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 그럴 듯한 박물관이 있다는 건 꽤나 행복한 일이다. 모든 게 서울에만 편중되어 있는 이 지독한

'서울공화국'이라지만, 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슬쩍 맘만 내키면 훌륭한 전시품들을 둘러볼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는 일이기도 하고, 각 지역의 지방색이 드러나는 좀더 특성화된 전시 테마나 기획을 통해

국가 단위의 역사인 '국사' 속에 숨겨져 있는 지방사나 홀대되었던 역사를 발굴하는 일이기도 할 거다.


무엇보다도, 날씨가 죽도록 촙던 날 사방으로 쏘다니다가 잠시 들어가 몸을 녹이며 설렁설렁 둘러보기에

딱 좋은 경유지라는 점. 전주에 있는 국립박물관, 높지 않은 2층짜리 아담한 국립전주박물관은 입장료가

무료일 뿐더러 이 지역에 위치했던 마한이라거나 가야의 유물들이 제법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사진은 가야의 철제 갑옷, 굉장히 이국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로 가야의 역사나 문화유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던 거 같다.


이 곳이 정말 매력적인 공간이라고 느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유물들에 붙어있는 이름표들에 있었다.

'점을 치는 뼈', 이 정도면 뭔가 갸우뚱하면서도 그럭저럭 별다른 낯선 느낌없이 넘길만하다 치더라도,

'신께 바친 다양한 제물', '크기를 줄여 만든 석제품'이라니. 왠지 이런 건 '제사공헌물', '석제모조품'

따위 한자어로 퉁명스럽고 고압적인 느낌으로 이름이 붙어있었던 게 일반적이지 않았나.


그런 식의 '친절한 이름표'종결자랄까, '고종 황제의 도장'이란다. 나이 든 사람들은, 아니 당장

나부터도 '어보'라거나 '옥새'라거나 '국새'라거나 따위 한자어로 적혀야 뭔가 있어보이고 격에

맞다고 얼핏 느껴지는데 과감하게 '도장'이란 단어를 써버렸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쉽게 풀어쓴

이름표를 보니까 그 유물이 뭐에 쓰인 건지 감이 확 온다. '네귀달린청자항아리'라니 실제 유물

특징이랑도 딱 와닿고, 이름만 들어도 상상이 대충 되고.


아이들을 데리고 교육삼아 오는 학부모들이 급격히 많아진 걸 생각하면 바람직한 변화인 듯 하다.

게다가 사실 괜히 어렵고 함축적인 한자어로만 이름표를 적어두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 전주국립박물관에서처럼 한글로 풀어쓴 이름을 크게, 한자어로 작게 병기하는 정도가

딱 좋은 거 같다.


박물관에서 본 신기한 것들이 몇 점 있었다. '시가 새겨진 청자 조롱박모양 주자',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신기하다기보다는 집에 저런 거 있으면 좋겠다 싶은 것들. 청자에 저렇게

술을 권하고 풍류를 즐기는 시를 새겨두고 술을 담아 주거니 받거니. 얼마나 멋졌을까.

집에서 저런 청자 주전자에 술을 담고 분위기 맞는 깔맞춤한 잔에 따라마시면 멋질 텐데.

그리고 실내 전시관 한켠 장독대에 뜬금없이 붙어있던 하얀 버선발 한짝. 알고 보니 집의 장맛을

지키기 위해서 숯도 깔고 꼬추낀 금줄도 두르고, 요기까지가 익히 알고들 있는 내용이지만

이렇게 버선발을 거꾸로 장독에 붙여두는 것도 '잡귀'를 쫓는 방법 중 하나였다고.

그리고, 사방에서 출몰하는 쥐는 '토끼의 해'특별전시 공간도 비켜가지 않았다는. 정작 토끼에

관련된 전시도 몇 점 되지 않는 상황에서 눈에 번뜩 뜨인 쥐 녀석. 요새 엿기름에도 빠지고

케잌속에도 들어가고 파란집에도 들어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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