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 카메라를 잡다가 어쨌는지 필름칸을 열어버렸다. 조마조마해하다가 그것도 잊은 채 현상하고 나서야 다시금 실망. 비싼 필름인데..ㅜ

photo by pentax superprogram & Kentmere.

- 걷고 싶은 아름다운 산책길 4, 경주 황남동 대릉원 지구(윤성의)-

 


* 2016. 7. 14(목) KBS제1라디오 '라디오 전국일주' 방송분입니다.

* 아래글은 제 블로그의 글 (시간이 보듬어준 경주의 듄, 대릉원의 곡선들.)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원고입니다.

 

오늘 함께 걷고 싶은 길은 경북 경주 황남동 일대의 대릉원 지구입니다. 황남동은 황남빵으로도 익숙한 지명이죠. 대릉원은 신라시대 왕과 왕비, 귀족 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는 곳입니다. 중에는 천마총, 오릉, 미추왕릉 익숙한 관광지 외에도 박해일 신민아 주연의 영화 경주 배경이었던 경주 노서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등도 있습니다.

대릉원은 경주 고속버스 터미널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고속버스를 타고 경주에 내리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유적지이기도 합니다. 대릉원은 제법 커다란 공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데요. 이곳을 둘러싼 담백하고 야트막한 기와 담벼락, 그리고 너머 민가들의 수수한 기와지붕들이 잠시 시간감각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야트막한 언덕 같기만 무덤 하나 하나에는 각각 주인이 있고 어쩌면 무덤 안에는 여전히 찾지 못한 보물들이 숨어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눈에는 그런 귀한 유물들보다 무덤의 옆구리 곡선이 탐나게 느껴졌습니다.

사하라 사막에 갔을 반해버렸던, 바람이 만들어낸 모래언덕과 닮은 곡선이었습니다. 바람이 모래를 하릴없이 헤치고 깎고 부어내며 만들어내던 자연스럽고 우아하던 곡선, 아마 대릉원의 곡선들 역시 조금 시간이 걸렸을 , 자연의 손길은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사방이 온통 둥그스름하고 풍만한 언덕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공간, 사이를 구비구비 휘감아 돌아가는 산책로의 모양새도 좋습니다. 딱히 어디를 찝어서 여기를 봐야겠어, 라거나 바퀴를 전부 걸어봐야겠어, 라는 욕심 부리지 않아도 그저 눈앞에 펼쳐진 곡선의 풍경들과 곡선의 길들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 행복해지는 공간입니다.

노서리 고분군도 추천하고 싶은 곳인데요, 천년을 버텼던 왕국의 무덤에서는 어느새 세월을 먹고 자라난 나무들이 자리를 잡은 풍경을 있습니다. 누가 감히 왕들의 안식처에 올라가 나무들을 심고 키우고 손봐줬을 리는 없고, 그저 자연스레 바람이 옮겨다준 씨앗을 자그마한 언덕이 품고서 물과 양분을 주며 이만큼 키워냈을 거라고 상상하면, 오랜 세월을 조금이나마 실감하게 됩니다.

대릉원에서부터 첨성대나 안압지, 계림숲이나 경주박물관까지도 설렁설렁 걸어서 닿을 있는 거리에 있구요. 오릉을 지나 포석정을 거쳐 경주 남산 아래턱을 가볍게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고분의 둥실한 실루엣과 너머 야트막한 산들의 실루엣이 겹쳐 보이는 풍경, 안에서 천년의 세월을 느끼며 걸어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지금까지 낯설게만 볼 수 있다면 어디서든 여행이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 윤성의였습니다.




경주 불국사에 이어 찾은 곳은 석굴암,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석굴암 가는 길은 그야말로 지그재그. 지리산 대청봉을 보고 달리는

 

와일드한 드라이브 코스에 비길만한 커브와 경사로가 연속된 구간이었다. 불국사에서 걸어 올라갈 수도 있다는데 왕복 2시간쯤.

 

전혀 기억에 없던-하긴 관광버스로는 이런 짧은 터널을 지나는지 전혀 알 방법이 없었겠지만-터널이랄까 문을 지나다 말고

 

잠시 차를 세웠다. 아마도 석굴암의 내부 한쪽 면에서 봤거나 혹은 국사책 어딘가에서 봤던 기억이 어렴풋한 나한이 서 있는

 

모습을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달까.

 

석굴암 주차장에 도착, 커브가 심한 이차선 도로를 따라 가파른 산을 꽤나 올라왔다 싶더니 역시나 전망이 탁 트였다.

 

 

구름이 조금 끼어있는 날씨가 아니라 완전 청명하고 파란 하늘이 반짝거리는 날씨였다면 저 아래 경주 시내가 좀더 잘 보였을 듯.

 

석굴암이 주차장 바로 앞에 있을 거라고, 전혀 근거는 없지만 그냥 막연히 믿고 있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여기서부터 또 한참

 

산길을 걷고 오르고 해야 도착하는 게 바로 석굴암. 여기는 그저 주차를 하고 티켓을 구매하는 입구에 불과하더라는.

 

 

알록달록한 연등이 양쪽에서 길을 안내해 주고, 산등성이의 짙은 그늘을 따라 걷기엔 꽤나 추워서 쉽지 않다고 느낄만큼

 

깊은 산의 서늘한 냉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 길을 따라 이십분여 걸었을까.

 

불쑥 나타난 건물 한 채. 이게 석굴암이었던가 살짝 당황하고 있는데.

 

불쑥 나타난 저 위의 자그마한 또다른 건물 한 채. 이게 바로 석굴암 되시겠다.

 

원래는 석굴암의 외벽이 저렇게 시멘트로 발라져 있던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고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본존불의 이마에는

 

거대한 보석이 박혀서 때에 맞춰서 광선을 석굴암 내부로 찬연하게 반사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여하간, 내부는 촬영금지.

 

그런데 정말, 석굴암의 본존불상은 굉장했다. 비록 유리벽으로 막힌 채 몇 미터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했지만, 인상은 압도적이었다.

 

소소한 세상사, 갑남을녀의 개인적인 고민은 비집고 들어가기도 민망할 만큼 중대하고도 근본적인 것을 마주하고 있는 표정이랄까.

 

최소한 일국의, 아니 인류의 차원에서 대두된 문제들, 나타날 문제들에 대한 깊고도 고귀한 명상과 성찰을 그치지 않는,

 

그야말로 신적인 지혜와 깨달음이 가득한 자의 표정과 눈빛이었다. 굉장히 우아하고 존엄한 분위기, 이런 표정과 분위기를 가진

 

자를 뭐라고 부르던, 당신과 나는 절대 동등하지 않으며 그 지혜와 깊이에 있어 난 하잘것 없는 미물이노라고 고백하고야 말 듯한.

 

이런 분위기의 부처를 보는 건 처음이라고 할 만큼, 마음을 뒤흔들어버렸다. 분명히 예전에도 이걸 봤었을 텐데. 비록 어리고

 

아무것도 몰랐을 때라지만, 그 때 전혀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것도, 그리고 지금 이런 분위기와 표정에 충격을 받은 것도

 

모두 놀라울 따름이다. 이건 전혀 다른 의미의 아름다움이자 극한에 달한 신성함..에 가깝지 않을까.

 

 

 

조금은 멍해진 채로, 저런 부처에게 세사 잡일을 고하고 일신의 복을 기원하는 것은 굉장히 무례하달까 격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다. 석굴암의 부처는 사람들이 복받고 행복하게 사는데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

 

인류 모두의 정신적 고양과 열반이랄까, 그런 것들에 주의를 온통 쏟고 있는 거다. 자애로운 미소가 아니라

 

살짝 경직되고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하는 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일 뿐이지만.

 

 

 

그리고 석굴암에서 내려와 다시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담은 몇몇 풍경들. 비록 경주시내에서 불국사까지 가는 길이

 

생각보다 가깝진 않고, 또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가는 길 역시 그리 쉽거나 가깝지 않지만, 석굴암의 부처님을 만나는 건

 

어쩌면 세속화된 부처들, 인간화된 신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굉장히 드물고 경이로운 순간으로 남을지 모른다. 내가 그랬듯.

 

 

 

 

경주 시내와 불국사가 이렇게 떨어져 있다는 감이 전혀 없었다. 수학여행의 기억은 몇 장 사진으로만 남았을 뿐.

 

시내에서 적잖이 차로 달려야 도착하는 불국사, 그러고 보면 불국사 안의 풍경 역시 깜깜하니 기억 하나 남지 않았었다.

 

 

산문을 들어서자마자 나타나는 구름다리. 우아한 아치를 그리고 선 돌다리가 정문과 불국사 본전을 잇고 있었다.

 

남쪽부터 슬슬 봄바람이 일기 시작하는지 연못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능수버들엔 연두빛 물이 올랐다.

 

 

너무 새빨갛거나 새파랗지 않게 적당히 세월을 머금은 단청의 빛깔이 녹록치 않은 불국사의 역사와 위상을 말해주는 듯. 

 

 

그러고 보니 여기는 생각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다짜고짜 저 높고도 날렵한 계단 앞에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던 기억.

 

경내에 들어서면 좌우로 복도가 있는데, 울긋불긋한 그 단청이 적당히 까뭇한 그늘에 반쯤 가리운 풍취가 참 좋다.

 

 

그리고 어디랄 것도 없이 적당히 녹슨 듯, 적당히 이끼가 스민 듯한 분위기의 불국사 풍경이라니. 사실 불국사는 1900년대

 

중반까지 몇 채의 건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몰락해가는 낡은 절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후 복원을 거듭하며 현재의 위용을

 

되찾았다는 건데, 그 시절 역시 적잖이 소요되어 이렇게 건물의 맵시나 색감이 자연스러워졌나보다.

 

불국사, 하면 빠질 수 없는 것 두 가지. 석가탑과 다보탑..인데, 근데 다보탑이 이렇게 컸던가. 새삼스레 놀라고 말았다.

 

아쉽게도 다보탑과 마주한 석가탑은 그 탑신을 볼 수가 없었다. 2010년 기단 덮개돌에 균열이 발견되었다나, 하여

 

지금은 완전히 해체해서 수리 중이라고 한다. 2015년이 되어야 다시 공개될 예정이라고 하니 잘 보이지도 않는 가림막에

 

아무리 고개를 들이밀고 이리저리 눈알을 굴려봐야 보이는 게 하나도 없다. 석가탑의 다른 이름이 무영탑이라더니,

 

아크릴로 된 가림막에는 과연 다보탑의 그림자만 비칠 뿐, 석가탑은 그림자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는구나.

 

 

그리고 불국사 심장부에 위치한 대웅전, 살짝 이르지만 나른하니 기분좋은 봄볕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파르라니 깍은 머리를 반짝거리는 스님은 어딘가로 총총걸음을 옮기고 계셨고.

 

 

대웅전의 청록빛이랄까 청동빛에 가깝도록 바랜 나무창살문을 보며 대체 이런 데를 내가 온 적이 있던가, 다시금 패닉에 빠지고.

 

도무지 단청을 화려하게 드리운 이런 오랜 사찰에 들어서면 눈을 사방으로 돌리느라 여념이 없으면서도 뭔가를 늘 놓치는

 

기분이다. 워낙에 오밀조밀한 구석까지 디테일을 챙겼던 옛 선조들 덕분에 전후좌우 위아래로 열심히 고개를 돌리는 중.

 

 

 

휘영청 하늘을 향해 말려올라간 처마의 곡선을 따라 푸른용 한마리가 고개를 들고 금세라도 뛰쳐오를 듯한 기세로 이빨을 드러냈다.

 

금세라도 콧김으로 불기운을 내뿜을 듯한 이 형상은 날카롭고 커다란 이빨 사이로 문고리를 꽉 움켜물었다.

 

 

 

도무지 사진으로 담기가 쉽지 않은, 수평하거나 수직한 직선도 아니고 사선도 아닌 처마의 저 율동감 넘치는 은근한 곡선미.

 

 

 

그러나저러나, 도대체 고등학교 2학년짜리들이 우르르 불국사에 몰려와서는 대체 뭘 보고 갔던 걸까. 이토록 아무 기억이 없다니.

 

 

아마도 천년은 훌쩍 넘었을 부처님의 모습을 수호하고 있는 붉은 나무울타리. 저 나무들이 모두 삭아 스러진대도 돌에 새긴

 

부처님은 다시금 천년을 버티고도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먹먹하다.

 

 

음..절에 갈 때마다 눈에 밟히는 건 저런 크고 작은, 높고 낮은 돌탑들. 다른 돌들의 균형을 흐트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돌 하나를

 

그 위에 얹는다는 행위가 갖는 기묘한 주술적 효과라거나 기복적인 요소를 인정하더라도, 여기만큼 대대적으로 벌어진 발원과

 

욕망의 탑쌓기는 처음 본 거 같다. 멀쩡한 마당도 모자라 기와가 오른 담장 위에도, 쪽문 위에도, 빗장 위에도 온통 돌탑이다.

 

 

 

워낙 사방으로 문이 나있어서 대체 어디로 어떻게 가야 전체를 한 바퀴 돌아보게 되는 건지 주춤거리게 된다. 게다가 한두개의

 

문만 지나와도 같은 듯 하면서도 또다른 실루엣과 풍경이 전개되는 판이라 마치 작은 미로 속에서 헤매이는 느낌이 들기도.

 

그 와중에 만난 복돼지상. 돼지라기보다는 살짝 쥐를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삐죽삐죽 묘사된 털도 그렇지만 저 얍실한 눈빛.

 

 

 

 

그리고, 무려 신라시대 화장실 유구란다. 저렇게 돌을 깍아만든 두 발디딤대 사이로 장차 비료가 될 것들이 보관되었단 이야기.

 

 

다시 돌아내려오는 길, 왠지 들어가던 길과 다르다 했더니 역시. 그러고 보니 불국사로 드나드는 길이 꼭 한 개가 아니었던 거다.

 

이렇게 넓은 부지, 넓은 정원과 수많은 전각들. 대체 난, 고등학교 2학년의 나는 친구들과 어떤 길을 어떻게 밟았던 걸까 싶다.

 

그림자 없는 석가탑과 십원짜리 다보탑의 이미지조차 온전히 간직하지 못했던 걸 보면, 아마도 친구들과 떠들고 뛰어노느라

 

정신없지 않았던가 싶기도 하고. (아마도 전날밤에 몰래 마셨던 술의 뒤끝에 잡혀서 비몽사몽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3월초, 정신이 번쩍 나는 맑고 차가운 공기를 부드럽고 새침한 봄볕이 살짝 뒤흔들고는 모른 척 돌아서는 그런 시기의 경주 대릉원.

 

천년을 버텼던 왕국의 천년 전 무덤들이 엄마 가슴처럼 봉긋하게 솟아오른 곳에는 어느새 세월을 먹고 자라난 나무들이 자리를 잡았다.

 

 

경주 시내의 고즈넉한 야경을 책임지는 가로등 갓 속에는 첨성대도 들어있고 초승달도 들어있고.

 

아마도 천마총에도 같이 묻혔었을 법한 신라 왕족의 금관 장식도 들어있다.

 

담백한 기와담벼락을 따라 걷다가 대릉원 입구로 접어드니, 살풋 물오른 연두빛 버드나무가 휘영청.

 

 

파란 하늘, 황금 잔디, 그리고 아직은 덜 깨어난 겨울나무들의 짙고 투박한 검은 빛깔.

 

 

제법 커다란 공원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는 대릉원을 둘러싼 야트막한 담벼락 너머 이어지는 기와지붕들이 보인다.

 

물론 신라시대 때의 가옥 양식이 저렇지는 않았겠지만, 콘크리트 네모 반듯한 건물들이 아니라 다행이다.

 

 

대릉원 안에는 천마총이 있는데, 무덤의 주인을 명확히 알게 되면 '릉'이라고 부르고, 누구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높은 신분의 무덤이라고 판단되면 '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천마 그림이 인상적인 무덤이라 해서 천마총인 셈.

 

내부 촬영은 금지, 주요 유물들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여기에는 모조품을 진열해두었다고 한다.

 

빨간 옷을 따뜻하게 여며입은 꼬맹이 하나가 동동거리는 걸음걸이로 무덤 안에 들어서는 모습이 귀엽다.

 

 

 

저 야트막한 언덕 같기만 한 무덤들 하나하나에 주인이 있고 부장품들이 있을 테지만, 그 안에 혹 품고 있을

 

보물들이나 금은보화 같은 것들보다도 저 무덤의 곡선이 참 탐난다. 사막에 갔을 때 반해버렸던, 바람이 만들어낸 듄 같다.

 

바람이 모래를 하릴없이 헤치고 깍고 부어내며 만들어내던 그 자연스럽고 우아하던 곡선,

 

아마 대릉원의 곡선들 역시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 뿐, 자연의 손길은 마찬가지였으리라.

 

 

 

어떤 각도에서 보면 마치 이전에 대유행했던 텔레토비의 동산이 중첩되어 보이기도 하고,

 

어떤 각도에서 보면 사방이 온통 둥그스름하고 풍만한 언덕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공간 같기도 하고.

 

 

그 사이를 이렇게 구비구비 휘여지는 산책로로 휘감아 돌아가는 모양새도 참 좋다.

 

딱히 어디를 꼭 찝어서 봐야겠어, 라거나 꼭 한바퀴를 전부 걸어봐야겠어, 라는 하릴없는 욕심 부리지 않아도

 

그저 눈앞에 펼쳐진 곡선의 풍경들과 곡선의 길들을 따라 흘러다니는 것만으로 행복해지는 공간.

 

 

경주의 가로등 만큼이나 눈길을 붙잡던 건, 기와지붕을 얹고 있던 경주의 버스정류장들.

 

대릉원을 나와서, 황남빵을 우물거리면서도 가슴 높이의 돌담길 너머 풍경에서 눈길이 떠나지 않았다.

 

왠지 대릉원은 경주를 갈 때마다 빼놓지 않고 꼭 한번씩 들르게 되는 거 같다.

 

 

경주 안압지, 주말에는 10시까지 개방한다는 이 곳의 주차장은 (관리인 아저씨 말로는) 이천 대까지 수용가능하다지만

 

그야말로 시장통이나 유명가수의 콘서트 직후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격전지가 되어 꽉 막혀 있었고,

 

그런 전쟁을 벌이고 들어가니 이런 고요한 수면 위로 안압지의 정자들이 의뭉스럽게 둥실둥실 떠올라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세 채의 정자. 온통 들어차있던 사람들은 흔적만 어렴풋이 남았다.

 

그 틈새에서 용케 삼각대를 소심하게나마 펼칠 공간을 잡고, 이리저리 두리번두리번.

 

안압지 수면에 비친 정자의 잔잔한 그림자. 아직은 쌀쌀한 겨울바람도 저렇게 말간 수면을 뒤흔들 힘은 잃었나보다.

 

정자 뿐 아니라 연못 주위의 인공섬들과 조경들에도 이쁜 조명이 고르게 비춰지고 있었다. 뱃놀이하기 딱 좋은 인공연못.

 

바글바글 정자가 미어지도록 올라선 사람들 쪽의 분위기와는 반대로.

 

굉장히 고즈넉하고 신비감마저 불러일으키는 안압지의 밤 풍경.

 

 

밤이 깊어가는데도 사람들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들어오고, 대형관광버스가 사람들을 쉼없이 토해내는 걸 보곤

 

이제 여길 떠날 때로구나, 싶어서 떠나기 전 마지막 컷.

 

아, 안압지 연못 바닥에서 발굴했다는 신라시대 귀족들의 술자리 장난감 모형도 한 장 담았다.

 

십이면체 주사위에 면면마다 적힌 술자리 벌칙들. 크게 웃기, 옆사람 간지르기, 술 원샷하기 등등.

 

숙소로 돌아오는 길, 경주의 고즈넉한 밤길 한가운데 서서 고고히 불을 밝히고 있던 첨성대 모형.

 

 

 

경주 남산에 오르는 길, 삼릉을 거쳐 지나는 골짜기에서 제일 먼저 마주치는 건 다소 묘한 손모양의 목잘린 좌불.

 

석조여래좌상, 삼릉어귀의 길로부터 출발해 남산에 오르는 길은 예전부터 절도 많고 불상도 많았다나.

 

무려 11개소의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산재한데다가 금오산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라 제일 즐겨찾는 등산로란다.

 

 

어느새 싱그러운 녹빛이 솔잎바늘 끝까지 충만한 소나무들. 남녘에는 봄이 왔다.

 

바위 위에 새겨진 관세음보살상. 천수관음의 자비를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은 천년을 이어지고.

 

관세음보살이 굽어보는 경주 남산의 앞마당. 하늘이 좀만 더 파랗게 맑았음 좋았을 텐데 아쉽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석가삼존과 아미타삼존이 새겨져 계시다는데, 머리에 둥그렇게 보름달같은 휘광이 비치는

 

부처님 세분이 계시니 뭔가 더욱더 강력해 보인달까. 이렇게 선으로만 새겨진 부처상은 남산에선 드문 거라고 한다.

 

하얗고 검은 바위의 육중한 옆구리에 명료하지만 가느다란 선으로 한붓그리기하듯 그려놓은 부처님들을

 

눈으로 따르다 보면 중간에 살짝 선을 놓치기도 하고 어지러워지기도 하고. 구도의 길이 멀고도 험하다는 은유일 수도.ㅋ

 

그리고 석가여래좌상. 부분부분 깨어져나간 부분도 보이고 뒤의 휘광도 다시 조각붙이기를 한 거 같지만

 

엄숙하고 우아한 표정이나 진중한 앉은 자세가 여전히 당당하다.

 

 

부처님한테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 요모조모 얼굴과 몸의 굴곡을 살펴보려는데, 부처님 왠지 우셨던 거 같다.

 

하긴 요새 세상이 위에서 내려다보기에 참 슬픈 일 투성이들일 테니. 놀랄 일은 아니지만 눈물자국이 선연하다.

 

 

남산 정상까지는 안 가고 내려오는 길, 색색의 등산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그다지 좁지 않은 길을 꽉 채워서

 

남산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좌우로 허리를 굽힌 채 소나무 터널을 만들어주고 있던 남산의 노송들.

 

 

그리고 남산 아랫자락에 그리 오래진 않아보이는 망월사라는 절에 잠깐 인사드리러 들어가는 길.

 

나른하고 촉촉한 봄볕이 내리쬐이는 절 앞마당에는 벤치도 늘어서 있고, 가지런히 누워 몸을 달구는 기왓장들도 쪼르르.

 

댓돌 위에는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였다.

 

 

대웅전 뒤로 푸릇푸릇한 기운이 마구 돋아나는 남산을 배경으로 크고 작게 솟아오른 불상과 불탑들.

 

 

 

 

천년고도 경주 남산에 찾아드는 봄. 꽃망울이 툭툭 터지며 노랑 꽃잎이 비집고 나왔다.

 

남산을 올라가는 길은 굉장히 여러갈래가 있는데, 그 골짜기마다 온갖 돌을 쪼아 모신 와불과 좌불이 숨어있다.

 

일단은 남산 아랫둔치에 있는 포석정부터 살짝 눈도장찍고 남산을 에둘러 삼릉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경주에 오면 뭐니뭐니해도 소나무. 거침없이 뒤틀린 그 기기묘묘한 생동감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와중에 이른 봄볕을 쬐러 나온 청설모 한 마리. 쉼없이 앞니를 놀리며 겨우내 아껴두었을 도토리를 까먹는 참이다.

 

그리고 삼릉. 제법 경사가 있는 곳에 울창한 소나무숲을 지나다 보면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이 둥실 떠오른다.

 

 

능 세개가 연이어 봉긋봉긋 솟아있는 곳엔 따스한 봄볕이 나리고, 주변에는 짙은 솔숲 그늘을 드리워 서늘한 기운이 뻗친다.

 

조그마한 구릉처럼 솟아난 저 신라시대 왕들의 무덤을 보면 참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

 

천년 전의 죽음이 이토록 자연스럽고 평온한 분위기로 승화되었구나, 랄까.

 

딱히 어디가 길이랄 것도 없는 남산 언저리를 더듬다 보면 이런 표지판이 보인다. 신라인의 미소와 도깨비의 형상.

 

경애왕릉을 향해 걷는 길, 곧고 늘씬하게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신비로운 기운처럼 하늘을 향해 하늘하늘 번진다.

 

 

그리고 다시, 삼릉과 경애왕릉을 지나고 남산을 향해 본격적으로 걷는 길, 양쪽으로 소나무가 어깨를 구부려 터널을 만들었다.

 

 

 

 

경주역 옆의 해장국골목, 일년 전쯤 경주 여행와서 도착하자마자 카메라 렌즈 부숴먹고는

 

사진 한장 못 남긴 게 아쉬워서 다시 간 김에 여기부터 재방문.

 

꼭 여기가 젤 맛있는지는 모르겠고-다른 곳은 안 가봤으니-주르륵 늘어서 있는 해장국집 중의 하나.

 

역사 오랜 맛집에 어울릴 듯한 이런 주방 풍경. '할매' 할머니는 문 앞에서 문을 여닫아 주시고.

 

메뉴판은 위와 같음. 기본은 묵해장국, 선지해장국, 뼈다귀해장국 등등. 게다가 온통 경주산의 식재료들.

 

선지해장국. 다진마늘을 아낌없이 넣어주셔서 깔끔한 국물맛. 수면 아래 선지가 90%.

 

뼈다귀해장국. 굳이 뼈를 들고 힘들여 발라먹지 않아도 될 만큼 말랑말랑한 살점들.

 

음식점 안에는 어디서 나셨는지 이런 공중전화 부스가 뙇. (가게 안에 전화기를 다셨었나..)

 

커피는요 셀프니드. 아마도 제가 경상도 혹은 경주쪽 사투리를 소리나는대로 쓴 거 아닐까 싶다.

 

"커피는요~ 셀프니드~"

 

 

겨울비가 제법 대차게 내리던 지난 1월. 포항을 지나 경주의 대릉원 앞 까페 골목에 잠시 멎었다. 겨울비도 잠시 멎은 그 때.

 

 

천년고도라는 진부한 호칭에도 불구하고 경주에는 뭔가 있다. 까페 인테리어에 이런 담백한 창살이 자연스러운 분위기.

 

 

커다란 새장 같은 전등갓에 불빛이 하얗게 스며들었다. 어느새 다시 캄캄해진 하늘.

 

야외 테라스에 내어놓은 테이블과 의자들은 흠뻑 빗물을 머금다 못해 뚝뚝 뱉어내는 중.

 

 

까페에서 단팥죽을 파는 것 역시 경주니까 그럴 만 하겠다 싶은데, 의외로 굉장히 맛있어서 깜놀. 에스프레소 꼼파냐도 달콜달콤.

 

이런 느낌의 룸, 마루보다 한층 올라간 높이가 조금 어색하지만 그래도 안에 들어가 있으면 막 아늑해지고 그러는 분위기.

 

 

그리고 이 까페 앞에 웅크린 천년 전 왕들의 무덤들, 조금 너머 하늘을 받치고 있던 야트막하지만 단단한 첨성대,

 

그런 것들과 함께인 듯 따로 그럴 듯하게 서있던 나무들 같은 풍경이 참 아름답던 경주 대릉원 너머 이차선도로 맞은편.

 

 

 

 

 

 

김이 펄펄 끓어오르던 커다란 양은솥. 아궁이에서 삼엄하게 번져나오던 화염. 그 와중에 살짝 풍기는 달콤한 냄새.

 

그것은 가히 '화염'이라 부를 만한 정도의 불길이었다. 빨갛다 못해 샛노랗게, 투명하게 달아올라 뿜어오르는 빛과 열.

 

부뚜막에 정좌하고 앉으신 며느리 할머니는 빨간 잠바를 이쁘게 걸치시고 파란 물바가지를 젓고 계셨다.

 

 

천천히. 그렇지만 쉼없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파란 물바가지가 끈적하게 아우성치는 조청에 휘감기는 느낌으로.

 

 

 

 

경주 대릉원에 도착했을 즈음 기대와는 달리 겨울비는 한창 기세를 올리던 중이었다.

 

자욱하게 내려앉은 안개 너머 첨성대와 봉긋한 선대의 능들이 찢겨지는 게 아닌가 싶도록 수천수만의 빗방울이 드세던 그 때.

 

 

켜켜이 내려앉은 시간이 무겁게 가라앉은 경주만큼이나 수백년을 산다는 천개의 가지를 가진 나무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이 땅을 누르고 있는 건 천년의 시간만이 아니었다.






@ 경주.



ⓒ ytzsche.tistory.com




세계각국의 유명 건축물들의 미니어처를 모아두었다는 제주 미니미니랜드, 삼십분의 일이라거나 십오분의 일

사이즈로 줄여놓았을 뿐 실물과 똑같다는 그 건축물들이 모인 곳을 어떻게 해야 가장 재미있게 돌아볼 수

있을지 생각해보니, 다녀온 곳들, 보았던 곳들 앞에서 각자 인증샷을 찍으면 괜찮겠다 싶다. 간 데가 몇군데

안된다 하더라도 뭐, 어쨌든 세계 곳곳에 산재한 명소들이 한 곳에 모여있단 건 큰 메리트니깐.

건축물들 미니어쳐 앞에 섰을 때, 걸리버가 소인국에 떨어졌을 때의 느낌에 최대한 가까울수록 성공적인

거 아닐까. 소인들이 꼬물거리며 지어올리고 그 안에서 사는 건물들의 디테일이나 리얼리티란 건 그야말로

최고의 수준일 테고, 그들 소인들보다 크고 무딘 손으로 조그마한 건축물을 지어올리려면 말이다.

타이완의 중정기념당, 한 사람을 위한 공간, 중정기념당에서 장개석을 생각하다.

중국 자금성, 블로그를 시작하기 전, 내가 카메라랑 그다지 친하지 않던 시절 다녀왔던. 비가 내리는 궂은

어두컴컴한 날씨였지만 황금빛 기와지붕과 붉은 담벼락은 여전히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왓, 캄보디아#31. 채색의 흔적을 발견하다, 앙코르 왓(1/3)

캄보디아#32. 박스 안의 박스, 무한선물상자를 열어보는 즐거움, 앙코르왓2

캄보디아#33. 앙코르왓의 전경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던 연못, 앙코르왓3

캄보디아의 앙코르톰. 사실 앙코르왓은 씨엠립의 여러 옛 사원 중 하나의 이름일 뿐.

캄보디아#4. '크메르의 미소' 바이욘(앙코르 톰)

이집트의 스핑크스. 이집트#7. 카이로 달동네를 거쳐 피라밋으로.

이집트#8. 쿠푸왕 대피라밋 안의 석관에 누워보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과 플랫아이언빌딩이 있었는데, 여기도 2001년..까마득한 과거에 다녀왔는지라.

뭐 자유의 여신상이나 플랫아이언에서 찍은 건 아니지만 어느날의 월스트리트.  풍요로운 땅 뉴욕의 공립도서관.


태국의 왕궁, 왕궁(Grand Palace)에서 만난 수호상, 랍스타 퍼레이드.

공원이 꽤나 넓었다. 무려 120여점의 건축물을 오밀조밀 세워둔 세계 7대 미니어처 파크라니 이정도 크기는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조경까지 생각하고 지역이니 나름의 테마에 따라 보기좋게 진열하려면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거 같다. 어느 순간 비가 쏴아 쏟아붓기 시작해서 부랴부랴 비를 피하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우의를 사입고 구경을 재개했다.


인도의 타지마할, 인도#5. 우윳빛깔 풍만한 타지마할의 자체발광, 하악하악.

미국의 워싱턴 국회의사당. 여기도 2001년에 3개월동안 체류하며 불법으로 알바하며 모은 돈으로 갔던 곳.

쿠웨이트의 쿠웨이트타워, [쿠웨이트] 24시간의 쿠웨이트 체류.

중국의 만리장성, 미니어처 건축물과 건축물 사이에 뱀처럼 몸을 좌우로 뒤채며 늘어져있었다. 

역시 내가 블로그를 하기 전, 카메라랑 친하기 전에 다녀왔던 곳. 


미국의 백악관. 워싱턴을 샅샅이 훑었던 그 때, 마일스톤 앞에서 잔뜩 폼을 잡고 사진을 찍었던 곳.

그리고 역시 미국의 링컨 기념관. 이번에 정말 재미없던 트랜스포머3에서 저 거대한 의자에 앉은 링컨을

밀어내고 나쁜 로봇이 편하게 앉았었다.

여긴 다녀오진 않았지만, 이 곳에서 가장 크고 이쁜 미니어처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어서 한 장.

이탈리아의 트레비분수였다던가.

이것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초록빛깔 잔디와 잘 어울리는 게 왠지 스위스 쯤에 있는 뭔가가 아닐까.

안 가본 나라가 너무 많은 거다. 이곳에 모인 것들은 전세계 곳곳의 50개국을 대표하는 한두점들일 뿐인데도

이 중에서도 안 가보고 모르는 것들이 이리도 많다니. 미니어처 말고 진품을 직접 보고 싶은 맘이 무럭무럭.

그리고 한국의 불국사. 여기야 뭐,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많이들 갔었지만, 막상 혼자던 친구랑이던

한번 다시 가면 새삼스러운 구석이 참 많던 곳이다. 불국사 말고도 경주라는 도시가 그랬다.

청와대. 시화연풍, 청와대 들어가기.

남대문, 지금 열심히 복원공사중일 텐데 이전보다 더욱 오리지널에 가깝고 단단하게 복원되면 좋겠다.

건축물들만 밋밋하게 열맞춰 늘어선 게 아니라, 나름의 야트막한 언덕이나 구릉이 있었고 또 이런 나무들도

있었으며 연못도 있고 다리도 있고 그랬다. 이끼가 파랗게 낀 보슬보슬한 촉감의 나무에 덩굴 하나가 체인처럼

기둥을 휘감은 채 흘러내린 모습이 너무 이뻤다.

하루방을 뭔가 캐릭터로 만들어보고 싶었던 거 같은데, 좀 아쉽다. 좀더 간결하고 참신하게 바꿨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보다 좀더 귀여웠어야 했지 싶다.


제주도 똥돼지를 멀뚱하게 바라보는 젊은이 하루방.

아무래도 제주가 좀 습하고 따뜻하고 그래서 그런지 나무들이 조금만 그늘진 곳이다 하면 저토록 빽빽히

이끼가 끼는 거 같다. 온통 연두빛 융단을 휘감은 듯한 느낌의 나무둥치.

세계 위인들의 조각상들도 있었다. 어떻게 선정된 위인들인지 모르겠지만 한국 선수로는 충무공 이순신과

세종대왕. 아마 화폐에 활용된 인물을 기준으로 한 게 아닌가 싶은데 그보다 놀랍고 기분좋았던 건 바로

맑스가 이 곳에 전시되어 있단 사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맑스의 조각상 뒤에서 주먹 불끈 쥐고 인증샷 찍고는 맑스 조각상을 따로 찍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러시아어가 적혀있는 그의 조각상을 전시하다니,

미니랜드가 급 좋아져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만화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공간도 있었다. 스머프들이 뛰노는 마을 뒤에서 음흉하게 웃으며

쳐다보고 있는 가가멜과 그의 고양이 아즈라엘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는 똘똘이 스머프 뒤로 텔레토비도 보인다.

그리고 원피스! 루피와 조로, 샹띠가 멋진 포즈를 잡고 있었는데 애들 보다는 오히려 내 또래의 '어른'들이

더 좋아라하던 포토존이었던 듯. 그나저나 대체 원피스는 언제 완결되려나.

무엇보다 캐릭터들 중의 압권이자 대미는 우리의 뽀통령. 모자빨과 안경빨일 뿐, 조그만한 눈에 앞머리 탈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게 함정이라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 인기만점이던 포토존.

이건 태권V의 입체그림이라고 했다. 정해진 뷰포인트에 두발을 고정하고 그림을 바라보면 바닥에 그려진

그림이 마치 벽처럼 일어나는 걸 느낄 수 있다는 거다. 아마도 지정된 점으로 집중되도록 소실점을 잡고선

원근을 감안한 덕분인 듯 한데, 페인트칠한지 좀 오래라 발색이 선명하진 않아도 제법 일어난 느낌이다.

쥬라기공원에 등장했던 렉터, 티라노사우루스도 있었다. 꽤나 정밀하게 묘사된 피부나 이빨, 발톱의

모양새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박치기하는 애들, 이름이 뭐더라, 그 초식공룡들도 마치 산책로를

점거할 듯한 기세로 산책로 옆에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은, 무료라는 글자를 큼지막하게 박아두고 있던 매직거울체험관. 미로공원에서 이미

겪었듯 길 찾기에는 영 젬병이란 걸 알고 있었는데, 이 기둥이 무한하게 이어지는 듯 보이는 거울의 방에서

자칫 못 나올 뻔 했다. 두 손을 엉거주춤 벌리고 앞의 공간을 더듬으며 그게 거울인지 아님 열린 공간이지

확인하며 한참을 버벅댄 후에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비만 안 왔으면 좀더 둘러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그래도 제법 꼼꼼하게 다 살펴보았더니 두시간 가까이

흘렀던 거 같다. 나오는 길에 눈길을 잡았던 건 오줌싸는 소녀의 상. 이건 대체 어느 나라에 있는 조각상을

소개한 건지는 전혀 확인하지 못했지만 익살맞은 표정이나 편안해보이는 자세가 매력적이었다.





경쟁에 반대한다 - 10점
알피 콘 지음, 이영노 옮김/산눈

제목부터 도발적인 책이다. "경쟁에 반대한다"

경쟁에 반대한다고? 시장 논리와 무한경쟁을 통한 효율성 제고의 신화가 경제 영역을 벗어나 교육, 정치,

문화 전 분야로 뻗어나가는 이런 시기에, 예컨대 '불공정한 경쟁'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경쟁' 그 자체에

반대한단 제목이다. 이런 책은 둘 중 하나 아닐까,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제목으로 '낚아보려는' 책이거나

혹은 작심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려보겠다는 결기 어린 책이거나. 둘 중 어떤 걸까, 이왕이면 후자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처음 집어들었다.


부제는 더욱 웃긴다. "왜 우리는 이기기 위한 경주에 삶을 낭비하는가?"

누구는 낭비하고 싶어서 하나? 그리고 나라고 지기만 한 경주는 아니었단 말이다, 라고 저쪽에서 루저 1이

울컥 핏대세워 이야기한다. 이번엔 졌지만 다음에 이기면 된다고, 더 큰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거라고

저쪽에서 또다른 루저 2가 자신없이 중얼거린다. 이건 낭비가 아니라 '두걸음 전진을 위한 한걸음 후퇴'라고

해병대 팔각모자쓴 저쪽 루저 3은 강단진 표정으로 이를 악문다. 1%의 인재가 나머지 사람들을 먹여살려

준다는 이야기는 이런 식의 경쟁, 줄세우고 비교하고 99%를 '비인재', 루저로 모는 무한경쟁 무한찬양의

극단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당장 이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싫어도 경쟁 속으로 뛰어들고,

혹은 더 큰 과실을 위해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경쟁에 참여하고 있다. 치열한 몸값경쟁을 통해 낙찰,

낙찰가 88만원인 거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배웠네 하는 사람들도 이야기한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여태 인류의 발전 과정을

보면 끊임없는 약육강식의 갈등, 적자생존의 경쟁 상황 속에서 이런 '빛나는 문명'을 꽃피운 거랜다. 한국

사회로 스코프를 좁혀보아도 국내 기업간의 이기기 위한 경주, 뼈를 깍는 경쟁을 통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난 거 아니냐는 이야기다. 초등학교 때부터 진단평가니 뭐니 시험을 보고 경쟁을 붙여야 아이들의

학업성취도도 올라가고, 그래야 우리 지자체의 경쟁력-이라고 쓰고 명문대 합격률이라 읽는다-도 올라가고

국가 경쟁력도 올라가고 나아가 인류 전체의 복지에도 공헌할 거라는 투다.


인류의 놀이문화를 봐도, 어쩌면 경쟁은 인간의 본성일 거라는 지레짐작이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이미

우리는 고대 그리스 이래 스포츠와 놀이 문화조차 '인격 형성과 성숙에 도움이 된다며 경쟁 일편향으로

기울어져 왔으니, 지금의 축구나 야구 같은 현대 스포츠가 전쟁과 같은 양상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욱 폭력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어쨌든 경쟁적 스포츠로 인간 본성에 내재한

전투적 본능을 달랜다는 해석도 있는 거다. 스포츠맨십 따위 치장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건 굳이 승자와

패자를 가려내고 승리를 통해 쾌감을 만끽하려는 욕구다. 승패 따위 가리지 않는 게임은 솔직히 지루하지

않은가, 라고 물어보기도 우스울 만큼 재미있으려면 당연히 경쟁적이어야 한다고 모두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티비에 만연한 온갖 버라이어티에서 보이는 경쟁 구도들, 갈수록 선연해지고 말초적으로 변해가는

경쟁들이 그 단적인 사례들 아닐까.)


그렇지 않다는 거다. 경쟁을 통해 더욱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라는 믿음, 경쟁을 통해 삶이 윤택해지고

의미가 생긴다는 믿음, 심지어는 경쟁이 '인간 본성' 그자체에서 비롯한다는 믿음, 이 모든 것들이 잘못된

오해거나 혹은 악의적인 이데올로기라는 게 이 책의 골자다. 스스로에 대해 확신이 없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는, 자존감 부족이 바로 경쟁사회의 원인이자 결과, 그래서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는 진단. 실은 협력을 통해 더욱 재미있을 수 있고 생산적일 수 있으며, 개인의 자존감 역시 더욱 고양될

수 있는데, 충분히 그런 사실을 증명하는 연구 결과들도 이미 나와 있음에도 워낙 근본적인 문제라 꼼짝도

안 한다는 거다.


생각보다 학술적으로 깊이 들어간 책이고 책 자체가 하나의 주장을 위한 탄탄한 논문이라 해도 좋을 만큼

논리 정연하고 논거가 풍부하다. 교육 심리학자인 저자는 기존의 학문적 필드에서 '정설'이라 일반화되어

버린 설들에 대한 강력한 반박을 하고 있어서 상당 부분 '팩트' 싸움, 유의미한 해석을 도출하는 실험의 인용

여부 및 신뢰도 싸움일 수 있는 건 사실이다. 다만 총 10장으로 구성된 챕터 중 무려 아홉 챕터나 할애해서

집요하게 보여주려는 것, "승리와 성공은 다르다"라는 명제 아래 지금의 "경쟁"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키워드, "협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하게 하려는 저자의 의도와 문제제기는 정말 너무나도 무겁다.


사실 이미 경쟁을 조장하는 구조가 문제냐, 경쟁적인 마인드에 절어버린 사람이 문제냐, 하는 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은 무의미하고 무익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예컨대 '키작은 사람은 루저'라는

말에 분개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경쟁시스템에서 '키'라는 요소로 패배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한편 '키'라는 요소조차 타인과의 경쟁구도 속에서 생각하는 멘탈리티를 이미 장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키'라는 신체적/천부적 조건조차

이 도박장이나 주식시장같은-대부분의 사람이 돈을 잃는다는 점에서-경쟁시장의 칩으로 훌륭히 쓰이고

있는 거고, 또 칩으로 이미 유통되고 있으니 사람들은 '키'를 둘러싼 경쟁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뫼비우스의 띠.


그렇게 보면 참 공고하다. 아무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경쟁하는 동물이 아니며, 경쟁 말고 협력을 통해

보다 나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떠들어봐야, 마치 맑스주의를 오늘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그래, 니말은 다 알겠는데, 참 논리정연하고 그럴 듯하고 멋져보이는데, 그래서 어쩌라구. 그런 차갑고

단단한 벽에 부딪히는 느낌 때문에 책을 읽어내리다가 덮어버리기를 몇 번. 단순히 경쟁 말고 협력에 의한

문화, 경제, 사회가 가능하겠구나 정도 고개 몇 번 주억거리고 말 일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뭔가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 지, 기업 구조, 경제 시스템, 학업 시스템 따위 거대한 것들 말고 당장

경쟁에 길들어버린 '내 입맛'은 어떻게 바꿔야 할지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저자는 치사하게 자기

전문분야인 '교육'에 대해서만 몇 마디 아이디어를 던져주고 말았다.


그냥, 계속 생각해 볼 만한 책이고 어쩌면 좀 확장해서 읽어보아야 할 책일지도 몰라서, 정리가 채 되지

않은 상태로 글을 쓰고 있다. 아니, 정리해 버릴 책이 아닌 거다. 계속 책상 위, 머릿속에서 ing로 남아있어야

할 책, 남아있어야 할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외부의 자-타인이 되었건

그들이 정해둔 기준이 되었건-를 빌어 스스로를 재어 보며 위축되거나 과시하지 않고, 스스로 혼자 설 수

있도록 좀더 애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취직 시즌이라 알게 모르게 또 마음속의 자를 가동해보는 자그마한

모터 소리가 윙윙 들리는 거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어디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어디쯤, 이런 식의 등수

놀이를 피하려면 다소간 '도 닦는 마음'이 필요한 거다. 스포츠에 비기자면,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려는

축구를 하기보다는 자신의 신기록을 갱신하려는 역도나 높이뛰기쯤에 임하는 마음이랄까.
 

책을 보면서 문득 떠올랐던 대학교 2학년 때의 기억 하나. 학과 신입생들을 맞이하는 새내기준비위원회

회장을 맡아서는 오리엔테이션에 뭐하고 놀지, 뒷풀이에선 뭐하고 놀지, 새터가서는 또 뭐하고 놀지

나름 열심히 고민고민했었다. 뭐 결과물이야 통속적이고 보잘것 없었지만, 만약 내가 '경쟁'과 '협력'을

감별해낼 만큼의 미각을 갖고 있었다면 좀더 신선하고 즐거운 놀이들을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함께 즐겁고, 서로의 얼굴을 기억해내고 이름과 쉽게 매칭시킬 수 있게 만드는 게임들.

누구보다 앞서고, 누굴 제치고 이기려고 바둥바둥대느라 잔뜩 지치고 상처받았을 녀석들하고 굳이

또 그런 게임을 할 필요는 없었던 건데.


되는 대로 쓰다보니, 아이폰 음악폴더니 사진폴더가 너무 지저분해져서 빈 공간도 얼마 안 남았다.

정리도 할 겸 사진도 옮기고 하다가 발견한 사진들, 재미있다 싶어 찍은 사진도 있고 아이폰치곤

제법 분위기있게 나왔다 싶은 사진도 있고.

퇴근길에 발견한, 어느 차에 붙어있는 '집주인'의 메모. 우리 차는 어디에 주차할까요. 뭔가

적나라하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면서도 그 심경이 생생히 전해진달까.

어디였더라, 어디선가의 음식점에서 계산서를 받았는데 저런 꼬릿말이 붙어있었다. 평소에

카드영수증을 한번씩 보고 찢어버리는지라 발견할 수 있었던 아홉 음절.

경기고였던가, 주말에 무슨 시험감독하러 갔다가 화장실에서 발견한 스티커였던 듯.

남학생이 담배를 피우면 1) 매사에 떳떳치 못하며 자신감이 떨어진다. 2) 어쩌구저쩌구

여학생이 싫어한다. 4) 지저분한 사람이 되기 쉽다...하나하나 넘 웃기기도 하고 어이없는

협박 같기도 해서 찍어놨었다.

친구와 요거트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다가, 괜히 둘다 뭔가 불끈한 맘으로 아이스크림에

조각을 해 버렸다. 반반이 다듬어 비석처럼 세워둔 후에 숟가락으로 살살, 구멍이 뽕

뚫려서 반대쪽 풍경이 하얀 배경 속에 들이차던 순간에 꽤나 기뻤다. 바보같이.

통인동 쯤의 어느 까페를 찾아가다가 만난 표지판. 이게 뭔가 싶었는데, 의미는 사실 바로 다가온다.

조용히 해달라는, 클랙숀 울리지 말고 애 울리지 말고 소리치며 싸우지 말라는 뜻이겠지.

사무실에 굴러다니던 하회탈 모형 두개, 슬쩍 얹어놓고 괜한 연출 한번. 코가 워낙 커서 조금더

얌전한 포즈는 불가능,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제법 꺽어서 진한 키스. 하회탈끼리.;

작년 부처님 오신 날에 코엑스 입구에서 찍은 사진. 탑을 수호하고 있는 사천왕 등이 멋졌었다.

코엑스몰 안의 어디메쯤에서, 파란 하늘로 향한 유리돔. 기하학적인 패턴이 재미있었다.

이태원 이슬람사원(모스크)에 갔을 때, 모스크 앞 계단에 쪼르르 앉아있는 무슬림들의 나른한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사진만 보고서는 여기가 한국인지 아랍지역의 어디인지 잘 모를 지경.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데, 집앞 놀이터에 있는 조그마한 벤치에 의경 네 명이서 쪼르르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콱 들어왔다. 제법 쌀쌀하던 가을날이었던 거 같은데 안쓰럽기도 하고.

술에 절어서 집으로 들어가던 어느날, 차라리 나도 어디론가 견인되었으면 좋겠다 싶던.

길가에 조금씩조금씩 토하며 걸었던 거 같은데,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말줄임표가

커다랗게 그려지겠구나..술김에 그리 생각했었던 날.

G20의 광풍이 세상을 덮던 즈음, 트레이드타워에도 포장지가 덮였다. 맞은편 한전건물이 이미

과하게 싸여진 선물상자처럼 퍼렇게 휘감겨있었고, 이곳은 조금만 살짝.

코엑스 국화꽃축제가 있던 때, G20 준비와 맞물려 조금 산만하긴 했지만 저 거대 공작새는 꽤

맘에 들었었다. 여느때처럼 건물 기둥뿌리를 온통 감싸돌던 노란 국화잎들은 꽃잎 하나하나가

탱글탱글,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고.

경주에 갔을 때, 들고 갔던 카메라가 부서지는 바람에 아이폰으로만 남겨야 했던 풍경들.

천마총이 있는 대릉원 산책길을 거닐다가 홀로 선 나무를 만났다. 가슴처럼 봉긋하고 따뜻하게

둥그스름하던 고분들을 뒤로 한 채, 마치 수묵화의 한 귀퉁이에서 튀어나온 듯한 나무.

부산에서, 모처럼 만난 군대친구들과 2차던가 3차로 갔던 다트바. 싫다는 녀석들을 때려가며

사선에 세우고는, 어찌된 일인지 내가 던진 다트 세 개가 모두 대충 가운데에 꽂혀버렸었다.

엄밀하게 따져서 세 개 모두 50점짜리에 전부 들어갔다고는 딱히 말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그래도, 딱히 50점이네 25점이네 따지기보다 가운데에 옹기종기 모인 모습이 이뻐서.



경주 대릉원 내의 천마총을 둘러보다가, 무덤 앞에 놓인 까만색 석비가 눈에 띄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신라의 통일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찬란한 민족문화를 기리 보존하여 위하여' 천마총을 발굴, 복원했단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정권을 탈취하던 당시 북한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열세를 절감했다가

이제 조금씩 경제적 우위를 선점하고 베트남전 파병 등을 통해 군사적 우위에 대한 자신감도 보인

영향인 걸까. '통일'이라는 이슈를 자신감있게 제기하던 그쯤, 삼국시대 신라는 일종의 롤모델이거나

동일시의 대상이었을지 모른다. 평화가 아니라 통일 그 자체, 신라에 의한, 그리고 남한에 의한

통일이 강조되던 시기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런 분위기는 천마총에서 그치는 건 아니었다. 부처가 살고 있다고 여겨지던 신성한 경주 남산의

동쪽 기슭, '화랑교육원'이니 '통일전'이니 그런 식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는 거창한 건물들이

세워져 있던 거다. 박정희가 권좌에 있던 시절, 민족문화를 중시한다는 식으로 뭉뚱그려지는

이면에는 그렇게 신라 중심의 통일, 군인정신의 모범으로 이미지화된 '화랑'에 대한 강조 따위가

숨어있기도 했던 것.


신라의 왕족들이 남산을 신성한 곳으로 꾸며내고, 부처와 천심을 업고 다른 나라들에 대한

통일, 혹은 지배 욕망을 정당화했듯이 박정희 역시 경주 남산과 신라의 고총들에 기대어 그런

정당화를 꾀했던 건 아닐까. 남북간의 군비 경쟁과 체제 경쟁에서 이겼다는 자신감과 함께.



#1. 아놔, 카메라가 갑자기 두동강 나서 바닥에 철푸덕. 이제 막 길을 나서서 해장국골목서

한그릇먹고 일어나려다가, 엉덩이가 그대로 붙어버렸다.


#2. 황남빵 한박스 사들고 가끔 꺼내먹으며, 비닐봉다리에 담긴 카메라 두조각 달랑거리며

걷고 있다. 대릉원, 첨성대, 계림, 월성과 안압지를 지나 황룡사지에서 잠시 휴식중.

#3. 걷는 것만큼 확실하고 단단하게 이동하는 방법은 없지 싶다. 내가 감내할 만한 속도로

주위사물들을 하나씩 만지듯 분별하며 뒤로 흘려보내고, 주위 분위기에 흠뻑 젖을만큼

스스로와 풍경을 동화시켜준달까.

#4. 경주 시내를 빠져나와 오릉, 박혁거세니 유리왕이니 소설속 인물같은 이들의 소설같은

무덤을 둘러봤다. 저 언덕들은 참 곱게도 잔디를 입혀놨단 생각만 들 뿐, 죽은 이들이 쉬는

공간에서 느껴져야 할 답답함이나 무거운 공기가 없다. 이천년 가까운 시간이 죽음의

무겁고 퀘퀘한 냄새조차 날려버렸다. (그나저나 안내판엔 온통 한자뿐. 그것도 손글씨.)


#5.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서린 우물이라 신라의 우물, 나정인가. 예수보다 육십년쯤 먼저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가 발견된 우물이 아직 남아있단 게 더 신기. 우물이니 알이니

동정녀니, 섹스(혹은 불륜)를 숨기거나 신성화하려는 전략이란 점에서 예수나 혁거세나

베들레헴이나 경주 나정이나 오십보 백보.


#5. 나정에서 포석정을 지나 삼릉골로 가는 길이다. 포석정 뒷길로 남산을 오를까 하다가

매표소 아줌마에게 추천을 청했더니 역시 삼릉골로 오르는 게 볼 것도 많고 길도 재밌다고.

남산은 당시 신라인들이 부처가 머물고 있다 생각했던 곳이라 했던가. 골짜기마다 잔뜩

조성된 석탑과 석불 따위 불교 유적들이 대단하다. 아마도 사람들은 산에 기대듯 부처에

기댔던 거다. 아니면 부처에 기대듯 산에 기댔는지도.

#6. 삼릉골이란 이름은 골짜기 입구에 세 개의 커다란 릉이 있어서라고 하지만, 막상

언덕만한 왕들의 무덤이래봐야 남산에 의탁하고 나니 그다지 위신이 안 선다. 왕이

자연에 귀의한 느낌이랄까, 산자락에 오체투지의 자세로 늘어붙은 것 같은 젖꼭지 세개.

#7. 워낙 삼릉골을 따라 조성된 탑이니 부처가 많은지라 이름모를 조각들도 뒹굴고 있었다.

그 중 문득 시선을 사로잡던 저 미묘하게 불룩한 위치와 모호한 손놀림.

#8. 선각육존불, 커다란 바위에 선으로 여섯 부처를 그려놓았던 곳이다. 그렇지만 바위

자체의 무늬와 오랜세월 깍이고 다듬어진 자취 때문에 선을 하나하나 식별하기가 이젠

쉽지 않아진 그림판. 군데군데 청동처럼 녹도 슬었다.

#9. 저 바위의 효용은, 그보다는 저 위로 좀더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해바라기했을 때다.

왕릉같이 부드럽지만 위엄있는 선을 그려내는 경주의 산들이 바라보였다.

#10. 돌아나오는 길에 어느 새로 짓는 듯한 전통음식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한옥지붕위로

어벙벙하게 웃고 있는 저 표정, 조그만 눈과 헤벌쭉한 입이 그렇지만 굉장히 다정다감했다.

2010년에 다시 그린 경주인, 신라인의 얼굴일지도.


* 경주남산 가이드맵.




신라시대의 안압지는 조선시대로 따지자면 경회루랄까, 국가적인 행사나 연회가 베풀어지던

공간인 셈이니까 그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하다. 사실 조선 시대 이전의 건물이나 사적들이

거개가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유물과 문화재란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들이란 점에서 때로는 조선시대의 무엇무엇과 닮은 점과 다른 점을 찾아내 식별하는 게

조선시대 이전 문화재들의 기능과 위상을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인 듯.

입장권 뒷면에서 발견한 (여전히 한자가 난무하는 딱딱한 말투의) 설명은 왜 그리도

안 읽히는지, 조금은 더 독자 입장에서 읽기 쉽고 재미있게 풀어 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여하간 이 '안압지'는 12봉우리를 가진 3개의 인공섬을 꾸며놓은 신라의 대표적 인공정원.

그 연못 주변에서 여러 연회용 건물이 지어졌던 것도 확인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연못 안에서

이러저러한 유물들이 발굴된 것이 더 흥미로웠다. 이 낯선 주사위는 신라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해 놀았던 놀이기구의 하나로, 총 14면이나 된다고 한다. 육각형이 8면, 정사각형이

6면이나 되는 형태도 신기하지만 그 각 면에 씌여진 내용들이 더 신기하다.


칼 같은 걸로 새겨진 글씨에 따르면,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마시기' (오늘날의 어휘로

바꾸자면 혼자 노래부르고 자작해서 원샷하기 정도일까), '술 석잔 한번에 마시기' (삼배주...;; ),

'여러 사람이 코때리기' (이건..다구리?;;;; ), '소리없이 춤추기' 등등 재미있는 벌칙들이 있는 셈.


당시 신라 왕실과 귀족들이 연회 중에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문득 주사위를 꺼내어서는

차례로 주사위를 굴리며 벌칙을 수행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비어져나왔다. 벌칙이란 것도

원샷에 삼배주에 다구리, 노래시키고 춤시키고, 오늘날의 음주 문화가 새삼 지탄받을 일은

아니구나, 싶기도 하고 한국인 DNA에 이때부터 각인된 건가 싶기도 하고.


근데 저 벌칙은 뭘까. '더러운 것을 버리지 않기'. 똥이나 오줌을 참으라는 걸까, 그니까 화장실을

가지 말라는 거거나, 혹은 잔뜩 사발주를 들이키곤 토하지 못하게 하는 건지도. 뭐가 됐건 간에

참 신라 왕족들 평소 술자리가 무료했나보다.

그래, 우리 조상들이 (개인적으로는 그저 '10세기즈음 한반도 주민들은'이라고 좀 멀찍이

표현하고 싶지만) 마냥 음주가무에만 몰입했던 건 아닌 거다. 이 그럴듯한 외양의 가위는

그 생김새도 훌륭하지만, 가위날에 붙어있는 동그란 받침이 독특해서 눈여겨봤다. 뭔고

하니 촛불의 심지를 자를 때, 뜨거운 촛농이 묻어있는 그 심지가 아무데나 떨어지지 않도록

받치기 위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감탄했다.

사실 중학교 때부터 단군 중의 한 명이라는 '치우천황'의 이름을 알았던 사람으로,

붉은악마들이 치우천황의 얼굴이 묘사되었다는 귀면와의 도안이 그려진 깃발을

흔들고 옷에도 그려넣고 하는 걸 보면서 조금 기분이 묘했다. 저들이 치우천황을

전면에 내세우는 건 자칫 굉장히 배타적인 민족사관과 더불어 한민족과 한국을

떠받드는 국가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싶기도 하고, 80년대 제대로

학자 대접도 못받던 재야사학자들의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반향을 받나 싶기도 하고.

민족사관의 시각에서 다소 아이러니할 수 있는 점은, '치우천황'의 이미지가 이어진 것은

다름아닌 신라의 기왓장들을 통해서였다는 사실. 민족사학이나 민족사관을 가진 학자들은

으레 고조선과 고구려의 기상과 패기를 강조하며 대륙을 정벌하고 지배했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외국 당나라를 끌어들여 조국 통일의 대업을 망치고 겨우 한반도 남단에 그치고 만

만고의 역적 신라라는 공리를 갖고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전쟁의 신'이라는 치우천황의

이미지가 신라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덕분에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는 건 좀 웃기는 일이다.


어쨌거나 그 무시무시하면서도 정겨운 표정이 그대로 살아있는 기와가 이 안압지 연못

바닥에서 많이 출토되었다고 했다. 오늘날의 미적 감각으로 보아도 천년이나 지난 디자인이라

홀대하기엔 너무 귀중한 것 같다. 부리부리한 눈이나, 수염을 길게 빼문, 으르렁대는 듯한 입,

그리고 양미간 사이에 잡힌 굵은 주름까지. 무서운 와중에 유머러스함이 솟아나오는 부분이

바로 그 양미간 사이의 주름인 듯 싶다.








늘 궁금했었다. 차디차게 식어버린 연탄, 까만 기운이 모두 쇠잔해버린 연탄은 어디로 갈까.

어렸을 적 동네에서 심심찮게 보였던 연탄재들은 더러는 짖궂은 아이들의 장난질에 깨지고

더러는 아래층 할머니가 가꾸는 텃밭에 가루로 뿌려졌더랬다. 다 타고 남은 연탄에 어떤

영양분이 남았는지, 혹은 어떤 재미난 구석이 남아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껏해야 신발을

넘어 바지 아랫춤까지 풀풀 날려오는 먼지만 만들어낼 뿐이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라, 는 어느 시인의 시구는 외려 연탄재가 얼마나 함부로 대해지는지를

보여주는 역설이다. 처음과 같이 뜨거운 마음이 아니어서, 처음과 같이 초롱초롱하고 씽씽

돌아가는 눈빛과 머리가 아니어서, 또 처음과 같이 뭐든 가능성으로 남아있던 미지의 낯설고

곤혹스런 두려움이 아니어서, 식어지고 둔해지고 익숙해져서 모든 것들은 연탄재가 되고 만다.


때로는 하얗게 재가 되어버린 연탄재를 까만 봉지에 담아놓듯 까만 척, 아직은 이루어진 것보다

이룰 것들이 많은 척을 하기도 한다. 가능성으로 남아있는 빈 공간이 아직은 뭔가에 더럽혀진

공간보다 많은 척 위장을 하기도 한다. 그건, 걷고 있는 길의 끝이 보일 때에도 마찬가지다.

길을 걷고 있으니까, 어쨌든 끝을 알 것 같더라도 그 끝에 이를 때까지는 잘 해내고 싶으니까.


계속해서 덜컥덜컥, 내 주위에서 딱딱하게 굳어오는 '내일'이란 것들이 가끔은 굉장히 거슬릴

때도 있지만, 또 어느 때는 그다지 거슬리지 않아 마치 내 몸에 맞는 옷인 양 느껴질 때도 있는 거다.

생각하기 나름. 내 몸에 얼추 맞아들어가는 단단한 옷 한 벌을 입고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간편하게 입력해두는 거일 수도 있고, 혹은 내 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구속구일 수도 있고.


하얗게 태워버린 연탄들이 까망색 비닐봉다리를 옷인 양 걸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순간 온갖

잡생각이 들어버렸었다. 저 연탄이 나인지 아니면 저 봉다리가 나인지 운운.



@ 경주, 분황사와 황룡사지 언저리.
경주 시내 곳곳에 뿌려져있는 자그마한 고분들, 누대에 걸쳐 조성된 탓에 딱히 한 곳에

모여있다기보다는 여기저기 산재해 있지만, 그래도 크고작은 고분 이십여기가 모여있는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대릉원, 천마도가 발굴된 천마총이 있는 곳이다.


큰 고분은 지름이 무려 120미터까지 뻗어나가기도 하는지라 대릉원의 넓이는 생각보다

훨씬 넓은데, 둥그런 고분들 사이를 걷도록 조성된 산책로가 정말 멋지다. 그런 곳인지라

화장실도 나름 신경써서 표지를 만들어 붙인 거 같다. 出자 모양장식의 왕관을 쓰고 옥대를

찬 똘망한 남자아이가 가리키는 건 역시 남자 화장실이다.

그리고 남자의 왕관보다 조금 덜 화려하지만 비슷한 시리즈라는 느낌으로 만들어진

왕관을 쓰고 당당한 자세로 서 있는 이 여성은 아마도 왕녀의 신분인 듯. 지체높은 혈통에서

뿜어나오는 우아함이랄까 범접치 못할 당당함이 예사롭지 않다. 그런 왕녀가 가리키는 거니까

역시 여자 화장실.


뭐, 만화체 그림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화장실 문양에도 어느 정도 이 공간, 이 분위기를

이어받은 것처럼 느껴지니 만족할 만 하다. 커다란 왕과 왕녀들의 릉들이 모여있는 공간에서

한참 그 분위기와 역사에 취해있다가 불쑥 생리적 욕구에 못 이겨 찾은 공간이, 전혀 생뚱맞은

빨강색 파랑색 인간모형으로 그 흥취를 다 깨버린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말이다.




* Mother nature is calling me, 직역하면 '자연이 나를 부르고 있어' 정도가 되겠지만 보통

이 문장은 허물없는 사이에서 화장실 다녀오겠다는 의미로 새겨지게 됩니다. 여행을 다니며

결코 빠질 수 없는 '답사지' 중 하나가 그곳의 화장실이란 점에서, 또 그곳의 문화와 분위기를

화장실 표시에까지 녹여내는 곳들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국내외의 특징적인 화장실 사진을

이 폴더 'Number one or number two?'에 모아보고자 합니다. 그 표현 역시 우리말로 치자면

'큰 거야 아님 작은 거야?' 정도겠네요^^




매표소에서 표를 끊으려는데, 선잠에 취한 듯 나른한 표정의 아주머니가 창구 안에서

겸연쩍은 듯이 반색을 한다. 며칠전 눈이 오고 나서는 평일에 사람 구경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데 어쩐 일이냐며, "학생, 밥은 먹고 다니나" 했다. 경주시내를 돌고 오릉을 거쳐

남산 서북쪽의 포석정까지 걷느라 조금은 지쳐있었는데 그 따뜻한 말 한마디에 금세 훈훈.


에이 그냥 슬쩍 들어갈 걸 그랬네요, 하며 입장권을 받아든 내가 슬쩍 눙치니까 아줌마는

웃으면서 그랬다. 조그마한 공간에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그랬으면 바로 잡혔을 거라.

사실 경주는 고등학교 2학년때 수학여행으로 찍고찍고 돌아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이들과 놀고 장난치기 바빠서 어디에 뭐가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안 나지만 워낙

교과서나 다른 곳에서 많이들 보이는 것들이라 대표적인 이미지들은 익숙하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포석정 내에 이렇게 아지랑이처럼 꼬물꼬물 피어오른 소나무라거나, 다른 그림들이

더욱 신선한지도 모르겠다.

이게 포석정의 대표 이미지랄까, 몇 그루 나무가 장승처럼 버티고 선 공간 안에 구불구불한

수로같은 것이 한바퀴 원을 얼추 그리고 있는 형상.

포석정 입장권에도 조악한 화질로나마 나와있는 사진이 바로 그거다. 왠지 10여년전 내가

고2때 받았던 입장권도 이것과 똑같았던 것 같은 아슬아슬한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입장권,

그 안에 그려진 포석정의 계절은 가을이다.

원래는 포석정을 둘러싼 형식적인 울타리 안을 넘어 들어가면 안 되었지만, 아무도 없는

텅빈 포석정에 나를 따라하다가 문화재를 파손시키거나 망가뜨리는 사람은 없겠지 싶어서

슬쩍. 가까이 찰싹 달라붙어서 봤더니 다소 멀찍이서 보던 것과는 달리 경사진 게 보인다.

수로 위쪽에서 잔에 술을 채워 찰박이는 물 위로 띄우면, 자연스레 아랫쪽으로 내려갈 듯.

그렇게 구불구불 미묘한 동감을 살리면서 술잔이 내려가다가 저 아래쯤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그 술잔을 받았을 사람들이 떠오른다. 재미없게 밋밋한 수로를 내려가는 게 아니라 이리저리

물결치며 내려가도록 만들어진 수로가 슬쩍 돌아서 한 바퀴.


사실 옛날에는 이보다 훨씬 길었을 거라고 한다. '유상곡수연'이라는 이런 수로의 형태는

한중일 삼국에서 공통적으로 조성했던 형태지만 그 일부나마 남아있는 건 이 곳이 유일하단다.

비단 포석정이 없었어도, 이 곳의 숲이 신라인들이 이곳에서 노닐던 그때도 이렇게 아름드리

나무들이 울창하게 서서는 가지로 하늘을 가려주었다면 정말 풍류를 즐기기에 딱 좋았을 듯.

돌아나오면서 뭐랄까, 참 좋은 공간인데 포장이 엉망이란 느낌이 들었다. 최근 1박2일에서

경주 '스탬프찍기' 여행이 알려지면서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관광지

앞에 선 안내문이나 동선 안내가 워낙 부실한 거다. 게다가 그 장소의 얼굴이랄 수도

있겠고 계속 그 공간의 기억을 남길 만한 기념품이랄 수도 있는 입장권이 이렇게 부실해서야.


한자가 어영부영 섞인 한글로만 설명이 있어 외국 관광객들에게 불친절할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읽기에도 참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글로 적혀있을 뿐이다. 디자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 공간에 대해 필요한 정보가 다 들어갔는지도 의문이다. 경주 시내 문화재들을

시간순으로나 장소순으로 읽어내릴 통합이미지나 번호라도 있으면 훨씬 좋지 않을까.




하늘 끄트머리에서부터 슬몃 붉은 빛이 감겨 올라오는 시간, 손바닥만한 경주시 한 복판의

노서, 노동고분군 옆에 자리를 잡았다. 노랗게 변색한 잔디가 이쁘게도 입혀져서는, 경주시를

감싸고 있는 산들처럼 완만하고 복스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왕족들의 안식처는, 천오백여년

시간을 시위하듯 커다란 나무들을 키워 올리고 있었다.

누가 감히 왕들의 안식처에 올라가 저 나무들을 심고 키우고 손봐줬을 리는 없고, 그저

자연스레 바람이 옮겨다준 씨앗을 이 자그마한 언덕이 품고서 물을 주고 양분을 줬을 거다.

그렇게 싹이 트고 키가 자라 저렇게 커다란 나무가 되어 더욱 단단히 고분의 가파른 옆구리를

움켜쥐게 되었겠지.

빨갛게 지던 해는 저 너머 나무 뒤로 가뭇없이 숨어버렸고, 고분은 온통 깜깜해져서

이제 그 곱던 갈빛 잔디의 부드러운 질감도 지워져버렸다. 한결 단단해지고 완강해진 느낌.

고분의 주인은 이제 완전히 분해되어 다시금 나무와 흙으로 변신했겠지만, 신라를 지배하고

백성들의 왕으로 군림하던 그 '의지'만은 남아서 태양을 응시하는 듯 하다.

노서, 노동 고분군은 고속버스를 타고 경주시에 내리면 어찌됐건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유적지인 거다. 그만큼 시내 복판에 있는 셈이지만, 막상 그 주변은 적당한 음식점이나 카페

찾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하나,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기어이 발견해낸 멋진 까페.

토토로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창가자리에 앉아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며 길 건너 봉긋하게

올라선 고분과 주위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유리창이 통유리가 아니어서 조금 아쉬웠지만, 사실 그렇게 스펙타클하고 거대한 풍경을

마주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왕복 2차선인 도로 너머 야트막하고 둥실한 고분 두어기를

조용히 바라보는 거니까. 고분의 실루엣이 저 너머 산들의 실루엣과 겹쳐보이는 풍경.


이 까페에서만 한두시간 있었던 거 같다. 경주에 도착하자마자 부서진 카메라를 대신해서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찍어대느라 급 방전된 아이폰을 충전하고 바깥 풍경도 구경하고,

까페도 구경하고 다이어리도 끄적대고. 담에 경주를 들르면 꼭 다시 한번 들르고 싶은 까페.

그리고 꼭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신라 옛 왕들의 석양바라기 풍경.





가끔 현수막이나 광고, 안내문에 오탈자나 비문이 보이면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해질 때가 있다.

친애하는 독재자 나으리의 '읍니다' 따위 말고도, 경주 남산에서 마주한 이 현수막을 보면서

이건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걸까 싶은 맘이 부글부글 일고 말았다.


"샛길 훼손지 복원을 위하여 훼손된 샛길을 복원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밥을 먹기 위하여 밥을 먹고 있습니다."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적절한 예문을

만들기도 어려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말인 거다. 어쩌자고 이런 말도 안되는 현수막을

내걸었는지 원. 제발 좀 실제로 만들어 내걸기 전에 한번이라도 생각이란 걸 해보고 걸기를.



@ 경주 남산.



경마장 가는 길, 기도문을 바치다.

에서 기도문을 바친 효험이 있었던 건지, 과천 경마공원에서 경마 세 게임에 만원을 베팅하고 나선 깨달은 바가

있었다. 아, 여기가 바로 '내집마련'의 꿈을 이뤄줄 곳이로구나.ㅋ

삼천원이 (구만원이 되려다가) 만이천팔백원이 되고, 이천원이 삼천이백원이 되고, 그리고 (약간 삐끗해서)

오천원이 사천오백원이 되는 곳. 게임비 낸다고 치고 몇시간 재미있게 노는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좋았던 건

사실 말들을 잔뜩 볼 수 있었다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꿈틀꿈틀 굵게 일렁이는 말근육들을 보는 재미랄까.

고등학교 일학년때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올림픽공원으로 소풍갔다가, 도망나와선 무려 네 명의 친구들과 함께

비디오방에서 봤던 게 '옥보단'이었다. 좁은 비디오방에 바글대며 앉아서는 옥보단을 보고 있던 상황도 꽤나

기억에 오래 남았지만 역시 '옥보단'이라고 하면 말의 근육이 인상에 꽂히는 작품.

경주가 시작되기 삼십분쯤 전에 1000미터짜리 트랙 옆의 조그마한 트랙을 빙빙 돌며 사람들에게 말을 보여주는

시간, 정보지를 손에 쥔 아저씨들이 날카롭게 말을 살피고 전광판을 살피며 뭔가를 적기도 하고, 계산을 하기도

하고. 내 나름으로 나도 열심히 살폈던 건, 말들의 걸음걸이가 경쾌한지, 신경이 곤두서거나 겁먹어 보이진

않는지, 그리고 역시 '말근육'이 쩍쩍 갈라져 있는지.

이 녀석은 긴장한 탓인지 자꾸 트랙을 벗어나려 하더니, 급기야 앞발을 쳐들고 진저리를 친다. 무슨 사고라도

나는 건 아닌가 싶어 잠시 긴장했지만, 침착한 인도자의 토닥거림으로 이내 차분해졌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말근육의 향연. 군살 하나없이 날렵하면서도 딱딱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냥 에너지덩어리가 

꿈틀꿈틀대며 말의 형체를 빚어낸 건 아닌가 싶도록 아름다운 몸이다.

이 녀석은 경주에 나서기 전부터 벌써 땀이 번질번질, 바싹 땡겨진 근육들이 범상치 않았다. 스타카토로 톡톡

튕기듯 하는 걸음걸이도 그렇고 온몸에서 뿜어내는 기운도 그렇고. 이 녀석이 일등한다는 데 걸었으면 무려

구십배의 배당을 받았을 텐데, 소심하게시리 삼등 내에 들 거라는 데 걸어서 열두배밖에 안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요새 재미있게 보았던 미드 '스파르타쿠스', 그야말로 말근육을 가진 로마시대 검투사들의 피와 살이 사방에

흩뿌려지는 하드코어한 이야기지만 적어도 근육에 있어선 이 말들보다 못한 거 같다. 팽팽하게 긴장감을

머금은 채 사방으로 갈라지며 부들부들 떨리는 저 근육들.

말들이 조그마한 트랙 위를 몇 바퀴 도는 새 전광판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이번 게임에 걸린 판돈이 무려 이십억을

넘어가고 있었다. 제각기의 말들에 걸린 배당률도 돈이 쌓이면서 시시각각 변해가고 있었고, 아무래도 강력한

우승 후보일수록 배당률이 낮은 건 당연한 이치. 증권 시장이랑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이런 식으로 돈 놓고 돈 먹기의 판에서는, 무엇보다 돈 앞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게 가장 중요한 거 같다.

적당히 포트폴리오를 짜서 손실을 통제하는 가운데 전략적으로 승부를 칠 줄 아는 감을 가다듬는 건 그 다음.

그러고 보니 정말 8번 말의 사진을 많이 찍긴 했다. 어쩌면 난 말을 알아보는 천부적인 눈을 가진 건지도

모르겠다는.ㅋ '경마가 가장 쉬웠어요' 한권 쓸까부다.;

마지막 바퀴는 기수가 말을 타고 돌았다. 경마에서 이기려면 아무래도 체구가 작고 가벼워야 한다더니 정말,

저 강인하고 아름다운 말 위에 기수가 살짝 얹힌 느낌이다. 전혀 무거워하지도 않을 거 같고, 오히려 에너지

충만한 저 말들이 방방 날아가지 못하도록 슬쩍 자그맣고 가벼운 돌멩이로 눌러둔 거 같달까.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트랙을 정돈하는 차들이 지나가고, 전광판에서 차츰 줄어들던 마권 구매가능 시간이

종료되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부터 두두두두, 말들이 내달리며 일으키는 흙먼지와 응원소리가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천 미터라고 해서 너무 짧은 건 아닌가 했는데, 의외로 엎치락 뒤치락 거푸 순위가 바뀐다. 심장이

쿵쾅쿵쾅 두근대면서 옆사람의 흥분과 고함소리에 전염되더니 눈앞을 쌩하니 지나가는 말들을 따라 시선이

먼저 올라가고, 그다음 양손이 번쩍 올라갔다. 일등이다!

안으로 들어가서 마권을 돈으로 바꾸고,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시 마권 구매표를 한 장 뽑았다.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구매표에 표기를 해서 카운터로 가져가면, 이번 경기에서도 마권을 다시 돈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거 크게 욕심만 안 내고 잘만 하면 야금야금 돈 벌 수 있겠는데. 


경마장 바닥엔 휴지처럼 쓸모없어진 마권이 잔뜩 널부러져 있었다. 토요일이 지난 로또처럼.

그러고 보니 맘의 여유만 있다면, 경마장에서도 가을을 느끼기란 어렵지 않았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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