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정원을 품은 건물, 아크로스 후쿠오카. 계단식 건물 옥상 가득히 펼쳐진 녹지에 구불구불 나있는 산책로를
빗겨나면 왠지 건물 내부 어딘가로 쿵, 추락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이 엉성한 한국어로 된 경고판때문에 비로소
생겨난 것이었다.
후쿠오카 한복판에 나무가 무성한, 비탈진 야산같은 건물이 있다고 들었다. 여행을 다니며 건축물 순례를 하는 건
좀 내키지 않았던 터라 그냥 모르쇠 스킵할까 하다가, 텐진 중심부 근처길래 설렁설렁 산책 겸 걸어가 보기로 했다.
못했던 건지 물이 잘박잘박하다. 유속도 그렇게 빠르지 않아 수면 바닥에 이끼가 잔뜩 끼어있었고 냄새도 조금
풍겼다. 이걸 또 '신화적인 돌파력'을 가졌다는 어떤 사람이 본다면 싹 갈아엎고 수돗물을 흘려보내자고 할지 모를
일이지만..그래도 여긴 선진국 일본이다.
섹스샵거리에서 봤던 것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조금 실망했다. ([파리여행] 물랑루즈 거리의 홍등가.)
단물이라곤 한방울도 남지 않은 '지구촌시대'라는 단어를 빌어 생각하자면, 사람들 혹은 남자들의 성적 취향과
자극원까지도 지구적 차원에서 보편화해 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일본AV와 정체불명의 옷가지들,
중국제 성인용품의 세례를 받고. 성의 영역에서도 개별성과 고유성은 지켜져야 할 가치가 아닐까 싶다. 한국
고유의 섹스샵, 고유의 성인 문화..머, 이미 뭔가 차고 넘치도록 있긴 한 거 같긴 하다만 그런 유흥문화말구.
아크로스 후쿠오카가 보여야 하는데 잘 모르겠다. 그냥 머...여느 거리와 비슷한 고만고만한 높이의 반듯한
건물들 밖에는, 딱히 시야를 잡아끄는 것이 없어서 갸우뚱대며 파란 불 횡단보도를 건너다.
더구나 반짝이는 건물 외관에 동강동강 비쳐지는 맞은 편 건물의 적나라한 토막 마술쑈까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맨들맨들하게 절단면이 빛나는 걸로 보아 상당한 고수의 실력이다.
뒷모습만 보면 젊은 애가 뭔가 주렁주렁 매달고 자전거를 타고 있구나 싶지만, 사실 앞을 보면 살짝 주름이 얹히기
시작한 연세의 아저씨라는.
색다르진 않았던 것 같고, 건물 한쪽 사면을 층층이 타고 올라가는 저 녹색의 물결이 정말 신기했다. 좀 만화같기도
하고, 왠지 열대우림지대의 오랜 옛 유적을 타고 올라가는 짙푸른 녹색 덩굴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하여튼간에
저 계단식 정원은 건물 꼭대기까지 연결되어 산책할 수도 있다고 했다.
많이 나와서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기도 하고, 강아지와 산책도 하고, 한쪽에서는 젊은애들이 빈 플라스틱 술병을
들고 묘기를 연습중이다. 뭔가 했더니 아마 칵테일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가보다. 다양한 모양의 병을 가져와선
저글링도 하고, 둘이 주고 받기도 하면서 병이 깨질 염려가 없는 잔디밭 위에서 오래오래 연습을 했다.
저렇게 배경으로 초록빛, 드문드문 붉은 단풍빛이 가득 얹힌 건물의 완만한 경사면을 두고 있으니 풍경이 무지
나른하기도 하고 평화로워 보이기도 하고, 그렇다.
수는 있는데 올라가보지는 않았다, 는 식의 말만 있어서 난 끝까지 올라가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뭐, 좀 꼬불대며
올라가야 하는 거 같긴 했지만 우거진 수풀 때매 제대로 길은 안 보였고, 까짓 길어봐야 건물도 그렇게 높지도
않은데 얼마나 걸리겠냐 싶어, 출발.
우회전 한번, 얼마후 다시 좌회전, 이런 식으로 우르르~ 좌르르~ 스텝정원을 올라섰다.
짙은 가을숲, 그리고 텐진 중앙공원의 느낌이 영 다르다.
글자로 토,일,휴일을 적어놓은 걸로 보아 '정기휴일'이겠거니 하고 별 미련을 남기지 않았다. 머 사실 조금 위에
더 올라서서 보나 지금 여기 높이에서 보나 비슷한 거다. 게다가 후쿠오카시의 마천루라는 게 상당히 나지막해서,
그러고보니 여기보다 높은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아랫쪽 어딘가를 바라보던 양복쟁이 아저씨도 내려갔다. 슬 그림자도 길어지고, 문득 바람이 차다고 느껴
서둘러 내려오기 시작했다. 마침 등장한 경찰관 아저씨, 내가 한국인임을 한눈에 알아보곤 말보다 행동으로,
내려가라고 연신 손사래를 친 덕분에...마치 쫓겨내려오듯 후다닥.
좌우로 헤집으며 내려가는 길. 아까 오르면서 만났던 빨갱이 단풍보다 더욱 선명하고 짙은, 그래서 더욱 이뿐
단풍을 만났지만 살짝 사진 한장 찍고 말았다. 사실은 단풍잎을 챙겨오고 싶었는데..경찰관이 계속 따라내려오며
지켜보는 바람에 엄두도 못냈다는.
더이상 입장이 불가능함을 알리는 표지가 있었고 문도 굳게 닫혀있었던 것. 아마 경찰은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들은
혹시 없는지 살피면서 한번 코스를 순회했던 것 같고, 그러다 보니 나랑 계속 겹쳐서 내려왔던 게다. 내 뒷통수가
솔찮이 따갑다고 느꼈던 건...아마도 과민반응이었던 듯. 하기야 이렇게 철저히 관리하지 않으면, 워낙 군데군데
으슥한 곳이 많아서 자칫 범죄의 온상으로 전락하기 십상이겠다.
둔탁해진 느낌이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고풍스런 옛 대리석 궁전과 철재와 유리 재질의 유리 피라밋을 하나의
풍경안으로 잘 엮어낸 느낌이라면, 여기는 건물 하나에 자연의 영역, 그리고 인간의 영역을 오밀조밀하게 중첩해
놓았다는 느낌이랄까. 한번쯤 들러볼만한 곳이지 싶고, 또 한번 들렀다면 꼭 올라가볼 만한 계단식 정원이었던
것 같다. 그다지 높지도 않고 길지도 않고, 경사도 완만해서 슬슬 오르기 딱 좋은 동네 뒤 야산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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