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즈음, 사람의 마음이란 것도 싱숭생숭 어디론가 저물어간다.

건물들이 즐비하니 포위망을 좁혀오는 명동의 좁다란 샛길을 따라 흘러가는 사람들.

덩달아 붕 떠버린 마음은 결국 사고를 내고 말았다.


@ 명동, 어느 건물 5층의 까페.





오거리 길이 길바닥에 불가사리처럼 널부러져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내가 가진 건 손에 쥔 빈약한 지도와 코끝에 감도는 그녀의 향기 뿐.


때론 느낌을 믿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라지만, 돌고 돌아 다시 선 길이 이전과 똑같은 오거리,

게다가 마치 리플레이하듯 똑같은 위치에서 오거리를 바라보고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만다면
 
이제부턴 뭘 어째야 할 지 몰라 그저 술을 마시고 마는 거다.



@ 도쿄, 아키하바라 뒷골목.


지브리 스튜디오는 도쿄에 있다. 정확히는 도쿄의 JR선 '기치조지(Kichijyoji)' 역과 '미타카(Mitaka)' 역 사이,

거의 그 중간에 걸쳐 있다고 해야 하려나. (참고 : 낡고 더러워진 도쿄 JR선 전체지도.)

해서 코스 잡기가 상당히 애매한데, 나는 기치조지 역에서 내려서 지브리 스튜디오까지는 (늦어서) 택시로

이동, 지브리에서 보고 나오는 길은 미타카 역까지 산책길을 걸어서 이동, 그리고 에도도쿄건축공원으로 향했다는.


아, 지브리 미술관은 한국에서 미리 표를 예약해야 입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빠뜨릴 수 없다. 성수기 때에는

2주 전쯤엔 해야 안전할 듯. http://ghibli.ktbtour.co.kr/ 여기에서 하는 게 한국에서 사전 예약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들었다.
 

열심히 기치조지역으로 가는 길, 전철 끝에 탔더니 시원하게 앞창이 전부 트여있다. 물론 보이는 거라곤 깜깜한

지하 터널뿐, 그리고 매 역마다 마이크를 잡고 프로의 솜씨로 역 안내방송을 하는 철도운전사 아저씨도 빼놓음

섭하겠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매주 화요일과 국경일에 휴관하며, 그외의 날엔 10시, 12시, 14시, 16시에만 입장할 수 있다.

입장 후에는 언제 퇴장해도 상관이 없으나 입장시간만은 지켜달라던 간곡한 부탁이 사전에 있었는데도 늦고

말았다. 사실은 기치조지역에서 살살 걸어보려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잡아탄 택시 안에서 사진 한장.

생각보다 기치조지역은 꽤나 도쿄 외곽에 있어 멀기도 했고, 생각보다 기치조지역과 지브리 스튜디오 간의

거리도 솔찮이 떨어져 있었던 탓.

일본 택시도 한번 타 볼만하다 싶던 게,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더라는 사실. 기사분은 영어를 전혀 못하시는

할아버지셨지만, '지브리스튜디오'하니까 한 큐에 알아들으셨다. '하야꾸하야꾸'하며 조금 채근해볼까 하다가

그게 '빨리빨리'란 말이 맞던가 문득 혼란스러워져서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았다.

지브리 스튜디오 입구! 결국 10시를 십분여 넘기고 말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줄을 선 채 입장 대기 중.

내부에서는 카메라 촬영 금지, 음식물 반입금지, 흡연 금지, 그리고 휴대폰 금지. 휴대폰? 아무래도 요새

휴대폰에 사진 촬영 기능이 기본으로 들어가있으니 그걸 막고자 함인 듯. 스튜디오 내부의 분위기가

외부로 새나가는 걸 꽁꽁 막겠다는 의지가 결연해 보였다.

결국 내부 사진은 한 장도 없고, 그저 하야오가 그린 너무나도 감격적인 원화들과 금세라도 그가 동료들과 함께

다시 앉아 작업을 계속할 것만 같은 작업실의 재현공간, 그리고 곳곳에 수북하게 꽃처럼 피어났던 담배꽁초들의

이미지만 가득한 채 완전 가슴먹먹해져서 옥상 정원으로 올랐다. 옥상 정원에 오르는 길, 마치 아이들 놀이터에서

흔히 보이는 우주선 모양의 뱅글뱅글 계단을 따라 올라야 했다. 온통 담쟁이가 휘감고 있던 그길을 오르는데,

무슨 '천공의 성 라퓨타'를 탐험하는 거 같기도 하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둘러보는 거 같기도 하고.

옥상 정원에 오르면 바로 눈에 띄는 게 바로 '천공의 성 라퓨타'를 지키던 로봇 병사의 모형. 이 녀석이 큰 팔과

다리를 흐느적대며 금세라도 새둥지를 품어주고 아이들의 머리를 친근하고 섬세하게 쓰다듬어줄 것만 같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주위에 대한 사려깊음을 잊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 그의 고개가 사뭇

수그러져 있어서 그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옥상 정원에서 내려다본 지브리 스튜디오 입구. 저기 아까 가슴 두근거리며 줄서 기다리던 그 천막이 보인다.

그리고 한층한층 눈을 뗄 수 없이, 그야말로 온 벽면 전체를 핥듯이 꼼꼼하게 살필 수 밖에 없었던, 여기 그냥

죽치고 자리깔고 살고 싶었던 지브리 스튜디오의 건물. 사방이 온통 초록빛 식물로 가득하다. 이런 곳이라면

지브리가 만들어온 그 온갖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쉼없이 졸졸대며 쏟아져도 이상할 게 없겠다.

하늘 높이 펄럭이는 지브리의 깃발. 하야오와 지브리, 그들의 작품에는 '반딧불의 묘' 정도만 제외하면 국적이

불분명한, 그리고 시대도 불분명한 시공간이 배경이 된다. 갈색머리와 검은머리가 공존하는, 그리고 기계문명과

녹색의 '원시문명'이 공존하는 세상. 지브리 스튜디오의 그 중세 성을 본딴 듯한 깃발이나 온통 녹색으로 휘감겨

있지만 내부에는 나름 기기묘묘한 것들이 숨겨져 있는 것들 역시 그런 것들의 반영일까.

공중 정원은 생각보다 그렇게 크진 않다. 로봇 병사를 지나 몇 걸음 걷다 보면 나타나는 조그마한 오솔길,

그길 끝에는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등장했던 비행석 실물 사이즈의 모형이 나타난다.

만화로 먼저 나타나고 그걸 현실세계에서 실물로 다시 재현한다. 그리고 그렇게 실물로 눈앞에 나타난 비행석의

모형을 보고 나면, 이 세상 어디엔가 천공의 성 라퓨타가 거대한 나무를 의지한 채 둥둥 떠있을 것만 같다.

그 밖의 다른 캐릭터, 다른 공간들 역시 어디엔가 숨어 있을 뿐, 미처 발견치 못하거나 잃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공중 정원에서만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고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건물 내에서만 불가능하다. 공중정원으로

오르는 테라스에 놓인 이런 신기한 벤치라거나, 다른 것들은 찍을 수 있다는 이야기. 이건 그나저나, 다리가

달라붙어 있는 생선이라고 해야 하나, 생선처럼 생긴 강아지라고 해야 하나, 혹은 프로펠러 꼬리가 붙어 있는

4족보행 탈 것이라고 해야 하나. 언젠가 지브리의 만화에서 등장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연예지망생인지도.

지브리 스튜디오의 입장권, 입장권으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지하1층에 있는 조그마한 영화관의 영화표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에서만 볼 수 있다는 지브리의 단편 네 편을 번갈아가며 상영한다는데, 한 20분간의

그 짧은 영화를 보고 또다시 하야오를 우러러보게 되고 말았다. 아 그의 상상력이란. 상상력과 통찰력이란.

그 아름다움이란.

지하 1층에 있는 조그마한 앞마당에 있던 빨간 지붕을 가진 낡은 펌프. 잔뜩 우그러들은 채 정감가득한

물잔이 두 개 놓여 있는 게 너무 귀여웠다. 펌프도, 끽끽 작지만 분명하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조금

펌프질을 하면 물이 진짜로 쏟아져 나온다.

지브리 스튜디오 건물 외벽에서 발견한 조그마한 창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그녀를 도왔던 검둥이

요정들이 바글바글 창문밖을 내다보겠다고 아우성 중이다.

풍경이 매달려 있고, 땔감으로 쓰려는 듯 한 구석에 차곡차곡 쟁여둔 나뭇가지들, 누군가 저 커다란 나무등걸에

땔감용 나무를 대고 도끼질을 신나게 해댈 것만 같다.

끝까지 감탄하게 만드는 지브리. 아, 지브리와 하야오 정말이지 당신들 최고. 마당 가운데의 하수구 뚜껑마저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챙겨주다니 당신들은 정말.

정말, 돌아나오기 싫었다. 이번 도쿄 여행은 사실 지브리 스튜디오를 가고 싶다는 오랜 소원에서 시작되었더랬다.

기념품샵을 이잡듯 뒤지며 지브리 스튜디오에서만 살 수 있을 법한 걸 골랐다. 그의 제작실 벽면을 빼곡하게

장식하던 원화들 복제본이 있으면 아무리 비싸도 한 점쯤 사가겠다 맘을 굳게 먹었는데, 정작 그런 원화를

활용한 엽서나 그림 따위는 보이지 않아 조금 실망. 그렇지만 한국에선 그다지 찾아볼 수 없는 붉은 돼지 관련

아이템들이 좀 보여서 그걸로 얼추 만족하다. 하야오의 작품 중 내가 손꼽는 작품 중 하나, 붉은 돼지.

돼지는 국가나 전쟁 따위 인간의 일에는 관심없어, 라는 붉은 돼지의 시크하면서도 단단한 한 마디.

그리고 지브리 입장권과 마찬가지로 필름을 일부 잘라내어 만들어낸 책갈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몇 컷이

담겨 있었다. 대충 여섯 컷쯤 들어가있는데 이건 뭐 거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아 첫 씬과 마지막 씬의 모습이

뭐가 다른지 모를 정도. 그만큼 부드럽고 섬세한 모션을 구현한단 얘기겠지 싶다.

마지막으로 산 건 지브리 스튜디오 옥상정원을 지키고 있던 로봇 병사의 모습, 미니어처 형태로 명함 따위를

꽂도록 만들어둔 주석 장식품. 사무실에서 날 지켜주셈, 병사님.ㅋ

돌아나오려는데 지브리 스튜디오 앞의 안내원이 머무는 조그마한 안내데스크에 놓인 장식이 눈길을 끈다.

붉은 돼지같기도 한 모양에, 입에서 모기향을 담배연기처럼 울컥울컥 뱉어내고 있던 모습.

돌아나서기가 어찌나 아쉽던지,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공중 정원으로 올라서는 우주선 모양 동글뱅이

계단 위에서 나부끼는 깃발이 보였고, 온통 짙푸른 녹음으로 덮인 고풍스런 건물이 보였고, 그리고

그 안을 가득 채운 하야오와 지브리의 꿈같은 이야기들이 보이는 듯 했다. 말하자면 이 건물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가 새로운 세계와 인물들을 창조해내는 마법의 솥 같은 존재랄까. 그런 경외감.
 
일단은, 당분간 안녕, 토토로. 지브리 스튜디오를 떠나는 길을 배웅해주는 토토로의 뚱하지만 믿음직한 표정.

저만한 사이즈의 토토로라면 눕혀두고 그 배 위에서 잠들어도 될 거 같은데 정말.

다들 마찬가지 심정이었던 게다. 좀처럼 사람 없는 순간을 포착하기 힘들 만큼, 다른 관람객들도 이곳을

떠나기 아쉬워하며 어떻게든 토토로와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려 애쓰고 있었다.





지브리미술관 구조를 소개하는 브로슈어, 그치만 이것만 봐서는 통..뭐가 뭔지 한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게다가

무려 한국어를 포함한 다섯개 언어, 일본어까지 합치면 여섯개 언어로 소개가 되어있음에도 그다지 쓸데있는

정보는 안 담겨 있는 거 같다. 명색이 미술관인데, 더구나 지브리의 특성을 살려 만화로 표현해놓은 지도인데.

지도는 보고 나면 여기가 어디고 어디로 가야할지는 최소한 알아야 할 텐데. 어떻게 이럴 수가.

브로슈어 뒷면에 적혀 있는 문구 하나, 이 모든 의혹을 해소하는 강력한 단서가 되어 주었다. '미아가 됩시다,

다 함께!!'라는 문구다. 영어로는 'Let's lose our way, toghether'라나. 이들은 지브리 미술관에 들어온 사람들을

모두 길잃고 홀리게 만들어 기념품점을 싹싹 긁어가게 만들고, 지브리홀릭으로 만들 생각인 거다.


더구나 미술관 내 사진촬영, 비디오촬영은 모두 금지라니. 이러니 지브리에 두고 온 내 금쪽같은 추억들이

더더욱 소중하고 아름답게 풍화되는 거다.

지브리의 입장권 두 장. 이걸 갖고 미술관 지하 1층으로 가면 오로지 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지브리의

단편 만화영화를 볼 수 있다. 약 15분에서 20분 가까이 되는 작품을 매시간 세 타임씩 틀고 있었다.


위의 입장권은 '붉은돼지'의 한 장면, 밑의 입장권은 '포뇨'의 한 장면, 필름을 이렇게 몇 컷씩 잘라내어 다시

입장권으로 재생한다는 발상도 참 감탄스럽다. 이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기념품.

지브리 스튜디오 입장권을 사전 예매하고 현지에서 받기로 했는데, 한국에서 미리 예약할 수 있는 곳은 대한여행사

뿐이라고 많은 블로거분들이 그렇게 알려주셨기로 나 역시.





비록 굉장히 낡고 더러워졌지만, 저 낡음이 어느 가방의 어느 모서리에 쓸렸는지, 그리고 저 얼룩이 어느 식당의

점원이 실수로 엎지른 간장 종지에서 번져나왔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가이드북에 절대적으로 빈곤하던 교통지도 중 JR선에 대한 갈급한 욕구를 이 지도 하나로

전부 해갈할 수 있었단 점. 기치조지역의 '지브리 미술관'을 찾아갈 때, 그리고 도쿄 도심을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도는 JR선의 대략적인 그림과 윤곽이 궁금할 때 매우매우 도움이 되었었다.




점점 해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맹렬해졌다. 하라주쿠의 쇼핑스트리트를 돌다가 슬쩍 찾아간 메이지신궁에

도착했을 무렵은 대략 그쯤이었다. 하라주쿠는 패션과 쇼핑의 거리, 그 일정에 슬쩍 양념처럼 집어넣었던

메이지신궁은 그저 해떨어질 무렵의 산책코스였으니 얼추 맞춘 셈이다.


일본의 하고많은 신사 중에서도 '신궁'은 특별히 역대 일왕('덴노'라는 고유명사로 불러주는 게 맞을 거 같긴

하지만)을 신으로 모셔놓고 있다는 둥, 그 중에서도 특히나 조선의 식민화를 감행했던 때 재위했던 메이지

일왕을 모시고 있다는 둥의 배경지식은 별반 감흥이 없었다. 그냥 뭐, 후쿠오카나 다른 곳에서 잔뜩 본 신사나

별반 다를 거 없잖아. 누군가에게 소원을 빌고 의지하고. 혹은 그저 습관, 전통으로써 유지되고.

일왕을 신으로 모시는 거야 그네들의 종교인 '신토'에서 기본 교리에 속하는 거고, 조선을 식민지화한 그네들의

야만적인 결정도 결정이지만 그보다는 그로부터 해방된 후 뒷처리를 여전히 못하고 있는 나라에서 새삼 남의

나라 와서 격분하는 것도 우스운 일. 그래서, 그냥 해떨어질 무렵의 고즈넉한 신사를 산책하듯 돌아보았다.

어느 신사, 신궁이나 그렇듯 입구에는 도리이(鳥居)가 서 있다. 이게 하늘 천天자로부터 유래한 모양이라고들

하던데, 어떻게 보면 비슷해 보이고 어떻게 보면 또 영 꿈보다 해몽인 거 같고. 6시 가까이 되어서 그런지 뭔가

방송에서 신사 방문객들의 퇴장을 종용하는 멘트가 일어, 영어로 계속 흘러나왔고 사람들의 흐름도 전부

입구로부터 바깥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일단 방송은 무시, 롯데 월드 6개가 들어가고도 남는다는 면적에 넙데데하게 자리잡은 이 메이지신궁을 전부

돌아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으니 그냥 본전까지만, 아니면 가볼 수 있는 데까지라도 가보기로 했다. 사실은

생각보다 해가 일찍 지는 바람에 당황하고 있었다. 여섯시가 넘으니 해가 지기 시작하다니, 어쨌든 그 어느때보다

뜨겁게 타오르던 여름도 가고 있었구나. 쳇, 그보다 '일출~일몰'이라는 애매모호한 메이지 신궁의 개방시간이

문제인 거다.

도리이를 지나 한 십여분 걸어들어간 거 같은데 본전은 커녕 본전을 가리키는 푯말도 아직이다. 커다란 석등에

번쩍 불이 들어왔고, 어디선가 안쪽 깊숙한 곳에서부터 사람들이 한 무더기 두 무더기 쿨럭대며 나오고 있었다.

예상보다 신사가 크다는 사실에, 그리고 예상보다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씩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느 신사에나 이렇게 입구쯤에 짚으로 감긴 단단해 보이는 술병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몰랐는데, 이건 술이 잘 익기를 기원하며 주류 회사에서 제물로 바친 술통들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사실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술들이 나름의 라벨을 붙인 채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는 걸 보면, 마치 방문자들을
 
향해 광고를 하려는 게 본심, '혼네'일지도 모른다.

파르스름한 어둠이 소리도 없이 땅거죽에 웅크려 앉기 시작했다. 노랗게 빛나는 석등 위의 불빛이 묘한

아늑함을 자아내기도 하면서도, 어느 순간 지나는 사람 한 명 없이 온통 적막할 뿐인 너른 대로 위에 둥둥

떠오른 듯한 낯선 느낌으로 목 뒷덜미를 쿡쿡 찌르기도 했다.

본전으로 가는 길은 온통 짙푸른 숲길, 길 양켠에서 뻗어나온 탐욕스런 녹색 가지들이 서로의 어깨를 짚어내야

만족할 태세로 터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신사에 들어서기 전까지 시야의 왼쪽과 오른쪽을 채웠던 건

히라주쿠의 온갖 샵들에 전시된 중절모와 원피스와 각종 액세서리들. 그것들 역시 왼쪽에서 오른쪽까지의

시야 전면을 온통 가려버릴 듯한 삼엄한 기세로 조그마한 도시 하나를 점령해 버린 듯 했다.


히라주쿠를 서울의 어디랑 비교해봐야 할까 생각해봤지만, 홍대나 삼청동이나 압구정동이나 명동, 그 어느 한

곳이라기보다는 그 모든 공간을 합쳐놓은 조그마한 소도시 정도로 놓아야 사이즈면에서나 분위기면에서나

비스무레할 듯. 일본은 확실히 대국인 거다. 인구면에서나, 도시의 사이즈면, 발전도면에서나. 1억 2천의 인구와

5천의 인구, 아무리 서울이 인구과잉의 초고밀집지역이라 해도 도쿄의 사이즈나 밀집도에 비길 바는 아닌 듯.

결국 본전까지는 포기. 거의 떠밀리다시피 돌아나와야 했다. 이미 입구에는 철문이 닫혔고, 시간은 칼처럼

지키는 일본인들은 다소간의 에누리도 없이 방문자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아마 내가 마지막으로 나온 걸까,

아쉬움에 카메라에 담았던 쪽문으로 빠져나오고 나자 등뒤에서 철컹, 문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맥주를 맛있게 잘 마시는 방법 중 하나는 맥주잔을 한번 들어올려 한모금 마실 때마다 일정한 양의 맥주를

들이키는 것이라고 한다. 너무 급하게 덤벼들거나 지루하게 할짝대지도 않으면서, 적당하고 일정한 템포로

맥주를 맛보는 것이 요체.


어렸을 적 키스를 잘하려면 체리에 달려있는 뒷꽁지를 입안에서 잘 휘감아 매듭짓는 법을 연습하라던 얘기를

듣고 종종 연습했던 적이 있었는데, 맥주도 마찬가지. 이렇게 크리미한 흑맥주류를 잔에 가득 따라서 거품이

일정한 간격으로 고리를 만드는 걸 확인해 가며 마시면 보는 재미에 마시는 재미까지 일석이조랄까.


에비스의 스타우트흑맥주는 달콤한 맛이 살짝 커튼 뒤에 숨은 채 이쪽을 훔쳐보는 발그레한 뺨의 소녀처럼,

쌉쌀한 맛이 막 장작개비 일백개를 힘껏 패고 굵은 힘줄이 여기저기 돋아난 당당한 마당쇠처럼 방울방울.



@ 도쿄, 에비스맥주박물관.

하늘 높은 구름위엔 빛무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아마도 식민지 조선을 보았을 일본인 할아버지로부터 빨갛고 노란 바람개비를 선물받고선

솜털 보송한 그 젓가락 손잡이를 들고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도쿄의 어느 공원을 돌아다녔다.


가미가제神風의 나라, 바람개비는 잘도 돌았다.



@ 도쿄에도건축공원.
궁남지 입구에서부터 펼쳐지는 범상찮은 풍경. 한껏 늘어진 버드나무 아래 그늘처럼 동그랗게 드리워진 돌섬,

그리고 떨어지는 햇살을 가득 받고 있는 연잎들로 가득차버린 연못.

아직 해가 스물스물 올라오는 아침나절, 비스듬히 내려꽂히는 햇발인데도 땀방울이 굵어졌다.


저너머 보이는 선화공주와 서동의 인형, 궁남지는 서동의 홀어머니가 그의 아버지(라 주장되는) 용과 교합하여

서동을 가진 장소라는 전설이 서려 있다고 한다. 그 서동이 신라에 염탐하러 갔다가 발견한 게 선화공주.


국적과 신분이 달라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두 사람, 함께 하기 위해 지어 불렀다는 서동요의 가사말을 이렇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서동도련님을 밤이면 몰래 안고 잔다"는, 다소 망측한 가사. 공주로서의,

여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조심스러움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겠다는 선화공주, 그녀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노랫말. 하긴 뒤집어 생각하면 어쩌면 의도치 않게 공주 전문 파파라치쯤에 노출되어 부끄러움을

못 견디고 신라에서 백제로 망명한 건지도.


궁남지 한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기슭과 다리로 연결해 두었다. 기슭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신선이 노니는

저 섬을 구경하면 한나절은 후딱 지날 듯 하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른다지만, 신선들의 '방장선산'을 향해 죽어라 풍악만 울리다가 툭툭

생명이 다해 떨궈지는 매미들.




대학 다닐 때, 갑갑증을 못 이기고 덜컥 버스 터미널에서 무작정 부여로 향했던 때가 있었다. 낙화암이나 용케

기억해 내어 둘레둘레 돌아보다가 궁남지 이 다리 위에서 하염없이 앉아있었던 기억. 마침 비가 왔댔다.




무지개가 살짝 서린 분수대. 그때도 분수가 있었던가. 뭔가 포말처럼 잔뜩 머릿속에 엉겨붙었단 느낌에 어디로던

나가서 바람을 쐬고 싶었던 거 같다. 여기를 다녀오고 나서 머릿속에 드라마틱한 무지개가 떠오르진 않았지만,

그래도 덕분에 부여라는 이름이 꽤나 낭만적이고 포근한 뭔가가 되었다.

서동과 선화공주가 빗자루로 환생했다면, 아마 이들이 아닐까. 굉장히 다정하게 서있는 한 쌍의 빗자루.

약간 크고 빗자루 숱도 많은 왼쪽 녀석이 서동, 약간 작고 아담한 데다가 숱도 단정한 오른쪽 녀석이 선화랄까.

"선화공주 빗자루는 남몰래 빗질하며 서동빗자루를 밤이면 몰래 털어준다." 정도로 노랫말을 바꿔 불러주면

둘의 못다한 사랑이 빗자루로 태어난 이번 생에나마 이어질 수 있을까.




새끼 오리가 무섬증도 없이 사람들 앞길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종종걸음을 친다. 그 재빠른 발놀림이나 발랄한

움직임은 태생이 그런 거지 딱히 겁을 집어먹어서는 아닌 거다. 평화로움 게이지에 플러스 십 쯤.

공주박물관에 있는 무령왕, 백제 문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백제인이지만 그가 어떻게 생겼었는지를 알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백제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어버린 불꽃무늬 왕관은 오늘에도 그대로 남아 분명한

형체를 남기지만, 그 왕관 아래 얼굴과 분위기는 대부분 상상의 영역에 남겨진 것. 그저 문헌상 '온유하다'거나

'따뜻한 성품'이라거나 따위 몇 개 키워드로 상상해낸 분위기를 어슴푸레 더듬을 뿐이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진 않다. 공주박물관에서 발견한 백제인의 생생한 얼굴, 그리고 전신의 형체. 어느 정도

중국풍이 가미된 걸 감안하더라도 꽤나 귀티나게 그려놓았다. 자신만만한 눈매, 당당한 태도의 잘 갖춰진

의관까지 세련되고 우아한 분위기가 풀풀.


기원후 500여년쯤 중국 남조 양나라 때 그려진 두루마리 그림 '양직공도'에 남아있던 그림으로, 중국 황제에게

사신으로 방문한 외국 사람들이 그려진 것을 감안하면 양나라(혹은 중국)과의 우호도나 관계에 따라 어느 정도

이미지가 변형되고 왜곡될 수 있었겠다고는 생각되지만, 아무리 중국인 입맛대로 그렸다고 해도 이건 꽤나

긍정적인 이미지.

또 다른 버전의 백제사신을 봐도 그렇다. 똘망똘망하고 귀티나게 생겼다. 의복 역시 허투루 대충

걸치고 다니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고 세련되고 당당한 느낌.

고구려 사신의 모습도 있었다. 나름 화려한 복색과 깃털관의 모양이 특징적이지만 무엇보다 털이 복슬복슬,

뭐랄까, 짐승남의 매력이 풀풀.

신라, 조금 다른 나라에 비해 앳된 듯한 동안의 사신이다. 백제 사신도 그랬지만 다른 주변국에 비해 뽀얀 피부,

붉은 입술, 그리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까지.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살짝 퇴폐적인 눈매까지.

왜국의 사신, 뭔가 헐겁게 걸친 옷가지들, 그리고 새까만 피부색, 그리고 바로 옆 고구려 사신과는 다른 느낌으로

북실거리는 털들. 그렇지만 색감이나 감각은 훌륭하다. 나름의 의관과 맞춘 의복에 팔다리귀에 꿴 고리들까지.

다른 버전으로는, 조금은 피부가 하얗게 나온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 사신에 비해 약간 키가 작게 나오는 게

'왜(倭)'라는 글자의 연원을 떠올리게 한다. 왜소하다, 작다, 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는 한자 倭.


조금 자극적으로 말하자면 '당대의 루저'였던 왜나라 왜국인들이였달까. 뭐 그떄가 요새처럼 키높이를 가지고

결정적인 평가를 내렸을지는 모르겠지만.



부여 정림사지, 왠지 그렇게만 이름부르고 끝내면 어색해지고 만다. 뭔가 더 이어서 할 말이 있는데 중간에 덜컥

끊어버린 느낌이랄까.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이렇게 한단어로 덩어리지어 기억되던 그곳. 부여에 도읍을

정한 백제의 대표적인 석탑이란 것이 머리에 꾹꾹 눌러박혀있는 거다.


그렇지만 몇 년전 대학 섭을 째고 무작정 버스터미널 가서 바로 출발하는 티켓을 사서 달렸던, 그 때의 부여,

그때의 정림사지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들어서는 길에 만난 벤치, 봉황이 활개치며 금세라도 하늘로 뛰쳐오를 듯한 율동감이 충만해 있다. 반대편엔

다소곳이 깃을 가다듬고 서 있는 봉황.

정림사지 5층석탑의 위엄. 600년 경 만들어져 이렇게 단단히 섰다고 하니 대략 1400년쯤 되었겠다. 단정하면서도

심심하지 않은 모습, 살짝살짝 들린 끄트머리가 은근하다.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신라를 도와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 이 석탑에다가 명문을 조각해 남겼다고 했다.

14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어렴풋하나마 글자의 흔적이 남아있는 탑신. 기록의 힘이다. 더불어 용케도 천여년을

무사히 살아남은 이 탑의 힘이기도 하고.

예전에도 이런 게 있었던가, 싶도록 생경한 연못이 탑끄트머리를 아슬아슬하게 품고 있었다. 어렸을 때 뭔가

연못에 비친 탑 그림자를 다룬 전래동화를 읽었었는데, 무영탑의 설화던가. 와이프가 탑의 완성을 기다리며

그림자가 연못에 비치길 마냥 기다리다 지쳐 죽었다는. (넘 거칠게 요약해 버린데다가 '와이프'란 표현이

전래동화의 격을 확 떨어뜨리고 말았다...)

정림사지박물관은 조금 심심했다. 아무래도 여전히 복원중인 정림사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엔 조금 발굴된

소재가 모자랄 수 밖에 없을 거다. 그래도 이런 장면은 꽤 흥미로웠다. 정림사지 5층석탑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어땠을지, 우뚝 선 완성태의 모습이 아니라 이게 어떤 식으로 하나씩 다져지며 올라갔을지를 상상케 해주는

몇 가지의 선명한 이미지를 선물해주는 전시들.

그 외에 부여 시대 백제의 암막새와 수막새(기와)를 지붕위에 얹는 장인들의 모습도, 첨에 아무생각없이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던 시선에 저 사람들이 잡혔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었다. 진짜 사람인 줄 알고.;

그치만 정림사지에서 만났던 가장 깜놀했던 장면은 바로 화장실 표식. 눈알이 그려지지 않은 채 흰자가 있어야할

부분까지 온통 살색으로 메꿔지고 만 이 젊은 처자는, 왠지 복수심에 불타 입술을 앙다물만큼 절절한 사연이

있어 보였다. 이래서야 화장실 들어가기 무서워서 원.

남자라고 별반 다를 거 없다. 뭐 나름 전통 의복을 입혀 놓은 건 좋은데, 역시 눈알이 안 찍힌데다가 흰자위까지

온통 살색이다. 표정 역시 완전 딱딱하게 굳어 있는 상태. 사실 따지려면 한량없다. 저 의관은 백제식으로 갖춰

입혀놓은 건지, 아님 그냥 조선식으로 입혀놓은 건지.

그리고 석불좌상. 5층석탑 너머에 있는 이 석불좌상은 또 고려시대에 조성된 거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정림사지는

엄밀하게는 고려의 문화유산, 그 원래자리를 준비하고 있던 5층석탑만 백제의 것인 셈. 미처 몰랐다. 어쨌든,

번쩍이는 안광에 힘이 빡 들어간 도깨비의 억센 이빨이 손잡이를 물고 있고 연꽃무늬가 장식된 문을 지났다.

뭐랄까, 온몸이 완전히 닳고 닳아버렸다.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니 아무리 멀리 잡아도 천년인데, 5층석탑이

저렇게 세밀한 부분까지 고대로 남아있는데 반해 이 부처님 좌상은 무슨 바위덩이처럼 변해 버리다니.

두 돌덩어리는 각기 다른 시간을 넘어 오늘에 이른 걸까. 그렇다고 이 석불좌상의 느낌이 죽어버린 것도 아니다.

다소 죄송스런 맘을 담아 표현하자면, 지하철이나 터미널같은 데서 많이 뵐 수 있는, 몸이 불편하여 땅에 일부를

끌고 다니시는 그런 분들을 닮은 부처다. 팔도 다리도, 온몸이 둥글둥글 지워져 버렸지만 왠지 모를 위엄과

따사로움이 느껴지는. 일견 엄한 것 같은 표정이지만 슬몃 웃음이 물려있는 듯 하기도 하고.

돌아나오는 길, 이번엔 석탑 대신 소나무 한 그루가 연못에 그려졌다.

정림사지는 여전히 발굴 중, 잔디만 무성한 한쪽 벌판 끄트머리에 뜬금없이 자리잡은 돌계단,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돌들이 어깨맞댄 틈바구니에서 풀들만 무성하다.

이런 거 좋다. 지역의 역사문화적 이미지를 이렇게 적극 활용해서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박물관에서 뽀얀 뽀샵 조명받고 손도 못대게 박제시켜 두는 것이 아니라, 2010년 현재에서 1400년전 사람들이

창조해내고 즐기던 미감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란.





여름 한 철 그악스럽게 울어제끼던 매미가 툭, 하고 벤치에 떨어지는 순간이 있었을 거다.

비는 내리고 어머니는 시집간다지만, 그야말로 매미는 떨궈지고 여름은 지나간다.




@ 부여, 궁남지.
지금 현재 네이트온 대화명은 "아쎄이 토, 유쎄이 꾜~ 토꾜로 토끼기 이틀전".

미야자기 하야오의 지브리스튜디오가 주요 목적 중의 하나라, 며칠에 걸쳐 그의 작품들을 다시 보는 중이다.

비교적 최근에 보았던 고양이의 보은이라거나 마녀배달부 키키, 월령공주, 반딧불의 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은 일단 뒤로 미루고 이웃집 토토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미래소년 코난, 붉은 돼지 정도를 다시 보았다.


고양이랑 개가 엉겨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앙칼지게 싸워대듯 종일 빗방울이 으르렁대던 토요일, 한강고수부지에

차를 대고 회사서 들고 온 놋북을 단단히 세팅한 뒤 캔맥주와 스낵을 사들고는 '붉은 돼지'를 틀었다. 볼륨은

최대한으로.


빗방울이 온 차체를 난타하듯 두들겨대건 말건,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애국공채를 팔건 전쟁을 하건 말건

붉은 돼지는 전쟁을 거부하고 인간의 야만을 거부하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멋진 극장, 멋진 영화. 게다가 빗방울이 뒤엉키는 멋진 날씨.


< 나만의 '자동차극장' Recipe >

1. 가까운 한강시민공원이나 한적한 장소에 차를 단단히 주차한다. 
  : 사람이 많이 지나다녀 번거롭지 않을 만큼의 한적함, 그렇다고 깡패에게 삥 뜯기지 않을 정도의 안전함,
    게다가 갑작스레 물이 불어난다거나 하는 자연재해로부터의 안전함이 중요.

2. 노트북(혹은 넷북)을 자동차 전면에 고정시킨다.
  : 자동차 대시보드 아래춤에 으레 있는 컵홀더를 잡아당긴다거나 하는 식으로 적당한 받침대를 찾아 고정.

3. 스낵은 필수, 캔맥주는 원칙적 불가(예외적 옵션).
  : 영화관에서 팝콘이나 나쵸 씹는 소리가 주변 사람들에 거슬릴까봐 녹여먹었던 기억이 있다면 여기선
    걱정없이 과자를 씹을 것. 캔맥주는 원칙적으로 불가하나, 영화가 두시간짜리 이상이고 영화본 후
    한참 지난 후에나 운전대를 잡을 예정이라면 예외적으로 옵션.

4., 자세는 생각대로.
   : 의자를 최대한 뒤로 밀고 시트의 각도를 자유로이 조정, 궁극의 자세를 찾아나서는 건 본인의 몫.









총 3층짜리 자그마한 까페. 아담한 높이의 아담한 너비, 뭐랄까 조그마한 방 하나를 켜켜이 쌓아올렸다는 느낌.

2층의 천장 한복판에는 샹젤리제처럼 저울이 매달렸다. 우주선이나 잠수함처럼 단단하고 믿음직하게 생긴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발, 그렇지만 정말 깜깜한 우주나 심해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은 묵직하지만

따뜻한 어둠이 걸쭉하게 고여있는 곳.

FRAGILE의 딱지가 아무것도 안 놓인 반대편 저울보다 무겁다는 위트. 섬세하고 예민해서 깨질 것만 같은

그대의 예기치못한 묵직함.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창문, 기차에서 떼어온 듯한 통유리창에 누군가 풍선든 소녀를 그려놓았다.

의자와 책상의 부조화가 나름의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만드는 건 '빈티지'를 표방한 삼청동이나 효자동 까페들의

기본기 중의 기본기지만, 어둑어둑함이 촉촉하게 서린 공간에서 녀석들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난파된 잠수함의
창문을 깨뜨리며 격하게 난입하는 파도처럼 덤벼드는 빛발 덕분인지도 모른다.

묘한 색감과 분위기, 게다가 갈 때마다 사람도 별로 없는 축복받은 곳. 사람들이 기차놀이하듯 일렬로 선 채

순례하는 삼청동이란 걸 감안하면 더더욱.

화장실 창문으로 내려다보다. 화장실 창문도, 그 위의 환풍기 보호커버도 예사롭지 않다. 볼수록 세심하게

손길이 여기저기 닿아있음이 느껴지는 것도 좋다. 어라, 이런 곳까지, 의 느낌이랄까.

2층에서 3층 올라가는 길, 3층이 아니라 옥상 위 옥탑방 가는 길이라 해야 하려나. 유리로 덮인 천장에서

하얗게 쏟아져내리는 빛이 눈발처럼 내려서는 유리병, 장식장, 등불에 조용히 쌓였다.

삼청동, 갈수록 사람들만 많아지고 길가는 전부 공사중인 데다가 많이 범속해져 신비감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갈 만한 까페 하나가 있어 다행. (사실은 삼청동 내 마이 페이버릿.ㅋ)





부여사비궁, 궁궐의 중심에 섰던 천정전을 향한 대로에 놓인 벽돌 포석들. 처음 느낌은, 뭐야, 이 문양은 왜이리

이질적이야. 하는 것이었다. 어줍잖은 지식이나마 내가 갖고 있는 한국의 문화유산 이미지에 이런 식의 용문양이

쓰였던 건 못 봤던 거 같아서.

근데, 아니었다. 백제의 문화유산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부여와 공주의 땅을 밟으며 온갖 곳에서 그 흔적과 변용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었던 것. 당장 박물관에서 여기저기 흔하게 눈에 띄던 용무늬 벽돌. 이런 문양이 친숙하게

쓰이고 사방에서 쉽게 쓰이던 때가 있던 것이었다. 1400년전.

정림사지석탑을 보러가는 길 울타리에도 있었다. 연꽃을 밟고 올라선 도깨비 문양, 연꽃 문양, 그리고 용 문양.

부여의 어느 음식점 앞, 부여궁(사비궁)에 있던 그 문양 비슷한 그림이 길가의 흔한 포석에서 다시 보였다.

용이 아니라 봉황, 인 듯 한데 그 역동적인 움직임이 느껴지는 모습이나 간결하지만 화려한 모양새가 멋지다.

길가의 어느 벤치, 널빤지를 지탱하는 양 끄트머리 대리석에 봉황 무늬가 선명하다.

안타까운 건, 길가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보도블럭의 모양새나 박물관에서 만나는 그것의 오리지널 모양새는

많이 닮았으면서도 은근히 다르다는 거다. 왠지 이전의 것들이 훨씬 기품이 느껴지고 깊이있어 보인다.

조명의 탓이라기엔 뭔가 부족하다. 당장 같은 형상의 봉황이라고는 해도 뭔가 저급의 봉황과 고급의 봉황이

확연히 구별되는 것 같달까. 내가 밟는 보도블럭도 조금은 더 고급스런 문양을 가진 거였으면 좋겠는데.

백제의 연꽃무늬 기와들은 그나마 눈에 좀 익은 편에 속하는 거다. 워낙 백제의 '우아한' 문화를 소개하는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대표적인 이미지이기도 하고, 그 고상하고 단정한 분위기는 워낙 인상적이기도 하고.

사비궁 벽돌 대로의 가장자리를 마감하고 있는 연꽃무늬 포석들은 그래서 한결 쉽게 다가왔다.

그리고 공주박물관 가는 길에서 다시 만난 백제의 문양들. 사방으로 금가있고 깨져있는 벽돌들이었지만,

형체는 분명했다. 불꽃이 수레바퀴 주변에서 돌아가는 듯한 형체의 문양. 근데 어떻게 니들은 1400년을 지낸

유물들보다도 더 오래되어 보이고 힘들어 보이니.

확실히 오리지널이 좀더 문양도 깊고 뚜렷하게 파여 있고, 세련됨의 정도로는 훨씬 더 세련된 느낌. 보도블럭이

핑크빛으로 칠해진 게 문제인 걸까. 예산이 없니 뭐니 하지말고, 아예 한 두께 20센티 정도의 벽돌이나 자연석을

가공해서 몇십년은 갈만한 보도블럭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어차피 매년 바꾸는 보도블럭 관련 예산이나

제대로 되어 몇십년 버텨낼 꺼로 바꾸는 예산이나.


도깨비 문양들, 연꽃을 타고 올라서 있기도 하고 산경치를 배경으로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기도 하고.

아마도 고대 '치우천황'의 이미지에서부터 내려온 게 아닐까 싶은 전혀 근거없는 상상. 이런 문양들도 좀더

많이 활용되면 충분히 백제의 얼굴이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부여궁 앞마당에 커다랗게 그려져있는 그림은, 너무 커다래서 한눈에 와닿지 않았었다. 더구나 그 원전이 되는

그림에 대한 이미지가 사전에 박혀 있지 않고서야 더더욱.

산경무늬 벽돌. 뫼산(山)자를 꾸역꾸역 먹이고 사육시켜서 토실하게 살찌워놓은 듯한 모양의 산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둥그스름한 형체도 그렇고, 듬성듬성 표현된 나무들도 그렇고 귀여운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불꽃무늬 왕관장식,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이 문화유산은 왕관에서 떨어져나와 그 자체로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성경의 한구절 표현을 빌자면 '쉬지 않고 불타오르는 떨기나무'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꼬리를 활짝 펼친 공작 같기도 하고.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으로부터 '백제의 미술'을 주제로 강연을 들었다. 세계대백제전, 그리고 부여나 공주의

백제 문화유산들을 돌아보려면 우선 백제 문화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가 있어야 훨씬 깊게 보일 것 같았으니

정말 좋았던 기회였던 셈이다. 여행 그 자체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준비하는 재미가 더 크다는 말도 있듯이,

그곳에 대해 사전 지식을 쌓고 일정을 잡아보고 어떤 문화적 배경이나 특징이 있는지 하나씩 알게 되는

재미를 놓치고 봐서야 영 밍숭맹숭하기만 하기 십상이다. 백제를 돌아보기 전, 그야말로 든든한 가이드로서

부족함이 없으신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한국미술사는 고사하고, 백제미술사에 대해 정리된 책 한권이 없다." 강연 말머리는 그렇게 시작됐다.  고분이니

회화니 조각을 개별적으로 다룬 책들은 있지만 총체적으로 백제의 미술은 이렇다, 라고 정리한 책이 없단 거다.

백제 문화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게 고작 중고등학교 때 배운 단편적 지식과 몇 개 이미지에서 멈춰

있는 중요한 이유겠다. 사실 그렇다. '백제'의 이미지란 어슴푸레하고 희미한, 불분명한 뉘앙스일 뿐이다.

사실 삼국시대의 세 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대개 그렇다. 고구려는 강인하고, 백제는 우아하며, (통일전)신라는

소박하다는 정도.

유홍준 전 청장으로부터 한 두시간 반, 강연을 듣고 나서 바로 부여박물관의 유물들을 보았다. 뭔가 조금은

눈이 뜨이는 느낌, 이래서 백제의 문화를 두고 "儉而不褸,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음)"이라고 표현한 거구나 싶었다. 그야말로 문화의 고상함과 우아함을 표현할

극상의 표현 아닌가. 검소와 누추 사이, 화려와 사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내는 미감이란.

부여박물관은 주로 백제의 사비(부여) 시대의 유물을 품고 있다. 백제의 수도는 한성과 공주를 거쳐 부여로,

그렇게 옮겨 다닌 게 백제의 유물이 신라 유물에 비해 적게 발견되는 하나의 이유라고 했다. 물론 계속된

전란과 정복자의 역사 왜곡/지우기 노력도 한 몫했겠지만.

아마 교과서에는 한 줄 이렇게 실렸을 게다. '백제는 활발한 해상활동으로 국제적으로 왕성하게 교류했다.'

박물관에서 만나는 유물들은 그 '왕성한 교류'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중국의 영향, 고구려와 신라와의

공통점, 왜와의 교류 흔적 등등. 나름 도식화되고 형식적인 그림 하나가 박물관에서 보였다. 설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적대관계와 교류관계를 선명히 구분했겠지만, 사실 당시의 외교란 게 오늘날 미국 편향의 외교같지도

않은 외교보다도 훨씬 정교하고 복잡해서 저렇게 국제관계가 굳어있었을 리 없는 거다. 뭐, 근초고왕 때의

분위기에 한정한 그림이라니 단순화를 무릅쓰고 저렇게 표현했겠지만.

전시품 중 동선의 앞머리에서 눈에 띄던 전시품 하나. 백제시대에 이걸 어떻게 세워놓고 활용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후대의 '장승'이 어쩌면 여기서 기원한 걸 아닐까 싶어졌다. 어느 지역이나 고대로 갈수록

남근이라거나 성적 뉘앙스가 잔뜩 담긴 예술품이 많아 보인다. 그게 왕성한 생명력의 근원 혹은 상징처럼

고대인들 사이에 공유되는 이미지였을 거다.

최근 발견되어 기사에도 꽤나 심심치 않게 떴던 백제시대 면직물의 유물이 여기에 있었다. 고려시대 문익점이

붓뚜껑에 담아왔다던 목화씨 신화 이전에도 이미 면직물을 한반도에서 직조했다는 증거인 셈이다. 유홍준 청장이

말한 것처럼, 유물 하나가 발견되려면 정말정말 억세게 운이 좋아야 한다. 하필 그 자리에 떨어져서, 우연찮게

보존을 위한 환경이 조성되고, 이후 수백수천년간 전란이나 화마, 홍수 따위 자연재해를 이겨내고, 근래에

들어서는 제대로 조사도 없이 갈아엎고 콘크리트를 부어대는 우악스런 손길을 벗어나야 하는 거다. 그리고도

발견되기란 더욱 기적과도 같은 일.


그래서 그나마 우리에게 남겨진 문화유산은 '죽음의 문화', 고분이나 무덤에 고이 매장된 것들이라 한다. 아무래도

'삶의 문화', 일상 생활에서 쓰이고 계속 변화하는 것들은 일상생활 중 파괴되거나 소모되기 십상이니까. 뭔가

궁금증 하나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백제금동대향로. 이것이 처음 발굴되었을 때 백제에서 만든 게 아닐 거라는 학계의 주장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그전까지 우리가 갖던 백제의 이미지란 막연하고 어설픈 것이었다. 발톱이 다섯개 달린 용이 연꽃봉오리를

입에 물고 버티고 있는 모양새라거나, 연꽃 위에 나타난 산수문양과 음악가들, 동물들의 형체, 그리고 맨 위에

버티고 선 봉황의 날아오르려는 듯한 모습까지. 이렇게 화려하고 우아한 대향로에 걸맞는 공간을 꾸미고 있었을

온갖 장식품과 치장들은 또 얼마나 화려했을까. 이 향로만 덜렁 놓였을 리 없는 거니까.

유홍준 청장에 따르면, 이런 백제의 공예 문화가 발달한 건 장인에 대한 예우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종을 만드는 주종(鑄鐘) 박사, 기와를 만드는 와(瓦)박사, 그렇게 기술인을 우대하고 적극 지원하는 정책,

오늘날 한국의 기술이나 디자인이 고전해온 이유도 그렇지 않을까. 장인 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장인 정신을 북돋을 정책적, 사회적 토양이 없어서.

서산 마애삼존석불은 매 계절, 매 시간, 매 순간 표정이 달라진다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씌여있었다.

그걸 보여주려는 걸까, 사방에서 조명이 움직이며 그에 따라 변하는 표정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마터에서 발굴되었다는 거대한 좌대. '상현좌'라 하여 부처님의 옷자락이 좌대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사이즈가 거의 킹사이즈 침대만하다. 부처님상까지 다 남아있었다면 정말 멋졌을 텐데,라고

유홍준 청장이 탄식했던 그 유물이다.

이 파격적이고 생생한 얼굴 묘사라니. 그런데 제목은 무려 '나한(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달은 성자)'랜다. 문득

현대미술을 전시한 미술전에 온 건지, 고대 문화유산을 전시한 박물관에 온 건지 헷갈리는 순간.

고대 삼국이 고분을 축조하며 왕의 안녕을 기원하던 시대에는 부장용 금관, 불교가 국교로 자리매김한 시대에는

사리함, 그렇게 일국 차원에서 문화적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내는 대상이 바뀌었다고 한다. 신라의 出자형 금관이

전자의 예라면 백제의 이런 사리함이 후자의 예. 권력층이 자신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문화적

역량을 총동원한다는 궤는 같지만.




백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이런 연꽃무늬 기와. 그렇지만 연꽃도깨비무늬니, 산경치도깨비무늬니

하는 것들도 굉장히 익숙하면서도 신선하다. 그전까지는 '연화귀형문전', '산경귀형문전'이란 함축적인

한자어로 표현되어 있어 딱딱하고 어려워보였는데, 그렇게 우리말로 풀어서 설명하니 훨씬 정감이 간다.

칠지도.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해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키워드들을 담고 있어 이를 소재로 하여 상상력을

마구 발휘한 소설들도 나왔던 바로 그 '칠지도'다. 진품은 일본의 왕실에 보관한 채 비공개를 고수하고 있다고

하던데, 칼에서 뻗어나온 가지들이 인상적이다. 뭔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흠뻑 서려있다.

나뿐 아니라 이 박물관을 둘러본 아이들의 눈에도 역시 그래보였나보다. 박물관 한쪽 벽에 전시된 아이들의

그림들엔 칠지도를 그린 그림들이 참 많았다. 문화시설이니 볼만한 전시회니 따위가 모두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2010년 한국, 그렇지만 1400여년 전 백제의 고대문화유산을 둘러보기엔 이 근처사는 아이들이 오히려 꽤나

유리한 점도 있겠다 싶어 조금은 다행이다.

대학에서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유홍준 청장의 말솜씨도 그렇고 이런 편안한 분위기도 그렇고. 그리고

듣고 나서 뭔가 세상에 뿌려진 흔적들을 조금은 더 새삼스런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겠구나 하는 유쾌함도 그렇고.

비록 그게 당장 살아가는 데 도움은 안 되는 거라 할지라도, 막연하기만 하던 '백제'에 조금은 더 단단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다면 꽤나 멋진 일 아닐지.



*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하니 선택과목으로 하니 말이 많지만, 어쩜 그런 건 정말 중요한 논점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몇가지 형식적이고 막연한 설명과 문화에 대한 표현어구를 외울 뿐인 식으로

공부시킨다면 그건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계승하고 느끼도록 하는 데는 실패하는 거다. '우아하다'라는

표현방식에 맞추어 백제의 유물 사진 몇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백제의 문화유산들을 둘러보고 본인이

'우아하다'라는 표현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역사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10 세계대백제전'을 준비중인 안희정 충남도지사를 만나 인터뷰할 기회가 생겼다. 대백제전이라니,

지자체들이
너도나도 하나씩 들고 나오는 무분별한 지역 행사 중의 하나는 아닐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출발해

부여에 
도착했다. 최근 성남시가 재정 악화로 모라토리엄 선언을 했듯 그간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유치하고

남발했던
지역 행사들도 상당수 지지부진한 채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상황, '대백제전'은 부디 그런

'나쁜 예'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취재 전에 '대백제전', '안희정'에 대해 미리 검색해보고 조사하는 것은 필수, 여러 정보 중에서도 최근

시사지에서
봤던 기사 한 꼭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김종필 전 총리가 기획해 심대평 지사 시절 시작했고 올해 축제를 앞두고 공사가 완료되었다. 이완구

전 지사는
이 축제를 국제 행사로 키워놓았고 안희정 지사가 마무리를 하게 된 것이다."

"
안희정이 백제에 빠진 까닭(시사IN, 151호)".

라는 내용이 있을 만큼 오랜 준비 기간을 거친 세계대백제전, 안희정 지사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2010 세계대백제전이 펼쳐질 부여의 '백제문화단지', 그 중에서도 고대 국가의 궁궐을 최초로 복원했다는

부여궁(사비궁)과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 능사를 복원한 공간을 안희정 지사와 함께 돌아보며 '대백제전'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눠보기 전, 간단한 브리핑이 있었다. 4000여 억원의 공사비가 투입되어 330만㎡

(100만 평)
대지에 건립된 아시아 최대의 역사 테마파크라는 백제문화단지, 1994년에서부터 근 20년 걸려

지어진 셈이다.


아시아 최대니 뭐니, 그런 거창하고 알맹이없는 수사보다, 무엇보다 놀랐던 사실 하나는 세계대백제전은 기껏

몇년 된 다른 지자체 행사와는 달리 올해로 57회를 맞는 연원깊은 행사라는 것. 일제시기 낙화암에서 나라잃은

백성의 비애를 달래던 부여/공주 지역행사를 이어받았다고 한다. 안희정 지사는 그런 역사적 연원을 강조하며

이 행사가 여느 지자체 주관의 행사들과는 다르게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성원과 지지가 있음을 강조했다.

사비궁에 들어서며 설명을 듣고 있는 안희정 지사. 그는 백제 문화와 역사가 그저 피상적인 암기와 이해에

머물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사실 '백제'라는 고대 국가의 이름이야 너무도 익숙하지만 그에 걸맞는 이미지나

깊이있는 지식이 있었던가. 북한과 남한이 각각 국가 정통성의 연원으로 '고구려'와 '신라'를 상대적으로

부각하던 사이, 1400년 전의 이 화려한 고대국가는 점점 그 흔적을 잃어가고 있었던 거다.

그런 점에서 세계대백제전을 통해 잊혀졌던 역사를 다시금 기억해내고, 재구성해내어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역사문화적 저력을 재발견하려는 것이 대백제전의 목적이라 한다. 외국에 나갔을 때 고작 삼성 반도체, 현대

자동차 따위 최근의 공산품 제조능력만으로 식별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문화적 저력과 성과를 인정받아

"나 자신의 한국인으로서의 품격이 존중받길 바랍니다"라는 게 안희정 지사의 바람이다.


들으면서 꽤나 거창한, 그렇지만 굉장히 매력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지구촌 유지'의 일원이

되었음에 천박한 황금이빨을 드러내며 으스대기 바쁜 게 지금 한국의 문화적 소양이랄까, 수준인 터다.

그에 더해 필요한 건 문화적 자존감과 정체성의 풍요로움. 백제는 분명 그 중요한 수원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담이불루 화이불치'라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문화의 정수를 찬탄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에 잘 살려내는 건 우리 후손들의 몫.

사비궁은 삼국시대 왕궁의 모습을 최초로 재현한 것으로, 아무런 잔존 건물이나 흔적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꽤나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영향을 주고 받았던 수, 당, 남송은 물론 왜의 당대 자취를

추적하고 고증을 거치면서 탄생한 궁전이지만 당연히 원래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거다.

역사도 마찬가지, 지금 우리가 불러내는 '백제'의 기억이란 지금 이시대의 요구와 필요성에 의해 제약받을

거다. 당장 낙화암 인근에서 대백제전 기간에 벌어진다는 '수상공연'이 4대강 정세와 맞물려 미묘한 파장을

낳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안희정 지사도 그런 부분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듯 했다. 한국의 토담 문화가 벽돌이나 석재를 위주로 한

여타 문화에 비해 시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금세 지워지기 쉬우나, 가능한 한 기록과 보전을 통한 역사문화의

계승은 꼭 필요하다는 것. 20세기식의 민족주의 혹은 국수주의를 극복하며, 동시에 현시대의 정치적 풍파에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사비궁을 돌아보고 점심까지 함께 하며 좀더 심도 있는 질문들을 나눴다. 내가 했던 첫 질문은, 대백제전을

이렇게
커다란 규모로 준비하고 있는데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백제문화, 조금 좁혀 대백제전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를 제시해 준다면 무엇인지
였다.


안희정 지사의 답.

백제의 키워드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대백제전의 키워드는 첫 번째로 역사무대를 소재로 한 지역의 축제이고, 두 번째로는 백제의 역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자체가 이번의 가장 큰 목표이다.

해상왕국으로서의 백제, 아시아권 질서내에서의 백제, 불교문화의 중심으로서의 백제, 향후 대백제전이 어떠한 주제의 컨셉을 가지고 볼것이냐가 앞으로 개발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역사문화축제라고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국가중심의 역사로부터 땅의 사람의 역사에 대한 문화에 대한 관점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국가의 역사로부터 백제의 역사는 있지만 한반도 어느 한 지역을 차지했던 이 땅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체계적으로 그 역사와 문화 속에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백제문화제의 초창기 55년, 56년 백제문화가 열렸던 초반기에는 국가의 패망을 애석해하는 유민의 심정으로 연민의 마음으로 행사를 치루었다면 올해 세계대백제전은 이 지역사로서의 백제의 지역역사에 대한 주목이 첫 번째 컨셉이고 역사에 대한 인식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온조 이야기를 주제로 한 사마(왕) 이야기, 사비미르 (부여의 용) 의자왕을 주제로 한 수상공연과 삼국시대의 궁터, 백제의 궁터 재현단지가 이번 축제기간에 주목받는 컨텐츠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사비궁과 능사를 둘러보던 옷차림은 참 편안했다. 등산객들이 흔히 쓰는 편한 모자, 그리고 한 손에는

플라스틱 부채를 쥔 채 캐주얼 차림이었다. 그의 말투 역시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맛이 느껴지는, 그리고

무엇보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성과 열정이 전해지게 만드는 그런 느낌.

그리고 두번째 질문, 외국인 관광객을 20만명으로 잡고 있었는데 이들을 유치하기 위한 구체적인

복안이
준비되어 있는 건지. 주로 어떤 국가의 관광객이 타겟이 될지.


안희정 지사의 대답.

20만 외국인 관광객 중에서 대다수는 일본인 관광객이 차지할 것이다. 주미대사가 열심히 홍보대사 역할을 해주실 것이다. 샤프 사령관등 주한미군 가족들이 백제역사 축제에 많이 참여를 할 것이고 한국에 살고 있는 많은 미국인들의 관광도 예상하고 있다.

일반 기업인들도 한국 내에 들어와 있는 많은 외국인 바이어들을 실질적으로  대접을 잘하고 싶다면 백제재현단지 문화를 보여줌으로써 한국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1400년 전 패망했던 백제유민의 심정으로 역사를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한반도가 아시아의 질서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우리의 조상들이 어떠한 생활반경을 가졌는지를 주목해 본다면 아시아 평화와 질서를 만드는데 상당한 기여를 할 것이라고 본다.


안희정 지사는 2010 세계대백제전이 가진 커다란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무엇보다 사람들이 함께 즐기며

또다시 이 시대의 기록을 쌓고 추억을 만들어가려면 재미있고 내실있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함께 강조했다. 그가 가장 자신있게 추천하는 공연은 바로 '사비미르 수상공연'. 꼭 한번 다시 와서 1400년 전

백제의 문화와 분위기를 흠뻑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백제전 홈페이지 : www.baekje.org/html/kr )



덧댐. 백제문화전과는 상관없이, 안희정 지사에게 궁금한 점 하나가 있어 트윗 친구를 빌어 질문을 했다.

안희정 지사(@steelroot)는 평소 활발한 트윗을 하는 걸로 유명한데 요새 트윗 세계와 바깥 세계와의

온도차가 심하게 나는 건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지. 대체 왜 그럴까, 하고. 대답이 궁금하신 분은 그에게

다시 물어보셔도 좋을 듯.




 

네발 달린 짐승이 슬쩍 고개를 돌린 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듯한 자태다. 이것은 뭐에 쓰는 물건인고, 묻고 싶게

만드는 이 물건의 이름은 호자(虎子), 백제 시대의 남성용 변기라고 한다. 아하. 그러고 보니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 동그랗게 구멍이 나 있는 데다가 등언저리에 손잡이가 붙어 있는 게 보인다.


위트있게 슬쩍 뒤로 뺀 엉덩이하며, 몸통에서 머리로 이어지는 그 은근한 곡선미하며, 전체적으로 안정감있게

버티고 선 균형감하며, 집에 저런 거 하나 있으면 따로 화장실 안 쓸 거 같다. 게다가 휴대하기도 편하잖아.

변기에 대해 아무런 생각없이 페트병이나 들고 다니던 현대인들에겐 없는 고졸한 운치와 미감은 말할 것도 없고.

게다가 이름은 '호자'라니, 왠지 볼 일을 보면서 호랑이처럼 울부짖어야 할 것 같은 충만함.

여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신체의 구조와 용변의 자세가 다르니 남자와는 달라야 하는 건 사실 당연한 건데,

내가 봐왔던 휴대용 변기, 요강의 형태는 남녀에 무차별했던 것들 뿐이었다. 앞으로 길게 뻗어나온 입술이

편안한 배변을 돕기에 맞춤한 백제 여성들을 위한 변기, 신기하게 이름은 변기(便器) 그대로다.


이런 한자이름으로 백제 때도 불리웠을지는 모르겠지만, 변기(便器)라는 단어는 새겨보면 뭔가 의미심장하다.

지린내와 똥내가 섞여있는 단어라기보다는 '편리한 기구'라는 담백하고 호의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단어랄까.


분명 장담하지만 이런 변기는 밤새 안녕하라는 의미로 방안에 들이는 일종의 '요강' 기능을 수행했을 테고,

일반 가정이 아니라 어느 정도 지체높으신 분들을 위한 물품이었을 터. 일반 백성들은 뭐, 집밖의 큰 나무아래

성별에 따른 편한 자세를 취하고는 대충 풀잎사귀 한줌 뜯어다가 닦고 덮어두고, 그랬을 거다.



@ 국립부여박물관.


원래는 올해 말에나 완공될 예정이었다. G-20 개최일자에 맞춘다며 9월까지 완공된다는 이야기가 얼핏 들리더니

어느 순간 8월 15일 광복절(그들은 '건국절'이라 하는)에 맞추어 완공될 거라 했다. 뭐, 그렇게 바싹 일정을

땡겨도 되는 것인지, 부실복원될 가능성은 없지 않은지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있었지만 기어코 8월 15일에 맞춰
'완공'된 광화문이 열렸다.


광화문 복원 ‘속도전’ 강압…현장 작업자들 “부실 우려” (한겨레)

광화문에 개판깔다 (시사IN)

"광화문 복원 ‘속도전’ 강압…" 에 대한 촌평 (개인블로그 ; 진성당거사)

광화문 복원‘속도전’강압, 현장 작업자들 “부실 우려”, 편법복원 등 보도기사(2010.7.1 한겨레신문)와 관련한 문화재청의 입장 (문화재청 보도해명자료)

뭐 요지는 무리한 공기 단축을 위해 오히려 원형을 훼손하고 있거나 혹은 제대로 복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

결국 부실 복원이라는 이야기인데, 두고 보면 알 일이지만 그때쯤이면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역시나 사람들은 뭔가 '배출구'를 찾아 헤맨다는 느낌이다. 광화문이 열리던 날, 그토록 뜨겁던 날씨였음에도

광화문 근처는 사람이 그득그득했다. 뭔가 거리로 나오고, 모여서 함께 즐길 기회만 있으면 그악스럽게 모이는

거다. 어떻게 보면 대단하고, 또 어떻게 보면 참 안타깝기도 하고. 월드컵 때 거리에 나가지 않음 바보 취급당하는

거나, 광화문 완공식 날 역대 최고라는 십여만의 인파가 몰린 거나 뭔가 병들었다는 징후가 읽히는 거 같아서.

사실 숭례문이나 광화문을 복원한다고 할 때 개인적으로는 아예 공사 과정을 관광 아이템화하는 건 어떨까,

그런 아이디어가 있었다. 전통적인 도구를 갖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느리지만 확실하게 복원하고, 복원과정에

참여한 노동자들이며 장인들도 전부 전통 복식을 차려입고 일을 하는 거다. 공사 현장 자체를 활짝 공개한 채

복원이 완료된 결과물 뿐 아니라 복원 과정 자체에도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동물원 창살 속 환상의 동물 해태. 2010/05/10 )

그게 이렇게 해태를 쇠창살 속에 가둬두지 않고, 광화문과 숭례문을 네모난 박스 안에 가둬두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더욱 키우며 '함께' 복원해 나가는 방법이 아닐까. 도난 위험 따위 보안에 문제가 있다

싶으면 아예 포졸이 복장에 삼지창 꼬나쥐게 만든 경비 인력을 동원할 수도 있었을 텐데.

여하간, 그렇게 개방된 광화문. 사람들이 성난 파도처럼 서로 어깨 부딪기며 광화문을 지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사진을 찍겠다고 문득 멈춰선 사람들 덕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걷던 사람들은 서로 발도 밟고 부딪히고

카메라에 머리도 부딪히고. 그렇지만 두 마리 봉황이 펄쩍 날아오른 단청 그림이 그려진 천장은 아무래도

눈길을 빼앗고 마는 거다.

광화문을 들어서니 넓은 공간이 있고, 바로 일직선상에 흥례문과 근정전이 보인다. 이전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놓였었고, 덕분에 각도가 빗겨나 이전되었던 광화문, 한국전쟁때 소실되고 박정희 때 콘크리트로 무지하게

발라졌던 광화문, 사실, 내부가 어떻게 제대로 복원이 되었는지, 저 기왓장 밑에 대나무발이 깔려 있어야할지

'개판'이라는 나무판이 깔려 있는지는 겉으로 보이지 않으니 모르겠다. 그냥, 일직선상으로 복원했다는 점,

조금은 더 조선의 정궁스러워진 위엄과 분위기를 되찾았다는 점이 당장 보이니까 일단은 좋아 보인다.

흥례문을 오르는 길, 자금성에서도 그렇듯 동아시아의 왕궁은 왕과 왕족의 영혼이 다니기 위한 가운데 통로를

제한해 두었다. 그리고 어라, 이런 게 예전에도 있었던가. 흥례문에서 근정전으로 넘어가는 길, 네모지고 길다란
 
연못이 있고 가운데엔 짧막한 돌다리가 있다. 이 돌다리 위에서 수호하느라 여념이 없는 네 마리 신물 중의

하나가 '흑록'이라던가 그 비슷한 이름을 갖고 있다던데, 성군이 잘 다스려 태평성대가 도래할 때 나타나는

영물이라고 했다.

근정문을 지나 근정전으로. 햇살이 워낙 뜨끈뜨끈하게 내리쬐는 서슬에 사람들은 우산을 양산삼아 쓰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연신 부채질을 하며 땀을 식혔다. 근정전 위에 바글바글 올라가 있는 사람들.

근정전은 복원 이전에도 똑같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어디서부터 어디가 복원된 건지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던 데다가 딱히 어디를 복원했다는 안내도 없어서 좀체 헷갈리더라는. 다만 한가지 확실한 건, 근정전에

들어설 때 경복궁의 정문이 아니라 인사동에서 이어지는 옆구리에 해당하는 문으로 들어섰다는 정도?

근데 굉장히 느낌이 다른 건, 역시 정문에 해당하는 광화문에서부터 직선으로 쭉 이어지는 그 길을 따라

내부로 들어섰기 때문인 듯. 궁궐에 덥썩 옆문으로 들어서는 게 아니라, 정문에서부터 하나씩 문을 지나며

들어서게 되니까 안으로 들어설수록 마음가짐이 뭔가 달라진다. 이전에 있던 것들도 새삼스런 눈으로 보게 되고.

근정전 위에 오르니 기와지붕들이 층층이 보인다. 그 너머로 살풋 고개를 내민 인왕산까지. 구중궁궐의 심처에서

바라보던 세상의 스카이라인은 이런 것이었을까.

일월성신도를 뒷배경으로 하고 자리잡은 채 국사를 보았을 근정전 내부. 왼쪽 오른쪽 측면의 문이 좁게 열린 곳으로

사람들이 우글우글, 이런 날은 자세히 들여다 보는 거 아니다, 하면서 카메라만 고개디밀고 대충 내부를 찍었다.

천장에 그려진 두 마리 황금용이 꿈틀대는 조각은 사치스럽다는 느낌은 피하면서도 꽤나 화려하다.

왕좌 앞에 차려진 신하들이 부복할 공간, 방석 하나씩은 챙겨두었더라.

사람이 넘 많았다. 이런 날은 그저 살짝 분위기만 즐기고 얼른 빠지는 게 상책이지 싶었다. 그늘만 찾아 살포시

즈려 밟으며 다시 돌아나오는 길.

대만에서도 돌아다니다가 사람들이 지하철 역에서 지상으로 올라나오자마자 우산인지 양산인지를 펼치는 통에

비오나 하고 맨날 깜짝깜짝 놀랬었는데, 이제 한국도 그렇게 되려나 보다. 우산이 양산도 되고 양산이 우산도

되는, 열대성 기습폭우 '스콜'이 게릴라처럼 치고 빠지는 동남아 기후.

광화문의 뒷통수 사진. 여전히 사람들은 순례하듯 열지어 광화문을 지나 흥례문으로, 근정문을 지나 근정전까지

앞으로 앞으로 걷고 있었다. 이 또한 광화문의 뒤틀어진 각도가 원상복귀되어 일직선상에 궁궐이 놓인 덕분이다.




동작대교니 어디니, 한강의 다리들 위에 언젠가부터 요 비스무레하게 생긴 까페들이 볼록하게 튀어나왔더랬다.

언제고 한번 가보겠다고 맘만 굴뚝이다가 어젯밤 불쑥, 동작대교의 '구름까페'로. 동작대교엔 구름까페와

노을까페가 대교 양편에 버티고 섰는데 한 삼십대쯤 차를 주차해놓을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덕분에 교통체증의

원인이라고 원성도 높다던데 월요일 밤 열시쯤 가서 그렇겠지만 한가한 분위기.

동작대교 남단에서 강넘어 남산촌을 바라보았다. 건너편 강변의 주홍볼빛과 이편 스테인레스 울타리의 은빛이

묘하게 대치하는 느낌.

구름까페는 3층이던가, 건물 위에는 전망대도 있어서 내키면 음료를 들고 올라와 마셔도 될 거 같다. 비가 온

직후라 그곳의 테이블은 온통 빗물에 씻겼다.

양초칠을 빽뺵하게 하고 비를 맞았으면, 혹은 물을 뿌렸으면 동글동글 이쁜 물방울들이 맺혔을 텐데, 아무래도

이 테이블들은 그렇게 준비된 상태는 아니었는지라. 물방울들이 지들 마음대로 쪼개지고 뭉치고. 그래도

그 올록볼록한 느낌은 생생하다.

동작대교를 넘나드는 차들의 행렬. 빨갛고 노란 불빛이 띠처럼 대교에 감겼다.

그리고 올림픽대로, 여길 88대로라고 부르는지 올림픽대로라고 부르는지에 따라 세대가 구별된다고 했던가.

올림픽대로를 따라 줄지어선 가로수들이 마치 디오라마를 꾸며놓은 나무 모형같다.





씨엠립에서 프놈펜으로 이동하려는 참,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길에 마주친 '노 머니, 노 허니'의 격한 티셔츠가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이 티셔츠가 작년 여름에 캄보디아에서 대유행이었던 게 틀림없다.

시엠립의 재래시장통을 옆으로 스쳐보내고, 이 조그마한 마을이 옆에 품고 있는 거대하고 웅장한 고대 유적들을

돌아본 기억을 차곡차곡 갈무리.

시엠립 시외버스터미널, 어딘가에서 모여 작은 미니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옮겨가는 식이었다. 처음엔

이런 미니버스를 태워서 어디로 데려가려는 건지 살짝 불안하기도 했지만 얼마 달리지 않아 대형 버스들이

잔뜩 주차해 있는 흙먼지 풀풀 날리는 황량한 공터에 도착했다.

버스에 짐을 싣고, 아직 출발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간단하게 점심을 먹기로 했다. 6시간이나 시골길을

달려야 시엠립에서 프놈펜에 도착한다니 미리 좀 먹어두는 게 낫겠다 싶어서.

다행히 우리네 버스터미널이 그렇듯 슈퍼가 있어서 다양한 간식거리나 음료도 많이 팔고 있었고, 요기거리가

될 만한 것들도 노점에서 많이 팔고 있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저 소세지들은 딱 보기에도 위생상 뭔가 문제가

있어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기름에 다시 지글지글 튀길 테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은근 맛있어 보이기도.

노점 말고도 건물로 된 음식점에서도 전부 이런 류의 소세지를 파는 게 왠지 안 먹으면 후회하겠다 싶어 주문.

칼로 잘라놓고 보니 꽤나 먹음직스러운 조리 예 시현, 무슨 고기로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맛도 꽤 좋았다.

숙주랑 함께 볶아진 닭고기-아마도..?-요리도 간단히 맛보고,

닭요리처럼 보여서 시켰는데 왠지 뼈도 자잘하고 맛도 살짝 다른 것이, 주인 아저씨한테 몇번을 물어봤지만

영어도 손짓발짓도 (심지어) 한국어도 안 통한다. 결국 이게 무슨 고기인지 밝혀내는데 실패, 왠지 찝찝해서

다른 것들은 싹 먹어치웠지만 이 녀석은 조금 남기고 말았다는.

가게 한 켠에 놓인 평상에서 오수를 즐기고 있는 아저씨, 그리고 선풍기 앞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대며

더위를 식히고 있는 아이 하나. 시선은 티비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벌거벗은 가슴 가득 선풍기 바람을

부딪기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슬금슬금 가게를 빠져나가던 고양이 한 마리, 잘 못 먹었는지 바싹 야윈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 닭인지 비둘기인지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 한 점을 던져주려 했는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버스 껍데기는 그래도 제법 깨끗하다. 더구나 내부에는 이렇게 화장실도 있었던 것. 여섯 시간쯤 달리니 필요하겠다

싶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문득, 아무리 그래도 중간에 휴게소도 설 테고 한국에서도 그정도 달려도 차에 화장실은

없는데 싶어 새삼스레 신기하게 바라봤댔다. 언제든 필요할 때, 급할 때 쓰라는 세심한 배려.ㅋ

그리고 뭔가 우스운 방석. 버스의 각 좌석마다 전부 이 알록달록한 핑크 톤의 방석이 매달려 있었다. 이건 뭐지.

버스 앞에는 그래도 티비도 달려 있고, 캄보디아의 대중 가요를 뮤직비디오랑 함께 쉼없이 틀어줬다. 뭐랄까,

80년대 한국 트로트 가요에 맞춰 성인 배우들이 80년대풍의 과장된 감정 연기를 하는 스토리다. 해변에서 함께

손잡고 하하호호 웃으며 뛰어다니다가, 어느 순간 그 해변에 홀로 앉아 눈물 글썽이며 옷을 쥐어뜯는.

바깥에서 휙휙 풍경이 지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복 2차선의 외길, 이대로 쭉 프놈펜까지 가는

길이라 했다. 엔간한 차 한대 보이지 않는 구간을 한동안 달렸고, 드문드문 스쿠터가 앞에서 알짱대기도 했고.

프놈펜에 거의 들어와간다 싶을 무렵, 똔레 쌉강인지 메콩강인지, 뜨겁던 태양이 한풀 꺽인 듯한 하늘 아래

강폭이 잔뜩 벌여진 수면 위로 배들이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강변으로는 수상가옥스러운 가건물들이 비탈지게 세워져 있기도 하고, 양철판을 이어붙인 선박들이 쭉 정박해

있기도 하고. 목욕탕의 쑥탕같은 이벤트탕 색깔이랑 비슷한 강물 색깔이 묘하다.

프놈펜 시내에 들어섰다. 아줌마들이 열맞춰 서서는 쿵짝 리듬에 맞춰서 에어로빅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프랑스 식민지 시절 '인도차이나의 파리'라 불렸다는 이곳은 아무래도 시엠립 같은

시골의 조그마한 동네와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었다. 비교적 높은 스카이라인도 그렇고 북적대는 사람들도

그렇고. 그리고 웃통도 제대로 챙겨입은 꼬맹이들이나 아저씨들도.

그리고 시내 곳곳에서 쉽게 보이던 원숭이들도. 좀처럼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얼굴 표정이 역력하면서도

막상 가까이 가거나 관심을 보이면 슬금슬금 도망가 버린다. 뭔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 떠나가는 듯.

어떤 면에서는 서울의 골목길에서 자주 보이는 길냥이들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프놈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숙소까지 가는 길에 잠깐 들러본 왓 프놈, '언덕 위에 세워진 사원'이란 의미의

왓 프놈은 프놈펜 시민들의 도심 공원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위치도 딱 프놈펜 시내 중심쯤에-약간 북쪽에

치우친 감이 없진 않지만-자리잡고 있다.

얼핏 보면 세느강변 옆의 파리 시내 분위기도 얼추 느껴진다. 가로등과 건물들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그렇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저녁의 어슴푸레한 풍경 속에서 촛불빛을 밝혀 바치는 걸로 보아 뭔가 종교적인

지도자 아닐까. 동상에 장식되어 있는 목걸이도 그렇고.

숙소, 호텔 캄보디아나에 도착해서 체크인하고 나니 객실에서 제일 먼저 반기는 건 벽면에 찰싹 붙어있던

도마뱀 한 마리. 안뇽.

똔레 쌉강과 메콩강이 합류하는 지점쯤에 호텔 캄보디아나가 서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어디서부터가 똔레쌉강이고

어디까지가 메콩강인지 뚜렷하게 구분하는 거 자체가 좀 넌센스다. 두 줄기 모두 홍수로 잔뜩 탁해진 한국의

강들처럼 온통 흙탕물인걸 뭐. 그치만 조금 낡긴 했지만 꽤 괜찮았던 오성급 호텔에 걸맞는 뷰라고 해두기로.

저녁이나 아침에 해넘이, 해돋이 보기엔 딱 좋은 위치다.

메콩 익스프레스, 시엠립에서 프놈펜까지 여섯 시간 걸려 달리는데 요금은 USD 11$ 이었다.(09. 8월 기준)

버스 짐칸에 짐을 실어주면서 가방에 묶어 두고 식별하기 위한 표찰을 떼어주기까지 하니까 나름 체계는

갖추고 있는 셈이다. 짐표에 그려진 저 돌고래..는 메콩 익스프레스의 로고. 근데 메콩강에 돌고래가 사나.



이태원 이란음식점에서 물담배 한대 땡겨보시려는지.(물담배 원리도 첨부)

에서 포스팅했던 그 가게, 이제 이태원에 다섯 번 가면 한 번쯤은 꼭 가야 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평을 빌자면, 주인 아저씨의 한국어 실력은 그새 조금 더 진보했고 또 그만큼 페르시안 음식들의 맛도 조금 더

향상된 거 같달까. 조금 바뀐 인테리어도 이전에 비해 조금은 더 세련된 느낌.

메뉴판을 한번 찍어두고 싶었는데 이제야. 메뉴에 나온 음식은 거의 다 먹어본 거 같다. 가격도 그렇게 비싸지

않고, 약간씩 변주된 이란의, 페르시안의 음식들.

메뉴판 반대편, 농염한 자태의 글래머러스한 흑발 여인이 포즈를 취했고, 페르시아의 유물이 가게 이름 위에

내려앉았다.

Chelo Kebab, 양고기 비비큐랑 양파, 오이, 구운 토마토랑 밥이 함께 나오는 메뉴.

Gheimeh, 양고기와 렌틸콩, 감자와 레몬으로 국물 자작하게 만든 소스와 함께 밥이나 난을 함께 먹는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를 애써 눌러 잡지 않았지만, 딱히 거슬리진 않는다. 오히려 그 양 냄새를 즐기는 편이라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요구르트, 플레인이면서도 시지 않고 정말 담백하고 걸쭉한 느낌이라 난을 찍어먹기 딱 좋은 만큼의 점도.

모처럼 갔으니 시샤 한 대 한 피고 돌아오는 건 예의가 아닌 터. 가장 맛좋은 애플 대신에 주인 아저씨의

추천으로 '피치'를 택했다. 처음엔 다소 옅게 올라오던 복숭아향이, 어느순간 물기를 담뿍 머금은 촉촉한

수증기처럼 폴폴 올라왔다. 생각의 줄을 놓은 채 뻐끔뻐끔, 집에다 한 대 들여놓았음 좋겠다고 또다시

마음이 동해버렸다.





밤에 차를 끌고 나가서 한강에 앉을 때 늘 아쉬워하는 것 하나. 호이포이 캡슐을 만들어줘.

흐르는 강물과 번지는 불빛과 나부끼는 바람을 느끼고 싶어서 나가는 건데, 맥주 한 캔이 없으니 영..

차를 끌고 와서는 술 한잔 여유있게 마시고 차는 호이포이 캡슐에 퐁, 넣어서 주머니에 담아 돌아가고 싶단 말이다.

차의 부피를 Zipping해서 호이포이 캡슐에 설혹 넣는다고 쳐도 차 한대의 무게까지 줄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게

엄밀하게 따지는 건 손오공의 '수세식 변기보다 깨끗한 마음'을 욕보이는 셈이니 관두고.


사실 휴머노이드 형태의 '차량용 호이포이 캡슐'은 이미 등장했다. 사실 꽤나 보편화되었다.

대.리.운.전.

@ 잠원 한강고수부지.

삼각대를 쓰지 않고 사진을 찍었을 때의 나쁜 예. 삼각대 들고 다시 한번 가야겠다.





씨엠립에서 프놈펜으로 가던 길이었다. 털털대는 버스가 흙길과 아스팔트길을 번갈아 달리다가 문득 멈춰섰다.

뭔가 노점이 길게 늘어서 있고 차들도 좀 보이는 게 말하자면 휴게소인 양, 잠시 멈춰서서 휴식도 취하고

화장실도 가고 그러라며 시간을 내준 거다.

노점상들에 쪼르르 달려가서 구경하기 시작, 몇 개 돌아보기도 전에 깜짝 놀라고 만 장면 발견. 다리가 우글우글,

털도 복슬복슬, 게다가 똥배는 오동통통 너구리. 색깔도 먹음직스런 갈색이다.


처음에는 무슨 후렌치 후라이인가 했는데, 날씬한 막대기들이 이리저리 서로 얽혀 있어서.

세부명칭은 싱가폴블루(Cyriopagopus sp.) 교목성(나무위성) 타란툴라, 수명은 10년, 성체가 되면 25cm까지 큰다니..이 아름다운 바디와 화려한 컬러는. 쿠하. 이제 날 타란툴라 브리더라 부르시오.

학명 : CYRIOPAGOPUS SP.

이름 : 싱가폴 블루

서식지 : 싱가폴

성체시 크기 : 25Cm까지 자라는 대형종

적정온도 : 26~32°C

적정습도 : 70~80%(바닥제는 습하게 해주는것이 좋다고 한다)

바닥제 : 바크,에코얼스,피트,버미큘라이트

성격 : 매우 공격적(꺄아~~^0^*)

성향 : 나무 위성

기타 : 싱가폴 블루는 구티오너멘탈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타란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타란입니다.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아직 발색이 나온 성체가 없기에 자세한 정보를 알수없거 대부분 외국사이트에 자료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현재 국내에서는 유체와 아성체를 구할수있습니다. 유체의 경우는 유목이나 바닥제를 이용하여 약간의 버로우성 은신처를 만들고 그곳에서 생활을 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입니다. 이때는 약간의 충격과 진동에도 반응하며 더깊이 숨어버리는 모습을 보이는 걸로 보아 사유난이도가 약간 있는편이지만 아성체의 경우는 지구타이거류의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므로 주의가 필요한 편입니다.



2007년쯤 반년동안 내가 길렀던 타란툴라가 생각났다. 슬슬 손바닥만하게 자라나며 저 신비한 파란빛이 몸통에

드문드문 배어나기 시작하던 녀석은, 2007년 겨울을 못 견디고 얼어죽어 버렸댔다. 집에 저 녀석이 왔을 때

질색팔색하던 어머니에게 "구워먹으면 초콜렛맛이 난다더라"며 설득했었는데 차마 구워먹기에는 반년간 쌓은

정이란 놈이 무서워서. 거미가 일찍이 '사랑은 없다'고 울먹였거늘.





타란툴라야 타란툴라야 거미줄을 뱉어라 안 뱉으면 구워먹으리 초콜렛맛.

타란툴라야 타란툴라야 꾸물대는 밀웜을 사냥해 보아라 꼼짝않고 버로우하면 구워먹으리 초콜렛맛.

거미튀김만 있던 건 아니었다. 정말 거대한 귀뚜라미들이 폴짝 뜀뛰려는 자세 그대로 뒤엉켜서는 난리다.

껴안고 뽀뽀하고 뒤집고 때리고, 지들끼리 난리가 난 그야말로 아수라장. 생명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 저 지독하게

밀집된 인구밀도에서 벗어나도록 종이봉투에 좀 덜어갔음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종이봉투에 담아 번데기씹듯

오도독 오도독. 나름 빨간 고추와 고수도 들어가 있어서 캄보디아 특유의 향신료 냄새도 부족하지 않을 듯.

이 녀석들은, 뭐랄까. 좋게 말하면 딱정벌레. 나쁘게 말하면 거대 바퀴벌레. 딱정벌레라고 하면 왠지 1그램쯤은

먹고 싶은 마음이 동할 수도 있겠는데, 바퀴벌레라고 하면 전혀 먹고 싶지가 않은 거다. 반질반질한 껍질이

기름에 튀겨졌으니 꽤나 바삭바삭할 거 같긴 한데. 근데 사진상의 에러는 저 절대 먹고 싶지 않은 빛깔의

징그럽게 생긴 곤충 하나. 아니다, 쓰면서 생각해 보니 왠지 색깔이 빨갛게 잘 찜쪄진 꽃게 같기도 하고.

그 외에는 여느 시골의 노점과 딱히 다른 풍경은 없었던 거 같다. (워낙 저 거미와 귀뚜라미와 바퀴(딱정)벌레의

생생하게 튀겨진 모습이 강렬하게 남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길가에 연해서는 간이 '구루마' 옆에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숫기없는 소년이 하나 있었다. 왠지 저 녀석,

거미튀김을 한 입 물려주면 기운이 번쩍 나서 구루마라도 뒤엎지 않을까, 마님을 찾진 않을까 싶은 상상의 나래.

차에 다시 올랐는데 바지만 입고 자전거를 타는 까무잡잡한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안장 높이나 전체 크기가

자신에 비해 훨씬 커보이는 자전거를 타고는 노점에 와서 뭔가를 사 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계속 안장에

찡겼는지 엉덩골 사이에서 옷을 잡아빼는 번거로운 손길이 눈에 밟혔다.

이내 출발, 다시 평화롭고 뜨겁지만 나른한 캄보디아의 시골길을 따라 먼지 풀풀 날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시엠립에서 프놈펜까지는 버스로 6시간, 중간에 몬도가네 튀김들을 보고 놀란 가슴 진정시키다 보니 그 정도

시간은 금방 흘렀다.







뚜얼슬랭 박물관의 리플렛. 프놈펜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킬링필드'에 갈 짬이 안 난다면 시내에 있는

여기는 꼭 한 번 들러보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

(관련 포스팅 : 캄보디아. 2만명의 원혼이 1명의 귀중함을 일깨우다, 뚜얼슬랭 박물관)


75년 폴 포트가 집권하여 중국의 '문화혁명'에 비견될 만큼의 극단적이고 광적인 정책을 펴면서, 외국어를

알거나 책을 보는 사람, 가르칠 능력이 되는 사람 등 지식분자스러운 사람들은 전부 수용소에 갇히고 외국과

내통했다거나 민심을 교란시킨다는 혐의로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런 광기가 이어진 게 약 4년.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 혹은 열등감, 부자에 대한 억울함과 불공정한 제도에 대한 멸시, 구조와 개인에 대한

감정과 이성적 판단이 뒤엉켰고, 그에 더해 자신의 개인적/사회적 경험이나 트라우마 따위가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을 거다. 그렇게 잔뜩 난마처럼 뒤얽힌 맥락에서 모두의 모두에 대한 증오만 남지 않았을까.

평범한 고등학교였던 곳이 보안본부이자 수용소로 전환되면서 약 2만명의 사람들이 끌려들어가서는 단 6명만

살아나왔다는 대표적으로 무시무시한 수용소, 프놈펜 시내의 뚜얼 슬랭 수용소다. 좁은 골목을 요리조리 꺽어

도착한 건물은 웬지 스산한 느낌, 아침나절의 선선한 공기조차 위축시키는 느낌은 뭘까. 검정개도 웬지, 지옥문을

지킨다는 머리 셋 달린 개처럼 흉맹스러 보인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 거겠지만 사람의 인기척이 거의 없다. 맘편히 아침부터 관광할 만한 장소는 아니니까.

매미니 뭐니 곤충들의 소리라도 있어야 할 법 한데 온통 조용한, 어딘가 추모공원이나 국립묘지에 온 듯한

엄숙하고 무거운 공기가 고여 있었다. 나무에 그어진 칼자국 하나도 범상해 보이질 않았다.

입구에서 표를 사고 안에 들어서서 돌아본 바깥의 풍경. 여기가 수용소였을 때도 밖의 건물들은 저렇게 바싹

세워져 있진 않았겠지. 사방에서 총을 든 병사들이 초소에 올라 감시하고 있었을 테고, 서치라이트가 문득

깜빡했다는 듯 한바퀴씩 빙글빙글 돌았을 거고.

기괴한 웃음이다, 라고 생각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치켜 올려 웃고 있는 느낌, 눈은 전혀 안 웃고 있는 걸. 아마

이 피비린내나는, 셀수없이 많은 생명이 집중적으로 죽어간 공간에 붙을 표지라는 걸 알았다면, 아무리 웃는

표정을 지으려 해도, 그리려 해도 저렇게 딱딱하고 경직된 표정밖에는 나오지 않았을 거다.

웃지 말라는 표지와 더불어 붙어 있는 규정들, 방문자에게 요청되는 규정인가 하고 읽다가 혼란스러워졌다.

아, 이 곳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규정이었다...뭐 하나 제정신박힌 규정이 없지만 특히 6번. 하아...

고문하다 소리지르면 안된다라니, 개꼽창들이 죽도록 갈구겠다고 단단히 작정하고 꼬투리잡겠다는 얘기.

1층에 있던 누군가의 침대, 매트리스나 담요조각 하나 없이 앙상한 철망만 남겨놓고 있으니, 게다가 이런 공간에

있으니 상상이 뻗어나가는 방향은 정해져 있는 셈이다. 고문기구로 쓰였을까, 팔다리를 묶고 때렸을까, 설마

이게 침대길이보다 신체가 길면 잘라버린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아니겠지..하며.

뚜얼 슬랭 박물관은 총 4개의 동으로 되어서, 고문실, 살해하기 전에 찍어둔 '영정사진', 고문도구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고 한다. 여기는 아마도 수용자들의 생활동쯤 되었나보다. 혹은 고문실이었거나, 고문실도 겸했거나.

낡아빠진 창문틀, 아무런 칠도 안 된 채 나무 그대로의 헐벗은 색깔과 질감을 드러낸 것들, 그리고 저 뜬금없는

농구골대 같은 건, 고문시설. 저기에 사람을 매달아 커다란 물독에 머리를 박아놨다고 한다. 날것의 폭력이다.

상상해보면 정말, 무지막지한 야만이다. 시키는 사람이나 시키는 대로 따르는 사람이나, 짐승처럼 저기에

매달린 채 허우적대며 목숨을 구걸했을 사람이나.

아마도 행정적인 필요에 의해서였을 거다. 살해하기 전 사람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남겨두는 건. 겁에 질린

그들의 표정이 보여주듯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존재가 지구상에서 소멸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한.

6월 광주항쟁을 다룬 책들에서 저런 사진들은 처음 접했었다. 겁에 질렸던 표정이었겠지만, 경직되면서 표정은

빳빳하게 굳었고 더이상 생전의 이름으로 신체부위를 하나하나 식별하는 게 무의미하다. 일정 공간을 차지하고

단정히 눕혀져 있는 가죽가방같은 존재들. 사람 한 명 죽인다며 달려오는 살인마에겐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욕하고 삿대질이라도 하겠지만, 이 엄청난 대규모 도살 앞에선 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발굴현장에서 발견된 듯한 쇠사슬, 수용자들을 둘둘 엮어서 끌고 다니기 편하도록 쓰이던 장치가 아닐까 싶다.

시멘트 건물의 묘한 냉기가 선뜻한 기분을 돋게 만들었다. 2층으로 오르던 길에 발견한 낙서들. 아, 여긴

1975년까지도 아이들이 가득하던 학교였던 거다.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음과 혼란이 가득했을 곳.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들이 울부짖고 절규하고 죽어가는 소리로 지옥도를 그려냈을 곳이기도 하다.

누굴까, 간수가 쓰던 책상인 거 같기도 하고. 70년대 후반에 쓰이던 책상과 의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니,

더구나 이런 장소에서 저렇게 보존된 걸 보면 왠지 섬뜩하다. 아마도 이런 섬뜩함, 인간이 얼마나 흉폭하고

무지하게 야만스러울 수 있는지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이런 장소가 필요한 거다.

그 뒷켠에 서 있던, 캄보디아가 잠시 '캄푸챠'라는 국명으로 광기어린 폴 포트 치하에서 신음하던 때 공산당

지도자들의 면면. 이들은 뭐가 좋아서 저리 활짝 웃고 있는 걸까. 사람이 가장 무서운 거다.

사실은, 그들의 교조화된 신념이 무서운 거다. 부르조아, 쁘띠부르조아, 인텔리겐챠가 조장한 자본주의와

뿌리깊은 봉건적 질서,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빈농과 노동자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열정이 단순화된

선악구도의 복수전으로 치달으면서 사회 전반을 퇴행시키고, 문명과 인류 지성을 퇴행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이렇게 손쉽게 재단할 수는 없었을 거다. 이런 식의 맑시즘을 빙자한 근본주의 혁명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와 해악에 대항하는 일종의 도덕적, 이상적 혁명을 구현하려는 시도로 보였을 수도

있었고, 실제로 적지 않은 서구의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은 심정적으로 그들을 지지하기까지 했으니.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눈먼 광신이 빚어낸 참극은 이토록 생생할지언정, 무엇이 이들의 문제의식을

자극했고 심지어 득세하게 했는지 그런 부분은 짚어지지 않는다. 철저히 기득권에 기댔던 정치세력에 대한

반감, 기득권 세력만이 호의호식하며 풍기는 부정부패의 구린내에 대한 혐오, 그리고 양극 세계질서의 패권성에

대한 문제의식까지. 이런 참극은 그 결과물일 뿐이다.

애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순수해지라느니, 깨끗해지라느니, 그런 도덕군자같은 소리를 하지만, 사실은 그렇다.

이들이 자라나서 제각기의 위치에서 이해관계를 겨루게 될 테고, 그 와중엔 어쩔 수 없이 갈등과 큰 소리가

빚어지게 되는 거고, 그 문제들을 얼마나 인정하고 진지하게 해결하려 노력하는지가 관건이어야지 시끄럽다고

혹은 '날것의 소란스러움/폭력'이 싫다고 그저 조용히 하라며 무질러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 싸우는 거 보고

애들보기 부끄럽지 않냐고 흔히들 말하는 건, 그래서 대개 무지의 소치다. 정치인들은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고 조용히 입닫고 있다가 이런 대량 학살도 벌어지고, 부정부패가 터져서 내전도 터지고 그러는 거 아닌가.

아마도 수용자들의 숙소로 쓰였던 듯한, 철조망이 한층 삼엄하던 한쪽 건물. 잔뜩 녹슨 철조망이지만 여전히

날선 이빨은 그대로다. 뚜얼슬랭 수용소는 안전하고 독성없는 '역사'의 한장면으로 전시되고 있지만, 사실

그때의 제3세계가 부딪히고 있는 국제정치적, 국내정치적 문제는 대부분 그대로다. 한국은..? 냉전의 최전선,

미국의 피벗(pivot)으로 제한된, 게다가 무능한 외교, 계층간 부의 격차 심화, 기득권의 부정부패...

안에 들어가니 이건 수용시설이라기보다는, 사육시설이다. 좁디좁게 구획된 공간,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둠,

그리고 발이나 손에 채워졌을 철제 차꼬가 그대로 남아 있고 정말 불결하고 간소한 화장실까지.

크메르어인지 뭔가 언어가 잔뜩 휘갈겨져 있는 한쪽 벽, 수용소로 쓰이기 전 아이들이 해둔 낙서일까 아니면

수용시설에 갇힌 누군가가 적어둔 글일까. 혹은, 비극이 벌어진 후 찾아온 누군가가 사람들을 기억하며 남긴

추도문일까.

해가 점점 중천으로 떠오르며 그림자도 확연히 짧아졌다. 남국의 열기가 훅훅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손발도 차갑고 가슴도 냉막하다. 이 공간은 그토록 서늘했다. 서늘하고, 시큰하고.

어딘가 굉장히 폐쇄된 채 어두침침한 공간, 바깥을 내다보기엔 너무 시늉만 해둔 창문, 하얗게 번지는 햇살.

마지막 건물동에서는 78년에 폴포트 치하의 캄보디아를 최초로 둘러봤던 한 서양인의 기록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폴포트의 초대를 받고 당시의 캄보디아 이곳저곳을 둘러봤던 그는, 그 거침없는 파괴와 재건의 움직임을

다소간 경탄의 눈으로 바라봤고, 일종의 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우호적이었던.

이런 식으로 당시의 사진과 감흥을 남겼고, 오늘날의 시점-역사적 평가가 어느정도 고착된-에서 다시 평가한

아이디어들을 함께 남겨 놓아서 훨씬 의미심장했던 거 같다. 훨씬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물론 그렇다고 당시라 해서 그 비판의식이 말랑말랑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유의해 볼 만한 점.

아마 그가 자신의 과거 사유를 반성하고 남들 앞에 이렇듯 샅샅이 끄집어내어 재평가하는 이유는, 이 메세지를

남기기 위함일 거라 생각한다. 사람에 대한 돌봄, 배려를 망각한 채 진행되는 래디컬한 혁명. 누군가의 피와

목숨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혁명의 비정함이나 과격함의 틈바구니에서 개별 인간들을 챙긴다는 게 어불성설일

수 있겠지만, 그래서 이제 그런 폭력적인 형태의 전복은 가능치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여겨지지만. 어떤

경로든 핵심은 그거다. 사람을 생각하기.

더구나 일국 차원에서의 '변혁'이 가능한지도 문제. 자립 경제체제를 갖출 수 있는지도 참 지난한 문제거니와,

자립경제를 갖춘다고 해서 외부의 적대세력으로부터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다. 러시아혁명 이후 외부로부터

지원받는 백군세력이 정상적인 국가 경제발전을 방해하고 상시적인 전시동원체제로 이탈하게 했듯.

꽤나 많던 전시물들을 다 돌아보고 문득 답답해져서 수용소의 철창 밖을 내다보았다. 한모금, 숨 돌릴 여유가

필요한 곳이었다.

자살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1층은 물론 2층, 3층에도 건물밖으로 뛰어나갈 수 있을 틈에는 전부 꽁꽁

철조망이 둘려 있었다. 자유롭게 죽음을 택하지도 못하게 붙잡아두고, '혁명 국가'의 이름을 빌어 그들을

'인민의 적'으로 처단하겠다는 집요한 의지일 거다. 사실 이건 모든 국가에서 법을 집행하며 국민을 규율하는

방법이랑 똑같다. 다만 조금 더 날것의 형태일 뿐. 사형수의 자살을 막고 목숨을 붙여놓은 상태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경우도 여전히 비일비재한 거다.

그들 수용자들이 행정적인 이유로, 아마도 세상에서 '제거'되기 이전의 서류 절차를 위해 저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이곳을 거쳐간 2만명, 여섯 명을 제외하곤 전부 저 의자를 거쳐 국가의 이름으로 살해당한 거다.

참. 단시간에, 그토록 많은 사람을 무참히도 해치웠다. 사람 한 명의 목숨이나 만 명의 목숨이나 경중을 따질 일도

부등호를 사이에 꼽을 일도 아니지만, 참 적나라하게 막장이었던...

나오기 전, 그들에 대한 위령탑이 서 있는 마당을 돌아보았다. 앞으로는 이런 광기 어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길.

그리고 지금 이순간에도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신념과 신앙과 이상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들에게도

귀감이 될 수 있길. 사람 만 명이나 한 명이나 똑같이 소중하다는, 그런 인식에까지 이를 수 있기를.

민주주의, 사람을 위한 정치체제는 피를 먹고 자란다. 사실 캄보디아 뿐 아니라,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렇게

시뻘겋게 피에 물든 장면들 한둘 이상씩은 갖고 있는 거다. 이런 비극은 어느 한 지역, 한 시대에 국한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언제든 재연되고 되살아날 수 있는, 다만 잠복해 있을 뿐인 사건일지 모른다.

앙코르 톰에서 승리의 문을 지나, 톰마논과 차우 싸이 떼보다 사이를 가로지르고 나면, 문득 쌓여있는 돌무더기가

보인다. 예전에는 돌로 쌓아 만들어진 돌다리였을 것만 같은 아치형이 반복된 형태의 돌무더기. 많이 허물어졌다.

울룩불룩하게 힘이 들어간 근육과 다이나믹하게 꼬인 채 돌무더기를 움켜쥔 모습은, 금세라도 돌을 집어던질

듯한 살벌한 기세다. 조용하고 침착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랄까.

그런 무시무시한 나무들에 꼬불꼬불 흔적이 남아있다. 나무들은 돌들에 상처를 내고, 개미들은 나무에 상처를 낸다.

바로 이 녀석들. 지금도 쉼없이 꼬물대며 나무를 바스라뜨리는 녀석들.

뭔가 수박씨만한 녀석들도 보이고, 작은 놈들이라고 해도 여기 녀석들은 원체 먹을거리가 많아서 그런가 굉장히

억세보이고 강인해 보인다. 딱 보기에 덩치도 그렇고 딴딴해 보이잖아.

꺄아...징그러. 저번에 올린 타이완 화시제 야시장의 뱀 사체들과 더불어 혐짤이랄 수도...있으려나.







마치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묘사된 '오세아니아'를 비롯한 세 개의 제국을 묘사하는 듯 한,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식은 힘


뚜얼슬랭 박물관에서 발견한 시. 1970년대 후반 폴 포트가 집권했던 약 5년간 2만여명의 크메르인들이 끌려들어가

단 6명만 살아남았다는 악명높은 뚜얼슬랭 수용소, 그 상상할 수 없는 시기를 상상케 해주는 시.


사랑, 결혼, 웃음, 게임, 학교, 신발, 빵, 온통 금지된 것들의 목록으로 이어지는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No hope, No life

A third of the people didn't survive.

The regiem died.




앙코르톰 동쪽 입구에 연해 있는 두 개의 사원, 톰마논과 차우 싸이 떼보다. 동쪽 입구에서 뻗어나가는 길을

사이에 두고 두 사원의 위치나 형태가 흡사하여 쌍둥이 사원으로 여겨진다고 하지만, 앙코르 유적에 대한

흥미를 더해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톰마논은 앙코르 왓을 세운 수리야바르만2세 때 세워진 사원이라 그런지 여기저기에서 그 유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아직 앙코르왓을 보기 이전이었는지라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닮았는지는.

천년도 넘은 사원의 무게감, 천년을 두고 돌덩이에 뿌리를 내렸을 이끼들도 돌의 무게감을 배웠다.

그리 크지는 않은 사원이라 한 바퀴 훌쩍 돌아보는데 한 삼십분 정도. 사실 반대쪽의 '차우 싸이 떼보다'란

기묘한 이름의 사원이 신경쓰여서 조금 살살 돌아봤다.

글쎄 길건너편엔 무슨 테마파크에서 봄직한 반짝반짝거리는 사원이 세워져 있었던 것. 똑같은 생김이고 방금

돌아본 톰마논과 같은 장식의 구조지만, 때깔이 너무 생경하다.

대충 뜨거운 태양에 눈먼 채로 보면 나이를 좀체 가늠할 수 없고, 부분부분 과거의 원형이 보전되어 있는 곳들이

있어 그래도 완전 복제품이라거나 100% 신품은 아닌 거 같긴 하지만, 아무래도 중간중간 두드러진다.

이런 식으로. 감히 인간의 손으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시간의 씻김, 그 자연스런 흔적과 함께 할 때 너무도

티가 나는 반듯반듯하고 번쩍번쩍하는 복원 부위. 시간이 지나면서 갓 지은 티가 좀 씻기고 나면 톰마논과

쌍둥이 사원으로 지어졌다는 게 좀더 실감이 나려나.

사원들 옆에 간단하게 지어올려진 천막, 그리고 보기만 해도 너무 편안해 보이는 해먹.

오랜만에 보는 봉긋한 사자녀석의 엉덩이. 이 녀석은 왠지, 봉긋보다는 불룩하단 표현이 맞을 듯 하기도.




일주일여 묵었던 친구녀석의 아파트 건물에 있던 빈티스 느낌 가득한 엘레베이터. 이중문으로 되어 있어

바깥문을 먼저 열고 안의 문을 열어야 엘레베이터에 탈 수 있고, 두개 문을 모두 닫아야 작동되는 형태.

마지막으로 돌아본 녀석의 집. 아침에 나와선 뒤도 안 돌아보고 멀어졌다가, 밤이 깊어 어둑해져서야 더듬대며

돌아왔으니, 이렇게 밝은 시간에 제대로 마주보는 것도 처음이다. 그치?

튈를리 정원 근처의 풍물시장이 있단 이야기를 들었는지라, 살짝 돌아보고 구경이나 할 셈으로.

터헛. 장화신은 고양이 3종세트가 저런 슈렉고양이스런 눈빛을 하고 내게 걸어오는 듯한 환상은 뭐지. 아..

저 애절하면서도 도도하고,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지한 눈빛. 냐옹.

마침 고양이 인형 샵도 옆에 있어주시고, 냉큼 들어가서 할딱할딱대며 온갖 고양이들을 원없이 구경하다가

눈에 딱 들어온 저 녀석. 저 아이, 딱 보면 갖고 싶어지지 않나효.

고양이 말고도 이런 아리따운 자태의 소녀들과 요정들도 잔뜩 귀엽긴 했지만, 고냥이보단 못해, 라고 멋대로

생각하고는 더이상 눈길도 주지 않았다. 고양이에 대한 절개..랄까.

암튼, 내가 샀던 건 요녀석들, 발을 늘어뜨리고 새근대며 잠들어 있는 모습이라니. 꺄아.

공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점심, 샹젤리제를 걷다가 역시나 발이 땡겼던 곳은 뽕드뺑. 뽈을 가줄까 하다가

그럴듯한 야외 테이블에 빈 자리가 없어서 여기로 와서 간단히 빵과 에스프레소로 요기.

왠지 파리지앵들은 휴가 마지막날 공항으로 가기 직전의 여행자보다도 여유로워 보였다. 휴가를 위해 일한다는

그들, 나도 그렇긴 하지만 그들은 조건부터가 다르다. 일년에 4주 휴가는 보통, 6주에서 8주 휴가도 전혀 드물지

않다는 삶의 질을 누리는 그들.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안다, 그건 축복이 아니라 싸워서 쟁취한 '상식'이다.)

거리 공연이 늘 벌어지던 지하철 역사 내 그 장소, 어김없이 어느 아티스트의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고 행인들은

적잖이 발걸음 멈추고 구경중이었다. 파리의 마지막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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