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사에서 굳이 마애관음좌상 이야기를 따로 빼서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보문사라는 절 하나를 돌아보는 것만큼

마애관음좌상을 보러가는 길과 마애관음좌상 자체의 무게가 묵직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이렇게 보문사 극락보전을 돌아 마애관음좌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채 밟기도 전부터 부처님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다.

(이전 포스팅 :  석실 안에 모셔진 천오백년 전 부처님의 모습, 석모도 보문사에서.)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꽤 많이 남았다 싶은데 벌써부터 계단 양쪽에 버티고 선 석등에는 불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쌍쌍이 손을 잡고, 혹은 아이의 손까지 잡고 사이좋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지만 글쎄, 내가 본 바로는

계단 중간쯤부터는 가쁜 숨을 헉헉 내쉬며 대개 손을 놓고 제한몸 건사하기에도 힘겨워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약 10분 소요'된다는 이 계단은 경사가 꽤나 가파르기도 하고, 애초 절에서부터 마애관음좌상까지의 거리도

10분이 걸린다기에는 조금 무리다 싶은 1킬로미터 가량이라고 하니.

계단을 오르는데 눈에 띈 현수막 하나. 소원을 담는 곳이라나. 소원을 적어서는 유리병 속에 담아 100일을 채우고 나면

스님께서 축원을 올려주시고 태워서 날려보낸다는 건데, 딱히 불자는 아니지만 이런 걸 보면 왠지 한번 해보고 싶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소원이라고 하면, 음..아무래도 로또나 연금복권 당첨 같은 것 밖에 떠오르질 않는 걸 보면 딱히

부처님에게까지 들고 가서 부탁할 일은 아직 없는 거 같다.

계단을 오르면서 계속 보문사 쪽을 돌아보았다. 아직 기운이 팔팔하던 계단 초입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단풍진 숲속에

포옥 감싸여 있는 절의 전체적인 모습이 계단을 좀 오르면서 점점 각도를 달리해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거다.

이런 식으로 보는 각도와 방향을 달리 해서 보문사를 굽어 볼 수 있다는 건 마애관음좌상을 친견하러 가는 계단 위에서

얻는 예기치 않은 또다른 즐거움.


오르는 길이 어찌나 가파른지, 계단을 지그재그 모양으로 만들어 두었어도 어느 순간 아래를 내려보면 살짝 아찔하다

싶을 정도의 각도로 꺽어지고 있었다. 지그재그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길이 저 아래 어디쯤에선가 앙상한 나무사이로

삼켜져 버려서 이젠 더이상 보문사의 기와지붕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노랗고 따뜻해 뵈는 등불을 품고 있던 석등이 중간중간 있어서, 저기까지만 가서 쉬면 되겠다, 라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석등에서 석등을 마음으로 짚고 넘어가는데 점점 하늘이 어두워진다. 해가 워낙 짧고

금방 사그라져버리는 계절, 겨울이 오고 있는 거다. 마음이 급해지는데 앞에 왠 반짝거리는 유리병들이 보였다.


아까 계단 입구에서 봤던 그 소원을 들어준다는 유리병들이 여기다 모여있었다. 색색의 종이에 꾹꾹 눌러 씌인 사람들의

소원이 반짝거리는 말간 유리병 안에 담겨있었다.

그리고 용 대여섯마리가 서로의 몸을 비비 꼬며 또아리를 틀고 있는 그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 사이에도, 용의 사슴뿔 위에도

사람들은 겁도 없이 유리병을 걸어두었다. 저렇게 하면 용을 타고서 조금이라도 빨리 부처님께 가닿을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마애관음좌상 도착. 툭 튀어나온 눈썹바위 아래로 돌을 돋을새김한 부처님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알겠다. 여기 예전에 왔을 때는 문득 비가 나려서, 저 눈썹바위 아래에 바싹 붙어서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내려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때 고마웠어요 부처님, 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보문사는 600년경에 창건된 천년사찰이라 하지만 이 마애석불좌상은 아직 백년도 채 되지 않은 비교적 최근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높이가 9미터가 넘고 너비가 3미터가 넘는 이 커다란 부처상도 그러고 보면 내가 그날 그랬듯

이 눈썹바위 덕분에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거다.

툭 튀어나온 바위가 지붕처럼 부처님을 가호해주고 있는 셈, 그리고 그 부처님은 이곳에서 저 아래 보문사, 그 아래 석모도,

그리고 강화도 너머 멀리까지 굽어살피며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가호해 주고 있는 거랄까. 여기서

다시 내려다본 지그재그 계단은 생각보다 별로 안 길어 보이는 게 아쉽다. 실제로는 숨이 턱까지 차서야 올라왔는데.

신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은 언제나 참 연약해 보인다지만, 특히나 저렇게 단단한 바위에 모셔진 부처님 앞에 선

사람들의 모습은 더욱 조그마해 보인다. 그저 눈에 보이는 부분만이 아니라 마치 빙하처럼 저아래로 보이지 않는

커다란 낙가산 전체의 기운과 무게감이 부처님 조각에 실려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새 점점 날이 어두워지고

부처님 앞에 모셔진 촛불들이 더욱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 보문사 마애석불좌상(안내판 참조) :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 주지 이화응과 보문사 주지 배선주가 낙가산 중턱의 일명 눈썹바위에 조각한 것이다. 불상 뒤의 둥근

빛을 배경으로 네모진 얼굴에 보석으로 장식된 커다란 보관을 쓰고, 손에는 세속의 모든 번뇌와 마귀를 씻어주는 깨끗한 물을

담은 정병을 든 관음보살이 연꽃받침 위에 앉아있다. 얼굴에 비해 넓고 각이 진 양 어깨에는 승려들이 입는법의를 걸치고

있으며 가슴에는 커다란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보문사는 관음보살의 성지로서 중요시하던 곳이었다.


 


날씨가 꾸물꾸물하더니 딱히 기별도 없이 해가 넘어가버릴 생각인가 보았다. 해질 무렵 이곳에서 바라보면 서해바다로

곤두박질치는 붉은 해의 모습과 노을로 타오르는 하늘과 바다의 모습이 정말 장관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나는 올 때마다

날씨가 이렇게 흐린지 모르겠다. 이런 것도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이라면 인연이려나, 시시각각 어둠이 내려앉고 계단을

지키던 석등의 노랑 불빛이 둥실둥실 떠오르더니 보문사를 넘어 석모도의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향불이 쉼없이 살라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제각기의 소원을 빌고 부처에 의탁하며, 빨강노랑초록색 향에 불을 쟁여

부처님께 바치고 있었다. 거칠 것없이 바람이 휘몰아치는 곳이라, 바람이 한번 불어닥칠 때마다 바싹 빨아당기는

담배 끝처럼 향 끝에서 붉은 불꽃이 일렁이며 거침없이 타들어갔다. 향로에 무질서하게 꽂혀있는 색색의 향들이

만들어낸 모양이 삐죽삐죽 제멋대로의 고슴도치 같기도 하고.

이곳 보문사 마애관음좌상은 현재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세속의 차원에서 보자면

보문사와 더불어 인천이 품고 있는 관광 명소 중의 하나일 것이고, 부처님을 모시는 차원에서 보자면 이렇게 석등의

갓 위에까지 도톨도톨하게 돌멩이를 올려둘 만큼 절절하고 영험한 관음보살의 도량인 게다. 그리고 내게는, 아직

연이 닿지 않아 보지 못한 낙조 풍경이 숙제처럼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숙제긴 숙제지만 유쾌하게 받아들고

기꺼이 하고 싶은 그런 류의 숙제 말이다.




* 인천관광공사에서 컨텐츠 제작에 필요한 지원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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