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과는 달리 안 간 곳도 있고, 몇 군데 정보를 얻은 곳 중에 그냥 놓아준 곳도 있다. 전부 다 숙제하듯 볼 생각은

아니었으니, 그냥, 내키는 대로 걷고 보다가 힘들면 쉬고 싶었다. 그치만 사실은 '설렁설렁'이라는 애초의 컨셉을
 
잘 지켰는지 반성을 해야할 지도 모르겠는 게, 성격상의 문제인지 혹은 아직은 뭔가 내 리듬 자체가 그런 여유롭고

한적한 스피드보다는 한참 더 액셀레이터를 밟고 있지 싶어서.


다른 사람을 추월하지 않기, 주위를 둘러보며 걷기, 힘들게 전투하듯 일정짜고 소화하지 않기..이런 것들은 단지

여행을 다니면서 염두에 두었을 뿐 아니라 블로깅 하는 데도 일정부분 와닿는 게 있지 싶다. 뭐, 더 나아가서는

삶에 대한 메타포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진부하므로 패스.


어찌됐건, 파리가서 오페라나 발레 한 작품을 꼭 관람하고 오겠다는 다짐이었지만, 내 체류 기간동안에는 파리시내

두 개의 오페라 극장 모두 아무런 일정도 없었다. 오페라 역에 있는 오페라 가르니에(Palais Garnier), 그리고

바스티유 역에 있는 오페라 바스티유(Opera Bastille)의 10월 일정표.
혹여 10월 중에 파리 가시는 분은 참고하시고 꼭 관람하면 좋을 거 같다. 양 오페라극장 모두 물론 비싼 좌석은

약 300유로 정도였던가, 엄청 비싸지만 5유로면 될 만큼 싼 좌석도 꽤나 있었다. 파리와 서울의 물가를 대비한다면

더욱 가볼 만 한 거 같다는 느낌. 싼 좌석이나 혹은 예비티켓..같은 것들은 공연 직전 삼십분 전쯤 가면 구할 수도

있다는 팁을 어느 싸이트에선가 본 거 같은데, 다시 찾으려니 또 못 찾겠다. 애초 난 그냥 주위를 어슬렁대며 놀다가

시간됐지 싶을 때 일단 들이대면 어떻게든 표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페라역으로 가는 길은 좌우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쭈욱 늘어서 있었다. 그런 한 켠에서 '귀빈'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식당을 발견했는데, 반갑다기보다는 왠지 파리에서 느끼고 싶던 이름모를 느낌을 살짝 방해받은 느낌.

여기 있어서는 안 될 무언가가 풍경에 끼어있다는 느낌이었어서, 눈에 확 띄었었다.

요새 파리에서는 유학생들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몇몇 한국식당에 대한 불만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돈을 벌 만한 경로가 많지 않은 유학생들은 현지 한국인들에게 손쉬운 타겟이 되기 십상이겠다.


사실 내가 2001년 뉴욕에 머물면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도, 단기 관광비자나 유학비자로 취업이 금지되어 있던

터라 높은 물가에 용돈이 궁한 한인유학생들은 맨하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옆 코리아타운서 불법취업을 많이

했었다. 법정 최저임금에 훨씬 못 미치는 시급을 주기도 했고, 턱없이 긴 수습기간을 설정해서 그기간에는 그나마

시급의 반만 주기도 했고, 밥은 늘 변함없이 전 식사시간에 먹다 남은 김치찌개에 국물붓고 약간의 김치와 고기, 햄
 
등을 추가해서 끓인 찌개와 함께 먹었었다. 왜 일본 같은 곳의 이름난 라면집 국물이나 '식객'에서 나왔던 신비의

간장이 수백년 동안 애초의 베이스를 유지한 채 보존되고 재생산되듯이. 그런 경험이 있는 터라 난 유학생에 한표.

오페라 바스티유에선 지휘자 정명훈씨가 재임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고풍스럽고 화려한 느낌의 오페라 가르니에와

비교하면 상당히 심플하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의 건물이었다. 그치만 날씨 탓일까, 아님 단순히 사진이 이상하게

찍힌 탓일까, 1989년에 완성되었다는 오페라 바스티유가 1875년에 완성된 가르니에보다 훨씬 칙칙하고 오래되어

보인다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화사한 벽면의 장식들과 에메랄드빛 돔 천장을 보면, 정말 화려하고 독특하다는 느낌이 든다. 완성 당시 건축가가

이 건물은 과거의 그 어떤 양식도 아니고 '나폴레옹 3세 양식'이라고 얘기했다는 일화가 수긍할 만 하다. 저

펑퍼짐한 돔의 형태, 짧게 끊긴 채 두 개씩 늘어서 있는 기둥들, 조각이 넘실대는 지상층과 옥상의 윤곽.

사용자 삽입 이미지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조각들, 그리고 동상들은 이곳이 문화예술의 전당임을 더욱 실감나게 했다. 비록

별렀던 발레나 오페라 같은 공연을 볼 수는 없었지만 건물 자체만 봐두는 것도 뭐,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 위로.

정말 주변의 오래된 건물들과 어울려서, 마치 과거 어느 시간대의 프랑스 파리를 걷다가 오페라 공연을 보러

우아한 복장을 하고 계단을 오르는 듯 한 느낌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즐비한 오페라 거리에 서 있다 보니, 자칫 너무 튀거나 어색해 보일 수 있을 이런 뜬금없는

하늘을 찌른 독수리 횃대모양 가로등도 제 자리에 서있는 느낌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페라 가르니에의 정문. 공연이 없는 기간이라 그런지 한적하기 짝이 없었지만, 드문드문 들어가서 미리 티켓을

예매해 가는 현지 파리지앵들의 모습이 보였다. 경비아저씨가 안 된다는 통에 티켓 예매소 이상을 들어가 볼 수가

없었고, 가이드북에 나와있는 그 멋지다는 천장화나 내부 장식은 그냥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했다. 사실 그다지

땡기지도 않았던 건...그때 배가 상당히 고픈 상태였기 때문이다. 역시, 예전같지 않다. 예전에는 밥을 쫄쫄 굶고

다녀도 배고픈줄 몰랐건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까 그 가로등의 특이한 아랫도리 장식. 뱃머리의 문양을 차용한 듯 한데, 저 기분나쁜 눈이야 바다에선 바다괴물과

사이렌, 풍랑과 역병을 쫓아냈겠지만, 가로등 위에 달려선 뭘 쫓아내려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