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산로드에서 동쪽으로 걷기로 맘먹은 날이었다. 점점이 몰려있는 외국인 여행자들을 지나치며
 
무작정 걷다가, 문득 어디선가 징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그것도 한두개가 아니라 여러개의

징을 산발적으로 두드려대는 댕댕대댕댕 소리. 저건 뭔가 싶어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왠 자그만

동산이 있고 꽃과 나무가 우거졌으며 태국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점점 커지는 징소리는 이제

머리 위에서, 커다란 말풍선에 담긴 채 하늘에서 징징 진동하며 떨어져내리고 있었고.

집 위의 야트막한 동산에 오르듯 계단을 따라 사람들을 따라 조금 올랐다. 옆으로는 꽃과 나무,

반대편으로는 자연적으로 조성된 건지 인공적으로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중턱쯤에서.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냈다. 수많은 종들. 잡아당기는 손들.

길 양쪽으로 온통 종들이었다. 울림통 안에서 웅얼웅얼대며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그냥 징 치듯

댕, 하고 짧게 끊기는 쇳소리였지만, 사람들이 순례하듯 지나며 일일이 하나씩 울려주고 있던

덕분에 끊기지 않고 대앵대앵- 울려퍼지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이렇게 커다란 징도 하나. 어찌나 많이 부딪혀댔는지 나무가 온통 뭉그러져버린 데다가

받아주는 징의 볼록한 부분도 한참을 움푹하게 꺼져들어갔다. 뭐, 그럴 만도 한 게 나 역시도

수십개의 종들을 울리며 올라왔지만 그 손맛과는 전혀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징의 웅웅거리는

울림과 찌릿찌릿한 손맛이라니. 뒤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않음 좀더 두들겨보고 싶어지는.

그 이후로도 길은 계속 가늘게 이어지며 동산 위로 이끌었다. 종 역시도 계속 이어졌고, 가만 보니

종들의 듬직한 등짝에는 이 곳의 모양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있었다. 푸 카오 텅, Golden Mountain.

높이 80미터로 정상에 황금색 탑이 세워져 있어 수많은 태국 불자들의 발길이 닿고 있다나. 계단수는

무려 320개를 헤아리는데, 사원은 전체적으로 우주의 중심이라는 메루산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그런 건조한 사실들보다 더욱 눈길을 끄는 건 이런 쓰레기통. 쓰레기를 버리란 건 알겠는데

저 해골바가지 그림은 뭔가 싶었다. 태국어를 알았다면 해골바가지 밑의 간단해보이는 몇글자쯤

해독해 냈을 텐데 싶기도 하고.

드디어 도착한 산..이라기보단 야트막한 언덕의 정상. 사원이 하나 세워져있고 깃발이

나부꼈다. 황금빛 칠이 번쩍거리는 건물벽은 방콕 시내가 반사될 듯 반짝거렸다. 원래

여기를 지을 당시에는 방콕 시내를 벗어나 평화로운 교외의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는데

지금은 여기까지 도시가 우물우물 삼켜버려 예전의 정취와는 판이해졌다.

여기에 모셔진 부처님들 중 일부는 인도에서 가져온 것들이라고 한다. 나름 1960년대까지 방콕을

내려다보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던 사원인만치 그만큼 보물들이 많이 모셔진 걸까.


그런데 이건, 네모난 금박들이 펄럭펄럭 나부끼는 헐벗은 불상들. 선풍기가 돌고 건물 안 공기가

휘몰아 돌면서 불상에 붙어있던 금박들이 파닥파닥 날뛰고 있었다. 더러는 위태롭게 나부끼다가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또 더러는 지나는 사람들의 머리위나 옷위로 내려앉기도 하고.

거의 다 벗겨진 채 누워있는 와불, 아마 저렇게 금박을 한겹한겹 입히는 것도 부처님께 공덕을

쌓는 일일텐데 뭔가 입혀드리는 날짜가 정해져있나보다. 그리고 문득 돋는 세속적인 생각 하나,

저 금박들이 진짜 금일까. 24K는 아닐 테고 18K나 14K쯤? 꽃가루처럼 날아다니는 금박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건물 중앙에 모셔진 황금빛 번쩍거리는 불상 하나가 포인트였다. 동서남북 사면으로

뚫려있는 한 가운데에 모셔진 불상은, 황금 금박이 촘촘하게 붙어있어 바늘꽂을 곳 하나 찾기 힘든

그런 번쩍번쩍한 느낌이면서도 또 보들보들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그 앞에 털썩 앉아 간절히

기도하는 분의 뒷모습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내부에 워낙 사람이 꽉꽉 들어차 있었지만, 밖을 향한 창문이 온통 활짝 열려 있어서 딱히 답답한

느낌은 없었다. 밖을 향해 활짝 열린 창문들, 밖으로 고개를 빼문 아이들, 그리고 멀리까지 내려

보이는 방콕의 전경.

뒤에서 아이들의 눈을 따라 휘적휘적 둘러보았다. 태국 국기와 황금산 깃발이 나부끼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낮고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 뒷켠으로 뾰족뾰족 서 있는 사원들. 그리고

멀찍이 이 언덕보다 높이 솟은 고층건물들이 보였다. 그 아이들의 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옥상으로 올라가니 거대한 금탑이 있었다. 하늘로 향할수록 긴장감넘치게 뾰족해지는 저

삼엄한 탑의 모양은, 거꾸로 지상의 소원과 염원들을 모두 흡입하겠다는 듯 굉장히 크고

넓은 밑둥아리를 갖고 있었다. 그 앞에 가지런히 무르을 모아꿇고 손을 맞붙인 사람들의

엄숙한 표정이나 조심스런 몸가짐들이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런 와중에도, 큰 금탑 주위의 사면에 하나씩 버티고 선 커다란 징은 계속 대앵, 대앵. 어떤

콧수염 아저씨가 채를 잡길래 카메라를 들어 'May I'했더니 방긋 포즈를 잡아주었다.

그리고 진중한 한 방, 사방으로 부들부들 퍼져나가는 울림이 언덕 아래로 낙하했다.

신 앞에 꽃을 바치고, 돈을 바치고, 종을 바치고, 그리고 빨간 천에 소원을 적고. 탑을 감싼

천에 직접 만든 색색의 리본을 달아주기도 하고. 기도를 바치는 존재가 신이라면 굳이 저렇게

써놓거나 박아넣지 않아도 다 알지 않을까. 아닌가, 신은 눈이 하나라서, 그 시선이 내게 오길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 노력하는 게 더 빠를 거라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좀더 큰 목소리로

좀더 튀고 마음에 들만한 걸로 신을 꼬드기는 것도 나름 합리적인지도 모르겠다.

선박박물관에서 봤던 그 굉장한 용 머리가 여기에선 몸통까지 제대로 묘사된 채 종을 물고 있었다.

이거..용이 아니라 새였던가, 대체 뭐지 싶을 만큼 상상력이 발휘된 동물. 그 밑으로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소원들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용머리가 사람들의 소원들을 발톱으로

움켜쥐고 금세라도 하늘로 날아오르려는건가, 그런 분위기를 노린 건가 싶기도 하고.

이쁘게 만들어진 화환들이 탑 여기저기에 걸렸고, 하얀티에 청바지를 입은 긴머리 아가씨의

뒷모습이 참 이뻤다. 발바닥이 하얗게 질리도록 미동도 않고 곱게 두손 모은 채 뭘 그리도

기도하고 있는 걸까 싶기도 하고. 내 마음까지 절로 숙연해지고 뭔가 간절해지는 느낌.

다시 돌아가는 길, 사람들은 마치 손잡이라도 되는 듯 종을 하나씩 잡고서 댕댕거리며 내려왔다.

뭔가 조금은 더 조신하고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내려오던 길에야 전체 모습을 조망할 수 있었다. 아, 이렇게 생긴 거였구나. 푸 카오 텅, 혹은

GOLDEN MOUNTAIN. 황금산. 저렇게 빙빙 도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렸고, 걸으면서 쉽없이

징이나 종을 울려댔던 거로구나 싶었다. 어김없이 걸려있는 꽃 한다발까지.



황금산 정상에서 탑돌이를 하던 분들, 그 와중에 징을 울리며 풍경을 뒤흔들던 그 묘하고도

묵직한 분위기. 소리가 좀더 생생하게 잡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실제 음량에 많이 못 미쳐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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