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뜨 언덕 근처의 블랑슈(Blanche) 역. 역에서 올라오면 그 유명한 물랑 루즈의 붉은 풍차 건물이 보인다.

물랑루즈라는 곳을 알게 된 건, 영화 '물랑루즈'와 드라마 '파리의 연인'때문이었다. 영화 '물랑 루즈'는 뉴욕서

체류할 때 먼저 한 번 봤었고, 노래가 너무 좋아 씨디를 사들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정도였다. 그리고 파리의 연인서

나왔던 물랑 루즈의 멋진 공연, 그리고 김정은의 귀엽고 천진난만한 리액션까지의 이미지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해가 떨어지고 붉은 풍차에 불이 들어오기 전, 백주대낮에 찾은 이곳은 왠지 분장 전의 배우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술병이 가득 담긴 박스가 수십개씩 들어가고 있었고, 네온사인이 반짝여야 할 'MOULIN

ROUGE'라는 간판에는 불꺼진 네온 램프가 구불거리며 이리저리 휘어져 돌아가는 게 보였다. 트레이드마크라 할

붉은 풍차 역시 양쪽의 건물들이 어깨로 치받아서 잔뜩 위축되어 보였고.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전철역 하나만큼 걷기로 했다. 피갈(Pigalle)역으로 가면 2호선이 아니라 12호선을 바로 타고

중심가인 콩코드광장쪽으로 바로 내려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몇 걸음 채 걷지 않아 거리의 풍광이 심히 묘해짐을 깨달았다.
각종 야릇한 란제리를 디스플레이해 놓은 상점, 지나다니는 관광객들이 DSLR을 들이대고 사진을 찍고 있길래

별 쪽팔림없이 나도 한데 묻어 같이 사진을 찍어보았다. 뭐..그렇다고 나중에 혼자 자세히 봐야지, 라고 꼭 생각했던

건 아니다.

다음으로 나타났던 가게는 피규어 가게. 상당히 세밀하게 묘사된 여성 피규어들이 가죽치마나 부츠를 신고 달뜬

표정을 짓고 있었고, 혹은 간호사나 경찰 같은 제복을 흐트러뜨린 채 정지되어 있었다. 저런 걸 대체 누가 돈주고

살까 싶으면서도, 예기치 못한 선정적인 볼거리들에 호기심이 잔뜩 부풀었다.

에로틱 아트 뮤지엄이랜다, 참내...이곳 파리의 트렌드에 맞게 오전 10시 개장을 하면서도, 폐장 시간은 자그마치

밤 2시. 앞에서 표를 파는 아가씨에게 얼마냐고 물었더니 이런 민망한 브로슈어를 건네주었다. 그렇게 관광객이

많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해써 들어갈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성(性)이라는 이슈에 대해 인류가 그간 쌓아올린 온갖 지식과 특화된 도구들이 총집결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내 지갑에서 8유로를 빼내고자 했다면, 반면 이런 식의 선정적이기만 한 접근은 사람을 쉽게 질리게 해 버린다는

경험칙이 얼른 그곳을 뜨고자 했던 이유였달까.


그렇지만 입구 주위에 맛보기처럼 전시된 몇몇 전시품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난 왠지 이 곳의 전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라거나 이미지가 무엇일지 다 알아버린 느낌이 들어서, 다시 건물밖으로 나와 버렸다.

잠깐 사이였는데도 공기가 다르다는 느낌.

에로틱 뮤지엄..이라곤 하지만 그냥 길가의 평범한 상점 건물의 공간을 쓰고 있는 곳이다. 보도 쪽으로 전시된

몇 개의 소장품..이 단어가 너무 안 어울린다 싶다면 전시품 중의 하나, 정조대. 이야기만 들었지 실물을 본 건

이게 처음이었다. 사진에 바깥 풍경이 반사되어 잡혔지만, 차라리 그래서 다행이지 싶다.

이걸 창밖으로 보고 나서는, 에로틱 뮤지엄이라는 데가 인류의 '성애(性愛)'의 역사를 뭔가 고답적으로라거나

철학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이런 '생생하고 선정적인 자료'들을 모아서 보여주는 데 주력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스스로의 추측에 더욱 확신이 들었다. 이건, 육체적 사랑에 대한 저속한 농담들만 모아놓은 공간일 거 같다.

물론 들어가지 않아서 실제 내용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저 취향 독특한 의자를 보는 순간 앞선 정조대의 의미와

맞물리며 무진장 남성적인 공간일 거라는 생각. 마초적인 발상과 성욕으로 일방의 욕망만을 투영시킨.

하긴, 이렇게 섹스숍이 줄줄이 이어져 있는 동네에서 좀더 아름답고 건전한, 그러면서도 흥미로울 수 있는 육체적

사랑을 테마로 한 박물관을 기대하기란 무리일지 모른다. 여성은 비디오로, DVD로, 혹은 육체 그 자체로까지

팔리는 상품이자 (변기와도 같은) 욕망의 해소공간으로 자리잡힌 채, 지갑과 육체를 쥐고 그러한 여성을 소비하는

남성들의 시각이 이 거리를 바라보는 일종의 빅브러더 같은 걸 게다.

밤이 되면 치안이 안 좋다고 들었던 몽마르뜨 앞의 환락가가 여길 얘기하는 거였구나, 뒤늦게 두 개의 퍼즐이

맞아떨어졌다. 피갈(Pigalle)역까지 걸어야 했던 거리는 사실 무지 짧았지만, 그 짧은 거리를 가득 채웠던 건 발정난

남성의 욕구 해소를 위한 온갖 상품들의 백화상품식 진열대.


그러고 보면 영화 '물랑루즈'에서 이완맥그리거가 "Just one night, just one night"을 노래하며 니콜 키드먼에게

구애를 한다. 그건 구매의 의사표시였을까, 아니면 이 동네의 문법에 맞는 방식으로 풀어진 구애의 의사표시였을까.

니콜 키드먼의 대답은 이랬었다. "There's no way, 'cause you can't p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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