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즐기는 해외여행 1, 외국 분위기 물씬한 정원(윤성의)-

 


* 2016. 8. 16(화) KBS제1라디오 '라디오 전국일주' 방송분입니다.

* 아래글은 제 로그의 글 (엘레강스한 주인의 손길이 구석구석, 한려수도의 꽃 외도..)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원고입니다.





안녕하세요. 라디오 전국일주 청취자 여러분. 한창 휴가철인 이맘때면 새로운 풍경과 경험을 찾아 해외로 나가는 여행객들로 공항이 연일 북새통이라는 기사를 많이 보실 텐데요, 저는 이번 한주동안 청취자 여러분께 해외에 나가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이국적인 풍경들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번 한 주 저와 함께 국내 곳곳에 숨어있는 외국 분위기 물씬한 여행지들을 돌아보시면서, 진부하다거나 잘 안다고 생각했던 곳에 숨어있었던 낯섦 한조각, 설레임 한조각을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오늘 먼저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 곳은 외도 보타니아 해상공원입니다. 외도는 깨끗하고 푸른 남해 바다와 경관이 수려하기로 이름난 한려해상국립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는 해상공원입니다. 동양의 하와이라는 별칭도 있다고 할 만큼 온난한 기후에 물이 풍부해 여러 이국적인 아열대 식물들이 가득한 작은 자연 공간에, 지중해의 어느 해안도시처럼 유럽 스타일로 공들여 꾸며진 건물과 조경들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곳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전부터 섬에 대한 로망이 있었습니다. 한쪽 끝에 서면 다른 쪽 끝이 보이는 그런 조그마한 섬. 외도는 그 정도로 작지는 않아도, 불쑥 올라선 섬의 중앙부에선 섬의 가장자리가 닿을 듯 가깝게 보일만한 크기인지라 정원으로 꾸며진 섬 전체가 한눈에 보입니다. 그 너머 섬들이 가득한 남해바다가 희끄무레한 바다안개를 덮은 채 버티고 있었구요.

그렇다 보니 대략 한시간의 산책로는 그대로 섬의 외곽을 따라 한바퀴 도는 길입니다. 판판한 평지에 조성된 정원이 아니라 제법 오르내림이 있는 조그마한 언덕 같은 섬에 조성되어 있으니, 산책로를 걷는 재미도 더 큰 거 같았습니다. 더러는 잘 다듬어진 높은 야자수들로 울타리쳐진 길을 오르기도 하고, 아니면 야트막한 정원수들이 양쪽에 열지어 있는 길을 조심조심 내려오며 전체 섬을 내려보기도 하구요.

프랑스 식으로 네모반듯하게 잘 다듬어진 비너스 가든과 벤베누토 정원은 외도의 한복판, 그야말로 외도 정원의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중간중간에 놓인 이국적인 느낌의 벤치나 조각상들 역시 바닷바람에 씻기고 적당히 헐어보여서 오히려 더 맘에 들었습니다. 괜히 유럽이나 그리스식의 분위기를 흉내내느라 억지로 힘줬다는 느낌이 아니라, 이제 외도 보타니아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이르렀달까요.

한바퀴 설렁설렁 돌아보고 선착장에 내려서기 직전, 외도의 마지막 포스트인 '외도 갤러리'에선 특히나 그곳에서 바라보는 바다쪽 풍경이 참 좋았습니다. 천장이 높아 바람이 숭숭 자유로이 드나드는 커다란 정자 같은 곳에 삼삼오오 앉아서는 바닷바람도 맞고, 멀찍이 바다에 시선을 던져둔 채 가만히 앉아있는 것. 바다랑 섬들이랑 사이좋게 어깨겯고선 남해의 풍경 덕분에 마음이 따뜻하게 차오르는 느낌이었습니다.

외도는 국내 유일의 해상농원으로, 놀랍게도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섬이라고 합니다. 부부가 1969년부터 수십년간 지극정성으로 가꿔온 섬, 곳곳에서 묻어나는 그분들의 개인적인 취향과 안목을 살펴보는 재미도 각별하지만 그분들의 자연에 대한 애정과 오랜 세월 쏟아오신 노력도 잊지 말아야 할 부분입니다. 자연에 거스르지 않으면서 이런 독특하고 고유한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도, 흔히 우리가 빠지기 쉬운 개발이냐 보존이냐, 라는 양극단 이외의 길이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니까요. 지금까지 낯설게만 볼 수 있다면 어디서든 여행이 시작된다고 믿는 윤성의였습니다.

 

마카오의 상징이 되어버린 이 앙상한 건물 외벽. 그것도 정면만 덩그마니 남아있는 모습은 기괴하기조차 하다.

 

그렇지만 1835년 화재로 정면을 제한 나머지가 소실된 이래 계속 저렇게 버티고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고 할 부분이고,

 

또 그 전면에 저렇게 많은 은유와 상징들이 가득 차 있는 아름다운 조각들이 빽빽하다는 것은 역시 아름답다.

 

이왕이면 하늘도 좀 새파랗고 빛도 따뜻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거 같은데, 그렇지만 이렇게 온갖 색깔의 우산이

 

마카오의 거리를 점령해 버린 모습도 꽤나 재미있는 풍경이다.

 

 대부분이 여행객인지라 이렇게 무리해서 꼬맹이한테 우산을 들리고 무등을 태운 아버지의 뒷모습도 보이고.

 

육포와 아몬드 거리로 이어지는 골목은 온통 고기 냄새와 아몬드 가루 냄새로 가득하다. 빗냄새 덕에 더욱 생생했던 듯.

 

실컷 육포도 맛보고 아몬드쿠키도 맛보고 나서는, 북쪽으로 계속 가서 까몽이스 공원까지 걷기로 했다.

 

정확히 어딘지는 몰라도 대충 골목길을 따라 위로위로 가다보면 나오겠거니 하고선, 재미있어보이는 골목으로 고고싱.

 

스콜처럼 비가 잠시 쏟아질 때는 옆에 있는 아무 상점이나 들어가서 물건들 구경도 하고, 주인이랑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어디서 왔냐길래 한국에서 왔다니까, 너는 왜 다른 한국인들처럼 shy하지 않냐고 놀라던 주인.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을 내려다보기 좋은 트윈픽스 발치, F라인 전차의 서쪽 종점이기도 한 이쪽 미션Mission 지구 곳곳에는

 

성적소수자의 인권을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나부끼는 중이다. 그만큼 샌프란시스코의 전향적인 분위기가 물씬한 이 곳,

 

특히나 돌로레스 대성당 어간에서부터 시작되는 발미 앨리Balmy Alley에는 1970년대 이래 진보적 아티스트들이 그렸다는

 

그래피티들이 골목들을 온통 점령하고 있는 진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평온한 일상이 흘러다니는 깔끔하고 단정한 큰길, 어느 길모퉁이에서 예기치 않게 나타난 전복의 순간.

 

 그리고 골목 담벼락을 온통 활용한 화려하고 입체감 넘치는 벽화.

 

 

비록 살짝 지린내도 나고 인적도 드물어 조금은 염려스럽기도 한 구간도 있긴 하지만, 차들이 늘어선 큰길가에도 그래피티의 축복이.

 

1776년에 지어져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오랜 건물이라는 돌로레스 대성당의 종탑. 이 위에서라면 울긋불긋하게 단풍처럼

 

번져나간 발미 앨리 지역의 그래피티들의 물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말에는 세 차례씩, 2시간 동안 이 곳에 그려진 60-70여개의 벽화를 감상하는 투어가 진행되고 있다고도 하는데,

 

혼자 돌아다니기보다는 아무래도 대낮 시간에 단체로 가이드를 따라 움직이는 게 안전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혼자 이 구역을 돌아다니는 게 위험하다고 느꼈다거나 곤란을 겪었던 건 아니고, 워낙 골목마다 숨어있는 그림들이

 

많아서, 잘 아는 사람의 안내가 있었다면 더욱 알차게 돌아볼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정도랄까. 요런 귀여운 토끼도 놓칠 뻔 했다.

 

 

성긴 철창이 가로막은 건물 외벽에도 누군가의 손길은 여지없이 거쳐갔다. 거대한 연꽃을 타고 있는 부처가 샌프란시스코에 현현했다.

 

 

 

정교하고 잘 안배된 기하학적 무늬가 차고 하나를 통째로 감싸버린 풍경이라니, 작업했던 모습을 상상해보게 만드는 풍경이다.

 

 조던의 드리블 장면이 붉게 두드러진 농구 골대에 내리쬐던 햇살, 좁다란 골목 양켠에서 형형색색의 색채를 밝힌 그래피티들.

 

 

 

 이름 모를 성당-혹은 교회-옆구리에도 그래피티의 가차없는 스프레이는 비켜가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성당의 위신을 고려했는지 만화체로 그려지긴 했지만 예수와 성모..인 듯한 캐릭터들이 독특한 수인을 맺고 있다.

 

 

 사실 벽화보다는 이런 그래피티가 더 멋지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좀더 본격적이고 멋진 그래피티를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가 하면 작정하고 캔버스로 벽돌담 벽면을 활용한 듯한, 무려 호랑이와 상어 간의 일촉즉발 격돌 장면.

 

 사실 발미 앨리 아니어도 샌프란시스코의 곳곳에서 숨어있는 벽화, 혹은 그래피티들을 찾는 재미는 쏠쏠하다.

 

아마도, 카센터의 내려진 셔터에 그려진 그래피티. 이 정도면 나름 상업적인 목적에도 충실하면서 미적인 기능까지 놓치지 않은 수작. 

 

 

 혹은, 뜬금없지만서도 파라오의 토실한 입술이 센스넘치게 가리키고 있는 소화전의 붉은 주둥이.

 

 이 건물은 GLBT 역사 박물관, 그러니까 게이(Gay), 레즈비언(Lesbian), 양성애자(Bisexual), 성전환자(Transgender)의

 

역사와 투쟁을 담고 있는 박물관이라고 한다. 들어가보지는 못했지만, 당당하게 펄럭이는 무지개 깃발만으로도 뭔가 상쾌하다.

 

 

샌프란시스코의 다른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래피티, 혹은 좀더 포멀한 차원의 벽화들. 아래는 작년인가

 

금문교를 배경으로 치뤄졌던 세계 요트대회의 한 장면을 건물 벽면에 재현해 둔 거라고 한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위해서는 우선 카투만두에서 비행기로 30여분 걸리는 포카라로 이동해야 한다. 아침 8시반 비행기로 출발,

 

포카라에 도착후 다시 택시로 한시간여 비포장도로를 달려 트레킹의 최초 출발점인 나야풀Nayapul에 도착하다.

 

 

이로써 해발 850미터의 포카라에서 1,070미터의 나야풀까지는 수월하게 도착. 이제 3,200여미터의 푼힐 전망대를 찍고 다시

 

3,700미터의 마차푸챠레 베이스캠프, 4,130미터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오르고 돌아오는 대장정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얄포름하고 앙상한 철판과 철망으로 만들어진 구름다리. 지나는데 20여킬로그램에 달하는 가방무게에 체중이 더해져 출렁출렁.

 

 

 

히말라야의 고봉들을 끼고 사는 마을이라 역시 애들 낙서조차 범상치 않다. 삐죽삐죽한 산들 아래 마을, 그 앞엔 왈칵 휘여돌아가는 강.

 

골목길을 연해 활짝 뚫려 있는 이발소 아저씨는 내 카메라를 보더니 슬며시 포즈를 잡으며 미소를 짓는다. 머리는 집에 가서

 

감아야 한다는 게 네팔 이발소의 법도.

 

개와 닭들이 이렇게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는 정경. 확실히 평화로운 시골 동네 분위기가 물씬 배어난다.

 

 

골목이 끝나갈 무렵의 조그마한 '마트'. 바닥에 앉아 동생과 놀던 아이가 내 쪽을 손짓하며 뭐라뭐라 신나서 떠드는 중.

 

 

히말라야 고산지대의 유용한 수송수단이 된다는 당나귀들. 길가에 똥을 어지간히도 싸질러놓는지 한발한발 조심스럽게 만드는.

 

 

다리를 지나고 체크포인트에서 트레커 카드와 TIMS 카드를 확인받고 나서는 점심식사부터 하기로 결정.

 

꼬질꼬질하게 때가 묻어있는 저 스위치들, 숫자는 많지만 정작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자주 끊긴다고 한다.

 

샤워설비가 굉장히 열악해 보이는구나, 벌써 땀은 이렇게 흐르는데. 싶었지만..나중에 3000미터 위에서부턴 샤워도 못했다.

 

기온이 뚝 떨어진 시점에서 샤워를 하면 자칫 감기에 걸려 고산병으로 고생하기 십상이기 때문에, 아예 제대로 씻기조차 포기.

 

티벳 불교도의 상징, 울긋불긋한 깃대를 올린 집. 사실 히말라야 산에 깃든 사람들은 대개 티벳 불교도라서

 

거의 모든 롯지(산장)에서 이런 깃대와 장식들을 볼 수 있었다.

 

첫 점심. 네팔의 전통음식이라 해야 하나, 달밧. '달'은 콩으로 만든 스프를 의미하고 '밧'은 흰쌀밥을 의미한다.

 

거기에 두어가지 찬을 더해서 제공되는 음식이 달밧. 첫 음식이니만치 든든하게 치킨 커리를 추가로 주문.

 

산장 겸 식당을 운영하는 롯지의 주인 아주머니가 쓰는 낡은 계산기와 장부.

 

그리고 다시, 1일차 오후로 접어들었다.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의 벼룩시장에서 조우한 구 소련제 필름카메라. 무려 77년산 Zorki 4K, 렌즈는 Jupiter8 2/50. 대체 제대로 찍힐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 야무지고 단단한 외관과 가죽내음 흠씬 나는 케이스가 맘에 들어 지르고 났더니 아무래도 찍어봐야겠는 거다.

 

며칠 후 동유럽의 진주 듀브로브닉에서 기어코 필름을 한 롤 사서는 다짜고짜 테스트 시작.

 

제대로 나오리라는 기대없이 찍었던 사진들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건질 만한 풍경이 보였다. (게다가 필름 현상과 인화 비용이

 

왜 이리도 비싼지, 일단 인화까지 마치고 난 사진들은 어떻게든 활용해야 되겠다 싶어서 집의 구리디 구린 스캐너로 스캔까지 완료)

 

설핏 초록빛이 머금어진 듯한 톤다운된 색감이 맘에 드는데, 스캐너가 구려서 그런지 인화된 사진이랑 스캔본이랑 조금 색감에

 

차이가 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듀브로브닉의 구석구석 들고 다녔던 그날의 분위기와 기분이 떠올라서 무조건 만족.

 

 

 그치만 이 사진에서 나온 색색깔의 우산들이 걸어가는 장면을 보면 그래도 스캔이 사진 색감에는 딱히 영향을 미치는 거 같지 않기도.

 

 

 어쨌든, 필름카메라를 가지고 놀려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걸 발견한 건 가외의 수확인 듯 하다. 현상할 때 먼지를

 

잔뜩 뒤집어씌워서 사진을 망치는 그런 데 말고, 그리고 좀더 싸게 할 수 있는 현상소를 찾아봐야겠다. 게다가 스캔도 해줌 좋겠는데.

 

필름에 담긴 세달 전의 추억들, 필름이 아니라 일종의 단단한 깡통에 아껴둔 기억과 순간들을 열어보는 느낌이랄까.

 

아마도 이렇게 석달전, 한달전의 시간을 고스란히 되돌리는 게 필름카메라의 묘미일 듯. 리와인드.

 

 

 

 

1일차. 15:00 인천 출발/22:20 Croatia Zagreb 도착. (23:30 숙소 도착)

 

2일차. 자그레브 stay

 

 

 

 

3일차.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출발/Slovenia Ljubljana 도착. (기차 2.5시간)

 

 

4일차.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버스 왕복 3시간)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출발/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도착(기차 2.5시간)

 

 

5일차. 자그레브 출발/Pltvice 도착(버스 3시간)

 

 

 

 

 

6일차. 플리트비체 출발/Split 도착(버스 4시간)

 

 

 

7일차. 스플리트 stay

 

 

 

 

  

8일차.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출발/Bosnia Mostar 도착(버스 4.5시간)

 

 

 

9일차. 모스타르 stay 

 

 

 

10일차. 보스니아 모스타르 출발/Croatia Dubrovnik 도착(버스 4시간)

 

 

 

11/12일차. 듀브로브닉 Stay

 

 

 

 

 

13일차. 듀브로브닉 출발/자그레브 도착(비행기 1시간)

 

 

14일차. 14:35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출발/12:20 인천 도착(+1일)

 

 

 

 

 

 

 

 

 

 

 

 

 

 

#2012_01. 후쿠오카 국제공항에서 유후인 가는 길(고속버스 시간표 포함)

 

#2012_02. 유후인 료칸의 열세가지 코스 만찬.

 

#2012_03. 방마다 노천온천이 딸린 유후인 몰.

 

#2012_04. 유후인 료칸의 숨은 그림찾기.

 

#2012_05. 유후인 료칸의 흔한 조식.

 

#2012_06. 유후인역까지 걷는 밤마실.

 

#2012_07. 유후인의 토토로, 그리고 숯의 정령들까지.

 

#2012_08. 유후인 료칸 체크아웃 후의 하루짜리 산책..오전편.

 

#2012_09. 흑마백마가 환대해주는 유후인.

 

#2012_10. 유후인 료칸 체크아웃 후의 하루짜리 산책..오후편.

 

#2012_11. 짙은 녹색의 그림자에 숨어든 금색 비늘의 호수, 유후인 긴린코.

 

#2012_12. 유후인의 편의점털이.

 

#2012_13. 후쿠오카의 밤거리 & 유후인 2박3일 여행일정

 

 

1일차. 후쿠오카 도착, 유후인 도착 (늦은 점심) 온천 (저녁) (밤마실 조금)

 

2일차. (아침) 유후인 마을 구경. (점심) (이른 저녁) 후쿠오카 이동. (늦은 저녁) (도심 구경 조금)

 

3일차. (여유있는 아침) 후쿠오카 출발. 서울 도착. (점심)

 

(끗)

 

 

 

 

 

 

 

이태원쪽으로 차를 몰고 놀러가다 보면 늘 지나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던 구비구비 꺽여도는 철제 계단길,

이번엔 놓치지 않고 한번 올라가 보겠노라고 작정하고 나섰다. 정확하게는 한강진역 앞에서부터 하얏트호텔 앞의

소월길까지 이어지는 산책로라는 게 맞겠다. 나무데크로 깔끔하게 꾸며진 길을 오르기 전 사진 한장.

제법 경사가 가파르다. 그래도 그리 높지 않은 나무 계단이 차근차근 놓여서 이리저리 몸을 뒤틀고 있으니, 몇걸음

걸어오르다 뒤를 올라다 보면 어느새 이만큼 올라왔나 하고 놀라게 된다.

산책길 초반에는 무슨 건물인지 양철 굴뚝에서 하얀 김이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겨울이 좋은 이유 중의 하나는

저렇게 풍성하고 소담하게 피워올려지는 입김이나 수증기같은 것들이 있어서다. 그다지 애쓰지 않고도 입에서

폴폴 하얀 입김을 내뿜을 수 있으니, 몇번만 해보면 금세 기분이 좋아지는.

본격 산책로 진입. 양쪽으로 놓인 풍경도 거슬림없이 나무들이 무성하다. 봄이나 가을에 걸으면 괜찮겠다 싶은.

저만치 남산 서울타워도 보이고. 앞에선 온통 까만 옷의 앞뒤로 박수치느라 바쁘신 아주머니가 한분 다가오셨다.

이건 S자도 아니고, S자에 더해 한번 더 휘였다. 나무들이 벼락처럼 땅에 내리꽂혀 있었고, 다소 기우뚱한

느낌으로 구비구비 버혀진 산책로에서 수평수직 감각을 지탱할 만큼 믿음직하게 서 있는 가로등 하나.

산책로는 대략 1km쯤 되나 싶은데, 한강진역 앞에서 시작해서 하야트호텔 앞에서 끝나서 남산 소월길과 만나버렸다.

지날 때마다 저긴 어떻게 건널 수 있는 걸까 궁금해지던 그 육교랄까 다리가 바로 코 앞으로 불쑥 나타났다.

다시 왔던 길을 거꾸로 돌아가는 길, 뒤통수에 눈이 달려있지 않으니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돌아가는 것도 재밌다.

오던 중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뒷통수 너머의 풍경이라거나, 정반대의 각도에서 흘러들어갈 수 있는 샛길이라거나

놓쳤던 풍경 같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으니. 테니스장 바싹 마른 그물에 낚여있던 볼링핀 시계.


살짝 내리막이 진 경사로를 내려오면서 줄곧 따라오던 한남동의 전경. 어느 건물들엔 연말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북돋우는 눈꽃 장식들이 건물 외관에 장식되어 있기도 하고, 멀찍이 교회인지 성당의 십자가가 보이기도 하고.

하얏트에서는 이태원 모스크의 꼭대기도 보였었는데 여기선 잘 안 보인다. 대신에 뚝뚝 끄트머리가 잘려나간 채

몇개의 앙상한 선으로 남은 나뭇가지가 시선을 가렸다.


어딘가 커다란 크레인이 쉬지 않고 움직이며 한남동의 스카이라인을 바꿔놓고 있기도 했다. 가파르게 고개를

곧추세운 크레인 아래로 바싹 엎드린 이태원 근방의 건물들이 납짝해졌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내릴 듯한

하늘이다 싶더니, 툭툭 옷소매를 건드리며 진눈깨비가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바삭하게 말라붙은 덩굴손이 가까스로 시멘트벽을 움켜쥐고 있는 거나, 철근을 미처 다 감싸안지 못한 채 울퉁불퉁

거칠고 거뭇거뭇한 시멘트벽이나 뭔가 통하는 느낌. 을씨년스럽고 차가운. 그리고 껍데기만 남은 듯한.

그리고 이태원으로 진입. 오랜만에 날이 풀렸다 싶어서 타고 갔던 오토바이를 까페 앞에 세워두고 흐뭇한 뒷태를 

감상. 이제는 정말 겨울이 다 갈 때까지 봉인해둬야겠구나, 싶어서 뿌리는 녹방지제는 어디서 사나 생각도 하고.

그렇게, 올해 마지막 휴가 하루.

따뜻한 기억이 서린 까페, 바로 옆에 있는 듯 느껴지는 그녀, 스미르노프 아이스, 비그포르스, 가벼운 단렌즈의 카메라,

창밖의 진눈깨비, 좋은 노래, 그리고 후희(post-play)같은 오토바이의 여운까지.









@ COEX, 이천, 인천.



ⓒ ytzsche.tistory.com

일본에 가기 전에 이제 좀 히라가나는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외워둔 히라가나에 따르면, 저기

앞에 가는 버스 앞에 붙은 스티커에 써진 말은 '감바로우'. 뭔가 최근 지진과 원전 폭발 사태로 위기에

처한 일본 동북지방에 힘내라고 하는 거 같긴 한데, 짧디짧은 일본어 실력으로도 힘내라는 말은 왠지

'감바떼' 아니었던가 싶었다.


알고 보니 '감바떼'는 힘내라~! 라는 명령형, '감바로우'는 힘내자~! 라는 권유형의 말이라고 한다.

어느 한 특정 지역에 제한된 문제도 아니고 지금 이시간에도 폭발한 후쿠시마 원전에서는 솔솔

고준위의 방사능 물질이 뿜어져 나오고 있을 테니, 누가 누구한테 힘내라 라고 위로하고 명령할

처지는 아닌 게 맞는 거다. 다같이 힘내자, 라고 이야기해야 할 만큼 중대한 상황.

코케시 인형을 전시하고 있던 전시관에서도 일본을 돕자는 팜플렛이 마치 적십자 표시처럼 비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여기저기 일본 본주의 동북쪽 끄트머리의 상점들과 호텔에까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건

후쿠시마 원전의 가동 중단으로 인한 전력 부족 사태. 7월 중순의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에어콘은

비실비실하고, 조명 역시 어슴푸레하니 하나 건너씩 꺼져있던 모습이 단적인 예다.

상점 입구나 호텔 로비에 어김없이 붙어있던 절전대책 관련 공지들. 이제 아오모리를 다녀온지도

두달이 가까워오지만 여전히 별다른 상황의 변화는 없지 않을까. 그다지 상황이 통제되지도 못하고

있는 데다가 사실 점점 더 사태가 전례없는 수준으로 치닫는 건 아닌지, 지금 인류는 전례없는 종말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있으면서도 그새를 못참고 눈돌린 채 다른 자극과 가십을 찾아보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아오모리로 떠나서 자동로밍된 폰에 제일 먼저 떴던 외교통상부의 안내 문자. '여행제한 지역'이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딘지, 아오모리는 괜찮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문구라서, 결국 의존할 것은 본인의 판단과 현지 여행가이드나 현지인들의 개인적인 판단.


그리고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더이상 일본 원전사태는 '강건너 불'이 아니라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 같은 거 아닐까 싶다. '감바떼구다사이', 힘내세요~라는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격려가

아니라, '감바로우~!', 힘내자~라는 스스로에 대한 북돋움과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높이는,

그런 구호가 필요한 거 같다. 당장 아무일 없다는 듯 '원전 르네상스' 사기를 치는 정부도 그렇고.




사람들 피난길로 방사능도 함께 달렸다 (시사IN, 2011.09.05)
일본 후쿠시마 현에서 원전 반대 집회가 열렸다. 집회 참가자는 정부가 아무런 지원도,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다며 규탄했다. 사고 당시 주민들이 피난하던 길로 방사능이 집중 확산됐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206호] 2011년 08월 19일 (금) 22:38:47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
아무런 경고도, 어떤 알림판도 없었다. 도쿄에서 후쿠시마까지 신칸센으로 1시간30분. 기차는 조용히 도착했고 인구 30만의 후쿠시마 시는 평온했다. 지극히 일상적인 여행이었다. 피폭을 막는다고 ‘반핵아시아포럼’에서 나누어준 마스크를 쓴 한국의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하나둘씩 마스크를 벗기 시작했다. 후쿠시마에서는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7월31일 ‘원자력발전소가 없는 후쿠시마를 요구하는 후쿠시마 현민집회’가 열린 후쿠시마는 겉으로는 너무도 조용한 지방의 작은 도시였을 뿐이다.

일본 정부는 원전 30㎞ 이내만을 피난지역으로 고시했다가 4월13일부터 방사선량이 연간 20밀리시버트(m㏜)가 넘는 지역을 계획적 피난지역으로 추가 고시했다. 이타테무라, 미나미소마 시(市) 등이 그곳이다. 연간 방사선량이 20밀리시버트가 넘는 지역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머지 지역이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는 연간 1밀리시버트 이상의 지역 전체를 대피지역으로 정했다(강제 이주 기준은 5m㏜).


ⓒ보건의료단체자연합
7월31일 후쿠시마 집회에 참가한 가족이 ‘어린이들에게 안심·안전한 미래를’이라는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일본 정부와 지자체가 측정한 방사선 측정치 7000여 개를 바탕으로 군마 대학 하야카와 유키오 교수가 작성한 방사선 등가선도(아래 그림·http://gunma.zamurai.jp)에서 보이듯 일본 국내의 방사선 확산은 후쿠시마 원전 서쪽으로 영문 V자 모양을 엎어둔 형태로 확산되었다. 일본 민주의료기관연합 피폭대책본부장인 고니시 교지 씨(의사)가 보건의료단체연합과 한 간담회(8월8일)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이 집중 방사능 확산 지역은 원전 피난민들의 피난길이었다고 한다. 역V자(Λ) 오른쪽은 116번 국도였고 왼쪽은 고속도로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달리는 길로 바람도 달렸고 방사능도 달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방사능은 후쿠시마 시도 오염시켰다. 필자가 후쿠시마 시를 방문했을 때에도 역 바로 앞에서 가이거 계측기에 0.79라는 수치가 찍혔다. 이는 연간 피폭 허용량의 6배에 해당하는 수치다. 후쿠시마 시 자치정부가 6월15일까지 조사해 발표한 바에 따르면 학교 교정의 방사선 수치가 특히 높다. 학교의 75%가 시간당 0.6마이크로시버트, 20%는 3.8마이크로시버트가 넘는 수치를 보인다. 각각 연간 피폭 허용량의 약 5배와 33배다.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에 따르면 방사능에는 안전한 수치가 없다. 계속되는 피폭은 암 발생률을 그에 비례해 증가시킨다. 더욱이 어린이는 어른보다 감수성이 훨씬 높다. 원전에서 80㎞ 이상 떨어진 후쿠시마 시에서도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 없다. 얼마 동안이나 그래야 할까? 후쿠시마의 방사선 오염은 주로 세슘에 의한 것인데, 세슘137의 반감기는 30년이다.

후쿠시마 시의 한 공원에서 열린 현민집회. 시에서 남쪽으로 40㎞가량 떨어진 고리야마에 산다는 마스모토 모리코라는 여성이 연단에 올라섰다. “저는 원전이 깨끗하고 안전하다고 배웠습니다…. 정부는 아무런 정보도, 물자도 주지 않았습니다. 고리야마 시에서 가장 위험한 며칠 동안 저는 물과 휘발유를 사러 온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저는 지금 45세입니다.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지금 중학교 2학년인 우리 둘째 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딸은 지금 도쿄 여동생 집에 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그래야 할까요? 어린이들을 지켜주세요. 제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대피지역 바깥 경계지역에서 거주했다는 교사 요시다 히로마사 씨도 연단에 섰다. “저는 공포 속에서 피난을 나왔습니다. 집에서 아무것도 못 들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까지 받은 것이라고는 휘발유 10ℓ가 전부입니다. 정부는 경계지역에서 그냥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혀 복구가 안 됩니다. 냉장고를 주문해도 배달은 안 해준다고 합니다. 매스컴에서는 ‘힘내라 후쿠시마’라고 떠들어댑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힘을 낼 수가 있단 말입니까?”


현민 20% 이미 후쿠시마 떠나

이것이 현실일까? SF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초현실적인 발언이 계속되는 집회 내내 비가 내린다. 사람들이 모두 우산을 받쳐든다. 저 비에는 방사능이 얼마나 들어 있을지, 방사능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고 냄새도 없다는 말을 드디어 실감한다.




수치로는 잡히지 않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고 후쿠시마 사람들이 전한다. 원전 재해 복구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병원에 실려갔고, 또 피난 과정에서 많은 이가 죽었다고 한다. 정부가 지정한 피난지역에서만 수십만명이 대피해야 했고 대피지역 바깥에서도 200만 후쿠시마 현민 중 약 20%가 이른바 ‘자발적 대피’, 즉 알아서 다른 지역으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결국 지금 남은 사람들은 피난할 곳도 돈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모든 재난의 피해자는 그 지역의 사회 약자들이다.

집회를 마치고 참가자들이 행진한다. “방사능 오염 없는 후쿠시마를 돌려달라” “어린이를 지키자”라는 구호를 외친다. 절실하지만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구호에 가슴이 먹먹하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땅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다. 그리고 체르노빌에서 그랬듯이 앞으로 음식물 등에 의한 내부 피폭이 더 문제다.

다시 도쿄. 일본 사회는 수도에서 1시간30분 거리를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다.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앞으로 재건만 남았을 뿐이라고 일본 정부는 말한다. 일본 시민운동가들은 일본도 변화 중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정부 말을 믿지 않는다고,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재앙적인 사고가 터졌어도 그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일본 사회의 답답함은 어쩔 수 없다. 일본에서 사회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본다. 잘못된 권력에 저항하지 않는 사회는 지극히 위험하다. 일본 자본주의의 세련된 외양 속에는 야만이 있다.

문득 한국을 생각한다. 수백만명이 사는 도시 바로 옆에 노후 원전을 두고 우리도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일본의 핵재앙 앞에서도 여전히 원전 르네상스를 고집하고 강진 9.0을 견디는 원전을 만들라고 지시하는 대통령을 둔 한국은 어떤지.





아오모리 지역의 토속 분위기가 물씬한 쯔가루 네부타마을, 네부타 마츠리라 불리는 동북 최대의 축제를

일년내내 감상할 수 있는 관광지. 마츠리 체험 외에 샤미센 연주 감상과 팽이와 같은 놀이문화도 체험할 수

있고, 일본의 전통적인 정원도 잘 가꿔놓고 있어서 일본문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흔히들 '도쿄'를 다녀오고 '일본'을 다녀왔다 하고, '뉴욕'을 다녀오고 '미국'을 다녀왔다 하는 식으로 도시

한두개를 보고 그 나라 전체를 다 경험해 본 양 말하는 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게 만드는지 새삼 생각해

보게 만들었던 공간.

입구로 들어가니 네부타 마츠리를 설명하고 네부타에 대해 설명하는 할아버지가 떠듬대는 한국말이지만

굉장히 진지하고 열정적인 모습으로 마음을 움직였다. 네부타 마츠리는 일본을 대표하는 3대축제의 하나로,

아오모리의 여름을 역동적으로 수놓는 축제라고 한다. 일본의 전통 종이에 사람 모형을 그리고 철사로

뼈대를 잡아 만드는 등불장식수레를 네부타라고 하는데, 네부타 하나에 150kg의 철사가 소요, 총 2500장의

화지가 소요되는 커다란 사이즈의 그것들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니 직접 축제를 보고 싶어진다.

일본의 마츠리, 축제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이런 커다란 북을 신명나게 두드리는 것. 가슴 깊은 곳을

두드리는 듯한 그 북소리가 점점 고조되면서 사람들은 단조롭고 고된 일상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멀리

떠나가거나, 혹은 몸과 마음에 꽉 차 있던 불만족과 권태로움을 태워버리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시범을 따라 방문객 중 한명이 함께 북을 두드리는 모습이 엄청나게 파워풀해 보인다.

히로사키 네부타 축제는 매년 8월 1일부터 7일까지 1주일간 열리며, 60대 정도의 큰 등통(네부타)이 거리를

대열지어 행진하는 축제라고 한다. 아오모리현에서는 크게 구분해서 히로사키 네부타, 아오모리 네부타의

두가지로 나뉘는데, 아오모리 네부타는 인형의 모양을 한 입체적인 것으로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행진하는

반면 히로사키 네부타는 부채꼴 형태로 된 것이 주류이며 천천히 위풍당당하게 거리를 행진하는 게 제일

큰 차이점이라고. 그러니까 이렇게 입체적인 네부타는 아오모리식인 거다.

반면 이렇게 부채꼴 모양으로 평면상 그림이 펼쳐진 건 히로사키식 네부타. 입체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동적인 느낌은 떨어지지만, 면과 면을 이어 만드는 입체적인 아오모리식에 비해 훨씬 정교하고 아름다운

표현이 인상적이다. 특히 여성의 저런 나긋나긋한 표정이나 실루엣은 거칠고 압도적인 느낌의 입체로는

표현하기 쉽지 않을 거다. 결국 두가지 모두 일본의 중요 무형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니 네부타는

사실상 일본 축제 문화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네부타의 속살, 철사가 쓰이는 입체형의 네부타 대신 부채꼴형의 네부타 뼈대는 나무로 엮여있었다. 저렇게

부채꼴 모양으로 뼈대를 잡는 것도 생각보다 복잡하다 싶은 게, 워낙 사이즈 자체가 크다 보니까 그 안에서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제작하기 위해 사다리가 필요해지고, 중간중간 발디딤대가 필요해지고 뭐 그런 식으로

정교해진 거 아닐까 싶다. 그 위에 저렇게 화려하게 채색된 그림을 한면 한면 붙이고 불을 켜면 끝, 이라기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일 거라 짐작해 볼 뿐이다.

 쯔가루의 독특한 '쯔가루니시키'라고 하는 금붕어가 모델이 된 금붕어 네부타. 1706년경부터 서민들이 네부타로

만들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며, 현재는 네부타 축제 때에 어린이들이 제등처럼 손에 들고 거리를 행진한다고

한다. 어쩐지 아오모리쪽의 호텔들을 전전하며 호텔 내에서 예외없이 마주쳤던 저 금붕어 등불들이 궁금해지던

참이었다.


금붕어 말고도 십이간지의 열두 동물이 모두 등불을 속에 품고 반짝반짝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방아를

찧다가 급하게 불려온 듯 떡방아를 쥐고 있는 토끼도, 닭도 개도, 심지어 뱀이나 쥐새끼조차도 제법 귀여운

모습으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네부타 축제가 처음 생겨났을 즈음에는 물론 지금처럼 이렇게 커다랗고 화려한 네부타 등불이 있었던 건

아니라고 한다. 이렇게 조그맣고 상대적으로 심플한 형태의 등불들을 앞세우고 축제를 벌였다고 하는데,

슬쩍 새장 속의 새들이 보일듯 말듯한 모양도 그렇고 화지를 잘게 잘라서 한번 꼬아 붙인 모양도 그렇고

간단해 보이면서도 꽤나 세련된 모습이다.


히로사키 네부타 축제의 기원에 대한 유력한 학설은 '옛날, 농민이 여름철 작업중에 졸음 때문에 농사일이

소홀해지거나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졸음을 작은 등통과 함께 강에 흘려보낸다'는 행사가 기원이라는 거다.

그 행사가 시대의 흐름과 함께 축제로 변화발전해 왔다고 전해지는데, 그 근거로 '졸립다'라 하는 말이 쯔가루

방언으로 '네푸테', '네푸테쟈'이고 그 말이 변하여 '네부타'가 되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네부타의 그림에는 그 원형적인 감성이나 정서가 그대로 남아있는 듯 보인다. 굉장히 섹시하고

도발적이면서 관능적인 느낌마저 도는 그 여전사들의 모습이나 여성적인 선들도 그렇거니와 이를 온통

드러낸 채 으르렁대는 모습의 남성들도 그야말로 남성성의 화신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거다. 시대가 지나

거칠고 날것의 흉폭함을 보이던 그림이 조금씩 정련되기는 하지만, 다소 섬뜩하고 위화감이 이는 신성성

가득한 그림의 포스는 그대로다.


너른 공간 가득했던 네부타들을 하나하나 눈여겨 보다보니 한걸음 내딛기도 쉽지 않았다. 일본의 장인들이

네부타를 만들고 코케시 인형을 만드는 모습을 조금 구경하다가 도착한 곳은 샤미센 연주장. 벽면 가득

화려하고 강렬한 색감으로 안구를 괴롭히던 네부타로부터 벗어나 담백한 햇살이 내려앉는 공간에

도착하니 갑자기 눈이 심심해진 느낌이다.

일본의 샤미센은 원래 뱀가죽을 덧댄 중국의 '산싱(삼선)'이란 악기가 기원으로 16세기에 오사카로

전해진 것이 처음이라 한다. 그렇게 고양이 가죽으로 만든다는 샤미센은 민요 등 노래의 반주 악기로

널리 쓰이다가 이제 일본을 대표하는 예능, 문화로서의 츠가루 자미센이 되어 버린 셈이니 니것내것

가르며 자국 문화를 편협하게 고수하려는 자세가 우습단 걸 존재 자체로 웅변하는 것 같다.


선생님과 제자 같은 두 사람은 가끔 눈빛을 교환하기도 하고, 서로의 멜로디에 악기통을 툭툭

두들기며 박자를 맞춰주기도 하면서 기교를 맘껏 구사하고 있었다. 때로 굉장히 힘있게 현이

끊어질 듯 튕기기도 하고, 때로는 나뭇가지를 살랑이는 미풍처럼 현을 건드리는 듯 마는 듯

섬세하게 연주하는 모습도 모습이거니와, 그 섬세한 음율이 인상적이었다.
 

마당에 꾸며져 있는 정원은 '요키원', 1880년경부터 1914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35년동안 가꾸며 형태를

잡아온 정원이라고 한다. 쯔가루 지방의 고유한 방식에 맞춰 세심하게 배열된 돌과 나무들, 그리고

연못의 구성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저런 석등에 새겨진 초승달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돌에 새겨넣은 걸까 아니면 인공석인 걸까 궁금해서 만져봤는데 잘 모르겠다.

다른 각도에서 본 정원, 요키원의 모습. 비슷한 사이즈로 다듬어진 나무들이 가지런히 열맞춰서 묶여있는

연못 위 다리도 이쁘고, 위에 너덜너덜 이끼가 내려앉은 커다란 석등도 둥글둥글하니 인상좋아 보이고.

쯔가루 고유의 팽이라는 '즈구리'를 직접 시연해 보이고 있는 아저씨, 여러 가지 팽이를 하나씩 돌려가며

샵을 지나는 방문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우리나라 팽이랄까, 내가 어렸을 때 돌렸던 팽이들보다 훨씬

크고 무거워보이는 나무 팽이는 슁슁 돌아가며 굉장히 매력적인 중저음을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달마 인형들을 응용해서 만든 이런저런 장난감들, 바퀴달린 수레인지 자동차 같은 것 위에

올라 앉아있는 잔뜩 인상쓴 머리들의 표정이 우스꽝스럽다. 수레 위를 겁내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불만에 찬 것 같기도 하고. 그리 두텁게 칠하지 않은 붉은 색감 아래로 나무의 색감이나 결도 그대로

살아있는 게 저런 장난감이라면 아이들의 손때를 묻히고 묻혀서 대를 물려 넘겨줘도 좋겠다 싶다.

네부타 마을의 입장권, 애초에 저런 모양으로 접힐 수 있도록 홈이 파여 있어서 네부타 세워놓듯 세우고

코케시 인형을 앞에 배치한 장식품이 될 수도 있겠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책상 서랍 어딘가쯤에 나름

곱게 보관해둔다고 모셔두었다간 몇년쯤 지나 그냥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여느 티켓들과는 달리 이렇게

어디에고 접어서 세워두는 티켓이라니, 오래도록 네부타 마을의 기억을 반추할 수 있는 작지만 귀한

계기가 되어주고 있다.




참고. 네부타마을(네부타무라) 공식홈페이지(www.neputamura.com)







* 이번 여행은 하나투어 '겟어바웃' 필진의 일원으로 다녀왔습니다.
Get About - 당신의 여행이야기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마주쳤던 자동차 십부제 운행안내판, 오늘은 휴일 내일은(도!) 휴일.
 
추석 당일 월요일날 찍었던 사진이니까, 실은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져야 한다. 엊그제는 휴일, 어제도 휴일,

오늘도 휴일, 내일도 휴일. 이렇게 장장 나흘에 걸친 달콤한 휴일이 있었더랬는데, 금요일날 밤에 눈감고는

문득 다시 뜨니까 수요일 아침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래서 사무실에 앉아서, 몸을 이렇게 비비 꼬고 있는 중. 책상은 낯설고 키보드는 차가워졌으며, 의자에

인체공학적으로 새겨졌던 나의 둔부 형태 따위 잊혀진지 오래인 거다.

저것도 아니라면 차라리 더치커피를 똑, 똑, 뽑아내는 유리실린더가 배배 꼬인 것만큼인지도 모른다.

죽겠네 진짜. 아무리 오늘, 내일, 모레만 버티면 다시 주말이 돌아온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북돋아보려

애써도 좀처럼 몸과 마음이 책상머리에 앉을 생각을 안 하고 있다. 오늘은 근무, 내일도 근무, 모레도 근무.


으악. 아무래도 쳇바퀴를 굴리고 있는 거 같다. 슬쩍 돌아나가며 새로운 풍경이 나오는 거 같다가도

알고 보면 다시 제자리인 무한루프. 월화수목금토일월화수목금토일월화수목금토일월화수목금토일

월화수목금토일월화수목금토일월화수목금토일월화수목금토일월화수목금토일월화수목금토일월화수목

금토일월화수목금토일...쪼큼 우울한 연휴 끝+1일차.








서울 시내 곳곳으로 까페가 급격하게 번지는 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까페를 찾는 이유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 때문이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질감의 쿠션이 엉덩이와 허리를 받쳐주는 등받이의자,

테이블과 몸뚱이 사이에 꼽아서 고정시켜둘만큼 두툼하고 단단하면서도 보들보들한 쿠션 두어개, 또

옆테이블에 앉은 사람과 말을 섞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지 않을 만큼은 충분한 테이블간의 널찍한 거리,

굳이 통유리가 아니어도 햇살과 바깥 풍경이 꾸물꾸물 스며드는 창문과 맘에 드는 노래, 거기에 굉장히

진한 에스프레소나 더치커피 같은 것들. 그런 거라면 반나절은 족히 까페에서 뒹굴 수 있는 거다.

책을 보던, 음악을 듣던, 이야기를 하던, 다이어리를 끄적거리던, 공부를 하던, 사실 가장 좋은 건

여행책자를 펴놓고 여행계획을 짜거나 어디 놀러갈지 생각하는 거지만. 사실 그렇게 치면 까페에

들어가 마시는 커피나 차류는 일종의 자릿값인 셈이다. 커피를 마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뭔가

쿠션과 테이블, 공간을 차지하고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거니까.

이렇게 볕이 한조각 떨궈진 공간에서 꾸물꾸물 밀려나는 그림자와 볕이 잠식한 빛의 영토를 시계삼아,

아침부터 점심, 점심부터 저녁..이렇게 대충 얼버무려진 하루를 하릴없이 까페에 앉아 뒹굴거리는 것.

굳이 분단위, 시단위의 시계나 전화기에 신경쓰지 않으며 책 한권쯤 읽는 것. 그러고 보니 그런 여유를

즐긴지도 꽤나 된 거 같다. 이 까페에 갔던 것도 어느새 수십일 전쯤.

그렇게 조용히 있다 보면 이런 평범한 앞접시에 숨어있던 밤하늘 별들과, 조그마한 망아지 한마리가

튀어나오기도 하는 거다. 흘낏 지나치는 시선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것들.

카메라라도 쥐고 있으면 더 좋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까페 곳곳에 렌즈를 들이대며 다짜고짜

찍어대기도 하고, 잘 안 쓰던 카메라 기능을 이렇게 저렇게 시험도 해보고.

아무래도 그렇게 즐겨 찾아드는 까페는 사람들이 좀 적은 곳, 덜 알려진 곳이기 마련이다. 아니면

사람들이 많이 찾더라도 상대적으로 조금 채워져 있는 시간대일 법한 때에 찾아가고. 사실 웬만한

까페는 다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곳이어서, 그런 고즈넉하고 편안하고 조용한 까페를 찾기란 쉽잖다.

까페 이름이 처음엔 '고기'라고 읽는 건가 했다. 까페 이름이 고기라니, 했더니 알고 보니 고기가

아니라 '고희'란다. 제법 맘에 든 까페여서 앞으로도 틈나면 가보려고 생각 중.

돌아나오는 길은 가정집도 많고 조그만 이층건물들이 골목을 따라 늘어선 다감한 느낌, 어렸을 적

왠지 무섭고 위축감 느끼게 만들던 저 사자머리 철문손잡이가 여전히 버티고 섰다. 이제 더이상

무섭지도 쫄지도 않게 되어 버렸지만, 그런 골목의 느낌도 애써 찾아다닐만한 거 같다.

 





나름 자주 다녔던 해외출장 덕분이랄까,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가슴설렘의 정도가 많이 누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여행에 대한 강렬한 예감과 흥분으로 설레는 건 마찬가지인 거다.


공항, 버스 대합실, 기차역사..를 막론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돌아오는 곳이 지니는 아우라가 분명히 존재하는

거 같다. 사람들의 설렘, 흥분, 지침, 실망, 만족 따위 온갖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거 때문이지 않을까.


사진은 지난 5월, 공항세관장을 취재하러 갔을 때 찍었던 인천국제공항 내의 풍경.




모슬포항에서 출발하는 배는 마라도 아니면 가파도에 가 닿는다. 더러는 마라도를 지나 가파도에

닿기도 하고, 가파도를 지나 마라도에 닿기도 한다지만, 가파도로 바로 가는 직행 선박은 하루

서너차례쯤 있다고 한다. 9시, 11시, 14시에 모슬포행에서 출발.

빗발이 잘게 부서져 분무기에서 뿜어나오듯 사방으로 비산되는 궂은 날씨, 쾌속선 뒤의 스크류가

퍼올리는 바닷물 방울들까지 합쳐져 배 뒤는 온통 뿌연 안개다.

멀찍이 보이는 산방산. 신령이 한라산을 빚다가 너무 높다 싶어 산봉우리를 뽑아 내던져서 생겼다는

커다란 바위산이 불쑥 솟아서는 잿빛으로 케케한 풍경 너머 실루엣만 내밀었다.

가파도에 들어선 길. 채 20분이 걸렸나 싶을 정도로 짧은 코스였다. 날이 흐리고 파도가 높아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미처 걱정스런 마음을 채 펼치기도 전에 야트막한 바다를 건너 도착.

가파도는 '섬속의 섬', 제주 올레길 10-1코스다. 제주도를 따라 동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쭈욱

이어지는 긴 끈같은 올레길이 이어지는 와중, 우도니 가파도니, 옆으로 새어 나온 길은 '다시' 표시가

붙어서 가까운 올레길 번호로부터 갈라져나온다. 신기한 게 남쪽이 상동, 북쪽이 하동. 이 섬과

섬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바다를 바라보고 살았단 증거 아닐까.

올레길 10-1코스, 가파도 코스는 총 5킬로미터, 한두시간이면 주파할 거리지만 어차피 조그마한 섬,

올레길에 구애받지 않고 사방으로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한 세네시간 여유롭게 돌다보면 숨어있는

이쁘고 신기한 풍경들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비가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게 조금 에러.

가파도에 살고 있는 인구는 겨우 150명 내외, 고양이가 얼마나 똑똑한지 모르겠지만 어느 집에

누가 사는지는 전부 알만큼 조그마한 섬인 건 확실하다. 바다 넘어 어디론가 달려가는 배 한척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동도 않는 고양이 뒷모습이 맘을 건드렸다.


어서 오십시오, 가파도 올레길을 시작하는 길 앞머리에 그려진 포석은 그려진지 얼마 되지도 않은 거

같은데 벌써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날근날근해졌다. 그 옆으로는, 바람 많은 섬 제주도의 구멍 숭숭한

돌 현무암으로 괴어올린 구멍숭숭한 돌담을 시멘트 벽돌로 따라 만들어 놓은 거 같다.

원래 이게 정석 아닌가. 돌 많고 바람 많은 제주도의 돌담이라고 하면.

왜 그렇게 고양이가 많던지. 어쩜 가파도도 노인분들 밖에 남지 않아서 반려동물로 애지중지하며

키우고 있는 거 아닐까, 외로움을 달랠 벗삼아서. 그래서인지 고양이들 눈빛이 더욱 새초롬하다.

섬 외곽의 해안선을 따라 올레길이 조성되어 있긴 하지만, 조금만 화살표 벗어나 섬 안으로 들어가면

온통 미로같은 길이 꼬불꼬불하다. 의도치 않았겠지만 온통 까만색 현무암으로 구획된 채 사방으로

열리거나 닫혀있는, 더러 가정집 앞마당이나 뒷마당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하는 그 길이 재밌다.

가파도에 사람이 살 수 있었던 건, 역시 섬에서 마실 물을 구할 수 있어서였다고 한다. 풀떼기가 무성하게

자라난 저 웅덩이가 우물인지 아니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때는 우물 비슷한 거였지 않을까. 그리고

둥그스름하게 곡선을 그리며 쌓아올려진 돌담은, 왠지 똥돼지를 가둬놓고 기르면  딱 좋을 거 같은데.

저 쪽이 제주도. 자욱하게 피어오른 바다안개와 비구름 사이에 낀 채 겨우 봉오리만 봉긋 세운

산방산과 울룩불룩한 제주도의 실루엣이 보인다.

올레길을 조성하면서 섬 해안도로를 시멘트로 포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직 미처 다 완공되진 않았다고

옷이랑 신발 버린다며 딴 길로 가라고 알려주시던 가파도 주민 할머니, 맘 써주시는 게 고맙긴 했지만

조금 묘한 생각도 들었다.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은 자연 그대로의 길, 흙길을 더욱 반길 테지만 막상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흙길 대신 시멘트길을 당연히 더 반기는 거다.


'지방'에 대한 '서울' 사람들의 인식, '시골'에 대한 '도시' 사람들의 인식이 그렇다. 휴양지로서, 추억을

되새기고 재충전을 하기 위한 공간으로 이상화된 자연, 박제된 과거의 이미지가 유지되길 바라는 건

아닐까. 불편함을 감수하고 인간다움과 자연을 만끽하겠다는 건, 그게 일상이 아니라 잠시지간의

일탈, 혹은 여행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올레길이 유명해지며 자연이 파괴되고 인심이 황폐해진다는

걱정은 도시 사람들의 것, 올레길이 유명해지니 이제 좀 살길도 트이고 개발되어 좋다는 건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것 아닐지. 많이 거칠게 굳이 나눠보자면. 쉽지 않은 문제다.

깡총 솟아있는 한쌍의 쓰레기통이 귀여웠다. 금방이라도 저 철봉을 잡고 앞뒤로 흔들대다가 훌쩍

한바퀴 공중제비라도 넘을 거 같은 거다.

가파도를 걸으며 만난 꽃들, 거센 빗방울에 툭툭 꺾였다가도 힘내어 곧추서는 단단한 줄기에 매달려

말갛게 꽃잎을 씻어내고 있었다. 침침한 날씨에 꺼뭇한 돌틈 사이에 가려져서 원래 빛깔이 제대로

나오지 못한 꽃도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꽃도 있었고.


가파도 북쪽 끝단에 가까워질 무렵, 아까 길이 채 포장이 되지 않은 흙길이 있는데 비때문에 진창이

되어 있을 거라더니 여기 이야기였다. 온통 찐득한 진흙이 철퍽대는 길을 따라 걷다가 굵어진 빗발을

그을 겸 옆의 오두막 같은 곳으로 올라가 잠시 쉬었다. 알고 보니 여기가 가파도에서 일출을 보기

가장 좋은 해맞이 장소라던데, 저렇게 잿빛 파도가 출렁이는 너머에서 해가 뜬다면 굉장히 멋질 듯. 


가파도에서 봄에 열리는 축제가 하나 있는데, 청보리밭 축제라고 한다. 조그마한 섬이지만 중간중간

제법 커다란 손바닥만한 보리밭이 현무암 돌담으로 둘러쳐져 있었고, 아직 청보리를 수확하지

않은 건지 그 푸르름을 미루어 짐작함직한 '샘플'들이 남아있었던 것. 4,5월 쯤에 청보리가 지천에

틔워올랐을 때 다시 와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래도 뭐, 다른 계절에 왔다고 해도 저렇게 돌뿌리에

기대어 소담하게 피어난 꽃들도 보이고, 갑갑한 창고 속에서도 초록빛 싱싱한 풀떼기도 보이고.

이쪽 각도로 보면 날이 좋을 때 무려 6개나 되는 봉우리를 볼 수 있다는 안내가 있었지만, 날이

잔뜩 궂은 날에야 그런 풍경보다는 차라리 저 안내판이 더 눈이 갔다. 제주도를 상징하는 말의

형태를 본딴 게 틀림없는 파란색 철제 표지판. 제주도에 흔했을, 그래서 가파도에서 제법 흔했을

말과 소 같은 짐승들의 침범을 막기 위해 제주도의 무덤은 저렇게 돌담으로 네면을 모두 꽁꽁

싸매어놓는다고 한다.

마을의 안녕과 고기잡이의 성공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던 마을 제단이 있던 곳. 남자 9명이 제관으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제를 올렸다는 이곳은, 정확히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공간이다.

지금도 매해 정월쯤에 날을 잡고 제사를 올리고 있는데 벌써 그게 150여년의 전통을 만들었다는.

해안길을 따라 계속 걷는 길, 그래도 자그만 섬에 항구는 남북으로 두개나 있는 데다가 커다랗게

헬기장도 하나 지어져 있다. 뭐 이렇게 날씨가 궂은 날에는 파도도 높고 기상도 안 좋아서 바닷길이나

하늘길이나 둘다 위험하긴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특히나 긴급 후송환자가 있다거나 할 때 많이

도움이 되겠지 싶다.

비가 와서 그런가, 초록빛 식물들이 아주 극악스럽게 고개를 내민 것 같기도 하다. 깨어진 시멘트 길 

사이로 번개치듯 우르릉쿵쾅 내달리는 초록빛 새싹들하며, 해안가 옹벽을 잡아먹을 것처럼 두텁고

무섭게 흘러내리는 덩쿨들하며, 길가의 커다란 돌멩이 곳곳에 틈을 내어 뿌리를 뻗고 자라나는

끈질긴 녀석들까지.  


쉼없이 내리는 비, 우산을 접어버리고 우의를 걸친지 오래지만 맹렬히 내리는 비 앞에서는 전부

별무소용이지 싶다. 말하자면 이렇게 휑하니 뚫려있는 지붕 아래 서 있는 기분.

가파도수퍼를 필두로 해서 골목 곳곳에 이렇게 파랑색 벽화가 그려져 있는 거다. 이쪽 벽에서는

해녀가 자맥질을 하고 있는가 하면 저쪽 벽에서는 가파도의 마을 제단이 그려져 있기도 하고,

나무들이 꽃을 주렁주렁 매단 채 우뚝 서있기도 하고. 그렇게 화려하거나 그림 하나하나가

심오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벽들이 좌우로 늘어서 만들어진 골목길의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다. 가파도 깊숙이 들어서며 사방으로 번지는 골목길들이 모두 이런 식이니, 사방으로

헤매고 다니며 그림 구경을 해도 다리 아픈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문득 발견한 파란 하늘과 파란 청보리밭이 그려진 긴 벽면에 나있는 구멍 하나. 쥐구멍이라기엔

넘 높고, 무슨 호스같은 게 지나는 물받이 구멍이라기엔 넘 어정쩡한 위치. 뭔가 해서 가까이 다가가니

그 구멍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던 초록색 잎사귀들. 저 식물을 살리려고 구멍을 뚫어두진 않았겠지만

자꾸 그런 식으로 상상이 되는 거다. 벽을 세우려는데, 저기에 저 풀떼기 하나가 눈에 자꾸 밟혀서

그 부분만 저렇게 빼놓고 벽을 세운 건 아닐까, 그런 식으로.


저 커다란 꽃들, 한송이만으로도 푸짐한 느낌이 넘쳐나는 화려한 색감의 꽃들은 가운데에 하나씩

뽀얀 색 진주를 박아넣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담백한 돌담벼락에 기대어 손가락길이의 잎사귀를

피워내고 끝내 담벼락을 닮은 담백한 빛깔의 꽃봉오리까지 활짝 틔워낸 녀석도 대견하다.


벽화 작업을 언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초 가파도에 옹기종기 모여살던 집들도 바닷바람과 파도에

씻겨내린, 그런 자연스러움이랄까 분위기가 한껏 살아있다. 적당히 낡고 헤진 옷이 갖는 편안함같은.


가파도에도 고인돌 군락지가 있다길래 궁금해서 푯말을 따라갔더니, 글쎄, 아직 발굴조사 중인지라

뭐가 고인돌이고 뭐가 자연석인지 구분하기가 영 쉽지 않다. 그냥 맨들맨들하니 조금이라도 인간이

가공한 흔적이 남아있고 평평한 돌이 있으면 저게 고인돌 추정 돌멩이인가 하는 거고. 고인돌 찾으러

들어갔다가 게으른 청보리밭 한뼘 구경하고 돌아나왔다.


이제 슬슬 가파도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항구로 돌아나오는 길, 9시 배를 탔었고, 2시엔가 떠나는

배를 타겠다고 미리 표를 사뒀었던 거다. 일단 사고 나면 회항 시간은 못 바꾼다 했던가, 그래서 부러

여유있게 돌아보고 있었던 거기도 했다. 가파도 한가운데쯤 있는 건 초등학교. 놀이터가 잘 꾸며졌다.


항구에 가까워지니까 어라, 이런 좋은 길이 또 정비되어 있었단 말야, 싶도록 말끔한 산책로가 나왔다.

청보리밭 산책로라던가, 3,4월에 청보리밭 축제를 할 때 이 길을 거닐면 온통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청보리바다 한 가운데서 유영하는 느낌이 들 거 같다. 그리고 가파도를 지키고, 남해를 지키고 있는

해수관음상.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질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관음의 상이 남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동포구, 모슬포행 선착장에 거의 도착할 무렵 또다시 마주친 제주의 바다. 이 정도 섬 사이즈면 딱

내가 좋아라 하는 섬의 크기다. 빨리 걸어서 이십여분이면 섬의 끝에서 반대쪽 끝으로 가닿을 수 있는

크기, 그리고 섬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이 보일만한 크기. 그 정도 사이즈라야 이게 섬이구나, 온통

바다로 둘러싸인 채 외로운 땅덩이구나 할텐데, 사실 제주도는 섬인지 뭔지 잘 감이 안 오니까.

항구를 둘러싼 채 두툼한 가랑이를 한껏 찢어벌린 방파제들이 흠뻑 젖었다. 빗물에 젖은 건지, 아니면

바닷물에 젖은 건지, 그렇게 조금씩 헐어가며 차갑게 반들거리던 시멘트 껍데기는 자갈과 모래가 섞인

뼈다귀를 드러낼 거다. 다음번에 조금더 헐어있는 방파제를 밟고 올라설 때엔, 눈위로 뜨거운 햇살이

쨍쨍 내리쬐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어김없이 정시에 가파도를 떠난 배는 불과 이십여분만에 다시금 제주의 모슬포항에 사람들을

부려놓았다. 섬 속의 섬, 이라는 표현이 딱 와닿았다. 서울이나 다른 '육지', '본토'에서 제주도로

넘어온 사람들에겐 제주도 자체가 섬이란 감각이 생경하다지만, 막상 또 제주도에서 가파도로

들어오니 이게 진짜 섬같다는 느낌이 확연한 거다. 모슬포항에 도착하니 왠지 발딛고 선 땅덩이가

커진 만큼 가슴도 넓어지는 거 같고, 좀더 세상이 커다랗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 제주도 2박3일 실제로 다녀온 일정을 기록한 것으로,

렌트카, 빡빡한 시간표, 그리고 짧은 시간에 많이 보려는 욕심, 이렇게 세 가지에서 해방된

삼무(三無)의 일정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토요일(첫째날)

6시반,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출발.

7시반, 제주공항 도착.

8시, 제주시외버스터미널 도착. 모슬포행 시외버스 탑승.

9시반, 모슬포항 도착. 숙소 IN.

11시, 읍면순환버스 탑승. 화순해수욕장 도착

11시반, 올레길 10코스(화순해수욕장-모슬포항, 약 16km) 시작.

12시~13시, 점심(고등어구이, 해물뚝배기)

17시반, 올레길 10코스 끝, 모슬포항 도착.

18시반, 숙소에서 휴식.

20시, 저녁(고기국수 등)

일요일(둘째날)

8시, 모슬포항 도착.

9시, 가파도행 배 탑승.

9시15분, 가파도(올레길 10-1코스, 5km) 도착.

12시~13시, 점심(가파도정식)

14시20분, 가파도 출발.

14시35분, 모슬포항 도착.

17시, 모슬포항 인근 까페.

18시, 숙소에서 휴식.

18시~20시, 저녁(고등어회)

월요일(셋째날)

10시, 모슬포항 출발.

10시반, 읍면순환버스, 초콜렛박물관 도착(농공단지 버스정류장)

11시, 도보 2km, 초콜렛박물관 도착.
 

12시반, 초콜렛박물관 출발.

13시~14시, 점심(밀면 & 수육)

14시, 숙소 OUT, 서일주버스 탑승.

15시, 협재해수욕장 도착.

16시, 한림공원 입장.

18시, 한림공원 퇴장.

18시~19시, 저녁(빅허브버거)

19시반, 서일주버스 탑승, 협재해수욕장 출발.

20시반, 제주공항 도착.

21시반, 비행기로 제주 출발.










 

 

올 한해동안 쓴 다이어리를 책상 서랍에 쟁여넣으려다가 문득 궁금증이 생겨버려 정리는커녕

서랍 안의 이전 다이어리들을 전부 헤집고 꺼내어 버렸다. 여태 내가 썼던 다이어리들이 전부

거기에 있었다. 아무래도 글로 쓰인 최초의 다이어리는 초등학교 1학년때의 일기장.


대체 머릿속에 생각이 있었을지도 의심스러운 1학년이긴 하지만 나름 1학년도 한참 지난 11월께

일기여서 그런지 뭔가 이야기의 흐름이 단순하지 않다. 휙휙 뒤바뀌는 사고의 흐름을 그대로

일기장에 옮겨놓은 듯한 내용. 잠시 여기저기 내키는대로 펼치고 읽다가 부끄러워져버렸다.

그렇게 초등학교 때도 꽤나 열심히 일기를 썼다. 조금씩 공책의 줄간격은 좁아졌고 디자인은

덜 유치해졌으며, 선생님이 바뀌며 매년 색깔과 필체가 다른 첨삭이 더해졌지만, 무엇보다

조금씩 글이 길어지고 그나마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달까. 서른 권은 채 안되지만

거의 매일같이 꼬박꼬박 썼던 그 때의 일상들, 지금 다시 보니 참..얘는 뭔가 싶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 쓰던 다이어리들. 그러고 보니 그때는 학습지를 시키면 예외없이

저런 다이어리를 선물로 주곤 했었던 거 같다. 따로 파는 속지랑 스티커 연초면 으레 잔뜩

사서는 내키는대로 재구성하고, 삼공 펀치로 구멍을 뚫어서 심은하나 최지우 사진이나 엽서도

함께 꼽아두고. 아, 좋아하는 만화캐릭터도 빌린 만화책에서 몰래 오려서 붙여놓곤 했었다.

아..베르단디, 스쿨드, 울드.;;


차마 그 낯뜨거운 잔해들을 옮겨놓진 못하겠고, 속지만 남겨놓은 어느 일년의 기억들, 그리고

나중에 혹 다시 쓸까 싶어 남겼던 껍데기 몇 개만 슬쩍 놓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군대 때 쓰던 다이어리. 어디에선가 한눈에 번쩍 띄었던 디자인의 공책인데, 그냥

틈나는 대로 날짜 '12/30' 요렇게 적고서 끄적이려고 들고 들어갔었다. 아마 일병 때부턴가

들고 갔던 거 같은데, 그 척박하고 비인간적인 돼지우리 속에서 전우 아닌 친구들과 함께

내 위로가 되었던 녀석이다. 어린 왕자, 다시 땡큐.

안에는 따뜻한 캔 하나에 감격하고 누군가의 편지 한통에 행복한 깨알같은 군바리의 일상이

깜장색 153모나미펜으로 꾹꾹 눌러 적혀있었지만, 그런 일상 이외에도 휴가계획이나 제대후

배낭여행 일정 같은 것들, 졸업논문 아이디어들이 제법 빼곡히 적혀있었다.


제대하고 터키-이집트-시리아-요르단을 가려던 계획을 세우고 저렇게 지도도 직접 그리고,

어디 갈지 여행정보나 참고사이트도 모아두고, 여행 예산을 잡고 휴가 때마다 얼마씩 벌었고

이제 얼마가 더 필요한지 모든 걸 닥치는 대로 모아둔 셈이다. 그러고 보니 다이어리에 더해

여행가이드북, 가계부, 지도 역할까지. 제대할 즈음 머릿속에 꽉 들어찼던 저 지도.

내무실 내 관물함 안에다 만들어서 하루하루 두근대며 그어나가던, 제대맞춤형 디데이달력.

아무리 기분좋고 그럴듯한 하루였다고 해도 "제대만이 살 길이다"라는 문구는 저녁무렵이면

으레 절실하게 다가왔고, 휴가라도 다녀와서 한꺼번에 대여섯개를 긋는 날이면 마치 제대가

내일모레인 양 흥분하고 말았던 거다. 그렇게 하루하루 소중하게 바라보던 이 녀석, 어디있나

했더니 다이어리 속에다가 접어서 보관했구나. 서랍을 뒤지는 소소한 즐거움이 이런 거다.

그리고 2007년으로 훌쩍. 대학 다니면서는 사실 대학수첩을 쓰느라고 따로 다이어리를 사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대학수첩을 충실하게 쓰지도 않았는지라..아마 당시 '나우누리' 과게시판을

워낙 열중해서 이용한 탓인 듯. 그래서 2007년, 저 이쁜 고양이 다이어리를 썼다.

다이어리를 펼치니 툭 떨어지는 건, 여기저기 꼽아본다고 써봤던 영어 이력서 한 장. 사진만

첨부하지 않았어도 합격률이 더 높았을 텐데, 실수였다.


다이어리가 굉장히 이쁘고 화려했던 게, 페이지 곳곳에서 고양이들이 갸르릉거리면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새를 쫓기도 하고 털실이랑 놀기도 했지만 어깨죽지에서 날개가

돋아 하늘을 날기도 하고, 여하간 굉장히 매혹적인 다이어리였다는.

내 마지막학기 시간표였다. 그러고 보면 은근 다이어리에 이런저런 그림을 그려넣은 게

적지 않았다. 시간표도 그려넣고, 만화캐릭도 그려보고, 기린도 그리고, 대체 왜인지는

몰라도. 아..2007년 상반기까지는 학생이었는데, 세월 참 빠르구나. 진부하게도 빠르다.

학생수첩을 들고 다니던 그 이전 어느해, 2005년 김기덕 감독이 우리학교에 와서 강의를 했었다.

그의 영화를 빼놓지 않고 챙겨보며 일일이 감동을 먹다가 아마도 그때 최신작 '시간'을 보고

뭔가 영화에 대한 질문 겸 이야기를 한 후 받았던 사인. 좀처럼 사람들 사인은 안 받지만, 그는

기꺼이 사인을 부탁할 만한 사람. ([리뷰] 날 환장시키는 김기덕, 시간.)


아, 그리고 왼쪽은 취직준비할 때 지원했던 수많은 회사들. 저거 말고도 더 있을 텐데.

2008년,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기엔 좀 진부하지만, 여튼 학교를 벗어나 방학도 없고 조조영화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 첫 해의 다이어리다. 뭔가 이제 학생이 아니니까 좀 단정하고 평범한 걸

써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나름 고심해 골랐는데, 아무래도 넘 심심하다.

원래 그런 건 안 하는데 유일하게 한해동안 본 영화니 공연, 전시회 티켓을 몽창 다이어리에

붙여보던 한해기도 했다. 갈수록 어찌나 두꺼워지고 뻣뻣해지던지, 다시는 안 하리라 다짐.

그래도 이런 신기한 공연도 봤었으니 기억해둘 만 하긴 하다. 한예종에서 있던 공연인데

제목이 무려 '카마수트라, 꿈', 대략 내 취향에 수렴되는 전위적이고 그로테스크했던 공연.

그리고 2009년, 다이어리가 이뻐야 한 해동안 곱게 품고 다니며 쓰게 된다는 간명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 한 해였다. 물론, 다이어리 뒤에 있는 꽁짜 쿠폰은 좋았지만.

그저 한해 일정만 설렁설렁 연초에 적어두고는, 그다지 수정하거나 추가하지도 않고서

일년이 지나버렸던 거다. 다이어리가 안 이쁘다기 보다는, 뭔가 레디메이드된 형태로

우르르 뿌렸다는 느낌이 워낙 강해서 '내꺼~♡'라는 애착이 안 간 거 같다.

그래도 빈 칸은 생각보다 적었던 건, 영화나 공연을 보고 나서, 혹은 여행을 다니면서

날짜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공책처럼 이렇게 저렇게 글을 쭉쭉 써댔기 때문인 듯. 아마도

이 페이지는 하루키의 1Q84를 읽고 나서 어딘가로 차를 타고 가던 중에 끄적끄적해둔.

([1Q84] 삶에 대한 '방법적 회의'의 밑장, 그리고 '리틀 피플'의 공갈협박.)

2010년 다이어리는 역시 너무 무거웠던 게 패인이었다. 노란색 가죽이 너무 맘에 들었지만

두껍고 무거워서 다소 부담스러웠달까. 그래도 대충 몇월 며칠에 뭘 하고 무슨 일을 했는지까진

적어두었지만, 소소한 생각들, 낙서들은 연초, 그리고 몇 번 마음을 다잡은 타이밍에 몰려있다.

이제 이틀 앞으로 다가온 2011년 새 다이어리, 고양이가 온통 뛰노는 표지가 그간의

다이어리 중 가장 이쁜 거 같다. 참 잘 샀다 싶어 맨날 자랑질하고 다니는 중.

2011년 잘 부탁해, 다이어리군&만년필양.

그렇게, 신발주머니 옥상으로 날려먹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기쓰듯 하루하루의 궤적을

적었던 다이어리를 한번 일람하고 나니까 왠지 급 나이들은 느낌이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몇 글자 두들김에 선명하게 내 안에서 살아나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정리하자면, 2011년에도 계속 잘 남겨보려는 의지 +5, 노화로 인한 우울증 +10, 시간낭비 1시간.




#1. 포지티브 Ver. : '빽투더퓨처'

점점 시야가 좁아들어지더니 어느 시점에서 점 하나, 그 점조차 팟 꺼져 버리는 시점이 분명

있었을 거다. 언제가 되었건, 누군가 그런 미래를 바로잡고 나를 돕고자 2010년으로 되돌아와

알게 모르게 암시를 계속 내렸던 건 아닐까. 어떤 이유로든 안과에 나를 데려다 앉혀놓으면

나머지는 의사가 알아서 하리라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덕분에, 아주아주 초기에서부터

발견해 내어 잘 관리할 수 있게 된 셈이니 미래는 바뀌었다.



#2. 네가티브 Ver. : '안경탈출 대작전 대실패'

국민학교 1학년 때니까 어느새 20년도 넘었다. 첨엔 물색없이 '박사님'처럼 보인다는 말에

기뻐했던 꼬마녀석이 이젠 겨울철에 더운 방안에 들어오면 훅 끼쳐오는 안개를 불편해하고

점점 두꺼워진 안경알에 얼굴선이 왜곡되는 걸 신경쓴지 오래인 시간. 문득 마음을 먹었고

이십여년 만에 안경으로부터 탈출하나 싶었더니 보기 좋게 좌초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맘에

들지 않는 건, 이제 평생 관리해야 할 만성질병 한두개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는 건가 싶은 막막한 피로감.



#3. Fact 1. (압구정 Y안과, 강남 S안과)

시력교정 수술에는 라식, 마이크로라식, 무통라섹, M-무통라섹, ICL(렌즈삽입술) 등이 있으며,

고도근시의 경우 대개 M-무통라섹을 통해 각막두께를 약 50마이크로미터쯤 상실하는 것으로

교정 시력에 근사한 시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수술 후 3일 정도 어두운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며 버텨야 눈에서 피눈물이 멈춘다고 하는 속설이 있으나, 직접 체험하기 직전에 수술이

취소되어 검증할 방법이 없어지고 말았다.



#4. 시니컬 Ver. : '빼도박도 못하는 서른 인증'

A: 녹내장? 치료받으면 나아?

B: 아니, 리미트엔이 무한대로 갈 때 실명. 낫진 않고 평생 관리. 고혈압같은 거래.

A: 내 통풍이랑 비슷한 건가. 아님 무좀이라거나.

B: 글치.

A: 자넨 안경 쓰는 게 그나마 지적으로 보인다구.

B: 이제 무좀이니 통풍이니 뭐니 고질병 한두개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B: 슬슬 고장나기 시작하는 나이란 게 맘에 걸리고,
B: 그리고 안경이 다시 얼굴에 찰싹 들러붙었단 것도 꿀꿀해.

A: 하긴, 벌써 서른을 넘었으니. 어째 우울한데.

B: 그러고 보니 이제 빠른 생일이네 만나이네 어쩌네 빼도박도 못하고 서른의 영역이야.



#5. Fact 2. (강남 S종합병원)

녹내장이란 안압상승 및 다른 여러 가지 위험요인으로 초래된 진행성의 시신경 손상과

이에 따른 특징적인 시야장애를 보이는 질환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다..가장 큰 위험인자는

나이와 안압이며, 근시, 당뇨병, 편두통, 고혈압, 저혈압 등이 있을 때 더 잘 발생한다. 가족 중

녹내장 환자가 있을 경우 발생률이 높아진다고 알려져 있다..환자 자신이 자각할 수 있는 증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겉으로는 정상처럼 보이므로 조기에 발견하여 적절한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이미 손상된 시신경은 회복시킬 수 없기 때문에, 조기에 발견하여 진행을 억제하는

것이 최선의 치료이다.



#6. 시니컬 Ver.2 : 짝부랄아외로워가 쓴 밤일과 녹내장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문

B: 육체의 내구연한이 다 되어가나 봐.

A: 밤일 좀 줄이시죠.

B: 밤일 이지랄ㅋㅋㅋ 씨발로마ㅋㅋㅋㅋㅋㅋ

A: 밤일과 녹내장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논문있던데. 이미 입증된 거임.

B: 아 그래?ㅋㅋㅋㅋ 하지 말라던?ㅋㅋㅋㅋ

A: 남아공 붕가붕가유니버시티에 짝부랄아외로워씨가 쓴 논문

B: 그리곤 제적당해 니미씨부럴털털카를 몰고 기둥서방노릇하며 나쁜 남자노릇한다는 그 아저씨 말이지?

A: ㅋㅋㅋㅋㅋㅋㅋㅋㅋ



#7. Quotation.


모든 것들에는 유통기한이 적혀 있다.

내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년으로 하고 싶다.

<중경삼림>



모든 것들에는 유통기한이 적혀 있다.

내 육체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년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백년만이라도 무탈하게 아무 말썽없이 굴려먹을 수 있기를.





#8. 남은 것.

라섹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삼일 정도 장님놀이하려고 냈던 휴가가 휑하니 비어버렸다.

지방에나 한바퀴 빙 둘러보고 친구들 만나고 올까 생각 중이다. 아침마다 낯선 잠자리에서

일어나 제일 먼저 안경을 더듬더듬 찾겠지. 씁쓸하다.







@ 사막의 도시 투르크메니스탄.



@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가 섞여드는 터키 이스탄불.


@ 동방명주가 하늘을 밝힌 상하이 와이탄.


@ 타이완, 타이페이.



지브리 스튜디오는 도쿄에 있다. 정확히는 도쿄의 JR선 '기치조지(Kichijyoji)' 역과 '미타카(Mitaka)' 역 사이,

거의 그 중간에 걸쳐 있다고 해야 하려나. (참고 : 낡고 더러워진 도쿄 JR선 전체지도.)

해서 코스 잡기가 상당히 애매한데, 나는 기치조지 역에서 내려서 지브리 스튜디오까지는 (늦어서) 택시로

이동, 지브리에서 보고 나오는 길은 미타카 역까지 산책길을 걸어서 이동, 그리고 에도도쿄건축공원으로 향했다는.


아, 지브리 미술관은 한국에서 미리 표를 예약해야 입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빠뜨릴 수 없다. 성수기 때에는

2주 전쯤엔 해야 안전할 듯. http://ghibli.ktbtour.co.kr/ 여기에서 하는 게 한국에서 사전 예약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들었다.
 

열심히 기치조지역으로 가는 길, 전철 끝에 탔더니 시원하게 앞창이 전부 트여있다. 물론 보이는 거라곤 깜깜한

지하 터널뿐, 그리고 매 역마다 마이크를 잡고 프로의 솜씨로 역 안내방송을 하는 철도운전사 아저씨도 빼놓음

섭하겠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매주 화요일과 국경일에 휴관하며, 그외의 날엔 10시, 12시, 14시, 16시에만 입장할 수 있다.

입장 후에는 언제 퇴장해도 상관이 없으나 입장시간만은 지켜달라던 간곡한 부탁이 사전에 있었는데도 늦고

말았다. 사실은 기치조지역에서 살살 걸어보려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잡아탄 택시 안에서 사진 한장.

생각보다 기치조지역은 꽤나 도쿄 외곽에 있어 멀기도 했고, 생각보다 기치조지역과 지브리 스튜디오 간의

거리도 솔찮이 떨어져 있었던 탓.

일본 택시도 한번 타 볼만하다 싶던 게,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더라는 사실. 기사분은 영어를 전혀 못하시는

할아버지셨지만, '지브리스튜디오'하니까 한 큐에 알아들으셨다. '하야꾸하야꾸'하며 조금 채근해볼까 하다가

그게 '빨리빨리'란 말이 맞던가 문득 혼란스러워져서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았다.

지브리 스튜디오 입구! 결국 10시를 십분여 넘기고 말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줄을 선 채 입장 대기 중.

내부에서는 카메라 촬영 금지, 음식물 반입금지, 흡연 금지, 그리고 휴대폰 금지. 휴대폰? 아무래도 요새

휴대폰에 사진 촬영 기능이 기본으로 들어가있으니 그걸 막고자 함인 듯. 스튜디오 내부의 분위기가

외부로 새나가는 걸 꽁꽁 막겠다는 의지가 결연해 보였다.

결국 내부 사진은 한 장도 없고, 그저 하야오가 그린 너무나도 감격적인 원화들과 금세라도 그가 동료들과 함께

다시 앉아 작업을 계속할 것만 같은 작업실의 재현공간, 그리고 곳곳에 수북하게 꽃처럼 피어났던 담배꽁초들의

이미지만 가득한 채 완전 가슴먹먹해져서 옥상 정원으로 올랐다. 옥상 정원에 오르는 길, 마치 아이들 놀이터에서

흔히 보이는 우주선 모양의 뱅글뱅글 계단을 따라 올라야 했다. 온통 담쟁이가 휘감고 있던 그길을 오르는데,

무슨 '천공의 성 라퓨타'를 탐험하는 거 같기도 하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둘러보는 거 같기도 하고.

옥상 정원에 오르면 바로 눈에 띄는 게 바로 '천공의 성 라퓨타'를 지키던 로봇 병사의 모형. 이 녀석이 큰 팔과

다리를 흐느적대며 금세라도 새둥지를 품어주고 아이들의 머리를 친근하고 섬세하게 쓰다듬어줄 것만 같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주위에 대한 사려깊음을 잊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 그의 고개가 사뭇

수그러져 있어서 그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옥상 정원에서 내려다본 지브리 스튜디오 입구. 저기 아까 가슴 두근거리며 줄서 기다리던 그 천막이 보인다.

그리고 한층한층 눈을 뗄 수 없이, 그야말로 온 벽면 전체를 핥듯이 꼼꼼하게 살필 수 밖에 없었던, 여기 그냥

죽치고 자리깔고 살고 싶었던 지브리 스튜디오의 건물. 사방이 온통 초록빛 식물로 가득하다. 이런 곳이라면

지브리가 만들어온 그 온갖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쉼없이 졸졸대며 쏟아져도 이상할 게 없겠다.

하늘 높이 펄럭이는 지브리의 깃발. 하야오와 지브리, 그들의 작품에는 '반딧불의 묘' 정도만 제외하면 국적이

불분명한, 그리고 시대도 불분명한 시공간이 배경이 된다. 갈색머리와 검은머리가 공존하는, 그리고 기계문명과

녹색의 '원시문명'이 공존하는 세상. 지브리 스튜디오의 그 중세 성을 본딴 듯한 깃발이나 온통 녹색으로 휘감겨

있지만 내부에는 나름 기기묘묘한 것들이 숨겨져 있는 것들 역시 그런 것들의 반영일까.

공중 정원은 생각보다 그렇게 크진 않다. 로봇 병사를 지나 몇 걸음 걷다 보면 나타나는 조그마한 오솔길,

그길 끝에는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등장했던 비행석 실물 사이즈의 모형이 나타난다.

만화로 먼저 나타나고 그걸 현실세계에서 실물로 다시 재현한다. 그리고 그렇게 실물로 눈앞에 나타난 비행석의

모형을 보고 나면, 이 세상 어디엔가 천공의 성 라퓨타가 거대한 나무를 의지한 채 둥둥 떠있을 것만 같다.

그 밖의 다른 캐릭터, 다른 공간들 역시 어디엔가 숨어 있을 뿐, 미처 발견치 못하거나 잃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공중 정원에서만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고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건물 내에서만 불가능하다. 공중정원으로

오르는 테라스에 놓인 이런 신기한 벤치라거나, 다른 것들은 찍을 수 있다는 이야기. 이건 그나저나, 다리가

달라붙어 있는 생선이라고 해야 하나, 생선처럼 생긴 강아지라고 해야 하나, 혹은 프로펠러 꼬리가 붙어 있는

4족보행 탈 것이라고 해야 하나. 언젠가 지브리의 만화에서 등장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연예지망생인지도.

지브리 스튜디오의 입장권, 입장권으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지하1층에 있는 조그마한 영화관의 영화표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에서만 볼 수 있다는 지브리의 단편 네 편을 번갈아가며 상영한다는데, 한 20분간의

그 짧은 영화를 보고 또다시 하야오를 우러러보게 되고 말았다. 아 그의 상상력이란. 상상력과 통찰력이란.

그 아름다움이란.

지하 1층에 있는 조그마한 앞마당에 있던 빨간 지붕을 가진 낡은 펌프. 잔뜩 우그러들은 채 정감가득한

물잔이 두 개 놓여 있는 게 너무 귀여웠다. 펌프도, 끽끽 작지만 분명하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조금

펌프질을 하면 물이 진짜로 쏟아져 나온다.

지브리 스튜디오 건물 외벽에서 발견한 조그마한 창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그녀를 도왔던 검둥이

요정들이 바글바글 창문밖을 내다보겠다고 아우성 중이다.

풍경이 매달려 있고, 땔감으로 쓰려는 듯 한 구석에 차곡차곡 쟁여둔 나뭇가지들, 누군가 저 커다란 나무등걸에

땔감용 나무를 대고 도끼질을 신나게 해댈 것만 같다.

끝까지 감탄하게 만드는 지브리. 아, 지브리와 하야오 정말이지 당신들 최고. 마당 가운데의 하수구 뚜껑마저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챙겨주다니 당신들은 정말.

정말, 돌아나오기 싫었다. 이번 도쿄 여행은 사실 지브리 스튜디오를 가고 싶다는 오랜 소원에서 시작되었더랬다.

기념품샵을 이잡듯 뒤지며 지브리 스튜디오에서만 살 수 있을 법한 걸 골랐다. 그의 제작실 벽면을 빼곡하게

장식하던 원화들 복제본이 있으면 아무리 비싸도 한 점쯤 사가겠다 맘을 굳게 먹었는데, 정작 그런 원화를

활용한 엽서나 그림 따위는 보이지 않아 조금 실망. 그렇지만 한국에선 그다지 찾아볼 수 없는 붉은 돼지 관련

아이템들이 좀 보여서 그걸로 얼추 만족하다. 하야오의 작품 중 내가 손꼽는 작품 중 하나, 붉은 돼지.

돼지는 국가나 전쟁 따위 인간의 일에는 관심없어, 라는 붉은 돼지의 시크하면서도 단단한 한 마디.

그리고 지브리 입장권과 마찬가지로 필름을 일부 잘라내어 만들어낸 책갈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몇 컷이

담겨 있었다. 대충 여섯 컷쯤 들어가있는데 이건 뭐 거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아 첫 씬과 마지막 씬의 모습이

뭐가 다른지 모를 정도. 그만큼 부드럽고 섬세한 모션을 구현한단 얘기겠지 싶다.

마지막으로 산 건 지브리 스튜디오 옥상정원을 지키고 있던 로봇 병사의 모습, 미니어처 형태로 명함 따위를

꽂도록 만들어둔 주석 장식품. 사무실에서 날 지켜주셈, 병사님.ㅋ

돌아나오려는데 지브리 스튜디오 앞의 안내원이 머무는 조그마한 안내데스크에 놓인 장식이 눈길을 끈다.

붉은 돼지같기도 한 모양에, 입에서 모기향을 담배연기처럼 울컥울컥 뱉어내고 있던 모습.

돌아나서기가 어찌나 아쉽던지,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공중 정원으로 올라서는 우주선 모양 동글뱅이

계단 위에서 나부끼는 깃발이 보였고, 온통 짙푸른 녹음으로 덮인 고풍스런 건물이 보였고, 그리고

그 안을 가득 채운 하야오와 지브리의 꿈같은 이야기들이 보이는 듯 했다. 말하자면 이 건물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가 새로운 세계와 인물들을 창조해내는 마법의 솥 같은 존재랄까. 그런 경외감.
 
일단은, 당분간 안녕, 토토로. 지브리 스튜디오를 떠나는 길을 배웅해주는 토토로의 뚱하지만 믿음직한 표정.

저만한 사이즈의 토토로라면 눕혀두고 그 배 위에서 잠들어도 될 거 같은데 정말.

다들 마찬가지 심정이었던 게다. 좀처럼 사람 없는 순간을 포착하기 힘들 만큼, 다른 관람객들도 이곳을

떠나기 아쉬워하며 어떻게든 토토로와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려 애쓰고 있었다.





그 높이가 무려 508미터. 버즈 칼리파(버즈 두바이)가 완공되기 전까지 세계 최고 높이의 빌딩으로 인증받던

타이페이101인지라 시내 곳곳에서 그 모습이 보인다. 하늘을 찌를 듯 하구나, 왠만한 빌딩은 아무리 바싹

눈앞에 땡겨놓고 원근법의 힘을 빌린다 하여도 딱히 상대가 안 된다.

길가를 다니는 타이완 현지인들이야 쏟아져내리는 햇살을 막느라 양산을 쓰고 다니느라 다른 곳에 시야를

두진 않겠지만, 마냥 모든 게 신기해서 두리번두리번대는 여행자의 마음으로는 뭔가 계속 낯설고 새롭고

재미난 것들을 찾아내려 눈이 벌개져 있는 거다.

오토바이가 유난히도 많은 타이페이 시내, 어디서든 신호만 걸리면 마치 모래와 자갈이 분별깔대기에서

분리되듯 오토바이가 맨 앞으로 몰려나온다. 그 뒤론 커다란 차들이 꼬리를 물고 서 있고. 멀리 하얀 햇살에

투명하게 탈색되어 버린 타이페이101의 윤곽.

어디쯤이던가, 도심을 걷다가 어느 순간 불쑥 눈앞에 나타나버린 101에 깜짝 놀랬었다.

다른 건물들이 그렇게 낮지도 않다. 우리나라 서울이랑 비슷하게 적당히 오래된 저층 건물들도 많고 새롭게

올라간 높고 두꺼운 건물들도 적당히 섞여 있지만, 단연 눈에 띄는 높이와 외관이다. 죽순의 형태를 형상화했단

말을 듣기 전에도 슬쩍 예감할 수 있었다.

단수이에 가는 길이었던가, 어딘가의 고가 위를 달리는 차에서도 멀찌감치 타이페이101의 우뚝 솟은 실루엣이

보였다. 다소 도도해 보이기도 하고, 조금은 외로워보이기도 하고.

타이페이101의 91층 전망대에서 야경을 보겠다며 나선 길, 조금씩 빌딩 앞으로 다가설수록 고개를 젖히는

각도가 가팔라졌다. 호오...서울의 트레이드타워나 63빌딩보다는 확실히, 월등히 높구나.

모양새도 꽤나 정묘하게 만들어진거 같다. 미끈하고 유려하게 뻗은 라인과 금빛 번쩍이는 외관을 자랑하는

63빌딩이나, 상승을 거듭하는 그래프 모양처럼 생긴 트레이드타워와는 또 다른 느낌이 있다. 우선 외관 자체에

돌출된 부분이나 장식물처럼 매달린 부분들이 있어서 그런 거 같고, 왠지 손으로 만질만질하면 그 오돌토돌한

골격의 촉감이 고스란히 전해질 거 같아서 그렇기도 하고.



 
해질녘 101타워 위의 전망대에 올라서 내려다본 타이페이 시내의 야경, 야경이야 어디서든 이뿌다지만

불안정한 대기 탓에 뭉게뭉게 예술구름이 피어나는 하늘 아래 다정하게 깜빡이는 주홍불빛들은 참.

101타워에서 엘리베이터로 올라갈 수 있는 최대높이는 89층, 382미터. 거기에서 계단으로 두 층 올라가면

건물 옥상으로 나와 타이페이 시내를 조감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 거다.

91층 높이, 390미터에 이르는 그 전망대는 사실 타이페이에 오기 전에는 굳이 오를 필요가 있던 곳이기도 했다.

평소 일하는 사무실 높이가 47층인지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둠이 내려 주홍불빛이 번지는 그 모습들에서

미감을 느끼기엔 다소 질려버리지 않았나 싶었는데, 그래도 조금 갈등하다가 가보기로 결정. 가도 후회, 안가도

후회할 거라면 차라리 가고 나서 후회하자는...결혼과도 같은 고민.


게다가 현재 세계 최고로 높다는 버즈 칼리파(버즈 두바이에서 이름이 바뀐)도 가봤으니, 그 이전까지 세계

최고 높이라던 이 타이페이101도 한번 가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싶어서.

올라서자마자 보인 건 촘촘한 안전철망 사이로 빛나던 조그마한 손톱달. 바람은 철망 사이로 숨바꼭질하듯

윙윙 소리내며 노닐고 있었고, 해가 떨어지며 찜통더위는 급속히 사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아래로 보이는 야경은 89층에서 유리창 너머 보였던 풍경과는 또 다른 느낌을 던지고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보여지지 않는 날것의 풍경이란 감흥 때문인지도, 시시각각 짙게 나리는 어둠 때문인지도.

이런 높은 건물에서는 꼭 줄을 내려 등반을 하거나, 글라이더를 타고 내려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지라,

이런 식의 경고 문구 역시 꼭 있기 마련이다. 그에 더해 흡연 금지, 뜀박질 금지라는 건 자칫 불씨가 날려가서

어딘가 불을 낼까 봐, 그리고 뛰다가 자칫 바람에 날려 떨어져 버릴까 봐 경계한 것일 테다.

101타워, 총 101층으로 되어 있어 101타워라고 불린다지만 일반인에게 공개된 부분은 여기 전망대의 91층까지.

아마 나머지 10층은 전망대가 있는 옥상 위에서부터 다시 탑처럼 솟은 이 부분을 가리키는 것인 듯 하다.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 전망대를 한바퀴 거니는 동안 하늘은 시시각각 어두워졌고, 언제부턴가 건물의

곳곳에서는 조명이 밝혀졌다. 뭔가 동물원 우리를 연상케 하는 안전철망, 다른 점이라면 갇힌 게 이쪽이란 점.

사방을 뛰어다니며-사실은 걸어다녔지만-사진을 찍어대다 보니 마치 신경세포들 같다. 그리고 신경관들이

촘촘히 뻗어있는 그것들은 마치 101타워, 여기에서부터 모든 것들이 뻗어나간 듯한 느낌. 여기가 그만큼

타이페이 시내 중심가에 있기 때문이겠지만, 멀찍이 둥글둥글 혈관이 뭉쳐있는 정맥류처럼 불빛들이 올망졸망

뭉쳐있는 곳들을 제하고 나면 대체로 가지런하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안전철망 따위 쉽사리 넘나드는 손톱달.

중간중간 멀리 내다볼 수 있도록 망원경이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철망을 조금쯤 걷어내서 시야를 가리지 않는

센스를 발휘했어도 좋았을 텐데, 사방을 빙빙 두른 철망은 완고하기만 하다. 풍경을 가지런히 칼질해내어

마치 병풍처럼 세워내는 그 솜씨하며.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나니 바람이 더욱 거세진 느낌이다. 어쩌면 조금씩 사위어가는 주위 풍경 속에서 용쓰지

못하는 시각 대신, 온통 바람이 건드리는 그 촉감에 쏠린 탓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어둑어둑해져 불빛을 잡아내기조차 힘들어진 즈음, 굵고 유난한 불빛, 굵은 혈관같은 불빛의 흐름만
 
남아버렸다.





타이완의 '국부' 장개석을 기념하기 위한 중정기념당의 메인 건물은 바로 요것, 커다란 팔각 정자처럼 생긴

하얀색 대리석 건물이다. 그렇지만 그 양쪽에 황금빛과 붉은빛으로 위풍당당한 콘서트홀과 공연장이 버티고

섰을 뿐 아니라 입구참엔 그럴듯한 정문이 서 있어서 조금은 위축되어 보이기도 한다.

우선 이게 중정기념당에 들어서는 입구, 현판에는 '자유광장'이라고 쓰여 있다. 천수이볜 전 총통이 몇년 전

대만에서의 최초 평화적인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루고 나서 시행했던 일종의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애초 '중정기념당'이라던가 '장개석광장'이라던가, 적혀 있던 현판을 내리고 '자유광장'으로 개명했다고 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보다보니, 다른 일반적인 한자 현판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적히기 마련인데 이 현판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적혀 있다는 점이 뭔가 생뚱한 느낌을 주고 있던 것이었다.

중정기념당에 올라 돌아보면 양쪽에 커다란 건물 두 채가 버티고 섰고, 잘 꾸며진 정원과 제법 큰 '자유공원'의

앞마당이 보이는 거다.

양쪽 건물은 거의 비슷해 보이면서도 사실 조금씩 모양새가 다르다. 한쪽 건물은 음악당, 콘서트나 연주회가
 
열리는 공간이라고 한다.

중정기념당을 에워싼 건물 유리벽에 비치는 으리으리한 처마의 그림자.

또 하나의 건물은 오페라니 뮤지컬이니, 그런 공연을 위한 공간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양산을 하도 많이 쓰고 다녀서, 가끔은 비가 오는 게 아닌가 하고 헷갈리기도 했다. 특히 지하철을

내려서 지상으로 올라올 때, 사람들이 지하철역 입구에서 일제히 양산을 펼치는 장면을 보고 비가 오는가 싶어

당황했던 기억.

북경 자금성에 갔을 때도 그렇고, 서울의 궁들을 돌아볼 때도 그랬지만 왕이나 황제를 위한 주된 건물의 가운데

길은 아무나 함부로 밟을 수 없게 해 놓았다. 용을 조각해 두거나 여기처럼 이렇게 커다란 태양을 조각해두어

정면으로 바로 걸어들어올 수 없게 만든 거다.


저 태양 문양은 타이완의 국기인 '청천백일기'에 등장하는 그것과 같다. 파란 하늘의 하얀 태양. 그리고 땅에는

시뻘건 피가 흐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타이완의 청천백일기.

생각보다 계단은 높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양옆 금빛 건물에 다소 눌려보인다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크기도 생각보다 많이 크고 높기도 높다. 고궁박물관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무늬의 하얀 계단 기둥들에

난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부시다.

문득 나타난 꺼뭇한 동굴 안, 뭔가가 웅크리듯 앉아 있었다. 하얗고 강렬한 태양에 길들었던 시야가 좀체 내부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이, 슬리퍼 신은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는 표지만 크게 보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쪼리는

슬리퍼랑 다르니까, 라 스스로 정당화하며 동굴 속으로.

중정기념당의 천장, 바깥에서처럼 하얀 태양이 내리쬐이고 있었다.

이 아저씨가 장개석, 혹은 장제스, 혹은 중정. 일제와 맞서 싸우기보다 공산당을 먼저 패퇴시키겠다면서도

부정부패를 방관하여 민심을 잃고 급기야 중국대륙을 잃어버린, 타이완까지 쫓겨들어와 권위적 독재체제를

십여년간 구축한 인물. 20세기 초중반의 격변기를 지나면서 개인적으로야 참 극적인 삶을 살았겠지만, 대부분

피식민지의 처지에 있던 지역들의 정치지도자들의 궤적과 딱히 다를 바 없기도 하다. 이승만처럼.

그에 대해 타이완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우리나라랑 비슷하게 천수이볜의 집권 몇년동안 심각한

내부갈등과 정치적 지향논쟁이 있었던 만큼, 이제 '반공'과 '친미'를 국시로 삼던 이 나라도 조금씩 과거사를

균형잡힌 시각으로 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을지 모른다. '국부'라는 모호하고 위압적인 칭호 뒤에 가려진

사실들을 발굴해 내고, 좀더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질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지 싶다. 더구나

남북 관계와는 달리 중국과 대만간의 양안 관계는 천천히, 그렇지만 확고한 우호관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으니

어쩜 우리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다.

중정의 커다란 동상을 지키고 있는 병정놀이 중인 군인. 워싱턴의 링컨도 그렇고, 타이페이의 장개석도 그렇고

다들 너무 크다. 그들은 너무 크고 으리으리한 건물 한 가운데 딱 버티고 서서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람들을

내려다 보는 거다. 게다가 그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들, 이런 호두까기 인형같은 병정들과 반짝이며

내려꽂히는 후광같은 조명들,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고 차가운 질감의 대리석, 기침소리조차 조심스럽게

내뱉게 만드는 그 공간의 깊은 침묵과 아스라한 공명 소리까지. 아, 양쪽으로 거대한 국기를 둘둘 말고 있는

데코레이션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그렇게 높은 곳에서, 그렇게 커다란 몸집을 하고, 주위의 온갖 것들이 다 당신만을 떠받드는 공간에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니 참 좋겠수. 그냥, 그런 정치인들의 거대한 동상들이 조금은 눈높이를 맞추고

소탈하게 내려와 있으면 안 될까 싶어서 괜히 장개석에게 툴툴거려 보는 거다.

돌아나오는 길, 현판까지 대리석인가 보다. 햇살이 내리쬐이자 거울처럼 말갛게 빛나며 처마끝을 반사시켰다.

왠지 씁쓸했던 거대 건축물. 누군가를 높이고 금칠하기 위한 기색이 너무 역력해 보였다. 그가 실제로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지 아닌지를 차치하고라도, 그냥 누군가를 그렇게 추앙하고 떠받드는 것 자체가 불편했던
 
거다. 장개석=타이완=국가=숭배의 대상, 따위 그가 의도했을 도식이 거칠게 머릿속에 막 떠올랐다.

장개석은 '신생활운동'을 전개해 국민들에게 유교적 가치를 보급하는데 힘썼다고 한다. 일종의 새마을운동같은
것이었을까, 그래서인지 이 '중정기념당'으로 통하는 조그마한 문들은 대효(大孝), 대충(大忠) 따위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타이완 거리에는 지금도 여전히 '신의信義로', '인애仁愛로', 심지어, '애국愛國로'같은

지명도 있어서 완전 경악하고 말았었다. 손발이 오글오글.

그들이 이공간을 어떤 의도로 기획했던 간에, 타이완을 어떤 국가로 구상했던 간에, 젊은이들은 모여서 춤추고

웃는다. 뭔가 수화로 된 공연을 연습중인지 손으로 수인을 짚거나 쉼없는 제스쳐를 펼쳐보이고 있었다.

중국과 한국, 일본의 단청과 처마의 기울어짐에 대해서는 중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 때 몇 가지 지문들을

읽으며 가늠할 수 있게 된 거 같은데, 정말이지 딱딱한 녀석들이다. 살짝 올라가려다 말았다는 느낌.

경직된 그만큼 완고해 보이기도 하고, 강건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뭔가 호락호락해 보이지는 않겠다는

결기가 꽉 차 보이는 거다.

돌아나오는 길, 아까는 없었는데 음악당 옆에서 붉은 기를 휘두르며 깃발춤을 연마중인 아이들이 보였다.

묘하게도 펄럭이는 붉은 기를 보면 일단 가슴부터 뛰고 만다. 우와..멋지다 이러면서.


타이페이 서북쪽으로 달려나가면 단수이가 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찍은 항구도시라고 해야 하나. 바다를

접한 조그마한 마을. 단수이항을 따라 걷다가 떨어지는 해를 잡았다.

배를 끌어 바다로 내려가는 길, 반짝반짝 비늘처럼 햇살이 깔렸다.

육각별 모양으로 빛나는 태양, 자잘하게 출렁이는 잔잔한 바다에 맞춰 너엄실대는 조각배 몇 척.

어쩌다가 햇살이 붉고 둥근 구체로 사진 안에 들어왔을까.

한가롭고 평온하던, 그렇지만 역시 무지 덥고 습했던, 그렇지만 또 바닷바람 덕분에 더위의 팔할은 날려버렸던

곳, 반짝반짝 단수이의 해변을 걸었다.



타이완, 타이페이에선 왠만한 곳들을 전철로 이동하는 게 편하다. 빠르기도 하지만, 워낙 지하철역 안에 냉방이

잘 되어 있어서 시원하게 쉬엄쉬엄 이동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역마다 다르긴 하지만 미술작품이 쭈르르

전시되어 있기도 하고, 쇼핑몰과 연계되어 있기도 하고. 

이렇게 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신기한 건 그다지 벤치나 의자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사람들이 맨바닥에 그냥

털썩 앉아서 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는 점.
 
구간에 따라 요금이 할증되는 시스템이다. 기본은 20NT$, 타이완의 화폐단위는 NTS, 뉴타이완달러의 약자인 듯.

기계에 돈을 넣으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전철표가 나온다. 금속도 아니고 종이도 아니고 플라스틱이라니,

왠지 조금 싸구려스러워 보였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재활용하기에도 편할 거 같고 훼손이 쉽지도 않을 거 같고.

괜찮은 거 같다.

개찰구는 저 빨강 부채모양 장벽이 펼쳐져 있다가 지날 때마다 접히는 형태. 들어갈 때는 저 플라스틱 코인을

접촉면에 띡 대면 삑 소리나면서 문이 열리고, 나갈 때는 저금통 구멍같이 생긴 곳에 집어넣으며 나옴 된다.

여기선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한 줄 서기 시행중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처럼 두줄서기 하는 나라를 본 적이

없는데, 한 줄은 서고 한 줄은 걷도록 해 주는 게 맞지 않나.

화려하게 꾸며진 지하철 역내 간판. 여기가 중정기념당 역이어서 좀더 신경써 꾸민 건지도 모르겠다.

중정, 장개석, 장제스, 그를 부르는 많은 이름들이 있다. 사실 대만의 장개석이나 한국의 이승만이나 일종의

'국부'였고 민주주의를 하는 양 독재를 했던 인물들, 닮은 면이 참 많은데 장개석에 대한 대만인들의 인식이

이승만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보다 조금은 좋은 거 같다. 기념물이 많아서 그렇게 느끼는 것 뿐일까.

사실은 별 생각없고 아무 느낌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月台, 월태가 전철을 가리키는 대만식 표현이다. 달 월, 별 태. 뭔가 굉장히 로맨틱한 느낌의 이름이랄까.

그런 달과 별을 조심하라는 전철역 플랫폼의 문구.

전철 안에 붙어 있던 인터콤 안내문, 왠지 2번 설명 위에 있는 녀석이 입에서 초음파를 발사하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재밌길래 그만 한 장. 주위의 사람들이 전부 이상한 사람보듯 쳐다보았지만 모른 척 했다.

그리고 또 한장, 노약자석에 붙어있던 안내판. 한국의 '노약자'는 임산부나 아이가 아니라 대개 나이든 노인을

위한 전용석처럼 되어있다가 요새 조금씩 임산부도 배려하기 시작하는데, 여기도 줄줄이 읊어놓았다. 노인,

행동이 불편한 사람, 어린 아이를 동반한 부녀, 임산부.

그렇게 도착한 중정기념당. 역사에서 올라오면 바로 보이는 모습.





예비군 1년차때는 군복을 다시 입는 것부터, 총을 쥐는 것도, 경례를 하는 것도 모든 것이 혐오스러웠다.

전역(轉役) 1년차의 예비군훈련.


그런데 이제 6년차, 예비군 훈련이 떳떳하게 볕쬐러 나오는 '휴가'라고 느껴지게 되었다.

물론 전투복은 전투하라고 입는 게 아니라 전투력 남김없이 떨어뜨리라고 입는 거고, 전투화는 끈을 바싹

조여매는 게 아니라 개혓바닥처럼 사방으로 아가리를 벌린 채 질질 끌고 다니는 거란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차갑고 불쾌한 총의 폭발음 역시 조금은 더 참을 수 있게 되었고, 다섯 발 중 세 발은 표적에 맞혔으며,

이제 그 '표적'이 언제라도 '사람', 혹은 북괴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바로 연결시키지는 않게 되었다.


그래서, 예비군 6년차, 마지막 훈련을 받으며 이런저런 훈련장 스케치.

되는대로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에 쇳덩어리 목총을 쑤셔넣고는 하이바를 올려둔 예비군들. 신병 훈련소에서는

특별지급되었던 치토스의 '따조'까지 승인되지 않은 놀이기구라며 뺏어가고 치토스 봉지조차 네모나게 각잡아

접어서는 버렸단 말이다.

준비성 철저한 어느 '전우'. 등산갈 때 부모님이 갖고 다니시는 휴대용 방석을 갖고 왔다. 4월이 한참 지났어도

쌀쌀한 날씨인데다가 항상 군대는 '춥고, 졸립고, 귀찮은' 몸뚱이가 문제인 거다. 어찌나 부럽던지.

다른 사람들이 사격 훈련을 마저 마치기를 기다리며 하릴없이 방황하는 예비군들. 후드티를 껴입고 갔다가

입구에선 교관들의 우악스런 손에 벗겨지던 구겨넣어지던 둘 중의 하나를 골라야 했지만 훈련 중엔 계속 쓰고

다녔다. 나처럼 후드티를 껴입고 온 다른 분께서는 유유자적 독서삼매경.

그래도 연막탄도 쉼없이 피워올리고, 총알도 다섯발씩 주고. 차라리 예비군들의 기초체력 강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하루 날잡아 등산을 시키던가, 구보던 웨이트트레이닝이던 하루치 일과를 주는 게 어떨까. 돈 아깝게

모형 건물짓고 연막탄 피우고 그러지 말고. 정말, 예비군 훈련을 그렇게 좀 실제로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바꾸면 모두가 좋아할 거 같다.

이런 '북괴'를 상대하려 해도 역시나, 되도 않는 정신교육이나 빌빌거리는 전투기술훈련 따위보다 배나오지

않은 날렵한 체력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참 웃기게 생긴 북한군인 아저씨, 그리고 밑에 이리저리 구르는

모형 수류탄들. 그 뒤로 등에 피로를 업은 예비군들.

뭐, 이런 훈련 안내문도 나눠주기 시작하고 이제 예비군도 조금은 서비스 정신을 갖게 된 걸까. 휴대폰을 들고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건 이미 숱하게 유출되고 유통된 '모두다 깊디깊은 숙면 중인 안보교육시간'이라거나

'개도 안먹는 예비군 짬밥의 실체'라거나 따위여서 군의 사기를 떨어뜨릴까봐 두려운 게다.


나는...음, 예비군 훈련에 대한 자극적이지 않은 스케치에다가 건설적인 대안까지 제시했으니 괜찮을 거다.

괜찮겠지 모.

상병때부터 일년넘게 내 왼쪽 뇌 옆에는 초록빛 체게바라가 있었다. CHE_GUEVARA.

사실은 빨간색이나 흰색으로 하고 싶었는데, 오바로크쳐주던 분이 그럼 잡혀간다며.

난 잡아갈 테면 잡아가라며, 어차피 엎으나 뒤치나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며.


그러고 보면 그람시나 알튀세르, 최장집을 읽었던 것도 군대에서였다.

얼룩무늬에 쩔고 '다'나 '까' 따위 말투와 마초들에 치여서 삶이 푸석해져버렸다던 오래전 이야기.

그렇지만 지금은 예비군 훈련을 몇 년 더 했음 좋겠을 뿐이고. 아이러니.





예순이 넘은 아저씨하고 같이 일하면서 참 많이도 이야기했던 날이었다. 울 집이 둔촌동이었던 시절..날 '도시'와

연결시켜줬던 2호선 성내역 옆에 자리잡은 '노동현장(절라 뻘쭘함..이단어는 내 취향이 아냐..ㅋㅋ)'이 그간의

작업공간과는 어찌나 판이한 질적 퀄리티를 갖고 있던지.


일거리를 맡기면 대략 될 만한 시간이 흐를 때까지 알아서 하게 냅두고..괜히 이일저일 못시켜서 안달인 나쁜넘이

없다. 화장실에 똥피라미드 군락이 형성되어 나로 하여금 뚜껑을 덮고 그위로 올라가게 하는 일도 없었으며..

저번 때와는 달리 콧물딱을 일없는 따스한 봄볕에 마음이 쾌청하였던 터에..무엇보다도 일거리자체가 그다지

힘들거나 오염스럽지 않았던 거다. 덕분에 일하다 쉬는 타이밍에 문자도 여기저기 날려보고 했던 거구.ㅋ


그냥, 날 자게 냅두지 않는 모종의 일로 말미암아 3시반에야 잠들고 5시에 인나야 했던 거...그 피로함에 맞물려

내게 다시금 '현실'을 들이대고 만 사건...어쩜, 오늘처럼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새롭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자체로...내 여행은 이미 애초 생각했던 때부터 시작되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라며 물러서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오늘처럼, 작업을 위한 먼지구덩이의 남루한 작업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뽑아든 나의 작업복, 새로

빨아진 채 작업날을 다시 기다린 째진 청바지, 이번에 부대에서 업어온 얼룩무늬 잠바, 그 색깔이 왜 그리 선명하고

화사하던지 스스로 눈치가 보일 지경이었다. 그 위화감을 의식하고 있다가..몇분 지나지 않은 횟가루 풀풀

날리는 작업에 금세 '낡아버린' 모습에 맘이 편해졌다.


오늘은 같이 일했던 사람들도, 나하고 같이 금방 '낡아버린' 거 같아서...봄볕을 즐기기에 별다른 애로가 없었달까..
오늘은 창동, 북한산 인수봉이 희뿌연 스모그 사이로 희끗거리는 아파트 신축공사장에 갔었다. 완죤 전국구로

돌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침에 5시에 인나서, 창동역 앞서 바리바리 작업복을 가방에 담은 아저씨들 만나 북한산

I'PARK 공사장으로 갔었지...여긴, 얼마전 내무실서 후임들이 서울 여긴 얼마짜리고 저긴 얼마짜리고-마치 서울

사는 사람은 그 모든 집값과 노른자위를 다 꿰차고 있는 양-물어보는 와중에 내게 들이대졌던 신문광고에

나왔었기 땜시 기분이 묘하더군.ㅋ


첫날은 비록 17층짜리였다 하나 지하4층서 일했고, 어젠 15층짜리 건물 15, 14층서 일했고..오늘은 24층짜리 옥상,

그니까 25층서 눈 치웠다, 오전 작업. 눈치우는 거야 워낙 '단련'된 일여서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일했으되, 워낙

꽁꽁 얼어붙어서 마치갖다 깨가면서 모닥불에 지져감서 진행해야 했어서 생각보다 오래 지체..


공사장용 엘리베이터-일명 호이스트카-가 강풍에 휘청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사방이 뚫린 그곳은 어제보다도

삼엄하던 것. 오늘 간 곳은 특이하게도 아주머니들이 '오야지(작업반장)'로 있어서 아저씨들이 꼼짝못하고

아줌마들의 호령을 따라야 했는데, 머...유독 '어린' 나야 원래 아줌마들이 하도 좋아해줘서 잼나게 일할 수 있었다.

마치 아들내미처럼 잘 챙겨주시고 살갑게 대해 주시더라구.ㅋㅋ 첫날 같이 일했던 아저씨들을 다시 만났더니

무진장 반가워해주시며 마스크도 챙겨주시고, 잘 따라 다니라고 신경도 써주시고. 으레 그렇듯 담배 한까치의

휴식시간엔 군인 '무용담'이 왕래하고.ㅋ


일은 오늘도 별로 어렵지 않았는데, 문제는 추위였다. 어찌나 춥던지..사무실서 줏은 전투복내피(일명 깔깔이..)를
 
외투삼고 옷을 몇개씩 껴입어도 무진장 춥더라. 이넘의 노가다판에는 거개가 군용물품이다. 아예 전투복 일체를

빼입고-줄까지 칼같이 잡힌..-오는가 하면, 귀마개에 깔깔이, 워커까지..-.ㅡ^


삽을 쥐고 굴신운동을 오전 내내 해서인지 배가 무진장 아팠다. 가건물로 지어진 화장실이지만 칸이 여섯개나

있다..왼쪽부터 까면 정상이고 가운데부터 까면 변태, 오른쪽부터 까면 피해의식이 강한 사람이란 이야기가

기억나서 왼쪽부터 까기 시작했다. 무데기무데기무데기...변기가 양변기면 뭐하노...그대로 앉음 찔릴 판이다,

뾰족한 산을 이루고 있더군...절라 충격. 제길.


어쩐지~ 화장실이 이러니 아파트 집집마다 구석탱이엔 그게 얼어있던 거였구나..아까도 정체를 모르고 손으로

집고서야 알아차렸더랬다. 몇번이나 예기치 못한 조우를 했던 것인지. 정말이지 거기 아주머니 말씀대로 아파트

전체가 똥천지다. 어쩔 수 없이...이미 갈데까지 가버린 그 높이를 더욱 융기시킬 수 없어, 걍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쪼그릴 수 밖에 없더군..쿨럭.


내일은 또다시 삼성역이다. 일단 낼까지 하면 대략 터키서 이집트가는 비행기 값정도 마련하는군.ㅋㅋㅋㅋㅋ
왠만함 이번엔 나와서도 죽은 척 갈라 그랬는데 결국 우려하던대로 세인들의 분노가 폭발해 버렸구나...-.ㅡ^

아무리 휴가가 많다느니 언제 다녀왔다고 또 나오느니 그래도 어쩌겠어, 공군은 휴가(연가)와 외박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니깐. 외박주로는 11월초에 나왔던 거 이후로 두달이 넘었단 말이다.


어쨌거나, 이번 외박부터는 자중하며 '생산적인' 시간을 갖기로 맘먹었다. 제대하고 바로 배낭을 꾸려볼까 하고.

제대할 때까지 여행갈 자금이나 '생산'해서리, 집에 손벌리기도 민망하고 더이상 환대도 못받는 상황도 타개하고자

하는게 내 아이디어.


해서, 현대 해상에 들어갔다.

현대 해상 사옥이 어디 있는지 아나?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을 축으로 등거리상에 교보빌딩을 마주 보고 있는 곳의

초현대적인-메탈과 유리가 두드러진-건물이 바로 그곳, 지금 보수 공사중이다.

오늘 4시50분에 인나서 인력회사 나가서는 방금, 집에 들어왔지...지하 4층에 있는 보일러실을 손봐주고 왔다.

일당 55,000원. 사실 60,000원인데 소개비조로 인력회사서 5,000원을 가져가더라구.


그나마 일거리도 거진 없는 겨울에, 경력이라고는 고2때 장난처럼 두 주 했던 거 말고 그저 군바리일 뿐인

(그것도 펜대굴리며 문서나 도장범벅 만들어놓는) 나로서는 굉장히 감지덕지지. 일은 머, 말그대로 인력, 군대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을 정도고, 힘든 정도는 글쎄...일병, 이병때보다는 쉽고 상병 떄보다는 어려운 편..

병장으로서는 쫌...측정불능. 요새 작업 나간지 하도 오래 되어서...대조군이 없군.ㅋ


그래도 시설담당 나대리나 같이 용역나간 아저씨들이 다들 군바리라고 일잘한다고 인정해 주는 거 보니 나쁘진

않은 듯하다고 혼자 생각하고 있다. 여태 월급 받은 건 외박 나올때마다 족족 다 뽑아 먹었으니 이제부터

군에서 받는 월급/보너스, 일케 일해서 버는 돈, 그런 것들 열심히 다 합침 대략 여행경비나올꺼같아서, 계속

열심히 살아 볼 생각이다. 일자리가 안정적이면 좋겠다만...어쩔 수 없지. 국가에 매인 이 한 몸, 무엇을 할 수 있다

말이오. 노동일 혹 노가다, 이건 뭐랄까...경험삼아라기보다는 지금 내가 돈을 모을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는 게지. 싫단 건 아니고, 어쩜 이런 자세가 제대로 된 '현장활동' 아닐까 싶어서. 호호호.


내일은 삼성역, 어디서 일할진 몰겠다만 기대만발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