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즈니쉬는 예수가 부처보다 미적 감각이 떨어진다고 평한 바 있다. 무엇을 먹어야 할지에 대해 그다지 성찰하지

않았던 예수와 달리, 부처는 육식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을 만큼 섬세했다는 이유다.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다람쥐, 십자매가 죽었을 때 묻어주면서 느꼈던 그 뻣뻣함과 선뜻함이 전부였다.

군대에서 '쫌생이'라는 고양이 녀석이 '자살'했을 때도 현장을 놓쳤더랬다. 조금은 긴장되고, 조금은 흥분되는

느낌이었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빈 퍼즐조각 하나를 채워넣는 기분이랄까..나이 드신, 나이 드신 채로

멈춰버린 경비 아저씨 한 분이 누워 계셨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뇌성마비 아저씨 한 분이 나오셨다.

다행스럽게도, 험하게 돌아가신 분들은 아니었지만..혹시나 모를 의심을 풀기 위해서 그분들은 험하게

다뤄져야 했다. 간단한 시각화를 시도하면, 안심살, 갈빗살, 곱창, 호두, 육포의 이미지. 그리고 시장에서

그램수로 과일을 담아 팔듯, 그렇게 호명되는 몇가지의 수치들. 브레인 천이백오십. 좌측폐 사백..



'죽어서도 억울할지 모른다'는 오래된 사고방식은, 사실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감시와 처벌'을 통한 사회의

존속에 기여하고 있었다. 죽으면 끝이다. 그렇지만 합법적으로 '평안한 죽음'을 살 수 있는 병원이나 기타 소견서

등을 첨부하지 못한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을 규율하기 위한 '증거'로 남는다. 갈수록 빈틈없어지는 인간들.



관례란다. 부검을 견학하고나면 내장탕을 먹어야 한댄다. 대체 어떤 새디스트가 처음 만들어냈는지는

모르겠으되, 식은땀을 잠시 질척하게 흘렸던지라 반가웠다. 나는, 배가 고팠다.



언젠가 집에 아버지가 가져왔던 돼지 앞다리가 생각났다. 털이 여전히 숭숭하고, 돼지 껍데기 밑으로 투실하니

붉은 살이 늘어져 있었다. 생명을 잃고 살이 적당히 발라져서는 먹히는 거다.

동물을 먹는 것이 그다지 아름다운 일은 아니라는 라즈니쉬의 말에 공감했다. 아직 나는 동물과 식물의 생명을

무차별하게 상상할 수는 없다. 내게 비어있는 또다른 퍼즐조각 하나.




(2006.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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