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해가 굼실굼실 지평선에서 게으름을 피우던 때,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시야를 채운 곳에

도착했다. 시화호 갈대습지. 만지면 청량하게 바스락거릴 듯한 갈빛 갈대가 눈 바로 앞에서부터

저 너머 산부리들로 끊어지는 곳까지 가득 차 있었다.

요새 날씨가 좀 춥긴 했으니 별로 놀랄 일도 아니지만, 갈대들을 잔뜩 품고 있는 습지의 수면이

살짝 얼어붙었다. 거친 선으로 굵게 그려진 크로키처럼 쭉쭉 뻗어나간 살얼음의 잔뼈들을 타고

햇살이 와작와작 부서지는 듯.

시화호에 방파제를 쌓아 물의 흐름을 끊어놓은 뒤부터 물이 썩어들어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던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다. 농업용지와 공업용지를 확보한다며 바다를 막고 땅을

메우는 간척사업 명분이었다지만, 결국 사업 전에 감안했던 득실계산과 실제 드러난 득실은

꽤나 큰 차이를 보이고 만 거니까. 그래도 이렇게 갈대습지를 조성하고 오염을 정화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결국 자연 생태계를 회복시키고 새들까지 불러오는 결과를 낳았다. 다행히도.

철새들의 시선을 피해 굳이 저런 조류관찰대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곳곳에 만들어져 있는

벤치와 쉼터에 잠시 앉기만 해도 사방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 꽥꽥거리는 소리, 어디선가

물을 움키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갈대만 가득한 줄 알았더니, 그 곳을 빌어 살아가는 것들이

정말 많구나 싶도록. 새들 뿐 아니라 고라니나 멧토끼, 족제비까지 종종 발견된다니 신기하다.

멀리서 볼 때는 그냥 갈빛이 빼곡해서 사람들이 걸어갈 길이나 제대로 나 있을까 싶었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곳곳에 길이 숨겨져 있었다. 아예 무슨 공원처럼 널찍하게 잘 조성된

흙길도 있었고, 어느새 살얼음이 전부 풀려버린 채 찰박거리는 습지 위로 만들어진 나무길도

있었고.

갈대 습지가 정말 생각보다 꽤나 넓어서, 설렁설렁한 걸음으로 한 바퀴 돌아본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듯. 중간중간에 쉬고 멈춰서 구경하고 할 테니 세네시간은 족히 소요될 테니 반나절

데이트 코스로도 제격이겠다.

습지 중간중간에 T자 모양으로 서 있는 나무 등걸이나 섬처럼 쌓여있는 돌무더기들은 새들이

쉬어가라고 만들어둔 것이라 한다. 갈대숲만 이렇게 울창해도 새들이 올 텐데 이런 식으로

서비스까지 확실하니, 많은 새들이 이 곳을 찾아들어 한해에만 약 15만 마리가 날아드는 게

놀랄 일은 아니다. 새를 가장 많이 관찰할 수 있는 시기는 겨울철새들이 찾아오는 12월에서

2월 사이. 망원경과 조류도감, 인내심을 갖고 오면 온갖 잡새 구경이 가능하다고.

평일이고 아직은 이른 시간대라 그런지 사람이 새들보다도 훨씬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래도

드문드문 갈대숲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가을도 좋지만 눈을 흠뻑 이고 있는

겨울이라거나, 봄볕이 나른하게 내리쬐는 봄에도 좋을 거 같다. 여름에도 좋을 거 같긴 한데,

아무래도 습지니까 모기나 날벌레들이 많지 않을까 싶어서 조금 조심스럽고.

돌아나오는 길이 아쉬워서 계속 뒤를 돌아보며 나왔다. 나중에는 좀 더 넉넉하게 시간을 보내며

쉬다 가야지, 그리고 조류도감은 아니어도 망원경 정도는 챙겨줘야겠다, 따위 다짐들을 새기면서.

그리고 갈대. 끝에 소복하니 먼지털이개처럼 달려있는 보드라운 털뭉치가 따뜻해 보인다.

바람이 일면 갈대 끝에 엉켜있는 그 털뭉치가 민들레홀씨처럼 탁 깨어져서는 퍼져나가는 거

아닐까, 위태한 맘으로 지켜보았지만 의외로 단단히 붙어서는 바람보다 앞서 바람결을 그려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