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가 되었고, 튈를리 정원에 앉아 지친 발을 풀밭에 눕혔다.

저녁무렵이 되어서인지 루브르 박물관 쪽에서 여행객들이 꾸역꾸역 나오고 있었지만, 당연히 내게는 모두 얼굴

낯설고 이름 모를 타향의 사람들. 더구나 왜이렇게 모두들 삼삼오오 일행들과 함께 나오는 건지.

혼자 떠난 여행의 단점은 자신의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다는 것 외에도..문득문득 이렇게 혼자라는 느낌이 치받아

올 때가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런 때에는 나무가 느닷없는 일진광풍을 가만히 견뎌내듯, 조용히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며 외로움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내가 벌렁 누웠던 풀밭 옆에서 자기들끼리 열중한 채 놀고 있는 아이들의 발랄하고 경쾌한 웃음소리조차 그저

왁자한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그런 순간. 주홍빛 백열등처럼 변한 태양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이 HOME으로 돌아가는지 전부 떠나고 나자, 이번에는 한 커플이 그자리를 떡하니

차지했다. 사실 저 카메라를 잔뜩 의식한 채 경계심을 풀지 못한 커플을 꼭 찍으려는 게 아니라, 하늘의 갑작스런

뭉게구름을 찍고 싶어서 쳐든 카메라였다. 이곳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

살짝 센치해진 기분을 달래보려고 일단 일어서서 잠깐 걷기로 했다. 루브르 궁전 건물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또

길어지고 있었다. 사람들도 한결 덜어낸 공간이 다소 휑한 느낌이다. 차라리 한낮에 바글대던 그 공간이 낫겠다는

생각이 슬몃 고개를 쳐든 건 또 무슨 변덕일까.

카루젤 개선문도 왠지 분홍빛의 온기를 잃은 채 차가워져 가는 느낌. 모든 게 냉막해지고, 파리에 혼자 떨어져서

뭐하고 있는 건가 싶은 답답함이 울컥울컥해져 버렸다.

다시 돌아온 애초의 내 자리. 아까의 그 커플은 보이지 않고, 텅빈 녹색의 공간에 나만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오늘따라 뭉게뭉게 구름은 잘도 피어오르는구나. 잿빛 하늘보다는 그래도, 파란 하늘이 보이니까 맘은 좀 낫다.

이런 식의 센치함이 닥쳐 온 건 사실 어딜 가던 한번씩은 꼭 있는 일이었다. 이건 단지 일상으로부터 도피한 것

뿐이라고, 아니 도피한 척 하는 것일 뿐이라고, 그리고 혼자 이렇게 다니는 거 하나도 재미없다고, 이제 누군가와

함께 다니고 함께 보고 즐기고 싶다고.

날 위로해 주듯, 문득 고개를 돌린 곳에서 황홀한 낙조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하얗게 탈색되어 버린 하늘에

찍찍 그어진 구름띠들, 그리고 어느 한점에서부터 엷은 금빛으로 물들여 나가는 다정다감한 햇살.

카루젤 개선문의 뒤로 돌아 서쪽을 바라보니 저멀리 노을이 은은하고 비치고, 해는 바야흐로 스물스물 기어내리고

있었다. 파리의 태양이 이제 서울로 떠나는구나. 6시간의 시차를 메꾸고 서울을 밝히러. 서울에 있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들을 덥히러 가는구나 싶다.

하늘은 여전히 은은한 금빛이 흩뿌려져 있었지만, 지상의 사람들은 적당한 어둠 속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저정도 어둠을 머금은 사람들의 어슴푸레한 윤곽은 왠지 정겨워졌다. 노랑빛이 풀어져 내린 흑백사진 속의 파리.

그래도 아직 대지는 고집스럽게 녹색을 움켜쥐고 있다. 저 운치있는 가로등과, 그림같은 가로수들의 형체들이

잔뜩 움츠러들고 옹송그려졌던 내 마음을 잔잔히 어루만졌다.

한국으로 가는구나. 엄밀한 과학적 상식으로야 내가 올라탄 이 지구라는 녀석이 팽팽 돌며 태양을 비껴나가는

거라지만, 그리고 태양이라는 거대한 불덩이가 고작 나를 위로하겠다고 세이 굳바이~ 할리야 없는 거라지만,

어쨌든 이제 맨눈으로 바라봐도 전혀 위협적이거나 아프지 않을 만큼 온화해진 태양은 조금씩 사그라들며

서울로 가노라고 했다.

해가 마침내 완전히 기울고, 서쪽 하늘만 조금씩 붉은 기운이 맴돌다가 사그라드는 걸 바라보면서 나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센치했던 기분과 왠지 처졌던 느낌들은 모두 이곳에 버려두고 가기로 했다.

룩소에서 봤던 오벨리스크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아 그래, 룩소에서도 문득 예기치 못한 그리움에 사로잡혔을 때,

창밖의 나일강을 바라보며 달랬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힘내서 여행길을.

왠지 '드래곤라자'에서 나왔던 인사말이 떠올라 버린 타이밍.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띠고 돌아와 마침내 평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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