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보내고, 벚꽃이 날리는 봄이 되어 문득 생각나는 일식 주점 하나.
일본에서 갔던 그런 주점들의 분위기도 제대로 나던 곳, 게다가 일본인 주방장의 솜씨가 좋아서
안주도 술도 모두 맛있던 곳. 특히나 복어 지느러미의 향이 담긴 히레사케를 두손모아 마시면.
주방쪽 바에 앉아 올려다봤던 냉장고와 벽면에 가득한 일본술들. 그리고 자기 그릇에 가득
쌓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한두알씩 꺼내쓰던 달걀도 눈에 들어왔었다.
이제 원전 사고 때문에 일본을 가는 것도, 일본에서 건너온 식재료나 술들도, 맥주니 사케니..
먹을 수 있으려나. 이래놓고 어제도 아사히 맥주를 죽도록 마셨지만. 언제든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이웃나라 일본,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고와 그 거대한 후과로 인해서 문득 그 어디보다
멀고 먼 나라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딱히 색깔이나 무늬를 맞출 생각은 없는 듯 무질서하게 쌓여있는, 그래도 대충 모양새는 비슷한
앞접시들. 누구에게 어떤 접시가 갈지는 모르고, 함께 가서 앞이나 옆에 앉았던 사람과 같은
접시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뽑기같은 랜덤함도 재미있었다.
빨간색과 검은색 젓가락이 점쟁이 산통에 들어있는 산가지들처럼 뺴곡하게 꼽혔다.
유난히도 길고 지루하던 지난 겨울, 몸을 녹여주고 곤두섰던 신경들을 다독여주던 따뜻한 술 한잔.
도쿠리에 나오는 술이 그렇게 싼 걸 쓰는 건 아닌 거 같았다. 향이나 맛이 조금은 달랐었다.
그리고 유쾌하던 화장실 표지. 가볍게 한 도쿠리와 맛난 안주를 먹고 나서 한참 이야기하다가
나오면, 이미 들어가기 전부터 어두웠던 사방이 더욱 짙은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따뜻한 도쿠리의 감촉도, 그리고 무엇인가가 사라져버렸다. 일본이란 나라의 '뚜껑'이 닫혀버린
느낌과도 같이 더이상 접근하기도 열어보기도 어려워져버린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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