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거니 뒷서거니 움직이던 프로 사진기사 아저씨 일행과 나. 전날 내린 폭설 덕에 한사람 걷기도 쉽지 않은 외길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서로의 위치를 빌려주기도 하고, 서로의 카메라가 향한 곳을 흘깃거리기도 하고.

 

 

 

그리고 잠시 한눈 판 사이, 나는 더이상의 접근은 무리라고 생각해서 돌아섰던 그 곳을 훌쩍 넘어가버린 프로 아저씨. 엄청 불어난

 

물 때문에 통나무로 만들어진 산책로가 거의 수면 아래로 잠기다시피 했던 길인데, 저 길 너머에 플리트비체의 대폭포인 벨리키폭포가

 

있는 거다. 아마도 이렇게 한 걸음 떼는지 마는지가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일지도.

 

산책로 아래로는 바로 또 낭떠러지 폭포가 이어져 있어서 물소리도 귓전을 때리고, 사방에서 날아다니는 물방울도 온몸을 때리고.

 

 

급물살은 찰박거리며 쉼없이 산책로를 들썩여대고, 폭포수의 맹렬한 소음과 진동은 몸 전체로 전해지는 상황. 이미 신발이고 옷은

 

흠뻑 젖어버렸고, 그저 카메라나 놓치지 않도록 꼭 쥐고 있는 것이 고작인 상황.

 

그래도 역시나, 이쪽에서 바라본 풍경들도 하나같이 숨을 멎게 만들 만한 그런, 절경이다.

 

 

멀찍이서 보이던 눈꽃들의 세세한 디테일과 원근감이 하나씩 드러나는 풍경 속에서, 좀더 두텁고 둔중한 소음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벨리키 폭포. 플리트비체 하류의 대폭포라고도 불리는 이 폭포는 물의 낙폭이 78미터라나, 아래에서 올려다보기 쉽지 않다.

 

 

그리고 폭포 아래로부터 어딘가로 다시 모여 흘러내리는 개울을 이루고는 오랜 세월 무성한 나무들을 키워냈다.

 

 

눈이 많고 추운 계절이라 그런지 아직 유량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도 않은데, 소리나 위용은 굉장히 사납고도 맹렬하다.

 

 

옆엣 산책로를 조금 빗겨 올라가서 벨리키폭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한껏 감상했다. 참, 이쁘고도 오묘한 경치다.

 

 

끊긴 다리를 향해 돌아가는 길, 벨리키 폭포는 플리트비체 공원 하류의 포인트이자 끄트머리이기도 해서, 이제 상류로 올라갈 시간.

 

 

상류쪽으로 멀찍이 보면, 조그마한 웅덩이 같은 에메랄드빛 호수들이 찔끔찔끔 이쪽으로 흘러내려오는 듯한 느낌이 있다.

 

카르스트지형의 특색이랄 수 있는 그런 하류로 미끄러지는 호수들, 그에 더해 하류의 눈꽃에서 미끄러지는 무지개도.

 

 

왠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더 많은 산책로가 폭포수에 먹혀버린 듯 하다. 앞에서 한바탕 찍고 간 프로 사진기사

 

아저씨도 조금 끙끙대며 건너가는 거 같더니 이유를 알 만 하다.

 

 

뭐, 급할 거 없으니 안전하게. 그리고 가능한 풍성하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다.

 

그리고, 산책로가 폭포수에 먹힌 바로 그 시점을 코앞에 두고, 인증샷 한 장을 남겨 이날의 모험을 기억해두겠다며.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앞서 프로 사진기사 아저씨가 선방을 뜨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앞장설 일은 없었지 싶다.)

 

 

 

 

 

 

강화도에도 그럴듯한 걷기 좋은 길이 있다길래 정보를 검색하다가, 그런 길이 무려 8개 코스나

생겼다는 사실에 깜짝 놀랬다. 이름하야 강화나들길. 그 중에서 제1코스, 심도역사문화길이란

이름이 붙은 길을 걸었다. 정비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나들길의 경로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갓 내걸린 신품의 느낌이 가득하다. 여기서부터, 총거리 18킬로미터, 약 6시간이 소요되는 코스.

<강화나들길 제1코스>

강화버스터미널 - 동문 - 성공회강화성당 - 용흥궁 - 고려궁지 - 북관제묘 - 강화향교 - 은수물

- 북물 - 북장대 - 오읍약수 - 연미정 - 옥개방죽 - 갑곶성지 - 갑곶돈대



 

 

코스야 그렇게 짜였다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모범답안'일 뿐 내키는 대로 형편닿는 대로

돌아보기로 했다. 버스터미널에서부터 조금 뻗어있는 나름의 도회지를 지나고 나니 이내

시간감각이 혼란스러워지는 풍경이 나타났다. 슬레이트지붕의 단층건물들이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는 골목길, 적당히 허름하면서도 정겨운, 그런 편안한 분위기다.

그런 골목을 지나다가 문득 발견한 동문, 몽고가 침입했을 때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옮겨와서

항전하며 쌓은 성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문이 있다는 건 양쪽으로 길고 높은 성벽이 이어졌을

거란 이야긴데, 아쉽게도 그 자취는 거의 사그라져 버린 듯 하다. 그나저나 저렇게 야트막한

가옥들과 눈높이를 맞춘 성문을 골목 끝에 갖고 있는 동네에서 살면 꽤나 운치있을 거 같다.

 

안내표지는 꽤나 친절하게 사방에서 찾을 수 있었다. 가장 많이 띄었던 표지는 저렇게

파랑색 바탕의 분홍색 화살표를 페인트로 그려놓은 거였는데, 뭔가 갈랫길에 당도하거나

길이 헷갈릴 즈음 길바닥이나 벽면에서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저런 좁은 골목 뒷길도

지나고 논두렁길도 지나고. 바람에 나풀거리는 앉은뱅이 허수아비도 만났다.

동문을 지나고 만나게 되는 600년 묵었다는 회나무, 그늘 아래서 자동차들도 쉬어가는

그런 거대한 나무를 보면 왠지 옷깃을 여미게 된달까. 그 생명력과 연륜 앞에서, 그리고

단단히 수백년동안 뿌리박은 그 위엄과 경이로움에 조금 압도되는 거 같다.

꽤나 한적한 나들길을 따라 걷는 건 정말 기분좋은 일이었다. 아직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

길이 채 제대로 나지 않은 곳들을 따라 걷는 즐거움도 있었고, 아직 상업화되지 않고 정비되지

않아 그냥 날것의 일상이 바로 옆에서 그대로 느껴지는 풍경도 생생했다.


그런 길을 좀 걷다가 마주친 건물, 110년이 넘었다는 한옥 양식의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햇볕이

슬슬 따갑게 내려쬐이기 시작한지라 땀 좀 식힐 겸, 한옥식 성당이라는 이곳을 좀 구석구석

돌아보기로 했다. '대영국 알마 수녀 기념비'가 서 있는 것부터 시선을 바싹 잡아당겼다.

'천주성전'이라는 편액을 걸어둔 건물이 바로 성당 본당이다. 처마의 생김이나 색감은

여느 한옥이랑 비슷하지만 기둥 사이사이로 활짝 열릴 유리문이 있다거나, 내부에 저리

길게 늘어뜨린 전등이라거나 성당의 기능에 맞게 개조된 내부 구조가 신기하다. 그리고

신부님이 머무시는 듯한 별당 건물 역시 지붕에 십자가 표지라거나 문짝에 그려진 태극

십자가 문양이 인상적이었다.


어느새 고려궁지, 오후 2시쯤 한참 뜨거운 때여서 다 허물어진 잔해 속을 거닐며 비감에 젖는

것보다는 그늘에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를 빨며 땀도 식히고 바람쐬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몽고 침입 때 고려 왕조의 왕궁으로 쓰였던 고려궁지는 이후 버려졌다가 조선 인조 때 다시

쓰였다가 이내 다시 잊혀졌던 곳이란다.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흔적이 더 큰 그런 곳이다.


코스에 따르자면 고려궁지에서 북관제묘, 강화향교, 은수물을 거쳐 북문으로 가게 되어 있지만

그냥 바로 북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기로 했다. 사실 스스로의 의지였다기보다는 그냥 내키는 대로

앞서나가는 발걸음이 이끌었다는 게 맞겠지만. 다행이었다. 나무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나무터널길이

북문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미처 가려지지 않은 햇살이 아스팔트 길위에서 반짝거렸다.

그리고 진송루, 북문. 북문은 동문과 딱히 별다르지 않게 생겼지만 좀더 지대가 높고 양쪽에

성벽을 위풍당당하게 조금 끼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다소 녹슬고 칙칙한 그림자에 가려진

성문을 지나면 저런 짙은 녹색의 숲이 바로 나타났다.

한번 코스에서 벗어나 일탈을 해보면, 그담엔 쉬워진다. 이제 뭐 정말 발걸음 닿는대로 걷기

시작했다. 어찌됐건 기분좋게 걸을 수 있고 재미있으면 되지, 꼭 어디어디를 지나쳐 어디로

가야 한다는 법 따위는 없는 거니깐. 숲으로 덥썩 뛰어들어서는 사람들이 많이 밟고 지나가

풀이 돋지 않았거나 상대적으로 흙바닥이 많이 보이는, 길처럼 보이는 걸 따랐다.


그렇지만 정말 작심하지 않으면 딴길로 접어들기도 어려울 만큼, 인적 하나 없는 숲길 중간에도

이렇게 나무로 잘 만들어진 안내판이 어김없이 길을 일러줬고, 그보다 더 자주 '강화나들길'의

끄나풀이 길을 인도했다. 어디선가 꽃향기가 걸쭉하게 번져나온다 싶으면 꽃이 나왔고,

어디선가 나뭇잎을 사각대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금세 바람이 따라왔다.


산길을 한참 걸어올라가다가 걸어올라온 만큼 내려간다 싶던 때 오읍약수터가 나왔다. 약수터는

그냥 조그만 동네 약수터랑 비슷했고, 그 아래쪽에 졸졸 물이 흘러내리는 풍경을 따라 걷다보니

산길이 끝나고 도로 갓길로 접어들었다.

한참 뜨거운 시간, 그림자는 한뼘도 생겨나지 않는 때에 하필 이렇게 벌거벗은 아스팔트 길

위에 서게 되다니 타이밍이 좀 안 좋았던 게다. 너무 뜨겁기도 하고 아무래도 도로 갓길은

쉽게 지치고 볼거리도 없고 하여 색색으로 이쁘게 칠해진 초등학교 정자나무 아래를 찾아

잠시 쉬었더니 금세 땀도 식고 기력도 회복하고. 근데 학교 진짜 이쁘게 칠했다.

사실 다른 건 몰라도 1코스에 '대산리 고인돌군'이 끼어있다길래 걷다가 고인돌들이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겠구나 했었다. 근데 아무리 가도 고인돌은커녕 바위쪼가리도 안 보이고

그저 숲길이 계속 이어졌고, 또 이어졌고, 주위에 보이는 건 온통 초록색 풀떼기 뿐. 길은

그대로인데 고인돌을 바라던 내 맘이 변덕인지라 '풀떼기'가 되고 말았다.


결국 다시 큰길가로 나오고 나니 맞이하는 건 사방으로 뻗은 화살표. 현재 위치는 이미

대산리고인돌군을 훌쩍 지나친 어디메쯤. 뭐 깔끔히 포기하고 고인돌은 다음 기회에 다시

보러오기로 했다. 그렇게 월곶마을의 띄엄띄엄한 건물들 사이로 느슨하게 놓인 길을

걷다가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를 원망할 무렵이었다. 저 파랑색 차양이 눈에 띈 건.

논쪽을 향해 불뚝 튀어나온 평상 위에 아저씨인지 할아버지인지 중늙은이 두 분이

앉아계셨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파랑색 차양을 높직이 드리우고는 한가로이 논쪽을

내려보며 쉬고 계신 듯 했는데, 가능하다면 옆에 한자리 끼어서 같이 쉬고 싶던 마음뿐.

결국 마을회관을 지나고 좀더 걷고서 도착한 '연미정'. 코스 중간에 식사할 수 있는 포인트로

연미정을 소개했던 안내지도와는 달리 근처엔 구멍가게 하나가 숨어있던 게 고작이어서,

위에 올라 바람맞고 쉬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 길 걷는데 중간중간 가게나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건 이 코스의 장점이자 단점인 거 같다. 분위기가 흐트러지지는 않되

미리 챙겨두지 않으면 목이 말라 쓰러지거나 배가 고파 쓰러질지도.

강화 10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곳, 연미정은 아래로 굽어보이는 물길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고 하여 연(제비燕), 미(꼬리眉)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 풍경이나

정자가 품고 있는 시원한 바람이 예사롭지 않아 강화나들길 1코스 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곳이다. (이전 포스팅 : 인조의 첫번째 굴욕이 있던 곳, 강화도 연미정.)

정말 경관이 굉장히 이쁜 곳이었는데, 500년된 느티나무도 두그루나 떡하니 버티고 있어

시원한 바람과 그늘을 품고 있었고, 그런 거에 비하면 참 안 알려진 곳이지 싶다. 어쩌면

그건 인조가 후금과의 기싸움에서 밀리고 억지로 맺었던 강화조약을 여전히 굴욕이라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치욕의 징소, 굴욕의 장소는 얼른얼른 덮고 지우려거나

최소한 소극적으로 방치해두기라도 하는 사례야 워낙 많았으니까.


나고 드는 게 자유로워서 '나들길', 강화나들길 제1코스는 이제 연미정에서 옥개방죽길을 거쳐

갑곶으로 마무리되도록 짜여있긴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기로 했다. 굳이 첨부터 끝까지 밟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형편따라 나고 드는 게 정말 나들길을 즐기며 걷는 방식이지

싶어서, 배도 고픈데다가 서울로 돌아갈 시간도 애매해서 나머지길은 다음을 기약했다.


강화도에 왔다면 어디서부터든, 저 '강화나들길' 표지를 발견하는 순간 이 나들길에 들어서서

조금이라도 걸으면서 발견하게 되는 강화의 풍경을 즐기다가 다시 나리는 건 어떨지.


* 강화나들길 사이트 : http://www.trekking.go.kr/




월화수목금, 그리고 토일. 이 사이클만 무한히 남아버린 듯한 일상.

막상 얻고 싶은 것들은 보행로 밖에 있는 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저렇게 커다랗고 위압적으로

씌여진 글씨 앞에서 고분고분 차선을 지키고 순서를 지키고 예의를 지키고 있다.


그렇게 안전한 보행로만 따라걷는다고 또 길을 잃지 않는 것도 아니면서.

당장 보행로가 저렇게 활처럼 휘어지는 곳에서, 또 다시 갈등하고 마는 거다.

같이 휘영청 휘감아돌아야 할지, 아님 보행로 밖으로 '탈주'해서 누군가 무언가의 앞에 설지.


길 (G.O.D.)

내가 가는 이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 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준형]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

[호영]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계상]무엇이 내게 정말 기쁨을 주는지
돈인지 명옌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지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아직도 답을 내릴 수 없네

[데니]자신있게 나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네

[호영]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태우]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hoo~ 지금 내가 어디로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살아야만 하는가

나는 왜 이길에 서있나(왜 이길을)
이게 정말 나의 길일까(이게 정말 나의 길일까)
이 길의 끝에서 내꿈은 이뤄질까(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난 무엇을)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꿈인가 hoo~)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오랜만에 학교에 갔더니 곳곳에 새 건물들이 들어섰다. 이미 이러저러한 공간들을 비집고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고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당장 내가 군대 포함해서

십년 가까이 먹고 마시고 자고 놀던 공간, 사회대 근처가 이렇게 변했는 줄은 미처 몰랐다.

매년 개강집회, 과 학생회장 선거, 사회대 학생회장 선거, 축제, 각종 문화제, 공연,

외부집회 나가기 전 사전집회, 단대 차원의 온갖 행사들이 치뤄졌던 사회대 아고라.

밥먹고 나서 우유팩 두개 거꾸로 접어 꼽아서는 '팩차기'를 해대던 공간이기도 하고,

사회대 도서관의 고시생들이 잠시 나와 바람을 쐬며 담소를 나누던 공간이기도 하고.


반원형의 둥근 재떨이같이 옴폭 파인 채 학생들을 불러모았던 그 공간 한 가운데

저렇게 공사판이 벌어졌고, 센스있는 학생들이 낙서를 잔뜩 해놨다. 기억해줘.

모든 걸 여기에 묻고 간다. 우리들의 광장 아고라.ㅋㅋ '끝'이란 단어가 괜히 원망스럽다.

사회대 도서관쪽에서 바라본 아고라. 다음 '아고라'가 온갖 이슈들에 대한 토론과 청원이

벌어지는 자유로운 백가쟁명의 공간이듯, 서울대가 연희동에서 관악산 자락으로 옮겨오고

사회대가 여기 건축되고 난 이후 쭈욱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 그 원래적인 의미로 일상적인

온갖 활동이 펼쳐지던 집회공간이었던 곳이다. 비록 점점 사람들이 여기 모이기 힘들어졌고

더러는 도서관에서 집회 소음이 시끄럽다며 항의하는 지경에까지 처했었지만, 이젠 아예

그 공간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속이 서늘하다.

주차장이던 공간에는 3, 4층짜리 건물이 섰다. 무려 파파이스랑 자바시티 커피점이 들어섰더라는.

뭐, 그런 게 다 들어서다니 학교가 정말 예전같지 않구나 싶기도 하지만, 사실 내가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게 있다.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맥도널드가 처음 생겼을 때,

미제의 브랜드가 신성한 대학 상권에 진입한 걸 항의하는 집회까지 있었다던가.

'미제', 미국 제국주의에 민감했던 시대적 정황을 염두에 두면, 그리고 당시에 생각하던

'대학'이란 지금 상식처럼 통용되는 대학의 의미와 달랐음을 염두에 두면 딱히 해프닝이라

치부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대학 사회가 꼭 과거와 같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같지도 않은 것이 사실이니까 그런 프랜차이즈들이 학내까지 들어온다고 정색할 일도

아닌지 모른다. '통큰치킨'으로 상징되는 손쉬운 합리적 소비욕구가 결국 영세 자영업자들을

전부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지만, 대학이라고 뭐, 별 수 있나.

씁쓸한 맘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 와중에도 커피숍 한쪽이 눈에 들어왔다. 소화전을

에워싼 그림들과 더불어 무슨 그림작품처럼 치장된 소화전의 세련된 모습. 어쩌냐.

눈은 자연스레 이쁘고 세련되고 센스부릴 여유있는 것들로 가는 게 인지상정인 건가.

어라, 내가 다닐 때는 이런 이정표는 없었던 거 같은데. 교내에 뿔뿔이 산재해 있는

민주화 투쟁 열사들 추모비들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민주화의 길'. 나중에

날이 좀 풀리면 학교에 놀러와서 한번 이 경로대로 걸어봐야겠다, 추모비들을 하나하나

새겨놓아야겠다 싶다. 언제 또 사라질지 모르는 것들이다.

졸업하기 전 꼭 해보고 싶던 것 하나가 있었다. 이 위에 올라가서 술 한잔 하는 것. 흔히 전면에서

찍힌 사진에만 익숙한 이 '샤' 정문은 알고보면 ㄱ과 ㅅ과 ㄷ의 조합일 뿐이지만, 덕분에 그게

'공산당'의 약자니 뭐니 그런 이야기도 있었던 거다. 옆에서 보면 제법 두툼한 이중의 철판이

단단히 땅에 조여져 있는데, 그 사이로 계단처럼 밟고 가라며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 것들이

층층이 박힌 채 꼭대기까지 인도하는 거다. 졸업하기 전에 야밤을 틈타 저길 한번 올라갔어야 했다.




아직 해가 굼실굼실 지평선에서 게으름을 피우던 때,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시야를 채운 곳에

도착했다. 시화호 갈대습지. 만지면 청량하게 바스락거릴 듯한 갈빛 갈대가 눈 바로 앞에서부터

저 너머 산부리들로 끊어지는 곳까지 가득 차 있었다.

요새 날씨가 좀 춥긴 했으니 별로 놀랄 일도 아니지만, 갈대들을 잔뜩 품고 있는 습지의 수면이

살짝 얼어붙었다. 거친 선으로 굵게 그려진 크로키처럼 쭉쭉 뻗어나간 살얼음의 잔뼈들을 타고

햇살이 와작와작 부서지는 듯.

시화호에 방파제를 쌓아 물의 흐름을 끊어놓은 뒤부터 물이 썩어들어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던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다. 농업용지와 공업용지를 확보한다며 바다를 막고 땅을

메우는 간척사업 명분이었다지만, 결국 사업 전에 감안했던 득실계산과 실제 드러난 득실은

꽤나 큰 차이를 보이고 만 거니까. 그래도 이렇게 갈대습지를 조성하고 오염을 정화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결국 자연 생태계를 회복시키고 새들까지 불러오는 결과를 낳았다. 다행히도.

철새들의 시선을 피해 굳이 저런 조류관찰대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곳곳에 만들어져 있는

벤치와 쉼터에 잠시 앉기만 해도 사방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 꽥꽥거리는 소리, 어디선가

물을 움키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갈대만 가득한 줄 알았더니, 그 곳을 빌어 살아가는 것들이

정말 많구나 싶도록. 새들 뿐 아니라 고라니나 멧토끼, 족제비까지 종종 발견된다니 신기하다.

멀리서 볼 때는 그냥 갈빛이 빼곡해서 사람들이 걸어갈 길이나 제대로 나 있을까 싶었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곳곳에 길이 숨겨져 있었다. 아예 무슨 공원처럼 널찍하게 잘 조성된

흙길도 있었고, 어느새 살얼음이 전부 풀려버린 채 찰박거리는 습지 위로 만들어진 나무길도

있었고.

갈대 습지가 정말 생각보다 꽤나 넓어서, 설렁설렁한 걸음으로 한 바퀴 돌아본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듯. 중간중간에 쉬고 멈춰서 구경하고 할 테니 세네시간은 족히 소요될 테니 반나절

데이트 코스로도 제격이겠다.

습지 중간중간에 T자 모양으로 서 있는 나무 등걸이나 섬처럼 쌓여있는 돌무더기들은 새들이

쉬어가라고 만들어둔 것이라 한다. 갈대숲만 이렇게 울창해도 새들이 올 텐데 이런 식으로

서비스까지 확실하니, 많은 새들이 이 곳을 찾아들어 한해에만 약 15만 마리가 날아드는 게

놀랄 일은 아니다. 새를 가장 많이 관찰할 수 있는 시기는 겨울철새들이 찾아오는 12월에서

2월 사이. 망원경과 조류도감, 인내심을 갖고 오면 온갖 잡새 구경이 가능하다고.

평일이고 아직은 이른 시간대라 그런지 사람이 새들보다도 훨씬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래도

드문드문 갈대숲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가을도 좋지만 눈을 흠뻑 이고 있는

겨울이라거나, 봄볕이 나른하게 내리쬐는 봄에도 좋을 거 같다. 여름에도 좋을 거 같긴 한데,

아무래도 습지니까 모기나 날벌레들이 많지 않을까 싶어서 조금 조심스럽고.

돌아나오는 길이 아쉬워서 계속 뒤를 돌아보며 나왔다. 나중에는 좀 더 넉넉하게 시간을 보내며

쉬다 가야지, 그리고 조류도감은 아니어도 망원경 정도는 챙겨줘야겠다, 따위 다짐들을 새기면서.

그리고 갈대. 끝에 소복하니 먼지털이개처럼 달려있는 보드라운 털뭉치가 따뜻해 보인다.

바람이 일면 갈대 끝에 엉켜있는 그 털뭉치가 민들레홀씨처럼 탁 깨어져서는 퍼져나가는 거

아닐까, 위태한 맘으로 지켜보았지만 의외로 단단히 붙어서는 바람보다 앞서 바람결을 그려냈다.






지브리 미술관에서 나오는 길, 미타카 역을 가리키는 화살표 하나, 미술관을 에워싼 공원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또 하나. 미타카 역에서 지브리 미술관으로 이어지는 길이 꽤나 매력적인 산책로라는 이야기에 그쪽으로 바로

빠지기로 결심은 했지만, 지브리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져 있는 공원에서 좀더 여운을 즐기고 싶은

마음도 움찔움찔.

아까 뛰어들어오느라 보지 못했던 지브리 박물관/미술관/스튜디오의 간판.

끝내 문을 나서서 돌아나오는 길, 샛노란 칠이 산뜻한 지브리 스튜디오 건물 안의 커다란 토토로가 배웅해주는

듯하다. 이제 막 스튜디오에 들어선 꼬마아이 하나가 토토로와 눈싸움을 시작했다.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나와 미타카 역쪽으로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태풍 '곤파스'가 가로수를 뽑고 휘두른다던

서울과는 달리 이곳 도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죽어나간다는 전례없는 폭염이 계속되던 중. 비행기 타고 고작

두시간도 안 날아가는 거리인데 이토록 판이한 날씨라니. 이런 점에서도 가깝고도 먼 나라, 맞다.

이국적인 느낌의 신호등, 빨간 신호등의 불빛이 유난히 붉다.

사실 미타카역에서부터 지브리 미술관으로 걸어오면서 점점 줄어들어야 하는 숫자, 미술관까지 300미터

남았음을 알리는 표지판. 푯말을 들고 있는 토토로도, 푯말 위에서 휘영청 몸을 꺽어내는 도마뱀도 귀엽다.

한참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닐 시간 아닌가, 오후 두세시경. 옆에 개천을 끼고 이어지는 골목길에는 그렇지만

사람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고즈넉하고, 조용하면서 깨끗한 거리.

나무도 많고, 집들도 아기자기하고, 그런 산책로를 따라 가다보니 금세 지브리 미술관에서 멀어진다. 어느새

500미터나 떨어졌다. 거꾸로, 미타카역에서 이 길을 따라 지브리 미술관을 향하는 길도 생각보다 금방 가닿을듯.

어느 집 앞마당에 얼기설기 세워진 대나무 울타리에 붙여진 안내판.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개와 고양이 그림이

귀엽다. 뭐, 이런 개나 고양이가 마당에 침범하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는 그런 걸까.

좀더 걷다 보니 다른 그림들도 눈에 띈다. 아이들이 손으로 직접 그린 듯한 포스터들, 그리고 검정귀를 가진

하얀 강아지가 푯말로 붙어있는, 그런 류의 귀여운 안내판들.

그리고 칠백미터. 토토로 말고 다른 캐릭터들도 푯말을 들고 있게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긴 하지만, 아무리

뭐니뭐니 해도 지브리의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는 역시 토토로. 붉은돼지 아저씨가 푯말을 들고 있기엔 왠지

어울리지 않는 거 같고.

이번엔 파란 불, 이건 또 아까 신호등과는 모양생김이 다르다. 햇살은 워낙 내리쬐이고 그늘은 또 그만큼

짙고, 도무지 광량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던 도쿄.

신호등 앞에는 이렇게 멈춰서서 기다리라며 발자국 모양까지 그려넣는 세심함..이랄까 유머러스함이랄까.

장난스럽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지브리 스튜디오-미타카 역을 잇는 이 산책로의 이름은, '바람의 산책로'. 아닌 게 아니라 개천을 따라 쓸듯이

불어내리는 바람이 머리빗처럼 순순한 방향으로 행인들을 빗어넘기고 있었다.

문득 툭 튀어나온, 그렇지만 너무 과하게 튀거나 부조화스럽지는 않은 일본 스타일 강렬한 집도 한 채 지나고.

그러다보니 벌써 지브리 스튜디오에서부터 천백미터. 그리고 거의 코앞까지 당겨져버린 미타카역.

지브리에서의 여운을 곱씹으며 마음을 탁 놓은 채 걷기에 딱 좋던, 딱 알맞은 거리와 분위기의 산책로.





출장을 마치고, 뒷정리를 어영부영 해치우고, 이제야 부랴부랴 제5차 동시나눔에 나섭니다.

지난 글들을 보며 대체 이번이 몇 번째인가, 궁금한 맘이 일어 헤아려보다가 말았습니다. 나눔이라 이름붙은

건 9번, 10번 된다지만 숫자를 세기 시작하니 왠지 자꾸 숫자를 늘리고 싶은 맘이 불끈 동하는 거 있죠?

티스토리 초대장도 나눈 건 나눈 거니까 몇 번 더해넣고 싶고, 뭐 그런 게 사람 맘인지라 그냥 숫자는 잊기로

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포스팅 하나하나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담긴 거니까요^^


이번 나눔, 뭘 할까 한참 고심하였...다는 건 뻥이고, 이번엔 스토리텔링으로 승부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출장 가서 사온 하이퍼울트라 은하계급 초레어 아이템을 나누고자 합니다. 무려 "LOVE CANDY"!!

미처 사진을 찍어두지 못한 관계로, 사무실 복사기에 넣고 컬러스캔했습니다. 컬러스캔하고 복사해서

몇가지 광고 문구를 넣어 보았습니다..ㅡㅡ;;


이게 뭐냐고 하실지 몰라도, 무려 연애세포재생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거 아닙니까.

길도 이거 딱 두 알 먹고 나니 박정아랑 사귀었답니다. 강혜정? 타블로가 가루로 빻아서는 억지로 먹였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대륙 통일할 때 전사들이 모두 하루에 이거 한알씩 먹고 전투에 임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소위 "인생은 육십부터 연애중"이라는 모두 익히 알고 계신 황금언을 가능케 만든

기적의 캔디가 바로 "LOVE CANDY"인 것입니다.


왜 이래요, 러브 캔디 한 알 못 먹어서 평생 연애 한번 못 해본 사람들처럼.
연애세포가 뭔지는 다들 아실 거고, 언제까지 솔로로 살 텐가. 가을이고 날도 춥고 바람도 차가우니 요

"LOVE CANDY" 하나씩 물고 푸석푸석해진 연애세포 좀 생기발랄하게코롬 촉촉하게코롬 되살려 보시죠ㅎ
 
덤으로 제가 직접 만년필을 휘둘러 손편지도 써드립니다.(음..이건 좀 마이너스..일까나..ㅡㅡ; )


2009. 10. 24(토) 24:00 까지 댓글로 자신이 아는 가장 멋진 사랑의 멘트를 알려주시는 분 5분을 선정하여
 
'영혼을 위한 비아그라'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기적의 캔디, "LOVE CANDY"(정품, 수입승인번호:

식가583-183092)와 제 정성을 가득..쪼끔 담은 손편지 한 통을 보내드리겠습니다.




* 이번 동시나눔 진행중이신 분들

주관하시는 BlogIcon 민시오™

[블로그 동시 나눔 행사] 제5차 "OO 기념 동시 나눔 마당" 진행 - 제5차 가을맞이 기념 나눔 이벤트

BlogIcon Slimer
정신 없이 바쁜 기념으로 조금 나누어 봅니다.

BlogIcon 백마탄 초인™
10월에 터지는 행운을 잡아라~!! [제5차 블로그 나눔]

BlogIcon 초하(初夏)
◆ '제5차 동시 나눔' 마당에 동참할 이웃지기님들을 기다리며

BlogIcon 2Proo
2proo.net 블로그 5차 동시나눔 이벤트 - 방문자수 4백만명 돌파 이벤트

BlogIcon Design_N
이사 완료 기념, 동시 나눔! (5차)

등등 많은 분들이 있으니 한번 둘러보고 가셔요^^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블로그와 나눔]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용산참사현장을 돌아보며 느꼈던 건..이 곳이 단순히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사고 현장일 뿐 아니라,

약자들을 위한 분향소이자, 거리의 감수성이 그대로 녹아있는 거리미술관이자, 또 그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한

추모의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대로 적나라한 한국의 현실과 빈궁한 민주주의의 허약함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근거지이기도 했다.


[용산참사 6개월] 참사 현장, 분향소에 다녀왔습니다.(1/5)

[용산참사 6개월] 참사 현장,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2/5)

[용산참사 6개월] 참사 현장, "니들이 경찰이면 나는 송혜교다".(3/5)

[용산참사 6개월] 참사 현장, "용산학살를 용서하지 않다!"(4/5)

[용산참사 6개월] 참사 현장, 매일 추모미사가 열립니다.(5/5)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용산참사 해결없이 이땅에 민주주의란 없다.

진상 규명은 사실상 그들이 원하던 원치않던 어느정도 된 상황아닌가. 누가 잘못한 건지, 안전수칙을 누가 어겼는지,

그리고 누가 지시했는지는 대충 언론보도로 (중구난방식일지언정) 노출된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선.

과잉진압 사과하고, 재발방지 약속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는,

생존권대책 마련없는 난개발정책 중단하라.

용산 참사현장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서 유가족분들에게 힘을 보태고, 귀막은 정부와 언론이 바라는 대로 잊혀지지는

않는다는 걸 직접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에 더해 민주주의를 위한 살아있는 교육 현장으로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 가는 길 :

용산역 1번 출구, 혹은 신용산역 2번 출구로 나와 걸어서 10분 이내.

저기 번개가 내리꽂힌 곳이 바로 용산4구역 철거민분들이 망루를 짓고 올라가셨던 곳이다.

..바로 여기.

다음 스카이뷰에 오른 사진은 언제 찍혔던 걸까. 아직 건물이 멀쩡히 제 기능을 할 때, 유리창들이 온전할 때, 그리고

그때만 해도 누군가 저 위에 올라가리라곤, 또 올라가 불에 타 돌아가시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때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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