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엔 이집트 문화의 양대축은 고대 파라오문화하고 이슬람문화인 거 같은데, 파라오의 그것들은 이미 충분할만큼
 
봤고, 이슬람문화는 카이로에서 제일 잘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하루에 다섯번씩 울린다는 아잔소리라거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스크 첨탑, 미나렛들은 이집트의 매끈하게 구획된 전 국토를 뒤덮고 있지만, 그게 뿌리깊은 유적처럼

남아서 지금 현재의 삶과 끈끈이 엮인 게 실감나는 곳은 아마 이슬라믹 카이로만한 곳이 없을 거다.

이슬라믹 카이로에서..아니, 카이로 전체에 수천수만개는 될거라는 저 황홀한 미나렛(첨탑) 중에서 가장 이쁘다고 생각한

알아자르 사원의 세개짜리 미나렛. 이 사원 안에서 난 앉아 쉬기도 하고, 배깔고 일기 쓰기도 하고, 론리가이드북을 펼쳐

일정을 구상하기도 하고, 지쳐 쓰러져 잠들기도 했었다. 마냥 저 미나렛을 질릴 줄 모르고 바라보다 기어이 한 컷.

그러고 보면 이집트에서는 계속 모스크 찾아다니며 아련한 아잔소리와 함께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좌식 문화에

익숙해선지 맘대로 누워도 되고 잘수조차 있는 그 평안한 모스크의 분위기가 넘 맘에 들었었다. 게다가 거기엔, 알 수

없는 부담감과 심적인 긴장을 일으키는 형상화된 신의 모습이 없어서..그 눈빛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게 맘에 든다.
 
그냥 저렇게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움푹한 공간이 있어서, 모두가 저 '지표' 너머 머나먼 메카를 응시하는 표정으로

예배를 드린다.

일단 알-아자르(Al-Azhar) 사원까지 걷고 좀 쉬어준 후에 이슬라믹 카이로를 돌기로 했다. 저번에 카이로에 머물던 때에
 
일부러 마지막을 위해 남겨놨던 지역이다. 근데 왜 이녀석들은 일본인이라니까 이렇게 친절해지는 거지. 세번째 온

알-아자르 사원인데 이제야 그 문 뒤의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을 소개해 주는 거다. 이로써 내가 사칭한 국적도 세 개.

북한인, 중국인, 일본인까지. 나를 드러내야 하는(identify) 일이 생기면 가장 유리한 게 뭘까 생각해서 필요한 국적을

꺼내 쓴 셈이다.


상인들의 숙소였다던 왈라카 어쩌구는, 마치 무슨 모델하우스 보는 느낌이었다. 새롭게 다시 지었다는 론리플래넷의

설명을 읽기 전에도, 어찌나 휑뎅그레하고 사람의 흔적이 하나도 없던지, 시간이 쌓이거나 사람의 체온이 묻었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래도 아, 이런 곳이 있었구나 정도랄까. 민속촌처럼.


이런 저런 모스크들을 또 순례하며 사진찍어도 된다는 꼬임이나 느닷없는 박시쉬 요구에도 이제 익숙해졌지만,

중간에 망고주스집에 들렀을 때 또다시 낯선 상황에 봉착. 주인아저씨는 가만히 있는데 주위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지들 멋대로 5파운드라느니 7파운드라느니, 진지하게 바가지를 씌우려는 거다. 음..쪼꼬만 애들부터 여행자를 봉으로

보는구나 싶어서 좀 씁쓸했다. 애들 응원 속에 은근히 가격을 높여 부르는 아저씨의 뻔뻔함도 거슬렸고.

베이트 알 수야미는 이슬람시대의 저택인데, 생각보다 훨씬 넓고 집구조가 마치 미로처럼 뒤엉켜 있어서 몇번이나 돌며
 
못 본 구석을 찾아다녀야 했다. 그덕분에 10이집션파운드의 입장료가 비싸다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수많은 방들에

열지어 배치되어있던 늘어진 쿠션들과 분수들, 우물들은 집안의 세과시용인가 싶을 정도로 으리으리했던 반면,

여성들이 가슴졸이며 내려다보았을 그 촘촘한 격자로 짜인 창문은 꽤나 이색적이었다. 왠지 전통한옥의 격자무늬를

닮은 거 같기도 한 그 창문은 외부의 시선은 완벽히 차단하되 내부에선 외부를 슬그머니 훔쳐볼 수 있는 식으로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왕의 천칸짜리 왕궁에서 하나 모자란 구백구십구칸짜리의 호화 상류층 저택이랄까. 무진장 넓고도 화려했고,
 
분수대가 마당마다 있는 게 네개던가 다섯개던가..이슬람문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딱 그 이야기에 어울릴 법한 저택. 사실 이 사진은 저 왼쪽 귀퉁이에 고양이가 중요했는데, 이녀석이 이뿌게 앉아있다가

움직여버렸다. 개보다 고양이가 역시 귀엽다.

카이로는 정말 매력적인 곳이다. 빌딩으로 빼곡한 스카이라인 한켠으로는 마치 중세를 여전히 사는 듯한 이슬라믹

카이로가 생생한 생명력으로 왁자지껄 펼쳐지고 있으니. 그런 스카이라인의 일부는 카이로 저 너머의 피라미드가

차지하고 있기도 했었다, 고층빌딩들의 각잡고 선 그 윤곽들 너머로. 여튼, 이슬라믹 카이로의 중심에 선 이

아름다운 문..막상 사진기를 들이대면 주위의 이집션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건 어쩌면, '역사'를 유산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삶의 터전'으로 살고 있는 사람의 시각차겠지. 근대에 박제되기 시작한 역사는 실은, 이런식으로

해방되어야 했을 거다. 한번 꼭 다시 가고 싶은데, 이집트 관광청이 이곳을 싹 정돈하고-사람들의 삶을 소거해내고-

깔끔하니 재건축을 한다고 들었다. 무슨 민속촌 분위기 만들라나 본데, 그래서 내가 갔을 때도 무진장 공사중인

이슬라믹 카이로. 최대한 빨리 다시 가보고 싶다.


나일강 근처 벤치에 앉아 바라본 카이로의 선셋은 생각보다는 이뻤지만, 그래도 역시 스모그나 대기오염때문이겠지만

태양의 선홍색이 어슴푸레한 뭔가에 밀려난 느낌이었다. 그치만 이스탄불, 카파도키아, 올림포스, 안탈랴, 셀축, 시와,

룩소르,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아스완에서 보았던 그 석양들을 떠올리며, 게다가 과거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바라봤을 그 석양들을 상상하며 멍하니 생각을 놔버렸다.


타흐리르 광장서 질주하는 차들과 제각기 일상에서 (여행자가 보기에) 소소한 것들에 묶여 사는 이집트 사람들을

응시하며 상념에 잠겨있었다. 여행도 실은 또다른 뭔가에 묶인 채 굴러가는 일상의 연속일지 모른다. 이러저러한

이름난 볼거리들, 그 틈새에서 악다구니하는 사람들에 눈이 가고 그래서 이곳 역시 사람들이 일상의 틀 속에서

버벅거리는 걸 보다 보면 문득 미소가 지어지고, 내겐 이곳이 그저 일상이 허락되지 않는 타지란 생각이 들었다.

난 여기서 그저 무언가를 계속 소비하며 내 안에 무언가를 계속 쌓아가는, 쌓아가려는 그런 뜨내기일 뿐인지도.


신호등도 변변찮은 이곳의 도로는..무단횡단의 진수를 보여주었더랬다. 재미삼아 합주해내는 클랙션의 무아지경과

도처에서 밟히는 브레이크의 굉음, 게다가 온전한 차 찾기가 힘들 정도로 광폭한 운전자들이라니...카이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8차선 도로 옆에 주저앉아 찍은 사진. 아마도 이런 것이 앞으로 내가 건너야 할 길이겠거니 하는 맘으로.


* 이런저런 티켓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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