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오늘 기분이 무지하게 싱숭생숭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납량특집인 듯한 '군대 꿈'을 꿨던 것 같다.
잔뜩 얼고 쫄아있던 이등병 시절, 밤에 코 곤다며 두루마리 휴지를 던지고 쓰레빠를 던지고 하이바를 던지고
급기야 하이바를 뒤집어 씌우고 주먹질에 발길질을 해대다가 새벽까지 내무실 전체를 뒤집어놨던 말년 병장의
패악질이 생생히 되살아났었다. 그치만 어쩌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밤에 잘 때 코에다가 휴지를 돌돌 말아
(소음기 삼아) 끼우고 자는 거랑, 그자식 팬티니 반팔티니 널어주고 거둬오고 개켜줄때 한개씩 두개씩 돌에
감아 지뢰밭에 던져버리는 정도. 그조차도 지 팬티 자꾸 사라진다며 또다른 낙수물효과식의 구타를 낳았지만.
아, 휴가 나오던 날 세살인가 어리던 바로 윗고참이 아침에 주임원사실에 가두고 갈구고 주먹질하던 것 역시
잊을 수 없는 기억. 훈련소에서 특식이라며 나눠줬던 '치토스'의 '따조'가 허가받지 않은 놀이기구라며 전부다
수거해가고 다먹은 과자봉지를 네모나게 '파지해서' 버렸던 기억도 있다.
뭐, 재미있던 기억도 있다. 민노당이 최초로 원내진출하던 때 BX를 털어 밤새 복분자주를 부어라 마셔라 했던
기억, 밤에 동기들과 BX 냉장고 불빛을 조명삼아 맥주궤짝에 앉아 한박스씩 마셔대던 기억, 그리고 여전히
남아있는 그 녀석들까지. 그 때나 지금이나, 군대는 인간과 인간성에 백해무익하다고 믿고 있지만.
네이트 대화명을 바꿨다. "장어를 뜯고 삼계탕을 마시니 남는 것은 애정욕."에서, "6년전 오늘, 제대할때만 해도
꿈많던 소년."으로. 2004년 8월 5일, 제대를 했었다. 무려 2년 5개월하고도 1주일, 지랄같은 군생활을 마치고
거대한 마침표, 혹은 쉼표를 내려놓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기념삼아, 바로 그날, 6년전 오늘 올렸던 싸이월드의 끼적거림 하나쯤 스크랩.
궁극의 업. (2004.08.05)
정말이다. 이제서야 비로소 난 몇가지 아직 내가 희미하게밖에 잡아내지 못하던 감정표현들과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거 같다. "감정이 복받치는" "심장이 두근거릴정도로 좋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죽도록 좋은""뱃속이 요동치도록 좋은"..게다가 몇몇 가슴시리도록 절박해보이는 갈구의 표정들, 자유의 몸짓들...
그런 놓여남의 순간들...그런 것들이 나름대로 단단하고도 생생한 느낌으로 내 안에 이제야 각인된 듯한.
어제 잠시나마 평소 늘 가던 자기계발실의 두번째 자리에서, 아무것도 생각이 안 떠오르고 할말을 집어낼 수 없이
멘탈이 아웃된 상황에서 꾸역꾸역 그 공간에서의 마지막 일지를 적었다. 아무 생각도 못할 정도로 그저
좋아서였는지, 혹은 실감이 안 나서였는지, 아님 한번 풀려버린 긴장을 추스리지 못하고 여전히 늘어져
버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년휴가 복귀때 꼭 챙겨간 일기는 막판까지 아무런 기억도 남기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마무리를 할 생각이었을 뿐인데, 감정이 토해지더군.
울컥울컥, 제대다 제대. 이제 여길 뜬다. 약간 늦었다. 아님 약간 이른지도 모르겠다. 아무생각없이, 제대다 제대.
넘 경계심없이 올라갈 때까지 올라와버린 걸까. 살짝 돌아갈 길이 걱정된다. 이 '궁극의 업'된 경지에서...어떻게
해야 상처받지않고 연착륙할 수 있을지. 그야, 제대하고 나서 세상이 뒤집히길 바라거나 갑자기 모든 일이 날
중심으로 훌훌 풀리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럴 거라 여길만큼 내가 '불손'하진 않은 거 같다. 다만, 아무리
'겸손한' 해방감일지라도...지금과 같은 거의 완벽하리만큼 충만한 행복감은, 금세 스러져버릴거란 게 뻔한 걸.
마치 무진장 좋은 영화를 봤을 때 당분간 입을 딱 다물고 그 황홀함을 두고두고 되새기려 애쓰듯이..그렇게
당분간은 혼자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어느 순간엔가 입을 떼게 될 거란 걸 알고 있는 데다가,
더이상 '군바리'라는 핑계로 주위에 투정부릴 수 있는 조건이 아니기에 조금쯤은 입다물고 지금의 감정을 아껴서
맛봐야겠다. 살아간다는 게 어찌할 수 없는 늙어감의 동의어라면 어찌할 수 없는 상처입음 또한 같은 거 같다.
감정이 움직움직하며 긁히고 까이고 패이고 혹은 흉터가 이지러지거나 조금씩 상실해 가기도 하고, 그렇게
조금쯤 '신품 인간'의 기준에서 빗겨나가는게 피할 수 없는 과정인 거 같아서..흔치 않은 이런 업에 올랐을 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로부터의 충격으로 경착륙 내지 추락해 버리고 싶진 않거든. 최대한 이뿌게, 고아한
곡선을 그리며 일상적인 평정심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우왁스런 진폭으로 리듬을 헝클어뜨리는 일은 사절.
몸값 어쩌구 하며 만남을 '종용'하거나 '선택'하려 하던 군바리의 투정은 이제 접어야 할 때, 인간들과 같은
생활을 살며 비슷하게 바빠지겠지. 제대했고, 세상이 경천동지는 커녕 어줍잖은 기상 이변조차 없이 멀쩡했고,
여전히 아무일 없이 조용했거나 여전히 어제처럼 시끄러웠고, 사람들은 여전히 두다리로 걸어다녔고,
전화통에 불이 나는 일도 없었고, 행인들이 화환을 걸어주거나 꽃을 뿌려 주는 일도 없었으며, 여전히 땀은
끈적하고 불쾌했고, 밥을 안먹으면 금세 배가 고파왔고, 이제 슬 피곤을 느끼며 잠도 오기 시작했고, 내가 아는 한
오늘을 임시 공휴일로 삼거나 국경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은 절대로 없었다.
그렇게 어쨌든 난 홀로 궁극의 업된 상태를 체험하며 제대했다. 제대.
* 제대가 오신다. (2004.07.06)
끝나간다. 담주 화욜임 말년휴가 나간다. 부산가서 이틀정도 놀다가, 잘함 알바 거기서 구해서 한 이삼일 더
일하고=놀고 할지 모르는 일이며..2주간의 휴가를 마치고 또다시 드러운 기분으로 복귀하면 8일만 개김 된다.
머 제대선물도 받을 거 같고, 제대회식도 뽀지게 함 할 테고. 부대 함 삥 돌면서 인사해주고, 그러면...
클클클...나도 제대란 걸 하는군.
한달 고참들이 제대하고 나서야 나도 제대하겠구나, 란 느낌이 정말 찐하게 들었다. 제대란 걸 하긴 하는구나.
이제 내 차례구나. 여전히 전역신고하고 부대를 내려올때의 기분이 상상조차 안가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부대
정문정도까지는..내 상상력이 뻗어갔다. 제대를 하면, 하면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 몇개 더 늘어날 거
같다.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 탈옥한다던가, 쇼생크탈출의 포스터와 같은 액션에 담긴 감정, 사형선고받았다가
전기의자가 고장나서 무기형으로 감형되는 죄수, 그 정도까지는 감정을 얼추 이입할 수 있지 싶다.
외박 나갈 때마다 집에서 그런다. 너처럼 유난하게 군대 싫어하는 넘 첨 본다고. 머, 어느 집의 경우를 보셨는지
몰겠지만, 제대회식할 때쯤 보면 그래도 내 '유난스러움'이 외롭지 않단 걸 느낀다. 다들 감춰놓고 있었거나,
잠시 무뎌져 있었거나, 혹은 제대하기 위해 걍 외면하고 있었거나...그게 폭죽처럼 펑펑 터지는 때가 제대회식이란
자린 거 같다. 남은 자들에 대한 위로, 좆같음의 새삼스런 일깨움(얄밉다..), 바깥에 대한 동경...근데 알아버린
거 같다. 군생활 끝, 이란 말로 어떤 일상을 매듭짓는 일이라거나 새로운 시작 등의 말로 심기일전해보려
해보아도, 내가 분기탱천하는 그 순간에 세상 전체가 깨어 새로운 의욕으로 쇄신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이미
'못 가볼 길'이란 건 하루하루 내 전망을 좀먹고 있는 셈인 탓이다. 아니, 그다지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보고
있는 건 아니다. 존재가 귀속되는 공간과 시간, 그 밖의 제반조건들-객관적이던 주관적이던-자체가 존재를
구성한다니까. 그냥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지평이나, 내가 발딛을 수 있는 지형이나..내가 코드와 모드가 통해서
소통할 수 있는 인간群이나..그런 것들은 새까만 어둠 한가운데서 작은 꼬마전구 주위의 세상을 구성하는 셈이다.
그림자를 가진 것들.
해서, 제대라는 이벤트를 수행한다고 미션 클리어, 넥스트 스테이지, 이딴 문구가 뜰 리도 없고, 아마 2002년
1월 쯔음의 세상이 나름대로 나이먹은 채 '연속'되어 성큼 다가올 거 같다. 비슷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비슷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비슷한 단검과 방패를 가지고, 비슷한 능력치에 약간의 경험치를 더한채 복귀한다. 환류.
제대가 오신다. 아무런 환상이나 근거없는 기대 따위 버리고 replay다. 결국 같은 곳에서, 약간의 문스텝으로
시동을 걸어줄지언정, 2년 6개월은 나나 너나 훌륭하게 해치웠다. 글치 세상아?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