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라세계류, 아오모리현의 특별명승지이자 천연기념물이라는 계곡을 따라 하늘을 가릴만큼 빼곡한

원시림 숲길을 걸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전체 거리 약 17킬로미터에 이른다는 오이라세계류

산책구간은 어쩌면 이제 한국에도 익숙해진 올레길, 둘레길 같은 트레킹 코스의 경쟁상대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제 점수는요. 바로 옆으로 2차선 도로가 구불구불 함께 달리고 있음에도 마치 사람 하나 찾기 힘든

깊은 산속의 좁은 숲길을 혼자 걷는 듯한 호젓함과 한가로운 느낌이 너무너무 좋았다.

오이라세계류를 따라 걷는 길은 계속 이런 식이었다. 다리를 건너 개울 건너편으로 간다거나 잠시 구불댄다는

등의 변칙은 있었어도, 대개 한켠에는 개울을, 신록이 그득한 원시림 한꺼풀 너머에는 이차선 도로를

끼고서 걷는 길. 다니는 차가 많지도 않았지만 두껍게 드리워진 초록빛 커튼이 소음과 부산함을 전부

막아내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치 다른 세상을 걷고 있는 듯한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까.

길 중간중간 오이라세계류 트래킹코스로 합류할 수 있는 샛길 길머리에는 어김없이 이런 안내판이

서있었다. 일본어로밖에 안 나와있는 건 아쉬웠지만 그림과 간략한 영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알 수 있는 내용들. 시끄럽게 하지 말고, 식물을 채취하지 말고, 동물을 함부로 풀어놓지 말고,

불을 붙이지 말라는 주의사항들은 어찌보면 굉장히 당연한 이야기들이지만, 저런 기본이 제대로

지켜진 덕분에 이곳의 짙푸른 원시림과 그 특유의 분위기가 지켜지는 거 같다.

핫코다 하치만타이국립공원 내에 있으며 일본에서 세번째로 깊다는 도와다호수는 강물이 전혀 흘러들지

않고, 땅에서 솟는 물과 비, 눈으로만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호수에서 유일하게 흘러나가는 물줄기가

바로 오이라세계류, 계류가 이끼낀 바위 사이를 힘차게 흐르면서 일으키는 하얀 물거품이 선명하다.

게다가 무성한 이파리에 가려 드문드문 찢겨진 채 떨궈지는 햇살 한 조각이 묘하게도 이끼낀 바위위에

떨어지는 것도 굉장히 묘한 감정을 일으킨다. 마치 하늘에서 의도한 적정량의 조명이 적절한 바로 그곳에

딱 맞춰서 예정대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숲이면 다 같은 숲이지 '원시림'은 또 뭐냐, 하는 맘이 없지는 않았다. 한국에도 여기저기 조성된 트레킹

코스들은 대개 나무가 무성한 숲길 한가운데를 걷거나 숲과 바다와 산을 끼고 걷는 길인데 새삼스러운 게

있으려나 생각했었던 거다. 그런데 '원시림'의 포스는 뭔가 분명히 다른 게 있다. 저 수령을 알 수 없는

두껍고 단단해 보이는 나무 주변에서 아우라처럼 뻗어오른 잔가지들, 그리고 그 잔가지를 다시 감싸는

초록색 이파리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다른 거다.

저 너머 도로에 꽂혀있는 급코스를 경고하는 노랑색 교통표지판이 보이는 즈음에, 나무 역시 급코스를

온몸으로 예고하듯 격하게 뒤틀어져 있기도 했다.


길 중간에 개울 너머로 다리를 놓아주고 있는 통나무 다리도 만나고. 나무로 만든 다리가 아니라

말그대로 통나무 하나를 베어내선 개울 이쪽과 저쪽으로 걸쳐놓은 통나무 다리였다. 흔들리지 않게

제법 단단히 양쪽 땅에 고정된 거 같긴 했는데, 뭐하나 의지할 것 없이 이 나무다리를 건너 저쪽으로

건너갔던 사람이 있기는 할까. 의구심과 동시에 저 건너편에 대한 맹렬한 호기심이 일어난 것도 사실.

나무 옆구리에서 톡톡톡, 연지곤지 찍듯이 여리고 둥근 연두빛의 잎사귀가 부드럽게 돋아났다.

계단 옆으로 하얗고 두꺼운 나무 뿌리 두개가 툭, 툭, 상아처럼 튀어나온 것도 꽤나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부러지고 넘어지고 휩쓸리고 뒹굴던 나무들. 이미 당당히 하늘을 향해 온몸을 펼쳤던 모습은

오래전 과거의 것인 듯 부러지면 부러진 대로, 넘어지고 휩쓸리면 휩쓸린 대로 각자의 모습 그대로

연두색 융단이나 액세서리들을 도톰하게 휘감고 있었다. 반지의 제왕에서 나왔던 숲의 정령들이

어디에선가 끼이- 끼이- 거리면서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벌인대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풍경.


전체 17킬로미터 구간을 다 걷지는 못했고 일부만 걸었는데, 그 중에서 이렇게 넓은 길은 정말 극히

일부였던 거 같다. 대개가 한사람이 딱 걸을만한 좁은 폭, 반대편에서 사람이 올라치면 어깨를 칼처럼

세워서 서로 지나쳐야 할 정도로 좁았으니까. 아무래도 숲을 보호하는 게 우선이니까 길을 최소한으로

내려고 했던 거 같다. 한국의 지자체들도 걷기 열풍을 타고 트레킹코스를 만든답시고 나무데크로

길을 완전 포장해버리는 짓을 하고 있는데, 자연이 우선이라는 마인드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이렇게 고사리가 무섭도록 무성하게 자라난 곳도 무딘 발에 밟히거나 쓸려나가지 않을 테고,

이렇게 좁은 숲길 양쪽에 펼쳐진 이끼 융단이라거나 여리디 여린 덩굴들이 그물처럼 서로를 엮어넣은

모습을 지켜낼 수가 있을 거다. 오이라세계류의 원시림을 이렇게 훌륭하게 지켜낸 건 그런 마인드 아닐까.

좋은 계절에 온 것 같았다. 온통 나무들이 꽃보다도 이쁜 초록빛 잎을 크고 두껍게 피워내는 신록의 계절,

계류를 따라 맑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새소리마저 신비한 숲속을 산책하면, 시끄러운 물소리에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이 온통 차분하고 경쾌하게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분명 몇걸음 앞에 다른 일행이나

사람들이 앞서고 뒷서며 함께 걷고 있음에도 웬지 이곳에 홀로 쉬고 있다는 느낌.

실타래처럼 떨어지는 폭포인 '시로노이토'. 삼각대를 갖고 왔어야 저 가늘고 부드러워보이는 폭포수가


더욱 그럴듯하게 표현되었을 텐데 아쉽기 짝이 없었다는. 이곳은 아무래도 호수에서 뻗어나온 개울이다

보니까 낙차가 그렇게 크지도 않고 유량이 많은 편도 아니라고 한다. 폭포라길래 뭔가 콰콰쾅하는 소리가

사방에 진동하고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그런 걸 기대하는 건 무리라는 사실.


그건 '조시오타키'라는 이름의 폭포도 마찬가지였다. 제법 낙차가 있고 유량도 많은 편이긴 했지만,

앞선 폭포의 섬세하고도 미묘한 물줄기를 보고 기대치를 어느정도 조정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조금 실망할 뻔 했다. 그렇지만 도쿠리병의 주둥이처럼 생겨서 저런 이름이 붙었다는 이 폭포는

이 오이라세계류에 산다는 무지개송어의 장벽이기도 하단다. 자세히 보면 중간중간 시퍼런 색깔이

섞인 게 신비한 분위기를 살풋 풍기며 부지런히 쏟아져내리는 폭포수가 굉장히 시원헀다. 


아마도 상수원이니 물을 깨끗이 보전하자는 건가, 아님 나무와 풀을 보호하라는 건가, 여하간 꽤나

오랫동안 저 자리를 지켰을 강철표지판의 가장자리가 온통 낡고 닳았다.

커다란 구렁이가 나무를 칭칭 휘감고 올라가는 건가 해서 깜짝 놀랐는데, 눈비비고 다시

보니깐 두툼한 가지 하나가 나무둥치를 휘감고 뻗어있었던 거였다. 깜짝이야.

원시림을 벗어나 다시 세속으로 돌아나오는 길, 불과 몇걸음 안 떼었는데도 방금까지 바로 옆에서

지줄거리며 흐르던 개울과 단단하게 공기를 쥐고 있던 푸른 잎사귀들로 이루어진 공간이 꿈인양 하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은 이런 곳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걷고 둘러보고 느끼는

와중에 딱 어울릴 것 같다. 다시 딱딱하고 살짝 끈적해진 느낌의 아스팔트를 밟으니 정신이 번쩍 난다.

도와다 호수로부터 뻗어나온 유일한 개울이라는 오이라세계류가 그럭저럭 직선을 그으며 흘러나가는

길을 따라 이어지는 황토색 길, 17킬로미터에 이르는 전 구간을 걸었으면 딱 하루 코스였을 텐데 시간만

허용되었다면 정말 꼭 걷고 싶었다. 아쉽게도 이렇게 살짝 맛만 보고 돌아서야 하다니. 주위에 보니

차를 타고 오기도 하고,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들도 적잖이 보였는데 무지무지 부러웠다.

우리나라의 숲길들도 잘 보존해서 이런 상서로운 분위기를 풍길 수 있는 때가 오길.


* 오이라세계류의 위치.







* 이번 여행은 하나투어 '겟어바웃' 필진의 일원으로 다녀왔습니다.
Get About - 당신의 여행이야기

말로만 듣던 거대 버거. 제주도에 가면 꼭 한번 먹어봐야지 했던, 바로 그 '빅허브버거'다. 접시 위에

담대하게 올라앉은 그 버거의 사이즈를 체감할 수 있는 사진을 어떻게 찍을까 하다가, 손닦으라고

나온 '건강물티슈'를 바로 옆에 붙여두고 찍었다.

커플버거도 있다는데, 별로 가격차이도 나지 않는 걸로 보아 빅버거로 쏠리게 하려는 속셈인 듯.

처음 생겼을 때에 비해 가격이 점점 올랐다는 불만의 글도 어디선가 봤는데, 사실 싼 건 아니다.

갈린 허브가 섞여있는 두툼하고 고소한 빵 사이에, 조금 얇다싶은 패티와 사과니 양파니 양배추니

패티의 아쉬움을 달래고 메인 목을 풀어주는 아삭아삭한 과일과 채소가 많이 들어있어서 조금 과하게

먹어도 그렇게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뭐, 저 거대한 빅허브버거도 버거지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전의 금능 해수욕장과 그너머 바다가

그대로 보이는 커다란 통유리가 참 맘에 들었다. 마침 식사시간을 좀 빗겨난 타이밍이라 아무도 없던

가게에서 이리저리 구경하며 창밖도 내다보고 가게 안도 구경하고.

벽면에 아기자기하게 장식되어 있는 자그마한 화분이라거나 그림들이 꽤나 귀여운 이미지를 연출중.

따뜻한 노랑색의 조명도 맘에 들고.

그리고 화장실 표지도 발랄하다. 글자체도 그렇지만 변기에 앉아 행복해하는 꼬맹이 표정이 참.

 

해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고, 바다로 점차 잠기며 한없이 길어지는 그림자가 가게 벽면에 이런저런

기하학적인 무늬를 남겼다. 미련이 가득한듯 벽면을 야금야금 긁어내리는 뒤늦은 햇살이 따가웠다.

피자처럼 여덟조각으로 커팅되어서 나온 버거는 어느새 약간의 빵부스러기와 양배추만 남기고

전부 사라져버린 상태. 옷을 탁탁 털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자리를 나섰다.

태양이 녹아내리는 바다에 뛰어들어서는 햇살을 산산이 조각내며 노니는 사람들.






일본의 대표적인 성이라고 하면 역시 오사카성, 이려나. 아직 오사카를 가보지 못했으니 구체적인 이미지는

하나도 안 잡히지만, 그래도 대략 이런 그림일 거다. 3층 이상의 고층으로 쌓인 탑같은 모양의 기와지붕 건물.

알고 보니 이 건물 자체는 '성'에 포함되어 있는 방어시설이자 망루의 역할을 하는 천수각이라고 한다.

오사카까지 가지 않고 아오모리현 히로사키 공원에 있는 히로사키성에 가서 알게 된 사실 하나.

히로사키성은 1895년 히로사키공원으로 개방되어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하였는데, 이곳에

벚나무를 심은 것은 약 300년 전부터라고 한다. 현재 공원 안에는 일본에서 가장 큰 왕벚나무와 일본에서

둘레가 가장 큰 왕벚나무를 포함해 약 2600그루의 벚나무가 있다고. 4-5월 벚꽃 축제 기간 중에는 전국에서

약 250만명이 찾아오는 일본 제일의 벚꽃 명소라고도 한다.

히로사키성 천수각은 원래 1611년에 축성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낙뢰를 맞아 완전히 불타버렸고,

1810년에야 재건이 이루어져 지금의 이런 모습을 이룬 것이라고 한다. 에도시대에 재건된 천수각으로는

도호쿠 지방의 유일무이한 것이라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는데, 현재는 히로사키성과 관련한

유물이나 자료들을 전시하며 일반에 개방되어 있어 꼭대기층까지 올라가볼 수 있다.

전시한 유물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화승총, 흔히 조총이라 부르는 그 '신무기'와 그곳에 들어갔던

옥구슬 총알, 그리고 화약통 세트. 거북이 등껍질이 통으로 쓰이고 있는 화약통도 신기했지만 무엇보다

조총의 탄환으로 동그랗게 갈아서 만든 동그란 옥구슬이 쓰였다는 게 신기했다. 저건, 거의 준보석 아닌가.
 

그리고 남성용 가마. 아마도 이 히로사키성의 번주가 타고 다니지 않았을까, 싶은데 역시나 크기는

매우매우 작아서 요새 체형이라면 열살짜리 어린애가 겨우 들어갈 정도인 거 같다. 까맣게 옻칠이

되어 있는 거나 사람 몸무게를 지탱하도록 단단해 보이는 외관은 그럴 듯 했다.


그리고 또, 신기했던 무기 하나. 이건 '바람의 검심'에 나왔던 그 사슬낫 아닌가. 그저 만화에서만 나오는

무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걸 실제로 휘두르며 싸웠던 사람이 있었으니 여기 이렇게 똑같이 생긴

무기가 전시되어 있는 걸 텐데. 일본어로 뭐라뭐라 설명이 되어 있었는데 대충 에도시대 무기의 일종,

동으로 만든 추와 철로 된 낫을 사슬로 이었다는 이야기인 거 같다. 저걸 휘둘렀으리란 생각만으로도

굉장히 섬뜩한 느낌이 든다.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가 박히진 않았을까.


그런 불상사가 일어날 경우에 대비해 '윗대가리'들은 이렇게 탄탄한 갑옷을 입고 버티는 거겠지만, 역시

아까 그 남성용 가마의 주인공임에 틀림없을 이 히로사키성의 번주는 참 작다. 요새 열살짜리 꼬맹이의

체구와 비슷했겠구나, 생각에 확신이 들었던 순간.

성의 각 층 옆구리마다 나있는 조그마한 창문을 자세히 보니 동으로 만들어진 거 같다. 파랗게 녹이 슬어서

제법 세월의 더께가 실린 표정을 하고 있던 창문, 아무래도 방어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서 창문이 작고

저렇게 이중으로 나무 문살을 해둔 게 아닐까. 바깥 풍경을 보기에 딱히 유리한 창문은 아니다.

굉장히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머리고 발걸음이고 온통 조심하라는 표지가

시뻘건 영어로 적혀있다. 아무래도 성의 기본적인 사이즈가 체구가 작은 일본인들 기준으로 맞춰져있어

(영어를 쓰는) 서양인들에게는 꽤나 곤혹스러울 거 같다. 한국인 표준에 가까운 나 역시 저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 비행기 이코노미석에 끼어앉은 듯한 갑갑함을 느꼈으니 서양인들은 오죽할까.

굉장히 세련되게 만들어진..쟁반이랄까, 접시랄까, 아님 그냥 장식품이랄까. 조개껍데기를 본따서

만들어진 황동색 틀 안에 슬쩍 웃고 있는 듯한 생선이 한마리 돋을새김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자세히 보면 생선 뒷목쯤에 무슨 조그마한 집처럼 생긴 자개가 붙어있기도 하다.

그리고 히로사키성의 번주로 임명되었던 번주들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일종의 '족보'. 봉건제도의 시스템상

번주들은 언제고 중앙의 권력자가 임명하고 폐할 수 있었던 거라지만, 실제로는 혼인관계나 세습으로 인한

변화가 더 많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얼핏만 보아도 1600년대 이래 19세기말까지 꽤나 복잡해 보인다.

그나마 번주들의 가문을 나타내는 문장이 때마다 바뀌었으니 다행이지, 유럽처럼 가문이 합쳐지거나 하면

문장도 합쳐지고 했으면 완전 복잡한 문장이 최종적으로 남지 않았을까.

그래서 1895년, 이 히로사키성이 히로사키 공원으로 일반에 개방되기 직전에 이성을 지키고 있던 번주

가문의 문장은 바로 요것. 아마 성 2층에 밀랍인형으로 제작되어 관광객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

저 분이 이 성의 마지막 주인 아니었을까.


천수각의 어느 창문에서 내려다본 히로사키 성의 전경. 앞에 새빨간 이쁜 다리가 보이길래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천수각을 떠나 성의 다른 곳들을 살펴볼 때 일부러 지나보았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 천수각을 올려보기

딱 좋은 장소기도 하고, 성의 모습이 시원하게 트여보이는 곳이었다.  

3층짜리 천수각의 꼭대기층은 생각보다 전시물이 없어서, 사람들은 천장 한번 쳐다보며 천수각의 누각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확인하고 사방의 창문에 붙어선 히로사키 성의 전경을 눈에 담기에 바빴다. 어떻게

생각하면 커다란 범선의 전망대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무로 만든 고층건물의 독특한 분위기가 맘에

들었다. 원래 5층짜리로 만들어졌었다니 그때는 이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멀리까지 보였을 텐데 아쉽다.

오른쪽 위에 보이는 게 히로사키성의 천수각, 그리고 나머지 보이는 부분은 히로사키성의 혼마루(本丸).

지금은 온통 초록빛 넘실거리는 벚나무밖에 보이지 않지만 원래는 저렇게 어전과 보물창고, 돈창고 같은

것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창문뿐 아니라 천수각의 기와도 청동으로 덮여있었던 거다. 어쩐지 그 미묘한 빛깔이 인상적이다 싶더니

청동이 녹슬어 에메랄드빛 비슷하게 변색되고 말았다. 그런 이끼덮인 듯한 느낌의 색깔이 천수각 벽면의

하얀 빛깔, 그리고 지반을 이루는 돌들의 담백한 색조와 어울려서 꽤나 매력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천수각을 나와 성의 다른 곳들을 둘러보러 걷다보니 어디서도 천수각이 언뜻언뜻 드러난다. 그러면서도

해자를 따라 빼곡하게 심어진 나무들이 휘영청 가지와 잎사귀를 늘어뜨려 좀처럼 완벽하게 제 모습을

노출시키지 않는 모습이, 아무래도 천수각을 외적이나 간첩의 침투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고려가 되어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나마 선명하게 나타난 건 아까의 그 빨간 다리, 게조바시 다리 위에서나 겨우.


그러고 보니 천수각을 해자의 깊은 바닥에서부터 떠받치고 있는 기반석들이 만들어낸 콧날이 굉장히

날카롭다. 칼날처럼 우뚝 서있는 기반석의 형태를 저렇게 짜맞춘 것도 신기하지만, 이게 바깥쪽 해자와

중간 해자를 통과한 후에 세번째이자 최종으로 나타나는 안쪽 해자인 걸 감안하면, 혹시 모를 침입과

전쟁에 대한 방비가 굉장히 철저했다는 걸 반증하는 것 같다. 그만큼 불안정하고 전쟁이 일상이던

시대상을 보여주는 거겠지만, 그 언젠가 시체가 산처럼 쌓였을지 모를 저 해자 아래엔 그야말로

반들반들 싱싱하기 이를 데 없는 연잎들이 무섭도록 자라 있었다.


히로사키 성이 통째로 공원과 식물원으로 변한 히로사키 공원에 천수각만 있는 건 아니다. 천수각이

있는 혼마루를 포함해서 북쪽에 남아있는 성곽이라거나, 3개의 망루와 5개의 성문, 삼중으로 된 해자등이

꽤나 그럴듯한 풍광을 만들어내는 거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왕벚나무 옆의 '동내문'의 모습.

활짝 열린 문밖으로 보이는 수령 오래되어 보이는 굵은 나무들은 언제부터 여길 지키고 있었을까.

성문의 쇠경첩이 저렇게 붉게 녹슬고 삐걱거리며 쉬이 움직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지만

문짝에 살벌하게 이열 종대로 징처럼 박혀있는 저 쇠못들의 예기는 여전해 보인다.  


그리고 또다른 문. 거의 비슷하게 생긴 문이 혼마루를 둘러싸고 동쪽과 남쪽에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밖으로

성루 세개가 천수각과 혼마루를 에워싸고 지키는 형태. 좀더 높은 데서 한눈에 볼 수 있었다면 히로사키성이

무엇을 꼬옥 품고서 지키려 하는 건지 바로 알아볼 수 있지 않았을까. 비록 지금에야 온통 벚나무가 가득한

공원이 되어버려서 과거의 그 적나라하고 잔혹한 성의 '권력지도'가 잘 보이진 않겠지만. 모든 것은 성의

중심, 그리고 성의 주인을 위해 고안되고 배치되었을 그 때의 풍경.

히로사키 공원 내에는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식물들과 화초들을 기르고 있는 식물원이 별도의 공간으로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공원 내를 여기저기 정처없이 걸어보는 것 만으로도 거의

무슨 식물원이나 우거진 숲을 걷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나무가 빼곡했고, 온통 녹색이었다. 그치만

별도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는 그 식물원에는 꽃달력길이나 고산식물들만 모아든 정원 등, 흥미를

돋우는 것들이 적지 않은 거 같으니 기회가 닿으면 가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드문드문 이렇게 숲으로 난 길을 막아선 낡은 바리케이트도 보이고, 그 뒤로는 무려 50여 헥타르에 이르는

이곳 공원에서 벌채한 게 틀림없는 나무들이 차곡차곡 정돈된 채 서로를 의지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 공원 여기저기에 이렇게 잘 만들어진 단아한 느낌의 화장실 건물이 있었다. 멀리서 보면

저게 화장실인지 매점인지 잘 모를 정도로 깔끔하고 정갈한 분위기를 풍기는 게 인상적이었다.

히로사키 성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왕벚나무가 있다곤 하지만 그 나이는 '고작'(?) 120살, 그에

비기자면 500살이 넘는다는 이 나무는 거의 히로사키 성이 지어진 이 땅의 주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 같다. 높이가 거의 18미터에 이르고 둘레도 5미터가 훨씬 넘는 이 임팩트 강렬한 나무는

이젠 그 거대한 몸뚱이를 스스로 지탱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는지 꽤나 높은 곳에다가 저렇게

끈을 칭칭 동여매어 몸이 비틀리거나 쪼개지지 않도록 조치해놨다는 게 좀 아쉬웠지만.

히로사키 성을 돌아나오는 길, 제일 바깥쪽 해자에서 수면을 덮고 있는 풀들을 걷어내고 있는 분들이

눈에 띄었다. 어딜 봐도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흐트러짐없이 정갈한 모습이 유지된다 했더니 역시

그건 저런 분들이 계속해서 풍경이 뭉개지지 않도록, 지저분해지지 않도록 신경써서 관리한 덕분.

천수각에 비치된 스탬프를 움켜쥐고, 이걸 과연 여권에 찍어도 나중에 출국하고 한국에 다시 입국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까 잠시 고민을 했더랬다. 주위 사람들이 신성한 여권에 그런 스탬프를 마음대로

찍으면 나중에 한국 못돌아간다고 겁을 주는 바람에 그냥 다른 종이에 찍고 말았던 씁쓸한 기억이

묻어있는 히로사키성 천수각 기념 스탬프.







* 이번 여행은 하나투어 '겟어바웃' 필진의 일원으로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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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뭘까. 직경이 지름 1미터쯤 되는 거대한 기둥 6개가 뻗어나가고 삼사층짜리의 자그마한 건물같은.

이런 비슷한 용도모를 건물이 원시인들이 살던 약 오천년 전에 세워졌었다면 거의 중세시대 성이라거나

요새의 초고층건물에 비견될 만한 거 아닐까. 에도시대부터 유명했다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기다리는

일본 아오모리현에 있는 산나이마루야마(三內 丸山) 유적군에 있는 대표적 유적이다.

그러니까 이곳은 이런 가죽옷을 입고 원목 몽둥이를 휘두르는 원시인 500여명이 일본 본섬의 북동쪽끝에서

대략 오천년 전부터 천삼백년쯤 살았다는 대규모의 집터 유적이 보존되어 있는 곳인 거다. 약 2천여 점의

유적이 대량 출토되었다는 이곳은 사실 야구장을 건설하기로 되었던 부지였는데, 1994년 아오모리현 지사가

유적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보전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덕분에, 원래 계획대로라면 철제 펜스가 높다랗게 세워진 채 삥 둘려있어야 할 이곳 야구장 건설부지는

일본의 국가사적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등재를 기다리는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남은 셈이다.

우선 마을 유적부터 둘러보기로 하고 박물관 건물 밖으로 나와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지나니 왠 샛노란

민들레 꽃밭이 먼저 나타난다. 그럴 리 없겠지만 오천년 전에도 여기 살던 사람들이 같은 꽃밭을

보고, 밟았던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일었다.

그렇지만 오천년 전의 기후나 지형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거다. 당장 그때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2-3센티 높았는지라 바로 이 마을 코앞까지 바다가 들이찼을 거라고, 퇴직하기 전까지 학교에서

근무하는 선생님이셨다는 '산나이마루야마 응원대'라는 자원봉사자 할아버지가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음식으로 삼았던 생선이나 해산물등의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고도 한다.


사실 이 나무 구조물이 무슨 용도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이런 형체가 확실한지에 대해서도 뚜렷이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한다. 자원봉사자 할아버지가 여기가 '번지점프대'였는지도 모른다고 농하셨듯이.

그래도 여러 정황상 여섯 개의 대형 기둥이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그 위에 저런 형태의 구조물이

설치된 채 아마도 망루의 기능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모든 유적 복원물에는 합당한 추정과 근거가 있는 법. 이 '망루' 추정 유적에는 뚜렷한 근거가 있었다.

토목, 건축, 고고학자들이 망라된 발굴조사 중에 무려 2미터 깊이, 2미터 직경의 구멍이 이렇게 뽕뽕

규칙적으로 박혀있는 걸 발견했다는데 그 중 일부 구멍에 지하수에 잠긴 밤나무 기둥조각이 온전히

남아있었다는 거다.


이곳이 그 복원된 '망루' 옆에 있던 실제 건물터. 이렇게 깊고 큰 구멍에 걸맞는 두껍고 튼튼한 기둥이

여섯개나 박힌 건물이라면, 글쎄 아무리 원시시대였다고 해도 꽤나 그럴듯한 건물이 지어지지 않았을까.

지금 복원해 놓은 건 가장 보수적이고 냉정한 상상력을 동원해 지어놓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상은 다른 마을 유적들을 둘러보면서 더욱 퍼져나갔다. 길이가 30미터가 넘는 커다란 집터의

우람한 덩치라거나 뒤로 이어지는 많은 주거지들의 흔적들을 보자니 여긴 정말 꽤나 커다란 마을을

이루고 있었겠구나, 그만큼 일손(노동력)도 많고 집짓고 망루짓는데 동원할 나무니 끈이니 자원도

많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무려 500여명이 살았다고 추정되는 마을이니만큼.

가장 큰 건물에 먼저 들어갔다. 길이가 32미터, 폭이 10미터에 이르는 이 커다란 건물은 무려 19개나

되는 밤나무기둥으로 지탱되고 있었다는데, 용도에 대해서는 공동작업소라거나 마을 집회소, 혹은

겨울철을 나는 공동가옥이었을 거란 여러 설들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런 설명들을 듣는 사이에

계속 코를 찌르던 연기 냄새가 거슬려 뭔가 물었더니, 건물을 구성하는 나무들을 튼튼하게 오래

보전하기 위해 원시인들이 처리했던 훈증 작업을 재연한 결과라고. 아닌게 아니라 나무들이 다 탔더라.

여기는 마을의 남쪽에 위치해있던 흙을 버리던 장소. 대량의 토기와 석기, 토우와 장신구들이 흙과 함께

버려지고 버려져서는 약 천년동안 언덕처럼 불룩 솟아올랐다고 한다. 말하자면 '난지도' 같은 곳이었을라나.

깨진 장신구, 못쓰게 된 토기 등을 생활쓰레기랑 함께 모아서 버리던 곳이랄까. 그런 곳이 수천년이 지나니

유물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유적의 보고가 되어버렸다.

이 곳에 당장 복원되어 있는 집터들도 꽤나 많다고 느꼈는데 이게 전부가 아니란다. 바닥에 땅을 파서

만든 집터도 있고 기둥을 세워 땅 위에 세운 집터도 있다는데 도합 600기 가까운 주거터가 발견되었지만

복원한 건 그 중에서 불과 20여기 남짓이라고. 땅에 대한 소유권이 없던 시절이었을 테니, 그들은 그저

원하는 장소에 스스로의 힘으로 나무 뼈대를 세우고 움막같은 집을 지었으면 땡이었을 거다. 그럼 굳이

여러 채 갖겠다고 과잉하게 노력해서 집을 지어놓지도 않았을 거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화려한 집을

짓겠다고 난리치지도 않았겠지. 뭐 단순비교하긴 그렇지만, 오천년 후 지금은 그때보다 행복할까.

이게 땅바닥을 파서 만든 주거터. 슬쩍 들어갔더니 암사동 선사유적지에 복원되어 있는 움집처럼 별 거 없다.

뭐 원시인들이 '일본땅' '한국땅' 출신이란 자각을 갖고 있지도 않았을 거고, 뭔가 고유하거나 특징적인

문화적 차이점을 주거 형태에 구현하기에는 아직 집 한채 짓기도 급급한 수준이었을 테니깐. 중앙에는

화로가 하나, 이때는 아직 쌀을 재배하기도 전이라 주식으로 도토리, 그리고 연어니 오징어니 생선과

해산물을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땅에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운 주거터. 하나 재미있는 건, 이곳에 살던 원시인들이 먹었을 음식의

흔적 중에서 생선 머리뼈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러가지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는데

토막내서 머리는 바다에 버리고 몸통만 먹었을 거다, 혹은 머리에 붙은 아가미가 공기에 닿아 쉽게

부패하면서 머리뼈까지 삭혔을 거다, 혹은 머리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썼을 거다, 라는 정도가 있다고

할아버지가 설명을 해주었다. 글쎄, 어차피 씌어지기 전의 역사, '선사(先史)'시대니까 상상하기 나름,

머리뼈는 몸에 좋다며, 아님 머리가 똑똑해진다며 다 먹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외에도 마을에는 어른들의 무덤, 아이들의 토기 무덤이라거나 북쪽에 조성된 쓰레기장들이 복원되어

있었는데, 오천년 전의 마을이라기엔 정말 생생하게 한 마을 풍경을 망라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대규모 마을 유적에서 발굴된 다량의 토기, 석기, 목제품이나 골각제품들은 2002년에 개관된 박물관에

전시해두고 있다고 하니 이젠 뙤약볕을 피해 박물관 내부를 관람할 차례. 그 전에 화장실을 가려고

표지를 찾았더니, 저렇게 귀여운 남/녀 화장실 사인이라니.

일본에서 까마귀가 길조로 여겨져서 많은 걸까, 아니면 워낙 많아서 길조로 여겨지게 된 걸까. 마치

닭과 달걀의 선후를 따지듯 골치아프고 애매모호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생각도 없지만, 이곳

산나이마루야마 마을 유적에도 까마귀가 참 많았다. 그러고 보면 일본 소설에서 까마귀는 길조이면서

동시에 죽은 자와 산 자를 잇는 메신저 역할도 하고, 아니면 죽은 사람의 영혼 그 자체라고 표현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왠지 오천년 된 유적지에서 만난 까마귀라 더욱 상서롭달까.

박물관, 정확히는 조몬지유칸(時遊館) 내부에 미니어쳐로 전시되어 있는 산나이마루야마 마을의 유적.

실제 마을에 선사시대 원시인들이 꼬물거리는 모습이 모형으로나마 시각화되니까 훨씬 그럴 듯 하다.

마을을 둘러싼 숲, 그리고 그 너머의 바다는 이 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을까. 외적이 쳐들어올 수도, 예기치 못한 짐승들의 습격이 있을 수도, 혹은 대규모의

자연재해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니만치 저렇게 불쑥 튀어나온 '망루'의 쓰임이 더욱 실감나기도 하고.

'망루' 유적의 커다란 구덩이 밑에서 보존되어 있던 1미터짜리 두꺼운 밤나무 기둥의 잔해 진품.

무려 오천년쯤이나 땅 속에서 썩지도 않고 이렇게 버텨왔다는 게 대단하다. 역시 진짜를 보니까

모조품을 보는 것과는 또 느낌이 다른 듯.

마을 유적에서 발굴되었다는 수많은 토기 조각들을 일일이 짜맞춰서 복원한 토기들. 토기를 어떻게

제작하는지를 마네킹이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저 푸른 초원 위에 복원된 십여기의 움막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지를 보여주는 모형.

무엇보다 흥미롭던 건 십자가 형태로 정형화되다시피 빚어지는 사람 모양의 토기, 토우였다.

아무래도 다산을 상징하고 싶었는지 불룩 튀어나온 두 가슴과 둔덕이 세 뿔을 이루고 있는

십자가 형태의 사람 흙인형은 얼핏 보면 노릇노릇 잘 구워진 쿠키같기도 하고, 초기 기독교시대의

십자가 원형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오천년 전 선사시대를 살던 사람들에 대한 편견 아닌 편견을 좀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각 토우들에

그려진 문양들은 이렇게 숫자를 나타내는 표식이기도 했다는 것. 그냥 거의 동물에 가깝거나 두뇌 활동은

미미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고쳐 생각하면 지금의 인류보다 훨씬 생존력도 강하고 적응력도 강하고,

심지어 저런 것을 보면 두뇌 수준도 훨씬 우수했던 건 아닐까. 막말로 요새 사람을 그들이 맞닥뜨렸을

환경에 떨궈놓는다고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은 거다.

그리고 토기에서도 이런 인물 문양이 발견되기도 했단다. 사람의 형체가 뚜렷하게 나타나서 얼굴과 손,

그리고 발의 모양이 쉽게 구별되긴 하는데, 손에 든 건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태 토기에 그려진

문양들은 대개 빗살무늬니 아라베스크 무늬니 하는 간단하고 기하학적인 것들 아니었던가. 아님 아예

아무것도 그려넣지 않은 민무늬거나. 꽤나 이례적인 토기 문양 같아서, 일본어는 모르지만 제법 중요하게

생각하고 비중있게 전시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 진짜, 이런 캐릭터 맘에 든다.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의 마스코트 캐릭터라는 '산마루', 십자가형

토우에 호피가죽옷을 입히고 똥글똥글한 눈을 가진 귀여운 캐릭터로 마스코트를 삼다니. 게다가

박물관 입구에 도토리로 만들어둔 저 귀여운 녀석들은 어떻고.


* 교통편.





* 이번 여행은 하나투어 '겟어바웃' 필진의 일원으로 다녀왔습니다.
Get About - 당신의 여행이야기

강릉 경포해수욕장, 굵고 단단해 뵈는 파이프가 하나 모래사장 위에 굳건하게 박혀있었다. 사람들이 뛰어내릴

수 있고 안전하게 버틸 수 있으면 되는 게 번지점프대라면 딱 그 기능에 필요충분한 파이프. 고개를 무리하게

꺽어야 그 꼭대기와 그 위에 선 사람들이 보이는 각도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뛰려던 건 아니었다. 저런 건 돈을 받고나 뛰어내릴까, 그저 남들이 뛰어내리는 걸 보고 싶었던 건데,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어느 여자분이 소리도 없이 뛰어내렸던 순간. 한없이 늘어날 듯한 줄이 어느 순간

출렁, 동시에 왈칵 뒤로 튕겨진 그녀의 목청이 비로소 터졌다. 꺄아악!


어우, 난 저런 건 돈 받고서도 못하겠다. 많이 주면 모를까.

초콜릿 박물관에 이르면 가장 먼저 그 초콜릿 색깔의 독특한 건물에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제주도 남서쪽,

모슬포항에서 놀다가 제주시로 올라가는 길에서야 비로소 이전부터 꼭 들르고 싶었던 그곳, 초콜릿 박물관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세계에 산재한 '초콜릿 박물관'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이 곳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사실

압구정에 있는 '샤또 쇼콜라' 초콜릿 전문점에서였다. 밀크나 유지방이 텁텁하게 들어간 네*퀵 류의 초코

음료가 아니라 제대로 된 맛이 나는 진짜 초콜릿 음료가 맘에 들었고, 그제서야 제주도에 언젠가 왔을 때

눈으로 슥 훑었던 지명 하나가 떠올랐다. '초콜릿 박물관'.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입장하기 전부터 뭔가 시선을 붙잡는 것들이 많았다. 멀찍이서 바라보는 초콜릿 빛깔의

판타지스러운 성같은 본관 건물이 그랬는데, 저 색깔은 제주도 특유의 화산석인 '송이석'으로 건물을 지은

덕분이라 하니 왠지 초콜릿과 제주도는 은근 궁합이 절묘하게 맞는 거 같기도 하다. 그리고 카카오 열매를

두손으로 받쳐들고 있는 카카오의 신님. 신이라기보다는 '찰리와 초콜렛공장의 비밀'에 나오는 움파룸파족같은.

이곳이 어떻게 2010 '세계 10대' 초콜릿 박물관 중 하나로 선정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안내문에는 이곳의 초콜릿을

만드는 전 공정이 보여지는 작업장과 각종 초콜릿 아트 갤러리가 눈을 끈다고 되어 있다. 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트롤리도 있다고 하는데 결국 이건 박물관을 돌아보는 동안 못 보고 말았다. 여하간 중요한 건, 이곳에서

초콜릿을 직접 만들고 있을 만큼 애정도 깊고 열정도 대단한 개인이 이런 박물관을 만들어내었다는 것.

초콜릿의 맛에 영향이 있을까봐 전구역에서 엄격한 금연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 마음이 느껴진다.

햐아. 건물 안에 들어가서 저 안에 초콜릿에 대한 무슨 내용들이 꽉 차 있을지도 궁금하지만 아무래도 그 전에

이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건물 자체를 좀더 즐기고 싶은 맘이 큰 거다. 초록빛으로 싱싱한 잔디밭과 드문드문

여유롭게 놓인 테이블도 그렇고. 초록색과 초콜릿색의 뚜렷한 대비가 웬지 먹음직스럽기도 하고.

어렸을 적 읽었던 '찰리와 초콜렛공장의 비밀'이란 소설에선 그야말로 어린 아이의 상상력과 식욕을 마구

자극하는 온갖 기기묘묘한 초콜릿들이 등장했었다. 그렇지만 그 다채로운 초콜릿의 향연 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이었던 건 아랍의 어느 왕자를 위해, 단단한 초콜릿으로 성을 만들고 안의 인테리어도 전부 초콜릿으로,

심지어 초콜릿으로 만든 수도꼭지를 틀면 마시는 초콜릿이 나오게 했다던 전설 같은 이야기. 이 성이 딱 그렇다.


마구 신나서는 건물을 사방에서 요모조모 뜯어보기도 하고, 잔디밭을 여기저기 찔러보며 걷기도 하고,

카메라를 들고 잔디밭 위에서 펄쩍펄쩍 뛰어보기도 하고. 완전 신난 기분이 그대로 찍힌 듯한 사진 한장.

아마도 이제 슬슬 저 안에 뭐가 숨어있을지 궁금함이 극에 달한 시점, 초콜릿 박물관 입구를 향해 달음박질하던

참이었던 거 같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건 중세 유럽의 완전무장한 철갑주의 기사. 한손엔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방패를 쥐고,

다른 한손엔 칼을 쥐고 초콜릿 박물관을 수호하고 있었다. 뭔가 그 기세만으로 따지면 십리 밖에서 바람타고

넘어온 극미량의 담배연기조차 쫄아서 발걸음을 돌릴 듯.

철갑의 기사를 지나니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바로 카카오. 하얗게 속이 꽉 차 있는 카카오는 아직 익지 않은 카카오로

녹색의 껍질을 두들기면 둔탁하고 속이 찬 느낌이 든다고 한다. 이 카카오는 최고 품질의 초콜릿을 만들 때 쓴다는

크리올로(criollo) 종이라고.

4-5개월 쯤 지난 카카오. 아직 조금 덜 익어서 껍질의 색깔은 노랑색을 띄고 있지만 크기는 약 20센티미터나

되고 무게도 500그램 가까이 된다고 하니 얼추 모양새는 잡힌 셈이다.

 

그렇게 익지 않은 카카오가 한 6개월 지나면 껍질이 불그스름하게 바뀌고, 두들기면 속이 비어있는 맑은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달고 신 맛이 나는 작은 씨가 삼사십개 들어있는 익은 카카오의 모습. 저 씨를 가지고 여러모로


가공해서 만드는 게 일반적인 초콜릿의 제조 방법이라고 한다.

걸음을 뗄라 하면 금세 새로운 뭔가가 발길을 붙잡는다. 입구에서부터 걸음을 떼놓기가 쉽지 않을 만큼

풍부한 이야기거리와 볼거리를 갖고 있다는 느낌. 입구 천장에 그려진 그림과 카카오 나무 화분이

묘한 현실감을 부여하며 3D 입체영상처럼 창세기의 한대목을 재연해 냈다.

최초의 초콜릿은 지금과 같은 딱딱한 판형이나 응고된 형태의 모양이 아니라 마시는 형태였다고 한다.

고대 중앙아메리카대륙에서 처음 시작된 '마시는 초콜릿'은 이후 대항해시대에 유럽으로 건너가며

왕실이나 귀족층의 고급 음료로 큰 인기를 끌며 점차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이라고.

그래서 현재까지도 멕시코나 중남미에서는 전통으로 내려오는 도구들을 동원해 마시는 초콜릿을 일상에서

즐겨마신다고 하는데, 그들의 조상은 무려 기원전 십여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시절부터 그렇게 가까이에서

카카오 열매를 활용한 음료를 즐겼다는 거다. 심지어는 종교의례에까지 가미되어 제사장의 피와 카카오를

섞어마시는 일도 있었다니, 뭔가 하늘과 땅을 잇는 신비의 음료라고 생각했는지도.

그렇게 초콜릿에 대한 동서고금의 역사를 살피고, 어떻게 유럽을 거쳐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수많은 전시물들과 설명을 지나, 초콜릿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는 Q&A 공간이 있었다. 원래

알고 있던 사실도 있었고, 전혀 처음 듣는 사실도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웠던 것들 몇개만.

Q. 초콜릿은 여드름을 유발하나요? A. 아닙니다. 유발하지 않습니다.

Q. 초콜릿은 최음제의 역할을 하나요? A.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음..딱 떨어지는 답변은 아닌 거 같아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뭐 아즈텍의 왕들이나 카사노바 등이

많이 먹었다니까 나도 많이 먹어야겠다..가 아니라, 많이 먹여야겠다, 가 맞으려나 그럼? 여하간.


과학적인 뒷받침이랄까, 카카오는 다양한 흥분제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익히 알고 있는 카페인,

근데 이게 카카오에 들어잇는 줄은 몰랐고. 테오브로민과 테어필린이란 흥분제 성분도 있다고. 물론

다른 설명에 나와있듯 초콜릿의 성분이 마약같은 중독에 이르려면 몸무게 60킬로그램의 성인이 하루

11킬로그램씩 초콜릿을 먹어야 한다니 과히 걱정하거나 유의할 수준은 아닌 거 같다.

그렇지만 박물관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공간은 바로 이곳, 크리스마스 룸. 방 전체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진 데다가, 온갖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그득하게 채워져있고 크리스마스 케잌을 꾸미거나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고받음직한 초콜릿류가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었던 거다.


심지어 푸른 잔디밭이 창밖 가득 펼쳐진 유리창 위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는 스티커가 붙어 있는데다가,

누구라도 잠시 앉아 쉬어갈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 위에는 크리스마스 트리 무늬가 귀엽게 박혀있는 테이블

보까지. 관람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때였지만 이 방만은 유독 사람들이 몰려서 떠날 줄을 모른 채 사진찍기에

열중하고 있더라는.


케잌 장식에 사용되는 각종 초콜릿과 설탕 공예 작품들, 그리고 이런저런 초콜릿 브랜드들이 판촉에 나서며

만들었을 장난감들까지도 저렇게 많이 수집해 놓았다. 근 30년동안 전세계 천여개에 가까운 초콜릿 샵을

돌아다니고 백여개가 넘는 초콜릿 공장을 방문했다는 박물관장의 열의 앞에 새삼 감탄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녹인 초콜릿을 부어 형체를 만드는 몰드. 돼지니 원숭이니, 심플하고 작은 것에서부터 복잡하고

커다란 것에 이르는 수십개의 몰드가 유리장 안에, 벽면에 열지어 늘어서 있었다. 실제로 여전히 초콜릿을

만들 때 쓰이기도 한다는 이 몰드들도 유래한 나라의 문화와 미적 감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셈이니

주화나 지폐, 우표처럼 꽤나 의미있고 흥미로운 수집목록이 되는구나 싶다.

초콜릿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 중에, 그리고 초콜릿 브랜드 중에 '고디바'를 빼놓을 수는 없는 거다.

자신의 백성들에게 높은 세금을 매기려는 성주에게 선처를 호소하던 젊은 고디바 부인이, 옷을 벗고

말을 탄 채 마을을 한 바퀴 돌면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성주의 삐뚤어진 요구에 그대로 응하였다던가,

그대로 행한 부인의 결심도 대단하지만 그때 문과 창을 모두 걸어닫은 채 그녀를 지켰다는 마을 사람들

역시 대단하긴 매한가지다. 아름다운 이야기에 걸맞는 맛과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고디바.

우리나라에선 언제쯤 그런 유서깊고 정평난 초콜릿 브랜드가 생겨날까. 한국인에게 초콜릿은 꽤나 새롭고

낯선 음식이었을 거다. 한국전쟁 때 미군으로부터 받아먹은 초콜릿 한 조각의 기억이 무한히 재생되는가 하면

그 이전 명성황후가 초콜릿을 좋아했다는 기록은 수입품으로 그녀의 눈을 홀리려던 일본의 계략이었다느니

그런 악의적인 해석이 난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세계 10대 초콜릿 박물관에 들어가는 수준의 박물관이 한국에 있다는 건 정말 놀랍고

감탄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일천한 역사를 딛고서 순전히 박물관장의 개인적인 열의와 노력으로

이런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 그리고 초콜릿 제조에 대해서도 세계적 수준으로 훈련받고 노력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는 것. 계속해서 이 곳이 발전해 나가 나중엔 '고디바'와 같은 명성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유리벽 너머 작업장에서 초콜릿 만들기에 열중한 저들의 손놀림과 눈빛을 보니 더욱.

초콜릿 제조실 안에는 초콜릿 품질 관리를 위해 절대 관람객들의 출입을 엄금하고 있다지만, 따뜻하게 녹여진

초콜릿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는 유리벽 너머까지 침투하기가 거침이 없다. 달달하고 사랑스런 분위기.

좀 뜬금없지만, 아~ 이래서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구나, 단번에 납득하고 말았다.


순수 초콜릿으로만 제작되었다는 수공예품들. 신데렐라, 곰돌이 인형, 에펠탑 등등이 한쪽 코너를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하나하나 꼼꼼이 살펴볼수록 그 정교함이나 세련된 터치에 감탄하고 마는 것들이었다.

저런 건 아까워서 먹을 수도 없다지만 그 짙고 먹음직스런 초콜릿색깔과 향기 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리고 전세계에서 팔리고 있는 고급 초콜릿 선물박스들을 모아두었던 곳에도 볼 게 참 많았다. 비운의

다이애나비를 추모하는, 혹은 그녀의 결혼을 축하하는 초콜릿 박스도 인상적이었고, 오즈의 마법사

오리지널 버전인 듯 보이는 캐릭터들이 그려진 양철가방 모양의 초콜릿상자도 재미있었다.

이 곳에서 만들고 있는 초콜릿들을 전시, 판매하는 샵을 한번 둘러보고는 다시 박물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마당 반대쪽에 온실같은 게 보여서 슬쩍 가봤더니 카카오나무를 직접 기르고 있는 온실이라는 거다. 아니,

한국의 기후에 카카오나무가 자라는 게 가능한가 싶어서 꼼꼼이 안내판을 읽었더니 역시 생육 조건은 절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여러 차례의 실패 끝에 겨우 싹을 틔우고 작은 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설명, 언젠가

'의지의 한국인이 키운 카카오나무에 달린 카카오빈으로 달콤한 초콜렛을 만들 그날'을 그린다는 마지막

문장이 굉장히 맘에 들었다. 보통 20년 내지 30년 정도의 수령이 된 나무가 가장 좋다니, 그때쯤이려나.


돌아나오는 길. 사실 요새는 예전과는 달리 고급 초콜릿을 파는 샵도 많이 늘었고 수제 초콜릿에 대한

수요도 많이 늘어난 거 같다. 그래도 아직 한국의 초콜릿 소비량은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서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지만, 수천년 이래 인간에게 달콤쌉쌀한 맛을 전해준 초콜릿이 사랑과 열정, 도취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해온 것처럼 한국에서도 점점 그렇게 되어가는 거 같아서 다행인 거다.


사실 초콜릿이면 무조건 아리도록 달기만 한다고 생각했던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처음에 99% 초콜릿이니

다크 초콜릿이니 그런 걸 좋아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원. 그런 점에서 이곳

초콜릿 박물관은 한국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종류의 초콜릿을 만끽하도록 도와주는 좋은

공간인 거 같다.

* 아, 그리고 하나 더. 보통 '초콜렛'이라고 많이 쓰는데 이 박물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초콜릿'

이라고 적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맞춤법 관련 규정을 확인하니, 놀랍게도 '초콜릿'이 올바른 표기.

많은 걸 배우고 돌아가게 해주는 제주 초콜릿 박물관이다.ㅋ




우도로 가는 길은 한가지다. 제주 동쪽끝의 성산 일출봉, 성산포항에서 거의 한시간 간격으로 있는 카페리에

몸만 싣던, 아님 차도 싣던 해서 그 배를 타고 우도로. 승용차 기준 9대가 꽉 차는 카페리의 아가리가 닫히고

15분 정도만 바다 위를 달리면 우도가 나타난다.

2층의 조타실에서 키를 잡고 있는 선장님, 촘촘하게 나사를 박아 단단해 보이는 창문 너머 허브 화분이

눈에 띄어서 한장. 그리고 불과 3.8킬로미터 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우도는 벌써부터 보이길래, 저 너머

길게 소가 물속에서 머리를 내민 모양으로 보이는 바로 우도다. 소牛 자를 써서 우도.

바다가 생각보다 많이 거칠었다. 듣고 보니 제주 서남쪽 모슬포항에서 출발하는 가파도행, 마라도행 배도

궂은 날씨로 뜨지 못했다던가. 저번에 왔을 때는 작은 섬이라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제법 큰 섬이었다.

섬 해안도로만 따라 걸어도 17킬로미터, 약 천오백명이 사는 섬이라니.

우도는 해양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특별히 관리될 만큼 자연생태나 풍광이 빼어난 섬인데, 그런 풍경을

'우도팔경'이라고 이름붙여 놓았다. 제주에서 배타고 우도로 향하는 중에 보는 우도의 풍경, 앞선 사진의

그 모습도 그 중 하나. 그리고 천진항으로 입항해 우도봉으로 걸어올라가는 길의 너른 잔디밭도 팔경 중 하나.

멀리 왼쪽으로 보이는 게 우도등대공원, 그리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구릉의 꼭대기가 우도봉. 132미터밖에

안되는 높이이긴 하지만, 거칠것 없이 불어닥치는 바닷바람 때문에 올라가는 길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길.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대는 탓에 앞서거니 뒷서거니 걷는 가족들과의 대화도 목소리를 키워서 해야 했다.

우도의 소 형상, 그중에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고 해서 '섬머리'라고 불린다는 부분이 바로 여기니깐,

말하자면 소 머리를 기어오르는 길인 셈이다.

방금 배타고 도착했던 천진항이 저만큼 내려다 보였다. 우도엔 천진항과 하우목동항, 이렇게 두 개의 항구가

있는데 대부분의 배가 왕래하는 곳은 천진항. 그 너머 보이는 게 제주도 본섬이니 날씨가 좋아 저 구름이

다 걷히는 때면 한라산도 보이지 않을까. 쉽지는 않겠지만 그 역시 우도팔경의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성산 일출봉의 저 묵직하면서도 날렵한 모양새. 중후한 독일제 세단을 보는 거 같은 느낌마저 든다.

계속해서 소머리를 밟고 올라가는 길. 키작은 잔디가 촘촘하게 자라나 푹신하게 밟히는 느낌이 참 좋다.

섬 바깥쪽으로는 무너지는 곳도 있고 지반이 약한 곳도 있다 하여 이렇게 넉넉하게 울타리를 둘러놓고는

'넘어가지 마세요'라고 안내판도 붙여두었지만, 장난스런 누군가가 두 글자를 지워 의미를 뒤집어버렸다.

사람들이 밟지 않는 쪽 풀떼기들은 뭐가 저리도 무성한지, 먼바다 파도처럼 넘실넘실.


우도봉 정상..이라기엔 좀 뭐한 높이지만, 그래도 속이 탁 트이도록 시원한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높이다.

싱싱한 초록색의 잔디가 곱게 깔려있던 구불구불한 길이 울타리의 인도를 받았고, 그 너머로는 짙푸른

담청색의 바다가 제주도와 우도를 갈라놓았다. 머리가 사방으로 봉두난발처럼 뻗쳐나가게 희롱하던

바람의 위력이란. 저 풀떼기들이 여자들 싸울 때 머리끄뎅이 잡아뽑히듯이 전부 뽑혀 훌훌 날려갈 기세.

울타리쪽으로 고무깔판을 깔아두어 미끄럼을 방지한 길 대신, 잔디밭 가운데를 가로질러 다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듬성듬성 야트막한 산처럼 쌓인 말들의 '생의 흔적'을 만났고, 그 중 한 곳에서는 질펀하게

싸제껴진 똥덩어리 사이로 노랑색 꽃을 피워낸 민들레를 발견했다. 저것이 양분이 되어 꽃을 틔웠다기엔

시간차가 좀 있는 거 같고, 이제라도 더욱 선명하고 이쁜 노랑색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하지 않을까.


제주도식 무덤은 꼭 이렇게 봉분 주변을 돌울타리로 한번 치는 게 상례라고 했다. 소나 말, 혹은 다른 동물이

행여 봉분을 훼손하지 않도록 막기 위함이라는데 보통 현무암을 얼기설기 쌓아올려 울타리를 치더니 여긴

시멘트로 아예 발라버린 거 같다. 천오백명이나 산다더니 정말, 이쪽의 양지바른 곳에 묘지가 잔뜩 모인 게

거의 공동묘지 분위기였다. 야트막한 언덕이 온통 올록볼록 엠보싱.

잔디밭 한가운데 시멘트로 엑스(X)자 모양을 만들어둔 헬기 이착륙장을 지나, 우도봉 뒤로 일찌감치

봐두었던 우도등대공원으로 걸었다. 정신없이 불어제끼는 바람 때문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발길을 돌려 우도의 해안으로 가는 거 같았지만, 저번에 여기 왔을 때 꽤나 멋졌던 곳으로 기억하고

있어서 굳이 걸어올라갔다. 사실 얼마 멀지도 않고.

사람들이 많이 오진 않는지 길 한복판에 둥둥 떠서 멈춰있던 잠자리에 깜짝 놀랬다. 날아가는 모습 그대로

공중에 멈춰 있다니, 자세히 보니 길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이어진 커다란 거미줄에 걸려서 이미

적잖은 시간 비바람에 시달린 듯 하다.

거미줄을 피해 조심조심 오르는 길, 나무 데크로 잘 정돈된 길을 오르다 보면 우리나라나 세계의 주요 등대들

모형이 차례로 만나게 된다. 마라도니 독도니, 우리나라의 주요 뱃길을 비추는 등대들도 그렇고, 뉴욕의

허드슨강을 지키던 등대니 뭐니, 이것저것 훑어보다 보면 어느새 공원의 끝, 우도 등대에 다다르는 거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실제로 쓰였다는 우도 등대. 그리 높진 않지만 단단하고 든든해보이는 체구의 하얀 등대다.

아래부터 위까지 스캐닝하듯 쭉 훑어보다가 발견한 저 풍향계, 그리고 꽃술처럼 풍성하게 벌어진 피뢰침.

풍향계에 그려진 N, E, W, S가 뚜렷하다. 그러고 보니 동서남북의 사방을 가리키는 영어 첫자를 따서 어케

잘 조합하면 뉴스(NEWS)가 되는구나. 뜬금없는 생각에 괜시리 감탄 한번.

그래도 역시, 더이상 쓰이지 않고 사람들이 드나들지도 않으며 비바람에 씻겨갈 뿐인 건물이란 건 왠지 슬프다.

문에 걸린 채 붉은 녹물만 주룩주룩 흘려대는 자물쇠 몇 개가 앙상하게 부식된 껍데기를 떨구고 있었다.


우도등대 앞에 서서 내려다본 우도의 마을 풍경. 시퍼렇다 못해 시꺼먼 바다가 해안에 다가와선 시퍼런 거품을

만들며 시위 중이었다. 그리고 울타리 틈틈마다 거미줄을 만들며 삶을 이어가는 거미. 샛노랗고 까뭇한 색의

대비가 바다보다 화려했다.

더이상 쓰이지 않게 된 하얗고 조그만 등대 대신 그 뒤에 버티고 선 등대전시관의 등대가 새로 작동하고

있다고 했던가. '에어콘 가동중'이란 안내에 낚여 뛰쳐들어갔다가 전혀 냉기 따위 없다는 걸 직감하고 그보다

빠른 속도로 뛰쳐나오느라 이 건물 안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바람은 강했지만 바닷가이다 보니 습하고

소금기 꿉꿉한 기분까지는 어쩔 수 없어서 에어컨으로 좀 말리고 싶었단 말이다.(버럭!)


우도를 지키는 해안경비단을 지나 다시 내려오는 길. 아까는 나무데크가 잘 정돈된 길로 올라가며 등대공원의

여러 전시품들을 둘러봤었고, 이번엔 완만한 내리막길로 걸어내려오며 바다 너머 제주도의 구름 가리운

풍경과 (무엇보다) 발밑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다시 우도의 너른 초원을 걸어내려가는 길, 옆에서 이리저리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들이 있고 1박2일팀이

와서 말을 타고 갔다는 광고가 내걸려있다. 가족 중의 누구 한번 타보라는 권유에 선뜻 앞으로 나선 동생,

요새 승마를 좀 연습했으니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기대.

종아리를 다 덮는 기다란 장화를 신고는 아저씨에 이끌려 초원으로 향했다. 조금 걷다가, 이내 머리가 날리도록

내달리기 시작하는데 제법 멋지다. 쏜살같이 내달려 어느새 손톱만한 사이즈로 변해버린 두마리 말을 좇아

카메라를 이리저리 들이대야 했다. 말을 배우려면 이렇게 풍경 멋진 데서 오르막 내리막을 모두 경험하며

배워야 한다고 아저씨가 코웃음쳤다던가.


차를 주차해둔 쪽으로 걷던 중에 우도의 명물 땅콩을 파는 아주머니들 옆으로 망아지 한 마리가 휘적휘적

유유히 걸어다닌다. 사람들 틈에 섞여서도 무서워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그저 제 갈길 간다는 태도. 그 옆에는

망아지 갈기와 땅콩 껍질을 소용돌이치듯 갈퀴질하는 거센 바닷바람에 날려 뒤집혀버린 하얀 의자가 적나라하니

나뒹굴고 있었다.

서빈백사. 우도의 서쪽 바닷가에 하얀 홍조단괴해빈해수욕장에 있는 모래는 온통 하얗게 반짝거렸다.

하얀 산호와 조개껍데기들이 깨지고 부서져서 바닷가에 쌓인 게 이 모래 아닌 백사장의 정체라고 하는데,

우도팔경 중의 하나로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다. 발로 밟으며 걷기엔 조금 아픈 감도 있는 게 아직 산호나

조개껍데기가 모래알처럼 작게 깨지거나 고와지지 않고, 나름의 형체를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산호가 풍화되어 생겨난 하얀 백사장은 우리나라에서 여기 딱 한 군데라고 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정도로 독특한 풍경 속에서, 맨발벗은 발을 따꼼따꼼 찌르는 아픔 속에서도 천막에 앉아 해삼과

멍게, 그리고 우도 특산물이라는 '톳'을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다른 해산물들도 다들 싱싱하고 맛났지만

특히 이곳에서 처음 맛본 톳은 싱싱하고 탱글거려서 제일 먼저 없어져버렸다는.

무려 3미터짜리, 3톤이 넘는다는 해녀상이 서 있던 하고수동 해수욕장. 세계 최대의 해녀상은 1932년 3개월동안

1만 7천여명의 해녀가 항일 항쟁을 벌였던 것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것이라 하는데, 당시 해녀가를 지어 불렀던

해녀가 우도 출신이었기에 여기 이런 거대한 해녀상이 선 거라고 한다. 
 

그 앞에는 또 하나의 해녀상이 서 있었는데 그 유래는 전혀 모르겠고, 시선이 계속 쏠리는 건 그 상들 너머

에메랄드빛 바다. 자잘하게 부서진 파도가 잔잔하게 이는 그 깊고 투명한 색감의 바다가 멋지다.

어라, 제주도에 비양도는 북서쪽 금능해수욕장 맞은 편 아니었던가. 알고 보니 여기도 비양도라는 같은 이름을

쓰는 섬이 하나 우도랑 연결되어 있었다. 조그마한 섬이고 우도랑 붙어 있어서 그냥 시멘트길이 넓게 이어져

차를 타고도 쉽게 한바퀴 돌아보고 나올 수 있었는데, 섬 앞머리 표식이 인상적이다. 온통 조개 껍데기를

탑처럼 쌓아올린 표식 바깥에 촘촘히 붙여놓아서, 멀리서 보면 새하얗게 반짝거리던 것.

우도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검멀레 모래사장 앞 '동안경굴'. 검멀레는 왠지 발음부터 연상되더니

역시, 검은 모래를 가리키는 제주도말이라 하고, 그 앞의 동굴까지 사람들이 내려가 볼 수 있는 거다. 이 동굴에

옛날엔 커다란 고래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는데 그 앞의 깊고 짙푸른 바다를 보면 왠지 상상이 되었다.

동안경굴, 우도팔경 중의 하나였던 그 동굴 위로 뻗은 산책로 앞에 있던 제주도 전통 대문인 '정낭'의 나뭇살

세개가 모두 구멍에 끼어져 있다. 주인이 멀리 출타 중이란 의미를 남길 때 저렇게 세 개를 모두 구멍에

끼어놓는다고 했는데, 산책로를 당분간 폐쇄한다는 안내판에 꼭 맞는 의미심장한 표식인 셈이다.


* 참고로, 제주도 전통 대문인 '정낭'의 표식에 대한 의미 정리. (네이버 지식인 참조)
 
ㅇ 나무가 한 개도 걸쳐 있지 않을 경우 : 집안에 사람이 있음

ㅇ 나무가 한 개 걸쳐져 있는 경우 : 가까운 곳(이웃집 등)에 잠시 나가 있음

ㅇ 나무가 두 개 걸쳐져 있는 경우 : 이웃 마을 등에 갔음

ㅇ 나무가 세 개 모두 걸쳐져 있는 경우 :  멀리 출타중임


산굼부리. 벌써 두번째 찾는 이곳은 분화구만 유독 뚜렷한 지형과 바람소리를 그려내는 억새밭이 만들어내는

호젓하고도 기묘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곳이다. 저번에 왔었을 때는 억새가 온통 누렇게 물든 계절이었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이제나 그제나 제주도의 변덕스런 날씨 덕에 꾸물거리는 하늘은 변함없었던 거다.

제주도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주차장이 어디든 넓찍하니 잘 마련되어 있단 것. 게다가 주차요금을 별도로

받지도 않는다. 산굼부리 주차장은 현무암으로 잘 조성된 너른 마당인데다가, 주차장에서 산굼부리

매표소로 가는 길도 운치있게 잘 정비되어 있어서 늘 기억에 남는다.

산굼부리 들어서는 입구. 매표소를 지나 걸어들어가면 현무암으로 이쁘게 지어올려진 관리사무소가 덩굴을

온통 칭칭 휘감은 채 버티고 있고, 이끼가 보들보들하게 돋아난 나무들에도 무슨 목걸이처럼 덩굴이 매달려

있었다. 바닥에 깔린 붉은 화산석이 비를 맞아 더욱 선연한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렇게 구멍이 뚫린 화산석은 어떻게 생긴 걸까. 옆의 설명을 참고하니 어찌 생긴 건지는 알겠지만 그

신비로움이 덜어지진 않는다. 화산이 폭발할 때 흘러내린 용암이 나무를 감싼채 굳어버렸단 거다. 그렇게

용암은 단단하게 굳어가고, 나무는 그대로 까맣게 숯이 되도록 타버렸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흔적도 없이

사그라져 버리곤 저렇게 빈 구멍의 흔적만 남기게 된다는. 제주도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용암수형석.


산굼부리에 오르는 사람들은 이쯤에서 여지없이 한번 주춤하는 거 같다. 길이 무려 세갈래나 되는 거다.

제법 경사진 계단으로 오르는 첫째길, 좀더 완만한 두번째 길, 그리고 아예 평탄하게 이어지는 셋째길까지.

첫째둘째길은 결국 산굼부리 정상으로 오르는 같은 길, 셋째길은 억새밭을 좀더 에둘러가는 길, 결국 같다. 


산굼부리, '굼부리'는 화산의 분화구를 이르는 제주도말이라고 한다. 한라산이 불쑥 솟아오르던 즈음에 함께

생겨났다는 산굼부리가 제주도의 수많은 기생화산, 그들의 분화구 중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이유는 여기

분화구가 솟아난 산세에 비해 유독 커다랗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높이 치솟지도 않았는데 분화구의

크기가 크다 보니, 평지 한복판이 움푹 파인 거 같은 느낌이 드는 거다. 올라가는 길도 이렇게 완만하고,

곳곳에 제주도식으로 돌담을 두른 무덤들도 자리를 잡았다.
 

금세 도착한 산굼부리의 분화구 둘레. '추락주의'라는 경고문구가 보여주듯 아래쪽으로는 깍아지른 듯한

가파른 사면이 분화구 아래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깊고 큰 화구가 남을 수 있었던 건 여기 분화구가

폭발할 때 주로 가스만 새어나오고 다른 용암이라거나 화산재들이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덕분에 분화구 주변이 높아지지 않은 거기도 하고, 분화구가 그대로 움푹 패인 채 남아있는 거고.

알고 보니 이 분화구, 백록담보다도 크고 깊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여기도 백록담처럼 물이 고여있었다면 좀더 멋지지 않았을까, 싶도록 분화구 아랫쪽은 온통 초록빛일색이다.

식물의 생태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분화구 사면에 따라 받는 일사량과 일조시간, 기온에 따라 다른 식생이

살고 있다며 온대, 난대성 식물과 각종 희귀한 식물이 산다는 사실에 좀더 많이 감탄했겠지만,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저 헤에, 그런갑다 할 뿐이다. (사실 아래까지 내려가서 직접 확인할 수도 없거니와)

산굼부리 분화구 주변을 한바퀴 둘러보다 보면, 그렇게 높진 않다지만 나름의 언덕 위에서 산굼부리 주변

풍경을 둘러볼 수 있어서 좋다. 시선이 산굼부리 안쪽, 바깥쪽으로 번갈아 움직이는 거다. 깊은 구멍 속에

초록빛이 연못처럼 고여있는 산굼부리 안쪽 사면, 그리고 억새밭이 넓게 펼쳐진 산굼부리 바깥 사면과

그너머 듬성듬성한 다른 기생화산들.

일단은 다시 원점, 세갈래길이 갈라지는 지점까지 돌아내려와서 다른 두길을 걷기로 했다.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기념품점 현무암 지붕이 온통 말라죽은 이끼 색으로 변해 있었는데 저게 정말 이끼가 덕지덕지

붙었다가 죽어서 남은 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색깔의 식물이 덮인 건지는 모르겠다.

두번째길로 돌아서 다시 올라가는 길은 온통 사람들의 소원이 뾰족뾰족 봉우리들을 만들고 있었다. 붉고 검은

화산석들이 제각기의 까칠한 모양새를 감내하며 어떻게든 바닥을 받치고 위로 서고, 또다시 바닥이 되어

중심을 잡고 윗자리를 마련하고.

둘째길로 들어서서 세번째길로 돌아나오는 길, 온통 억새밭이 장관이었다. 바람소리가 문득 까먹었다는 듯이

윙윙 울릴 즈음이면 억새들은 제들끼리 사각거리며 바람의 잔영을 새기기에 바빴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이 점점 다가오거나 멀어지고 있다는 게 억새밭의 움직임으로 가늠할 수 있다는 게 재미있어서,

질리지도 않고 계속 바라보았다. 


세번째 길까지. 산굼부리의 길들을 샅샅이 걸어보고 내려가는 길, 여태 꾸물거리며 겨우겨우 참는다 싶더니

그 길에서야 울음이 터졌다. 굵은 빗방울이 시원하게 내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저 신민아를 닮은 아가씨가

입고 있는 우의와 쓰고 있는 우산을 사러 매점으로 달려야 했다.




한라산 백록담은 생각보다 작았다. 물이 조금 마른 건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원래 저 사이즈만큼

물이 고여있다고 했다. 구름이 위로 지나면 순간 뿌옇게 변하기도 할 정도로 맑은 물이었는데

제법 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데도 백록담 밑의 바닥이나 수면 위의 물결이 일렁이는 것까지

전부 보인다는 게 신기했다는. 단순히 연못이 크고 작고를 떠나서 저 시퍼렇고 맑은 물빛과

주변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맞물려서 역시 백록담, 이란 감탄을 하고 말았다.



세계각국의 유명 건축물들의 미니어처를 모아두었다는 제주 미니미니랜드, 삼십분의 일이라거나 십오분의 일

사이즈로 줄여놓았을 뿐 실물과 똑같다는 그 건축물들이 모인 곳을 어떻게 해야 가장 재미있게 돌아볼 수

있을지 생각해보니, 다녀온 곳들, 보았던 곳들 앞에서 각자 인증샷을 찍으면 괜찮겠다 싶다. 간 데가 몇군데

안된다 하더라도 뭐, 어쨌든 세계 곳곳에 산재한 명소들이 한 곳에 모여있단 건 큰 메리트니깐.

건축물들 미니어쳐 앞에 섰을 때, 걸리버가 소인국에 떨어졌을 때의 느낌에 최대한 가까울수록 성공적인

거 아닐까. 소인들이 꼬물거리며 지어올리고 그 안에서 사는 건물들의 디테일이나 리얼리티란 건 그야말로

최고의 수준일 테고, 그들 소인들보다 크고 무딘 손으로 조그마한 건축물을 지어올리려면 말이다.

타이완의 중정기념당, 한 사람을 위한 공간, 중정기념당에서 장개석을 생각하다.

중국 자금성, 블로그를 시작하기 전, 내가 카메라랑 그다지 친하지 않던 시절 다녀왔던. 비가 내리는 궂은

어두컴컴한 날씨였지만 황금빛 기와지붕과 붉은 담벼락은 여전히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왓, 캄보디아#31. 채색의 흔적을 발견하다, 앙코르 왓(1/3)

캄보디아#32. 박스 안의 박스, 무한선물상자를 열어보는 즐거움, 앙코르왓2

캄보디아#33. 앙코르왓의 전경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던 연못, 앙코르왓3

캄보디아의 앙코르톰. 사실 앙코르왓은 씨엠립의 여러 옛 사원 중 하나의 이름일 뿐.

캄보디아#4. '크메르의 미소' 바이욘(앙코르 톰)

이집트의 스핑크스. 이집트#7. 카이로 달동네를 거쳐 피라밋으로.

이집트#8. 쿠푸왕 대피라밋 안의 석관에 누워보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과 플랫아이언빌딩이 있었는데, 여기도 2001년..까마득한 과거에 다녀왔는지라.

뭐 자유의 여신상이나 플랫아이언에서 찍은 건 아니지만 어느날의 월스트리트.  풍요로운 땅 뉴욕의 공립도서관.


태국의 왕궁, 왕궁(Grand Palace)에서 만난 수호상, 랍스타 퍼레이드.

공원이 꽤나 넓었다. 무려 120여점의 건축물을 오밀조밀 세워둔 세계 7대 미니어처 파크라니 이정도 크기는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조경까지 생각하고 지역이니 나름의 테마에 따라 보기좋게 진열하려면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거 같다. 어느 순간 비가 쏴아 쏟아붓기 시작해서 부랴부랴 비를 피하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우의를 사입고 구경을 재개했다.


인도의 타지마할, 인도#5. 우윳빛깔 풍만한 타지마할의 자체발광, 하악하악.

미국의 워싱턴 국회의사당. 여기도 2001년에 3개월동안 체류하며 불법으로 알바하며 모은 돈으로 갔던 곳.

쿠웨이트의 쿠웨이트타워, [쿠웨이트] 24시간의 쿠웨이트 체류.

중국의 만리장성, 미니어처 건축물과 건축물 사이에 뱀처럼 몸을 좌우로 뒤채며 늘어져있었다. 

역시 내가 블로그를 하기 전, 카메라랑 친하기 전에 다녀왔던 곳. 


미국의 백악관. 워싱턴을 샅샅이 훑었던 그 때, 마일스톤 앞에서 잔뜩 폼을 잡고 사진을 찍었던 곳.

그리고 역시 미국의 링컨 기념관. 이번에 정말 재미없던 트랜스포머3에서 저 거대한 의자에 앉은 링컨을

밀어내고 나쁜 로봇이 편하게 앉았었다.

여긴 다녀오진 않았지만, 이 곳에서 가장 크고 이쁜 미니어처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어서 한 장.

이탈리아의 트레비분수였다던가.

이것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초록빛깔 잔디와 잘 어울리는 게 왠지 스위스 쯤에 있는 뭔가가 아닐까.

안 가본 나라가 너무 많은 거다. 이곳에 모인 것들은 전세계 곳곳의 50개국을 대표하는 한두점들일 뿐인데도

이 중에서도 안 가보고 모르는 것들이 이리도 많다니. 미니어처 말고 진품을 직접 보고 싶은 맘이 무럭무럭.

그리고 한국의 불국사. 여기야 뭐,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많이들 갔었지만, 막상 혼자던 친구랑이던

한번 다시 가면 새삼스러운 구석이 참 많던 곳이다. 불국사 말고도 경주라는 도시가 그랬다.

청와대. 시화연풍, 청와대 들어가기.

남대문, 지금 열심히 복원공사중일 텐데 이전보다 더욱 오리지널에 가깝고 단단하게 복원되면 좋겠다.

건축물들만 밋밋하게 열맞춰 늘어선 게 아니라, 나름의 야트막한 언덕이나 구릉이 있었고 또 이런 나무들도

있었으며 연못도 있고 다리도 있고 그랬다. 이끼가 파랗게 낀 보슬보슬한 촉감의 나무에 덩굴 하나가 체인처럼

기둥을 휘감은 채 흘러내린 모습이 너무 이뻤다.

하루방을 뭔가 캐릭터로 만들어보고 싶었던 거 같은데, 좀 아쉽다. 좀더 간결하고 참신하게 바꿨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보다 좀더 귀여웠어야 했지 싶다.


제주도 똥돼지를 멀뚱하게 바라보는 젊은이 하루방.

아무래도 제주가 좀 습하고 따뜻하고 그래서 그런지 나무들이 조금만 그늘진 곳이다 하면 저토록 빽빽히

이끼가 끼는 거 같다. 온통 연두빛 융단을 휘감은 듯한 느낌의 나무둥치.

세계 위인들의 조각상들도 있었다. 어떻게 선정된 위인들인지 모르겠지만 한국 선수로는 충무공 이순신과

세종대왕. 아마 화폐에 활용된 인물을 기준으로 한 게 아닌가 싶은데 그보다 놀랍고 기분좋았던 건 바로

맑스가 이 곳에 전시되어 있단 사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맑스의 조각상 뒤에서 주먹 불끈 쥐고 인증샷 찍고는 맑스 조각상을 따로 찍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러시아어가 적혀있는 그의 조각상을 전시하다니,

미니랜드가 급 좋아져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만화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공간도 있었다. 스머프들이 뛰노는 마을 뒤에서 음흉하게 웃으며

쳐다보고 있는 가가멜과 그의 고양이 아즈라엘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는 똘똘이 스머프 뒤로 텔레토비도 보인다.

그리고 원피스! 루피와 조로, 샹띠가 멋진 포즈를 잡고 있었는데 애들 보다는 오히려 내 또래의 '어른'들이

더 좋아라하던 포토존이었던 듯. 그나저나 대체 원피스는 언제 완결되려나.

무엇보다 캐릭터들 중의 압권이자 대미는 우리의 뽀통령. 모자빨과 안경빨일 뿐, 조그만한 눈에 앞머리 탈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게 함정이라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 인기만점이던 포토존.

이건 태권V의 입체그림이라고 했다. 정해진 뷰포인트에 두발을 고정하고 그림을 바라보면 바닥에 그려진

그림이 마치 벽처럼 일어나는 걸 느낄 수 있다는 거다. 아마도 지정된 점으로 집중되도록 소실점을 잡고선

원근을 감안한 덕분인 듯 한데, 페인트칠한지 좀 오래라 발색이 선명하진 않아도 제법 일어난 느낌이다.

쥬라기공원에 등장했던 렉터, 티라노사우루스도 있었다. 꽤나 정밀하게 묘사된 피부나 이빨, 발톱의

모양새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박치기하는 애들, 이름이 뭐더라, 그 초식공룡들도 마치 산책로를

점거할 듯한 기세로 산책로 옆에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은, 무료라는 글자를 큼지막하게 박아두고 있던 매직거울체험관. 미로공원에서 이미

겪었듯 길 찾기에는 영 젬병이란 걸 알고 있었는데, 이 기둥이 무한하게 이어지는 듯 보이는 거울의 방에서

자칫 못 나올 뻔 했다. 두 손을 엉거주춤 벌리고 앞의 공간을 더듬으며 그게 거울인지 아님 열린 공간이지

확인하며 한참을 버벅댄 후에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비만 안 왔으면 좀더 둘러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그래도 제법 꼼꼼하게 다 살펴보았더니 두시간 가까이

흘렀던 거 같다. 나오는 길에 눈길을 잡았던 건 오줌싸는 소녀의 상. 이건 대체 어느 나라에 있는 조각상을

소개한 건지는 전혀 확인하지 못했지만 익살맞은 표정이나 편안해보이는 자세가 매력적이었다.





제주도를 수차례 여행도 하고 출장도 다녀왔지만, 생각해보면 한라산은 늘 '아웃오브안중'이었던 듯 하다.

기껏해야 섬 한가운데 딱 박혀서는 겨울철에 갑작스런 폭설을 쏟아붓거나 변덕스런 날씨를 만드는 주범이라고나

생각했을까, 제주도의 찾아가볼 곳 중에서도 늘 빠졌던 한라산은 그냥 배경화면처럼 거기 있었던 거다.


이번에 그 배경화면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져볼 기회가 있었다. 성판악에서 백록담으로 올라 관음사로

내려오는 구간, 오르는데 네 시간이 채 안 걸렸고 내리는데 다섯시간이 채 안 걸렸으니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런 구간이겠으나, 아무에게나 쉽게 열어주지 않는다는 백록담이 구름을 훑어내고 활짝 열렸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싶어서. BGM은 '헉헉헉' 쯤 숨이 턱에 닿는 소리라고 치고 사진만으로 포스팅.

백록담까지 오르내리는 길이나, 정상 아래로 깔린 운해나, 백록담의 미묘한 색감, 그리고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간다는 주목들의 기이한 형상들까지. 아,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오르고 싶어졌다는 정도는 말해둬야겠다.


삼양검은모래 해수욕장의 낙조.  모래빛깔이 검은 탓인지 더욱 검게만 보이는 해변가, 그리고 중부지방엔,

특히 서울 강남엔 엄청난 폭우가 내렸던 날이라 그런지 갈기갈기 찢긴 구름이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한 세시간 전쯤의 삼양검은모래해수욕장 앞바다. 햇볕이 뜨끈뜨끈 내리쏘이던 제주 북부, 제주시에서

그리 멀지않은 해수욕장인데도 사람이 얼마 없었다. 이곳의 검은모래가 신경통이나 피부병에 특효를

발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참이었다.

이미 대여섯시쯤 되어 사람들이 한풀 꺾였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 이렇게 사람을 묻고 사람이 묻혔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있었으니. 어찌 보면 씨앗들을 뿌리기 전의 밭고랑같기도 하다.

여긴 또 다르다. 일일 만오천원이던가, 쯤의 금액을 내고 입장할 수 있는 모래찜질 전용 공간. 삽과 기타

전문도구로 무장한 아주머니가 순식간에 사람을 묻었다가 파냈다가 그러나보다. 밭고랑이라기보다는

무슨 대규모 플랜트농장같은 느낌. 거대한 트랙터가 굉음을 내며 왔다갔다 할 거 같은.

여하간, 정오의 햇살이 전달해준 열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던 모래는 생각보다 뜨끈거렸다. 어느 정도

깊이 파낸 모래도 그새 땅속 깊이 머금어진 햇빛의 힘으로 따뜻한 온기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모래가

어두운 검정빛을 띄고 있어서 더욱 따뜻했는지도 모르겠다. 머리만 남기고 온통 파묻혀버린 사진.

커다란 봉분이 따끈하게 섰고, 그 속에서 옴쭉달싹 못한 채 순식간에 땀이 주륵주륵 흐르기 시작했다.

한 삼십분쯤 모래무덤 속에 짓눌려 있었던가, 생각보다 몸 위에 덮인 모래의 무게는 상당해서 좀처럼 쉽게

빠져나올 엄두를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땀이 뻘뻘 흐르기에 이르렀고 버둥거리며 모래더미를 파헤치고선

좀비처럼 기어나와, 바다로 달려들었다. 누워있을 땐 몰랐는데 이미 많이 기울어버린 해.

그리고 잠시 후에 내 옆에서 함께 찜질하던 아빠가 일어나서 바다로. 정말 하늘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해안이 제주시 근처에 있단 걸 여태 몰랐다. 모래찜질하기에 딱 좋은 검고 고운 모래가 쪼르륵

깔려있는 아담한 해안, 햇빛에 뜨끈뜨끈 달궈진 모래인데다가, 눈앞의 바닷물도 깨끗한 편이고 경사도 완만해

놀기에도 좋은 곳인 듯 하다. 아빠가 몸에 곱게 코팅된 모래를 꼼꼼히 씻는 모습을 엄마가 바라보고 있다.

왠지 선녀와 나뭇꾼 스토리를 현대적으로 전복한 이미지같기도 하고. 당당하게 남자를 훔쳐보는 여자랄까.

해안의 야경 사진 몇 장 더. 멀찍이 깜빡이는 노랑 불빛은 동해에서 남하한 오징어를 따라 제주도까지 내려온

오징어잡이배들이고, 하늘에서 반짝이는 빨간 불빛은 어디론가 우르르 일렬로 날아가던 헬리콥터들.

햇살의 잔영이 남아있는 바다쪽 말고 뒤를 돌아보니 이미 새까맣다. 해안가에는 DNA 나선형 구조의

LED조명이 불을 밝혔고, 한결 더위가 가신 해변가에는 치킨이니 맥주를 들고 나와 삼삼오오 모여 마시는

사람들이 다시 출현했다.

이번엔 좀 늦게 해수욕장에 도착한 감이 있었던 데다가 수영복이고 세면도구고 전혀 준비하지 않고

무작정 쳐들어간 거여서, 다음에는 모래찜질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좀더 뜨끈할 때 가는 것도 괜찮겠다.





미로공원의 대체적인 이미지는 그런 거다. 회양목류의 정원수를 키가 넘도록 길러서는 도톰하게 관리해서

이리저리 휘어지고 갈라지는 길을 뱅글뱅글 만들어두는 것. 다만 그게 어려워봐야 얼마나 어렵겠나, 그냥

애기들이나 재밌다며 돌아볼 그런 난이도의 가벼운 미로일 거라고 생각했고, 미로보다는 잘 다듬어졌을

그 정원 자체가 볼 것이 더 크지 않을까 했었다. 오산이었다. 최근에 본 네이버 웹툰에서 미로를 빠져나가는

'좌수법'이니 '우수법'이니를 배워두길 잘 했다 싶었다.

비슷한 테마파크들이 서로를 복제하며 우후죽순처럼 들어선다 싶은 제주도, 미로공원 역시 여러개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오래 된 곳은 이곳 '김녕미로공원'이다. 제주도 동북부의 김녕해수욕장이랑 바싹

인접해 있기도 하고, 제주시에서부터 차로 달려도 채 한시간이 안 걸리는 거리. 입구 매표소에선 미로를

다 통과하면 종을 울리면 된다며, 아무리 헤매도 한시간내로는 다 찾는다고 했다. (그래서 미로 패스하고

난 기념 선물은 아이들에게만 준다고도 했다.)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푯말 하나. 대개가 30분 안에 종을 울린다는 이야기인데, 좀체 방향감각이나 길찾는 능력이

떨어지는 나로서는 저 80% 안에 들을 수 있을지 슬쩍 의구심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1시간이 넘도록 헤매는 건

아니겠지 설마, 했는데 막상 미로 속에 들어서니 설마가 역시나가 될 듯한 분위기.

키를 훌쩍 넘어까지 올라간 미로의 수풀 담벼락, 길도 두사람이 동시에 지나기 힘들정도로 좁은 데다가

이리저리 격하게 휘어지고 갈라져 있어서 좀체 한치 앞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저렇게 하트 모양으로

다듬어둔 모양조차 올려다보아야 하는 높이의 커다란 사이즈로 미로 속 인간들을 압박하는 듯.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세갈래길, 이곳저곳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얄미워 보였지만 뭐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하나씩 차례로 뚫어보기로 하고 우선은 오른쪽 길로 고고.

길이 좀 아닌 거 같다. 몇걸음 지나지 않아 덤불 저 너머로는 시체라도 파묻을 듯 붉게 드러난 흙무더기

위로 삽 두자루가 꽂혀 있는 모습이 살벌했다. 미로공원에 함께 들어왔던 가족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수가

그리 적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주위에 인기척은 없고, 미로의 벽들이 소리를 전부 흡수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괴괴한 분위기가 살짝. 뭐, 0.5초 만에 앞의 코너에서 불쑥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나긴 했지만.

여하간 중간중간 사람들의 인적이 뚝 끊긴 분위기가 연출될 때가 있는 데다가, 길이 막다르거나 혹은 조금

급하게 휘어져돌아간다 싶은 곳에서는 아무래도 이런 표지가 필요하겠다. 뽀뽀금지. 연인들이 손붙잡고

이쪽저쪽을 상의하며 가다가, 어딘가에서 불쑥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 둘만 있다고 느낄 때 인지상정인 거다.

이렇게 덜컥 막다른 길이 눈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눈높이로 보이는 건 온통 초록색 담벼락인데다가 담 너머

저쪽에는 뭔가 기준으로 삼을 만한 표식도 없어서, 망망대해에서 둥둥 속절없이 떠다니는 느낌이다.

이렇게 휘휘 감아 돌아가는 길에서 그냥 무작정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은 그래서, 딱히 내 의지가 실렸다기보단

그저 되는대로 가보자, 언젠가는 길이 뚫리겠지, 라는 식의 체념과 멍때림의 상태. 아이들 눈높이에 딱 맞는

수준의 미로일 거라 지레 짐작했던 걸 반성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 닿은 곳은 어이없게도 입구. 차분한 맘으로 다시 미로를 재출발하기로 했다. 알고 보니 사람들이

한번씩은 다시 입구까지 돌아와서 출발한 경험이 있어서 딱히 내가 멍청한 건 아니..라고 자기 위안.

이번에 새로 밟는 길에선 드문드문 해골이 깔려있기도 했다. 여름철 야간개장을 한다고 밤 9시반까지 미로를

개방한다더니 혹시 저 해골들은 밤에 반짝반짝 빛나는 그런 야광해골은 아닐지. 깜깜해진 어둠 속에서 미로를

헤매는 건 음...살짝 스릴 넘칠 거 같단 생각도 든다.

종이 매달려 있는 도착점이 눈앞인데, 좀체 저기로 나가는 길을 모르겠단 말이다. 그 와중에 아까 봤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엇갈려 마주치고, 정말 두세번 만나는 게 낯설지 않았다.


해골과 키스하지 말란 표지판. 뭔가 으스스하면서도 달콤한 분위기가 풍기는 미로공원이다.

겨우 발견한 길, 미로 위로 올라서는 계단이길래 다 왔구나 했다. 근데 아직. 갈 길이 좀더 남았더라는.

이쪽에서 저쪽 종이 있는 곳까지 다시 또 미로를 헤쳐나가야 한다니, 더구나 이렇게 위에서 바라봐도

좀체 꼬불꼬불한 길을 어떻게 뚫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미로가 생각보다 훨씬 크구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어떻게 이리저리 길을 휘휘 돌다 보니까 불쑥 미로의 끝에 도달했다. 다시 걸어보라면 또다시 헤매며

좀체 학습이 이뤄지지 않은 그 길이었지만 어떻든 도착점은 예고도 없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덜컥 다가왔다.

이미 앞서 도착한 사람들이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재촉하니 사람들 표정이 다들 환하다. 


종을 울리고 미로 밖으로 빠져나오기 전 한번 휘휘 눈으로 온 길을 되짚어 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모르겠다.

대체 어디로 어떻게 가야 시작점과 도착점을 아무런 방황없이 통과할 수 있을까. 그치만 사실 미로는 좀

그렇게 헤매고, 뒤로 돌기도 하고, 왔던 길 또 가기도 하라고 만들어둔 거니까 대충 삼십분쯤 헤매면 미로가

가진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인 거 같다. 바로 한큐에 왔다면 글쎄, 한 5분 걸리려나.

미로 밖으로 내려섰더니 이제야 미로 앞의 잘 꾸며진 정원도 눈에 좀 들어온다. 정원도 길이 꼬불꼬불하니

또다른 미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동선이 야릇했지만, 그래도 잘 다듬어진 관목들과 꽃나무들이 보기 좋다.

아래는 그 정원에서 찍은 꽃들.

확실히 제주도는 따뜻한 남녘땅이어서 그런지 화려하고 커다란 꽃들도 많은 거 같고, 위에서 못 봤던

품종들도 많은 거 같다. 아니면 내가 '위쪽'에서 보았던 게 대부분 콘크리트 사이에서 비리비리한 한계절용

조경들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고.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말은 뱃속으로'란 말이 가장 맞지 않을까 싶었던 말고기

오찬. 제주도산 말만 취급한다는 전문점에서 세트메뉴를 시켰더니 가장 먼저 나오는 건 말고기 사시미.

참치살처럼 새빨갛고 촉촉한 살점이 가지런히 놓여 나왔다. 굉장히 부드럽고 단 맛이 도는 고기라서 사진 한번

찍고는 훌떡훌떡.

이어지는 육회. 생고기로만 만드는 육사시미의 맛을 알고 나서부터는 저가의 냉동육에 계란과 배로 맛을 내는

육회는 그다지 안 먹게 되었지만, 말고기의 경우는 물론 예외인 거다. 계란과 배를 잘 섞어서 맛보는데, 딱히

냉동고기 같지도 않고 비린 맛도 없다. 아니,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 특유의 냄새가 약해진 거라 말해야

하지 않을까. 많이 안 먹어보던 고기, 예컨대 양이나 염소 같은 고기에 노린내가 나니 냄새가 심하니, 말하지만

사실 모든 고기엔 특유의 향취가 있는 거니까. 다만 우리가 소와 닭과 돼지 냄새에 익숙해 있을 뿐인 거다.

말의 향취를 그야말로 응축시켜서 느낄 수 있던 건 육회 다음으로 나왔던 말엑기스. 시꺼멓고 끈적한 느낌의

액체가 막걸리잔보다는 조금 작은 잔에 담겨나왔다. 원래 한약냄새 풀풀 나는 것들도 잘 먹는지라 조금씩 맛을

음미하며 마셨는데, 에스프레소처럼 첫맛은 쓰고 시다가 뒷맛은 뭉근하니 단맛이 퍼지는 그런.

왠지 힘이 불끈하는 느낌..?ㅋ

이어지는 말고기쌈. 얇게 썰린 무채에 올려놓인 다른 야채들과 함께 한점 올려진 말고기가 참 촉촉하기도 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게 눈에 보인다. 젓가락으로 잘 감싸서는 한입에 쏙.

육사시미 때부터 계속 느꼈던 거지만 말고기 참..먹음직스럽게 생겼다. 색깔도 투명한 선홍빛으로 이쁜데다가

사방으로 갈라지는 고기의 결도 그렇고, 촉촉히 배어나오는 고급스런 윤기까지.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투명한 색감 그대로 깔끔하고 산뜻한 맛에다가 입안에서 바로 허물어지는 부드러움, 그리고 촉촉하고 매끄러운

치감이라니. 말고기 초밥을 먹으면서, 만약 이게 요리만화라거나 그렇다면 아마도 난 지금 보드랍고 매끄러운

갈기를 나부끼는 구릿빛 튼튼한 말을 타고 드넓은 녹색의 대초원위를 경쾌하고 뛰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말고기 스테이크와 내장. 말고기 스테이크는 뭔가 소스가 가득 뿌려져 있는 탓에 내용물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던 데다가, 소스의 맛과 향이 말고기 특유의 향을 상당부분 감춰버려서 그다지 별 차이점을 못 느끼고

먹어버렸다. 그냥 다진 고기로 만든 여느 함박스테이크랑 비슷했던 듯. 그렇지만 내장은 정말, 말 특유의

냄새가 가장 진하게 났던 부위였던 거 같다. 소나 돼지에 비해 좀더 부드럽게 씹혀서, 내장의 쫀득한

씹는 맛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조금 실망할지도. 그래도 정말 말 한마리 어느 하나 못 먹을 부분이 없단 걸

체감했다는 것 만으로도 만족이다.

그리고 말고기 갈비찜과 말고기 구이. 마지막으로 나온 말뼈사골국까지 해서 그야말로 말고기를 날로 먹고

쪄서 먹고 구워 먹고 다져 먹고 고아먹고 엑기스로 짜서 먹고, 온갖 방식으로 조리해서 맛볼 수 있었다. 

갈비찜에 들어간 말갈비는 소갈비랑 얼추 비슷한 사이즈였던 듯 하고, 고기의 육질은 (조리하기에 달린

부분일 수도 있겠지만) 역시 부드러웠다. 무엇보다 전반적으로 말고기엔 기름이 많지 않은 건 확실하다.

구이로 나왔던 고기들도 기름기가 많지 않아 담백하고 부드러운 살코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구제역이 한참일 때 소나 돼지와는 달리 말고기의 소비가 제법 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발굽 사이에서

물집이 잡힌다는 구제역은 발굽이 두개 이상으로 쪼개진 동물이나 걸리는 병인지라, 통굽인 말은 구제역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라던가. 그렇지만 구제역이 무서워서뿐 아니라, 말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말고기가

사람 몸에 '그렇게도 좋다'더라는 이야기를 전파하곤 한다. 말 머리에서부터 신장, 허파, 심장, 음경과 고환,

심지어는 말꼬리와 말굽에 이르기까지 참 세세하게도 효능을 적어둔 이 내용을 그대로 믿어보자면,

말한마리를 잡아먹으면 뭔가...변강쇠가 될 거 같다. 아저씨들의 취향에 맞춘 효능 안내인 걸까.

효능이야 여하간에, 말고기는 기름이 적어 꽤나 담백하고 부드러운 육질을 가진, 별미로 맛봄직한 고기인

거 같다. 제주도에서 갈수록 눈에 쉽게 띄는데다가 이제 슬슬 서울에까지 분점을 내고 있는 말고기전문점은

어디가 되었건 한번 들어가서 시도해보면 색다른 제주도 체험이 되지 않을까. 다만 이렇게 길가에 망아지가

자유롭게 노니는 제주도에서 혹시 동족의 냄새를 맡은 녀석이 뒷발로 차기라도 하면 목숨이 위험할지는

모르겠다.



제주도 서남부에 '오설록' 차박물관이 있다면 동북부에는 '다희연'이 있는 셈이었다. 너른 차밭이 언덕을

꿀렁꿀렁 넘어다니며 펼쳐진 모습도 장관일 거라 생각은 했지만, 여기는 동굴까페가 있는 데다가 카트를

직접 운전하며 6만평 차밭을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것.


거문오름 자락에 연해 있다고 하더니 정말, 다원 한쪽엔 거문오름 트레킹코스 종점을 알리는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고, '다희연'이란 이름보단 '동굴의다원'이란 이름으로 계속 도로표지판이 나오더니 정말,

구석구석 땅밑세계가 은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갈라지고 터진 검정돌바닥 아래로 슬쩍 내비치는 땅밑의

터널이라거나, 물소리가 졸졸거리며 옆구리가 터친 동굴까지.

우선 카트를 빌려서 다원을 한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6만평에 달한다니 걷기엔 무리인 크기인데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를 피하기엔 저렇게 꽁꽁 비닐차양이 둘러쳐진 전동카트가 제격. 엑셀레이터를

밟으면 소리없이 나가는 그 느낌이 굉장히 신기해서 한두어 바퀴 다원을 돌며 카트레이싱을 펼쳐보기도 했다.

카트를 타다가 발견한 전망대..라기엔 조금 애매한 높이의 2층짜리 건물. 비에 젖은 철계단을 조심스레

휘휘 돌아감으며 2층까지 올라갔더니 탁 펼쳐진 풍경. 몇개 놓인 나무의자와 말간 아크릴창 너머 가지런한

싱그러움이 있었다.

아침부터 여우비가 오고 있었는지라 햇살이 언뜻언뜻 내리쬐는 와중에도 부슬거리는 빗발. 안개가

자욱한 구릉들이 안온하게 감싸고 있는 녹색의 다원. 차라리 비가 조금 온 게 다행이다 싶었다. 사람 하나

마주치기 쉽지 않은 공간에 고즈넉한 공기가 차분하게 내려앉은 채 단단히 응결된 느낌.

카트를 타며 지나친 풍경들. 6만평이란 게 얼마나 넓은지 처음엔 와닿지 않더니, 좀 달리며 둘러보니까

비로소 실감이 간다. 산도 있고 나무도 있고 오르막내리막길도 있고 언덕도 있고 다원도 있고. 저런

흔들의자들이 띄엄띄엄 놓여있기도 하고. 참 많은 게 들어가는구나.

그야말로 '언덕 위의 하얀 집'이다. 빗물에 씻겨 더욱 싱싱하게 풀빛을 뿜어내는 녹차밭과 잔디밭 사이로

깜장돌이 차곡차곡 즈려박혔고, 돌이 이끄는대로 밟아 올라가면 도착하는 언덕 위의 하얀 집. 그리고 다희연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또다른 뷰포인트.

녹차밭만 있다기엔 중간중간 우거진 나무들도 있고, 늘씬하게 뻗은 채 그림처럼 서 있는 나무도 있었고,

아직은 전부 조성완료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자귀나무 동산이나 종가시나무로 조성한 미로 비스무레한 것도

있었다. 나뭇잎이 듬성듬성 가지끝에 성기게 매달린 게 종가시나무인 거 같던데, 아직 미로라기보다는 그냥

정신없이 우거진 종가시나무숲이란 느낌이었지만 조만간 정비되면 괜찮지 않을까. 녹차나무로 팔괘진을

만들었단 곳은 제법 잘 정비되어 있었고, 사진에 이쁘게 나오려면 조금 높이서 내려볼 수 있는 받침이나

사다리를 만들어두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조금 남았던 곳.


곶자왈, 제주도 여기저기에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 많다 했더니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였다.

'곶'은 숲, '자왈'은 자갈을 가리키는 제주도 사투리. 그러니까 자갈이 깔려있는 숲길이랄까. 제주도의 독특한

화산지형으로 생겨난 산책로인 셈인데, 비를 맞아 더욱 꺼뭇꺼뭇 구멍송송해진 현무암 틈새로 빼곡히 자리를

잡은 이끼들과 잘박거리며 발 아래에서 뒹구는 자갈들이 묘하게도 정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다지 길진

않았지만 온통 나무들이 빼곡하게 하늘을 가린 곶자왈 산책로를 걷고 다시 탁 트인 차밭으로 나오니

기분이 묘하다.

그렇게 곶자왈도 숨어있는 6만평의 너른 차밭을 샅샅이 수색하듯 전동카트로 헤집고 나서, 드디어 동굴의 다원

입장하기 직전. 거문오름에서 뻗어내린 여러 자락 중에서도 동굴계 자락 끄트머리에 자리한 덕분에 가능했던

거라고는 들었지만 대체 어떤 식이길래 동굴의 다원이라는 걸까 궁금하기도 했고, 녹차로 만든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크기도 했고.

생각보다 깊고, 크고, 넓은 동굴이 조금 이어지더니 불쑥 밝은 빛이 가득한 홀이 나왔다. 뭔가 물이 뚝뚝

떨어지고 흐릿한 조명에 조악한 테이블이 몇개 있으려니 했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고, 깔끔하고 나름

단정한 스타일의 인테리어를 갖춘 천장 높은 까페가 있었던 거다. 30만년전에 형성된 동굴이라더니, 그래서

저리도 넓고 큰가 싶었다.


녹차 아이스크림은 물론이고 녹차빙수, 녹차발효액에 각종 케잌과 빵류까지 제법 잘 갖춘 까페에서 잠시

앉아서 시원한 에어콘을 쐬면서 이것저것 맛도 보며 쉬다 보니 금세 땀이 식어버렸다.


돌아나오는 길, 들어가는 길이나 나오는 길이나 같은 길이었지만, 이런 경우 늘 신기한 건 들어갈 때 못 보았던

것들을 나오면서 새삼 발견하는 경우가 왕왕 있더라는 것. 내가 관찰력이 떨어지거나 주의가 산만해서인지도

모르지만, 저렇게 동굴 외길 한켠에 나란히 걸린 '사랑의 서약'은 왜 아까 못 봤을까.

녹차를 응용한 음식들을 파는 레스토랑도 있고 도자기만들기를 체험해볼 수 있는 전통도요도 있다고

하는데 뭐, 배는 고프지 않고 도자기는 익히 만들어보았으니 전부 스킵. 사전에 예약하면 녹차따기나

녹차팩만들기, 녹차비누만들기나 녹차장아찌, 녹차발효액만들기 체험도 해볼 수 있다고 한다. 조그만

아이들이랑 함께 제주도에 놀러간다면 한번쯤 체험을 해보는 것도 좋을 거 같지만, 머리 굵은 사람들끼리의

여행이라면 짙푸른 녹색의 다원에서 카트를 질주하곤 동굴까페에서 녹차 팥빙수 한그릇 흡입해주는 정도면

충분하지 싶다.



동생과 내가 각자 직장을 다니다 보니 부모님이랑 3박4일 가족여행을 맞춰 떠나기도 쉽지 않게

되어버렸다. 부모님과 동생은
3박4일, 난 마지막 하루 일정을 빠지고 2박3일만 함께 했던

오랜만의 가족여행이었다. 렌트카를 빌려서 돌아다니는 기동성있는 여행일정으로 참고삼아

제주시와 동부를 아우른 2박3일, 그리고 제주 서남부를 포함한 3박4일 스케줄을 기록.



첫째날. 한라산 등반


06:50 김포 출발

08:00 제주 도착 - 렌트카 픽업, 점심거리 구매

08:30 제주공항 출발

09:20 성판악 도착, 등산 시작

13:00 백록담 도착

13:30 백록담 출발
18:00 관음사 도착

19:00 숙소(제주시) 도착, 저녁식사

21:00 해안도로 까페촌



둘째날. 제주 동북부


08:30 숙소 출발

09:30 다희연 도착

12:00 산굼부리 도착


13:30 점심 (말고기)


14:30 제주미니랜드 도착


16:00 사려니숲길 도착 (불어난 계곡으로 인해 출입금지)

16:30 김녕미로공원 도착


18:30 삼양검은모래해변 도착


20:00 저녁 (붉은못허브팜 빅버거) take-out


20:30 숙소(제주시) 도착



셋째날. 제주 동부


07:30 숙소 출발

08:40 성산포항 도착

09:00 우도행  카페리 출발(15분 소요)

09:15 우도 - 우도봉, 우도등대공원, 서빈백사, 하고수동해수욕장, 비양도, 동안경굴


11:30 성산포행 카페리 출발(15분 소요)

11:45 성산포항 도착

13:00 제주시 진입, 점심 (전복뚝배기)

14:00 제주민속5일장 (2/7일 개장)


15:30 제주공항 도착




(남은 일정)


쇠소깍

쉬리의 언덕

내국인면세점(10-21시 운영)

숙소(모슬포) 도착, 저녁식사


* 넷째날. 제주 서남부

제주조각공원

화순해수욕장, 용머리해안

초콜렛박물관

생각하는 정원

유리의성

금능해수욕장-애월항 해안도로 드라이브






1일차 (인천-아오모리-고마키)


12:30 인천공항 출발
14:50 아오모리공항 도착

17:00 고마키, 핫쇼쿠센터 도착

18:30 고마키 아오모리야 호텔(일본 100대 온천호텔) IN

21:00 아오모리 남부 민요쇼(엔카, 쯔가루샤미센 연주 등)


 

2일차 (고마키-도와다-카즈노)

09:00 호텔 OUT


10:20 도와다, 오이라세계류 도착


12:00 점심
13:00 도와다호, 도와다신사, 소녀상 관람

15:00 카즈노, 히메노유 호텔 IN


18:00 만찬(일본 전통 카이세키요리)




3일차 (카즈노-쿠로이시-히로사키-시라카미-오와니)

08:40 호텔 OUT
10:00 쿠로이시, 네프타마을 도착 (쯔가루전승공예관, 코케시관)


12:00 점심
13:00 히로사키, 히로사키성 도착


15:00 시라카미, 시라카미산지(세계자연유산) 도착



18:00 오와니, 아오모리 로얄호텔 IN



4일차 (오와니-아오모리-인천)

09:30 호텔 OUT


10:20 아오모리, 산나이마루야마 공원 도착


12:00 점심
12:50 AEON 쇼핑센터 도착


14:30 아오모리공항 도착


16:40 아오모리공항 출발
19:20 인천공항 도착







 

모슬포항에서 출발하는 배는 마라도 아니면 가파도에 가 닿는다. 더러는 마라도를 지나 가파도에

닿기도 하고, 가파도를 지나 마라도에 닿기도 한다지만, 가파도로 바로 가는 직행 선박은 하루

서너차례쯤 있다고 한다. 9시, 11시, 14시에 모슬포행에서 출발.

빗발이 잘게 부서져 분무기에서 뿜어나오듯 사방으로 비산되는 궂은 날씨, 쾌속선 뒤의 스크류가

퍼올리는 바닷물 방울들까지 합쳐져 배 뒤는 온통 뿌연 안개다.

멀찍이 보이는 산방산. 신령이 한라산을 빚다가 너무 높다 싶어 산봉우리를 뽑아 내던져서 생겼다는

커다란 바위산이 불쑥 솟아서는 잿빛으로 케케한 풍경 너머 실루엣만 내밀었다.

가파도에 들어선 길. 채 20분이 걸렸나 싶을 정도로 짧은 코스였다. 날이 흐리고 파도가 높아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미처 걱정스런 마음을 채 펼치기도 전에 야트막한 바다를 건너 도착.

가파도는 '섬속의 섬', 제주 올레길 10-1코스다. 제주도를 따라 동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쭈욱

이어지는 긴 끈같은 올레길이 이어지는 와중, 우도니 가파도니, 옆으로 새어 나온 길은 '다시' 표시가

붙어서 가까운 올레길 번호로부터 갈라져나온다. 신기한 게 남쪽이 상동, 북쪽이 하동. 이 섬과

섬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바다를 바라보고 살았단 증거 아닐까.

올레길 10-1코스, 가파도 코스는 총 5킬로미터, 한두시간이면 주파할 거리지만 어차피 조그마한 섬,

올레길에 구애받지 않고 사방으로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한 세네시간 여유롭게 돌다보면 숨어있는

이쁘고 신기한 풍경들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비가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게 조금 에러.

가파도에 살고 있는 인구는 겨우 150명 내외, 고양이가 얼마나 똑똑한지 모르겠지만 어느 집에

누가 사는지는 전부 알만큼 조그마한 섬인 건 확실하다. 바다 넘어 어디론가 달려가는 배 한척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동도 않는 고양이 뒷모습이 맘을 건드렸다.


어서 오십시오, 가파도 올레길을 시작하는 길 앞머리에 그려진 포석은 그려진지 얼마 되지도 않은 거

같은데 벌써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날근날근해졌다. 그 옆으로는, 바람 많은 섬 제주도의 구멍 숭숭한

돌 현무암으로 괴어올린 구멍숭숭한 돌담을 시멘트 벽돌로 따라 만들어 놓은 거 같다.

원래 이게 정석 아닌가. 돌 많고 바람 많은 제주도의 돌담이라고 하면.

왜 그렇게 고양이가 많던지. 어쩜 가파도도 노인분들 밖에 남지 않아서 반려동물로 애지중지하며

키우고 있는 거 아닐까, 외로움을 달랠 벗삼아서. 그래서인지 고양이들 눈빛이 더욱 새초롬하다.

섬 외곽의 해안선을 따라 올레길이 조성되어 있긴 하지만, 조금만 화살표 벗어나 섬 안으로 들어가면

온통 미로같은 길이 꼬불꼬불하다. 의도치 않았겠지만 온통 까만색 현무암으로 구획된 채 사방으로

열리거나 닫혀있는, 더러 가정집 앞마당이나 뒷마당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하는 그 길이 재밌다.

가파도에 사람이 살 수 있었던 건, 역시 섬에서 마실 물을 구할 수 있어서였다고 한다. 풀떼기가 무성하게

자라난 저 웅덩이가 우물인지 아니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때는 우물 비슷한 거였지 않을까. 그리고

둥그스름하게 곡선을 그리며 쌓아올려진 돌담은, 왠지 똥돼지를 가둬놓고 기르면  딱 좋을 거 같은데.

저 쪽이 제주도. 자욱하게 피어오른 바다안개와 비구름 사이에 낀 채 겨우 봉오리만 봉긋 세운

산방산과 울룩불룩한 제주도의 실루엣이 보인다.

올레길을 조성하면서 섬 해안도로를 시멘트로 포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직 미처 다 완공되진 않았다고

옷이랑 신발 버린다며 딴 길로 가라고 알려주시던 가파도 주민 할머니, 맘 써주시는 게 고맙긴 했지만

조금 묘한 생각도 들었다.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은 자연 그대로의 길, 흙길을 더욱 반길 테지만 막상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흙길 대신 시멘트길을 당연히 더 반기는 거다.


'지방'에 대한 '서울' 사람들의 인식, '시골'에 대한 '도시' 사람들의 인식이 그렇다. 휴양지로서, 추억을

되새기고 재충전을 하기 위한 공간으로 이상화된 자연, 박제된 과거의 이미지가 유지되길 바라는 건

아닐까. 불편함을 감수하고 인간다움과 자연을 만끽하겠다는 건, 그게 일상이 아니라 잠시지간의

일탈, 혹은 여행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올레길이 유명해지며 자연이 파괴되고 인심이 황폐해진다는

걱정은 도시 사람들의 것, 올레길이 유명해지니 이제 좀 살길도 트이고 개발되어 좋다는 건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것 아닐지. 많이 거칠게 굳이 나눠보자면. 쉽지 않은 문제다.

깡총 솟아있는 한쌍의 쓰레기통이 귀여웠다. 금방이라도 저 철봉을 잡고 앞뒤로 흔들대다가 훌쩍

한바퀴 공중제비라도 넘을 거 같은 거다.

가파도를 걸으며 만난 꽃들, 거센 빗방울에 툭툭 꺾였다가도 힘내어 곧추서는 단단한 줄기에 매달려

말갛게 꽃잎을 씻어내고 있었다. 침침한 날씨에 꺼뭇한 돌틈 사이에 가려져서 원래 빛깔이 제대로

나오지 못한 꽃도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꽃도 있었고.


가파도 북쪽 끝단에 가까워질 무렵, 아까 길이 채 포장이 되지 않은 흙길이 있는데 비때문에 진창이

되어 있을 거라더니 여기 이야기였다. 온통 찐득한 진흙이 철퍽대는 길을 따라 걷다가 굵어진 빗발을

그을 겸 옆의 오두막 같은 곳으로 올라가 잠시 쉬었다. 알고 보니 여기가 가파도에서 일출을 보기

가장 좋은 해맞이 장소라던데, 저렇게 잿빛 파도가 출렁이는 너머에서 해가 뜬다면 굉장히 멋질 듯. 


가파도에서 봄에 열리는 축제가 하나 있는데, 청보리밭 축제라고 한다. 조그마한 섬이지만 중간중간

제법 커다란 손바닥만한 보리밭이 현무암 돌담으로 둘러쳐져 있었고, 아직 청보리를 수확하지

않은 건지 그 푸르름을 미루어 짐작함직한 '샘플'들이 남아있었던 것. 4,5월 쯤에 청보리가 지천에

틔워올랐을 때 다시 와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래도 뭐, 다른 계절에 왔다고 해도 저렇게 돌뿌리에

기대어 소담하게 피어난 꽃들도 보이고, 갑갑한 창고 속에서도 초록빛 싱싱한 풀떼기도 보이고.

이쪽 각도로 보면 날이 좋을 때 무려 6개나 되는 봉우리를 볼 수 있다는 안내가 있었지만, 날이

잔뜩 궂은 날에야 그런 풍경보다는 차라리 저 안내판이 더 눈이 갔다. 제주도를 상징하는 말의

형태를 본딴 게 틀림없는 파란색 철제 표지판. 제주도에 흔했을, 그래서 가파도에서 제법 흔했을

말과 소 같은 짐승들의 침범을 막기 위해 제주도의 무덤은 저렇게 돌담으로 네면을 모두 꽁꽁

싸매어놓는다고 한다.

마을의 안녕과 고기잡이의 성공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던 마을 제단이 있던 곳. 남자 9명이 제관으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제를 올렸다는 이곳은, 정확히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공간이다.

지금도 매해 정월쯤에 날을 잡고 제사를 올리고 있는데 벌써 그게 150여년의 전통을 만들었다는.

해안길을 따라 계속 걷는 길, 그래도 자그만 섬에 항구는 남북으로 두개나 있는 데다가 커다랗게

헬기장도 하나 지어져 있다. 뭐 이렇게 날씨가 궂은 날에는 파도도 높고 기상도 안 좋아서 바닷길이나

하늘길이나 둘다 위험하긴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특히나 긴급 후송환자가 있다거나 할 때 많이

도움이 되겠지 싶다.

비가 와서 그런가, 초록빛 식물들이 아주 극악스럽게 고개를 내민 것 같기도 하다. 깨어진 시멘트 길 

사이로 번개치듯 우르릉쿵쾅 내달리는 초록빛 새싹들하며, 해안가 옹벽을 잡아먹을 것처럼 두텁고

무섭게 흘러내리는 덩쿨들하며, 길가의 커다란 돌멩이 곳곳에 틈을 내어 뿌리를 뻗고 자라나는

끈질긴 녀석들까지.  


쉼없이 내리는 비, 우산을 접어버리고 우의를 걸친지 오래지만 맹렬히 내리는 비 앞에서는 전부

별무소용이지 싶다. 말하자면 이렇게 휑하니 뚫려있는 지붕 아래 서 있는 기분.

가파도수퍼를 필두로 해서 골목 곳곳에 이렇게 파랑색 벽화가 그려져 있는 거다. 이쪽 벽에서는

해녀가 자맥질을 하고 있는가 하면 저쪽 벽에서는 가파도의 마을 제단이 그려져 있기도 하고,

나무들이 꽃을 주렁주렁 매단 채 우뚝 서있기도 하고. 그렇게 화려하거나 그림 하나하나가

심오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벽들이 좌우로 늘어서 만들어진 골목길의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다. 가파도 깊숙이 들어서며 사방으로 번지는 골목길들이 모두 이런 식이니, 사방으로

헤매고 다니며 그림 구경을 해도 다리 아픈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문득 발견한 파란 하늘과 파란 청보리밭이 그려진 긴 벽면에 나있는 구멍 하나. 쥐구멍이라기엔

넘 높고, 무슨 호스같은 게 지나는 물받이 구멍이라기엔 넘 어정쩡한 위치. 뭔가 해서 가까이 다가가니

그 구멍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던 초록색 잎사귀들. 저 식물을 살리려고 구멍을 뚫어두진 않았겠지만

자꾸 그런 식으로 상상이 되는 거다. 벽을 세우려는데, 저기에 저 풀떼기 하나가 눈에 자꾸 밟혀서

그 부분만 저렇게 빼놓고 벽을 세운 건 아닐까, 그런 식으로.


저 커다란 꽃들, 한송이만으로도 푸짐한 느낌이 넘쳐나는 화려한 색감의 꽃들은 가운데에 하나씩

뽀얀 색 진주를 박아넣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담백한 돌담벼락에 기대어 손가락길이의 잎사귀를

피워내고 끝내 담벼락을 닮은 담백한 빛깔의 꽃봉오리까지 활짝 틔워낸 녀석도 대견하다.


벽화 작업을 언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초 가파도에 옹기종기 모여살던 집들도 바닷바람과 파도에

씻겨내린, 그런 자연스러움이랄까 분위기가 한껏 살아있다. 적당히 낡고 헤진 옷이 갖는 편안함같은.


가파도에도 고인돌 군락지가 있다길래 궁금해서 푯말을 따라갔더니, 글쎄, 아직 발굴조사 중인지라

뭐가 고인돌이고 뭐가 자연석인지 구분하기가 영 쉽지 않다. 그냥 맨들맨들하니 조금이라도 인간이

가공한 흔적이 남아있고 평평한 돌이 있으면 저게 고인돌 추정 돌멩이인가 하는 거고. 고인돌 찾으러

들어갔다가 게으른 청보리밭 한뼘 구경하고 돌아나왔다.


이제 슬슬 가파도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항구로 돌아나오는 길, 9시 배를 탔었고, 2시엔가 떠나는

배를 타겠다고 미리 표를 사뒀었던 거다. 일단 사고 나면 회항 시간은 못 바꾼다 했던가, 그래서 부러

여유있게 돌아보고 있었던 거기도 했다. 가파도 한가운데쯤 있는 건 초등학교. 놀이터가 잘 꾸며졌다.


항구에 가까워지니까 어라, 이런 좋은 길이 또 정비되어 있었단 말야, 싶도록 말끔한 산책로가 나왔다.

청보리밭 산책로라던가, 3,4월에 청보리밭 축제를 할 때 이 길을 거닐면 온통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청보리바다 한 가운데서 유영하는 느낌이 들 거 같다. 그리고 가파도를 지키고, 남해를 지키고 있는

해수관음상.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질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관음의 상이 남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동포구, 모슬포행 선착장에 거의 도착할 무렵 또다시 마주친 제주의 바다. 이 정도 섬 사이즈면 딱

내가 좋아라 하는 섬의 크기다. 빨리 걸어서 이십여분이면 섬의 끝에서 반대쪽 끝으로 가닿을 수 있는

크기, 그리고 섬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이 보일만한 크기. 그 정도 사이즈라야 이게 섬이구나, 온통

바다로 둘러싸인 채 외로운 땅덩이구나 할텐데, 사실 제주도는 섬인지 뭔지 잘 감이 안 오니까.

항구를 둘러싼 채 두툼한 가랑이를 한껏 찢어벌린 방파제들이 흠뻑 젖었다. 빗물에 젖은 건지, 아니면

바닷물에 젖은 건지, 그렇게 조금씩 헐어가며 차갑게 반들거리던 시멘트 껍데기는 자갈과 모래가 섞인

뼈다귀를 드러낼 거다. 다음번에 조금더 헐어있는 방파제를 밟고 올라설 때엔, 눈위로 뜨거운 햇살이

쨍쨍 내리쬐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어김없이 정시에 가파도를 떠난 배는 불과 이십여분만에 다시금 제주의 모슬포항에 사람들을

부려놓았다. 섬 속의 섬, 이라는 표현이 딱 와닿았다. 서울이나 다른 '육지', '본토'에서 제주도로

넘어온 사람들에겐 제주도 자체가 섬이란 감각이 생경하다지만, 막상 또 제주도에서 가파도로

들어오니 이게 진짜 섬같다는 느낌이 확연한 거다. 모슬포항에 도착하니 왠지 발딛고 선 땅덩이가

커진 만큼 가슴도 넓어지는 거 같고, 좀더 세상이 커다랗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모슬포항 앞,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로 배를 가득 채운 '만선'의 꿈이 뭔가 어촌의 정취가 느껴지면서도

여유롭고 뿌듯한 삶을 바라는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 느껴지는 단어라면, 그 뒤로 보이는 단어는 훨씬

강렬하고 직설적이다. '돈방석'이라니. 굉장히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욕망을 드러내는.

내가 꼭 저 만선식당에서 먹었던 고등어회가 정말정말 맛있어서만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가뜩이나

신선도가 금방 떨어져서 회치기가 힘들다는 고등어, 왠지 비릴 거 같기도 한 그 생선회를 구운 김에

싸서 깨소금과 참기름으로 비빈 밥과 함께 먹으면. 캬아..제주도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인상에 남는.

바다에 비가 내리는 걸 보노라면 뭔가 망연해진다. 비가 오는 날 회를 먹지 말라던 건, 비싼 회를 조르는

아이들의 입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던 어른들의 궁여지책 같은 거 아니었을까. 배고프다.

제주도답게, 구멍이 송송하고 반들반들한 현무암스러운 돌멩이로 냅킨을 눌러둔 까페에 앉아

책도 들척이고, 노래도 듣고. 그러고 있으면 참 좋았다. 어딘가로부터 어딘가로 걸었던 길 끝에서,

혹은 어딘가로 떠나기 전 길을 앞에 두고, 쿠션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포실포실한 쿠션을 꼬옥

끌어안고는 잠시 몸을 부려두는 거. 그리고 여력이 된다면 다시 책 속이나 멜로디 속으로 떠나는 거.

더구나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씨라면.

모슬포항 주변에도 이런저런 벽화가 그려져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저 해녀 사진.

몸의 동작이나 모양새 자체가 바다 속이라는 느낌이 가득하도록, 살짝 흐느적거리거나 유영하는 듯하다.

무중력 상태에서 자유롭게 몸을 운신하며 바다 밑 해산물들을 채취하는 그네들의 생활이 꼭 저럴 거 같다.


이렇게 며칠째 비가 내리는 날에는 바다 밖의 사람들도 저렇게 둥둥 유영해다니는 거 같다. 길거리를

부유하는 우산들도 그렇지만, 뭐 하나에 마음이 집중되지 못하는 정신상태 역시.









제주 모슬포항 근처를 밤늦게 어슬렁대다가 만난 간판. 수음?

제주산 흑돼지고기를 파는 '수눌음'이란 음식점 간판에 가운데 '눌'자 불이 꺼져있었던 거다.

5,60년대 한국문학에서 적잖이 사용되던 그 단어, 뭔가 고풍스러우면서도 은밀한 뉘앙스를 가진.

네이버에 물었더니 비슷한 말까지 우르르, 한자로 풀리니까 더욱 뜻이 선명하다. 손수手에 음란할음淫.

손으로 하는 '음란한 짓'이랄까. 그렇지만 뭐, 자연스런 욕망의 발현을 굳이 음란하다느니 따위로 색안경

끼고 볼 일은 아닌 거 같다.


그래서, 여하간, 제주흑돼지 파는 집 간판에서 '수음'이란 단어를 떠올리고 말았다는 이야기.



커다란 컨테이너가 흙바닥을 찍어누르듯 자리잡고서 오랜 시간이 지났나보다. 온통 붉은 녹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컨테이너 철판껍데기에는 햇빛 알레르기처럼 자잘한 물집이 빈틈없이 잡혀 있었다.

흉흉하고 살벌해보이는 그 두껍고 우왁스러워보이는 컨테이너차벽, 그런데 그 벽면에 바싹 기대어선

노랗고 하얀 꽃들을 피워내는 들풀들이 있었다. 햇볕도 가리우고, 철이 부식되고 페인트가 떨어져

나오며 참 많이 방해받았을 텐데, 기어이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 제주, 가파도.


이런 거 왜 계속 방치해두고 있나 모르겠다. 아예 저렇게 철판이 다 썩어서 산산이 부서질 때까지

방치할 생각인 걸까. 가파도의 풍광은 아름다웠지만, 시멘트를 때려부어 만든 길은 편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했고, 그 와중에 이 녹슨 컨테이너 박스가 가시처럼 박혔다.






제주도에 비행기를 타고 내려서 가장 멀게 느껴지는 곳은 어디일까. 좌우로 길쭉하게 생긴 제주도의

모양새를 보자면 제주시에서 한라산을 넘어 바로 접근가능한 서귀포는 차라리 가깝다고 말해야 할 거

같고, 동쪽의 성산이니 섭지코지쪽도 딱히 멀다고 하기는 애매하다. 가장 먼 곳은 아무래도 마라도,

가파도로 향하는 배가 뜨는 모슬포쪽 아닐까. 제주도 서남쪽, 올레길 10코스가 있는 곳이다.

화순에서부터 시작하는 올레길 10코스, 제주도의 변덕스런 날씨 탓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드문드문 빗발이 날리는 날씨였지만, 멀찍이 커다란 바윗덩이같은 산방산이 흔들림없이

섰다. 궂은 날씨에도 밭에 나와 일하고 계신 분은 이제 신경쓰지 않을 그 풍경, 산방산을

오른쪽에 끼고 계속 제주도 남서해안길을 따라 걷는 게 10코스의 매력이다.

젖은 날개를 쉬러 잠시 꽃들에 내려앉은 배추흰나비들. 금방이라도 쏴아 비가 쏟아부어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다 보니까,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빗물에 씻겨서 거의 형광색에

가깝도록 강렬하고 선명하게 빛깔을 내뿜는 꽃들 옆에 쪼그리곤 이리저리 구경.


제주도에 출장으로도 오고, 여행으로도 오고, 혼자도 오고, 가족이랑도 오고, 어떻든 올 때마다

주변에서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돌 많고 여자 많고 바람 많다니 조심하라는. 바람 구멍 숭숭난

깜장 현무암 돌담 옆을 우르르 걷는 여자들의 그림이 그럼 제주도의 단적인 이미지일까.

여자들 대신 보이는 건 농사일이나 장사일로 고단하신 어르신들이다. 제주도의 지역소주는

한라산, 그렇지만 맥주는 뭍이나 여기나 똑같다. 카스, 하이트, 맥스..관련 법규정이 워낙

대량생산이 가능한 대기업 위주로, 빡빡하게 되어있어 그렇다던데 지역 맥주를 만드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제주도의 맑은 물로 빚은 맥주라면.

화순 금모래해변가로 바싹 내려가는 길에서부터 본격 올레길 시작. 음..그치만 사실 길에 시작이

어디 있고 끝이 어디 있나. 올레길로 구간구간 끊겨있긴 하지만, 어디서고 올레길에 들어서서

또다시 어디서고 내키는대로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유랄까. 올레길이 불어온 걷기열풍이니

'자기를 찾는 도보여행'이니 따위의 말의 성찬에 걸맞는 사용법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파도에 씻긴 어두운 암갈색의 바윗덩이 해변.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진 듯한 해변가에 셀수없이

들이치고 빠져나갔을 물결무늬가 그대로 새겨진 기암괴석들. 짙은 안개인지 구름이 끼어 정상부

절반쯤이 뚝 잘려나간 산방산이 계속 눈앞이다.


날이 잔뜩 찌푸린 거 치고는 잔잔한 바다다, 싶었는데 어느결에 조그마한 복어 한마리를 뱉었다.

점점이 흰 알맹이가 박힌 검정모래사장 위에 뉘인 하얀 배의 복어새끼, 그 거무스름한 등판에도

점점이 하얀 얼룩이 박혀있었다.

화순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이 끝나고 슬쩍 언덕 위로 올라가는 길을 따랐다. 짙고 검은 바위들을

질식시킬 듯이 빼곡히 들어찬 녹색 풀떼기들이 검고 딱딱하고 까칠한 그것들을 바다로, 바다로

밀어내는 것만 같다. 녹색생명과 암석생명간의 전면전이랄까.

문득 언덕길 아래로 한뼘만한 모래사장이 나타났다. 삼면이 까만 바위로 둘러쳐진 채, 자동차 두어대만

대면 꽉 찰 것 같은 공간에 제주도에서는 보기 힘들것 같은 황금빛 모래가 곱게 쌓여있는 비밀의 공간.

아까는 뾰족뾰족, 파도에 벼려진 칼날같은 바윗덩이들 사이로 걷는 게 곧 길이더니, 이번엔

파도에 씻겨서 둥글둥글해진 해변가 올레길이다. 뾰족하고 동글하고, 그걸 모두 파도 핑계로만

돌리는 건 얼마나 비겁한가. 나는 잘하는데 상대가, 다른 사람들이, 세상이 잘 못한다는 말은

대개 핑계이기 마련. 내 단단함과 심지를 먼저 살필 일이다.

'썩은 동앗줄', 누군가의 배를 항구에 비끄러매었을, 혹은 누군가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었을,

아니면 하다못해 그물망이라도 잡아놓고 있었을 그런 나이롱끈이 깡충하게 짧아진 채 해안가

모래톱 위에서 가늘고 야윈 몸을 뒤채고 있었다.

딱딱한 바위판, 두터운 각질처럼 해변가를 덮고 있는 길은 군데군데 여린 곳이 파이고 깨어져

물이 제법 깊은 곳도 있고 얕은 곳도 있고, 곳곳이 웅덩이였다. 테이블처럼 깍아지른 바위판에

파도가 밀려오니 철썩철썩 극적으로 하얗게 부서져내리기도 하고.

용머리 해안으로 접어드는 길. 올레길 표지가 언제 저렇게 쌈빡하게 바뀌었을까. 해안을 따라 걷던

좁은 길이 확 트이며 숲사이로 이어지는 즈음, 흙바닥은 톱밥이 깔린 듯 폭신폭신.

'산방연대'가 뭔가 했다. 산방산에 있는 연대, 그러니까 연기를 피워올리는 봉화대를 말하는 거다.

조선시대에 변경 최일선에 설치한 시설물로, 둘레에는 참호를 파고 대 위에는 각종 병기와 생필품을

간수하는 창고 역할도 했다고 한다. 저렇게 말끔하게 잘 보존이 되어있나 했더니, 최근에 보수한

거라고. 안에 불을 지펴 연기를 피워올려야 할 곳에는 잡초만 듬성듬성. 조선시대라면 평화로운

때로구나, 하겠지만 이미 봉화대는 퇴역한지 오래, 평화와는 거리가 먼 삼엄한 시절이다.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표류한 곳이 바로 여기란다. 용머리해안. 용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는 이곳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간직한 곳이라 하여 중국의 누군가 와서 이곳에 칼을 꼽았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라고 했다. 칼을 꼽자 천지를 진동하는 비명소리가 번졌다던가. 하멜은

그런 전설이 서린 이곳에 처음 당도했을 때 저런 풍경을 봤을 거다. 그러고 보면, 올레길 10코스를

걷는단 건 당시 하멜이 봤던 풍경을 따라 걷는 길은 아닐까. 조난당하고, 근처를 배회하고, 혹은

조선의 병사들에게 압송되거나 민간인들에게 길안내를 받거나. 그렇게 걸었던 길 아닐까.

하멜 동상과 하멜이 타고온 범선이 놓인 한 옆에는 네덜란드문화체험관이 조그맣게 서있었다.

네덜란드의 나막신들을 직접 신어볼 수도 있고, (좀 뜬금없지만) 히딩크 생가나 캐리커쳐도 있고,

풍차니 튤립이니 모양을 딴 장식품들도 전시되어 있고. 풍차의 날개를 돌려 운수를 보라더니

'좋은 사람을 만나니 마음가는대로 행동하라'랜다.

산방산자락을 끼고 계속 가는 길, 올레길이 설마 산방산 위까지 올라가나 했는데 그런 건 아니고

우회하는 길이라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검푸르딩딩한 바다가 잔뜩 찌푸린채 빗발을 날리는

하늘이랑 섞여들어버렸다. 그나마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표지하는 건 길게 늘어진 섬하나.


파도에 씻기고 쓸려서 오랜 옛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 모습이 되어 있는 해안가 바위들, 녹조류가

이끼처럼 온통 돋아난 모습이 신기하다. 암석의 때로 격하고 때로 부드러운 굴곡이 리드미컬한

가운데 부드러운 녹색 이끼가 빼곡하니 융단처럼 내려앉아 더욱 보드라운 느낌을 던져준다.

검정 모래사장 위에 떠밀려온 미역 비스무레한 해초류 동가리. 쪼글쪼글한 잎새 모양이 변기

청소하는 솔 같기도 하고. 굉장히 탱글탱글하고 두툼하니, 맛있어 보이기도 하고.

해안에 바로 붙어서 걷는 길은 이제 좀 뜸하려나, 해안도로의 아스팔트 위로 올라섰다. 오래지않아

나타난 조그만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는, 잠시 길가 벤치에 앉아 쉬는 중에 발견한

누군가의 호루라기. 대형버스들이 줄지어 서있던 이 곳이 마라도 잠수함타는 곳이라던가. 어느

부산한 가이드가 흘리고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멀리 형제섬이 보이는 바닷가. 바닷물이 들고 남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섬의 크기나 갯수가

달라진다는 형제섬을 흘낏거리며 걷는 와중에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려진 사람들의 소원도 만나고,

무슨 십장생도의 영지버섯처럼 자라난 풀떼기들도 만나고, 형제섬 앞으로 달리는 유람선도 만나고.

좀 가다 보니 나타나는 송악산 자락. 송악산은 제주도의 오름(기생화산) 중 남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인데, 제일 먼저 마주한 건 산자락에 뽕뽕 뚫린 구멍들. 일제시대에 여기에

대공포 요새를 만들었다나, 굴을 파고 포들을 숨겨놓았다 한다. 일반인의 접근은 통제된 채

그저 먼 발치에서만 볼 수 있는 뽕뽕뽕 구멍들.

그리고 송악산 중턱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 가만히 네다리로 버티고 선 채 잠을 자는 듯

미동도 않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사이좋게 서로 몸을 바싹 붙인 채 풀도 뜯고 꼬리를 휘둘러

파리도 쫓는 (아마도) 부모자식간의 말 두마리도 있었다. 그리고 올레길 10코스 처음부터

우릴 따라 내달려온 저 말모양의 표지판도.


송악산 정상, 성산일출봉만은 못하지만 그만큼 거대하게 푸욱 꺼진 분화구는 한눈에 채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리저리 고개를 휘휘 돌려야 크레이터의 끝에서 끝까지, 그리고 위에서 아래까지 시선으로

거칠게나마 훑어볼 수 있었던 것. 그 풀떼기들과 돌무더기들의 거친 질감과 거리감을 담기엔

카메라가 너무 가까웠다. 가뜩이나 황량한 풍경, 불쑥 코앞에 닥친 거대한 크레이터 때문에 더욱

막막해지고 말았는지도 모르겠다.

올레길이 만들어진지도 이제 꽤 되었나. 파랑 페인트로 그려진 화살표가 놓인 돌이 쪼개지고 그 틈으로

풀씨가 새어들어가선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화살표를 뚝 끊어먹었다. 애초 돌부터 쪼개져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화살표를 따른 오솔길 옆으로 말들이 슬몃슬몃 숨어있는 풍경이

희끄무레한 안개에 휘감겨 있었다.


아까까지는 돌무더기가 거칠거칠하거나 모래밭에 발이 푹푹 빠지는 해변가를 걸어서 힘들다 싶더니

어느결에 오르락내리락거리는 호젓한 산길 위로 걷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더구나 저 좁은 길 위로

폭탄처럼 투하되어 있는 말똥들의 향연이라니. 한발 한발, 지뢰를 밟을지도 모른다는 텐션 가득한

순간들. 그 덕에 주변 풍경을 여유롭게 보기보다는 발끝만 바라봐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빗물에

씻긴 풀꽃들이라거나 나무를 칭칭 감은 채 하얗게 변색된 덩굴 따위, 눈에 콕콕 박혔다.

말들이 돌아다니는 걸 막으려 했나보다. 제법 넓은 길이 나타났다 했더니, 어느 틈에 저런 울타리가

길 앞을 가로막았다. 숲까지도 길게 이어져있는 엉성한 울타리, 사람들은 저 옆에 한번 꺽여있는

좁은 창구로 이동해야 한다. 말을 막고 사람은 걸러내는 그런 신기한 울타리.

그렇게 울타리를 넘고 나니 또다른 말들이 나타났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뒷배경이 모두

날아가버린 어느 언덕 위에, 미끄럼틀처럼 고개를 드리우고 풀을 뜯는 어미말 옆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며 이방인들을 경계하는 망아지 한마리. 아니 근데, 말에 접근하지

말라면서 어떻게 올레길 표지는 말 옆에 저리도 바싹 묶어둘 수가 있나 말이다.

그리고 또다시 나타난 말들, 그보다 먼저 눈에 띈 건 푹 꺼진 땅에 구축된 콘크리트 구조물.

말들이 느긋하게 늘어져서 풀을 우물거리는 정경은 분명 평화로워야 함에도 왠지 모를

서늘함과 살벌함이 느껴지는 건 저 구조물 때문이었다. 뭔고 하니, 일제시대 이 근처에

만들어진 '알뜨르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한 방공포진지였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기지로 삼고자 군사시설을 부랴부랴 확충하던 시기 건축하던 것으로 5기 중

하나는 미처 완공도 못한 상태였다니,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군사시설이 조선이 해방되는 순간을

그대로 멈춘 채 증거하는 셈이다.

흡사 정글 트레킹을 하는 기분. 어느덧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비는 가방과 옷을 흠뻑 적시곤

삶의 무게를 한껏 더해주었고, 물방울을 머금어 축축 처진 잎사귀들이 시야를 가리고 길을

감추기에 이르렀다. 날이 맑았다면 온통 새까맣게 타버리고 목도 금방 말라버리고, 여러모로

그것도 쉽진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끈덕진 가랑비도 쉽진 않단 말이다. 온통 희뿌옇게

'밥안개'가 내려앉은 제주도의 시골 풍경, 대충 16킬로미터에 이르는 올레길 10코스가 끝물에

다다른 참이어서, 조금 더 비를 맞으며 걷기로 했다.


예기치 않게 눈앞에 저런 시멘트 구조물이 나타나서 조금 놀랬다. 그리고 조금 지나 나타난 텅빈

주차장과 단발 비행기의 앙상한 얼개까지. 사람 하나 얼씬대지 않는 곳에 이런 것들이라니. 더욱

을씨년스럽고 추적추적 청승맞은 느낌이다. 알고보니 그 '알뜨르 비행장'과 관련된 시설들,

시멘트 구조물은 비행기 격납고, 주차장은 인근 양민학살장과 비행장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시설.

아직도 남아있는 청보리밭이 조금. 청보리축제는 이미 3,4월에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

수확을 하지 않은 밭이 조금 남아있었던 거 같다. 상큼하고 건강한 보릿대가 위로 뻗어올라가면서

초록빛을 쭉쭉 짜올리다가 급기야 가늘고 보드라운 붓털같은 끄트머리에서 팡, 공기중으로

퍼뜨려 버리는 느낌. 바람이 불지 않으면 저 보리밭 위로 연두빛 구름이 곱게 뭉쳐있을 것만

같은데, 바람이 슬슬 일렁이며 초록빛 기운을 온통 흐트려버렸다.

그렇게 10코스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빗발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고, 흙길엔 온통 물구덩이가

패여서 발이 푹푹 빠지는 열악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10코스를 첨부터 끝까지 걷는데

5시간에서 6시간내외로 걸린다고 보면 될 듯.


아마도 청보리가 가득 차 있던 밭이 아니었을까. 양쪽으로 시꺼먼 흙, 굉장히 비옥해 보이는

흙이 잘 다독거려진 채 빗발을 흔적없이 빨아들였다. 그 사이로 난 곧고도 좁은 길 하나가

하모해수욕장, 모슬포항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고인돌의 나라, 강화도(고인돌의 나라, 강화를 재발견하다.)에서 올해로 벌써 14회째를 맞이한

축제가 있다. 다른 지자체들의 축제가 부침을 거듭할 때에도 흔들림없이 계속되어온 이 축제의

이름은 "강화고인돌문화축제", 아무래도 강화도를 대표할 뿐 아니라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에 이른 고인돌을 앞장세운 게 톡톡히 제 역할을 했지 싶다.


이틀동안 축제가 벌어지는 곳은 생각보다 너른 섬 강화도의 중앙쯤 위치한 고인돌광장,

강화도 지석묘를 둘러싸고 있는 초록잔디밭 광장 위로 특이한 형태의 연들이 줄지어

꼬리를 퍼덕이고 있었다. 올해의 경우 6월 11일(토)부터 12일(일)까지 이틀 열렸는데

광장을 꽉 채워 고인돌 행사장, 체험장, 사진전시장, 전통체험관, 먹거리장터들이 늘어섰다.



ㅇ 고인돌 축조 재현하기

무엇보다 눈을 사로잡았던 건 역시 고인돌을 쌓아올리는 모습을 직접 재현하는 모습이었다.

부족을 통솔하던 부족장이 죽자 하늘이 내려앉은 듯 탄식하며 비통해하는 원시인들의 모습,

그리고 커다란 덮개돌을 덩굴같은 줄로 단단히 묶어서는 흙으로 비탈을 만든 바닥돌 위로

힘을 합쳐 끌어올리는 모습, 재현 중에서는 열명 남짓한 원시인들이 힘을 합쳤지만 실제론

수백명에 달하는 인력이 동원되었을 거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건 실제보다는 상당히 축약된 무게와 규모로 재현된 미니어처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재현행사를 준비하는 스탭들이 저 커다란 덮개돌을 가뿐하게 들어올리는

모습을 얼핏 보았던 거 같기도 하다. 스티로폼으로 만들었으려나, 그렇지만 그걸 저렇게

리얼한 표정과 액션으로 소화해내며 재현 행사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원시인 여러분들의 연기력에 박수를 보낼만 했다. 

 

구경하던 사람들까지 모두 불러내어 으쌰으쌰, 덮개돌을 바닥돌 위에 확실히 얹어놓고나서는

두 손을 번쩍 치켜올리며 고인돌이 완성된 것을 축하하는 원시인들. 바퀴 역할을 하며 바닥에서

뒹굴었던 나무통과 비탈을 만들어 주었던 흙만 치워내면 이곳 강화도에 이미 존재하는 140여기의

고인돌에 하나가 더해지는 셈이다.

고인돌축제의 개막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인돌 축조과정을 재현하는 원시인들의 기합소리와

함께, 칠선녀들의 공연과 함께. 고인돌광장과 바로 붙어있는 강화역사박물관에 마네킹으로 전시된

선녀들의 복장이나 장신구는 완전히 똑같았던 그녀들은, 그렇지만 훨씬 뛰어난 미모와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칠선녀는 과거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단군이 하늘에 제를 지낼때 일곱선녀가 옆에서 제를

도왔다던 고사로부터 등장하는데, 전국체전의 성화를 매년 새롭게 뽑히는 칠선녀들이 참성단에서

채화하고 있기도 하다고. 그리고 그녀들은 1956년 이래 강화여고에서 뽑혀왔다고 하니, '그녀들'이라

칭하기보다는 그 아이들, 이라는 표현이 낫겠다.


ㅇ 원시인의 일상 체험하기

이리저리 고인돌광장을 떠돌며 행사도 구경하고 체험관들도 구경하던 와중에 만난 꼬맹이들.

고인돌을 둘러싼 울타리에 기대앉아선 조금 쉬어가려는 듯 옥수수로 하모니카를 불고 있더니

카메라를 보자 불쑥 장난끼가 발동한 듯 옥수수랑 돌도끼를 양손에 쥐고는 흔들어준다.

원시인들이 다들 저런 레오파드 무늬가 뚜렷한 가죽옷을 입고 다녔을지는 상당히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벌거벗고 다니거나 잎사귀 한두장으로 코스프레를 하기엔

너무 전위적인 느낌이니까 원시인들은 모두들 표범 한두마리쯤 쉽사리 때려잡았을 거라

호의적으로 생각하기로 하자. 호피무늬 원시인 복장을 머릿수건까지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돌도끼나 단검을 꼬나쥐고 나니까 다들 신났다. 거울 앞에서 요리보고 조리보고.

그렇다고 다들 폭력적으로 변한 건 아니었다. 돌판과 돌확을 이용해서 낟알의 껍질을 까고 있는

진지한 표정의 아이의 손끝이 신중했다. 돌확은 원시인들이 곡식을 떨어내고 껍질을 제거하던

작업을 돕기 위한 도구인데, 저 정도로 원시적이어서야 손으로 하나씩 까는 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에 불과하지 않으려나 싶다. 하긴 워낙 발전속도가 빨랐으니, 수천년 전의 인류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터에 직접 '인간 탈곡기'가 되어 체험하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몇몇 시대를 구분짓고 공간을 구분지을 지표가 되어주는 토기들을 갖고 아이들에게

열심히 그 특징과 정보를 알려주고 계신 아저씨. 이 토기에 그려진 무늬는 빗살무늬라고 하는데

주로 곡식의 낟알등을 담아두었고 바닥이 뾰족한 건 땅에 묻어두었으리라 추측하는 근거가

된다 운운, 이야기를 듣는 아이의 자세가 제법 의젓해서 보기만해도 흐뭇했다.

사냥감을 사냥해보는 체험, 이랄까. 새총들이 줄줄이 늘어선 가운데 꼬맹이들이 있는 힘껏

노랑 고무줄을 당겨서는 표적을 노리고 있었다. 공룡이 그려진 표적지를 보며 다시금 궁금해진 건,

인류의 조상인 원시인들이 공룡과 겹쳤던 적이 정말 없었을까. 일반적으로는 인류와 공룡은

서로 시기가 겹치지 않는다고 하지만, '고인돌 빠삐코'니 뭐니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 원시인들은

늘 공룡들과 함께 노닌다.


ㅇ 강화도 문화 체험하기

강화도의 특산품, 하면 화문석. 어쩔 수 없는 암기식 교육의 부산물이다. 이름만 익히 듣고 외웠지

그게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여태껏 블랙박스 안에 숨겨져 있었던 게 사실.

옆에서 하나씩 가르쳐주는 선생님 옆에서 입을 꼭 다문 채 화문석 만들기에 몰입해 있는 아이도

아이지만, 그 손놀림을 유심히 바라보며 대체 어떻게 저렇게 이어지고 묶이는 걸까 호기심에

가득찬 구경꾼들의 표정도 못지 않았다. 시간만 있다면 털썩 천막에 앉아서는 선생님한테

배워가며 직접 한땀한땀 정성으로 매만진 화문석 한장을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강화도에 많이 나는 약쑥으로 비누도 만들어보고, 상큼한 형광색 꼬리를 달고 있는 화살을

던져넣는 투호도 하고, 그렇게 몇걸음 채 걷지 못하고 무언가 직접 손목 걷어부치고 만들거나

경험해보거나 그렇게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함께 즐길 거리들이 제법 솔찮았다. 아이가 탄

유모차를 끌고, 혹은 걷는 아이 손을 꼭 붙들고 온 부모들에겐 꽤나 수월한 나들이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천연염색을 체험할 수 있는 부스를 포함해서, 고인돌마을 족장 체험, 도자기 만들기 체험,

연날리기 체험, 무형문화재 제14호 단청그리기 체험, 다도체험 등등 고인돌을 만들던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살던 인류가 축적해온 유무형의 독특한 문화유산들을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 넓게 열려있었다. 이정도면 굳이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라는 단어를 동원해

교육과 놀이가 혼합되어있음을 강조한 주최 측에 수고했노라, 박수를 쳐줄 만 하다.


ㅇ다양하게 즐기기

강화고인돌문화축제를 즐기러 와서 찍은 사진 중에서 맘에 드는 사진은 즉석에서 인화해서

콘테스트에 응모할 수 있다나, 이미 응모된 사진들을 하나씩 살펴보니 다들 욕심이 그득하다.

일등해서 상품가져갈려는 의욕이 넘치는지 사진들이 다들 범상치 않았달까.

원시인 복장을 챙기고 돌도끼를 들지는 않더라도, 뺨이든 손등이든 뭔가 고인돌축제에 어울릴

페인팅을 하나 하고 나면 뭔가 축제를 즐길 준비가 된 느낌인 거다. 특히나 아이들이 엄마손

잡고서 길게 늘어선 그 줄을 슬쩍 지나치고 나니 또 다른 긴 줄이 나타난다. 삐에로 아저씨가

풍선으로 강아지를 만들어주는 건, 정말 어디서나 아이들을 모으는 최고의 방법인 듯.

그 와중에 바쁘게 돌아가는 먹거리장터와 행사장 주변 스탭들의 발놀림. 축제의 분위기를

돋우는 건 심장 박동을 따라 노니는 풍물의 흥겨운 장단과 함께, 빤짝거리는 새틴 재질의

'가죽옷'을 입은 '원시인'이 어색한 옷차림에 불편해하면서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행사가

잘 되도록 움직이고 있는 모습인 거다.
 

공연도 이틀동안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짜여있었다. CBS에서 녹음방송을 하는가 하면, 마야가

초청가수로 와서 노래를 부르고, 평양예술단이니 인천시무형문화재협회 공연이니, 심지어는

웃찾사 공연팀이 와서 개그공연까지 하도록 스케줄이 짜여있었다. 나름 강화군 차원에서 심혈을

쏟아붓는 행사라는 게 빈말은 아닌 거 같다.


굉장히 흥미로웠지만 조금 아쉬웠던 건 '에어바운스' 축하비행이었다. 등뒤에 커다란 프로펠러를

메고서는 그 힘으로 날아올라 낙하산에 의지하여 두둥실 떠다니는 것, 처음에 굉장히 커다란

선풍기 소리가 날 때만 해도 설마 저게 날겠어 싶었는데 정말 훌쩍 떠오르더라는. 아쉬웠던 건

바람이 너무 쎄서 비행에 성공하기까지 어려움이 좀 많았고, 그나마 떠올랐던 것도 생각보다

일찍 내려온 거 같았다. 그치만 정말, 저렇게도 날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줬달까.

그 옆의 역사박물관에서는 축제 기간에 맞추어 인천무형문화재 기능장들의 특별전을 열고

있었다. 대금, 단소 같은 전통악기나 화문석, 도자기나 전통의상 등이 강화역사박물관 1층의

로비에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었으니, 잠깐 더위도 식힐 겸 에어콘 바람도 쐴 겸 들어가서

휘 둘러보기에 딱 좋았던 거 같다.  

 

2011년 강화 고인돌문화축제는 여러모로 좋은 계기가 되었던 거 같다. 강화도에 있다고만 들었던,

실물을 제대로 보거나 체험해본 적은 없는 고인돌이니 화문석이니 그런 것들에 대해서 작정하고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고, 축제 자체도 '고인돌'이라는 뚜렷한 아이템을 가지고 특색있게 잘

꾸며놓아 중구난방식의 여느 지방 축제와는 격을 달리 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강화 고인돌광장 인근으로 산재해 있는 고인돌군을 돌아보기에도 좋은 위치라는 점,

그리고 강화도도 제주도나 다른 곳들처럼 트레킹 코스를 사방으로 개발하고 있으니만치 더욱

즐길 것이 많아졌다는 점도 축제에 맞추어 강화도를 향해 발걸음을 쉽게 떼도록 이끈다.








제주도 모슬포항에서 배를 타고 가파도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저 털뭉치였다.

흐릿한 하늘 아래 황토빛 털복숭이가 하나, 해안가의 시꺼먼 현무암 돌담 위에서 바다로

나서는 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던 거다. 귀를 쫑긋 세우고는 등을 둥글게 말아올린

고양이가 배웅이라도 하듯,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먼바다로 나서는 배에 붙박혀있었다.
 

배가 멀찍이 나아가며 점점 나아가는 걸 확인하고야 귀찮다는 듯 슬쩍 몸을 돌려 카메라를

바라봤다. 뭐야, 배웅하는데 왜 방해하고 그래, 라는 투다. 배에 녀석의 친구나 주인이 타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님 누군가가 배를 타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바다를, 배를

바라보고 꼼짝없이 앉았는 고양이 한 마리가 온갖 드라마를 불러온다.

가파도엔 왜 이리 고양이가 많아, 싶어지도록 몇걸음 채 걷기도 전에 다시 발견한 이쁜 고양이.

현무암 돌무더기에 살짝 가려진 몸을 빙글 돌리고는 얼추 반쯤 가려진 얼굴로 이쪽을 초롱초롱

바라보고 있었다. 선명히 드러난 한쪽눈의 모양새라거나 얼룩덜룩한 무늬가 호랑이같은 몸의

실루엣이라거나, 뒷배경으로 당당히 서있는 싱싱한 풀떼기의 위풍당당함이라거나.

잠깐 그렇게 포토세션을 갖고는 이내 가르릉대며 몸을 피해버리는 도도한 녀석. 뭐, 그래도

저렇게 멋진 포즈를 잡아주었으니 그걸 제대로 포착하고 못하고는 찍는 사람의 문제인 거다.

이제 여기저기서 고양이가 툭툭 튀어나와도 놀라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달까. 가파도의

해안길을 따라 둘려진 바람숭숭 돌담 위에서도 고양이 한마리를 발견했다. 이녀석, 비를

피하지도 않고 저렇게 계속 맞고 있는 건가, 싶도록 엉망이 된 털인데다가 눈도 잘 못뜨고

꼬박꼬박 조는 모습이 걱정스럽다. 온몸을 잔뜩 옹송그리고 꼬리까지 바싹 몸에 두른

모습이 정말 어디가 안 좋은 건가 싶다.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가도 귀찮다는 듯 고개만 휘휘 돌릴 뿐 딱히 새초롬하니 도도쟁이 놀이를

하지도 않고, 움직임도 느릿느릿하다. 그냥 졸릴 뿐인거 같기도 하고.

가파도의 한가운데 교회 앞마당에서 발견한 껌정얼룩고양이. 정문 뒤에 슬쩍 몸을 가린 채

이쪽을 경계하는 모습을 처음에는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한걸음씩 가까이 접근하는 모습을 바싹 곤두선 모습으로 경계하다간 후다닥 도망가서

몸을 숨기겠답시고 벽돌 뒤에서 눈치를 빤히 보고 있던 녀석이다. 저기에 몸이 숨겨질거라

정말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제법 커다란 벽돌의 든든함이 맘에 들었는지

꽤나 가까이 다가서도록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얼음, 하고 있었다.

한바퀴 휭 둘러보고 나오려는데 어디선가 녀석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냐옹냐옹. 이 녀석이

인사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님 나랑 술래잡기라도 하자는 건가 싶어 반가운 맘에 둘러보니

초록색 풀밭에 배깔고 누워서는 게으르게 냐옹거리는 중. 눈도 반쯤 감긴 게 얼마나 태평해

보이던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 고양이가 저런 표정이었을 거다.







* 제주도 2박3일 실제로 다녀온 일정을 기록한 것으로,

렌트카, 빡빡한 시간표, 그리고 짧은 시간에 많이 보려는 욕심, 이렇게 세 가지에서 해방된

삼무(三無)의 일정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토요일(첫째날)

6시반,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출발.

7시반, 제주공항 도착.

8시, 제주시외버스터미널 도착. 모슬포행 시외버스 탑승.

9시반, 모슬포항 도착. 숙소 IN.

11시, 읍면순환버스 탑승. 화순해수욕장 도착

11시반, 올레길 10코스(화순해수욕장-모슬포항, 약 16km) 시작.

12시~13시, 점심(고등어구이, 해물뚝배기)

17시반, 올레길 10코스 끝, 모슬포항 도착.

18시반, 숙소에서 휴식.

20시, 저녁(고기국수 등)

일요일(둘째날)

8시, 모슬포항 도착.

9시, 가파도행 배 탑승.

9시15분, 가파도(올레길 10-1코스, 5km) 도착.

12시~13시, 점심(가파도정식)

14시20분, 가파도 출발.

14시35분, 모슬포항 도착.

17시, 모슬포항 인근 까페.

18시, 숙소에서 휴식.

18시~20시, 저녁(고등어회)

월요일(셋째날)

10시, 모슬포항 출발.

10시반, 읍면순환버스, 초콜렛박물관 도착(농공단지 버스정류장)

11시, 도보 2km, 초콜렛박물관 도착.
 

12시반, 초콜렛박물관 출발.

13시~14시, 점심(밀면 & 수육)

14시, 숙소 OUT, 서일주버스 탑승.

15시, 협재해수욕장 도착.

16시, 한림공원 입장.

18시, 한림공원 퇴장.

18시~19시, 저녁(빅허브버거)

19시반, 서일주버스 탑승, 협재해수욕장 출발.

20시반, 제주공항 도착.

21시반, 비행기로 제주 출발.










 

 

배들이 부딪힐 것에 대비한 걸까, 타이어를 촘촘이 둘러둔 제주 모슬포항 가장자리는 짠내나는

비바람에 말라터진 각목재들이 한번더 둘려 있었다. 그렇게 파도에 흠뻑 젖었다가 햇볕에

바싹 말라 소금꽃을 피웠다가, 그렇게 반복하며 저렇게 껍데기만 겨우 지탱하고 있는

각목과 시멘트 사이에서 풀꽃들이 피어났다.


어디에선가 실려왔을 풀꽃씨가 용케도 바다에 삼켜지지 않고 저기에 안착하기까지, 그리고

느닷없이 출렁거리는 물벼락이나 바닷소금의 짠기에 침범당하지 않고 싹을 틔우고 저렇게

작지만 샛노란 꽃을 피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드라마틱한 순간들이 있었을까. 다 썩어빠진

나뭇토막엔 대체 양분이 남아있기나 하려나.

서울로 돌아오기 전 협재해수욕장에서 낙조를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언제 이렇게

해넘이 시간이 늦어졌는지, 7시가 넘어도 좀체 가라앉지 않는 태양보다 서울행 비행기가

먼저 떠나버릴 지경이어서 여기까지..여기까지만 해가 내려앉은 걸 보고 버스를 부랴부랴

잡아타고 말았다.



@ 제주도, 모슬포항 & 협재해수욕장

ㅇ 고인돌, 교과서 밖에서 만나다.(Intro.)

강화도, 대학에 들어올 때까지 교과서에서 배웠던 강화도와 실제로 이래저래 놀러다녔던 강화도의

이미지 사이에는 꽤나 큰 갭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국사교과서 상권이었던가, 표지모델로 봤었던

이런 지석묘, 고인돌의 이미지가 강화도에 대한 대표적 이미지 중 하나였다면, 막상 강화도를

걷고 달리고 드라이브하면서 마주쳤던 풍경 중에 고인돌은 딱히 맞닥뜨렸던 적이 없는 거 같다.


의외로 이렇게 눈에 탁 뜨이는 공간에 그림처럼 놓여있는 것들이 많지 않은데다가 평소에

별반 관심이 없으면 그만큼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아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저 나만의

특수한 사례에 속할지도 모르지만. 여하간 고인돌을 실제로 본 적도 굉장히 까마득한 거 같고,

한두기 띄엄띄엄 보는 게 아니라 좀 제대로 작정하고 본적도 없는 거 같고.

그러고 보면 고인돌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탁자모양 북방식, 바둑판모양 남방식, 그리고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매장양식이란 거 정도다. 이래서야 원, 저렇게 얼추 탁자모양 닮은

벤치가 덩그마니 놓여있는 것만 보고도 '탁자모양 북방식 고인돌'이라고 생각할 지경이다.


이미 14회를 맞이했다는 강화도고인돌문화축제, 이번 기회에 단단히 작정하고 고인돌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강화도 여기저기에 산재해있다는 고인돌, 알아보고 찾아보고, 그러면

더 강화도를, 고인돌의 이미지들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알고 보면 고인돌은 영어로 Dolmen,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는 거석문화의

한 형태라고 한다. 큰 바위로 석상이나 무덤 등을 만들어 부족의 권위나 영광을 드러내는

문화, 어쩌면 그런 문화는 인류가 지배-피지배의 권력관계로 정립되고 나서 지배계층이

품게 되는 필연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욕망을 그대로 반영하는 건 아닐까. 이집트의 피라밋,

요르단의 페트라, 모아이의 석상들, 그 커다랗고 무쓸모하지만 위풍당당한 석조물들. 

그렇지만 한국의 고인돌이 2000년 UNESCO의 세계문화유산 인증을 받은 건 나름의 고유함과 특성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의 강화, 고창이나 화순처럼 고인돌이 밀집된 곳이

흔치 않다고 한다. 전세계에 퍼진 약 6만여기의 고인돌 중 약 2/3(4만여기)가 우리나라에 있는데,

강화도의 경우는 북한과 남한 고인돌의 맥을 모두 반영하고 있어 그 형태가 다채롭고, 고창,화순은

보존상태가 좋고 한곳에 밀집된 특징이 있어 선정되었다.


특히 강화도의 경우, 북방의 탁자식과 남방의 바둑판식이 섞여 있고, 고려산을 중심으로

고지대에 분포하고 있어 연구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강화도 고인돌에 대한 연구는 이미

1916년 조선총독부가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 학술적 가치를 짐작할 만 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표적인 고인돌이 바로 첫사진, 그리고 강화고인돌문화축제가 벌어지는

곳인 부근리 고인돌이고, 그 외에 강화도에 산재한 150여기 중 70여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니 저렇게 다양한 고인돌 탐방로를 짜서 둘러볼 수 있는 거다.


ㅇ 고인돌 만드는 법

무릇 유행이란 돌고 도는 것. 선사시대 부족장 Style의 무덤이 언젠가 2000년대 이후 부활해서

새롭게 트렌드가 될지 모르는 거다. 당장 던져진 돌무더기가 산을 이루도록 맞아야 할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여하간 어떤 경로로던 고인돌(Dolmen) 스타일의 매장 풍습이 다시 유행할

떄를 대비하여 간단히 고인돌 만드는 과정을 보아두는 것도 좋겠다.

1. 채석하기 : 고인돌을 만들기에 좋은 편마암을 큰 바위조각으로 떼어낸다. 특히 강화도는

편마암이 풍부한 덕에 고인돌이 이렇게 많이 축조되었다고 이야기된다고 한다.

2. 바닥돌 세우기 : 땅을 파서 통나무를 지렛대처럼 이용해서 돌을 세운다. 꽤나 많은 인력과

당시로선 적잖은 물자가 동원되었을 테니, 아무래도 고인돌은 지배집단이 강력해진 징표.

3. 덮개돌 운반하기 : 흙으로 바닥돌 주위를 덮어 완만한 경사면을 만든 후, 통나무를 바퀴처럼

활용해서 덮개돌을 바닥돌 위로 끌어올린다. 커다란 고인돌의 경우 덮개돌을 옮기기 위해

천명에 가까운 인력이 소요되었을 거라는 분석도 있다고 하니, 보통일은 아니었던 거다.


4. 고인돌 축조완료 : 완만한 경사면으로 쓰기 위해 덮었던 흙을 전부 파내고, 바닥돌 사이의

양쪽 열린 공간을 막음돌로 막는다. 그러고 나면 이제 '선사시대 부족장 Style' 고인돌 완성.

그 앞에서 제사를 지내던 차례를 지내던, 아니면 굿판을 벌이던 남는 건 선사시대 매장양식을

21세기에 되살린 본인의 취향 문제랄까.


ㅇ 고인돌의 나라, 강화도를 돌아보다.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라고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수많은 고인돌을 갖고 있단다.

특히나 강화도, 고인돌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버린 이 '강화도 지석묘'의 존재만으로도

강화도는 '고인돌의 나라' 수도 서울깜이다. 이 고인돌은 얼마나 공들여 축조되었는지 바닥이

무려 수십층이나 다져진 자취가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저토록 당당한 듯.

그렇지만 사실 대부분의 고인돌들은 저렇게 반듯하고 딱 떨어지는 깔끔한 이미지로 유지되는

건 아니다. 근처에 있는 '신삼리고인돌', 논밭 한가운데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채 잔뜩 녹슨

철울타리로 둘러쳐진 커다란 너럭바위가 하나 있다 싶었더니 고인돌이랜다. 아놔. 잡초라도

좀 거둬내주고 울타리라도 좀 페인트칠이라도 다시 하던가, 나무울타리로 바꿈 좋겠고만.

그렇지만 요모조모 둘러보며 이 수천년 묵은 커다란 바위의 신비함을 느끼기에는 더없는

효과가 있는 거 같기도 하다. 좀처럼 연대를 식별할 수 없는 바위지만, 저렇게 판판하게

다듬어진 게 수천년 전의 인류 솜씨라는 걸 헤아리려면, 저렇게 잡초라도 무성하고

녹이라도 슬어야 좀 실감이 나는 거다. 바닥돌이 좀만 더 잘 보이면 좋겠지만.


지나던 주민분들, 폭삭 늙으신 할머니 농민분들이 사진찍는 걸 보더니 슬쩍 알려주시던

이야기 한 토막. 논을 넓히겠다며 주인이 저 바위를 움직이겠다고 으쌰으쌰한 적이 있댄다.

그게 언젠지, 삽으로 퍼내려 한건지 굴삭기를 동원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날밤

그의 꿈에 머리가 새하얀 노인이 나타나서 크게 꾸짖었다나. 우가우가, 이러셨을려나.

 

그리고 좀더 차로 달리다가 문득 발견한 강화 부근리의 '점골 지석묘'. 제법 잔디도 깔리고

말끔하게 정돈된 상태로 서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70여기의 강화도

고인돌 중 하나라고 한다. 앞선 '신삼리 고인돌'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은 곳이었어서

그렇게 방치되다시피 했던 걸까.


고려산 북쪽 능선을 따르다 끝자락에 축조된 점골 지셕묘는 상석과 4개의 바닥돌이 있는

전형적인 탁자형 고인돌로, 원래 상석과 바닥돌이 기울어져 있던 것을 2009년께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준비하며 발굴조사하고 나선 해체하고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문화재를

수선하거나 관리할 때 자주 쓰이는 '해체', '복원'이란 단어가 웬지 고인돌 앞에선 웃기다.

그냥 돌들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제대로 올려놓는, 굉장히 심플한 작업이지 않을까 싶은 거다.

물론 실제론, 제대로 이가 맞았는지라거나 어디를 괴어야 할지 따위 의외로 복잡할 듯.

'강화 삼거리 고인돌군'
엔 그래도 제법 고인돌들이 우르르 몰려있다길래 놓칠 수 없다 싶어

조금 길을 헤매고 뱅뱅 돌면서도 굳이 찾아갔다. 표지판들이 꽤나 오래전 구비된 듯 많이들

헐고 낡은데다가, 그렇게 많지 않아 가는 길 내내 이 길이 맞는지 조바심을 내야했다. 게다가

저렇게 철컥 자물쇠가 걸린 채 수십년은 녹슬고 있는 듯한 장애물까지.

옆으로 돌아 계속 앞으로 걸으니 점점 산길이 깊어지고 경사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산 꼭대기를 오르는 길인가 싶어, 어느 순간부터 끊긴 인적을 찾아 되돌아가야 하나 걱정이

스물스물 일기 시작할 무렵. 문득 저런 조그마한 표지판이 땅에 박힌 걸 발견했다.

그 표지판 옆에는 저런 제법 커다랗고 판판한 바위가 땅에 박혀있었다. 저게 설마, 고인돌인가.

그저 바위라고 생각하기에는 은근히 인공의 손길이 가해진 느낌으로 판판한데다가,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표지판이 앞에 이름표처럼 붙어있을 리가 없으니깐.

역시 그런 거였다. 계속 오르는 길 양편으로 제법 크거나 많이 크거나 조금 큰 바위들이 누워

있었고, 그게 좀 눈에 띄게 편편하다 싶은 것들엔 저런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이곳 강화도

삼거리 고인돌군에 크고 작은 고인돌들이 십여기나 모여 있다더니, 이런 것들이 이제 그

예고편이나 전조처럼 가는 길에 늘어서 있는 건가보다.

오르막길이 끝나고, 제법 평평해진 중턱에 올랐더니 표지판이 나타났다. 수천년 전에도 여긴

지금처럼 평평한 지형으로 양지바르게도 햇빛을 담뿍 받는 그런 곳이었을까, 수기의 고인돌이

주르르 늘어서 있다니 뭐랄까, 그때의 선사시대인들과 약간의 동질감이 느껴진다. 저들도, 지금

내가 쬐는 이런 햇살을 쬐었겠구나, 오르막길 걷다가 이 평지에 탁 올라서니 기분좋았겠구나.

'강화지역에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고인돌이 산재해 있으며, 특히 이들 중에

10-20여기에 달하는 군집을 이루는 고인돌군이 5개가 있다. 이 중 하나인 삼거리고인돌군은

고려산 북쪽 능선에 위치하며, 모두 10여기의 북방식 고인돌이 3개의 소군집을 이루고 있다.

삼거리 고인돌 중에는 덮개돌에 '성혈'이라고 하는 작은 구멍이 패여있기도 하는데 이를

별자리와 연관짓기도 한다. 2000년 12월 2일 고창, 화순의 고인돌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덮개돌이 미끄러져 내려간 걸 제외하면 형태가 제법 온전히 남은데다가

덮개돌이나 바닥돌이 고른 두께로 납작하게 다듬어진 게 꽤나 공력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가히 삼거리고인돌군의 대표선수라고 해도 될 거 같은데, 무너져 내리지 않았으면 최근에

만들어진 석조 탁자라고 해도 믿었을 거 같다. 차라리 무너지며 뒤틀려서 아마도 부족장의

유해가 뉘여졌을 그 내부 공간이 드러나고 나니까 고인돌스러운 거 같다.
 


누군가가 옆에 굴러다니는 납작한 조그만 돌들로 고인돌을 만들어놓고 떠났다. 뒤로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수천년 전의 커다란 진품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자잘한 고인돌 모형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대부분 덮개돌이 미끄러져 내린 채 낙엽이 두껍게 덮이고, 잡초가

자라고 자잘한 돌들이 틈새를 메우고 있었다.


십여년 전에 조성된 무덤은 무섭지만, 수천년 전에 조성된 이곳 고인돌 무덤은 전혀 무섭지 않다.

그들의 팔다리가 놓였을 공간은 이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머리가 놓였을 곳에는 특히나

불쑥 뾰족뾰족한 잡초가 자라났다. 그네들의 양분을 빨아먹고 자랐을 거다, 라고 간단하게

치부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차이가 그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흙으로 돌아갔다가

지렁이에 먹혔다가, 물에 섞여 하늘에 올랐다가 다시 땅위로 흘러내리고 바다로 번져서,

온세상에 흩어져 있을 거다. 
 

그래서 이렇게 싱싱하고 원기왕성한 덩쿨이 되어 나무를 기어 오르기도 하고, 이미 죽어버린

나무등걸들이 때마침 바닥돌처럼 11자로 늘어선 가운데에서 부울쑥, 새싹을 틔우기도 하는건

아닐까. 수천년 전의 인류가 지금의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대체 얼마나 길고 오랜 시간이

그 사이에 놓여있는지 가늠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네들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공간인 고인돌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그 망연한 수천년의 시간이 바싹 땡겨지고 조여지는 느낌이다.
 

비록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는 수천년동안 깨지지도 녹슬지도 변색되지도 않는 돌처럼

단단하고 완고한 그들의 거석문화가 아니라, 이렇듯 금세 녹슬고 낡아지는 슬레이트 같은 세상은

아닌가 더러 걱정스러워지긴 하지만 그래도. 수천년 전 고인돌을 만들어 지금까지 이렇게 전하는

그들의 본능적인 지혜랄까 원초적인 에너지를 우리도 갖고 있으려니 믿고 싶어지는 거다.


아까 신삼리 고인돌이 덩그마니 놓여있던 논밭을 지나 강화도를 빠져나오는 길.

수천년전 그때처럼 태양이 새빨갛게 떨어져내리고 있었고, '고인돌의 나라' 강화도를

빠져나오면서 내 안 어디에선가 틀림없이 각인되어있을 수천년전 인류의 흔적이 새삼

도드라져 보였다.







뚝섬쪽 한강 고수부지, 서늘한 강바람을 쐬며 커피라도 한 잔 하려 갔을 뿐인데 한강 위에

온통 불빛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뭔가 가만히 살펴보니 목에다가 야광 목걸이를 차고 있는

오리보트들이 둥실둥실. 페달을 밟아대는 그 아픔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아무래도 밤이라

그런지 서로 적정한 거리를 예의바르게 지켜가며 그저 한자리에서 둥싯둥싯 물결을 타넘고

있었다. 목에다가 빨강 형광목걸이, 파랑 형광목걸이를 차고 있는 오리들이 십여마리

한강 위에 내려앉아 쉬고 있는 모습이 외려 낮의 모습보다 이뻐보였다. 한번 타봄직한.

한강변에서 터지는 싸구려 폭죽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분이 다운되는

거 같다. 피식, 펑, 피식, 퐁, 쉭, 폭..그런 식으로 짧게 던져지고 쪽팔린지 서둘러 터지는 폭죽을

보면 왠지 인생무상함이 짙게 느껴지고 별 거 없다, 싶은 맘이 커지는 거다. 그래도 그나마 가끔

제대로 피육, 쏘아올려져서 퍼엉, 하고 여운이 남게 터지는 당당한 폭죽을 예기치 않게

바라보며 즐기는 낙이 있으니 매캐한 화약냄새를 기꺼이 맡고 싶어지기도 한다.


키스데이라는 6월의 14일, 한강에서 오리보트 페달을 밟다가 문득 키스라도 한번 하거나,

쪽팔린다 싶으면 수줍게 터지는 폭죽 몇 방으로 분위기 쇄신하고 다시 힘내서 시도함이 어떤지.

그러고 보니 꽤나 괜찮은 하루의 마감일 듯.

김포에서 김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촬영한, 일종의 항공사진이랄까. 어젯밤에 중부지방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렸다더니 제법 가벼운 느낌으로 쳐내어진 구름들이 하얗게 깔려선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조그마한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분명한 속도감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구름들은 더러

비행기보다 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나기도 하고 혹은 딱 붙어서는 전혀 움직임없이 비행기와

함께 흘러가는 듯 하기도 했다. 비행기 탈 때마다 잠시 구경하다가 이내 창문을 내리고

잠을 청하거나 영화를 보곤 했었는데, 작정하고 카메라를 들이대니 지루할 틈 없이 뭉개지고

다시 뭉쳐지고 또다시 뭉개지는 그 모양새와 디테일한 보슬보슬함에 눈을 뗄 수가 없다.

터키의 파묵칼레, 온통 하얀 석회석으로 이루어져 반짝거리는 새하얀 산이었던 그곳에

다시 오른 느낌이었다. 비행기 문을 열고 저위로 한걸음 내딛으면 딱딱한 바닥이 감각될 듯한.

맨발로 그 하얀 석회석과 미끈거리는 물을 가르며 걸었던 기억이 문득 발에 돌아왔지만,

아니면 북극이나 남극에 둥둥 떠다닐 커다란 빙하에 오른 듯 차가운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이곳에도 제법 날카롭고 높직한 산맥이 내달리는가 하면, 평야가 넓게 펼쳐지기도 하고,

새하얀 대지 아래를 적시며 잿빛 강이 흐르기도 했다. 예전에 봤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업'이 떠올랐다. 색색의 풍선들을 매달고 하늘을 나는 집, Adventure is up there라고 했지만

실은 Adventure란 게 어디에나 있음을 이야기하던, 그리고 인생을 순식간에 흘려보내는

압도적인 오프닝이 있었던 멋진 애니메이션. 풍선들 대신 비행기를 탔지만, 그림으로

접했던 그네들의 설렘과 열광, 흥분을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부산에 거의 도착할 무렵, 지상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불쑥 굽어진 어떤 강이

온통 황토빛으로 흐르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탁하고, 무겁고, 혹시나 4대강 삽질때문은

아닌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 워낙 새하얗고 가볍고 장난스러워서

상대적으로 더욱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줘야 하지 않으려나 싶기도 하고.





강화도에도 그럴듯한 걷기 좋은 길이 있다길래 정보를 검색하다가, 그런 길이 무려 8개 코스나

생겼다는 사실에 깜짝 놀랬다. 이름하야 강화나들길. 그 중에서 제1코스, 심도역사문화길이란

이름이 붙은 길을 걸었다. 정비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나들길의 경로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갓 내걸린 신품의 느낌이 가득하다. 여기서부터, 총거리 18킬로미터, 약 6시간이 소요되는 코스.

<강화나들길 제1코스>

강화버스터미널 - 동문 - 성공회강화성당 - 용흥궁 - 고려궁지 - 북관제묘 - 강화향교 - 은수물

- 북물 - 북장대 - 오읍약수 - 연미정 - 옥개방죽 - 갑곶성지 - 갑곶돈대



 

 

코스야 그렇게 짜였다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모범답안'일 뿐 내키는 대로 형편닿는 대로

돌아보기로 했다. 버스터미널에서부터 조금 뻗어있는 나름의 도회지를 지나고 나니 이내

시간감각이 혼란스러워지는 풍경이 나타났다. 슬레이트지붕의 단층건물들이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는 골목길, 적당히 허름하면서도 정겨운, 그런 편안한 분위기다.

그런 골목을 지나다가 문득 발견한 동문, 몽고가 침입했을 때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옮겨와서

항전하며 쌓은 성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문이 있다는 건 양쪽으로 길고 높은 성벽이 이어졌을

거란 이야긴데, 아쉽게도 그 자취는 거의 사그라져 버린 듯 하다. 그나저나 저렇게 야트막한

가옥들과 눈높이를 맞춘 성문을 골목 끝에 갖고 있는 동네에서 살면 꽤나 운치있을 거 같다.

 

안내표지는 꽤나 친절하게 사방에서 찾을 수 있었다. 가장 많이 띄었던 표지는 저렇게

파랑색 바탕의 분홍색 화살표를 페인트로 그려놓은 거였는데, 뭔가 갈랫길에 당도하거나

길이 헷갈릴 즈음 길바닥이나 벽면에서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저런 좁은 골목 뒷길도

지나고 논두렁길도 지나고. 바람에 나풀거리는 앉은뱅이 허수아비도 만났다.

동문을 지나고 만나게 되는 600년 묵었다는 회나무, 그늘 아래서 자동차들도 쉬어가는

그런 거대한 나무를 보면 왠지 옷깃을 여미게 된달까. 그 생명력과 연륜 앞에서, 그리고

단단히 수백년동안 뿌리박은 그 위엄과 경이로움에 조금 압도되는 거 같다.

꽤나 한적한 나들길을 따라 걷는 건 정말 기분좋은 일이었다. 아직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

길이 채 제대로 나지 않은 곳들을 따라 걷는 즐거움도 있었고, 아직 상업화되지 않고 정비되지

않아 그냥 날것의 일상이 바로 옆에서 그대로 느껴지는 풍경도 생생했다.


그런 길을 좀 걷다가 마주친 건물, 110년이 넘었다는 한옥 양식의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햇볕이

슬슬 따갑게 내려쬐이기 시작한지라 땀 좀 식힐 겸, 한옥식 성당이라는 이곳을 좀 구석구석

돌아보기로 했다. '대영국 알마 수녀 기념비'가 서 있는 것부터 시선을 바싹 잡아당겼다.

'천주성전'이라는 편액을 걸어둔 건물이 바로 성당 본당이다. 처마의 생김이나 색감은

여느 한옥이랑 비슷하지만 기둥 사이사이로 활짝 열릴 유리문이 있다거나, 내부에 저리

길게 늘어뜨린 전등이라거나 성당의 기능에 맞게 개조된 내부 구조가 신기하다. 그리고

신부님이 머무시는 듯한 별당 건물 역시 지붕에 십자가 표지라거나 문짝에 그려진 태극

십자가 문양이 인상적이었다.


어느새 고려궁지, 오후 2시쯤 한참 뜨거운 때여서 다 허물어진 잔해 속을 거닐며 비감에 젖는

것보다는 그늘에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를 빨며 땀도 식히고 바람쐬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몽고 침입 때 고려 왕조의 왕궁으로 쓰였던 고려궁지는 이후 버려졌다가 조선 인조 때 다시

쓰였다가 이내 다시 잊혀졌던 곳이란다.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흔적이 더 큰 그런 곳이다.


코스에 따르자면 고려궁지에서 북관제묘, 강화향교, 은수물을 거쳐 북문으로 가게 되어 있지만

그냥 바로 북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기로 했다. 사실 스스로의 의지였다기보다는 그냥 내키는 대로

앞서나가는 발걸음이 이끌었다는 게 맞겠지만. 다행이었다. 나무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나무터널길이

북문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미처 가려지지 않은 햇살이 아스팔트 길위에서 반짝거렸다.

그리고 진송루, 북문. 북문은 동문과 딱히 별다르지 않게 생겼지만 좀더 지대가 높고 양쪽에

성벽을 위풍당당하게 조금 끼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다소 녹슬고 칙칙한 그림자에 가려진

성문을 지나면 저런 짙은 녹색의 숲이 바로 나타났다.

한번 코스에서 벗어나 일탈을 해보면, 그담엔 쉬워진다. 이제 뭐 정말 발걸음 닿는대로 걷기

시작했다. 어찌됐건 기분좋게 걸을 수 있고 재미있으면 되지, 꼭 어디어디를 지나쳐 어디로

가야 한다는 법 따위는 없는 거니깐. 숲으로 덥썩 뛰어들어서는 사람들이 많이 밟고 지나가

풀이 돋지 않았거나 상대적으로 흙바닥이 많이 보이는, 길처럼 보이는 걸 따랐다.


그렇지만 정말 작심하지 않으면 딴길로 접어들기도 어려울 만큼, 인적 하나 없는 숲길 중간에도

이렇게 나무로 잘 만들어진 안내판이 어김없이 길을 일러줬고, 그보다 더 자주 '강화나들길'의

끄나풀이 길을 인도했다. 어디선가 꽃향기가 걸쭉하게 번져나온다 싶으면 꽃이 나왔고,

어디선가 나뭇잎을 사각대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금세 바람이 따라왔다.


산길을 한참 걸어올라가다가 걸어올라온 만큼 내려간다 싶던 때 오읍약수터가 나왔다. 약수터는

그냥 조그만 동네 약수터랑 비슷했고, 그 아래쪽에 졸졸 물이 흘러내리는 풍경을 따라 걷다보니

산길이 끝나고 도로 갓길로 접어들었다.

한참 뜨거운 시간, 그림자는 한뼘도 생겨나지 않는 때에 하필 이렇게 벌거벗은 아스팔트 길

위에 서게 되다니 타이밍이 좀 안 좋았던 게다. 너무 뜨겁기도 하고 아무래도 도로 갓길은

쉽게 지치고 볼거리도 없고 하여 색색으로 이쁘게 칠해진 초등학교 정자나무 아래를 찾아

잠시 쉬었더니 금세 땀도 식고 기력도 회복하고. 근데 학교 진짜 이쁘게 칠했다.

사실 다른 건 몰라도 1코스에 '대산리 고인돌군'이 끼어있다길래 걷다가 고인돌들이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겠구나 했었다. 근데 아무리 가도 고인돌은커녕 바위쪼가리도 안 보이고

그저 숲길이 계속 이어졌고, 또 이어졌고, 주위에 보이는 건 온통 초록색 풀떼기 뿐. 길은

그대로인데 고인돌을 바라던 내 맘이 변덕인지라 '풀떼기'가 되고 말았다.


결국 다시 큰길가로 나오고 나니 맞이하는 건 사방으로 뻗은 화살표. 현재 위치는 이미

대산리고인돌군을 훌쩍 지나친 어디메쯤. 뭐 깔끔히 포기하고 고인돌은 다음 기회에 다시

보러오기로 했다. 그렇게 월곶마을의 띄엄띄엄한 건물들 사이로 느슨하게 놓인 길을

걷다가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를 원망할 무렵이었다. 저 파랑색 차양이 눈에 띈 건.

논쪽을 향해 불뚝 튀어나온 평상 위에 아저씨인지 할아버지인지 중늙은이 두 분이

앉아계셨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파랑색 차양을 높직이 드리우고는 한가로이 논쪽을

내려보며 쉬고 계신 듯 했는데, 가능하다면 옆에 한자리 끼어서 같이 쉬고 싶던 마음뿐.

결국 마을회관을 지나고 좀더 걷고서 도착한 '연미정'. 코스 중간에 식사할 수 있는 포인트로

연미정을 소개했던 안내지도와는 달리 근처엔 구멍가게 하나가 숨어있던 게 고작이어서,

위에 올라 바람맞고 쉬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 길 걷는데 중간중간 가게나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건 이 코스의 장점이자 단점인 거 같다. 분위기가 흐트러지지는 않되

미리 챙겨두지 않으면 목이 말라 쓰러지거나 배가 고파 쓰러질지도.

강화 10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곳, 연미정은 아래로 굽어보이는 물길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고 하여 연(제비燕), 미(꼬리眉)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 풍경이나

정자가 품고 있는 시원한 바람이 예사롭지 않아 강화나들길 1코스 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곳이다. (이전 포스팅 : 인조의 첫번째 굴욕이 있던 곳, 강화도 연미정.)

정말 경관이 굉장히 이쁜 곳이었는데, 500년된 느티나무도 두그루나 떡하니 버티고 있어

시원한 바람과 그늘을 품고 있었고, 그런 거에 비하면 참 안 알려진 곳이지 싶다. 어쩌면

그건 인조가 후금과의 기싸움에서 밀리고 억지로 맺었던 강화조약을 여전히 굴욕이라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치욕의 징소, 굴욕의 장소는 얼른얼른 덮고 지우려거나

최소한 소극적으로 방치해두기라도 하는 사례야 워낙 많았으니까.


나고 드는 게 자유로워서 '나들길', 강화나들길 제1코스는 이제 연미정에서 옥개방죽길을 거쳐

갑곶으로 마무리되도록 짜여있긴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기로 했다. 굳이 첨부터 끝까지 밟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형편따라 나고 드는 게 정말 나들길을 즐기며 걷는 방식이지

싶어서, 배도 고픈데다가 서울로 돌아갈 시간도 애매해서 나머지길은 다음을 기약했다.


강화도에 왔다면 어디서부터든, 저 '강화나들길' 표지를 발견하는 순간 이 나들길에 들어서서

조금이라도 걸으면서 발견하게 되는 강화의 풍경을 즐기다가 다시 나리는 건 어떨지.


* 강화나들길 사이트 : http://www.trekki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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