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굼부리. 벌써 두번째 찾는 이곳은 분화구만 유독 뚜렷한 지형과 바람소리를 그려내는 억새밭이 만들어내는

호젓하고도 기묘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곳이다. 저번에 왔었을 때는 억새가 온통 누렇게 물든 계절이었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이제나 그제나 제주도의 변덕스런 날씨 덕에 꾸물거리는 하늘은 변함없었던 거다.

제주도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주차장이 어디든 넓찍하니 잘 마련되어 있단 것. 게다가 주차요금을 별도로

받지도 않는다. 산굼부리 주차장은 현무암으로 잘 조성된 너른 마당인데다가, 주차장에서 산굼부리

매표소로 가는 길도 운치있게 잘 정비되어 있어서 늘 기억에 남는다.

산굼부리 들어서는 입구. 매표소를 지나 걸어들어가면 현무암으로 이쁘게 지어올려진 관리사무소가 덩굴을

온통 칭칭 휘감은 채 버티고 있고, 이끼가 보들보들하게 돋아난 나무들에도 무슨 목걸이처럼 덩굴이 매달려

있었다. 바닥에 깔린 붉은 화산석이 비를 맞아 더욱 선연한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렇게 구멍이 뚫린 화산석은 어떻게 생긴 걸까. 옆의 설명을 참고하니 어찌 생긴 건지는 알겠지만 그

신비로움이 덜어지진 않는다. 화산이 폭발할 때 흘러내린 용암이 나무를 감싼채 굳어버렸단 거다. 그렇게

용암은 단단하게 굳어가고, 나무는 그대로 까맣게 숯이 되도록 타버렸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흔적도 없이

사그라져 버리곤 저렇게 빈 구멍의 흔적만 남기게 된다는. 제주도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용암수형석.


산굼부리에 오르는 사람들은 이쯤에서 여지없이 한번 주춤하는 거 같다. 길이 무려 세갈래나 되는 거다.

제법 경사진 계단으로 오르는 첫째길, 좀더 완만한 두번째 길, 그리고 아예 평탄하게 이어지는 셋째길까지.

첫째둘째길은 결국 산굼부리 정상으로 오르는 같은 길, 셋째길은 억새밭을 좀더 에둘러가는 길, 결국 같다. 


산굼부리, '굼부리'는 화산의 분화구를 이르는 제주도말이라고 한다. 한라산이 불쑥 솟아오르던 즈음에 함께

생겨났다는 산굼부리가 제주도의 수많은 기생화산, 그들의 분화구 중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이유는 여기

분화구가 솟아난 산세에 비해 유독 커다랗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높이 치솟지도 않았는데 분화구의

크기가 크다 보니, 평지 한복판이 움푹 파인 거 같은 느낌이 드는 거다. 올라가는 길도 이렇게 완만하고,

곳곳에 제주도식으로 돌담을 두른 무덤들도 자리를 잡았다.
 

금세 도착한 산굼부리의 분화구 둘레. '추락주의'라는 경고문구가 보여주듯 아래쪽으로는 깍아지른 듯한

가파른 사면이 분화구 아래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깊고 큰 화구가 남을 수 있었던 건 여기 분화구가

폭발할 때 주로 가스만 새어나오고 다른 용암이라거나 화산재들이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덕분에 분화구 주변이 높아지지 않은 거기도 하고, 분화구가 그대로 움푹 패인 채 남아있는 거고.

알고 보니 이 분화구, 백록담보다도 크고 깊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여기도 백록담처럼 물이 고여있었다면 좀더 멋지지 않았을까, 싶도록 분화구 아랫쪽은 온통 초록빛일색이다.

식물의 생태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분화구 사면에 따라 받는 일사량과 일조시간, 기온에 따라 다른 식생이

살고 있다며 온대, 난대성 식물과 각종 희귀한 식물이 산다는 사실에 좀더 많이 감탄했겠지만,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저 헤에, 그런갑다 할 뿐이다. (사실 아래까지 내려가서 직접 확인할 수도 없거니와)

산굼부리 분화구 주변을 한바퀴 둘러보다 보면, 그렇게 높진 않다지만 나름의 언덕 위에서 산굼부리 주변

풍경을 둘러볼 수 있어서 좋다. 시선이 산굼부리 안쪽, 바깥쪽으로 번갈아 움직이는 거다. 깊은 구멍 속에

초록빛이 연못처럼 고여있는 산굼부리 안쪽 사면, 그리고 억새밭이 넓게 펼쳐진 산굼부리 바깥 사면과

그너머 듬성듬성한 다른 기생화산들.

일단은 다시 원점, 세갈래길이 갈라지는 지점까지 돌아내려와서 다른 두길을 걷기로 했다.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기념품점 현무암 지붕이 온통 말라죽은 이끼 색으로 변해 있었는데 저게 정말 이끼가 덕지덕지

붙었다가 죽어서 남은 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색깔의 식물이 덮인 건지는 모르겠다.

두번째길로 돌아서 다시 올라가는 길은 온통 사람들의 소원이 뾰족뾰족 봉우리들을 만들고 있었다. 붉고 검은

화산석들이 제각기의 까칠한 모양새를 감내하며 어떻게든 바닥을 받치고 위로 서고, 또다시 바닥이 되어

중심을 잡고 윗자리를 마련하고.

둘째길로 들어서서 세번째길로 돌아나오는 길, 온통 억새밭이 장관이었다. 바람소리가 문득 까먹었다는 듯이

윙윙 울릴 즈음이면 억새들은 제들끼리 사각거리며 바람의 잔영을 새기기에 바빴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이 점점 다가오거나 멀어지고 있다는 게 억새밭의 움직임으로 가늠할 수 있다는 게 재미있어서,

질리지도 않고 계속 바라보았다. 


세번째 길까지. 산굼부리의 길들을 샅샅이 걸어보고 내려가는 길, 여태 꾸물거리며 겨우겨우 참는다 싶더니

그 길에서야 울음이 터졌다. 굵은 빗방울이 시원하게 내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저 신민아를 닮은 아가씨가

입고 있는 우의와 쓰고 있는 우산을 사러 매점으로 달려야 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