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백록담은 생각보다 작았다. 물이 조금 마른 건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원래 저 사이즈만큼

물이 고여있다고 했다. 구름이 위로 지나면 순간 뿌옇게 변하기도 할 정도로 맑은 물이었는데

제법 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데도 백록담 밑의 바닥이나 수면 위의 물결이 일렁이는 것까지

전부 보인다는 게 신기했다는. 단순히 연못이 크고 작고를 떠나서 저 시퍼렇고 맑은 물빛과

주변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맞물려서 역시 백록담, 이란 감탄을 하고 말았다.



제주도를 수차례 여행도 하고 출장도 다녀왔지만, 생각해보면 한라산은 늘 '아웃오브안중'이었던 듯 하다.

기껏해야 섬 한가운데 딱 박혀서는 겨울철에 갑작스런 폭설을 쏟아붓거나 변덕스런 날씨를 만드는 주범이라고나

생각했을까, 제주도의 찾아가볼 곳 중에서도 늘 빠졌던 한라산은 그냥 배경화면처럼 거기 있었던 거다.


이번에 그 배경화면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져볼 기회가 있었다. 성판악에서 백록담으로 올라 관음사로

내려오는 구간, 오르는데 네 시간이 채 안 걸렸고 내리는데 다섯시간이 채 안 걸렸으니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런 구간이겠으나, 아무에게나 쉽게 열어주지 않는다는 백록담이 구름을 훑어내고 활짝 열렸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싶어서. BGM은 '헉헉헉' 쯤 숨이 턱에 닿는 소리라고 치고 사진만으로 포스팅.

백록담까지 오르내리는 길이나, 정상 아래로 깔린 운해나, 백록담의 미묘한 색감, 그리고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간다는 주목들의 기이한 형상들까지. 아,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오르고 싶어졌다는 정도는 말해둬야겠다.


충북 괴산의 산막이옛길, 예전에는 산골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옆 마을로 넘나들거나 장터갈때

이용하던 길이라던데 점차 마을이 조그매지면서 잊혀져가던 길이라고 한다. 최근에야 휘적휘적

구비진 강을 따라 오르내리며 내달리는 산길을 정비해서 근 삼 킬로미터에 이르는 '옛길'을

되살려냈다던가. 제주 올레길의 예기치 못한 성공담이 지자체에 던진 울림은 이다지도 컸지싶다.

세 그루의 연리지, 아니 여섯 그루의 연리지라고 해야 하나. 서로 사이좋게 몸을 섞은 채

고개를 살풋 외로 꼬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한 세 커플나무들. 연리지 하나가 생겨나기만 해도

울타리도 치고 포토존도 만들고 수액도 맞아가며 특별대접을 받는 판인데 무려 세 쌍이라니.

옛길 초입부터 계속 유유한 호흡으로 따라오는 건 괴강. 그러고 보니 이곳의 지명은 괴산,

강이름은 괴강. 57년에 이승만대통령이 괴산수력발전소를 만들고선 호수가 되어버려 괴산호라

불리게 되었다곤 하지만, 조금씩 방류되고 있는 건지 바람이 미는 건지 아니면 드문드문 다니는

조그만 철선과 목선이 만드는 건지 수면에 잔물결이 꼼꼼히 새겨져 있었다.

나무에 묶인 그네에선 아이들이 꺅꺅 소리를 질러대며 산아래쪽을 향해 발을 구르고 있었다.

저러다 휘잉~ 하고 날면 그대로 괴강, 괴산호까지 날아가겠고만 겁나지도 않는지 마냥 즐거운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 살벌한 그네 대신 조용조용 잔물결처럼 일렁이는 흔들의자에서 잠시

앉아 쉬었다. 전날 내렸던 비가 어느결에 말랐는지 보송보송한 의자에서 슬몃 나무냄새가 났다.

출렁다리, 어렸을 적 고성 잼버리장에서도 뛰놀아보고 했지만 이렇게 길고 출렁대는 다리는

처음 본 거 같다. 이거 재미있겠다 싶어서 우다다 걷다가 일부러 흔들기도 하고, 그러다가

뒤의 꼬맹이가 완전 겁먹은 거 보고 미안해져버려서 사뿐사뿐 흔들림없이 걸어보려 했지만

몇걸음 가지 못해 다시 출렁출렁. 처음 느낌 그대로, 어른들한테도 꽤나 길고 재미있던 코스. 

출렁다리에서 내려와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이는 단단한 흙길을 밟으니 기분이 상쾌하다.

흔들리던 발아래 나무판자 대신 땅을 딛으니 시선이 자연스레 주변을 스캔하게 되는 거다.

약간 뜨겁긴 하지만 아직 설익어 부드러운 느낌의 오전 봄햇살도 그렇고, 본격적으로

짙어지기 전의 싱그러운 녹색 풀떼기 같은 것들.

산막이옛길은 그냥 하이킹 삼아 가볍게 걷는 길도 좋지만 저 위로 본격 등산로를 따라 걷는 것도

꽤나 좋을 거 같다. 대충 코스를 짜보자면 등산로로 크게 돌아서 산막이마을까지 가서는 옛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 정도가 좋지 않으려나. 여기가 바로 등산로와 옛길이 갈라지는 지점인데

등산로라기엔 넘 푸릇푸릇하고 완만한 길이 시작되는게 꽤나 유혹적이었다.


괴산수력발전소가 물을 가두고 나서 몇개 마을이 잠기고 구불구불하던 강의 생김생김도 많이

변했다지만 여전히 옛길 옆을 따라 출렁이는 강물은 구불한 실루엣을 간직하고 있었다. 제법

폭이 넓은 강, 호수를 끼고 있어서 그런지 바람이 굉장히 시원하다. 미처 땀이 솟을 겨를도

없이 에어콘바람처럼 시원한 산바람 강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연화담. 지금은 연꽃이 피워올려지는 저 연못이라지만 이전에는 천수답, 논이었다고 한다.

충북 괴산, 여기 옛길까지 차로 달리며 놀랐던 건 마치 강원도의 느낌처럼 쉼없이 울룩불룩

높진 않아도 야무진 삼각산들이 늘어서있던 풍경. 논농사를 짓기엔 땅이 부족했던 걸까,

저 손바닥만한 세모땅에까지 벼를 심었다니. 직각이등변삼각형 모양, 올만에 떠올린 단어.

산막이옛길을 따라 걷다가 발견한 큼지막한 동굴이 있었고 왠 뜬금없는 호랑이 상과 인형이

놓여있었다. 앞에 세워진 표지판을 보기도 전에 뭐야 이거, 호랑이굴이야 했더니 역시나.

믿거나 말거나 1960년대까지 호랑이나 다른 산짐승이 자리잡고 살던 굴이라고 하는데

그것보다 더 놀라웠던 건 대체 왼쪽의 호랑이 인형은-ZOO COFFEE에서 들고 온 듯한-

어제의 장대비를 견디고 저리도 뽀송거리는 걸까.


적당한 강약으로 오르내리는 계단도 있고, 그리 좁지 않은 너비로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나무

데크 길이 쭉 이어지고 있어서 아이들도 신나라 걷고 뛰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 지칠 만하면

나타나는 전망대니 약수터니. 앉은뱅이가 물을 마시고 벌떡 일어났다나, 그런 약수터의 전설이

무색하게 물이 아낌없이 펑펑 흘러나오던 물맛은 나쁘지 않았다.

비가 그친 연후라 그런지 완전완전 산뜻한 초록색을 뽐내며 옛길을 터널처럼 감싸고 있던

나무들, 그리고 제법 울창해진 그 틈새를 비집고 기어이 불어오는 산바람과 이따금씩 뚝뚝

떨어지는 봄볕 쪼가리들. 어디선가 풍기는 나무냄새, 꽃냄새까지 더해지니 정말, 한없이

걸어도 좋겠다 싶었다. 그야말로 풀향기 가득한 이런 길만 쭉 이어진다면.

괴강에서는 선착장과 선착장, 산막이옛길의 처음과 끝을 잇는 목선과 철선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옛길 위의 사람들을 앞서 달리고 있었다. 배를 몇번을 보내고 맞이하며 급할 것 없이

걷다가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선 반짝, 초록빛 나뭇잎새를 뚫고 햇살이 눈부셨다.


중간중간 지게에 얹혀있던 것들은 이곳, 산막이옛길을 노래하는 시들이 적혀있었다. 제법 많은

시들이 이곳의 경치와 분위기와 역사에 감동하고 감탄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렇다. 풍경이 이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의 말을 건네 들을 필요가 있나. 그래서 내용은 늘 스킵,

차라리 지게 위에 늘어뜨려진 성긴 나뭇잎을 보며 안구를 정화. 피톤치드를 달라며.

어디였더라, 그랜드캐년이었던가, 바닥이 유리로 된 이 전망대는 분명 그걸 염두에 두고 만든 게다.

뭔가 바닥을 보고 겁먹기에는 온통 초록빛의 여리여리한 이파리들, 그리고 보기만 해도 보들거리는

괴강의 잔물결들이었는지라 저런 꼬맹이도 펄쩍펄쩍 겁먹지도 않고 뛰놀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만큼

밖으로 불룩 나가서 바라본 풍경은, 강 한복판은 아니어도 대충 깊숙히 들어와 강의 좌우를 바라보는

느낌을 줬다. 잔뜩 굽어진 강물, 강물 따라 잔뜩 굽어진 산등성들, 또 산등성들 따라 굽어진 초록빛들.

총 길이가 채 삼 킬로미터가 안 된다는 거 같던데, 조금씩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제

슬슬 길이 끝날 때가 되어가려나. 좀더 길면 좋겠는데. 좀더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마음이

가득한 채 아껴 핥듯이 한걸음 한걸음 길을 뒤로 밀어보내고 있었다. 갈수록 멈춰서서 사진을

찍어 남기고 싶은 마음만 강해지다 보니 사진은 어느새 기백장을 헤아릴만큼 찍어대고 있었고.

산딸기길. 6월이 되어야 산딸기가 길 좌우로 잔뜩 피어나 붉고 푸른 색감이 강렬할 텐데

지금은 그저 푸른 색 일색이었다. 날이 좋은 주말에는 이 길 가득 사람들이 걷는다는데

이때는 그래도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던 거 같다. 그래도 주차장은 이미 만차가 되어

주변 골목까지 차들로 빼곡하게 넘쳐나는 상황이었지만.

뭘 파종한 걸까, 갈빛 땅위에 초록색으로 가지런히 빗질을 한 듯한 평행선들 너머로 잔뜩 여윈

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선착장 도착. 여기가 산막이옛길의 끝 '산막이마을' 선착장이고, 애초 출발했던 지점은

'차돌바위' 선착장이라던가. 십오분만에 바로 가는 소형배는 오천원, 그리고 멀리 한바퀴

돌아서 한시간여 유람까지 하는 유람선은 만원.

11인승인 소형배는 두 종류가 있었다. 목선이랑 철선이라고 부르던데, 이게 그 목선.

뭔가 정신사나운 만국기가 무당집처럼 내걸려 있는 거 빼고는 그래도 좀 운치가 있달까.

배 뒤로 남겨두는 궤적도 뭔가 뽈뽈뽈뽈, 통통거리는 엔진소리에 맞춰 리드미컬하다.


아쉽게도 내가 탔던 건 목선이 아닌 철선. 11명 이상이 타면 뽀글대며 가라앉지 않을까 싶은

간단하기 짝이 없는 모터배였다. 그래도 뭐, 괴강 한복판에서 올려다보는 양쪽 강가의

풍경이란 건 다른 맛이 있었으니 배가 어쨌거나.

산막이옛길 반대편 강가에도 습지가 제법 발달해 있었고, 나무가 뭉텅이뭉텅이 소보록하니

자라나 있었는데 아직 그쪽에는 이런 길이 나있지는 않다고 한다. 거참..딜레마다. 좋은

길을 보면 걷고 싶은데, 또 사람들이 한둘 모여 걷다 보면 길이 황폐해지고 자연도 조금씩

상해버릴 텐데. 산막이옛길도 잘 관리되고 보전되었으면 좋겠는데..그런 점에서 나무데크로

단단하게 만들어놓은 길이 조금 아쉽긴 했다.

설렁설렁 걷긴 했지만 한시간반 정도 걸려 꼼꼼이 걸었던 길을 이십분도 안 되어서 훌쩍

되돌아오다니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 눈으로 옛길을 되짚다가 불쑥 뜨인 난파선에 시선이

가기도 하고,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으로 칠해둔 남한 최초의 수력발전소라는

괴산수력발전소의 유머러스함에 웃어주기도 하고.

그렇게 한 세네시간동안 잘 돌아본 산막이옛길, 다시 돌아나오는데 아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사인이 샛노랗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목,

큼지막하고 선명하게 새겨진 산막이옛길. 그리고 빨간 화살표가 선연한데 아까는 왜

저걸 못 봤나 했더니 주차장이 만차라 반대쪽으로 돌았더랬다.





백운산에 오르려다 개울을 만났다. 날이 풀리고 산이 뱉어내는 물, 개울 너머가 궁금해서

결국 벗어던진 양말과 신발 속 창백한 맨발이 꽁꽁 얼어붙어버렸다.

花. 신발을 벗어던지고 시원하다 못해 모세혈관까지 꽁꽁 얼어붙는 듯한 개울에 발담그게 만든

풍경, 낙엽이 갈빛으로 깔린 바닥 가운데로 개울이 졸졸거리며 흐르고, 나무들엔 물이 올라

불쑥 연두색 새순이 돋았고, 개울 옆에는 점점이 노랑빛 꽃이 한웅큼씩.

水.
마침 드문드문 내렸던 비로 물이 불기도 했나보다. 수량이 넘쳐서 곳곳에 엉킨 채 섬을 이룬

낙엽들, 벚꽃잎들, 그리고 위에서부터 떠내려왔을 썩은 나뭇가지들. 그렇게 자연이 순환하는

개울 위로 세상은 온통 푸릇푸릇하다.

 


花. 산등성에 가렸는지 아직 꽃눈이 채 다 벌어지지 않은 꽃송이들이 있었다. 분홍색 빛깔이

여리여리하면서도 어찌나 곱던지, 뒷배경처럼 싱싱한 연두빛이 깔린 위에 압정처럼

꽂혀있는 꽃봉오리들이 조만간 폭죽처럼 펑펑 터뜨려지리란 예감에 괜히 가슴이 설렜다.


生. 땅을 온통 뒤덮은 채  사체들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피어난 얄포름하고 여린 이파리들이

눈에 띈다 싶더니, 그 위에 얹힌채 바람에 풀썩이는 노랑 알갱이들이 궁금했다. 잔뜩 몸을

구부려 눈에 힘을 주니 보이는 건 꼬물거리는 아기 거미들.

新綠. 그야말로 신록, 올해 새롭게 뻗어나는 녹색의 잎사귀들. 하늘을 향해 양손을 활짝 펼친

그런 겁없고 당찬 느낌이다. 온몸을 들어 하늘로 향하는 듯한, 그런 거침없고 적극적인

모양새 덕에 굉장히 동적인 분위기가 나는 거다. 게다가 저 이파리들에 햇살이라도 비칠라치면,

온통 속살까지 투명하게 반짝거리며 빛나는 모습이라니.

 

影. 산이 흘려낸 물들은 모두 저수지로 모였다. 봄바람이 불자 바다처럼 잔물결이 일었지만,

그래도 제법 잔잔한 수면 위로 녹색의 나무가, 녹색의 둑길이, 녹색의 산이 전부 담겼다.

가을철의 나무처럼 아직은 헐벗고 앙상해보이는 나무들이지만 좀더 부드럽고 긴장감이

느껴지는 것이 역시, 봄날의 새순을 기다리고 있다는 분위기가 물씬 맴돌았다.




산성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얼추 올라서는, 간단히 수어장대 어간의 남한산성 길을

돌아보기로 했다. 고등학교 2학년때 담임선생님과 함께였다. 그게, 그러니까 15년전이다.

그때 그렇게도 커보이던 선생님이었는데, 돌이켜 생각하면 지금 내 나이뻘이셨던 거다.

선생님복은 참 많은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는 역시 고2때의 선생님이셨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기말고사가 끝나면, 그리고 모의고사가 끝나면 때마다 뭔가 아이들과

함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셨었다.

당시에 막 들어서기 시작한 멀티플렉스 상영관 하나를 통째로 빌리다시피해서 영화도 같이 보고,

연극을 하던 친구 모습도 볼 겸 대학로에 가서 연극도 다같이 보고, 고수부지에 가서 축구, 농구도

하고 고기도 구워먹고. 남자애들이 바글바글한 남학교에서 그런 문화생활을 앞장서 챙겨주시던

선생님의 존재는 정말 특별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수학여행 때. 큰 방 하나에 애들을 다 모으시더니 맥주를

두 박스쯤 사오라고 하셔서는 선생님이랑 같이 마시자고. 담배 필 사람도 선생님 앞에서 피우고

대신 밖에 나가서 꼬장부리지만 말라고 하셔서 아이들 모두 함께 했던 게 참 좋았다. 그때야말로

잘살고 못살고, 라거나 공부잘하고 못하고, 같은 구분 없이 다 재미있던 최고의 순간.

선생님과 거의 매년 만나뵙긴 했지만, 늘 감탄스러운 점은 무엇보다 그거다. 뭔가 '어른'으로

딱딱하게 굳어진 분이 아니라, 매년 생각하시는 게 변하고 발전하고 그렇게 계속 생각하시고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 내가 옳다, 라거나 나를 따르라, 가 아니라, 내가 지금은 이전에 비해

이렇게 바뀐 생각을 하고 있고 그때 인간적인 약점은 이러저러한 것들이 있었으며, 결국은

선생님도 사람이라는 걸 늘 강조하시는 분이라는 게 대단하다.

 

그래서 선생님과의 대화는 과거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금세 현재의 생활, 현재의 세계로 돌아오게

되는 거다. 선생과 학생의 단순하고 선명한 구도로 나뉘었던 그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복잡하고

단단해진 구도에 더해 제각기 머리도 굵어져 고집도 세지고 주관도 뚜렷해진 사람들의 이야기란

더러는 긴장감이 흐르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고. 천안함이니 무상급식이니, 시사 이야기도 하고

가족 이야기, 사는 이야기까지 생각보다 이야깃거리는 참 많지 싶다.

어쩌면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선생도 사람이다'란 이야기는 그런 거 같다. 사제의 위치가 정해져서

가르치고 배우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자리가 될 수 있도록, 앞서거니

뒷서거니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권위의식이나 수직적인 위계없이 이야기하자는

배려, 그러고 보면 선생님의 이야기나 생각은 조금씩 바뀌었을지언정 그 기조는 늘 한결같았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이제는 다 커서, 제 사업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애기도 낳고. 뭐 나랑은 해당되는

게 하나도 없긴 하지만 우야튼. 남한산성을 걷다가 백숙에 얼콰하니 막걸리를 마시고는 족구 한판

뛰고 나니까 알콜기운이 싹 빠져버렸댔다.





최악의 황사라더니 햇살만 눈부시던 날. 아무래도 5월의 첫날 메이데이의 집회/시위를 막으려던

음모는 아닌가 싶도록 그럴 듯한 날씨였다. 붉은 목련이 햇살을 맞고 온통 하얗게 탈색된 그런 날.

서울 근교에 있어 지하철로도 갈 수 있는 경기도 모락산, 산 이름을 발음하니 재미있다 싶었는데

사모할 모, 낙양 낙, 해서 조선시대 왕이 낙양을 사모하며 올랐던 산이라나. 봄볕이 갸냘픈 신록을

뚫고 뚝뚝 뭉텅이로 떨어져 있는 그런 산길로 접어들었다.


몇 걸음 들어가니 좀더 짙어진 나뭇가지들의 차양, 덕분에 좀더 짙어진 녹색과 갈색의 향연.

자잘한 잎새들이 사방에 온통 튀어버린 페인트 물감처럼 점점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황사가 극심할 거라는 일기예보 탓인 듯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고즈넉한 산길.

겨울산이 잔뜩 품었던 잔설들이 투명하고 맑은 물이 되어 산의 옆구리에서 줄줄 새어나오기 시작,

사람들이 걸어서 오르내리던 계단이 한단한단 물그릇이 되어서 잔뜩 물을 움켜놓았다.

하늘이 조금 뿌옇긴 했지만, 그래도 갓난애 뺨같이 보들거리고 싱그러운 느낌의 둥근 산자락이다.

아스파라거스나 브로콜리처럼 봉긋봉긋, 그러면서도 울룩불룩한 질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산등성에서 또다른 등성으로 넘어가는 길, 잘 정돈된 잔잔한 평지를 지나니 또다시 나무뿌리가

울퉁불퉁 핏줄처럼 돋아난 오르막길이다. 뭐하나 반듯하게 수평이 잡히지도 않고, 이리 뒤뚱

저리 뒤뚱 기울어진 천연 나무계단에 약간씩 뒤틀려 자라나는 나무들, 덩달아 지나는 사람들도

제각기의 각도로 기울어진 채 산을 타고 있었다.

잔뜩 말라붙은 채 두껍게 나무에 덧붙어있는 껍질들, 드문드문 떨어져나간 모습이 더 황량하지만

그 뒤로 보이는 반짝반짝 연두빛 꼬마전구들이 켜진 덕에 조금은 부드럽게 다독다독. 근데 저건

무슨 코르크나무도 아닌데 나무껍데기가 저렇게 두꺼운가.


아무래도 블랙 & 화이트의 그림에서는 뭔가 서늘하고 가라앉은 느낌이 나는 거 같다. 아무래도

봄의 신록을 잡아내기에는, 저렇게 하늘 향해 조막손을 펼친 새순들을 찍는다 해도 왠지 그냥

전부 겨울산, 겨울나무 같은 느낌. 뭔가 분위기도 무거워지고 사연있는 느낌이랄까.

여릿한 잎사귀의 유아틱하게 작고 귀여운 비율을 가진 모양새도 모양새지만, 채 제대로

염색되지 않은 옅고 여린 빛깔이 아무래도 어린 잎의 뽀인트 아닐까. 저런 연두빛 잎새로

쫙 한줄기 햇살이라도 들이치면.


문득 느낌이 이상해서 하늘을 보면, 문득 파란빛이 담겼다간 이내 뿌옇게 흐린 구름이나 먼지에

덮여버리곤 하는, 그런 패턴이 반복되는 날씨. 그런 침침한 하늘 아래 침침하게 뻗는 나무의

잔가지들, 그리고 물기 뺀 큰 붓을 비틀어 대충 꾹꾹 누른 듯한 연두빛뭉치들. 청소 오랫동안


안한 집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먼지 뭉치 같기도 하다.

모락산 정상, 그렇게 높지 않은 산이라 쉬엄쉬엄 오르멍 사진찍으멍 밥먹으멍 놀았지만 금세

올라버렸다. 아래로 펼쳐진 건, 자줏빛 진달래숲, 연둣빛 나무숲, 그리고 회색빛 아파트숲.

휘휘 둘러보다가 문득 시선이 콱 꽂혔던 풍경이다. 하늘은 여전히 뿌옇지만 저게 황사인지

안개인지 구름인지는 모르겠고, 그 아래 여전히 까슬한 채 잎사귀옷을 챙기지 못한 나무들이

부드럽게 뭉개져버린 풍경 속, 연둣빛이 저렇게 강렬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모락산에서 능선을 타고 가면 바로 이어지는 백운산,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뭐,

표지판이 말해주겠지 싶어서 설렁설렁 내딛던 발걸음. 양쪽으로 아직은 힘이 덜 붙고 나이가

덜 찬 나무들이 구불구불 길을 만들어주던 그 오솔길을 세심하게 헤아려주던 봄바람.

지루했던 겨울과 지겨워질 여름 사이에서 잠깐 주어지는 봄날, 한눈팔 시간도 없는 거다.




봄이면 으레 드는 생각. 뭔가 죽은 줄 알았던 것들이 저런 생명을 품고 있었구나. 만물이

푸릇푸릇 움트기 시작하고 죽은 듯하던 나뭇가지에서 어여쁜 연두빛의 잎사귀가 꼬물꼬물

기지개를 켜는 시간이라는 생각이다. 너무 작고 여려서 손가락끝 갖다대기도 저어스러워지는

그런 여린 속살이 어떻게 저런 딱딱하고 두텁한 나뭇가지를 뚫고 나왔을까.

거칠한 나뭇가지를 기어가는 빨간 벌레인 줄 알고 자세히 살폈더니 꽃눈이었다. 전혀 나뭇가지와

어울리지도 않고 융화해보이지도 않는, 툭 돌출한 까실까실한 꽃눈. 일단 한번 눈에 뜨이고 나니

나뭇가지 곳곳에서 툭툭 터져나오고 있었다. 정답을 알고 난 숨은 그림찾기처럼.

고만고만하니 고개만 삐죽이 내민 꽃눈, 잎눈들이 아니라 나름 날개를 펼친 아이들. 바싹 마른채

툭툭 분지러질 거 같이 위태한 나뭇가지 끝에서 한웅큼 새순이 올랐다. 보기만 해도 보들보들.

그렇다고 이 따뜻한 봄날이 온통 생명의 기운,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으로만 충만한 건 아니다.

겨우내 산이 품고 있던 물들이 흘러넘치는 개울가에 푹신하도록 뭉쳐있는 솔잎들, 그리고

이미 분해되기 시작한 그 주검들 위에 내려앉은 얇고 투명한 벚꽃잎들. 쓰나미가 몰아닥쳐

온갖 부산물들이 뒤엉킨 그런 현장처럼 뒤숭숭하고 비감한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그 와중에도 드문드문 바람결에 휘감겨 개울로 낙하하는 벚꽃잎들. 이미 많이 상하고 시든

꽃잎이지만 벚꽃잎의 위엄은 그대로다. 새하얀, 투명한, 그리고 입술처럼 감각적인 모양새까지.

물길을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돌틈에 숨어 한숨 돌리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만나서

넝출거리며 비비대기도 하고.


물살이 빨라지는 곳, 돌멩이 위에 차곡차곡 잔뜩 걸려있는 낙엽들 위에 슬쩍 얹혀버린 꽃잎

한장이 동그란 구멍처럼 보이기도 하고. 보글보글 봄볕에 끓는 물빛이 투명하기만 했다.

더러는 이렇게 물살에 휩쓸리지 않고 어딘가에 단단히 정박중인 고목나무를 붙잡고 있기도.

옆에는 그새 형체를 사그라들어가버린 벚꽃잎의 자취가 남았다. 조금은 서늘한 기분.

개울가 옆에 하얗게 내려앉은 벚꽃잎들, 녹지 않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일 듯한 기세로

바닥을 온통 하얗게 덮은 채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나풀나풀.

 

개울이 흘러 저수지에 다다랐다. 전날의 폭우로 잔뜩 흐려진 수면 위에서 더욱 싱그러운

연두빛의 잔가지들. 저 수많은 뉘앙스의 색감을 표현할 단어란, 초록색, 연두색, 연두빛,

풀색, 누런색, 노랑색 등등이 뒤적뒤적 뭉쳐진 그 무언가쯤이 되려나.

딱딱하고 바싹 말라 되려 쭉쭉 갈라터지는 나뭇가지 속에 저런 솜털보송보송한 잎사귀가

숨어있었다는 것도, 조그만 티눈같았을 점에서부터 저렇게 귀엽고 앙증맞은 잎사귀

형체를 뻗어내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 저 부드러운 잎사귀에 떨어지는 이 따사롭고

포근포근한 봄볕까지. 모든 게 다 황홀하던 어느 봄날.




@ 백운산.(경기도 의왕시, 백운호수 옆)

(오늘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바램 >

1. 시산제 행사는 지방 특색과 향토색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음을 이해바랍니다.

2. 산에 대한 의례적인 예식 행사이니 종교적인 부담스러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산악인의 마음가짐으로 이해바랍니다. (큰절 대신 묵념으로 대신해도 괜찮습니다.)

 

 

ㅇㅇ 산악회 계룡산 시산제 식순 & 축문

 

1. 개회식 [사회자]

 

* 지금부터 시산제 개회식이 있겠습니다.

* 모든 회원님들은 자리에 정렬해 서 주시기 바랍니다.

* 지금부터 신묘년 ㅇㅇ 산악회 시산제를 거행하겠습니다.

* 일동 차렷!

* 순국선열 및 먼저 가신 산악인에 대한 묵념이 있겠습니다.

* 일동 묵념!

* (20초후) 바로!

* 다음은 산악인 선서 순서입니다.

* 선서는 산악대장님께서 해주시겠습니다.

 

2. 산악인 선서 [산악대장]

 

* 산악인은 /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 정열과 협동으로 /

온갖 고난을 극복할 뿐 /

언제나 절망도 포기도 없다. /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 /

아무런 속임도 꾸밈도 없이 / 다만 자유와 평화, / 사랑의 /

참 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따름이다.

 

3. 회장 인사말 [회장]

 

* [사회자] 회장 신년인사가 있겠습니다.

회장 인사 :

 

 

4. 시산제

 

* [사회자] 지금부터 신묘년 ㅇㅇ 산악회 시산제를 거행하겠습니다.

* [사회자] 강신(降神, 신을 모심)이 있겠습니다.

* [사회자] 모두 단정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시산제에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초혼관인 산악회 회장님께서는 제를 올리기 전에 경건한 마음으로 촛불을 켜시고 분향하시기 바랍니다. 집사는 우측에서 도와주시기 바라며, 회장님은 잔에 술을 받아서 땅에 세 번 나누어 붓고 엎드려 초혼문을 낭독하시기 바랍니다.

 

* [회장 : 초혼문]

招魂文 :

 

ㅇㅇ 산악회 모든 회원들을 지난 한해동안 무사하게 산행할 수 있게 도와주신 천지신명님과 이땅의 모든 산신령님께 감사드리고, 또 신묘년 올 한해동안 무사히 산행을 하도록 보살펴 주십사하고 부족한 정성이지만 성심을 다하여 제물을 마련하여 정기 어린 이곳 계룡산 정상에서 신령님께 바치오니, 신령님께서는 인간 세상에 내려오시에 임재(臨在)하여 주시옵소서.

 

* [사회자] 다음은 참신이 있겠습니다. 다 같이 세 번 큰절을 하시기 바랍니다. 일동삼배!

* [사회자] 이번은 초헌(初獻) 순서입니다. ㅇㅇ 산악회 회장님께서 산신께 첫 잔을 올리겠습니다. 초헌관은 산신계 잔을 올리고 절을 세 번 하시기 바랍니다.

 

* [사회자] 독축(讀祝)이 있겠습니다. 축문은 ㅇㅇ 산악회의 부회장님께서 낭독을 하시겠습니다.

 

* [부회장 : 축문]

신묘년(2011) ㅇㅇ 산악회 祝文 :

 

유세차~

서기 2011(신묘년) 312(음력 28)

아름다운 마음으로 화합하며 친목을 도모하는

ㅇㅇ 산악회 회원 일동은 시산제를 거행함에 앞서

천지신명과 이 땅의 모든 산신령님께 엎드려 고하나이다.

 

전지전능하신 천지신명님과 이 땅의 모든 산신령님이시여!

금일 우리 ㅇㅇ 산악회 회원 일동은 정기어린 계룡산 정상에서

지난 한해동안 무사히 산행을 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심에 감사드리며

회원 모두의 정성을 모아서 성스러운 제를 올리나이다.

 

바라옵건대 신묘년 올 한해에도 ㅇㅇ 산악회의

무궁한 발전과 더불어 회원간에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며

각자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깃들게 하여 주시기를 엎드려 비나이다.

아울러 아름다운 조화로 가득 찬 산하를 걸을 때마다

자애로운 눈길로 굽어 살피시어,

우리 회원 모두에게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전지전능하신 천지신명님과 이 땅의 모든 산신령님이시여!

오늘 저희가 준비한 술과 음식은 적고 보잘 것 없지만

이는 저희의 정성이오니 어여삐 여기시고,

ㅇㅇ 산악회가 무사무탈한 산행을 하며

날로 번창하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라오며

이 한 잔 술을 올리나이다. 흠향하여 주시옵소서.

 

서기 2011년 신묘년 음력 28(양력 312)

 

ㅇㅇ 산악회 회원 일동 

 

* [사회자] 아헌(亞獻) 순서입니다. 아헌은 전임회장님께서 두 번째 잔을 올리겠습니다. 아헌관은 산신께 두 번째 잔을 올리고 세 번 절을 하시기 바랍니다.

 

* [사회자] 종헌(終獻)이 있겠습니다. 종헌은 산악대장 및 임원들이 잔을 올리겠습니다. 세 번 절을 하시기 바랍니다.

 

* [사회자] 다음은 헌작(獻爵) 순서입니다. 올 일년동안 무사산행을 기원하는 잔을 신령님께 올리실 분들은 앞으로 나오시어 차례로 잔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전임회장 및 임원진과 회원들)

 

* [사회자] 더 이상 헌작하실 분이 안 계시면 수저를 내리고 산신령님께 작별을 고하는 사신을 하겠습니다. 모든 분들은 정중히 큰절을 세 번 해주시기 바랍니다.

 

* [사회자] 다음은 소지(燒紙)를 하겠습니다. 회장님께서 안전산행을 기원하면서 축문을 태워 하늘로 날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5. 폐회

 

* [사회자] 이상으로 ㅇㅇ 산악회 2011, 신묘년 시산제를 마치겠습니다.

 

* [사회자] 행사를 위해 후원 및 도움을 주신 분들과 묵묵히 산에 와주시는 회원 친구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회장님께서는 시산제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게 골고루 술과 음식을 나누어 드리시기 바랍니다. .






신묘년(2011) ㅇㅇ 산악회 祝文 :

 

유세차~

서기 2011(신묘년) 312(음력 28)

아름다운 마음으로 화합하며 친목을 도모하는

ㅇㅇ 산악회 회원 일동은 시산제를 거행함에 앞서

천지신명과 이 땅의 모든 산신령님께 엎드려 고하나이다.

 

전지전능하신 천지신명님과 이 땅의 모든 산신령님이시여!

금일 우리 ㅇㅇ 산악회 회원 일동은 정기어린 계룡산 정상에서

지난 한해동안 무사히 산행을 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심에 감사드리며

회원 모두의 정성을 모아서 성스러운 제를 올리나이다.

 

바라옵건대 신묘년 올 한해에도 ㅇㅇ 산악회의

무궁한 발전과 더불어 회원간에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며

각자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깃들게 하여 주시기를 엎드려 비나이다.

아울러 아름다운 조화로 가득 찬 산하를 걸을 때마다

자애로운 눈길로 굽어 살피시어,

우리 회원 모두에게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전지전능하신 천지신명님과 이 땅의 모든 산신령님이시여!

오늘 저희가 준비한 술과 음식은 적고 보잘 것 없지만

이는 저희의 정성이오니 어여삐 여기시고,

ㅇㅇ 산악회가 무사무탈한 산행을 하며

날로 번창하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라오며

이 한 잔 술을 올리나이다. 흠향하여 주시옵소서.

 

서기 2011년 신묘년 음력 28(양력 312)

 

ㅇㅇ 산악회 회원 일동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책상정리를 하며 풀곤 했다. 마치 책상 위에 산재해 있는 것들이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이런저런 골칫덩이들인 양 적당히 가르고 포개고 짱박아서 정리를 했던 거다. 그래서인지

나름 남자치고 책상 정리도 깔끔하고 정리정돈도 잘 한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고.


그런데 요샌 또 그렇지도 않은 게, 계간지에 연재되는 소설을 한호흡에 다시 읽겠다며 우르르

꺼내두고, 소설이니 사회과학도서니 따위 보려던 거 꺼내두고, 그러다 보니 책상위에 책으로 된

산이 하나 생겨버렸다. 책꽂이가 다 차 버려서 더이상 꼽을 데가 없다고는 해도, 이미 그런 상황도

여러 차례 겪으며 버릴 책 솎아내고 없는 공간 만들어냈으니 핑계란 건 스스로 알고 있다.


어쩌면 요새 머리가 아픈 건 머릿속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그저 하얗게 비어있는 거니까 딱히

책상 위의 물건들을 빌어 정리를 해야 할 건덕지가 없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여전히

책상 위가 난장판이 되어있는 걸 봐도 정리하고 싶은 의욕도 안 생기고, 그저 책 어디메쯤

꽂혀 있는 고양이 모양 간지가 대롱대롱 매달렸다.



며칠 전부터 내 방에서 달콤하면서도 청량한 송진 냄새를 폴폴 풍기는 솔방울들이 한 바가지

가득 자리를 차지했다. 티비에선가 나왔다는 '솔방울 가습기'를 보고 등산다녀오는 길에

부모님이 따온 솔방울들인데, 바싹 말라 온통 벌어져있던 솔방울들이 물을 빨아들이면

저렇게 포실포실한 모양으로 비비적대며 커지는 거다.


효과도 꽤나 좋은 거 같은 게 아침마다 건조했던 목이나 눈이 조금 덜한 거 같고, 목이

잠기거나 가라앉는 것도 한결 나아진 것 같다. 벌써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을 전부 뱉어내

활짝 피었다가 다시 물을 함뿍 머금고는 통통하게 닫히는 과정을 밟고 있는 솔방울들.

자세히 살펴보면 빛깔도 모양도 약간씩 다른 것들이 이쁘기도 하다.


굳이 이쁜 걸 줍지 않아도, 조금씩 깨지거나 이빨이 나가있는 솔방울을 줏어도 일단

녀석들이 물을 빨아올리기만 하면 토실토실, 생각보다 별로 티도 나지 않을 뿐더러 이쁘긴

매한가지. 근처 야트막한 산이라도 올라 솔방울을 한 바가지 정도만 골라오면 되겠다.






짧은 제주 일정의 마지막 경유지는 바로, 성산 일출봉. 대학교 일학년 때 친구들과 자전거로 제주도를 일주할 때

멀리서부터 그 봉우리를 보고는 다들 미친듯이 페달을 밟았던 기억이 생생한 곳이다. 이번에는 일출봉 바라보고

가던 길에 배가 고파 살짝 무슨무슨 맛집, 어디 프로그램 소개 맛집, 요런 데 들러서 가볍게 식사를 했다.

그 식당 앞에 무질서하게 쌓아올려진 듯 보이는 돌담, 바람이 숭숭 잘도 통하게 쌓아놨다.

매표소 옆의 계랸색 매점 건물을 지나 눈을 높이면, 웅장한 맛을 풍기는 일출봉이 우뚝하다.

제주 지역방송들이 방송 중간중간에 간지 끼워넣듯 껴넣는 이미지, 성산 일출봉에 해뜨는 모습이라지만 사실 여기서

해뜨는 건 번번이 못 보고 지나갔었다. 가족들과 어렸을 적 왔을 때는 아예 요앞에서 묵으며 해를 기다렸는데 날이

흐려서 못 봤었고, 다른 날은 여기에서 일출이나 일몰을 기다릴 타이밍이 되지 못했더랬다.

성산봉 오르는 길목, 초록빛 싱그러운 초원 위에는 잘 생긴 갈색 말 몇 마리가 묶인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뿐 아니라 제주도를 돌다 보면 드문드문 승마 초보자 환영, 말타볼 수 있는 곳, 이런 간판을 많이 볼 수 있다.

초원 같은 평지, 살풋 각도가 느껴지는 평지를 지나 본격적으로 등산 시작. 일출봉 어귀에 있던 매점에는 중국어가

떡하니 적혀있었다. 샨샹메이요우슈웨이~. 일출봉 오른 후엔 물 파는 데가 없으니 여기서 사란 얘기. 그러고 보면

제주도에서 중국인 단체관광객은 눈에 참 많이 띈다.

일출봉 가는 길이 그때도 이렇게 잘 닦여 있었던가, 처음부터 끝까지 차곡차곡 계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다지 길지

않고 힘들지도 않은 코스, 지레 겁먹었던 동생님도 어느새 생기발랄해졌다. 왕복 50분이면 넉넉히 보고 돌아올 듯.

일출봉에 올라서서 바람으로 땀을 식히는데, 좀 곤란하다. 커다란 분화구 모양의 일출봉. 사진을 찍을 만큼의 적당한
 
거리를 허용치 않은 채 나와 방문자들을 덥썩 안아 버렸다. 제법 까끌하면서도 부드러운 질감이 느껴지는 초록빛

커버가 분화구를 매끈하게 메우고 있었다. 현무암에 잔뜩 슬어있던 이끼같기도 하고, 스프 위에 좀 과하게 뿌려놓은

아스파라거스 가루 같기도 하다.
 
안개 자욱한 분화구 너머 마을이 희끄무레하게 보이고, 분화구의 오톨도톨한 가장자리가 험준한 산의 능선이나

백두대간처럼 쭉 이어진 산맥처럼 보인다. 파도치듯 쉼없이 달려나가는 백두대간의 미니어쳐랄까. 아님 우유 광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우윳방울이 낙하한 직후의 왕관같은 흔적과도 흡사하다. 천분의 일초 쯤으로 찍어올린 장면,

튀어오른 물방울들은 전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정상에서 굽어본 중간 쉼터. 사람들이 조그만 게 개미같고, 나무들은 딴딴하고 속이 찰진 파슬리나 브로콜리 같다.

멀리 보이는 마을과..저건 호수인 척 하는 바다일까. 그러고 보니 이날 날씨가 하루종일 흐린 편이었기에

더위도 덜했고, 땀도 그다지 많이 나지는 않았던 거 같다. 바람이 찍혀 나온 사진.

성산 일출봉에 올라 사람들이 밟을 수 있는 영역이란 딱 여기까지다. 울타리가 설치된 구간은, 커다란 분화구의

오분지일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의 공간만 확보해 주었을 따름이다. 사람들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나름

최선의 뷰를 잡아보려 애쓰지만, 어쩌면 이 곳의 풍광을 오롯이 감상하려면 열기구나 헬리콥터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게다가 맨눈보다도 못한 카메라로는 눈으로 감상하는 풍경의 절반도 담지 못하겠더라. 적어도 나는.

내려가는 길, 그러고 보니 내게 남아있던 일출봉의 이미지란 단지 그 뾰족한 화구만의 것은 아니었다. 거기까지

이르는 길에 푹신해보이도록 깔려있는 녹색의 잔디밭, 언덕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곡선, 그리고 그 너머에서

산산이 부서져 있는 햇살, 그 햇살이 둥둥 표류하는 바다.

어라, 한쪽에는 모터보트 선착장도 생겼나보다. 이런 거 못 봤던 거 같은데. 계속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 내어 굳이

대조해보게 되는 건 왤까.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느끼려고 애쓰면서도, 막상 쉽지 않다. 어쨌거나, 혹시

모터보트 추격신이 필요하거나 해안 총격장면을 찍어야 하는 감독이라면 한번 추천해주고 싶긴 하다.

내려오는 길 어딘가에서부터 사람들이 다듬어진 돌계단길을 버리고 잔디밭으로 걷기 시작했다. 사실 보폭이 그다지

고려되지 않은 채 만들어진 계단인지라 계속 왼쪽 다리로 계단을 내려서게 되거나, 혹은 반발짝을 마저 걸어야 하는

등 좀 불편하고 힘들었다. 푹신푹신, 경사가 제법 되는 길인데도 사방을 둘러보며 걸을 여유가 생겼다. 덩달아

여유로와보이는 저너머 '노인과 말'.

늘 생각하지만 제주도에 가서 성산 일출봉은 왠만함 꼭 들러야 하는 곳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봉우리 하나

등산하듯 오르내리는 게 아니라, 그 봉우리 앞에 쫙 펼쳐져 있는 이런 풍경들, 이렇게 이쁜 길들, 그것들은

'성산 일출봉'이란 이름과 떼어놓을 수 없는 매력적인 공간들이지 싶다. 일출봉이 덮고 있는 무릎깔개처럼

안온하고 포근한 느낌을 전해주는 그 보들보들하고 싱싱한 녹색. 그러고 보니 언젠가 한번 구경갔던 골프장의

인공조경과 비견할 만한 굴곡에 녹색이다.


일단 올해 다녀온 제주도 여행기는 여기서 끝~*


제주#1. 제주올레 7코스, 외돌개를 끼고 걷기 시작하다.
제주#2. 꽃길, 찻길, 논두렁길, 바닷가길을 넘어 건너.
제주#3. 철조망에서 자유로운 제주도의 해안..?
제주#4. 남/녀 노천탕에 사람은 없고 조개껍데기만.
제주#5. 올레길 7코스의 바닷가 우체국.
제주#6. 강정포구 가는 길(올레길 7코스)
제주#7. 올레길 7코스 vs 해군기지.
제주#8. 월평포구에서 끝난 올레길 7코스.
제주#9. '업'에서 나왔던 커다란 새를 찾아내다.(아프리카 박물관)
제주#10. 오설록녹차박물관에서 '현미녹차'를 생각하다.
제주#11. '식상한' 천지연보다 '제주감귤와인'이 궁금했다.
제주#12. 이름이 왜 5.16도로일까.
제주#13. 숲다운 숲, 비자림 거닐며 산림욕 한번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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