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취지.

앙코르 톰의 왕궁 정원에는 '코끼리 테라스'와 '문둥이왕 테라스', 이렇게 약 300여 미터에 달하는 길다란 테라스가 있다.

왕궁을 등지고 테라스 정 가운데에 서서는, 외국 사신들이 묵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앞의 쁘라삿 수오르 쁘랏(Prasat Suor

Prat)을 휘휘 여유있게 둘러 보는 왕의 시야에는 뭐가 보였을까.


아마 왕의 좌우로 문무백관이 관직에 따라 시립해있고, 등 뒤에서는 느긋하지만 확실히 부쳐주는 커다란 부챗바람이

솔솔 불어왔을 거고, 머리위에는 커다란 일산-양산-이 몇 개씩 늘어서 있었을 게다. 눈 앞에는 아마도 최고로 멋을 내어

무장하고 정복을 차려입었을 군대가 열맞춰 사열을 받았을 거고, 혹은 외국의 사신이 공손하게 시선을 내리깐 채

무릎걸음으로 기어왔을지도 모르겠다.


비어있는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보기.


관련 영어 숙어표현.

put oneself in(to) a king's shoes. 왕의 입장이 되어 보자.


왕의 시야 진행방향.

왕은 우선 정면을 보고 있다가, 좌로 고개끝까지 오만하게 훑어보고는 다시 우측 끝까지 거만하게 훑어본다.

그리고 나선 정면에 쌓여있는 산더미같은 공물을 보며 크게 흡족한 나머지, 두번이나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빙의시 참고사항.

재채기하지 말 것, 너무 오래 본체를 떠나 있지 말 것. 그리고, 타인의 몸으로 장난치지 말 것.





바푸온 사원에서 조금만 걸으면 바로 나타나는 피미니아까스, 그리고 옛 궁전터. 건장한 금발남자 세네명이 우르르

몰려다니길래 슬쩍 끼어들어 말을 섞어봤다. 엑, 회사를 삼개월동안 쉬며 여행을 다니고 있다고. 무지하게 부럽긴

했는데, 사진은 참...이상하게 찍어준다.  

피미니아까스란, 궁전 내부에 있는 사원이다. 궁전은 이미 다 헤집어져서 주춧돌만 남았다는 이야기에 가보지 않고,

그 바로 앞에 있는 사원인 이 곳만 올라갔다 내려오기로 했다. 저 어마어마한 경사도. 인간이 아닌 신이 걷는 길이라

하여 일부러 저렇게 가파른 경사의 계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앞에 버티고 선 사자상의 각목같은 다리가 아쉽다.

여기도 노골적으로 각목같은 사각기둥 모냥의 네 받침대 위에 둥둥 떠있는 조각상. 복원을 어정쩡하게 시멘트로

눈속임하듯 발라놓느니 차라리 저렇게 노골적으로 "여긴 파손된 부위입니다"라고 알려주는 게 솔직하지 싶다.

사원 벽면 돌 틈새에, 그리고 벽돌 한장한장에 숭숭한 구멍 틈새를 놓치지 않고 무수하게 싹을 틔운 초록생물들.

왠지 '토토로'에서 우산든 토토로가 씨앗들을 틔우는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귀엽고 작은 잎새들이지만, 사원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마 금세 전부 솎아내질 거다.

신이 걷던 길을 인간이 오르려니, 쉽지 않다. 피라밋 오르는 것도 일종의 익스트림 스포츠로 만끽되다가 사람

몇명 떨어져 죽고는 금지되었다고 하던데, 여기 경사는 피라밋보다 더 높은 거 같다. 보통 사원 네 면에 모두

이런 계단이 있는데, 약간씩 경사가 다르다. 허물어지고 이지러진 탓도 있겠지만, 잘 돌아보면 특정 방향

계단이 일부러 좀더 완만하게 만들어진 곳도 있다.

이 곳의 서쪽 계단을 통해서만 3층의 성소까지 갈 수 있다. 경사가 약 40도에 이른다는 이 계단 아래에도 여지없이

'곰팡이처럼' 피어난 녹색의 여리여리한 이파리들. 이 계단 말고 돌계단을 직접 밟고 가다 보면 가끔은 덜컹덜컹

움직이는 계단석이 있었다. 순간 움찔하게 되는 상황.

3층 성소에 해당하는 지역. 예전에는 원래 ‘황금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3층 꼭대기.

원나라 때던가, 중국 사신이 이곳에 거주하며 남긴 글에 따르면 여기가 온통 황금으로 치장된 그곳이라지만,

지금은 네발짐승처럼 팔다리를 온통 몸무게 지탱에 쓰는 여행자들만이 굳이 올라가 보는 곳.

낑낑 올라가서 내려다 본 피미아니까스의 연못. 여기는 왕과 왕비가 동침하기 전에 스르륵 옷가지를 풀어헤치고

몸을 씻던 곳이 아닐까, 아니면 얼핏 어디선가 본 것처럼 후궁들이 몸을 씻었던 곳인지도. 힌두교의 사제들은

정절을 어케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이 곳에서 딱 이런 시선으로 마치 나뭇꾼이 선녀 목욕 훔쳐보듯 밤마다

벌건 눈으로 두리번거렸을지도 모른다.

어느 사원 근처에나 쭉 늘어서 있는 행상들. 잡다구레한 액세서리도 팔고, 시원한 물과 음료는 기본이고 코코넛을

큰칼로 손질해 즉석에서 빨대를 꽂아 코코넛주스를 팔기도 한다. 그리고 예외없이 눈크고 이쁘장한 아이들까지 완비.

사람 댓명이면 꽉 차버릴 만큼 좁은 정상에는 향꽂이랑 조그마한 함이랑 뭐 그런, 예불 드리기에 딱 좋은 일습이

구비되어 있었다. 뭐랄까, 저 사진만 보면 왠지 계룡산이니 마니산이니, 그런 곳에서 예불을 보거나 나름의 종교의식을

치르는 분들의 장비랑 그 분위기랑 비슷하다.

앙코르왓의 돌들은 전부 이런 사암석, 라테라이트라고 한다던가. 흙을 물에 개어서 벽돌을 만들면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는 단단한 벽돌이 된다고 했다. 부분부분 누런색이 끼어있는 걸 보고 혹시 과거의 금칠이 남아있는 건가

눈을 크게 뜨고 꼼꼼히 뜯어봤지만 아니었다는. 손톱으로 좀 긁어봤어야 했다.

내려가는 길에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올라오긴 햇는데 막상 내려가려니 그 체감하는 경사가 또 다른 게다.

밑에서 올라오려 기다리는 서양 아주머니들이 몇 분 있길래, 위에 아무 것도 없다고 얘기해줬더니 마침 잘됐다

싶은지, 냉큼 앞장섰던 의욕에 찬 아주머니 한 분 손을 이끌고 뒤로 이끄셨다.

사진이 좀 작게 찍혔는데, 저 달구지 같은 것 위에 올려져 있는 건 무슨 조각상의 몸통이다. 아마도 배꼽부위쯤.

그야말로 유적이 발로 차이고 홀대받을 정도로 넘쳐나는 공간이라는 실감이 들었다.

수퐁나무, '툼레이더'에서 그 신비로운 폐허를 만들어낸, 그밖에도 다른 앙코르왓 유적들을 잡아삼킨 주인공이다.

마치 어린왕자의 바오밥나무를 연상케 할 정도로 두려울 정도로 거대하고 거침없는 이 나무는, 그래도 현지인들에게

큰 효용이 있다고 한다. 저기서 나오는 검정액체가 일종의 기름 대체물이 된다는 것. 호롱불도 밝히고, 배도 용접하고.

그러고보니 캄보디아는 여전히 전기가 귀하여 어두워지면 이곳 사람들은 바로 잠자리에 든다고 한다.

궁전터를 돌며 마주친 또다른 연못. 어렸을 적 동남아 지역에 대해 어렴풋이 들었던 내용 중에는, 비가 오고 나면

커다란 물웅덩이가 생기는데 그 안에서 바로 고기들이 뛰어논다던가. 그토록 풍족하고 먹기 살기 편하다는 정도의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발전이 늦었다느니, 식의 왜곡된 사실까지는 당시에도 별로 와닿진 않았지만,

비가 내리면 물고기가 뛰어노는 물웅덩이가 생긴다는 이야기는 꽤나 매력적이었다.

문득 무너져 내린 왕궁 담장. 나무들이 빼곡하고 잎사귀가 무성해서 시야가 많이 가리지만, 답답한 느낌보다는

뭔가 야~ 눈이 좋아지겠다, 라거나 피톤치드를 많이 흡수하겠네, 라는 식의 상쾌한 기분.

쭉쭉 뻗은 미끈한 나무들. 잘 생겼다, 라는 느낌도 있지만 워낙 크다. 머리 하나쯤 큰 서양인의 훤칠하고 우월한

골격을 보는 것 같다.

온통 녹조류가 끼어서 초록빛 스프가 고인 것처럼 되어버린 연못. 뭔가 신비한 것이 저 아래 숨어있지는 않을까,

마주한 연못 하나가 문득 몽환감을 불러일으켰다.



바푸온으로 향하는 잘 닦인 돌길은 여느 힌두교 사원과는 달리 '나가 난간(뱀머리와 몸통으로 장식된 난간)'이 없다.

지상과 천국을 잇는 다리를 재현하려는 의도였다고 추측된다는데, 탁 트인 채 주변 녹지와 이어져 있어 살짝

어색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이다.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에 한 컷. 그런데, 저 너머 천국은 얼핏 봐도 공사중.

양쪽에 배치된 인공 연못은 열대 기우 특유의 끈적한 느낌이 묻어났다. 뭔가 쏴한,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이 아니라

끈적한 젤리나 타르처럼 몸에 덕지덕지 묻어날 것 같은 연못물. 바람이 일면 수면이 푸딩처럼 흔들렸다.

사방에 흩뿌려진 돌덩어리들에 쭈그려 붙어앉아 뭔가를 열심히 정돈하는 사람들. 혹은, 단순히 잔디깍는 중인지도.

'바푸온', 숨긴 아이라는 뜻의 사원은 전쟁 때 아이와 아내를 숨겼다던가, 그런 연유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지금이야 무너지고 부서져 사방에 구멍이 숭숭 난 채 헐벗어 있지만, 그때만 해도 피신자들을 품넓게 넉넉히 안아줄
 
만한 커다란 사원 아니었을까. 아마도 새들마저 조심할 만큼의 위엄이나 신성을 띄고 있었을 거다.

네모 반듯반듯한, 게다가 계단 차곡차곡한 연못. 아마 사원에 들어가기 전 몸을 씻는 공간이었지 싶다. 어디서나

어느 때나 물이 갖는 이미지란 별 수 없는 거다. 정화, 죄씻음, 그런 이미지. 인간의 상상력이란 의외로 한계랄까

그 구획이 뚜렷하다. 마치 저 연못처럼.

인류에게 공동된 거대한 지식창고가 우주 어딘가에 있고, 인류의 각 민족들은 거기서 조금씩 지식을 끌어쓰고

있다는 뉴에이지류의 상상력이 새삼 신선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먼 타지에서 '별수 없군'이란 생각을 들게

만드는 몇가지 진부하고 익숙한 사고방식이나 그 결과물을 만날 때.

가까이서 바라본 바푸온 사원의 본전은 생각보다 많이 뭉개져있었다. 복구를 한다고는 하는데, 오랜 내전이나 

킬링필드, 인접국과의 전쟁 등 여러 역사적 굴곡을 겪으면서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도면이 사라지기도

했다는데, 엄격한 좌우대칭의 원칙을 지키는 공법과 여러 노력을 기울인 덕에 나름 복원을 재개하고 있다고.

캄보디아는 근 칠십년이던가, 19세기 중반이래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었다. 아마 앙코르왓이 재발견된 것도

프랑스 식민시절이 아닐까 싶은데, 이 곳의 수많은 유적들은 지금 각국의 지원을 받아 복원되거나 유지되고 있다.

당장 바푸온사원도 이렇게,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복원이 한창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캄보디아가 스스로의 힘으로 '과거'를 돌보기엔, 그들의 '현재'가 너무 숨가쁘다.

돌덩이에 그려진 전 식민국가 프랑스의 자유/평등/박애 삼색기.

태양을 피하는 법. 몸을 숨길 조그마한 그늘막 아래서 뜨거운 태양볕을 피하고 있는 인부들. 저 그늘막의 남루함

혹은 빈티지스러움은 왠지 천년을 지낸 사원에서 느껴지는 '남루함' 혹은 빈티지스러움에 필적하고 있다.

새로 해 넣은 이가 과장스럽게 반짝거리듯, 뭔가 새로운 걸로 '땜빵'해넣은 곳이 온갖 시선을 한몸에 받듯,

반짝거리는 복원부분. 보통 새로 기워진 부분이 이전 몸체에 융화되려면 그간 본체를 써온 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한다던데. 바푸온 사원의 새롭게 복원된 부분이 자연스럽게 원형에 녹아들려면 또다른 천년쯤이 흘러야 하지 않을까.

문틀에 조각되어 있는 동물들의 움직임이, 마치 문틀을 발로 차 깨고 어디론가 도망가려는 것처럼 역동적이었다.

아마도 사원의 복원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사무실로 쓰고 있지 않을까, 싶도록 사원 옆에 딱 붙어 세워져있던

'움집'. 아기돼지 삼형제 중 게으른 첫째가 지었다던 지푸라기집이 이런 거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그 첫째돼지는

게을렀던 게 아니라, 동남아와 같은 아열대성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한 건지도 모른다.

엉성해보이는 외관은 실은 바람 숭숭 통하기 위한 지혜이며, 햇볕만 막음 되니 공들여 담쌓고 벽세울 필요도 없을 터.

사원 위에 올라 내려다 본 천상과 지상을 잇는 참배로. 저 멀리 보이는 건 한무리의 참배객, 아니 단체여행객.

어느 나라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이나 영어 가이드가 붙었다면 설명도 훔쳐듣고 좋았을 텐데, 한템포 빨랐다.



바이욘은 크메르왕국의 전성기를 구축했던 '자야바르만 7세'의 무덤으로 추측되고 있다. 바이욘에 있는 오십여개의

탑 네면에는 모두 사람 얼굴이 돌로 짜여져 있는데, 이 얼굴이 아마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로 죽고 나서도 왕국을

수호하겠다는 의지, 지켜보겠다는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해석이다.

바이욘에 들어가 돌아보기 전 한번 여행책자를 일별해 보았다. 뒤로 보이는 수많은 아이들은, 여행객의 복장, 말투의

힌트를 얻고 '안녕하세요 일달러, 니하오, 곤니찌와, 하이'를 넘나들며 조악한 악세사리를 다짜고짜 들이댄다.

자야바르만 7세, 앙코르왓 유적군의 대부분은 그의 치세 때 세워진 것들이다. 이름이 잘 안 외워진다면,

"잘 발음해봐" 자야바르만. 이제 한 큐에 외워버렸다.

캄보디아에 대한 몇 안 되는 이미지 중에 빠지지 않는 '압사라 댄스', 머리에 금탑같은 거 쓰고 손으로 인을 맺으며

추는 춤이 바로 이런 '압사라'들의 동작을 흉내낸 거다. '압사라'란, 태초에 세계가 거대한 우유바다였는데 그걸

신과 악마들이 휘저으며 세상을 창조할 때, 우유 거품에서 태어난 무희의 신들이다.

바이욘에 들어서니 이미 두 무리의 단체여행객이 회랑을 선점했다. 바이욘 회랑에 그려진 벽화를 따라 가이드의

선전을 들으며 그들이 진격하는 사이, 한쪽에 자리잡고 앉아 사간 용과(Dragon Fruit, 龍果)을 까먹었다.

삐딱하게 세워진 위험 표지판만큼이나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는 유적. 그렇지만 여긴 그래도 대표적인 곳 중 하나라

잘 관리되고 있는 축에 속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깨달았다.

돌에 새겨진 조각이라기엔, 드문드문 곰팡이도 슬고 퇴락한 것처럼 보여서 무슨 그림 같다. 그냥 자연 그대로의

돌덩이였다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저 씻겨지고 부서져 여전히 돌덩이 그대로였을 텐데, 사람의 손을 타고나니

돌에 시간이 새겨진다.

앙코르 톰은 4대문을 가진 성곽도시였다. 바이욘을 기준으로 남쪽은 귀족들의 거주지역, 북쪽은 왕궁과 사원이었다고
 
하며, 백성들은 악어가 사는 해자를 지난 성벽 외부에 살았단다. 돌로 만든 것들만 남아서, 지금은 가로세로 3km의

성곽과 내부의 왕궁, 사원들만 남아 있지만 이런 회랑의 벽화를 통해 과거의 모습을 그려볼 수가 있다.

얼굴이 숨어있는 돌탑들, 이정도면 차라리 얼굴이 스며들은 돌탑이라는 게 나을지도. 20만개가 넘는 돌들을 쌓아올려

만들어졌다는 이 얼굴들은 약간씩 표정이 다르다. 세월에 따라 버즘처럼 피어오른 얼룩이들이 뉘앙스와 표정을

바꿔놓았는지도 모르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저 두툼하고도 커다란 입을 벌려 껄껄 대고 웃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입을 벌려 혀를 움직이고 이를 부딪혀 무언가 말을 만들어낼 것 같기도 하다.

다소 양식화된 형태의 나무. 정글 지역의 나무답게 사방팔방으로 가지를 뻗었다.

코끼리가 한바퀴 돌았나보다. 바이욘 사원의 문간 너머로 문득 잡힌 코끼리.

알고 보니 흡연 금지, 쓰레기 투척금지, 식사 금지, 음...떠들기 금지.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그리고 사원이니만치

민소매 대신 반팔을 입으라는 지침. 반팔을 입으라는 건, 사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서양인들은 차제에

선탠까지 같이 하고 싶은 듯 다들 바짝바짝 짧게 입었고, 나도 벌써 흠뻑 젖은 옷을 보니 차라리 나시가 낫겠다싶다.

희끗희끗한 붓의 터치감, 약간 탁한 초록빛 풀빛이 섞인 진회색의 사원. 불투명수채화 화폭 가운데에다 대고

사람이 얼굴을 마구 눌러대는 것만 같다.

낙서란, 어쩔 수 없다. 아예 정과 망치로 새겨버린 듯한 이 오랜 낙서는, 어느 시점부터는 '유적'이 될 게다.

회랑을 지나 사원의 내부로 들어가는 길, 아무런 조명도 없는 그곳까지 스물거리며 기어들어온 정글의 햇살.

아래서 보면 살짝 웃는 거 같기도 하다. 훈남. 정면에서 볼 때랑 밑에서 볼 때랑, 이게 바로 얼짱 각도의 마법?!

원래 54개의 탑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약 40개가 안 되는 탑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 탑 중 하나 안에 들어가보니

하늘이 저멀리로 밀려나있다. 하늘을 길어내릴 수 있을 법한 거꾸로 '우물'이다.

"Hey Ya hey Ya Fire Fire 오 아가씨 Yeah ya Yeah Ya Warning Warning No No"(냉면, 명카드라이브 中)

명수 생각하다. 이정도 가파름이라면, 제시카를 업어야 한다. 근데 낼모레 마흔인 내가, 내몸도 추스리기 힘들텐데.

시카 생각하다. 이정도 가파름이라면, 명수 오빠를 업어야 한다. 에효. (팬픽 '금단의 사랑' 51부 中)

이 사자상의 매혹적인 뒤태. 돌로 조각해서 만들었다기엔 너무 유연하고 봉곳하다.

어이, 비웃지 말라고. 사자상 뒷태 좀 감상했기로서니. 가까이서 보면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것들.

압사라 댄스 무희 복장을 하고, 여행객들과 함께 사진찍을 준비를 하고 있는 젊은 처자들. 1 달러였던가, 나는

누군가 함께 찍힐 준비를 하고 있는 새 그녀들만 사진에 담아와 버렸다. 내가 들어있지 않아도, 내가 찍은

사진이면 만족한다.

누구라도 생각할 법한, 액자식 프레임 안에 담긴 '크메르의 미소'.

질문. 이 사진안엔 총 몇 개의 얼굴이 담겨 있을까요.

미소짓고 있는 압사라. 왠지 머리굵어지고 나서 석굴암에 다시 한번 가봤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거기에도 압사라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건 좀. 무슨 공포영화도 아니고, 얼굴을 정육점 회전분쇄기에 대고 갈아버린 것 같잖아. 근데 좋댄다.

돌들에 나 있는 구멍들은, 아마도 돌들을 서로 이어놓기 위한 이음새를 꼽아넣었던 자국 아닐까 싶다.
 
약간 폐허의 느낌처럼 돌조각들이 산재해 있는 바이욘의 내부 공간. 그래도 천년이나 무사히 버텨온 게 대단하다.

여긴 금세라도 이런 거대한 나무와 덩쿨들이 짖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은 '정글'이란 말이다. 악어와 원숭이들이

뛰놀고 뱀들이 쉭쉭거리며 한동안 인적을 끊어놓았을 그런 깊은 야생의 정글.

그 와중에 마주친 고양이 한마리. 꺄아~ 이 곳의 고양이도 한국의 고양이처럼 보드라운 털실을 신고 살금살금

사람 사이를 돌아다녔고, 살짝 뾰루퉁한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도도함을 잃지 않았다.

목이 잘려나간 수문장. 신화와 은유의 세계였던 그 때 사람들의 사고를 어찌 오롯이 이해하랴만은, 이 곳의

힘을 약화시키겠다며 수문장의 목을 꺽고 조각상들을 훼손한 침략자들의 심보야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어쩌면 발전한 건 인간의 도구일 뿐, 그걸 다루고 이용하는 인간은 별반 진보하지 않았다. 어쩌면 철저히

분업화되고 실제 생산활동에서 유리된 현대인은 생존능력이랄까, 어떤 면에서는 퇴보했는지도 모른다.

올록볼록 양감이 뚜렷한 탑들이 천년을 버티고 서있었다. 아기자기하게 인공으로 꾸며진 작은 돌산 같기도 하고.

떠나기 전 뒤돌아 바라본 바이욘의 전경. '크메르의 미소'는 숨어버리고 '크메르의 사원'이 남았다.




흔히 '앙코르왓'이라고 칭하는 크메르 유적군은 멀게는 씨엠립 시내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롤루오스 지역,

37킬로미터 떨어진 반띠아이 쓰레이까지 포괄하는 넓은 지역에 수십여 유적이 산재해 있는 방대한 지역을
 
이른다. (사실 '앙코르왓'은 그 유적군 중 하나, 대표적인 하나의 유적 이름이다.) 캄보디아만 따로 다룬 안내책은

생각보다 많지도 않지만 보통 뚝뚝을 하루 종일 대절하는 것을 전제로 하루짜리, 혹은 삼일짜리 일정을 엇비슷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나름 좀 새로운 루트를 구상해봤다.


첫날(자전거) : 일명 '그랜드 투어'라 불리는 코스. 오전에는 앙코르 톰(Angkor Tom)(바이욘, 바푸온, 피미니아까스,
 
옛궁전터, 문둥이왕테라스, 코끼리테라스), 오후에는 쁘리아 칸(Preah Khan), 니악 뽀안(Neak Pean),

따쏨(Ta Som), 그리고 쁘레룹(Pre Rup)까지.

* 자전거 대여료는 호텔에서 보통 하루 3달러, 예치금을 맡기기도 한다. 그랜드 투어 이외에 스몰 투어 코스가 있는데

이름 그대로 좀더 짧고 여유로운 코스가 될 거 같다.


둘째날(뚝뚝) : 외곽지역의 포스트들을 작정하고 둘러보는 코스. 오전에는 쁘라삿 끄라반(Prasat Cravan), 반띠아이
 
끄데이(Banteay Kdei), 쓰라쓰랑(Sras Srang), 반띠아이 쌈레(Banteay Samre), (한참달려) 반띠아이 쓰레이

(Banteay Srey), (한참달려) 오후에는 롤루오스 유적군(롤레이(Lolei), 쁘레이꼬(Preah Ko), 바꽁(BaKong)까지.

* 뚝뚝의 종일 렌트비는 12-15 달러 정도? 흥정하기에 달린 거 같다. 다만 반띠아이 쓰레이 쪽을 가려면 10달러 정도
 
비용을 더 내야 하니, 차라리 추가비용 내고 도는 김에 외곽지역을 다 도는 게 좋을 듯 하다.



셋째날(자전거 또는 도보 또는 뚝뚝) : 앙코르왓 유적군의 핵심, 앙코르왓과 기타 지역 둘러보는 코스.

오전에는 박쎄이 참크롱(Baksei Chamkrong), 앙코르왓(Angkor Wat), 승리의문(Angkor Tom East Gate),

오후에는 톰마논(Thommanom), 차우싸이 떼보다(Chausay Thevada), 스삔토마(Spean Thma), 따께우(Ta Keo),

따쁘롬(Ta Prohm), 프놈바껭(Phnom Bakheng)까지.

* 체력 상태에 따라, 충분히 도보도 가능할 만큼 오밀조밀 붙어있는 포스트들이다. 다만 도보라 해도 뚝뚝 등을

이용해 앙코르 왓 내부까지는 들어와야 하며, 씨엠립시내에서 앙코르왓까지 최소 5달러는 줘야 하는 듯. 그러느니

자전거나 뚝뚝을 이용하는 게 경제적이기도, 편하기도 할 거다.



기타 문의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 제게 문의해주시면..최대한 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지만, 막상 이렇게 정리하고보니

기존 루트와 아주 다르진 않다. 다만 앙코르왓을 맨 마지막으로 아껴두었던 건 정말 잘 한 거 같다. 그걸 보고 다른 걸

봤다면 아마도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듯. 갠적으론 반띠아이 쓰레이, 앙코르왓, 따 쁘롬이 정말 좋았다.

어쨌든, 그런 정도로 거칠게나마 일정을 짜두고 출발한 첫날 아침, 물안개 너머 어슴푸레한 앙코르왓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대로 앙코르 톰까지 직진. 남문을 지나기 직전이다. 이미 사람들이 바글대는 건가 살짝 긴장했는데

워낙 넓은 곳에 흩어지다 보니 별로 여행객이 많다는 느낌은 내내 안 들었던 것 같다. 남문 고푸라(현관문짝..

이랄까)에서 언뜻 내비치는 큰바위 얼굴이 보이는지.

난간에 장식되어 있는 사람의 형상. 실은 이런 장식 하나하나에도 과거 신화의 한 대목을 구현한 내용이 응축되어

있어서 아는 만큼 보이는 거고 더욱 재미있게 느낄 수 있는 거라지만, 모른대도 딱히 문제될 건 없다. 앙코르톰을

둘러싼 넓은 해자는 살짝 말라있었다. 유럽 중세의 성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깊은 해자와 도르레로 오르내리는

거대한 성문이 떠오를 텐데, 그 해자가 서기 천년경 크메르 양식으로부터 전래된 거란 사실은 꽤나 놀라웠다.

어디로 갈까, 여기는 어딘가 잠시 자전거를 내려 길을 살펴보고 있는 라이더 윤. 그러고 보면 이날 햇볕이 그리

뜨겁지 않아 왠종일 자전거를 타는 게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오후엔 스콜이 잠시 내려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달리기도 했지만, 그 역시 더위를 식히는 데 일조했을 뿐더러 무척이나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

남문에서 쭉 올라가니 앙코르 톰의 대표 유적지, 바이욘Bayon이 있다. 캄보디아에 대해 갖고 있는 몇 안되는

이미지 중 하나가 바로 이 거대한 돌머리, 이른바 '크메르의 미소'가 아닐까 싶다. 그 크메르의 미소가 사면에

그려져있는 탑이 백여개라던가, 그런 유적지가 바로 바이욘이다.

멀리서 보면 그냥 정교하게 잘 쌓아올려진 완만한 굴곡 띈 돌탑들, 혹은 사원으로 보이지만 조금 눈살에 힘을 주고

눈여겨보자면 몇 개의 얼굴이 떠오르는 게 보인다.

앙코르 톰 주변을 코끼리로 돌아보는 여행자들. 쭉쭉 뻗어나간 나무들, 울창한 정글 사이를 저렇게 코끼리 타고

누비는 것도 꽤나 매력적일 거 같았다.

뭐랄까, 나무들이 전부 훅, 하고 자라난 느낌이었다. 한국에서 익숙했던 사이즈와 기장의 나무들이 아니라

훨씬 크고 훨씬 높다란 나무들이어서 영판 다른 종을 보는 듯한 느낌. 이런 나무들이 쭉쭉 자라나는 정글속에서

문득 앙코르왓 유적지, 천년 동안 버텨낸 유적지를 처음 발견했을 자의 경이로움이란,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앙코르 톰, 바이욘 앞에 정비된 자그마한 연못들. 세월의 때가 눅진눅진 묻어있는 돌덩이들인지라, 건조물 자체가

하나의 자연석인 양 느껴진다. 본격적인 앙코르 톰 탐방은 다음 포스팅으로~*




앙코르왓을 돌아보는 루트는 짜기 나름이다. 몇 권 들춰본 가이드북마다 제각기의 코스를 제안하고 있었는데,

그건 대개 가이드를 대동하고 뚝뚝을 이용하는 걸 전제로 깔고 있었다. 여행이라고 와서 오토바이로 윙윙 지나는 건

왠지 아니다 싶어서, 첫날은 우선 자전거를 타고 달려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하루에 3달러에 대여해 주었고, 사고에

대비한 예치금 20달러를 별도로 내야 했지만, 이미 자전거를 이용한 그랜드투어, 스몰투어 코스가 있을 정도로

자전거 이용은 활성화되어 있다. 근데 실제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은 전부 서양인이었다는.

자전거를 타고 숙소에서부터 앙코르왓까지 밟아댄 설레는 아침. 출근길의 캄보댜 사람들이 신기한 듯 흘낏대며

쳐다봤고, 승용차와 트럭과 뚝뚝과 오토바이(모또)와 자전거가 뒤섞인 도로는 생각보다 정신사나웠다. 알고 보니

아직 캄보디아는 제대로 된 교통질서가 확립되지 않았다던가. 신호등이나 교통 체계, 표지판 같은 게 꽤나 취약하다.

그래도 모두들 알아서 조심조심, 비록 차선도 무시되고 역주행도 흔한 일임에도, 별탈없이 유유자적 흐름을 잘 타고

있었다.

달리다가 보니 어느 순간 한적해진 길, 아마 씨엠립 시내 중심부까지의 출근길을 벗어나 앙코르왓으로 빠지는

길 어귀에서부터 급 한가해졌던 것 같다. 이제 자전거를 타며 카메라를 찍어대는 묘기를 부리기 시작. 춤추는

카메라에 길가 좌대가 잡혔다. 저건 뭘까. 양주병, 음료수페트병, 그리고 큼지막한 깔대기 하나까지.


뭐냐면, 오토바이 혹은 개조한 삼륜차 뚝뚝이 주된 교통수단이 되고 있는 나라인지라, 기름을 저렇게 병 단위로

사서 즉석에서 주유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빈병은 어디서 났는지, 저런 비싼 고급양주병이 흔할리가 없는데.

알고 보니 워낙 흔히 보이는 풍경이라 나중엔 그러려니 했지만, 처음엔 어찌나 신기하던지.ㅎ

캄보디아, 라고 하면 무지 멀어보이고 무지 못 사는 나라같지만-또 실제로도 맞긴 하지만-생각보다 세련되었달까

잘 꾸민 여성들, 남성들도 눈에 종종 띄었다. 특히 씨엠립같은 시골 관광마을 말고 프놈펜같은 수도로 가면 더욱.

매우 '컨츄리틱'한 '구루마'와 나름 세련된 스타일의 뽀얀 여성분.

이런 식으로 기름을 팔기도 한다. 휘발유와 디젤인가, 아마 그렇게 두 종류인 듯 한데 그냥 드럼통을 갖다놓고

저기서 바로 뽁뽁이로 주유. 아까 봤던 병들이 기름보다는 일보 전진이라 해야 할지.

아침 일곱시부터 서둘러 나서서 그랬는지, 앙코르왓까지 가는 길은 무척이나 한적했다. 드문드문 현지 사람들과

함께 달리기도 하고, 아직 관광객들은 아침을 먹고 있나보다 싶었다. 어쩌다 보니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입장료

사는 곳을 지나쳐버린지라 좀 돌아가야 했지만, 덕분에 아침부터 한시간 이십여분을 줄창 자전거로 달려야했지만,

꽤나 재미있었던 라이딩.

아침부터 사이좋게 아이스크림을 빨며 자전거를 타던 귀여운 남매, 자전거를 타고 카메라를 두리번대는 내게

자신있는 ^^V 제스처를 취해준다. 스스럼없는, 그리고 그저 친근한 그 태도에 나 역시 활짝 웃고 말았다.

옆에서 미친듯이 페달을 밟으며 맹추격했던 꼬맹이 녀석. 저 의지에 가득찬 눈빛과 그야말로 건각(健脚). 건강한 다리.

나랑 한동안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유쾌하게 앙코르왓으로 향하는 정글 가운데 이차선 도로를 점령했던 꼬마친구.

입장소에서 파는 앙코르왓 입장권은 1일 패스, 3일 패스, 그리고 일주일 패스. 3일짜리, 일주일짜리는 즉석에서

사진을 찍어준다. 저 여자분 뒤에 조그맣게 캠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걸 찍으려는 순간 여자분이 몸으로 가려버려

의도치 않은 도촬...ㅡㅡ;; 좀 더 웃는 얼굴로 나왔음 더 이뿌셨을 텐데 아쉽..

보통 앙코르왓을 제대로 보려면 최소한 3일 패스는 써야 한다고 한다. 워낙 넓은 지역에 많은 사원들이 흩어져있어서.

1일 패스는 20달러, 3일 패스는 40달러, 일주일 패스는...모르겠다. 입장권의 배경은 앙코르왓 유적의 정수 중 하나인

'반띠아이 쓰레이'. 여긴 앙코르왓서 약 30킬로 떨어져있어서 차량을 타고 가야 한다.

입장권을 사고 다시 앙코르왓으로 힘차게 페달을 밟는 길, 길을 좀 헤멘 탓인지 툭툭을 타고 속속 도착하고 표를

사 떠나는 여행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맘이 급해졌다.

그래도 이미 한시간여 자전거를 내리 달린 데다가, 입장권 판매소에서 앙코르왓까지는 2-3킬로미터를 또 달려야

하는 터라 길가에 과일판매대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바나나, 용과, 라임, 오렌지 따위를 팔고 있길래

용과를 사서 다시 출발하려는데, 저토록 편안해보이고 재미있어 보이는 해먹에 자꾸 눈이 갔다.

앙코르왓을 둘러싼 100미터짜리 해자, 그 바깥쪽 둔덕에 앉아 아이들을 씻기고 있던 아주머니. 아이들 셋을 혼자

단도리하려면 얼마나 힘들까 싶다. 해자가 얼마나 넓던지, 아침햇살을 맞으며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감싸니 마치

여름날 한강 상류에서나 마주할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뜨겁게 이글거릴 햇볕을 예고하는 짙은 물안개.

물안개 너머 보이는 앙코르 왓의 실루엣.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한시간 넘게 쉼없도록 달린 자전거

탓도 있겠지만, 툭툭 타고 슝 왔으면 왠지 이런 설렘은 덜하지 않았을까. 자전거 타고 첫날을 시작하길 잘했다 싶은

순간이었다.

문득 돌아본 길가엔 코끼리 주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음..코끼리가 노니는 땅이로구나.

짙은 정글, 그 사이 놓여진 얄포름한 포장길 한 줄. 그렇게 한참 가다가 문득 당도한 앙코르왓이었다.






보통 캄보디아는 인접한 태국이나 베트남, 요새는 라오스까지 연계해서 일정을 짜는 것 같던데, 그냥 캄보디아만

일주일 돌아보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캄보디아라는 이 거대한 땅덩이가 아니라, 앙코르왓을 볼 수 있는

'씨엠립(SIem Reap)'과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Phnom Penh)', 그 두 점과 두 점의 사이를 잇는 부피감없는

그야말로 얄포름한 선 하나일 뿐이다. 어느 나라 다녀왔어, 라는 말이 때론 무지 허망하고 슬프게 들리는 이유다.
 
8월 23일 오후 7시, 캄보디아 씨엠립으로 향하는 대한항공 비행기 이륙 직전. 돈이나 시간이나 부족하긴 학생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 그치만 '학(사경)고'의 위협보다 '밥줄끊김'의 위협이 더 크다는 게 캄보디아만 돌기로 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국경을 넘고 장거리를 이동하는 것보다-설혹 비행기로 훅 한번에 간다해도 공항에서 지체할

그 시간들을 고려한다면-그냥 한 나라 내에서 동선을 최소화하며 많이 보는 게 낫겠다 싶었다.


놀랐던 건, 캄보디아 씨엠립과 프놈펜에 하루 한번씩,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취항하고 있단 사실이었다.

왠만한 외국항공사보다 싼 값에 미리 사두었던 할인항공권인지라, 아마도 여행으로 밖에 나가면서는 처음

국적기를 타 보는 것 같다.

5시간 25분간의 비행은 금방이었다. 저녁 먹고, 여행계획 짠다고 가이드북 좀 들여다 보고, 그랬더니 금세 내리랜다.

원래 앙코르왓은 하루 차량을 대절하고 가이드까지 사서 도는 게 일반적이라고는 하던데, 그건 왠지 아니다. 모름지기

여행이라면 미리 공부해가고 또 가서 보면서 궁금한 건 찾아보고, 그렇게 스스로의 걸음걸이와 호흡에 맞춰 다니는거

아니던가. 덕분에 비행기에 내리기 전 머릿속에는 힌두교의 온갖 신들, 시바니 크리슈나니 파르바티니, 가네샤니

나가니 하는 이름들이 제법 익숙하게 자리잡았다. 실은 어릴적 탐닉하던 만화책 '3X3 EYES'의 공헌이 컸다.

3X3 EYES의 삼지안이 바로 힌두교에서 말하는 시바의 상징, 힌두교의 십자가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고 보면, 알제리 출장 직전엔 노무현 전대통령이 서거했고, 캄보디아 여행 전엔 김대중 전대통령이 서거했다.

출입국사무소로 들어가기 전 돌아보니 우리가 탔던 비행기가 마치 산소호흡기를 꼽은 위급한 환자처럼 무언가

주렁주렁 달고 있다. 제일 작은 사이즈의 보잉기지 아마 저게? 작은 만큼 소음도 크고 진동도 컸지만, 뭐 잘 왔다.

여행이니만치, 국내의 온갖 비루하고 저질스런 것들은 싹 잊기로 했다.

도착하고 나니 검역서를 제출하란다. 비행기 안에서 스튜어디스 언냐들이 미리 나눠줬던 검역서를 제출하는데,

전부 마스크를 쓰고 분위기도 왠지 뒤숭숭하다. 신종 플루 때문에 여기도 난리구나, 싶기도 하고 혹시 열난다거나

재채기한다고 격리조치하거나 귀국조치시킨다 해도 거스를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별 무리없이 적을 수 있는 내용들, 열? 없다. 기침? 안해. 두통? 말짱. 등등등. 없다면 되는 게지.

출입국사무소 들어가며 나눠받는 안내문, 꼬불꼬불한 저 글씨가 바로 캄보디아의 크메르어. 손 글씨도 저렇게

이쁘게 그림처럼 꼬불꼬불하면서도 정연할 수 있을까?

캄보디아 비자는 도착해서 바로 발급받는 게 더 빠르고, 편하고, 싸다는 얘기를 들었다. 여행용비자는 20달러,

웃기는 건 1달러를 더 내라던 직원의 이야기에서 비롯했다. 단체로 온 듯한 아주머니들, 21달러 내란 이야기에
 
발끈하셔서, 얘들 바가지 벌써부터 시작이네, 우리가 봉이야, 어이없네, 동남아가 그렇지, 못사는 나라가 원래

그래..운운.
 

이미 1달러가 왜 추가되냐고 묻고 그게 '심야시간대'에 붙는 할증의 일종이란 설명을 들을 수 있었던 나는 그녀들에게

그게 바가지가 아니라 나름 '심야시간 할증'이라는 명분이 있음을 알려주었고, 그러고 나니 한풀 꺽인 그녀들의

민감한 반응과 불만섞인 목소리. 가져갔던 사진 두장과 함께 비자피를 내고 한 오분 기다리니 비자가 나왔다.

마치 컨베이어벨트시스템처럼 누군가는 여권을 열고 넘겨받은 누군가는 비자스티커를 붙이고 누군가는 싸인을

해서 마지막으로 누군가가 여권의 이름을 호명하는 듯 했다.

통관대를 통과하면서 또다시 1달러를 내야했다. 이건 왜냐고 물어도 대답도 없고, 왠지 이번엔 정말 그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이 아닐까 싶었다. 이런 이야기는 어디에도 못 봤었는데, 뭘까. 굳이 정색하고 흥분할 일은 아니라 넘기기로

했다. 비자피가 22달러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굳이 1-2달러 갖고 날카롭게 굴고 기분상할 필요는 없지 싶어서.

화장실, 저 앞에 있는 사람이 문 열어주고 휴지 집어주고 팁을 달라하는 건 아닐지 예상했는데, 아쉽게도(?) 예상은

빗나갔다. 그냥 조용하게 서 있던 사람. 이집트에서 뭔가 바닥을 본 걸까, 이른바 제3세계라는 이곳의 웃음이나

말투가 너무 부드럽기만 하다. 평온한 느낌.

고작 1달러에 날카로워지고 격해졌던 감정은 아마도 열악한 공항시설, 허술한 체계, 어줍잖은 인테리어에 대한 불신,

불만에서 비롯했을지 모른다. 우스워보이기도 하고, 왠지 영 권위가 안 선다고 해야 하나,

씨엠립국제공항 출구까지의 거리는 참 짧았다. 문 밖으로 새삼 느껴지는 후텁지근한 바람, 생각보다 시원하고

보송보송해서, 이게 밤이라 그런 건지 아님 운좋게도 좋은 날씨에 당도한 건지 잠시 가늠해보았다. 몇개의

단체관광객용 표지판을 지나, XX투어, XX여행사, 지나서, 제일 먼저 하얀 웃음을 보인 캄보디아인이 모는 뚝뚝

-이곳이나 태국에서 유명한 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차-에 올라 공항을 빠져나왔다.

뚝뚝에 올라앉아 바라본 공항의 모습. 이미 현지시간은 밤 11시. 늘 신기한 건, 밤 19시에 인천서 출발해서

다섯시간 이십오분이나 비행기를 타고 도착해보면 밤 22시 반쯤밖에 안 되고 마는 시간과의 경쟁. 비행기안에서

시간은 대체 어떻게 흐르는 걸까. 출발시간과 도착시간은 알겠고, 둘 사이의 시차도 알겠는데, 그 사이에 흘러나간
 
시간은 어떻게 솔솔 빠져나가는 걸까. 1초에 1초만큼? 1분에 1분만큼?

뚝뚝은 열심히 달려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길 양편은 꽤나 오래된 듯한 어둠을 깔고서 고즈넉히 웅크리고 있었고,

가로등조차 변변치 않아 게으르게 문득문득 밝아질 뿐이던 어설픈 아스팔트 2차선 위를 꽤나 달려야 했다.

맹렬한 오토바이 배기음이 무색하게 영 속도가 안 붙는 그 움직임에 유쾌해졌다.

#1. 세관신고서.

#2. 출입국 카드.

#3. 캄보디아 비자신청서.





잘 다녀왔습니다~!
 
다녀온 사이 이 곳을 너무나도 잘 지켜주신 이웃분들 완전완전 감사해요^^ 특히 리나님!ㅎㅎ


어제밤 11시 비행기를 타서는 오늘 새벽에 인천에 떨어졌더니, 생각보다 많이 삼엄한 분위기더라구요. 신종플루가

이 정도로 수선스러워야 하는 정도에 이른 건지 좀 이해가 안 되었지만 어쨌든, 한잠도 안 자고 사진 정리하고

영화보고 해서 그런지 열도 오르는 느낌에 피로가 급 몰려와 여태 뻗어있다 잠시 살아났습니다.


어디 다녀왔는지는, 몇 장 두서없이 올리는 사진들 보시면 자연스레 아시게 될 거에요~*

본격적인 여행 이야기는 내일부터...(과연?ㅡㅡ;;)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을 근 천오백장이나 찍어왔어요^^
그곳의 해가 지는 모습이에요. 우기라 그런지 먹구름이 맹렬히 하늘을 달리더라구요.  

그곳의 뒷골목 풍경입니다. 빨래도 널려있고, 오리도 널려있는.

하늘엔 전선덩굴이 정글처럼 무성하게 뒤엉켜있고, 땅엔 트럭과 오토바이, 자전거 등 왼갖 탈것이 온통 뒤엉켜있고.

그곳의 올드마켓 풍경이에요. 대략 생김생김이 동남아의 필이 좀 오나요?

노을을 배경으로 한 제 실루엣이에요. 하늘 표정이 어찌나 드라마틱하고 변화무쌍하던지..그저 감탄했더라는.

사원입니다. 힌두교 사원으로 지어졌다가 후세에 불교사원으로 바뀌기도 하고, 불교사원으로 애초 지어지기도 한.

구름이 몽실몽실 담겨있는 네모난 해자. 흔히 중세 유럽의 성에서 떠올리게 되는 성 주변의 깊이 파인 해자가

실은 이곳에서 전래된 거라더군요. 놀랐습니다. 그리고, 앙코르왓의 아름다움과 거대함, 또 디테일함에 탄복했습니다.

앙코르왓에서 삼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반띠아이 쓰레이, 란 사원에 있던 연꽃밭에서 한 장.

옷이 온통 걸레가 되어가며 걷고, 자전거 타고, 뚝뚝(이라는 현지 삼륜차) 타고, 수영하고, 그랬네요.


잘, 다녀왔습니다~!^-^*



여행이 끝났다. 한달여 나의 의지에 오롯이 맡겨졌던 시간이 다시 내 아쉬운 주먹을 희롱하며 어딘가로 풀려난다,

사막의 모래처럼. 아주아주 크고, 딱딱한 책갈피 하나를 꼽아 넣은 느낌이기도 하다. 이왕이면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검정빛, 가죽냄새도 약간 나면 좋겠다.


8주마다 나오는 휴가와, 제대휴가를 온통 노가다판에서 보내며 모았던 돈이었다. 못을 밟아 피가 흐르는 발바닥을

뽁뽁 쳐대며 죽은 피를 뽑아내주던 작업반장의 망치질이 웃기기만 했던 건, 그래도 제대하고 나서 '군대에서 공찼던'

기억만 잔뜩 이야기해대는 '복학생'이 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군대라는 웅덩이에 내가 담겨 있었단 사실이 저만치 예전의 일인 양 스스로에게 낯설어진 것에 대해

감사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다합의 해변에서 되짚어 보았던 '나'라는 것으로부터 한걸음 더 멀어졌다는

얘기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했던 xx살의 나, 하루키의 매혹적인 이 표현을 쓰고 싶어서 난 23, 22, 21,그런 식으로

나라고 불려왔던 것이 밟아온 무대와 주어진 씬, 그리고 허용되었던 애드립과 - 사실은 스스로 알고 있었을 - 대사들을

충분히 떠올려 보고, 그게 뒤늦게 내게 의미했던 '필연성'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들과 같은 진실을 담은 온갖 표현들, 하지만 그것이 살아있는 울림을 갖고 효용을 갖는 것은

이미 그 진실이 자신의 지나간 과거로 굳혀진 이후일 뿐이다. 그처럼. 나의 과거도. 다행인지, 아직 크다란 후회나 참담한
 
고뇌를 되씹을 만한 상처를 입지 않은 내게, 미래란 언제나 여전히 최초의 반짝임을 그대로 간직한 신품의 크리스탈과

같다. 그리하여 불행인지, 무언가 바람이 바뀌어 불 때마다, 나는 노심초사하며 나를 되짚어보고 지금 나의 꿈을

생각한다. 혹여나 최초의 균열, 내지 최초의 후회-돌이킬 수 없을 만한-가 이로부터 비롯되지는 않을지, 여태 아무런

흠집없이 나름대로 명민하던 그 반짝임이 드디어 뭉그러지고 무뎌지는 건 아닌지. 혹은 이미 그리 되었는지도

모르겠으되, 그토록 커다란 책갈피의 느낌을 갖는 지금 다시금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없다.


여행은, 맨 몸이었다. 룩소르에서 10여시간 자전거를 타고 물통 네 개를 아작내거나, 17시간 버스에 구겨진채 버티거나,

혹은 등짐을 메고 왠종일 거리를 걷거나. 그러한 순수한 육체적인 깡다구로서의 의미 외에도, 이른바 계급장 다 뗀
 
상태에서의 맨 몸이었단 뜻도 된다. 혹자는 김일성의 한국이냐고 되묻기도 하는 그런 내 나라주소, 거기에 알게모르게

내 등뒤에 버티고 섰던 온갖 상징들-학력, 나이, 재력, ..이른바 사회적, 문화적인 자본이랄까-이 훨씬 희미하게

드러나는 곳에 순간적이나마 벌거벗겨졌다. (물론 여행자로서 달리 획득하는 또다른 온갖 외투들이 순식간에 다시

입혀지지만..)


그곳에서 내 앞에 펼쳐질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는 이야기는 곧 내가 돌아올 곳에서 다시 꿰어입어야 할 내 친숙한

껍데기들을 하나씩 꼼꼼히 뜯어보며 각각의 가능성과 내 의사를 타진한다는 것과 같지 싶다. 현재까지 내가 있었던 곳,

바라보던 곳,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그렇게 차근차근 지금의 '나'란 것에 대해 반추해보고, 그것이 어느쪽으로

얼마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 또 해는 앞으로 어디로 움직여 그림자가 얼만큼 어디로 길어지게 될지. 그래봐야

고작 한 뼘이겠지만.


생각이란 놈도 일정량의 치사량이 있는 듯하여, 술에 먹히는 경우 바로 게워내짐이란 행위로 다시금 술을 잡아먹을

준비를 가다듬듯, 생각이 잡다하게 얽히고 섥혀 결국 갈피를 못잡게 되면 다시금 토해내고 그 어느 맘 잡히는대로의

꼬투리에서부터 잡념을 이어가는 듯하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알 수 없는 건 알 수 없는 것.


그냥 가보는 거야, 라고 신해철이 '절망에 대하여'에서 절규했듯..그렇게. 역시나 답은 없이 고작 불타오르는 양광 아래

한뼘의 그림자로 방향을 가늠해볼 수 밖엔 없을 거 같다. 고대 이집트에선 그림자란 그 사람의 생명을 보호한다고

믿어졌다던가.


여행이 끝났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들을, 내가 정말 그것을 하고 싶어서 할 수 있다면, 노심초사 따위 고이접어
 
나빌레라.ㅋ



* 지금보다 낫던 그때의 마음과 정신상태. 아아..바쁘게 살기엔 삶이 짧단 말이다..




역시 터키는 뭔가 심심하다. 차가 달려도 빵빵거리지 않고, 사람들이 막무가내로 무단횡단을 하지 않으며, 공항도

좀더 럭셔리한 티가 풀풀 난다. 물론 터키항공의 불친절과 덜된 서비스정신엔 할 말 없지만, 적어도 트랜짓 동안 쉬라고

별 넷짜리 호텔을 제공했으니 그 또한 봐줄 수 있다. 밤 3시 45분 비행기로 날아서 6시에 이스탄불을 다시 도착한

참이었다. 자, 이제 저녁 8시 비행기 타기 전까지는 12시간 정도 시간이 있으니 뭘 할지 생각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번 하는데 꾸정물이 줄줄 나온다. 그런 시설에서 한번 씻고 났더니 피로가 대번에 풀리는 느낌,

대신 무지하게 배고파져서 일단 에미뇨뉴로 나와 고등어케밥부터 먹었다. 역시 맛있다. 파샤 모스크를 찾아가서 기대

이상의 인테리어를 좀 인상깊게 봐주고, 슐레마니에 가서 그들 술탄들의 무덤을 먼저 보았다. 천년쯤 된 무덤들이

그토록 고스란히 남아있다니, 종교의 힘이 아마도 그 시간을 지켜냈으리라. 도저히 눈이 감기고 피곤해서 모스크의

천장 그림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여기 터키의 사원들은 그다지-아니 절대-편히 쉬고 누워 잠잘 만한

정도의 분위기가 안 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구석에 가서 벽에 기대앉아 한시간쯤 잤나.


주섬주섬 일어나 한바퀴 돌며 인사해주곤, 중심가 산책이나 어슬렁대며 하기로 했다. 그랜드 바자르 한번 돌아보고,

이집션바자르도 한번 돌아보고, 블루모스크까지 걸었다. 도중에 격하게 친절했던 삐끼 아저씨들한테 잡혀서

양탄자 가게에 앉아 설탕 듬뿍 들어간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정치학 얘기까지. 그리곤

이집트 카르낙 신전에서 들고 와 이스탄불의 한 광장 복판에 서있는 오벨리스크에게 그곳의 안부를 전해주었다.


다시 블루모스크다. 근데 이집트를 거쳐 다시 바라본 이곳은, 정말 시장바닥이다. 전혀 모스크로서의 기능,

성소로서의 아우라를 잃은 채 그냥 관광지같다. 애들 뛰어다니고 단체관광객 줄서서 돌아보고 다니고. 그냥

한군데 퍼져 앉아 이리저리 고개 갸웃대며 바라보고 싶었는데, 왠 이상한 관광객들이 같이 사진찍자고 하질않나,

아님 애들이 놀자고 장난걸질 않나..머 나름 전부 여자였으니 불만이야 없었지만. 내가 원했던, 이집트에서

만끽했던 그런 분위기는 아무리 기다려도 절대 나올 법 하지 않아 걍 나와버렸다.


내 생각엔 이집트 문화의 양대축은 고대 파라오문화하고 이슬람문화인 거 같은데, 파라오의 그것들은 이미 충분할만큼
 
봤고, 이슬람문화는 카이로에서 제일 잘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하루에 다섯번씩 울린다는 아잔소리라거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스크 첨탑, 미나렛들은 이집트의 매끈하게 구획된 전 국토를 뒤덮고 있지만, 그게 뿌리깊은 유적처럼

남아서 지금 현재의 삶과 끈끈이 엮인 게 실감나는 곳은 아마 이슬라믹 카이로만한 곳이 없을 거다.

이슬라믹 카이로에서..아니, 카이로 전체에 수천수만개는 될거라는 저 황홀한 미나렛(첨탑) 중에서 가장 이쁘다고 생각한

알아자르 사원의 세개짜리 미나렛. 이 사원 안에서 난 앉아 쉬기도 하고, 배깔고 일기 쓰기도 하고, 론리가이드북을 펼쳐

일정을 구상하기도 하고, 지쳐 쓰러져 잠들기도 했었다. 마냥 저 미나렛을 질릴 줄 모르고 바라보다 기어이 한 컷.

그러고 보면 이집트에서는 계속 모스크 찾아다니며 아련한 아잔소리와 함께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좌식 문화에

익숙해선지 맘대로 누워도 되고 잘수조차 있는 그 평안한 모스크의 분위기가 넘 맘에 들었었다. 게다가 거기엔, 알 수

없는 부담감과 심적인 긴장을 일으키는 형상화된 신의 모습이 없어서..그 눈빛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게 맘에 든다.
 
그냥 저렇게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움푹한 공간이 있어서, 모두가 저 '지표' 너머 머나먼 메카를 응시하는 표정으로

예배를 드린다.

일단 알-아자르(Al-Azhar) 사원까지 걷고 좀 쉬어준 후에 이슬라믹 카이로를 돌기로 했다. 저번에 카이로에 머물던 때에
 
일부러 마지막을 위해 남겨놨던 지역이다. 근데 왜 이녀석들은 일본인이라니까 이렇게 친절해지는 거지. 세번째 온

알-아자르 사원인데 이제야 그 문 뒤의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을 소개해 주는 거다. 이로써 내가 사칭한 국적도 세 개.

북한인, 중국인, 일본인까지. 나를 드러내야 하는(identify) 일이 생기면 가장 유리한 게 뭘까 생각해서 필요한 국적을

꺼내 쓴 셈이다.


상인들의 숙소였다던 왈라카 어쩌구는, 마치 무슨 모델하우스 보는 느낌이었다. 새롭게 다시 지었다는 론리플래넷의

설명을 읽기 전에도, 어찌나 휑뎅그레하고 사람의 흔적이 하나도 없던지, 시간이 쌓이거나 사람의 체온이 묻었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래도 아, 이런 곳이 있었구나 정도랄까. 민속촌처럼.


이런 저런 모스크들을 또 순례하며 사진찍어도 된다는 꼬임이나 느닷없는 박시쉬 요구에도 이제 익숙해졌지만,

중간에 망고주스집에 들렀을 때 또다시 낯선 상황에 봉착. 주인아저씨는 가만히 있는데 주위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지들 멋대로 5파운드라느니 7파운드라느니, 진지하게 바가지를 씌우려는 거다. 음..쪼꼬만 애들부터 여행자를 봉으로

보는구나 싶어서 좀 씁쓸했다. 애들 응원 속에 은근히 가격을 높여 부르는 아저씨의 뻔뻔함도 거슬렸고.

베이트 알 수야미는 이슬람시대의 저택인데, 생각보다 훨씬 넓고 집구조가 마치 미로처럼 뒤엉켜 있어서 몇번이나 돌며
 
못 본 구석을 찾아다녀야 했다. 그덕분에 10이집션파운드의 입장료가 비싸다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수많은 방들에

열지어 배치되어있던 늘어진 쿠션들과 분수들, 우물들은 집안의 세과시용인가 싶을 정도로 으리으리했던 반면,

여성들이 가슴졸이며 내려다보았을 그 촘촘한 격자로 짜인 창문은 꽤나 이색적이었다. 왠지 전통한옥의 격자무늬를

닮은 거 같기도 한 그 창문은 외부의 시선은 완벽히 차단하되 내부에선 외부를 슬그머니 훔쳐볼 수 있는 식으로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왕의 천칸짜리 왕궁에서 하나 모자란 구백구십구칸짜리의 호화 상류층 저택이랄까. 무진장 넓고도 화려했고,
 
분수대가 마당마다 있는 게 네개던가 다섯개던가..이슬람문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딱 그 이야기에 어울릴 법한 저택. 사실 이 사진은 저 왼쪽 귀퉁이에 고양이가 중요했는데, 이녀석이 이뿌게 앉아있다가

움직여버렸다. 개보다 고양이가 역시 귀엽다.

카이로는 정말 매력적인 곳이다. 빌딩으로 빼곡한 스카이라인 한켠으로는 마치 중세를 여전히 사는 듯한 이슬라믹

카이로가 생생한 생명력으로 왁자지껄 펼쳐지고 있으니. 그런 스카이라인의 일부는 카이로 저 너머의 피라미드가

차지하고 있기도 했었다, 고층빌딩들의 각잡고 선 그 윤곽들 너머로. 여튼, 이슬라믹 카이로의 중심에 선 이

아름다운 문..막상 사진기를 들이대면 주위의 이집션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건 어쩌면, '역사'를 유산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삶의 터전'으로 살고 있는 사람의 시각차겠지. 근대에 박제되기 시작한 역사는 실은, 이런식으로

해방되어야 했을 거다. 한번 꼭 다시 가고 싶은데, 이집트 관광청이 이곳을 싹 정돈하고-사람들의 삶을 소거해내고-

깔끔하니 재건축을 한다고 들었다. 무슨 민속촌 분위기 만들라나 본데, 그래서 내가 갔을 때도 무진장 공사중인

이슬라믹 카이로. 최대한 빨리 다시 가보고 싶다.


나일강 근처 벤치에 앉아 바라본 카이로의 선셋은 생각보다는 이뻤지만, 그래도 역시 스모그나 대기오염때문이겠지만

태양의 선홍색이 어슴푸레한 뭔가에 밀려난 느낌이었다. 그치만 이스탄불, 카파도키아, 올림포스, 안탈랴, 셀축, 시와,

룩소르,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아스완에서 보았던 그 석양들을 떠올리며, 게다가 과거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바라봤을 그 석양들을 상상하며 멍하니 생각을 놔버렸다.


타흐리르 광장서 질주하는 차들과 제각기 일상에서 (여행자가 보기에) 소소한 것들에 묶여 사는 이집트 사람들을

응시하며 상념에 잠겨있었다. 여행도 실은 또다른 뭔가에 묶인 채 굴러가는 일상의 연속일지 모른다. 이러저러한

이름난 볼거리들, 그 틈새에서 악다구니하는 사람들에 눈이 가고 그래서 이곳 역시 사람들이 일상의 틀 속에서

버벅거리는 걸 보다 보면 문득 미소가 지어지고, 내겐 이곳이 그저 일상이 허락되지 않는 타지란 생각이 들었다.

난 여기서 그저 무언가를 계속 소비하며 내 안에 무언가를 계속 쌓아가는, 쌓아가려는 그런 뜨내기일 뿐인지도.


신호등도 변변찮은 이곳의 도로는..무단횡단의 진수를 보여주었더랬다. 재미삼아 합주해내는 클랙션의 무아지경과

도처에서 밟히는 브레이크의 굉음, 게다가 온전한 차 찾기가 힘들 정도로 광폭한 운전자들이라니...카이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8차선 도로 옆에 주저앉아 찍은 사진. 아마도 이런 것이 앞으로 내가 건너야 할 길이겠거니 하는 맘으로.


* 이런저런 티켓들.

다합에서 밥을 먹을 때 찾아왔던 새끼고양이가 있었다. 반가워서 버터바른 빵이나 딸기잼바른 크레페조각같은 걸

던져주다 보니 다음 식사 시간에도 알아서 찾아왔댔다. 스스럼없이 옆에서 세수도 하고 눕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는
 
모습을 보니까 전번에 제대로 쓰다듬어줬구나, 하는 확신이랄까.ㅋ 내 허벅지가 만든 그늘에서 편히 웅크리고

쉬고 있는 고양이를 보며, 내 가슴 속에 올려놨던 고양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나도 누구 한사람 대략

품어줄 만큼은 큰 거 같다고. 그래도 이제 내 호흡에 버거워 주위 사람들 못 챙기거나 신경못쓰는, 소중한 사람을

못 품어주는 일은 없을 거라는 나름의 자신감이 생긴 거 같다.

카이로-시와-알렉산드리아-아스완-룩소-다합-카이로..

마지막을 향해 가는 여행, 카이로를 향해 10시간 버스를 달렸다. 자리가 저번보다 훨씬 편했는지라 문제없이 내내

잘 수 있었다. 어제 중간에 한 잠 자주지도 않고 바다에서 쉼없이 놀았던 게 생각보다 많이 피곤했던 듯. 사실

밤새 달리는 동안 버스는 몇 차례나 멈춰서곤 했었다. 참 이놈의 동네 차도 널럴하게 몰고 다닌다고 생각하며 이왕

멈춰선 김에 해뜨는 거나 보자고 생각했다. 첨에는 아무 이유없이 바다일 거라 믿었던 길 양쪽, 어둠이 양껏

웅크리고 있던 그곳이 실은 먼지 뽀얀 황무지란 사실이 슬슬 드러나기 시작할 즈음, 군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미 앞에 멈춰섰던 차를 샅샅이 뒤지고 우리차로 온 참이었다. 모든 짐을 다 꺼내놓고서 하나하나 풀어

헤치며, 가방검사를 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생쇼인가, 하고 있는데 결국 내 차례가 다가왔다. 아무리 이집트가

관광객을 보호하고 관광산업을 지키기 위해 군인과 경찰을 온동네에 풀어놓은 경찰국가라고 해도 왠 소지품검사?

어쩌면 다합에서 다른 곳으로 마약이나 다른 물건들이 밀반입될까봐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길 한구석에 몰아세워진 채 가방을 줄세워 차례로 열고 있는 모습이란 좀 씁쓸하다. 다른 외국인

여행자들도 다들 툴툴대며 불만가득한 표정이면서도 여권 보여주고 짐 풀어주고.


내 차례는 금방 지나갔다. 어디서 왔냐고 묻고는 여권만 보고 가버렸다. 하긴 혼자서 40명분 가방을 일일이

뒤지는 게 얼마나 짜증났겠어. 조금 후에 버스는 다시 출발했고, 난 다시 편하게 잠들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은 더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어느 순간부터 문득 눈에 띄지 않아서 발을

쭉 뻗었다. 그가 잡히지 않기를 기원했다.




17시간여, 수많은 체크포인트(검문소)와 검표원에게 여권을 티켓을 보여줘 가면서 도착한 다합(Dahab).

룩소에서 다합까지 장장 17시간에 걸쳐 가장 큰 소원은, 의자를 한뼘만 뒤로 젖혔으면 하는 거. 하필 내 자리는

젖히는 레버가 고장난데다가, 90도, 딱 그 각도에서 움직일 줄 모르고 치솟아 있는 거다. 어찌나 답답하고

불편하던지, 열일곱시간 내내 이리뒤척 저리뒤척. 온몸의 근육이 다 뒤엉키고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짐부터 숙소에 부려놓고 이제 허기가 뭔지조차 잊어버린 배를 달래주러 밖으로. 확실히 홍해 건너 사우디가

바라보이는 바닷가 휴양도시라 물가가 비싸다. 해변 한번 쭉 돌아보고, 제일 사람이 적어보이고 평온해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이집션 아침먹고 이제 모르겠다. 눈앞에 바로 펼쳐진 파도, 머리위의 파라솔, 늘어지는

긴 의자, 배는 부르고 파도소리 황홀하고 바람도 시원하고. 그래, 쉬더라도 눈앞에 뭔가 그럴듯한 걸 병풍처럼

둘러놓고 쉬어야지, 그냥 호텔 방안에서 디굴대는 건 아니다. 남들 다 바쁘게 움직이는데서 혼자 늘어져있는

것도 그다지 내 스타일은 아닌 거 같고. 그래서 푸욱 쉬었다.

그렇게 세네시간 바다보면서, 또 바다를 들으면서, 그림자가 방향이 꺽여 내가 앉던 자리를 두번인가 바꾼 거

빼고는 정말 아무 것도 안 했다. 저녁때가 되고 해가 뉘엿뉘엿 해질때까지도 그럴 수 있겠던데, 세시 좀

넘어서는 일단 인나서 샤워하고 다시 나워서 바다에 들어가기로 작정했다. 여태 breaking the ice는 할 만큼

한 셈이니까, 본격적으로 친해져 봐야지 하고. 숙소에서 나오는 물은 약간 짭짤한 게 아마도 바닷물을 어찌

바꿔서 수도로 끌어들이는 듯하다.


생각보다 파도가 높았고, 물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맑고 깨끗하길래 그냥 맘놓고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출렁출렁.

한시간도 채 안 있었는데 체온이 뚝 떨어졌다. 태양은 여전히 이글이글 모드지만, 아마 여기가 40도를 오르내리던

아스완이나 룩소보다 훨씬 북쪽이라 그런지 아님 그 동네서 워낙 단련이 된 건지 사실 다합은 그다지 덥단 느낌은

없었다. 바다라는 거대한 온도조절장치가 효과를 발휘한 건지도 모르겠다.

다합엔 유적이나 기타 입장료 낼 게 하나도 없고, 그저 바다다. 바다랑 긴 의자/파라솔 세트. 아무 레스토랑이나

카페 들어가서 제대로 갈린 망고쉐이크가 서비스로 나오는 초콜렛 핫케잌같은 음식 시키고 걍 한나절 개기면서

딩굴딩굴, 물담배도 피고, 마약해보지 않겠냐고 은근히 물어오는 사람들이랑 수작을 부려주고. 천국이다.

삼일정도 아무것도 안 하고 걍 눈뜨면 바다나와서 아무 긴의자에 철푸덕 앉았다. 홍해 건너 사우디아라비아의

왕국서 해가 기어코 탈출하는 걸 보고 나면, 다시 들어가서 씻고, 잠시 나른함을 즐기다가 다시 나와서 하루종일

걍 해변가에 바로 붙은 긴의자, 혹은 양탄자바닥, 혹은 모래사장에 왠종일 누워 바다소리를 듣고, 바다빛깔을

보고, 지나다니는 고양이랑 놀기도 하고. 배고프면 전과는 다른 메뉴 시켜서 맛나게 먹고, 더워지면 바다에

뛰어들어 잠시 놀아주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쓰고 싶어지면 노트를 꺼내 일기도 적어보고, 적어놓은 거 읽어

보기도 하고. 혹은 론리가이드북을 내키는 대로 펴놓고 읽기도 하고. 삐끼 아저씨들이랑 야한 농담같은 것도

주고받고,ㅋㅋ

그렇게 삼일동안 바다만 끼고 살았다. 정말 이게 릴랙스...라는 느낌이 들면서, 해지는 거 봐주며 물담배도

피워올려보고, 밤바다에 주저앉아 생각나는 노래 전부 불러보기도 하고.(난 이러면서 왠지 상실의 시대에서

나오코에게 바치는 그 멋진 장례신이 생각났다ㅋ) 24, 23, 21, 나이를 거슬러가 보기도 하고, 바다조차 흐른다.


문득 바다랑 피라밋이랑 닮았단 생각이 들었다. 파도를 예측할 수 있을까. 태양의 위치, 바다면의 굴곡, 재질의

차이로 인한 온도의 차, 자잘한 돌들의 방해, 해수 자체의 온도차와 그로 인한 별도의 작은 흐름..해수 표면에

떠있는 온갖 부유물들과 바람이 뒤흔들고 지나는 힘. 드문드문 새들의 날갯짓이나 부릿짓, 배가 만드는 파문에

물고기들이 튀어오르는 소소한 파문까지. 이 모든 걸 다 고려하고 파도의 움직임을 예측하거나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왜 일부러 더 어질러 볼라면 어딘가 어색하듯이, 혹은 아무리 멋지게 꾸며보려 해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움이나 부담스러움이 꼭 느껴지기 마련인데, 바다는 그런 게 없다. 피라밋, 오천년의 시간으로

씻겨내어진 피라밋도 그랬다.


인간과 자연의 타협점이랄까, 여행와서 숱한 건축물과 유적, 풍경이나 자연들을 봐왔지만 결국은 자연스러움의

지향, 사막..바다..산..조금은 거릴 두고 보는 게 좋고 직접 그안에 들어가게 되면 잘 보이지가 않는다. 그걸

닮아가는 피라밋, 이슬라믹카이로, 터키 셀축의 유적들.


생각해보면 제대 휴가나와서까지 노가다를 뛰어 모은 돈으로 나온 여행이었다. 그것도 제대한지 사흘만에

비행기 잡아타고 나선 길, 사람이 늘어짐을 넘어서 마치 잔뜩 허물어진 벽이 마침내 더이상 무너져내릴 데가

없을 때까지 무너져 내리듯, 그렇듯 무너져 내려 쉬었더랬다.




이집트는 묘한 나라다. 피씨방에서도 코란 독경소리를 엠피쓰리로 듣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아침식사를 하러

들어간 식당에서는 자신의 휴대폰에 담긴 야한 동영상을 어깨동무하고 같이 보자는 점원도 있다. 즐감해 주고, 몇마디

농담을 나누다가 카르낙 신전으로 향했다.

몇 대의 왕에 걸쳐 계속 확장되고 보수되고 고쳤다는 카르낙 신전. 전날 왕의 계곡을 자전거로 도느라 완전히 지쳤어서

오늘은 좀 여유있게 다니려 했는데, 이 신전 하나만 돌아보는데도 두세시간은 걸릴 듯 했다. 룩소에 도착해서 알게 된

친구 칼리드가 말한 대로 세 시간 정도는 할애해야 그 사이즈에 대한 느낌을 온전히 품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기둥이 수백개는 되는 듯 했다. 아마 최근 트랜스포머2에서 나왔던 이집트의 신전이 여기가 아닐까, 보면서 혼자

생각했는데 영화 속에서는 카이로 기자의 피라밋 옆에 딱 붙어있는 신전처럼 나왔던 거 같다. 영화적상상력이란 건가.

그나마 다합으로 떠나기 전 룩소에서의 마지막 방문지를 칼리드와 함께 다닐 수 있어서 사진이 좀 남았다.

그래서,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한국인누나들이 그랬듯, 아스완서 렌이 그랬듯, 룩소르에선 칼리드가 출발할

때 배웅해 주었다. 머, 앞길을 선명한 비전으로 가다듬고 오겠다거나, 세상에 다시없을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오겠다거나, 그런 거창한 걸 바라고 온 여행은 아니었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다니며 자유로움을

만끽했다는 게 제일 큰 뿌듯함인거 같다.

내가 무언가를 왜 하고 싶냐, 고 스스로 자문했을 때 왜냐믄 내가 그걸 하고 싶으니까. 라는 대답으로 충분하다는
 
것. 아마도 대뇌피질쯤에 각인되었을 그 무수한 해돋이와 석양의 풍경, 매혹적인 온갖 자연의 풍광들과 인간이
 
이루어놓은 호방하고 때론 우악스러운 유적..건축물들은 덤, 쯤 되겠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마주치고 말을 섞고 혹은 잠시나마 여행을 함께 한 사람, 사람들.. 언제나 난 사람들에
 
기대를 덜 걸었고,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은 내게 선물과도 같이 주어지곤 한다.


* 비분강개하게도, 인물이 사진 주제를 많이 훼손시킨 사진들.

캐나다 의사아저씨 렌과 펠라페를 맛나게 먹구서는 걍 기차역에 마침 서있던 기차를 덥썩 잡아탔다.

3등칸이었다. 2이집션파운드(400원 가량?)만 내고 에드푸까지 갈 수 있었는데, 덜컹이며 무심히..요샛말로 '시크하게'

달리는 허름한 기차는 이제 우리는 없애버린 경춘선 열차랑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 난 애초 내가 탔던 칸에서

쫓겨나는 수모 아닌 수모를 겪긴 했다. 외간남자와 함께 앉아있을 수 없다며 거세게 손사래를 치는 검은 차도르

차림의 아주머니들이 옆칸으로 밀어냈던 것. 유일한 외국인이었던 나는 머..그저 느낌으로 그렇게 이해했을 뿐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남자인 것에 상관없이 내 생김새가 맘에 안 들었다거나 그런 건..아니길 바랄 뿐.


오히려 다행이었다. 옆 칸에 가서도 역시 유일한 외국인으로 만인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지만, 친절한 이집션 부부와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빵에 치즈를 발라서 주기도 하고, 기차칸서 간식으로 팔고 다니는 볶은 콩..아마도 소금물에

푹 절였다가 볶은 듯 엄청나게 짰던..그런 것도 사서 듬뿍듬뿍 나눠주고 그랬다. 아마 적도에 인접할만큼 뜨거운 동네니만치

땀을 많이 흘리는 것에 대항해 염분을 보충하려는 건가, 그렇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왕소금을 씹는거 같은 느낌이라구

운운 혼자 머릿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그들의 부드럽고 편안한 분위기에 절로 웃음이 났다.  

3등객석은 생각보다 괜찮은 편이었는데, 마치 우리나라 옛날 기차처럼 닭 같은 것도 들고 타고, 짐보따리도 잔뜩 

이고 타고, 그런 류의 푸근함이 느껴졌다. 나일강을 끼고 덜컹이며 유유히 움직이던 그 열차칸의 진동과, 흔히 외국인의

암내라 부르는 것과는 또 다른그 짙은 이질적인 내음, 닭털이 날리고 사람들의 와글와글함 사이에서 동그마니 던져져

있던 날 이어준 건 그 사람들의 따스한 정이었다.


나른하고 유유자적한 기차의 율동감에 나도 몰래 졸고 있다가, 아까 그 가족들이 깨워줘서 에드푸에 내려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경찰이었다. 자기들끼리 잔뜩 뭐라뭐라하더니 택시 타라면서 차 한대를 잡아준다. 십오 내랬다가 십 내랬다가.

나름대로 깎는다고 오파운드 불러놓고는 배짱 튕겼더니 뭐, 일단 타기로 했다. 근데 이게 알고 보니 이게 택시가 아니라

일종의 마을버스 같은 거였던 거다. 차 뒤 짐칸이 개조된 곳에 사람들이 잔뜩 서서 타고 내리는 걸 함께 부대끼면서

이게 절대 오 파운드일리가 없다 싶었다. 내릴 즈음 다른 사람들처럼 오십 피아스타만 내고 내려버렸다. 

신전엔 거의 아무도 없었다. 있어도 이집트인 관광객 하나둘.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디선가 시작된 아잔의 메아리소리가

신전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들을 우르릉 흔드는 느낌이었다. 걍 앉아서 하염없이 그림보고 히에로글리프 보고 하다가,

이제 됐다 싶어져서 다시 기차타러 출발. 많이 더워져서 망고주스를 애타게 찾다가 큰 컵에 1.5EP라는 곳을 발견,

연이어 두잔을 들이키고 한잔을 사서 물병에 옮겨담았다. 이건 거의 중독이다. 여기에 마약탄 게 아닐까 싶을 정도.


다시 기차역, 3등차를 타고 룩소르에 입성했다. 꾸준히 나일강을 끼고서, 나일강물의 빛깔은 뭐랄까, 심오해보인다.

투명하게 맑지도 않고, 그렇다고 더럽다거나 거부감이 들지도 않는...적당한 의뭉스러움과 요요함을 숨긴 듯한.

룩소르 피씨방에서 칼리드라는 이집션을 만났다. 피씨방에서 미니홈피를 확인하다가 알바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 알바생이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주고 싶다는 거다. 다짜고짜 넘겨준 전화통을 붙잡고 사실 적잖이

당황했고 이걸 어째야 하나 싶었는데, 짧고 성긴 대화가 오간 잠시 뒤에 그는 피씨방으로 직접 찾아왔다.

콧수염, 턱수염도 그럴듯하고 풍채도 딱 벌어진 게 아저씨스럽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고작(!) 스물하나. 아직

대학생이고 투어가이드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내친 김에 룩소르 신전의 야경을 보러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혹해서 또 따라나섰지만 혹시나 몰라 경계심은 살짝 유지하기로 했었다.


룩소르 신전 입구서 한 '코리언'을 만났다. 칼리드가 먼저 알아보고 내게 저기 '코리언'이 있다고 말해줬다.

외국에서 한국인을 꺼리는 병이 도져 잠시 쭈뼛거리는데, 그에게 몇몇 이집션 애들이 다가와서 돈달라고 손내밀고

그러는 거다. 그러자 바로 한국말로 터져나온 욕의 향연. 마치 여긴 내가 하는 말 아무도 못 알아들을 테니 걱정없이

상스러워질 수 있다는 듯이. 질려버려서 걍 멀어져버렸다. 단지 과거의 돌덩이들만 보러 여행온 건 아닐텐데..

거기서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건지. 상대적으로 칼리프에 부쩍 호감을 갖게 되어, 그의 그럴듯하게

자세가 잡힌 설명을 들으면서 룩소르 신전의 아름다운 야경을 잔뜩 구경하고, 뭔가 스토리가 잔뜩 웅숭그리고 있던

그곳의 정취에 함뿍 젖을 수 있었다. 빛이 모자라 잔뜩 흔들리고 깜깜한 사진들과 함께. (그래서 사진이 없다..ㅡㅡ;)


담날 새벽엔 변태를 만났다. 뉴욕에서도, 팟타야에서도, 심지어는 이집트의 아스완에서까지 변태는 내 친구..엉?

아침에 펠루카를 탄 채 나일강 위에서 해돋이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새벽 5시, 여전히 깜깜한 한밤중에 나일강변에

나섰더니 왠 이집션이 다가왔다. 시시껄렁한 얘기하고 어쩌구 하더니 불쑥, 자기 집에 아무도 없댄다. 아내도 없고,

자식들도 없고. 그리고 long banana가 있다나..not small이란다. 쳇..여전히 못 알아듣고 있던 나는, 50파운드

주겠단 얘기를 듣고서야 그제야 그제야 알아버린 거다. 일단..너무 싸다고 거절.ㅋㅋ 50파운드? 우리돈 오천원이잖아.


근데 이자식, 아니랜다. 여기 정가가 그렇다고, 얼마를 원하냐고 진지하게 치근덕거렸다. 장난으로 대거리하다가는

정말 큰일나겠다 싶어 더럭 겁이 났다. 단호히 거절하고 돌아서서 속보로 퇴각하는데도 계속 따라오길래..경찰이 보이는

곳으로 도망왔다. 성질 좀 내볼까 했으나...어찌나 정말 '남자답게' 생겼던지 화는 못 냈다.

그러고 찍은 해돋이 사진들. 아침 5시반..그 바나나 아저씨를 만나고 난 직후다. 더구나 펠루카를 빌려서 나일강 서안으로
 
건너가 해돋이 보기로 약속을 해놓고서 이 아저씨들이 바람이 없어 펠루카는 안된다며 모터보트로 건너갔던 터다. 전날

황혼을 펠루카에서 보려던 계획을 빵꾸낸지라, 대신 해돋이를 보겠다던 의욕에 불타던 내 기분이 살짝 흐려졌었지만...

하늘이 밝아지고 천지가 뿌얘지더니 그제서야 은근슬쩍 올라오는 해를 보며 모든 걸 용서할 듯한 마음이 되어버렸댔다.


6시면 해가 뜰 줄 알았더니 동쪽에 딱 산이 있어서 생각보다 꾸물거린다. 6시 50분쯤에야 해를 봤다. 단순히 "해뜨다"란

표현으로 가리우는 그 지루할만큼 길고도 변화무쌍한 국면들...뿌연 하늘, 차츰 진해지는 청색과 서편 끝에까지 뻗어나가는

빛의 알갱이들, 동편이 차츰 붉게 달아오르다가 어느 순간 이미 햇님이 어디선가 뜬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밝아졌다 싶을

즈음, 불쑥, 하고 해가 떠오른다. 처음에는 고개만 빼꼼히 그치만, 점점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고, 완전히 지면에서 떨어져

나갈 때조차 아직은 빛을 내는 아주아주 똥그란 다홍빛 원반같을 뿐. 그 열기는 한참 후에야 내게 도착해서 따뜻함을

전한다.


해뜨기 전이 가장 춥다느니 하는 통속적이고 진부한, 마냥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자세를 강조하는 말도 있지만, 기실
 
해 뜨기 전에 이미 사위는 모두 밝아진다는 점을 주목할 수도 있는 게다. 용례라면,

A : "해뜨기 전이 가장 춥다잖냐, 물고문, 성고문만 나오면 80년대와 다를 게 없다지만 좋아지겠지."

B : "꼬됴 이자식아. 해가 뜨기도 전에 이미 사방은 온통 밝아온다는 말도 모르냐."


여행 중 숱하게 떠오르는 해를 보고 가라앉는 해를 봤지만, 이때의 해돋이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물론, 그러고 나서

이 모터보트 선장이 애초 약속과는 달리 바가지를 씌우려는 바람에 불끈, 또 깡따구를 부려야 했지만. 머, 인샬라다.

이집트는 여전히 해가 떠오르는 동쪽...나일강 동쪽변에만 그들의 삶을 꾸린다. 서편은 별로 발전시킬 의욕도

없는 거 같고, 일단 과거로부터의 무덤이 너무도 많아서. 나일강을 보고 있으면 보통 볼 수 있는 water와는

다르게 점도가 상당히 높은 거 같다는 착각이 든다. 유속이 그리 느리지도 않은데, 수면에 계속해서 파문이

그려지면서도 쉽게 지워지지가 않는다. 살짝 끈적스러워 보이면서도 무진장 맑아보이는 나일강. 물 밑에는

거대한 물고기가 잔뜩 산다.






아부심벨에 가려면 아스완에서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한다. 실제 출발시간은 4시가 넘어서지만, 가기 전에 경찰에서

아부심벨로 향하는 차량대수와 총 인원수를 파악하고 행렬의 앞뒤에 패트롤카가 붙어 호위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서 절대 못가고, 결국 투어를 할 수 밖에 없단 얘기. 97년엔가 이집트 룩소르서 관광객대상으로 테러나고 일케

경찰이 잔뜩 깔렸다는데, 그와중에 어제 또 테러가 났으니 이제 이집트 난리났겠지 싶다. 관광자원으로 먹고 사는

나라에서 관광객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한다면...이미 이집트인들은 거의 계엄상태인양 쫙 깔린 경찰에 눈치를 보며

지냈었더랬다. 카이로에서 만난 한 이집트친구는 이집트인과 외국인이 같이 붙어다니는 것만 봐도 경찰이 와서 이집트

사람을 조사할 정도라고 그러던데.

아부심벨 가는 길은 한 3시간 채 안 걸린 거 같은데, 좁디좁은 15인승 미니버스에 빼곡히 실린 채 그래도 자보겠다고

잔뜩 힘쓰다가 문득 눈뜨니 6시쯤, 해가 꾸물꾸물 뜨고 있었다. 황량한 황토빛 황야에서, 아직은 그다지 강렬하지는

않은 태양이 미처 열기까지는 전달하지 못한 채 분홍빛 양광만을 세상에 꽂아주고. 반사적으로 사진 함 찍고 잠시

감상해주다가 다시 잠들어 버렸다. 사실은 끊임없이 펼쳐진 듯한 황야, 황량하고 쓸쓸한, 단조로운 풍경이 계속된

것에 지치기도 했다.

8시쯤, 기사아저씨가 갑자기 웰컴 투 아부심벨~! 외치는 소리에 깼다. 불쑥 눈앞에 나타난 나즈막한 산.

뒤로부터 정면으로, 조금씩조금씩 드러나는 아부심벨의 그 유명한 네 기의 석상은 생각만큼이나 멋졌다.

각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카르투쉬를 오른쪽 어깨와 가슴에 새기고, 먼곳 어딘가를 당당히 응시한 그 자세가

참 위풍당당하다는 느낌.

큼지막한 신전의 덩치도 덩치지만, 그 온갖 벽면과 천장을 온통 히에라글리프(이집트 그림문자)와 그림으로

가득 채워놨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 이빠이 안력을 돋구고 사방을 쉼없이 돌아보며 눈을 엄청나게 혹사시켜야

그걸 그래도 대략이나마 훑을 수 있을 정도니, 왠만한 궁전의 호사스러움에 비길만하다.


뭘 그렇게 남기고 싶었을지, 그렇게 극렬하게. 이집트인들이 죽음에 그토록 집착한게 아니라, 사실은 그 행복한

삶을 죽음 너머까지 잇고 싶어서 그토록 사후에 대한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 그림과 도안들은

그저 치장을 위해서라거나 무의미한 단편들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무수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하다. 뭐랄까..

신전 자체가 한권, 혹은 그 이상의 책으로 느껴진달까.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사람이 침튀겨가며 무언가 웅변조로

스스로 감동먹은 채 잔뜩 얘기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문제는, 마치 렌이라는 캐나다 의사아저씨가

종종 그렇듯,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서 흥분하다 보면 말이 무진장 빨라지는데 그럴 때 내가 느끼는 감정, 뭔말인지

대략은 알거 같은데 맥락이 대부분 끊기고. 그저 어렴풋한 뉘앙스와 의도만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인, 그런 느낌이

바로 내가 읽고 해석하지 못하는 그 고대의 텍스트에 대해 갖는 거랑 똑같은 거 같다.

혹 내가 그걸 읽어내고 벽면에 걸친 스토리를 이어낼 수 있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 폭포처럼 쏟아져내릴

거란 생각...그것은 람세스2세의 자기자랑이거나 마누라자랑, 혹은 이집트 위대하다 식의 쓸데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고, 혹은 이 신전에는 뭐가 얼마나 들어갔고 짐 무슨 신에게 언제 제사를 지내며..그런 이야기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그 히에라글리프와 그림들은 자체의 아름다움에 더하여 '무식'자의 눈에 신비로움을 더하고,

게다가 그토록 방대하고 빽빽하게 채워진 스토리를 읽어내릴 수 있다면 일종의 외경심마저 들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옆에 있는 좀 작은 규모의 네페르타리를 위한 신전도 가봤지만 글쎄..아부심벨과 같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가득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 이야기들이 내게 신기함과 이국적인 느낌 이상을 던지지 못하고

이해되지 못하는 이상 아부심벨의 전투신이 훨씬 인상적이었다.

어찌보면 이집트 고대문화는 기독교문화와 이슬람문화 모두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 거 같다. 오벨리스크가 이슬람

사원의 미나렛이나 교회의 첨탑으로, 히에로글리프가 모스크의 캘리그래피로,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는 상형문자가

교회의 십자가 원형태로. 올곧이 전승되었다거나 의식적으로 계승되었노라고 말하기는 힘들지 몰라도, 영향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다.

신기하게도 또다시 체코에서 온 파블로와 마르코 남매를 만났다. 어제도 기차역에서 멀찌감치 날 봤다고 하던데, 참

질긴 인연이다. 뭐..여행자들 가는 루트란 게 워낙 비슷하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부심벨 안에서 만나다니 하도

반가워서 덥썩 사진 한방 찍으려다 제지당하고, 밖에 나와 함께 사진 한장.


9시까지 미니버스로 돌아오라 하던 차에, 시시각각 여행객들이 단체로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길래 질려버렸다.

한번 다시 완상해주고는 차로 돌아가선, 같은 숙소에 머무는 미나꼬와 그녀의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아스완 하이댐으로.

마침 그녀 친구중에 하나가 하루끼의 '댄스댄스댄스'를 읽고 있길래 엉성한 영어로나마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었다.

아스완하이댐은, 볼 건 하나도 없으면서 보안에는 가장 철저했다. 사진 한장 찍지 못하게 할 정도.

다음으로 필라에 신전, 기대했던 만큼 멋졌다. 섬에 세워진 신전이란 컨셉도 그렇지만, 신전의 외벽을 크게 장식한

인물들의 조각들이 참 볼 만했다. 다만 거슬렸던 건, 비잔틴 혹은 이슬람 문화가 유입된 이후, 새롭게 등극한 신의

이름으로 이전의 신들을 말살하려는 듯 잔뜩 뭉개버린 흔적들이다. 태양이 있던 자리에 십자가가 험상궂게 새겨져

있거나, 온갖 신들의 얼굴을 위주로 몸체가 완전 뭉개져 있고, 그러다 힘겨움 걍 얼굴만 지워놓기도 하고.

단지 1800년대에 다녀간 사람들의 장난기어린 낙서가 아니라, 새로운 신의 새로운 '미신'으로 과거를 그렇게 거부

혹은 부정하려는 게...얼굴 지운다고 어떤 신적인 힘이 사라질 거라 믿는 건 또 하나의 미신일 텐데.

어쨌든, 캐나다에서 의사질을 하고 있다는 렌이라는 아저씨와 같이 보조를 맞춰 돌기도 하고 때론 혼자 돌아보기도

하면서, 사진 찍고 싶을 땐 주위에 있는 울 차 사람들-어느새 얼굴도 익고 친숙해져 버린-을 아무나 잡아 부탁하며

투어의 장점을 최대한 살렸다.

신전의 수호신인 호루스. 그의 샐쭉한 표정이나 다소 새침스러워 보이는 자태가 은근히 웃음을 불렀다.

약간 사팔뜨기같기도 하고..이 새 말이다.

마지막으로 갔던 곳은 미완성 오벨리스크. 이미 해는 중천에서 이글이글, 저토록 까맣게 탄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정오의 시간이었다. 역시 투어는 이래서 문제다. 빈칸 네개 만들어진 데다가 숙제했다고 도장 하나씩 받는

기분이랄까, 그땐 이미 여행이란 기분은 싹 사라지고 얼른 '해치우고' 가버리기만 바라게 되는 거다. 게다가

아부심벨과 필라에 신전이 주였다면, 아스완 하이댐과 미완성 오벨리스크는 그에 비해 현격한 체급차가 나는

소품에 불과하다. 미완성 오벨리스크, 가보니 걍 커다란 돌덩이, 쪼다말고 버려진 돌덩이 하나 덜렁 있었다.


물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일종의 채석장이자 그토록 거대한 오벨리시크나 피라밋들이 결국 인간의 손으로

저렇게 돌 하나를 쫄아 만들어졌다는 걸 증거하는 강력한 현장인 건 맞다. 다만 그게 워낙 덜 만들어진 거라서

기둥의 삼면만 설렁설렁 다듬어지고 아무런 다른 손길이 미처 닿기 전이었는지라 좀 많이 밋밋했단 얘기.

조금 상상력을 발휘하자면 저걸 마저 어떤 식으로 꾸며넣었을지(그니까 수다스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새겨

넣었을지), 어떻게 세우고 밑면을 어떻게 다듬고 어떻게 운반했을지 정도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지만, 이미 기진맥진해 있던 상태라 그런 거 생각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얼른 퇴각했다.




밤 10시 기차, 카이로에서 아스완까지 13시간을 달렸다. 내가 앉은 좌석에 또다른 티켓이 발부되어 잠시 소란이 이는 등

영 못 미더운 이집트 기차의 저질 서비스를 실감하고 내리 자다가, 꽉꽉 들이찼던 사람들이 많이 빠진 한적한 찻칸에

동그마니 남았다. 아침 6시밖에 안 되었는데, 유리창 너머 햇살이..느낌일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남으로 내려갈수록

심상찮다. 입으로 이글이글 소리를 내면서 내리쬔다는 느낌?


불쑥 승무원 아저씨가 객실에 들어오더니 통로바닥에 깔린 카펫이 깨끗하다고 막 자랑을 늘어놓는다. 어이없게도

그러고 나서 박시쉬 달라고. 기차 카펫 깨끗하니 팁달라는 건 대체 무슨 경우냐. 하이 머니 헬로우 머니 어쩌구 하는

아이들도 적나라한 사례였다. 뭐랄까, 그들의 생업 자체가 관광객에 달려있어서, 아직 그다지 세련화하지는 못한

-서비스 정신으로 치장되지 못한-fight for money가 더욱 두드러진다고 느꼈다.

숙소를 잡자마자 나섰다. 정처없이 아스완 시내구경 좀 하다가, 이집트 남단의 원주민이라는 누비안족의 문화나 유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엘레펀트 아일랜드에 들어가기로 했다. 20파운드(2000원)이라는 관광객요금을 요구하는 페리호
 
선장을 쌩까고 1파운드(200원)의 현지인요금만 내고 건너간 그 섬에서, 플라스틱 물병을 소중히 간직한채 5시간여 거닐며

온갖것을 볼라다가 일사병 걸리는 줄 알았더랬다. 그 조그마한 섬에서도 길을 잃고 헤매던 내게 자신의 짐을 들리시곤,

자신의 집방향과 같은 곳에 있던 누비안박물관을 안내해 주셨던 순박한 아저씨, 들고 갔던 2리터짜리 물병을 다 비우고

탈진해가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뜨신 차이를 나눠줬던 맘좋은 아저씨..들 덕분에 살아돌아나왔달까.

햇빛 가릴 한 줌의 그늘이 아쉬워질 정도의 열기, 눈알이 화끈거리며 말라붙는 듯하던 그 열풍이라니. 물통 역시

금세 끓어오를 듯이 뜨거워져서는 물이 이미 미지근함을 넘어서버린지 오래였다. 박물관에선 그래도 손님이 나밖에

없어서 그랬는지 관리인이 따라다니며 불켜줬다가 다시 끄고 설명도 해주고 차도 함께 마시고 그랬다.

펠루카와 엘레판트 아일랜드. 강에 내려앉은 나비떼 같은 저 하얀 돛단배들이 바로 펠루카. 무동력범선이랄까.

오로지 돛의 힘으로 움직인다는데,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때는 노를 쓰고. 그치만 갈수록 모터도 다는 추세인 거

같았다, 펠루카 선장들과의 인터뷰 결과 노질이 너무 힘들어서 모터를 다는 거라나. 아스완은 수단과의 경계에

가장 근접한 도시인지라, 내가 내려간 최남단의 도시이기도 했다. 아부심벨은 물론 여기서 한 160킬로 더 남단에

있었고. 무진장 더웠다. 하루에 1.5리터 펫병을 네개까지 먹을 정도였으니...에어콘은 커녕 선풍기조차 천장에 붙은

크다란 팬밖에 없는 숙소는 그저 밤에 잠잘때만 들어갔고, 나머지 시간은 저 유유한 나일강의 유유한 펠루카를

바라보며 유유하고자 했다.

 펠루카와 나일강..은 참 잘 어울린다. 한강에는...거북선이 어울릴라나. 뜬금없이 한강도 보고 싶어졌다.

어딜가나 박시시(일종의 팁)을 요구하는 이집트인들, 오죽하면 카이로공항에 첨 떨어져서 화장실을 이용할 때
 
휴지 빼주고 건조기 버튼눌러주고는 팁을 요구할까..어딜가나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내가 자발적으로 박시시를

줘야겠다고 맘먹은 아저씨, 너무도 더운 아스완에서 그것도 2시에서 3시쯤에, 아스완 서안에 있는 tombs of

nobles를 안내해가며 다니는데 할아버지가 넘 힘들어하는 거다. 내 욕심같아선 몇개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나도 지쳤고 물도 떨어졌고 해서 걍 만족하고 내려오는 길. 이미 볼만치 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덤들의 열쇠를 가진 할아버지는 내가 보자고 하는 무덤에 앞장서 도착해 문을 열어줬고, 내가 보고 나온 무덤을

다시 잠그고는 서둘러 앞장섰더랬다. 무덤들은, 비슷하게 정형화된 양식인 듯 했지만, 그 안에 온통 가득한

히에라글립스(상형문자)들과 그림들은 정말 볼 만 했다. 단순히 치장이나 배경이 아니라 죽은 자의 일생을

세세히 새겨넣어 후생을 기하려는, 그런 어떤 의지가 강렬하게 와닿을 정도로,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지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내게 등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을 앞세우는 것은 살짝 안심스런 일이기도 하다. 그 사람에 대한 신뢰와 호의가 쌓여

무언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사이라면, 난 그사람이 쥐여준 끈을 잡고 길을 인도받는 셈이다. 누군가에게

등을 보이고, 누군가에게서 등을 빌리고. 그 길이 비록 뜨끈뜨끈한 모래바람이 휘몰아친대도, 태양이 아무리

녹여내릴 듯 작열한대도.(저 짙은 그늘이라니...)


6시쯤 일어나 씻고는 바로 시디가베르정류장으로 트램타고 출발. 정말 우리나라도 트램같은 호흡을 가진 탈 것이 있으면,

시간이 어중띠게 비는 때, 어딘가 갈 데가 마땅히 없지만 움직이고 싶을 때, 무지 애용해줄 거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이집션들도 터키에서 들었던 악명보다는 훨씬 덜 '귀찮고', 생각보다 훨씬 더 친절하다. 물론 한국을 거의 피를 나눈 형제

국가로 여기는 터키인들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못지않다. 흔히 진부하게 표현하듯, '사람들이 때묻지않은 제3세계'운운

하기는 뭣할 정도로 관광대국인 이집트지만, 그래서 사람손도 많이 타고 때도 남들만큼은 묻어보이지만, 푸근했다.


영어가 안되도 눈빛과 제스처로 충분히 그 진심이 느껴진다. 어쩌면 말이 쉽게 통한다는 건-의사소통이 단지 언어에만

기대어 가능할 정도로-많은 것들을 놓치게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외려 답답한듯한 눈빛과 제스처로, 그리고 그

뉘앙스로 무언가 의미를 교환하려 서로 애쓰는 와중에 훨씬 더 '인간'을 만난단 느낌을 짙게 한다. 몇마디 여행용

영어로나, 혹은 아주 식상한 '잘지냈어' 정도의 말로는...그저 인터넷상에서 무언가를 클릭해 순식간에 정보만을 얻고

치우는 정도...그런 느낌이다. 마치 여기가 무슨 리니지 같은 온라인겜 혹은 이러저러한 게임 속이고, 어디서 누굴 만나

대화를 걸면 무슨 정보나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이런 식의 걍퍅한 관계. 머, 그런 거 주의하면서 신나게 여행 중.


일요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시간이나 기다려서야 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그런 늘어지는 삶의 속도도 여유롭게

즐겨줄 만큼의 여유가 맘속에 생겼다. 어쨌거나, 여행 중이니까. 전날밤부터 재미나게 읽고 있던 론리플래넷 이집트의

역사랑 문화 편 보느라, 이집트에 대한 정보랑 이미지를 좀더 세밀하게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으로 썼다. 여기도 참..

3000여년의 파라오 시대 이후에는 계속되는 수난사였다. 페르시아, 로마, 아랍, 터키, 오스만투르크, 나폴레옹, 그리고

영국에 이르기까지 2000년이 넘게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온 땅이다. 덕분이랄까 문화도 파라오시대, 그레코로만시대,

등등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이로로 향하는 세시간 반정도의 버스여행길은, 안내양 아가씨(혹은 아주머니)가 함께 했다.

이집트에서 그런 '개명된 스타일'의 여성은 참 드물게 보아서, 계속 흘끔대며 보다가 넋놓고 남들하듯 차를 시켰다.

빵류까지 갖다주길래 혹시나 하고 몇번씩 물어봤지만 대답이 시원찮고 다른 이집션들도 많이 먹길래, 꽁짠갑다 하고

다 먹고 났더니, 자그마치 17EP를 내란다. 어이, 버스비가 22EP였다구. 데따 맛도 없었는데다가 꼭 불량식품같이

버석대는 엉성한 비닐봉지에 담긴 빵쪼가리와 과자부스러기였단 말이다. 카이로에서도 한끼는 5EP면 되는 판에.


더구나 내릴 즈음, 한 아저씨가 나보고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남이냐 북이냐, 해서 왠지 북이라 하기도 껄떡지근하고

남한서 왔다고 사실대로 말했더니 뭔가 옆의 아저씨와 아랍어로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흥분이 내게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음에도, 그는 내게 좀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싶었는지 몇마디의 영어와 제스쳐를 동원했다.

America, strong, 무언가 기는 표정 내지 쫄은 표정을 지어가며 혀를 낼름낼름-뭔가 핥듯-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모두 박장대소한다.


감이 왔다. 뭐, 이라크 전에 굳이 파병한 한국이 아랍세계에 곱게 보일 리는 없는 거고, 對제3세계 외교가 전무한 채

오로지 미국과의 코드맞추기에 급급한 한국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맞는 이야기고, 나도 비슷한 생각이지만 기분이

좀 묘했다. '조국'과 나를 동일시할 생각이야 없지만,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 국적과 그 인간을 뭉뚱그려 빈정대고

싶지도 않고 빈정당하고 싶지도 않은 거다. 어쨌든 내가 느꼈던 감정은, 나 자신이 '국가'와 '국적'에 묻혀 매도당하고

있다는 불쾌감, 그리고 부끄러움이었다. 명분 없는 전쟁, 명분 없는 파병에 대해.


아마도 조상신과 헤르메스-여행자를 돌본다는-의 도움으로, 문득 6시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시계는 한개도 못 들었지만,

덕분에 아침도 먹고 샤워도 하고 일정도 점검하고 여유있게 택시를 탔다. 어제 그토록 찾기 힘들었던 투르고만 가리지와

부스를 쉽게 찾아 시와로 출발. 마루사 마투르와(Marsa Matru)에서 12시쯤 내려 점심으로 펠라페를 먹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1시반에 다시 출발.
 
여행자의 행색은 나와, 터키서 말을 섞었던 형님 한분밖에 없어서 살짝 비즈와히르 사막투어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끝없이 황량한 지평선과 그야말로 먼지같이 뿌옇기만 한 풍경에 지쳐 꼬박꼬박 졸아버리고

말았다. 카이로에서 마루사 마투르와까진 5시간, 거기서 시와까지는 4시간을 더 가야 했다.

그리고 시와. 갑작스레 푸른 빛깔이 눈앞에 점점이 나타나더니 커다란 마을이 되어 불쑥 눈안에 차고 들어왔다. 흙은

여전히 물기 하나없이 풀풀 날리는 먼지같건만, 야자수가 더불어 숲이 되니 이런 오아시스가 생겨났다. 아마 생겨난 

순서는 반대로 오아시스가 있어 더불어 숲이 이루어진 거겠지만. 사막이 저멀리 보인다. 여우를 볼 수 있을까.

죽은 자의 산, 이곳에 미이라가 네 구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산 사이의 크레바스처럼 갈라진 틈에 고이 모셔져

있는, 바싹 마른 사자(死者). 그들의 죽음은 무섭다기보다는 왠지 처연했달까. 완전히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기보다

껍데기만 남아 왜소하고 볼품없이 말라 비틀어진..

석양을 산위에서 맞이하기로 하고 조용히 앉아 기다렸다. 메마른 바람이, 그 꺼칠함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몸을

휘감았고,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조금 떨어진 사막의 모래 사각이는 소리가 들리는 환상에 빠졌다.

이 한가로움과 유유함. 시끄럽고 정신없는 카이로에서 내가 정말 바라던, 그리고 여행이 어느덧 이주가 넘어가면서

살짝 지친 내게 꼭 필요한 그런 거였다.

저녁으로 지방음식 중 삭슈가인가, 발음도 제대로 안 되던 그런 신기한 걸 먹었는데, 음식이란 게 상상력만으론 닿기 힘든

그런 영역인 거 같다. 이름만 가지고서는 예상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설명을 듣고도 도무지 어떤 음식인지 상상해내기가

힘드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있게 먹어치우고, 모처럼 간만에 배부르게 먹고, 물담배 시샤(seesha)를 한 대 피워올리며

포도 1킬로를 사서 나눠먹었다.


시샤가 생각보다 셌던 건지, 아님 내가 연기를 지나치게 몸안에서 많이 돌려버린 건지, 한국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문득 보였다. 마침 지나가던 당나귀를 붙잡고 장난을 치다가 사진 한장.




2시쯤 이집트공항에 떨어졌는데, 그새 친해진 일행 넷이 모두 여권 정밀검사에 걸리고 말았다. 한참 기다리다가 3시쯤

공항을 나와서 그 중 길동무가 된 친구 하나와 택시를 잡았다. 그는 애초 내가 가려던 호텔이 아닌 다른 호텔을 고집했고,

별생각없이 난 그저 시나브로 시작된 이집션들의 바가지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일단 그의 의견을 따랐다. 문제가 시작...

방이 없댄다. 옆의 가깝다는 호텔을 알아봐줬는데, 길도 알려줬는데, 반대길로 내가 앞장서버렸고, 거기서부터 2시간

가까이의 개삽질을 해야 했다. 완전히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더구나 현재좌표조차 부유하는 상황에서 경찰서를 찾아

도움을 청했지만, 영어 한마디 소통이 불가능했다.


6시에야 무지 비싼 곳의 더블룸을 잡을 수 있었다. (사실 애초 묵고 싶었던 곳은 하루에 15EP, 우리가 묵었던 곳은 30EP,

가격은 두배지만..그래봐야 6000원 안짝?) 한밤중 새벽녘의 카이로란 거. 이제 아무리 혼자 헤매도 해가 말간 낮이기만

하면 걱정따위 안 할 거 같다. 줄창 자버릴 줄 알았는데 9시전에 일어나서 아침먹고 밖에 나섰다. 세상에.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카이로의 무질서함과 대혼란스러움인가 싶었다.

폭주하는 차들, 가만 보면 어디 하나 성한 구석없어 사이드미러가 없거나 범퍼가 찌부러졌거나, 녹이 벌겋게 슨 차들은
 
마치 수다떨듯 클랙션을 두들겨대고 있었다. 재미삼아 합주해내는 클랙션의 무아지경과 도처에서 밟히는 브레이크의

굉음, 게다가 온전한 차 찾기가 힘들 정도로 광폭한 운전자들이라니...이러니 누군가 이집트 여행을 왔다가 식겁해서

공항으로 바로 돌아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는 일화까지 전해지지. 신호등도 변변찮은 이곳의 도로는..극한의 무단횡단

신공을 요구했다.

사실 약간 질리긴 했다. 좀 이 정신없고 공격적인 도시를 벗어나 여행도 추스리고 쉴 필요도 있을 거 같아 우선 내일은

이집트 서쪽에 외떨어진 오아시스 마을 시와(Siwa)로 뜨기로 했다. 힘겹게 환전을 하고, 쿠샤리로 배를 채우고.

ⓒ 위키피디아.
'
쿠샤리'란 흔히 "저 이집트 가서 쿠사리먹고 왔어요"할 때의 그 쿠사리다. 이집트의 전통적인 음식인데, 쌀, 콩, 마카로니,

국수 등을 토마토 소스와 버무려 나오는 음식이랄까. '쿠샤리'라는 뜻 자체도 모든 걸 섞어 만든다는 뜻이라고 한다.

좀 거칠게 만들어진 파스타랄까, 그치만 콩이나 쌀 덕분에 파스타보다도 되려 씹는 맛은 좋았다.
 
그리곤 다시 나와서 이슬람 카이로지구를 방황하고 있다. 어느 모스크에서 아잔을 틀었던 성직자 할배가 미나렛을

열어주곤 박시쉬를 달라는 게 아닌가. 그것도 20EP나. 박시쉬란 일종의 팁을 말하는 거고, 이집트는 이런 식의 

팁문화가 일반적이라곤 해도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한 터무니없는 요구가 그침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방금

먹었던 쿠샤리가 1.75EP, 호텔 하루 방값이 20EP였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뻔뻔스러움이다.

물론 10$를 환전해서 62EP정도를 만들었던 당시 환율을 따지자면 '고작'...얼만고, 4,500원 정도? 그정도긴 하지만

현지 물가를 감안컨대 이건 아니다. 더구나 여행경비는 내가 군대 휴가나와서는 꼬박꼬박 노가다를 뛰며 모은,

못도 밟아가며 모은 피같은 돈이란 말이다.(심지어 빠듯한..ㅡㅡ;)

그래서 말했다. 이봐, 그러지 말고 5EP 줄테니 이곳에서 내 사진이나 찍어주지 않겠나. 결국 10EP로 낙찰. 그럴 줄 알았음

처음에 미나렛 열어준다며 앞장설 때 그렇게 좋아하고 고마워하진 않았어도 되는 건데, 어쨌든 전망이 꽤나 좋았으니.

서울 야경을 뻘겅십자가가 점령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여긴 모스크의 미나렛이 천지삐까리다. 저 꼭대기에서 한꺼번에

시간맞추어 아잔소리를 틀어댄다고 생각하니 공기조차 달라보인다. 제각기 다른 실루엣을 띈 미나렛들.

이집트 여행을 시작하며 내 자세부터 결정해야 했다. 사람을 안 믿어야 한다..기엔 오버스럽고, 친절을 베풀려 하는

사람에겐 박시쉬줘야 하는 건지부터 물어야 하는 건지 원. 공항에선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휴지걸이 쪽으로 가는데,

왠 아저씨가 잽싸게 휴지마디를 끊어 건네길래 엉겁결에 받았더니 박시쉬 달라고 손내미는 통에 깜짝 놀라 도망치는

일도 있었단 말이다.

그냥, 무난한 선에서 그때그때 눙치며 넘어가기로 했다. 박시쉬가 이들에겐 자연스러운 문화라니 기겁할 일도 아닌 거고.

그런데 조금 후에 만난 구두닦이 녀석은 정말 착했다. 나 혼자 빵조각 우물거리며 앉아 쉬는 걸 보더니, 자기가 싸온 거

같이 먹자며 집에서 싸온 양념통들을 꺼낸다. 호오...토마토소스가 정말 맛있어서, 유쾌하게 다 먹어버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친구들이라며 뒤늦게 합류한 목걸이 파는 애, 음료수 파는 애들이 오길래 인사도 하고, 사진 찍어달라고

카메라를 내밀었더니 신나서 자기들끼리 서로 난사하듯 마구 찍어버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아쉽게 헤어지고, 알-아자르(Al-Azar)모스크가서 세개의 미나렛을 보며 즐기다가 이왕 온거 밥-주웨일라

(Bob-zuweila)까지 보자 하고 어둑어둑해질 무렵 일어났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과거의 것들을 현재에까지 여전한

방식으로 활용하며 공존하는 게 진짜 그 '유물'들을 받아들이는 방식일지 모른다.

좀 변두리 지역서는 카메라를 들고 신기한 듯 건물들을 돌아보는 내가 무진장 이상스러운 사람처럼 의아한 눈총을

받기도 했다. 피샤위 커피숍서 물담배 한대 피워올리려다가, 워낙 현지의 이집션들밖에 없어서 왠지 살짝 소심해져서

포기, 대신 망고주스가 얼마나 맛있는 건지 깨우쳐버렸다. 






어제 일찍 잔다고 누웠는데 주위 '아저씨'들이랑 수다떨다가 12시 넘어서야 잠든 거 같다. 눈떠보니 8시반,

아저씨들은 여전히 자고 있고, 알람을 분명 맞춰놨던 시계도 여전히 자고 있다. 샤워하고 체크아웃.

지상열차라 불러야 할까, 터키의 트램은 귀엽기도 하고 편리하기도 하고. 이스탄불 시내를 도는데 매우 유용한

교통수단이었다. 국내 도입이 시급하다, 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집트 바자르 가면서 씁쓸한 기분으로 예니사원을 쳐다봐주고, 바자르 구경하면서 떡같은 것과 피스타치오를

계속 먹어댔더니 나중엔 아침 한끼가 해결되어 버렸다. 그래도 작정한대로 오늘 아침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바라보는 어느 벤치에 앉아 고등어케밥과 터키식 요구르트를 먹는 로망을 실천. 저번과는 달리 고등어뼈가

막판에 쵸큼 발견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비린내도 안 나고 역시 괜찮았다. 하긴, 음식을 가린 적이 없다.

비가 상당히 쏟아붓는 바다 위에서 유람선을 타니까 느낌이 또 다르다. 수업 빼먹고 제부도로 바다보러 혼자

들어갔다가 폭우로 배가 끊겼을 때..그때 들어가던 비가 딱 이모냥이었다. 십년만에 올해가 비를 가장 쏟아부을

거라던 이상기후. 흑해로 다가가 이름모를 폐허의 성에 오르니 바닷바람이 귀를 막아버린다. 좋으네.

가슴이 방방 부푸는 느낌.

한참 바람을 맞고 있자니 어느순간 속이 헛헛해져서 배로 돌아가는 길, 한 터키 대학생아가씨와 나눈 담소가

-주로 그녀의 수다를 들으며-배안에까지 이어졌다. 함께 점심으로 양고기 케밥을 먹고. 부두에 다시 도착할

때쯤엔 거의 폭우 수준이었던 비를 피해 그랜드 바자르로 향했다.

시골의 재래시장 느낌인 이집트 바자르와는 달리 나름 격조있으시게도 '뚜껑'있는 아케이드여서 비를 그을

수 있던 그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삐끼들과 말상대 좀 해주었다.(어쩌면 내가 말상대를 구한 건지도..

삐끼들이 안 잡으면 살짝 섭섭했으니.)

마지막으로 블루모스크랑 아야소피아 주변을 다시금 어슬렁대며 눈도장 좀 다시 찍어주고.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모스크 안의 분위기하며, 유려하고도 세련된 문양들, 그리고 광선을 걸러내는 저 이뿐 모양의 조그만

창들까지. 터키의 분위기랑 가장 잘 닮았다고 생각한 게 고즈넉할 때의 블루 모스크 분위기 같다고 생각했다.

많은 곳을 돌아본 것 같다. 숙제하듯이 가이드북에 하나하나 체크해가며 '클리어'해간다는 부담스러움보다는

걍 설렁설렁 다니며 여기 사람들하고 많이 놀고, 구간구간 함께 하는 사람들이랑 많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뭐...아직은 정말 만족스러운 거 같다.

원래 여행 컨셉이 혼자 하는 여행이었는데, 이스탄불 공항에서부터, 아니 인천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멋진 누님들하고 함께 하고, 또 새로운 친구도 만나고, 그러다 보니 실제로 혼자 여행을 다시 시작한 건

고작 며칠 전이었다. 잠시 만났던 터키쉬 말로는 혼자 하는 여행이 외로워지면 나이가 든 거라 했는데, 글쎄..

또 누군가는 그랬다. 혼자 밥먹는 걸 즐길 줄 알면 어른이 된 거라나.

셀축-아마도 젤 큰 로마시대 유적이 현존하는 지역이라는 그곳-에서 혼자 저녁을 먹으며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는 걸 구경했는데, 잠시 헷갈렸다. 어른이 된 건지, 나이가 든 건지.

아, 그리고 나서 카펫가게서 만났던 지야라는 20살 청년집에 놀러가서 환대받고, 과일과 차를 잔뜩 대접받고

왔었다. 지야, 지레, 부탄..삼형제의 장난스러움과 어수선함이라니. 내 군생활을 지탱했던 게 라디오헤드와

하루끼였는데, 지야 이녀석이 라디오헤드 광팬이었다. 같이 Paranoid Android, high & dry 뭐 그런 거

들으면서 화씨 9.11 이야기하고, 앞으로 뭐하고 싶은지 이야기하고. 그는 비엔나에 가서 영화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블랙 코미디를 찍고 싶댔다.

문제는, 이 동네 사람들이 워낙 여행객에 기대어 살다 보니까, 워낙 친구도 많고, 워낙 덧없는(?) 만남도

많을 거 같다는 거다. 사실 나 역시도 첨에 카펫가게에 들어간 건 아이쇼핑도 할 겸 (목도 칼칼한데) 차대접도

받을 겸..괜히 맘에도 없는 카펫으로 고민하는 척하는 연기를 하며 환심을 끌었다 해야 하나. 그들 역시 내게

바가지(알고 보니 바가지였다는..) 씌울라는 의도, 나 역시 낼모레 체크아웃한다며 당장 지갑을 열어 구매할

듯한 뉘앙스, 머 글케 서로 약간은 어긋난 만남으로 시작했었다. 그나저나 숱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떠나보내고

했을 그들은, 그 덧없는 '관계'라거나, 우연에 불과할지 모르는 '겹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묻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뒤를 돌아봐야 했다. 내 여행과 끝을 장식하는 모스크의 야경. 터키와 이집트의 모스크는, 마치 쇼윈도의

그것과 노점상의 그것만큼이나 다른 공기와 분위기를 뱉어낸다. 온몸을 내맡기는 오체투지의 자세로 알라의 뜻에

기대는 무슬림들의 뜻은 하나였으되, 터키에선 종종 그 숙연한 모습이 관광객들의 사진 배경쯤으로나 쓰이곤 했다.

관광객들의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 천장의 돔을 뒤흔들고, 쫓기듯 설명하고 채근하듯 움직이던 가이드에 내몰려

모스크의 공기는 온통 찢겨진 채 비둘기들을 흥분시켰다.

그래도 나, 한점의 유서깊은 공기를 들이기며 블루모스크의 그 고아한,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하늘'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에 마지막 반나절을 오롯이 이 아름다운 모스크에 헌정했다. 구석에 최대한 쑤셔박힌 채 "눈까리가

째져라" 하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눈가리가 째졌다.

이제 내일 밤이면 터키를 떠나 이집트로. 그동네에선 지금이 딱 무지 덥고 습기도 없어 완전 미이라 되기에
 
최적인 날씨라고 했다. 머, 사막가서 여우나 길들여봐야겠다. 정말 사막에 가면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어쩌면

어린왕자의 '여우'라는 캐릭터는 어린왕자 스스로가 불러낸 '외로움'의 소산, 외로움의 메타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이집트다.


생각보다 많이 지쳤던 거 같다. 계속 죽은 듯이 자다가 루밀리성이 얼핏 보일 때쯤 잠시 정신차렸다가, 다시

이스탄불 오토가르에 올 때까지 전혀 대비없이 자버렸다. 셀축(Celcuk)-혹은 에페스(Efes)-에서부터 12시간

내리 달려 이스탄불까지. 버스들이 전부 껍데기는 벤츠인데 알맹이는 그냥 시골버스다. 차냄새 쿠리쿠리한. 

메트로 찾아서 악사라이까지 왔더니 또 친숙한 삐끼 아저씨를 한 명 달아버리고, 걍 주절주절 계속 달고

다니다가 비오는 걸 기화로 걍 떼내버렸지만 이젠 미안하지도 않다.


비가 오는 이스탄불은, 공기조차 달콤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어느 입구..저 너머엔 황금빛 응가통이 있었던 듯 하다.>

체크인하며 Shit이라 내뱉는 서양아가씨에 동감하며 짐풀곤 바로 박물관으로. 모자가, 알고 보니 용도가

디게 다양하다. 우산으로도 쓸 수 있었다. 소피아라는 덴마크 아가씨 만나서 말 좀 섞다가 박물관의 알렉산더

대왕의 석관이랑 최초의 평화조약을 함께 보고...또...여기 와서 많이 멍청해졌음을 느낀다, 들으면 바로

까먹으니. 여튼 몇 가지 멋졌던 것들을 기억하고 숙소에서 인터넷에서 좀 썼다.

<돌마바흐체의 후원이던가, 흑해에 바로 면한 이 뒤뜰에서 맞은 시원한 바닷바람과
빗물인지 바닷물인지 사방에 비산되던 촉촉한 물방울들.>


동양호텔은 사람도 넘 많고-밖에 없고-인터넷이 거의 비슷한 속도로 나온단 점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한국같이 익숙하고 둔감한 것이랄까, T4 라인 타고 돌마바흐체 가는데 현지 유학생을 만났다. 지나치게 친절하고

치근덕대는 터키 남자들때문에, 여자끼리 여행하기엔 참 안 좋은 곳이라는 그녀의 이야기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하기도 하고, 터키에서 공부한다는 그녀의 열정에 감탄하기도 하고.

돌마바흐체는 눈이 좀 편했달까. 대략 눈으로 좇으며 걸어다닐만한 정도의 화려함. 그 음양감과 생생한 조각의

흔적들이 모두 그림이라니. 쳇, 짭퉁이다. 결국 울룩불룩한 게 아니라 평면이란 말이지. 껌딱지처럼.
일단의 패키지 여행객을 만났는데, 가이드가 정말 별로였다. 전혀 자신의 일에 열의가 안 느껴진달까. 그냥, 그래

한번 훑어봐라~ 라는 식의 싸늘한 표정과 건조한 말투, 식은 눈빛. 시간과 정신이 담긴 문화재를 설명하는 일에,

비록 남의 나라 것이라 여겨서 그럴지 몰라도,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건 정말 별로였다. 이스탄불 왔더니 역시

한국인이 많다. 가이드의 째려보는 눈빛을 느끼면서도 그의 설명을 조금조금 귀동냥하다가, 배낭여행객은 절로

가라고 하도 눈치주며 구박하는 통에 걍 니들끼리 놀아라~ 속으로 그러고 말았다.

탁심까지. 갈라타탑까지. 갈라타대교까지 내처 걸었다. 명동같은 거리에서 첨으로 가이드북에 나왔던 음식점을

찾아 맛을 보기도 했고, 구시가에서 잠시 길을 잃고 버벅거렸는데 아마도 그건 그 직전 예니사원서 만났던

적반하장의 할배 탓일 거다. 무지 친절한 척하다가 갑자기 삐져버리고. 아직 영어로 싸우는 건, 혹은 따지는 건

잘 못하겠다. 그저 착하고 모범적인 영어만 배워왔으니 원. 그림도 신통찮더만, 맘껏 구경하래서 옆에서

그림그리는 거 구경하고 한점 두점 꺼내서 보여주는 거 잠자코 구경했다가 갈랬더니, 그림 하나 안산다고 난리...

걍 말 안통하는 사람한테는 그저 미안하다고 하고 치워야겠다.


일요일이어서 원래 문을 안 연 거였는지, 아님 갑작스레 8시가 넘으면서 어두워진 것에 놀란 건지, 좁은 시커먼

골목에 인적도 없고 아무 생명의 기운도 없고, 아잔 소리가 괴기스럽게 골목을 뒤흔들더닌 길가에 널린 고양이들이

음흉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헤매도 대로는 커녕 사람 한 명 안 보이는데 덜컥 쫄아서 어느순간 뛰기 시작했는데,

문득 아야소피아의 어여쁜 미나렛이 눈앞에 서있는 모습에 맥이 탁 놓였다.

무슨 페스티발 같은 게 오늘부터 아야소피아 앞 광장서 있었나보다. 우리네 장터같이 구멍가게들이 열리고,

경찰들이 분주하고, 사람들이 바글바글. 좀 구경해주다가 영 지치고 목도 마르고 다리도 아프고. 오렌지를 까먹고

싶단 생각이 불쑥 들었는데, 오렌지주스말고 생 오렌지는 절대 안 판다는 싸가지 아저씨에서, 여섯개에 오천원을

부르는 사기꾼식끼, 그런 고난과 역경 끝에 겨우 6개를 1$에 손에 넣었다. 어찌나 기쁘던지, 공연을 보며 오렌지를

까먹겠다던 원래 생각과는 달리 공연은 보는 둥 마는 둥 계단에 앉아 순식간에 다 까먹고 숙소로 들어와버렸다.





셀축(Celcuk)행 버스를 타고 '오라이~' 아저씨와 안 되는 영어로 둘다 애써가며 터키어도 몇마디 배워보고,

서로의 지갑도 구경시켜 주고 했다. 그렇게 심심찮게 도착한 셀축에선, 아르테미스 분수대 앞에서 또다시

새로운 아저씨와 친해지고 말았다. 재미있게 말도 잘했고, 맥주도 사준대다가 안주삼아 먹고 있던 도토리도

맛보여줘서 그냥 자연스레 합석하고, 함께 걷게 되었던 거다. 그냥 착한 현지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한적한

골목 어귀에 앉히고는 주위를 둘레둘레, 사뭇 긴장한 손짓으로 지갑 속에서 오래 되어 보이는 금화를 몇 닢이나

꺼내 놓았다.


250달러, 150달러, 100달러, 50달러, 40달러, 10달러, 5달러까지...재미삼아 시작한 흥정인데, 급기야 내가 찬

싸구려 목걸이라도 바꿔줄 수 있다고 했다. 에페스에서 일한다느니, 발굴작업하면 그냥 그런 과거의 유물들이

쏟아져나온다느니, 합법적인 루트로는 팔 방법이 없어 그러니 자신의 가족들을 생각해서 사달라느니,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그에게 문득 질려버린 걸 느꼈다.

그런가 하면 이사베이모스크 옆의 가게에 있던 그 스무살짜리 아가씨, 뛰어와서 빨대까지 챙겨주는 거 보면

어려보인다고 칭찬해줬던 말이 약빨이 있었던 것 같다. 괜한 말이 아니라 정말, 머리 모양새도 그렇고 얼굴의

솜털도 그렇고..난 부모님이 잠시 안 계신 새 가게를 지키고 있는 중학생쯤으로나 상상했었단 말이다.


오토가르 가는 길 가르쳐주면서 담배도 권해주고 이것저것 유적도 보여줬던 아저씨도 있었다. 이빨을 온통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주었던 그의 주름진 털복숭이 얼굴. 그런 식의 친구가 권하는 담배는, 마다할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들. 아, 시장에서 만난 카펫집 아저씨는 복숭아티도 사주고 쉬었다가 가라고 살갑게

대해주기까지 했었다. 사람들이 정말 친절하고 밝고 긍정적이랄까.


근데도 침대가 열 몇개 있는 데서 혼자 자려니 무진장 외롭네. 혼자 시장쪽을 돌며 아이쇼핑을 하는데, 문 다 닫힌

유적들을 헛되이 도는데 왜 그리도 허전하던지. 동양인따위 한명도 보이지 않는 외딴 곳에서 혼자 떨궈진

느낌이랄까.

시계를 7시반에 맞춰놓았는데 8시에 일어났다. 알람이 믿음직스럽지가 못하군. 샤워 한번 싹 해서 체온 좀 올리고

바로 체크아웃하고 나섰다. 성요한교회부터 찾아나섰다. 어젯 밤에 멋진 성이라고 생각했던 게 실은 교회유적의

일부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리저리 배회하며 구경을 하다가 어제 그 아저씨를 또 만나고 말았다.

숨겨져 있던 리얼 모자이크를 보여주겠다며 구석으로 끌고 가서는, 또다시 그 금화(라고 쓰고 동전나부랭이라고

읽기로 하자)를 꺼내들었다. 해서 필살기. Traveler's Check도 받아요? 바로 돌아서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래도 사진이나 한 방 같이 찍어줄까 하는 마음이 동했으나, 그새 다른 여성여행객에게 달라붙어

금화(라고 쓰고 동전나부랭이라고 읽는 그 금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사베이모스크 보러 가는 길에 어제 그 아가씨 있는 가게에 다시 들러 물을 샀다.

하맘보러가다가 또다시 동전이랑 '파파 프러블럼'을 호소하는 아저씨한테 잡혀서 잠시 옥신각신하다가,
 
반강제로 그의 귀여운 아이와 함께 사진을 기어코 찍고는 빠이빠이. 모스크에선 비치되어 있던 쿠란을

조심스레 살펴보며 잠시 쉬었다.

그리고 아르테미스 신전을 거쳐 에페스까지 걷기로 작정,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둥 하나 딸랑 남은 유적지.

참 친절한-주는 것 딱히 없이도 기분이 좋아지는-사람들을 많이 봤다.

카트를 무겁게 끌고 가던 꼬맹이 아이들, 비록 짐은 얼마 안 되었지만 카트 자체로도 충분히 무거워보였다구.

타투를 멋지게 하고 자전거를 타는 장난꾸러기 녀석들, 포스만은 폭주족이었다. 쉬었다 가라고 자리를 권하는

아저씨에 아까 동전갖고 하맘서 장난친 아저씨까지.

에페스는 멋졌다. 무진장 더운 거 빼고는. 또 어느 가족에게 잡혀 영어실습상대가 되어주기도 하고, 사진도

찍히고, 왠지 손해보는 듯 해서 나도 굳이 같이 찍자고 하고. 에페스서 오는 길에 긴 생머리 여선생님을 만나

마케서 과일 쫌 같이 사서 함께 나눠먹었다. 어찌나 달콤하고 양도 많던지. 남겼다.

푸욱 쉬고 박물관 가서 돌아보고는, 이번에는 오렌지를 사들고 돌아다니다가 카펫 가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만난 지야. 아침에 환전해야 해서 여기저기 은행을 찾아보고 환전소를 찾다가 난감하던 중에, 어떤 삐끼

한명이 친절하게도 환전이 가능한 한 기념품 샵에 데려가 주었었는데, 그때 거기 누나가 파랑눈깔 비스무레한 걸

내게 달아줬었다. 그 삐끼가 바로 지야였던 것. 우연찮게 다시 만난 그는 무지 반가워하며 차도 잔뜩 대접해주고
 
카펫도 구경시켜 주고.

차 석잔쯤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문득 지야는 자신의 집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시장 들러서 잠시 그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가는데, 드디어 이곳 사람들이 사는 집까지 들어가보는구나 하고 상당히 기대를 했었다.

지야, 지레, 부탄..이던가, 난장판으로 어질러진 집에 가서 복숭아 먹고 무화과도 먹고. 터키 음악채널 보면서

음악이야기도 하고. 이런저런 장래 이야기랑 블랙코미디, 영화이야기까지. 뭐 약간의 연애나 여자이야기도 나오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난 여기서 Radiohead가 먹힐 줄은 몰랐다. 와우. HIgh & dry라거나 Let down..


뭐랄까, POWER of MUSIC.



안탈랴에서 마주쳤던 아이들, 저울을 갖고 다니며 몸무게를 재주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터키 전통아이스크림인 '돈두르마'를 파는 맥도널드 앞에서 머니머니~를 외치며 오가는 관광객을

붙잡기도 하고 있었다. 크고 짙은 쌍꺼풀이 인상적인, 그래서 그저 선해보이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눈에 꽉 찼다.


파묵칼레로 이동하려고 버스터미널로 가는 길에 문득 볼일이 있어서 급하게 주위를 찾았더니, 화장실 앞에

지하철 같은 회전문이 설치되어있었다. 무려 500,000터키쉬리라. 그래봐야 한국돈으로 치면 500원이라지만

어쨌든 이런 치사한.


안탈랴(Antalya)에서 데니즐리(Denizli)까지 4시간, 거기에서 다시 파묵칼레(Pamukkale)까지 30분 소요.

생각보다 피곤했었나보다. 여러 사람과 계속 다녀서 그랬는지, 혹은 맨날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빡센 일정을

소화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내 자버렸다. 생각보다 파묵칼레는 별로였다.

탄산성분을 흠뻑 함유하고 있는 온천이 흘러나와 기원전시대부터 휴양지로 이름높았다는 파묵칼레, 이곳의

하얀 물그릇같은 웅덩이에 층층이 고인 하늘빛 물결이 찰랑이는 그림. 요새 터키 관광을 홍보하는 광고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바로 그곳이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던가,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도 알고 있고.

여러 이유가 있었을 거지만, 이 탄산온천 지역의 환경 및 수량 보존을 위해 유량을 제한하고 있었다는 것도 하나,

그리고 뭐랄까...딱 이 사진만큼의 풍경이었다는 이유도 하나, 마지막으로 저 언덕을 올라가는데 신발을 벗고

맨발로 느꼈던 물머금은 탄산칼슘 덩어리들의 찝질한 감촉이 그닥 유쾌하진 않았다는 것 하나까지.

해가 질 무렵 다시 올랐던 파묵칼레에서의 그늘진 풍경. 때로는 잔뜩 선망을 품고 다가갔던 그에게서 생각보다

전혀 진부하거나 실망스런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는 거다.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새하얀 '목화의 성'(파묵칼레의

의미라던데)다운 풍모가 보이지만, 가까이서 들이대고 볼수록 뭔가 디테일에 집착하게 되는..멀리서 바라볼 때

더 좋은 풍경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히에라폴리스는 파묵칼레에서 걸어서 고작 몇 분..? 그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고대의 도시 유적이다. 집터라거나,

아치형 문의 형체라거나, 여러 유적들이 남아있지만 무엇보다 압도적인 것은 2세기경에 만들어졌다는 로마의

원형극장이었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옆에서 설명하는 가이드의 말에 귀를 쫑긋세워 감청해 보니 여기가

오히려 그곳보다 잘 보존되어 있고, 규모도 못지 않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실제로 여전히 당시 고안되어

배치되었던 돌들에 반사되는 음향효과가 작동하고 있어, 무대 위에서 지른 소리가 관객석 뒤쪽까지 전달된다고

했다. 반신반의하는 여행객들. 나도 뒤에서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원형극장을 한바퀴 돌았다.

그걸 확인하러 무대와 관객에 뿔뿔이 흩어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경탄하는 여행자들. 나는 신체분절의

마법을 사용하여 조금씩 사진 속에 나를 구겨넣기로 하고, 나의 가지런한 두 발을 사진에 담았다. 아 물론,

내 귀에도 무대에서 누군가가 "마이크 테스트"를 웅얼대는 소리가 와닿았었다.

더운 날씨였다. 8월의 터키는 계속 그랬었던 것 같다. 유럽에서 온 듯한 여행객들은 웃통을 훌떡 벗어제끼고,

우람한 배와 복실복실한 가슴털을 자랑하며 활개치고 다녔다.




카파도키아의 로즈밸리 하이킹을 함께 하며 친해진 일행들을 전부 꼬셔서 술과 안주가 무제한으로 나온다는(!)

투어에 끼기로 했다. 이름하야 '터키쉬 나이트'.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 맥주는 물론이고 터키의 전통주인

'라키'가 나온다고 했다. '라키'란 포도를 증류해서 만든 50도짜리 술인데, 겉으로 보기엔 투명한 소주와 같지만

향이 매우 독특하고 맛도 묘하며, 물에 희석시키는 순간 하얗게 우윳빛으로 변해버리는 신비의 술이다. 사실 지금

우리 집에도 한병 있지만, 그 강렬한 이국의 맛과 향 때문인지 잘 손이 안 가는 게 사실이다.
물론 술이 무제한이라는 이유 이외에도, 터키의 전통춤인 밸리댄스를 보여준다는 이유도 있었다. 본전 생각에

저녁까지 굶고 저녁 8시에 숙소에서 출발, 우리 숙소처럼 똑같이 바위를 파고 만들어진 큼지막한 무대 옆에

차려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안주로 나온 과일과 과자를 계속해서 리필하며 밸리댄스와 수피댄스, 그리고

이름 모를 다양한 전통 춤들을 구경했는데, 아쉽게도 밸리댄스는 그다지 오래 공연되지 않았다. 이미 익숙한

밸리댄스보다 더욱 눈을 끌었던 것은, 남자분이 치마같은 하얀 옷을 입고 몽환적인 음악에 맞추어 내내

뱅글거리며 돌던 수피댄스. 이슬람 신비주의..만물이 쉼없이 유전하며 변화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다는 그 댄스를 집중해서 보다보니, 지금까지 먹고 마신 술과 안주들이 뱃속에서 함께 뱅글거리는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마지막은 거의 나이트 분위기,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무대로 올라와 춤을 추던...그런

히피스러운 분위기랄까. 비록 몸은 뻣뻣한 나무토막같았지만, 마음만은 그들과 함께 웃고 즐길 수 있었던 밤.

다음 날 눈떠보니 7시 반, 전날의 피로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몸띵이를 채근하며 일어났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여러

투어 중에서 뭘 해야 하루가 알찰까 생각했지만 어차피 이곳이 워낙 넓고 기기묘묘한 형상들도 모두 신기한 터라,

굳이 다 '발자국 찍으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지 싶다. 이스탄불에서부터 함께 움직이던 누님들과 함께 사파리 지프

투어를 하기로 했다.

터키 중부의 황량한 지형, 그곳의 기묘한 풍광은 역시 스타워즈에서 배경으로 삼을만한 이질적이고도 낯선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곳을 마냥 달렸던 우리의 지프. 이름 까먹은 저 터키아저씨..영어는 짧았지만 손은 길어서,

은근슬쩍 스킨십을...ㅡㅡㆀ 누님과 휴학생 아가씨, 터키를 끝내 같이 돌았음 무지 잼있었을 멤버였는데.
울 뒷차엔 프랑스 할무이 한분, 글구 대구 커플 한팀..거기에 수학과외샌님들이랑-이분들한테 '아주머니'이랬다가

맞을 뻔했다. 그리고 회사 그만두고 몇달째 여행중이시라던 그 '여행속물' 아저씨 한 분. 여행 다님서 만나는

한국인은 딱 세 부류였다. 좀 젊다, 어리다 싶음 대학생, 약간 나이가 있다 싶음 학교 선생님들, 글구 어정쩡하니

왠지 안 어울려보이면 '백수'..회사 관두고 무언가 심기일전을 꾀하거나 애초의 꿈을 수복하거나. 학교 선생님들

참 많이도 만났다 그러고 보면.

차유신, 젤베, 데브란트, 우치사르..많은 곳을 돌며 그 루트도 참 괜찮다 싶던데, 황량한 벌판이나 완연한 시골길,

거친 오프로드에서 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때론 시냇길을 차로 주파하며 '물쑈'를 하기도 하고. 보면 볼수록

터키인들 참 친절하고 적극적이랄까, 지프타고 가면서 계속 손흔들고 인사하며 푸근하게도 웃고 다닌 것 같다.

어설픈 웃음이나 경직된 미소, 금세라도 무표정으로 바뀔 듯한 위태한 미소가 아니라 정말 여유있는 웃음. 그걸

여행 도중에 계속 갖고 다녀야지, 하고 다짐.


걍 대략 산비탈에 벽돌로 올려세운 집들이 아니라, 산을 깍아내고 만든 이 촘촘한 공간들. 때론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전체의 윤곽을 미처 알아보지 못할 만한 풍경들이 있는데, 카파도키아의 풍경 역시..지나고 나서야 무슨 길을

밟고 무슨 풍경 사이에 자신이 틈입했었는지 알 수 있는 법인갑다. 자연과 인간, 무슨 교양 수업 제목틱한 느낌을

카파도키아에서 참 실감나게 얻었더랬다.

어딜 가나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섞여 있기 마련이라지만, 대체로 울나라 사람들이 (외국인에게) '무뚝뚝해

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대체로 터키, 그리고 이집트인들은 무지 친절하다. 머...여자들끼리 다님 좀 안

좋다는 터키 유학생의 투덜거림도 있긴 했지만, 어쨌든 이집트와는 달리 터키에선 아무한테나 카메라를 맡겨

사진을 부탁해도 잘 찍어주었다. 이것저것 말도 붙이며 호기심과 환대를 표하기도 하구. 이집트서는 카메라를

거부하거나, 왠지 카메라 받음 바로 도망갈 듯한 우려로 인하여 혼자 여행다님의 설움을 많이 느껴야 했었지만.

우치사르 정상에서 어느 붙임성좋고 잘생긴 터키 남성의 도움을 받은 단체 사진.

우리가 움직였던 코스. 그리고 우리가 묵었던 LAZER Pension.

여행은 줄곧 해뜨는 것으로부터 해지는 것까지의 주요 일정과, 해진 이후의 옵션으로 구성되었더랬다. '해가 진다',
 
'해가 뜬다'란 표현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국면과 형용불가의 장면들을 담고 있는 것인지, 몇십번을 봤건만

질리지가 않았다. 대체로, 터키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해야 할 듯한 곳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계속해서 한탄.

리가 머물던 숙소는 기묘한 형태의 바위를 파내어 방을 만들어낸, 그런 운치어린 곳이었다. 그보다 더욱 좋았던

건, 혼자라 생각하고 떠났던 여행이 어느새 정감어린 사람들에 둘려진 채 따스한 배웅까지도 받는 '럭셔리'한

것으로 바뀌었단 사실. 카파도키아를 떠나 지중해와 '나무 위의 집'-허클베리 핀이 살았을 법한-이 기다리는

올림포스로 떠나던 날 밤...누나들의 환송, 그리고 '아저씨'의 촬영.




기타 참고자료..도움이 되려나 몰겠지만.


기대치에 훨씬 못 미치는 벤츠껍데기 버스를 타고 도착한 카파도키아. 제대로 잠을 못 자서 온통 뻣뻣해진

몸뚱이를 끌며 펜션에 들어섰지만, 테라스 쪽에서 보이는 풍경이 날 다시 분기시키기에 충분했다. HP +100.

온통 뾰족뾰족하게 갈아진 듯한 바위산에 자그마한 구멍이 난 채 옆의 구멍에선 연기가 뻐끔뻐끔 올라오는 천혜의

펜션인 거다. 바위집..이라는 표현도 부족하고, 토굴, 아니 바위굴...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저런 투어 중에 고민하던 참이었던지라, 우선 혼자 러브밸리라는 펜션 뒤쪽의 협곡을 트레킹하고 돌아오니

1시반, 왜 이름이 러브밸리인지는...ㅋㅋㅋ

잠시 쉬었다가 이곳에서 새로 만나게 된 휴학생 아가씨와 장기여행중인 아저씨하고 넷이 로즈밸리 하이킹을 시작.

기암괴석군들을 뚫고 다니며 자연의 낯선 풍광에 감탄하기도 하고, 그런 거칠고 황량한 곳에서 주거지를 파내고

종교를 고수하는 인간의 신념에 또한 경의를 표하면서 밧줄도 타고 기어오르기도 하고, 더러는 미끄러지고 그런

재미있는 코스였다. 저 너머 노출된 불그스름한 사면이 장밋빛이라 하여 로즈밸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여기서의 해지는 장면이 정말 멋지다고 하는데, 담에 직접 차몰고 다님서나-아마도 신혼여행쯤에ㅋ-볼 수 있을까.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색색으로 염색한 시루떡이 각각 만들어진 제조일자가 달라 굳은 정도에 차이가 나는

거라. 해서 비나 바람에 씻길 때 말랑말랑한 것부터 떨어져나가다 보니 야리꾸리한 형태의 바위들이 남게 된 것.

사진으로 보니까 별반 실감이 덜하다만은..

비록 풍경이 워낙 압도적이고 광활해서 바싹 붙어선 상태에선 그림에 채 담기지 않는다는 치명적이고 안타까운

면을 계속해서 한탄할 수 밖에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그길을 지난 후에야 내가 어떤 코스를 지났었는지 조망할

수 있다는 상식의 울림을 크게 해 준 것에 감사할 뿐.

아저씨가 사진을 좀 찍을 줄 아는 듯하여 먼저 내가 모델 역할을 해주고 그것과 똑같이 아저씨를 찍어주며 카메라
 
찍는 법 실습하는 식으로 많이 찍었다. 암만 생각해도 내가 가져간 필름이 많이 부족할 듯 하여 그 아저씨와 그런 

일종의 '공조'를 했던 건데, 결과적으로는 그 아저씨는 사진을 꼭 이메일로 보내주겠노라던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내가 담긴 사진들을 전부 들고 날라버렸다. 난 그의 약속만 믿고 내 필카를 최대한 아끼고 있었기에

이곳의 사진들이 많이 남지 않는 비극이 벌어졌다는...


아마도 직장을 관두고 마음을 정리하러 세계여행을 다니는 중이라 했으니, 디카의 용량이 부족했으려니...

하지만. 그 아저씨는 내가 만난 대표적인 여행 '속물'이었다. 어디를 가던, 무슨 풍경을 보고 무엇을 먹던

꼭 한 마디. 이건 어디어디보다 못하네, 어디어디랑 똑같네.


많이 다녀봤다고 자랑하는 건지. 아니 다녀봤다는 일정을 들어보니 파리서 삼일, 런던서 삼일..머 그런

식이던데...내가 파리에서만 일주일 넘게 있었어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판에, 인증샷만 찍고 다니셨나.


아저씨, 그런 식의 싹둑 자르는 말은 속으로만 하시던가. 아니...속으로만이라 해도 그렇다. 돈을 싸짊어지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껏 마음 정리하러 세계를 돌고 있다면서 여기와 저기를 꼭 그렇게 평가하고 비교해야

속이 시원하시겠수. 그냥 그곳을 느끼고 즐기면 되는 거 아니냔 말입니다.

그리고, 만사 제쳐놓고 여행이야 알아서 자기 느낌대로 떠나고 배우고 즐기는 거니까 터치 안 한다 치면..

했던 약속은 지켜야 할 거 아니냐구요. 당신 때문에 군대 휴가때마다 나와서 노가다 하며 번 돈으로 떠난

한달여의 귀한 여행 중 며칠간의 기록이 완전히 증발해 버리다시피 했단 말입니다.


어쨌든, 여행 다니시며 마음 좀 정리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난 참 기분이 그랬던 냥반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선입견'이 있었던 내게, 그런 다소 눈먼 호감은 위험하다고 알려준 사람 중 하나.

여기저기 다녀봤다고 자랑하듯 말하는 사람이나 이런 식으로 뭘 느끼는지 모르게 여행을 다니는 사람

(물론 전적으로 내 기준이지만), 혹은 심지어 게임기를 들고 다니며 이동 중에,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하는

사람까지. 난 그런 여행 속물이 아닌 채 여행을 계속하고 싶었다.




톱카프 궁전...이 지독히도 눈을 괴롭히는 궁전 기본 입장료가 15000, 보석관이 별도 10000, 하렘(여성전용 궁전

칸이라 해야하나;)이 별도 15000쯤 되던가. 안력을 만땅으로 돋구고, 쉴새없이 전후좌우위아래를 탐색해도

여전히 볼 것이 남던 그곳, 무지하게 화려한 온갖 치장과 혹시 한군데라도 빼놓을까 편집증적으로 치장된 기둥

-대들보-천장.
 
금남의 구역이던 하렘의 웬지모를 폐쇄적인 분위기와 화사한 장식들, 그리고 보석관에서 전시된 84캐럿 다이아를

위시한 보물들은 별도의 비용을 내고 들어갈 값어치가 충분히 있었다.

톱카프 궁전의 내실에서 발견한 절라 편해보이는 긴쿠션을 가진 의자, 게다가 어딜 가나 놓여있는 저 '향로'..?

온통 흰색과 파란색을 쓴 이즈니크 타일들과 천장 가득 조각된 문양들, 그리고 아낌없이 쓰여진 금색의 화려함은

곳곳에 놓인 보물류와 비싸보이는 도자기류들과 더불어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머...정신없이 보고 나왔는데,

대략 사람 살 곳은 못 되는 듯.ㅋㅋ

톱카프 궁전에서 어찌나 지쳤던지..하렘 입장표 끊고 난입직전 잠시 쉬는 중에 한 장. 아, 내 앞의 그 프랑스

아줌마 어찌나 싸가지 없던지...마구 허공을 찔러대는 손가락과 함께 blurblur..so be quiet, 이 지랄.--+ 하렘은

그 자체로 완결된 구조를 지녔다는 느낌과 더불어, 왠지모를 여성의 향기가 은은히 남은듯한 환상..마치 여행내내

차도르를 쓴 여성들의 눈을 보며 얼마나 이쁘실지를 상상하며 즐거워했듯.

톱카프 궁전의 뒷뜰에서 함께 하루를 빡시게 돌았던 누님들과 함께.

여행의 둘째날, 의욕에 불타던 나는 누님들을 독려해가며 오전, 오후를 상당히 밀도있는 스케줄로 함께했었다.

제대한지 기껏 5일 지난 군바리에게나 가능할 그런 스케줄을 소화해내느라 급기야, 한 누님은 터키식아이스크림

돈두르마를 먹고서 갑작스레 더위도 같이 먹었단 걸 깨닫고...담날 카파도키아로 가는 껍데기만 벤츠였던 잔뜩

구린 버스를 결국 다른 누나랑 나만 타야했던...그래도 이땐 마냥 좋았는데^^; 톱카프 궁전의 뒤뜰서 이스탄불의

시가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많은 모스크와 미나렛들에 감탄했었는데, 이집트 가보니 여긴 장난이었던 셈이다.ㅋ


보스포러스 해협에선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가 만난다고 한다. 한강둔치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던 그곳...

이 바다를 따라가면 한켠엔 흑해가, 한켠엔 지중해가. 그리고 지구는 둥그니까 언젠간 동해까지도 닿지 않을까

따위 망상에 잠시 젖기도 했었다. 흑해의 바닷물이란 어찌나 시퍼러둥둥하던지.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팔던 고등어케밥,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들 알겠지만, 내가 이곳을 여행했던 2004년만

해도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던 듯...바닷가에 정박해둔 배에서 고등어를 쉴새없이 구우며, 바게트빵사이에

토마토나 양배추와 함께 꼽아서 1,500,000터키쉬리라에 팔았던 듯. 말하자면 고등어샌드위치라고 볼 수도

있을 텐데, 애초엔 엄청 비리지 않을까, 좀체 빵 사이에 생선을 끼워먹는다는 게 말이나 되나 싶었지만..

먹어보니 무지 맛있었다. 터키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맛보고 오겠다고 다짐할 만큼, 유니크하고도 맛났던

샌드위치.


아, 1,500,000터키쉬리라였다곤 하지만 0 세개 떼고 생각하면 대략 한국돈으로는 1,500원쯤? 이란 이야기. 이걸

하루종일 빨빨거리며 다닐 때 점심으로 먹었었던가..그러고 보면 여전히 군바리 마인드가 강했었더랬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끼고 선 예니 사원을 뒤로 하고. 나중에 이곳에선 왠 '미친 할배' 하나와 손짓발짓으로 싸우고

말았다는.




아침 6시부터 움직이기로 누나들과 약속했었는데, 암만해도 의욕이 지나쳤었던 것 같다. 전날 이스탄불을

떠난다는 여행자로부터 론리플래넷 흥정하고 정보도 얻고 하느라 늦게 잤던 탓도 있고, 아무리 그래도 6시는

너무 이르다는 이야기도 있고 해서 밥먹고 8시 넘어서야 여행 시작.


히포드롬이라 해서 원형극장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다 허물어지고 남은 건 카르낙신전에서 들고 온 오벨리스크와

몇 개 벽돌찌끄러기들. 이 누님들 사진찍기를 얼마나 좋아하던지, 1000장 찍기가 목표라 했건만 이 속도라면

며칠도 안가 1000장쯤은 우습겠다 싶다. 디카를 사들고 왔어야 했는데 그럴려면 노가다를 몇주쯤 더 해야

했을 테니 여행 자체가 틀어졌을지도 모를 일, 어쩔 수 없었던 셈이다.

블루모스크는 안쪽의 거대한 돔과 타일로 이루어진 벽면이 인상적이었다. 전혀 이슬람 문화와 접촉이 없었던 내가

처음 밟은 모스크였다. 독특한 건물 모양, 그리고 파스텔풍의 색감이 참 부드럽다는 느낌..그 옆에 서 있는

아야소피아는 오백년전부터 계속 개축된 건물이라는데, 천장의 화려한 당초무늬라거나 꼬불하게 이어지는

그림같은 글씨들이 워낙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이어서...목이 아픈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바라보게 만들었다.

회칠이 벗겨지면 다시 덧칠하는 정도에서 끝내며 계속 '현재'에 소용되는 건물로 쓰이던 그 건물들이, 이제는

모두 볼썽 사나운 파이프 따위로 얼길설기 엮인 스피커와 감시카메라, 조명같은 것들로 포박당한 채 그저

과거의 유물로 고정되어 있었다. 더이상 생명이 이어지지는 않는 '관광지'의 느낌.

바로 옆에 붙어있던 아야소피아..하기야 소피아..라고도 하고, 소피아 대성당이라고도 하고, 그 다양한 명칭은

보르포러스해협에 자리해 아프리카와 유럽, 그리고 아시아의 요충을 잇는 이곳 이스탄불의 종교적 위세의 격변과

성쇠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애초 모스크였다가, 잠시 교회로 개축되었다가, 다시 회칠되어 모스크로 쓰였던

그곳은, 이제는 활짝 무장해제된 채 각국의 다양한 종교인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상숭배가 금지된 이슬람 교리에 따라 모스크 내에는 아무런 조각상이나 상징물이 없다. 다만 이슬람 세계의 중심인

메카의 카바 신전을 지시하는 구조물이 있으니, 사진의 조형물이 바로 그 방향을 나타낸다. 이슬람교도들이 기도를

할 때는 모두 이 곳을 향해 기도를 해야 한다고 하며, 메카의 방향을 정확히 잡기 위해 고대 이슬람의 수리지리학이

발달한 것이라고도 한다.


터키 물가는..그럭저럭 한국과 비슷한데, 숙박비가 싼편이다. 5~7$이면 하루밤 묵을 수 있으니..근데 입장료가

열라 비싸다.(지금은 아마 화폐개혁을 했다고 알고 있지만..) 아야소피아 입장료도 15,000,000 터키쉬리라(혹은

15,000bin). 오전의 지하궁전은 10,000터키쉬리라(혹은 10,000bin). 거기서 000을 빼면 대략 한국의 가격으로

환산이 가능했다. 그치만 예산 빠듯한 갓 군필자에겐 너무 혹독한 느낌을 안겨주던 그곳의 화폐 단위.

지하궁전의 온전함과 메두사의 뒤집어진 머리는 과거에도 그런 단절이 없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악의로던, 혹은 무의도적이던. 마치 거대한 연못을 지하에 파놓은 듯, 으슥하면서도 살짝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그곳에서 수백수천년동안 물에 찰박거리며 씻기우고 있던 메두사의 뒤집어진 머리조각이라니.

마침 지하의 그곳에는 우리 일행밖에 없이 한산했던 터라 한발 한발 내딛는 발걸음도 더욱 큰 반향을 가지고

사방에서 메아리쳤고, 지하 특유의 냉기가 목덜미의 땀을 앗아갔던, 그런 특별했던 기억.





공항까지 가는 길이 어찌나 덥고 등짐은 무겁던지, 여기서 벌써 이렇게 진한 육수가 흐르는데 터키나 이집트에선

괜찮을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공항서 기어코 무료 인터넷컴을 찾아 숙제처럼 친구에게 인사를 남기고, 터키항공

비행기를 타고 창가쪽 자리에 앉았다. 앉고 나서 보니 창가쪽 자리란 초짜를 위한 자리구나 싶은 게, '우익'에 가려

잔뜩 갑갑한 창 너머 시야에 더해 옆좌석에 타자마자 담요를 머리까지 덮어쓴 채 뒤척이며 잠을 청하는 아주머니를

보며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왠지, 이 담백한-꾀죄죄한-아줌마가 어디선가 낯이 많이 익다는 신호가 마구 쏴지는 거다. 이미 그녀가 신문을

활짝 펼쳐서 읽는 것을 보며 살짝 빈정이 상하기는 했지만, 아님 말자는 심으로 '혹시 누구 닮았단 이야기 들어보지

않으셨나요?'라 말을 걸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누구를 닮았을까요?'라고 되물음으로 답하길래 에라, 모르겠다

싶어 '한비야씨 많이 닮으셨어요.'라 했더니 답이 돌아왔다. '제가 한비야에요'ㅋㅋ


그렇게 트인 말문은 이스탄불에 도착할 떄까지, 구호활동, 여행, 종교, 국가관, 역사, 외교부, 김선일 사건 그리고

이라크전, 민주노동당에 이르기까지 참 많이도 이야기하고 술마시고 건배하고 그렇게 이어졌다. 저마다의 쓰임이

있고, 영역이 있고, 세상일이란 어느 한명이 다 맡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소신에 투철한 '누님'이었다. 그녀의

겸손함은 어쩌면 종교의 힘일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신념과 열의는 사람에 기대어 분출된다. 누님과의 이야기중에

잡은 화두 하나, 내가 효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찾는 것. 인삼같은 만병통치약이 아닌 바에야.


누님은 이라크 국경에서 민간구호활동을 하러 가신다며 이스탄불 공항에서 아쉽게 헤어졌다. 이제 다시 혼자

시작하는 여행이구나, 싶었는데 공항서 왠 아가씨 둘이 환전하느라 낑낑대고 있는 것을 돕다가 합류하게 되었다.

친절한 터키인의 도움으로 메트로와 트램을 거쳐 '동양호텔'에 체크인, 야경이 어찌나 멋지던지 한시정도까지

밖에서 아야소피아와 블루모스크를 바라보며 사진도 찍고 Efes 한 캔을 홀짝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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