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한옥마을,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 중의 하나는 '경기전'. 마치 덕수궁 돌담길이

하염없이 이어진 듯 보이는 이 길을 걸었다. 날씨가 워낙 추워서 사람들이 얼마 보이지 않았고

저만치 앞에서는 혼자 온 듯한 외국인 관광객이 새하얀 얼굴이 빨개진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왠지 이런 날 이렇게 마주치면 웃음부터 주고받게 되는 거다.

길바닥이 온통 반짝반짝하게 얼어붙었다. 경기전 내부로 들어와서도 바로 옆 전동성당의

멋진 풍모는 가려지질 않는 게 묘한 느낌이다. 조선시대 한옥 마을과 고풍스런 성당이

한 장면에 담기다니, 어디선가 유생들이 '야소'귀신 물러가라며 뛰쳐나올 법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법 이쁜 그림이 된 거 같다. 시간이 쌓여 공자귀신과 야소귀신도 화해를 한 건가.

그리 높지 않은 한옥이지만 오르락내리락하는 처마의 윤곽선을 눈으로 더듬다보니 뭐랄까,

리듬을 타는 기분마저 느껴졌다. 야트막한 담 너머로 보이는 건물들은 이 곳 경기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음식을 만들고, 떡을 찌고, 제기를 보관하는 등 온통 제사를 위해

마련된 건물들이니 그런 기분은 조금 안 어울리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영정)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이라고 한다. 대략 500년 전에

그려진 이성계의 초상화를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왕노릇을 하면서 바라보고 기리면서 할아버지,

할아버지할아버지의 얼굴을 익혔을 거라고 생각하니 나름 절실하기도 했겠지 싶다. 사진도

없고, 딱히 그 이미지를 남겨둘 방법이라고는 그림밖에 없을 텐데 그걸 얼마나 애지중지했을까.


그렇게 1410년, 태종때 처음 지어져서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이래 이 곳의 중요성은 계속

높아지기만 한 거 같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네 곳의 사고 중 하나인 '전주사고'도 여기에

있으니 꽤나 중요한 공간인 거다. 게다가 전주이씨와 경주김씨의 시조묘까지 있다고.

기와지붕위로 나뭇가지들이 살얼음처럼 번져나간 풍경. 잎새 한두장이 남아서 더욱 추워보인다.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봉안된 건물, 내부를 찍거나 영정 자체를 찍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니

슬몃 카메라를 돌려 모퉁이 사진이나 찍을 수 밖에. 깨끗하게 칠해진 단청이 선명하다.

영정이 모셔진 경기전 내부 깊숙한 건물로 들어서는 가운뎃길은 사람을 위한 길이 아니다.

이름도 '신도', 아마도 이성계를 위시한 조선왕조의 이씨 혈족들, 그들의 영혼만이 다닐 수

있는 영혼길인 셈. 아쉬웠던 건 가운뎃길도 그렇지만 주변 길도 좀 정비 좀 잘 해두었으면

어땠을까 싶도록 삐뚤빼뚤 들쭉날쭉하던 바닥돌들의 배열이었다.

아마도 '전주사고' 건물을 복원이나 수리 중인 듯한 곳, 홍살문의 살들이 무언가에 잔뜩

치이기라도 한 듯 삐뚤빼뚤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부디 '잘 보존된 우리문화'로

이 곳이 좀더 정비되면 좋을 거 같다.

햇볕은 좋았지만, 꽁꽁 언 바닥에서 튕겨나오는 햇살들이 눈을 찔러대던 겨울날의 아침나절.

톡톡 튀어나온 문짝의 장식들을 유심히 바라보던 눈에 바깥세상은 온통 하얗기만 했다.

이런 걸 솟을대문이라고 하던가.  차곡차곡 늘어지던 담벼락이 어느 한 곳에서 불쑥 튀어올랐다.

그러고 보니 슈퍼마리오가 머리로 벽돌을 찧을 때 저런 느낌이었는데. ㅋ

한옥마을같은데 가면 꼭 궁금하게 만들던 이것의 정체, 이건 바로...굴뚝이었다. 기와집

앞마당에 불뚝불뚝 솟아있는 조그마한 탑같이 생긴 이곳에서 김이 펄펄 올랐던 걸까.

밑에서 올려볼 때는 꽤나 커보였지만 실제로는 저런 조그마한 쓰레기통 크기, 소복하니 눈을

덮은 채 정갈한 담벼락에 기대 선 모습이 아이러니하게도 따뜻해 보인다.


경기전은 어진박물관을 깊숙이에 품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비롯해 다른 조선왕들의

어진을 모아둔 박물관. 어진들은 모두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눈으로만 담았고, 한양에서

이곳으로 이성계의 어진이 옮겨지던 당시의 행렬을 재현한 모습은 파노라마로. 세 면에 걸쳐

구비구비 늘어선 아이들을 한 화면에 평면으로 구겨넣다니 역시 신기하다.

어진박물관을 나와,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들을 하나하나 구경하다가 신기한

곳을 발견했다. 우물인데, 온통 담벼락으로 둘려진 채 작지만 잘 갖춰진 솟을대문까지 있다.

여기에서 퍼올린 물로 제사밥도 짓고 떡도 찌고, 여하간 음식을 준비하는데 전적으로

쓰였다는 설명이 흥미롭다.

경기전 내부에서 보이는 전동성당의 뾰족하고 둥근 외양. 기와지붕 틈틈이 소복하니 나려든

하얀 눈뭉치들도 소담스럽고, 희끗희끗 눈이 얼어붙은 바닥도 (미끄러워 위험하지만) 정겹다.

아까 함께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경기전 바깥 돌담길을 걸었던 외국인 여행객이 슬쩍

사진에 잡혔다. 웃음만 주고 받던 우리는 슬쩍 방향을 틀어 각자의 길을 걸었는데 어느새

내 카메라에 잡혔던 걸까. 이제서야 발견하고 새삼 반갑다는.

아무래도 이 곳에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모셔진 건 국가적인 차원의 의미라기보다는 혈족

혹은 씨족 차원의 의미가 더 부여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경기전 출입문 단청에 온통 적혀있는

복(福)자와 희(喜)자를 보면 그렇다. 나라를 연 건국시조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조상에 대한

예우, 그리고 그 후손에 대한 복과 기쁨을 비는 커다란 사당 같은 느낌이랄까.

돌아나오는 길, 사실은 좀더 있고 싶었는데 손도 곱고 다리도 시렵고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어서 도망치듯 돌아나와야 했다. 온통 하얗고 차갑게 얼어붙은 공간에서도 홀로 파랗게

섰는 소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아, 이래서 옛 선비들이 그렇게도 소나무를 좋아했구나 싶다.

그랬는데 어라, 돌아나오는 길에 나무 한그루, 등저리에 온통 이끼를 안고 서 있었다.

겨울이라 파란 게 소나무만이 아니라 저런 선태식물, 이끼도 있는데 옛 선비들은 역시

가오를 따졌던 것인가 싶어졌다. 아무래도 이끼보다는 소나무의 덕을 칭송하는 게

보기에도 좋고 듣기에도 좋으니, 인지상정이겠다.

다음에는 좀더 화사한 계절에 다시 한번 오고 싶어졌다. 어딘가를 가서 제대로 그 모습을

보려면 최소한 일년에 네 번, 사계절의 모습은 모두 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요새들어 정말

그 말이 맞다 싶을 때가 있다. 봄의 경기전, 여름의 경기전, 가을의 경기전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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