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심벨에 가려면 아스완에서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한다. 실제 출발시간은 4시가 넘어서지만, 가기 전에 경찰에서

아부심벨로 향하는 차량대수와 총 인원수를 파악하고 행렬의 앞뒤에 패트롤카가 붙어 호위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서 절대 못가고, 결국 투어를 할 수 밖에 없단 얘기. 97년엔가 이집트 룩소르서 관광객대상으로 테러나고 일케

경찰이 잔뜩 깔렸다는데, 그와중에 어제 또 테러가 났으니 이제 이집트 난리났겠지 싶다. 관광자원으로 먹고 사는

나라에서 관광객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한다면...이미 이집트인들은 거의 계엄상태인양 쫙 깔린 경찰에 눈치를 보며

지냈었더랬다. 카이로에서 만난 한 이집트친구는 이집트인과 외국인이 같이 붙어다니는 것만 봐도 경찰이 와서 이집트

사람을 조사할 정도라고 그러던데.

아부심벨 가는 길은 한 3시간 채 안 걸린 거 같은데, 좁디좁은 15인승 미니버스에 빼곡히 실린 채 그래도 자보겠다고

잔뜩 힘쓰다가 문득 눈뜨니 6시쯤, 해가 꾸물꾸물 뜨고 있었다. 황량한 황토빛 황야에서, 아직은 그다지 강렬하지는

않은 태양이 미처 열기까지는 전달하지 못한 채 분홍빛 양광만을 세상에 꽂아주고. 반사적으로 사진 함 찍고 잠시

감상해주다가 다시 잠들어 버렸다. 사실은 끊임없이 펼쳐진 듯한 황야, 황량하고 쓸쓸한, 단조로운 풍경이 계속된

것에 지치기도 했다.

8시쯤, 기사아저씨가 갑자기 웰컴 투 아부심벨~! 외치는 소리에 깼다. 불쑥 눈앞에 나타난 나즈막한 산.

뒤로부터 정면으로, 조금씩조금씩 드러나는 아부심벨의 그 유명한 네 기의 석상은 생각만큼이나 멋졌다.

각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카르투쉬를 오른쪽 어깨와 가슴에 새기고, 먼곳 어딘가를 당당히 응시한 그 자세가

참 위풍당당하다는 느낌.

큼지막한 신전의 덩치도 덩치지만, 그 온갖 벽면과 천장을 온통 히에라글리프(이집트 그림문자)와 그림으로

가득 채워놨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 이빠이 안력을 돋구고 사방을 쉼없이 돌아보며 눈을 엄청나게 혹사시켜야

그걸 그래도 대략이나마 훑을 수 있을 정도니, 왠만한 궁전의 호사스러움에 비길만하다.


뭘 그렇게 남기고 싶었을지, 그렇게 극렬하게. 이집트인들이 죽음에 그토록 집착한게 아니라, 사실은 그 행복한

삶을 죽음 너머까지 잇고 싶어서 그토록 사후에 대한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 그림과 도안들은

그저 치장을 위해서라거나 무의미한 단편들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무수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하다. 뭐랄까..

신전 자체가 한권, 혹은 그 이상의 책으로 느껴진달까.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사람이 침튀겨가며 무언가 웅변조로

스스로 감동먹은 채 잔뜩 얘기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문제는, 마치 렌이라는 캐나다 의사아저씨가

종종 그렇듯,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서 흥분하다 보면 말이 무진장 빨라지는데 그럴 때 내가 느끼는 감정, 뭔말인지

대략은 알거 같은데 맥락이 대부분 끊기고. 그저 어렴풋한 뉘앙스와 의도만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인, 그런 느낌이

바로 내가 읽고 해석하지 못하는 그 고대의 텍스트에 대해 갖는 거랑 똑같은 거 같다.

혹 내가 그걸 읽어내고 벽면에 걸친 스토리를 이어낼 수 있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 폭포처럼 쏟아져내릴

거란 생각...그것은 람세스2세의 자기자랑이거나 마누라자랑, 혹은 이집트 위대하다 식의 쓸데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고, 혹은 이 신전에는 뭐가 얼마나 들어갔고 짐 무슨 신에게 언제 제사를 지내며..그런 이야기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그 히에라글리프와 그림들은 자체의 아름다움에 더하여 '무식'자의 눈에 신비로움을 더하고,

게다가 그토록 방대하고 빽빽하게 채워진 스토리를 읽어내릴 수 있다면 일종의 외경심마저 들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옆에 있는 좀 작은 규모의 네페르타리를 위한 신전도 가봤지만 글쎄..아부심벨과 같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가득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 이야기들이 내게 신기함과 이국적인 느낌 이상을 던지지 못하고

이해되지 못하는 이상 아부심벨의 전투신이 훨씬 인상적이었다.

어찌보면 이집트 고대문화는 기독교문화와 이슬람문화 모두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 거 같다. 오벨리스크가 이슬람

사원의 미나렛이나 교회의 첨탑으로, 히에로글리프가 모스크의 캘리그래피로,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는 상형문자가

교회의 십자가 원형태로. 올곧이 전승되었다거나 의식적으로 계승되었노라고 말하기는 힘들지 몰라도, 영향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다.

신기하게도 또다시 체코에서 온 파블로와 마르코 남매를 만났다. 어제도 기차역에서 멀찌감치 날 봤다고 하던데, 참

질긴 인연이다. 뭐..여행자들 가는 루트란 게 워낙 비슷하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부심벨 안에서 만나다니 하도

반가워서 덥썩 사진 한방 찍으려다 제지당하고, 밖에 나와 함께 사진 한장.


9시까지 미니버스로 돌아오라 하던 차에, 시시각각 여행객들이 단체로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길래 질려버렸다.

한번 다시 완상해주고는 차로 돌아가선, 같은 숙소에 머무는 미나꼬와 그녀의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아스완 하이댐으로.

마침 그녀 친구중에 하나가 하루끼의 '댄스댄스댄스'를 읽고 있길래 엉성한 영어로나마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었다.

아스완하이댐은, 볼 건 하나도 없으면서 보안에는 가장 철저했다. 사진 한장 찍지 못하게 할 정도.

다음으로 필라에 신전, 기대했던 만큼 멋졌다. 섬에 세워진 신전이란 컨셉도 그렇지만, 신전의 외벽을 크게 장식한

인물들의 조각들이 참 볼 만했다. 다만 거슬렸던 건, 비잔틴 혹은 이슬람 문화가 유입된 이후, 새롭게 등극한 신의

이름으로 이전의 신들을 말살하려는 듯 잔뜩 뭉개버린 흔적들이다. 태양이 있던 자리에 십자가가 험상궂게 새겨져

있거나, 온갖 신들의 얼굴을 위주로 몸체가 완전 뭉개져 있고, 그러다 힘겨움 걍 얼굴만 지워놓기도 하고.

단지 1800년대에 다녀간 사람들의 장난기어린 낙서가 아니라, 새로운 신의 새로운 '미신'으로 과거를 그렇게 거부

혹은 부정하려는 게...얼굴 지운다고 어떤 신적인 힘이 사라질 거라 믿는 건 또 하나의 미신일 텐데.

어쨌든, 캐나다에서 의사질을 하고 있다는 렌이라는 아저씨와 같이 보조를 맞춰 돌기도 하고 때론 혼자 돌아보기도

하면서, 사진 찍고 싶을 땐 주위에 있는 울 차 사람들-어느새 얼굴도 익고 친숙해져 버린-을 아무나 잡아 부탁하며

투어의 장점을 최대한 살렸다.

신전의 수호신인 호루스. 그의 샐쭉한 표정이나 다소 새침스러워 보이는 자태가 은근히 웃음을 불렀다.

약간 사팔뜨기같기도 하고..이 새 말이다.

마지막으로 갔던 곳은 미완성 오벨리스크. 이미 해는 중천에서 이글이글, 저토록 까맣게 탄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정오의 시간이었다. 역시 투어는 이래서 문제다. 빈칸 네개 만들어진 데다가 숙제했다고 도장 하나씩 받는

기분이랄까, 그땐 이미 여행이란 기분은 싹 사라지고 얼른 '해치우고' 가버리기만 바라게 되는 거다. 게다가

아부심벨과 필라에 신전이 주였다면, 아스완 하이댐과 미완성 오벨리스크는 그에 비해 현격한 체급차가 나는

소품에 불과하다. 미완성 오벨리스크, 가보니 걍 커다란 돌덩이, 쪼다말고 버려진 돌덩이 하나 덜렁 있었다.


물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일종의 채석장이자 그토록 거대한 오벨리시크나 피라밋들이 결국 인간의 손으로

저렇게 돌 하나를 쫄아 만들어졌다는 걸 증거하는 강력한 현장인 건 맞다. 다만 그게 워낙 덜 만들어진 거라서

기둥의 삼면만 설렁설렁 다듬어지고 아무런 다른 손길이 미처 닿기 전이었는지라 좀 많이 밋밋했단 얘기.

조금 상상력을 발휘하자면 저걸 마저 어떤 식으로 꾸며넣었을지(그니까 수다스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새겨

넣었을지), 어떻게 세우고 밑면을 어떻게 다듬고 어떻게 운반했을지 정도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지만, 이미 기진맥진해 있던 상태라 그런 거 생각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얼른 퇴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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