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도요호텔에서 투숙객들의 편의를 위해 일본어판 관광안내지도 일부를 복사해서 비치해놓은 듯 하다.

한국에서 들고 갔던 가이드북에 나와있지 않은 세부 사항이라거나, 세세한 골목같은 경로를 탐색할 때 꽤나

쏠쏠하게 도움이 되었던 지도였다. 축척이 1:4000이니까 거의 50미터 버전의 내비게이션하고 비슷한 수준아닐까.

후쿠오카 시내 관광을 계획중인 분들에게는 꽤 도움이 될 듯.





하카다역 인근 숙소에서 가까운 전철역까지 걷다 보면 몇군데씩 새로 생겼다는 '신장개업'의 빠찡꼬게임장들을

볼 수가 있었다. 한국에서 바다이야기가 성행했고, 지금도 변종 업소들이 성행하고 있다지만 나와는 별로 인연이

닿지 않는 장소들인 터, 도박장이라고는 몇년전 강원카지노랜드 가서 슬롯머신 하다가 만원정도 기부하고 온 게

전부였다. 시끄러운 소음이 공기중에 붕붕 떠다니고, 그렇지만 아직 신장개업중인지라 약간 어설픈 기류가 흐르는

그 곳에 들어서니 왠 배용준사마와 최지우히메가 보인다.


오...역시 이들이 일본에서 좀 먹히긴 하나 보다 싶기도 하고, 게임기 자체가 온통 겨울연가, 그 둘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는 걸 보니 좀 살짝 질리기도 하고. 대체 저건 무슨 게임일까 잠시 궁금해하다가 돌아서고 말았다.

그 옆라인에 늘어선 또다른 게임기..마치 바다이야기처럼 스크린이 있고, 뭔가 그림이 움직이는 것 같던데 역시

좀처럼 어케 하는 건지 모르겠다. 바글대지는 않더라도 누군가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옆에서 살짝

어깨너머로 배워서 직접 땡겨보기라도 했을 텐데, 워낙 사람도 없고 휑뎅그레한 분위기여서 금방 문밖으로 나섰다.

텐진 쪽으로 가다가 마주친 영화관, 건물 둥근 모서리에 입구가 펼쳐져서는 이런저런 일본영화들을 상영하고 있다.

왠지 간판도 그렇고, 외관도 그렇고 중후하달까, 고풍스러운 느낌이 짙었다. 사실 우리나라도 한 십년전만 해도

종로나 명동즈음의 영화관은 다 저런 느낌 아니었던가 싶은데, 급속히 멀티플렉스관들이 생겨나면서 볼 수 없게

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가끔 일제강점기나 6,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뮤직비디오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게 된 정도.

텐진으로 가는 길, 어느새 어둠이 짙게 드리웠고, 야트막한 하천에는 커다란 네온사인 불빛들이 늘어지게 비쳤다.

살짝 비가 내리더니 땅바닥이 금세 촉촉해졌고, 텐진 한 가운데쯤 보도에 박힌 방향 표시판은 공항, 역사 등등의

방면을 안내하며 밟히고, 비에 씻기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버스를 타고 다시 하카다역 근처로 돌아나오는 길. 빗방울이 묻어 울룩불룩해진 차창 너머로

어릿하게 굴절되어 들어오는 불빛들. 왠지 모르게 사람을 애잔하게 만들었던 외국의 낯선 밤거리.

하카다역 근처에서 술을 한잔 마시고 들어가려 했다. 일본에 온 김에 제대로 된 이자카야에서 오꼬노미야끼 같은,

일본식 안주들과 따뜻한 사케를 마시고 싶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서울에선 열걸음마다 채이는 이자카야 술집이

역 근처에선 좀체 찾을 수가 없던 거다. 어찌어찌해서 들어간 술집에선 오꼬노미야끼 같은 것 대신 꼬치류를

주로 팔고 있었다.


게다가 메뉴판은 온통 일본어뿐, 영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이어서 옆사람들 먹는 것을 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켜

음식을 주문해야 했다. 다행히도, 옆자리에 앉았던 분이 후쿠오카에 와서 사신 지 오래되셨다는 한국분이셔서,

그분의 도움을 받아 몇가지 안주류를 무난히 주문하는데 성공. 팽이버섯베이컨말이꼬치, 닭고기꼬치, 관자꼬치,

게다가 실패였다고 후회하고 만 고래고기까지. 울산 사는 군대 선임이 늘 고래고기를 한번 맛보여주겠노라고

약속만 하고 여지껏 못 지켰던 터여서, 늘 고래고기에 대한 선망과 호기심이 넘실대던 터였다. 그렇게 과거의 오랜

욕구를 따라 질러버린 고래고기는, 시커먼 색의 고기가 가지런히 잘려서 한 열 점 나왔던가. 어찌나 짜던지, 또

어찌나 고기가 퍽퍽하던지 한입 살짝 베어물 때마다 사케 한모금을 머금어야 했다.

정말 맛있던 건 이 가리비 구이..랄까. 속이 옹골찬 가리비 하나를 큼직하게 몇조각으로 썰어서는 버터를 조금

넣고 조개구이집에서 굽듯 철판 위에서 굽는 거다. 고소하면서도 짭조름한, 게다가 탱탱거리면서 쫀득거리는

가리비의 식감이란. 손님들이 들고나고 주문하고 호출할 때마다 큰소리로 이럇사이마세~ 아리가또고자이마스~

어쩌구~ 라고 경쾌하게 떼지어 외치는 종업원들의 외침 속에서도 홀연히 그 존재감을 과시하는 가리비.

한참 먹고 마시다가 문득 바라본 자리 앞 철판에선 김을 걷어낸 삼각김밥 모양의 주먹밥이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었다. 저건 또 뭘까..이미 어느 정도 배도 찼고 술도 오른 상태였지만 한국 돌아가서 저런 걸 또 언제 맛볼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하고는 싸가기로 했다.

찰지게 모양잡힌 하얀 삼각밥이 철판 위에서 몇번씩 뒤집어지는 동안 꺼뭇꺼뭇하게, 또 누릇누릇하게 익혀졌다.

그리고 얼추 지금쯤 꺼내지 않으면 타지 않을까 싶은 타이밍에 맞춰, 주방장 아저씨가 앞뒤로 간장을 발라주고는

철판에서 건져냈다.

숙소에 돌아가 포장된 삼각주먹밥을 풀고는, 가져갔던 위스키 미니어처병을 홀짝대며 안주삼아 맛을 봤는데 역시

조금 과하게 먹는게 아닌가 싶긴 해도 먹을 땐 먹어주는 게 남는 거란 확신이 들었더랬다. 겉은 누룽지처럼 살짝

딱딱하면서도 간장 때문에 달콤짭조름하고, 속은 밥알들이 쫀득하게 찰싹 엉겨있고. 꽤나 맛있었다.


그치만 주점을 나서면서 살짝 기분이 찜찜했던 건, 왠지 바가지를 썼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4000엔이 약간 넘을

정도로 나왔는데, 물론 다른 단품 안주들에 비해 월등히 비쌌던 고래고기나 가리비구이를 시켰고 잔술도 꽤 많이

시켰다고는 해도..은근히 머릿를 굴려 예상했던 금액과 적잖은 차이가 있었던 것 같았다. 어쨌든, 맛있게 마시고

먹었으니 됐다고 치고 금세 머릿속에서 휘발시켜 버렸다.

그보다 조금 전 술에 기분좋게 취해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 하카다역 옆 굴다리를 지나는데 별 생각없이 한장

찍어본 사진, 카메라도 같이 술을 마셨었던 겐지 사진 속 불빛들이 온통 일렁인다.

 




 

다자이후역으로 가는 길, 양옆에 늘어선 상점들이 성업중이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던 건 이 뽑기기계.

마치 수백마리 종이학들이 푸드덕대며 날아오르는 것처럼, 주홍빛 종이가 투명한 원통 안에서 서로 부딪쳐가며

나부끼고 있었던 거다. 저 꼬맹이는 첨엔 다소 움찔거리며 겁내하는 것 같았는데, 아마 저 종이새들이 그악스럽게

휘몰아치는 기세에 겁먹었겠지만, 이내 손을 조심조심 내뻗었다.그 모습을 옆에서 의젓하게 지켜봐주는 오빠.

잠시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도 꼬마손님들이 쉼없이 다녀간다. 닌텐도DS니 WII니 그런 경품이 걸려 있다는 것도

꼬마손님들을 이끈 동기겠지만, 저렇게 원통안에 갇힌 채 맹렬한 기세로 날아다니는 종이를 한번쯤 손뻗어

잡아 보고 싶다는 순수한 호기심이 더욱 크지 않았을까.

사람 참 많다. 다자이후 역에서 다자이후텐만구, 혹은 고묘젠지까지 이르는 그 짧은 구간에 빼곡하게 늘어선 작은

상점들도 꽤 볼만한 게 많아서인지 사람들의 발길이 좀체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꼬맹이가 두손으로 캔을 그러쥐고 마시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저 말똥말똥한 눈망울하며.

'소녀떼'들도 주말을 맞아 놀러온건가. 아님 하교길에 잠시 들른 건가. 군것질거리를 파는 몇몇 가게에는 여지없이

그네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있다. 일본 교복이 이뿌단 말은 많이 들었는데, 역시 예외는 있는 법이다.

고명에서 매실향이 조금 나는 찹쌀떡이랄까. 얘들을 머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데, 소녀떼 팬들을 모아들이고

있던 것의 정체는 바로 이것. 한 개에 105엔, 다섯 개에 525엔, 열 개에 1050엔, 열다섯 개에 1575엔, 스무 개에

2100엔. 많이 산다고 전혀 가격할인이나 덤도 없는 시크한 가격체계.

이곳에서 유명한 건가 보다. 똑같은 걸 파는 가게가 몇개나 늘어서 있었는데, 손님이 많은 집은 줄이 엄청 길게

늘어서 있고 없는 집은 썰렁했다. 만드는 방법은 약간씩 달라서, 어떤 집은 이렇게 손으로 반죽을 떼어 틀에 넣고

만드는가 하면, 또 다른 집은 마치 호두과자 기계처럼 자동으로 움직이는 과정을 통해 만들고 있었다.

이런 식이었는데, 역시 기계로 만드는 곳에는 별로 사람이 모여있지 않았다. 가격이 다르지도 않았는데, 그렇다면

더더욱 손맛이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사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테다. 달다 싶으면서도 쫀득하고 부드러워

금방 먹게 된다. 그렇다고 찰떡처럼 찰지지는 않고 살짝 흐물흐물한 편이라, 많이 사갖고 들고 다니기는 무리였다.


덧붙이자면, 이건 '우메가에모치'라는 떡이라고 한다. 이하는 '후쿠오카 관광가이드북'의 관련 자료 내용.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공이 에노키샤에서 불우한 생활을 보내고 있을 때, '조묘니'라고 하는 노파가 공을 동정하여

가끔 이 떡을 가지고 와서 공의 무료함을 달래주었다고 한다. 공이 서거했을 때 이 떡에 매화나무 가지를 덧붙여

보냈다는 고사에서 기원되어 우메가에모치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이 떡에 공의 영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인지 우메가에모치를 먹으면 병마를 막을 수 있다는 특효가 있다고 하여

널리 유명해지게 되었다."

좀..앞뒤가 맞지 않고 매화와 떡을 잇는 이야기가 워낙 빈약하다 싶긴 하지만, 어쨌든 병마를 막을 수 있댄다.

근데 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공은 죽어버린 거지?ㅡㅡ;

한국 관광객이 역시 많은지, 종종 한국어 설명이 병기되어 있는 곳도 눈에 띄었다. 근데 이게 뭥미.."감자기 경단"??

감자 경단이면 감자 경단이지 감자기는 뭐람. 난 첨에 얼핏 '갑자기 경단'이라고 읽었었다. 갑자기 경단이 먹고

싶어지면 와서 먹으란 겐가 했다.

한국인이 이 관광객 틈에 어딘가 스며들어 있겠지만, 일본/중국/한국인의 구분을 잘 해내는 편인 나로서도 찾아

내기가 쉽지 않았다. 11월 중순께 급격한 엔고 추세로 인해 뜸해졌을 수도 있고, 한국관광객들의 여행 비수기라

그럴 수도 있겠고. 서양 관광객도 거의 눈에 안 띄었는데 찍고 보니 용케 비 아시아권으로 보이는 관광객 한명이

사진에 잡혔다.

꼬치는 300엔~ 무지하게 비싼 거 아닌가. 한국이던 일본이던 관광지 주변 물가란 건 참..그렇다.

그렇게 다자이후 역까지 돌아나왔다. 바로 다시 돌아갈까 하다가, 조금 반대편길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리 넓은

번화가가 펼쳐져 있지도 않고 시골 읍내처럼 한두 블럭에 걸친 상점가가 보여서, 금세 돌아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건물들이 폭이 좁다. 대부분 슬림하게 빠진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건물들의 색감도 대체로

차분하고 담백한 느낌이다. 간판도 한국처럼 서로 튀려고 그악스럽게 다툼하는 자극적이고 천박한 색과 모양이

아니라는 게 또 하나의 발견.

"티셔츠가 아주 싸지고 있습니타?" 티셔츠가 싸면 싼 건지 대체 싸지고 있는 건 뭘가. 아주 싸지고 있으니 조금더

기다렸다가 사라는 건가. 이걸 발견하고 재밌어서 한참 실실거렸다.

같은 가게, 티셔츠에 씌여진 일어 단어들을 삼개국어로 설명해 놓았다. "무책임", "우리 길을 간다!", "파란만장",

뭔가 그럴듯한 의미가 있어보이고 적당히 반항기 어려보이는, 딱 내가 좋아할만한 문구들이 적혀있었는데, 마지막

하나 설명을 보고 대체 뭘까 한참 고민해야했다. "깨지만 나무"???? "Bad boys or Bad girls"가 대체 왜 그렇게

번역이 되는 걸까. 게다가 깨지만 나무..란 말은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이냐. 근데 정말 "Bad boys or Bad girls"을

한국어로 어떻게 바꿔야 할까 생각해 보았다. 좀 격하게 나가자면 "씨X놈X들", 좀 부드럽게는 "나쁜 녀석들"정도?

하카다 큐슈난지. 대학 다닐 때 동경대에서 교환학생을 왔던 친구가 큐슈 출신 남자였다. 교환학생을 와서 머리로

공부하러 온 게 아니라 '간'을 사용해 공부하러 왔다던 그와 숱한 술자리를 가지면서 배운 몇 안되는 일본어 중

하나. 큐슈난지. 한국에 경상도싸나이가 있듯 일본엔 큐슈난지가 있다고 했다.

우유부단 티셔츠. 아...이 가게 정말 재미있는 티셔츠나 소품들이 많아서 한참동안 구경했다. 저 티셔츠를 입고

있으면 왠지 우유부단해지는 건가.

금세 끝나버린 번화한 골목 뒤에는 또 무슨 신사인지 절인지. 예전 철없을 적 좋아라, 하면서 보았던 일본 만화

"오 나의 여신님"의 주인공들이 사는 절이 이런 곳 아니었을까.


지독히도 남성중심적인 판타지로 가득한 그 만화에서. 찌질한 주인공을 둘러싼 세명의 여신이 가진 이름들은,

알고 보니 게르만 전설에 나오는 세 운명의 여신 노르네스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었다. 과거를 아는 우르트르

(울드), 현재를 담당하는 베르트란디(베르단디), 그리고 미래의 여신인 스퀼트(스쿨드). 그치만 개인적으로 이

세명은, 메이드/선생/아줌마(엄마) 취향을 위한 베르단디, 군복녀/SM/누나/직장녀 취향을 위한 울드, 그리고

롤리타(소녀)/안경녀/여동생/교복녀 취향을 위한 스쿨드로 짜여진, 이후 일본의 연애시뮬레이션게임의 섬세하게

분류된 캐릭터 구축을 위한 선행적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한 걸까.

조금 더 걸어가다가 보게 된 다자이후의 주택가. 다닥다닥.

푸른 대나무밭에 기대선 집들 역시, 다닥다닥.

계속 걸어나가다 보면 어디가 나올까 궁금했는데, 조금씩 풍경이 시골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산까지 보이는 걸로 보아 더 가봐야 돌아올 때 힘이 들테니 돌어가자는 판단을 내렸다. 발의 피로도가 누적되는

것을 감수하고 미지의 뭔가 재미있는 것들을 탐사하기엔 이득보다 비용이 커질 뻔한 지점에서 돌아서다.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고등학교. 학교이름을 저렇게 크게 써두는 것도 한국에서는 못 본 거 같다. 보통 교문에

자그마한 문패를 걸거나 표지석을 세운 게 전부아니었나. 적어도 내가 봐왔던 한국의 학교들은 그랬던 듯.

문득 앞에서부터 오는 버스를 보고 놀랐다. 운전수가 서서 운전하고 있네, 하면서. 잊고 있었는데, 일본은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다. 그리고 다자이후에 온 관광버스들은 모두 저런 분홍색 옷의 안내원이랄까, 조수랄까 앞좌석에

타고 계셨던 거 같다.

돌아가는 길. 개찰구는 뭐, 한국이랑 별반 차이는 없다.

티켓을 사서 처음 들어가면서 넣으면 저렇게 구멍이 뚫려서 나오고, 나오면서 넣으면 그냥 먹어버린다.

텐진행 급행열차. 밝은 하늘색 차체가 둥글둥글한 모양새가 귀엽다.

굳이 일본어를 몰라도 영어 한글이 병기되어 있어 누구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다. 편하면서도 살짝 섭섭한 게,

여행을 가서 모르는 사람 붙잡고 말걸고 길묻고 친해지고, 그런 것들도 재미가 쏠쏠한데 자꾸 표지판에 의존하게

된단 말이다.

다자이후에서 텐진까지. 여긴 거의 일본어밖에 안 쓰였다. 이래서야 까막눈.




고묘젠지를 둘러싼 야트막한 담장길을 따라 나오는데, 단풍나무가 빼꼼히 배웅을 한다. 들어설 때 보이지 않던

풍경, 나무 밑둥으로 하얀 자갈이 고랑을 그리며 깔려 있는 모습이라거나, 저 건물 너머 그림같이 이쁜 정원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고묘젠지에서 다자이후 역으로 돌아나가는 길, 길 양옆에 이런 울타리를 쳐 놓았다. 푸른 대나무를 다듬어 긴

장대로 만들고는, 목책에 구멍을 뚫어 걸어두거나 저렇게 대나무를 가뿐히 접어 고정시켜 놓은 모습이 특이하다.

커다란 규모의 관광포스트들, 예컨대 다자이후텐만구, 큐슈국립박물관, 혹은 고묘젠지 이외에도 자잘한 사원이나

사당같은 것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아마도 관광객) 출입금지인 걸로 보아 신사 본연의 목적에 충실한 곳인 걸까.

오후가 되면서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다. 753명절을 지내러 부모님 손잡고 텐만구에 가는 듯한 가족들하며, 점점이

보이는 소풍나온 듯한 학생들까지.

그런 와중에도 비둘기 한마리에 완전 몰입해 있는 귀여운 딸내미. 주위의 공기가 들썩들썩, 사람 버글대는 휴일

분위기로 꽉 차 있지만 그런 따위에 연연치 않는 듯, 꼬맹이와 비둘기 주위엔 왠지 다른 질감의 공기가 느껴진다.

석탑 위에 버티고 선 저 동물형상이 우스워서 사진을 찍었는데, 글쎄 잘 안 나온 거 같다. 물고기나 해마 비슷하게

생긴게 꼬린지 발을 힘껏 차올리고서는 마치 물구나무서다가 고개만 꺽인 자세로, 정면을 보고 있다.

고묘젠지의 담장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 바로 이렇게 민가들이 버티고 서있다. 커다랗게 적힌 한자들 때문일까,

뭔가 한국같지만은 않은 분위기가 풍기는데, 그게 어디서 비롯하는지 모르겠다.

국화 화분을 앞에 내놓은 채 장사 중인 가게도 있고. 근데 이사진은 내가 뭘 찍고 싶었던 걸까.ㅡㅡ;

이렇게 이쁘게 잘 관리받고 있는 집도 있고. 일본의 집은 작기로 유명하다는데 그렇게 봐서 그런지 정말 다 작아

보인다.

이건 뭘까. 뭔가 넓은 부지를 차지한 채, 사당을 둘러싼 녹지에 원형 산책로까지.

그렇게 다시 다자이후 역근방까지 도로 나왔다. 살짝 꾸물꾸물한 하늘, 꾸물꾸물 모여들어 이젠 장사진을 이룬

관광객들 혹은 참배객들.

화장실을 잠시 가려는데 여기도 남/녀 표시가 특이하다. 여기저기서 이렇게 화장실 남녀표시를 그간 찍어온 것만

따로 모아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다. 선남, 선녀.

다자이후 근방에는 다자이후텐만구, 큐슈국립박물관, 그리고 고묘젠지가 일단 역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금방금방 돌아볼 수 있고, 약간 떨어져서 절이라거나 유적지, 혹은 과거 토성의 흔적같은 게 산재해 있다고 한다.

다자이후 역에 가면 자전거 대여소가 있다고, 거기서 빌려서 돌아보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갔는데

별로 의지가 없어서였는지 찾지 못했다. 후쿠오카(텐진)역에서 다자이후까지 가는 법은 위와 같음.ㅋ


다자이후 역에 내리면, 다자이후덴만구 이외에도 고묘젠지, 그리고 교토박물관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고묘젠지는

'고케데라-이끼사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곳으로, 이끼로 육지를, 흰모래로 바다를 표현한 정원과 돌로 '빛 광'

(光)자를 써놓은 정원, 그리고 아름다운 단풍과 진달래로 유명한 사원이라고 한다.
고묘젠지 입구 모퉁이길에 세워져있는 볼록거울에 꽉 채워진 이웃집 풍경.

고묘젠지는 다자이후텐만구를 돌아보고 나오다 보면 빠지는 조그마한 샛길따라 나타난다.

고묘젠지, 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 했었는데 한자를 보니까 좀 풀린다. 광명선사..구나. 안내판의 한자들을 띄엄띄엄

읽어보니 임제종 계열에 속하는 철우원심스님이 약 700년전 창건한 절로서 다자이후텐만구의 결연사라는 거 같다.
절 앞측 정원은 열다섯개의 돌이 빛광자를 나타내고 있다는 큐슈 지방의 유일한 석재정원이라는 듯 하고, 절

내부의 정원은 육지나 섬을 이끼로 표현했고, 하얀모래로 바다를 표현했다는 것 같다. 음...어디까지나 내 맘대로의
해석.ㅋ

들어서려는데 현판의 초록빛이 이목을 끈다. 아마 이끼사원으로도 불리는 이곳의 특징을 감안해서겠지만, 녹색을

사용해 저런 편액 글씨를 써놓은 것은 처음 봤다. 대문 너머 붉은 단풍과 어울려 산뜻한 느낌을 준다.

대문을 지나면 바로 나타나는 하얀 돌 가득 깔린 앞마당 정원. 여기가 아마도 빛 광자 모양으로 돌들이 늘어서

있다는 곳일 텐데,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그 글자, 光자가 나타난다는 걸까. 외려 눈에 띄는 건

저토록 완벽하게 고랑이 파인 바닥. 긁개 같은 것으로 잘 가다듬어 놓은 거같은데, 그 이랑 틈새에 단풍잎들이

내려앉아 더욱 선명히 굴곡을 드러냈다.

고묘젠지 안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큰 방, 방 앞쪽에 마치 무대처럼 꾸며져 있는 이 조그마한 단상과 좌우에 도열한

그림 그려진 문짝은...뭘까. 뭔가 이 신사의 중심부가 여긴가 보다 싶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러 왔는지 검은

옷의 사람들이 이 곳에 무리져 있기도 했고.

이제 절 내부의 정원으로 들어갔다. 사실 들어갈 수는 없는 것 같았고, 모두들 목조건물 대청마루랄까, 내부를

향해 펼쳐진 대청마루, 혹은 열린 복도에 서서 정원을 감상했다. 하얀 모래로 바다를, 초록색 이끼로 땅을 표현했단

설명이 그럴듯 하다. 그렇담 저 튀어나온 괴석들은 바다에 불쑥대며 솟은 섬들이겠고, 저 나무들은...땅덩이의

사이즈와 비례해 생각하건대 거의 하늘을 꿰뚫만큼 높이 솟은 신목이겠군.

이런 정원을 밟게 해놨다면 얼마나 쉬 망가지겠냐만서도, 한번 저렇게 그림같이 잘 꾸며진 정원을 거니는 것도

정말 운치있고 행복할 거 같다. 저 하얀 자갈들의 바다는, 밟을 때 자갈자갈 소리를 내지 않을까.

고묘젠지 본건물과 옆의 건물을 잇는 구름다리. 이 다리를 건너면 뭐가 나올까 해서 살짝 들여다봤더니, 경읊는

소리와 함께 꽤 많은 사람들, 아마도 가족들이 제를 지내고 있었다. 여긴 단순히 관광지가 아니라 실제로 그런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곳이었던 게다. 자연 발걸음소리도 더욱 죽이고 걷게 되었다.

이런 식의 대청마루, 혹은 열린 복도. 건물과 바깥 마당을 막고선 저 울타리가 있으니 마루라기에는 좀 그런가.

11월 중순의 일본 후쿠오카, 처마지붕 아래 단풍이 연하게 든 나무들을 담고 싶었는데..지붕 아랫도리가 너무

어둡게 나왔다.

건물 벽면을 따라 쭈욱 돌면서 정원을 완상하다가 한 컷. 정원과 건물 사이를 가르고 있는 저 경계가 선명한 걸

보면, 정말 이 정원은 두고 보기 위해 만들어진 정원같긴 하다. 흔히 일본과 한국, 중국의 문화적 차이를 담벼락

높이가 거의 낮고, 조금 높고, 매우 높다면서 그 의미를 이렇게저렇게 부여하곤 하는데, 정원만 두고 보면 중국과

일본의 정원은 보통 도매금에 묶이곤 하는 것 같다. 한국의 '자연미'에 비해 중국과 일본은 너무 인위적이라거나

특히 일본은 인간과 유리된, 감상용으로서의 정원을 꾸민다거나. 모종의 가치평가가 내재된 그런 지적을 꼭

따르고 싶지는 않지만, 여긴 확실히 그런 감상용 정원이긴 하다.


다만 그런 '감상용'이라는 단어가 갖는 모호성을 생각해 보자면, 저런 풍경을 배경으로 한 채 차를 한 잔 한다거나

사람들과 담소를 나눈다면..굳이 유리되어 있다고 말할 필요는 없지 않나. 당장 유센테이코헨같은 정원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다니면서 풍경에 녹아들었으니, 꼭 "일본의 정원은 이래"라고 말할 것도 아닌거 같기도 하고.

옆건물로 건너가는 길, 조그마한 다다미방안에 무릎을 단정히 꿇고 앉아 격자무늬 창을 통해 정원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조그마한 물받이 돌그릇...이거 대체 이름을 뭐라고 해야할지 원...에 뭐가 있다고 저렇게 불편한 자세로 몇분씩

카메라를 들이대고 계시던 할아버지 한 분. 그 열의가 좋았다. 그리고 대체 무엇을 찍으시는 건지 무지하게

궁금해져서, 옆에서 여기저기 얼쩡거리며 구경하다가 드디어 빈 자리를 꿰어차고 들어앉았다.

아..!! 작게 탄성이 터졌다. 그 안에 단풍나무가 담겨 있었다. 물에 비친 선연한 붉은 빛의 단풍나무.

옆에는 정말 제대로 된 마루에서 사람들이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서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을 보기도

하고, 옆사람과 이야기도 하고, 아이들이 노는 것에 때론 눈길을 빼앗기기도 하면서, 그렇게 유유자적하는

분위기. 뭔가 이 곳은 다른 질감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앉아서 보고 있던 풍경. 11월인데, 아직 대세는 청량한 초록빛이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가지런히 정리된 게다와 담백한 나무질감의 서랍장이 차분하다.

고묘젠지의 가을 풍경.

그래도 제법 울긋불긋한 느낌인데다가, 하얗게 내려앉은 가을 햇살이 지붕에 서렸다.

2층으로 올라가 난간을 잡고 내려본 고묘젠지의 앞면 정원. 완벽하게 빗살무늬가 새겨진 하얀 자갈정원바닥에

빨간 단풍잎이 고랑마다 내려앉아 더욱 선명하다.

고묘젠지를 들고나는 입구. 엉성하게 연두빛 잎사귀를 틔운 나무가 시야를 가렸다.

뭔가 그럴듯한 포스를 풍기며 가지를 사방에 뻗어나간 붉은 단풍.

2층 지붕에 살짝 가려진 단풍나무. 얼핏 보면 지붕에 불이 붙은 것 같지 않냐...는 강변이었는데, 어떤지 모르겠다.

한바퀴 돌고 잠시 정말 대청마루에 앉아서 좀 쉬었다. 나무의 원색을 최대한 끌어낸 채 별다른 채색이 더해지지

않은 담백하고 단정한 건물이, 붉고 푸른 주변 풍경에 더해져 제법 화려한 느낌도 풍긴다.


"위험하다!!"라는 표지판이 산책로와 산책로가 아닌 건물옥상 어딘가를 구분해 놓은 이곳은 후쿠오카 한 복판의

계단정원을 품은 건물, 아크로스 후쿠오카. 계단식 건물 옥상 가득히 펼쳐진 녹지에 구불구불 나있는 산책로를

빗겨나면 왠지 건물 내부 어딘가로 쿵, 추락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이 엉성한 한국어로 된 경고판때문에 비로소

생겨난 것이었다.


후쿠오카 한복판에 나무가 무성한, 비탈진 야산같은 건물이 있다고 들었다. 여행을 다니며 건축물 순례를 하는 건

좀 내키지 않았던 터라 그냥 모르쇠 스킵할까 하다가, 텐진 중심부 근처길래 설렁설렁 산책 겸 걸어가 보기로 했다.
후쿠오카를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는 개천, 물이 마르는 겨울철 11월이라 그런지, 아니면 수량 자체가 원래 풍부치

못했던 건지 물이 잘박잘박하다. 유속도 그렇게 빠르지 않아 수면 바닥에 이끼가 잔뜩 끼어있었고 냄새도 조금

풍겼다. 이걸 또 '신화적인 돌파력'을 가졌다는 어떤 사람이 본다면 싹 갈아엎고 수돗물을 흘려보내자고 할지 모를

일이지만..그래도 여긴 선진국 일본이다.

지나가며 잠시 들러본 섹스샵. 일본이라 좀더 특이한 게 많지 않을까 했는데, 올 여름 파리 몽마르뜨언덕 아래의

섹스샵거리에서 봤던 것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조금 실망했다. ([파리여행] 물랑루즈 거리의 홍등가.)

단물이라곤 한방울도 남지 않은 '지구촌시대'라는 단어를 빌어 생각하자면, 사람들 혹은 남자들의 성적 취향과

자극원까지도 지구적 차원에서 보편화해 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일본AV와 정체불명의 옷가지들,

중국제 성인용품의 세례를 받고. 성의 영역에서도 개별성과 고유성은 지켜져야 할 가치가 아닐까 싶다. 한국

고유의 섹스샵, 고유의 성인 문화..머, 이미 뭔가 차고 넘치도록 있긴 한 거 같긴 하다만 그런 유흥문화말구.

지도에 따르면 대충 요  신호등을 건너 작은 다리만 건너면 바로 계단식 숲처럼 꾸며진 건물,

아크로스 후쿠오카가 보여야 하는데 잘 모르겠다. 그냥 머...여느 거리와 비슷한 고만고만한 높이의 반듯한

건물들 밖에는, 딱히 시야를 잡아끄는 것이 없어서 갸우뚱대며 파란 불 횡단보도를 건너다.

아..가까이 가니 네모반듯한 한 켠이 점차 무너져 내리며 땅바닥까지 끌리는 게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반짝이는 건물 외관에 동강동강 비쳐지는 맞은 편 건물의 적나라한 토막 마술쑈까지.

건물을 따라 쭈욱 걸었다. 무슨 야구장 스타디움같은, 계단식 관중석이 있는 원형돔을 종으로 절단한 내부를 보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맨들맨들하게 절단면이 빛나는 걸로 보아 상당한 고수의 실력이다.

아크로스 후쿠오카에서 잠시 내 시선을 돌리게 했던 건 이 폭주족틱한 복장의 자전거 아저씨. 그렇다, 아저씨.

뒷모습만 보면 젊은 애가 뭔가 주렁주렁 매달고 자전거를 타고 있구나 싶지만, 사실 앞을 보면 살짝 주름이 얹히기

시작한 연세의 아저씨라는.

아크로스 후쿠오카, 이 건물은 애초 국제회의, 문화, 정보 시설을 위한 공간이라고 하는데 실제 내부는 그다지
 
색다르진 않았던 것 같고, 건물 한쪽 사면을 층층이 타고 올라가는 저 녹색의 물결이 정말 신기했다. 좀 만화같기도

하고, 왠지 열대우림지대의 오랜 옛 유적을 타고 올라가는 짙푸른 녹색 덩굴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하여튼간에

저 계단식 정원은 건물 꼭대기까지 연결되어 산책할 수도 있다고 했다.

아크로스 후쿠오카의 녹색 계단과 맞닿아 있는 자그마한 녹지는 바로 텐진 중앙공원.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이 나와서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기도 하고, 강아지와 산책도 하고, 한쪽에서는 젊은애들이 빈 플라스틱 술병을

들고 묘기를 연습중이다. 뭔가 했더니 아마 칵테일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가보다. 다양한 모양의 병을 가져와선

저글링도 하고, 둘이 주고 받기도 하면서 병이 깨질 염려가 없는 잔디밭 위에서 오래오래 연습을 했다.

저렇게 배경으로 초록빛, 드문드문 붉은 단풍빛이 가득 얹힌 건물의 완만한 경사면을 두고 있으니 풍경이 무지

나른하기도 하고 평화로워 보이기도 하고, 그렇다.

텐진 중앙공원의 놓인 벤치, 적당하게 뒤로 누운 벤치에 반질거리는 짙은 나무색이 사람을 부른다. 

시루떡처럼 층층이 얹힌 그 녹색 계단식 정원에 오르는 첫 관문. 이 곳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서도, 다들 올라갈

수는 있는데 올라가보지는 않았다, 는 식의 말만 있어서 난 끝까지 올라가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뭐, 좀 꼬불대며

올라가야 하는 거 같긴 했지만 우거진 수풀 때매 제대로 길은 안 보였고, 까짓 길어봐야 건물도 그렇게 높지도

않은데 얼마나 걸리겠냐 싶어, 출발.

조금 올랐다 싶어 길을 되짚어 돌아보니 '풀떼기'들이 금세 시야를 막아섰다. 좀 가다 좌회전 한번, 또 좀 가다가

우회전 한번, 얼마후 다시 좌회전, 이런 식으로 우르르~ 좌르르~ 스텝정원을 올라섰다.

거의 다 올라왔다 싶을 즈음, 유난히 붉은 잎사귀를 소담히 얹은 여윈 나뭇가지가 후쿠오카 시내를 덮었다.

꼭대기에 올라와서 내려다본 아랫마을 풍경. 건물만 빼곡한 공간과, 이 곳 아크로스 후쿠오카가 품고 있는 작지만

짙은 가을숲, 그리고 텐진 중앙공원의 느낌이 영 다르다.

사실 전망대는 1미터 정도 위에 따로 설치된 공간이 있지만, 문이 닫혀있다. 아마 목욕탕 휴일 표시하듯 빨간 색

글자로 토,일,휴일을 적어놓은 걸로 보아 '정기휴일'이겠거니 하고 별 미련을 남기지 않았다. 머 사실 조금 위에

더 올라서서 보나 지금 여기 높이에서 보나 비슷한 거다. 게다가 후쿠오카시의 마천루라는 게 상당히 나지막해서,
 
그러고보니 여기보다 높은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한참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여기 앉아 혼자 빵과 우유를 먹던 아가씨도 내려가고,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는

멍하니 아랫쪽 어딘가를 바라보던 양복쟁이 아저씨도 내려갔다. 슬 그림자도 길어지고, 문득 바람이 차다고 느껴

서둘러 내려오기 시작했다. 마침 등장한 경찰관 아저씨, 내가 한국인임을 한눈에 알아보곤 말보다 행동으로,

내려가라고 연신 손사래를 친 덕분에...마치 쫓겨내려오듯 후다닥.

내려오는 길은 반대방향으로. 그니까 오른 길을 되밟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로 아크로스 후쿠오카를

좌우로 헤집으며 내려가는 길. 아까 오르면서 만났던 빨갱이 단풍보다 더욱 선명하고 짙은, 그래서 더욱 이뿐

단풍을 만났지만 살짝 사진 한장 찍고 말았다. 사실은 단풍잎을 챙겨오고 싶었는데..경찰관이 계속 따라내려오며

지켜보는 바람에 엄두도 못냈다는.

내려오고 나니, 경찰관이 왜 그렇게 몰듯이 따라내려왔는지 알 거 같다. 애초 정원에 올랐던 정원 입구에는 오늘

더이상 입장이 불가능함을 알리는 표지가 있었고 문도 굳게 닫혀있었던 것. 아마 경찰은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들은

혹시 없는지 살피면서 한번 코스를 순회했던 것 같고, 그러다 보니 나랑 계속 겹쳐서 내려왔던 게다. 내 뒷통수가

솔찮이 따갑다고 느꼈던 건...아마도 과민반응이었던 듯. 하기야 이렇게 철저히 관리하지 않으면, 워낙 군데군데

으슥한 곳이 많아서 자칫 범죄의 온상으로 전락하기 십상이겠다.

텐진 시내로 가서 저녁을 챙기기 전 마지막으로 한번 둘러보았다. 어느덧 해도 많이 기울었고, 건물빛은 다소

둔탁해진 느낌이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고풍스런 옛 대리석 궁전과 철재와 유리 재질의 유리 피라밋을 하나의

풍경안으로 잘 엮어낸 느낌이라면, 여기는 건물 하나에 자연의 영역, 그리고 인간의 영역을 오밀조밀하게 중첩해

놓았다는 느낌이랄까. 한번쯤 들러볼만한 곳이지 싶고, 또 한번 들렀다면 꼭 올라가볼 만한 계단식 정원이었던

것 같다. 그다지 높지도 않고 길지도 않고, 경사도 완만해서 슬슬 오르기 딱 좋은 동네 뒤 야산같은.



일본식 포장마차를 '야타이'라고 한댄다. 후쿠오카엔 나카쓰쪽 야타이가 유명하다고는 하던데, 가기 전 귀동냥한

팁들에 따르면 그쪽은 이미 많이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로 '더럽혀졌다'고 했던가. 바가지도 심하고, 맛도 그냥

그렇고, 친절하지도 않은 것 같다는 중평이었다. 우선 나카쓰쪽 야타이를 구경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텐진쪽

야타이를 가기로 맘먹고 호텔을 나섰다.
자전거가 빼곡히 주차되어 있는 텐진의 거리.

텐진 기차역 부근의 횡단보도, 해가 살짝 뉘엿거리며 넘어가는 시간대, 택시기사 아저씨는 벌써부터 차에 조명을

밝혔다. 퇴근하고 번화가를 활보하는 직장인들이 확실히 늘어나서 거리는 더욱 붐비기 시작했다.

텐진(天神)역의 사통팔달한 지하상가 내 점포들은 10시부터 20시까지 영업을 한댄다. 그리고 통로의 개폐시간은

새벽 5시 반부터 24시 반이라나. 지하상가를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아무 구멍으로나 나서서 조금만 걸으면 저녁엔

금방 야타이를 찾을 수 있다.

텐진 지하상가는 11월 중순부터 이런 치장을. 아마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단장한 듯 한데 뭔가 유치하고 엉성해

보인다. 그치만 지하상가 천장을 온통 파란 불빛으로 치장하고 나니 어쨌든 크리스마스 기분은 살짝 동하는 듯.

서울도 명동지하상가나 강남지하상가 천장을 저렇게 꾸며놓으면 조금은 더 연말 분위기가 나지 않을까. 이제

12월도 중순인데 그다지 서울 거리에서 연말 분위기가 느껴지질 않는다.

길가다 마주친 야타이. 윙버스에서 추천하는 야타이 위치들과 가게 이름을 뽑아오긴 했는데, 그걸 보고 어딘가를

찾아가는 것보다 그냥 아무 곳이나 내키는 곳을 들어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어느 곳에 무엇이 있더라, 하는 후기를

참고해서 굳이 그곳을 찾다보니 빙글빙글 돌기만 하고, 비슷비슷해 보이는 가게들 사이에서 괜히 거길 고집할

필요가 없을 거 같았다.

그렇게 꼬리잡기하듯 뱅글거리며 골목길을 돌던 중 마주친 자판기에서 식권을 뽑아 주문하는 라멘집,

그치만 살짝 촌스런 노랑초록파랑 불빛이 일렬로 늘어선 '누름'버튼에는 메뉴가 지정된 것보다 비어있는

버튼이 더 많아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자판기는 정반대, 빈틈없는 진열과 누름버튼으로 전면을 메우고 있다.

일본을 두고 자판기의 왕국이라고도 하던데, 정말 이렇게 빼곡한 담배 자판기는 무시무시한 포스가

느껴진다. 네모난 담배갑의 오와 열을 딱 잡고 늘어세워서는, 왠만한 편의점에서 파는 것보다 더 많은

종류의 담배를 팔고 있는 자판기.

도시의 야경. 후쿠오카시의 중심가, 큐슈지방 최대의 번화가라는 이곳은 그렇지만 서울보다는 조금 덜 복잡하고,

조금 덜 시끄럽고, 그리고 조금 덜 큰 거 같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도 도쿄 중심의 중앙집중식 개발이 이루어

졌다는 이야기를 대학교 때 무슨 강의에선가 들었었다. 한국 제2의 도시라는 부산과 수도 서울 간의 격차가 너무

현격하게 나는 것처럼, 아마 도쿄와 후쿠오카간에도 그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일까.

문득 그 네 도시간의 부등호 관계가 궁금해졌다. 도쿄>서울, 서울>후쿠오카, 후쿠오카>부산? 부산>후쿠오카?

자리를 잡고 들어간 야타이, 이미 아저씨 세네명이 정면에 앉아 잡고기탕에 아사히 병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한 직장동료인 것처럼 보이는 형님누님들이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이번에

후쿠오카를 다녀와서, 일본사람들이 조용하다느니 타인을 배려한다느니, 깨끗하다느니, 그런 식의 '상식'에

반하는 모습을 많이 보고 왔다. 택시 기사들은 보행자 신호임에도 횡단보도를 무시하는가 하면, 전혀 조용하지

않은 사람들이 주위를 아랑곳않고 떠드는 식당, 호텔 로비..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무지 반가워하면서 오래전에 누군가 꼽아두고 간 한글 명함을 수고로이 찾아 보여줬다.

후쿠오카에 다녀간 누군가 이곳이 맘에 들었었나보다. 약간의 취기가 묻어나는 글투로, 행복하세요~ 랜다.

오뎅도 맛있고, 뒤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건 잡고기들이 잔뜩 들어간 탕이랄까, 그냥 간단히 잡고기탕 정도.

그거랑 따뜻한 사케 한잔을 마시자니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마주앉은 형님누님들과 영어를 빌어 말도 섞고

간단한 생존 일본어를 선보이기도 하고. 대머리 주인아저씨 미소가 푸근했다.

말이 안 통한다네, 바가지를 씌우네, 온갖 조언들을 명심하고 왔었지만 이건 너무 쉬웠다. 짧은 몇마디에 마음이

훈훈해졌었고, 주인 아저씨는 한국에서 왔단 얘기에 어찌나 반가워하며 신나하시던지, 경계심이 녹아내렸다. 

잡고기탕 한 그릇, 오뎅 다섯개, 따뜻한 사케 세 잔 정도시켰던가, 1300엔밖에 안 나와서 내일 또 와야지 했었지만.

짧은 일정으로 다녀올 때 아쉬운 건, 맘에 들었던 곳을 다시 한 번 찍을만큼의 여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 뭘

먹어도 맛있고 어딜 가도 좋으니..계속 새로운 곳, 새로운 음식, 새로운 사람을 찾는 게 낫다는 판단을 하게 되는

거다. 대체 얼마쯤 되는 일정이어야 긴 거냐고, 얼마쯤 되야 갔던 곳을 다시 찾겠냐고 묻는다면..글쎄, 그러고 보면

짧은 인생, 한끼를 먹어도 맛있는 것, 새로운 것을 먹겠다는 사람을 주위에서 많이 보는 것 같다.


가게 사진을 찍고 돌아섰다. 내일을 기약했지만, 속으로는 당장은 힘들 테고 담에 언젠가 또 후쿠오카에 오게 되면

꼭 찾아보겠다고 다짐.

포장마차 안에 있는 동안 날이 더 쌀쌀해졌다. 따뜻한 사케를 마시고 풀렸던 몸이 다시 옹쳐매여지는 느낌의 추위.

입김을 내뿜으며 찍으려던 풍경에, 입김은 안 찍히고 술기운에 젖은 손가락의 떨림만 담기고 말았다.

텐진(天神)이라고 쓰인 왼쪽 끄트머리에 있는 숫자들은 몇번 버스인지를 나타내는 숫자들. 그리고 각 노선마다

쭉쭉 뻗어나가며 지나치는 정류장들을 그려놓고는 일정 구간을 넘어서는 순간 할증되는 금액들이 빨간 색으로

적혀있다. 예컨대 하카다역(博多驛)즈음까지는 100엔, 그 이후부터는 220엔.

게다가 평일(월-금), 토요일, 일요일 버스시간표가 다 따로 게시되어 있는데, 생각보다 막차 시간이 이르다. 조금만

더 미적거리다 일어났으면 텐진서 하카다역 근처 숙소까지 걸어가야 할 뻔 했다. 택시비는 무지하게 비싸다는 얘길

어디선가 또 들어놨어서.

집에 오는 길, 하카다역 굴다리를 지나면 바로 도요호텔 앞길이 나온다. 호텔로 들어가려는데 앞에서 다코야끼를

팔고 있는 게 보인다. 왠지 일본의 다코야끼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차선 방에 가서 술안주 삼아 2차

술판을 벌여야겠다 하고 냉큼 샀더니, 녹차 캔음료 두개에 사탕 두개, 게다가 물티슈까지 두개 바리바리 비닐봉지

안에 챙겨주는 거다. 따로 다코야끼 위에 뿌리는 가쓰오부시도 챙겨주고. 오....이런 친절하고 세심한 서비스라니.


다코야끼 자체는 서울에서 먹어본 것과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문어냄새가 조금 더 풍기는 거 같다는 호의 섞인

편향된 느낌과 약간 더 쫀득한 거 같다는 역시 호의 섞인 주관적 식감을 제하고 나면, 녹차캔 두 개와 사탕 두 개,

물티슈 두 개만큼, 그리고 그걸 건네주던 아저씨의 살가운 미소만큼 더 맛있었다는 게 정확할 듯. 


해가 갓 떠오르려는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부산 후쿠오카를 향하기 직전이다. 한번 꼭 가보아야

겠다는 생각만 하다가, 문득 생겨난 찬스에 얼씨구나, 하면서 올라탔다. 비록 언제 환전하는 게 좋을까 환율추이를

보던 며칠새 백원씩 급등하는 환율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후쿠오카에 뭐가 있는지, 서울에서부터 어떻게 왔다

갔다 하는 게 좋을지 요리조리 따져보면서 여행 자체보다 좋기도 하다는 '여행의 전희'를 맘껏 누렸다.

기차를 타고 부산역에서 내리면 바로 KTX입구 오른쪽으로 이렇게 순환셔틀버스 승차장이 있다. 전철역으로

한정거장, 부산역-중앙동역(여객터미널이 있는) 구간을 무료로 운행하는 셔틀은, 그렇지만 7시 50분 가까이

되어서야 첫 차가 운행한다. 내가 탈 배는 오전 8시 30분 출발, 한시간 전까지는 안전하게 도착하라 했으니..셔틀은

아쉽지만 포기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기본요금 거리, 참 부산 택시의 기본요금은 1900원이다.

11월 중순에는 그래도 기름값이 꽤나 내려간 걸로 알고 있었는데, 오를 때와는 달리 그렇게 금방 반영되지는 않는

듯 하다. 왕복 뱃삯 이외에 유류세가 부과되는데, 부산에서 갈 때는 삼만원, 후쿠오카에서 올 때는 이천엔. 100엔에

대략 1500원 이상하고 있으니 한국이나 일본이나 비슷한 금액의 세금이 부과되는 셈이다. 거기에 더해서

부두 이용료도 내야 한다. 부산에서는 3,200원, 후쿠오카에서는 500엔. 가기 전 인터넷이나 여행사를 통해 정확한

액수를 알아보려 했지만 워낙 변동이 심한 탓인지 여객터미널에 도착해서야 정확한 금액을 확인했다.

드디어 출발, 부산서 후쿠오카까지 고속으로 주파하는 이 배는 수면위 2미터를 부상해서 달린다고 한다. 왜 그

호버크래프트처럼 공기를 분사해서 떠 있는 건지, 아님 다른 뭔가 원리가 적용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엔간한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3시간이면 충분히 후쿠오카에 닿는다고 했다. 푸른 하늘에 날아가는 갈매기떼들이 부럽지

않게도, 드디어 비행기가 아닌 다른 교통수단으로 외국을 밟게 되는구나, 싶은 느낌. 배를 타고 국경을 넘는다니,

 한'반도'라곤 하지만, 기실 섬나라에 살고 있었단 실감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고속여객선의 실내. 상당히 안락한 의자에 넓찍한 공간까지. 우등고속버스, 혹은 그 이상으로 편안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보통 배를 타면 느끼는 파도모양의 율동감이 거의 안 느껴졌다.

깔끔한 식판거치대에 배 안내문, 면세품 이용안내문까지 가지런히 꽂혀있다.

옆에 지나치는 저 배는 대마도로 가는 배란다. 최근 일본 우익세력이 대마도의 실효적 지배권이 한국인에게 넘어

간다느니 어쩐다느니, 결국 독도를 노린 술수를 부리고 있다지만, 어쨌든 저 배에 타는 사람은 그렇게 많아보이진

않았다. 실제 대마도땅을 한국인이 매입한 것도 고작 0.5%라던가, 그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던데, 엄살쟁이 우익들.

배는 이렇게 부산항의 등대를 지나,

망망대해를 달렸다. 시속 80킬로미터라고는 하지만, 어디 하나 기준잡을 곳이 없는 망망대해인지라 그 속도감이

별로 실감이 안 난다. 다만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는 느낌, 파도 따위에 아랑곳없이 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은

강하게 들었다. 이건 물에 둥둥 떠다니는 배가 아니라 수면 위 2미터 수준으로 공중부양한채 달리는 배인 거다.

한 세시간 가까이 지날 즈음, 우리가 가는 곳에서 오고 있는 여객선이나 고깃배들도 보이고, 첨엔 쪼그만 점처럼

보였던 섬들이 금세 부풀어오르더니 시야 뒤로 사라져 버렸다.

저기 조그맣지만 분명하게 형체를 드러낸 대형 관람차가 있는 곳에서 후쿠오카 인근 여행명소가 시작되는 거다.

저기가 이름이 뭐였더라, 후쿠오카에서 배를 타고 조금 가야 하는 곳이라고 봤던 거 같은데.

하카다항에 거의 도착할 즈음, 배의 속도가 완연히 늦춰졌다는 느낌과 함께 입국 안내가 시작되었다. 양손가락

지문을 모두 요구하는 일본의 과도한 입국 심사가 인권 침해라는 비판도 많지만, 사실 주권국가 일본이 그러겠다면

딱히 외부에서 막을 방법은 없는 거다. 일본에선 일본 법을 따라야 하는 건 기본이요, 들어갈 때도 일본 법에

따라야 저런 '입국이 허가되지 않'는다는 협박에 쫄지 않을 수 있는 거다. 그치만 이미 저런 흉악한 안내문 자체로

살짝 심리적 위축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얼마전 내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다는 이야기에 느꼈던 모종의

불안감이 고개를 드는 것도 사실. 아니, 한국정부도 못 믿는데 일본정부는 어떻게 믿냐 말이다.

하카다항에 배를 대고 세관으로 올라서는 길, 부산까지 213킬로미터임을 알리는 표지가 붙어있는 항만의 건물.

웰컴투 후쿠오카, 세관을 거치기 전이라 그런지 촘촘한 그물이 일본땅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세관을

통과해야 비로소 그물이 걷힐 테고, 그러고 나서 맘껏 후쿠오카를 거닐어주겠다고 두근두근.

부산발 후쿠오카행 고속여객선 티켓. 배는 1층, 2층으로 나뉘어있는데 정말 아무것도 볼 게 없었다. 그리고 시속

80킬로-실감나지는 않았지만-로 달린다는 배답게 선내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해놓고, 듬성듬성 설치된 티비로

영화를 상영해 주었다.


일본에 왜 이렇게 고양이들이 많은지, 그리고 고양이를 소재로 한 만화, 액세서리, 소품들이 다양한지 모르겠다.

이유는 몰라도 고양이가 눈에 띌 때마다 꺄아~ 하며 쫓아가선 사진을 찍기 수차례, 제풀에 지쳐서 나중에는 옆에

고양이가 멀뚱히 날 좀 찍어줘, 라 해도 애써 외면하고 지나기도 했다.
하카다역 근처 캐널시티 쇼핑몰에서 만난 고양이 인형. 이 므훗한 표정하며, 두손곱게 모아쥐고 투명한 유리공을

받쳐든 폼하며, 번들거리는 T존까지. 입꼬리, 혹은 눈꼬리가 어떻게 살짝이라도 비틀리느냐에 따라 표정과

느낌이 그야말로 천양지차로 바뀌고 만다. 당장 요 두마리도, 조금 덜 과감하게 웃은 왼쪽 녀석이 상대적으로

다소곳하고 순한 느낌이라면, 오른쪽 녀석은 왠지 잔뜩 장난꾸러기 같다.

후쿠오카 대로변의 한 주차장에서 등을 웅숭그린 채 사주경계 중인 호랑무늬 고양이. 복슬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앞발이 귀엽다.

구시다신사였던가, 신사에 있는 소원적는 나무판에 그려진 고양이. 축 늘어진 볼살을 그려내고 싶었던 듯 한데,

왠지 어색한 주름살로만 보인다. 그래도 천금과 만복을 가져다주는 고양이라니 번쩍 쳐든 앞발과 살짝 초점잃은

시선이 귀엽다고 치자.

큐슈지방에서 최대 규모의 잡화 전문점이라는 텐진 니시테츠 야쿠인역 인근 INCUBE 매장을 둘러보다가 한켠을

가득 메운 고양이에 혹했다. 섬세하고도 자부심강한 야옹이들의 러시.

하카타역 옆의 쇼핑몰 커낼시티를 걷다가 마주친 또다른 고양이들. 자세히 보면 사슴, 돼지, 토끼 등속도 보이지만

내겐 전부 고양이로 보인다. 특히 저 까만 고양이가 자꾸 눈을 당긴다.

텐진, 나카쓰 거리를 걷다가 문득 뒷통수가 근질거려 돌아본 곳에 버티고 앉았던 두 마리 얼룩 고양이. 깜장이랑

하양이 굵게 얼룩져 있는데, 두마리 다 콧등성이에만 조그맣게 검은 얼룩이 두드러진다. 도망가지도, 겁내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 당당한 녀석들.

다시, 인큐브(INCUBE) 매장에서 만난 깜장 고양이. 저 몽환적인 눈빛과 축 늘어진 사지하며, 따스하고

살짝 거친듯 부드러운 느낌의 재질하며. 은빛 단추로 표현된 코와 은은히 웃고 있는 입 모양까지.

그러고 보니 내가 고양이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던 체셔 고양이 때문이었던 듯.

몸뚱이만 서서히 지워져 나가고 난 후에도 그의 웃음소리는 남아서 사방을 울렸다는 그 입째진 고양이의

독특한 캐릭터와 카리스마가 좋았다. 

초점이 뒤에 있는 황금거북이한테 맞아 버렸는데, 요 두마리 고양이 장식품도 참 이뻤다. 심플하게 표현된 바디와

머리 위 장착된 두 개의 똥글똥글한 안구까지. 유려하게 슬쩍 웨이브를 탄 꼬리의 곡선도 미끈하다.

온갖 동물들이 인형으로 만들어지지만, 얼마전 아랍에미레이트에서 산 이뿐 낙타인형과 더불어 이렇게 귀여운
 
고슴도치 인형은 본 기억이 없다. 보드랍고 포근한 느낌의 고슴도치.

실사 고양이인형..이랄까. 땡그란 눈을 두리번대는 것 같은 왼쪽 녀석도 귀엽고, 살짝 자긍심에 차 업되어 있는

느낌으로 코를 들어올린 오른쪽 녀석도 귀엽다. 어리버리하지만 순해보이는 왼쪽 녀석과 야무지고 똘똘해보이지만

살짝 건방져보이는 오른쪽 녀석, 멋진 짝이다.

닥스훈트 밑에 깔린 새끼 강아지.

그리고 토토로~* 역시 인큐브의 잡화매장에서 찍은 건데, 한 코너가 온통 만화 캐릭터 상품들로 가득했다. 그 중

가장 눈여겨보았던 건 역시 토토로. 말도 몇마디 없고 단순히 행동과 표정만으로 존재감을 전달하는 이 캐릭터에

왜 그렇게 꽂혀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요녀석의 캐릭터상품을 내 사무실 책상에 꼭 올려놓을 생각.

당장 2009년 달력도 팔고 있었지만, 글쎄..1년만 놓고 버려야 한다는 건 좀 아쉽길래. 토토로 분수대를 사실 가장

갖고 싶다는.

만화의 나라 일본에서, 이런 식의 상품 설명 만화가 그려진다는 건 좀 굴욕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저

어색한 표정, 어색한 동작, 어색한 얼굴의 여자아이가 그려진 그림이라니. 멍하니 그냥 가만히 보다보면은 이거는

뭔가 아니다 싶어 밑의 아가씨는 저게 혀라고 빼물고 있는 건지 저건 뭔가 적잖이 속이 쓰려오는 그림.

일본의 음식점이나 가게에 들어설 때마다 보이는 본던져주는 고양이가 살짝 변형된 오른쪽 고양이. 이 아이는 다소

과하다 싶게 속눈썹을 그려놓아서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나름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참해 보인다. 그래도 역시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저 왼쪽 므흣고양이.

이런 식의 아이디어 상품. 비록 메이드 인 이태리..라는 글자가 선명하지만, 여튼 일본에서 봤으니깐. 저런 깜찍한

시계는 하나만 덜렁 있음 왠지 별로일 듯 하고, 다른 고양이 컨셉 소품들과 함께 있으면 정말 괜찮을 거 같다.

저런 독특한 소품들에 따르는 일종의 '규모의 경제'효과랄까, 한두개로는 별로 괜찮단 느낌이 없지만 여러개가

뭉쳐 있어야 비로소 그 진가가 살아나는 듯한.

전혀 고양이나 동물과 상관없지만, 저런 관람차 모양의 액자, 혹은 회전목마 모양으로 실제 돌아가는

액자도 꽤나 참신한 아이템이지 싶다. 애기들 사진 꽂아서 곁에 놔두면 혼자서도 재미있어하며 잘

갖고 놀지 않을까.

텐진의 어느 펫샵에서 만난 고양이. 엄청 나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길래 장난삼아 살짝 톡톡 건드렸더니 귀찮다는

듯 몸을 딩굴거린다. 왠지 한손으로 다른 한 팔뚝을 잡고는 뻐큐를 날리는 것 같은 포즈, 그리고 시크한 저 표정.

얘들도 동물이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커낼시티와 붙어있는 구시다신사에서 만난 상상속의

동물 녀석. 붉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건 잘 못 봤던 거 같다.

보통은 이렇게 회색빛 돌을 깍아서 만들지 않나. 얘는 근데 왜케 복슬복슬해 보이는지, 푸들의 몸을 빌린 거 같다.

얘는 표정이 맘에 좀 안든다. 사람을 내리깔아 보는 느낌의 눈빛. 게다가 살짝 입꼬리를 말고 웃고 있다.

신성한 소라며 대접받는 소 동상도 신사에서는 흔히 보이는 것 같다. 딱히 귀여운 느낌은 없고, 걍 동물이니까

끼워 준 셈.

부록삼아. 이 아이는 동물인지 식물인지..명확치 않으나 유산균 캔디를 샀더니 그 사은품으로 딸려있던 걸로 보아

유산균이라고 봐야 할 거 같다. 유산균은...식물은 아니니 포함시키기로 하고, 사실 유산균 캔디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저 휴대폰 고리를 갖고 싶어서 산 거였다. 꽤 귀여운 데다가 일본 여행의 기념품도 될 수 있을 듯하여.

일본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휴대폰에 달고 좋아라, 하면서 찍은 사진. 저 입모양은 딱 빙긋 웃는 모양이다.



학문의 신인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모신 곳. 901년 '우다이진(右大臣)'이라는 장관직에서 돌연 다자이후로 좌천된

미치자네는 2년 후, 이곳에서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무덤 위에 세워진 것이 이 '텐만구(天滿宮)', 그니까

신사로서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학문의 뜻을 이루고 부와 행운이 따른다나. 시골마을로 밀려난 이사람이 왜 무려

'학문의 신'으로까지 추앙받고 있는지는...글쎄, 관직운과는 별도로 학문적 성취가 대단했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다만 '학문적 성취'를 빌도록 특화되어 개창했을 이 신사가 언제부터 부와 행운까지 얹어주는 종합선물세트로

탈바꿈했을지 생각하다 보니, 결국 사람들은 언제 어느시대고 그런 것들을 바라는 법인가 부다 싶다.

다자이후텐만구에 가는 길에는, 엔 기호처럼 생긴 저런 문을 몇개씩 지나야 했다. 어렸을 적 민족사관이니 뭐니에

빠졌을 때에는 우리나라의 솟대, 천군의 상징이 저 문의 원형이라더라, 라고 외치는 비분강개조의 목소리에 동해

합세했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가까운 지역이 영향을 주고 받는 건 당연한 거고. 과거를 금칠하는 건 곧잘

현재를 비하하고 부정하는, 과거로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초래하는 것 같다. 자랑스러운 한민족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면서 외려 '지금 여기'의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그리고 과도하게 부끄러워하는 함정. 그러다가 덜컥

부국강병, 군사강국을 이야기하고 '다물'을 이야기하며 북벌이니 남벌이니. 심지어는 핵무장을 통해 무궁화꽃이

피었다고 비분강개조로, 혹은 격정적인 연설조로 눈물이 그렁그렁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유아적 발상.

그런 시끄러운 감정과잉의 것들보다는 차라리 요런 게 훨씬 좋다. 저 꼬맹이의 할머니뻘 되어 보이는 분이 아기를

들쳐앉고는 봉헌된 '신성한 소'의 옆에 바싹 붙어 사진을 찍고는, 잠시 눈을 감고 뭔가를 빌었다. 조용히.

또다시 지나는 문, 조금씩 본전에 다가설수록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교육 문제가 심각한

곳이니만큼, 학업성취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이 다자이후텐만구는 아마도 영원토록 무궁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은 얼핏 듣기로 대학교만이 아니라 중고등학교도 어딜 가는지가 중요하다고 하던데, 어쩜 여태껏 한국보다

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미, 조만간 한국 청소년들의 스트레스가 급격하게 상승해서

금방 따라잡고 또 추월할 거 같단 생각이 강하긴 하지만.

마침 이곳을 방문했던 날이 11월 15일, 일본 명절인 시치고산(753)이라고 했다. 여행을 다녀온 후 일본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마치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을 위한 백일잔치나 돌잔치를 하듯 일본에서 아이들의 건강과 행운을 빌어

주는 행사라고. 아이들이 무사히 크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기 위해 전통의상을 곱게 차려입고 신사에 가서는
 
조상신에게 인사도 하고, 사진도 찍고 하는 날이란다. 말그대로, 7, 5, 3살짜리 아이들을 위한 날.


정작 이렇게 이뿌게 차려입고 온 아이들이 꾸역꾸역 정말 쉼없이 신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무슨

중학교 입학시험이나 초등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 있거나, 막 치르고 왔나 했다.

저렇게 귀엽게 차려입은 아이들을 양손에 잡은 어른 한 명, 그리고 카메라를 쥐고선 버둥대는 아이들을 열심히

지휘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 어른 또 한 명. 그렇게 구성된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이들이나 아이들이 입은

옷이나 어찌나 귀엽고 앙증맞던지, 도촬 아닌 도촬이 계속되고 말았다는.

우리나라 산사에 오르면 입구에 시원한 샘물이 있듯, 후쿠오카에서 들어가본 모든 신사에도 그런 샘물이 있었다.

물맛이 좀 이상하다 싶어 그냥 손만 씻고 말았는데, 일본 사람들도 나이가 좀 든 사람들 아니면 딱히 마시는 것

같진 않다. 하기야 이런 신사가 한국의 절들처럼 산등성이에 버티고 서서 사람을 목마르게 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보고 귀여워 죽겠다고 생각하면 결혼할 나이라고 하던데, 한 세네살쯤 되어보이는 이 꼬맹이 아가씨의 눈이

어찌나 말똥말똥하던지. 그치만 결혼은 아직.

커다란 붉은 등을 지나면 인제 다자이후텐만구의 본전이다. 흐릿하게 디테일을 죽여놓고 보면 색감이나 목조건물

양식이나 얼핏 한국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요모조모 따지다보면 딱히 닮았다기도 민망하지 않을까

싶도록 달라 보인다. 부산에서 배타고 고작 3시간여 달리면 도착할만큼 가까운 곳인데, 사실 아는 게 없다.

본전 앞마당 좌측에는 점쟁이같은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아이들과 부모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꼬맹이가 점을 본 건지, 부적을 산 건지, 흐뭇한 아버지는 한 손에 잡은 뭔가를 늘어뜨리고 있는데, 애기는 바싹

얼어있는 표정이다. 여린 눈, 여린 피부가 감당하기엔 가을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그랬던 건가.

본전에 올라가 절을 하고 나오는 아이들에게 신녀, 라고 하나...그 누님들이 풍선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다홍빛

치마에 팔소매가 너풀대는 하얀 저고리, 그리고 반들거리는 긴 생머리를 정갈하게 동여맨 흰 머릿수건..(?)까지.

뭔가 단순히 전통을 지킨다는 느낌의 '민속촌 도우미'가 아니라 성당의 수녀님들에서 느껴지는 단정하고 깔끔한,

그리고 뭔가 비세속적인 '종교인'의 느낌이 들었다.

꼬맹이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주고 있는 부모들. 그리고 언니가 빠알간 원색의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게 여전히

낯선지 빤히 바라보는 여동생. 무엇보다 저 꼬맹이가 들고 있는 쪼꼬만 빽. 꺄아.

얜 뭘까. 한국이나 태국의 절에서 많이 봤던 것들과 비슷하긴 한데, 그렇다고 해태나 머 그런 불교설화상의 동물은

아닐 테고-여긴 신사 안이니까-, 그렇다고 한국설화에 있는 철을 먹는 불가사리, 이런 것도 아닐 테고-여긴 일본

이니까-, 정체가 싱숭생숭한 만큼이나 싱숭생숭한 저 눈빛. 녀석의 기분을 모르겠다.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본전에 들어가려는지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유유히 지나는 신사 관계자분. 감청빛

바지와 살짝 비취빛을 띈 저고리의 색감이 청신하다. 그리고 왠지 약간의 대머리 느낌이 더할나위없이 잘 어울리는

거 같다고 느꼈다. 저 의상을 걸치고 시커멓게 숱이 많은 머리였다거나, 곱슬머리였다면 전혀 안 어울렸을 듯.

본전에 들어앉아 뭔가 빌고 있는 학부모들, 그리고 아이들. 사람들이 꽉 차들어왔다가는 쑥 빠지고, 또 다음 팀이

꽉 차들어왔다가는 파도처럼 쑥 빠진다.

그리고 한 가운데 당당히 버티고 앉아 뭔가를 읊고 있는 아저씨. 일본 제품들에서 종종 느껴지는 세련된 색감은

어쩜 저런 전통의상으로 전승되는 과거의 빛깔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뿐인지도 모르겠다. 한국도 요새

세련되고 고급스런 색감의 한복이 많이 나오던데, 아직 그런 빛깔을 갖고 제품에 잘 적용하지는 못하고 있는 듯.

점보는 듯한 곳에 갔더니 무려 일인당 오천엔. 당시 1000엔에 15000원하던 환율이었으니..무지하게 비싸다. 그치만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역시, 불황 속에서도 아이들만 잘 타겟으로 하면 지갑은 쉽게 열린다. 특히

최근 '소황제' 외동아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중국이나, 더 말할 것도 없는 한국이나, 그리고 일본은 그렇지 싶다.

뭔가 빨갛고 노란 종이들이 가득히 묶여있다. 내가 어렴풋이 아는 바로는, 신사에서 점괘를 보고 운이 좋으면 그냥

가져가고, 좋지 않으면 신사 안에 묶어두는 곳이라고 하던데, 그럼 저 이뿌게 묶인 종이들이 온통 악운을 예언한

것들인 건가. 일본어로 뭐라고 쓰여 있긴 한데 영 까막눈이다. 그래도 한자는 잘 읽는 편이지만, 일본어에 쓰이는

식으로 한단어씩 뚝뚝 끊겨 쓰여서야, 좀처럼 이해불능인 게다.

그 아마도 악운을 예견해서 이곳에 동여매진 종이들 사이로 바라본 텐만구 건물.

사진을 찍다보면서 느낀 거기도 하고, 지금 또다시 느끼는 거기도 하지만, 어쩌면 난 아이들이 이뻐서라기보다는

저 쬐끄만 사이즈의 일본 전통의상..아마도 기모노?..의 색깔과 라인, 그리고 문양들에 꽂혔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저렇게 등 뒤에서 커다란 꽃모양으로 묶인 허리띠의 깜찍함이라니.

말하자면 다자이후텐만구의 기념품점인 듯 한데, 파는 게 대부분 부적이다. 이미 수험생활과는 상당히 멀어져버린

몸인지라, 학업관련 말고 다른 종목에 괜찮은 물건이 있음 기념품으로 사갈까 했으나 그다지 땡기는 게 없었다.

뭐...솔직히 녹록치 않은 가격도 한 몫했달까.

100엔짜리 제비라고 한국어로 적혀있다. 한국사람들이 꽤 많이 오나본데, 그치만 내가 다닐 때에는 다른 한국인들

거의 못 만났다. 아사히 맥주공장 견학갔을 때 만났던 게 사실상 유일무이한 한국인과의 접촉이었던가. 급격히

올라버린 환율 탓에 적지않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거나 다른 곳으로 돌렸다고 했고, 게다가 인근 국가에는

주로 패키지 여행이 많은 탓인지도 모른다. 내 일정 자체는 그다지 한국인을 피하려는 속셈이 없었으니.

다소...기분이 언짢았던 표지판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열매처럼 주렁주렁 달린 소원 적는 나무판들. 저렇게

조그마한 꼬맹이들이 뭔가를 간절히 두눈 꼭 감고, 혹은 머리를 푹 떨구고 빌고 있다. 합격을 바란다.

저만한 아이때부터 세상에 거부당한 느낌에 직면해야 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비극이지 싶다. 경쟁을 통한

선별작업도 좋고, 무한경쟁을 통한 체질개선도 좋은데...아직 가을햇살도 뜨겁고 눈부신 아이들이란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학업 성취라는 달콤한 과실을 설득력있는 스토리에 꿰어맞춘 이 다자이후텐만구는 살짝 애교스런

사기에 가까울지 모른다. 적극적으로 아이들의 '학업 성취'를 팔면서 그렇게 크지 않은 돈을 박리다매식으로

그러모으고 있는 게다. 머, 사실 어떤 종교던 뭔가를 팔고 있는 거지만, 다소 노골적이고 상대적으로 다소 단순한

것을 팔고 있다는 점에서는 무지 심플하고 담백한 공간이기도 하다. 여기선 부활이니 천국이니, 그런 세련된 걸

팔지는 않으니.

이 호리병들은 뭘까. 뭔가 안에 손오공이라도 가둬뒀을 법한 호리병들이 담고 있는 건, 사람들의 밝은 소원일까

아님 뭔가 이곳에 버리고 가고픈 악운이나 나쁜 감정일까.

그런 식의 소원적어 걸어두는 나무판은 다자이후텐만구 본전을 둘러싸고 쭉 계속 이어졌다. 어떤 한국사람은

독도는 한국땅, 이렇게 격정적인 궁서체로 적어놓기도 했고-미리 여기와서 그런 글을 쓰려고 붓을 챙겨올 만큼

용의주도했던 걸까, 아님 펜으로 붓의 궤적을 그릴만큼 집요했던 걸까-우리 사랑 영원하게 해주세요, 혹은 대학

가게 해주세요 운운운. 일본어는 하나도 모르지만, 일본어로 적힌 것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다.

바글바글한 꼬맹이들과 부모들을 품고 있는 본전 건물 뒷켠을 돌았더니 인적이 툭, 끊겨 있었다. 더러는 나무에

걸리고, 남은 햇볕들이 땅바닥에 누웠다.

신녀..라고 해야 할까, 라고 두번째 갈등. 여기서 있는 사람들은 계속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인 걸까, 아니면 뭔가

일로 하는 걸까, 아님 알바? 아까는 '종교인'의 포스가 느껴졌던 뒷태였지만, 이렇게 인적없는 곳을 종종걸음치는

모습에서는 왠지 몇세기 전 일본에 불시착한 느낌, 민속촌의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시치고산(753)을 맞아 가족사진을 찍으려는 듯 흥정하는 가족, 그리고 요 쪼꼬맣고 귀여운 아가씨의 뒷태.


하카다 역 주변에서 12번 버스를 타고 유센테이 공원으로 향했다. 한 30-40분쯤 갔을까, 버스 안에 사람들이 잔뜩

탔다가 다시 대부분 내렸을 즈음 한적한 교외 동네가 나타났다. 유센테이, 友泉亭. 아는 거라곤 이수영이 여기서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더라, 그리고 정말 그림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라더라, 그거밖에 모르고 무작정 와본 길.

정류장 지나 이런 돌담길을 마주치니 대충 이게 유센테이 공원의 외곽이겠거니, 감이 왔다. 입구까지 조금 걷다.

가을. 바삭할만큼 구워진 삼겹살처럼, 잘 말려진 갈빛 낙엽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안내판.

정(靜)..숙, 이겠지. 입에 손을 갖다대고 쉿, 할 필요도 없이 늦은 아침. 인적없이 고요한 공원에 발을 내딛었다.

한참 지나서야 부스럭거리며 나온, 그리고 채 자리도 못 잡고 있는 아저씨. 단정한 건물과 규칙적인 기왓장 배열.

작지 않은 연못을 경계로 두 세계가 마주보고 있었다. 위아래가 바뀌어도 이 고즈넉하고 신비로운 느낌은 같다.

초록물이 번진 것처럼,  오랜 돌위에 이끼가 슬몃 끼어들었다.

바람조차 조용히 불고 지나는 찬란한 수면 속, 혹은 수면 위 세상.

아무도 보는 사람 없지만 표지판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순로'를 걷는다. 무작정 반대로 가지는 않을 만큼의 나이.

쉼터. 큰 연못을 가깝게 끼고, 때로는 살짝 멀게 두고 걷는 코스라지만 내겐 그다지 길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나무그늘모양 물웅덩이 밖으로 뛰쳐나가려 하는 금빛 물고기.

깔끔하면서도 정갈한 맛이 똑 떨어지는 느낌의 저 석조상에서 풍기는 꼿꼿한 존재감.

만원짜리의 경회루를 한번은 제대로 봐야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래선 대조군이 외국, 실험군이 한국이 되고 말 듯.

저 둥글둥글한 탑 너머, 저 배배 뒤틀린 수풀 너머 암흑물질이 가득한 곳에는 토토로가 살고 있지 않을까.

네 활개를 쫙 펼친 '당당한' 남자용 표식.

빨간 천으로 팔다리를 다소곳이 싸매고는, 노랑 밴드로 이뿌장하게 동여맨 느낌의 여성용 표식.

연못에서 쏘아올린 분화구 속에서 피어오른 수풀들이 까칠해보인다.

설계도가 분명 필요했을 거다. 설계도에 더해, 적당한 크기와 모양의 돌들을 골라내어 섬세히 배치하는 수고로움.

90도, 그리고 또 90도. 그렇게 가차없이 전개된 대나무 울타리.

오랜 청동기유물처럼 사방에 초록색 녹이 슬어있어서, 싱싱한 녹색 수풀과 녹슨 이끼의 경계조차 허물어져버렸다.

들고남(出入)이 아니라, 서서 들어가는(立入) 걸 금지하고 있는 걸까. 유방이 기어지났다던 가랑이 사이도 아니고.

대인배는 200엔, 소인배는 100엔. Y자와 등호 =자가 포개져 인쇄된 듯한 게 엔 표시의 기원을 더욱 궁금케 만든다.

물에 절반, 땅에 절반 빚지고 있는 누각 위에 오르다.

잎사귀가 붉어지는거야 자연의 섭리, 일본색이 무척이나 강한 낯선 정원에서 내편처럼 든든히 느껴지던 단풍.

원근감과 입체감을 상실한 굵고 검은 나뭇둥치가 얼기설기 펼쳐지고, 붉고 푸른 조각들이 꽉 메워진 모자이크화.

액자식 구성, 스토리 속의 스토리. 1인칭 주인공을 바라보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희롱처럼 고양이가면을 씌웠다.

이끼처럼 곱게 깔린 융단이 살짝 주름이 진 듯하여 맘이 좋지 않았다. 저걸 반듯이 펴주어야 하는데.

정숙해 보이는 연못속 세상을 흐트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50엔, 누룽지밥알처럼 엉겨붙는 물고기들의 아비규환.

다다미도 이뿌고 비슷한 사이즈의 단정한 문짝도 이뿐데, 저 빨간 요가 매트같은 게 영 거슬린다.

방 한구석에 놓인 화분 한 점과 그림 한 폭이 공간을 자극하며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대나무를 찰지게 엮은 매듭, 그리고 이끼가 점령한 지역과 자갈자갈 소리를 내는 산책길을 고집스레 선긋는 기와.

고풍스런 청보랏빛 우산이 이렇게 이뻐보이는 건, 결혼을 앞둔 두 사람의 의상과 분위기 때문이었을 거다.

버스 노선도를 가만 보면 유센테이에서 텐진(天神) 지역을 지나 하카다역(博多驛), 300엔까지 오렌지색 라인 12번.

 주중,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의 운행스케줄이 다 달라 무척이나 복잡해 보이지만, 시간만 잘 지키면 된다. 쉽다.

유센테이 공원을 나서다가 발견한 스탬프 두 개, 기념품삼아 꾸욱 눌러 가져오려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유센테이 공원. 과거 지방영주의 가옥이었던, 다도체험이 가능한 새롭게 정비된 일본식 정원이랜다.

그렇지만 이런 설명서는 한국에 돌아와 비로소 펼쳐보아도 좋다. 그림같은 풍경이 가득했던 유센테이 공원.

"아사히 비~루 코~죠", 내 발음이 이상했는지 호텔 프론트의 직원들은 난 아무것도 몰라요, 이런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후쿠오카에 오기 전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아사히 맥주를 무한정 마실 수 있는 행복한

공간이 있다고, "아사히 비루 코죠"라고 이야기하면 다들 알 거라고 했던 거 같은데, 아사히 맥주공장이 하카타역
 
근처에 있다는 걸 아는 직원도 거기에 무료 시음을 제공하는 견학 코스가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랬다.

다행히도 난 전화번호를 갖고 있었고, 호텔 로비의 공중전화를 써서 직접 통화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사전에

예약을 하고 가야하는데다가 영어가 가능하다고 했으니. 092-431-2701. 얼마를 넣어야 할지 몰라 우선 있는 잔돈

탈탈 털어넣었다. 요금이 툭툭 떨어지면서, 안내 아가씨와의 통화가 시작. 위치를 파악하고, 시간을 정하고.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한국어가이드를 대동한 한국인들 단체 관광객들과 같은 시간으로 예약해 주었다. 원래는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만 설명이 제공된다던가. 오픈시간은 오전 9시반부터 오후 3시까지였고, 난 3시 10분전에

도착하기로 했다.

비오는 날은 맥주를 마시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아사히 생맥주를 포함한 술 자체를 워낙 좋아라~하는 터라

딱히 개의치 않고 호텔을 나섰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우중충한 날을 맞아 호텔 엘리베이터 안에 붙여져 있던

조그만 우산 판매 광고. 참...아기자기한 글씨에, 아기자기한 광고. 일본이다.

드문드문 젖어 있는 도로 위를 건너기 전. 숙소는 하카다역 근처 '도요(東洋) 호텔'이란 곳이었고, 하카다역에서

로컬 트레인을 타고 남쪽으로 한정거장 내려가면 '다께시타(竹下)'라는 곳이 나온다고 했었다. 관광안내소에서

가는 길을 물었더니 '다케시타'라길래 왠지 낯익은 단어다 싶어, 아 다케시마? 그러면서 '竹島'를 써보였더니 그게

아니라 죽하(竹下)였다. 어쩐지...'다케시마'란 이름의 역이 뜬금없이 후쿠오카 내지에 있을 리가 없지.

이게 바로 다께시타 행 티켓. 원래 커다란 기차역이 그렇듯 잔뜩 혼잡한데다가 공사까지 여기저기서 진행중이어서

더욱 정신없던 하카다역에서 무조건 역무원에게 다가가 가는 길을 물었더니 쉽게 해결해 주었다. 티켓 사는 곳도,

기계에서 티켓 사는 방법도, 그리고 차를 어디서 타야하는지도 자상히 지도받은 후에 기차를 기다리기 시작.

참, 티켓은 편도에 320엔. 왕복 640엔이었으니...고작 한정거장 가는 건데 한국물가로 치면 무지 비싼 거려나...

그치만 후쿠오카 내에서 버스 한번 타는 데도-시내 중심구간에 한정되어 운행하는 100엔버스를 제하고는-220엔,

혹은 그 이상인 걸 감안하면, 사실 전혀 비싸단 느낌도 없이 표를 샀었다. 이미 환율에 대한 건 고작 사흘만에

환율이 백원씩 폭등하는 엔화의 강세에 질렸을 때, 피눈물을 흘리며 환전하면서 맘을 접었기 때문인지도.

하카다 역 구내. 후쿠오카 시내를 돌아다니면서도 계속 느끼던 거지만, 되게 한국과 비슷한 느낌이면서도 뭔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느낌이다. 단순히 일본어 표지판이나 간판 때문만도 아닌 거 같고. 전반적으로 매우 비슷하지만

살짝 낯선 느낌을 던지는 그 무엇, 끝내 무엇인지 속시원히 모른 채 돌아왔다.

더블체크를 위해 다께시타행 기차 타는 곳을 물었더니 정말 친절하고 열심히 가르쳐준 역무원 아저씨. 타는 곳은

애초 표살 때 가르쳐주신 분 말씀이 맞았는데, 로컬 트레인은 배차간격이 무지 길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거의

20분 간격으로 있는 거 같던데, 덕분에 여유있게 도착하겠거니 했던 예상이 보기좋게 틀어지고 말았다. 이젠 되려

지각했다고 안 들여보내주면 어쩌나, 걱정해야 하는 단계에 이른 것. 그나저나 역무원 아저씨, 카메라 의식하고는

기차 들어오는 것 무지 열중해서 바라보고 계신다.

하릴없이 20여분을 기다리면서 빗발이 점차 굵어지는 걸 보았다. 비가 내리는 걸 볼 때마다 참..인간들이 어줍잖단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어쩌니저쩌니 잘난척을 하는 인간들이지만 비가 내릴 땐 고작 우산이

전부다. 그런 식의 천조각/비닐조각으로 비를 긋는단 건 진부할대로 진부해졌음에도..별로 더 좋은 대응방법을

고안치 못하는 것 같다. 그치만 역시 일본에선 투명비닐우산이 많이 보였다. 불의의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는

투명 비닐 우산. 모 프로그램의 적극적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선 아직 그다지 쉽게 보이진 않는다.

플랫폼 한가운데 버티고 선 스낵코너.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자판기. 외국음식에 대한 넘치는 식욕과 호기심은 늘

절제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압도했고, 일본에서도 역시 곱창라면이니 뭐니 거의 돼지뼈가 흐물거릴 때까지

고아진듯한 느끼하고 진한 라면에 매료되어 버렸댔다.

한국의 '노약자석'은 기실 나이많은 분들을 위한 자리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굳이 별도로 '임산부석'이란

표시를 '노약자석' 옆에 붙여야 할 정도로, 눈으로는 '노약자' 혹은 '장애인'석이라고 읽히되 머리로는 '노인'이라고

이해되는 어색한 간극이 곧잘 몇몇 사건들로 드러나곤 한다. 노인에게 자리양보하지 않는다고 폭언, 구타, 그러다

같이 경찰서도 가고, 혹은 배안나온 임산부를 억지로 일으키는 노인에 대한 항거, 분노..그런 이야기들.


일본은 '우선석'이라는 개념을 쓰고 있었다. 애기가 있거나, 임신했거나, 노인이거나, 혹은 신체가 불편한 사람을

우선 앉도록 하는 우선석. 노인에게 벌떡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의 모습이 꼭 한국에서만 멋지고 자랑스러운 건

아닐 거다. 그리고 한국의 그것은, 개인의 선택 이전에 구조적으로 강제되는 '미덕'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미덕이 아닌지도 모른다.

하카다(博多), 한자음으로는 '박다'라고 읽히는 곳에서 고작 한정거장, 다케시타.

기차에서 내려 빠져나오는데 불쑥 눈에 띈 '우측통행' 표지판. 그리고 얼마전 다른 블로그에서도 봤었지만, 일본도

에스컬레이터 두줄서기는 안 하고 있었다. 한 줄서기가 굳어져 있는 것 같던데 대체 왜 갑자기 생뚱맞게 두줄로

서자고 잘되지도 않는 걸 억지로 밀어붙이는 건지. 이 역시 그 모 프로그램에서 다뤘던 거 같은데..글쎄, 성격도

급하고 걸음도 빠른 나로서는 두줄서기는 죽을 맛이다. 괜히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고 그냥 한줄서기가 정착된 이상

거기서 보완책을 마련하는 게 정답아니었을까. 캠페인, 계도, 그런 식의 고압적이고 수직적인 태도란 참.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지각한 사람은 아사히 맥주를 공짜로 맛볼 기회를 박탈할지도 몰라, 라는 염려로

우산도 안 쓰고 뛰었다. 다행히 기차역에서 내려 한 백미터 정도 걸었더니 바로 앞에 보였다.

헐떡이며 들어가니 이미 견학투어는 시작했댄다. 그렇지만 내 뒤에도 다른 한국인 여행자들이 여유있게 입장하고

있길래, 왠지 마음이 푹 놓였다. 설마 한두명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데 안 들여보내주지는 않겠지 싶어서.


처음으로 마주한 견학 포스트는 맥주의 재료를 소개하는 곳이었다. 보리니 뭐니 샘플을 구비하고 있었고, 중국집

간장/식초통처럼 생긴 곳에 담긴 보리는 직접 시식을 해볼 수 있는 깨끗한 것이라고 했다. 몇알 입에 넣고 씹어

봤더니 생각보다 무지 고소하고 달콤했다는.

복도를 따라 이어지는 견학 코스에는 이렇게 맥주를 만드는 방법을 소개해 놓기도 하고, 아사히맥주의 연혁을

소개하고 있기도 했다. 저 주홍빛 판대기에 하얗고 커다란 거품이 그려진 건 왠지 환타나 써니텐 오렌지맛스럽지
 
싶었다. 그리고 저 연혁을 차근차근 보기에는 생각보다 움직이는 스피드가 빨랐다. 4,50분만에 견학을 마쳤던 거

같은데, 그렇게 빠르진 않아도 거의 쉼없이 걷기는 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앞에서 저 빨간 옷을 입은 직원분이 일본어로 설명을 해주시면 한국인 단체관광객을 이끄는 한국인

가이드분이 통역을 해주셨다. 보통 단체여행객은 이럴 때 끼어서 설명을 듣는 배낭여행자들이나 개인여행자들을

기피하고 싫은 티를 팍팍 내던데, 이분들도 별로 좋아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 가이드가 통역해주면서 내뱉는

말풍선들을 내가 혼자 들고 가서 독식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뱉어진 말들은 한없이 잘게 부서져 퍼지는

비누방울처럼 공간가득 채워지는 거 아닌가. 그렇담 그거 좀 같이 들으면 어때서 사람을 눈치주고 노골적으로

가라고 하는지. 뭐, 여기선 그렇게까진 안했지만 다른 데선 많이 겪었던 일이다.

중간에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도 있는데, 왜지 사람들이 분위기잡고 앉아서 사진찍기 딱 좋은 지점같았다.

저 은빛 알루미늄 컵위에 올라앉은 건 분명 맥주거품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겠지만, 난 그냥 커피 위에 얹혀져있는

휘핑크림이 생각나는 건 왤까. 너무 과장스럽게 표현된 거같지만, 그만큼 아사히 맥주의 거품이 맛있다는 건

어필하고 싶었으리라 관대하게 납득하기로 했다. 이제 견학코스가 거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난 제한시간내에

최대한 많이 맥주를 마시기 위한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복도 중간중간에 마주친 맥주 모양의 그림. 저런 세세한 곳까지 맥주와 연관된 장식을 채우다니 이곳이 정말 공장
 
견학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했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고, 아님 익히 알려진대로 일본인의 꼼꼼하고 섬세한 면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사진을 보곤 이런 곳까지 신경써서 관찰한 사람이 더 꼼꼼하다고 이야기해준

사람도 있었지만 말이다.

우리를 계속 안내해주었던 밝은 웃음의 인상좋은 아가씨. 견학 코스 중 사진을 찍지 말도록 제한한 곳이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아사히 맥주가 어떻게 환경보호, 자원재생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를 전시한 곳이었다. 맥주의

펫병으로는 폴리섬유를 짜내어서 직원들이 입고 있는 옷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기타 알루미늄캔, 남은

보리찌꺼기 등도 모두 남김없이 재활용하고 있다고 했지만, 역시 입고 있는 저 옷이 100% 아사히맥주 펫병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제일 놀라웠다. 벌써 근 30여년 이전부터 그렇게 철저한 자원재생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니,

역시 선진국다운 면모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히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정부의 적극적인 규율 그리고 지원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드디어 무료시음회장 입성. 약 20분정도 진행된다고 했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 30분 가까이 시간이 주어졌던

것 같다. 누군가 여기에서 맥주를 네 잔 마셨다고 했던가, 난 그 얼굴모를 블로거에게 뜨거운 호승심을 느끼며

최소한 다섯 잔은 마시리라 굳게 다짐하며 들어섰다.

우선 첫잔은 아사히 생맥주, "첫잔은 슈퍼 드라이로 마셔주세요"라는 한국어 안내문이 있을 정도다. 그리고 두번째

잔부터는 흑맥주를 마시던 생맥주를 마시던, 본인이 원하는 걸 달라고 하면 저 아주머니들이 따라주신다. 왜 이런

무서운 얼굴의 사진이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다만 맥주를 청하면 쾌속무비한 속도로 손을 놀리시는 아주머니들이

그저 고마울 뿐. 생맥주도 맛있고 흑맥주도 맛있고.

사전에 인원수에 맞춰 테이블에 저런 안주를 인당 한개씩 배치해 둔다. 그리고 중간에 초콜렛이라거나 기타 안주를

맛보라며 조금씩 더 주는데, 그런 것들은 시음회 공간 한 옆에 있는 매점에서 팔고 있는 것들을 판촉하는 거라고

보면 될 거 같다. 그 매점의 매대에 마련된 시식용 안주들이 눈에 띄길래 새로 술잔 받으러 오고가는 길에 하나씩

집어들기도 했지만, 역시 맥주 본연의 맛을 느끼려면 안주는 없어도 그만이다.

생맥주, 흑맥주, 흑맥주, 생맥주, 흑맥주..기어이 채웠던 다섯잔은 아마 이 패턴으로 비웠던 것 같다. 듣던대로 단체

관광객들 중 술을 잘 안하시는 분들은 꽤나 많아서, 그분들은 주스 한잔만 마시고 금방 일어서시기도 하고, 매장에

무슨 안주를 파나 구경도 하고 그랬다. 그 와중에 다섯잔이라니 좀 심했다 싶기도 하지만, 사실 그렇게 부어라하며

마신 것도 아니고 상당히 여유롭게 마셨는데도 시간이 충분했던 느낌. 정말 30분쯤, 혹은 그이상 시간을 할애해

주었던 거 같다. 그러니 이렇게 사진도 함께 찍고, 주변 사진도 찍을 여유도 있었겠지.

마지막으로 일어섰다. 사람들이 전부 빠지고 나니 다시 자리를 정돈하고 내일 견학 프로그램을 준비하시나 보다.

어쨌든 이분들은 오늘 우리 3시 견학 일정을 끝으로 시마이.

왠지 나가기가 아쉬워서 매장이랑 근처를 살짝 둘러보았다. 생맥주와 흑맥주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잔을 채우던

저 샘터가에는 이제 사람 한명 보이지 않고, 반대편에 있는 매장은 뭔가 뒷정리로 분주하다.

아까 견학하면서 처음 받았던 브로슈어에 꼽혀있는 한국어 광고글, 대체 누가 쓴 건지 모르겠지만 참 빼뚝거리는

글씨에 꾹꾹 눌러박힌 느낌표들이라니, 정말정말 상품을 팔고 싶은 느낌이 확 전해지는 거 같다. 요컨대, 저

매장에서는 요런 것들을 판다는 거다. 그치만 시식해 본 바에 따르면 글쎄, 맥주가 제일 맛있었다.

가리키는 대로 문을 나서니 밖에는 여전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그치만 아까와 다른 건 어쨌건 빈속에

맥주를 다섯잔이나 들이마신 내 부유하는 정신상태. 조금씩 후끈해지는 머리와 목덜미에 와박히는 빗방울이

간지러우면서도 시원한 게, 이유없이 유쾌해져버렸댔다. 그냥, 취기가 돌았단 얘기.

다시 다케시타 역으로 갔더니 아까 서두르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스탬프가 한 옆에 놓여 있었다. 아사히 맥주공장

기념 스탬프쯤 되려나, 찍을 만한 종이가 잡히지 않아 그냥 하얀 받침대에 하나 이뿌게 눌러 찍고는, 사진으로

남겼다. 그러고 보니 오른쪽의 네모난 도장은 또 무슨 그림이었을까, 미처 못 보고 있었는데 이제 눈에 들어온다.

확실히 살짝 취했었던 겐가.

맥주 만드는 공정. 비단 아사히 맥주만이 아니라 모든 맥주가 이런 공정을 거쳐 만들어질 게다.

들고 온 명함, 후쿠오카에 갈 일이 있다면 꼭 들러볼 만한 코스인 거 같다. 맥주 공장이라는 곳을 그렇게 쉽게

갈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아사히 맥주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왠지 갓 제조했을 거 같은 느낌의

신선하고 맛난 맥주를 맘껏 먹을 수 있단 사실만으로도 꽤나 괜찮지 않나 싶다.



중동 쪽 사업 아이템을 찾고 있다면 이 사진을 주목해야 할 거 같다. 

이 뜨거운 나라들이 어쩌자고 물탱크는 건물 옥상에 저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내놓고 있다. 사우디에서나 카타르도

마찬가지, 그래서 일반집은 물론이고 오성급 특급호텔에서도 차가운 물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아무리 차가운 쪽으로 손잡이를 돌려놓아도 나오는 물은 뜨겁길래 혹시나 하고 반대쪽으로 돌리면 약간 과장해서 

증발직전의 끓는물이 나왔었다. 그게 다 저렇게 직사광선에 노출된 물탱크 때문이다. 최소한 저기에 차폐, 단열을

위한 커버를 씌우는 간단한 시설 만으로도 이 곳의 사람들에게 찬물 세례를 가능케 해주리란 생각.

비자 때문에 예상치 못하게 공항에서 너무 지체되고 말았다. 어느덧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밝히는 네온사인중에

문득 눈에 가는 게 있다. 저건 분명 술집에 오라고 달콤하게 꾀는 네온사인. 금주령이 공식적으로 너무너무 엄격히

지켜지고 있다는 사우디, 어쨌건 술집 간판을 발견치는 못했던 카타르, 그 어디서도 술을 맛보지 못했던 터에 저런

술집간판이 눈에 띄는 동네에 온 것만으로도 뭔가 조금은 더 낯익은 동네에 온 반가운 느낌이었다.

쿠웨이트 Courtyard Marriot 호텔. 이미 많이 어두워진 상황에서, 호텔정문 앞 현관지붕이 마치 인디아나존스에서

성배찾는 편에 나왔던 투명한 다리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불빛들이 많이 반사되면서 반짝거리고, 그 투명한

지붕 뒷켠에서 비치는 불빛들이 섞여들면서 꽤 화려했는데, 막상 사진에는 담기지 않았다.


이곳의 호텔 역시 들어서면서 탐지대와 금속탐지기를 각각 사람과 짐들이 통과해야 했지만, 그렇게 깐깐하게 굴진

않았던 거 같았다. 사우디나 카타르 호텔에 들어설 때마다 가방을 열어 물건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받았던 일행 중

한 분이 여기선 아무 문제없이 통과했던 것만 봐도 그랬고, 이전과는 달리 위압적이지 않은 자그마한 탐지기를

첫눈에 띄지 않도록 구석에 밀어넣어둔 느낌이 들었던 것도 그랬다.

저녁 먹으러 간 곳에서 마주친 고양이. 그 곳이 유별난 곳이었는지, 아님 쿠웨이트가 대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고양이들이 사방에서 어슬렁대며 쏘다니고 있었다. 이 건방지고 사랑스런 것들.

호텔 방안에서 발견한 쿠웨이트식 나침반. 저 화살표가 친절히 메카가 있는 방향, 무슬림들이 기도를 해야 하는

방향을 일러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좀 이해가 안 되기도 하는 게, 다른 종교들은 보통 신은 어디에나 편재한다고

가르치면서 아무데나 대고 기도를 한다. 물론 대개 신을 형상화한 십자가던 조각상이던 그런 물체를 앞에 두고

기도를 하게 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런 기도의 대상을 정형화하는 것을 단연코 거부하는 이슬람교가 막상 기도

방향에 있어서는 저렇게 불편하고 까탈스러워 보이는 기준을 고집하는 건 왜일까.


그런 면에서 보면 저 '나침반'도 다소간 무슬림들의 고민이 녹아있는 건지도 모른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

메카가 있는 그곳을 나타내는 건 그냥 네모난 상자 모양, 혹은 단순한 건물 모양일 뿐이다. 특별히 메카나

기도의 방향을 나타내는 상징이 발달, 아니 발생하지도 못한 이슬람교의 처지에서 보면 저런 식으로 특별한

의미가 담기지 않은 기호로 메카를 표시하는 게 당연할지도.

호텔 창밖으로 내다보인 쿠웨이트 시내 전경. 내가 중학교 때던가 이라크의 점령과 뒤이은 걸프전을 치러낸 이곳은

덕분에 호텔이 흔치 않고 높은 건물 찾기가 쉽지 않은 곳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호텔 숙박비도 상대적으로 좀더

비싼 편이었다. 건물을 지어올려도 언제 또 이라크가 공격해올지 모른다는 학습된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런 불확실한 부동산 투자보다 다른 분야의 투자처를 찾았다는 얘기다. 그렇게 찾은 다른 투자처가 바로 두바이.

두바이의 건설붐을 뒷받침한 총알은 실제로 쿠웨이트의 투자자들로부터 나온 것들이라고 한다.

사진과는 그닥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세상에서 가장 비싼 돈은 뭘까. 달러, 엔, 유로, 파운드? 몰랐는데 쿠웨이트

디나르(DINAR)화가 가장 비싼 돈이다. 1쿠웨이트 디나르는 자그마치 5,416.32원이다.(2008.11.27 현재)

1쿠웨이트 디나르는 또 3.66739달러, 달러가 아무리 요새 갈수록 힘이 빠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어제오늘

이야기도 아니고, 새삼스런 것도 아닌 오래전부터 그랬던 거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쿠웨이트 디나르화.

미국이 중동에서 일으킨 전쟁들의 가장 큰 전비부담도 직간접적으로 쿠웨이트가 가장 크게 짊어졌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정부 재정은 건전하기 짝이 없댄다. 갱장히 돈이 많은 나라다.

상담회 진행을 하며 총총거리고 다니다 몇번씩 타는 엘레베이터가 그때마다 재미있는 거다. 따로 층수가 정해진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고 싶은 층 번호를 저 전화기 다이얼같은 걸 눌러서 입력을 하는 식이다.

그러면 A부터 D까지 이름이 붙어있는 엘리베이터 중 하나의 이름이 딱 뜨면서 그쪽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층수가 적힌 번호를 누르느냐, 아님 층수 자체를 본인이 입력하느냐의 사소한 차이랄 수도 있겠지만

왠지 꽤나 새롭고 흥미롭게 보였다.

미처 방안을 어지를 시간조차 없이 짧았던 쿠웨이트에서의 체류시간. 단지 일박만 하고 밤비행기로 돌아가는

스케줄이어서 그랬는데, 다음에는 더 길게 올 수 있기를 바랬다. 기름값이 1리터에 60원(20센트)라는 이 기름진 땅.

순수쿠웨이트인은 100만명에 그치고 외국국적의 사람들이 200만이 넘는다는, 역시나 한국인으로서는 쉽게 상상키

힘든 상황이지만, 병원, 학교 등 대부분이 국영으로, 거의 무료나 다름없이 제공되는 유토피아같은 이미지의 땅.

이렇게 된 건, 쿠웨이트의 석유채굴 원가가 무지 낮기 때문도 한 몫했다고 한다. 대부분 육상에 위치한 유전이어서

석유채굴 원가가 배럴당 3불 정도밖에 안된다는 거다. 국제원유가가 백이삼십불에서 보합이라고 쳐도 대체 얼마나

수익률이 높은 장사를 하고 있는 건지.

밤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에 마주친 쿠웨이트 타워(Kuwait Tower), 총 3개의 탑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형물이라고

설명은 들었는데, 대체 왜 내 눈에는 저 조명이 이뿌게 비치는 탑 하나밖에 안 보이는 건지.

쿠웨이트를 나서는 공항에서 마주친 내가 보지 못한 쿠웨이트의 풍경들. 아...저런 곳이구나. 그렇지만 이곳에

두고 오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얼른 출장을 마치고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뭉싯뭉싯 커지기 시작한

터라 그다지 미련은 없었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아쉬움을 끊어냈다.

이런 옷을 입은 배나오고 전반적으로 뒤룩뒤룩한 아저씨들을 보는 것도 이제 다시 흔치 않은 일로 돌아간다.

실내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피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던 곳, 여성들의 눈만 보고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다고 느끼게

되는 곳-물론 사우디를 제한 나머지 나라들은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지만-, 꼭 출장이어서가 아니라 술을 마시기가

불가능에 가까운..살기 힘든 곳, 그런 곳을 벗어나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짧았다. 지구 자전의 도움을

받아, 10시간이 넘게 걸리던 서울-두바이 구간이 불과 8시간 45분이 소요되는 두바이-서울 구간으로 단축됐다.



쿠웨이트의 수도 이름은? 쿠웨이트. 정확히는 쿠웨이트 시티(Kuwait City)라 해야 할까. 카타르에서 쿠웨이트까진

고작 1시간 15분. 그치만 비행기로 1시간 안팎의 거리는 뭔가 가늠하기 어려운 격차가 있다. 서울에서 제주도도

50분, 서울에서 광주던가..그 거리도 45분. 서울에서 베이징도 대략 한 시간이었던 거 같다. 아마 미처 비행기가

제 고도에 올라 제 속도를 내기 전에 다시 착륙 준비를 하게 되기 쉬운 시간이지 싶다.


쿠웨이트 공항에 내려서면서 보인 공항 주변 풍경은, 사우디나 카타르나 비슷하다. 인천공항에 내려설 때처럼

서해쪽 섬마다 무성하고 파릇한 나무들같은 건 보이지 않는 건조한 그림.

현지에서 안내를 나온 아저씨가 완전히 우리를 잘못 인도해버렸다.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비자를 받는 데 1시간반

넘게 걸리고 말았으니..비행시간이 그보다 짧게 소요되었던 걸 생각하면, 비자 받으려고 기다리는 동안 다시 한번

카타르로 날아 도착했을 거라고 모두들 툴툴거렸다. 이 상황에 딱히 적당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역시 해외에 나감

외국인보다 한국인을 더 조심하라고 했던 거다. 그리고 내 경우엔 정말 그랬던 때가 많았다.


1) 비행기에서 내리면 바로 달려나간다. 저렇게 'VISA ISSUING'이라고 적힌 표지를 보고 종종걸음을 쳐서 얼마나

빨리 도착하느냐가, 비자 발급 기다리다가 홧병나 죽느냐, 혹은 늙어 죽느냐를 결정할지도 모른다.


내 경우, 굳이 일행들을 비행기 내리자마자 모아놓고 인원체크한 후 일일이 인사를 하겠다고 고집하는 그 아저씨

덕분에 이미 이 때 게임이 종료된 상황이었다. 늙어 죽을 운명.

2) 화장실 같은 건 조금 참았다가 비자 발급 순서기다리면서 가도 충분하다. 괜히 다른 곳의 화장실 사인과 달리

남자가 양쪽 허리에 손을 척하니 걸치고 있는 모습 같은데 혹해서 카메라를 찾는다거나 볼일을 보겠다고 들어가면,

비자발급대에 5분 늦게 도착해서 50분 늦게 떠날지 모른다.

3) 이렇게 세관으로 통하는 한 층 아래 내려가는 계단이 있지만, 우선 그 오른켠에 있는 비자 발급대에서 비자를

발급받고 내려가야 한다. 역시 쿠웨이트는 다른 아랍국가들보다 훨씬 친미적이고 자본주의적이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제일 먼저 마주치는 가게는 바로 맥도널드였다. 그 맥도널드를 지나면 바로 나오는 저 비자발급 표지.

사실은 여기까지 고작 50미터 정도를 얼마나 빨리 주파하는지가 관건이었는데, 우리는 일행을 다 모아 나와서는

화장실도 들르고, 일일이 인사도 다 하고 명함도 주고 받고. 그랬다.

3-1)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나고, 대기표 번호가 오육십번 밀려있는 상황에서..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하며 참고삼아

찍은 사진. 이렇게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면 그 오른쪽에 저렇게 조촐한 비자발급대가 있는 거다. 저기서

시간 허비안하고 얼른 나서려면 달려야 하는 거다.

4) 비자발급대에 가면 무조건 빈 공간에 들이미는 게 아니라, 왼쪽 번호표 발급대에서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한국인은 번호표 없어도 괜찮아, 이런 말도 안되는 억지 부리면 1시간반 기다리는 거다.


약 대여섯명이 비자 발급 업무를 맡고, 창구를 열고 있는 거 같았다. 도착하고서 잔뜩 그 앞에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들 보고 잠시 황망했다가, 또 번호표 필요없이 그냥 아무데나 가서 하면 발급해준다는 그 아저씨 말듣고

들이밀었다 구박당해서 또다시 황망..알고 보니 번호표는 680번대..그리고 현재 창구에 찍혀 있는 번호는 그보다

훨씬 앞에 있는 610-620번대.


더욱 놀라운 건 이들의 일처리 행태였다. 마치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일하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한사람 해결하고

다음 사람을 불러야 하는데 좀처럼 부르질 않고 호출번호도 바뀔 줄을 모르는 거다. 그리고 멍하니 넋놓고 허공

쳐다보고 있거나, 옆사람과 잡담을 하고 있거나, 전화기를 만지작거리거나. 자신들앞에 입국자들이 3열짜리

의자에 빽빽히 앉아서 자신들의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가끔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그런 사람 등 뒤를 손으로 쿡쿡 찌르면, 그제서야 어슬렁어슬렁 손을 뻗어 호출번호를

새 번호로 바꾸고는 손님을 맞는다. 그렇게 한명씩 쿡쿡 찌르고 다니는 감독자의 몸짓도 역시 나른하고 게을러

보였지만, 그래도 찔리기 전까지 움직일 생각조차 없어보이는 그 사람들에 비하면 무지 부지런하고 성격급한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 식으로..번호가 한번 바뀌는데, 그니까 한 사람 비자 발급하는데 십분 정도

걸리는 느낌이었다.

5) 이게 번호표 발급기계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바로 그 옆에 있다. 'Service is Optional'이란 문구. 일종의

급행료를 받는 곳인 게다. 그냥 비자를 발급받는 경우, 원칙적으로는 25달러, 더러는 30달러를 받는다. 무슨 말이냐

하면 원래 25달러가 공식적인 가격이지만 창구에서는 대개 30달러를 요구하며, 이미 잔뜩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공무원들에 주눅이 든데다가 오랜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비자를 받는다는 것 자체를 감사해 하기 마련이라

그냥 모르고 주는 거다. 약 20명의 일행 중 딱 한명만 30불 내고 5불을 거슬러 받았고, 나머지는 모두 30불을

당연한 줄 알고 내버렸다.


그런데 급행료의 경우, 50불을 주면 번호표가 필요없이 바로 발급받을 수 있으니, 시간이 보다 중요한 사람은

급행료를 내고 갈 만하지 싶다. 더구나 우리의 경우, 일행 중 하나가 모르고 내라는 돈 다 내고 Optional

Service를 받아 먼저 짐을 찾으러 내려간 덕분에 짐이 그새 없어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을 덜 수 있었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짐의 안위를 걱정할 판이었을 게다. 어쩌면 급행코스 때문에 더욱 번호표 라인은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르고, 자신들의 수입을 위해 더욱 기다리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기다리다

지치면 돈 더내고 급행코스를 밟으라는 거 아닐까.

6) 이 조잡한 종이는, 실제 저렇게 번호표 받고 기다리면서 적게 되는 비자 발급 신청서다. 대체 어떻게 복사를

하는 건지, 좀 다시 깔끔하게 프린트해서 대량복사해놓으면 안 되는지, 네모반듯해야 할 표들이 휘영청 야자수처럼

너풀대고 있다. 자신의 순서가 되면, 혹시 그전에 홧병걸려 죽거나 늙어 죽지 않는다면, 정확히 25불과 함께 저

신청서를 내면 이제 저기에 도장을 찍어주고 직인을 붙이고 한다. 그게 바로 쿠웨이트 비자, 그자체가 되는 거다.


그러다가 잉크가 떨어져서 도장이 흐릿하니 안 찍히면 그 핑계대고 또 한참 손놓고 쉬기도 하고, 기껏 됐나보다

하고 저 비자를 들고 아랫층으로 내려가면 뭔가 빠뜨린 게 있다며 다시 계단을 거슬러 오르기도 해야 하고..

쿠웨이트 비자 받기가 이렇게 힘든 건지는 미처 몰랐다.

공항을 벗어날 즈음 나타나는 그림. 흥, 웰컴 투 쿠웨이트란다. 웰컴은 커녕, 첫인상부터 너무 사람을 힘들게 하는

동네란 느낌만 팍팍 각인되고 말았다. 어쨌든 살아 생전에 비자 받기 위해 기억해야 하는 것은, 가능한 빨리

비자 발급대를 찾아 번호표를 받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비자 발급비는-급행이 아니라면- 25불이라는 것.


뜨거운 태양빛이 키큰 야자수 잎새에 흐트러진 회색 아스팔트길, 옆으로는 태양만큼이나 눈부신 바다를 끼고서

우리를 태운 대형버스는 시내투어에 나섰다. 카타르 도하의 해안도로는 다른 오랜 유적들과 함께 도하, 혹은

카타르에 가서 꼭 가봐야 할 곳 중 하나로 손꼽히곤 한다.

제한속도 80, 그렇다곤 하지만 차들이 왠지 시내 한복판에서보다 천천히 달린다는 느낌이 들었던 건 내 착각일까.

옅은 남색바다가 저렇게 옆에서 출렁이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왠지 운치있게 쪽쪽 뻗은 도로 중앙의 야자수들.

그리고 야자수 잎새 사이에서 얼쩡대는 저쪽 해안가의 스카이라인도 심심치는 않다.

내 마음대로 차를 멈췄다 다시 달렸다 할 수 있었다면, 저 사람들처럼 차를 세우고 바다쪽을 바라보며 잠시라도

바람을 쐬었을 텐데, 하다못해 패키지 투어라 해도 가이드를 꼬셔서 차를 세웠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일하는 중인

게다. 카메라를 손에 계속 쥐고 있기도 사실은 꽤나 민망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일행분들 찍어준다는 핑계를 대며

꿋꿋이 쥐고 있었다.

야자수 아닌 다른 종류의 나무를 본 건 꽤나 새로웠다. 더구나 저렇게 특이한 모양새로 다듬어진 나무라면.

차들 너머, 어릴 적 갖고 놀던 레고에서 푸른색 무성한 '나무'랑 똑같이 생긴 것들.

이게 무슨 호텔이었더라...하얏트 호텔이었던가. 곱게 관리되고 있는 저 잔디밭은 멀찍이서 보기만해도 무지

보드라울 거 같은 느낌이다.

지조없이 살짝살짝 구불거리면서도 이 해안도로가 집요하게 잡고 놓을 줄 모르는 것은, 바로 옆의 바다.

우체국이었던가, 무슨 관공서 앞에서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그늘에서 잠시 쉬고 있는 콧수염 아저씨. 여긴 아무리

뜨거운 햇볕이 쨍쨍하고 내리쬐어도 그늘 아래만 들어서면 선선한 기운이 금세 차오른다. '더위'라는 게 꼭 우리

나라처럼 덥고 끈끈한, 그래서 불쾌한 무엇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대통령궁이었던가, 카타르 최고지도자의 집무실이라고 들었다. 별로 건물이 특이하다거나 볼만한 걸 품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었고, 그나마 건물 정수리에서 펄럭이는 카타르 국기조차 바람결에 적극펄럭인다기보다는 이리저리

돌아누우며 어떻게든 안 일어나려는 휴일 아침의 내 모습 같다. 외려 저 촘촘하고 날선 느낌의 둘러친 담에 시선이

가닿는다.

울타리쳐진 담 끄트머리에 저 뾰족스러운 것들, 정말 누군가 무단으로 저걸 넘으려다가는 자칫 커다란 빵꾸가

몇개씩 생기고야 말 거 같다. 카타르가 그렇게 정치상황이 불안하거나 외교적인 긴장관계에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저렇게 살벌한 담을 둘러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버스가 계속 달리면서 지나가는 그 최고권력자의 집무공간..그제서야 바람이 조금 일었는지, 카타르 국기가 조금

몸을 일으킬 염을 냈나보다.

특이한 형태의 모스크..겠지? 둥글게 둘둘 휘감긴 느낌의 진흙색 건물, 맨 위 탑꼭대기에 초승달 모양 장식이

선명하다. 저 위에 올라서면 아마 도하 사방이 내려다보이지 않을까 싶도록 전체적인 건물들이 납작 엎드려있다.

해안도로가 그래도 유명한 이유는 이런 싱싱한 잔디밭이 사방에서 유지되고 있는 덕분 아닐까 생각했다. 황량한

모래바람과 쉼없는 땡볕세례에 까실까실 뾰족해진 잎새들만 품고 있는 이곳 녹색공간에 저렇게 풋풋하고 약한만큼

섬세한 녹색이 번창하고 있다는 게, 보는 사람의 맘을 왠지 안도하게 만드는 거 같다.

길가에는 저런 식의 조경이 꾸며진 정원도 있었다. 물도 차있지 않은 조그마한 풀 위를 가로지르는 아무 쓸데없는

다리, 아무 쓸데없는 계단같아 보였지만, 그래도 버스 밖을 계속 바라보는 보람이 된다.

길가의 표지판. 다른 건 다 몰라도 눈이 저렇게 이쁘다면 왠지 다른 외모도 모두 적잖이 화려하고 이쁠 거 같다.

신체의 실루엣이 하나도 드러나지 않는 저 검정 두루마기는, 그녀들에게는 더러 아쉬움을 유발하지 않을까.

얼마전 올린 포스팅에서, 사우디와는 달리 카타르에서는 여성 기업인들이 상담회에 참석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는데, 운전 역시 마찬가지다. 엄격히 여성의 운전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우디와는 달리 카타르에서는 이런 여성

운전자가 꽤나 흔하게 보였다. 흔히 외국인들이 중국, 한국, 일본 등지를 '유교문화권'이라 묶어서 이해하는 것에

대해 지나친 단순화라거나 너무 범주가 크다고 불평할 수 있듯, 아랍권 국가들 역시..'아랍권'이라는 형체불분명한

칭호보다 개별국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와 접근이 필요할 때 아닌가 싶다.
온통 공사중 표지판으로 도로가 성치 않은 도하의 중심가에는 '시티 센터'라는 쇼핑센터가 있었다. 3-4층쯤 되는

건물은 얼핏 보기엔 한국의 쇼핑몰과 비슷해 보였지만, 가만..비슷한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닌가 싶다.

반짝이는 두 눈만 가린 채 온몸을 까만 천으로 둘둘 감은 여자들이 대체 언제 어디서 저런 야시시한 옷들을 입는단

얘길까.

듣자 하니,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친족간의 결혼이 심심치 않은 카타르에서는, 결혼식 날의 몸치장을 위해 정말

돈을 아끼지 않고 값비싼 명품들을 몸에 휘감는다고 했다. 향수, 란제리, 악세사리, 옷까지. 그렇다면 이 발랄하고

깜찍한 옷들의 수요가 어느정도 설명이...될 리 없단 말이다.

대체 누가, 언제 입는 걸까. 혹시 까만 두루마리 옷 아래엔 저런 밝고 화려한 옷차림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차마

찍지는 못했지만 란제리류도 정말 화려한 것들이 잔뜩 디스플레이되어 있었는데..어쩜 생각보다 카타르나 아랍권

국가들의 여성들은 히잡과 긴 검정장옷으로 외부의 시선을 가리고는 '은밀한 사생활'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런 도발적인 표정을 한 여성의 포스터가 여기저기서 보인다. 이것도 서양이나 우리나라, 그니까 비 아랍권세계와

비슷한 거 같으면서도 살짝 다르다. 뭐냐면, 저 두드러지게 강조된 눈화장. 아무리 살짝살짝 드러나는 손과 팔목에

타투를 한다거나 해도 역시 상대의 이목을 끄는 데는 반짝이는 보석같은 눈만한 게 없는 게다. 다들 어찌나 눈이

이뿌던지.

스타벅스는 사우디, 카타르, 그리고 쿠웨이트에서 흔히 볼 수 있었지만, 그래서 빅맥지수 대신에 스타벅스지수같은

거 발표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커피빈은 여기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던 거 같다. 저 꼬불꼬불한 글자가

머, 대충 커피빈이란 뜻이겠거니.

약간 한국의 커피빈과 메뉴판이 달랐다. 굵직한 초코칩이 씹히는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시켰는데, 휘핑크림맛이

뭐랄까, 좀더 느끼하면서 뭉글거린다. 음식류가 세계화되려면 무엇보다 어느 곳에서나 균일한 맛을 낼 수 있어야

함이 기본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지 음식에 자신이 없는 미국인들이 맥도널드로 쉽게 발걸음을 옮긴다는

얘기인데, 적어도 그런 균질한 맛을 낸다는 측면에서는 커피빈이나 스타벅스나..좀 모자른 감이 없지않다. 물론

아랍쪽 사람들이 이런 휘핑크림이나 커피맛을 즐기기 때문에 다소 현지화된 거겠지만.

마치 롯데월드처럼 둥그런 아이스링크장을 쇼핑몰 한쪽에 품고 있었다. 쇼핑몰 안은 에어콘이 빵빵해서 더위를

실제로 느끼긴 쉽지 않았지만, 둥그런 유리천장으로 내리쬐는 햇볕만으로도 스케이트 타고 싶은 맘이 불쑥 동해

버렸다. 그야말로 태양이 발광, 작렬하고 있었다.

내리쬐는 태양을 거슬러 고개를 들어보니 유리 돔 너머 건설중인 고층 빌딩 두 채가 나란히 보인다. 쌍둥이 빌딩

같은 건가, 둘이 비슷한 게 마주보고 있는 느낌.

그리고 유리돔 한켠에서 중심부를 향해 쏘아진 화살촉 모양의 저 깃발들...뭘까.

2008년 한국에서 사는 사람에게 노출된 두가지 비상식. 쇼핑몰 곳곳에서 눈에 띄는 저런 금연 경고판. 국민들의

건강한 삶을 '어여삐 여기사 흡연으로 서로 건강을 해치지 않게 할새', 정부 공보물인 건지 금연 홍보물인지, 아님

협박을 하겠다는 건지 잘 포인트가 안 잡힌다. 또 하나의 비상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내에서 거리낌없이

흡연을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 남자, 여자를 불문하고 어디서든, 곧게 편 두 손가락 끄트머리쯤에 담배

밑둥아리를 조여놓고 살짝 내민 입술에 꼽아놓고는, 라이터불을 들이대며 가볍게 빨아올린다. 치이익. 뻐끔.

맵을 보면 코엑스몰이나 다른 한국의 쇼핑몰에 비해 그렇게 커보이지는 않는데 실제론 어떤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갔을 때에는 이미 세계적으로 'R'의 공포가 닥쳐들고 있었을 때였는데도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쇼핑을

나온 사람들도 많았고, 뭔가 북적북적한 느낌이었던 게다. 뭐..현찰을 그득 쥐고 있는 오일머니라는 이미지가 

일종의 선입견으로 작용해서 무조건 좋게 해석해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바틸..이라고 읽어야 할까. 아랍권에서 아주아주 유명한 대추야자 전문샵이라고 한다. 그저 길가 대추야자나무에서

농익은 채 뚝뚝 떨어지던 대추야자를 가지고, 마치 고급 초콜렛들을 치장하는 듯한 방식으로 한단계 가공을 더

한 셈이다. 내가 대추야자를 처음 접한 건 이집트 시와 오아시스마을에서 길가 대추야자를 마음껏 따먹은 때였고,

룩소 등지에서도 그냥 따먹고 다녔던 거 같다. 그 이후에는 돈주고 사먹는다는 게 영 어색했었지만 결국 얼마전

파리에 갔을 때는 술안주 삼아 사먹고 말았었는데, 이제 자연의 선물인 달고단 대추야자를 그냥 따먹던 단계에서

돈주고 사먹는 단계로, 그리고 보다 고급화된 치장을 거친 차별화된 상품을 접하는 단계까지 올라섰다.

내가 산 건 아니고, 현지에서 선물로 받은 거다. 잘 익은 대추야자는 정말 혀가 아리도록 달다. 뭐 대추야자를 절반

쪼개서 안에 뭔가를 집어넣기도 하고, 뭔가를 발라놓기도 하고, 그 질리도록 단 맛에 뭔가를 계속 변주해내고

있었지만, 난 그냥 잘 익은 대추야자를 천천히 녹여먹는 게 제일 맛있었던 것 같다. 근데 저렇게 꾸며놓으니 이뿌긴

꽤 이뿐 거 같은 데다가,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이런 포장 박스까지. 바틸..바텔..? 바띨..? 모르겠다.

또다시 화장실 씬. 아랍권 모스크에선 어디나 볼 수 있는 것들인데, 발을 씻으라고 마련된 수도꼭지들이다. 화장실

한 켠에 이렇게 몇개 발씻기 전용 수도꼭지를 마련해 놓았는데, 쓰는 사람이 있나 싶어 기다려본 몇 분동안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점심을 먹으러 간 곳은 개성시 초입에 있는 봉동관이라는 음식점이었다. 얼마전까지는 이 곳의 유일한 북한식

고급 음식점이었지만, 평양관이라는 곳이 근처에 문을 열면서 독점 체제가 깨졌다고 했다. 그 이전에 비해서

서비스하는 게 훨씬 부드러워지고 친절해졌다는 짧은 촌평도 곁들여졌는데, 실제로 내가 겪은 바에는 참 친절했던

것 같았다. 한층짜리 건물 외양만 봐서는 마치 시골 어디메쯤에서나 쉽게 볼듯한 콘크리트 벽돌로 설렁설렁 지어진
 
어설픈 가건물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져 나간 건물 전면에 내걸린 저 간판, 자칫 머리가

부딪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야트막하다.

일행들과 함께 조그마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상해에서였던가 북한에서 운영하는 옥류관을 갔을 때랑 비슷한

분위기의 홀이 옆에 있고 그 앞켠엔 무대도 있는 듯 했지만, 우리는 8명이 겨우 자리잡아 서빙을 받을 만큼의

자그마한 방으로 들어갔다. 무대가 있는 홀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했지만, 사실 난 '반갑습니다'라거나 '휘파람'류

노래와 연주가 이어지는 그 공연은 이미 봤었기 때문에 그냥 북쪽에 와서 일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는 조용하고 밀폐된 방도 좋겠다 싶었다.


서빙되기 전에 화장실에 가서 손부터 씻으려는데, 남위생실/여위생실, 이렇게 명패가 붙어있었다. 마치 대학가의

허름한 주점에 달린 화장실같이 삐그덕대는 얄팍한 문짝으로 가리워진 그 내밀한 공간.

그러고 보니 자꾸 각지의 화장실 사진을 올리게 되는 듯 한데, 개성서 둘째간다면 서러워할 이 봉동관의 자그마한

화장실 모습.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거울이나 세면대 같은 것 하나 없고 그냥 물도 내려가지 않는

소변기 하나, 그리고 옆에 수도물이 나오는 호스 하나.

여러 메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인당 30달러짜리 식사를 하면 우선 술이나 음료가 나오고, 몇가지 음식이

연이어 푸짐하게 나오고, 그리고는 평양냉면이나 쟁반냉면을 마지막으로 서빙해준다고 한다. 물도 새 병인듯한

이 '고려 신덕산 샘물'의 마개를 따서는 따라주었다. EVAIN이니 FIJI니 외국물을 마셨을 때 느껴지는 다소 생경한

뒷맛이나 목넘김과는 달리 부드럽고 시원했다. 제주삼다수랑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술은 백두산들쭉술이니 뭐니, 꽤 종류가 많다고 했지만 괜히 술먹고 실수하지 말자고 음료수를 달라고 했다.

음료수라고 하니까 잘 못알아듣는 것 같아서, 이쪽 공장에서 오래 일하신 분이 다시 주문했다. 단물주세요.

그러니까 나온 '대동강 사과 탄산단물', 탄산의 느낌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고 노란색이었는데 꽤 맛있었다.


음식은 꽤나 여러가지가 나왔다. 녹두전, 소꼬리찜, 오리구이, 닭백숙, 잡채, 양고기 볶음. 우리를 전담하던 '접대원

동무'에게 양고기나 이런 식자재는 어디서 조달하느냐고 물어봤더니 모두 북한산이라고 한다. 북한은 양을 곧잘

키우고 있다고 했다. 거기에 도라지무침, 김치 등 밑반찬도 푸짐하게 나와서 배부르도록 먹었지만, 마지막에 나온

평양냉면은 끝내 남기고 말았다.


30달러짜리 식사면, 공단에서 일하는 공원들의 반달 월급인 셈이다. 그렇게 애초부터 살짝 불편한 마음으로 앉았던

자리였던데다가 테이블 위로 가득 펼쳐지는 음식들을 보면서 더욱 맘이 불편했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절박한

사람이 그득한 이곳 북한땅에서 이렇게 호사로운 밥상을 받아들고는 얼마 먹지도 않고 깨작대다가 남긴다는 건..

아침을 못 먹고 서둘러 나왔던 탓도 있었지만, 그런 마음이 쿡쿡 찔러왔기에 약간 무리를 하면서까지 먹었던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은 이 쪽의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고 닝닝하다고 얘기도 한다지만,

난 외려 그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 땡기기도 했다.

나오는 길에 '접대원 동무'한테 여기 맥주는 무슨 맥주가 있는지 물어봤더니 한켠에 놓인 냉장고를 보여준다.

대동강맥주. 맛을 못 보고 돌아가는 게 아쉽긴 했지만, 일단 어떻게 생겼는지라도 알아놨으니 담에는 꼭 맛보기로

했다.

'접대원 동무'. 보통 어떻게 불러야 하냐는 질문에 그렇게 부르라고 한댄다. 사진이 실물보다 못 나왔지 싶은데,

우리는 김민희 살짝 닮았다느니 이영아 닮았다느니 이야기를 했더니 그게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한국에서 유명한

배우이자 모델이라고 하니, 그때까지 아저씨들의 얄궂은 농담들을 능란하게 받아넘기며 얼굴색 하나 안 변하던

그녀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여기에서 일하는 '접대원'들은 상해나 북경에 있는 옥류관으로

순환하며 일하는 것 같은데, 다들 출신성분도 좋고 예술학교를 나와 노래나 악기에 모두 능숙한 솜씨를 보인다고

했다. 게다가 20대 초반 정도의 나이임에도 천연덕스럽고 센스있게 사람들의 말을 받아치거나 받아주는 그 밀고

당기는 감각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일행 중 한 분이 계속 이 아가씨와 사진을 한장 찍자고 조른 덕분에, 그 사진을 찍어준 나 역시 이렇게 한 장 같이

찍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손도 꼭 잡아주셨던.ㅋ


'접대원'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남한 토양에서 뱉는 순간 상당히 불건전한 느낌으로 변하고 마는 것 같다. 그런

같지만 다른 단어의 뉘앙스를 악용했던 사례가 바로 2006년쯤엔가, 당시 열린우리당 당의장이었던 김근태의원이

졸지에 '북측 접대원과 춤을 추는 추태'를 부렸다고 보도되며 '개성공단 춤사건'으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그

장소가 바로 여기, 봉동관이라고 했다. '북한처자와 춤을 춘 좌파세력의 총수'라고까지 매도하는 극우세력들의

선정적인 비난은 당시 핵미사일 발사직후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점에서 일부 심적으로 이해는 간다고 해도,

앞뒤맥락 끊어놓고 '북측 접대원'이라는 단어를 설명없이 모호하게 방치하는 건 너무 악의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공연을 구경하는 사람중 연장자나 좌장 격으로 보이는 사람을 무대 위로 끌어올려 잠시나마 함께 율동을

하는 건 흥을 돋우기 위해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라고 한다.


어쨌든 불과 1-2분, 앞 무대에서 노래부르며 춤추던 북측 '접대원'의 채근에 못이겨 춤추는 시늉을 했던 그는

보수세력의 십자포화를 맞았고, 유력한 대선후보에서 급전직하하고 말았으니..

봉동관을 떠나 길가로 내려서는 계단에는 그간 내린 눈이 조금 쌓였다. 쌓였다기보다는 살짝 얹혀있다는 느낌이

더 강할 정도로, 그렇게 얄포롬하게 내려있었다.

아마 저 왼쪽에 있는 길을 계속 가면 개성 시내로 들어갈 수 있나보다. 원래 개성공단 내에 있는 모든 교통표지판엔

서울 방향과 개성 방향이 표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그 글자들이 파란 페인트로 지워져 버렸고,

남아있는 표지판이나 버스 정류장 표지에는 '현대아산', '관리위원회' 등의 공단 내 지명만 남아버렸다고.


아마 교통표지판에 있는 '개성'과, 특히 '서울'이라는 글자가 계속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지 않을까 겁났던

게 아닐까 싶다. 이쪽 방향으로 조금만 쭉 가면 서울이 나오는구나, 그리고 저쪽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개성시내가

보이겠구나. 이런 자각이 언제든 동토를 뚫고 싹을 틔울 수 있을 테니.

다시 본공장으로 돌아가는 길. 차창에 내려앉은 눈발은 금세 물방울로 녹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차에 내려앉은 눈방울들이 금세 녹아버리는게 차내의 온도때문이라면, 정말 이렇게 초록색 솔잎위에 내려앉은

눈발이 녹지도 않고 가만히 쌓여있는 건 살짝 경이롭기도 하다. 눈이 녹지 않을 만큼 차가운 온도로 저 초록색

싱싱한 솔잎의 체온이 내려가 있다는 건데, 용케 얼지도 않고 잘 버티고 있는 셈이니까 말이다.

아까는 스쳐지나갔던 것들이 조금씩, 배가 빵빵하게 불러버린 내 눈에 들어왔다. 라인마다 한 개씩 위에 달려있는

저 금일목표, 현재목표, 현재실적을 나타낸 안내판. 비록 찰리채플린은 모던타임즈에서 저런 단순 제조작업을

풍자하기도 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제조업을 경원시하기는 하지만, 사실 일자리 창출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제조업을 살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괜히 금융선진화니, 대규모 토목공사니 할 게 아니라..

그렇다고 저런 목표량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이나 삶이 위협받아서는 안 되는 건 당연하다.


애초 개성공단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남북간의 관계가 계속 진전하고 호전되기만을 바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남북관계가 점차 발전하면서 노동자에 대한 통제가 점차 완화되고

숙련공이 자유롭게 다른 직장으로 옮겨다닐 수 있다거나 임금인상과 복리후생 등의 측면이 불거지게 되면,

저임금의 이점을 바라보고 개성에 들어갔던 기업들의 경우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남북관계의 현상유지를 내심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며, 그게 전진이던 후퇴던 너무 급박한 움직임은

원치 않고 있다는 건 확실한 거 같다. 지금이야 어쨌든 북쪽에서 정한 최저임금선에 맞춰서 노임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매년 5% 상당의 일률적인 임금상승도 충분히 용인할 수 있는 상황인 듯.

해서, 남과 북의 관계 개선을 견인하는 여러 행위자 중에서 이렇게 북한 측에 이해관계를 가진 남측 기업인들은

점차 보수화된 입장을 표명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흔히 북한의 글씨체는 왼쪽의 저런 힘있고 전투적인 필체, 게다가 빨간 색과 검은 색이 장렬하게 섞여있기 쉽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오른쪽에 보이듯 저렇게 단정하고 힘뺀 글씨를 쓰는 사람도 북한에는 있는 거다.

아까는 제대로 귀기울여 듣지 않았지만, 여유있게 한바퀴 다시 돌아보면서 계속 가사를 분별해내려고 애쓰며

듣게 된다. 작업장 내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는 마치 군가 풍의 씩씩하고 감정이 과잉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는데, 중간중간 장군님 어쩌구, 승리 어쩌구 하는 가사가 들렸던 거 같다. 북한의

대중가요 같은 거 아닐까 싶은데, 노래하는 아저씨나 아가씨나, 금방이라도 감격해서 울어버릴 거 같은 목소리다.

작업장과 사무실 공간을 구획하고 있는 낮은 파티션. 앞에는 '자본주의의 꽃'인 광고 포스터 안에서 전지현이

화려한 외모와 모션, 그리고 옷차림을 과시하고 있었고, 뒷켠에는 하얀 머릿수건에 하얀 작업복, 주홍빛 앞치마를

두른 여공원들이 열심히 옷을 만들고 있었다.

청소를 깨끗이. 청소조로 짜여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면 참 재미있었다. 아까 봉동관에서

양념을 많이 한 음식 먹으면 건강에 안좋다고 한마디하던 '접대원' 아가씨에게도 느꼈던 거지만, 이곳은..그리고

이곳의 사람들은, 마치 30년 전쯤의 한국과 같지 않을까 싶다. 우리 할머니또래의 이름들, 할머니또래의 입맛..

그렇지만 우리처럼 (아직은) 팽팽하고 젊은 사람들.

그렇지만 또 자주 개성공단을 왕래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이곳에서 일하는 여공원들의 화장이 갈수록

짙어지고 화려해지고 있다고 하니, 이곳의 시간은 어쩜 우리네 경제가 압축성장했듯 그렇게 압축해서 총알처럼

흘러버릴지도 모르겠다.

2시 30분, 출경할 때처럼 꼬리를 물고 늘어선 차들이 북한군 차량의 인도를 기다리고 있다. 혹시나 해서 살짝

켜본 네비게이션에서는 노이즈 섞인 한국TV 방송이 볼만하게 나오고 있어서 깜짝 놀랬다. 정말 이렇게 가깝구나.


북한을 벗어나기 전에도, 들어올 때와 똑같은 절차를 밟았다. 금속탐지기와 검색대를 지났고, 아까 들어올 때

삑, 소리를 유발했던 코트의 금속 쇠붙이는 또다시 삑, 소리를 내고 북한군인 아저씨의 이목을 끌었다. 북측에서

발부했던 출입증은 반납했고, 내 카메라에 찍힌 사진들은 끝에서 끝까지 샅샅이 검사당했다. 군인아저씨가 직접

카메라를 쥐고는 사진을 한장 한장 빠르게 넘겨가며 매서운 눈매로 체크를 했다는 사실. 혹시 뭔가 꼬투리를

잡지는 않을까, 나도 모르게 뭔가 이상한 게 찍혀있는 건 아닐까..예측할 수 없는 위협이 언제고 머리를 쳐들 수

있다는 생각에 은근히 긴장했었지만 별탈없이 넘겨받았다. 하기야, 출입국으로 오면서 몇차례나 샅샅이 찍은

사진들을 확인했었고, 스스로 쫄아서 지워버린 사진도 적지 않았으니까.

개성공단 지구를 벗어나는 길에 세워져 있는 저 커다란 붉은 별이 박힌 바리케이트. 어렸을 때 똘이장군이니 뭐니

반공만화 드라마에서 보았던 북한군인들은 모두 머리위나 가슴팍에 커다란 붉은 별을 달고 있었다. 그것도 왠지

음흉한 느낌을 주는 붉은 색이었거나, 좌우지간 이뿐 빨강이라는 느낌은 전혀 안 들었던 거 같다. 근데 솔직히

군복은 북한 군복이 좀더 이뿐 거 같은데. 소련과 중국의 대륙식이랄까, 그런 군복과 유사한 느낌으로.

유리창 너머 보이는 전면의 커다란 송전탑. 저 탑을 통해 무려 15만여 볼트로 내달리며 남측의 전력이 북측의

개성공단으로 공급되고 있는 거다.


아까 그 봉동관에는 이 전기가 공급되는 게 아니겠지? 밥먹는 와중에 세네차례나 전기가 끊겼더랬다. 갑자기

형광등이 꺼져버리고 주위가 조용해지는 순간, '접대원'이나 이곳에 오래 머물렀던 분들은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이었지만 난 정말 개성의 전력수급이 이렇게 열악하다는 걸 체감하고 깜짝 놀래버렸다. 개성은 북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큰 도시인데, 실제 하루에 전력이 들어오는 시간은 네다섯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비무장지대를 건너, 자유의 다리를 건너면서 계속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어쨌든 지금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거고

지금 사진을 찍던말던 북측에서 어떻게 제재할 방법이 있겠어, 그리고 남측에서도 그렇게 빡빡하게 나오겠냐라는

생각을 했지만...어쨌든 북한 지역은 벗어나기로 했다.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라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게다. 북측과 남측의 구역을 식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선도로를 따라 함께 늘어선 가로등

중간쯤 꿰어진 저 플라스틱 링을 보면 알 수 있다. 남측 구역은 노란색 링을 끼고 있고, 북측 구역은 파란색 링을

끼고 있는 거다. 실제로 이 사진을 찍은 건 비무장지대를 한참 지난 후의 일.

입경하는 코스는 북한에 들어갈 때와 비교하면 훨씬 간단했고, 훨씬 부드러웠다. 아까 카메라 검사받을 때 한번

크게 풀린 긴장감은, 일렬로 마치 장송행렬하듯 천천히 전진하던 자동차 대열에서 벗어나 남측 출입사무소에서

일단 내리면서 다시금 완전히 해제되었다. 그러고 보니 입경, 표지판에는 한자와 영문이 모두 병기되어 있다.

왠지 그 밑에 웰컴 투 코리아 혹은 웰컴 백 투 코리아, 이런 거라도 적혀 있어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지만, 또한 금세 내가 개성을 갔다왔고 북한땅을 밟았다는 사실이 꿈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혼란한 느낌도 들었다. 이건 너무 가까운데, 너무 다른 세상이었다.


저녁때 종로에서 가볍게 술한잔 마시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으레 그렇듯 떠들썩하게 와 하고 퍼지는 웃음소리와

시끌벅적한 붕붕 떠있는 분위기. 개성에서 첫눈을 맞았던 나는, 서울에도 첫눈이 왔다는 사실을 여기 와서야 알게

되었다. 난 오늘 하루 어디를 다녀왔던 걸까 싶었다. 차로 불과 한시간 거리면 그렇게도 비슷하고 닮은 사람들이

참 다른 세상을 감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이다지도 낯설고 모를 뿐더러 무관심하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 너무나 놀라운 건데..아무리 놀라운 것도 반세기가 넘으면 그저 진부한 레토릭이 될 뿐인가.


개성엔 편의점이 있을까? 공업단지 내의 도로를 돌아다니다 보면 불쑥 어디 모퉁이에선가 나타난다.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바로 옆쯤에 있는데, 무려 '개성공업지구점'이란 거창한 지점명도 갖고 있었다.

안 들어가 볼 수 없어서 얼른 들어가 봤더니, 북한 아가씨인 듯한 젊은 처자가 카운터를 보고 있다. 엷은 화장에

남측 기준으로 평범한 복장이어서, 순간 여기가 개성 맞는지 의심스러운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이곳은 개성, 북한이 외화벌이를 위해 위험한 시장경제 실험을 벌이고 있는 곳 아닌가. 모든 상품은

달러로 가격이 표시되어 있었고, 그 점원누님은 아마도 16년동안 편의점 알바를 뛰어온 알바의 달인인 듯 능란하게

손님들을 받고 있었다. 다만 다소 들떠 보이고 리드미컬한 북한 사투리가 도드라졌다는 점을 빼면.

이곳에서 파는 담배나 술 종류는 면세가 되기 때문에 가격이 상당히 싸진다고 한다. 이 곳에 주재하며 일하는

남측 직원들은 2주정도마다 남쪽으로 돌아갈 때 애용하기도 한단다.


이 곳에서 쓰이는 돈은 달러, 최소단위는 1달러지폐라는 것이 북한에 넘어오기 전 방북 교육의 내용이었다. 그렇담

저 센트 단위의 거스름돈은 돌려 주려나, 아님 그냥 올림하려나. 편의점을 떠나는 순간부터 궁금했지만 끝내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혹시 모두들 기를 쓰고 센트 단위 거스름돈을 안만들기 위해 머리를

쓰며 상품을 고르려나. 0.9달러짜리를 샀다면 꼭 1.1달러짜리라도 하나 골라서 같이 사는.

그 옆에는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라는, 남측의 관리 주체가 있다. 지금 현재 이곳은 2번째 포스팅에서 이야기한

판-옵티콘으로 입주하기 전까지 임시로 머물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자동차들에 붙어 있는 번호판들을 보면, 흰색

번호판은 이쪽에서 상주하며 쓰이는 차량이거나 잠시 넘어왔던 차량, 그렇게 남쪽 차량을 의미하고, 노란색 판은

북한 차량이다. 노란색 번호판을 단 차량을 꼭 사진으로 남겨놓고 싶었지만, 대부분 그런 차들은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찍을 수가 없었다.

개성공단 내에는 병원도 있다. 그린 닥터스라는 단체에서 운영하는 병원인데, 1층짜리 건물에 남과 북의 의사와

간호사가 다소 섞여서 남, 북한의 환자를 각기 치료중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남쪽 소속의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병원 한쪽 공간에는 남측 의사와 간호사가 주가 된 채 두세명의 북측 의사, 간호사가 함께 진료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병원의 다른쪽 공간에는 북측 의사와 간호사가 주로 포진하여 북쪽 소속의 환자를 치료한댄다. 그 두 공간

사이에는 반투명한 유리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꼭 항상 열려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남측에서 은행도 건너가 있었다. 다소 작다 싶은 지점 수준의 규모였는데, 창구가 두 개 정도 되었던 거 같다.

한쪽 벽면에는 그간 다녀간 귀빈들의 방문 사진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임시절 개성공단을

한번 쭈욱 둘러본 듯 하다. 여기저기서 그의 사진을 볼 수가 있었다.

참 심플한 메뉴판이다. '안내표'란 말은 글쎄, 북한에서 고친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어색한 느낌은 없는데

메뉴판이란 단어 대신 바꿔봄직한 거 같다. 그래봐야 영어+한자를 한자어로 바꾼 거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어느

건물인가에는 이런 찻집도 있다. 다시 한번, 참 심플한 안내표다. 1달러, 1달러, 2달러, 2달러, 1달러. 여기선

최하 1달러지폐를 통용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듯한 느낌이다.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가 현재 소재하고 있는 건물 한 켠엔가 붙어있는 한반도 지도. 출입증에 보였던 것처럼

명백하고 과장스럽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저기 얼룩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의도된 두 개의 점을 볼 수 있다.

참 드문 경험이지 싶은데, 독도에 대한 한국정부의 명쾌하고 단호한 입장을 이렇게 쉽사리 마주칠 수 있단 건.

'소방대'도 있다. 이 사진을 찍어도 될지 안 될지, 그리고 저 옆에 살짝 찍힌 아저씨의 츄리닝이 '제복'에 포함될지

안 될지..백만분의 일초 사이에 머릿속에 온갖 걱정과 근심이 어른거렸다. 북한, 개성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단

사실도 놀랍고 슬펐지만, 내가 스스로 이렇게 개성에 다녀왔노라 글을 쓰면서도 단어와 표현, 뉘앙스를 스스로

정제하고 가다듬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슬픈 것처럼. 아, 그러고 보니 이 사진 안의 차들은 모두 노란색 번호판을

달고 있는 북한측 차량이다.

개성공단 내의 도로를 달리면서 보면, 서울이나 어디 남녘 소도시를 다니는 것과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친숙하고 낯익은 풍경들에 놀라게 된다. 단순히 남과 북의 민족적 일체감...운운이 아니라, 개성공단

내 도로나 가로등, 도로표지판까지 모두 한국 측에서 제공한 것이기 때문인 거다. 파란색 도로표지판의 색도나

그 글씨체까지 모두 남측에서 통일되어 있는 바로 그것들이다. 


우리가 탄 차 앞에서 달리는 트럭에 빼곡히 탄 북측 인부들. 사실은 저것도 애초의 룰과는 벗어나는 일이다. 애초

약속하기로는, (노랑 안전모를 쓴) 북측 사람들은 (노란 번호판을 단) 북측 차에만 타고, (흰색 안전모를 쓴) 남측

사람들은 (흰색 번호판의) 남측 차에만 타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게 어디 되겠나 싶었다. 아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얼굴 맞대고 한공간에서 일하고 이야기하며 '살고' 있는데, 편의적인 이유에서든 심리적인 이유에서든

그런 불편한 룰은 금세 지워질 수 밖에 없었을 거다.

노란색 안전모들이 몽글몽글 뭉쳐져 있던 그 계란판같은 트럭 위에서 살짝 드러난 얼굴. 나이를 가늠하긴 힘들지만

꽤나 연로해 보이시고 피곤해 보이시는 표정이다. 아님 단지 코가 간질거려서 잠시 재채기를 하려고 하셨는지도.

저런 식으로 유려하게 씌여진 한글 간판이 이 개성공단을 꽉 채울 수 있다면 그것도 꽤나 멋진 광경이 되지 않을까.

이미 몇가지 서체, 그것도 대부분 일본에서 유래되었다는 서체에서 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남측의 한글디자인

그리고 한글문화에 조금은 자극을 던져 주면서, 북한이 남한이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례가 될 수 있을지도.

현대아산 사무실에 들어왔더니, 개성상황실이 있다. 벽면에는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중국횡단철도와 연계해서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개성을 보여주기 위한 온갖 도면이 붙어있었고, '복스럽게' 생긴 북한아가씨가 우리에게

개성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개성은 유명한 박연폭포와 한석봉이 판액을 쓴 걸로 유명한 남대문, 그리고

정몽주가 피살당한 선죽교 등의 문화유산을 품고 있습니다..운운. 어라? 피살? 단어가 상당히 세다고 느꼈는데,

나만 그렇게 느꼈던 걸까. 설명중인 아가씨는 여전히 피냄새가 풍기고 훈김이라도 오를 듯한 그런 단어를 발음해

놓고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이런저런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별반 반응이 없었다.

저 디오라마 한가운데 있는 붉은 기둥 같은 건 아마도, 거대한 김일성 동상인 듯 했다. 개성 시내 한가운데에는
 
저런 게 서있나 보다. 설마 조명까지 저 섬뜩한 붉은 색으로 비추는 건 아니겠지.

현대아산의 개성상황실에서 능숙한 말투와 자세로 흐트러짐없이 개성의 현황, 개성공단의 향후 계획에 대해

설명하던 아가씨. 내가 카메라를 들고 멈칫거리는 걸 센스있게 눈치채곤 한마디 해주었다. 자유롭게 사진찍으셔도

됩네다. 그 말 듣고 당장 찍은 그녀의 발표 모습. 겉모습만 보곤 남한과 북한의 처자를 구분하기가 그리 용이하진

않은 듯 하다. 남측보다 결혼이 빨라서 20대 초중반에 결혼을 한다고 하는데, 그 이전까지는 남측과 비슷하게

연령대에 맞는 외양을 유지하다가,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나서는 같은 나이의 남측 여성에 비해 한 10년쯤 더 나이가

들어보인다고 한다. 아무래도 출산을 위해 모체의 영양분을 모두 아이에게 넘겨주고 나서 그를 보충할 충분한

영양이 공급되지 않는 환경이니까 그렇지 싶다. 산후조리, 그리고 산중 영양섭취의 중요성이랄까.

개성은 저기다. 강화도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금방 닿을 수 있는, 아마 서울까지 가는 것보다 개성에 가는 게

더 가까울 거 같다. 참 가깝다. 이렇게 남측에 최근접한 곳을 공단시설부지로 내놓을 수 있었던 건 확실히 김정일의

일인독재에서 기인한 결단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북한 군부에서는 격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김정일은 이를

모두 물리치고 기어코 이곳을 남측과의 경협사업에 내어준 거라고 들었다.

이게 개성공단 1단계 공장구역, 백만평에 이르는 부지라고 한다. 현재 노동집약적 업종 중심의 개발사업은 완료된

상태로, 남북경협의 기반을 구축하는 단계라고 한다. 약 250여개 업체가 들어가서 실제 50여개 업체가 공장을

가동중이라고 하는데, 주로 봉제, 신발, 가방 등의 상품이 만들어지고 있다.

2단계 공장구역은 250만평에 이르며, 기계, 전기, 전자 등 기술집약적인 산업을 발전시켜 세계적인 수출기지로의

육성을 꾀하고 있댄다. 배후지역에는 골프장도 두세개 건설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음...골프장이랜다.

3단계 사업은 IT, 바이오 등 첨단산업 중심으로 550만평을 개발하여 동북아 거점 생산기지로서의 역할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이게 2012년까지의 계획이라고 했는데..글쎄, 현재까지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으로 보아서는

다소 지연될 가능성이 크지 싶다. 그리고 다소 지연되더라도 좋으니 그런 청사진대로 개발이 될 지에 대해서는,

글쎄, 지켜보는 수밖에 없지 싶다.

1단계 공장구역과 3단계 공장구역 사이로 고속도로와 경의선 철도가 놓여 있을 텐데, 그 부근에 상업구역을 만들어

저런 고층빌딩을 잔뜩 올릴 계획도 갖고 있다고 했다. 저 반달 형태의 호수는 남북한의 화합과 번영을 상징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너무 먼 이야기인 거 같아 사실 흘려들었다.

빨간 선이 고속도로, 노란 선이 경의선 철도. 지금도 도라산역에서는 북측으로 하루에 한 차례씩 철도가 운행중에

있다고 한다. 딱히 무언가를 싣고 옮길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모처럼 놓인 철로가 못쓰게

되고 수명도 짧아진다고 했던 것 같다.


놀랬던 건, 설명을 하던 북한 아가씨의 입에서 '세계적인 경쟁력', '가격경쟁력', '세계 일류', '세계 시장'같은

자극적인 단어들이 잔뜩 튀어나왔다는 사실이었다. 아..북한도 변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던 순간.

현대아산 건물 위에 올라 개성공단을 조망했다. 아침부터 하늘이 잔뜩 의뭉스럽게 꾸물꾸물하더니 기어코 눈발을

뱉어놓고 있었다. 황량한 공사현장이 산재해 있고, 저 기분나쁜 판-옵티콘은 어디서나 잘 보이지만, 그래도 올해

첫눈을 개성에서 맞게 되다니 기분이 색다르다. 처음에는 딱딱하게 뭉쳐진 싸리눈이 투둑대며 떨어지더니, 조금씩

부드러운 눈발로 바뀌어 나리고 있다.

눈이 내리는 걸 보면서,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든 생각은 머리에 바른 왁스물 흘러내리겠다는. 어느순간 눈내리는

것이 싫어진다면 나이를 먹었다는 증표라고 했지만, 단지 머리에 뭔가를 바르지 않던 시절과 멋 낸답시고 뭔가를

바르기 시작한 이후라는 차이가 아닐까 싶다.

시계가 순식간에 잔뜩 움츠러들어 버렸다. 거대한 감시탑 혹은 망루처럼 세워져있는 저 관치냄새 풀풀 풍기는

건물도 슬몃 눈발이 만들어낸 장막 뒤로 한 걸음 숨어들었다. 그리고 여긴 개성.


문득 눈을 뜨니 제법 얼음이 올라붙은 자그마한 강이 보인다. 아마도 임진강의 지류일 게다. 
아침 7시반에 모여 개성으로 출발하기로 했는데, 추운 바람에 뻣뻣해져버진 몸을 삽시간에 녹여버리는 지하철의

빵빵한 난방 탓에 10분 정도 지각하고 말았었다. 미친 듯이 뛰었던 탓일까, 죄송합니다, 를 연발하며 차에 타고는

피곤함과 노곤함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와 금세 또 잠들어버렸었다.


지금 난 개성으로 가고 있다. MB정권이 출범하고 나서 쉼없이 삐걱대던 남북관계, 급기야 개성공단의 존폐를

위협하는 이야기들마저 떠다니다가 급기야 다음달부터 개성으로 통하는 육로를 제한, 통제하겠다는 북측의

통고가 전달된 상황이다. 이번 개성행도 몇 주전부터 갈 수 있을지, 혹 재수없으면 못 가게 되는 건 아닐지 적잖게

걱정했었지만, 그래도 어쨌건 난 북측에서는 통행증이, 남측에서는 방북증이 무사히 발급되었다고 했다. 방북증이

북한을 갈 때 쓰는 여권이라면 통행증은 일종의 비자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함께 오기로 했던 다른 사람같은 경우

이유는 모르겠으되 북측에서 통행증 발급을 거부했다고 한다.

가을걷이를 끝낸 임진강변 들녘의 풍경이 고즈넉하다. 난 육로를 통해 개성에 방문하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곳을 방문하는 10시부터 14시30분까지 무얼 볼 수 있을지 잔뜩 휘저어진 상태였지만, 우아한 날개짓을 뽐내는

새떼들을 보며 조금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여차하면 총 맞는 거 아닐까, 북한사람들이 다시 경직되었다고

하던데 자칫 맘에 안들면 못 들어가거나, 혹은 못 돌아오는 거 아닐까. 이런저런 걱정과 설렘이 교차했다.


이곳 남한 최북단의 마을, 얼마전 가봤던 장단콩 마을을 포함한 파주 근방의 마을은 모든 세금이 면제된다고 한다.

게다가 병역의 의무 또한 면제된다고 하니..논밭에 나가든 마을 밖 마실을 나가든, 혹은 새로운 트랙터나 차를 사든

일일이 군인들에게 알리고 움직여야 하는 불편함 쯤은 감수할 만 하지 싶다. 아닌가..?

남북출입사무소 앞에 들어서니, 이미 많은 차들이 열맞춰 서있었다. 한대씩 들어가는 게 아니라, 대략 삼십분

단위로 끊어서 한꺼번에 움직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아침에 지각만 안 했으면, 사무실 들어가서 "개성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서 차를 타고 바로 개성에 다녀오는 경이로운 그림이 나왔을 텐데..

늦는 바람에 지하철 역 앞에서 픽업당해버렸다. 개성간다는 말을 마치 옆집 철수네 가듯 별일 아닌 것처럼

무심하지만 시크하게 내뱉는 그런 멋진 그림은 그래서 다음 기회로.

남북출입사무소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바글대는 게, 그냥 무슨 대합실쯤 온 느낌이다. 1층에선 사람들이

출입증 신청을 위해 기다리고 있고, 2층에는 이제 오늘 다녀올 사람들이 출발 시간이 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남북출입사무소의 광고판은 계속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는데, 예컨대 컴퓨터 반출하면 혼난다~

라는 이야기. 군수용으로 전용될 수 있는 전략물자 통제라는 차원에서 노트북이던 데스크탑이던 컴퓨터 반출이

금지되어 있댄다. 대부분의 사무를 컴퓨터로 처리하는 요즘 세상에,  개성에 가서 일하시는 분들이 좀 많이

불편하겠다 싶었다. 게다가 몇가지 금지품목이 더 있었다. 정확치 않은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배율 10배 이상의

망원경/쌍안경, 휴대폰과 충전기, 160mm이상 렌즈의 카메라, 그리고 시집과 소설책, 종교서적 등이었다.


휴대폰은 북측 주민들이나 공원(북에서 직원을 '공원'이라 부르는 건 중국식이지 싶다, 꽁위엔)들 손에 넘어가면

자칫 영화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 테니까. 문득 받은 전화 건너편의 사람이, 내레 북조선 인민입네다, 이렇게.

그리고 시집과 소설책은 다소 의외인데, 자본주의적 문화가 담겨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차원에서

여성의 나체나 누드가 담긴 책도 반입 불가.

또다른 잔소리는, 모든 식물류, 그리고 흙이 부착된 식물 반입금지라는 국립식물검역원의 안내가 있었다. 이런

경고가 좀더 절실한 건 역시, 지금 여기선 사람들이 육로를 통해 외국에 다녀오는 거니까 그렇지 싶다. 비행기를

통해 먼거리를 왔다갔다 하는 거라면 좀더 관리가 편하겠지만, 그냥 자신이 집에서부터 타고 온 차 그대로 갔다가

오는 거니까..암만해도 좀더 의뭉스런 노림수들이 먹힐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개성을 포함한 북한 남부지역엔 말라리아가 창궐하고 있는데, 그 징후 중 하나는 '무기력증'이라는 안내에 살짝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렇다면 나는 말라리아 초기 징후가 하루에도 몇번씩 수시로 도지는구나. 가장 좋은 예방책은

모기에 물리지 않는 거라는 다소 무책임해 보이는 설명에 분개하려다가, 지금같은 때엔 말라리아 염려는 없다는

일행의 설명에 급격히 평온해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손씻기 등 개인위생에 철저하란 이야기는 잘 듣기로 했다.

2층 한 켠에는 저런 사물함이 있고, 가기 전 이런저런 짐들을 넣어두고 있었다. 이런저런 책들이 들어있는 가방과

함께 핸드폰을 잠시 꺼두고는 함께 넣어두었다. 천원, 오백원짜리 두개로 문이 잠기는데 잔돈이 없어서 맞은편

북한상품 판매소 아줌마한테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혹시 나중에 짐 다시 꺼낼 때 돈도 돌려받나요, 하고 여쭈니까

그래서 어디 장사가 되겠냐고, 공짜가 어디 있냐고 타박하셨다. 나는 혹시 이것도 일종의 남북경협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로 간주해서 정부가 지원해주는 건 줄 알았지만, 역시 공짜는 없는 자본주의 세상이다.

손에 카메라만 든 채로, 한결 홀가분한 몸으로 출발 전까지 좀더 둘러보기로 했다. 1층에는 우리은행이 있어서

원하는 사람들은 달러화로 환전을 해갈 수 있다. 개성, 평양과 금강산 지역에는 달러화가 통용되며, 기타 지역에는

유로화도 통용된다고 하는데, 원화는 안 받아준댄다. 혹자는 미국과 극렬히 대치하고 있는 북한이 달러 아니면

안 받아주는 게 아이러니하다고 비웃듯 말하기도 하지만 글쎄, 보기에 따라서는 당연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회는 행정이나 각종 인허가, 법제를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일종의 통일부 산하기관으로

생각해도 될 거 같은데, 여기 남북출입사무소 2층에는 도라산 출장소가 나와있었다.

출발 전 약 25분에 걸쳐서 방북교육을 받아야 한다. 10분 정도 동영상을 보며 개략적인 사실들에 대해서 교육을

들은 후, 나머지 시간은 사무관이 그 내용을 보완하고 질문을 받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화해와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자는 첫 멘트가 다소 생경하게 들렸다. 10년간 나름대로 진지하게 발전해 온 남북관계가 이렇게 순식간에

얼어붙고 퇴행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래서 더욱 그간 남북경협을 통해 쌓아온 경제적 연결고리가 소중한

게 아닐까 싶다. 꼭 그 경제적 이해관계로 인해 관계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기능주의적인 기대가 아니라 해도,

남과 북 모두에서 이전의 공고했던 '국가' 행위자 아래의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생겨난다면 최소한 파국은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올라가지 않을까 해서.

정말인지 모르겠는데, 최근 방북했던 사람 중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병세를 물었다가 즉시 추방당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왠만하면 민감한 이야기는 피하되, 꼭 해야 하는 경우는 이런 호칭을 써서 말하라고 했다. 대통령님...이라...

국방위원장님이 아니라 국방위원장인데, 대통령님이 아니라 대통령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대통령 자체로 이미

존칭인 거잖아. 괜시리 걸어보는 딴지인지도 모르지만, 어디 가서 우리 MB대통령님은,(꼭 MB가 아니라 해도)

우리 대통령님은 어쩌구저쩌구, 이렇게 말하는 거 웃긴다. 왠지 우리 대통령님께서는..이라고 말해야 할 거 같다.

금강산 관광이 어느새 10년이 되었다. 남북간 통신선도 얼마나 오래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노후화되고 있어 서울을

떠나 개성으로 향하는 걸음을 방해하고 있다. 통신선은 노후화하고, 이산가족분들도 고령화하시고, 그리고 (전쟁의

기억을 잊어간다고 한탄하는 것만큼이나)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기억도 휘발되고 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포스터에 등장했던 도라산 역 앞의 철마는 워낙 부식이 심해져서 자칫 폭삭 부스러져 내릴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포스코에서 5억원을 들여 복원중이라고 한다. 그만큼 오랜, 아주 오랜 휴전 중이다. 그리고 그 휴전 기간동안

두 나라는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외면한 채 기형 내지는 불구가 되어가고 있다. 시간의 세례를 받아 늙고 낡아가는

것들은 죄가 없을 거다. 죄가 있는 것은, 그러한 기형화된, 불구화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득을 보는 집단 아닐까.

남북간 출입만을 규율하고 있는 공간이라 그런지 영어나 한자로 병기되어 있지 않아 그 정확한 뜻은 추측하는 수

밖에 없지만, 입경, 출경은 아마도 거의 99%의 확실성으로 경계 경자를 쓴 出境, 入境이라는 한자를 쓰지 않을까

싶다. 설마 서울 경자를 써서 出京, 入京이라고 쓰지는 않을 테고. 국경을 넘어선다는 의미일 거다. 한반도라곤

하지만 막상 대륙에 이어진 반도라고 느낄 수 있는 경험은 여지껏 없었던 게 사실이다. 단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았거나, 부산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거나. 그런데 이제 이렇게 땅을 밟으며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예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국경이 아니라 다른 말로 바꾸지 모. '대한민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영토의 경계를 넘는 경험.

남북출입사무소에 붙어있는 포스터. 흰색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고 머리를 야물게 빗어올린 북한 아가씨가

인상적이었다. 하나된 개성공단, 세계로 미래로라..사실 개성공단은 평소 내게 일종의 딜레마를 던지기도 했었다.

마치 절대빈곤선 부근에서 허덕이는 제3세계 아이들을 부려서 커피를 따게 한다거나, 낮은 임금을 주며 잡일을

시키는 상황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쉽게 판단이 안 서듯이 말이다. 개성공단 혹은 북한의 저임금 노동자를

'활용'해서 가격경쟁력을 부활시켜 한국의 부, 혹은 한국 기업들의 부를 축적한다는 건 일종의 윈-윈일 수도

있겠지만..이미 우리 사회의 노동자층이 정규직, 비정규직, 외국인노동자(이주노동자) 등으로 고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또하나 저임금노동자의 공급처로 전락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스럽기도 했다.

2층 오른켠에는 북한상품 판매소가 있고, 비매품으로 전시된 북측 도예가의 작품들과 수십년은 묵은 듯한 더덕,

상황버섯 등으로 빚은 술, 그리고 제1차 남북정상회담 기념 도자기가 놓여있었다. 한 차례 정상회담으로 뭔가

경천동지할 일이 급박하게 전개되리라고 기대치는 않았지만, 뭔가 많이 바뀌었다 싶으면서도 역시 또 뭔가가

허전하다. 당장 불과 작년에 있었던 제2차 정상회담은 그 시기와, 결과와, 의미 등에 있어 많은 논란이 있었음에도

결국 기억조차 희미하게 지워지고 말았다. 아직까지는.

예전에 어디에선가 북한술을 파는 걸 봤었을 때는, 고작 몇 종류 안 되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이런 두 줄짜리

진열대를 두 칸이나 차지한 채 늘어서 있다. 학교 앞 '그날이 오면' 서점에서 운영했던 '미네르바'였던가, 그 찻집서

한과와 함께 백두산 들쭉술을 마시면서 학회 세미나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술 참 맛있었던 거 같은데 뭐라도

한 병 살까 하다가 말았다.

이게 북한에 들어가기 위한 비자 역할을 하는 출입증이다. 눈길을 끌었던 건 파란 색으로 그려진 한반도 지도에도,

밑에 스탬프 모양으로 만들어진 엠블렘에도, 한반도 등허리 건너 편 동해바다에 점 두 개가 선명하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거의 비등한 사이즈로 그려져 있는 저 점 두 개.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한반도 그림을 그릴 때 저토록

선명하게 독도를 표기했던가 싶다.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독도를 저렇게 뻥튀기한 사이즈로까지

부각시켜서 그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또, 혹 남북간에 쓰이는 이런 출입증에만 쓰이는 거라면 괜히

못난 애비가 집안에서만 위세피우는 식인 건 아닌가 싶어서 의아하기도 하고.

출입증과 함께 받은 방북증명서를 보여주고 세관을 통과했다. 방북증명서는 주민등록증처럼 생긴 플라스틱카드로,

유효기간이 5년쯤 되는 복수 여권인 셈이다. 반면 출입증은 북한에서 돌아올 때 반납하게 되는 단수 비자인 셈.

수속을 마치고는 남북출입사무소 뒷쪽 문에서 차를 기다려야 한다. 차는 운전기사 한 명과 함께 별도의 수속을

밟고 이 곳에 와서 다시 일행들을 태우고 출발하게 되는 식이다.

개성, 이라는 표지가 선명한 뒷문어귀에서 한 할아버지가 고개를 떨구고 계신 모습을 보았다. 지난 세월에 닳고 또
 
다듬어져 표정조차 가늠키 힘든 얼굴을 떨구고 상념에 젖은 것처럼 보이셨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할아버지의 속내엔 무슨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을까.

이슬람교는 신의 외양을 흉내낸 것들에 주의가 기울여지는 순간 우상숭배로 빠질 수 있다면서 조각상이나 징표를

빌려 신을 기리는 걸 경계할 만큼 분별있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모스크에 가도 화려한 스태인드글라스나 장식,

조각상들은 보이지 않고, 다만 코란 말씀들을 적어넣은 아랍문자들이 그림처럼 장식되어 있을 뿐. 그런 맥락에서

모스크가 주변 건물들에 포위당한 듯 압도당한 그림이 나오는 건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다. 어쩜 크게 괘념치

않을지도 모르겠고, 아님 반대로 그렇게 독실하게 따르는 신의 처소 내지 전당을 압박하는 것에 버럭할지도.


보통 이렇게 띄엄띄엄 놓인 건물들 사이에서라면, 모스크가 아무리 작고 야트막해 보인다하더라도 하루 다섯번씩

독경 소리를 울려퍼뜨리며 기도시간을 알리는 미나렛이, 마치 물 밖으로 튀어나온 스노클링처럼 톡 튀어나와서는

모스크의 존재를 알리게 된다.

그렇지만 이미 한껏 높아져 버린 카타르 도심의 공사현장 틈바구니에서는 미나렛이 제아무리 쫑긋대봐야

잘 눈에 띄지도 않는다. 외려 저 괴물처럼 커다란 건물 꼭대기쯤에서 신에게 기도드릴 시간임을 알리는 게

더 웅장하고 그럴듯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작고 약해보이는 모스크가 금세라도 밀쳐질 거 같다.

이 건물은 뭔가...세계 몇 번째로 높네 어쩌네 말이 나오고 있을 거 같다. 아직 건물이 다 올라간 건지, 아님 미처

다 올리지 못하고 여전히 올리고 있는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주위에 크레인이 없는 걸로 봐서 이미 다

올릴 만큼 올린 걸까. 저 높이쯤임 만족하고 세계 몇 번째니 하는 섹시한 광고문구와 타이틀을 거머쥐는 건가.

근방의 건물들도 모두 공사중. 카타르 도하는 공사중. 이렇게 짧막하게 이야기해도 별로 무리가 없지 싶을 정도로

차암~ 여기저기서 공사중이다. 도심을 지나는 도로가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모를만큼 길을 중간중간 막아놓고

돌려놓으며,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사진으로 카타르의 열감과 열풍을 전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 저 분들이 얼마나 더울까..그래도 햇볕에 직접

닿지만 않으면 조금은 서늘한 기분마저 느낄 수 있기에 머리고 팔이고 온통 천으로 가려 놓은 듯 하다.

노가다 현장에서 몇 달 일을 해본 바로는, 일 자체가 고되다기 보다는 그 먼지날리고 위험한 작업환경이 더

고되었던 것 같다. 다만 드럼통에 목재들 넣고 모닥불을 쬐가며 작업해야 할 만큼 추운 날이라거나, 햇볕이 너무

뜨거워 오후 한시에서 세시정도까지는 아예 그늘을 찾아 쉬어버리는 날에는 날씨 그 자체도 무지 힘들었다.

여긴 어떨까. 7,80년대, 그리고 지금도 이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어떨까.

도심을 벗어나 시 외곽쪽으로 조금만 나서면 이렇게 여유있고 설렁설렁 공간을 쓰고 있는 건물들이 천지삐까리다.

삼각뿔 형태의 담장, 삼각뿔 형태의 건물 외관. 그리고 빨간 삼각뿔이 뒤집어진 형태의 못알아먹을 교통표지판.

도하에 면한 아라비아해의 파란 바다를 내려다보는 저 집들. 여긴 딱히 모래사장을 찾아 걷고 싶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바다 앞에 지어진 집들은 좋을 거 같다. 낚시도 하고, 보트도 타고..가끔 살짝 잊어버리곤 하는데, 사막

근처의 바다라고 해서 바다까지 사막처럼 황량한 건 아닐 거다. 이집트 여행때 휴양도시 다합에서도 느꼈었지만,

바다는 어디에서든 바다다. 온갖 빛깔의 어패류와 생명들이 가득한.

물론 마냥 황량하게만 보이는 사막도 사실은 조심조심 생명들을 품고 있다.

이건 뭘까. 카타르에서 이용해본 대중교통이라곤 택시가 전부여서, 저게 일반인들이 이용하는 버스라고 확실히

단언하진 못하겠다. 왠지 스쿨버스의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흔치 않게 강한 색을 가진 집이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살짝 흐끄무레한 색깔을 띄고 있거나 오랜시간 닳아버린

모랫빛깔을 닮아 있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색 자체가 강하진 않더라도 뭔가 선명하고 단호한 느낌의 건물이라

맘에 들었다.

펄 카타르에 지어질 건물을 광고하는 대형 포스터랄까. 펄 카타르가 다 완성이 되면 저렇게 되는구나..빨간 원색이

좀 많이 쓰이고 녹색 정원이 건물 사이의 공간을 꽉 메운.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색깔이 좀더 밝고 선명해지고,

녹색이 훨씬 많이 눈에 띄고.


'펄 카타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LUSAIL 신도시 건설현장을 찾았다. 호텔서 나서서 그곳까지

가는 길에 보이는 게 전부 모래먼지 풀풀 날리는 공사현장들이었다. 카타르 정부에선 새로 지어지는 건물들이

기존의 건물과 비슷하거나 평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 착공 허가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새로 지어지는 건물들이 전부 뭔가 특이하다. 살짝 비틀어놓은 듯한 외양이거나, 허리춤을 바싹 졸라맨

모습, 혹은 얼기설기 꺽어놓은 듯한 모습까지.

도로의 양쪽은 그다지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계속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심겨져 있는 비실비실한 나무

몇 그루가 그나마 황량한 경관을 조금 덜어주고 있었지만, 모랫빛의 토양, 모랫빛에 침식된 아스팔트, 그리고

모랫빛과 섞인 채 뿌연 하늘..저 뿌연 먼지가 사막에서 오는 건지 공사현장에서 오는 건지.

물론 모든 동네가 이런 건 아니다. 평균국민소득이 7만달러가 넘나드는 자원부국인지라, 그리고 그 부가 카타르

국적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집중된 나라인지라 잘 사는 사람은 엄청 잘 산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이 살지 않을까,

이렇게 베이지색 건물이 반듯하고 야자나무 가로수와 녹색 정원까지 잘 관리되고 있는 동네라면.

참,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가스세, 전기세, 수도세 같은 공공요금이 전부 무료라고 한다. 카타르 국적을

얻는 것은 출생이 아닌 한 불가능하다고 했던가..카타르 여성이 본국 남성이 아닌, 예컨대 미국 남성이라 해도 국제

결혼을 마다하는 것도 카타르 국적을 상실하는 것이 얼마나 큰 손실인지 알기 때문이라고.

카타르의 가정은 사람 수만큼 차를 굴리고 있다고 한다. 기름 값도 워낙 싸지만, 그만큼의 구매력이 된다는

뜻이겠다. 자연히 집 앞 주차공간이 많이 필요하게 되고, 마당이 넓거나 차고를 넓게 만들거나 한다고 했다.

그리고 역시나, 녹색 공간을 많이 확보하고 잘 관리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라고.

넓찍하게 공간을 쓰면서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단층 내지 복층짜리 건물들. 그리고 도로주변도 말끔하게 정비된 채

차들의 그림자들도 그리 짙지 않아서, 사진만 보고서야 여기가 한창 토목공사가 진행중인, 섭씨 삼사십도를 우습게

넘나드는 아랍지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지나가는데 가이드해주신 분이 불쑥 우측에 있는 건물이 카타르 왕의 공주가 사는 집이라며 잘 봐두라고 했다.

제법 달리는 버스 안에서 우측을 아무리 쳐다보아도 이런 담백한 모양의 담이 쭉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게

모두 공주집을 에워싸고 있는 담이라고 했다. 안이 어떻게 꾸며져 있을지 궁금했지만, 대충 녹색 정원이 건물들을

촘촘이 에워싸서 열을 식히고 있을 테고, 몇 채나 될법한 건물들은 모두 공주와 그 일가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봉사하는 시설과 사람들로 가득할 거다.

펄 카타르 공사현장에 가까이 접어드니 뭔가 더욱 본격적인 움직임들이 한창이다. 중동의 비버리힐스를 만들겠단

야심찬 계획이 실행되고 있으며, 4만명이 거주할 수 있는 규모의 고급 주거단지가 최종적으로 건설될 예정이라고.

앗..이렇게 찍고 본 사진은 왠지 다른 사이트에서 찾아본 펄 카타르의 조감도 중 일부랑 구도가 비슷하다. 아닌가..

2011년쯤 완공이라 했는데 그때쯤 다시 와서 완성된 모습을 보고 싶다.

현재 공사중인 펄카타르 프로젝트는 몇 개의 개발 구역으로 나뉘는데, LUSAIL 신도시는 펄카타르의 핵심인

인공섬 배후지역쯤 되나보다. 공사현장과 공사현장을 잇는 아스팔트 도로만 제대로 완성된 채 깔려있었는데,

그 길 모퉁이께 서있는 저 쌍둥이 빌딩의 뒤틀린 모습이란. 왠지 모르게 좌우로 삐뚝빼뚝 발을 움직여대는

다이아몬드 스텝을 밟는 모습이 연상됐다.

20세기 소년이란 만화에서 세계 멸망후 '친구력'을 새롭게 손꼽던 시대에서던가, '친구'가 장악한 세상과 기타

세상을 분리해놓은 국경선의 번듯한 외양을 가진 성이란 게 사실은, 요 앞의 하얗게 눈부신 장식품처럼 고작

합판 한장짜리 껍데기에 불과했던 거다. 아직은 공사중이라 저런 식의 카바가 필요했겠거니, 나중에 전부 완공되면

저런 식의 분칠 따위 없이 환상적인 도시를 내보이겠거니 믿어본다.

펄카타르라는 프로젝트의 신도시 건설 계획은, 두바이의 인공섬인 '팜아일랜드'에 자극받아 세워진 거라고 한다.

두바이가 야자수 모양의 섬을 만들었다면, 카타르는 진주 모양의 섬을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대체 어떻게 진주

모양이 되는 건지 몇장의 항공사진과 설명을 봐도 여전히 이해가 잘 안 되지만, 어쨌든 기름 세례를 받기 전

카타르는 진주잡이와 어업으로 먹고 살았던 나라라서 '펄 카타르'를 만든다고 한다.


그 펄, 진주 모양의 섬을 만들기 위해 인간이 원하는 대로 요기조기 바탕색을 채워넣어주는 바다.

저 멀리 보이는 괴물같은 크레인들의 실루엣, 그리고 지어지고 있는 건지 부서져 내린 건지 일순 알 수 없어져버린

저 바벨탑들. 그나마 바다가 이만큼 공간을 잡아먹어 황량함이 덜하다.

바다를 메워 섬을 만든 게 아니라, 어쩌면 사람들이 미처 돌아보지 못하고 안 챙기는 빈 공간들을 바다가 메워주고,

채워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건물은 멀찍이 정면을 볼 때랑 이렇게 옆구리를 돌아나가면서 볼 때랑 느낌이 꽤 다르다. 그럴듯 하겠다.

저 멀리 보이는 게 하얏트 호텔이라던가..특급 오성급 호텔과 쇼핑센터들을 즐비하게 늘어세우고 그앞에는

800여대의 보트를 정박시킬 수 있는 호화 선착장을 짓는다고 했다. 솔직히 무지하게 화려하고 호화스러울 거 같단

생각은 든다. 그리고 한 번쯤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

그런데 어쩌나...아스팔트 도로는 2011년쯤 완공되기 전에 다 닳아빠지겠다. 잔뜩 헐어버린 느낌의 페인트하며,

검은색이 회색으로 변해버릴듯 낡은 느낌의 아스팔트하며. 저 길쭉한 삼각형 모양들이 이어져 있는게 횡단보도.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 LUSAIL 신도시..의 모델 하우스랄까. 여태껏 달려온 광활한 공사현장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펄 카타르'의 조감도에나 나올 거 같은 파란 하늘에 말간 통유리창, 그리고 싱싱한 잔디밭정원.

입구에 들어서니 별 신기한 장식품이 천장에서부터 늘어뜨려져 있다. 동그란 판 형태의 바닥이 위아래로 슬슬

진동하면서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왜 나는 이걸 보면서 어린 시절 일요일마다 보았던 외화가 생각났을까.

'초자력 충전~' 어쩌구하면서 은빛 갑옷을 위풍당당하게 휘감고 달려나가던, 그 녀석들의 에너지 충전소가

저렇게 생겼던 거 같다.

우선 간단하게 펄 카타르, 그리고 LUSAIL 신도시 계획에 대한 브리핑, 이렇게 생긴 등에서 뿜어지는 은은한

조명만을 제한 채 마치 수면실처럼 어둑어둑해진 분위기의 브리핑룸에서 깜빡 잠들어버렸다.

LUSAIL 신도시의 모형. 이 아랫쪽으로 주로 휴양 및 위락시설이 갖춰질 펄카타르 인공섬이 조성될 테고, 신도시는

펄카타르와 연계되어 비즈니스 시티로 육성된다고 한다. 현재 도하에서 거주중인 인구수와 비슷한 2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도시를 만들겠다고 하니, 그리고 그 계획이 펄카타르 프로젝트의 한 부분일 뿐이라니..정말

그야말로 역사적인 대공사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설명을 듣다가 다시 건물 밖으로 나섰다. 멀찌감치 쌍둥이빌딩이 서 있고, 근처에는 앙상하게

이쑤시개처럼 보이는 크레인들이 도처에서 삐딱하게 박혀있는 느낌이다. 이 모델하우스가 잘 정비되어 있는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저 앞에 펼쳐진 공간이 정비된다면, 우선은 그 어마어마한 계획을 결국 실현시키고 만

능력(추진력은 물론 자금력까지)에 경의를 표할 용의는 있다. 그치만 왠지..뭔가 제대로 수요조사가 된 건지,

기름과 가스가 떨어지면 관광산업에 기대겠다는 방향은 맞는지, 방향이 맞다해도 이런 식으로 관광산업을

육성하려는 게 맞는 건지, 저렇게나 해안선을 뒤틀고 스카이라인을 잔뜩 치켜올려도 괜찮은 건지..좀 뭐랄까,

기가 질려 버렸다고 고백하는 게 맞을 거 같다.
뭔가 재밌는 게 없을까 눈에 불을 켜고 카타르 도하의 디플로머틱 클럽을 사방으로 쏘다니던 중 멋진 정원이

ㅁ자형 건물 한가운데 꾸며져 있는 걸 발견했다. 자그마한 다리도 보이고 나무들이 잘 가꿔진 게 얼핏 보기에도

꽤나 그럴듯해 보여서, 지나가는 직원에게 내가 들어가 봐도 될지 정중히 청하니 냉큼 문을 열어준다.

게다가 문을 잡고 기다려주기까지.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그의 과한 호의가 다소 민망할 정도였지만, 아무도

없는 그 공간을 혼자 거닐 수 있다는 생각에 민망함은 금세 지워버렸다.


나무에 달린 이름모를 하얀꽃들이 정원에서 희미한 별처럼 둥실 떠있었다. 저 주홍불빛 너머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스탠딩파티를 하고 있었던가. 아님 아직 카타르와 한국의 공연이 진행중이었던가.

인공으로 만들어진 동굴입구같은 조형물에, 그아래 흐르는 유유한 냇물이 아기자기하다. 밤이 되니 후끈한 열기도

어디론가 가버리고 선선한 느낌이었는데, 속삭이듯 졸졸거리는 물소리가 한결 시원함을 더했다.

하얀 산책로, 그리고 잘 관리된 잔디밭과 야자나무.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듯 아스라하던 소음이 살짝

잦아든 듯 하여, 잠시동안이나마 유유자적 산책하던 시간을 아쉬워하며 다시 정원문을 열고 들어서야 했다.

그리고 돌아온 라마다 플라자 호텔, 방 앞마다 붙어있는 방패 모양의 문패가 특징적이다. 그리고 천장에 종유석

커튼처럼 늘어뜨려진 모양의 장식도, 그에 반사되는 조명도 평범하진 않은 거 같다.

방을 함께 쓰는 일행이 씻는 동안, 우선 차나 한잔하며 잠시 쉴까 했다. 그런데 저 커피 포트 너머에 무언가가

내 눈에 자꾸 거슬린다. 뭐지? 이미 난 디플로머틱 클럽 안의 그럴듯한 인테리어와 훨씬 더 멋진 정원을 보고 온

터라, 잔뜩 지저분해지고 잔뜩 헝클어진 방 꼬락서니가 살짝 맘에 거슬리는 상태였다.

어라. 이건..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에 있는 알카바 위치를 나타낸 표식이다. 하루에 다섯 번씩, 전세계 오억명에

달하는 이슬람 교도들이 절하는 방향이 바로 이 메카 방향, 정확하게는 메카 내의 신성지역인 알카바 신전이다.

메카로는 사우디 내부에 있는 사람들도 관광이 금지되어 있다는 게 사우디에서 줏어들었던 토막 상식이었는데,

아마 사우디에서 머물렀던 호텔에도 분명 이런 표식이 있었을 텐데 그땐 미처 발견치 못했나보다. 


이 스티커 표식은 몇 번씩 겹쳐져 붙여진 듯 하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호텔 측에서 객실 내 소품들 위치를 조금

바꾼다거나 교체한다거나 할 때마다 다시 신경써서 방향을 잡아준 듯. 무척이나 신기해서, 마시려고 했던 커피

따위나 지저분하게 쓰고는 스스로 화가 나버린 방 따위 잊어버리고 한참이나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북쪽을 가리키는 게 일반적인 나침반이라면, 이건 어디서고 메카를 가리키고자 하는 무슬림들의 나침반인 게다.

그리고 바로 옆으로 옮겨진 시선, 사우디와는 달리 카타르는 돼지코 모양의 콘센트가 들어가질 않는다. 삼발식

형태의 콘센트가 필요해서, 미리 챙겨왔던 '거의 모든 나라에서 통하는' 국제 콘센트를 꼽고 그 위에 노트북이나

기타 전자기기를 연결해야 했다.

다시 시선을 조금 아래로. 약간 일하다 말고 문득 놀라서 찍은 사진이다. 얼마 일하지 않았는데 무슨 쓰레기가

저리도 많이 나왔는지. 카타르 현지 신문에 우리 행사들이 나왔는지를 확인해 보고 다 본 신문은 저렇게 구겨서

버리기도 했고, 다음 날 일정을 안내하기 위한 안내문을 만들고 행사 실적을 정리하는 와중에 나오기도 했고,

이미 지난 일정에 대한 자료들은 모두 그때그때 찢어서 버리기도 했고, 이래저래 맥주거품처럼 쓰레기통에서

흘러넘치는 쓰레기들.

그리고 방 안. 디플로머틱 클럽의 잘 정리되고 깔끔하게 다듬어진 정원이나 내부 인테리어의 세계와는 영 딴판인,

일하기에 최적화된 돼지우리다. 에효...사실은 일하는데 최적화된 환경을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니고(당연하지만ㅋ),

그냥 일하다 보니 저렇게 자연균형상태를 찾았달까.

청소를 깔끔하게 해주시고 주름 하나 없이 쫙 펼쳐주었을 이불보 위에는 사람 자국부터 남아야 하는데, 온갖

서류 뭉텡이들과 가방, 여권, 호텔 키 나부랭이들만 엎어져 있다.

그 와중에도 어지럽혀지지 않고 깔끔하게 사수되고 있는 공간은 역시, 노트북 인근 지역. 휴대용 프린터와 마우스,

USB까지 꼽혀있으면 마음이 든든하다.

카타르에서 내가 들고 다녔던 현지 휴대폰, NOKIA에서 만들어진 폰이었는데 정말 심플한 디자인에 기능도 심플,

전화, 문자 외에 별다른 기능이 없었다. 카타르에서 전화는 일정액을 충전하는 방식으로 쓰는 가 보았다. 심카드를

쓴다고도 했는데, 그런 기계 쪽에는 전혀 약한지라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었을 뿐이고, 3일간의 일정동안

충분히 쓸 만큼 충전해놨다는 이야기에 역시,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다.

이 핸드폰은, 정말 무지 간단한 기능들 만큼이나 간단하게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저 문자판이 아예 분리되어 버렸었는데 알고 보니 말랑말랑 고무판이다. 다시 끼고 버튼을 시험삼아 눌러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길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사실 잡다구레한 기능이 껴들어가지 않은 바에야 별로 고장날

구석이 애초부터 없는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랍어로 문자를 작성해 보았는데, 글자가 역시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씌여지는 게 참 신기했지만 뭔말을 쓰고 있는지는 나도 모르고.

다음날 아침, 호텔 창밖으로 내다보인 도하의 거리 풍경. 불쑥 솟아있는 뿔들은 모스크의 미나렛들이다. 저기서

하루에 다섯 번씩 종을 치면 사람들은 기도를 한다.

비슷한 높이의 비슷비슷한 모습의 집들이 비슷비슷비슷하게 열을 맞춰 늘어서 있는 게 신기하다.
만찬장으로 마련된 곳은 카타르 도하의 외교 클럽(Diplomatic Club), 한국-아랍간의 우호 친선을 증진하자는

행사의 일환으로 벌어지는 기념식 및 만찬은 나름 볼만한 프로그램들로 짜여져 있었다. 한국과 아랍의 기자들이

저마다 무대를 촬영하기 좋은 포스트를 선점하려고 바글바글대는 행사장 안 전경. 디플로머틱 클럽 내부의

아랍스러운 인테리어도 눈을 끌었지만, 무엇보다 내 앞에 앉아 있던 이 아저씨의 저 화려한 머릿수건 매무새가

한동안 눈에 꽉 차들어왔다.

물론 저 카메라들이 이 사람을 향한 건 아니었고,

한국-아랍소사이어티 회장님이라거나, 카타르의 최고 정치지도자의 얼굴과 말들을 찍어내기 위해서였을 거다. 

공연은 카타르의 전통 음악과 함께 시작했다. 단조롭고 묵직한 북소리가 조금씩 욱일승천하더니 어느순간 천지를

두드리는 천둥소리처럼 울려퍼지고, 좌우에 시립한 사람들은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명확치 않은 허밍을

읊조리고 있었다. 왠지 사막의 거칠고 황량한 질감이 떠오르는 노랫소리, 그리고 멜로디없이 리듬만 타고 도는

털복숭이 아저씨들의 은근한 움직임.

가운데 빨간 머릿수건 아저씨가 대장인 듯, 북을 저렇게 받쳐들고 치기도 하고,

저렇게 제자리에서 뱅글 돌며 북을 머리위아래로 올렸다 내렸다 하기도 하고.

채를 빙빙 돌리다가 한번씩 박자를 쪼개며 들어가기도 하는 저 빨간 머릿수건 아저씨의 재치있는 손놀림을 보고

있노라니 어딘가 사물놀이랑 통하는 데가 적지 않다 싶었다.

다음은 카타르의 비보이 공연. 카타르에도 비보이가 있다니, 하면서 깜짝 놀라면서 봤는데 생각보다 잘 했다.

아랍 문화, 혹은 유교 문화..이런 식으로 나뉠법한 '꼰대들의 전통 문화'와는 거리가 많이 멀어보이는 패션감각과

발랄하고 유연한 몸놀림을 보면서, 저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카타르도 많이 변하겠구나 싶었다.

네ㅇㅇ나 다ㅇ 등의 검색엔진에서 "카타르 비보이"같은 검색어를 치면 이날의 행사에 대한 스트레이트성 기사와

기자들의 소감문이 몇몇 눈에 띈다. 카타르 비보이들은 상대적으로 간단한 동작을 많이 했다는 평도 어디선가

보았는데, 글쎄..물론 이 담에 나온 한국 비보이 '묘성(妙聲)'의 퍼포먼스가 워낙 대단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닥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카타르 측 공연 시간이 한국 측보다 턱없이 짧아서 전반적으로 한국의 공연이 지배한 듯한 분위기를 준 것은

좀 적절치 않았다는 느낌이었다. 한국이 보여줄 게 많았다거나, 혹은 카타르의 전통 공연이라는 게 아직 그만큼

발굴되고 육성되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살짝 지나가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날 카타르 비보이로 소개된 사람들이 사실은 이집트의 비보이라나 뭐라나, 그런 말도 있었다.

행사 중간에 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꼬마 여자아이가 꽃다발을 들고 무대 옆에서 중앙으로 다가가는 걸 보았다.

쟨 또 뭔가, 싶어서 잠시 무대에서 시선을 돌려 지켜보고 있자니, 어른들의 손에 등떼밀린 그 아이는 카타르 왕자와

그 일행들이 있는 쪽으로 가서 쭈뼛쭈뼛 꽃다발을 건네고 낼름 돌아와버렸다.

세 번째로 시작한 사물놀이. 무대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고 행사장 자체도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꽹과리의 날카로운 쇳소리는 공간을 꽉 채운 채 사방으로 삐쭉대며 날아가 박힌다. 게다가 북의 울림은

카타르의 전통 북보다 깊고 울림이 큰 소리를 내면서 그 까칠한 꽹과리 소리를 부드럽게 위무하고 있다.

카타르 사람들이 무지 신기해하며 사진 찍으려고 난리였다. 내가 카타르 전통 공연을 볼 때 사진 좀 찍어보겠다고

무대 앞섶까지 비집고 들어서려 애썼던 것처럼, 이 사람들도 상고모자와 사물놀이가 신기한 게다.

그치만 또 달리 생각하면, 나 역시 카타르까지 와서 사물놀이를 보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인데다가, 사물놀이를

본 것도 기실 수년이나 지난 일이다. 내가 갖고 있는 '사물놀이'의 이미지는 정선같은 지방 소도시 오일장쯤에서

어정쩡하게 나타났다 뻘쭘하게 사라지는 노친네들의 가장행렬같은 거였거나, 혹은 잠깐 바라보다 '저기 사물놀이

하는구나' 이러고 지나쳐 버리는 그런 초점 나간 사진같은 거였는지도 모른다. 아마 카타르 전통 공연을 봤던

이들 역시 그렇지 않을까. 지겹고 식상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막상 제대로 '감상'이란 걸 해본 적이 있는지

되돌아본다면 별로 뚜렷한 이미지도, 기억도 없는 그런 거. '아지랑이'라는 단어를 진부하게 쓰고는 있지만

막상 '아지랑이'란 걸 제대로 본 적은 엄청 옛일이거나, 혹은 제대로 보기나 했었는지 의심스러운 것처럼.

그리고 드디어 한국 비보이들의 공연. 우리나라 비보이들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들 하던데, 이날 왔던 '묘성'이란

비보이들도 아마 그런 정도 경지에 오른 팀이 아닐까 싶었다. 시종 파워풀하면서도 절도있고 섬세한 동작으로

비보잉 댄스 자체를 한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카타르 사람들은 물론, 보고 있던 한국 사람들도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메라를 가진 사람은 모두 무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겠다고 이리저리 버르적거렸고, 자리에 점잖게 앉아있던 나이드신 분들도 일어서서 고개를

잔뜩 늘여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묘성(妙聲)'이라는 이름답게 이들은 빠르고 비트강한 음악에 맞춘 퍼포먼스만 벌이는 게 아니라, 아리랑 같은

추욱 늘어지는 노래에도 마치 현대무용을 하듯 느릿하면서도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찬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무대에 누워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다가는 어느순간 섬세하게 감싸고 올리면서 재빠르게 솟구친다거나,

쉼없이 스핀하면서 곡조의 완급에 맞춰 속도를 조절하고 몸의 양감을 키우고 줄이는..'Dynamic Korea' 광고에

맞추어 형상화한 역동적이고 강한 느낌의 퍼포먼스는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그 광고 자체에 대한 호오를 떠나서.

마지막으로 한국과 카타르의 공연자들이 모두 무대에 올랐다. 박제화된 감이 없잖은 '전통문화'에 갇힌 한국과

카타르 각각의 무대가 아니라, 그런 전통과 역사를 빌어 지금 이시간 이곳에서 만난 젊은이들이 땀과 눈빛으로

호흡을 맞추는 하나의 무대.

카타르에서의 숙소는 라마다 플라자(Ramada Plaza), 사우디 호텔에서 미처 찍지 못하고 놓쳤던, 그래서 무척이나

아쉬웠던 사진부터 후딱 찍었다. 이 곳 역시 화장실 풍경이 사우디랑 똑같앴던 것. 욕조와 좌변기 사이에 놓인

저것의 정체는..뭘까. 나중에 알고 보니 비데란다. 그치만 그렇게 알고 나서도 저걸 어떤 자세로 쓸지, 그리고

대체 어디에 쓰는 건지, 게다가 왜 저렇게 따로 만들어져 있는지..좀체 이해가 쉽지 않다.

카타르에서 만난 비즈니스맨들은, '비즈니스퍼즌'이란 젠더중립적인 단어가 이미 넓게 쓰이고 있는 세상임을

새삼스레 의식시켰다. 이전 사우디에서 만났던 한량 복장의 남성 일색의 상담회장이 아니라 히잡도 안 쓴 이런

당당한 여성기업인이 더러 눈에 띄었던 거다. 물론 이곳에서도 비슷하게 한량스런 전통 복장을 한 턱수염 복실한

아랍 아저씨들이 압도적으로 많기야 했지만, 저 여성이나 다른 여성들도 그저 유럽 어디메쯤의 아줌마 같은

느낌으로 충만해 있는 '비즈니스퍼즌', 혹은 당당한 '여성CEO'.

행사장이 있는 호텔 안을 종종걸음치다 발견한 구두닦는 이를 위한 의자. 저 높은 의자에 올라앉으면 구두닦는

아저씨가 양 발을 번갈아 올려가며 구두를 닦기 시작한다. 우아한 주름이 줄줄 흘러내리는 전통의상을 입은 남자가

올라앉아 왠지 중세시대 하인 복장을 떠올리게 하는 호텔 구두닦이에게 척하니 발을 맡기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사실은 아랍 전통의상을 입은 남성은 모두 맨발에 슬리퍼나 샌들을 신고 있다. 대부분 닥스니

루이비통이니 하는 명품 슬리퍼. 해서..그런 적나라한 그림을 볼 수는 없었다는.

호텔 정문에는 역시 금속 탐지기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사우디보다는 훨씬 작은 사이즈의 탐지기였다는 점,

그리고 호텔 경비원들의 인상이 훨씬 부드러웠다는 점 이외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풍경이었다. 그렇지만 잔뜩

귀찮아하며 이러저런 서류뭉치와 가방, 카메라, 카타르 현지에서 쓰던 핸드폰 등을 여섯번째쯤 탈탈 털어놓고

맨몸뚱이로 금속탐지기를 통과하려던 내게 빙긋 웃어보이며 그냥 가라고 손짓해 줄 만큼의 여유가 있다는 건 역시

엄청나게 큰 차이를 불러일으킨다. 카타르, 우호도 5점 상승↑.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는 라마다 플라자 호텔의 위용. 그리고 그 앞에 꼬리물고 늘어선 황금색 고급차들의 행렬.

하루종일 예정된 상담회가 중반으로 치달으면서 점점 몸이 뒤틀린 나는, 살짝 자리를 벗어나 바람을 쐬러 나온

참이었다. 밤 두시정도까지 일하다가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는 일정이 반복되면서 구두가 꾸덕꾸덕해져 있었다.

발은 언젠가 목욕탕 열수탕에서 깜빡 잠들어 세네시간동안 푸욱 삶아졌을 때처럼 팅팅 불어있었지만, 살짝

벗은 발로 허공을 휘휘 저어봐도 바람기운이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늘 하나 만들어지지 않는 뜨거운 태양

아래, 조그만 미동조차 없이 굳어버린 듯한 대기.

호텔 한 켠에는 높은 분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북한에 김일성, 김정일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얼마전까지 박정희니 이승만이니 사진을 걸어놨던 것처럼, 그리고 사우디에서 초대왕과 선왕, 현재 국왕의 사진을

삼위일체로 걸어놓는 것처럼. 표정도 얼추 비슷하다. 무척이나 현명해보이고 부드럽다 못해 자비로워보이기까지

하려는 눈매에..그렇지만 왠지 느껴지는 삼엄하고 강단진 기운. 혹자는 카리스마라 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부려짐'보다는 '부림'에 훨씬 익숙한 데서 비롯한 체취같은 거 아닐까.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로 충만한 거야

더 말할 것도 없고.

아랍에서 손님을 맞는 전통적인 방식은 저런 곳에서 느긋하게 뒤로 누워앉아서는,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이라고 한다. 나도 잠시 앉아 봤지만 뭐랄까, 사람을 무척추동물처럼 만드는 자리같았다. 아무리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 보려해도 영 어색하고 불편해서 스스로 타협하게 만든다. 조금만 뒤로 기대 볼까.

그렇게 조금씩 엉덩이는 앞으로 쭈욱 미끄러져내리기 시작하고, 아예 온몸이 흘러내리겠다 싶은 순간 자연스레

양팔을 걸침으로써 그 효용을 다하는 팔걸이=몸걸이. 무지하게 편해서 한번 눌러앉으면 일어나기가 싫어지는

마력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호텔 로비에 떡하니 버티고 한번 맛이나 봐라~ 라고 있는 거 같다. 왜 그 난로와 이불과 테이블이

붙어있는 일본의 코타츠..던가, 내가 꿈꾸는 겨울나기 MUST HAVE 아이템인 그것보다는 못할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나름 이것도 사람을 마비시킬 만큼의 중독성은 있는 듯 하다.

그 곳에 앉아 바라본 호텔 인테리어. 어쩌면, 내가 좀더 여유롭고, 이게 좀더 폐쇄적이고 사적인 공간에 놓여

있었다면, 아마 하루종일 딩굴댔을 거라 생각했다.

어느덧 이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숨 돌리러 다시 나온 호텔 창밖 풍경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태양은 조금씩 이지러지면서 건물 뒤로 숨고 있었고, 한낮엔 내 발을 쌩까던 바람도 어디선가부터 불어오고

있었다. 왠지 순식간에 가버린 하루, 그 느낌만큼이나 순식간에 저물어버리는 태양.

부드러운 살구색 빛살이 풀어져내리는 하늘 아래서 구두는 꾸덕꾸덕하고...

햇님은 번데기처럼 몸을 뒤틀며 쉬러가는데 난 아직도 오늘의 일정이 절반 가까이 남았고...

카타르 도하를 달구던 태양은 이제 불이 나가버렸다.

상담회장을 정리하고 우선 방으로 짐들을 올려두러 가는 길, 금세 나와서 만찬 행사장에 가야 한다.

호텔이야 어느 나라건 은은하다못해 침침한 조명에 다소 응큼한 분위기가 있다지만, 이날따라 침침했던 조명.

따카타르 도하에는 VIllaggio라는 쇼핑몰이 유명하다고 한다. 저녁 시간을 이용해 잠시 호텔을 벗어나 택시를 탔다.

짙게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도 드문드문 조명이 몇 개 건물을 둥실하게 떠올렸다. 모스크의 단정한 흰색 미나렛이

택시 차창에 바싹 달라붙은 내 눈에 포착.

난...빌라지오, Villaggio는 도하의 시내 중심가에 있는 커다란 쇼핑몰이란 것만 알고 왔을 뿐이고, 심지어는

그 철자조차 제대로 몰랐어서 간판부터 한 장 찍어놓을랬더니 또다시 경비원이 막아섰을 뿐이고..

거대한 단층짜리 쇼핑몰이었다. 출구도 사방팔방으로 나 있어서 애초 들어왔던 출구를 찾기도 쉽지 않다는 이곳은,

천장이 워낙 높아서 실내의 매장들이 2층짜리 건물처럼 외양을 꾸며놓았다. 그리고 높은 천장에 그려진 하늘빛의

말간 하늘. 스타벅스 매장도 보이고, 한국에서 쉽게 보지 못한 유럽 브랜드가 많이 보인다. 파리 샹들리제 거리에서

들러 향수를 폭폭 뿌리고 다시 나섰던 SEPHORA 간판도 뒤에 보이고, PAUL같은 베이커리점도 너무 반가웠다.

한국의 코엑스 쇼핑몰과 비슷하지만, 지하에 위치해 있고 천장이 낮아 다소 답답한 느낌이 드는 그곳과는 달리

하늘이 그려진 높은 천장, 그리고 유럽의 거리 한 블럭을 고대로 떼어온 듯한 매장들의 외장이 훨씬 우아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런 휴식공간도 뭔가 좀더 아늑한 느낌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코엑스몰보다 훨씬 적어서 유유히

돌아볼 수 있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중 하나. 이제 흰옷을 펄럭이며 머릿수건을 흩날리는 아랍 남성과

검은 옷으로 둘둘 감은 채 보석같은 두눈만 반짝이는 아랍 여성을 보는 데에는 살짝 익숙해지고 있었으니 그건

빼고라도.

아랍 브랜드도 꽤나 많이 입점해 있었지만, 그 와중에 한국 브랜드가 하나 보였다. 다른 곳들에 비해 너무 심심한

외양에 살짝 실망하고 바로 스킵. 한국 브랜드건 외국 브랜드건 뭔가 발걸음을 끌어야 들어가서 구경을 하지, 이

먼 만리타향까지 나와서 눈에 딱 띄이지도 않고 국내와도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국내 브랜드점을 구경하는 데

쓸 시간은 없다.

중간중간 카타르의 민속공예품, 기념품들을 파는 샵이 있었다. 이곳도 한국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싶은 거는,

그런 류의 특산 기념품들이 어딜 가나 비슷비슷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었단 점. 물 담배와 파이프, 단검모양

장식품과 보석류, 그리고 약간의 인형류와 냉장고 자석..그리고 이미 이집트나 사우디의 기념품점들을 구경해 본

나로서는 그 나라들에서 팔던 기념품들 간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내 보는 눈이 미욱해서인지, 아님 내가 그런 곳만

갔던 건지는 모르겠으되, 아랍권의 토산품들은 보이지만 개별 국가들의 특산품은 안 보인달까. 조금만 생각을

펼쳐보면 애초 아랍 문화권으로 엉성하게 묶이던 지역을 이리저리 개별 '영토'로 구획하고 절개한 '근대국가'로서

정체성 찾기와 역사 재구성의 과정이 일천해서일지도...그렇담 우리 나라는 '한국'이라는 국가브랜드 아래 개별

지역의 정체성을 아직 못 찾고 있어서 그런건가. '한국인'의 외피 아래 숨어있는 탐라인들, 경주인들, 부여인들의

정체성과 지역사를 살려내는 게 지갑을 열고 싶게 만드는 기념품들을 만드는 첩경일지도 모르겠다.

빌라지오가 유명한 이유 중의 하나는, 가운데에 자그마한 십자 형태, 거의 일자 형태의 수로가 있고 거기에 마치

베네치아 쯤에서나 볼 법한 곤돌라가 떠 다니고 있어서라고 한다. 그 수로 한쪽 끝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버렸다.

작은 광장같은 느낌으로 둥그렇게 트인 공간에, 저렇게 선착장이 있고 가족들이 배를 기다렸다가 타고, 내리고

하는 거다. 이쯤 되니 점점 이곳이 아랍 지역인지, 아님 유럽의 어느 쇼핑몰인건지 조금씩 헷갈리기 시작한다.

가까이 가서 살펴본 곤돌라는 다소..짝퉁의 느낌이 강하다. 롯데월드 어드벤처에서 봤던 거 같은 조악한 플라스틱

껍데기가 씌워진 배하며, 저 쌩 알루미늄 삘로 충만한 노하며. 그나마 붉은 가죽을 쓴 듯한 의자가 좀 쌈빡하지만

왠지 '레쟈'같다. 좀 통나무를 깍아만든 클래식한 느낌의 배였다면, 그리고 좀 손때가 묻어나는 노하였다면 훨씬

좋았을 거 같은데 아쉽다. 그리고 이곳이 카타르를 비롯한 아랍지역 갑부들이 와서 돈쓰며 놀다간다는 그런 유명한

쇼핑몰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치만 그렇게 너무 가까이 들이대서 꼬투리 잡으려 눈에 불을 켜지만 않는다면, 이 곳은 정말 꽤나 괜찮다. 이

운치있는 가로등하며, 수로 주위를 둘러친 울타리도 그렇고..바닥의 포석도 무신경한 듯 시크한 비닐장판 따위가

아니라 벽돌을 직접 깔아놓은 것 같다.

물이 새파란 거야 바닥에 파란 색을 칠해 놨으니 그렇다고 쳐도, 저 이층에 있는 커피숍에서 아래를 떠다니는

곤돌라과 주변의 운치있는 건물모양 매장들을 보며 차 한잔 정도는 하는 것도 꽤 괜찮지 싶다.

이런 자그마한 다리도 있었다. 귀여워귀여워..ㅜ 모든 작은 것들이 귀여운 것처럼, 이 다리도 수로도, 자그맣게

축소된 것들이라 더 이뿐 거 같기도 하다. 그치만 또 어떻게 보면 장난스럽다 싶기도 하고.

한 곳에는 저런 공연장도 있고, 지금은 뭔가 공사중인 듯 하다. 구역마다 약간씩 분위기가 다르고, 컨셉도 살짝

다른 게, 건물들의 외관이나 천장의 그림이 달라졌다.

연붉은 색으로 노을진 하늘 아래 반짝이는 곤돌라. 여기가 수로의 다른 쪽 끝이다. 걸어온 거리를 보니 꽤나

길었던 거 같다. 막 곤돌라에 탑승하는 아랍인 부녀..인 듯 하다.

옷에 붙어있는 택을 가만히 보니까, 아랍에미레이트, 바레인,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등 다섯 국가의 화폐 단위로

금액이 붙어있다. 이 나라들에서 온 사람들이 주된 고객이란 뜻이겠지.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이 여기를 굳이 올

리는 없으니, 역시 내 생각대로 아랍 지역의 부유층이 유럽 분위기를 느끼며 쇼핑을 하고 싶을 때 여기에 오는 거

같다. 자그마한 형태로 축소된 유럽식 테마파크.

심증이 굳어지니 여기저기서 보이는 것들이 모두 그 심증을 굳히는 단서들로 보인다. 쇼핑몰 한 귀퉁이에서 마치

BGM처럼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는 저들은, 파리 지하철역에서 그토록 쉽게 보이던 악사들을 따라한 거 같고,

유럽 분위기를 내려고 '알바'를 고용해서 쓰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우르르 나타난 한 무리의 '있어보이는 사람들'. 유한계층의 표징처럼 느껴지는 저 하이얀 옷을

나빌레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포스와 기품이...왕과 가까운 사람들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또 보이는 검은 옷의 여인들. 여기는 사우디랑 달리 여성들끼리도 자유롭게 거리를 나서고, 옷차림도

그렇게 까탈스럽지는 않은 것 같다. 쇼핑몰이어서 그런걸까 아니면 카타르 자체가 훨씬 개방적인 분위기여서일까.

가만히 저 검정색 장옷도 보다보니까 여기저기 멋을 낼만한 구석이 있었다. 소매 끝에 자수를 화려하게 넣는다거나

천의 재질 자체를 고급스런 광택이나 텍스타일이 느껴지도록 한다거나.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한국산 천이 가장

고급 소재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그 천 자체에서 미감을 예민하게 느끼기 때문에, 딱 보기만

해도 어디 천인지, 고급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시간이 훌쩍 지나고, 갑작스런 호출 때문에 부랴부랴 호텔로 돌아나서는 길. 빌라지오 앞에 주차장에 즐비하게

늘어선 고급차들을 지나쳐 택시를 잡아탔다.
메리어트 리야드 호텔에서 짐을 싸고 공항으로 가기 직전, 이번 출장을 위해 산 가방을 잠시 주목. 무려 29인치짜리

거대한 가방, 시중에서 파는 가방 중에 가장 큰 사이즈이고, 3년간 무상수리가 보장된 가방이다. 애초 사무실에선

출장을 자주 다니다보면 가방이 마구 다뤄지기 때문에 바퀴나 손잡이가 파손되기 쉽다고 하면서 '샘소나마이트'표

가방을 강추했지만, 사실 제품보장이나 사후서비스가 철저한 브랜드, 그리고 딴딴한 품질은 꼭 그것만 있는 시대는

이미 아닌 거 같다. 사이즈로 말하자면, 출장 갈 일이 아니라면...글쎄, 나중에 이민이나 가면 모를까 나 혼자 여행

다닐 때에는 좀체 쓸 일이 없을 거 같은 가방이다. 가뜩이나 나는 짐을 가볍게 하고 다니는 걸 중요시하는 편이다.

사우디에 처음 들어와서 공항서 호텔까지 가면서, 앞서고 뒷서는 차들의 번호판을 보면서 오랜만에 아랍어 숫자

공부를 다시 했다. 이집트 여행다니면서 이미 한번 완전히 익숙해졌었던 체계라서 금세 1부터 0까지의 숫자를

식별해 낼 수 있었다. 다시 리야드 공항으로 가는 길, 이제 다시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번호판들과 교통표지판들의

숫자를 읽으면서 느낄만한 잔재미까지 지워져 버리지는 않았다. 더구나 저런 산만한 치장을 하고 달리는 차라면

내 시선을 붙잡기에 부족함이 없달까.

*참고삼아, 아랍의 숫자체계를 보여줄 그림 두개를 퍼왔다. 내가 미처 챙기지 못한 이런 사진까지 찍어놓으신 분께

감사합니다~*

사우디 공항에 들어서서 보니, 처음 사우디에 도착했을 때처럼 포도송이 눌린 듯한 모냥새의 공항 건물이 왠지

반갑다. 사우디의 맛만 보고 간다기도 뭐한 며칠간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이제 내 머릿속에다가 사우디란

나라를 단단히 박아넣은 느낌이다. 몇몇 사람들의 웃음어린 얼굴과 혹은 모래처럼 부석하게 표정이 말라붙은 얼굴,

그런 것들과 함께 성황을 이뤘던 상담회까지.

티켓팅을 하고 공항 로비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며 쉬었다. 울룩불룩한 천장의 틈새에서 삼각형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뿌여스름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자연채광이라 산뜻한 느낌. 베이지색의 안온한 기둥과 더 엷은

베이지색의 천장 무늬도 차분하다.

까페에 앉아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다. 인적이 어찌나 드문지 공항서

일하는 사람들이 공항을 이용하는 사람들보다 많아보일 지경이다.

공항 벽면에 그려진 '아랍스러운'  문양. 모스크 사방에 저런 글씨랄까, 그림이랄까, 크게 그려져서 걸려 있는 것도

보았었지만..그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모양 자체로도 충분히 인상적이다.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어떻게

그려지는 건지, 하다못해 글씨인지 그림인지부터 분간도 못하고 있으면서도.

다음 행선지는 카타르. 카타르까지는 사우디아라비아 항공을 타고 가게 되었다. 그런데 받아들고 보니 이 티켓이란

게 얼마나 엉성한지, 예전에 쓰이던 얇은 팩스용지같은 데다가 타자로 찍어낸 것 같은 글씨의 인쇄상태라니.

어쨌든 보기도 힘든 사우디아라비아항공, 사우디의 국적기를 탄다는 사실은 은근히 설레는 것이었다.

스튜어디스(flight-attendant라는 단어가 보다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가 서빙을 하고 있을지, 비행기 내에서 주류

제공이 가능할지 등등.

리야드에서 카타르 도하까지는 고작 1시간 20분의 비행. 조그마한 비행기 안에서 스튜어드가 비상탈출 방법을

열심히 알려주었다. 대체 저런 교육을 받으면 지상 수천미터 상공의 비행기에서 무사히, 혹은 죽지 않고 탈출할

수 있을지 회의스럽기 짝이 없지만..그래도 들어두면 나중에 능숙하게 써먹을 일이 있겠지, 하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듣게 된다. 음음..산소마스크는 여기에 있고, 구명조끼는 이걸 땡기면 순식간에 부풀어오르는구나. 비상구는

저쪽에 있으니 비행기가 위태롭다 싶음 초연하게 훌쩍 뛰어내리면 되겠고. 어, 앞에 신문만 보고 있는 아저씨들,

아저씨들도 좀 배워둬야 하지 않겠어요? 나이들면 모든 것에 초연해진다.

이런 높이에서 날고 있단 말이다. 아무리 비행기의 떨림이나 좌우 롤링이 마치 비포장도로를 내닫는 4WD 자동차의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질 뿐이라 해도, 엄연히 여긴 하늘 위 세상이다. 발 딛을 곳 하나 없이, 날개도 없는 동물이

고작 저 얄포름한 날개 한짝 믿고 신문이나 펼쳐 보고 있거나, 심지어는 잠이 들어버린다니. 가만보면 저 날개란

것도 웨이브하듯이 진동이 끝에서부터 타고 들어오는 게 보일 때가 있다. 아기코끼리 점보의 커다란 귀가

펄럭펄럭하듯이 말이다.

좌석 앞에 놓인 멀미봉투와 비행기 안전소개 팜플렛. 저 요상한 폰트의 한국어가 시선을 확 잡아챘다. 아랍어,

영어, 불어, 독일어, 한국어...정도 밖에 알아보지를 못하겠다. 은근히 외국인들이 많이 타나부다..그리고 한국인도

많이 타나부다..하고 감탄해버렸다.

기내식은, 최악이었다. 이렇게 맛없는 건 처음 먹어봤지 싶을 정도. 물론 기내식 자체가 별로 기대할 만한 밥은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푸석푸석한 닭고기가 밥속에 숨겨진 저 노란 밥도 그렇고, 바싹 마른 빵위에 느끼하기만

한 초콜렛판이 이미 분리된 채 따로 노는 저 조각케잌, 그리고 빵이라기엔 뭔가가 부족한 느낌의 저 밀가루반죽

부풀어올린 것까지. 그레이프후르트와 오렌지가 나온 과일만 먹고 식판을 물리고 말았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항공에는 여성승무원이 있다. 빵을 나눠주고 밥을 나눠주시는 분, 후덕하신 웃음과 함께

나눠주셨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사우디 국내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마 사우디 내

여성들의 지위에 대한 변화의 조짐이 아닐까 싶다. 걸치고 계신 게 제복인 듯 한데 무지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알 파이잘리야 타워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사우디를 떠나기 전 최후의 만찬, 비록 며칠 안 있었다지만.

메리어트 리야드 호텔에서 멀리 어슴푸레 윤곽만 보이던 걸 아쉬워하던 그 뾰족한 뿔같은 유선형의 건물이다.

대체 애초에 뭘 형상화하고 싶었던 걸까, 건물에 조금씩 접근하면서도 계속 궁금했다. 단도? 칼날? 창? 아님...

죽순? 뭔가 봉긋 튀어나오고 날카로운 느낌이 강한 사각뿔 형태의 것..뭘까.

건물 상층부에 남보랏빛 조명 아래 잠시 어두운 부분을 지나치면 드문드문 불이 켜진 (그나마 평범해보이는)

층 공간들의 식별이 가능하다. 그 불빛없는 상층부 공간은 금빛 구가 틀어박혀 있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이 건물,

정말 뭘 형상화한 걸까. 날렵하게 빠진 유선형으로 다듬어진 사각뿔, 게다가 끝부분 가까이에는 금색 구까지

박혀있다니. 그나저나 건물에 조명시설은 꽤나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타워 옆에는 호텔 건물이 있었다. 렉서스니 크라이슬러니 벤츠니 베엠베(BMW)의 로고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그 앞 주차 공간에서 유독 많이 보이던 차종은 SUV. 암만해도 사막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니 딱 어울리는 곳이긴

할 거 같다. 저 T자형 하얀 불빛이 차곡차곡 쌓인 공간은 아마도 호텔의 라운지 공간이나..그런 거 같았지만,

모시고 다녀야 할 일행분들을 챙겨야 하므로 쫑긋 고개를 든 궁금증은 애써 눌러담았다.

타워에 들어서기 직전 뒤돌아 찍은 호텔의 전경. 아주 독특한 외관을 갖고 있었는데, 뭐랄까, 둥글게 휜 점토판에

네모난 빵꾸를 뽕뽕 격자무늬로 뚫어놓은 듯한 전면의 모습. 이미 어둠이 많이 깊어진 시간이었고, 배가 고팠기

때문에 다시금 궁금증을 즈려 밟아주었다.

리야드의 통치자인 왕자의 명을 받아 1997년 착공했다는 내용의 '머릿돌'이랄까. 알 파이잘리야 타워는 생각보다

오래 된 거구나, 사우디의 저력..아님 금력을 보여주는 거 같다.

타원 안에 들어서니 모형이 로비 한가운데 버티고 서 있다. 이 곳 역시 금속탐지기에 짐을 던지고, 나 자신 역시

스캐너를 통과해야 입장이 가능한 곳이었다. 아..저런 부속건물이 있구나, 하는 것보다는 그저 이 타워 자체가

참 신기하게 생겼단 느낌이다. 상해에 갔을 때도 동그란 구를 위아래로 두개 꼬치 모냥으로 꼽아놓은 건물, 이름이

동방명주탑이던가..그걸 보고 대체 촌스럽고 초현실적인 저게 뭐냐 했었는데, 그것처럼 똑같은 구를 건물 형태에

본격적으로 도입했으면서도 뭔가 세련된 느낌이다. 실용적인지는 차치하고, 건물의 날렵한 외관을 잡아주는 네개

선 안에 고이 모셔져 있는 황금빛 구는 확실히 그럴듯하다 싶다.

로비 한 벽면에 장식되어 있는 낙타, 그리고 사막의 모래구름 풍경 사진. 사실은 이걸 찍는 척 하면서 저 벤치에

앉은 세 사람을 찍고 싶었다. 온통 까만 옷으로 전신을 감싼 채 두손 모으고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여성, 그리고

마치 신라시대 불상에서 느껴질 법한 우아하고 맵시있게 떨어지는 옷의 주름을 과시하려는 듯 쩍벌남의 자세를

과시하며 완연히 여성을 소외시킨 두 남성. 여성이 살풋 고개를 숙인 채 이야기에 공손히 귀기울이고 있는 듯한

자세가 왠지 이 나라, 사우디아라비아의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 같았다.

위의 사진을 찍고는 잽싸게 초점을 옆으로 이동, 안 그래도 일행분들이 저사람들이 여자 사진찍는 줄 오해하면

큰일난다고(실제로 사진 찍은 건데), 그러다 카메라 뺏긴다며 염려해 주셨다. 천장도 높고 공간도 꽤나 넓은

로비였지만,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건 단지 커다란 금속탐지기, 타워 모형, 그리고 드문드문 엉성하게 놓인

저 화분들. 휑뎅그레한 느낌이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10층이던가, 그쯤에 있는 식당으로 올라가면 드디어 밥을 먹을 수 있는 거다.

아무리 배가 고파 손이 떨려도 엘레베이터 문짝이 건물 모습을 담고 있는데야 또 게으를 수는 없지 싶어서.

10층, 통유리로 감싸인 실내의 레스토랑은 부페식, 양고기와 온갖 아랍 전통 음식이 가득했지만 그보다 내 관심은

유리문을 열고 나가면 실외 전망공간으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온통 그쪽으로 쏠려 버렸다.

생각보다 사우디 리야드의 야경도 볼 만하다 싶었다. 그렇게 높은 곳에 오른 건 아니어서 거리나 건물의 불빛들을

위에서 내리꽂듯 본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살짝 비스듬한 각도로 편하게 보는 것도 좋았다.

건물들의 실루엣에 중간중간 끊겨나간 거리의 꼬마가로등 불빛들, 앞건물에 가리워진 뒷건물의 옆구리. 그리고

저 멀리 까만 하늘과 까만 땅의 경계를 그어주는 주홍불빛무리들. 그런 것들이 왠지 살짝 감질나면서도 못견디게

사랑스러워지는 순간. 저 불빛 하나하나가 사람의 심장이거나 생명 그 자체인 양 따스한 느낌이다.
큰길을 따라 주욱 늘어선 가게나 기타 자본주의적 공간들의 네온사인이 화려하다. 다국적기업들의 간판도 꽤나

많이 봤고, 베스킨라빈스, 맥도널드, 피자헛 이런 것들도 쉽게 눈에 띄는 곳이라 첨에는 살짝 당황했지만, 여기

사우디는 원래 그런 곳이었던 거다. 다른 아랍권 국가들처럼 반자본주의, 반미적인 투사형 국가가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왕정의 안위가 가장 큰 관심사일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


실외로 나서니 한바퀴 돌아볼 수 있게 사면으로 연결이 되어있었다. 한쪽 방향에서 한 장씩, 그렇게 네장을

찍음 되겠다 했지만 그게 또 아니다. 보다 밝고 불빛이 화사한 곳, 보다 어둡고 불빛이 귀한 곳, 고만고만한 높이의

건물들 사이에서 불쑥 뛰쳐올라 하늘을 찌르는 건물-랜드마크라고 부르는-이 있는 방향이 있는가 하면, 그 고만한

높이마저도 현저히 낮아보이는 주택가 지역쪽 방향이 있다는 걸 금세 알아채고 말았다.


확실히 심심하고 단조롭게 배치된 불빛들, 단순히 내 생각일까, 불빛도 한결 흐리멍텅해 보인다.

이게 내가 느낀 사우디의 이미지에는 훨씬 맞아떨어지지 싶다. 그러고보니 이쪽에는 가게 간판 불빛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다시 한번 비교해 봐도 뭔가 많이 다른 것 같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라 해도 다양한 풍경과 높이, 그리고 불빛이

공존하듯 이곳 리야드 역시 그런 게다.

사진을 얼추 찍고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실외에 마련된 자리 한 켠에 검은 옷으로 둘둘 감은 여성들만 세네명이

앉아 까르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거다. 순간 내 머리를 스친 두가지 생각, 실외의 전망을 위한 통로를

찍는 척하면서 찍어야겠다는 생각과 잘못 찍었다가 큰일나겠다라는 생각. 첫번째 생각이 카메라를 눈높이로

끌어올려 전광석화같은 속도로 셔터를 누르도록 시키는데 두번째 생각이 개입해서는 손을 잡아끌어버렸다.

그러니 이 사진은 내 머릿속에서 두가지 생각이 광선검의 뿜어나오는 섬광같은 속도로 충돌하며 빚어진 사고현장.
자리에 돌아와 밖에 여자들만 앉아 있다는 이야기를 하니, 나보다 앞서 그곳을 지나쳤던 일행 한 분은 그 여자들이

자신을 응시하며 말을 걸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신다. 알고 보니 이곳은, 일반인이 출입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장소라 왕족 같은 높은 신분이나 부유한 계층(이 두 집합은 대개 겹치기 마련이지만)의 여성들이 와서 다소간의

자유를 즐기고 가는 공간이랜다. 머릿수건, 히잡을 잠시 벗고 담배를 피거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여성끼리

와서 움직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다른 남성에게 말을 거는 일도 있는 곳. 그런 자유를 원하는 건 신분고하나

빈부격차를 막론하고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어쨌든 이곳은 거의 유일한 사우디 여성의 해방구라는.

실내 레스토랑 천장에서 별빛처럼 반짝이는 조명들. 창밖 어둠이 깊어질수록 실내도 점점 어두워지면서, 저 멋진

조명은 사실 아무런 조명으로서의 기능은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촛불이라봐야 음식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나 알려주고 앞사람 얼굴이 웃고 있는지, 찡그리고 있는지 정도나 알려줄 뿐.


참, 술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사우디에선, 살짝 탄산맛이 나는 사과레몬주스를 술 대신 마셨다. 발효가 조금

되었는지 알콜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사과와 레몬맛이 섞여서 달콤시큼한 게 맛있는 주스같기도 하고 그랬다.

사우디는 비록 금주령으로 유명하고, 공식적으로 술을 팔지도 사지도 못한다고는 하지만, 또 음성적인 밀수로

들어오는 술의 양이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그 술들은 대개 왕족들이 개인적으로 소비하게 된다는데,

일종의 암시장에서 수급상황에 따라 널뛰기하는 가격만 맞출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구할 수야 있다고 한다.

또 하나. 사우디의 밤거리를 달리는 차들을 보면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떠날 때가 다 되어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불빛들이 강렬하게 눈을 찌른다. 마치 빙판위를 달리는 것처럼, 자동차의 불빛들이 아스팔트 노면위에서

잔뜩 궁글려져서는 더욱 번쩍번쩍 시야를 교란하고 있는 거다. 저게 고급 아스팔트라는 설명이었다.

왜 레이싱 도로를 보면 반질반질 윤이 나고 타이어와의 접착력이 높다고 하는데, 바로 그 아스팔트 도로라는 것.

비가 올 일이 일년에 하루 있을까말까 하다는 곳인지라 이런 매끄러운 아스팔트를 써도 거의 무방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대신 어쩌다가 정말 비라도 오면 여기저기서 사고가 터진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불빛을 저렇게나 반사시키며 미끄러뜨리는 걸 보건대, 운전할 맛은 제대로 나지 않을까 싶었다. 거칠거칠한

표면 위가 아니라 벨벳처럼 부드럽고 매끈한 도로 위를 착 달라붙는 느낌으로 운전한다면..절로 엑셀레이터에

발이 가겠지. 차들이 아스팔트 위가 아니라 검은색 빙판 위에 버티고 선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때였지만, 집으로 들어가기는 뭔가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다. 이 짬에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마들렌 교회에서 방돔광장까지 산책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았다. 딱히 목적지로 잡고 가기에는 뭔가

끌림이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눈길 한번 안 주고 돌아가기에는 왠지 섭섭한 곳들.


마들렌 교회, 그리스 신전 같은 외양에 가슴속 십자가를 품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콩코드광장에 서서 사방을

바라보면, 개선문, 루브르궁전, 마들렌 교회, 앵발리드까지 파노라마처럼 360도로 펼쳐진 풍경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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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본 마들렌 교회의 옆모습, 부석사 무량수전이었던가, 아랫배 부분이 봉긋한 배흘림기둥.

그 것과 똑같지는 않지만 가운데가 살며시 불룩한 이 도리스양식 기둥의 온화한 곡선이 매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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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는 안 들어가기로 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발그스름한 금빛 석양이 잔잔히 배어나오기 시작한 남청색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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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빛이 청색으로 변해버린 시간, 노랑색 가로등이 켜진 때에 노천 까페에 앉아 커피를 한 잔 마시지 않는다면

대체 언제 마실 것인가..하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도 있지만 와인을 한잔 가득 따라놓고 마시는

파리지앵들도 적지 않다. 우리처럼 와인을 격식 맞춰 마시는 분위기는 아닌 거 같다. 물론 그렇게 마셔야 할 와인도

있겠고 그런 격식을 차려야 할 자리도 있겠지만, 그저 편하게 마시는 술, 그런 와인/와인마시는 법도 수입한다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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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치 높이가 44미터에 이른다는 방돔 광장 중앙의 탑. 맨 꼭대기에는 나폴레옹상이 파리 시가를 굽어보고

있다는데..이미 날이 너무 어두워져서 육안으로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잔뜩 녹이 슬어 에메랄드색으로

변해버린 청동 기둥의 둔중하고 거친 무게감이 왠지 시대를 거슬러 오른 과거의 향기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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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0문의 대포를 녹여 만들었다는 청동제 기둥. 뭔가 조각이 되어 있는 건지, 아님 그냥 울룩불룩하게 생겨난

무늬들인지 모를 정도였지만, 기둥을 둘둘 감고있는 띠 모양으로 그림이 가득한 거 같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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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표시도 남다른 사우디아라비아. 터번을 감은 턱수염 아저씨와 머릿수건 히잡을 쓴 망사 속의 아가씨가

각각 남여 화장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왠지 여성은 검은 색이 많이 들어가서 그런지 남성보다 은밀하고 숨겨진 느낌이 든다. 단순히 조명이 직접

때려지지 않아 마침 광택이 조금 덜했던 걸 넘 크게 해석한 걸까.

남성이라면 잠시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난 첨 화장실에 들어가서 이걸 보는데, 앉아서 쓰란 건지 서서 쓰란 건지

순간 혼란스러운 느낌마저 일었었다. 저 거창한 칸막이도 흔히 보는 소변기 사이의 칸막이라기엔 좀 거시기하다.

비록 생긴 건 좌변기같이 길쭘하게 생겼지만, 어쨌든 이건 남성용 소변기. 서서 쓰는 거다.ㅡㅡ;

아침부터 시작한 상담회인데, 하루 종일 실내에만 있으려니 하도 답답해서 잠시 호텔 밖으로 나섰다. 여전히 호텔

문 앞에서 사람들과 짐들을 스캐닝하고 있는 금속 탐지기. 안그래도 내 손에 쥐어진 카메라를 불안하게 경계하던

보안요원은 내가 미친 척하고 카메라를 들이대자 즉각 반응한다. 찍지 말랜다.


알았다고, 웃음기조차 없는 그 얼굴이 인상쓰면 정말 무섭겠다 싶어 얼른 밖에 나섰더니 어느새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은 알 파이잘리야(Al Faisaliah) 타워, 사우디 리야드의 가장 높은 건물 중의

하나이자 대표적인 랜드마크라고 한다. 붉고 노란 라이트불빛만 늘어뜨리고 호텔 앞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

초점이 안 맞은 채 찍힌 사진이지만, 왠지 이 딱딱하고 적대적인 공간을 조금이나마 부드러운 이미지로 기억시켜

줄 것 같은 사진. 하품이라도 하고 눈에 물기가 잔뜩 어린 채 쳐다보는 세상같다.

다시 상담회장으로 돌아가는 길, 불과 십 분도 안 되는 짧은시간 건물을 나갔다 들어왔지만 예외없이 금속탐지기를

통과해야 했다. 우선 플라스틱 바구니에 카메라와 주머니속 잡동사니들을 빼놓고는 검은색 고무로 된 컨베이어

벨트 위에 얹는다. 그리고 그 바구니가 거의 소형차 마티즈만한 사이즈의 기계를 통과하는 동안 나는 공항에서

흔히 보는 탐지기를 통과해서 스캐너로 사지를 스캔당한다. 통과. 당할 때마다 불쾌하지만, 어쩔 수 없다.


상담회장 바로 옆에 카펫 판매장이 있었다. 호텔 내 기념품점이야 어느 나라에나 있고 이곳에도 이런저런

기념품을 파는 매장이 따로 있었지만 카펫을 파는 곳이 아예 이렇게 따로 있을 줄이야. 잠시 들어가서

한바퀴 돌아보며 카펫의 문양과 촉감을 구경하고 나왔다. 따스하고 보들보들한 느낌이 손끝을 스치는 게

둘둘 감고 있으면 포근할 거 같다.

메리어트 리야드 호텔의 1층 로비. 은근하지만 화려한 조명과 야자수가 휘영청 늘어진 느낌이 그럴 듯 하다.

두바이 공항과 달랐던 점은 저 야자수들이 전부 진짜였다는 점, 그리고 잎사귀에 먼지가 낄 새도 없이 잘 관리되고

있어서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였다는 점. 역시 호텔은 가오로 먹고 산다.

별 모양으로 늘어뜨려진 조명과 저 멀리 초대 국왕, 선대 국왕, 그리고 현재 국왕의 초상화가 보인다. 흡연이

자유로운 아랍 문화답게 호텔 로비에서던, 복도에서던 흡연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는다.

내가 들은 기억으론 가운데가 초대 국왕, 왼쪽이 선대 국왕, 그리고 오른쪽이 현재 국왕이라고 했던 거 같다.

가운데 아저씨가 입고 있는 검은색 옷(사실은 왼쪽 오른쪽 아저씨들도 입고 있지만)은 굵은 금색 실로 치장되어

상당히 화려한 느낌을 주는 의례복으로, 왕가의 사람들이 공식적 행사에 참여할 때 입는 복식이라고 한다.

호텔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지는 엘레베이터 앞 재떨이. 거리낌없이 아침부터 담배를 피워대는 투숙객들 때문에,

두 개층을 오르내리며 겨우 흐트러지지 않은 재떨이 모래무지를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알고 보니

수시로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치우고 모래를 일부 걷어내고는 다시 메리어트 호텔 마크를 저렇게 찍어 놓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산책을 겸해 호텔 밖을 또(!) 나섰다. 호텔 바깥의 녹색 공간은 시간맞춰 분사되는 이런 스프링쿨러

시스템에 크게 빚지고 있었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몇십분 동안 쉼없이 흩뿌려지는 물들, 중동권에서 물은

기름보다 비싸다던가.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자 무진장한 수준의 천연가스를 보유하고 있는 사우디에서 더욱더

실감나는 말이다. 심지어 이들은 천연가스는 아직 개발도 제대로 시작하지 않은 상태인 거다.


보안요원이 따라나오더니 사진 찍지 말랜다. 왜!! 냐고 묻고 싶었지만, 역시 무서운 얼굴에 쫄아버렸다. 나무에

물주는 거 찍겠다는 나도 니들눈에 웃길지 몰라도, 그걸 굳이 막겠다고 나선 니들도 웃기다 참.

우선 알겠다고 하고 몇걸음 내딛다가 다시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그 뒷켠의 화단. 물기없이 부석부석한 흙에서

비실대고 있는 꽃들이 안쓰럽다. 호스가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저런식으로 물을 뿌려주고 있었지만 글쎄..축 쳐진채

잔뜩 목말라보이는 저 꽃의 뿌리까지 촉촉하게 젖어서 꽃잎이 팽팽해지려면 한참 걸리지 싶다.

근데 이 꽃...한국에서도 많이 봤던 거 같은데, 이름도 알았던 거 같은데 영 기억이 안 난다.

꽃에 대고 사진찍는 것도 못마땅했나보다. 여기까지 다시 쫓아나온 보안요원, 오늘은 아침부터 보안요원하고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숨바꼭질하는 것도 아니고. 이번엔 짜증을 낸다. 자꾸 이러면 카메라를 검사해서 사진을 다 지워

버리는 수가 있댄다. 나도 대체 왜, 왜 꽃이나 나무도 못 찍게 하냐고 물었더니 그게 규정이랜다. 호텔, 공공건물을

촬영하는 게 금지되어 있다나. 사실 카메라를 검사하겠다는 으름장에 살짝 쫄아있던 상태였는지라, 고분고분 말을

듣기로 했다. 카메라 안에는 이들 왕의 초상화도 담겨 있는데 행여 걸리면 어찌되겠다 싶어서.


그래도 이대로 들어가긴 따땃한 사우디의 아침햇살이 너무 아쉽다. 호텔 안의 에어컨 바람에 질린 참이었다.

알 파이잘리야 타워 쪽 아침 풍경을 한번 돌아보았더니, 이번에는 타워 위쪽에 있는 구 형태의 조형까지 뚜렷이

보인다. 그리고 발톱처럼 유선형으로 건물을 타고 오르는 곡선의 실루엣도 선명하다.

메리어트 리야드 호텔 옆에 이어지는 정원, 그리고 부속건물들. 이건 대체 무슨 건물인가 싶어서 크게 호텔 주변을

돌아보기로 맘먹었다. 호텔보다 화려하고 얼마 되지 않은 새 건물 같은 게, 뭔가 특별한 용도가 있지 싶었다.

알고 보니 허무하다. 메리어트에 딸린 bodyline Health Club & Spa랜다. 사우디의 부유층들은 운동량이 정말

얼마 안 된다고 한다. 당뇨 등 성인병이 만연해 있고 양고기 등 기름진 음식에 대한 경계심도 없는 데다가, 따로

운동을 해서 건강관리를 해야겠다는 의식도 없는 탓이라고 하는데 여긴 장사가 될런지 모르겠다. 아직 한국같은

'웰빙' 바람이 불어닥치지 않은 무풍지대, 사우디아라비아.

이런 세계도 있을 수 있음을 몰랐다.

'여행'이라는 방법만이 외국을 접하는 유일한 통로였던 때에는, 여행자의 카메라와 시계 등속에 관심을 보이며

서툴게 말을 건네던 길 위의 행인들이 그 나라의 얼굴이었다. 마주치던 그 나라의 풍경 역시 대부분 길위에서,

어느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해 가는 그 선상에서 마주한 것들이었다. 바람이 불고, 하늘이 보이며, 땅을 밟는.

설혹 박물관이나 기념건물 등의 실내로 들어선다 해도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신기하게 바라볼 태세가 되어 있는

여행자의 시각으로, 뭔가 그 장소에서 그 나라가 보여주려는 걸 동조해 보려고 노력하면 그만이었다.


그렇지만 출장이란, 출장으로 떠난 나라를 맛본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도 않지만 또 다른 이야기같기도 하다.

물론 출장이라고 해도 다양한 방식과 목적을 가진 출장이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떠난 출장은 호텔에서 호텔로

전전하며 비즈니스상담회를 진행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더욱 다르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봤던

건, 여행자로서 부닥뜨리게 될 세계와는 또 다른,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지만 엄청 다른 풍경을 보이는 세계였다.

같은 사우디라 해도 호텔 내에서 하늘 한번 바라보지 못하고 해가 뜨고 지고 하는 그런 조건에서 보이는 사우디는

당연히, 사우디가 외부에 보여줄 준비가 된 관광지-그게 실내 장소이건 실외 장소이건 간에-를 둘러보며 느끼는

사우디랑 다른 게 당연할 게다. 그러니 자칫 출장을 나가 된통 고생하고 온 나라에 대해서는 첫인상은 첫인상대로

구기고, 제대로 본 건 없지만 그렇다고 안 갔다고 할 수도 없게 되어 버리니, 선배들 이야기대로 그 나라와의

관계를 망치기 십상이겠다 납득이 간다.


그렇지만 최대한, (할 일은 하면서도) 여행자의 시각을 갖고 비즈니스의 세계 호텔을 둘러보고, 짬나는 시간마다

창밖을 둘러보려고 애쓰다 보니 또 나름의 쏠쏠한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같은 호텔 건물이라 해도, 여행자에게는 아늑한 휴식의 공간, 출장을 나온 직딩에게는 밤 두세시가 지나도록 일을

하는 작업의 공간. 이틀만에 옮겨야 하는 일정인지라 가방은 다 풀지도 않고 저렇게 쩍하니 입만 벌려놓았다.

아무리 호텔의 백열등이 그 불빛의 세례를 받은 것들을 고급스럽고 아늑하게 보이도록 마법을 걸어준다 해도,

이 정신사나운 풍경마저 그렇게 감싸기란 쉽지 않다. 생각보다 환시(幻視)란 건 조건이 까다로운지도.ㅋ

호텔방에 들어서자마자 한 일은 한 켠의 화장대로 쓰일법한 테이블 위를 싹 밀어내고는 노트북과 휴대용 프린터를

설치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사우디는 220볼트 돼지코 콘센트가 그대로 쓰인다. 카타르나 쿠웨이트는 별도의

호환 플러그가 필요하다.

잠시 호텔을 나서 저녁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쇼바가 꺼졌는지 잔뜩 출렁이는 차에서 운전자 뒷좌석서 겨우 찍은

사진에서는 불빛들이 팔분음표를 그리고 있다. 내가 이 사진을 찍으면서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다른 중동

국가들처럼 사우디 역시 직업군에 상당히 강고한 위계가 있으며, 그 위계 내 '하층 직업'을 차지한 사람들은 대부분

서남아 등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란 거다. 예컨대 택시기사는 인도/파키스탄 사람,(인도사람은 또한 중동의 오일

머니를 실제로 운영하는 중간관리자 역할을 장악하고 있기도 하다) 청소부는 방글라데시 사람, 트럭운전수는

어느나라 사람, 이런 식인 게다. 택시기사란 직업은 우리나라랑 크게 다르지 않은 조건인지, 사납금을 일정액씩

매일 납부를 해야 하는데, 그걸 채우기도 벅찬 데다가 아저씨 삶을 꾸리기 위해서는 하루에 18시간씩 운전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푸념하는 아저씨. 그 얘길 들으면서 문득 불안해졌었다.

이 차가 이렇게 꿀렁이는 게 단지 아스팔트 바닥면의 문제라거나 차의 쇼바 문제가 아니라, 급출발 급제동을

반복하며 잠을 쫓아내는 아저씨의 발놀림에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행사장이 세팅된 Najd룸은 인테리어가 특이한 거 같다. 거울을 별 모양으로 천장이고 벽면이고 할 거

없이 붙여놓았고, 심지어 나즈드룸에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기둥조차 이런 식으로 별모양으로 세워

놓고는 유리로 감싸 버렸다. 이게 몇각별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랍권의 문화와 맥이 닿아 있는 걸까.

지배인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해놓고 까먹어 버렸으니, 여전히 답이 나오지 않은 궁금증.

상담회가 시작되고, 나는 현지 바이어들이 한명씩 제대로 스케줄에 맞춰 오고 있는지, 상담은 문제없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챙겨놓은 오렌지 주스 한잔을 홀짝대기도 쉽지 않을 만큼

정신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사우디의 바이어들이 살짝 원망스러우면서도, 성황을 이루고 있단 사실

자체가 뿌듯하기도 했다.

중동의 거상이나 거물정치가를 떠올릴 때 당연히 연상하게 되는 저 머릿수건. 평소 궁금했던 점은, 저 색깔이나

디자인, 혹은 착용방법이 본인의 신분이나 위치를 드러내는 걸까 하는 거였는데, 아니랜다. 빨간 격자무늬를 하던,

민무늬 하얀천을 하던, 띠를 두르던 안 두르던 아무 상관없이 그냥 패션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런 머릿수건을

하고 하얀 긴팔소매 치마옷을 입고 온 사람들은 딱 보기에도 유한계층이랄까, 그런 느낌이다. 뛸 수도 없고 손을

놀려 일할 수도 없는 새하얀 옷을 입고 있는 이들은 마치 18세기 조선에서 유행했다던 넓은 소매 옷을 입고

유유자적하던 양반들을 떠올리게 한다. 생산하지 않는 계층으로서의 과시일까.


그치만 아랍권에 왔다는 실감을 느끼게 해주니, 양복차림새보다는 저런 차림새로 상담하러 온 사람들이 더 반가운
 
건 인지상정. 또 계속 보다보면 은근히 매력있는 옷이라고 느끼게 된다. 옷에서 흘러내리는 주름이라거나, 몸의

윤곽을 살짝살짝 드러내주는 그 부드러운 재질감이라거나.


참, 저 머릿수건을 벗겨내면 유대인들이 쓰고 있는 조그마한 모자같이 생긴 게 나온다. 유대인의 문화(혹은 종교),

아랍권의 문화(혹은 종교)가 기실 한끝 차이임을 드러내는 거 같아 유쾌한 발견이다.

오찬을 위해 이동한 곳 천장에서 대롱대는 특이한 형태의 조명. 이런식의 형용사가 허용된다면, 왠지

"아랍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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