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오프라야강 서안에 있는 왕실선박박물관은 사실 가이드북엔 그리 크게 나와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찾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가면 꽤 괜찮은데, 그리고 가는 길도 꽤나

매력적이었던 곳이었다. 왕의 배들이 웅크리고 있던 방콕의 선박박물관

큰길을 따라 걷다가 표지판을 보고 꺽어서 골목으로 들어가는 길, 그야말로 허름한 빈티지 삘

가득한 뒷골목의 느낌이라 조금 당황한 건 사실이었다. 더구나 앞으로 나가봐야 길이 막혀있는

것처럼 벽이 벌써부터 보이니까 더욱. 그래도 옆에 화살표가 크게 붙어있으니 믿고 들어가기로.

골목을 틀어 돌아가니 개 한마리가 좁은 길 가운데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섰다. 옆엔 나른하게

널부러져 있는 황구 한마리. 길 양켠을 차지한 건 허름한 음식점과 두개밖에 없는 테이블.

뭔가 의구심이 생길 즈음이면 어김없이 나타나주는 화살표라 더욱 믿음직스러웠달까.

거침없이 계속 앞으로 가다가, 잠시 후진을 해야 했다. 좁은 길폭에 딱 맞춤하게 만들어진

세바퀴 수레를 끌고 길을 나오고 있던 아저씨, 양쪽으로는 다닥다닥 붙은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이 벽처럼 서 있어서 적당히 피할 공간도 없길래 조금은 뒤로 후진. 근데 저 수레 위에

올려진 것들은 대체 뭘까. 뭔가 양념통 같은 것도 보이고.

아저씨와 수레를 보내드리고 나니 다시 막막한 외길이다. 다른 길로 샐 데가 없으니 그냥 조금만

걸음 되겠거니 싶긴 하지만, 조금씩 당황스러워진 것도 사실이었다. 금방 가 닿을 줄 알았는데,

바로 눈앞의 건물인가 싶었는데 계속 화살표만 나오니까. 그리고 이젠 화살표가 벽에 그려졌다.

마음을 조금 널럴하게 먹고, 설렁설렁 산책한단 기분으로 걷기로 했다. 주위에 널어진 옷가지도

보고, 저렇게 돼지모양 깔개가 귀를 물린 채 널려있는 것도 보고.

아, 그러고 보니 선박박물관에 배들이 물에 띄워져 있을 테니 수로 근처에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건, 조금씩 집들의 바닥이 드러나며 물위에 떠있다는 게 느껴지면서였다. 생활용수랑

섞여들고 각종 쓰레기가 섞이면서 희뿌얘진 물에 조그만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다.

저렇게 집들의 아랫도리를 질퍽질퍽하게 적신 물이 이런 큰 수로로 섞여들어서는 조금은 더

깨끗해보이는 물줄기를 이뤘다. 여전히 탁하고 잔뜩 고인 채 지저분해 보이긴 하지만..그래도

말갛게 비추는 풍경은 실제보다 이뻐보인다.

허술하게 만들어진 안전바, 그 곁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은 여봐란 듯이 내부를 활짝

열어제끼고 있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한 집인지도 그저 눈치로 추측할 뿐 일렬로 다닥다닥

붙어있던 집 안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렇게 가는 게 맞는지 싶어서 묻고 싶어도.

이제 뭐, 사실은 초점이 조금 바뀌어 있었다. 굳이 선박박물관을 찾아야 할 이유는 없고

이미 충분히 이 구불구불한 미로길을 걸으며 방콕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거 같기도 했고

나름 세세한 풍경들이 맘에 와닿는 것들도 많았으니. 대충 벽면에 그려둔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일부러 조금씩 돌아가 보기도 하고 옆길로 새보기도 하면서 설렁대며 걸었다.

일부러 세팅이라도 해 둔 것처럼 하천 위에 벤치처럼 묶여 있는 화단이라거나, 하천 옆에

손바닥만한 땅바닥에도 빼곡히 들어서 있는 각종 녹색 풀떼기들. 하나같이 싱싱하고 푸른.

태국 사람들은 전부 Green Thumb을 가진 건가 싶을 정도로 싱그런 초록색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어느 집 앞의 아저씨가 담배를 태우고 계시길래 슬쩍 말을 붙였다. 집안에

온통 강아지들이 가득 하길래, 그리고 또 뭔가 신기해보여서 인사도 하고, 안에 좀 둘러봐도

되냐고 물었더니 굉장히 반가워하신다. 직접 가꾼 운하위의 정원도 보여주고.

그 집을 벗어나서 다시 화살표를 따라가는 길, 산뜻하게 새로 세워진 담벼락 위로 누군가가

노랑색 물총을 걸어놨다. 뭔가 물총이 담 아랫길을 굽어보는 게 씨씨티비의 각도인 게, 골목길의

안녕과 평화를 지키는 듯한 포스.


어느새 선박박물관은 아웃 오브 안중, 그냥 촘촘하게 구불구불 쟁여진 골목길을 즐기고 있었다.

낡은 창문짝들이 활짝 열려있는 하얀 벽 아래 적색의 항아리가 뒤집어져 있는 모습이라거나,

이끼처럼 벽을 타고 오르는 꺼뭇꺼뭇한 자국이라거나.

어느 집앞에 널린 빨래를 무심히 지나치다가 살짝 놀랬다. 속바지가 여러벌 널려있었는데, 색깔만

다르고 전부 똑같은 제품이었던 것. 음..패션이나 심미적 만족 따위가 아니라 그냥 실용적으로다가

한다발 사서 쓰는 듯했다.

거의 다 도착했나 싶다. 삼거리에서 불쑥 눈에 뜨인 건 마치 하이네켄의 색감과 비슷하게

그려진 선박박물관을 향한 안내화살표. 얼룩덜룩한 시멘트벽돌담이 운치있다.

그리고 선박박물관. 왕의 배들이 웅크리고 있던 방콕의 선박박물관

돌아나오는 길에 슬쩍 고개를 집어넣고 구경했던 미용실 풍경. 국왕의 얼굴이 달마다 실려있는

달력이 몇개씩 걸려있고, 손님을 받는 곳도 고작 의자 두개, 옆에 소파에 누운 아주머니의 머리에

'구루뿌'를 말아주고 있었다.


다시 처음의 큰길 쪽으로 돌아나오면서 조금씩 정돈되고 깔끔해지는 건물들의 분위기. 단적으로

페인트칠도 말끔하고 태국국기도 산뜻하게 걸려있는 이런 집이 몇 채 몰려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집 현관에도 왠 뜬금없는 자동차 타이어가 하나 뒹굴고 있고. 뭔가 관광지를 따라다니는

동선으로는 보지 못했을 것들을 살짝 둘러봤다는 느낌이었다.


 


벌써부터 부처님 오신 날을 준비중이었다. 파스텔톤의 등불을 빼곡하게 달아두고 있던 경내 마당에

얼룩덜룩 팔각 그림자가 융단처럼 깔렸다. 올록볼록 엠보싱 같기도 하고. 전등사 이름부터 범상치

않더니 땅바닥에 연등 그림자를 내걸었다.

보통 알록달록한 원색으로 만들어진 연등에는 익숙했는데, 이런 식으로 파스텔톤의 다정다감한

연등들이 바람불때마다 쏴아, 가만히 앉아 그 빛깔들이 섞여들어가는 걸 보고 있어도 좋았다.

아무리 날씨가 구질구질하고 여전히 바람이 쌀쌀해도, 5월이 오긴 하겠구나. 이런 식으로

4월이 슬그머니 닥친 걸 보면.

색색의 꽃들, 전등사는 그러고 보면 한해에 한번씩은 꼭 가는 거 같은데. 그때마다 차를 갖고 가서

순무김치를 안주삼아 인삼동동주를 마실 수 없음에 아쉬워하면서 번번이 그런다. 술기운 대신

꽃향기를 맡고서 힘을 내는 패턴이랄까.

그리고 풍경의 두가지 버전. 요새 토이카메라 모드가 꽤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자꾸 찍어보게

되는 첫번째 풍경 사진, 그리고 그냥 여느 때처럼 찍은 두번째 풍경 사진. 물고기가 하늘에 둥둥

떠서는 바람결에 퍼덕거리다가 산호초 사이에 낑겨 버렸다.




친구의 결혼식. 신부대기실에서 다른 친구들과 노닥거리며 잔뜩 긴장한 그녀의 표정을 풀어주려

애썼지만 역시. 그녀를 웃게 하는 건 그녀의 신랑. 손을 잡고 대기실을 나서는 그들의 표정이

한편으론 화사하고 다른 한편으론 비장해보이기도 했다.

신부가 허리를 곧추세운 채 앉아서 치장하고 식을 기다리던 곳, 봄날같이 나른하고 보드라운

노랑 커튼이 너울지고 있었다. 그리고 폭신한 느낌의 보료가 깔린 위에는 늘어지는 장의자.

경제학과 이준구 교수님이 주례를 맡았다. 오랜만에 듣는 교수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장난스럽고

탄력있는 느낌, 주례사 역시 남편과 아내가 서로 돕고 역할 분담도 잘 하는 '훌륭한 민주가정'을

이루라는 메시지로 명료하고 정갈한 마무리였다. 하얀 드레스와 노랑꽃들, 노랑촛불이 참..

양가 부모에 인사하는 신랑신부. 제법 괜찮은 느낌의 흑백 더하기 노랑색 사진. 오래도록 행복하길~*

식장 벽쪽에 예비로 준비되어있었던 의자 세개. 두개는 같은 색인데 하나는 다른 색, 사이좋게

나란히 있는 모습이 왠지 다정해보여서 한 방.


피로연장에서도 다 좋았는데 조금 실망이랄까, 깜짝 놀랐던 것 하나. 냅킨에 '호암교수회관'이라고

파랗게 적혀있는 문구가 인쇄되거나 한 게 아니라 마치 고무도장으로 찍힌 듯 했다는 사실.

저거 밥먹고 입도 닦을 수 있는 건데 저렇게 해도 되는 걸까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얼음만 남기고 홀딱 마셨던 라떼, 얼음이 녹은 자리엔 물이 들이찼다.

물과 기름이 미끌거리며 서로 버텨내듯 가만히 녹아내린 얼음은 잔뜩 흐려진 라떼의 잔해와 버텨낸다.

창밖에서 볕이 손가락을 뻗쳐왔다. 이미 봄볕에 사로잡힌 꼬마아가씨는 분홍빛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룰루랄라 스텝을 밟으며 봄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조용히 스며들어온 봄볕은

꽃무늬가 커다란 테이블을 지나 보랏빛 쿠션이 보드라운 의자위에 느긋이 몸을 눕혔다.

풍성하게 바람넣은 머리처럼 불룩한 화분을 둥지삼아, 붉은 새 한마리가 가만히 앉았다.

주체못하고 쏟아져들어오는 봄볕, 강물에 빠져버린 자동차의 깨진 창문으로도 저렇게 쏟아져

내리지는 않을 거다.

예전에 왔을 때도 눈여겨봤던, 그렇지만 별다른 감상없이 봤던 곰 두 마리. 사선으로 그어진 채

첫째 곰의 몸뚱이를 두개로 쪼개놓은 햇살 아래서 보니 표정이 떠오른다. 저 녀석들의 조심스런

손의 위치는, 살짝 외로 꼬은 고개의 각도는, 조금 우울하게 늘어진 표정은. 뭘까.

그리고 벽면에 장식되어 있는 몇 장의 도자기 접시. 몇 장의 도자기도 붙어있고, 몇 장의 흔적도

여전히 붙어있다. 벗겨진 페인트로 그 존재를 주장하려는 것들은 깨져서 떼어낸 걸까 아니면

억지로 떼어내어 다른 곳으로 옮긴 걸까.

이층과 일층을 잇는 계단, 아래로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은 종종 수평감각을 희롱한다.

이렇게 보니 계단이 아니라 격자처럼 좁아져 나가는 통로같기도 하고 거울은 천장에 붙은 듯.

여기에 올 때마다, 뭔가 삼청동에서 숨겨진 잠수함 같은 곳에 올라타는 느낌이다. 의미상

잠수함이라면 수면 밑으로 내려가는 게 맞겠지만, 여긴 위로 부상해있음에도 조용하고,

사람들 눈에도 딱히 안 띄는 거 같고. 그리고 저 제법 든든해 뵈는, 잠수함 창문같은

이중 유리창들을 활짝 여는 건 뭔가 역설적인 즐거움을 준다.

제법 선명하고 튀는 색감의 테이블, 의자들, 쿠션들이 구석구석 차지하고 있지만 나름 분위기는

어찌어찌 정돈되는 게 신기하다. 창문이라고 뚫려있는 곳에 보이는 곳은 이웃한 건물의 붉은 벽돌

뿐이라지만, 그것도 나름 호의적으로 봐줄 수 있다.

벽에 있던 이집트 냄새나는 조각상 하나. 쭉 찢어진 눈이라거나 칼처럼 날카로운 콧날들이 좀

영특하다 못해 교활한 분위기를 주기도 하지만 화려하고 정교한 꾸밈을 보면 대충 만들어진

물건은 아닌 거 같다. 하긴, 이집트가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일지도 모르겠다. 음..어디려나.

이층에서 삼층으로 오르내리는 계단, 많은 사람들의 발이 나무를 조금씩 깎아낸 거다. 색깔이

빠지고, 나무의 이빨이 빠지고, 그렇게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궤적이 남았다. 무질서하게 늘어선

와인병들이라지만 일정한 수량이 넘어서는 순간 나름의 미감이 생겨난다. 규칙없이 내걸어둔

티스푼 장식장들이라지만 역시, 나름의 균형이 잡히고 미감이 떠오른다.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 고만고만하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들 사이에서 탑처럼 우뚝 솟아난

나무하며, 해가 지면 바통체인지해서 불을 밝힐 야트막한 가로등 하나. 밑을 내려다보면 여느

때처럼 줄을 늘어선 채 삼청동을 순례중인 사람들. 여기서 저쪽은 잘만 보이는데, 왠지 저쪽에서

여긴 안 보이는 거라고 자꾸 의심하게 되는 거다.

자리에 앉아 가져간 책을 조금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위로 들린 창문에도 불빛이 하나 떠있다.

앨리스가 빠져들어간 거울나라, 원더랜드의 시작은 이런 조그만 균열감, 일상의 것이 아닌 듯한

약간의 낯선 기미부터 시작했을 거다. 이곳의 불빛과 저곳의 불빛. 저 창문을 거울삼아 비치고 있는

풍경 속에는, 좀더 각도를 틀어서 여기저기 이쪽 세상을 비쳐본다면 뭐가 더 보일런지.

가져갔던 책을 다 읽고 라떼를 다 마시고 다이어리를 다 정리하고 이곳의 추억들을 조금 되씹고도

못내 아쉬워서, 이리저리 고개를 휘휘 돌렸다. 이미 나보다 늦게 들어온 몇몇의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나가버린, 그래서 다시금 혼자가 된 공간이었다. 그때 발견한 외계인들의 우주선. 까페를

침공하는 중이었다. 스크류 모양으로 생긴 메탈빛 강한 것들이 짙은 그림자를 바닥에 새기며

소리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외계인들이 이층 혹은 삼층에 불시착할 것을 일찌기 예측이라도 했다는 양, 까페 주인님께서는

친절하게도 이런 안내문을 계단 내려오는 길목에 붙여놨댔다. 머리 조심. 제법 가파른 그 계단은

보통의 지구인들도 자칫 머리를 부딪힐 가능성이 농후한 곳인 거다. 마지막으로 아쉽게 주위를

둘러보고 까페를 떠나는 나를 배웅한 건 역시, '머리 조심'. 또 올께요.



짜오프라야 강을 남쪽으로 달리는 쾌속 유람선에 별 대책없이 올라탔다. 뭐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심정 반, 가다가 괜찮은데 있음 내키는대로 내리자는 심정 반. 의외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불쑥불쑥 솟아있는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버티곤 선 오성급 호텔들이나

새로 지어지고 있는 고층빌딩들.

촌스럽다 싶을 정도의 원색을 세개나 써서 빨갛고 노랗고 초록빛나는 배가 통통거리며 지나고,

그 뒤로는 흰색으로 우아하게 뻗은 유람선, 그리고 턱없이 불끈 솟아오른 완강한 빌딩의 뼈대

사이엔 뭔가 적잖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너무 크고, 혹은 너무 작고.

뱃전에 선 아이들은 아주 신나셨다. 사방으로 손가락을 찔러대고, 격한 강바람을 온몸으로

즐기면서 속절없이 부어지는 햇볕 아래 펄쩍대고 있었으니까.

유람선이 짜오프라야강의 마지막 역인 '오리엔탈' 역에 멈춰섰다. 그 전역, 전전역, 전전전역에서

내릴까 말까 갈등하다가 강바람이 좋아서 그냥 끝까지 와버렸다. 배 위 이층탑 위에서 배를 조종하던

마도로스 아저씨의 선그라스가 반짝, 빛났고 나는 내려서 '유럽의 어느 길'을 옮겨놓은 듯 하다는

오리엔탈 역 근처를 걷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찾아도 '유럽길'을 옮겨놓은 듯 하다는 고풍스럽고 세련된 느낌의 거리는 간데없고

그냥, 여느 방콕의 거리랑 비슷한 거다. 관광지 쪽에만 집중된 밀도높은 사람들, 활기 같은 것들이

벗겨지고 난 고즈넉하고 한산한, 적당히 허름한 거리. 그리고 어디에나 뿌리깊이 박혀있는 불교.

그랬는데 문득 눈앞에 전 교황님인 요한 바오로2세의 동상이 나타났다. 이럴 수가. 역시 이쪽 동네는

'유럽'의 거리를 옮겨놨다더니 성당도 다 보이는구나 싶었다. 자세히 밑의 명판을 읽어보니 그가

태국 방콕에 한번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걸 기념해서 이렇게 동상을 만들어 놓은 거라고 하는데,

그의 발치에 놓인 조그마한 화환이 역시 태국이구나, 싶다.

성당 내부는 꽤나 화려하다. 성당임에는 분명한데 금색 도료가 아낌없이 칠해진 걸 보면 역시

종교가 수입될 때도 나름의 문화적 맥락과 고유한 미감이 덧칠해져서 받아들여지는 거다.

그리고 얼핏 굉장히 이국적으로 보이는 천사상도, 태국스럽다고밖에 할 수 없다 싶은 건 역시

팔에 푸짐하게 둘려진 꽃다발. 노란빛깔이 강렬한 화환이 다소 가라앉은 색감의 천사상을 둥실

하늘로 띄워올리는 느낌이었다. 태국의 성당은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저런 화환 만으로도.

그리고 한참을 방황하다가 발견한 건 그 '유럽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하다는 동아시아회사.

과거 제국주의 시절 유럽 열강이 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을 경영하면서 진출했던 기업의

건물인 듯 한데, 아쉽게도 입구는 막혀있었다. 그저 겉으로만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뭐 조금

1밀리그램쯤은 유럽의 느낌이 난다고 쳐줄 수도 있겠다.

저 위의 깃대에는 어느 나라의 깃발이 휘날렸을까. 안에 들어가면 뭐가 있을까. 이것저것 꼬리무는

물음표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런 것만큼 더 확실하게 다가왔던 건 역시나, 어줍잖은 몇마디

감상평이나 가이드북 코멘트에 낚이는 건 위험하단 사실. 그래도 저 태국화된 성당의 느낌을

얻어내었으니 나름 뜻밖의 수확은 충분했다.

소매물도 십자동굴을 보러가던 차였다. 온몸에서 통통거리는 유람선을 타고서 제법 높은 파도를

뚫으며 달리던 길에 빼어든 새우깡에 갈매기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입이 찢어져라 벌리며 공중에서 과자를 낚아채는 녀석, 그리고 애절하게 손을 내뻗으며

나도 한입..이라고 외치는 듯한 다른 녀석들의 눈짓과 날갯짓이란.

굉장히 시크하게 생긴 녀석들이 새우깡 한두조각에 미친듯이 갸르릉거리며 덤벼드는 걸 보자니

왠지 배신감도 느껴지고 그랬다. 그나마 석모도 가는 길의 그 탐욕스럽고 무시무시한 괭이갈매기

녀석들보다는 훨씬 낫긴 하다만.

슬쩍 보이는 배의 꼭대기 위에서부터 퍼져나가듯 날아가는 갈매기들.

니놈들 중에 조나단은 없는 거냐.




카오산로드에서 동쪽으로 걷기로 맘먹은 날이었다. 점점이 몰려있는 외국인 여행자들을 지나치며
 
무작정 걷다가, 문득 어디선가 징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그것도 한두개가 아니라 여러개의

징을 산발적으로 두드려대는 댕댕대댕댕 소리. 저건 뭔가 싶어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왠 자그만

동산이 있고 꽃과 나무가 우거졌으며 태국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점점 커지는 징소리는 이제

머리 위에서, 커다란 말풍선에 담긴 채 하늘에서 징징 진동하며 떨어져내리고 있었고.

집 위의 야트막한 동산에 오르듯 계단을 따라 사람들을 따라 조금 올랐다. 옆으로는 꽃과 나무,

반대편으로는 자연적으로 조성된 건지 인공적으로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중턱쯤에서.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냈다. 수많은 종들. 잡아당기는 손들.

길 양쪽으로 온통 종들이었다. 울림통 안에서 웅얼웅얼대며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그냥 징 치듯

댕, 하고 짧게 끊기는 쇳소리였지만, 사람들이 순례하듯 지나며 일일이 하나씩 울려주고 있던

덕분에 끊기지 않고 대앵대앵- 울려퍼지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이렇게 커다란 징도 하나. 어찌나 많이 부딪혀댔는지 나무가 온통 뭉그러져버린 데다가

받아주는 징의 볼록한 부분도 한참을 움푹하게 꺼져들어갔다. 뭐, 그럴 만도 한 게 나 역시도

수십개의 종들을 울리며 올라왔지만 그 손맛과는 전혀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징의 웅웅거리는

울림과 찌릿찌릿한 손맛이라니. 뒤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않음 좀더 두들겨보고 싶어지는.

그 이후로도 길은 계속 가늘게 이어지며 동산 위로 이끌었다. 종 역시도 계속 이어졌고, 가만 보니

종들의 듬직한 등짝에는 이 곳의 모양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있었다. 푸 카오 텅, Golden Mountain.

높이 80미터로 정상에 황금색 탑이 세워져 있어 수많은 태국 불자들의 발길이 닿고 있다나. 계단수는

무려 320개를 헤아리는데, 사원은 전체적으로 우주의 중심이라는 메루산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그런 건조한 사실들보다 더욱 눈길을 끄는 건 이런 쓰레기통. 쓰레기를 버리란 건 알겠는데

저 해골바가지 그림은 뭔가 싶었다. 태국어를 알았다면 해골바가지 밑의 간단해보이는 몇글자쯤

해독해 냈을 텐데 싶기도 하고.

드디어 도착한 산..이라기보단 야트막한 언덕의 정상. 사원이 하나 세워져있고 깃발이

나부꼈다. 황금빛 칠이 번쩍거리는 건물벽은 방콕 시내가 반사될 듯 반짝거렸다. 원래

여기를 지을 당시에는 방콕 시내를 벗어나 평화로운 교외의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는데

지금은 여기까지 도시가 우물우물 삼켜버려 예전의 정취와는 판이해졌다.

여기에 모셔진 부처님들 중 일부는 인도에서 가져온 것들이라고 한다. 나름 1960년대까지 방콕을

내려다보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던 사원인만치 그만큼 보물들이 많이 모셔진 걸까.


그런데 이건, 네모난 금박들이 펄럭펄럭 나부끼는 헐벗은 불상들. 선풍기가 돌고 건물 안 공기가

휘몰아 돌면서 불상에 붙어있던 금박들이 파닥파닥 날뛰고 있었다. 더러는 위태롭게 나부끼다가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또 더러는 지나는 사람들의 머리위나 옷위로 내려앉기도 하고.

거의 다 벗겨진 채 누워있는 와불, 아마 저렇게 금박을 한겹한겹 입히는 것도 부처님께 공덕을

쌓는 일일텐데 뭔가 입혀드리는 날짜가 정해져있나보다. 그리고 문득 돋는 세속적인 생각 하나,

저 금박들이 진짜 금일까. 24K는 아닐 테고 18K나 14K쯤? 꽃가루처럼 날아다니는 금박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건물 중앙에 모셔진 황금빛 번쩍거리는 불상 하나가 포인트였다. 동서남북 사면으로

뚫려있는 한 가운데에 모셔진 불상은, 황금 금박이 촘촘하게 붙어있어 바늘꽂을 곳 하나 찾기 힘든

그런 번쩍번쩍한 느낌이면서도 또 보들보들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그 앞에 털썩 앉아 간절히

기도하는 분의 뒷모습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내부에 워낙 사람이 꽉꽉 들어차 있었지만, 밖을 향한 창문이 온통 활짝 열려 있어서 딱히 답답한

느낌은 없었다. 밖을 향해 활짝 열린 창문들, 밖으로 고개를 빼문 아이들, 그리고 멀리까지 내려

보이는 방콕의 전경.

뒤에서 아이들의 눈을 따라 휘적휘적 둘러보았다. 태국 국기와 황금산 깃발이 나부끼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낮고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 뒷켠으로 뾰족뾰족 서 있는 사원들. 그리고

멀찍이 이 언덕보다 높이 솟은 고층건물들이 보였다. 그 아이들의 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옥상으로 올라가니 거대한 금탑이 있었다. 하늘로 향할수록 긴장감넘치게 뾰족해지는 저

삼엄한 탑의 모양은, 거꾸로 지상의 소원과 염원들을 모두 흡입하겠다는 듯 굉장히 크고

넓은 밑둥아리를 갖고 있었다. 그 앞에 가지런히 무르을 모아꿇고 손을 맞붙인 사람들의

엄숙한 표정이나 조심스런 몸가짐들이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런 와중에도, 큰 금탑 주위의 사면에 하나씩 버티고 선 커다란 징은 계속 대앵, 대앵. 어떤

콧수염 아저씨가 채를 잡길래 카메라를 들어 'May I'했더니 방긋 포즈를 잡아주었다.

그리고 진중한 한 방, 사방으로 부들부들 퍼져나가는 울림이 언덕 아래로 낙하했다.

신 앞에 꽃을 바치고, 돈을 바치고, 종을 바치고, 그리고 빨간 천에 소원을 적고. 탑을 감싼

천에 직접 만든 색색의 리본을 달아주기도 하고. 기도를 바치는 존재가 신이라면 굳이 저렇게

써놓거나 박아넣지 않아도 다 알지 않을까. 아닌가, 신은 눈이 하나라서, 그 시선이 내게 오길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 노력하는 게 더 빠를 거라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좀더 큰 목소리로

좀더 튀고 마음에 들만한 걸로 신을 꼬드기는 것도 나름 합리적인지도 모르겠다.

선박박물관에서 봤던 그 굉장한 용 머리가 여기에선 몸통까지 제대로 묘사된 채 종을 물고 있었다.

이거..용이 아니라 새였던가, 대체 뭐지 싶을 만큼 상상력이 발휘된 동물. 그 밑으로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소원들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용머리가 사람들의 소원들을 발톱으로

움켜쥐고 금세라도 하늘로 날아오르려는건가, 그런 분위기를 노린 건가 싶기도 하고.

이쁘게 만들어진 화환들이 탑 여기저기에 걸렸고, 하얀티에 청바지를 입은 긴머리 아가씨의

뒷모습이 참 이뻤다. 발바닥이 하얗게 질리도록 미동도 않고 곱게 두손 모은 채 뭘 그리도

기도하고 있는 걸까 싶기도 하고. 내 마음까지 절로 숙연해지고 뭔가 간절해지는 느낌.

다시 돌아가는 길, 사람들은 마치 손잡이라도 되는 듯 종을 하나씩 잡고서 댕댕거리며 내려왔다.

뭔가 조금은 더 조신하고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내려오던 길에야 전체 모습을 조망할 수 있었다. 아, 이렇게 생긴 거였구나. 푸 카오 텅, 혹은

GOLDEN MOUNTAIN. 황금산. 저렇게 빙빙 도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렸고, 걸으면서 쉽없이

징이나 종을 울려댔던 거로구나 싶었다. 어김없이 걸려있는 꽃 한다발까지.



황금산 정상에서 탑돌이를 하던 분들, 그 와중에 징을 울리며 풍경을 뒤흔들던 그 묘하고도

묵직한 분위기. 소리가 좀더 생생하게 잡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실제 음량에 많이 못 미쳐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차들이 씽씽 다니는 도로 위라면, 더구나 거대하고 육중한 건축물이 머리 위로 버틴 채 하늘을

가리고 소리를 울려대는 고가 아래라면, 아무래도 뭔가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불안해지기 마련.

그래서 경찰관이 한 명 버티고 섰나, 심상하게 쳐다보며 횡단보도 앞에 멈춰섰는데 어라.

경찰관이 뭔가를 쥐고 있었다.

탄탄하게 생긴 게 등산용 로프처럼 생긴 줄을 두 손에 꽉 쥔 채 횡단 보도를 가로막고 있는 거다.

자세히 보니 로프는 반대쪽 가로등에 묶인 채였고, 사람들은 이런 일에 익숙한 듯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이어서 나만 혼자 놀라고 있었다. 초등학교 앞에 녹색어머니회 분들이 깃발로 슬쩍 막고

있는 모습이야 자주 보지만, 이건 아예 사람들의 발을 꽁꽁 묶어둔 셈이다. 그렇게 신호등의 빨간

등불만큼이나 단호하게 그는 줄을 잡고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뭐, 신호등도 있고 경찰관도 있고 무엇보다 저 팽팽한 로프도 있으니 무단횡단으로 인한 사고는

획기적으로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국내 도입이 시급하다, 고 생각하려다가 뭔가 불안해진 건

아무래도 경찰관도 사람인데 파란불 바뀌는 타이밍에 딴청을 피우거나 딴생각에 빠지면 어떡하지

하는 지극히 한국적인, '빨리빨리'의 사고방식 때문이었을까.


근데 정말, 파란 불이 바뀐 순간 경찰관은 슬쩍 딴 데를 바라보던 차였고-아마도 여자, 이쁜 여자-

불빛이 바뀐 것보다 한두 템포 늦게 로프가 풀려나가 땅에 떨어졌다. 여행자 모드였으니까 딱히

내게도 거슬리진 않았지만, 한국에서 이런 게 가능할까 싶어졌다.




방콕에서 인물 사진을 찍을 때는 간단히 물었다. 'May I?' 하며 카메라를 슬쩍 들어올리면

애나 어른이나 다들 알아듣고선 방긋 웃어주거나, 별 흔들림없이 시크하게 멈춰주거나.

그렇게 찍은 사진들. 황금산 위에 올랐을 때 올망졸망 머리를 맞대고 방콕 시내를 내려다보던

가뭇가뭇한 아이들이 귀여웠다.

황금산 주변동네를 진동시키던 징소리, 종소리를 만들어내던 저 팔뚝들. 여자친구와 함께

무언가를 빌러 온 아저씨 하나가 나의 '메이 아이?(카메라 들썩)' 앞에서 흔쾌히 포즈를

취했다. 사진 이후의 다시, 대애앵- 귓바퀴에서 데굴데굴 구르던 굵은 떨림.

황금산 위의 황금탑, 사람들의 기원을 모으는 안테나처럼 위로 뾰족하게 곧추선 그 탑을 향해

무언가를 조용하게 빌고 있던 태국의 아가씨. 꺾인 발바닥이 하얘지도록 미동도 없이 탑을 향했다.

어딘가의 재래시장, 순대를 튀긴 것처럼 곱창 안에 밥풀이 잔뜩 채워진 채 기름으로 튀겨진

간식을 팔던 해맑은 꼬맹이 숙녀들. 하나만 달라는 내게 계속 두개를 디밀어주어 당황시키던.

두리안에도 제철이 있는줄은 몰랐다. 지금은 남국에도 두리안은 제철이 아니라더니, 과일시장은

온통 파인애플과 수박뿐. 조그마한 밴 위로 바늘꼽을 틈도 없이 차곡차곡 쟁여진 파인애플을

내리던 이들의 머리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려 있었다.

그리고 적재가 끝난 다음인지 파란색 바구니들을 탑처럼 쌓아둔 채 고단한 몸을 뉘인 아저씨.


다른 시장, 또다른 고단함. 고개를 한껏 젖힌 채 불편한 자세지만 잠시라도 쉬어 가실 수 있다면.

짜오프라야 강으로 스미는 방콕의 거미줄같은 운하들, 사람들은 마을버스를 타듯 수상보트를

타고 방콕 깊숙히 들어갔다. 그리고 좁은 운하만큼이나 가늘고 긴 배를 타고 온통 물보라를

일으키며 내달리는 통에 저런 파란 방수포를 끌어올린 채, 검표원만 배 밖에 남겼었다.

지저분한 방콕의 운하 좌우변의 허름한 수상 가옥들을 쾌속 보트로 휙휙 지나치며 문득 눈에

꽂혔던, Joy is UP이란 저 높은 건물. 선착장에 내리니 문득 풍경이 바뀌었다. 여기는 모던 방콕.

그리고 제법 대도시스러운 복장의 사람들.

그리고 어느 재즈바, 클래식기타를 쥐뜯으며 분위기를 잡던, 그리고 그만큼의 공력을 갖췄던

태국의 아티스트가 있었다. 구불구불한 장발을 커튼처럼 늘어뜨린 채 그가 만들어내던 멜로디들.

그런가 하면 태국의 소수부족, 아마도 북쪽 치앙마이 인근에서 온 듯한 분들이 나무 개구리를

막대기로 긁으며 개구리 소리를 내기도 하고, 원색의 고깔모자처럼 생긴 전통모자를 쓴 채

여행자들에게 팔고 있었다. 대부분은 저렇게 단호한 거절, 그래도 개구리 소리는 그치지 않고.



정말 귀엽게 생긴 백인 꼬맹이들이 짜오프라야 강을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유람선 앞선창에

딱 버티고 서서는 아주 신났다. 찢어질 듯 맹렬하게 펄럭이는 태국 깃발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어찌나 재미있어하던지. 녀석의 윗도리도 질세라 나부끼고 있었다.

카오산로드 바로 옆에는 커다란 복권 상설도매시장이 위치해 있었다. 방콕 구석구석을 넘어

태국의 곳곳으로 퍼지는 복권을 대량으로 구매하기 위한 사람들, 그리고 팔기 위한 사람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잔뜩 쌓아둔 채 몇십장 단위로 끊어서 스테이플러로 묶어두는 어른들의

부산함 속에서 혼자 가판을 지키는 아이의 눈빛이 심퉁스럽다. 놀고 싶은 거겠지.

라오스에서 왔다는 Kai, 이 게이 아저씨는 내 선글라스를 굉장히 부러워했다. 아침부터 쌀국수에

맥주를 먹는 내 앞에 앉아 계속 재잘재잘, 며칠 안 되는 사이 세번이나 가서 밥도 먹고 그와 얘기도

나누는 '단골'이 되어버렸다. 남자친구 자랑을 어찌나 하던지 문득 시샘이 샘솟듯 하더라는.

왕실선박박물관에서 온몸을 구부린 채 배 안쪽을 수선하고 있던 아저씨. '메이아이(카메라)?'의

물음에 슬쩍 흘려주던 수줍은 미소가 참 좋았는데.

숙소로 돌아가던 길, 카오산로드로 돌아가는 숏컷shortcut, 지름길을 자기집 안방인 양

차지하고 의자에 누워 티비를 보는 가족들이 넘 웃기고 정겨운 거다. 전등 불빛과 함께

어둑한 골목길을 비추는 티비 조명.

어느 음식점들, 골목 뒷켠에 숨어 외국인이나 여행자는 눈에 띄지 않던 그 곳은 태국의

아저씨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신문을 꾸깃하게 펼친 채 달겨붙는 파리에게 엉성하게

손을 휘저으며.

그렇지만 카오산에만 들어가면 이렇게 꿈틀거리는 문신을 과시하며 벗고 다니는 외국인들 천지.

유럽인, 미국인, 아시아인들, 온갖 국적의 인종들이 몰려들어와선 그야말로 국적불명의 문화를

만들어놓은 해방구의 분위기가 참 좋았는데.

이렇게 온몸 가득 타투가 새겨진 마네킹이 서 있던 카오산의 그 어느 골목, 아무래도 저런 식의

타투는 그렇게 이쁘다는 생각은 절대 안 든다.

공원의 큼지막한 그늘 아래에서, 돗자리처럼 펼쳐진 초록빛 잔디밭에 기대 누운 채 책도 읽고

낮잠도 자는 금발의 아가씨들. 저런 식의 여유를 그렸던 거다. 사진을 찍고는 나도 슬몃

풍경에 끼어들어 책도 보고, 낮잠도 자고. 또 누군가 사진을 찍었을지도.

하얗게 칠해진 길다란 벤치 위에 척하니 양반다리를 한 채 신문을 읽던 아저씨가 있었다.

밑에는 커다란 개 두마리가 녹아내린 듯 땅에 달라붙어서 나른하게 잠들어있었고. 꽤나

한가롭고 평화로워보이는 풍경이었는데, 카메라를 들이대니 개들은 도망가고 아저씨만 웃었다.

조그마한 불당에 들어갔는데 아저씨가 부처상 앞을 싸리빗자루로 쓸다가 잠시 멈추더니 한참을

통화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내게 하나도 의미를 싣지 못한 채 그저 시끄럽고 야릇한 노래처럼

울렸지만, 왠지 부처는 다 이해했다는 듯 빙긋 웃고 있었다.

드디어 돌아오던 날, 짐가방을 질질 끌며 공항버스를 기다리던 때. 따끈하게 덥혀진 보도블록에

앉아 눈앞에서 내달리는 차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사방으로 꼬불거리는 글씨가

창문에 가득 적힌 시내버스 한 대가 멈췄고 사람들을 쏟아냈고 다시 삼켰다. 사람들이 몸싸움하듯

오르내리던 부산함 가운데도 흔들림없던 그녀, 무심한 눈빛으로 버스를 보내버렸다.





짜오프라야강 서안, 카오산로드에서 북서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선박박물관',

태국 왕실이 기념일이나 행사 때마다 짜오프라야강에 띄우는 화려한 배들이 정박해 있는

곳이다. 가는 길이 쉽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박물관에 들어섰을 때 이토록 한적할 수가.


입장료는 100바트, 300바트에 대략 10달러, 만이천원이라 치면 100바트는 대략 3000원선.

안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되지만 따로 100바트를 추가로 내면 사진 촬영도 가능하다고 했다.

걍 둘러보지 뭐, 하고 입장료만 내고 들어갔다가 헉, 아니다 싶어서 냉큼 100바트 더 내고 촬영을

허가받았다는 표시의 얄포름한 종이 한장을 목에 걸었다. 바람에 펄럭펄럭 나부끼던 촬영증.

이런 금빛찬란한 화려한 뱃머리가 나란히 모여 있던 거다. 첫눈에도 정교한 조각과 세련된 마감,

금빛이 번쩍거리면서도 결코 싸지 않은 느낌의 배색과 품격이 느껴졌다.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 무려 1981년에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의식용으로 쓰이는

이 배의 뱃머리엔 옆구리에 손을 짚은 신장이 당당히 저멀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랫춤엔 조그맣게 숨어있는 포신. 이런 배를 넓고 도도한 짜오프라야 강심에서 마주친다면

어떤 기분일까. 이렇게 화려하고 세련된 뱃머리, 저 눈길을 올려다본다면.


이것들은 더 멋졌다. 동남아에서 신격화되는 뱀의 신 '나가'를 형상화한 듯한 일곱 머리를 가진

뱀의 흉흉하고 위압적인 모습도 그렇고, 날개처럼 두 팔을 펄럭이며 날아오를 듯한 분위기의

날렵한 신장도 그렇고. 특히 저 빨간 혀와 새하얀 이빨을 가진 일곱머리 금빛 뱀은 태국 왕실을

배경으로 유유하게 짜오프라야 강을 점령한 화려한 배들이 담긴 풍경 엽서에서 자주 봤었다.

이 녀석은 정말, 이 배를 타고 수많은 선단으로 구성된 전투용 배들의 앞머리에 섰다면, 적선들이

딱 마주쳤을 때 바싹 쫄았을 거 같다. 화염이 불타오르는 듯한 저 사납고 들끓는 듯한 갈기들,

그리고 단숨에 숨통을 물어뜯어낼 듯한 강력한 턱과 이빨, 그리고 새빨간 혀가 날름거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시꺼먼 아가리까지. 뱃전에 설치된 포신이 차라리 귀여워 보일 지경.


옆으로 넘어가며 배를 하나하나 둘러보는 데도 은근히 동선이 길다. 배가 그다지 크지는 않다

싶었는데, 앞에서 보았을 땐 얄포름하다 싶어서 그랬지만 정작 배의 길이가 꽤나 긴 거다.

전체적으로 가늘고 긴 형태의 배라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탈 수 있을지는 모르곘지만, 그런

날씬한 형태를 갖추고도 정면에서 보았을 때 이런 위엄을 갖출 수 있다니 그것도 놀랍다.

여기에 보관되어 있는 여덟 척의 배중에서 가장 아름답던 배, 초록색 눈과 은빛 어금니가

온통 보석으로 꾸며진 것 같다. 학처럼 우아하게 뻗어올려진 미끈한 목에도 비늘같은 무늬가

꼼꼼하게 세공되어 있었고, 슬몃 쳐들어올려진 고개도 당당한 분위기를 더한다. 용이 또아리를

틀고 땅에 내려앉은 채 하늘을 바라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리고 배의 뒷꼬리, 미끈하게 쭉 빠진 느낌도 그럴 듯 하지만 배의 앞섶과 마찬가지 문양으로

통일성을 갖춘 모양새는 왕실의 선박으로 부족함이 없다. 게다가 번쩍 들린 앞머리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실용적인지 감각적인 측면인지 모르겠지만, 하늘로 은근히 슬금슬금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번쩍 치켜올려지는 휘영청한 곡선의 아름다움까지.

배 가운데, 금빛 휘황한 좌대가 설치되어 있다. 물론 왕과 왕비, 왕자나 공주를 위한 자리일 테고.

시야를 확보하고 바람이 넉넉하도록 그랬는지 햇빛을 가릴 천장이 좌대만큼 높았다. 저렇게

높이고서도 배가 균형을 잘 잡을까 싶을 정도로.


현재도 언제든지 불려나갈 준비가 되어있어 보이는 반짝거리는 배들 옆으로, 옆면이 휑하니 빈 채인

배도 한 척 보였고, 아예 분해해서 새롭게 만들 작정인 듯 뱃머리만 떡하니 떨어져나가있는 덩어리도

보였다. 다리 사이로 대포를 쏴대는 모양의 뱃머리, 모양이 제각기 다 다르니 한척 한척이 모두

굉장히 소중한 거 같다.

그래서겠지만, 박물관 한 쪽에는 이전에 쓰였던 배의 잔해들과 장식들을 보관해 두고 있었다.

언제든 새로운 배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그리고 한척 한척 모두 독특한 자기만의 모양새와

분위기를 가지고 짜오프라야 강을 당당하게 가로질렀노라 기억해 두려는 듯. 박물관이긴 하지만

이 배들은 유물이 아니었다. 지금도 계속 저렇게 자재를 운반하고, 배 안에 들어가 사포질을 하고

뭔가 수선하고 보완하는 공장 같은 분위기였다. 박제된 기념품들이 아니라, 언제든 행사 일정에

맞추어 나설 준비가 된 살아있는 것들.

아마도 저런 일꾼들이 이렇게 소담스런 불당을 차려놓은 거 아닐까. 박물관 아닌 박물관의 기둥

한켠에 새집처럼 올려둔 불당 앞으로 빨강색 환타 두병을 열어서 빨대까지 꼽아둔 저 다정함이라니.

한쪽 벽면에는 배를 실제로 어떻게 젓는지, 그리고 수병들의 복장은 어땠는지, 그런 모습을

에둘러 짐작해볼 몇 장의 자료들이 있었고 조그마한 형태로 축소된 배도 전시되어 있었다.

가만히 보니 배들은 언제든 수로를 통해 짜오프라야 강으로 나갈 수 있도록 제각기의 도크

위에 번쩍 들려있는 것이었다. 고개를 당당히 든 채 다리가 치워지고 철문이 열려 짜오프라야강

위로 둥실, 의연하게 미끄러져가는 그림이 자꾸 머릿속에 그려졌다. 허름한 창고 같은 박물관

안에서 벗어나 남국의 햇살 아래 온통 번쩍거리며 그 섬세한 디테일 하나하나가 사방으로

빛무리를 떨쳐낼 그럴 장면. 왕의 배들이 어둠속에 웅크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방콕의 시장통에 선 레깅스 모델. 굉장히 당당한 체구를 자랑한 채 공중부양 둥둥.

태국의 마네킹 모델은 우리나라의 마네킹들처럼 그렇게 바싹 마르지는 않았나보다.

아니면 아마도 레깅스의 신축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바람을 양껏 불어넣은 걸까.

고작 네 개 마네킹을 걸었는데 행거가 꽉 차버렸다. 근데 저걸 보면서 수영장에 끌어안고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난 뭐지.;; 구명용으로도 딱일 거 같은데. 방콕을 휘감고 도는 짜오프라야

강에 누군가 빠지기라도 하면 슬쩍 들고 와 던져주면 되겠다.

대책없이 '공주풍'인 원피스들도 있었다. 강렬한 핑크빛의 원단과 레이스에 휘감긴 신데렐라,

백설공주, 인어공주 같은 공주님들이 우아하게 스마일. 저런 건 입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얼얼한 형광핑크에 눈이 아파 시선을 돌렸다. 그랬더니 눈을 찌르는 직사광선을 비늘처럼

반짝거리며 나부끼는 태국 깃발들, 게다가 만국기 아래에서 번쩍이며 발색하는 형광파랑,

형광핑크, 형광초록의 택시들.

어라..저건, '품바'라고 읽어야 하는 건가.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하는

각설이타령의 품바 그건가. 근데 저 그림은 또 뭐지. PUMBA를 품바, 각설이라 읽어야 하는

건지 아님 뭔가 영어 단어에 뜻이 있는 건지 문득 혼란에 빠져버렸다.

옆골목으로 무작정 꺽고 들어갔다. 허름한 건물 아랫도리로 쭉 늘어서 있는 노랑색 파라솔들이

산뜻하다. 노랑 간판들이 번쩍 서있는 곳에서부터 노랑색 파라솔들을 지나 돌돌돌, 굴러오는

노랑망고 파는 노랑모자 아주머니. 잘 익은 노랑망고도 맛있지만 덜 익은 파랑색 망고도 꽤나

맛있었는데. 그렇게 달지 않고 산뜻해서 목이 마를 때 아작아작 씹어먹으면 딱이었다.

주차를 한 건지 방치를 한 건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차들이 범퍼에 범퍼를 붙인 채

어느 골목 한 켠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뜨끈하게 덥혀진 본넷 위에는 누군가 작업할 때

끼는 목장갑이 몇 짝 나뒹굴고 있었다. 말리려고 한 건지 버리려고 한 건지, 차나 장갑이나.

다시 재활용할 건지 아님 버려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가게 옆 벽면에서 발견한 외계인의 신호. 쭈꾸미별에서 온 듯한 외모,

이미 '아기공룡 둘리'에서 본 적 있는 그 외계인이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웃고 있었다.





밤 열두시가 넘어 텅빈 방콕의 거리, 늦게까지 재즈바에서 공연을 보고 맥주를 마시다가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새 비가 쏟아부었는지 아스팔트 바닥엔 가로등 불빛이

그렁그렁 번져 있었다. 파란색 조명이 애꾸눈처럼 노려보는 뚝뚝의 뒷자리에서 나 역시

질수 없다며 운전수 아저씨 뒷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러다 문득 떨궈진 시선, 풉- 하고 짧게 터져 버렸다. 아저씨가 방구쟁이였단 말인가.

누군가 뒷좌석에 손님이 탔고, 아저씨는 방구를 트셨고, 견디지못한 손님이 괴로웠고,

마침 어디선가 산 방구금지 스티커가 있었고, 복수하는 맘으로 붙이고 내린 건가.

뒤에 붙은 스티커는 아는지 모르는지, 아저씨는 계속 달렸다. 파란조명에서 뿜어나온 시선은

쓰리쿠션 돌듯 내게 튕겨 다시 아저씨 뒷통수로. 요란스런 폭음이 문득 멈췄고, 파란조명은

빨간조명 두개와 어깨를 걸었다.




왓 아룬, 새벽사원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곳은 첫날 일정을 위한 일종의 반환점이었다.

5년 전에 다녀갔던 그 곳. 그 때도 나름 똑딱이로 사진을 남기고 나름의 감흥을 남겼었다

"거대한 것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려면, 적당한 거리잡기가 가장 중요하다.
얼마만큼 거리를 격해야 나와 당신의 그림이 이뿌게 나올 수 있을지..
당신의 위풍당당함과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고 내가 그 곁에 자연스럽게 설수 있는 사진은.

너무 멀면, 모든게 용서될 것 같다. 고작 한웅큼 흩뿌려진 저녁 햇살 만으로도
너무도 부드러워보이는 당신의 실루엣.

너무 가깝게 들이대진 말기. 그 오색찬란한 빛깔과 생생한 질감이 사실은
사기접시를 깨넣고 붙여넣은 재활용품처럼 보일 수 있으니.

고슴도치가 사랑을 하듯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바싹 다가가기엔 한 평생 호흡이 길다.
크레딧이 올라가도 삶은 계속되고, 한마디 말로 감정을 전달한다는 건 편집기술의 승리일뿐.

간격잡기는, 고수의 스킬. 당신은 내 간격 안에 들어와있어. 베인다.


p.s. 풍경만이 아니라, 사람도, 삶도, 너무 거대해보이는 요즘이다.



정말이다. 이 커다란 사원의 그 오밀조밀하고 오톨도톨한 질감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었다.

어떻게 새겨넣었는지 일일이 눈으로 쫓으려면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한 무늬들에 온통 둘둘

감겨 있는 거대한 탑, 그리고 요기조기서 탑을 온몸으로 (그리고 한쪽 무릎을 확 꺽어 바닥을

찍은 채) 받치고 있는 신들. 그저 탑의 굵은 윤곽만으로 섬세함과 장엄함을 던져준다.

그렇지만 역시나, 몇 걸음 가까이로 내딛으면 금세 드러나는 거다. 그 굵고 단호한 선 뒤에

가려있던 디테일들이란 게 얼마나 불규칙하고 마구잡이식으로 붙어있는 타일 조각들인지.

하나하나 정갈하게 붙어있다기보다는, 철퍽 접착제를 덧바른 후에 준비된 타일들을 꾹꾹

빠르게 붙여나간 게 아닐까 싶은 느낌으로 더러는 회칠 속으로 잠겨 있기도 하고, 조금은

들떠 있기도 하고.

원래 왓 아룬이 완공되었을 때는 지금과 같은 모습을 의도하진 않았다고 한다. 중국에서

태국의 왕에게 선물로 보내온 온갖 자기들이 있었는데 딱히 왕이 달가워하지 않아 그걸

이 곳의 사원을 꾸미는데 활용했다고 한다. 더러는 깨뜨려서 모자이크 타일처럼 썼지만

사진에서처럼 조그마한 자기는 통째로 붙여 장식하기도 했나본데, 하나가 쑥 빠졌다.

저건 누가 챙겨갔으려나. 괜히 손가락을 힘을 주어 옆의 자기도 슬쩍 건드려보고.

위로 오를수록 가팔라지는 중앙탑에는 사방으로 계단이 나있다. 위로 오르는 사람들은 점점

몸을 탑에 의지하며 파이프 난간을 굳게 잡고, 밑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은 거의 엉거주춤한

자세로 스물스물 계단에 붙어 기어내려오고.

탑의 중턱까지 올라와서 한숨 돌렸다. 짜오프라야 강이 내려다 보이고, 단정한 사원의 뒷끝있어보이는

뾰족한 부리들이 생생히 보이고, 온통 평지인 방콕 시내가 멀리까지 보이고. 남국의 햇살보다

바람이 더 힘센 공간이기도 했다. 따끈한 햇살을 시원한 바람이 산산조각낸 채 사방으로 날려보내는.


그렇지만 이미 상당히 좁아진 공간, 한바퀴 탑을 돌아보는데 좁은 통로를 비비적대며 사진도 찍고

바깥도 구경하는 사람들이 발에 걸리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 사방을 바라보는 각도와 시야가

몇 가지로 제한되어 버리는 곳이기도 했다.

다시 꾸역꾸역, 더이상 방문객에게 허용되지 않는 제한선까지 올라왔다. 조금더 높아졌고

그만큼 멀리까지 방콕을 바라볼 수 있었고, 짜오프라야 강 너머 꼬물대는 사람들이나 차들이

조그만 벌레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아까 중턱쯤에선 남국의 햇살과 바람 사이에 입을

오른쪽으로 벌린 부등호가 한 개 정도 끼어있었다면 여기는 한 두세개 쯤. 햇살<<<바람.


그만큼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워졌다. 공간이 더욱 좁아져서는 이미 올라와있는 사람들이

돌아보는 방향으로 일방통행밖에 가능하지 않았을 뿐더러, 보여지는 세상도 광각으로 잡힌

그저 작고 귀여워서 마냥 용서가 되는 듯한 사이즈. 그러고 보면 왓 아룬을 멀리서 볼 때의

느낌이나, 이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볼 때의 느낌이 같다.

거의 수직에 가깝게 솟아있는 탑의 나머지 상단부, 여기에서도 몇 명의 역사가 조금 졸린 눈을

하고서 탑을 떠받치고 있었다. 조금은 더 인상을 쓰고 있어야 실감이 더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 탑을 떠받드는 것 자체가 굉장한 공덕이라 여겼으리라 생각하면, 저 나른하고

흐뭇한 표정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렇지만 가만 보면 탑 상단부에는 이렇게 코끼리들이 머리를 모은 채 커다랗게 휘영청한 상아 이빨과

길다란 코를 휘두르며 금방이라도 탑 밖으로 튀어나올 듯 육박하고 있는 거다. 조그마한 창문 하나를

완전히 꽉 메운 채 탑의 사방에서 돌진하는 녀석들, 그 무게만 해도..하며 어림짐작해보려다가 말았다.

탑 위에서 내려다보는 왓 아룬의 화려한 전경. 저렇게 길고 가늘게 뻗어있는 첨탑은 어떻게

위에 올렸을까. 길기도 길지만 무게도 무게일 텐데, 균형을 잡고 유지하기도 쉽지 않지 싶다.

언제 이 곳에 공양된 화환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낮을 버텨낸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비실비실 수분을 잃고 축 처져버리긴 했지만 아직 그 색과 향은 여전했다.

다시 내려왔다. 탑을 한바퀴 둘러보기에도 여유롭고, 탑의 위와 아래, 디테일과 실루엣을

내키는대로 올려보고 굽어보기에는 역시 아래에 내려와 있는 게 좋은 거 같다. 위에 오르면

아무래도 시각도, 시야도 특정하게 묶여버리고 마는 거다. 그렇게 여기저기 훑어보다가

발견한 저 일란성 쌍둥이 난간 장식들 틈의 미운 오리 한마리. 훼손된 장식을 회색 시멘트로

그냥 다시 붙여버렸나 보다.



그러고 보면, 역시나 태국 사람들은 참 꽃을 사랑하는 거 같다. 모든 장식문양은 결국 꽃.

넓은 꽃잎, 좁은 꽃잎, 긴 꽃잎, 짧은 꽃잎, 그렇게 왓 아룬 사원 전체를 꽃밭처럼 뒤덮은 꽃들.

탑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토끼 분수대. 금색 토끼가 사실적으로 묘사된 조각이 신묘년

토끼해를 맞은 사람들에게 나름 의미를 던지는 듯 하다. 근데 태국도 십이지신의 개념을

매년 적용해서 의미를 부여하려나, 그건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 곳의 아이들에게 이 사원은 그저 잔디가 파릇파릇 깔려있는 폭신한 공원. 깔깔거리며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아이들이 시선을 확 끌어당겼다.

바로 앞의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짜오프라야 강 동안으로 넘어가는 길, 꽃 한송이 한송이를

묘사하던 타일 조각들, 탑의 구석구석 피어난 그 꽃송이들, 그것들이 그어내던 미묘하고 자잘한

떨림 같은 선들이 싹 걷혀버렸다. 그리고 다시 처음에 봤던 모습 그대로, 단호하고 기하학적인

굵은 선으로 강렬하게 그어진 탑 한덩이만 남아버렸다.


+ 태국여행, 특히 방콕에 들러 이국적인 문화를 만끽하고 싶다면 방콕호텔 예약은 판매못한 객실을

모아 저렴하게 판매하는 '레이트스테이즈'를 추천하니 참고하면 되겠다.





아무 목적지 없이 그냥 걷기..가 이번 여행을 하면서 괜히 별 이유도 없이 세웠던 고집이었는데

생각보다 그런 건 쉽지 않았던 거다. 가다 보면 문득 지금 방향에 대해 두려움이 생기고,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가야 뭔가 중요하고 귀한 걸 놓치지 않을 것 같고, 무엇보다 목적지 없이

휘청대는 걸음 자체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던 거 같다. 망망대해에서 무작정 항해하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조금 타협하기로 했다. 걷다가 여기가 어디쯤인지 지도만 슬쩍 보고 확인하기. 지도를 보고

그곳의 몇몇 이름난 명소를 향해 졸졸 따라가는 길을 인도받으려는 게 아니라, 그냥 정말로

지금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만 확인하면 족한 걸로. 누군가 일러주는 대로 길을 가는 건 이미

한국에서 내비게이션의 지령을 따라 운전하는 걸로 질릴만큼 질려버렸으니까.

그러고 나니 조금은 수월하게 걸을 수 있었다. 한참 걸으며 대충 머릿속으로 여기가 어디쯤일지를

상상하다가, 내키는 곳에서 오렌지주스나 망고를 먹으며 쉬기도 하고, 아님 아예 그럴 듯한

까페에 눌러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슬쩍 지도를 곁눈질하며 어디쯤인지를 확인하는 건 나름의

밀고 당기는 리듬감이 느껴져서 좋았다.

길을 가다보면 문득 차들이 쌩쌩 다니는 고가 도로 위를 걷기도 하고, 맨발의 소년이 낚시찌를

던지는 냄새나는 강둑을 지나기도 했다. 누군가가 굳이 담벼락 위에 CCTV처럼 걸어둔 노랑색

물총을 보며 궁금해 하기도 하고, 차도 옆까지 온통 꽃밭으로 가꿔둔 태국인들의 꽃 사랑에

감탄하기도 하고. 더러 황량한 골목으로 부러 꺽어지며 어떤 풍경과 사람들이 숨어있나 슬쩍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동서남북의 방향감, 얼만큼 걸었는지의 거리감이 상실되면

적당한 표지판 앞에서 지도를 펼치는 거다. 여기가 어디지, 하며.

어쩔 수 없이, 랄까 가다 보면 뭔가가 가까워지고 그럼 자연스레 발길이 그리로 향하기도 했다.

뭔가 커다랗고 특이하고 사람과 가게들이 몰려있는 곳들, 몇 대의 대형버스가 관광객들을 토해내고

거두어가는 그런 곳. 인적없는 곳을 한참 떠다니다가 그런 부산한 지점이 가까워진다 싶으면

마치 철가루가 자석의 자장에 이끌리듯 내 궤적 역시 몇 개 지점으로 수렴하고 마는 거다.

그래도, 그렇게 덥썩 일로직진하여 그곳으로 돌입하고 싶진 않았다. 쿡쿡 찔러보고 슬슬

에둘러가며 멀찍이서 감각하다가 우연처럼 이쁜 까페를 발견해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선그라스를 벗고 시원한 망고&라임 쉐이크를 쭉 빨아서 땀을 식히려다가 차가운 두통에

조금 인상도 써주고. 쿠션을 껴안고 늘어지게 앉아서는 다시 책을 꺼내들어 조금 읽기도 하고.

그렇게 설렁설렁, 이날의 반환점은 왓 아룬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저 걷다가 쉬고 또 걷고, 그렇게 어디로든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선이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또다시 어쩔 수 없이, 나의 걷기 자체도 해와 달에 귀속되고 마는 거였으니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나리면 슬슬 돌아갈 염려를 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러다 보면 언제나 커다란 원의

궤적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해가 정점을 찍고 낙하할 무렵 방향을 홱 틀어야 하는 거다.

러시아 민담이었던가, 하루종일 걸어서 원위치로 돌아온 땅이 전부 자기 것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에 빗대자면 나는 하루치 걸어서 무얼 갖게 된 걸까. 어느 광장에 따끈한 대리석 위에서

엉덩이만 비비가 뭐해서 아예 가방을 베고 에라, 누운 채 해가 떨어지고 퍼렇게 멍들다가

까뭇해지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돌아가야 할 때. 여행을 떠나도 돌아갈 곳은 남는다.

여행을 떠나도 돌아갈 곳은 남는다. 원하던 원치 않던.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다.

조그만 골목에 기대어 테이블을 세우고 음식을 팔았을 허름한 길거리식당, 어디에서나 마주치는

태국 국왕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둥실 떠올랐다.





지도에도 그려져 있지 않은 짜오프라야 강 서안, 방콕의 서쪽 끄트머리에서 만난

갈래갈래 운하길에서 선인장과 조우했다. 조우. 불쑥 에피톤프로젝트의 이 노래가

생각났고 단숨에 가사가 머릿속을 지나갔다. 뭐랄까 가사가 그리는 풍경, 감정이

한순간에 휙 머금었다가 휙 빠지는 느낌이, 마치 스펀지를 미지근한 물에 푹 담궜다가

힘주어 꽉 짜내는 그런 기분이었다.


잔뜩 구겨진 스펀지로부터 손을 타고 끈적한 물이 뚝뚝 흘러떨어지듯, 그렇게 땀이

얼굴에서 뚝뚝 떨어졌더랬다. 어쩔 수 없었다. 알지만, 땀이 흘러주어 다행이었다.

어쩔 수 없었지만 맘이 아픈 것도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선인장, 에피톤프로젝트.


햇볕이 잘 드는 그 어느 곳이든

잘 놓아두고서 한 달에 한번만

잊지 말아줘, 물은 모자란 듯 하게만 주고


차가운 모습에 무심해 보이고

가시가 돋아서 어둡게 보여도

걱정하지 마, 이내 예쁜 꽃을 피울 테니까


언젠가 마음이 다치는 날 있다거나

이유 없는 눈물이 흐를 때면 나를 기억해

그대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줄께


내 머리 위로 눈물을 떨궈

속상했던 마음들까지도

웃는 모습이 비출 때까지

소리 없이 머금고 있을께


그 때가 우리 함께 했었던 날 그 때가

다시는 올 수 없는 날이 되면

간직했었던 그대의 눈물 안고 봄에서 있을께


언젠가 마음이 다치는 날 있다거나

이유 없는 눈물이 흐를 때면 나를 기억해






주홍빛 옷을 둘둘 감고 머리를 박박 밀은 승려들에 대한 태국인들의 존경심과 신심은

정말 대단한 거였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가 희끗거리는 할아버지가 두 승려와 함께

길을 걷는 모습을 보았고, 할아버지가 번쩍 치켜든 검정우산이 그 두 젊은 승려의 몸위로

온통 서늘한 그림자를 내리뜨리는 모습을 보았다.

터미널이나 공항에 있는 의자에도 마찬가지. 늙은 할아버지가 젊은 승려들에 깍듯하게 양산을

받쳐주는 그림에야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들의 '노약자석'에는 어김없이 승려가 들어가있다.

마치 미이라처럼 온몸에 둘둘 천을 감고 있는 듯한 형상이 바로 승려, 그러고 보면 '노약자석'이란

우리나라식의 이름이 적절하지만은 않은 듯. 장애인석, 노약자석의 개념에 담기지 못했던

임산부들을 위해 별도의 스티커를 붙이곤 하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배려석' 정도의 넓은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지.

어느 골목을 걷다가 문득 호기심이 동해 들어갔던 이름모를 조그만 사원의 뒷뜰. 그리고 빨랫줄에

내걸린 채 산뜻하게 색깔을 내고 있는 승려들의 주홍색 천들. 정말 저 옷에는 앞도 없고 뒤도 없고,

그저 적당한 모서리를 잡고 적당하게 몸에 감으면 되는 걸까 싶어졌다.

그리고, 스님들의 거쳐 주변에서 떠들지 말아달라는 저 절박하고 단호한 손바닥 그림. 실은

저 그림이 떠들지 말라는 건지 들어오지 말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스님들이 근처에

계시니 행동을 조심하고 삼가라는 의미란 건 충분히 알고도 남겠다.





전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래서 '빅맥지수' 따위의 경제학적 개념에도 동원되는

맥도널드는 나라마다의 특성을 살려낸 메뉴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거다. 터키에서는

돈두르마 아이스크림을 팔기도 하고, 한국에선 라이스버거였던가. 뭐 그런 식으로.


태국에서도 그런 식으로 신메뉴를 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들어가서 메뉴판만 슬쩍

일견했어도 쉽게 알아챘을 테지만 음식의 나라 태국에서 맥도널드라니 안 될 말이다.

대신 발견한 건 맥도널드의 상징, 로널드.


노란 아치형 맥도널드 마크와 빨간 머리, 큰 구두를 신은 삐에로, 그의 이름이 바로

로널드였다. 이름은 이제야 여기저기 검색하다 알게 되었지만 그 캐릭터야말로 미국과

맥도널드의 영향력을 상징하는 아이콘 아닐까. 63년에 TV 광고를 통해 최초로 선을 보인

로널드는 이후 미국 중심의 세계화 물결 맨 앞에서 영욕을 겪어온 셈이다.
 

그런 와중에 나름의 변화를 겪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한다. 비만의 주범으로 패스트푸드가

지목되는 가운데 헐렁한 노랑옷이 예전과는 달리 몸에 꼭 맞게 바뀌는가 하면, 프랑스에서는

로날드 대신 프랑스 만화인 '아스테릭스'의 캐릭터가 나타나기도 했다고.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에선 매출이 부진하다고 하이힐과 비키니 차림의 날씬한 여성을

새 마스코트로 쓰겠다나.

하이힐 여성이니 만화 캐릭터니 보다, 이 로널드는 꽤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한 셈이다.

태국에 대한 외국인의 이미지는 아무래도 그 우아한 손놀림과 해맑은 미소, 그리고 그런

손놀림과 미소가 어우러진 인사가 강렬하게 박혀있지 않을까. 두 손을 앞으로 기도하듯

모으고 상대를 향해 슬쩍 고개를 숙이는 인사.



"싸와디~"(안녕하세요, 라는 뜻의 태국어).




방콕에 가서는 꼭 들르게 되는 바가 있다. '색소폰Saxophone'이라는 이름의 재즈바.

방콕 북쪽 전승기념탑 근처에 있는 이 라이브바는 9시부터 라이브 공연을 시작하는데 그다지

한국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곳 같다. 사실 장소도, 시외로 나가는 버스들이 우르르 서있는

큰길가에서 조금 빗겨나 예기치 않은 장소에 놓여있어 찾기도 쉽지 않다.

그렇지만 막상 들어가면, 맥주 한병에 120-150바트 정도 과히 비싸지는 않은 가격에 주로 서구에서

온 외국인들이 우글우글하다. 게다가 공연 라인업도 가히 방콕 최고의 퀄리티를 자부한다는.

9시 이후 본격적으로 밴드들이 공연하기 전엔 가볍게 클래식 기타 공연, 이렇게 맥주 한잔 마시면서

다이어리도 정리하고 엽서도 쓰고. 중간중간 곡이 끝나면 박수쳐주는 거 빼고는 오롯이 내 시간이다.

아마도 Byrd의 초상화인 듯한 그림이 한 점 천장 가까이에 걸려 있고 알토, 테너, 소프라노

색소폰들이 반짝반짝 빛내며 전시되어 있었다. 알토 색소폰을 손에서 잠시 놓은 게 어느새

육개월, 나도 얼른 다시 시작해야 할 텐데.

아홉시가 지나니 이렇게 저렇게 마이크도 체크하고 한참을 부산하게 굴더니 꽤나 시간을 잡아먹는다.

근 이십여분 가까이 지나서야 겨우 시작한 밴드는, 그렇지만 그 기다림이 전혀 아깝거나 화나지

않을 만큼 훌륭하고 그럴듯한 공연을 보여줬다. 특히 뒤에서 알토 색소폰을 불던 저 까까머리 아저씨.

알토 색소폰 말고도 플룻도 불고 테너 색소폰도 불고, 여차하면 트럼펫도 같이 부는 굉장한 실력을

보이며 화려한 손놀림과 입놀림을 보였댔다.

10시쯤 되니까 사람들이 바를 가득 메우고 급기야 자리가 없어 벽에 기대어 서서 병맥주를 홀짝이는

사람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바 한쪽 벽면에는 실내 소음크기를 측정하여 보여주는 전광판이 대충

80에서 90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데시벨을 나타냈고.

원래는 열한시쯤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글쎄 금세 새 밴드가 와서 공연을 한다는 거다. 이미 앞의

밴드가 후끈 달궈놓아 흥분한 혈관에 알콜이 더해졌고, '색소폰'에 대한 신뢰가 더했다. 그렇게

조금 더 기다려 맞이한 두번째 밴드, 역시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최고였다. 특히 저 건반을 맡은

아저씨의 무시무시한 속주 실력이란.

그리고도 저 귀여운 아가씨와, 슬쩍 우습게 생긴 이 아저씨의 노래 솜씨는 정말 들어보지 않고는

말을 할 수도 없는 정도. 바를 온통 후끈 달군 채 사람들을 열광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던.

하나 아쉬웠던 점이라면 저 아저씨가 신고 나왔던 모카신, 그리고 공연 시작 전 기타리스트의

엉덩이를 슬쩍 만지며 들어서던 모습을 내가 똑똑히 보고 말았다는 것. 사실 내가 특별히 아쉬울

부분이란 게 있을 것도 없지만 저런 모카신을 소화해낼 수 있다는 게 대단해 보였다.

후끈 달아오른 바의 관객석. 원래는 8시쯤 들어갔으니 세시간 정도만 놀다가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한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야 아쉽게 아쉽게 돌아서고 말았다.

혼자 하는 여행의 장점이랄까, 딱히 정해진 스케줄 없이 다음날 일정에 대한 압박감없이

그냥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고 싶은 시간만큼 머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장점을

최대한 뽑아쓸 수 있게 해주는 공간, 색소폰이었다.





왓포에서였던가, 금발 꼬맹이 하나가 잔뜩 늘어진 고양이를 일으켜 세우려고 무진 애를 쓰는 중이었다.

고양이한테 소리도 질러보고, 슬쩍 꼬리나 귀를 잡아당겨보기도 하고. 그럼에도 철저히 몸뚱이를

내팽개친 채 끄떡없이 눈을 감고 있던 이 녀석. 야윈 목덜미를 감싼 색색의 목걸이가 눈에 닿았다.

방콕 가이드북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은 짜오프라야강 서안, 운하가 촘촘한 그 어디메를

헤매이다 발견한 늠름한 개자식. 더럽고 위험해보이는 이곳에도 피터팬과 푸우는 살풋

이불보처럼 내려앉아서 개자식의 위용에 커튼을 더했다.

실은 이 녀석의 밥을 훔쳐먹는 두 마리 까마귀를 담고 싶었는데, 영악한 녀석들은 카메라

렌즈 움직이는 소리에 멀찍이 도망가고 객쩍은 참새만 남아서 부리질 중이었다. 그나마도

찰칵, 소리에 눈을 뜬 개자식은 더운 나라의 개답잖게 미친 듯이 짖어대며 밥값을 했다.

빡크롱 꽃시장에서, 핏줄이 섞인 듯한 이 두 녀석이 늘어지게 자는 걸 보고 접근했더니 두 녀석

모두 어느 순간 번쩍 눈을 뜨고 말았다. 앨런포의 '검은 고양이'를 떠올릴 만큼 악마처럼 새까맣던

녀석들의 잠을 방해했단 사실이 따끔따끔해지도록, 그렇게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대던 녀석들.

이렇게 서글서글한 눈빛이라면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꽃시장의 아지매들, 아저씨들이 슬쩍

쌀국수 그릇을 걸친 채 한끼를 해결하던 식탁 대용 테이블에 퍼진 채 남국의 고양이다움이란

이런 것임을 늘어지게 과시하던 녀석.

오늘은 동쪽으로 걸어볼까, 싶던 날. 차도와 인도가 슬몃 섞여들어가던 어느 길 위에서 지하세계로

통하는 비밀의 문을 발견했다. 절실한 손과 발 모양으로 그곳을 갈구하던 도마뱀 한 마리, 도망갈까

싶어 조심조심 사진을 찍고 나서 한숨돌리며 슬쩍 발로 밀었더니 슬슬 밀린다. 고인의 명복을.

아침에 먹던 쌀국수와 캔맥주를 제하면 사실 남국의 과일로 배를 채우다시피하던 낮의 시간,

그에 더해 맥주와 재즈 공연 따위로 버무려진 저녁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배가 꾸륵꾸륵꾸르륵.

어딘가 있을 무료 화장실을 찾아 애타게 방황하던 타이밍에도 고양이는 놓칠 수 없었다.

날 그렇게 심문하는 눈초리로 노려보지 말기를. 나 역시도, 너 역시도 왜 사는지는 모르잖아.

우린 이제 요절하기엔 너무 많은 나이. 한 시간에 이백바트짜리 타이 마사지로 몸을 풀기에는

배배 꼬인 구석들이 워낙 많더란 말이다. 근데, 심문을 하려는 거냐 아님 측은해하려는 거냐.

싸판풋 야시장, 라마1세 동상이 서 있는 앞에서 불경하게도 두어 시간 누운 채 노래를 듣고 책을

읽으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었다. 따끈하게 달아오른 대리석 화단조각에서 내 게으른 등짝을

떨어뜨렸던 건, 어디선가 웽웽거리며 나타난 R/C 카, 그리고 그 자동차를 따라 짧은 발을 재게

놀리며 눈을 뗄 줄 모르고 내달리던 강아지 한 마리.

방콕의 물가는 많이 올랐다. 타이 마사지는 삼십분에 백바트, 한시간에 이백바트. 이건 그나마

배낭여행객의 천국, 게으름뱅이들의 천국 카오산의 시세고, 이런 이쁜 고양이가 지키는 다른

동네에선 한시간에 이백육십여바트. 고양이값이라기엔, 저녀석은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다는.

카오산 동쪽으로 걸어볼까 싶던 날이었다. 예기치 않게 마주친 골든 마운틴, 푸 카오 텅의

황금산을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슬쩍 풍경과 섞여있던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울룩불룩한

탑의 무늬에 스며든 채 달게 자던 녀석이 부러워 굳이 탑모서리를 밟고 다가가선 카메라를

들이밀었더니, 심술궂은 눈을 번쩍 뜨고 만 녀석의 심통스러움이라니.

남쪽으로 걷던 날이었다. 팟퐁을 지나 쑤언 룸 나이트 바자를 가는 길은 무슨 공원을 하나

끼고 있었더랬다. 공원을 따라 걷는 길에, 불쑥 난 경련하듯 몸을 떨며 잠시 멈춰선 채 저

미지의 생물체가 뭔지 곰곰이 뜯어봐야 했다. 이 거대한 도시 한 가운데 수로를 유유히

헤엄치던 저 녀석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래, 룸피니 공원. 이리저리 물길을 품고 있는 그 공원의 울타리 저쪽으로, 더러는 버스 정류장

뒷편의 깨어진 콘크리트와 벽돌 자재들 사이로 일미터는 쉽게 넘을 거대 도마뱀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비둘기가 심상히 도마뱀의 상륙을 바라보듯, 정류장의 태국인들은 심상히 도마뱀들을

눈으로 좇고 있었던 거다. 거대 도마뱀을 품고 있는 도시, 방콕.

미국식으로라면, Cock-a-doodle-do!의 순간이랄까. 카오산 로드 앞의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에 들어맞을 그 사원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오만한 수탉 녀석이 시도 때도 없이 목을 뽑아쥐고

꼬꼬댁을 외치던 타이밍이었다.

남국의 개들은 남국의 고양이들만큼이나 축축 늘어진 채 순한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그 앞을 장군처럼 꼿꼿한 걸음걸이로 비장한 히프를 내민 채 사열하는 수탉들의 위엄이라니.

태국에서, 태국의 방콕에서 만났던 개와 고양이와 닭, 그리고 더러는 도마뱀들에 얽힌 이야기들.






젖이 팅팅 불은 채 아파하는 암소처럼, 누군가에게 사랑을 쏟지 못해 힘든 마음.

이전에는 몰랐다. 사랑받으려는 욕구보다 큰 게 사랑하려는 욕구임을.


내가 주는 걸 최대한 흘리거나 튕겨내지 않고, 가능한 오롯이 받아낼 수 있는 사람.

사람은 변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정말 인연이란 게 있을지도 모른다.


스무 살 때나 지금이나, 더러 기억하기도 부끄러운 치졸한 이별과 유치하고 눈멀었던 사랑을

겪고 난 뒤에도 결국 난 변하지 않았다.

말그대로 푸지게도 피어있던 꽃들.

꽃 하나하나의 이름은 모르지만, 어느 시인이 그랬듯 굳이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야 내게 와서

꽃이 되는 건 아니었다. 꽃의 이름을 몰라도, 아니 그것이 꽃인지 꽃잎인지 실은 꽃받침인지 몰라도,

그저 바라만 봐도 마음이 화사해지고 열포름하니 가벼워지는 존재들.


혼자 떠난 여행, 어디서나 꽃들이 함께 했다.



@ 태국, 방콕.



오랫동안 생각만 하고 있었다.


5년전, 일년반 기약하고 매달렸던 공부를 마치고 태국으로 놀러갔을 때부터 꽂힌 타투였다.

몇 군데 샵을 알아보고 샘플북을 뒤져보았지만 딱히 멋진 도안을 찾을 수가 없기도 했고

조금 무섭기도 하여 그때는 그냥 타투 대신 헤나로 만족하고 말았었지만, 헤나는 역시 일주일도

못 가서 뭉개져버리고 말았었다.


카오산 로드에 숙소를 정하고 나서 마음 내키는 대로 느적느적 놀기로 맘먹은 여행이었다.

눈뜨이면 일어나고, 대충 씻고 걸쳐서는 나가서 쌀국수와 캔맥주 하나로 아침, 오늘은 서쪽으로

걸어볼까 싶으면 서쪽으로 걷고, 동쪽으로 걸어볼까 싶으면 동쪽으로 걷고. 저녁에는 재즈바나

라이브클럽에서 공연을 보고 들으며 맥주를 마시고, 오렌지와 망고, 철지난 두리안까지 과일로

잔뜩 배를 채우며 가져간 책들도 다 읽고 다이어리도 꼬박꼬박 쓰고. 사진도 잔뜩 찍고.


그렇지만 이번에도 카오산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뜨인 건 역시 타투샵들. 돌아다니다 덥다 싶으면

에어콘이 빵빵한 샵에 들어가 샘플북을 뒤적거리며 맘에 드는 도안을 찾았다. 아쉽게도 대개가 무식하고

무시무시한 데다가 큼지막한 녀석들이어서 번번이 땀만 식히고 일어나길 수 차례, 드디어 맘에 드는

도안을 발견했다. 그렇게 커다랗지도 않고, '조폭'스럽지도 않으며, 평생 몸에 새긴 채 살아갈.


타투샵 전면에는 이런 경고문이 붙어있긴 했지만, 사실 위생상의 문제는 딱히 걱정스럽진 않았다.

내가 특별히 심장질환이나 질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타투 아티스트도 태국의 타투 대회에서

몇차례나 상을 받았던 사람이라고 하니까 실력없고 장비없는 '야매'의 어설픈 솜씨로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있을 거 같지도 않고.


그렇게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몸에 새겨넣을 순간이 다가오니까 살짝 긴장했다.

몸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 같은 거니까. 가볍게 생각하면야 어디서 사고로 죽더라도

내 시체는 손쉽게 찾겠구나, 식일 수도 있는 거지만 무거워지기 시작하면 한없어지는 거다.

회사에서 뭐라고 하진 않을까,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어떻게 보려나, 주위 여자들은 어떻게

보려나, 나중에 결혼할 때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 나중에 후회하게 되면 어쩌나.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고민, 주사맞기도 뜨악해하는 내가 일초에 구십번 다다다다 바늘이

찔러대는 타투머신 앞에서 괜찮으려나. 많이 아프진 않을까. 타투 아티스트가 본을 그리고

위치를 맞추어 내 몸에 본을 옮기는 와중에도 슬쩍 진땀이 났다. 새기다가 기절하지나 않을까,

발버둥치다가 바늘에 푹 찔려서 출혈과다로 급살맞는 건 아닐까 따위 망상이 시작됐다.

이미 돈은 다 냈는데, 걍 돌려달라고 하고 도망가버릴까.


근 한 시간, 재봉틀 소리를 내며 맹렬하게 움직이는 바늘이 파란색을 머금었다가 검은색을 머금은 채

몸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생각보다는 덜 아팠는데 특정 부위에 집중되다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아려오는 느낌이었다. 그치만 점점 아픔의 강도가 세지면서도 어느 순간 그정도 아픔에 만성이

되었는지 약간은 시원하다거나 자극적인 쾌감이 느껴지기에 이르렀고, 바늘 끝에서 그려지는 그림을

매의 눈으로 관찰하며 선이 조금 엷다거나 저기 조금 색칠이 덜 되었다는 식의 지적질까지.


흔히 '낙인'을 찍힌 사람은 그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곤 한다. 만화에서든

성경에서든 드라마에서든 언젠지 모르지만 죽고 몸이 썩어질 때까지 변치 않을 그 낙인의 존재가

굉장히 의미심장한 메타포로 쓰이듯이, 타투의 무게 역시 정말 굉장히 무겁구나, 생각했다.


주어진 대로 쓰고 있는 몸뚱이에 내 의지로 결정한 뭔가를 그려넣고, 이 몸은 내가 장악하고

있음을, 이 몸에는 다른 몸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하나의 흔적이 있음을 말없이 보여주는 거니까.

내 몸에 대해서 남들이 뭐라고 하던 어떻게 보던, 그런 거 개의치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며

살겠다는 조용한 저항 같은 걸 수도 있겠다. 최소한 내 몸만큼은 내 의지대로.


어쨌거나 이러저러한 의미 따위야 좋을 대로고, 이뻐 죽겠다. 이걸 찾으려고 몇 개의 타투샵을

뒤지고, 또 몇몇 권의 샘플북을 정독한 보람이 있었다. 이 그림을 새긴 채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느낌이라면 너무 과한 걸까. 최소한 ver.1.0에서 ver.2.0으로 렙업은 한 느낌.


I inked TATTOO.



BGM : '마도로스K의 모험 Ⅱ' from 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


외도를 한바퀴 걷고 돌아나오던 길, 선착장이 가까워졌다 싶어서 바다를 내다보니 오밀조밀

덩어리가 하나 떠 있었다. 뭔가 싶더니 점점 선명하게 보이는 그것은 똑같은 사이즈의 배 다섯 척.

외도를 오가는 수십대의 선박들이 시간에 맞추어 선착장에 들고 나면서, 기다리는 배들은

저기에 사이좋게 나란히 정박을 해두고 있나보다. 자동차에 비기자면 저기는 일종의 주차공간,

선도 그어지지 않은 바다 위에서 솜씨좋게도 딱딱 기장도 맞추고 각도도 맞추어 주차를 해뒀다.

그 와중에도 한 대가 새롭게 주차를 하려는지 그 옆으로 접근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모자라

미처 '마도로스K'의 마술적인 주차 실력을 일견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다섯 대가 이렇게 우르르 정렬해선 바다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떠 있으니 재미있다.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무너뜨린 '연환계'가 떠오르기도 하고, 뭔가 선박들을 모아 커다란

벽을 만들어둔 느낌.





@ 외도, 소매물도.

조그만 선착장 위에 부려진 채 커다란 동물처럼 웅크리고 있던 짐꾸러미와,

어딘가에 그 끝이 묶이지도 않은 채 하염없이 감겨있을 뿐인 투박한 밧줄과,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움키고 있었을 구명튜브의 뻥 뚫린 가슴 속으로,

병풍처럼 앞바다를 둘러친 섬들의 어깨를 훌쩍 짚고 넘은 햇살이 달겨들었다.



@ 외도 선착장.

되는 대로 쓰다보니, 아이폰 음악폴더니 사진폴더가 너무 지저분해져서 빈 공간도 얼마 안 남았다.

정리도 할 겸 사진도 옮기고 하다가 발견한 사진들, 재미있다 싶어 찍은 사진도 있고 아이폰치곤

제법 분위기있게 나왔다 싶은 사진도 있고.

퇴근길에 발견한, 어느 차에 붙어있는 '집주인'의 메모. 우리 차는 어디에 주차할까요. 뭔가

적나라하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면서도 그 심경이 생생히 전해진달까.

어디였더라, 어디선가의 음식점에서 계산서를 받았는데 저런 꼬릿말이 붙어있었다. 평소에

카드영수증을 한번씩 보고 찢어버리는지라 발견할 수 있었던 아홉 음절.

경기고였던가, 주말에 무슨 시험감독하러 갔다가 화장실에서 발견한 스티커였던 듯.

남학생이 담배를 피우면 1) 매사에 떳떳치 못하며 자신감이 떨어진다. 2) 어쩌구저쩌구

여학생이 싫어한다. 4) 지저분한 사람이 되기 쉽다...하나하나 넘 웃기기도 하고 어이없는

협박 같기도 해서 찍어놨었다.

친구와 요거트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다가, 괜히 둘다 뭔가 불끈한 맘으로 아이스크림에

조각을 해 버렸다. 반반이 다듬어 비석처럼 세워둔 후에 숟가락으로 살살, 구멍이 뽕

뚫려서 반대쪽 풍경이 하얀 배경 속에 들이차던 순간에 꽤나 기뻤다. 바보같이.

통인동 쯤의 어느 까페를 찾아가다가 만난 표지판. 이게 뭔가 싶었는데, 의미는 사실 바로 다가온다.

조용히 해달라는, 클랙숀 울리지 말고 애 울리지 말고 소리치며 싸우지 말라는 뜻이겠지.

사무실에 굴러다니던 하회탈 모형 두개, 슬쩍 얹어놓고 괜한 연출 한번. 코가 워낙 커서 조금더

얌전한 포즈는 불가능,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제법 꺽어서 진한 키스. 하회탈끼리.;

작년 부처님 오신 날에 코엑스 입구에서 찍은 사진. 탑을 수호하고 있는 사천왕 등이 멋졌었다.

코엑스몰 안의 어디메쯤에서, 파란 하늘로 향한 유리돔. 기하학적인 패턴이 재미있었다.

이태원 이슬람사원(모스크)에 갔을 때, 모스크 앞 계단에 쪼르르 앉아있는 무슬림들의 나른한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사진만 보고서는 여기가 한국인지 아랍지역의 어디인지 잘 모를 지경.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데, 집앞 놀이터에 있는 조그마한 벤치에 의경 네 명이서 쪼르르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콱 들어왔다. 제법 쌀쌀하던 가을날이었던 거 같은데 안쓰럽기도 하고.

술에 절어서 집으로 들어가던 어느날, 차라리 나도 어디론가 견인되었으면 좋겠다 싶던.

길가에 조금씩조금씩 토하며 걸었던 거 같은데,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말줄임표가

커다랗게 그려지겠구나..술김에 그리 생각했었던 날.

G20의 광풍이 세상을 덮던 즈음, 트레이드타워에도 포장지가 덮였다. 맞은편 한전건물이 이미

과하게 싸여진 선물상자처럼 퍼렇게 휘감겨있었고, 이곳은 조금만 살짝.

코엑스 국화꽃축제가 있던 때, G20 준비와 맞물려 조금 산만하긴 했지만 저 거대 공작새는 꽤

맘에 들었었다. 여느때처럼 건물 기둥뿌리를 온통 감싸돌던 노란 국화잎들은 꽃잎 하나하나가

탱글탱글,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고.

경주에 갔을 때, 들고 갔던 카메라가 부서지는 바람에 아이폰으로만 남겨야 했던 풍경들.

천마총이 있는 대릉원 산책길을 거닐다가 홀로 선 나무를 만났다. 가슴처럼 봉긋하고 따뜻하게

둥그스름하던 고분들을 뒤로 한 채, 마치 수묵화의 한 귀퉁이에서 튀어나온 듯한 나무.

부산에서, 모처럼 만난 군대친구들과 2차던가 3차로 갔던 다트바. 싫다는 녀석들을 때려가며

사선에 세우고는, 어찌된 일인지 내가 던진 다트 세 개가 모두 대충 가운데에 꽂혀버렸었다.

엄밀하게 따져서 세 개 모두 50점짜리에 전부 들어갔다고는 딱히 말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그래도, 딱히 50점이네 25점이네 따지기보다 가운데에 옹기종기 모인 모습이 이뻐서.



주말이면 아키하바라의 넓은 대로는 차 대신 코스프레 걸들로 가득 찬다고 그랬었다.

가이드북에 딱 한 줄, 그렇게 나온 정보만 믿었던 게 실수였던 거다. 코스프레걸들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주말에 맞춰 당도했던 아키하바라는 전혀 예상과 다른 곳이었다.


* 알고 보니 코스프레는 하라주쿠에서 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하라주쿠 역 근처 다리 옆이

본산이라던가, 아키하바라는 건물 내 실내에서 드문드문 볼 수 있는 정도라고.


코스프레걸들이 제각기 빼입고 온 의상과 제스처를 선보여야 할 넓은 대로 위엔 차들이

씽씽거리고 달리고 있었고, 대로변엔 온통 게임샵들 뿐. 플레이스테이션 같은 게임기를

직접 체험해보는 사람들이 있고, 줄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흘낏흘낏

구경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게임엔 별로 관심이 없으니 그대로 전부 스킵하고 지나자니 이제 망가샵들이 나타나기 시작.

코스프레걸들을 구경하는 대신 애니메이션 샵들을 구경하기로 맘을 정하고, 5-6층짜리

건물이 통째로 애니메이션 관련 상품을 파는 그런 건물들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활용한 상품들이야 한국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거지만, 이런 식으로

캐릭터들의 코스튬을 파는 가게들은 신기했다. 유니폼이나 응원복 같은 걸 맞추는 옷가게나

수선집 같기도 하고, 다소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빨강 파랑 원색의 의상들이 줄줄이 걸려있었다.

그 와중에 조금 비싸고 질이 좋아 보이는 옷은 이렇게 마네킹에 입힌 채 디피되어 있었고,

에메랄드색 가발도 가발이지만 머리뒤로 깍지낀 두손의 포즈는 또 뭔가 싶고. 그래도 저런

옷은 옷걸이에 빼곡하게 걸려있는 다른 것들과는 달리 인간이 입을 수 있겠다 싶은 느낌.

재질도 그렇고 모양새도 그렇고.

샵마다 조금씩 퀄리티나 분위기가 달랐는데, 내 취향은 (굳이 따지자면) 이런 쪽이랄까.

원색의 빤짝거리는 나이롱 재질의 옷들 말고, 단정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의...ㅋㅋ

굳이 치마가 잔뜩 짧을 필요도 없지 싶은 건, 역시 에반겔리온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인지도.

여전히 에반겔리온의 캐릭터들이 살아있구나 싶어서 기쁘기도 하고, 그 이후 이만한 작품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거지 싶어서 아쉽기도 하고.

그러다 발견한 재미난 상품 하나. '원피스'의 캐릭터들이 제법 에로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물건의 용도는 바로 마우스 패드였던 거다. 이미 만화에서부터 풍만하게 그려졌던 그녀들의

가슴을 팔목받침으로 써서 손목의 피로도 줄이고 터널증후군도 방지하겠다는 그 갸륵하고도

참신한 발상이라니. 그 유쾌한 용도를 확인하는 순간 빵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슬쩍 올려보는 '공기인형' 상품. 배두나가 주연했던 영화 '공기인형'에서 첨부터

끝까지 등장했던 녀석들이 이런 실리콘 재질의 물컹이는 것들이었던 거다. 푸시시식, 하며

바람 빠지는 장면과 그 때의 배두나의 눈빛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영화.

[공기인형] 짤그랑대는 기네스 병맥주,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그 밖의 건담이니 뭐니 캐릭터가 반영된 여러 성인용품들도 한쪽에서 팔고 있었고, 그것들의

모양새라거나 특징들이 어찌나 변화무쌍하던지 자꾸 눈이 가더라는.

그 밖의 여러 기기묘묘한 것들이 잔뜩 있었지만 차마 사진으로 담을 수는 없어서 그저 두눈으로

마음으로 곱게 담아두고, 잠시 바람쐬러 건물 밖으로 나와 또다시 옆 건물로.

아마 사무실에 저런 넥타이를 하고 가면 당장 출근길에서부터 쏟아지는 눈화살에 맞아

죽어버리지 않을까. 쟤는 뭘까, 하는 의구심과 경계심을 가득 품은 눈화살들.

귀여운 물건들도 많아서, 저런 다양한 이모티콘이 그려진 컵이라거나, USB 포트에 꽂으면

쉼없이 자전거 페달을 젖는 강아지라거나, 질릴 줄 모르고 돌아보게 되는 마력이 있던 곳.

캐릭터를 활용한 음식도 한가득이었다. 이름하야 '메이드 쿠키'. 메이드 복장을 한 꼬마아가씨가

귀여운 저 포장 때문이라도 한번 더 눈이 가게 되는.

웃기면서도 다소 의미심장한, 나이키 로고를 패러디한 NEET 로고. No Job, No Guts.

Just Don't do it이란 절묘한 말장난이 일본의 심각한 청년실업과 고용불안을 시사하는 듯.

그리고, 무엇보다도 맘에 들었던 건, 심지어 저 가슴을 활용한 마우스 패드보다도 훨씬 맘에

들었던 건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캐릭터상품들. 지브리 스튜디오 샵에서도 못 봤던 것 같은

캐릭터상품들이 많이 있었다.

아...이 녀석들을 하나씩 수집하는 건 어떨까, 싶다가도 저 만만치 않은 금액에 깜놀해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하야오의 아이들.

그리고 마치 우리나라 모든 관광지에서 똑같은 등긁개니 곰방대니 옥돌이니 따위 파는 것처럼,

도쿄의 어느 관광지에서고 팔고 있던 녀석. 복던지는 고양이 스몰사이즈가 우르르.

건물 안에 들어가 샵들을 구경하는 데도 워낙 재미가 쏠쏠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러저러한 캐릭터상품들도 구경하고, 일본냄새가 물씬한 아이디어상품들도 보고,

그러다가 밝은 햇살 속으로 나오면 또 드문드문 메이드복을 입은 아가씨들이 이런

메이드샵 광고지도 나눠주고. 만화캐릭터의 뽀얗고 맑은 피부, 커다랗고 그렁그렁한

눈망울, 여릿한 허리와 가늘고 기다란 다리 따위와는 전혀 거리가 먼 그녀들이

우르르 찍혀 있는 광고지를 요모조모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던 일본의 추억 중 하나.



하코네의 어느 료칸, 잠깐 들러서 온천욕만 즐기다 갈 수도 있고 혹은 아예 숙박을 하며

온천을 즐길 수도 있는 곳이라는데, 도쿄에서 꽤나 떨어진 하코네까지 와서 하루만에

돌아가거나 료칸 대신 일반 숙소에 머무는 건 좀 아닌 거다. 분명히 싼 가격은 아니지만

온천의 질이나 시설들, 그리고 숙박비용에 포함된 저녁식사와 아침식사가 워낙 훌륭하니

절대 강추. (훌륭한 저녁식사에 대해서는 하코네, 어느 료칸의 감동적인 저녁식사.)

료칸 입구 신발장에 정리되어 있던 색색의 게다들. 아무거나 본인이 원하는 걸 골라서 신고 다닐수

있었는데, 따그닥 따그닥 소리가 재미있어서 신고 나가선 가볍게 동네도 한바퀴 돌아봤다. 생각보다

굽이 높고 발 앞굽과 뒷굽사이 간격도 좁아서 뒤뚱뒤뚱, 여자들 킬힐 신음 이렇지 않을까 싶은

느낌으로 신발 위에 올라타서 걷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던.

삼층짜리 료칸 건물 옆에는 정기적으로 하코네 역과 료칸 사이를 오가며 손님들을 옮기는

고풍스런 수송차량이 한대 서 있었다. 버스라기에도 뭐하고, 승용차라기에도 뭐한 클래식한

느낌이 물씬한 차. 조금 일찍 시간을 맞췄으면 이 차를 타고 편하게 료칸에 도착했을 텐데,

돌아다니다가 늦어서 택시를 타고 손짓발짓으로 설명해서 들어왔댔다.

료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신사. 밤이라 많이 어둑어둑해지고 나니 왠지 조금

으스스한 느낌이 들어서 안으로 들어가보려다가 포기하고, 여기서 짧은 게다 산책은 끝.

복던져주는 고양이야 뭐, 한국에도 이미 워낙 많이 퍼진 일식 밥집과 술집들에서 익숙하지만

이렇게 천으로 만들어진 건 못봤던 거 같다. 도자기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좀더 따뜻한 느낌이 배어나오는 고양이다.

다다미가 깔려있는 나무바닥은 반질반질 윤이 나서 천장의 형광등 불빛을 고스란히 되비치고

있었고, 나무색이 가득한 안온한 일층 로비의 분위기는 이층, 삼층의 객실과 식당 같은 곳까지

전부 이어져 고급스럽고 편안한 기분을 주었다.

한쪽에는 이렇게 유카타를 진열해놓기도 하고, 회의나 기타 목적으로 쓸 수 있는 방도

마련해 두었다. 여럿이면 오면 저런데 둘러앉아 보드게임을 하는 것도 괜찮을 듯.ㅎ

남녀 욕탕으로 들어가는 앞에는 이런 100엔, 200엔짜리 뽑기 기계도 놓여있었다. 아마도

아이들의 마음을 자극하려는 용도 아닐까 싶지만 또 잘 살펴보면 하코네의 특색이 담긴

뭔가를 뽑을 수 있는 것 같다. 어른들도 기념품삼아 한번 돌려봄직 하겠네, 싶어졌다.

고양이 인형이니 클래식한 돌림식 전화기니 료칸 복도나 벽면을 꾸미고 있는 것들도 하나하나

눈길을 붙잡아 두는 것들이었다. 미처 사진은 못 찍었지만, 밤새도록 울어대는 귀뚜라미들

소리가 어디선가 녹음해둔 걸 무한 재생시키는 건가 했는데 알고 보니 귀뚜라미들을 잡아서

기르는 통 안에서 '쌩 레알'로 난 거라는 것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고양이 문양이 가득한 벽면도 있고. 유카타를 입은 내 모습도 비쳐보이고.

여기저기에 숨어있는 고양이 인형들, 어디서 요런 귀여운 것들만 모아뒀는지, 장식품들

하나하나가 다 허투루 만들어진 싸구려같진 않은데.

그리고 아마도 이 토끼는 몸 속에서 양초나 향을 태우는 용도로 쓰이는 거 아닐까. 아랫배 쪽에

구멍이 뽕뽕 뚫려있는 걸 보면 저기서 뭔가 연기가 송송 나오던 불빛이 새어나오던.

이제 방 내부로. 간결한 수납공간과 거울이 붙어있고, 역시 하얀 벽지에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뼈대가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휴지 케이스도 '깔맞춤'해서 은은하고 차분한 갈빛으로

씌워두었고.

이런 디테일에 대한 세심함, 형광등 스위치까지도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

나무결 분위기가 묻어나는 걸로 챙겨서 설치하는 점에는 정말 감탄할 수 밖에.

검은색 흰색 두 가지 종류의 면봉과 솜까지도 넉넉히 구비해 두고,

반지나 귀걸이니, 액세서리들을 따로 챙겨둘 수 있는 이런 접시도 있어 빼두고 다시 찾기도

쉬웠다. 이런 소소한 것들이 모여서 료칸의 전체 분위기를 만들고 더할 나위없는 흡족한

기분을 느끼도록 해주는 거 같다.

그리고 희뿌옇게 동이 터오던 아침, 간단하게 온천욕을 마치고 전날 저녁식사를 맛있게 했던

그 식당으로 다시 내려갔다. 아침식사는 또 어떨지, 간소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기대할 만하지

않을까 싶어서 제법 설레는 마음으로.

확실히 저녁 메뉴와는 많이 달랐다. 일단 기본 세팅부터가, 젓가락도 그렇고.

우선 상큼한 냉국과 크리미한 계란찜으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식욕을 좀 다독다독 일으켜세우고.

생선튀김이 한마리 나오고 끈적끈적한 마가 데코레이션처럼 살짜기 놓였다.

커다란 밥통에서 이런 이쁜 공기에 밥을 퍼서 조금씩 생선이랑 먹기 시작했더니 또 금세

식욕이 깨어났다. 온천을 하고 나니 아무래도 금방 배고파지는 거 같기도 하고, 식욕도

빨리 돌아오는 거 같고.

유부피에 쌓인 어묵이 오드득오드득, 찰지고 탱탱한 식감이다. 국물도 시원하니 좋았고.

일본식 미소국은 확실히 우리네 된장국이랑은 다르다. 좀더 맑고 간질간질한 느낌이랄까,

우리네 된장국이 좀 텁텁하고 맛이 진한 것에 비하면 그런 거 같다.

디저트, 오미자 한 알이 폭 박혀있는 푸딩이 나왔다. 이쯤되면 정말 제대로 나온 아침식사다.

아침부터 생선 한마리를 다 먹고, 큰 밥통의 밥을 또 거진 다 먹고, 이런저런 사이드디쉬의

음식들도 다 먹고 후식까지 먹었으니. 여행다니며 아침을 든든히 먹는 게 꽤나 중요한데

이 정도면 든든한 정도가 아니라 점심을 한참 늦게 먹어도 될 듯.

그러고 방으로 돌아가니 간식으로 들어왔던 검정깨 푸딩, 그리고 약간의 과일이 있어서

마저 또 다 먹고서 그야말로 정말 든든해져서, 1박 2일 하코네 료칸에서의 온천여행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갈 준비는 끝~*




아침 일찍 도쿄를 출발해서 전철, 산악열차, 유람선, 곤돌라 따위를 타며 하코네를 돌아보고

어둑어둑해질 무렵 도착한 어느 료칸, 예약자명을 대고 입실하고 나니 푸짐함 저녁식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갈한 분위기의 다다미식당엔 발이 내려뜨려져 있고 마치 명패를

붙여놓듯 각 좌석마다 료칸 투숙객들의 이름을 붙여두었고, 그쪽으로 인도해주던 아가씨는

영어가 조금 짧았지만 생글거리는 미소와 친절한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젓가락을 받치고 있는 토끼도 귀엽지만 젓가락을 묶어둔 일본전통종이 재질의 띠지도

고급스럽다. 사실 토끼 표정은 살짝 '자살토끼'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어쨌든.

내가 여태 봐왔던 수많은 물수건 중에서 가히 최고라 할 만한 걸 여기서 만났다고나 할까.

검은 바탕에 알록달록 큼직한 꽃문양이 그려져 있는 수건이었는데, 면이 헤지지 않아

털도 두툼하니 포실포실한 느낌이 들었고 따뜻하면서 깔끔한 느낌이 좋았다. 이후로

나오게 될 음식들의 질과 맛을 기대하게 만들던 그럴듯한 '에피타이저'랄까.

이내 내온 음식들, 그러고 보니 작년 가을에 갔던 이 료칸에서 은근히 토끼 장식들을

많이 보았던 것 같다. 씨알굵은 밤이니 참치니 생선알이니 따위가 금빛 접시에 담겨나왔고,

그 위에는 하얀 무로 깎여진 눈빨간 토끼 한마리가 폴짝 뛰어올랐다.

금빛 접시에 올라있던 시원한 음료랄까, 냉국이랄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탱글탱글한

알맹이가 알맹이가 자작한 국물에 가득 담겨 있었다.

보기만 해도 탱글탱글한 느낌이 잔뜩 전해지는 노란색 묵, 위에 살짝 얹힌 와사비와

초록색 별모양이 더욱 식욕을 자극했다. 단순히 미각적인 기대뿐만이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날 먹어'라고 맹렬하게 유혹하는 음식들.

이제 주메뉴, 하코네 멧돼지고기 샤브샤브. 커다란 접시에 야채도 제법 풍성하게 나왔고,

깔끔하게 썰린 돼지고기들이 부채처럼 펼쳐져 있었다.

전기온열기 위에 등나무로 만들어진 소쿠리를 올리고 기름종이를 받치고는 육수를 부었다.

그렇게 한겹의 얇은 종이 위에서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는 돼지고기와 야채들, 불이 거의

손실없이 그대로 전달되어선지 순식간이었다. 야채들은 거의 데친다는 느낌으로 끓는 물에

넣었다가 바로 꺼내어 먹기 시작했고, 돼지고기는 조금은 더 익혀서.

샤브샤브를 먹는 새 반찬들이 나왔다. 반찬이랄까, 사이드디쉬랄까. 반찬이라기엔 하나하나

단품으로도 너무 훌륭한 것들이어서, 또 딱히 밥이랑 먹는 것들도 아니어서.

밥이 그리 작지 않은 통에 담겨나왔고,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것도 잠시, 어느새

바닥을 보인 채 나뒹굴고 만 밥통. 하루종일 하코네 산간을 돌아다니느라 적잖이 지치고

배고팠던 상황이라곤 해도, 굉장히 맛있게 많이 먹었던 저녁식사였다.

그렇게 야채 한 점 남기지 않고 완전히 싹 비어버린 샤브샤브 접시도 나뒹굴고. 남은 건

애초 서빙될 때 꽂혀 왔던 '하코네멧돼지'가 꿀꿀거리는 화살표 하나.

그리고 디저트, 소복하니 상큼한 과일샤벳과 촉촉한 치즈케잌, 그리고 말차 냄새가 진하게 나는

모찌 두조각에 커피가 나왔다. 정말 디저트까지 한치의 허술함이 없는 훌륭한 만찬이구나, 싶은

느낌이 팍팍 들게 만들던 것들. 새삼 사진을 정리하며 다시 보아도 참...언제고 다시 한번

료칸의 굉장했던 온천욕 시설을 만끽하고 나서 저 만찬을 맛보고 싶은 맘이 무럭무럭.

소소한 디테일도 정겹기 그지없던 료칸의 식당 액세서리들. 젓가락을 받쳐주던 토끼들도

그렇지만, 이쑤시개를 담아두고 있던 저 쇼핑백 모양의 통도 참. 정말 종이쇼핑백을

펼쳐놓은 채인 양 옆에 라인도 들어가있을만큼 디테일하던.







도쿄 신도청도 도쿄의 야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멋진 뷰포인트 중의 하나로 이름높은 곳이다.

도쿄 타워를 코앞에서 볼 수 있는 모리타워와 함께, 도쿄 전역을 내려다볼 수 있고 날이 맑으면

후지산 봉우리도 볼 수 있다는 전망대가 있다.
 
(*이전글 : 도쿄타워가 있는 야경, 모리타워에서 보는 게 최고.)

도쿄도청 제1본청사 45층, 지상 202미터 높이에 남북으로 두개의 전망대가 있다고 하는데,

층수만 따지자면 그렇게 높은 건물은 아닌 거 같지만 도청 건물 밖에서 올려다본 건물 꼭대기는

꽤나 아득해 보였다. 단단하면서도 꽉 차보이는 도청 건물 자체가 주는 위압감도 적잖고.

이런 게 도청이라니, 딱히 우호적인 분위기는 아닌 거 같다.


크고 호화롭게 짓느라 돈을 많이 들였고, 결국 재정상태를 악화시킨 주범 중 하나라는 반성이

있다던가, 한국의 지자체들이 경쟁하듯 높고 커다란 건물들 짓는 모습이나 중앙정부가 이런저런

대규모 토목공사를 강행하는 모습이 겹쳐진다.

도쿄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꽤나 편하다고 생각했던 건, 곳곳에 있는 안내판에 대개 한글이

함꼐 병기되어있더라는 점.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만 잘 따르면 바로 전망대다.

엘레베이터 앞, 청경이 가방을 열어보는 등 소지품 검사를 하고 있었다. 일일이 가방을 열어보긴

했지만 딱히 금속탐지기도 없고 그냥 좀 요식적이라는 느낌. 아무래도 공공건물이고 관광객이나

외부인이 늘 왔다갔다 할 테니 안전문제는 신경을 써야겠지만, 동시에 한명한명 제대로 검사하면

관광객들에게 불편을 끼치고 명소로서의 위상도 추락할 건 뻔한 일이다. 그 중간 어디쯤에선가

타협을 했다는 딱 그 수준의 검사.

엘레베이터는 굉장히 평범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외부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 엘레베이터도

아니었고,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도 않았으니까. 도쿄 도청 전망대는 꽁짜니까 이런 곳까지

정비하길 바라는 건 무리인지도 모른다. 전망대는 뭔가 도청 건물의 '부록'같은 느낌이랄까.

단순히 '부록'이라고 표현하면 이 쪽에서 내려다본 야경에 대한 실례가 될 거 같긴 하다.

굵직굵직한 고층건물들이 옆에 나란히 서 있었고, 해가 저문지 꽤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불빛이 층층이 새어나와 도쿄의 밤거리에 떨궈지고 있었다.

전망대를 한바퀴 돌아보며 도쿄 시내 전경을 360도 구경할 수 있었고, 눈에 띄는 주요 건물들이

무슨 건물인지를 알려주는 설명도도 붙어있었다. 그렇게 이름붙은 건물들 너머로 무수하게

빛나는 자그마한 불빛들, 너무 작아서 부스럭지같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모래알처럼 번져있어

더욱 아름다운 풍경이 나오는 거 같다.

한바퀴를 빙 맴돌고 나서는 전망대 안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모리타워 전망대에 비해서는

뭐랄까, 좀 어수선한 분위기다. 여기저기 기념품가게나 까페가 늘어서 있는 것도 좀

어색한데 거기서 파는 것들도 좀 두서도 없고 특색도 딱히 없고, 그래서 아마 그런 느낌이

더욱 심하게 드는 듯 하다. 일반 사무동 건물의 빈 사무실을 텅 비우고 활용하는 느낌.

그런 어정쩡한, 두서없는 기념품이랄까 오락거리 중의 하나. 정체를 잘 모르겠다. 한국어와

중국어로 된 설명이 적혀있긴 한데, 읽어도 잘 뜻이 전달되지 않는 데다가 살짝 바랜듯한

탁하고 뿌연 조명부터가 싸구려티가 풀풀 풍기는 듯. 그나저나 저 한국어는 왜 저렇게도

어색한 건지, '일본의 선물에 아무쪼록 한국어'? 자동번역기로 대충 번역한 거 같다.

어쩌면, 이곳은 그저 크고 화려하고 웅장하게만 지으려던 도쿄 신도청으로 생긴 재정악화를

해소하고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예정에 없이 대중에 공개된 전망대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큰 건물을 도청 기능으로 모두 채울 수 있을리도 없으니 공실율도 상당하지 않으려나, 일단

전망대 한층부터 빼서 이런저런 기념품가게니 까페 집어넣어놓고 활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뭐, 도쿄에 놀러간 입장으로서는 저런 그럴 듯한 야경을 볼 수 있는

포인트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니 땡큐지만.

일본이란 나라, 참 민감하고 조심스럽게 평해야 할 나라 중 하나겠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우리나라가 걷게 될 길은 이 나라가 걸었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패션이나 음식류의 최신 트렌드도 그렇지만, 대두되는 사회적 문제들도 그런 거 같다.

어쩌면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송도니, 용산이니, 아님 다른 지자체의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건물 꼭대기층 전망대에서 야경을 볼 수 있게 되는 건 아닐까, 그렇진 않았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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