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눈을 뜨니 제법 얼음이 올라붙은 자그마한 강이 보인다. 아마도 임진강의 지류일 게다.
아침 7시반에 모여 개성으로 출발하기로 했는데, 추운 바람에 뻣뻣해져버진 몸을 삽시간에 녹여버리는 지하철의
빵빵한 난방 탓에 10분 정도 지각하고 말았었다. 미친 듯이 뛰었던 탓일까, 죄송합니다, 를 연발하며 차에 타고는
피곤함과 노곤함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와 금세 또 잠들어버렸었다.
지금 난 개성으로 가고 있다. MB정권이 출범하고 나서 쉼없이 삐걱대던 남북관계, 급기야 개성공단의 존폐를
위협하는 이야기들마저 떠다니다가 급기야 다음달부터 개성으로 통하는 육로를 제한, 통제하겠다는 북측의
통고가 전달된 상황이다. 이번 개성행도 몇 주전부터 갈 수 있을지, 혹 재수없으면 못 가게 되는 건 아닐지 적잖게
걱정했었지만, 그래도 어쨌건 난 북측에서는 통행증이, 남측에서는 방북증이 무사히 발급되었다고 했다. 방북증이
북한을 갈 때 쓰는 여권이라면 통행증은 일종의 비자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함께 오기로 했던 다른 사람같은 경우
이유는 모르겠으되 북측에서 통행증 발급을 거부했다고 한다.
가을걷이를 끝낸 임진강변 들녘의 풍경이 고즈넉하다. 난 육로를 통해 개성에 방문하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곳을 방문하는 10시부터 14시30분까지 무얼 볼 수 있을지 잔뜩 휘저어진 상태였지만, 우아한 날개짓을 뽐내는
새떼들을 보며 조금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여차하면 총 맞는 거 아닐까, 북한사람들이 다시 경직되었다고
하던데 자칫 맘에 안들면 못 들어가거나, 혹은 못 돌아오는 거 아닐까. 이런저런 걱정과 설렘이 교차했다.
이곳 남한 최북단의 마을, 얼마전 가봤던 장단콩 마을을 포함한 파주 근방의 마을은 모든 세금이 면제된다고 한다.
게다가 병역의 의무 또한 면제된다고 하니..논밭에 나가든 마을 밖 마실을 나가든, 혹은 새로운 트랙터나 차를 사든
일일이 군인들에게 알리고 움직여야 하는 불편함 쯤은 감수할 만 하지 싶다. 아닌가..?
남북출입사무소 앞에 들어서니, 이미 많은 차들이 열맞춰 서있었다. 한대씩 들어가는 게 아니라, 대략 삼십분
단위로 끊어서 한꺼번에 움직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아침에 지각만 안 했으면, 사무실 들어가서 "개성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서 차를 타고 바로 개성에 다녀오는 경이로운 그림이 나왔을 텐데..
늦는 바람에 지하철 역 앞에서 픽업당해버렸다. 개성간다는 말을 마치 옆집 철수네 가듯 별일 아닌 것처럼
무심하지만 시크하게 내뱉는 그런 멋진 그림은 그래서 다음 기회로.
남북출입사무소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바글대는 게, 그냥 무슨 대합실쯤 온 느낌이다. 1층에선 사람들이
출입증 신청을 위해 기다리고 있고, 2층에는 이제 오늘 다녀올 사람들이 출발 시간이 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남북출입사무소의 광고판은 계속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는데, 예컨대 컴퓨터 반출하면 혼난다~
라는 이야기. 군수용으로 전용될 수 있는 전략물자 통제라는 차원에서 노트북이던 데스크탑이던 컴퓨터 반출이
금지되어 있댄다. 대부분의 사무를 컴퓨터로 처리하는 요즘 세상에, 개성에 가서 일하시는 분들이 좀 많이
불편하겠다 싶었다. 게다가 몇가지 금지품목이 더 있었다. 정확치 않은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배율 10배 이상의
망원경/쌍안경, 휴대폰과 충전기, 160mm이상 렌즈의 카메라, 그리고 시집과 소설책, 종교서적 등이었다.
휴대폰은 북측 주민들이나 공원(북에서 직원을 '공원'이라 부르는 건 중국식이지 싶다, 꽁위엔)들 손에 넘어가면
자칫 영화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 테니까. 문득 받은 전화 건너편의 사람이, 내레 북조선 인민입네다, 이렇게.
그리고 시집과 소설책은 다소 의외인데, 자본주의적 문화가 담겨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차원에서
여성의 나체나 누드가 담긴 책도 반입 불가.
또다른 잔소리는, 모든 식물류, 그리고 흙이 부착된 식물 반입금지라는 국립식물검역원의 안내가 있었다. 이런
경고가 좀더 절실한 건 역시, 지금 여기선 사람들이 육로를 통해 외국에 다녀오는 거니까 그렇지 싶다. 비행기를
통해 먼거리를 왔다갔다 하는 거라면 좀더 관리가 편하겠지만, 그냥 자신이 집에서부터 타고 온 차 그대로 갔다가
오는 거니까..암만해도 좀더 의뭉스런 노림수들이 먹힐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개성을 포함한 북한 남부지역엔 말라리아가 창궐하고 있는데, 그 징후 중 하나는 '무기력증'이라는 안내에 살짝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렇다면 나는 말라리아 초기 징후가 하루에도 몇번씩 수시로 도지는구나. 가장 좋은 예방책은
모기에 물리지 않는 거라는 다소 무책임해 보이는 설명에 분개하려다가, 지금같은 때엔 말라리아 염려는 없다는
일행의 설명에 급격히 평온해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손씻기 등 개인위생에 철저하란 이야기는 잘 듣기로 했다.
2층 한 켠에는 저런 사물함이 있고, 가기 전 이런저런 짐들을 넣어두고 있었다. 이런저런 책들이 들어있는 가방과
함께 핸드폰을 잠시 꺼두고는 함께 넣어두었다. 천원, 오백원짜리 두개로 문이 잠기는데 잔돈이 없어서 맞은편
북한상품 판매소 아줌마한테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혹시 나중에 짐 다시 꺼낼 때 돈도 돌려받나요, 하고 여쭈니까
그래서 어디 장사가 되겠냐고, 공짜가 어디 있냐고 타박하셨다. 나는 혹시 이것도 일종의 남북경협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로 간주해서 정부가 지원해주는 건 줄 알았지만, 역시 공짜는 없는 자본주의 세상이다.
손에 카메라만 든 채로, 한결 홀가분한 몸으로 출발 전까지 좀더 둘러보기로 했다. 1층에는 우리은행이 있어서
원하는 사람들은 달러화로 환전을 해갈 수 있다. 개성, 평양과 금강산 지역에는 달러화가 통용되며, 기타 지역에는
유로화도 통용된다고 하는데, 원화는 안 받아준댄다. 혹자는 미국과 극렬히 대치하고 있는 북한이 달러 아니면
안 받아주는 게 아이러니하다고 비웃듯 말하기도 하지만 글쎄, 보기에 따라서는 당연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회는 행정이나 각종 인허가, 법제를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일종의 통일부 산하기관으로
생각해도 될 거 같은데, 여기 남북출입사무소 2층에는 도라산 출장소가 나와있었다.
출발 전 약 25분에 걸쳐서 방북교육을 받아야 한다. 10분 정도 동영상을 보며 개략적인 사실들에 대해서 교육을
들은 후, 나머지 시간은 사무관이 그 내용을 보완하고 질문을 받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화해와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자는 첫 멘트가 다소 생경하게 들렸다. 10년간 나름대로 진지하게 발전해 온 남북관계가 이렇게 순식간에
얼어붙고 퇴행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래서 더욱 그간 남북경협을 통해 쌓아온 경제적 연결고리가 소중한
게 아닐까 싶다. 꼭 그 경제적 이해관계로 인해 관계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기능주의적인 기대가 아니라 해도,
남과 북 모두에서 이전의 공고했던 '국가' 행위자 아래의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생겨난다면 최소한 파국은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올라가지 않을까 해서.
정말인지 모르겠는데, 최근 방북했던 사람 중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병세를 물었다가 즉시 추방당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왠만하면 민감한 이야기는 피하되, 꼭 해야 하는 경우는 이런 호칭을 써서 말하라고 했다. 대통령님...이라...
국방위원장님이 아니라 국방위원장인데, 대통령님이 아니라 대통령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대통령 자체로 이미
존칭인 거잖아. 괜시리 걸어보는 딴지인지도 모르지만, 어디 가서 우리 MB대통령님은,(꼭 MB가 아니라 해도)
우리 대통령님은 어쩌구저쩌구, 이렇게 말하는 거 웃긴다. 왠지 우리 대통령님께서는..이라고 말해야 할 거 같다.
금강산 관광이 어느새 10년이 되었다. 남북간 통신선도 얼마나 오래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노후화되고 있어 서울을
떠나 개성으로 향하는 걸음을 방해하고 있다. 통신선은 노후화하고, 이산가족분들도 고령화하시고, 그리고 (전쟁의
기억을 잊어간다고 한탄하는 것만큼이나)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기억도 휘발되고 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포스터에 등장했던 도라산 역 앞의 철마는 워낙 부식이 심해져서 자칫 폭삭 부스러져 내릴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포스코에서 5억원을 들여 복원중이라고 한다. 그만큼 오랜, 아주 오랜 휴전 중이다. 그리고 그 휴전 기간동안
두 나라는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외면한 채 기형 내지는 불구가 되어가고 있다. 시간의 세례를 받아 늙고 낡아가는
것들은 죄가 없을 거다. 죄가 있는 것은, 그러한 기형화된, 불구화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득을 보는 집단 아닐까.
남북간 출입만을 규율하고 있는 공간이라 그런지 영어나 한자로 병기되어 있지 않아 그 정확한 뜻은 추측하는 수
밖에 없지만, 입경, 출경은 아마도 거의 99%의 확실성으로 경계 경자를 쓴 出境, 入境이라는 한자를 쓰지 않을까
싶다. 설마 서울 경자를 써서 出京, 入京이라고 쓰지는 않을 테고. 국경을 넘어선다는 의미일 거다. 한반도라곤
하지만 막상 대륙에 이어진 반도라고 느낄 수 있는 경험은 여지껏 없었던 게 사실이다. 단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았거나, 부산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거나. 그런데 이제 이렇게 땅을 밟으며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예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국경이 아니라 다른 말로 바꾸지 모. '대한민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영토의 경계를 넘는 경험.
남북출입사무소에 붙어있는 포스터. 흰색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고 머리를 야물게 빗어올린 북한 아가씨가
인상적이었다. 하나된 개성공단, 세계로 미래로라..사실 개성공단은 평소 내게 일종의 딜레마를 던지기도 했었다.
마치 절대빈곤선 부근에서 허덕이는 제3세계 아이들을 부려서 커피를 따게 한다거나, 낮은 임금을 주며 잡일을
시키는 상황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쉽게 판단이 안 서듯이 말이다. 개성공단 혹은 북한의 저임금 노동자를
'활용'해서 가격경쟁력을 부활시켜 한국의 부, 혹은 한국 기업들의 부를 축적한다는 건 일종의 윈-윈일 수도
있겠지만..이미 우리 사회의 노동자층이 정규직, 비정규직, 외국인노동자(이주노동자) 등으로 고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또하나 저임금노동자의 공급처로 전락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스럽기도 했다.
2층 오른켠에는 북한상품 판매소가 있고, 비매품으로 전시된 북측 도예가의 작품들과 수십년은 묵은 듯한 더덕,
상황버섯 등으로 빚은 술, 그리고 제1차 남북정상회담 기념 도자기가 놓여있었다. 한 차례 정상회담으로 뭔가
경천동지할 일이 급박하게 전개되리라고 기대치는 않았지만, 뭔가 많이 바뀌었다 싶으면서도 역시 또 뭔가가
허전하다. 당장 불과 작년에 있었던 제2차 정상회담은 그 시기와, 결과와, 의미 등에 있어 많은 논란이 있었음에도
결국 기억조차 희미하게 지워지고 말았다. 아직까지는.
예전에 어디에선가 북한술을 파는 걸 봤었을 때는, 고작 몇 종류 안 되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이런 두 줄짜리
진열대를 두 칸이나 차지한 채 늘어서 있다. 학교 앞 '그날이 오면' 서점에서 운영했던 '미네르바'였던가, 그 찻집서
한과와 함께 백두산 들쭉술을 마시면서 학회 세미나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술 참 맛있었던 거 같은데 뭐라도
한 병 살까 하다가 말았다.
이게 북한에 들어가기 위한 비자 역할을 하는 출입증이다. 눈길을 끌었던 건 파란 색으로 그려진 한반도 지도에도,
밑에 스탬프 모양으로 만들어진 엠블렘에도, 한반도 등허리 건너 편 동해바다에 점 두 개가 선명하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거의 비등한 사이즈로 그려져 있는 저 점 두 개.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한반도 그림을 그릴 때 저토록
선명하게 독도를 표기했던가 싶다.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독도를 저렇게 뻥튀기한 사이즈로까지
부각시켜서 그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또, 혹 남북간에 쓰이는 이런 출입증에만 쓰이는 거라면 괜히
못난 애비가 집안에서만 위세피우는 식인 건 아닌가 싶어서 의아하기도 하고.
출입증과 함께 받은 방북증명서를 보여주고 세관을 통과했다. 방북증명서는 주민등록증처럼 생긴 플라스틱카드로,
유효기간이 5년쯤 되는 복수 여권인 셈이다. 반면 출입증은 북한에서 돌아올 때 반납하게 되는 단수 비자인 셈.
수속을 마치고는 남북출입사무소 뒷쪽 문에서 차를 기다려야 한다. 차는 운전기사 한 명과 함께 별도의 수속을
밟고 이 곳에 와서 다시 일행들을 태우고 출발하게 되는 식이다.
개성, 이라는 표지가 선명한 뒷문어귀에서 한 할아버지가 고개를 떨구고 계신 모습을 보았다. 지난 세월에 닳고 또
다듬어져 표정조차 가늠키 힘든 얼굴을 떨구고 상념에 젖은 것처럼 보이셨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할아버지의 속내엔 무슨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을까.
빵빵한 난방 탓에 10분 정도 지각하고 말았었다. 미친 듯이 뛰었던 탓일까, 죄송합니다, 를 연발하며 차에 타고는
피곤함과 노곤함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와 금세 또 잠들어버렸었다.
지금 난 개성으로 가고 있다. MB정권이 출범하고 나서 쉼없이 삐걱대던 남북관계, 급기야 개성공단의 존폐를
위협하는 이야기들마저 떠다니다가 급기야 다음달부터 개성으로 통하는 육로를 제한, 통제하겠다는 북측의
통고가 전달된 상황이다. 이번 개성행도 몇 주전부터 갈 수 있을지, 혹 재수없으면 못 가게 되는 건 아닐지 적잖게
걱정했었지만, 그래도 어쨌건 난 북측에서는 통행증이, 남측에서는 방북증이 무사히 발급되었다고 했다. 방북증이
북한을 갈 때 쓰는 여권이라면 통행증은 일종의 비자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함께 오기로 했던 다른 사람같은 경우
이유는 모르겠으되 북측에서 통행증 발급을 거부했다고 한다.
가을걷이를 끝낸 임진강변 들녘의 풍경이 고즈넉하다. 난 육로를 통해 개성에 방문하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곳을 방문하는 10시부터 14시30분까지 무얼 볼 수 있을지 잔뜩 휘저어진 상태였지만, 우아한 날개짓을 뽐내는
새떼들을 보며 조금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여차하면 총 맞는 거 아닐까, 북한사람들이 다시 경직되었다고
하던데 자칫 맘에 안들면 못 들어가거나, 혹은 못 돌아오는 거 아닐까. 이런저런 걱정과 설렘이 교차했다.
이곳 남한 최북단의 마을, 얼마전 가봤던 장단콩 마을을 포함한 파주 근방의 마을은 모든 세금이 면제된다고 한다.
게다가 병역의 의무 또한 면제된다고 하니..논밭에 나가든 마을 밖 마실을 나가든, 혹은 새로운 트랙터나 차를 사든
일일이 군인들에게 알리고 움직여야 하는 불편함 쯤은 감수할 만 하지 싶다. 아닌가..?
남북출입사무소 앞에 들어서니, 이미 많은 차들이 열맞춰 서있었다. 한대씩 들어가는 게 아니라, 대략 삼십분
단위로 끊어서 한꺼번에 움직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아침에 지각만 안 했으면, 사무실 들어가서 "개성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서 차를 타고 바로 개성에 다녀오는 경이로운 그림이 나왔을 텐데..
늦는 바람에 지하철 역 앞에서 픽업당해버렸다. 개성간다는 말을 마치 옆집 철수네 가듯 별일 아닌 것처럼
무심하지만 시크하게 내뱉는 그런 멋진 그림은 그래서 다음 기회로.
남북출입사무소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바글대는 게, 그냥 무슨 대합실쯤 온 느낌이다. 1층에선 사람들이
출입증 신청을 위해 기다리고 있고, 2층에는 이제 오늘 다녀올 사람들이 출발 시간이 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남북출입사무소의 광고판은 계속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는데, 예컨대 컴퓨터 반출하면 혼난다~
라는 이야기. 군수용으로 전용될 수 있는 전략물자 통제라는 차원에서 노트북이던 데스크탑이던 컴퓨터 반출이
금지되어 있댄다. 대부분의 사무를 컴퓨터로 처리하는 요즘 세상에, 개성에 가서 일하시는 분들이 좀 많이
불편하겠다 싶었다. 게다가 몇가지 금지품목이 더 있었다. 정확치 않은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배율 10배 이상의
망원경/쌍안경, 휴대폰과 충전기, 160mm이상 렌즈의 카메라, 그리고 시집과 소설책, 종교서적 등이었다.
휴대폰은 북측 주민들이나 공원(북에서 직원을 '공원'이라 부르는 건 중국식이지 싶다, 꽁위엔)들 손에 넘어가면
자칫 영화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 테니까. 문득 받은 전화 건너편의 사람이, 내레 북조선 인민입네다, 이렇게.
그리고 시집과 소설책은 다소 의외인데, 자본주의적 문화가 담겨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차원에서
여성의 나체나 누드가 담긴 책도 반입 불가.
또다른 잔소리는, 모든 식물류, 그리고 흙이 부착된 식물 반입금지라는 국립식물검역원의 안내가 있었다. 이런
경고가 좀더 절실한 건 역시, 지금 여기선 사람들이 육로를 통해 외국에 다녀오는 거니까 그렇지 싶다. 비행기를
통해 먼거리를 왔다갔다 하는 거라면 좀더 관리가 편하겠지만, 그냥 자신이 집에서부터 타고 온 차 그대로 갔다가
오는 거니까..암만해도 좀더 의뭉스런 노림수들이 먹힐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개성을 포함한 북한 남부지역엔 말라리아가 창궐하고 있는데, 그 징후 중 하나는 '무기력증'이라는 안내에 살짝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렇다면 나는 말라리아 초기 징후가 하루에도 몇번씩 수시로 도지는구나. 가장 좋은 예방책은
모기에 물리지 않는 거라는 다소 무책임해 보이는 설명에 분개하려다가, 지금같은 때엔 말라리아 염려는 없다는
일행의 설명에 급격히 평온해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손씻기 등 개인위생에 철저하란 이야기는 잘 듣기로 했다.
2층 한 켠에는 저런 사물함이 있고, 가기 전 이런저런 짐들을 넣어두고 있었다. 이런저런 책들이 들어있는 가방과
함께 핸드폰을 잠시 꺼두고는 함께 넣어두었다. 천원, 오백원짜리 두개로 문이 잠기는데 잔돈이 없어서 맞은편
북한상품 판매소 아줌마한테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혹시 나중에 짐 다시 꺼낼 때 돈도 돌려받나요, 하고 여쭈니까
그래서 어디 장사가 되겠냐고, 공짜가 어디 있냐고 타박하셨다. 나는 혹시 이것도 일종의 남북경협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로 간주해서 정부가 지원해주는 건 줄 알았지만, 역시 공짜는 없는 자본주의 세상이다.
손에 카메라만 든 채로, 한결 홀가분한 몸으로 출발 전까지 좀더 둘러보기로 했다. 1층에는 우리은행이 있어서
원하는 사람들은 달러화로 환전을 해갈 수 있다. 개성, 평양과 금강산 지역에는 달러화가 통용되며, 기타 지역에는
유로화도 통용된다고 하는데, 원화는 안 받아준댄다. 혹자는 미국과 극렬히 대치하고 있는 북한이 달러 아니면
안 받아주는 게 아이러니하다고 비웃듯 말하기도 하지만 글쎄, 보기에 따라서는 당연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회는 행정이나 각종 인허가, 법제를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일종의 통일부 산하기관으로
생각해도 될 거 같은데, 여기 남북출입사무소 2층에는 도라산 출장소가 나와있었다.
출발 전 약 25분에 걸쳐서 방북교육을 받아야 한다. 10분 정도 동영상을 보며 개략적인 사실들에 대해서 교육을
들은 후, 나머지 시간은 사무관이 그 내용을 보완하고 질문을 받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화해와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자는 첫 멘트가 다소 생경하게 들렸다. 10년간 나름대로 진지하게 발전해 온 남북관계가 이렇게 순식간에
얼어붙고 퇴행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래서 더욱 그간 남북경협을 통해 쌓아온 경제적 연결고리가 소중한
게 아닐까 싶다. 꼭 그 경제적 이해관계로 인해 관계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기능주의적인 기대가 아니라 해도,
남과 북 모두에서 이전의 공고했던 '국가' 행위자 아래의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생겨난다면 최소한 파국은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올라가지 않을까 해서.
정말인지 모르겠는데, 최근 방북했던 사람 중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병세를 물었다가 즉시 추방당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왠만하면 민감한 이야기는 피하되, 꼭 해야 하는 경우는 이런 호칭을 써서 말하라고 했다. 대통령님...이라...
국방위원장님이 아니라 국방위원장인데, 대통령님이 아니라 대통령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대통령 자체로 이미
존칭인 거잖아. 괜시리 걸어보는 딴지인지도 모르지만, 어디 가서 우리 MB대통령님은,(꼭 MB가 아니라 해도)
우리 대통령님은 어쩌구저쩌구, 이렇게 말하는 거 웃긴다. 왠지 우리 대통령님께서는..이라고 말해야 할 거 같다.
금강산 관광이 어느새 10년이 되었다. 남북간 통신선도 얼마나 오래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노후화되고 있어 서울을
떠나 개성으로 향하는 걸음을 방해하고 있다. 통신선은 노후화하고, 이산가족분들도 고령화하시고, 그리고 (전쟁의
기억을 잊어간다고 한탄하는 것만큼이나)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기억도 휘발되고 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포스터에 등장했던 도라산 역 앞의 철마는 워낙 부식이 심해져서 자칫 폭삭 부스러져 내릴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포스코에서 5억원을 들여 복원중이라고 한다. 그만큼 오랜, 아주 오랜 휴전 중이다. 그리고 그 휴전 기간동안
두 나라는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외면한 채 기형 내지는 불구가 되어가고 있다. 시간의 세례를 받아 늙고 낡아가는
것들은 죄가 없을 거다. 죄가 있는 것은, 그러한 기형화된, 불구화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득을 보는 집단 아닐까.
남북간 출입만을 규율하고 있는 공간이라 그런지 영어나 한자로 병기되어 있지 않아 그 정확한 뜻은 추측하는 수
밖에 없지만, 입경, 출경은 아마도 거의 99%의 확실성으로 경계 경자를 쓴 出境, 入境이라는 한자를 쓰지 않을까
싶다. 설마 서울 경자를 써서 出京, 入京이라고 쓰지는 않을 테고. 국경을 넘어선다는 의미일 거다. 한반도라곤
하지만 막상 대륙에 이어진 반도라고 느낄 수 있는 경험은 여지껏 없었던 게 사실이다. 단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았거나, 부산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거나. 그런데 이제 이렇게 땅을 밟으며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예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국경이 아니라 다른 말로 바꾸지 모. '대한민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영토의 경계를 넘는 경험.
남북출입사무소에 붙어있는 포스터. 흰색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고 머리를 야물게 빗어올린 북한 아가씨가
인상적이었다. 하나된 개성공단, 세계로 미래로라..사실 개성공단은 평소 내게 일종의 딜레마를 던지기도 했었다.
마치 절대빈곤선 부근에서 허덕이는 제3세계 아이들을 부려서 커피를 따게 한다거나, 낮은 임금을 주며 잡일을
시키는 상황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쉽게 판단이 안 서듯이 말이다. 개성공단 혹은 북한의 저임금 노동자를
'활용'해서 가격경쟁력을 부활시켜 한국의 부, 혹은 한국 기업들의 부를 축적한다는 건 일종의 윈-윈일 수도
있겠지만..이미 우리 사회의 노동자층이 정규직, 비정규직, 외국인노동자(이주노동자) 등으로 고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또하나 저임금노동자의 공급처로 전락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스럽기도 했다.
2층 오른켠에는 북한상품 판매소가 있고, 비매품으로 전시된 북측 도예가의 작품들과 수십년은 묵은 듯한 더덕,
상황버섯 등으로 빚은 술, 그리고 제1차 남북정상회담 기념 도자기가 놓여있었다. 한 차례 정상회담으로 뭔가
경천동지할 일이 급박하게 전개되리라고 기대치는 않았지만, 뭔가 많이 바뀌었다 싶으면서도 역시 또 뭔가가
허전하다. 당장 불과 작년에 있었던 제2차 정상회담은 그 시기와, 결과와, 의미 등에 있어 많은 논란이 있었음에도
결국 기억조차 희미하게 지워지고 말았다. 아직까지는.
예전에 어디에선가 북한술을 파는 걸 봤었을 때는, 고작 몇 종류 안 되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이런 두 줄짜리
진열대를 두 칸이나 차지한 채 늘어서 있다. 학교 앞 '그날이 오면' 서점에서 운영했던 '미네르바'였던가, 그 찻집서
한과와 함께 백두산 들쭉술을 마시면서 학회 세미나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술 참 맛있었던 거 같은데 뭐라도
한 병 살까 하다가 말았다.
이게 북한에 들어가기 위한 비자 역할을 하는 출입증이다. 눈길을 끌었던 건 파란 색으로 그려진 한반도 지도에도,
밑에 스탬프 모양으로 만들어진 엠블렘에도, 한반도 등허리 건너 편 동해바다에 점 두 개가 선명하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거의 비등한 사이즈로 그려져 있는 저 점 두 개.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한반도 그림을 그릴 때 저토록
선명하게 독도를 표기했던가 싶다.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독도를 저렇게 뻥튀기한 사이즈로까지
부각시켜서 그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또, 혹 남북간에 쓰이는 이런 출입증에만 쓰이는 거라면 괜히
못난 애비가 집안에서만 위세피우는 식인 건 아닌가 싶어서 의아하기도 하고.
출입증과 함께 받은 방북증명서를 보여주고 세관을 통과했다. 방북증명서는 주민등록증처럼 생긴 플라스틱카드로,
유효기간이 5년쯤 되는 복수 여권인 셈이다. 반면 출입증은 북한에서 돌아올 때 반납하게 되는 단수 비자인 셈.
수속을 마치고는 남북출입사무소 뒷쪽 문에서 차를 기다려야 한다. 차는 운전기사 한 명과 함께 별도의 수속을
밟고 이 곳에 와서 다시 일행들을 태우고 출발하게 되는 식이다.
개성, 이라는 표지가 선명한 뒷문어귀에서 한 할아버지가 고개를 떨구고 계신 모습을 보았다. 지난 세월에 닳고 또
다듬어져 표정조차 가늠키 힘든 얼굴을 떨구고 상념에 젖은 것처럼 보이셨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할아버지의 속내엔 무슨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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