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원인#1.
점심시간, 47층에서 탄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다 고장나 멈춰서버렸다. 왠지 오늘 출근하기가 싫었었다.
화장실을 들를까 하다가 남자라서 참기로 했었다.
사고 경과#1.
근 스무명이 바글대며 탄 엘리베이터가 크게 한번 출렁이곤 조금, 추락한다! 외칠 맘이 슬금 들려다가 말았다.
멈춰버렸다. 다행히도 전부 같은 회사 사람들, 예기치 못한 '조난' 앞에서 얼결에 업되고 말았다.
대응 방안#1.
우리 이거 돌아가며 숨쉬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티비에서 보니까 엘리베이터 안에 공기가 부족해진단 건 뻥이래요.
그치만 여긴 사람이 꽉 차 있어서 아무래도 공기도 안 좋아지고 이산화탄소 농도도 높아질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 머리가 아프네요. 돌아가며 숨쉬어 볼까요.
대응 방안#2.
다같이 살짝 발을 구르면 1층까지 내리닫지 않을까요.
그러다가 훅 가지 않을까요. 티비에서 이럴 땐 어떻게 탈출하라던가요.
그래도 40층쯤에서 멈췄으면 더 무서웠을 텐데, 여긴 떨어져도 안 죽겠는데요.
아무리 2층에서 멈췄다곤 해도 지하3층이 바닥이니 죽기엔 차고 넘치는 높이라구요.
사고 경과#2.
점심 약속을 취소하는 전화를 제각기 걸기 시작했다. 조그만 금속상자 안에서 윙윙대며 튀어다니는 말소리들,
누가 누구와 통화하는지 모를 지경까지 끓어올랐다가 '짬밥'의 역순으로 하나둘 입을 닫았다.
사고 원인#2.
그러고 보니 엊그제 꿈이 굉장히 흉흉했어요. 내용은 이야기하기 그렇지만..
어 그래요? 엘리베이터는 안 나왔었죠? 아님 김전일이라거나 명탐정 코난이 나왔다거나.
저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꿈을 꿨었어요.
로또는 사셨나요? 꿈에 번호가 안 보이면 그냥 맘가는 번호로 찍음 된다던데.
네가티브 씽킹#1.
왜 하필이면 점심시간에 고장나가지고, 밥도 못 먹게 말이에요.
출근시간이나 업무 중에 고장났으면 좋았을 텐데.
사고 원인#3.
지금 복구중이며 씨씨티비로 지켜보고 있으니 안심하세요, 란 관리직원의 인터폰에 음모론 급부상.
사람들을 삼십분째 가둬놓고 어떻게 반응하나 보려는 건 아닐까요.
이거 고치는 사람들 밥먹고 와서 고쳐줄 생각인 건 아닐까요.
5분마다 반복되는 멘트가 꼭같은데 녹음된 거 틀어놓은 건 아닐까요. 씨씨티비 부실까요.
네가티브 씽킹#2.
왜이리 사람이 꽉 차있을 때 고장이 난 걸까요. 다리 아픈데 앉을 수도 없잖아.
남녀 두 명이 이렇게 오래 갇혀 있었으면 커플 하나가 탄생하는 기적이 벌어졌을 텐데, 너무 많네요.
사고 경과#3.
차장님은 '마눌'에게 문자를 보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셨고, 유력하게 예상된 '고맙다'는 답문.
보험을 여러개 들어두었다는 부장님은 휴대폰으로 묵묵히 바둑을 두기 시작하셨다.
포지티브 씽킹#1.
그래도 퇴근 시간이 아닌 게 다행이네요. 퇴근시간 늦어지는 게 세상에서 제일 짜증나.
사고 경과#4.
언제부턴가 전화기 안테나는 꼴딱꼴딱 죽었다 살았다 하고 있었다. 이쪽의 말을 저쪽으로 옮기지 못하는
전화기에 대고 '안들리죠' 이러고 끊는 차장님의 말투에 어찌나 비애가 짙게 묻어나던지.
사고 경과#5.
거의 삼십오분동안 갇혀있다가 탈출에 성공했다. 1층 문과 아귀가 맞지 않아 무대에서 내려서듯 엘리베이터
밖으로 뛰어내려섰다. 점심시간은 반토막났고, 점심 대신 색소폰 섭을 반토막내고서는 맘이 몹시 상해버렸다.
오늘의 교훈#1.
화장실 참으면 병 생긴댔는데, 옛말 그른 거 하나 없다.
엘리베이터에 조난당하면 트위터가 하고 싶어진다. 아놔 아이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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