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섬 남쪽에 닻을 내린 배에서 맥주와 버니니를 마시던 우리는, 적당한 취기에 따끈한 햇살이 뒤를 밀어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요트의 본넷 위로 기어올라가 바다를 향해 뛰어내리고 말았다. 어찌나 멋지던지.

 

아침 댓바람부터 코즈웨이베이 앞에 집결하기로 했다. 프라이빗 요트들은 여기에 정박할 수 있다고 했던가.

 

 

사람들이 하나둘씩 요트 안에 탑승하기 시작하고, 선장님은 작대기로 항구를 밀어내며 배를 바다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스타페리가 진부하게 왕복할 뿐이던 바다에 횡으로 큰 궤적을 그리며 홍콩섬을 따라 요트가 달리기 시작.

 

도시를 벗어나 좀 초록초록한 공간들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지만, 여기도 고층빌딩이 불쑥불쑥 자라난 건

 

서울이나 비슷하구나 싶다. 뜬금없이 섬 한가운데서 버섯처럼 자라나서는 몇 채가 서로 얼굴을 맞댔다.

 

 

 

 

한참을 달리고 살짝 홍콩섬의 해안선을 따라 구부러졌다 싶었다. 제법 들고 나는 해안선이 재미있는 리듬감을 준다.

 

그리고 정박. 저 너머에는 제법 사이즈가 되어 보이는 88열차 코스가 섬위에 떡하니 얹혔고, 그 앞 바다에는 요트들이.

 

 

요트를 타고 즐길 수 있는 게 단순히 달리는 것 뿐만이 아니구나 싶었다. 한군데 머물며 둥싯둥싯 파도를 느끼고.

 

잔뜩 쟁여간 맥주니 버니니니 간단한 스낵들이니 먹고 마시고. 그러다가 간단한 쿠킹 코스도 함께 하고.

 

 

여차하면 바다로 뛰어들어서 수영도 하고, 조금 무리하면 이 아저씨처럼 해안선까지 다녀오기도 하고.

 

 

 

다들 그저 즐거운 어느 여름날의 한때. 요트를 본거지로 해서 사방에서 삼삼오오 모여서는 웃고 떠드는 그런 분위기.

 

그렇게 한량처럼 보내는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간다. 네댓시간을 유유자적하다가 어느새 코끝은 빨갛고 타고

 

바닷물에 젖었던 몸에는 소금 결정이 생기기 시작했을 무렵, 홍콩섬 남부의 어느 항구에 배를 대고 상륙 준비.

 

 

 

이렇게도 많은 요트가 정연하게 마치 주차장에 차를 대놓은 것처럼 반듯반듯 세워져있는 모습이라니.

 

여전히 요트 위에서 널부러진 채 망중한을 즐기던 동료 하나.

 

조그마한 배로 갈아타서 항구로 상륙을 해야 한다. 요트는 여기에 반듯하게 주차할 예정.

 

 

홍콩섬 상륙 직전. 이렇게 잔잔하고 아름다운 바다에 이날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햇살이라면 배위에서 살겠고만..

 

 

그리고 부두에 어느 잡동사니들이 쌓여있는 창고. 아마 제각기 쓰임이 있겠지만 전혀 과문한 바 잡동사니처럼 보일 뿐.

 

요트 위에 있을 때는 그래도 이렇게 위압적인 느낌은 아니었는데. 조그마한 항구와 그 앞의 조그마한 부품점을

 

오만하게 눈을 치뜨고 내려보는 거인같이 고층 아파트들이 어깨를 맞댔다.

 

 

이제 여기서 각자 편한대로 다시 호텔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근처에서 좀더 놀다가 돌아가기로 했다.

 

비슷한 행선을 가진 사람들끼리 택시를 하나씩 불러타고, 아닌 사람들은 조금 걷거나 근처의 바에서 낮술을 푸겠다며.

 

 

 

 

 

강화도 외포선착장에서 카페리를 타고, 게으른 갈매기들이 부리에 물리는 새우깡만 씹는 모습을 보며 들어선 석모도.

 

눈썹바위 아래 부처조각과 소위 '기돗발'이 잘 받는 3대 관음도량으로 유명한 보문사를 오랜만에 찾았다.

 

보문사로 올라서는 제법 가파른 산길에서도 꿋꿋이 하늘과 땅 사이에 수직으로 버티고 선 나무에 하트 무늬가 새겨져있다.

 

한여름내 햇볕을 그득 받고 시퍼렇게 멍들어버린 덩굴손들이 커다란 바위를 꽁꽁 움켜쥐고 있는 듯.

 

수능이 머지 않았다. 3대 관음도량인데다 영험하다는 소문이 퍼진 절이다보니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탑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선 부처들, 혹은 부처의 뒤를 이어 깨달음을 얻은 보살(보디사트바)들의 색색깔 뒤통수.

 

 

눈썹바위로 가는 길에 수백개 돌계단을 오르고, 역시 수백개의 연등 옆을 지났던 거 같다.

 

그리고 눈썹바위 전망대에서의 석모도 그리고 그 너머의 전경. 바다 위로 불쑥불쑥 솟은 송전탑들.

 

 

보문사를 등지고 내려와 허기를 달래려 복분자 막걸리 한 동이와 함께 감자전을 주문했다.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강원도 묵호항에서 울릉도로 가는 배편을 구하는 가장 쉬운 방법, 한 좌석만 챙기면 되는 싱글 여행자라면 언제고

 

그냥 인터넷을 통하거나 전화로 예매하면 내일이고 모레고 떠나는 배를 잡을 수 있는 것 같다. (http://www.daea.com/)

 

꼭 그렇지 않아도 사실 한 좌석 정도라면 그냥 여객선터미널에 가면 대충 그까이꺼 구할 수 있을지도.

 

아침 9시 배를 타기로 전화로 예약했는데, 티켓 창구가 8시부터 연다는 이야기에 아침을 챙겨먹으려 근처를 배회.

 

 

'아침식사 됩니다'란 간판을 따라 걷는 길에는 머리를 조심해야 하는 높이 1.7미터 짜리 터널을 지나고,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뚜껑 덮인 재래시장을 지날 즈음.

 

울릉도 떠나는 배를 아침저녁으로 보시면서도 여태 울릉도를 못 가보셨다는 아주머니가 생태찌개를 맛있게

 

끓여주시던 '향로식당'에서 든든히 아침을 먹고. 원래는 생선구이를 먹을까 했는데 세시간여 배를 타고 가려면

 

멀미를 조심해야 한다며 생태찌개를 권해주셨던 아주머니.

 

비행기 타는 만큼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배 역시 위험하기 때문일까. 주민번호와 비상연락처를 적는 승선표.

 

뭔 일이 생기면 '신원불상'의 사상자가 아니라 '홍길동(31세, 남)' 뭐 이정도로 식별은 가능하겠구나 싶다.

 

꾸역꾸역 배를 타는 사람들. 대개가 단체관광객들이었다. 전국에서 모인 아주머니들인지 사투리도 각양각색.

 

이상하게도 묵호에서 울릉도로 떠나는 배는 파도가 심한 편이라 한다. 나올 때는 잔잔한 편인데, 아무래도 조수 탓인 듯.

 

배를 타고 한시간이 지나기 전, 양손으로 봉지를 쥐고 배 바닥 곳곳에서 힘든 작업을 펼치다가 널부러진 어르신들.

 

(선창으로 나갈 수 없는 밀폐형 고속정이어서 배 안 가득한 냄새와 소리는..가히 지옥도의 한장면을 방불케했다.)

 

그리고 세시간 반. 시퍼런 물결이 넘실거리던 망망대해 저쪽에서부터 삽시간에 거대해지는 섬 하나. 꽤나 크다.

2012년 6월부터 강원도 묵호에서 울릉도로 들어가는 배는 도동항이 아니라 사동항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도동쪽의 번화한 상권을 형성한 상인분들의 반대가 없지 않다고는 하는데, 사동항은 도동항에 비기면-굳이 비기지 않아도-

 

완전한 허허벌판. 이제 항구가 본격적으로 건설되고 상권이 조성되면 또 금세 이런 모습은 사라지겠지만.

 

 

 

울릉도에 와서 가장 먼저 눈에 띄인 건 오징어가 매달려 있는 가로등.

 

아무 생각없이 섬을 시계방향으로 돌아볼까, 하고 무작정 한 삼십분 걷다가 그래도 기운 빵빵한 첫날인데

 

성인봉을 쉬엄쉬엄 오르는 게 낫겠다 싶어서 다시 뒤로 돌아 걷기 시작한 기점. 성인봉을 만만히 봤었던 거다.

 

그렇게 다시 사동항을 지나가는 길에, 아까의 배가 한껏 토해놓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대형버스와 봉고를 타고 떠나버린 한적한 풍경을 다시 한 컷.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한없이 걷고 싶은데 어디까지 얼마나 걸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는, 섬이 답이다.

 

바다로 둘러싸인 한뼘만한 땅덩이, 울릉도에서 2박 3일동안 정신나간 도보여행을 하고 싶을 때 추천하는 일정.

 

눈뜨면 걷고, 어두워지면 멈췄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건 삼일차, 남양에서 저동까지 움직이는 데까지만 한 번.

 

 

제주도 올레길이 조금은 편하고 아기자기한 코스라면, 울릉도 도보여행길은 좀더 거칠고 날것의 느낌.

 

대부분 성인봉 등반만 하고 마는 단체 등산객이거나 버스로 찍고 찍고 다니는 단체 여행객들만 찾는 곳이니만치

 

하루종일 걸어도 만나는 사람들은 손 꼽을 만큼인 곳. '둘레길'도 말만 둘레길이지 그냥 버려진 옛길이랄까.

 

 

미친 짓 한번 하고 싶을 때, 러닝-하이가 아닌 워킹-하이(Walking-high)를 맛보고 싶을 때 한번쯤,

 

내키는 대로 한없이 걷다가 바다가 나오면 발길을 틀면 그뿐이었다. 딱히 정해진 일정도 계획도 없었던 코스.

 

그렇게 3일동안 한걸음씩 꾹꾹 내딛었던 발걸음들을 잇고 나니 저런 길들이 그려졌다. 시속 4km의 세상.

 

 

 

ㅇ 1일차 : 사동항 - 성인봉(KBS중계소 코스) - 천부

 

 

(03:00 서울 출발, 05:30 추암 촛대바위 도착)

 

07:00 묵호여객선터미널 도착

 

07:00~08:00 아침식사

 

09:00 묵호항 출발 (by 씨플라워호)

 

12:30 사동항 도착

 

14:30 KBS중계소(성인봉 등산코스 출발지) 도착

 

17:00 성인봉 도착

 

18:30 나리분지 도착(성인봉 등산코스 도착지)

 

20:00 천부리 도착

 

20:00~21:00 저녁식사 (울릉도식 백반정식)

 

 

 

 

 

 

 

 

ㅇ 2일차 : 천부 - 현포 - 태하 - 둘레길2코스 - 구암 - 남양

 

 

10:00 숙소 출발

 

10:30~12:00 예림원(문자조각공원) 체류

 

13:00 현포 도착

 

13:00~14:00 점심식사 (울릉도식 백반정식)

 

15:00 태하항 도착

 

15:30~16:20 태하등대(모노레일) 체류

 

16:40 태하삼거리(울릉둘레길 2코스 시작점) 도착

 

18:30 구암 도착

 

19:00 남양 일몰전망대 도착

 

19:30~20:30 저녁식사 (약소숯불구이)

 

 

 

 

 

 

 

 

 

ㅇ 3일차 : 저동항 - 행남등대 -  도동항 - 독도전망대 - 사동항

 

 

10:00~10:30 아침식사 (따개비 칼국수)

 

10:40~11:20  저동항 도착 (by BUS)

 

12:00 소라계단 도착

 

12:30 행남등대 도착, 행남해안산책로 시작

 

14:00 도동항 도착 (행남해안산책로)

 

14:30 도동약수공원 도착

 

15:00 독도전망대 도착 (케이블카 왕복)

 

17:00 사동항 도착

 

17:30 사동항 출발 (by 씨플라워호)

 

21:00 묵호항 도착 

 

23:40 서울 도착

 

 

 

 

 

 

 

 

 

 

 

 

 

 

 

 

 

'맛있는 인생', 현실까지 넘쳐들어온 강릉의 로맨스.

 

영화 '맛있는 인생'에선 차를 타고 슬쩍, 그야말로 옆동네 가는 기분으로 강릉에서 주문진으로 옮겼다는 느낌이었는데,

 

실제로도 강릉에서 주문진 건너가는 건 그런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던 거다. 경포 앞바다를 떠나 길을 잠시 달리다간

 

어느새 다시 나타난 바다는 좀더 본격적으로 항구도 두어개 끼고, 아저씨들은 그물을 정리하고.

 

 

 

방파제의 두 팔 안에 조심스레 안겨있는 주문진항에서 둥실둥실 여유로운 배들, 그리고 그물을 정리하는 분들.

 

그리고 항구 코앞에 바다를 바라보며 주차된 자전거와 자동차, 수면에 기댄 채 출렁이는 배까지. 탈거리 셋이 모였다.

 

주문진에서 출발하는 크루즈호의 선착장. 크루즈라곤 하지만 글쎄, 그다지 호화스러워 보이진 않던데.

 

 

주문진항 근처의 수산시장을 돌다가 만난,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가오리 떼들.

 

골목골목 누비다가 만난 '성인나이트'의 숨겨진 간판, 그렇지만 입구도 숨겨진 거 같구 지금도 하는지는 미지수.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단단한 선언조의 문구가 눈을 확 잡았던, 마치 무슨 공산당 테제같은 느낌의 광고.

 

 

골목을 한꺼풀만 열고 들어가도 재미난 풍경들이 숨어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얼기설기 얹은 허름한 집 앞 자전거.

 

 

수산시장 골목마다 김을 펄펄 피워올리며 새빨갛게 익어가던 가뜩이나 빨간 대게들, 저 녀석들은 물구나무를 서있는 건가.

 

 

주문진항의 상징물 오징어는 왠지 울트라맨에서 자주 나오던 크라켄이던가, 거대괴물이랑 비슷하게 생긴 듯.

 

수산시장 입구에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아무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그들처럼 회는 먹고 가야겠다는 다짐만

 

갈수록 단단해지던 차에, 생선을 따로 사고 회를 따로 떠서 어디던 바다가 보이는 곳에 앉아 먹기로 결심.

 

광어랑, 청어였던가 제 이름으로 못 불리고 '잡어'로 통칭되는 생선들 몇 마리, 그리고 개불이랑 멍게까지.

 

그리고 주문진 앞바다. 드문드문 바닷가 깊숙하게 쳐들어간 바위 덩어리들은 이렇게 자그마한 금강산 코스프레중.

 

일만이천봉우리가 하나하나 살아나선 뾰족뾰족 하늘을 이었다.

 

 

바위들 위로 기어올라가 제법 뜨끈하게 달아오른 햇살 바라기 좀 해주고, 덥다 싶으면 아이스크림 하나 베어물고.

 

 

멀찍이 보이는 등대 아래춤에선 사람들이 낚싯대를 드리운 채 정지화면처럼 멈춰 있고. 움직이는 건 바람결에

 

살랑살랑 잔물결을 이어나가는 주문진 앞 바다뿐.

 

조금은 흐린 날씨탓에 하늘과 바다가 분간하지 어려워서 문득 망연해지는 시선을 붙잡아 주는 건, 문득문득

 

생각났다는 듯 날개를 펼치고 하늘과 바다를 가르며 날아가는 갈매기 한마리.

 

 

 

 

 

속초의 갯배. 온전히 사람의 팔힘으로, 아니 온몸의 힘을 실어 잡아당기는 쇠줄을 따라 꾸역꾸역 움직이는 사각형 배.

속초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청초호를 끼고 갯배선착장까지 걷는 길. 호수라고는 하지만 속초항 앞을 지나 바다로

나갈 수 있어서인지 가장자리를 따라 고깃배들이 일렬주차중.

서울역 광장에서 종종걸음치며 날개를 퇴화시키는데 힘쓰는 비둘기떼들마냥, 속초에선 갈매기들이 그런다.

청호대교 위를 따라 완만한 오르막길을 오르는 길. 빗발이 듬성듬성 내리는, 그렇다고 우산쓰기는 애매한 날씨.

대교의 고갯마루쯤에 오르면 바깥으로 툭툭 튀어나온 전망대 비스무레한 곳이 있다. 고개를 슬쩍 빼면 저만치 갯배가 떠다닌다.


다리 아래 아스팔트 바닥에서 생선 대가리를 토막치는 분도 보이고, 바싹 뭍에 붙여놓은 조각배도 보이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크게 보이는 갯배. 배라기엔 참 투박하고 모양새가 없어서, 그냥 커다란 네모 부표라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산책하는 속도랄까, 그래도 한걸음씩 단단히 힘주어 밟아가듯 확실히 전방진행중인 갯배들.


다리 아래, 생각지도 못한 곳에 이런 화사한 그림이 숨어있었다. 하트가 샤방샤방하게 날리는 복어커플.

이런 플래카드는 좀 없어도 좋을 거 같은데. 하긴 이런 방송의 힘이 없었다면 찾아오기도 쉽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이용요금은 성인 200원, 아이 200원, 자전거 200원, 손수레 200원. 갈 때 200원, 올 때 200원.


자전거 두 대가 왜 저렇게 묶여있나 했더니, 가을동화에서 그들이 탔던 자전거라고 한다. 그보다 더 흥미롭고 시선을

잡아당겼던 건 저 오징어 모양의 장승. 속초 시내 곳곳에 세워두면 나름 명물이 될 거 같은데.

갯배로 건너가는 구간은 굉장히 짧아서, 설설 걸어가는 속도의 갯배라곤 하지만 채 2-3분도 안 걸리는 거 같다.

그래도 이렇게 갈매기가 마구 날아다니는 엄연한 바다 위를 저렇게 간단한 뱃조각에 기대어, 아저씨가 끌어주는

쇠줄에만 의지해서 건넌다는 건 꽤나 독특한 체험이다. 속초의 이곳, 갯배선착장을 지나면서야 경험해볼 수 있는.

뱃손님이 다 내릴 때까지 저렇게 쇠줄을 바투 땡겨잡고는 배가 흔들리거나 풀려나지 않도록 고정하고 계신 아저씨.

 

속초시내에서 걸어다님직한 거리 내에 있는 볼거리들. 야트막한 스카이라인, 허름하고 한산한 거리는 걷기 좋은 듯.






한 장의 사진을 기억하며 찾았던 강릉 경포해수욕장. 해풍을 막는 야트막한 솔숲 너머로 깔끔한 흔들의자가,

그리고 그 너머로 탈색되어버린 듯한 누런 빛의 모래사장과 퍼러딩딩한 바다가 있었다.

바다에 도달하면 더 나아갈 곳이 없다 멈추게 되지만, 사실 조금만 몸을 틀면 될 일이다. 바다와 함께, 파도소리와

함께 발맞춰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무한하게 뻗어가는 거다.

모래사장엔 경사에 기대어 꽁꽁 얼어있는 잔설들이 아직 남아있었다. 여름철 뜨겁게 달궈졌던 누런 모래사장이

색이 바랜듯 창백해져버린지라 시퍼렇게 차가운 얼음눈들은 자연스레 보호색을 맞춰입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바다를 따라 앞서 걸어간 걸음걸이들. 발자욱들이 줄맞춰 정연히 늘어선 게 왠지 땅을 헤집어둔 공동묘지같다.

무언가 저 구덩이에 넣고 봉긋하게 흙을 쌓아올리면 파도가 와서 다 쓸어버릴 것 같은. 그런 세기말적 풍경.

바다를 따라 걷는 기분이 그랬다. 파티나 잔치가 끝난 뒤의 적막함이랄까, 50연발 폭죽이 숨쉴틈 없이 터지고 나서

텅 비어버린 채 모래사장에 나뒹구는 느낌. 겨울바다의 풍경들이 하얗게 재만 남아버린 가슴에 날아와 박혔댔다.

BGM은 서영은의 '겨울바다', 경포해수욕장에서 무작정 북쪽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뭐 뾰족한 일정이 있는 것도

가야 할 곳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그냥 저 위쪽 어딘가에 테라로사라는 까페가 있다는 이야기만 듣고

슬슬 걸어보기로 했던 참이었다. 바다를 따라 걷다가 불쑥 기습하는 파도에 발걸음이 뒤척거리기도 하고,

문득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발걸음이 파도에 씻겨내리기도 하는 길.

그러다 문득 발에 채인 유리병 하나. 와인병에 코르크 마개로 단단히 막힌 게, 안에는 돌돌 말린 종이까지 제대로

갖춰져 있는 게 한눈에도 파도에 실려온 메시지를 담고 있어 보였다. 뭐지, 일본에서 왔나. 아님 미국..?

그 자리에서 코르크마개를 따고 안의 종이두루마리를 꺼내 보았다. 약간 습기가 차 있긴 했지만 까끌한 종이의

질감이 그대로 남아있고, 테이프로 허리춤이 둘둘 감겨 있어 슬쩍 들춰본 속지엔 한글이 써져 있는 듯. 일단은

들고 가다가 나중에 따뜻한 데 앉아서 읽어보기로 했다.

꽁꽁 언 민물길이 바다로 향하는 길, 얼음에 반사된 빛무리들이 시멘트 교각 바닥을 긁으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삼면이 바다라는 한국의 해안가에 빼놓을 수 없는, 군부대와 군대 시설물들. 여긴 심지어 탱크가 한대

바닷바람에 녹슬어가고 있었다.

뭍에서 흘러내리는 민물이 모래사장 사이로 야트막한 개울을 만들었다. 찰박거리며 위태로이 바다로 향하는

물길을 시시각각 얼리며 덮쳐오는 얼음판, 그 위로 성글게 번지는 빛그림자.


더이상 물의 흐름이 읽히지 않는 빙판, 여러번 깨지고 얼고 깨지고 얼고의 과정을 반복한 듯 조각난 얼음판들이

조각보처럼 이리저리 얽혔다.

그리고 어느 모래사장에 꽂힌 채 당당히 바다를 굽어보던 팽팽한 낚시대 하나. 가늘고 약해 보이는 낚시대가

바싹 성난 듯이 머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게 제법 긴장감을 머금고 있다.

몇 걸음 걷다가 문득 뒷주머니가 허전해졌다. 아까 그 와인병 안에서 꺼냈던 메시지를 뒷춤에 꼽아넣고 있었는데

여러번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카메라를 만지다 보니 어느 틈에 도망가 버린 것. 왠지, 그 종이쪼가리를 꼭 찾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발걸음을 되짚어 거꾸로 걷길 십여분. 이렇게 얌전히 구덩이에 놓여있는 걸 용케 다시 만났다.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은 언제 봐도 가슴이 시원해진다. 바다가 떠밀어 보내준 메시지도 다시 찾았고,

방파제를 때려부술 듯한 소리를 내며 들썩이는 파도를 보며 계속 걸었다. 


날카로운 칼날처럼 깨어졌을 유리조각조차 이렇게 부드럽고 둥그런 모습으로 바꿔버리는 파도의, 바다의 위력.

특히나 겨울바다가 주는 신산하고 허한 느낌이란 건, 어쩌면 이렇게 모든 것들을 쓸어버리고 잘게 부숴버리다가

종국에는 남는 것 하나 없이 지워버리는 그 압도적이고 거대한 힘에 대한 경외감이나 허무함일지도 모르겠다.

겨울이라 그런지, 바다 색깔이 한결 더 검푸르다. 잉크처럼 검푸른 바닷물이 수면으로 밀어올려져서는 점점

에메랄드빛으로 연해지다간 하얀 파도로 보글보글. 모래사장까지 끌려나온 파도는 뒤미쳐 온 파도에 익사해버린다.

이쯤이 좋겠다 싶어서, 메시지를 펼쳐 보았다. 누군가의 글씨가 하얀 종이 가득 적힌 채 인연을 칭하며 친구를

청하고 있었고, 언제나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란다는 인사까지 적혀있었던 메시지. 이메일 주소도 적혀있었지만

알아볼 수가 없어 연락할 도리는 없고, 배를 접어 바다에 띄워보내는 게 최선이지 싶었다.

그렇게 뭍에서 흘러내리는 민물이 만들어낸 자그마한 개울에 띄워서 바다로 흘려보내며. 중간중간 모래톱에

걸쳐 멈추기도 하고, 빙글빙글 제자리에 맴을 돌기도 했지만 어쨌든 바다까지 나가는데 성공.

순긋해변이던가, 간소하게 만들어진 부두가 방파제의 품 속에 안겨 있었다. 시뻘겋게 녹슨 철제구조물 위로

앙상하게 덮인 나무판때기, 그리고 딱딱한 부두시설과 딱딱하고 약한 배 사이의 완충을 위한 고무타이어.


파도가 철썩철썩 방파제에 속절없이 부딪혀 깨지고 있었다. 자그마한 부두의 외곽을 단단히 감싼 방파제,

언뜻 보면 아무렇게나 팔다리를 쩍쩍 벌린 채 내팽개친 탕녀나 탕아 같기도 하다.

모래사장을 따라 계속 걷고 있는 참이었다. 경포대에서 사근진, 순긋, 순포해변까지 이름이 계속 바뀌고는

있었지만, 모래사장은 죽 이어진 한 길이었다. 물론 이렇게 중간중간 민물이 넘실거리며 모래사장을 가르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물이 마른 겨울철이라 잔뜩 녹슨 다리는 아무 쓰임도 없이 그저 거기 있을 뿐.


바다를 계속 끼고 걷자니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까는 바다가 모든 걸 지워버리고 무화시켜 버리는 힘을

갖고 있어서 허무하다 했지만, 아니,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아무리 잘게 깨고 부수고 으깨어도 뭔가는


남는다. 그렇게 남은 것들이 조금씩 쌓여 모래사장을 이룬 걸 테니까. 말하자면 저건 수백년, 수만년 전의

감정과 희로애락이 그대로 담겨 있는 거대한 아카이브인지도 모른다.

사념(思念), 사념(沙念), 모래들의 사념들. 파도가 아무리 으깨고 바스라뜨릴 기세로 억겁년을 덤벼든다 해도

사념들은 고스란히 남는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변한다는 말이 진리처럼 통용되지만, 아닐지도 모른다.

조금씩 해가 기울어갔다. 쉬엄쉬엄 사진도 찍고 돌아보기도 하며 걸은 길인지라, 게다가 바닥이 단단하지 않아

걷기 쉽지 않은 모래사장으로만 따라 걸어온 길인지라 꽤나 시간을 들여 걷고 있었다.

저 너머 고래등처럼 수면 위로 불쑥 튀어나온 바위 위에는 갈매기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석들이

싸질렀을 게 뻔한 배설물들이 성난 파도로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하얀 줄무늬가 얼룩덜룩.

순포해변을 지나 계속 올라가려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하다. 해안가를 따라 철망을 얹은 철책이 끝없이

이어져있고 중간중간 저렇게 침투 대비용 표찰까지 붙여놨다. 어렸을 때는 돌멩이를 철책에 꼽아놨었던 거 같은데.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모래사장, 녹슨 깡통만 굴러다니며 버려진 해변이나 마찬가지다.

한쪽엔 바다를, 한쪽엔 부대를 끼고서 아예 쭉 주파해버릴 생각으로 열심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난리가

났다. 호루라기를 불고 손을 흔들고. 더이상 접근하지 말라길래 은근 부아가 나서 걍 지나간다는데 왜 난리냐고

한마디 했다가, 그냥 왔던 걸음 되짚어 돌아가기로. 불쌍한 군바리들, 까라면 까는 그들이 무슨 잘못인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트리 위에 얹었던 탈지면 솜뭉치를 닮은 얼어붙은 눈 한조각. 밟으면 아작아작 소리가 나는게

좋아서 한참 밟고 돌아다니다가 조그마한 이 녀석은 차마 밟지 못하고 사진 한장.

이 녀석은 얼마나 묵은 걸까. 모래를 잔뜩 묵은 이 녀석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단단한 알루미늄 캔이 호일처럼

얊고 약해질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이제 조금씩 몸이 헐어가며 모래알로 변해갈 거다.

돌아나와선 부대 뒷켠의 차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앙상한 싸리비를 거꾸로 꽂아놓은 듯한 겨울 나무, 그 위로

싸리비에 이리저리 쓸리고 번져버린 듯한 겨울 하늘. 슬몃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애초 목적지도 없이 그저 걷던 참이었지만, 문득 생각해보니 이 근방에 테라로사라는 까페가 있다고 했었다.

겨울바다라봐야, 도착하면 금세 추워져서 이내 돌아올 걸 알고 있었으니까. 저런 까페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거짓말처럼 눈 앞에 번쩍 나타났다.

그렇게 근 세시간, 경포대에서부터 북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모래사장을 밟아 걷던 길이 끝나고, 테라로사에 앉아

다시 또 네다섯시간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글도 끼적이고.


잔뜩 걸었지만, 쉼없이 뭔가를 생각했던 것 같지만. 막상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니 다 사라져버린 것 같아서

따뜻한 까페 안에서 이상한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했던. 그렇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




강화도 외포리 외포여객터미널, 이곳에서 30분마다 출발하는 카페리호를 타고 석모도를 들어가려는 차와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화도 외포리에서 석모도 석포리로 불과 십분 남짓 배를 타고 이동하는데 드는 비용은

승선비용 대인 2,000원, 소인 1,000원, 승용차 14,000원. 편도비용이 아니라 오가는 왕복비용을 미리 지불하는 식이다.

선착장 끝이 바다에 슬몃 잠겨있고, 그 앞에서부터 일렬로 늘어서서는 배가 오기를 기다리는 차들. 저만치 앞에서

갈매기떼를 무슨 날파리들처럼 몰고서 오는 유람선이 보인다. 

이제 배 앞의 입을 활짝 벌리고는 항구와 단단히 연결짓도록 인도하는 아저씨, 배 한대에 승용차로 한 삼십여대이상

들어가는 거 같았는데 이날따라 관광버스로 석모도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아무래도 수능시험을 치고나서

보문사의 부처님께 부탁할 일이 많아서라거나, 석모도에 있는 조그마한 산들을 오르내리려는 거 아닐까 싶다.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린, 석모도 가는 길 배 위에서 갈매기에 새우깡 던져주기 놀이. 이제 갈매기

녀석들도 어찌나 닳고 닳았는지 엔간한 새우깡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게으르게 배를 따를 뿐이다. 던져졌던 새우깡이

바다에 힘없이 떨어지고 나면 그제야 바다에 살짝 내려앉아 먹기도 하고, 요행히 자기 비행 경로에 맞춤하게 던져진

새우깡만 잡아챌 뿐, 던져진 새우깡을 먹겠다고 서로 다툼하거나 사람 손가락까지 잘라먹을 듯 덤벼드는 '기백'은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고 새우깡 안 사고 남들이 던져주는 것만 구경하길 잘했다 싶을 정도로 배부른 갈매기들.

▲ 네이버에서 찾아본 석모도 지도. 왼쪽 아래 '장곶선박출입항대행신고소'와 '민머루해수욕장'이 보인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장구너머포구. 네이버 지도상에는 '장곶선박출입항대행신고소'라는 긴 명칭으로 나와있지만

장곶포구 혹은 장구너머포구라고 흔히들 부른다고 한다. 포구로 향하는 길은 그다지 정비되어 있진 않아서

차 두대가 아슬아슬하게 지날만큼의 아스팔트포장이 되어 있고, 따로 간판이나 표지판이 서 있는 게 아니라

길 바닥에 저렇게 노랑 화살표가 그려져 있는 정도. 포구에 도착하니 낙조를 보며 식사를 할 수 있다는 횟집들이

각자의 배 이름을 걸고서 성업중이었다.

그리고 흐릿한 날씨에 벌써부터 시뻘겋게 변해버린 해가 걸쳐 있는 하늘 아래로, 마치 태양으로부터 뻗어나와

바닷물에 일렁이는 햇살인 것처럼 출렁이는 배들이 저 멀리부터 점점 커지며 눈앞으로 육박하고 있었다.

포구에 배들이 전부 들어와있나 싶을 정도로, 조그마한 포구가 꽉 차 있었다. 그리고 한 켠엔 잔뜩 녹이 슬어 있는 채

시멘트 바닥 위로 끌어올려져 있던 커다란 닻이 하나.

바닷바람이 꽤나 쌀쌀했지만 바다에 낚시줄을 드리우고 있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보였다. 그네들도 추운지 제각기

방해받지 않고 띄엄띄엄 자리를 잡은 게 아니라 다닥다닥 붙어선 낚시대를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었는데, 그와중에

혼자 살짝 떨어져 있는 저 분이 눈에 띄었다. 어쩌다 보니 저 분이 낚시대를 드리워서는 저 어선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재미있어서 사진으로 담아봤다.

포구나 그런 곳은 보통 갈매기떼들이 하릴없이 노니며 주인없는 생선이 있지는 않나 호시탐탐 노리는 게 상례인데,

아무래도 석모도의 갈매기들은 전부 외포리와 석포리를 잇는 카페리호를 따라다니는 거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구너머포구로 들어오는 배, 포구에서 나가는 배들이 그 사이에도 쉼없이 뱃고동을 울리고 있었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이 곳에서 아예 바다로 삼켜지는 태양을 구경하는 것도 꽤나 괜찮겠다 싶어서 기억해두었다.

강화도에서 먹었던 것 중 맘에 들던 조합 하나는 강화도인삼막걸리랑 순무김치, 석모도에서도 순무가 나는지

장구너머포구를 뜨기 전 한 옆에 소담하게 무더기짓고 있던 자줏빛 순무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민머루해수욕장'.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민머루, 미음발음이 연이어 나는 이름이

기억하기도 쉽고 이쁜 거 같다. 석모도에 있는 유일무이한 해수욕장이라는데 이미 바지런한 이들은 텐트를 펼치고

바다를 바라보며 캔맥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요새 날씨에 바다에 들어가긴 좀 무리겠고, 바다를 바라보며 캠핑을

하기엔 맞춤한 장소일 거 같다.

바다만 바라봐도 추워 보이는 11월인데다가 바닷바람도 제법 세차다. 아무래도 여름철 바다와는 달리 다른

봄가을겨울의 바다란 건 다분히 관상용이라는 혐의가 짙다.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듣고 바다 냄새를 맡으며,

지치지도 않고 쉼없이 달려들다간 허물어지는 파도에 질릴 줄도 모르고 시선을 빼앗기는 것.


아니면 이렇게 바닷가 모래사장에 주차되어 있는 자전거를 타고 바퀴가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 위를 잠시 주행해

본다거나, 낚시대를 바닷가에 드리워보는 것도 괜찮겠다.


모터보트는 뭍에 잔뜩 끌어올려진 채 엔진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내년 여름까지 움직이지 않으려나. 여름이면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이 바글바글 줄서서 샤워장을 이용하고, 모터보트의 엔진도 쉴 줄 모르고 뜨겁게 달아오를

텐데, 민머루해수욕장의 여름철 풍경이 문득 환상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계절에 딱히 구애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산악오토바이, 네 바퀴의 ATV를 타고 해수욕장 근처를 돌아보거나

가볍게 드라이브를 즐기는 건 비만 오지 않으면 언제든 환영이다. 사진에 찍힌 건 그렇게 당장 드라이브를 나갈

상태는 아니고, 다만 카울 옆에 붙은 '페라리' 마크가 너무 선명해서.

천막이 걷힌 채 뼈대만 차갑게 남아있는 가을 혹은 겨울바다 위로 조금씩 해가 기울고 있었다. 가뜩이나 춥고 센치한

풍경에 저런 앙상하고 차가운 알루미늄 뼈대가 시꺼멓게 타버린 듯한 모습을 보니 이정도면 이맘때 바다를 찾아

즐길 수 있는 센치함은 만땅 충전되었지 싶어, 이제 슬슬 떠나도 되겠다 싶었다.

민머루해수욕장을 떠나려는데, 아까 장구너머포구에서부터 잘 보이지 않던 새떼가 보였다. 갈매기는 아니고,

쐐기 모양의 대형을 이루어 어딘가로 떠나는 철새들인 거 같았는데, 덕분에 이맘때 바다를 찾아 느끼고 싶은

스산함이라거나 센치함이라거나 그런 감정이 충만해진 채로 떠날 수 있엇다.





* 인천관광공사에서 컨텐츠 제작에 필요한 지원을 받습니다.

새만금 아래, 변산반도국립공원 끄트머리에 있는 격포항에서. 허리와 엉덩이와 입술을 맞댄 배들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조조의 연환계라도 쓴 듯 그렇게 바다를 뒤덮은 채로 옴쭉달싹 못할 거 같은 배들 너머로 유유히

항구를 빠져나가는 배가 보인다.

그리고 조금 너머에는 배 세척을 사이좋게 나란히 묶어둔 채 둥실둥실하는 모습도 보였다. 가운데 있는 배가 조금

커보이긴 하지만 비슷한 사이즈의 비슷한 색깔, 모양새의 배 세척이 고양이 발가락처럼 곰실곰실.

여객선터미널을 지나 쭉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사람들과 대치하고 선 우락부락하게 층진 암반, 그위에 살풋

얹힌 단풍들. 저쪽으로 좀더 걸어가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모자란 관계로 패스, 어찌나 아쉽던지.

대신 무지개빛의 바람개비 옆을 지났다. 바람이 불지 않던 탓에 빳빳이 굳어있던 바람개비들은 바다쪽으로부터

육지쪽을 향해 날아갈 폼만 잡고는 장대 위에 게으르게 앉아있었다.

바다도 보고 언덕도 보고, 그리고 단풍도 즐기며 변산반도 쪽, 다음에 시간 내어 제대로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바람이 불어왔고 바람개비들이 씽씽 돌기 시작했다. 저러다간 어느 순간 포르르 날아가버리겠다 싶도록.




* 한국원자력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에너지체험 블로그기자단'의 일원으로 떠난 출사 여행이었습니다.

목포의 유달산 일출을 찍기로 한 출사 여행이었던지라 저녁 일정은 일찍 마쳤다. 술도 깰 겸 하여 습관처럼

카메라를 둘러메고 훌쩍 혼자서 나온 건 이미 늦은 밤, 그래도 밤 공기도 선선한데다가 바로 옆에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이 너무 좋아 내처 걸어보기로 했더랬다. 알고 보니 숙소가 위치한 유달산쪽은 옛 목포항이 있던

곳이라나, 몇걸음 걷기도 전에 물결치는 필체로 쓰인 '예향목포'란 돌덩이부터 만났다.

역시 항구도시인지라 길가에 이렇게 닻을 겹겹이 쌓아둔 채 셔터를 내린 상점들도 보이고, 스크류니 프로펠러니

선박에 관련된 장비들을 취급하는 간판들이 즐비하다. 지나는 사람은 고사하고 차들도 흔치 않아 조금 헛헛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혼자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밤길을 걷는 건 굉장히 유쾌한 일이다.

나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선 한밤 중에 단풍놀이도 즐기고. 짭조름한 바닷바람에 절여졌을 텐데도 노랗게 잘도

익은 나뭇잎들이 이쁘다. 그런데 그 밑에 줄줄이 주차해 있는 저 리어카들은 왜 저렇게 바닥이 길게 덧대어져

있는 걸까. 한 두대도 아니고 우르르 세워진 리어카들이 전부 저 모양이니 더욱 궁금증이 이는 거다. 나중에

목포 수협 위판장까지 걷고 나서야 풀린 의문.

목적지를 정해두고 걷는 길이 아니었으니, 골목이 나오면 괜히 한번 꺽어들어가 보기도 하고, 뭔가 호기심을 잡아끄는

게 있겠다 싶으면 옆길로 새보기도 하고, 아니면 굳이 뒤로 되돌아와 확인해보기도 하고. 그렇게 떠도는 중에 지나친

골목 중 하나. 작고 여윈 이층짜리 건물에 문짝은 왜 그리도 많이 달렸는지, 문짝 하나 창문 하나로 이루어진 상점들이

세네개는 들어서 있는 거 같았다. 가로등 불빛을 양분삼아 하얀 스티로폼 상자 속에서 쑥쑥 자라던 상추들도 있었고.

 

정말이지 아무 것도 모르고 문득 다다른 곳이었다. 목포수협 위판장. 불이 환하게 밝혀진 곳이 멀찌감치에서 보이는

거 같아서 그것을 향해 걸었을 뿐이었는데 무슨 마을 잔치라도 벌어진 듯이 웅성대는 분위기에 온동네 사람들이

전부 나온 듯 바글바글한 인구밀도까지. 뭔지 몰라도 바싹 구미가 당겨서 풍경 틈새에 비집고 들었다.


그 결과, 조기가 풍년이라는 요새, 어떻게 어선들이 잡은 생선이 모이고 분류되고 포장되는지 그 과정을 전부

구경할 수 있었다. 더불어 다음날 새벽 5시부터 경매가 진행된다는 정보도 입수해서, 경매가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생선들이 팔려나가는지까지 알 수 있었던 뜻밖의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우선은 경매를 준비하기까지,

생선들이 집하되고 분류되고 포장되는 과정을 시간순으로. 사진은 어쩌다보니 역순으로 찍혔더라는.

어선들이 항구에 배를 가까이 대고 나면, 크레인차가 배 곁으로 바싹 붙어선 단단히 위치를 잡는다. 온통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에서 불쑥 튀어나온 배와 그 우악스런 불빛으로도 충분히 정신이 혼란스러워지는데, 게다가 어디선가

솔솔 풍기는 기름 냄새와 둔중한 기계의 울음까지.

배의 갑판 위에서 잡은 고기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선원 아저씨들. 예비군 모자가 유난히 반짝거리는 젊은이도 있고,

그야말로 뱃사람 느낌이 물씬 풍기는 아저씨도 있고. 옷에 가려 보이진 않아도 그네들의 팔뚝은 두꺼운 근육들로 감겨

사방으로 갈라지지 않을까 싶다. 크레인이 늘여뜨려진 배의 한복판에서 잰 손놀림으로 뚝딱 짐 하나를 꾸린 사람들.


그렇게 잘 여며진 생선 상자들이 크레인의 움직임에 따라 번쩍 들려서는 안전하게 항구 위 단단한 바닥에 옮겨졌다.

두껍고 까만 크레인 낚시바늘이 생선 비늘처럼 반짝거렸지만, 그런 건 일하는 사람이 아닌 놀고 있는 사람 눈에나

보이는 법인가 보다.

한짐을 꽁꽁 안전하게 묶고 있던 두꺼운 밧줄을 헤집어서는 번쩍,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옮겨진

생선들은 노란 플라스틱 박스에 부어져서 아주머니들이 분류해주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어찌나 생선들이

많은지, 당연하지만 한마리 한마리 긁히거나 찌그러지지 않게 챙길 여유는 없는 듯 했다. 마치 우유가 담긴

그릇에 씨리얼을 붓듯이 가차없이 부어버리는 그 냉정한 손속이라니.

일렬로 늘어선 아주머니들과 노랑 박스를 무질서하게 가득 채운 조기들과의 기싸움이 시작되고. 아주머니들의

군더더기라곤 없는 정연한 몸놀림과 생각보다 현란한 패션센스에 뒤지지 않는 생선들의 아크로바틱한 자세는

요지부동이었다. 모두 하나같이 입을 쩍쩍 벌린 채.
 

아주머니들은 인어공주처럼 온통 반짝거리는 비늘로 뒤덮인 하반신을 하고 있었다. 창백한 색감의 형광등 아래에서

미끌거리며 반짝거리는 비닐 앞치마 자체의 광택도 눈이 부셨지만. 생선의 사이즈에 따라 각기 다른 상자에 옮겨담는

과정이라고 했는데, 생선들을 분류하는 손놀림에서 일말의 망설임이나 잡생각도 읽어낼 수 없었다. 무슨 '생활의 달인'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달까.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생선들은 아직도 숨이 붙어 펄떡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아주머니들이 제각기의 패션센스와 칼라를 과시하며 일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은 왠지 슬며시 웃음이

나오게 되는 그런 따뜻한 풍경이기도 했다. 열두시가 넘은 오밤중에 나와서 쉼없이 저렇게 일하시는 게 그렇게

마냥 재미있는 일은 절대 아니겠지만, 그래도 노랑 박스에 포위당하다시피 한 상태로 끊임없이 새로 부어지는

생선들의 산을 의연하게 해치우시는 모습은, 뭐랄까, 약간 영웅적인 분위기마져 풍겼던 거다.


그리고 그렇게 사이즈별로 분류된 생선을 받아서는 저렇게 가지런히 정리하는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사이즈가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약간씩 자세도 다르고 모양도 다른데, 무슨 테트리스 조각맞추듯이 이렇게 저렇게 짜맞춰선

틀림없이 저런 봉긋한 언덕 모양의 생선박스를 만들어내시는 거다. 그 손놀림 역시 신묘하기가 달인의 경지더라는.

완성된 생선꾸러미엔 저렇게 물을 한바가지 끼얹어서는 창고 맨 뒤쪽부터 차근차근 놓이게 되는 거다.

그 전에 생선의 선도 유지를 위해 빠질 수 없는 얼음 한 삽. 큰 칼 옆에 차고 자세를 잡으신 충무공은 아니라지만

눈삽을 옆에 차고 깔맞춤된 '구루마'에 턱하니 기대선 모습이 어찌나 멋지시던지. 마침 약간 빛살도 새어들어와

머리 위로 내려떨어졌으니 더할나위없는 영웅의 풍모.

이렇게 안에서부터 바싹 붙어선 차곡차곡 채워지는 생선들은 이제 새벽에 있을 경매를 기다리며 네다섯시간을

얼음찜질하는 거다. 물론 이 곳으로 목포 근방의 어선들이 모두 집결하니까 생선량이 어마어마할 수 밖에 없겠지만

얼핏 보기에도 조기가 정말 풍년이긴 한 것 같다. 드넓은 위판장 바닥이 온통 저렇게 빈틈없이 빽빽하게 갈무리된

조기 꾸러미로 깔려 버렸다.

그래도 그 옆에서 수협 위판장 바닥에 대한 나름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던 녀석들은 새우젓 드럼통들. 꽁꽁 묶인

주둥이 사이로 용케도 삐져나온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보고 나서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던 위판장 벽면의 무슨 전기스위치상자. 손대지 맛시요. 위염. '맛시요'란 말은

전라도의 특징적인 억양을 그대로 살려서 적은 거 같은데 왠지 발음하며 읽어볼수록 맛깔스러운 거 같다.

손대지 맛시요. 알았시요, 라고 얼른 대답해 주고 싶은.

조금이라도 자고 몇 시간 후에 있을 경매 모습을 구경하려면 얼른 돌아가야겠다 싶어서, 이제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숙소. 덕분에 돌아가는 길은 무척이나 짧았고, 생각보다 금방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도 돌아오는 길에 그토록 길게 덧대어진 리어카들의 쓰임을 알아냈으니, 생선을 담는 나무상자를 가능한

많이 싣고 옮기기 위한 방책이었던 것. 저런 식으로 '대륙'의 느낌 가득하게 나무상자를 바리바리 싣고는

위판장에서 필요할 때 옮겨와서 쓰는 거 같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이미 자정이 지난 늦은 밤이었지만 시꺼먼 바다를 가르며 불빛들이 나타나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생선을 실은 배인지 아니면 막 내려놓은 배인지 모르겠지만 불빛 세 개가 발톱처럼 수면을

긁으며 앞으로 기어나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는 배가 지나가고 나면 길 옆으론 온통 까만 어둠이다. 빵꾸난 구멍으로 새어나올 법한

불빛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먹지같은 까만 벽이 하나 바닥에서 하늘 꼭대기까지 세워진 느낌. '바다'라는 곳에서

느끼는 막막함과 망연함이란 건 사실 저런 형태 아닐까 싶었다. 제 손가락도 제대로 식별할 수 없는,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도 말할 수 없는 그런 무저갱의 어둠 속. 아마도 밤바다가 웅크리고 있을 그 무시무시한 공간을 옆으로 두고는

열심히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 한국원자력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에너지체험 블로그기자단'의 일원으로 떠난 출사 여행이었습니다.

새만금, 몇 년전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전에는 간간히 뉴스나 신문에서 접했던

그 곳 새만금에 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어디서 어디가 매립지인지도 가늠하기 힘든 그 곳, 직선으로 쭉쭉 뻗은 도로만이

이 곳이 지도위에 그려진 몇개의 직선을 따라 만들어진 땅일 거라 짐작하게 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거침없는 직선으로

내뻗은 도로를 따라 함께 저너머 안개가 자욱한 곳으로 내달리는 건 듬성듬성하지만 역시 완고한 직선으로 심어진 잔디.


2009 희망다큐프로젝트 "살기 위하여" 시사회..물막이댐을 쓸어낼 '재해'를 기다리며.

 

다큐를 보고 나서도 그렇지만 그 이전에도, 이런 대규모 간척사업이 대체 무슨 경제적 이득이 있을지, 그리고 설사

이득이 있다 해도 다른 생태계 파괴 등의 요소를 고려했을 때도 여전히 이득일지는 의문이었다. 그런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땅이 좁은 나라라 하지만, 실제로 쓸 땅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계획과 시스템의 문제 아니던가 싶어서다.

새만금을 둘러본 건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던지라 판단에 새로운 팩트를 가감하지는 못했지만, 풍경은 남았다.

아직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채 공사중이었던 새만금 관광센터 앞에서 빙글빙글 도는 동그란 순환로가 있었다.

군산으로, 부안으로, 그리고 수변로로 빠지는 길들이 동그라미 밖으로 빠지는 화살표들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그 옆에 노란 삼각형 안에 검은 화살표가 빙글빙글 도는 모습은 왠지 '재활용 표시'같기도 하다. 플라스틱이니

알루미늄이니 재활용이 가능하단 표시로 꼬리에 꼬리를 문 채 순환하는 화살표. 그렇지만 빨갛고 노란 바탕색에

검정 화살표가 그려져 있으니 재활용이 불가능하다는 불길한 징조 같기도 하다.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공사중인 모습. 저 멀리 무슨 갑각류의 딱딱하고 화려한 껍데기처럼 반짝이는 주황색

포크레인이 여러 대 세워져 있고, 앞에는 물빼기 작업용으로 쓰였을 녹슨 쇠파이프가 여러개. 그렇게 물이

바싹 빠진 바닥에 물새들이 몇 마리 깃을 접고 내려앉았다.

방조제를 따라 이어진 수변로를 쭉 걷다 보니 방조제 안쪽으로, 아마도 이제 폐선으로 버려지고 만 듯한 배들이

생각보다 잔뜩 있었다. 아직은 방조제 안쪽의 물이 전부 빠지지 않은 상태인지라 제법 둥실거리며 떠 있긴 했지만

바닷바람과 바닷물에 하릴없이 낡아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다.

그리고 수변로 옆의 성기게 심어진 잔디밭 위에 동그마니 놓여있던 배 한 척. 그 조금 위로 씽씽 달리는 관광버스와

자동차들이 일으키는 바람에 조금씩 흔들거리는 배는 어쩜 잔디가 일으키는 물결을 타고 있는 거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잔디가 어쩜 저리 반듯한 이랑을 만들어 놓고 있는지, 정말 굉장히 작위적이기도 하고 인공적이기도 하고.

그렇게 죽죽 그어진 잔디밭 골들은 그대로 얼어붙은 파도 같기도 하다. 안개가 잔뜩 끼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빗발도

흩뿌리는 날씨 탓에 왠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반쯤 헐벗은 채 얼어붙은 파도 위에 올라앉은 배 한조각이 분위기를 더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눈에 걸리던 저 콘크리트 기반 위에 비석처럼 서 있는 게 뭔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봤다.

방조제 관리를 위한 전기설비 단자함이란 걸 알고 난 후에도, 이 땅 밑에 잠들어있을 수많은 바다 생명들, 이곳에

깃을 접고 내려앉았을 뭇 생명들, 그리고 이 곳에서 땅을 파고 바다를 일구며 살아왔던 사람들을 위로하는

반듯한 직선으로 만들어진 비석같기만 했다.


이 곳은 방조제로 감싸이지 않은, 살아있는 바다 쪽의 갯벌. 아직 살아있는 것들이 생생한 자취를 남기고, 그에

더해 파도가 얼기설기 갯벌을 흐트러뜨리며 손자욱을 깊게 긋고 내리는 곳.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이

갯벌을 뒤집고 뭔가를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수변로 안 쪽의 갇힌 배들과는 달리 바닥을 드러낸 맨땅 위에 기우뚱 정박해있는 배들, 그건 오히려 이들이

아직 갇히지 않고 자유로이 바다 위를 달리며 움직일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다시 물이 들이차면 둥둥 떠올라선

사람들을 싣고 고기를 잡으러 앞바다로 나갈 준비가 된 배들이다.

수변로를 따라 앞서 내달리던 일군의 자전거 무리들. 관광안내소 앞 주차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달리기

대신 이층으로 탑쌓기 놀이 중이었다. 화려한 유니폼 때문인지 자전거를 차곡차곡 챙기는 모습이 무슨 탑쌓기

퍼포먼스를 하는 것 같더라는.

새만금 방조제가 가둬버린 땅과 바다에는 더이상 파도가 갈퀴질할 갯벌도, 갈퀴질의 흔적이 남을 만큼 말랑한 공간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대신 남은 건 온통 쭉쭉 뻗은 단단한 직선들이다. 게다가 아직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직선들은 사람들의 손길이나 자연의 세례를 받지 못해 엄청 날카롭고 황량해보이기조차 한다. 그러고 보면 여기서

보았던 유일한 동그라미조차 생태계의 순환이 파괴되고 재생이 불가해졌음을 묵시하는 것 같았던 거다.





* 한국원자력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에너지체험 블로그기자단'의 일원으로 떠난 출사 여행이었습니다.

배 위에서 화장실이 급할 만큼 긴 시간 배를 탄 적이...부산에서 후쿠오카 건너갔던 때 말고는 없었던 거

같다. 그 쾌속선이야 워낙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으니 딱히 화장실이 눈에 띌 만큼 특징적이지도 않았지만,

남해의 소매물도니 외도를 돌아보는 이 유람선에 이렇게 설치되어 있는 화장실은 신기했던 거다.


뭐,이런 화장실에 눈이 갈 만큼 긴 시간 배를 탔던 것도 이유겠고, '소변만 가능'하다는 저 협소하고 불편해

보이는 조그마한 공간이 불쑥 혹처럼 튀어나온 게 눈에 잘 띄기도 했고. 살짝 문을 열어보고는 그 강렬한

냄새와 위생상태에 질겁을 하며 문을 닫아버렸다는.

사실 파도만 좀 잔잔해서 바다가 거울같이 반반하고 실크처럼 매끈하다면, 그래서 배가 전혀 요동이 없고

흔들거리지 않았다면 화장실이 그렇게까지 되어버리진 않았을 거라 짐작해 본다. 배 위에서 일을 본다는 건

일종의 거대한 천재지변과 정면으로 마주하겠다는 의지, 그 의지로 자폭해버리거나 뒷사람에 민폐를

끼치는 걸 막기 위해 아마도 '소변만' 가능하다고 읍소한 거였나 보다.




북촌한옥마을에 위치한 까페 가회, 저번달에 '타투이스트'의 전시가 있다해서 겸겸 다녀왔었다. 전시는

생각보다 단촐했는데, 아무래도 전시의 방점이 '타투'보다는 타투이스트의 예술 세계에 맞춰져서 그런듯.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은 여권에 과감하게 그림도 그리고 낙서도 하고, 심지어 저렇게 타투하듯이

재봉틀로 별이니 배니 종이비행기니 박아놓았던 작품.

북촌 한옥마을은 거의 처음 가봤던 거 같다. 안국역에서 내려선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 자칫하면 못 보고

지나칠 뻔한 조그마한 안내판을 용케도 놓치지 않고선, 빗길을 뚫고 가회 갤러리 까페 입성.


입구에서부터 전시중인 타투이스트 전시 관련한 팜플렛과 달력, 온통 그의 '타투' 작품 사진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북촌 한옥마을을 소개하는 A4 한장 크기의 도보자용 지도도 주었는데, 여태 모셔두고만 있다.

왜 이렇게 비가 자주 오는지 걷기엔 참 좋지 않은 날씨 탓이다.

'타투이스트',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국어로 딱히 바꾸기가 애매한 단어다. 문신술사, 문신전문가, 문신예술가.

혹은...뭐가 더 있으려나. 그만큼 한국에서 '타투', 문신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워낙 부정적이고 척박하단

사실을 반증하는 거 같다. 그 와중에도 이렇게 종이 비행기를 주된 테마로 잡고 타투 아트를 계속해온

아티스트가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박수쳐줄 일이지 싶다. 자기 몸을 도화지 삼아 연습하지 않았을까.


그가 갖고 있는 타투 장비들. 저 총처럼 생긴 것에 잉크통을 꼽고서 펜처럼 피부 위에다가 그림을 그리는

거다. 우리나라에서 타투가 뭐라더라, 공중위생법으로 제재받고 있다던가. 딱히 제재할 법이 없으니 저

타투 장비가 위생적이지 못하다느니 병을 옮긴다느니 따위의 조잡한 꼬투리를 잡고서 제재하고 있다는데,

한심한 일이다. 양성화해서 다양한 예술적 디자인이나 그래픽이 발전하도록 하고, 위생상의 문제가

정 그렇게 신경쓰인다면 제대로 관리하면 되지 않을까.


타투이스트 한 명의 작품만이 아니라, 다른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이 이루어진 결과물들도 전시해 놓았었다.

재봉틀을 이용해 저런 아기자기한 그림들을 수놓고는 소녀의 여린 팔목에 뽀빠이처럼 닻 모양이라거나

조폭처럼 '一心' 이런 한자를 수놓는 센스라니.


뭐 벽면 한쪽으로 그런 그림이나 복합 재료로 꾸며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이렇게 분방하게 채색된

구두도 한 켤레 놓여있었고. 아무래도 갤러리 까페라 그런지 차 마시기도 괜찮은 분위기였지만, 찻잔을

들고 벽면을 따라 돌아다니며 이런 전시물들을 구경하기에도 괜찮았던, 편한 분위기의 천장 높은 까페.

와중에 발견한 맘에 쏙 들던 아이템 하나. 뱅 앤 올룹슨의 오디오였는데, 저 앙증맞은 빨강 세모모양

스피커가 한눈에 확 꽂혀버렸다. 게다가 조그마한 체구에서 울려나오는 사운드가 전혀 뒤지지 않고.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라도 꼭 사겠다며..일단 위시리스트에 보관.

에스프레소는 생각보다 많이 연했다. 갈수록 진한 커피를 좋아하게 되는 참이라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에스프레소 위의 크리마가 여느 까페 체인의 그것보다 훨씬 풍부하고 부드러웠던 듯. 저렇게 활짝 웃고있는

스푼의 애교에도 맘이 녹아내렸다.


들어갈 때 한장씩 나눠줬던 종이는, 전시 중인 타투이스트의 메인 테마인 종이비행기를 접으라며 미리

접는 선이 인쇄된 종이였다. 내친 김에 종이비행기도 접고, 배도 접고 나서는, 영수증 종이로도 조그마한

종이비행기를 마저 만들어버렸다.

그러고 나니 문득 불붙어 버린 종이접기의 마력. 어렸을 때 만들었던 독수리5형제의 비행기를 만들 수

있을까, 스스로 궁금해져버려서 있는 종이 없는 종이 동원해서 결국 만들고야 말았다. 저렇게 입도 쩍쩍

벌어지는 날렵한 모양의 비행기. 양쪽 옆구리에도 비행기 한대씩 합체분리할 수 있고 위에도 한대

합체해놓을 수 있는 궁극의 비행기였었다. 어렸을 때 커다랗고 두꺼운 달력 종이로 참 많이 만들었는데.

그렇게 비행기도 접고 배도 접고, 까페도 온통 둘러보고, 책도 읽고 하는 와중에도 참 줄기차게 내리던 비.

이제 한국은 4계절이 뚜렷한 나라라기보다는 '우기'가 있는 아열대의 나라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서 북촌한옥마을을 좀더 돌아볼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비는 그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에스프레소는 훌짝 다 마셔버린지 오래. 마치 타투처럼 굵고 선명하게 남아버린 크리마의 갈색 띠만

에스프레소 잔 안쪽에 보름달처럼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내 타투를 보고도 사람들이 '참 잘했어요'라거나 '1등급' 따위의 둥근 도장을 찍어놓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도 이쁘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조금은 더 밖으로 열려있는 이미지였음

좋았겠다 싶기도 하고, 일단 달과 별을 몸에 새겼으니 다음에는 다른 천체를 새겨서 공간을 넓혀야겠다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실 가회 갤러리까페에서 전시회를 열었던 이 타투이스트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내 꺼만한 게 없지 싶어서 조금은 뿌듯.




충북 괴산의 산막이옛길, 예전에는 산골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옆 마을로 넘나들거나 장터갈때

이용하던 길이라던데 점차 마을이 조그매지면서 잊혀져가던 길이라고 한다. 최근에야 휘적휘적

구비진 강을 따라 오르내리며 내달리는 산길을 정비해서 근 삼 킬로미터에 이르는 '옛길'을

되살려냈다던가. 제주 올레길의 예기치 못한 성공담이 지자체에 던진 울림은 이다지도 컸지싶다.

세 그루의 연리지, 아니 여섯 그루의 연리지라고 해야 하나. 서로 사이좋게 몸을 섞은 채

고개를 살풋 외로 꼬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한 세 커플나무들. 연리지 하나가 생겨나기만 해도

울타리도 치고 포토존도 만들고 수액도 맞아가며 특별대접을 받는 판인데 무려 세 쌍이라니.

옛길 초입부터 계속 유유한 호흡으로 따라오는 건 괴강. 그러고 보니 이곳의 지명은 괴산,

강이름은 괴강. 57년에 이승만대통령이 괴산수력발전소를 만들고선 호수가 되어버려 괴산호라

불리게 되었다곤 하지만, 조금씩 방류되고 있는 건지 바람이 미는 건지 아니면 드문드문 다니는

조그만 철선과 목선이 만드는 건지 수면에 잔물결이 꼼꼼히 새겨져 있었다.

나무에 묶인 그네에선 아이들이 꺅꺅 소리를 질러대며 산아래쪽을 향해 발을 구르고 있었다.

저러다 휘잉~ 하고 날면 그대로 괴강, 괴산호까지 날아가겠고만 겁나지도 않는지 마냥 즐거운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 살벌한 그네 대신 조용조용 잔물결처럼 일렁이는 흔들의자에서 잠시

앉아 쉬었다. 전날 내렸던 비가 어느결에 말랐는지 보송보송한 의자에서 슬몃 나무냄새가 났다.

출렁다리, 어렸을 적 고성 잼버리장에서도 뛰놀아보고 했지만 이렇게 길고 출렁대는 다리는

처음 본 거 같다. 이거 재미있겠다 싶어서 우다다 걷다가 일부러 흔들기도 하고, 그러다가

뒤의 꼬맹이가 완전 겁먹은 거 보고 미안해져버려서 사뿐사뿐 흔들림없이 걸어보려 했지만

몇걸음 가지 못해 다시 출렁출렁. 처음 느낌 그대로, 어른들한테도 꽤나 길고 재미있던 코스. 

출렁다리에서 내려와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이는 단단한 흙길을 밟으니 기분이 상쾌하다.

흔들리던 발아래 나무판자 대신 땅을 딛으니 시선이 자연스레 주변을 스캔하게 되는 거다.

약간 뜨겁긴 하지만 아직 설익어 부드러운 느낌의 오전 봄햇살도 그렇고, 본격적으로

짙어지기 전의 싱그러운 녹색 풀떼기 같은 것들.

산막이옛길은 그냥 하이킹 삼아 가볍게 걷는 길도 좋지만 저 위로 본격 등산로를 따라 걷는 것도

꽤나 좋을 거 같다. 대충 코스를 짜보자면 등산로로 크게 돌아서 산막이마을까지 가서는 옛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 정도가 좋지 않으려나. 여기가 바로 등산로와 옛길이 갈라지는 지점인데

등산로라기엔 넘 푸릇푸릇하고 완만한 길이 시작되는게 꽤나 유혹적이었다.


괴산수력발전소가 물을 가두고 나서 몇개 마을이 잠기고 구불구불하던 강의 생김생김도 많이

변했다지만 여전히 옛길 옆을 따라 출렁이는 강물은 구불한 실루엣을 간직하고 있었다. 제법

폭이 넓은 강, 호수를 끼고 있어서 그런지 바람이 굉장히 시원하다. 미처 땀이 솟을 겨를도

없이 에어콘바람처럼 시원한 산바람 강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연화담. 지금은 연꽃이 피워올려지는 저 연못이라지만 이전에는 천수답, 논이었다고 한다.

충북 괴산, 여기 옛길까지 차로 달리며 놀랐던 건 마치 강원도의 느낌처럼 쉼없이 울룩불룩

높진 않아도 야무진 삼각산들이 늘어서있던 풍경. 논농사를 짓기엔 땅이 부족했던 걸까,

저 손바닥만한 세모땅에까지 벼를 심었다니. 직각이등변삼각형 모양, 올만에 떠올린 단어.

산막이옛길을 따라 걷다가 발견한 큼지막한 동굴이 있었고 왠 뜬금없는 호랑이 상과 인형이

놓여있었다. 앞에 세워진 표지판을 보기도 전에 뭐야 이거, 호랑이굴이야 했더니 역시나.

믿거나 말거나 1960년대까지 호랑이나 다른 산짐승이 자리잡고 살던 굴이라고 하는데

그것보다 더 놀라웠던 건 대체 왼쪽의 호랑이 인형은-ZOO COFFEE에서 들고 온 듯한-

어제의 장대비를 견디고 저리도 뽀송거리는 걸까.


적당한 강약으로 오르내리는 계단도 있고, 그리 좁지 않은 너비로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나무

데크 길이 쭉 이어지고 있어서 아이들도 신나라 걷고 뛰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 지칠 만하면

나타나는 전망대니 약수터니. 앉은뱅이가 물을 마시고 벌떡 일어났다나, 그런 약수터의 전설이

무색하게 물이 아낌없이 펑펑 흘러나오던 물맛은 나쁘지 않았다.

비가 그친 연후라 그런지 완전완전 산뜻한 초록색을 뽐내며 옛길을 터널처럼 감싸고 있던

나무들, 그리고 제법 울창해진 그 틈새를 비집고 기어이 불어오는 산바람과 이따금씩 뚝뚝

떨어지는 봄볕 쪼가리들. 어디선가 풍기는 나무냄새, 꽃냄새까지 더해지니 정말, 한없이

걸어도 좋겠다 싶었다. 그야말로 풀향기 가득한 이런 길만 쭉 이어진다면.

괴강에서는 선착장과 선착장, 산막이옛길의 처음과 끝을 잇는 목선과 철선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옛길 위의 사람들을 앞서 달리고 있었다. 배를 몇번을 보내고 맞이하며 급할 것 없이

걷다가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선 반짝, 초록빛 나뭇잎새를 뚫고 햇살이 눈부셨다.


중간중간 지게에 얹혀있던 것들은 이곳, 산막이옛길을 노래하는 시들이 적혀있었다. 제법 많은

시들이 이곳의 경치와 분위기와 역사에 감동하고 감탄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렇다. 풍경이 이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의 말을 건네 들을 필요가 있나. 그래서 내용은 늘 스킵,

차라리 지게 위에 늘어뜨려진 성긴 나뭇잎을 보며 안구를 정화. 피톤치드를 달라며.

어디였더라, 그랜드캐년이었던가, 바닥이 유리로 된 이 전망대는 분명 그걸 염두에 두고 만든 게다.

뭔가 바닥을 보고 겁먹기에는 온통 초록빛의 여리여리한 이파리들, 그리고 보기만 해도 보들거리는

괴강의 잔물결들이었는지라 저런 꼬맹이도 펄쩍펄쩍 겁먹지도 않고 뛰놀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만큼

밖으로 불룩 나가서 바라본 풍경은, 강 한복판은 아니어도 대충 깊숙히 들어와 강의 좌우를 바라보는

느낌을 줬다. 잔뜩 굽어진 강물, 강물 따라 잔뜩 굽어진 산등성들, 또 산등성들 따라 굽어진 초록빛들.

총 길이가 채 삼 킬로미터가 안 된다는 거 같던데, 조금씩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제

슬슬 길이 끝날 때가 되어가려나. 좀더 길면 좋겠는데. 좀더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마음이

가득한 채 아껴 핥듯이 한걸음 한걸음 길을 뒤로 밀어보내고 있었다. 갈수록 멈춰서서 사진을

찍어 남기고 싶은 마음만 강해지다 보니 사진은 어느새 기백장을 헤아릴만큼 찍어대고 있었고.

산딸기길. 6월이 되어야 산딸기가 길 좌우로 잔뜩 피어나 붉고 푸른 색감이 강렬할 텐데

지금은 그저 푸른 색 일색이었다. 날이 좋은 주말에는 이 길 가득 사람들이 걷는다는데

이때는 그래도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던 거 같다. 그래도 주차장은 이미 만차가 되어

주변 골목까지 차들로 빼곡하게 넘쳐나는 상황이었지만.

뭘 파종한 걸까, 갈빛 땅위에 초록색으로 가지런히 빗질을 한 듯한 평행선들 너머로 잔뜩 여윈

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선착장 도착. 여기가 산막이옛길의 끝 '산막이마을' 선착장이고, 애초 출발했던 지점은

'차돌바위' 선착장이라던가. 십오분만에 바로 가는 소형배는 오천원, 그리고 멀리 한바퀴

돌아서 한시간여 유람까지 하는 유람선은 만원.

11인승인 소형배는 두 종류가 있었다. 목선이랑 철선이라고 부르던데, 이게 그 목선.

뭔가 정신사나운 만국기가 무당집처럼 내걸려 있는 거 빼고는 그래도 좀 운치가 있달까.

배 뒤로 남겨두는 궤적도 뭔가 뽈뽈뽈뽈, 통통거리는 엔진소리에 맞춰 리드미컬하다.


아쉽게도 내가 탔던 건 목선이 아닌 철선. 11명 이상이 타면 뽀글대며 가라앉지 않을까 싶은

간단하기 짝이 없는 모터배였다. 그래도 뭐, 괴강 한복판에서 올려다보는 양쪽 강가의

풍경이란 건 다른 맛이 있었으니 배가 어쨌거나.

산막이옛길 반대편 강가에도 습지가 제법 발달해 있었고, 나무가 뭉텅이뭉텅이 소보록하니

자라나 있었는데 아직 그쪽에는 이런 길이 나있지는 않다고 한다. 거참..딜레마다. 좋은

길을 보면 걷고 싶은데, 또 사람들이 한둘 모여 걷다 보면 길이 황폐해지고 자연도 조금씩

상해버릴 텐데. 산막이옛길도 잘 관리되고 보전되었으면 좋겠는데..그런 점에서 나무데크로

단단하게 만들어놓은 길이 조금 아쉽긴 했다.

설렁설렁 걷긴 했지만 한시간반 정도 걸려 꼼꼼이 걸었던 길을 이십분도 안 되어서 훌쩍

되돌아오다니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 눈으로 옛길을 되짚다가 불쑥 뜨인 난파선에 시선이

가기도 하고,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으로 칠해둔 남한 최초의 수력발전소라는

괴산수력발전소의 유머러스함에 웃어주기도 하고.

그렇게 한 세네시간동안 잘 돌아본 산막이옛길, 다시 돌아나오는데 아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사인이 샛노랗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목,

큼지막하고 선명하게 새겨진 산막이옛길. 그리고 빨간 화살표가 선연한데 아까는 왜

저걸 못 봤나 했더니 주차장이 만차라 반대쪽으로 돌았더랬다.





외도에서 촬영되었다는 옛날옛적의 드라마, '겨울연가'를 알리는 낡은 간판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2002년 드라마였던가..했다가 문득, 군대가는 바람에 마지막 엔딩을 못봤었단 생각이 떠올랐다.

근데 정말 어떤 장면에서 외도가 나왔던 거지? 전혀 기억에 남는 게 없는 걸 보면 내가 놓친 엔딩?

국내 유일의 해상농원,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섬으로 개인적인 취향과 안목이 그대로 투영된

이국적인 아열대 식물들, 평소에 관리가 얼마나 잘 되고 있는지를 느끼게 하던 범상치않은 조경.

온통 하늘로 치솟은 덤불의 끄트머리가 무슨 탑의 형상같기도 하고, 에너지가 뻗쳐나가는 거 같기도.

동양의 하와이라 불리기도 한다는 외도에서 눈에 띄던 건 역시 육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아열대의 식물들, 황금빛에 가까운 신기한 빛깔을 뽐내던 요 신기한 풀떼기처럼.

산책로를 따라 걷는 길, 한바퀴를 도는데 대략 한시간 정도 소용된다니 걷기 전에 몸을 가볍게

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이 엘레강스한 화장실 표지 역시 섬주인의 취향이 그대로

묻어나는 하나의 특징적인 포인트일 텐데 조금 거창하단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이쁘다.

화장실 표지도 표지지만, 전지역 금연을 실시할 정도로 환경을 보호하기에 열심인 이 작은 섬에선

빗물을 저장시설에 모아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섬이 작아 딱히 물이 있지는 않은가 본데,

이렇게 많이 다녀가는 관광객들을 소화하려니 이런 부탁을 할 수 밖에 없을 듯.

정말이지 깔끔하게 전정된 가로수들, 가지들을 툭툭 쳐낸 모양새가 인상적이다. 옷걸이로 쓰면

딱 좋겠다 싶은 생각도 들고, 저기에 잘못 부딪히면 푹 박히는 거 아닌가 싶어 지레 소름돋기도

하고. 저런 곳의 나무를 켜내면 옹이구멍이 송송 박혀있는 거 아닌가.

2월의 매화꽃. 짙은 초록색의 두텁고 반들거리는 울창한 잎사귀 사이에서 샛노란 술을 가진

새빨간 꽃들이 촘촘이 박혔다. 슬쩍 잎사귀를 차양삼아 햇살을 가리려는 듯한 꽃잎의 제스처가

사랑스럽다.

판판한 평지에 조성된 정원이 아니라 제법 오르내림이 있는 조그마한 산 같은 섬인지라, 이렇게

산책로를 걷는 재미도 더 큰 거 같았다. 더러는 높은 나무로 울타리쳐진 길을 오르기도 하고,

아니면 저런 야트막한 정원수들이 양쪽에 줄서 있는 길을 조심조심 내려오며 전체 섬을

내려보기도 하고.

조금 당황스러웠던 공간, 외도에서 가장 뭐랄까, 이질적이고 뜬금없다 싶었던 공간이었던 거 같다.

물론 갠적으로. 이름하여 '비너스가든'과 '음악당'. 루브르박물관에서 봤던 니케상 비슷한 것도

하나 서 있고, 그리스 느낌 가득한-그렇지만 꽤나 아쉬운 느낌 역시 가득한-구조물이 바닷바람을

맞고 녹슨 채 서 있었다.

프랑스 식으로 잘 다듬어진 정원은 외도의 한복판, 그야말로 외도 정원의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조금만 늦게 와서 날도 풀리고 꽃도 좀더 피고 녹색도 좀더 싱싱했다면 더 멋졌을 거 같긴

하지만, 뭍은 아직 겨울바람 씽씽 불어닥치는 2월에 갔어도 꽤나 좋았았던 공간.


중간중간에 놓인 벤치 역시 바닷바람에 씻기고 적당히 헐어보여서 오히려 더 맘에 들었다.

괜히 엘레강스한 분위기를 내려 힘준 게 아니라, 그리고 괜히 유럽이나 그리스식의 분위기를

잡느라 꼬불꼬불한 문양으로 흉내낸 게 아니라 좋았다.


같이 갔던 사람들이 여긴가, 여긴가 했다. '겨울연가'에 나왔던 장면이, 나왔던 외도의 풍경이

여기 어디선가 찍혔던 건 아닐까 추측이 난무했던 곳.


곳곳에 숨어있던 귀여운 소품들, 고양이 가족들의 익살맞은 표정도 맘에 쏙 들었지만 색색깔의

기린들이 보이는 시크한 표정과 우물대는 듯한 입모양이 참.

외도의 주인이 얼마나 조경에 힘쏟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몇그루의 잘 가꿔진 나무들.

남자사람 머리만 해도 삐쭉삐쭉대지 않도록 잘 다듬어주려면 삼주에 한번씩은 깎아줘야 하는데,

작다고는 하지만 이 섬 전체를 정원으로 꾸며버린 스케일을 감안했을 때 정말 얼마나 손길이

필요한 일일까. 하나 흐트러짐이나 지저분한 구석없이 이렇게 관리하려면. 



양배추처럼 생긴 꽃..저거 이름이 뭐더라, 맨날 듣고는 까먹어버리는 이름의 꽃들 사이로

곰발바닥이 새겨진 시멘트 바닥을 따라가면, 지금은 출입통제된 정원의 어느 샛길이 나타난다.

막혀있단 거 뻔히 보이지만 곰발바닥이 귀여워서 일단 따라 걷고 보는 단순한 걸음걸이.


이전부터 섬에 대한 로망은 있었다. 한쪽 끝에 서면 다른 쪽 끝이 보이는 그런 조그마한 섬.

외도는 그정도 사이즈는 아니어도, 불쑥 올라선 섬의 중앙부에선 섬의 가장자리가 손에 닿을듯

가깝게 보일만한 사이즈. 정원으로 꾸며진 섬 전체가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 섬들이

가득한 남해바다가 희끄무레한 바다안개를 덮은 채 버티고 있고.

기묘하게 생긴 벤치, 아마도 커다란 죽은 나무를 다듬어서 만든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어디론가

통하는 샛길 하나가 또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귀여운 바리케이트로 막혔다. 자연스런

나무의 휘어짐이나 모양새가 그대로 살아있는 느낌이 좋다.

날씨에 따라 대마도까지 보인다는 전망대, 오백원짜리 동전은 내가 어렸을 적 통일동산이나

판문점 같은 곳에 올랐을 때부터 변치않는 가격인 거 같다. 물가는 미친 듯이 뛰었어도

전망대용 망원경 가격은 십여년째 그대로.


날이 흐리고 해무도 끼어서, 게다가 딱히 망원경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섬 너머는 전부 바다니깐

그냥 맨눈으로 보아도 이쁘다. 그리고 전망대 아랫자락으로 펼쳐지는 외도의 살갗도 참 이쁘고.

거의 외도를 한 바퀴 돌고서, 선착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 내려다보이는 '비너스정원'과

'음악당'의 모습이 자그마하니 귀엽다. 그리고 건물 안에서 삥삥 도는 저 계단 역시.


'명상의 언덕'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 혹은 성당. 사이즈로는 정말

X딱지만하다는 표현이 딱 맞아떨어질 정도로 작지만, 안에 슬쩍 들어가서 바라본 창밖

풍경은 바다랑 섬들이랑 사이좋게 어깨겯고선 따뜻하기 그지없던.


선착장으로 가는 길, 바닥엔 동글동글 까만 돌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기하학적인 문양들을 만들고

담백한 풀꽃모양도 떠올려냈다. 그리고 가로수들 그루마다 둘러싼 깔끔한 돌화분에 박혀있는

산뜻한 타일들, 애기들이 지나가다 관심을 바싹 갖고 하나하나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바닥에 하트 모양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공간을 발견, 저 은은하고 부드러운 핑크빛의

하트에는 동글동글하고 작은 조약돌로 두번이나 하트모양으로 띠도 둘려 있다. 일종의 이별여행을

떠났던 곳이니만치, 저런 모양 하나하나에 쿡쿡 가슴이 찔려왔지만, 사랑ing인 사람들이야 뭐.


선착장에 내려서기 직전, 외도의 마지막 포스트인 '외도 갤러리'라는데 다른 것보다 그 뷰가

참 좋았다. 천장이 높아 바람이 숭숭 자유로이 드나드는 커다란 정자 같은 곳에 삼삼오오

앉아서는 바닷바람도 맞고, 멀찍이 시선을 던져둔 채 망연하게 넋놓고 있는 것.

배가 선착장을 떠나는 순간. 선착장과 배 사이를 쉼없이 이간질하며 철썩철썩 거칠게 내지르는

파도를 견디어내려면 저렇게 튼튼한 타이어를 빈틈없이 둘러야 하는 거다. 그렇게 하고서도

바닷물과 바닷바람과 파도와 무디고 둔탁한 뱃전에 쓸려 금세 낡고 허름해지는 타이어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구나. 늘 긴장 가득한 관계구나 싶다. 배와 항구란 거.




짜오프라야강 서안, 카오산로드에서 북서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선박박물관',

태국 왕실이 기념일이나 행사 때마다 짜오프라야강에 띄우는 화려한 배들이 정박해 있는

곳이다. 가는 길이 쉽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박물관에 들어섰을 때 이토록 한적할 수가.


입장료는 100바트, 300바트에 대략 10달러, 만이천원이라 치면 100바트는 대략 3000원선.

안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되지만 따로 100바트를 추가로 내면 사진 촬영도 가능하다고 했다.

걍 둘러보지 뭐, 하고 입장료만 내고 들어갔다가 헉, 아니다 싶어서 냉큼 100바트 더 내고 촬영을

허가받았다는 표시의 얄포름한 종이 한장을 목에 걸었다. 바람에 펄럭펄럭 나부끼던 촬영증.

이런 금빛찬란한 화려한 뱃머리가 나란히 모여 있던 거다. 첫눈에도 정교한 조각과 세련된 마감,

금빛이 번쩍거리면서도 결코 싸지 않은 느낌의 배색과 품격이 느껴졌다.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 무려 1981년에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의식용으로 쓰이는

이 배의 뱃머리엔 옆구리에 손을 짚은 신장이 당당히 저멀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랫춤엔 조그맣게 숨어있는 포신. 이런 배를 넓고 도도한 짜오프라야 강심에서 마주친다면

어떤 기분일까. 이렇게 화려하고 세련된 뱃머리, 저 눈길을 올려다본다면.


이것들은 더 멋졌다. 동남아에서 신격화되는 뱀의 신 '나가'를 형상화한 듯한 일곱 머리를 가진

뱀의 흉흉하고 위압적인 모습도 그렇고, 날개처럼 두 팔을 펄럭이며 날아오를 듯한 분위기의

날렵한 신장도 그렇고. 특히 저 빨간 혀와 새하얀 이빨을 가진 일곱머리 금빛 뱀은 태국 왕실을

배경으로 유유하게 짜오프라야 강을 점령한 화려한 배들이 담긴 풍경 엽서에서 자주 봤었다.

이 녀석은 정말, 이 배를 타고 수많은 선단으로 구성된 전투용 배들의 앞머리에 섰다면, 적선들이

딱 마주쳤을 때 바싹 쫄았을 거 같다. 화염이 불타오르는 듯한 저 사납고 들끓는 듯한 갈기들,

그리고 단숨에 숨통을 물어뜯어낼 듯한 강력한 턱과 이빨, 그리고 새빨간 혀가 날름거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시꺼먼 아가리까지. 뱃전에 설치된 포신이 차라리 귀여워 보일 지경.


옆으로 넘어가며 배를 하나하나 둘러보는 데도 은근히 동선이 길다. 배가 그다지 크지는 않다

싶었는데, 앞에서 보았을 땐 얄포름하다 싶어서 그랬지만 정작 배의 길이가 꽤나 긴 거다.

전체적으로 가늘고 긴 형태의 배라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탈 수 있을지는 모르곘지만, 그런

날씬한 형태를 갖추고도 정면에서 보았을 때 이런 위엄을 갖출 수 있다니 그것도 놀랍다.

여기에 보관되어 있는 여덟 척의 배중에서 가장 아름답던 배, 초록색 눈과 은빛 어금니가

온통 보석으로 꾸며진 것 같다. 학처럼 우아하게 뻗어올려진 미끈한 목에도 비늘같은 무늬가

꼼꼼하게 세공되어 있었고, 슬몃 쳐들어올려진 고개도 당당한 분위기를 더한다. 용이 또아리를

틀고 땅에 내려앉은 채 하늘을 바라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리고 배의 뒷꼬리, 미끈하게 쭉 빠진 느낌도 그럴 듯 하지만 배의 앞섶과 마찬가지 문양으로

통일성을 갖춘 모양새는 왕실의 선박으로 부족함이 없다. 게다가 번쩍 들린 앞머리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실용적인지 감각적인 측면인지 모르겠지만, 하늘로 은근히 슬금슬금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번쩍 치켜올려지는 휘영청한 곡선의 아름다움까지.

배 가운데, 금빛 휘황한 좌대가 설치되어 있다. 물론 왕과 왕비, 왕자나 공주를 위한 자리일 테고.

시야를 확보하고 바람이 넉넉하도록 그랬는지 햇빛을 가릴 천장이 좌대만큼 높았다. 저렇게

높이고서도 배가 균형을 잘 잡을까 싶을 정도로.


현재도 언제든지 불려나갈 준비가 되어있어 보이는 반짝거리는 배들 옆으로, 옆면이 휑하니 빈 채인

배도 한 척 보였고, 아예 분해해서 새롭게 만들 작정인 듯 뱃머리만 떡하니 떨어져나가있는 덩어리도

보였다. 다리 사이로 대포를 쏴대는 모양의 뱃머리, 모양이 제각기 다 다르니 한척 한척이 모두

굉장히 소중한 거 같다.

그래서겠지만, 박물관 한 쪽에는 이전에 쓰였던 배의 잔해들과 장식들을 보관해 두고 있었다.

언제든 새로운 배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그리고 한척 한척 모두 독특한 자기만의 모양새와

분위기를 가지고 짜오프라야 강을 당당하게 가로질렀노라 기억해 두려는 듯. 박물관이긴 하지만

이 배들은 유물이 아니었다. 지금도 계속 저렇게 자재를 운반하고, 배 안에 들어가 사포질을 하고

뭔가 수선하고 보완하는 공장 같은 분위기였다. 박제된 기념품들이 아니라, 언제든 행사 일정에

맞추어 나설 준비가 된 살아있는 것들.

아마도 저런 일꾼들이 이렇게 소담스런 불당을 차려놓은 거 아닐까. 박물관 아닌 박물관의 기둥

한켠에 새집처럼 올려둔 불당 앞으로 빨강색 환타 두병을 열어서 빨대까지 꼽아둔 저 다정함이라니.

한쪽 벽면에는 배를 실제로 어떻게 젓는지, 그리고 수병들의 복장은 어땠는지, 그런 모습을

에둘러 짐작해볼 몇 장의 자료들이 있었고 조그마한 형태로 축소된 배도 전시되어 있었다.

가만히 보니 배들은 언제든 수로를 통해 짜오프라야 강으로 나갈 수 있도록 제각기의 도크

위에 번쩍 들려있는 것이었다. 고개를 당당히 든 채 다리가 치워지고 철문이 열려 짜오프라야강

위로 둥실, 의연하게 미끄러져가는 그림이 자꾸 머릿속에 그려졌다. 허름한 창고 같은 박물관

안에서 벗어나 남국의 햇살 아래 온통 번쩍거리며 그 섬세한 디테일 하나하나가 사방으로

빛무리를 떨쳐낼 그럴 장면. 왕의 배들이 어둠속에 웅크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 외도, 소매물도.

BGM : '마도로스K의 모험 Ⅱ' from 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


외도를 한바퀴 걷고 돌아나오던 길, 선착장이 가까워졌다 싶어서 바다를 내다보니 오밀조밀

덩어리가 하나 떠 있었다. 뭔가 싶더니 점점 선명하게 보이는 그것은 똑같은 사이즈의 배 다섯 척.

외도를 오가는 수십대의 선박들이 시간에 맞추어 선착장에 들고 나면서, 기다리는 배들은

저기에 사이좋게 나란히 정박을 해두고 있나보다. 자동차에 비기자면 저기는 일종의 주차공간,

선도 그어지지 않은 바다 위에서 솜씨좋게도 딱딱 기장도 맞추고 각도도 맞추어 주차를 해뒀다.

그 와중에도 한 대가 새롭게 주차를 하려는지 그 옆으로 접근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모자라

미처 '마도로스K'의 마술적인 주차 실력을 일견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다섯 대가 이렇게 우르르 정렬해선 바다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떠 있으니 재미있다.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무너뜨린 '연환계'가 떠오르기도 하고, 뭔가 선박들을 모아 커다란

벽을 만들어둔 느낌.




조그만 선착장 위에 부려진 채 커다란 동물처럼 웅크리고 있던 짐꾸러미와,

어딘가에 그 끝이 묶이지도 않은 채 하염없이 감겨있을 뿐인 투박한 밧줄과,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움키고 있었을 구명튜브의 뻥 뚫린 가슴 속으로,

병풍처럼 앞바다를 둘러친 섬들의 어깨를 훌쩍 짚고 넘은 햇살이 달겨들었다.



@ 외도 선착장.

해질녘 단수이항, 통통배에서 내려 뭍으로 오르는 사람들.

까만 실루엣으로만 남은 저것들-포클레인이니 중장비 따위-가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그래도 검푸른 바다와

파스텔톤이 은은히 번져나가는 하늘이 참 이뻐서.

그리고 다시 떠나는 통통배들, 어둠은 조금 더 깊어졌고 건너편 해안의 불빛도 조금 더 강해졌다.





문득 길 옆에서 걷는 남자를 만났다. 하얗게 친 백구가 반들거리긴 하지만, 뭐 과히 놀랍진 않다.
 
아마도 꿀두피 윤성호 덕분인 건가..

근데 아니다. 스쿠터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날씬한 다리하며, 살색그림 펑펑 보여주시는 웃도리하며.

탱크탑처럼 가슴께에서 바싹 쪼인 웃도리, 그리고 허벅지 윗둥치까지 올라온 몽땅한 미니스커트.

이정도는 입어줘야 상하이 패셔니스타. (날씬한 다리가 섹시하다...고 느끼면 안 되는 건가...ㄷㄷㄷ)








해가 갓 떠오르려는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부산 후쿠오카를 향하기 직전이다. 한번 꼭 가보아야

겠다는 생각만 하다가, 문득 생겨난 찬스에 얼씨구나, 하면서 올라탔다. 비록 언제 환전하는 게 좋을까 환율추이를

보던 며칠새 백원씩 급등하는 환율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후쿠오카에 뭐가 있는지, 서울에서부터 어떻게 왔다

갔다 하는 게 좋을지 요리조리 따져보면서 여행 자체보다 좋기도 하다는 '여행의 전희'를 맘껏 누렸다.

기차를 타고 부산역에서 내리면 바로 KTX입구 오른쪽으로 이렇게 순환셔틀버스 승차장이 있다. 전철역으로

한정거장, 부산역-중앙동역(여객터미널이 있는) 구간을 무료로 운행하는 셔틀은, 그렇지만 7시 50분 가까이

되어서야 첫 차가 운행한다. 내가 탈 배는 오전 8시 30분 출발, 한시간 전까지는 안전하게 도착하라 했으니..셔틀은

아쉽지만 포기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기본요금 거리, 참 부산 택시의 기본요금은 1900원이다.

11월 중순에는 그래도 기름값이 꽤나 내려간 걸로 알고 있었는데, 오를 때와는 달리 그렇게 금방 반영되지는 않는

듯 하다. 왕복 뱃삯 이외에 유류세가 부과되는데, 부산에서 갈 때는 삼만원, 후쿠오카에서 올 때는 이천엔. 100엔에

대략 1500원 이상하고 있으니 한국이나 일본이나 비슷한 금액의 세금이 부과되는 셈이다. 거기에 더해서

부두 이용료도 내야 한다. 부산에서는 3,200원, 후쿠오카에서는 500엔. 가기 전 인터넷이나 여행사를 통해 정확한

액수를 알아보려 했지만 워낙 변동이 심한 탓인지 여객터미널에 도착해서야 정확한 금액을 확인했다.

드디어 출발, 부산서 후쿠오카까지 고속으로 주파하는 이 배는 수면위 2미터를 부상해서 달린다고 한다. 왜 그

호버크래프트처럼 공기를 분사해서 떠 있는 건지, 아님 다른 뭔가 원리가 적용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엔간한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3시간이면 충분히 후쿠오카에 닿는다고 했다. 푸른 하늘에 날아가는 갈매기떼들이 부럽지

않게도, 드디어 비행기가 아닌 다른 교통수단으로 외국을 밟게 되는구나, 싶은 느낌. 배를 타고 국경을 넘는다니,

 한'반도'라곤 하지만, 기실 섬나라에 살고 있었단 실감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고속여객선의 실내. 상당히 안락한 의자에 넓찍한 공간까지. 우등고속버스, 혹은 그 이상으로 편안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보통 배를 타면 느끼는 파도모양의 율동감이 거의 안 느껴졌다.

깔끔한 식판거치대에 배 안내문, 면세품 이용안내문까지 가지런히 꽂혀있다.

옆에 지나치는 저 배는 대마도로 가는 배란다. 최근 일본 우익세력이 대마도의 실효적 지배권이 한국인에게 넘어

간다느니 어쩐다느니, 결국 독도를 노린 술수를 부리고 있다지만, 어쨌든 저 배에 타는 사람은 그렇게 많아보이진

않았다. 실제 대마도땅을 한국인이 매입한 것도 고작 0.5%라던가, 그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던데, 엄살쟁이 우익들.

배는 이렇게 부산항의 등대를 지나,

망망대해를 달렸다. 시속 80킬로미터라고는 하지만, 어디 하나 기준잡을 곳이 없는 망망대해인지라 그 속도감이

별로 실감이 안 난다. 다만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는 느낌, 파도 따위에 아랑곳없이 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은

강하게 들었다. 이건 물에 둥둥 떠다니는 배가 아니라 수면 위 2미터 수준으로 공중부양한채 달리는 배인 거다.

한 세시간 가까이 지날 즈음, 우리가 가는 곳에서 오고 있는 여객선이나 고깃배들도 보이고, 첨엔 쪼그만 점처럼

보였던 섬들이 금세 부풀어오르더니 시야 뒤로 사라져 버렸다.

저기 조그맣지만 분명하게 형체를 드러낸 대형 관람차가 있는 곳에서 후쿠오카 인근 여행명소가 시작되는 거다.

저기가 이름이 뭐였더라, 후쿠오카에서 배를 타고 조금 가야 하는 곳이라고 봤던 거 같은데.

하카다항에 거의 도착할 즈음, 배의 속도가 완연히 늦춰졌다는 느낌과 함께 입국 안내가 시작되었다. 양손가락

지문을 모두 요구하는 일본의 과도한 입국 심사가 인권 침해라는 비판도 많지만, 사실 주권국가 일본이 그러겠다면

딱히 외부에서 막을 방법은 없는 거다. 일본에선 일본 법을 따라야 하는 건 기본이요, 들어갈 때도 일본 법에

따라야 저런 '입국이 허가되지 않'는다는 협박에 쫄지 않을 수 있는 거다. 그치만 이미 저런 흉악한 안내문 자체로

살짝 심리적 위축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얼마전 내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다는 이야기에 느꼈던 모종의

불안감이 고개를 드는 것도 사실. 아니, 한국정부도 못 믿는데 일본정부는 어떻게 믿냐 말이다.

하카다항에 배를 대고 세관으로 올라서는 길, 부산까지 213킬로미터임을 알리는 표지가 붙어있는 항만의 건물.

웰컴투 후쿠오카, 세관을 거치기 전이라 그런지 촘촘한 그물이 일본땅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세관을

통과해야 비로소 그물이 걷힐 테고, 그러고 나서 맘껏 후쿠오카를 거닐어주겠다고 두근두근.

부산발 후쿠오카행 고속여객선 티켓. 배는 1층, 2층으로 나뉘어있는데 정말 아무것도 볼 게 없었다. 그리고 시속

80킬로-실감나지는 않았지만-로 달린다는 배답게 선내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해놓고, 듬성듬성 설치된 티비로

영화를 상영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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