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폴 포트가 집권하여 중국의 '문화혁명'에 비견될 만큼의 극단적이고 광적인 정책을 펴면서, 외국어를

알거나 책을 보는 사람, 가르칠 능력이 되는 사람 등 지식분자스러운 사람들은 전부 수용소에 갇히고 외국과

내통했다거나 민심을 교란시킨다는 혐의로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런 광기가 이어진 게 약 4년.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 혹은 열등감, 부자에 대한 억울함과 불공정한 제도에 대한 멸시, 구조와 개인에 대한

감정과 이성적 판단이 뒤엉켰고, 그에 더해 자신의 개인적/사회적 경험이나 트라우마 따위가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을 거다. 그렇게 잔뜩 난마처럼 뒤얽힌 맥락에서 모두의 모두에 대한 증오만 남지 않았을까.

평범한 고등학교였던 곳이 보안본부이자 수용소로 전환되면서 약 2만명의 사람들이 끌려들어가서는 단 6명만

살아나왔다는 대표적으로 무시무시한 수용소, 프놈펜 시내의 뚜얼 슬랭 수용소다. 좁은 골목을 요리조리 꺽어

도착한 건물은 웬지 스산한 느낌, 아침나절의 선선한 공기조차 위축시키는 느낌은 뭘까. 검정개도 웬지, 지옥문을

지킨다는 머리 셋 달린 개처럼 흉맹스러 보인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 거겠지만 사람의 인기척이 거의 없다. 맘편히 아침부터 관광할 만한 장소는 아니니까.

매미니 뭐니 곤충들의 소리라도 있어야 할 법 한데 온통 조용한, 어딘가 추모공원이나 국립묘지에 온 듯한

엄숙하고 무거운 공기가 고여 있었다. 나무에 그어진 칼자국 하나도 범상해 보이질 않았다.

입구에서 표를 사고 안에 들어서서 돌아본 바깥의 풍경. 여기가 수용소였을 때도 밖의 건물들은 저렇게 바싹

세워져 있진 않았겠지. 사방에서 총을 든 병사들이 초소에 올라 감시하고 있었을 테고, 서치라이트가 문득

깜빡했다는 듯 한바퀴씩 빙글빙글 돌았을 거고.

기괴한 웃음이다, 라고 생각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치켜 올려 웃고 있는 느낌, 눈은 전혀 안 웃고 있는 걸. 아마

이 피비린내나는, 셀수없이 많은 생명이 집중적으로 죽어간 공간에 붙을 표지라는 걸 알았다면, 아무리 웃는

표정을 지으려 해도, 그리려 해도 저렇게 딱딱하고 경직된 표정밖에는 나오지 않았을 거다.

웃지 말라는 표지와 더불어 붙어 있는 규정들, 방문자에게 요청되는 규정인가 하고 읽다가 혼란스러워졌다.

아, 이 곳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규정이었다...뭐 하나 제정신박힌 규정이 없지만 특히 6번. 하아...

고문하다 소리지르면 안된다라니, 개꼽창들이 죽도록 갈구겠다고 단단히 작정하고 꼬투리잡겠다는 얘기.

1층에 있던 누군가의 침대, 매트리스나 담요조각 하나 없이 앙상한 철망만 남겨놓고 있으니, 게다가 이런 공간에

있으니 상상이 뻗어나가는 방향은 정해져 있는 셈이다. 고문기구로 쓰였을까, 팔다리를 묶고 때렸을까, 설마

이게 침대길이보다 신체가 길면 잘라버린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아니겠지..하며.

뚜얼 슬랭 박물관은 총 4개의 동으로 되어서, 고문실, 살해하기 전에 찍어둔 '영정사진', 고문도구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고 한다. 여기는 아마도 수용자들의 생활동쯤 되었나보다. 혹은 고문실이었거나, 고문실도 겸했거나.

낡아빠진 창문틀, 아무런 칠도 안 된 채 나무 그대로의 헐벗은 색깔과 질감을 드러낸 것들, 그리고 저 뜬금없는

농구골대 같은 건, 고문시설. 저기에 사람을 매달아 커다란 물독에 머리를 박아놨다고 한다. 날것의 폭력이다.

상상해보면 정말, 무지막지한 야만이다. 시키는 사람이나 시키는 대로 따르는 사람이나, 짐승처럼 저기에

매달린 채 허우적대며 목숨을 구걸했을 사람이나.

아마도 행정적인 필요에 의해서였을 거다. 살해하기 전 사람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남겨두는 건. 겁에 질린

그들의 표정이 보여주듯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존재가 지구상에서 소멸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한.

6월 광주항쟁을 다룬 책들에서 저런 사진들은 처음 접했었다. 겁에 질렸던 표정이었겠지만, 경직되면서 표정은

빳빳하게 굳었고 더이상 생전의 이름으로 신체부위를 하나하나 식별하는 게 무의미하다. 일정 공간을 차지하고

단정히 눕혀져 있는 가죽가방같은 존재들. 사람 한 명 죽인다며 달려오는 살인마에겐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욕하고 삿대질이라도 하겠지만, 이 엄청난 대규모 도살 앞에선 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발굴현장에서 발견된 듯한 쇠사슬, 수용자들을 둘둘 엮어서 끌고 다니기 편하도록 쓰이던 장치가 아닐까 싶다.

시멘트 건물의 묘한 냉기가 선뜻한 기분을 돋게 만들었다. 2층으로 오르던 길에 발견한 낙서들. 아, 여긴

1975년까지도 아이들이 가득하던 학교였던 거다.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음과 혼란이 가득했을 곳.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들이 울부짖고 절규하고 죽어가는 소리로 지옥도를 그려냈을 곳이기도 하다.

누굴까, 간수가 쓰던 책상인 거 같기도 하고. 70년대 후반에 쓰이던 책상과 의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니,

더구나 이런 장소에서 저렇게 보존된 걸 보면 왠지 섬뜩하다. 아마도 이런 섬뜩함, 인간이 얼마나 흉폭하고

무지하게 야만스러울 수 있는지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이런 장소가 필요한 거다.

그 뒷켠에 서 있던, 캄보디아가 잠시 '캄푸챠'라는 국명으로 광기어린 폴 포트 치하에서 신음하던 때 공산당

지도자들의 면면. 이들은 뭐가 좋아서 저리 활짝 웃고 있는 걸까. 사람이 가장 무서운 거다.

사실은, 그들의 교조화된 신념이 무서운 거다. 부르조아, 쁘띠부르조아, 인텔리겐챠가 조장한 자본주의와

뿌리깊은 봉건적 질서,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빈농과 노동자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열정이 단순화된

선악구도의 복수전으로 치달으면서 사회 전반을 퇴행시키고, 문명과 인류 지성을 퇴행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이렇게 손쉽게 재단할 수는 없었을 거다. 이런 식의 맑시즘을 빙자한 근본주의 혁명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와 해악에 대항하는 일종의 도덕적, 이상적 혁명을 구현하려는 시도로 보였을 수도

있었고, 실제로 적지 않은 서구의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은 심정적으로 그들을 지지하기까지 했으니.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눈먼 광신이 빚어낸 참극은 이토록 생생할지언정, 무엇이 이들의 문제의식을

자극했고 심지어 득세하게 했는지 그런 부분은 짚어지지 않는다. 철저히 기득권에 기댔던 정치세력에 대한

반감, 기득권 세력만이 호의호식하며 풍기는 부정부패의 구린내에 대한 혐오, 그리고 양극 세계질서의 패권성에

대한 문제의식까지. 이런 참극은 그 결과물일 뿐이다.

애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순수해지라느니, 깨끗해지라느니, 그런 도덕군자같은 소리를 하지만, 사실은 그렇다.

이들이 자라나서 제각기의 위치에서 이해관계를 겨루게 될 테고, 그 와중엔 어쩔 수 없이 갈등과 큰 소리가

빚어지게 되는 거고, 그 문제들을 얼마나 인정하고 진지하게 해결하려 노력하는지가 관건이어야지 시끄럽다고

혹은 '날것의 소란스러움/폭력'이 싫다고 그저 조용히 하라며 무질러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 싸우는 거 보고

애들보기 부끄럽지 않냐고 흔히들 말하는 건, 그래서 대개 무지의 소치다. 정치인들은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고 조용히 입닫고 있다가 이런 대량 학살도 벌어지고, 부정부패가 터져서 내전도 터지고 그러는 거 아닌가.

아마도 수용자들의 숙소로 쓰였던 듯한, 철조망이 한층 삼엄하던 한쪽 건물. 잔뜩 녹슨 철조망이지만 여전히

날선 이빨은 그대로다. 뚜얼슬랭 수용소는 안전하고 독성없는 '역사'의 한장면으로 전시되고 있지만, 사실

그때의 제3세계가 부딪히고 있는 국제정치적, 국내정치적 문제는 대부분 그대로다. 한국은..? 냉전의 최전선,

미국의 피벗(pivot)으로 제한된, 게다가 무능한 외교, 계층간 부의 격차 심화, 기득권의 부정부패...

안에 들어가니 이건 수용시설이라기보다는, 사육시설이다. 좁디좁게 구획된 공간,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둠,

그리고 발이나 손에 채워졌을 철제 차꼬가 그대로 남아 있고 정말 불결하고 간소한 화장실까지.

크메르어인지 뭔가 언어가 잔뜩 휘갈겨져 있는 한쪽 벽, 수용소로 쓰이기 전 아이들이 해둔 낙서일까 아니면

수용시설에 갇힌 누군가가 적어둔 글일까. 혹은, 비극이 벌어진 후 찾아온 누군가가 사람들을 기억하며 남긴

추도문일까.

해가 점점 중천으로 떠오르며 그림자도 확연히 짧아졌다. 남국의 열기가 훅훅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손발도 차갑고 가슴도 냉막하다. 이 공간은 그토록 서늘했다. 서늘하고, 시큰하고.

어딘가 굉장히 폐쇄된 채 어두침침한 공간, 바깥을 내다보기엔 너무 시늉만 해둔 창문, 하얗게 번지는 햇살.

마지막 건물동에서는 78년에 폴포트 치하의 캄보디아를 최초로 둘러봤던 한 서양인의 기록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폴포트의 초대를 받고 당시의 캄보디아 이곳저곳을 둘러봤던 그는, 그 거침없는 파괴와 재건의 움직임을

다소간 경탄의 눈으로 바라봤고, 일종의 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우호적이었던.

이런 식으로 당시의 사진과 감흥을 남겼고, 오늘날의 시점-역사적 평가가 어느정도 고착된-에서 다시 평가한

아이디어들을 함께 남겨 놓아서 훨씬 의미심장했던 거 같다. 훨씬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물론 그렇다고 당시라 해서 그 비판의식이 말랑말랑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유의해 볼 만한 점.

아마 그가 자신의 과거 사유를 반성하고 남들 앞에 이렇듯 샅샅이 끄집어내어 재평가하는 이유는, 이 메세지를

남기기 위함일 거라 생각한다. 사람에 대한 돌봄, 배려를 망각한 채 진행되는 래디컬한 혁명. 누군가의 피와

목숨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혁명의 비정함이나 과격함의 틈바구니에서 개별 인간들을 챙긴다는 게 어불성설일

수 있겠지만, 그래서 이제 그런 폭력적인 형태의 전복은 가능치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여겨지지만. 어떤

경로든 핵심은 그거다. 사람을 생각하기.

더구나 일국 차원에서의 '변혁'이 가능한지도 문제. 자립 경제체제를 갖출 수 있는지도 참 지난한 문제거니와,

자립경제를 갖춘다고 해서 외부의 적대세력으로부터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다. 러시아혁명 이후 외부로부터

지원받는 백군세력이 정상적인 국가 경제발전을 방해하고 상시적인 전시동원체제로 이탈하게 했듯.

꽤나 많던 전시물들을 다 돌아보고 문득 답답해져서 수용소의 철창 밖을 내다보았다. 한모금, 숨 돌릴 여유가

필요한 곳이었다.

자살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1층은 물론 2층, 3층에도 건물밖으로 뛰어나갈 수 있을 틈에는 전부 꽁꽁

철조망이 둘려 있었다. 자유롭게 죽음을 택하지도 못하게 붙잡아두고, '혁명 국가'의 이름을 빌어 그들을

'인민의 적'으로 처단하겠다는 집요한 의지일 거다. 사실 이건 모든 국가에서 법을 집행하며 국민을 규율하는

방법이랑 똑같다. 다만 조금 더 날것의 형태일 뿐. 사형수의 자살을 막고 목숨을 붙여놓은 상태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경우도 여전히 비일비재한 거다.

그들 수용자들이 행정적인 이유로, 아마도 세상에서 '제거'되기 이전의 서류 절차를 위해 저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이곳을 거쳐간 2만명, 여섯 명을 제외하곤 전부 저 의자를 거쳐 국가의 이름으로 살해당한 거다.

참. 단시간에, 그토록 많은 사람을 무참히도 해치웠다. 사람 한 명의 목숨이나 만 명의 목숨이나 경중을 따질 일도

부등호를 사이에 꼽을 일도 아니지만, 참 적나라하게 막장이었던...

나오기 전, 그들에 대한 위령탑이 서 있는 마당을 돌아보았다. 앞으로는 이런 광기 어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길.

그리고 지금 이순간에도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신념과 신앙과 이상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들에게도

귀감이 될 수 있길. 사람 만 명이나 한 명이나 똑같이 소중하다는, 그런 인식에까지 이를 수 있기를.

민주주의, 사람을 위한 정치체제는 피를 먹고 자란다. 사실 캄보디아 뿐 아니라,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렇게

시뻘겋게 피에 물든 장면들 한둘 이상씩은 갖고 있는 거다. 이런 비극은 어느 한 지역, 한 시대에 국한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언제든 재연되고 되살아날 수 있는, 다만 잠복해 있을 뿐인 사건일지 모른다.



마치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묘사된 '오세아니아'를 비롯한 세 개의 제국을 묘사하는 듯 한,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식은 힘


뚜얼슬랭 박물관에서 발견한 시. 1970년대 후반 폴 포트가 집권했던 약 5년간 2만여명의 크메르인들이 끌려들어가

단 6명만 살아남았다는 악명높은 뚜얼슬랭 수용소, 그 상상할 수 없는 시기를 상상케 해주는 시.


사랑, 결혼, 웃음, 게임, 학교, 신발, 빵, 온통 금지된 것들의 목록으로 이어지는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No hope, No life

A third of the people didn't survive.

The regiem died.




박쎄이 참끄롱(Baksei Chamkrong), 박쎄이 참끄롱, 박쎄이 참끄롱, 뭔가 묘한 운율감과 리듬감이 혀끝에서

대롱대롱 살아난다. 앙코르왓과 앙코르톰 사이에 끼어있는 조그마한 사원, 그냥 모른 채 휙 지나기 쉬울 정도로
 
조그맣다. 더구나 다른 후대의 사원들과는 달리 탑 하나 덜렁 있는 일탑형 사원이어서, 이후의 화려하고

울룩불룩한 사원들의 실루엣과는 영 달리 한번 볼록, 하곤 끝이다.

꼭대기까지 끙끙대며 기어올라가 보았다. 저 구멍 안에는 뭐가 있을까 싶어서. 팔을 괴고 누운 와불이 놓여있고

앞에는 향과 꽃이 빼곡하게 들이차있었다. 원래 이 곳은 시바에게 바쳐진 힌두교 사원이라던데, 사실 이 땅에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불교도인 거다. 지금처럼 민족 국가 단위로 그 땅위의 소유주를 주장하고

승인했으니 망정이지, 과거의 힌두교 선인들이 보았다면 당장 제단을 뒤엎고 불상을 깨뜨렸을 일이다.

가파른 벽돌탑, 붉은 기가 언뜻언뜻 배어나는 모퉁이에서, 벽면 귀퉁이에서 마성의 매력이 뿜어져

나온다. 저런 색깔은 아마 캄보디아의 사원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싶다.

낑낑대며 내려오는 길, 70도의 각도라곤 하지만 체감하기론 거의 90도에 가깝다. 모로 비튼 발바닥이 겨우

지탱해낼 만큼 깔려있는 계단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느낌이다. 어느 순간 에잇, 귀찮은데 훌쩍 뛰어버릴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아, 박쎄이 참끄롱은 '날개로 보호하는 새'를 의미한다고. 그냥, 사원 안에서는 그다지 새라거나 날개라거나

따위의 이미지가 구현된 부분은 못 봤던 것 같다.

뚝뚝을 타고 첫날 자전거로 돌며 만났던 앙코르 톰 내부를 다시 한번 돌아나오는 길. 정말, 자전거로 달릴 때와

차로 달릴 때, 그리고 걸어서 볼 때 눈에 잡히는 풍경이 다르다. 자전거로 달릴 때는 물론 언제든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차 안에서나 걸어가면서 뒤로 흐르는 풍경 따라 고개를 한없이 돌릴 수는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다시 만난 앙코르 톰 '승리의 문', 안녕, 크메르의 미소씨?

왠지 전에 봤을 때랑 분위기도, 뉘앙스도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아서 잠시 뚝뚝에서 내렸다. 이 녀석,

햇살의 강도니 각도니 그런 것들에 따라 느낌이 그때그때 달라지는 거 같다.

45도쯤 비튼 각도, 약간 아래에서 위로. 조명이 살짝 위에서부터 스미도록.

'크메르 미소'씨의 얼짱 각도 뽀샵사진.





반띠아이 쓰레이는 앙코르 유적지에서 약 38km, 한 시간정도 툭툭을 타고 가야 하는 길 위에서 소 달구지도

만나고, 자전거 레이스를 하겠다고 덤비는 꼬맹이들도 만나고.

밝은 감색 승복을 나부끼는 스님들과 허술한 기념품 가게 옆도 씽 지나쳐버렸다. 역시 여행은 속도가 느릴수록

재미있는데 말이다. 할애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충분하게 확보되지 않으니 자꾸 압축적으로 보려는 마음이

동하게 되는 거겠지만. 그래서 사실 가끔 여행 많이 다니는 자칭 '고수'들이 그렇듯 패키지로 나가는 '관광객'을
 
낮추어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빠알간 꽃의 무게를 못 이기고 축 처진 것처럼 보이는 줄기들.

반띠아이 쓰레이에 거의 다 도착할 즈음, 눈에 번쩍 띄었던 꼿꼿한 나무 한 그루. 뭔가 왼쪽의 무성한 이파리의

가지와 앙상한 오른쪽의 가지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드디어 반띠아이 쓰레이다. 근 한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달려 여기까지 꼭 와야 했을까, 살짝 반신반의하는 맘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여긴 입장권 판매소부터 다르다. 깔끔히 정비된 간판에 사원 주변을 둘러싼 듯한 연꽃밭.

입구서부터, 뭔가 조각이 다르다. 선명하고 섬세하고, 빈틈없이 화려하다.

'링가'들이 두줄로 정렬한 채 순례자를 중앙사원으로 인도하는 통로. 바닥의 포석은 더러 유실되고 이리저리

비틀어져 버렸지만 링가의 불끈한 형태는 그대로다. 상상 그대로인 것이, 저 링가란 파괴의 신 시바를 추상화한

형태로 표현한 것으로 시바신이 사람처럼 상상되기 이전 그의 존재를 나타낸 조각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건

고대인들이 으레 그러하듯 남성의 성기 모양을 따서 상상되었다고 하는데 벌써 모양새가 딱 그렇다.

사원 중간중간 부서진 조각들에도 꼼꼼하게 번호가 매겨져 있다는 건, 이 사원이 한번 철저하게 스캐닝되어

관리되고 복원되고 있다는 의미와 같지 않을까. 이 조각이 있어야 할 곳, 소용되는 곳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단

것일 테니 말이다.

얼마나 깊고 정교하게 조각을 했는데 살짝이라도 손을 대면 으스러져 떨어져나갈 것만 같다. 무슨 부드러운

붉은 색 목재를 조각한 것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이건 모두 붉은 사암, 돌이다.

링가가 세워져 있던 장소, 성소가 흐르는 곳이라 하는 곳을 '요니'라 한다. 옆을 지나가던 한국인 가이드의

설명을 훔쳐들은 바, 이것 역시 여성의 성기를 본따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그래서 링가와 요니가 만나는 이

곳을 성스러운 장소로 여겼었다고. 미루어 추측해 보자면 아마 성기 그 자체가 창조나 풍요, 생산력을 상징할

수 있었겠구나 싶다.

가까이 다가가서 볼수록 굉장하다. 멀리서 볼 때부터 충분히 그 돌출감을 실감할 수 있을 만큼 깊고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엇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이건 무슨 부드럽고 다루기 쉬운 코르크 재질로 만든 장식 같기도 하다.

이렇게 입체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었던 당대의 장인들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았을까,

캄보디아의 전통 사회에서도 '사농공상' 같은 유교적 위계가 있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사원이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온통 조각으로 가득해서 밑에서부터 훑어올라가는 시선이 위에까지 가 닿으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쉽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을만큼 강렬한 매력을 가진 반띠아이 쓰레이.

그러고 보면 '반띠아이 쌈레', '반띠아이 쓰레이' 등등 '반띠아이'로 시작하는 사원들이 적지 않다. 반띠아이란

크메르어로 '방으로 둘러싸인 사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그리고 '쓰레이'는 (발음을 잘 해야겠지만)

'여성'을 의미한다고 하니, 반띠아이 쓰레이는 사원의 여성적인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걸맞는 이름을 가진 셈.

앙드레 지드가 소싯적에 여기서 '동방의 모나리자'라 불렸다는 이 여신상을 도굴하려다가 잡혀서 6개월 실형을

살았다고 한다. 그가 여길 도굴하려던 게 1924년,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 아름다운 사원이 발견된 게 고작 그

십년 전, 1914년이라는 사실이다. 얼마나 잊혀져 있었던 걸까.

하아...할 말을 잃게 만드는 저 조각들. 천년 전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엣지있게' 생생하다. 슬쩍

손을 뻗쳐 모서리를 만져보니 여전히 빳빳한 게, 막 조각해 내었을 때의 뚜렷한 각도가 그대로인 게다.

약간 사원 옆으로 튕겨나와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다. 아기자기한 높이에 그다지 크지 않은 스케일의 사원임엔

틀림없지만, 붉은 빛을 가득 품은 정말 아름다운 사원이다. 해가 뜰 때나 질 때 보면 햇살에 붉은 빛이 반사되어

더욱 이쁘다고 하는데, 빈약한 상상으로나마 그 풍경이 대충 감이 간다. 아니, 그때의 감동이 어느만큼일지

대충 감이 간다는 게 맞겠다.

육체적 피로나 따꼼한 발바닥 따위는 잊고 아무리 감격한 채 사원을 헤집고 다녀보려 해도 한가지, 뜨거운 불볕

더위는 어쩔 수 없다. 잠시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도 사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반띠아이 쓰레이에도 외부를

빙 둘러 해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제 자취가 거의 남지 않을 만큼 사라져버렸지만, 어쨌건 흔히 '유럽의 성'에서

연상하는 해자는 캄보디아에서 연원했다는 것.

3개의 탑을 앞세운 중앙성소는 원숭이 상들이 빙 둘러 수호하고 있고, 외벽에는 빼곡하게 여신상이나 코끼리상

혹은 나가(뱀)상, 덩굴무늬 등이 조각되어 있었다. 굉장히 화려하고 사치스럽기까지한 느낌이었는데, 아쉽게도

사진상으로는 색감이 좀 날아가버렸다.

근데 대체 지드가 훔치려 했던 '동양의 모나리자'라는 여신상은 어떤 걸까. 하나씩 꼼꼼이 살피며 대체 뭘까,

했는데 약간씩 표정과 몸짓의 뉘앙스가 다르다. 뭐였을까. 지드가 반해 버려서 도굴까지 꾀했던 그 여신상은.

사실 여신상은 중앙성소의 벽면마다 하나씩 안배되어 있을 정도로 많은 수가 조각되어 있는 데다가, 사이즈도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아 맨눈으로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극히 드물게도 이곳은 사원 보호를 위해

일정 거리를 확보한 채 출입제한선을 설정해 두고 있는 거다.)

어느 문화재나 그렇지만, 그림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와 이야기를 알고 보면 더욱 재밌다. 그렇다고 여기에 직접

가이드북에서 읽은 배경 이야기들을 그대로 옮기는 건 의미없는 짓 같고, 그저 비주얼과 개인적인 이야기만

털어놓아도 보고 싶은 맘이 무럭무럭 동하지 않을까 기대해 볼 뿐. 사실은 여행 가기 전 열심히 관련 책도 읽고

힌두교 신화와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입에서 술술 나올 만큼 익숙하게 공부를 했었는데, 어느새 다

까먹어 버렸다.;

또다시 중앙성소 주변에서 발견한 '요니'. '반띠아이 쓰레이'는 시바신에게 바쳐진 힌두교 사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시바신을 형상화한 초기 형태랄 수 있는 남성 성기 모양의 '링가', 그리고 그것과 한짝인 '요니'가

곳곳에서 모셔지고 있는 거라고.

여기에 조금 남아있는 해자의 흔적. 원래는 해자 바깥 쪽으로 외벽이 하나 더 있었다고 하는데 거의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해자너머로 보이는 반띠아이 쓰레이의 중앙사원과 그곳을 향한 통로들이 장난감같이 귀엽기도

하고, 테마파크처럼 아기자기하기도 하고.

너무 거리를 두었는지 사원의 디테일한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초록빛 정글과 대비되는 붉은 사암

재질의 벽돌들이 또다른 미감을 자극한다.

가루다(조류의 왕)도 보이고, 비슈누(코끼리)도 보이고, 말탄 시바도 보이고, 머리만 남고 자신의 몸을 모두

뜯어먹었다는 악마 칼라도 보이고. 아니 저토록 정교한 덩굴장식은 대체 어떻게 천년을 버티냐고.

연꽃밭 한 가운데 잘 꾸며진 화장실이 있다. 아마 캄보디아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운 연꽃들. 여행객들의 영양분을 먹고 살아 더욱 아름다워졌으리라.

화장실에서 발견한 어이없는 그림 하나. 휴지걸이 옆에 붙은 그림이 뭔가 보고 실소(失笑)해 버렸다. 샤워하지

말랜다. 워낙 더운 나라, 더구나 반띠아이 쓰레이까지 왔을 여행객들이면 얼마나 꼬질꼬질 힘이 들었을까.

이런 어이없는 그림이지만, 오히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생기길래 오죽하면 그러겠어 싶기도 하다.

캄보디아에서 봤던 개 중에 가장 활기차 보이던 개. (다른 개들과는 달리) 그래도 불볕더위가 내리쪼이는

시간대에 그늘에 숨어 퍼지지 않고 네 발로 당당히 버티고 서서는 화장실 다녀오는 사람들 냄새를 맡던 녀석은

꽤나 똘똘해 보였다.



앙코르 유적지의 스몰투어와 그랜드투어, 그 중에서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얼추 하룻동안 돌아보게 되는

그랜드투어 루트를 자전거로 밟고 있다.

앙코르 왓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앙코르 왓은 앙코르 유적지 중 하나,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하나의 사원이고, 근처에는 아기자기한, 혹은 거대한 사원들과 유적들이 즐비하다. 그렇게 유적지와

유적지를 이어주는 이차선 도로 옆으로는 이따금 소가 풀을 뜯고, 원숭이가 지나가는 정글이다.

그렇게 도착한 니악 뽀안, 사실 그렇게 하나하나 다 돌아봐야 하나 하는 회의도 얼핏 스쳤지만, 어차피 루트를

따라 가고 있는 중에 마주치게 된 것이라 잠시라도 들러보기로 했다. 먼지가 풀풀 나는 비포장도로, 게다가

경사도 살짝 있어서 당장은 좋지만 나중에 돌아나갈 땐 어쩌나 싶은 코스를 오분 정도 달리니 당도했다.

니악 뽀안은 '꽈리를 튼 뱀'이라는 뜻이다. 가운데 분수대처럼 조성된 사원의 계단을 가만히 보면 두 마리의

뱀이 둘둘둘, 흔히 표현되는 잘 싸질러진 Ddong처럼 감겨 있는 걸 볼 수 있으니 이름의 의미는 충분히 알겠다.

사방으로 부조 조각이 있고, 그 중에서도 아직 많이 훼손되지 않은 조각들은 꽤나 그럴듯한 실루엣을 그리고

있었다. 원래 이 곳은 물이 가득 차있는 수상사원인데, 우기에나 물이 찰 뿐 다른 때에는 걸어서 사원 안쪽까지

들어가 볼 수 있는 거다.

주위에도 네 개의 조그마한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대체 물이 어디까지 잠겨들어간다는 건지 그리고

조그마한 연못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짙푸른 하늘을 보며 잠시 누워 쉬기로 했다. 딱히 여기가 어떤 곳이고 역사적으로 어떻고 조각은 어떻게

조성되었으며 재질은 뭔지, 그런 거 모르고도 그냥 정글 한가운데 커다란 운동장 벤치 같은 거 있고 마침맞게

짙은 그늘도 있으니 쉬기 딱 좋은 타이밍인 거다. 그럴 듯한 운치. 잠시 낮잠을 즐겨도 좋을 만큼 기분좋은

따뜻함, 땀이 식으며 몸이 조금씩 '찰져가는' 느낌, 게다가 쉼없이 달린 자전거로 묵직하지만 유쾌한 두 발의

나른함까지.

잠시 누웠다가 가운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이 말이 웃긴다. 아마 물이 들어차 있었으면 가운데

사원으로 헤엄쳐 가는 말의 형상이 그럴듯 했을 텐데, 지금은 무슨 부적붙은 말 강시처럼 두 팔을 앞으로

내뻗고는 꽁꽁 굳어있는 모습이다. 

중앙성소에서 한번 둘러보며 구경하고 있는데 저쪽 입구에서 우르르,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들어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 곳의 매력은 정글 한가운데서 사람 소리없이 편안히 누워 쉴 수 있었단 게 가장

컸었는데 그 평화가 깨지기 직전이다. 사람의 파도를 피해, 서둘러 다시 돌아나가기로 했다.




쁘리아 칸, 크메르어로 '신성한 검'이라는 의미의 남성적 기풍이 물씬한 사원에 도착해 자전거를 내리자마자

쫄래쫄래 쫓아오는 아이들. 조금이라도 흥미를 보이거나 웃음을 보이면 안심한 아이들은 마음놓고 말을 걸고

물건을 내밀고 지칠줄 모르고 따라온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아이들이 어떻게 그리도 하나같이 이쁘고 눈이

맑은지 웃음을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거다. 숨바꼭질이나 얼음땡이라도 하듯 쫓고 쫓기는 정신사납고 부산한

놀이를 좀 하다가 끝내 털썩 주저앉아 항복하고 만 내게 사진찍어달라며 활짝 웃어주던 아이.

쁘리아칸은 앙코르톰 바로 북쪽에 붙어있는 커다란 사원이다. 한때 불교 승려가 천명을 헤아리던 거대 사원인

동시에, 왕궁이자 도시의 기능도 병행되었던 네모반듯한 계획도시이기도 하다. 정글이 동서남북 사방에서

포위하고 슬금슬금 침투해오고 있지만 여전히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사원 내부의 통로들.

사원 중간중간에 배치된 경비원은 딱히 여행객들의 움직임을 제재하지는 않는다. 관람 동선이나 제한구역 등이

제대로 설정되어 있지 않아 그냥 발길 닿는대로, 거대한 사원을 돌아다니다 보면...길을 잃기도 한다.

좌우대칭에 엄격했던 크메르 유적들 안에 들어서면 어쩔 수 없다. 어디가 남쪽인지 이글대는 태양을 보고

가늠해 볼 밖에 없는 거다.

가루다, 한국에서는 불교적 전통에서 '금시조'라고 이야기하는 이 조류의 제왕은, 비슈누를 태우고 다니는

커다란 새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커다란 사원을 이고 있다는 듯 튼실한 '꿀벅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사원으로 들어가는 통로. 아무리 캄보디아, 앙코르왓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라고는 해도 워낙 많은

건축물들이 산재한 터라 생각보다 여행객들로 붐비지는 않았다. 몇몇 주요 건축물만 빼고.

얼핏 보면 조그마한 집 하나가 옆의 나무에 치여서 붕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눈의 착각. 실제로는

꽤나 큰 사원인데다가 그보다 훨씬 징그럽도록 크고 거대한 나무다.

사람과 비교컨대 이정도 사이즈. 스펑나무라는 이 나무의 발육속도나 생장력은 어마어마해서 삽시간에 건물을

잡아먹곤 한다고, 그나마 이건 계속해서 신경써 통제하고 관리하기 때문에 좀 늦춰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벽면을 움켜쥐려던 거대한 나무뿌리를 잘라서 생장억제제를 투여하기도 한다고.

틀림없이 이 사원 어딘가에 자신의 위치가 있었을 돌들이, 더이상 사람들의 기원을 들어주지 못한 채 바닥에

쓰레기처럼 널려버렸다. 그렇지만 그 위에는 이미 또 다른 사람들의 소원이 조그마한 돌멩이로 쌓이기 시작한

셈이니, 결국 어쨌거나 여전히 충실하달까.

무희의 홀이라 이름붙은 공간으로 들어서는 들머리, 사원에 소속된 무희들이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공연을 했던

장소라 해서 '무희의 홀'이라고 한다. 공간에 맞는 인테리어, 무려 열세명의 무희들이 춤을 추는 동작이 조각된

문틀.

뱀의 신, 나가를 타고 있는 새의 신, 가루다. 아주아주 전형적인 크메르 유적군의 난간 '액세서리'.

잠깐 앉아서 쉴 만한 그늘을 찾고 나니 딱 이녀석과 눈이 마주보고 앉게 되었다. 뒤엣녀석은 이미 두 발만

남긴 채 자연으로 돌아갔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천년 가까이 사원을 수호하는 사자 한마리.

다소 이국적인 건물이다 싶어 가이드북을 펼치니 역시, 그리스풍의 건축물이라고 딱 찝어놓았다. 여기가

바로 '쁘리아 칸', 신성한 검을 모셔놓았던 곳으로 추측되는 곳이라 하는데 대체 어떻게 생긴 검이었을까.

유난히 촘촘하게 세워진 기둥 사이로 언뜻언뜻 고이 모셔져있었을 과거 '신성한 검'의 잔영이 보이는 듯 했다.

나의 상상 : 뱀의 형상을 한 왕의 침대같은 곳에 누워 육감적인 여성으로부터 크메르식 마사지를 받고 있는

오만한 표정의 남자. 이건 당대 크메르 왕국의 생활상을 드러내는 걸까.

가이드북의 '정답' : 힌두신화에 따라 한 우주의 주기가 파괴되고 지금의 세계가 오기 전에 비슈누가 우유의

바다에서 큰 뱀 위에 누워 다음 세상을 명상하고 있는 장면.

나의 상상 : 퍼덕퍼덕 날아다니는 천사들을 배경으로 한 수레 위 가부좌 아저씨가 벌거숭이 아저씨들로부터

신앙고백을 받는 장면.

가이드북 : ...(침묵, 설명없음)

연씨무늬 창문살이란다. 뜨거운 햇살을 막으면서도 통풍을 원활하게 하고 바깥 풍경을 볼 수 있게 하려는

'조상님의 지혜'인 거다. 꼭 한옥이 어떻네 온돌이 어떻네 하면서만 찾을 수 있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조상님의 지혜', 우리보다 앞선 시대를 살아간 선배 인류에 대한 존중, 경탄의 표현이니까 말이다.

중간중간 세워져 있던 No Touch. 흔히 '노다지'라고 하는 말의 어원은 구한말부터 한반도에 들어와 지금의

북한 지역 금광을 채굴하던 서양인들-대개 영어를 구사하는 미국인들-이 갱도 안에서 금을 캐던 한국인 인부가

금을 발견하고 나면 손대지 말라고 하면서 '노 터치! 노 터치!', 그로부터 비롯했다는 설이 있다. 어쨌던

'노터치'란 표지판이 기우뚱 위태롭게 선 저곳도 캄보디아 현대인들에게, 인류에게 '노다지'와 같은 곳.

비록 이렇게 새초록한 이끼가 무성해지고,

문틀 가득 세심하게 조각된 무늬들이 손을 타 닳아갈 지언정,

여전히 사람들은 중앙 성소를 찾아 순례하는 마음으로 사원을 돌아 보는 거다.

앙코르왓 지역 내 어느 사원에서든, 영어/프랑스어/일본어/중국어 등 세계 언어로 가이드를 해주는 캄보디아

현지인 가이드들이 일군의 여행객 무리들을 이끌고 다니는 걸 볼 수 있다. 그 중 한 영어 가이드가 설명하던

이야기를 훔쳐들으며 함께 감상했던 자야바르만 7세의 어머니를 본딴 여신상이라던가.

같은 여신인데, 조명이 없을 때의 은은하던 미소가 조명 아래에선 '쥐잡아먹은 듯한 입술'로 덮여버렸다.

여기는 그 가이드가 은밀히(?) 안내해주며 팁을 요구했던 또다른 숨겨진 여신상. 보존 상태도 훨씬 양호하고

표정도 훨씬 당당하다. 여신이 아니라 여왕의 풍모가 풍겨난다.

한시간반 정도 둘러보니 다 둘러봤다 싶다. 나오는 길에 다시 돌아본 통로.

갈수록 문의 크기가 작아지는 것이 느껴지는지. 사원의 네 개 대문에서 중앙성소로 이어지는 통로 중

서쪽에서 이어지는 통로는 중앙으로 갈수록 문의 크기가 작아지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중앙, 왕이

있는 곳으로 갈수록 신하들의 머리가 숙여지도록 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인 셈. 경복궁이나 덕수궁에서,

심지어는 수원화성에서도 왕이 지나다니는 문과 신하들이 다니는 문의 크기가 다르듯 여기 역시

마찬가지 아이디어가 건물에 반영된 거다.

머리가 날아가버린 수문장의 상이다. 이 곳을 공략했던 외적들이 크메르의 기운을 쇠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머리를 파괴했다는 건데, 그런 식으로 '기운'을 꺽기 위해 이러저러한 상징을 깨부수고 파괴하는 일은 사실

어느 나라에서나 조금씩은 자취가 남아있는 듯 하다. 백두대간의 쇠말뚝도 그렇고, 태국의 무수한 머리없는

부처상들도 그렇고.








@ 캄보디아, 씨엠립.
문둥이왕 테라스에 길게 이어진 건 바로 코끼리 테라스, 여기는 앙코르톰 동쪽 '승리의 문'을 통해 들어올 수

있었던 개선군이 왕에게 승리를 보고하던 곳이라 한다. 코로 연꽃을 휘감아 왕에게 바칠 태세를 갖춘 코끼리

코들이 벽에서 뻗어나왔다.
 
아니, 어쩌면 코끼리들의 육중한 몸으로 벽을 쌓아 왕의 전면에 도열시켜 놓았음을 상징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굉장히 유니크하면서도 재미있는 발상, 그리고 건축물이다.

코끼리 코, 하면 생각나는 건. 근데 돌로 깎였음에도 미끈하게 쭉 뻗은 코끼리 코라기보다는 팔을 스트레칭하는
것 같이 나와버렸다. 아놔.

통일신라시대던가, 이 땅에서 발굴된 막새-기왓장-무늬에도 비슷한 그림을 분명 본 적이 있다. 흔히 요새

'치우천황기'라고 흔드는 데 들어간 그 그림 말이다. 그건 사실 한민족의 고대 인물을 드러내기엔 다소 적젏치

않은 상징일지 모르겠다. 캄보디아에서도, 다른 불교 베이스의 국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미지인 탓이다.

('치우천황'이란 인물에 대한 악의적 이미지 왜곡이 중국에 의해 이뤄졌고, 그게 아시아 문화권 일반의 악귀,

라거나 악귀를 쫓는 무서운 신, 의 이미지로 변용되었단 점을 감안해도 그렇단 얘기다.)

여기서도 빼놓을 수 없는 매혹적인 저 사자의 뒷태. 완전 잘록한 허리와 풍성한 힙의 조화라니. 사랑스럽다.

뭐랄까, 카메라 광고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는데. 그들이 의식하지 않게 하겠다, 어쩌구 하는 비를

따라가다간 가랭이 찢어지겠다. 두다리를 허공에서 펄럭이며 날고 있는 압사라 여신도 비웃었다.

코끼리 테라스에서 왕이 바라본 풍경은 또 어땠을까, 싶어 휘휘 둘러보았다. 우선 정면.

멀리 보이는 건축물들은 원래 창고 용도로 쓰이다가, 나중에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일종의 영빈관으로

쓰였을 거라는 게 가이드북의 설명이지만 글쎄. 저런 데 사람이 살기엔 좀 불편하지 않았을까, 커다란 굴뚝

아니면 무슨 화장터 같이 생겼는데.

왼쪽으로 고개를 틀면, 저쪽에 문둥이왕 테라스와, 길게 이어진 코끼리 코가 인상적인 코끼리 테라스.

오른쪽, 문무백관들이 왕의 좌우로 호위하듯 둘러서 있었겠지. 빳빳한 밀랍인형처럼.

관광객들도 눈에 잘 띄지 않는 한산하고 다소 휑한 분위기, 운치를 더하듯 어슬렁대는 검정개 한마리.

가만히 앉아 쉬고 있자니 휘적휘적대며 느릿하던 녀석이 어느새 바로 앞까지 찾아왔다. 심심했던 게냐.

왕이 서 있던/앉아 있던 바로 그 장소. 다소 기울어져 보이는 게 카메라 잡은 이의 농간이었는지 아님 원래

저 지반이 살짝 뒤틀어져 기우뚱해 있던 건지 모르겠다.


왕의 시각에 빙의되어 보자, 이게 바로 왕의 시야.




흔히 '앙코르왓'이라고 칭하는 크메르 유적군은 멀게는 씨엠립 시내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롤루오스 지역,

37킬로미터 떨어진 반띠아이 쓰레이까지 포괄하는 넓은 지역에 수십여 유적이 산재해 있는 방대한 지역을
 
이른다. (사실 '앙코르왓'은 그 유적군 중 하나, 대표적인 하나의 유적 이름이다.) 캄보디아만 따로 다룬 안내책은

생각보다 많지도 않지만 보통 뚝뚝을 하루 종일 대절하는 것을 전제로 하루짜리, 혹은 삼일짜리 일정을 엇비슷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나름 좀 새로운 루트를 구상해봤다.


첫날(자전거) : 일명 '그랜드 투어'라 불리는 코스. 오전에는 앙코르 톰(Angkor Tom)(바이욘, 바푸온, 피미니아까스,
 
옛궁전터, 문둥이왕테라스, 코끼리테라스), 오후에는 쁘리아 칸(Preah Khan), 니악 뽀안(Neak Pean),

따쏨(Ta Som), 그리고 쁘레룹(Pre Rup)까지.

* 자전거 대여료는 호텔에서 보통 하루 3달러, 예치금을 맡기기도 한다. 그랜드 투어 이외에 스몰 투어 코스가 있는데

이름 그대로 좀더 짧고 여유로운 코스가 될 거 같다.


둘째날(뚝뚝) : 외곽지역의 포스트들을 작정하고 둘러보는 코스. 오전에는 쁘라삿 끄라반(Prasat Cravan), 반띠아이
 
끄데이(Banteay Kdei), 쓰라쓰랑(Sras Srang), 반띠아이 쌈레(Banteay Samre), (한참달려) 반띠아이 쓰레이

(Banteay Srey), (한참달려) 오후에는 롤루오스 유적군(롤레이(Lolei), 쁘레이꼬(Preah Ko), 바꽁(BaKong)까지.

* 뚝뚝의 종일 렌트비는 12-15 달러 정도? 흥정하기에 달린 거 같다. 다만 반띠아이 쓰레이 쪽을 가려면 10달러 정도
 
비용을 더 내야 하니, 차라리 추가비용 내고 도는 김에 외곽지역을 다 도는 게 좋을 듯 하다.



셋째날(자전거 또는 도보 또는 뚝뚝) : 앙코르왓 유적군의 핵심, 앙코르왓과 기타 지역 둘러보는 코스.

오전에는 박쎄이 참크롱(Baksei Chamkrong), 앙코르왓(Angkor Wat), 승리의문(Angkor Tom East Gate),

오후에는 톰마논(Thommanom), 차우싸이 떼보다(Chausay Thevada), 스삔토마(Spean Thma), 따께우(Ta Keo),

따쁘롬(Ta Prohm), 프놈바껭(Phnom Bakheng)까지.

* 체력 상태에 따라, 충분히 도보도 가능할 만큼 오밀조밀 붙어있는 포스트들이다. 다만 도보라 해도 뚝뚝 등을

이용해 앙코르 왓 내부까지는 들어와야 하며, 씨엠립시내에서 앙코르왓까지 최소 5달러는 줘야 하는 듯. 그러느니

자전거나 뚝뚝을 이용하는 게 경제적이기도, 편하기도 할 거다.



기타 문의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 제게 문의해주시면..최대한 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지만, 막상 이렇게 정리하고보니

기존 루트와 아주 다르진 않다. 다만 앙코르왓을 맨 마지막으로 아껴두었던 건 정말 잘 한 거 같다. 그걸 보고 다른 걸

봤다면 아마도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듯. 갠적으론 반띠아이 쓰레이, 앙코르왓, 따 쁘롬이 정말 좋았다.

어쨌든, 그런 정도로 거칠게나마 일정을 짜두고 출발한 첫날 아침, 물안개 너머 어슴푸레한 앙코르왓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대로 앙코르 톰까지 직진. 남문을 지나기 직전이다. 이미 사람들이 바글대는 건가 살짝 긴장했는데

워낙 넓은 곳에 흩어지다 보니 별로 여행객이 많다는 느낌은 내내 안 들었던 것 같다. 남문 고푸라(현관문짝..

이랄까)에서 언뜻 내비치는 큰바위 얼굴이 보이는지.

난간에 장식되어 있는 사람의 형상. 실은 이런 장식 하나하나에도 과거 신화의 한 대목을 구현한 내용이 응축되어

있어서 아는 만큼 보이는 거고 더욱 재미있게 느낄 수 있는 거라지만, 모른대도 딱히 문제될 건 없다. 앙코르톰을

둘러싼 넓은 해자는 살짝 말라있었다. 유럽 중세의 성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깊은 해자와 도르레로 오르내리는

거대한 성문이 떠오를 텐데, 그 해자가 서기 천년경 크메르 양식으로부터 전래된 거란 사실은 꽤나 놀라웠다.

어디로 갈까, 여기는 어딘가 잠시 자전거를 내려 길을 살펴보고 있는 라이더 윤. 그러고 보면 이날 햇볕이 그리

뜨겁지 않아 왠종일 자전거를 타는 게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오후엔 스콜이 잠시 내려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달리기도 했지만, 그 역시 더위를 식히는 데 일조했을 뿐더러 무척이나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

남문에서 쭉 올라가니 앙코르 톰의 대표 유적지, 바이욘Bayon이 있다. 캄보디아에 대해 갖고 있는 몇 안되는

이미지 중 하나가 바로 이 거대한 돌머리, 이른바 '크메르의 미소'가 아닐까 싶다. 그 크메르의 미소가 사면에

그려져있는 탑이 백여개라던가, 그런 유적지가 바로 바이욘이다.

멀리서 보면 그냥 정교하게 잘 쌓아올려진 완만한 굴곡 띈 돌탑들, 혹은 사원으로 보이지만 조금 눈살에 힘을 주고

눈여겨보자면 몇 개의 얼굴이 떠오르는 게 보인다.

앙코르 톰 주변을 코끼리로 돌아보는 여행자들. 쭉쭉 뻗어나간 나무들, 울창한 정글 사이를 저렇게 코끼리 타고

누비는 것도 꽤나 매력적일 거 같았다.

뭐랄까, 나무들이 전부 훅, 하고 자라난 느낌이었다. 한국에서 익숙했던 사이즈와 기장의 나무들이 아니라

훨씬 크고 훨씬 높다란 나무들이어서 영판 다른 종을 보는 듯한 느낌. 이런 나무들이 쭉쭉 자라나는 정글속에서

문득 앙코르왓 유적지, 천년 동안 버텨낸 유적지를 처음 발견했을 자의 경이로움이란,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앙코르 톰, 바이욘 앞에 정비된 자그마한 연못들. 세월의 때가 눅진눅진 묻어있는 돌덩이들인지라, 건조물 자체가

하나의 자연석인 양 느껴진다. 본격적인 앙코르 톰 탐방은 다음 포스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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