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드골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내 유로를 허물었던 건 파리 시내까지 들어가기 위한 지하철 티켓이었다.

파리 도심에서부터 원형 형태로 1, 2, 3, 4, 글고 5 Zone까지 구분해서 요금을 징수하는 파리의 지하철 요금체계에

따르자면, 공항(5 Zone)에서 파리 시내(1 Zone)로 들어서려면 자그마치 8.4유로짜리 티켓을 사야 한다.

내게 처음 그 지하세계의 이미지를 던졌던 지하철 RER B선. 일종의 교외선이다 보니 한국에서도 그렇듯, 암만해도

좀 낡고 많이 허름한 느낌이다. 밤에 혼자 타기는 다소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파리 시내에서 여행을 다니는 건 1 Zone, 혹은 2 Zone내에서 다 해결되기 때문에, 1-day free pass는

3.2유로. 계산해 보니 두 번 이상만 타면 일일자유이용권이 쌌던 것 같다. 더구나 일일 자유이용권같은 경우, 그

티켓으로 버스도 자유승차가 가능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편리하다. 다만 그렇게 교통 요금체계가 바뀐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저 지하철표를 들고 버스에 탔을 때 아직은 운전기사가 번번히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태우는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일주일 무료 이용권. 16.4유로였던가..대략 16유로였다. 유의할 점은 일주일 무료 이용권은 항상 월요일을 기점으로

표를 구매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많은 개찰구를 표로 후비고 다녔는지 너덜너덜해졌다. 파리지앵들의

경우는 보통 한달 무료 이용권을 사서 쓰는데, 창구에서 사면 자그마한 카드같은 곳에 자신의 사진을 끼우고 표를

사용케 한다고 한다.

파리 시내의 역은 저마다 약간씩 모양이 다르지만, 몽마르뜨 언덕을 가는 길에 내렸던 아베스(Abbesses) 역의

외관은 날렵해 보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개구리가 생각난다. 좀 만화적인 느낌이기도 하고.

파리의 지하철 내부는 나지막한 천장에 이리저리 꼬불거리는 통로로 가득하다. 지하철 내의 광고가 얼마나 붙어

있는지를 기준으로 그곳의 경기를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요새 텅텅 비어있는 서울 지하철 내 광고판들을 보면서

했던 생각이다. 그런 기준에서라면 파리의 경기는 나쁘지 않다. 아크릴광고판도 있고, 이런 식으로 사람이 직접

풀을 묻혀가며 붙이는 포스터같은 광고도 있었다.

14개나 되나 지하철 노선은 파리의 모든 지역을 편하게 가 닿도록 해주지만, 역과 역 사이의 거리가 짧아서 자칫

한눈이라도 팔다간 원하던 역에서 두세정거장씩 지나있기 십상이었다. 안내표지가 많아서 환승도 쉽게 할 수

있으며, 지하철 노선마다 다니는 지하철 내부의 모양이나 깔끔한 정도가 다르다.

가끔은 환승 거리가 길어서 이런 식의 에스컬레이터가 쓰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역에서는 에스컬레이터를 보기

매우 힘든 편인 듯 하다. 첫날, 그리고 마지막 날, 바리바리 싸든 여행짐꾸러미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니

땀이 삐질삐질 났댔다. 그렇지만 계단이 높거나 터무니없이 길지는 않았어서, 걷기에 나쁘지 않다.

몽마르뜨 언덕 가는 길에 나선처럼 비비 꼬인 계단을 한참동안 올랐다. 유독 긴 거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달팽이길에 이런 식으로 벽화가 그려져 있어서 지루하다거나 힘든 줄 모르고 오를 수 있었던 듯.

비단 몽마르뜨 옆의 이 역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도 지하철역 근처의 명승고적이나 유래에 따라서 아기자기한

소개를 하고 있다. 예컨대, 파스퇴르 역이라 치면 그의 의학적 공헌이나 간략한 연대기에 대한 소개가 있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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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나 프랑스나, 다른 나라에서도 그랬던 것같지만 지하철을 상징하는 알파벳은 역시 'M'. 내가 머물던 곳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이었던 Convention(이라 쓰고 콩방숑..이라 읽는다)역의 야경.

지하철 역내 플랫폼으로 가는 길 역시 역마다 매우 다르다. 배선이 밖으로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이런 풍경이

흔하고, 다소 으슥해 보이는 구간도 없지 않지만 글쎄...전반적으로 매우 양호한 편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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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역에서는 쉴 새없이 어디선가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다못해 바이올린이나 트럼펫, 혹은 중국 악기인

얼후까지. 많은 허름한 예술가들이 자신의 연주 자체를 즐기면서 덤으로 승객들의 호의를 기대하는 듯 했다.

그 중에서도 샤틀레(Chatelet)역은 자그마치 5개 노선의 환승이 가능한 파리 중심부의 요충지랄까, 그래서인지

항상 지날 때마다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귀를 쫑긋 세웠고, 항상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무슨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루는 바이올린 7대, 비올라 2대, 그리고 첼로 1대로 이루어진 굉장한 규모의 합주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이나 감상했었다. 지하철 역의 야트막한 천장, 사방으로 뻗은 좁은 통로..를 타고

천지사방으로 공명하는 현의 떨림을 따라 심장까지 함께 공명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른 날에는, 아코디언과 클래식 기타 반주에 맞춘 성악.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이 곳을 지날 때마다

실망하지 않고 무엇이든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고, 파리에서 발레건 오페라건 멋진 공연 하나 못 보고 돌아오는

아쉬움을 적잖이 달랠 수 있을 만큼 맘에 들었었다.

그것 역시 일상으로 받아들이면 무덤덤해지는 걸까. 파리지앵들의 주저함없는 발걸음을 보면서, 그리고 백이면 백

모두 멈춰서서 즐기는 여행자들을 보면서, 사실은 열린 마음이 문제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십분이고 이십분이고 원하는 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자유로움의 문제일지도.

학교, 직장, 혹은 지인들과의 약속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오롯한 자기 시간을 확보한. 그러니까 여행을 떠나는 거다.

Sortie(라고 쓰고 쏘ㅎ띠에..라고 읽으면 되는 듯했다, R발음을 ㅎ쯤으로 낸다는 것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누군가

파리 유학을 다녀왔음을 과시하고 싶었던 나머지 친구가 오르세미술관 어쩌구...할 때 못 알아들은 척 했다나.

오르세가 뭐니, 오흐세라 그래야 알아듣지, 라고 했단다.)

지하철의 출구. 출구를 나설 때는 따로 티켓을 집어넣고 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저렇게 출구에 가까이 가면

자동으로 문이 열리는 시스템. 아마 발밑의 무게를 감지하고 열리는 게 아닐까 싶은데, 잘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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