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상해 출장 때 받았던 내몽고의 전통주. 120미리 작은 병으로 한 박스를 받았었지만, 다 마셔버리고 집엔

세병 달랑 들고 왔었다. 62%의 높은 도수에 걸맞는 고화력과 휘발성을 과시하지만, 그때나 어젯밤이나 역시

뒷끝은 없었다.


따로 판매용은 아니라 하고, 내몽고 로얄 패밀리들을 위해 특별제작되는 거라던데. 믿거나 말거나.

포장지에 그려진 징기스칸의 후예들이니 믿어야 할 거 같다 왠지.



동생이랑 어머니가 프라하 여행을 다녀오며 가방에 바리바리 싸온 Kozel 맥주 삼종 세트. 맛 본다고 홀짝홀짝

하다가, 지금은 곱창에 소주 일잔으로 이차 나가기 직전. 맥주는 배가 부르다며 위스키도 두 잔 걸친 터라, 대체

오늘 술빨은 어디까지 달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뜯긴 세 캔으로 부족하여 보따리 수입해온 마지막 한 캔까지 꿀꺽, 필스너 우르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맥주는 '레페 브라운'과 '필스너 우르켈'. 그렇지만 역시 맥주는 배가 부르다.




날씨가 다시 추워졌다. 이런 날 마시라고 누군가 와인을 한 병 건넸었다. 따뜻하게 데워먹는 와인이다.
 
겨울철 유럽의 거리에서는 한 잔씩 팔기도 한댄다. 진짜인진 모르겠지만, 특별한 경험이 될 듯 하다.

왠 아가씨가 방긋 웃고 있는 사진이 라벨 맨 위에 올라붙어 있지만, 뭔가 너무 산만해서 잘 눈에 띄지가

않는다. 독일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몰라서이기도 하지만, 그냥 술은 맞겠지 대책없이 믿어본다.

처음에 받아봤을 때도 똑같은 프로세스를 거쳤다. 앞을 보고 잠시 황망해하다가, 뒤를 보곤 당황했다. 어라,

한국어네. 정식 수입된 와인인갑네. 이름은...크리스트킨들스 마르크트 글뤼바인...?;;;;


집에서 정종 덥혀먹을 때 그러듯 자그마한 주전자에 붓고 살살 끓였다. 60도에 딱 맞출 재간은 없고, 그냥

적당히 김이 오르고 와인향이 집안 가득 퍼진다 싶을 때 불을 껐다.

잔에 가득 따라붓고는 홀짝홀짝, 따뜻한 사케 마시듯 두손으로 잔을 감싸쥐었다. 안경에 뽀얗게 김이 서리곤

이내 사라진다. 레몬향과 계피향이 진하게 섞여든 게, 와인이라기 보다는 따끈한 차 같기도 하다.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방긋 웃어주는 아가씨. 가만 보니 머리엔 금색 왕관도 썼다. 금발에 금색 왕관이라니,

무슨 초록색 개구리가 초록색 똥 눈 거 같이 티가 한개도 안 난다.




몇 달 전 마셨던 샴페인, 크룩 그랑 꾸베(Krug Grande Cuvee). 집에 들어온 건 그보다 훨씬 이전.

샴페인을 터뜨릴 만큼 축하할 일이란 그다지 많지 않은 까닭이다.

마실 때도 그다지 요란스럽게 흔들어 뻥, 하니 터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흘러넘치는 술이 아깝기도 했고

함께 했던 대하와 조개구이 친구들이 무엇보다 '샴페인'과의 마리아주(Marriage)를 고대하고 있었다는.

그리고 숙취처럼 남은 것. 한번 빼낸 코르크 마개를 다시 닫기란 좀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샴페인 마개는

더더욱 그렇다. 고집스럽게 펼쳐진 콜크 마개의 아랫도리. (그리고 효용을 다한 채 하얗게 반짝이는 철사조임)

적당히 칠링된 샴페인은 굉장히 깔끔하고 상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혀끝에서 톡톡 터지던 그 자그마하고

부드럽던 반짝임들이 이제는 코르크 마개 위로 옮겨왔다. 미각에서 시각으로.



참 니가 고생이 많다. 입으로만 친구찾는 녀석들에 낚여서 정선에 훅 떨궈져서는, 잘못 찾아간 펜션에서

박대당하고 신종 꽃뱀에 물려 바지까지 털리고, 과잉친절을 베풀고는 바지를 벗겨내려는 아저씨를 만나는가

하면 기껏 만난 친구 녀석은 전 여친과 잤다는 고백이라니. (비록 오해가 풀려 전 여친이 아니라 여동생이라는

'충격적 반전'이 있지만, 그닥 고백의 강도가 떨어지지는 않는 거다.)


실은 이 녀석, 그 모든 '비극적인' 상황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정선에 놀러가자는 친구들 꼬드김에도,

경포대에 가서 바다라도 보라는 친구 권유에도 항상 반문하는 거다. 거기에 뭐가 있는데? 거기 가면 뭐하지?

내가 바뀌지 않았는데 내가 놓인 곳이 변한다 해서 현실이 변할리 없다는 냉철한 판단이요 괜한 돈 낭비하며

멀리까지 나가봐야 돌아오면 똑같다는 실리적인-냉소적인-계산이 이미 끝난 건지도 모를 일이다.


짧막하게 줄여 말하자면 거기엔 술이 있었고, 거기 가서는 술을 마실 일만 있었다. 그 고생들, 무려 오박 육일에

이르는 대장정에는 늘 술이 있었다. 정선에 도착해 처음 들어선 해장국집에도, 티비와 함께 하던 허름한 펜션

방에도, 경포대의 횟집과 어딘가의 여관방에서도. 술은 사람들과 처음 얽히는 단초가 되기도 했고, 혹은 이미

설켜있는 관계를 해소하는 매개가 되기도 했다.


사실 까칠하게 보자면 꼭 술이 있어야 사람들과 말을 트고 관계를 쌓아나가느냐, 형님아우하며 부어라 마셔라

해야만 그렇게 친밀감이 쌓이고 신뢰가 쌓이냐, 등등 눈살을 찌푸리며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녀석이

근 일주일 동안 주종 가리지 않고 마셔댄 결과 몸도 축나고 나중엔 술잔도 기피하는 '교육적'인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제대로 된 음주문화를 선도하려는 의도 따위도 없을 거고 말이다.


다만 그냥 오감에 기대어 말하자면, 영화를 보면서 여행이 땡기고 술이 땡기고 또 새로운 인연이 땡겼다.

주인공 혁진이 드디어 서울로 돌아가려는 찰나, 벤치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걸어오는 설레는 가능성의 그녀.

그녀와 그의 얼굴이 오버랩되는 순간 그들이 강릉으로 함께 떠나 술을 마시는 그림이 떠올라 버렸다. 다소

들뜨고 경계심이 풀린 그들, 여행 중인 그들, 음주 중인 그들, 그리고 새로운 인연 앞에 설레어하는 그들이다.


왠지 여행과 술과 인연을 굉장히 설득력있고 강력한 끈으로 칭칭 동여매어두는 삼위일체의 신비. 꼭 술이

아니어도 된다지만 역시나 술이란 '황홀한 마취와 각성의 액체', 상대와 자신의 마음/몸을 무장해제시키고

피가 들끓게 만드는 그건..곧 여행, 그리고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감과 통하는 거다. 혹 그가 지금 눈앞의

그녀와 함께 떠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 어디메쯤, 서울로 돌아와 다시 어디론가 흐르는

그 골목길 어귀 어디메쯤에서라도 인연은, 그리고 술집은 항상 기다리고 있으니까.



* 다만 '숙취'는 조심할 것. 혼자 떠난 여행에서 김빠진 기대감만 발로 툭툭 차며 돌아오는 일이란 건

부지기수인 데다가, 더러는 '변태'도 만나 단돈 육천원에 몸값을 흥정해야 하는 굉장히 유니크하지만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은 경험도 쌓이기 마련이니.


어제 만찬행사 때 기껏 밥먹여 보낸 녀석은 '북한인권법'이나 발의하고 앉았다. MBC는 이제 MB氏 뜻대로

주물럭 오리고기가 되어버린다 하고, 모처럼 아홉시 뉴스를 보다가 역시나 예상대로 화가 나버렸다. 

요새는 어쩌다 보니 계속 탁주만 마셨다는 사실-심지어는 생선회와 초밥을 먹으면서도-, 그리고 오늘은 마침

무겁고 습한 눈이 펑펑 내렸다는 사실을 용케도(!) 기억해내고는 술잔을 꺼내들었다.

위스키는 년수가 오랠수록 확실히 부드러운 거 같다. 25년산, 모처럼 맛본 위스키. Serenity, 왠지 Serendipity가

떠오르는 이름.

뜻밖의 인연. 그리고 마음의 평정.





와인은 원래 포도를 원료로 하여 숙성시켜 만드는 술, 포도주를 이르던 단어였을 텐데, 어느 순간 '포도주'란

단어가 촌스러워보이기 시작하던 즈음 새로운 원료로 빚어진 '와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거 같다. 복분자니

오디니, 그런 것들이 '와인 열풍'을 입고 마구 생겨나는 것 같은데 해외에도 비슷한 열풍이 일고 있는 건지,

아니면 원래 여러 원료로 '와인'을 빚어내는 건지는 모르겠다.

마우이 블랑. 하와이의 커다란 네 개 섬 중 하나가 마우이섬 아닌가?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거기에서 무려

파인애플을 원료로 하여 빚어낸 와인이라고 한다. 카라멜 색깔의 파인애플 와인이라 라벨에는 써져있지만

글쎄, 카라멜 색깔이라기보다는 약간 형광빛 느낌마저 도는 누런빛이라고 하는 게 맞을 거 같다. 노란색

형광펜 액상을 물에 풀어넣고서 약간 탁하게 하면 저런 색이 나오려나.

9.99달러짜리니까 꽤나 저렴한 와인인 거다. 물론 국내에 들어온 와인들은 대개 현지에서의 가격보다 네다섯배

정도는 우습게 뛰어오르니까, 만약 이 와인이 국내에서 팔리고 있다면 한 50달러 정도에 맞춰져 있으려나. 뒷면

라벨엔 'soft, dry, fruity'한 와인이라고 적혀 있는데 사실 맛은 그다지 내 취향은 아니었다. 이걸 대체 화이트

와인이라 해야할지 레드와인이라 해야할지도 잘 모르겠지만 대략 색깔이 붉은색보다는 백색에 가까우니까

화이트 와인이라 치고, 부드럽고 드라이하다기보다는 맛이 시큼하고 텁텁했다. 딱, 파인애플 맛.

와인이라기엔 좀 많이 예외적인 맛과 향을 가진, 차라리 레드와인과 오렌지주스를 섞은 '샹그리아'처럼

이름을 달리 붙이는 게 나을 법한 '마실거리'였다.




어딘가와의 송년회 다음다음날, 그날 입었던 옷 주머니 안에서 소주잔과 종이쪼가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저번의 중국산 와인과는 달리 또렷한 맨정신으로 주머니에 슬쩍 넣었었는데, 어찌저찌 하다보니까

며칠 지나서야 주머니 안에서 꺼내놓게 된 거다. 왜 들고 왔는지는, 뭐, 그냥 재밌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그 소주잔과 종이쪼가리는 바로, 이효리와 함께 술을 마시기 위한 준비물. '효리주'를 불러내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인 거다. 소주병 뒤엣 라벨에 축축한 물수건을 대고 적당히 불린 후에 효리가 웃고 있는 상반신을 정교하게

오려내야 한다. 가능한 효리의 모습이 최대한 들어가서 소주잔 바닥사이즈에 꽉 차도록, 그리고 효리의 저

나부끼는 머릿결 웨이브 한올한올이 잘리지 않고 생생하도록.

(위 포스터 파일은 '고양이처럼'을 만드는 회사 홈페이지에서 퍼왔음을 알리며, 문제 발생시 자진삭제하죠 모)

참고로 효리 사진이 있는 소주 라벨지는 위의 '고양이처럼'의 뒷켠을 보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 완성품. 극도로 숙련된 손놀림으로 글자 세 개 역시 절묘하게 효리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흔들" "더".

유리잔 바닥 아래에 붙어 환히 웃어주고 있는 효리. 비록 나와 그대가 소주잔 바닥의 두꺼운 유리벽을 격하고는

있으나, 그대가 권하는 술 한잔 내 어찌 마다하리요. 뭐, 그런 효과가 있어 따라주는 족족 술을 원샷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이게 바로 "효리주"랜다.

책상에 앉아 다시 효리주를 재연해보면서 시험삼아 다시 일순배를 해 보았다. 효리가 흔들, 더~, 흔들, 더~ 를

외치며 저 너머에서 머리칼을 나부끼며 웃고 있다. 뭐, 맨정신으로도 참 흐뭇해지는 술잔인 건 틀림없다.

# 응용편. 사실 굳이 '효리'여야 할 이유, '효리주'라 불려야 할 이유는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연예인이던 일반인이던 군인이던, 일단 사진만 구할 수 있으면 된다. 소주잔 아랫바닥의 지름은 실측 결과

3.4mm, 그 마법의 원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얼굴이면 된다. 혹은, 얼굴이 아니라 특정 신체 부위도 가능할 법

하지만 나는 도무지 순진해서 더이상은 모르겠다.

술에 엔간히 쩔었을 때의 시야는 이렇지 않을까. 앞에 있는 게 효리인지 사람인지 술잔인지도 구분이 안 되고,

흔들흔들, 더더, 이런 식의 추임새만 귀에 들어오는 타이밍. 효리주도 좋지만 술은 적당히 기분좋게~*





(서울=땡박뉴스) 이번 "건국60년 대한민국 봉헌을 위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이명朴統이 직접 산타 복장을 하고

5인조 그룹을 결성, 흥겨운 캐롤에 맞추어 춤판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언제나

궁민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눈물을 닦아주려고 노력하는 이명박정부는 최근 들어 말바꾸기개그와 호통개그가

더이상 통하지 않는 상황에 처했다고 판단하여 국회에선 슬랩스틱개그를 유도하고 청와대에선 막춤개그를

선도하기로 결정했다.

본보가 발굴한 당시 영상을 보면 그 사지의 팔랑거림이 일견 경망스럽기 이를 데 없어 마치 사람잡는 선무당을

방불케 하나, 보면 볼수록 보는 사람의 심박수를 제압하는 묘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전언에 따르면 이명朴統은

춤사위를 펼친 후 격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대자연에 굴하지 않고 삽을 높이 치켜올린 태산같은 기개, 그리고

대다수 사람이 뭐라하건 자신의 길로 일로매진하는 신화적인 돌파력을 형상화했다"고 자평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국이교도연합회 알함브라 대변인은 "이명朴統은 하루라도 빨리 그의 타고난 神氣와 화해하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한편 이명朴統의 총애를 받는 강만수 기획재정부장관은 똥아일보와의 구원을 풀고자 오보 개그를 연마중이라고

한다.




*                                       *                                       *

작년에 올렸던 거지만, 이 분이 국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선별적 재활용밖에 없다고 판단되어

다시 한번 올려본다. 그가 해온 일 중 가장 무해한 일이 아닌가 싶어서, 물론 사람에 따라 약간의 메스꺼움과

분노를 동반한 구토증을 유발할지도 모르겠다.

어제 배철수가 그랬던가, 비오면 비온다고, 추우면 춥다고, 어떤 핑계든 대고 찾는 게 술이라고.

그렇게 비온다고, 눈온다고, 밤이라고, 춥다고 찾는 게 또 하나 있으니 음악이라고 했다. 그래서,

음악과 술은 언제 어느때고 내키면 꺼내들 수 있는 창과 방패인 듯 하다.


부드러운 음악으로 실드치고 톡 쏘는 술로 찌르기 들어가고.


그렇게 싸우다 보니 저녁밥으로 술을 마셔버렸다. 아 무슨 술꾼도 아니고.

(그리고 지금은 공부가주 마시고 야근중..)




에스프레소를 좋아하지만 가끔은 마끼아또같은 달콤한 게 땡길 때가 있다.


독한 술을 좋아하지만 또 가끔은, 술 같지도 않은 달콤한 리큐어가 땡길 때도 있다. 


한잔 한잔 홀짝대다 보면 뭔가 그럴듯한 아이스 피커와 커다란 아이스덩어리가 갖고 싶어지고,

달콤하고 고소한 맛에서 얼추 느끼함이 분별될 즈음 병이 비워지곤 한다.


집에서 마실 때의 원칙은 주종을 하나로만. 병이 비면 술도 그만인 거다.



흔히 강화와인이라 부르는 이것, 보통 10도를 오르내리는 와인보다는 훨씬 높은 도수의 fortified wine이다. 무려 20도.

포르투갈에서 처음 만들어진 강화와인은, 배를 통해 와인을 수출/수입할 때 중간에 상하는 걸 막기 위해서 일부러

발효 중인 와인에 브랜디를 섞어버리면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진짜인지는 모르겠다.)


보통 와인보다도 향은 좀더 끈적하면서도 강렬하게 달콤하고, 맛 역시 레드와인을 응축시킨 건가 싶을 만큼

진하고 사치스럽도록 화려하다. 대개의 레드와인이 가진 달콤함이나 매콤함, 쌉쌀함이나 새콤함이란 게

세필로 언뜻언뜻 그어진 가느다란 선에 비긴다면, 강화와인의 맛이란 그 선들이 모조리 bold처리된 느낌이랄까.

특히나 단 맛이 많이 강화되어서 대체로 이 술은 식후주로 많이 쓰인다고 한다, 일종의 디저트 삼아. 화려함이 지나쳐
 
그 미묘함과 섬세함이 다소 죽어버린다 느낄 때에는 차갑게 해서 마시는 것도 한 방법이다.


20도의 도수란 것도 매력적이다. 한잔 가득 따라 놓으면 잠들기 전 몇 시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정도랄까.

그렇지만 보통 강화와인을 찾는 날의 마음가짐이란, 상콤하고 발랄한 '양가집 규수'같은 와인을 마다하되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헤롱대는 눈빛의 '날잡아잡수' 위스키나 꼬냑도 피하고 싶은 날이어서 한 잔으로 끝나기가 쉽지 않다.

고혹적인 자태로 가끔, 잊지 않을 만큼의 방심한 눈빛을 쏘아주시는 달콤한 님과 만나고 싶을 때 마시게 되는 술이라서,

한 잔이 또 한 잔을 부르고 두 잔이 세 잔이 되고 나면 하룻밤이 훌떡 지나버리기 일쑤.








알제리는 회색빛 뽀얗고 희멀건한 색감 만큼이나 무색무취해 보이는 동네였지만, 사실 알고 보면 사람사는 곳에 다

노는 곳도 있는 건 인지상정. 시내에 위치한 호텔 지하나 인접한 곳에는 술집도 있고, 다소 진하게 놀 수 있는 나이트도

있다고 한다. 사실 묵었던 호텔 지하에 있는 나이트가 정말 물이 좋다느니 그런 이야기는 들었는데, 못 가봤다.


대신 우리가 현지에서 채용했던 Amir의 소개로 도착한 곳은, 그의 페이버릿, 그래도 알제리 수도 알제에서 가장

핫(!)한 공간 중의 하나라고 했다. 입구에서부터 벌써 번쩍번쩍한 장식품들이 쫙 늘어서 있고, 떡대가 딱 벌어진

아저씨가 우리를 맞았다.


카메라는 안 된댄다. 안에서 촬영도 금지되어 있고, 혹시 찍다가 걸리면 쫓겨난다고 엄포를 잔뜩 주는 떡대아저씨.

안 찍을 테니 카메라는 들고 가겠다, 협상을 시작했다. 만의 하나 한장이라도 건지려는 마음도 있었고, 맡아둔단

말이 도무지 신뢰가 안 가는 바람에 배터리를 몽창 빼들고 손위에 올려놓아 보여주었다. 


카메라는 들고 들어가라는 허락이 겨우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사진은 안된다고 몇번이나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대체 왜? 아미르에게 물었더니 아마 알제리 같은 외견상 이슬람 국가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술을 마시고 공연을

감상하는 술집이 있다는 걸 외부에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일 거라 했다. 유튜브니 블로그니 워낙 정보통신이

발달한 탓에, 이른바 '국가 이미지'가 손상되는 걸 바라지 않을 거고, 가게 입장에서는 또 국가로부터 어떤

피해를 입을지 두려울 테니까. 그제서야 좀 납득이 갔다.

그래도 기어코 찍어버린 한 장. 사막에 세워두고 생활했던 천막같은 내부 인테리어도 특이했고, 앞쪽에서 수피 댄스니

마그레브 지역 전통음악이니 하는 공연을 하는 가운데 술과 푸짐하고도 맛있는 안주를 즐길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았다.

맥주, 위스키, 보드카, 럼, 꼬냑에 와인까지 없는 주종이 없었고 양갈비 같은 알제리 전통음식을 먹어본 중 가장

맛있게 나왔으며, 밤이 깊어질수록 손님들이 그득그득 들이찼다. 금발로 염색한 알제리 아가씨하며, 귀걸이를 하고

피어싱까지 한 알제리 청년들. 그리고 드문드문 섞여앉은 외국인들까지.


다소 음침한 느낌의 조명아래 뿌연 담배연기가 흘러다니고 있었다. 킁킁, 냄새를 맡으니 사과향 물담배다.

시샤, 라고도 불리는 물담배는 터키, 이집트에 여행다닐 때 맛을 들여서 이후 여행의 추억을 떠올릴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아이템이었는데, 국내에선 사실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내고 말았던 터다. 이집트에선 한 대에 천원도

채 안들이고 했는데 국내에선 거의 만원가까이 줘야 가능하니.


한번도 시샤를 태워본 적 없으시다는 전무님의 마음을 움직여, 사이좋게 사과향 시샤 한대를 나눠 빨았다.

부드러우면서도 뭔가 짙은 느낌의 시샤 연기. 게다가 촉촉하고 달콤한 사과 향기가 싱싱했다.

나오는 길에 발견한 거대한 물담배 기구. 뱀처럼 돌돌 말린 저 파이프를 통해 물담배 연기를 빨았으면 뭔가 더욱

연기가 순하고 맛깔나지 않았을까. 다시한번 고심...물담배 기구를 세트로 사가야 해 말아야 해?

다음에 알제리 갈 일있으면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혹 다른 분들 알제에 가시면 한번 추천해 드리려고 스캔해서 올렸다.

(전혀 그 쪽과의 커넥션은 없음을 미리 알려드리는 바임다.ㅎㅎ)


중동 쪽 사업 아이템을 찾고 있다면 이 사진을 주목해야 할 거 같다. 

이 뜨거운 나라들이 어쩌자고 물탱크는 건물 옥상에 저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내놓고 있다. 사우디에서나 카타르도

마찬가지, 그래서 일반집은 물론이고 오성급 특급호텔에서도 차가운 물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아무리 차가운 쪽으로 손잡이를 돌려놓아도 나오는 물은 뜨겁길래 혹시나 하고 반대쪽으로 돌리면 약간 과장해서 

증발직전의 끓는물이 나왔었다. 그게 다 저렇게 직사광선에 노출된 물탱크 때문이다. 최소한 저기에 차폐, 단열을

위한 커버를 씌우는 간단한 시설 만으로도 이 곳의 사람들에게 찬물 세례를 가능케 해주리란 생각.

비자 때문에 예상치 못하게 공항에서 너무 지체되고 말았다. 어느덧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밝히는 네온사인중에

문득 눈에 가는 게 있다. 저건 분명 술집에 오라고 달콤하게 꾀는 네온사인. 금주령이 공식적으로 너무너무 엄격히

지켜지고 있다는 사우디, 어쨌건 술집 간판을 발견치는 못했던 카타르, 그 어디서도 술을 맛보지 못했던 터에 저런

술집간판이 눈에 띄는 동네에 온 것만으로도 뭔가 조금은 더 낯익은 동네에 온 반가운 느낌이었다.

쿠웨이트 Courtyard Marriot 호텔. 이미 많이 어두워진 상황에서, 호텔정문 앞 현관지붕이 마치 인디아나존스에서

성배찾는 편에 나왔던 투명한 다리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불빛들이 많이 반사되면서 반짝거리고, 그 투명한

지붕 뒷켠에서 비치는 불빛들이 섞여들면서 꽤 화려했는데, 막상 사진에는 담기지 않았다.


이곳의 호텔 역시 들어서면서 탐지대와 금속탐지기를 각각 사람과 짐들이 통과해야 했지만, 그렇게 깐깐하게 굴진

않았던 거 같았다. 사우디나 카타르 호텔에 들어설 때마다 가방을 열어 물건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받았던 일행 중

한 분이 여기선 아무 문제없이 통과했던 것만 봐도 그랬고, 이전과는 달리 위압적이지 않은 자그마한 탐지기를

첫눈에 띄지 않도록 구석에 밀어넣어둔 느낌이 들었던 것도 그랬다.

저녁 먹으러 간 곳에서 마주친 고양이. 그 곳이 유별난 곳이었는지, 아님 쿠웨이트가 대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고양이들이 사방에서 어슬렁대며 쏘다니고 있었다. 이 건방지고 사랑스런 것들.

호텔 방안에서 발견한 쿠웨이트식 나침반. 저 화살표가 친절히 메카가 있는 방향, 무슬림들이 기도를 해야 하는

방향을 일러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좀 이해가 안 되기도 하는 게, 다른 종교들은 보통 신은 어디에나 편재한다고

가르치면서 아무데나 대고 기도를 한다. 물론 대개 신을 형상화한 십자가던 조각상이던 그런 물체를 앞에 두고

기도를 하게 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런 기도의 대상을 정형화하는 것을 단연코 거부하는 이슬람교가 막상 기도

방향에 있어서는 저렇게 불편하고 까탈스러워 보이는 기준을 고집하는 건 왜일까.


그런 면에서 보면 저 '나침반'도 다소간 무슬림들의 고민이 녹아있는 건지도 모른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

메카가 있는 그곳을 나타내는 건 그냥 네모난 상자 모양, 혹은 단순한 건물 모양일 뿐이다. 특별히 메카나

기도의 방향을 나타내는 상징이 발달, 아니 발생하지도 못한 이슬람교의 처지에서 보면 저런 식으로 특별한

의미가 담기지 않은 기호로 메카를 표시하는 게 당연할지도.

호텔 창밖으로 내다보인 쿠웨이트 시내 전경. 내가 중학교 때던가 이라크의 점령과 뒤이은 걸프전을 치러낸 이곳은

덕분에 호텔이 흔치 않고 높은 건물 찾기가 쉽지 않은 곳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호텔 숙박비도 상대적으로 좀더

비싼 편이었다. 건물을 지어올려도 언제 또 이라크가 공격해올지 모른다는 학습된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런 불확실한 부동산 투자보다 다른 분야의 투자처를 찾았다는 얘기다. 그렇게 찾은 다른 투자처가 바로 두바이.

두바이의 건설붐을 뒷받침한 총알은 실제로 쿠웨이트의 투자자들로부터 나온 것들이라고 한다.

사진과는 그닥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세상에서 가장 비싼 돈은 뭘까. 달러, 엔, 유로, 파운드? 몰랐는데 쿠웨이트

디나르(DINAR)화가 가장 비싼 돈이다. 1쿠웨이트 디나르는 자그마치 5,416.32원이다.(2008.11.27 현재)

1쿠웨이트 디나르는 또 3.66739달러, 달러가 아무리 요새 갈수록 힘이 빠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어제오늘

이야기도 아니고, 새삼스런 것도 아닌 오래전부터 그랬던 거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쿠웨이트 디나르화.

미국이 중동에서 일으킨 전쟁들의 가장 큰 전비부담도 직간접적으로 쿠웨이트가 가장 크게 짊어졌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정부 재정은 건전하기 짝이 없댄다. 갱장히 돈이 많은 나라다.

상담회 진행을 하며 총총거리고 다니다 몇번씩 타는 엘레베이터가 그때마다 재미있는 거다. 따로 층수가 정해진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고 싶은 층 번호를 저 전화기 다이얼같은 걸 눌러서 입력을 하는 식이다.

그러면 A부터 D까지 이름이 붙어있는 엘리베이터 중 하나의 이름이 딱 뜨면서 그쪽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층수가 적힌 번호를 누르느냐, 아님 층수 자체를 본인이 입력하느냐의 사소한 차이랄 수도 있겠지만

왠지 꽤나 새롭고 흥미롭게 보였다.

미처 방안을 어지를 시간조차 없이 짧았던 쿠웨이트에서의 체류시간. 단지 일박만 하고 밤비행기로 돌아가는

스케줄이어서 그랬는데, 다음에는 더 길게 올 수 있기를 바랬다. 기름값이 1리터에 60원(20센트)라는 이 기름진 땅.

순수쿠웨이트인은 100만명에 그치고 외국국적의 사람들이 200만이 넘는다는, 역시나 한국인으로서는 쉽게 상상키

힘든 상황이지만, 병원, 학교 등 대부분이 국영으로, 거의 무료나 다름없이 제공되는 유토피아같은 이미지의 땅.

이렇게 된 건, 쿠웨이트의 석유채굴 원가가 무지 낮기 때문도 한 몫했다고 한다. 대부분 육상에 위치한 유전이어서

석유채굴 원가가 배럴당 3불 정도밖에 안된다는 거다. 국제원유가가 백이삼십불에서 보합이라고 쳐도 대체 얼마나

수익률이 높은 장사를 하고 있는 건지.

밤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에 마주친 쿠웨이트 타워(Kuwait Tower), 총 3개의 탑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형물이라고

설명은 들었는데, 대체 왜 내 눈에는 저 조명이 이뿌게 비치는 탑 하나밖에 안 보이는 건지.

쿠웨이트를 나서는 공항에서 마주친 내가 보지 못한 쿠웨이트의 풍경들. 아...저런 곳이구나. 그렇지만 이곳에

두고 오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얼른 출장을 마치고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뭉싯뭉싯 커지기 시작한

터라 그다지 미련은 없었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아쉬움을 끊어냈다.

이런 옷을 입은 배나오고 전반적으로 뒤룩뒤룩한 아저씨들을 보는 것도 이제 다시 흔치 않은 일로 돌아간다.

실내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피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던 곳, 여성들의 눈만 보고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다고 느끼게

되는 곳-물론 사우디를 제한 나머지 나라들은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지만-, 꼭 출장이어서가 아니라 술을 마시기가

불가능에 가까운..살기 힘든 곳, 그런 곳을 벗어나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짧았다. 지구 자전의 도움을

받아, 10시간이 넘게 걸리던 서울-두바이 구간이 불과 8시간 45분이 소요되는 두바이-서울 구간으로 단축됐다.



[술잔#1] 조각만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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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한쪽 끝에 서면, 다른쪽 끝이 보일만큼 자그마한 섬에 가보고 싶다.
내가 가보았던 섬들은 모두 너무도 크고, 사람이 너무 많았다. 김한길이 이야기했던가, 북극곰은 다른 곰을 만나면 사랑에 빠지고야 만다고. 평생 한번 만날지조차 기약없는 만남이므로. 그렇게, 조각만한 땅뙈기에서, 술잔과 오른손의 인연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술잔#2] 그녀 앞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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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은 마주섬에서 시작된다. 설레이며 눈을 마주치고, 술잔과 오른손은 서로가 품고 있는 표정과 이야기를 알고 싶어하고. 여전히 스스로의 감정과 상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채 두손 떨구고 어설픈 사랑.



[술잔#3] 목소리 좀 들려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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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동하면 몸이 움직인다. 몸이 움직이면 마음이 간다.
입밖으로 소리내어 사랑을 말하는 순간 손가락은 술잔에 매료되고 말았다. 당신도 날 보고 있었나요..우선, 술잔 당신의 매끄럽고 후끈한 목소리를 좀 들려줄래요. 우리 목소리부터 익혀나가는 건 어떨지. 손길이 닿으면 갸냘프지만 분명한 술잔의 응답. 말꼬리를 땋기 시작했다.



[술잔#4] 살짝 접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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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술잔은 위험하지 않다고, 냄새와 향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손을 뻗어 만지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꿈이었던양 떠나버릴 것 같아..오른손은 술잔의 부피와 질감을 확인하기 시작하다. 이 세상에 있었구나, 조각만한 세상에서 병아리오줌만한 인연을 타고. 고마워서.



[술잔#5] 외전. 기어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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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은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오른 유리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니미럴 절라 높네.



[술잔#6] 니 이야기를 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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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가 되고, 나도 니가 될 수 있었던 소중한 기억들..하루가 하루를 지랄같이 소모시켜도 기꺼이 온몸으로 귀가 되어주는 술잔이 있었기에. 서로의 사용설명서를 꼼꼼이 읽어내리며, 조금씩 마카로니 치즈의 맛을 음미하기 시작하는 사람들. 몇번씩의 구역질과 거부감을 인내한 후에야.



[술잔#7] 어깨 빌려 사람人의 뜻을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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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휩쓸려 가라앉지 않으려면 댄스댄스댄스. 끊임없이 똑딱이며 빛바래가는 세상 속에서 오른손의 이정표는 술잔. 생기와 의욕을 말려버린채 기어코 삶의 뒷켠으로 내리눌러버리겠다는 시간을 비웃으며 어깨도 걸어보고. 가벼운 스텝으로 하루하루 생을 더해갈 수 있다면. 하루치 삶의 의미를 아침마다 떠올릴 수 있다면.



[술잔#8] 손잡고 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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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다 힘들면 쉬었다 가기도 하고, 손잡고 가기도 하고.
지겨워서, 힘들어서, 살다가 지쳐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손내밀어 이끌어주기도 하는. 어차피 시작해 버린 인생, 최종 목표는 트루 러브라 외치는 술잔과 오른손. 그 치기어린 말과 행동은 한때..아름답다.



[술잔#9] 기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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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기. 허물어지듯 무너지더라도, 두팔가득 받아줄 술잔이 있다면 나중나중에 다시 일으켜세워볼 요량도 생기겠지. 세상이 무거워졌다고 느낄 때 대신 하늘을 빤히 노려봐주는 노랑색눈깔의 술잔.



[술잔#10] 좌우명은 올인(al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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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지 못하겠음 뛰어든다. 이리저리 재봐야 답도 안보이고 머리만 아플터. 맷돌에 장렬히 뛰어든 콩처럼 곤죽이 된채 설설 밀려나올지라도, 올인이다. 눈에 보이고 말이 섞이고 심장이 따라간다면. 오른손과 술잔의 이빨과 이빨이 부딪쳐 불똥이 튄다해도, 좌우명은 올인.



[술잔#11] 완전한 밀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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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래길에 도착. 정점에 도달했으니 식도를 타고 내려갈 길만 남은 건가. 혹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속으로..? 완급의 조절, 호흡의 조절. 산낙지마냥 술잔에 엉겨붙은 오른손은 그저 좋댄다. 일생동안 흔치않을 황홀한 충만감. 손을 위한 술잔. 술잔을 위한 손.



[술잔#12] ..어디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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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 충실한 게 술잔이라지만, 납득할 수 없는 오른손.
어디갔을까, 아무런 냄새도 풍기지 않고 순식간에 말라붙은 술잔.



[술잔#13] 넌 왜..비어 버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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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에 비견될만한.
넌 왜 비어버렸니.
털썩, 절망한채 바닥에 무너져내리는 오른손.



[술잔#14] 술은 술이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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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만한 인연이 사그라들고, 잘록한 곡선과 짙은 향을 닮은 술잔을 다시금 어디선가 들어올리겠지만. 지나간 시간과 흘러간 이야기들은 사진첩에 봉인된 채 고이 '버려진다'. 찍히는 순간 죽어버리는 밴댕이같은 사진, 그리고 그속에 담긴 기억들처럼. 달그림자가 비치듯 그대의 마음에 잠시 비쳤던 것 뿐이니..슬퍼할 것도, 그리워할 것도 없다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어디선가 오른손의 이야기와 표정을 떠올려 준다면..

술은 눈코입으로 마시고 마음으로 마신다. 그리고 무엇보다...술과 술 사이, 그 비워진 잔 또한 마셔야 한다.

#1.

사무실에서 일하던 중 문득 그녀의 전화를 받고 끊을 때, 그녀는 말한다. "공부 잘해~". 집에서 회사일을 말할 때

나도 문득 말한다. "학교에서~".

아직도 어색한 정장차림과,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 출근길, 그리고 여전히 번거롭기만 한 아침마다의 의례.

넥타이와 셔츠의 매치. 대학생이자 인턴인 남자아이 하나와 대졸 회사원이자 외부적으론 대리인 남자아이 하나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하는 그런 묘한 분위기가 이따금씩 피어올랐다 사라진다.


#2.

적나라한 금전적 성과로 환산되지 않는 업무의 특성때문인지 이곳 사람들은 확실히 스트레스가 적고, 덜

늙어보인다. 들어오기 전도 그렇지만 들어오고 나서도 줄기차게 들었던 말, 이곳 사람들은 다들 너무 좋다고.

첨에는 정말 여긴 사람들의 인성을 많이 보고 뽑나보다, 할 정도로(글탐 내가 뽑힌 게 100% 시스템 에러겠지만)

사람들이 하나하나, 다들 좋아 보였다. 물론 지금도 좋아 보인다.


다만 그러한 '사람 좋아보임' 이면에는, 굳이 다른 사람에게 까칠해 보이기 싫고 뒤로 싫은 말 듣기 싫다는

암묵적인 계산이 깔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깊게 개입되지 않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허허 웃고 치우는

거다. 그럴수록 뒤로만 말이 무성해지지 않을까. 선배들이 최소 3개월은 나죽었다 생각하고 이미지관리 잘 하고

앞으로도 이미지로 '쇼부'칠 거라는 충고를 던지는 건 괜한 게 아니다. 굳이 부딪히지 않고, 마침 크게 부딪혀야

할 일도 없고 뚜렷이 숫자로 된 성과로 계측되는 집단도 아니니, 좋은 소리 듣고 좋게좋게 가는 게 제일 중요해

지는 거 같다. 아님 술자리에서, 어디에서든 질겅질겅 씹히면서도 정작 본인은 모르기 십상이지 싶다.


누구였더라, 사석에서 남의 뒷담화만 안 해도 제대로 회사생활하는 거라는 말씀은 갈수록 묵직하게 느껴진다.


#3.

내가 외국계 기업을 가고 싶어했던 건, 그곳에는 뭐랄까, 문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술을 먹어야

빨리 친해진다거나 매일같이 이어지는 술자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거 말고.

여기도 많이 먹는 편은 아니며, 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이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으레 술을

깔아놓고 몇차씩 옮기며 마시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을 못찾고 있는 것 같다.


단적으로 합격자 발표 후 가족들을 불러 식사를 함께 하는 IBM의 '가족적'인 마인드는, 사실 한국 기업들에선

찾아보기 힘들 거다. 적어도 협회에선 확실히 그런 거 같고. 그래서 한국 대기업식의 빡빡한 조직문화도 아닌

것이, (다소 이상화된) 외국계기업식의 개인화된, 동시에 다른 방식으로 묶여있는 조직문화도 아닌 것이

어정쩡하게 조직과 개인을 모두 풀어버린 지금의 그림이 아닌가 싶다. 그닥 뚜렷한 묶임이 없고 각자 적당히

친한 척하며 살짝살짝 그림자만 스칠 뿐인 피.상.적.이기 쉬운 관계. 그렇게 두루두루 친하고 둥글둥글 모나지

않은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곳이 아닐까. 하고 다소 기우 중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어떻게, 어떤 관계를 누구와

만들어나가야 하는 걸까 생각 중이다.

새벽에 눈을 뜨니 집앞 놀이터였다. 얼굴을 모랫바닥에 반쯤 파묻고선, 입안에선 알콜내음 물씬한 모래가 잔뜩

씹혔다. 팔다리를 어떻게 휘청이며 일어섰는지 기억이 없다. 하늘색 니트는 군데군데 얼룩진 갈색으로

변해있었고 바지 역시 토사물이 떡처럼 엉겨있었다. 다시는 엉망으로 술 먹지 않겠다는 약속, 깨뜨릴 때마다 뭔가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엄마는 미친놈, 이랬다.


해가 중천을 지나서야 다시 집에서 같은 상황 반복. 뱃속은 돌로 변한 것처럼 딱딱하게 죽어있었고, 숨결엔

알콜이 실려나왔다. 물 한모금에도 바로 변기를 부여잡아야 했고 누가 옆에서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고 있어서

약국으로 향했다. 몇 걸음 걷다가 지쳐서 아파트 계단에 앉아 쉬는데 신물이 넘어왔다. 화단에 숨어들어가

숨넘어가듯 구토. 조금만 힘을 더주면 목으로 내장이 넘쳐 나올 것 같아서 참았지만, 이미 노란색 위액이

질펀하게 낙엽을 부식시키고 있었다. 치아는 말랑해지고, 나는 죽을 듯한 상쾌함을 느꼈다.


저녁에야 겨우 라면 하나 먹고 트림이 나왔다. 점심 때 미친놈 미친놈 이러면서 라면을 끓여줬던 엄마는, 그치만

물 400ml에 북어랑 파랑 다시마까지 넣어줬었다. 덕분에 국물이 바싹 쫄아들어 난 기갈스럽게 숟가락으로 냄비

바닥만 긁다말고 변기로 향했었고. 장이 다시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지렁이나 플라나리아가 앞으로 향하기 위해

꿈틀대는 그런 연동운동, 내 장에서도 재개됐다.


머리를 쪼개 두 개의 머리를 갖게 된 플라나리아처럼, 감정도 때로 두 개로 쪼개지는 시험에 들기도 하고, 또 때론

두 개 다 끈질기게 살아남기도 한다. 그래서 한 장면에선 두 사랑이 겹치더라도, 다음 장면은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선택하려는 것이어야 한다. 장이야 연동운동을 제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어딘가로 가고

그러지야 않겠지만, 장이 아닌 바에야 거칠거칠한 모랫바닥이라 해도 아무리 오래 걸린다 해도 1mm라도

움직이는 기색이 있어야 할 거 같은데.


보낸 건 난데, 돌아오길 바라는 것도 나다. 악역을 맡고 싶은 사람은 없어서, 그래서 어디도 향하고 있지 않은

당신의 멘트를 뺏어 내가 대신했지만, 나 역시 악역은 싫었다. 정답이었는지 모르겠다.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는 약속을 들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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