리즘 희곡'의

대명사라느니, 그런 홍보 문구들은 자연스레 그런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이데올로기 전쟁을 통해

드러나는 부조리나 비인간성, 혹은 근대국가의 위선이나 폭력성을 천착하며 쉽지 않은, 가슴

답답해지는 느낌을 가득 안고 나오겠구나 했던 거다. 답없는 질문, 그렇지만 질문 자체로 새로운

프레임이 잡히고 당연했던 상식들을 낯설게 보게 만들 수 있는 그런 멋진 경험이랄까.


그런 기대가 좀 컸던 탓일까. 리얼리즘은 커다란 무대 위에 구현된 산골마을의 초가집이나 언덕길,

봄에 지천으로 피어난 꽃들과 막판의 산불 이미지가 리얼했다고 붙여질 만한 이름은 아닐 텐데.

단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전쟁기를 배경으로 한 어정쩡한 치정극을 본 느낌이었다. 여리고 나약한

인텔리 '선생님'을 두고 이년간 수절했던 두 과부가 욕정과 애정이 뒤범벅되어 만들어낸 삼각관계,

한국전쟁은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조건이었을 뿐 꼭 그때가 배경일 필요는 없었을 거 같고,

그나마 사랑 이야기조차 제대로 설득력있게 풀리지는 않은 것 같다.


1부에서는 나름 충실하게 한국전쟁의 비극성과 작위적이지만 흉포한 근대국가의 폭력성을

묘사하려 애쓴 거 같은데, 20분의 쉬는 시간동안 겨울이 지나고 순식간에 봄이 오며 시작하는

2부에서는 다른 것들은 다 뒤로 물러나고 급작스레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의 갈등과 절망에

초점이 맞춰지는 거다. 남자의 분노도 여자들의 절망도 공감하기에는 너무 급작스러워서, 이후

온통 무대를 벌겋게 피어오른 산불은 극의 절정이라거나 극적인 결말이라기보다는 그냥 모든 문제를

무화시키고 덮어버리는 느낌이었다. 20분의 쉬는 시간동안 나도 모르게 극이 계속 진행되었던 걸까.


물론 공정하게 말하자면 꽤나 재미있었다. 연기도 좋았고, 넓은 무대를 십분 활용한 동선이라거나

그럴듯한 배경과 효과들, 그리고 무대인사 때 특히 인상적이었던 강부자의 무게감이나 관록까지.

다만 막이 내리고 돌아나오면서 뭔가 당황스럽고, 딱히 이야기의 포커스를 잡아서 이해하기엔

모호하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는 거다. 희곡의 원저자가 누구던, 어떤 금테가 둘려 있던 간에, 글쎄,

'한국전쟁기'라는 특수하고도 깊숙한 상흔을 갖고 이정도 문제의식 밖에 못 꺼내고 이정도 이야기

풀어낸다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 특히나 '한국인이 꼭 봐야 할 연극'이라고 팔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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